111과 행복한 가정 만들기 Ⅲ-“성경적인 자녀양육”


<말씀>잠언 22:6

  과거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서 추장이 아들을 얻으면 그는 아들을 어릴 때부터 강인하게 키웁니다. 훗날 부족을 지킬만한 용감한 추장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여러 훈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위험한 훈련이 “광야 훈련”입니다. 추장은 아들을 부족과 멀리 떨어진, 사나운 들짐승과 독사들이 우글대는 광야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창 한 자루만 쥐어준 채 돌아갑니다. 그런 후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이를 데리러 갑니다. 아이는 홀로 남아 야수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담력을 테스트 받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별다른 위험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유인즉 아들이 나무에 묶여 있는 동안 추장 아버지는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아이 몰래 들짐승을 쫒아내며 밤새도록 활시위를 당긴 채 아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어려움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1. 자녀를 이렇게 키우라. 반드시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이다

한 가정교육 전문가가 ‘자녀를 망치는 10가지 부모 습관’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양육과 비교해 봅시다.

1)자녀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사주어라 - 이 세상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게 될 것이다.

2)자녀가 나쁜 말을 써도 그냥 웃어 넘겨라 - 자기 말이 재미있는 줄 알고 더 악하고 험한 말을 쓰게 될 것이다.

3)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책망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 - 이 다음에 자동차를 훔치고 체포된 후에 사회로부터 책망 받게 될 것이다.

4)자녀가 치우지 않은 옷과 신발을 대신 정리해 주어라 -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인생낙오자가 될 것이다.

5)아무 프로나 보도록 TV나 켬퓨터 사용권을 자녀에게 넘겨주어라 - 그의 마음과 정서는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6)자녀 앞에서 부부간에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어라 - 커서 가정이 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7)자녀가 달라는 대로 용돈을 듬뿍 주어라 - 탕자(눅15:11-16)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8)자녀에게 좋다고 하는 것은 다 먹이고, 입히고, 꾸며 주어라 - 한번 이라도 거절 받으면 이내 좌절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9)자녀가 싸울 때 언제나 자기 자녀 편이 되어라 - 건전한 사회가 모두 그 자녀의 적이 될 것이다. 10)자녀의 신앙훈련은 쉽게 쉽게 지나쳐라 -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인본주의가 될 것이다. 

  위의 내용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필요하다면 서로를 위해서 느낀 점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올바른 자녀 양육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자녀를 이렇게 키우라. 반드시 인생을 성공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자녀들이 인터넷과 같은 대중매체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풍부한 물질, 넘치는 정보, 성 개방, 열광적 스포츠, 연예인 우상화 등에 노출되어 획일적인 인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공허함을 느끼지만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데는 무기력합니다. 자녀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의 교훈입니다(잠22:6). 아래의 10가지 성경적인 자녀양육법을 소개합니다.

1)건강한 자화상을 심어주십시오(빌4:13) -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건강한 인생을 살기위한 첫걸음입니다.

2)용서와 관용을 익히게 하십시오(엡4:2) - 타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의 자세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입니다.

3)순종의 원리를 가르치십시오(엡6:1) -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님과 다른 권세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4)성경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길러주십시오(시199:9) -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한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5)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도록 키우십시오(갈6:7) - 과잉보호는 금물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을 가르치십시오.

6)고난을 극복하는 자세를 확립시켜 주십시오(갈6:9) - 고난을 외면하기보다는, 용기와 인내의 덕을 쌓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7)인간의 중요성을 가르치십시오(빌2:4) -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의존도, 자립도 아닌,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8)베푸는 삶이 복된 것임을 알게 하십시오(행20:35) - 받는 축복과 누리는 축복보다 더 값진 것은 베푸는 축복입니다.

9)꿈과 비젼을 갖게 하십시오(잠29:18) - 미래는 그것을 꿈꾸고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10) 어느 한 분야에 전문가로 키우십시오(잠22:29) - 미래에는 많은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한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112과 행복한 가정 만들기 Ⅳ-“가정의 경제생활”


<말씀> 잠28:19-27

  부부가 가정 안에서 사랑과 위로를 나누고 미래를 준비하려면 돈을 올바로 다루고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늘 돈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돈에 대해 무관심한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가정 내의 불신과 갈등의 요소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본문 속으로>

1. 돈에 대해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돈으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나 불화는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감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불신감을 해소하고 신뢰의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부부간의 대화입니다. 재정문제에 있어 부부가 서로 대화하고 같이 결정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편은 돈만 벌어다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돈의 사용처에도 관심을 갖고 재정에 관한 문제들을 아내와 대화하고 같이 결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부부간의 불신과 갈등을 방지하는 지름길입니다. 부부는 하나님의 거룩한 동업자입니다. 


2. 가정의 재정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재정계획을 세우는 것은 건강한 재정관리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만약 이런 계획이나 목표가 없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장래를 위해 무조건 저축하거나 쌓아두는 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재정계획은 반드시 가족들과 함께 세워서 가족들 간의 참여의식이나 성취의욕을 높이고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계획을 세울 때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계획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재정계획은 생활비, 헌금, 저축, 투자, 자녀교육, 노후대책, 구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 부부간에 재정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결혼이 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 두 사람 사이의 거룩한 동업이라면 부부의 경제생활도 공동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가장 큰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의 하나가 “내 돈” “네 돈”하며 서로 나누어 관리하는 태도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의 재정을 분리하는 행위 속에는 “나는 너를 신뢰하지 못한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그런 가정은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공개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합쳐져야 합니다.  아내 몰래 돈 모으는 남편, 남편 몰래 재산을 숨겨 놓는 아내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 된 두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 돈” “네 돈”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성공하는 동업자들은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않고 ‘우리’ 것을 많이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결혼이 둘이 하나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돈 문제도 공동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배우기>

한국 전쟁이 막 끝나가던 해 어느 가을, 미국의 올래곤주 유게네라는 마을 회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낳은 전쟁고아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들을 보살펴 줄 손길을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끝이 났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한 농부 부부는 서로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농부인데, 우리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 부부는 그 영화내용을 잊으려고 애썼으나 날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땅을 일부 팔아서 직접 한국에 가서 전쟁혼혈고아 8명을 데리고 돌아와 성심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나가자 여러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고, 그리고 혼혈고아들을 양자로 삼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은 그 일에 보람을 느끼며 전적으로 이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바로 ‘홀트 아동복지단체’를 만든 ‘해리 홀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데 사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물질이라도 가족전체가 마음을 같이하여 남을 돕는 일에 드려 봅시다. 그리고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작은 선교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경제 신조>

1)  돈을 결코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것을 다짐한다.

2)  행복의 개념을 육체적 편안함보다는 정신적 편안함에 둔다.

3)  의식주에 관한 한 자족하는 훈련을 갖는다.

4)  절대로 불로소득을 기대하지 않는다.

5)  충동적으로 지출하는 일을 가급적 삼간다.

6)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 즉 빚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7)  가계부 관리의 실질적 책임은 아내가 맡는다.

8)  신용카드는 가능한 한 적게 만들어 사용한다.

9)  항상 영수증을 챙기고 정산하는 습관을 지닌다.

10) 필요한 지출에 있어서는 아까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지출한다.



제 113 과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번 주부터는 릭 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 고성삼 역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02)을 한 과씩 공부하게 됩니다.


“그의 능력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모든 권세와 지위, 주권,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또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16


러시아의 소설가 안드레이 비토프(Andrei Bitov)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에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우울한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눈길을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도 절망하여 그 순간 삶이 멎어버릴 것 같았고, 나의 미래는 통째로 없어질 것 같았다. 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하나님 없이는 삶은 무의미하다.’ 나는 그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그 구절을 계단 삼아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목적에 대해서 고민하며 암담함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무엇일까요? 


1.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는 삶의 목적

우리가 삶의 목적에 대한 고민들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때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도 우리 자신 안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우리가 누구이며,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한 삶의 소중함, 더 나아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길은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목적

이 세상의 많은 지침서들은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당신의 꿈을 생각하라. 가치관을 명확히 하라. 목표를 설정하라. 무엇을 잘하는지 파악하라. 목표를 높게 설정하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 꾸준히 자신을 훈련시켜라.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어라. 다른 사람과 꿈을 공유하라. 절대 포기하지 말라.

물론, 이러한 권고들 덕분에 큰 성공을 이루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면 일반적으로 그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것은 절대 같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목표를 모두 달성하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엄청난 성공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지침서들이 제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 줍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토론하고 그 의미를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들은 명확하게 삶의 목적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제시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우리 삶의 다섯 가지 목적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이 목적들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3. 에베소서 1:11의 통찰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근원이십니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1:11절의 말씀은 삶의 목적에 관한 아래의 세 가지 통찰을 제시해 줍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때라야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생각에 앞서 오늘까지 진행되어왔고 우리의 도움 없이, 이미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셋째,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이 영원을 위해 계획해놓으신 보다 큰 목적의 한 부분이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질문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십시오.


제 114 과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2 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시편 44:2


만약 우리가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나서 살게 된 것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존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아니며, 우리의 삶 또한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그리고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셨습니다.


