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과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

                     

<말씀> 창 13:5-13

  예전에는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때 IQ(지능지수)만을 중요시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와 더불어 EQ(감성지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EQ를 간단하게 측정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보여 주면서 지금 당장 사탕을 먹으면 하나를 주지만 조금 후에 먹으면 두 개를 준다고 약속한 후에 아이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를 먹는 아이들보다 조금 후에 두 개를 먹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대체로 EQ가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즉 당장의 필요만을 생각하는 아이들보다는 조금 후를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의 EQ가 높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자주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취하는 반응과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까요? 아브람(창세기 17장 5절 이후에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아브람의 선택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풍요로워진 재산 때문에 조카 롯과 분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 종들의 다툼으로 인해 이방 민족들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서로 분가할 것과 분가할 경우 땅의 선택권을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제의는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의도와도 같았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전폭적인 양보를 한 이유는 단지 상태가 조카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브람이 전폭적인 양보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현실적인 필요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양보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2. 롯의 선택

  롯은 아브람의 제의를 받고 요단 들을 선택했습니다. 롯이 요단 들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요단 들이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시키는 데 있어서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롯의 이러한 선택은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롯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필요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람의 필요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3. 선택의 결과

  아브람과 롯은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역시 이유만큼이나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떠난 후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또 한번 약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3:14-15)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즉 조카 롯은 동쪽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동서남북의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롯은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는 전쟁의 와중에서 포로로 잡히고 재물까지 노략 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 심판 받아 멸망하고 맙니다. 이 와중에 롯은 아내까지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리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것만을 고려했던 선택은 결국 그를 불행으로 이끌었습니다.    

 

<배우기>

  세속적인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욕망, 이기심 눈 앞의 것만 보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가지고서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롯은 아브람과 분쟁이 있을 만큼 큰 복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의 함정에 빠져들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기적인 마음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세속의 욕망이 발목을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롯의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했다가 오히려 가진 것마저 잃어야 했던 롯의 선택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한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으로 믿음을 인정받는 또 다른 아브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당신이 선택할 때 그것이 어떤 선택이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우리의 삶에서 매일 매일 겪게 되는 선택의 순간에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우선 생각하여 선택합시다.

82과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선택

                     

<말씀> 창 25:27-34

  우리 속담 중에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 묶어 쓰랴"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급해도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을 혼동하는 데 있습니다. 날림 공사는 부실을 부르고 이내 참사로 이어집니다. 졸속 행정은 땜질 처방으로 연명하다가 더 큰 손해를 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긴급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한 사람과 구별하지 못한 사람의 선택과 결과가 나옵니다. 바로 야곱과 에서의 선택이 그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각기 다른 선택을 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선택에 대한 명분과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에서의 선택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나 가문을 위한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눈앞에 보이는 긴급한 문제만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곤비한 그는 당장 먹을 찾아 배를 채우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겼습니다(창 25:30).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한 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소중히 여겨야 했던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만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눈앞의 필요와 장자의 명분을 맞바꾸었습니다(창25:32). 이같은 모습이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당장 아내가 필요하다는 문제에 급급해서 믿음의 가문을 세워야 하는 중요한 사명을 소홀히 여기고 맙니다. 그래서 사십 세가 되던 해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이로 인하여 에서는 부모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2. 야곱의 선택

  야곱은 당장의 필요보다 중요한 것에 더욱 집중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팥죽 한 그릇과 바꾼 장자권으로 아버지 이삭이 빌어 주는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창 27:27-29).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앞에는 고단한 삶과 고난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눈을 가졌던 야곱은 그에 합당한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3. 선택의 결과

  장자의 명분을 놓고 전혀 다른 선택을 했던 에서와 야곱의 인생은 크게 달라집니다.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항의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삭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습니다.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창 27:33). 반면 야곱은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장자의 권한과 복이 곧바로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은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훗날 이삭의 축복 기도처럼 야곱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마 1:2).

 

<배우기>

 잘못된 가치관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마음은 중요한 선택을 그르치게 만듭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눈앞의 음식 한 그릇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에서에게는 믿음의 대를 이어갈 만한 권리가 있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 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후손인 에돔 민족은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이 되고 맙니다(민 20:14-21:4).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야곱에게는 믿음의 대를 이을 욕심이 있었고 그래서 주저 없이 장자의 명분을 선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야곱의 후손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살아가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손에 주어진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에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열망했던 야곱이 믿음의 대를 이어가게 됩니다.