1.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

우리들의 부모님이 우리라는 생명체를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마음속에 품으셨고, 또한 우리의 존재를 제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체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선택하여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속한 인종, 피부색, 머리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숙고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재능과 독특한 성격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결정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편 139:15에서는 “주님은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아십니다. 내 몸 속의 모든 골수 조직도 아십니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어떻게 무에서 유가 되었는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16절에서는 “주님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보셨고 내가 숨쉬기 이전부터 내 삶의 매일 매일을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날들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우리가 가진 아주 작은 부분조차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합당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출생 상황이 어떠하든,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죄까지도 모두 고려하여 우리 각 사람을 하나님께 독특하고도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특별하게 대하시며, 특별한 목적을 이루도록 격려하시고 도와주십니다.


2.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계획하고 만드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이 땅의 기초를 마련하기 훨씬 이전에 그분은 우리를 계획하셨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엡 1:4).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도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지구의 환경을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고 그분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이 그 만드신 것들 중에 우리들을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약 1:18)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일을 하셨을까요?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대로 완벽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너희를 돌보았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돌보겠고, 너희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어주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너희를 돌보겠다. 너희를 인도하며 구원해 주겠다”(사 46:3-4)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정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는 특별한 대상으로 만드셨고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을 이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 진리 위에 우리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저 그런 한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삶에는 어떠한 목적도, 의미도, 소중함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지구상에서의 짧은 삶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우리를 만든 이유가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만이 우리 삶 속에서 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특별하게 지으셨고,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음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당신이 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주님의 지팡이로 지어진 당신

당신이 사랑받는 당신이 된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죠!


제 115 과 “삶의 원동력”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3 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뭔가에 의해 쫓기듯이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열심히 살게 하는 지를 물어본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에는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나 우리에게 해로운 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이번 과에서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그릇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따라서 사는 삶의 유익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그릇된 요소들

첫째로, 우리는 과거의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닙니다. 과거에 저지른 죄와 실수들에 억눌려 우리의 현재를 성공적으로 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죄의식에서 해방되게 하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

둘째로, 우리는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갑니다. 과거의 상처와 그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그들과의 관계를 파괴하여 고통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만 합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요일 4:18).

넷째로, 우리는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더 행복해지고 더 안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진정한 안전은 그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압력에 끌려 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상의 그릇된 요소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은 목적이 없는 삶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삶은 의미 없는 행동, 방향 없는 활동, 그리고 이유 없는 행사들의 끊임없는 연속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목적을 알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목적에 따라 사는 삶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유익을 우리에게 줍니다.



2. 목적이 이끄는 삶에 따르는 유익

첫째로, 목적을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모든 사람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 있는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망을 제공합니다. 삶의 의미와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남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여러분들의 장래에 대한 소망”입니다(렘 29:11).

둘째로,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주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요구에 응하기 위해 분주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에 집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단순화되고 우리 마음도 평화롭게 됩니다.

셋째로, 목적을 알면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과 에너지를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해서 효율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초점을 맞춘 삶은 성령의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거의 빈손이었지만 초점이 맞추어진 삶을 살았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삶이 힘이 있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활동도 잘라 내십시오. 그것이 유익하고 좋은 활동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들만 하십시오. 활동을 많이 해도 생산성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계속 바라보십시오”(빌 3:15).

넷째로, 목적을 알 때 삶의 동기 혹은 열정과 의욕이 유발됩니다. 목적을 알면 의욕이 생기고 삶에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다섯째로, 목적을 앎으로써 영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는 것보다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없어져버릴 것들을 남기기 위해서 애쓰는 삶보다는 영원한 유산을 남기는 삶을 사는 것이 시간을 더 유용하게 쓰는 방법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기억하라.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게 될 것이다...그렇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자기 삶에 대한 셈을 해야 할 것이다”(롬 14:10, 12) 하나님은 두 가지의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첫째는 “너는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들을 받아들이고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배웠느냐?”이고, 둘째는 “내가 너에게 준 것들로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이 두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 더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제 116 과 “목표를 가진 가정”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2 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전도서 9:9)

우리의 가정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정을 설계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나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만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가정도 목표가 이끌어 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번 과에서는 어떻게 가정의 목표를 세워야할 것인지, 또 어떤 것이 그 목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우리의 가정을 이끌어 가는 요소들

우리는 몇 가지 가정을 이끌어 가는 요소들로 가정의 종류를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전통이 이끄는 가정이 있습니다. 전통이 이끌어 가는 가정에는 족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를 훈장처럼 여깁니다. 선대에 무슨,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윗대에서 했던 일들을 자랑하고 훈장처럼 여기는 것이 가정의 존재 이유입니다.

또 인물이 이끄는 가정이 있습니다. 이런 가정 안에는 절대적 존재가 있어서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대개 가부장적 가정의 형태가 이에 속합니다. 한 사람을 위해 나머지 가족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존재한다기보다 희생한다는 말이 옳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정 안에는 눈치밖에 남지 않습니다. 비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역기능 가정은 대게 여기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재정이 이끌어가는 가정이 있습니다. 모든 가치 기준이 돈에 의해 결정되는 가정입니다. “그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니?" 그래서 소유에 모든 관심이 쏠립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도 ‘존재’보다는 ‘소유’가 되어 버립니다.

네 번째는 프로그램이 이끄는 가정입니다. 제사와 생일 등 가족 행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가족의 일상사는 행사를 중심으로 끌려 다닙니다. 종가집 며느리들의 경우 제사 지내다가 평생을 다 허비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건물이 이끌어 가는 가정이 있습니다. 몇 평에 사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큰 집과 좋은 집이 곧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겉을 꾸미는 일에 모든 가치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으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부부간에 이 목적이 분명하면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목적이 이끄는 가정

목적이 이끌어 가는 가정이 되려면 첫째,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바른 목적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되고 매우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초를 둔 가정의 목표 혹은 가훈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자녀들까지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그런 가정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둘째, 목표를 갖되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가정에 대한 한 가지 목적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모든 것이 헛될 것입니다. 명예도, 지위도, 부귀도.... 다른 것은 다 빼앗겨도 배우자(그리고 자녀들)와 즐겁게 사는 즐거움만큼은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미리 맛보는 천국이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서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즐거워하다가 가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선물을 즐거워하다 선물을 주신 이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중심의 가정설계를 갖는 그 가정이야말로 가장 건강한 가정이며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시간을 떼어놓고 있습니까? 너무 쉽게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희생하지는 않습니까? 가족들을 즐거워하는 일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제 117 과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4 과


지난 사경회에서 최영기 목사님은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삼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의 9개월, 이 땅에서의 삶, 그리고 영생이 그것입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보낸 기간이 다음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듯이,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영생을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의 삶은 출장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우리의 죽음 건너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과에서는 영생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1. 현재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 과정

현재의 삶이 존재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즉 영원한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삶은 다음 삶을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이 말은 우리 안에는 영원한 삶을 바라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영원토록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육체는 이 땅에서의 시간과 결별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육체는 ‘장막’(텐트)이라고 부르지만 미래의 몸은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이 땅에서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우리가 이생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 우리는 영생을 그분과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난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2. 영원을 준비하는 삶의 모습

지금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영원의 빛 가운데서 살 것이고, 우리의 모든 관계와 임무와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많은 활동과, 멋지고 대단했던 목표,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던 많은 문제들이 한순간에 의미 없고, 사소하며,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시간과 돈을 더 현명하게 쓰게 되고, 명예나 부, 또는 일의 성취감이나 쾌락보다 인간관계와 인격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됩니다. 또한 유행을 따르고 대중적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별 의미 없는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한 때 이 모든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해주신 것 때문에 그것들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빌 3:7)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 삶의 전부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절제하고, 착하고 도덕적으로 살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존재의 끝이 아니고 영생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행위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릅니다. 우리 삶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이 영생에서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릿속에 계속적으로 영생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 소중함과 가치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집을 예비하신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와 재회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구름 위에서 가야금이나 타며 신선놀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끝없는 사랑의 관계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영원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출장 나온 자로 살기 위해서 정리해야할 내 삶의 부분들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제 118 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5-6 과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삶을 만듭니다. 밖으로 드러내어 놓고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관점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투자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하며,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계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는가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은 삶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삶에 대한 상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임시로 맡겨진 임무라는 것입니다.


1. 이 땅에서의 삶은 시험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시험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창22장). 인격과 믿음은 시험에 의해서 개발되고 다듬어집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시험이고 우리는 항상 시험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 문제, 성공, 갈등, 불의, 병, 심지어 날씨 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변화, 미루어진 약속,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응답받지 못한 기도, 이유 없이 받는 비난,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시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사건도 우리의 인격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매일, 매 순간이 인격을 개발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는 성장의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모든 시험을 우리가 통과하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시험을 능히 통과할 힘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2. 이 땅에서의 삶은 위탁받은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에너지, 지적 능력, 기회, 관계, 자원 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보고 관리하도록 잠시 맡기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피조물들의 관리를 맡기셨고, 하나님의 재산을 맡은 청지기로 임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르시라 하시니라”(창 1:28)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들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돌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5:14-29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잘 사용하여 이익을 남긴 종들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마 25:21). 가장 중요한 관리 대상 중의 하나가 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돈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얼마나 잘 다루고 돌보았는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위탁받은 모든 것을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돌보고 관리하고 개발했는지가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그분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할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3. 이 땅에서의 삶은 임시로 맡겨진 임무입니다(6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생에 비해 지극히 짧으며 임시적입니다. 성경은 ‘순례자, 외국인, 방문객, 손님, 나그네’ 등의 말들로 이 세상에서의 짧은 시간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며 우리의 모국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을 위해 사는 것, 즉 세상이 기준이 되고, 세상의 일이 우선순위인 삶의 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유혹에 빠지는 것을 하나님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부르십니다(약 4:4).

그런데도 슬픈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그들의 집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31).

삶이 시험이고, 위탁받은 것이며, 잠시 맡겨진 임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만 세상의 즐거움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움켜쥐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보는 것들은 내일이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지금 보지 못하는 것들은 영원할 것입니다”(고후 4:18).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영웅은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성공하고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고, 영생에서의 약속된 상급을 기다리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 날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을 닮아 가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수행하면서,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가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제 119 과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7 장


우주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 과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다섯 가지의 삶의 목표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우리의 삶

하나님은 영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 스스로이십니다. 그분의 본질, 중요성, 능력, 선하심 등의 표현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생물체로부터 거대한 은하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지금도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성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으며,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영광이 되고 가장 큰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그런 삶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사 43: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2.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 삶의 다섯 가지 목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다섯 가지 목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그분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동기가 의무감이 아닌 사랑과 감사와 즐거움이길 바라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즐기고, 사랑하며, 우리가 그분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그분에게 드려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둘째, 우리는 다른 믿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믿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온전한 성숙함에 이를 때까지 자라나길 바라십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방법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우리의 은사로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특한 재능과 은사와 기술과 능력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그들이 삶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돕고, 그 영원한 목적지에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아주 크나큰 특권입니다.


3. 무엇을 위해 살 것입니까?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남은 삶 동안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진정한 삶은 스스로를 예수님께 완전히 헌신할 때 시작됩니다. 이것이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그저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먼저,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을 삶의 주인과 구원자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받아들입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지금 하십시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따라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 120 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제 8 장

이번 장부터 14장까지는 우리 삶의 첫 번째 목적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 삶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는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께 더 많은 기쁨을 드립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립니다. 이번 과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기쁨의 근본인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그를 예배하고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시 147:1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예배입니다. 누구인가를 예배하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놓으신 본능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 외의 대체물을 찾게 되는데, 그 대체물이 심지어 우리 자신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들과 교제하는 시간인 예배를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2. 예배는 음악 이상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의 한 요소, 즉 말씀이나 찬양(음악)과 예배를 동의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오해입니다. 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모든 부분이 예배의 모습입니다. 기도, 성경 봉독, 찬양, 고백, 침묵, 말씀을 듣는 시간, 필기하는 것, 헌금, 세례, 성찬식, 헌신 카드 작성,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까지도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예배라는 말이 음악 스타일을 뜻하는 말로 오용되기도 합니다. “나는 빠른 찬양곡도 좋아하지만, 느린 경배곡이 제일 좋아”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스타일이나 음량이나 곡의 속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사랑하십니다. 노래를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음이 아니라 가사입니다. 만약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은 예배인 것입니다.

3.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오늘 예배 아주 좋았습니다. 아주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라는 인사는 예배에 대한 하나의 잘못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예배합니다. 물론 예배에는 친교, 교육, 복음 전도의 요소가 포함되고, 예배를 드리는 유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에 대한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창조주에게 영광과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전통이 아닌 열정과 헌신에 감동을 받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해오던 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사 29:13)


4. 예배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찬양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처음 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밤에 눈을 감을 때 하는 마지막 행동이어야 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시 34;1)

그러면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처럼 함으로써, 또 그것을 하는 동안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삶의 비밀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하나님께 드리면 일도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면서 행하십시오.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한 순간도 연인을 생각하는 것에서 떠날 수 없듯이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제 121 과 “행복한 가정 그림”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4장


미국의 유명한 잡지 『라이프』지의 사진기자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지하철 역사 내 식당으로 갔습니다. 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 한 노부부가 들어왔습니다. 행색은 매우 초라했으나 얼굴은 밝아 보였던 노부부는 서로를 부축해 가며 사진기자 바로 앞자리에 앉았고 이내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잠시 후, 주문한 비스킷 한 접시와 차 한 잔이 나왔습니다. 노인이 먼저 비스킷 한 조각을 겨우 먹고 나더니 입안의 틀니를 뽑아냈습니다. 노인은  틀니를 정성스럽게 깨끗이 닦아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틀니를 자연스럽게 입안에 넣고는 비스킷을 먹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비스킷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기자는 그만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사진기자는 두 노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하철 식당에 다정히 앉아 있는 이 두 노인의 모습이 “아름다운 참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지에 실렸고 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전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참 사랑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한 가정의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2:24-25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제 그 그림을 그려 봅시다.


1. “부모를 떠나라”

이것은 분리의 원칙을 말합니다. 단순한 분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이 새로운 출발점에 선다는 것입니다. 즉 부모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부모의 통제나 조종 아래 있지 않고, 두 사람의 관계와 의견이 가장 중요시되는 독립된 가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떤 목회자는 주례를 하면서 부모 서약부터 먼저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 자녀를 양육하여 출가시킴에 있어 이들 곁에 서서 이들을 조종하지 않기로 작정하십니까? 또한 이들을 온전히 떠나보내시겠습니까?”

2. “그 아내와 연합하여”

  연합이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조화를 의미합니다. 배우자에게 100%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연합입니다. 서로의 단점은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보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연합니다. 영어 성경이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사용한 단어 ‘cleave’란 ‘들러붙다, 가까이 지내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 지속되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혀가 입천장에 붙는 것이나 살이 뼈에 달라붙는 것, 또는 비늘이 물고기에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부란 어떤 경우에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죽음 외에는 둘을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하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마 19;6).

3.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것은 하나 됨의 원리입니다. 결혼은 독특한 공식을 갖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여기에 결혼의 신비가 있습니다. 불완전한 반쪽이 드디어 결혼을 통해 온전함으로 묶이게 됩니다. 따라서 부부는 궁극적인 가치관 혹은 삶의 목적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됨은 육적인 연합까지도 포함합니다. 성적인 교제는 부부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바울도 권면하기를 기도하는 일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고전 7:5).

4. “두 사람이 벌거벘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는 친밀성의 원리입니다. 이 말씀은 결혼생활에서 허물이나 약점을 정죄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가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부란 서로를 깊이 알고 그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는 관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아픔과 실수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가는 “가장 연약한 부분을 다 드러내고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과 배우자뿐”이라고 합니다.


독립된 두 사람이 서로 조화와 하나 됨을 이루어 서로의 허물을 덮어가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가정, 이것이 행복한 가정의 그림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은 무엇이며 어떤 부분을 더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부분에 모든 에너지를 모아 더욱 풍성한 가정을 만들어 나갑시다.


 

제 122 과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것 『목적이 이끄는 삶』, 제 9 장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즉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노아는 온 세상이 파탄 상태에 빠져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번 과에서는 노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예배하는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가장 사랑할 때 미소 지으신다

노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만드셨고,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너의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사랑을 원한다. 나는 너의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더 알기를 원한다”(호 6:6)는 말씀은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마 22:37-38)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전히 신뢰할 때 미소 지으신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뻐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비가 내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산에다 배를 만들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고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도와주시며,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할 때 부모가 기뻐하듯, 하나님도 우리의 믿음에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합니다”(히 11:6).


3.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순종할 때 미소 지으신다

하나님은 방주에 실을 동물 수뿐만 아니라 방주의 크기와 모양과 재료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노아는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습니다(창 6:22). 

진심어린 순종이란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 조건을 달지 않고 지체 없이 무엇이든 행하는 것입니다. 또 진심어린 순종은 부분적인 순종이 아닌 전적인 순종입니다. 성경은 읽겠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순종이며, 이것은 사실은 불순종입니다. 더불어 진심어린 순종은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시 100:2).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순종을 통해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순종의 모습은 예배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심으로써 왜 순종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4.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미소 지으신다

노아가 홍수에서 살아남은 이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제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입니다(창 8:20). 우리가 하나님께 경의와 감사를 표할 때 그분은 미소 지으십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히 13:15)와 ‘감사의 제사’(시 116:17)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는 상호 작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들에 대해 기뻐하고 우리가 그 즐거움을 하나님께 표현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더 큰 기쁨이 됩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5. 하나님은 우리가 능력을 사용할 때 미소 지으신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사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3참조). 이 말씀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제외하고서,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이 찬양의 자세를 가지고 행해질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접시를 닦고, 기계를 수리하며, 물건을 팔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며, 곡식을 키우고, 또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당신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모습을 특히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들을 즐기는 것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감각들을 사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음악을 즐겨야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가 잠자는 것을 보면서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모든 단계를 사랑하시고 모든 단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욕구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하나님은 21세기에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 의지가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제 123 과 예배의 중심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0 장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열한 장을 할애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에 대해서 설명한 후, 바울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온전히 드릴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롬 12:1).