  선택은 확률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결과가 따라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택하면 그에 합당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밀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택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신 미래를 보며 선택하십시오. 그 선택은 당신의 삶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축복된 삶으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적용하기>

1. 하루하루 삶에서 느끼는 당장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영적인 필요를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웁시다.

83과 기드온의 선택

                     

<말씀> 삿 7:4-8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는 구약의 많은 전쟁과 싸움 중에서도 매우 극적인 승리로 꼽힙니다. 오랫동안 압제를 받던 설움에서만 벗어나도 기쁘기 그지 없을턴데, 통쾌한 승리까지 거두게 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의 주인공은 기드온도, 300용사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싸움의 기획자도, 싸움을 주도하는 이도, 전략을 세우는 이도 모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드온은 자신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신다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뜻을 굽혀 응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에까지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고비마다 변치 않고 순종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던 기드온을 통해 순종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이고 능력 있는 선택임을 배워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사사로 부르심에 순종하는 기드온

  기드온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왜냐하면 미디안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의 땅을 약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라한 모습의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큰 용사라 부르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모습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스라엘을 구원할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약하고 작은 자라고 말하며 사사로서 부적합함을 고백합니다(삿 6:15). 하지만 기드온에게는 능히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표징을 구합니다. 표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에 기드온은 사사가 미디안과 전쟁을 이끌어야 함을 알면서도 사사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였습니다.

      

 2.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순종하는 기드온

  기드온이 미디안을 칠 군사를 모집하자 3만 2천 명의 백성들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중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기드온에게는 1만명의 군사가 남았습니다(삿 7:3).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남은 군사를 물가로 인도하여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를 제외한 군사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삿 7:4-7). 이제 기드온에게 남은 군사는 300명뿐이었습니다.

  자원해서 모인 백성을 돌려보내고, 또 이런 저런 기준으로 단 300명만을 남도록 하셨을 때, 기드온은 하나님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300명의 군사만을 가진 기드온은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에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표징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기드온의 적인 미디안 병사의 입을 통해서 주셨습니다. 미디안 병사의 꿈과 해몽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는 선택이 옳았음을 미디안과의 싸움을 통해 증명해 보였습니다.


<배우기>

 순종은 선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힘과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결단입니다. 순종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만 내릴 수 있는 결단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능력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최선의 선택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은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경험과 계산에 맞지 않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 사람은 누구나 고민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이들은 순종을 거부합니다. 명령한 하나님을 원망하며 등을 돌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거부도, 타협도, 합리화도 아닙니다. 순종은 다만 순종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순종을 바라는 이유를 생각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당신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이전보다 쉽게 순종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당신이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힘든 것도 순종하십시오. 쉬운 것뿐만 아니라 어려운 것일지라도,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것일지라도 순종하십시오. 순종은 하나님의 계획을 그대로 당신의 삶에 옮겨놓는 지름길입니다.

84과 마르다의 선택과 마리아의 선택

                     

<말씀>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

  목적과 수단은 다릅니다. 수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목적은 변하지 않지만 수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고 뒤바뀌는 경험을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난파당한 배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그런 경험은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만 잠깐 겪게 되는 혼란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오래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 예를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의 선택과 마르다의 선택을 살펴봄으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적을 지키기 위한 수단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마르다의 선택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의 누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가족과 친밀하게 지내셨고, 이들 또한 예수님께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외향적이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특히 예수님을 대접할 때 마르다는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요 12:2). 말하자면 마르다는 봉사하는 일에 열심이며, 자기가 해야할 일에 전념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품은 때때로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여 못마땅해하기 쉽습니다. 본문에서도 마르다는 분주할 때 자기와 함께 일하지 않는 동생 마리아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이는 마리아의 행동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마리아의 선택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에 분주할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비록 언니인 마르다의 원망을 들었지만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주의 발아래 앉아”(눅 10:39)라는 표현은 보통 랍비들의 교훈을 경청하는 자세로서, 마리아가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였기에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드리는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요 12:3)