1. 삶을 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세 가지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일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은 쉬워집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시면서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너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예수님께 드리면 우리는 그분이 폭군이 아닌 구세주라는 것, 상사가 아닌 형제라는 것, 그리고 독재자가 아닌 친구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우리의 교만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을 통제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가 인간일 뿐임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항상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더 많이 신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고,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지 않으며, 자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항복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말에 대한 오해가 우리의 헌신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단념하는 것이나 숙명론적인 것도 아니며, 또는 게으름에 대한 핑계도 아닙니다. 현실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겁쟁이가 되거나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이성적인 사고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우리의 성격을 억누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이성과 독특한 성격을 다 사용하여, 현실의 상황에서 최선인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 항복의 의미입니다.


2. 항복의 축복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누리는 복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셋째,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집요한 유혹과 어려운 문제들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때 그분의 능력으로 모두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천사가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했을 때 마리아는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하나님은 항복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3.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

모든 사람은 결국 어떤 것엔가 또는 누구에겐가 항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 돈, 분노 혹은 두려움, 자만심, 욕망, 자아에게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항복할 대상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 뒤에 따라 오는 결과들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삶의 방법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안됩니다. 다른 모든 방법은 좌절과 실망과 자기 파괴를 낳을 뿐입니다. 과거의 후회, 현재의 문제들, 미래의 야망, 두려움, 꿈, 약점, 습관, 상처, 열등감까지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하고 핸들에서 손을 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실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지만 항복하는 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산 제물은 제단에서 내려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항복의 삶은 매일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항복의 삶은 매순간 이루어져야 하고, 평생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삶은 때로 불편하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교만과 오해를 이기고 매일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제 124 과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1 장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죄의식이나 두려움의 방해 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였고, 하나님도 그들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희생으로 다시 가능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친구라는 단어는 얼굴 정도 아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깝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전능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완벽하신 하나님이 유한하고 죄 많은 우리를 그러한 친구로 삼아 주신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친구가 되게 하시려고 온 우주를 계획하셨고, 역사의 모든 부분을 조율하셨으며, 우리 삶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계획하셨습니다(행 17:26-27 참조).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우정에 대해서 여섯 가지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이번 장에서 두 가지를 다루고 다음 장에서 네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1.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하나님과의 우정을 지속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가는 것만으로는, 혹은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그 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은 모든 삶의 경험을 하나님과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활동, 모든 대화, 모든 문제, 모든 생각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루 종일 대화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살전 5:17)은 쇼핑할 때나 운전할 때, 혹은 일을 하거나 하루의 일과를 수행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임재하심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7세기의 로렌스 수도사가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는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하던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즉 이벤트로서의 예배 시간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을 통해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로렌스는 어려운 말을 사용한 긴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루 동안 계속 짧은 대화와 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고, 발전시킬 수 있는 습관입니다. 마치 음악가들이 쉽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매일 연습하듯이, 우리도 하루 일과 중에서 자주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스스로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나도록 만드는 물건들을 주변에 두거나, 시계나 휴대폰에 알람 기능을 설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항상 계시다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2. 계속해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우정을 지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으며,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 묵상할 것을 계속해서 권고하십니다(시 1:2; 수 1:8). 그분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모르고서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만, 읽거나 외운 구절을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 구절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묵상을 수도승이나 신비론자들이 하는 어렵고 비밀스러운 의식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묵상은 단순히 초점을 맞춰 생각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고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걱정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의 걱정거리는 줄어듭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시 77:12)라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설교 테이프를 들을 때 듣고 그냥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그 진리를 머릿속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읽고 들은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넘기는 삶의 비밀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고, 묵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야기하실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 125 과 하나님과의 우정을 키워가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2 장


지난 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를 맺고 우정을 키워가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과에서는 지난과에 이어서 나머지 네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과 더 깊은 우정을 쌓으려면 우리의 잘못과 느낌에 대해서 솔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닌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마 11:19)이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인 아브라함, 모세(특별히 출 33:1-17), 욥, 다윗 등은 그들의 감정에 솔직했고, 자주 불평했으며, 잘못 추측하기도 했고, 비난했으며, 창조주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밀려오는 의심과 싸운 적이 많았고, 그 의심을 상투적이고 종교적인 말들로 덮어버리기보다 공개적으로 모든 것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솔직함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종교적이고 경건한 말을 쏟아놓기보다는 지금 정말로 느끼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가 있을 때, 그것을 감추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그것들을 표현하고 우리의 감정을 드러내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 142:2-3)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한 모습입니다.


2.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순종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필요한 요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친구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때, 그것은 또한 우리의 창조주요 왕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의무감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요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용서받았고 형벌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사랑으로 순종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9-11).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라고 도전을 받지만 실은 하나님은 작은 일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그 행동들을 예배로 여기십니다. 작은 일들이란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수록 하나님이 신경 쓰시는 부분들에 대해 더 신경 쓰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슬퍼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해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백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모든 자녀들을 찾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구는 자기 친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4.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소망해야 한다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열망했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연이 아닌 우리의 선택이며 우리가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열정이 없이 무디어져 있는 우리를 깨우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더 쉬운 방법은 하나님께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 어떤 것보다 당신을 더 가까이 알기 원합니다”라고.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하나님과의 우정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을 쌓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대화와, 말씀 묵상과, 솔직한 감정 표현과, 순종과, 복음전도와, 우정을 열망하는 기도를 지속해야 할 것입니다. 


제 126 과 가장의 권위를 세워가는 가정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5장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 2:23

하나님은 남편을 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머리됨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헤드십(headship)이라 부릅니다. 남자와 여자에게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지만 역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이 머리의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탄은 남편의 헤드십을 끊임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사탄은 바로 이 헤드십을 공격하는 것으로 가정 파괴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남성들이 가지는 권위의 끝없는 추락이 가정 파괴의 한 단면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아이들 아침잠을 깨우는 목소리에 그나마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야, 일어나, 임마. 아니 빨리 일어나라니까 뭐해. 빨리 일어나.” 그러나 요새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야, 너희 엄마가 일어나란다.”

이제야 말로 헤드십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아내를 짓밟고, 무시하고, 아내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헤드십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참된 헤드십은 아내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창 2:23)을 말합니다. 헤드십은 영적인 권위를 상징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영적인 권위를 가진 남편의 헤드십을 세워갈 수 있을까요?


첫째, 남자들은 가정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가장이란 “가정에서의 제사장”이란 말의 약자라고 말합니다. 참 재미있는 관찰입니다. 과장, 부장, 사장보다 더 좋은 말은 가장(家長)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기 위해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돌보셨던 것처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마치 목회자가 교회를 돌보거나 목동이 양을 돌보는 것처럼 가장은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자를 가장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정의 영적 제사장으로서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의 신앙적인 면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부분들을 돌봄으로써, 가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책임지고자 하는 태도를 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가장은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앞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의 의견을 먼저 구하는 아내야말로 현명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순종함으로 남편에게 명령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머리로 세워 주고 자신은 그 머리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목이 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아내가 목이 되기만 하면 머리는 아내를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남편은 헤드십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역할을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탄의 도구가 되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을 위한 지침 열 가지: 1. 아내를 관리하지 말지니 아내는 재산이 아니라 파트너다. 2. 부부간에 일단정지의 사인을 놓지 말지니 계속되지 않는 사랑은 식게 되느니라. 3. 기다리지 말지니 가정은 정거장이 아니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라. 4. 아내를 혼자 있게 말지니 머리 속에 남편이 없으면 이미 남남이니라. 5. 아내를 남과 비교하지 말지니라. 6. 찌푸리고 집에 들어가지 말지니 가정은 병원이 아니니라. 7. 아내 앞에서 으쓱대지 말지니 허세는 금물이니라. 8. 아내를 돈주머니로 여기지 말지니 가정은 주식회사가 아니니라. 9. 아내에게 훈장노릇 하지 말지니 사랑은 서로 보충하는 것이니라. 10. 비밀을 두지 말지니 사랑은 아는 것이니라.


■다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의 가정에 질서를 허락하신 주님, 저희 가정에도 온전한 머리됨이 실현되길 소원합니다. 우리 가정에 기도하는 가장이 세워지게 하시고 모든 가족들은 그를 믿고 따르는 순종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워가게 하여주옵소서. 또 우리의 가장들에게는 가족을 온전히 돌볼 수 있는 사랑의 지팡이와 너그러움의 막대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제 127 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3 장

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하기 가장 좋은 시간, 장소 그리고 스타일에 대해 예수님과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은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는지는 왜 예배하고, 예배할 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얼마큼 드려야 하는 지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배드리는 데 바르고 그른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드리자”(히 12:2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정확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대하기 편안하고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예배는 말씀의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진정(진리)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진실할 때 기뻐하십니다.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에 우리의 영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예배가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없는 찬양은 찬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예배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깊은 감정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감정을 허락하셨지만, 쇼나 속임수나 가짜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솔직함과 진정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악 때문에 감동받는 것을 성령에 의해 감동받는 것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절대 같지 않습니다. 실제로 감성적이고 내면에 와 닿는 음악이 때로는 예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음악으로 인해 초점이 하나님에서 우리의 감정으로 옮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바로 우리 자신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찬양 스타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배경과 성격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맞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사려 깊게 예배드릴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배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의미 없는 행동 또는 빈 감정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중언부언’(마 6:7)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입니다. 성경적인 어휘도 과용하면 지겹고 상투적인 표현이 될 수 있는데, 이는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쓰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다양하고도 새로운 표현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또 우리의 예배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체적인 감사와 찬양의 제목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도 사려 깊게 예배드리는 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들은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지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그분의 성품의 여러 면모를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중 예배 역시 사려 깊게 드려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를 통해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14:40)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참여했을 때 그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 14:16-17).

4.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현실적일 때 기뻐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행위(공 예배, 찬양, 기도, 헌금...)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장, 가정, 사회생활 등의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산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거나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제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산제사는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피곤하지만 예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일어날 때, 또는 지쳐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제 128 과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4 장


모든 일일 잘 풀리고 행복한 상황이 펼쳐질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몇 백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십니까? 가장 깊은 경지의 예배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시험을 당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삶을 내어드리며, 그분이 멀게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종종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라고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고 또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나는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신 31:8; 시 37:28; 요 14:16-18)라고 약속하시지만, “네가 항상 나의 임재를 느낄 것이다”라고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십니다(욥 23:8-10).

플로이드 맥클렁(Floyd McClung)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모든 영적인 느낌이 사라졌다. 기도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악마를 꾸짖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영적인 행동을 한다.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닌다. 그리고 금식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적인 슬럼프가 얼마나 오래 갈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며칠? 몇 주? 몇 달? 끝은 날까? 마치 기도가 천장에서 튕겨져 떨어지는 것 같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내 문제가 무엇인가’라고 소리친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시험과 성숙을 위한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최소한 한 번씩 그리고 보통은 여러 번 이런 과정을 겪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우리의 믿음이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감정과 멀리 느껴지는 감정은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믿음에 대한 시험, 즉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거나, 내 삶에 그분의 역사하심의 가시적인 증거가 없을 때에도 나는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예배에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는 하나님보다 경험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면서 어떠한 느낌을 추구하고 그것이 마음속에 생기면 예배드렸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때때로 감정을 거두기도 하십니다. 감정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감정일지라도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초신자일 때 하나님은 많은 감정의 확신을 주시고, 가장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에도 응답해주십니다.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서 그분은 이러한 의존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든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현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진리고 후자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는 단순한 감정으로 측정하기에는 너무 심오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의 존재를 느끼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느끼기보다 신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은 감정이 아닌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아무 의사소통 없는 위기의 때에 어떻게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말하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모두 쏟아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분은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그분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일들을 아십니다. 나를 돌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의 삶에 대해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셋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함으로 의지해야 하고, 영적으로 메마른 기간 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깊은 성숙의 단계로 이끌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만 그런 우리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계속 신뢰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깊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다른 것은 하나도 해주지 않으셨다 치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만으로도 그분은 우리의 남은 삶 동안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분의 버림받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 같은 기간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히 13:5)


제 129 과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5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원하시고 우리가 가족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 갖고 계시는 두 번째 목적입니다. 이번 장부터 몇 장에 걸쳐서 이 주제를 살펴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그분과 함께 통치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외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며, 다른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고 교회는 우리의 영적이 가족이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믿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가족은 혈육관계의 가족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멋진 선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때때로 이혼, 먼 거리, 노화, 죽음 등으로 깨지곤 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영적인 가족, 즉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유익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의 가족이 된 순간 우리는 엄청난 생일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이름과, 가족들끼리 닮은 점, 특권, 친밀한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엄청난 유산을 받았습니다.

이 유산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포함합니다. 첫째,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살전 4:17; 5:10). 둘째, 우리는 완전히 변화하여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요일 3:2; 고후 3:18). 셋째, 우리는 모든 아픔, 죽음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계 21:4). 넷째, 우리는 상급을 받을 것이고 섬김의 자리에 재배정될 것입니다(막 9:41; 히 10:35). 다섯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롬 8:17; 골 3;4). 이 얼마나 엄청난 유산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유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세례: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 되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지상명령에서 세례가 전도나 훈련과 똑같이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삶의 두 번째 목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의 교제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함께 동참함으로 옛 삶이 죽었음을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고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의식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축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영적인 진리에 대한 가시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신 순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그러나 세례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세례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결혼반지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내면적인 헌신의 가시적인 표시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 후 바로 행하여야 할 의식이지 영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미뤄두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성경에서 제시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뿐입니다(행2:41; 8:12-13, 35-38).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자 예수님의 명령인 세례를 아직 받지 않았다면 즉시 받으십시오. 그것은 세상에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삶의 특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이 거룩하게 하신 모든 백성은 한 가족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 2:11). 이 엄청난 진리가 마음속 깊이 뿌리박히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에 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며, 불안하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제 130 과 돕는 배필이 되는 아내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6 장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오랫동안 남편이 하는 이상한 행동들이 마음에 거슬렸던 자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남편 좀 사랑해 주세요. 다른 남편들 사랑하듯 제 남편도 사랑해 주세요. 다른 남편들에 대한 사랑의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만이라도 사랑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남편을 변화시킬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기도하는 자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네 남편은 네가 사랑해라.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하마.”

지구촌에는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 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성경이 남성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성 형으로 바꾸자고 주장합니다. 여자 혐오증에 빠졌던 철학자 니체는 이런 독설을 늘어놓았습니다. “여자들은 결코 남녀평등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여자에게로 가는가? 그렇다면 매를 잊지 말지어다.”

이러한 남녀 간의 싸움이 계속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3:16에 보면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여기서 “남편을 사모하고”는 남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남편을 조종하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나타냅니다. 여자가 남편을 주장하기를 원하는 모습은 죄가 가인을 강하게 주장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창 4:7 죄의 ‘소원’이란 말이 3:16의 ‘사모’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돕는 관계로서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순종이 어려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오히려 남자를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가 남편을 조종하려하면 할수록 남편은 더욱 더 여자를 다스리려고 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9에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또 디모데전서는 아예 순서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2:13). 그리고 원죄의 문제까지 드러냅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2:14).

이런 성경 구절을 볼 때마다 여성들은 화가 치밀 게 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돕는 배필’이란 말의 어원과 뜻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돕는 배필이란 “필요한 것이나 부족한 것을 공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할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 115:9). 여기서 “도움”이라는 말은 ‘조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자’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더구나 히브리서 13:6은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즉 그분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삶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돕는 배필이 될 때 여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돕는 배필이 된다는 것은 여성만이 부여받은 특권입니다. 이런 여성의 도움 없이 남성은 완성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여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돕는 배필이 된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손해를 보았다고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의 돕는 배필이 해야 할 일곱 가지의 역할에 대해서 음미해 봅시다.

나는 내 남편을 위한 온전한 돕는 배필로서,

1.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여자들 중 특별히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믿는다.

2. 그의 희망과 꿈을 함께 나누며 그의 상처와 실망을 함께 짊어질 것이다.

3.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그를 내어놓을 것이다.

4. 중요한 순간마다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5. 그의 성적, 정서적 요구를 나의 것보다 앞세워 존중할 것이다.

6. 조건 없이 그를 사랑할 것이다.

7. 하나님이 그에게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그를 도울 것이다.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아내가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가정으로 아름답게 세워질 것입니다.


제 131 과 가장 중요한 것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6 장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배우기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가장 많이 닮아갈 수 있기에 사랑은 그분이 내린 모든 명령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원하시지만, 특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생기면 마땅히 그를 도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믿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어야 한다.”(갈 6:10)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나눌 영원한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으로서의 책임’을 부여하심으로써 그 훈련을 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의 기술을 터득할 수 있도록 다른 믿는 사람들과 정기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갖기 원하십니다. 혼자서는 사랑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짜증나게 하고, 불완전하며, 당황하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삶을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우리의 최고 목표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고전 14:1). 왜 그렇습니까?

첫째, 사랑 없는 삶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하나님은 인간관계가 우리 삶의 전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도 하나님과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마 22:37-40). 바쁘게 사는 것은 관계를 맺는 데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는 삶을 꾸려나가고, 일을 하며, 계산서를 지불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 땅에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치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나 재산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느냐 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아무도 “내 졸업장을 가져와! 내가 받은 상과 메달을 보여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사랑으로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성숙함을 측정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의 인간관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은 “너의 직업, 예금 계좌, 취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대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보실 것입니다(마 25:34-4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은 시간입니다.