 3. 예수님의 반응

  두 자매의 각기 다른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랐습니다. 마르다의 원망을 들은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41-42).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 신앙의 초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봉사와 구제는 중요한 신앙생활의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헌신, 구제, 봉사는 말씀과 믿음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칫 헌신, 구제, 봉사라는 이름으로 말씀, 복음, 믿음이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배우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때로 이런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도 선택을 망설이곤 합니다. 일에 매몰되어서 일의 방향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걷고 뛰느라 분주해서 길의 목적지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혼돈은 얼마든지 우리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르다는 일에 묻혀 있다가 정작 중요한 진리의 말씀을 놓쳤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리어 예수님께 나아가 동생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르다의 불평에 우리가 쉽게 공감한다는 데 있습니다. “왜 나처럼 하지 못하는가?” 혹 이런 원망 섞인 불만이 당신의 입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 마르다의 원망에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목적보다 수단을 우선시하는 사람의 이유였을 뿐입니다.

  잘못된 선택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우까지 범하게 만듭니다. 마리아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 받았습니다. 비록 다른 이들로부터는 원망을 듣긴 했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누구를 위한 선택, 누구로부터 칭찬 받는 선택이 되길 원하십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칭찬 받는 선택을 하십시오.

85과 유대 관원의 선택과 제자들의 선택

                     

<말씀> 마가복음 1장 16절-20절; 10장 17절-22절

  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다섯 더하기 다섯은?” 아이는 양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 가면서 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양손의 손가락을 펴서 셈을 한 후에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아홉이요.” 그런데 아이의 손을 보니 이내 답이 아홉이 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한 손에는 동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손을 모두 펴면 동전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었던 아이는 동전을 누르고 있던 한 손가락을 끝내 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무엇이든지 잘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포기할 줄 모르는 것이 아이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일까요?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을까요? 큰 일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유대인 관원과 제자들의 선택을 비교해 보면서 바른 선택을 위해 포기 할 줄 아는 지혜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유대인 관원의 선택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의 방법을 물었던 한 유대 관원은 율법을 잘 지킨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막 10:20).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보고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전합니다(막 10:21). 유대 관원은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진 재물이 많아 그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유대 관원에게 있어서 그가 가진 많은 재물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유대 관원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는 명령에 자신의 소유를 먼저 챙기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눅 9:59-62).

      

 2. 제자들의 선택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 될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곧 자기들의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막 1:18). 어부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인 그물을 버려 두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부모와 형제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어부들은 그 즉시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3. 선택에 따른 결과

  유대 관원과 어부들은 비슷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대 관원은 자신의 가진 재물을 포기해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어부들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떠나라,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유대 관원이나 어부들 모두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포기해야만 할 것들이 있었고, 그 포기해야 할 것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각각 다른 선택을 했고, 그만큼 그들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유대 관원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지 못하고 자기의 자리로 되돌아갔습니다. 반면 어부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사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되는 복음 증거자가 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배우기>

  중요한 선택과 결단일수록 희생이 따릅니다. 어떤 선택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기도 합니다. 선택을 해야하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14절의 말씀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것에 사로잡힌 사람은 새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유대 관원은 앞으로 자신이 얻을 귀한 영생보다 버려야 할 것에 대한 집착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것을 얻는 삶보다는 지금 있는 것을 지키는 삶을, 뒤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어부들은 지금 있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과거가 아닌 주님과 함께 하는 미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앞으로 주님이 당신의 삶에 주실 것입니까?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멈추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86과 십자가의 두 강도

                     

<말씀> 누가복음 23장 39절-43절

  막가파 사건, 지존파 사건,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 탈영병들의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 등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건들은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은 범인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범인들은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가진 자들을 향한 분노, 번번이 자신의 뜻을 좌절시킨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은 그들에게만 한정된 특별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자주 겪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이런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기에 앞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어리석은 분노'와 '진정한 회개'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회개의 선택과 분노의 선택

  성경은 이 두 범죄자가 어떤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십자가라는 중형에 처해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들은 무척 무거운 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에 처해진 두 범죄자의 태도는 사뭇 다르기만 합니다.