어떤 것의 중요도는 우리가 얼마나 시간을 많이 투자하느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 수는 있지만 시간을 더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투자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주어야 합니다.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 남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저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채워줍니다. 도대체 무엇을 더 원하는 건가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당신 자신을 원합니다. 당신의 눈, 귀, 시간, 관심을 원하고, 당신이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에게 초점을 맞춰주길 바랍니다. 어떤 것도 이것들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바라는 선물은 다이아몬드나 장미나 초콜릿이 아닌 관심의 집중입니다. 관심은 “나의 가장 소중한 자신인 내 시간을 줄 만큼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해”라고 말해줍니다. 우리의 시간을 투자할 때마다 우리는 희생을 하는 것이고, 이 희생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내가 선호하는 것들, 안락함, 목표, 안전, 돈, 에너지, 시간 등을 내어주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3. 사랑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갈 6:10) “가능한 순간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지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절대로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말하지 말라.”(잠 3:27) 왜 지금이 사랑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기회를 얼마나 오래 가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변합니다. 사람은 죽고 아이들은 자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면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삶을 가장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표현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가장 좋은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제 132 과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7 장


우리는 공동체를 구성하여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교제하도록 만들어졌다. 성경은 우리는 함께 이 땅에 보내심을 받고, 함께 생활하도록 되어 있으며, 한 가족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서로 어울리도록 만들어졌고, 함께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2:12; 엡 2:21,22; 3:6 등).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살아 있는 몸의 중요한 기관이 되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관이 된다는 의미였다(롬 12:4,5; 고전 6:15; 12:12-27). 우리는 멤버십의 이러한 성경적 의미를 되찾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몸이지 건물이 아니며, 유기체이지 조직이 아닌 것이다.

만일 한 기관이 몸에서 분리되었다면 그것은 무기력해지거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이처럼 교회에서 공급을 받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시들기 시작하고 결국 영적인 모습은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엡 4:16).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교회를 잘 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멤버십은 사소하거나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교회를 세울 것이고 어둠의 권세가 그것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파괴될 수 없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나는 교회가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만큼 거만하거나 무지한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엡 5:25)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만큼 교회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교회에서의 교제

신약 성경은 크리스천이 지역 교회에 속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인 독립적인 개인주의는 많은 영적인 고아들, ‘떠돌아다니는 믿는 자들’을 만들어냈다. 정체성, 책임 또는 헌신 없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떠돌아다니며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좋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행동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지역 교회에 꼭 헌신하고 활발히 교제해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고 있기 때문이다.


왜 교회 가족이 필요한가

첫째, 교회 가족은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임을 증명해준다. 우리가 다른 배경, 인종,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사랑 안에서 교회 식구로서 하나가 되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증거이다(갈 3:28).

둘째, 교회 가족은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고립에서 건져준다. 보통 사람들, 불완전한 믿는 사람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교제를 배울 수 있고,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지하는 신약의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엡 4:16; 롬 12:4-5).

셋째, 교회 가족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각 부분이 제 역할을 하므로 다른 부분들의 성장을 돕게 되고, 그래서 몸 전체가 건강하고 사랑으로 가득하며 성장할 수 있게 된다.”(엡 4:16)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에게 행동의 책임을 점검받을 수 있는 관계를 통해서 더 빠르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와 나눌 때에 우리도 역시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가족 안에서의 독특한 역할을 주셨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이고 하나님은 이 임무를 위해 우리에게 많은 재능을 주셨다. “은사는 교회를 돕는 데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고전 12:7)

다섯째, 세계 전역에 걸쳐서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멋진 특권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그분의 손, 발, 눈 그리고 심장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여섯째, 교회 가족은 타락의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만일 지금 누군가 영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그들을 쫓아가서 교제 가운데로 다시 데리고 오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영적 전쟁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고, 지도하고, 돌본다(행 20:28-29; 벧전 5:1-4).


모든 것은 교회 안에 있다

하나님이 교회에 대해 가지고 계신 다섯 가지 목적은 우리의 삶에 대해 가지고 계신 목적과 일치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교제는 삶의 문제들에 대처하도록 도와준다. 제자 훈련은 믿음을 지키도록 해주고, 사역은 우리의 재능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준다. 전도는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도와준다. 이 세상에서 교회 같은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의 선택

교회를 다니는 것과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의 차이는 헌신의 정도다. 단순히 교회를 다시는 사람들은 방관자이자 소비자이고, 구성원들은 참여자이자 기여자다. 완벽한 교회를 찾기 위해 평생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찾을 수 없다. 하나님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죄인들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크리스천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의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 헌신해야 한다. 첫 번째 결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두 번째 결심으로 교제할 수 있게 된다.

제 133 과 삶을 함께 경험하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8 장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은 이러한 공유된 경험을 교제(fellowship)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그 성경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했습니다. 교제는 이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제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제는 함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제에 있어서 그 그룹의 크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큰 무리와 함께 예배를 드릴 수는 있지만 교제는 할 수 없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교회 내의 여러 소그룹에 참여해야 합니다. 큰 모임이 아닌 바로 이러한 소그룹에서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소그룹에 속했다고 해서 꼭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주 외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교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교제와 그렇지 못한 교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교제에서는 사람들이 진실함을 기대합니다

진정한 교제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상호 작용이 아닙니다. 진실하며 때로는 아주 깊은 나눔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진실하게 이야기할 때만 가능해집니다. 그들은 상처를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며, 실패를 고백하고, 의심을 보이며, 두려움을 시인하고, 약점을 깨달으며,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 세상은 친밀함이 어둠 속에서 생겨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빛 가운데서 우리의 상처, 잘못, 두려움, 실패와 실수들을 개방함으로써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받아들이게 됩니다. 노출, 거부, 그리고 또다시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우리는 오직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상호 의존합니다

상호 의존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상호 의존은 교제의 핵심입니다.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책임을 나누며,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성경은 상호 간의 책임, 격려, 섬김, 그리고 존경에 대한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에는 ‘서로에게’ 또 ‘서로를 위해’ 등의 표현이 50번 이상 등장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노력해야 하는 책임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들을 돕기 원하십니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공감합니다

공감하는 것은 충고를 하거나, 신속하고 표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공감하는 것은 “나는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안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공감을 통해서 두 가지 근본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즉 이해받고, 감정의 정당성을 확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해주고 이해해줄 때마다 우리는 교제를 쌓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때때로 너무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감할 시간을 못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는 스스로의 상처에 너무 묶여 있습니다. 자기 연민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메마르게 합니다.

교제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는 각각 다른 시기에 적용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나눔의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는 교제입니다. 더 깊은 단계는 섬김의 교제이고, 우리가 선교 여행이나 봉사 활동에 함께 참여하는 것 등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깊고 친밀한 단계는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제인데(빌 3:10, 히 10:33-34), 이것은 서로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때는 바로 심각한 위기, 깊은 슬픔, 그리고 의심의 상황을 지날 때입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우리의 믿음이 무너지려고 하는 바로 그때에 믿음의 친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들은 자비를 경험합니다

교제는 은혜의 장소이고, 이곳에서는 우리의 실수가 드러나지 않고 덮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자비를 필요로 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흔들리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서로에게서 그것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용서 없이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죄인들이기 때문에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 때로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자비의 모습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이상의 용서를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에너지를 복수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해결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여러분은 진실함과 상호의존과 공감과 자비가 있는 진정한 교제를 누리고 계십니까? 이런 진정한 교제를 누리는 가정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해 갑시다.

제 134 과 가정을 세우는 두 기둥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7 장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롬 12:10


가정을 집에 비유한다면 가정 안에는 함께 거닐 수 있는 정원도 있어야 하고 이해라는 창문도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수도 배관과 같은 대화의 통로도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을 튼튼히 세우기 위해서는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둥이 튼튼하지 못하면 집은 허물어지고 맙니다.

위에 적어 놓은 로마서 12장 10절에서는 가정의 두 기둥으로서 ‘우애’와 ‘존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입니다. 우애와 존경이야말로 가정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우애와 존경에 의해 인격이라는 그릇이 결정됩니다.

먼저 ‘우애하고’라는 단어는 다른 성경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단어로 바울은 이 단어를 가족관계에서 누리는 정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애정을 말하는 것이 ‘우애’라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가정은 이 애정에 기초해 꾸며집니다. 애정이 없는 부부관계처럼 비참한 부부관계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부관계를 “결혼한 독신자” 혹은 “결혼한 독신녀”로 표현합니다.

다이애나비의 비극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높은 권좌에 있었고 세인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녀에게는 모자라는 것도 아쉬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결정적으로 모자랐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편 찰스의 애정이었습니다.

역기능 가정의 첫 번째 특징은 언제나 애정에 공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가정의 가족들은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뭉쳐 있긴 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가 모래알과 같습니다. 친밀감도 없고 인격적 접촉도 없습니다. 모두들 경계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데서 외도가 생겨나고 탈선이 일어납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집을 나가거나 자살, 마약, 환각, 임신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대부분의 이유도 그들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쉽게 사랑에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정에도 애정의 기둥을 세워 보십시오. 가족들의 감정과 환경을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고 작은 일에도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말아 보십시오.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이 든든히 세워질 것입니다.