  한 범죄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전혀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는 생각지 않은 채 형벌에 대해서만 분노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을 비방했습니다(눅 23:39). 그리고 구원을 간구하는 대신, 예수님께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라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범죄자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그는 형벌에 대한 분노를 타인에게 표출하는 범죄자를 꾸짖었습니다(눅 23:40). 그는 예수님과 자기들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눅 23:41)이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이 범죄자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 두 범죄자의 가장 큰 차이는 죄를 뉘우치느냐, 죄로 인하여 분노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를 깨닫고 뉘우치지는 못할망정 죄로 인해 받는 벌에만 집중하여 분노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무분별한 분노는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2. 선택에 따른 결과

  죄를 뉘우친 범죄자는 예수님께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눅 23:42).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낙원(천국)의 허락이었습니다(눅 23:43). 비록 십자가에 달릴 만한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이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함으로써 영원한 실패의 길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죄를 지었지만 두 범죄자의 결말은 달랐습니다. 분노를 선택했는냐, 회개를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한 범죄자는 영원한 형벌의 길로, 또 다른 행악자는 낙원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배우기>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좌절에 따른 분노, 미움으로 인한 분노 등 분노는 다양한 이유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원인에 대한 숙고 없이 나타나거나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 없이 나타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를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린다면 그 분노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뜻이 좌절되었을 때,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맞게 되었을 때 분노와 회개 중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범죄자는 똑같은 중죄인이었지만, 한 범죄자는 무분별한 분노를 선택함으로써 파멸의 길로 들어섰고, 다른 범죄자는 진정한 회개를 선택함으로써 낙원(천국)을 허락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회개는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분노는 실패를 확정짓고 새로운 기회를 박탈해 버립니다. 파멸의 길이냐, 회생의 길이냐의 갈림길에는 분노와 회개의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십니까?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7과 베드로의 선택과 가룟 유다의 선택

                     

<말씀> 마태복음 26: 47-50; 69-75, 겔 33:11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은 더 나쁜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삶은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것일까요?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잘못된 선택을 한 후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잘못된 선택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본문 속으로>

 1. 가룟 유다의 잘못된 선택

  큰 무리를 대동하고 나타난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함으로써 무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잡아가게 합니다(마 26:48). 이 일이 있기 전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할 것을 말씀하셨고, 함께 있던 가룟 유다도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마 26:21). 예수님은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하시고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고까지 말씀하셨지만, 가룟 유다는 자기의 계획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선택을 합니다(마 26:14-16).

     

 2. 베드로의 잘못된 선택

  베드로는 예수님의 거듭된 수난 예고를 듣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언제든지 주를 따르겠다고 충성을 맹세합니다(마 26:33).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34). 이에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죽음을 각오한 충성을 다짐합니다(마 26:35). 어쩌면 이들의 맹세와 다짐은 당시 제자들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마 26:69-75).


3. 잘못된 선택을 극복하는 방법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또한 잘못된 선택 이후에 곧 후회했다는 점도 공통점입니다(마 26:75; 27:3-4). 하지만 이후에 잘못된 선택을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했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생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집니다.

  갸룟 유다는 잘못된 선택을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자책하며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함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마 27:5). 반면 베드로는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거듭났습니다(행 2:41).

  이처럼 잘못된 선택이 모든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선택이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절망하여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회개하고 뜻을 돌이켜 그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겔 33:1).

 

<배우기>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입니다. 완벽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베드로도 가룟 유다도 흠 많고 탈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는 죄를 저질렀지만, 잘못된 선택 이후에 서로 다른 행동을 함으로 이 두 사람의 인생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실수했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변명과 자학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변명하다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습니다(창 3:12-13). 가룟 유다는 자학 끝에 자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실 베드로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도 잘못을 저지른 후에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가 회개로 이어지지 않고 후회만으로 끝난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몇 번의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대신 그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의 비극은 잘못된 선택에 있다기보다는 잘못된 선택에서 돌아서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잘못된 선택을 할 위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서는 자, 회개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당신 앞에는 새로운 선택을 할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새로운 선택에 도전하십시오.

88과 예수님의 선택

                     

<말씀> 마태복음 4: 1-10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시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떤 시험은 사람을 넘어 뜨려 좌절시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시험은 사람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당면한 시험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꿰뚫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상 시험을 당할 때, 생각처럼 쉽게 거절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험이 다가올 때, 시험 앞에 넘어져야 하는 걸까요? 정말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시험을 이기는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받았던 시험에 대처했던 예수님의 선택과 방법을 통해 배워 보십시오.

       

<본문 속으로>

 1. 의식주와 관련한 시험 앞에서의 선택

  마귀는 광야에서 금식하시던 예수님께 나아와 세 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은 먹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거의 아사 직전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도 돌을 떡덩이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마귀의 시험은 매우 물리치기 힘든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당장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배고픔을 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먹는 문제를 맡기십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음식이 부족했던 광야에서 조금만 배고프고 목말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언제든지 먹을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먹는 문제를 맡기십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2. 능력 사용의 문제 앞에서의 선택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려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두 번째 시험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귀가 요구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을 하니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귀는 성경구절까지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떨어지면 다칠 수 있는 높은 위치라는 위험 속에서 일부러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철저하게 사람들을 섬기는 것에 사용하셨습니다.


3.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의 선택

  세 번째 시험은 우상숭배와 관계된 것입니다. 사단은 자기에게 절하면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입니다. 사단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이스라엘은 좀 더 편하고 부자로 살기 위해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섬기라는 명령으로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태어날 때도, 살아갈 때도, 또 죽을 때까지도 전혀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낮았고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마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에게 부활을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마 28:18).

 

<배우기>

  시험이 왔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당신은 시험에 굴복할 수도 있고, 타협할 수도 있고, 또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앞세워 당장의 필요만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시험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한다면, 당신은 시험과 타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원칙을 망각한다면, 당신은 시험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처럼 선택하십시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했다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혹은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사용함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심으로써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조건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셨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18).

89과 예수님의 선택(2)

                     

<말씀> 마태복음 26: 36-46

  "기도란 바다에 띄워진 배 위에서 육지와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 위에서 육지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면 움직이는 것은 육지가 아니라 배입니다. 잡아당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육지가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배입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요, 기도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가장 큰 결단의 순간을 맞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선택은 단순히 둘 중의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야말로 위대한 선택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위대한 선택을 배워 보십시오.

       

<본문 속으로>

 1.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실수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뜻하신 바가 있어 철저하게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사야 5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흔히 ‘고난장’이라고 부르는 장입니다. 이 고난장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역은 고난을 통한 구원입니다. 즉,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나음과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사 53:5).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와 고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2.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도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당할 고난에 대해 예고 하셨습니다(마 16:21).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해서 고난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께서 감당해야할 고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셨기에 더 슬프고 고난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임박했을 때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동참하지 못하는 고독 속에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마 26:40).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선택

  예수님은 장차 당할 고난을 인하여 고민하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세 번의기도를 드렸습니다.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깊은 고민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뜻에 하나님을 맞추기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어 하나님의 뜻대로 선택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세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배우기>

  어떤 내용으로 우리의 기도가 채워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마 조금 놀랄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헌신과 결단보다는 부탁과 간청입니다. 어투는 사뭇 공손하지만 내용은 하나님이 해야할 잡다한 심부름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야 무릎을 꿇을 정도로 간절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당신은 다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좀 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려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뜻은 누구의 뜻인지 생각하십시오. 또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해야 할 사명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십시오. 더 이상 우리의 기도 속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다면, 그 다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과 생각과 행동을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내 뜻을 포기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비우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공간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당신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들이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뜻보다 옳으시며, 당신을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90과 예수님의 선택(3)

                     

<말씀> 마 1:18-25

  올해도 어김없이 거리의 화려한 불빛들이 크리스마스가 왔음을 알려 줍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교회의 성탄 트리와 찬양이 아니라, 상업적 목적에 의해서 밝혀진 화려한 거리의 장식들과 낯 뜨거운 크리스마스 카드를 통해서 성탄이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날을 기념하여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축하하는 것을 막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비록 불신자라고 하여도 이 날만큼은 한데 어울려서 소리 높여 성탄을 축하하는 찬양과 캐롤송을 부른다면 아기 예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상실한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님이 빠진 성탄, 아기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은 12월 25일이라면 국가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마음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본문 속으로>

 1.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방법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의 난세포까지 작아지셨습니다. 인간과 똑같이 여인의 태어서 자라시고 태어나셨습니다. 하늘의 하늘들조차 감당하지 못할 분이 태어나신 곳은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깨끗한 병원도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가정집도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조차 상상할 수 없이 낮고 천한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2. 예수님의 만남

  예수님은 오셔서 그 사회에서 사람으로서 존경받지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격리되는 병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고쳐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의인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만남을 보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한다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격적인 만남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을 친구들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사랑과 우정과 진실이 아니라, 이익과 권력과 물질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위와 학력과 재물로 대우 받고 있습니다.