그 다음의 중요한 요소는 존경입니다. 자신의 영광이나 지위를 구하기보다 서로에게 기꺼이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태도를 묘사합니다. 빌립보서 2:3에 있는 대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바로 존경입니다. 성경의 또 다른 가르침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을 때의 ‘경외하다’가 ‘존경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단어를 가정에 적용해 보면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존경하고,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빌 클린턴의 끊임없는 섹스 스캔들도 따져보면 어린 시절 존경할 만한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는 아무리 높은 자리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존경할 만한 사람을 경험하고 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 문제는 애정결핍과 존경의 결핍으로 묘사되는 모성실조, 부성실조에서 비롯됩니다. 성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진공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진공이 무의미로 강탈당하지 않으려면 무언가로 반드시 그 진공을 채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진공을 채울 수 있을까요? 만약 그 진공이 채워지지 않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 진공이 물질로 채워지면 맘모니즘에 빠져듭니다. 진공이 명예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일 중독증에 빠져듭니다.

진공을 채울 재료가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애정과 존경입니다. 애정과 존경으로 진공이 가득 차게 되면 생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애정과 존경은 인간의 공허감을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 됩니다. 사실 인간이 겪는 공허감은 사치스러운 식사나 마약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허감이 저택이나 직업으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체에다 물은 담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공허감은 애정과 존경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먼저하며.” 상대방이 아닙니다. 서로 먼저 해야 합니다. 서로 먼저 시작하십시오. 성숙한 사람이 먼저 하는 법입니다.


제 135 과 공동체 가꾸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19 장


공동체는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성령만이 믿는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의 선택과 헌신을 사용해서 역사하신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말한다. 아래의 다섯 가지 지침은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공동체를 가꾸게 할 것이다.


공동체를 가꾸려면 정직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때 침묵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행동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스럽더라도 자신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해줄 사람이 없어서 계속해서 자신을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엡 4:15)라고 하면서 정직함이 없이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다.

교회 안의 많은 모임과 소그룹은 갈등을 두려워하여 계속 표면적인 데에 머무른다. 긴장이나 불편하게 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거짓된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냥 덮어두곤 한다.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크게 말하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또한 소문에 소문을 낳게 된다.

결혼이나 우정, 혹은 교회 안에서의 진정한 교제는 솔직함에 달려 있다. 사실, 갈등의 터널이란 어떤 관계에서든 친밀함으로 가는 길이다. 내면에 깔려 있는 장벽들에 맞서고, 그것들을 허물 생각이 없다면 절대 서로 가까워질 수 없다. 갈등이 올바른 방법으로 해소될 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알고 그것을 좁혀가면서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솔직함은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며 무례함도 아니다. 적절한 시간과 방법을 가지고 가족에게 하듯이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


공동체를 가꾸려면 겸손해야 한다

교만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지만 겸손은 다리를 놓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며, 더 온화하게 해주는 기름 역할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우리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방법으로 겸손을 연습할 수 있는데,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약점에 인내하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세워줌으로써 가능하다. 바울은 이렇게 충고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 겸손은 스스로를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공동체를 가꾸려면 공손해야 한다

공손함이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며,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을 인내하는 것이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모든 교회와 소그룹 안에는 적어도 한 명 이상 서로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별히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안정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는 버릇이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술이 부족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은 그들과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다. 그들은 이미 우리 가족이다.

서로에게 공손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과거를 알아보라.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그들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대신에 그들이 아픈 상처에도 불구하고 얼마큼 멀리 왔는지를 생각하라.

공손함의 또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 의심한다고 그들을 얕보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 의심과 두려움을 나누고, 그로 인해 상대방이 판단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세워진다.


공동체를 가꾸려면 비밀을 지켜야 한다

따뜻하게 받아들여지고,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을 때에만 사람들은 가장 깊은 곳의 상처와 필요와 실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음을 연다. 그러나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그룹 안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구성원들만이 알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험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문을 싫어하신다. 특히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이라는 이름 하에 전해지는 것을 싫어하신다.


공동체를 가꾸려면 자주 만나야 한다.

우리가 속한 그룹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야 한다. 관계를 맺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우리는 함께 만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

공동체는 내가 가고 싶을 때만 가는, 그런 편리함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영적인 건강함을 위해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확신 위에 만들어진다. 그 중요성을 믿기 때문에 원하지 않을 때에도 만난다. 교제는 시간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만났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만일 여러분이 소그룹이나 모임에 속해 있다면 다음의 아홉 가지 사항을 지키기 위한 그룹 서약서를 만들어볼 것을 권한다. “우리는 서로 솔직한 감정을 나누고(진실), 서로 격려하고(상호 의존), 서로 돕고(동감), 서로 용서하고(자비),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고(정직),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고(겸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공손), 말을 퍼뜨리지 않고(비밀을 지킴), 이 모임을 최우선 순위로 둘 것이다(자주 만남).”


제 136 과 깨어진 관계 회복하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20 장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서로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해 부르셨습니다”(고후 5:18). 이번 과에서는 관계 회복을 위한 일곱 가지 성경적인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하나님과 먼저 그 문제에 대해 의논하십시오. 친구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거나, 우리의 도움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관계들을 놓고 더 기도한다면, 분명 그 관계들은 더 원만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눈을 돌리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기쁘게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우리를 실망시켰다고 화를 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에게 왜 먼저 오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기에 하나님께 먼저 우리의 모든 감정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항상 먼저 다가가라

우리가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대하십니다. 상대방이 행동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매우 중요해서, 예수님은 이를 예배보다 우선순위에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관계가 왜곡되고 깨어지면 바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화복의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미루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얼굴을 맞대고 만날 계획을 잡으십시오. 뒤로 미루면 분노만 깊어지고 문제가 더 심각해질 뿐입니다. 갈등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곪습니다.

화복을 위한 만남의 성공 여부는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두 당사자가 피곤하거나, 마음이 급하거나, 누군가의 방해를 받을 만한 시간대는 피하십시오.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두 사람이 모두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입보다는 귀를 더 많이 사용하십시오.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기 전에 사람들의 심정이 어떤지 먼저 들어보아야 합니다. 사실보다는 그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해결이 아닌 공감으로 시작하십시오. 처음부터 사람들이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말로 충고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방어하지 않고 감정의 짐을 덜게 하십시오.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해한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감정이 항상 진실 되거나 논리적이지는 못하니까요.

우리 모두는 상처를 받으면 짐승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인내하며 들어주는 것은 희생입니다. 특히나 그 분노가 근거가 없는 것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우리는 들어주며 공감하는 희생을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고백하라

만일 여러분이 진지하게 관계 회복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실수나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우리는 모두 자기 시각으로는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당사자와 만나기 전에 제삼자에게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쭤보아야 합니다.

고백은 화해의 아주 강력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실수를 겸손하게 인정하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화를 풀고 공격을 늦춥니다. 핑계를 대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그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정도의 대가를 치르십시오. 자신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라

누구의 잘못인가를 가리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을 쏟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단어 선택을 현명하게 하면서 부드러운 대답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갈등을 해결하려고 할 때 어떻게 말하느냐는 무슨 말을 하느냐 만큼 중요합니다. 만일 공격적으로 말을 한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방어적이 될 것입니다. 비난, 비하, 비교, 판단, 모욕, 멸시, 빈정대는 태도를 버려야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협력하라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했습니다. 평화에는 항상 대가가 따릅니다. 때로는 그 대가가 우리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자기  중심성일 수도 있습니다. 교제를 위해서 우리는 양보하고, 상대방에게 맞추며, 상대방의 필요에 호의를 보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롬 12:10, 빌 2:3).

해결이 아닌 화해를 강조하라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동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가 화해에 초점을 맞출 때 문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도 관계는 다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정당하고 솔직한 의견 차이나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쾌감을 주지 않으면서 그 의견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획일성이 아닌 연합을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 해결책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논의하고 논쟁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조화 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화해는 그 문제 자체가 아닌 이미 표면에 떠오른 부분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 과를 읽고 여러분이 연락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구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까? 단 일초도 더 지체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과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전화를 들고 그 과정을 시작하십시오.


제 137 과 가정을 다스릴 줄 아는 남자 

*송길원; 이동원,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40일 새벽기도』, 제 8 장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디모데전서 3:4-5


이 시대의 남자는 결혼생활이나 자녀들을 희생시키고 직장 일에 자신을 다 소모하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승진과 더 많은 수입을 위해서라면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더라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길들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에서 성공하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고 해도 그것으로 남자의 권위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족들과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새롭게 시작해 보려고 애쓰는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가려 해도 가족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사람 없이도 살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후입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들이 가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꿈꾸는데 진정한 성공은 밖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회심리학자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이 사회생활에 실패할 수 있는지와 사회생활에 성공한 사람이 과연 가정생활에 실패할 수 있는 지를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둘 다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그 어느 누구도 가정에서 실패한 후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 없었고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치고 가정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한동안은 가정에서 하숙생 같은 생활을 해도 사회에서 성공하고 돈만 벌어다 주면 그것으로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사람이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교회에서 장로로서 성공할 수 있느냐”며 영적 사역의 기초로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때 ‘다스리다’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대개 다스린다고 하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거나 벌을 주는 것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살펴보면 ‘다스리다”는 말은 세 가지 뜻으로, 즉 잘 안내하고(guide), 보호하고(guard), 돌보는(govern) 행위를 뜻할 때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잘 안내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역할이 곧 가장으로서 남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미국 콜롬비아 성경 대학에 로버트슨 맥퀼퀸이라는 학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에 아내 무리엘이 치매에 걸리자 그 동안 맡아 온 학장직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무리엘은 지난 8년 동안 건강이 점점 약해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 나는 무리엘이 내가 그녀와 함께 있어주는 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이제는 내가 그녀를 잠시라도 떠나 있으면 몹시 불안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할 때는 불안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잃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고 나를 찾아 집 밖으로 나올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학장직을 사임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내가 42년 전에 결혼 서약을 하면서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무리엘을 돌볼 것을 서약했을 때 이미 약속한 것이기에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 동안은 아내가 나를 40년이 넘도록 돌보아 왔지만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무리엘을 돌보는 것이다. 물론 의무감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남자가 보여줄 수 있는 남자다움의 극치입니다.

진정 우리들의 가정에는 이런 남자다움을 소유한 가장이 있습니까? 또 우리 가장들은 가족들을 지혜롭게 안내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며 사랑으로 돌보고 있습니까?

남성 여러분, 이제부터 성공의 우선순위를 바꾸십시오. 성공은 바깥에서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공만이 진정한 성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들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소중하게 다스리고 아름답게 가꿔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 138 과 교회를 보호하기 『목적이 이끄는 삶』, 제 21 장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서로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기 전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셨습니다(요 17:20-23).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그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우리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교회보다 하나님께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위해 가장 큰 값을 치르셨고, 교회가 분열, 갈등, 부조화 등으로 인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 됨을 지키고, 교제를 보호하며, 교회 가족과 모든 믿는 사람들 간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서로의 차이보다는 공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한 주님, 한 몸, 한 목적, 한 아버지, 한 성령, 한 희망, 한 믿음, 한 세례, 한 사랑을 공유합니다(엡 4:4, 5:5, 빌 2:2). 그리고 우리는 같은 구원, 같은 삶, 같은 미래를 공유합니다. 이는 우리가 열거할 수 있는 우리의 차이점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집중해야할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차이를 무시하는 획일성이 아닌 그런 차이를 뛰어 넘는 하나 됨을 원하십니다. 하나 됨을 위해서 우리의 개성이나 기호, 스타일 등의 사소한 차이점들이 우리를 갈라놓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 각자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기대를 하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제가 어떤 것인지 발견한 후에는, 교회 내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이유들-갈등, 상처, 위선, 무시, 인색함, 형식주의, 또 다른 죄들-로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교회의 그런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우리를 포함한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서로 상처를 줍니다. 그럴 경우 교회를 떠나기보다는 가능하다면 남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도망가는 것보다는 화해하는 것이 더 성숙한 인격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탈출해서 갈 수 있는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나름대로의 약점과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벽해야 사랑받는다는 환상을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우리는 더 빨리 겉모습을 버리고,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며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시작입니다. 모든 교회가 이러한 푯말을 내걸 수도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지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곳은 스스로가 죄인이고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하는 사람만을 위한 곳입니다.”

비판하기보다 격려하라

공동체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보다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항상 더 쉽습니다. 하나님은 서로를 비판하거나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경고하십니다(롬 14:13, 약 4:11 등).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롬 14:4).

우리가 다른 믿는 사람들을 판단할 때마다 네 가지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게 되고, 우리의 교만과 불안을 드러내게 되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교회의 교제를 해치게 합니다. 우리가 비판할 때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 그의 일을 대신해주는 꼴이 됩니다. 우리가 다른 믿는 사람을 비교하고 비난하는 데 보낸 모든 시간은 교제와 연합을 이루는 데 쓰여야 했던 시간입니다.

험담을 귀담아듣지 말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퍼뜨려서도 안 되지만 험담을 귀담아들어서도 안 됩니다. 험담에 귀 기울이는 것은 훔친 물건을 받는 것과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험담하려 할 때 용기를 내어서 “그만하세요. 저는 그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과 직접 이야기해 보셨나요?”라고 말하십시오. 우리에게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우리에 대해서도 험담을 합니다.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익히라

갈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상대방에게 용기를 내어 직접 얘기하기보다는 제삼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것보다 우리는 관련된 사람에게 직접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세 단계의 간단한 과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마 18:15-17).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항상 첫 번째 단계이고, 이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만일 단둘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 문제를 확인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몇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교회에 알려야 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이 계속 거부한다면, 그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대해야 합니다.

목사와 지도자들을 지지해주라

완벽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킬 책임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목사들은 상처를 받았거나, 갈등하고 있거나, 성숙하지 못한 교인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모두를 기쁘게 해야 하는 불가능한 임무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하시지 못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우리를 영적으로 인도하고 섬기는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우리는 교회를 보호해야 합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우리의 격려와 기도와 감사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 된 교회에 복을 주십니다. 지역 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갈망하고 속할 곳을 찾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교인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교회를 만든다면, 우리는 교회로 밀려오는 사람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교회 문을 잠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 139 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제 22 장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 이어서 우리의 삶의 세 번째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이러한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하지만 우리의 죄에 의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었습니다(창 6:9; 약 3:9).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완전한 형상을 다시 찾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한다’라고 말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의 존재의 완전한 묘사’(고후 4:4; 골 1:15; 히 1:3)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1-12), 성령의 열매(갈 5:22-23), 사랑에 관한 바울의 위대한 장(고전 13장),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위한 베드로의 인격 리스트(벧후 1:5-8) 등에 묘사되어 있는 인격을 개발하기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위해 우리의 인격을 쌓고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만드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이런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의 성품을 만들고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성령의 힘’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기적적인 일이나 격렬한 감정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령의 힘은 우리의 삶에서 조용하고 약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차리거나 느끼기 힘듭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그 안에 삶으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일어납니까? 우리가 하는 선택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각 상황에 적합한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고, 성령이 그것을 위한 힘, 사랑, 믿음, 지혜를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구하기만 한다면 항상 얻을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협력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에 힘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행동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힘이 생기거나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약점이 있어도 행동하십시오. 두려움과 감정에 상관없이 옳은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성령과 협력하고 우리의 인격이 세워지는 방법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노력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을 닮아 성장하는 데 ‘힘쓰라’는 말이 적어도 여덟 번 등장합니다(눅 13;24등).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 그리스도와 같아지기 위해서 우리가 져야 할 세 가지 책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첫째, 우리는 옛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4:22). 둘째,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령이 너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도록 하라”(엡 4:23). 셋째, 우리는 새롭고 거룩한 습관을 발전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습관을 모두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


2. 하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당신의 말씀과 사람들과 상황을 이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주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해주며, 상황은 그리스도와 닮은 모습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하며,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3.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길고 느린 성장의 과정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우리는 아직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영적인 변화의 과정은 평생 걸릴 것이고,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마무리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지보다는 어떤 사람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두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잘 적응하여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목적은 훨씬 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시기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특권이고, 즉각적으로 수행해야할 책임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종착점입니다.



제 140 과 성장하는 방법 『목적이 이끄는 삶』, 제 23 장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목표는 우리가 성숙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갖는 것이고, 사랑과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성장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성장하기를 원하고, 성장해야겠다고 결정하고,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성장을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인 제자도는 항상 결정을 내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단순히 예수님의 초대에 응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정한 헌신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헌신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놓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엔가 삶을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다른 가치관들 사이를 오가며 반만 헌신을 하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평범한 삶을 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를 쌓거나, 유명 인사가 되는 것과 같은 세상의 목표들에 완전히 헌신하지만, 결국 실망하고 비통해 합니다. 모든 선택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르므로 현명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분과 우리의 부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이 구절은 구원을 받는 방법이 아닌 성장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영적인 성장의 두 부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루라’는 말과 ‘안에서 행하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루라’(work out)는 말은 우리의 책임이고, ‘안에서 행하는’(work in) 것은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와 성령께서 협력하여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책임은 그 삶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성장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 조종 장치 바꾸기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뒤에는 우리의 생각이 있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믿음에 따른 동기 부여가 있고, 모든 행위는 태도에 의해 유발됩니다. “너희의 사고방식에 주의하라. 너희의 삶이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다”(잠 4:23).

우리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의지로 바꾸려고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나는 적게 먹고, 담배를 끊고,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고, 지각하는 버릇을 없앨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의지로 단기간의 변화는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으로는 계속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그 단기간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결국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운동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동 조종 장치,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바꾸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신약은 이러한 정신적인 전환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그리스어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회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자기 자신, 죄, 다른 사람들, 삶, 우리의 미래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태도와 관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는 데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을 중단하는 것인데 그 생각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을 위해 노력하는 생각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필요만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의 둘째 부분은 성숙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와 일치해야 하고, 우리의 믿음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행동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2-3).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드는 것이 아니고, 문화를 거스르는 어려운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를 도우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고전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