  성탄절만큼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회복되고, 인정받고, 서로 함께 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함께 하신 것처럼, 단 한 사람의 소외됨 없이 모두가 “사람”으로 만나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과 어울려 한 상에서 먹고 마신 것처럼 우리 주위의 소외받은 이들이 성탄의 잔치에 초대되어서 즐기는 날이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교회만의 잔치이거나 세상의 돈벌이 도구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되는 날이어야 합니다.

 

<배우기>

  해마다 성탄 절기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동요합니다. 연인들은 연인들만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가정은 여행 계획을 세워 떠날 준비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에 어떤 계획을 세우기 원하십니까? 생일잔치를 벌여놓고 정작 당사자인 주인공은 제쳐 두고 자기들만의 잔치가 된다고 하면 곤란한 일이 아닐까요?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과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크리스마스는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화려한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처럼, 우리 사회의 낮고 낮은 곳으로 자신을 낮추는 날이어야 합니다. 거리거리마다 화려한 조명으로 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연탄이 없어서 추운 방에서 동생을 껴안아 주고 있는 소년 소녀 가장들의 마음과 몸에 사랑의 불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케익과 술이 부족한 날이 아니라, 쌀과 따뜻한 국으로 양로원과 거리의 노숙자들이 먹고 배 부르는 날이어야 합니다. 성탄절은 나를 위한, 내 가족을 위한, 내 교회를 위한 날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의 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도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91과 하나님의 선택

                     

<말씀> 고린도 전서 1:26-29, 요 15:16

  러시아 속담에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가족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든, 양자를 삼든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한 후에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 내가 기꺼이 너희를 내 가족으로 삼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우리의 반역과 마주하고서도 우리를 자녀 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후회나 취소란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한 이유와 하나님의 선택으로 달라진 우리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보다 명확하게 알아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선택의 이유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공의를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이유는 당신을 너무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하십니다. 그분은 불면 행여 날아갈세라 당신을 애지중지 아끼십니다.

  하나님께 냉장고가 있다면, 거기에 당신의 사진을 붙여 놓으실 것입니다. 그분께 지갑이 있다면, 그 안에 당신의 사진을 넣고 다니실 것입니다. 매년 봄마다 당신을 위해 꽃을 피우시고, 아침마다 해를 선물하십니다. 당신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그분은 언제든지 들으십니다. 그분은 이 우주 어느 곳에라도 계실 수 있지만, 굳이 당신 마음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미치도록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요 3:16).


2. 하나님이 선택으로 변화된 당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다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갈 4:7).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인입니다(롬 8:17).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며(눅 20:36), 영원히 변치 않을 면류관을 가졌습니다(고전 9:25).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벧전 2:5), 하나님의 소유입니다(출 19:5). 하지만 다른 어떤 호칭이나 자리보다 더 의미 심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입니다. 실로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배우기>

  당신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입니까? 혹시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십니까? 혹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입니까?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 되십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움직여졌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 사사들, 제자들과 사도들,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가족이자, 동역자로 선택되었습니다(고전 3:9). 하나님의 선택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가 당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서 시작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당신 앞에는 선택해야 할 수많은 갈림길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제 이번 과정을 통해 배운 올바른 선택의 방법들을 가지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여기서부터는 목자가 인도해 주세요.

1. 한 해 동안 가장 보람있었거나 감사했던 일 한가지를 나눠 봅시다.

2. 한 해 동안 가장 힘들었거나 슬펐던 일을 나눠 봅시다.

3. 새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한가지를 나눠 봅시다.

92과  목표를 향해서 

                     

<말씀> 빌 3:13-14

  희망찬 새해! 영광의 꿈을 안고 가정교회 목장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새해에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로마의 철인 세네카는 “인생은 충분히 길다. 보람차게 보낼 수만 있다면 위대한 일을 완성하는데 충분하다. 그러나 방탕과 나태 속에 낭비해 버리고 착한 일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인생이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주어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활에 있어서 목표 있는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되이 인생을 보내지 않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표를 가지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사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목표를 알아봅시다. 

       

<본문 속으로>

 1.잡힌바 된 목표

   먼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성도는 그리스도안에서 잡힌바 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다메석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는 순간, 그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된 그는 이전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매여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집니다. 성도의 성공적인 삶은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며, 그리고 그 길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과 같이 중보자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잡힌바 된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본문 13절에 바울의 고백 중에 ‘잊어버린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은 단순한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의해서 더 이상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일생동안 죄인 중에 괴수임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회개는 한번의 감정의 고조에 의한 눈물을 흘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완전히 자신의 길을 돌이키는 180도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애굽을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었던 것 같이 오늘도 세상이 그리워 뒤를 돌아보는 자는 영생의 유업을 잃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지난 한해 좋지 않은 기억과, 아픔도 다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모든 옛 습관들도 이제 버리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목표를 향해 나갈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3.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단어는 본래 굶주린 사냥개가 먹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향해 있는 힘껏 질주하는 모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13절에 보면 바울에게 뚜렷한 한 가지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땀을 흘리고 시간을 드리고 인생을 드릴 수 있는 새로운 푯대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상급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세워지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이 그러한 인생으로 결산되기 위하여 이제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목표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집중력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집중 없이 위대한 인생의 성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의 진보와 성숙도 마찬가지입니다.

  헨델이 「메시아」라는 위대한 곡을 작곡할 때 무려 23일간이나 침식을 잊고 작곡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훗날 헨델은 그 곡을 작곡하던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그때 오직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이 나라의 주(主)이신 메시아 바로 그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원자이신 메시아 그 한 분만을 바라보았던 이 집중이 위대한 음악을 탄생시킨 배경이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배우기>

 2005년 여명의 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진정한 보람과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인생에는 반드시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듯 영적인 삶의 여정에도 어려운 고비와 역경이 있습니다. 실패의 아픈 기억들은 잊어버리십시오.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은 버리십시오. 그것은 더 힘찬 전진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잡힌바 되는 삶의 목표에 집중하십시오. 그 목표에 혼신의 힘과 정열을 쏟으십시오. 그러면 후회 없는 한해를 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 보다 더 많은 풍성한 열매와 간증이 우리가정과 목장에 함께 하길 기대합시다.

93과  사도신경 

                     

<말씀> 로 10:9-10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사도신경을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내듯이 위대한 선지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묘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신비한 66권을 아름다운 꽃에 비유한다면, 이 사도신경은 그 꽃들로부터 꿀벌들이 꽃가루를 모아다가 꿀을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사도신경을 비유로 표현한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매우 강조함으로써 성경적인 교회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을 요약한 사도신경을 이해하여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교리가 위협받는 시대

  요즘 한국교회는 교리를 잘 강조하지 않습니다. 한때 교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교회가 분열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교회성장과 교회의 실용적인 가치를 중요시한 결과 교단 그리고 교파간의 특색이 사라져가고 있는 듯 합니다. 교리의 지나친 강조도 문제는 있지만, 교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결국 믿음에 대한 왜곡은 물론 성경적인 믿음의 불균형으로 믿음의 성장에 방해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사도신경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사도신경의 역사적 배경

 사도신경은 종교회의에서 의논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전설에 의하면 12사도가 한 조목씩 만들어 12사도가 12신앙고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도들이 만들어 낸 신앙고백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지금의 사도신경은 주후 700년경에 정식으로 보급된 형태의 것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인 주후215년에 히폴리투스의 질문 형식의 신앙고백과 주후 340년에 마루셀루스라는 신앙고백이 유행했으며, 특히 마루셀루스의 신앙고백은 지금의 사도신경과 거의 일치합니다. 사도신경은 히폴리투스나 마루셀루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통해서 보면 신앙고백은 입에서 입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전해졌습니다. 즉 교회의 역사를 통한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교회역사를 통하여 형성시켜 주신 것입니다.  


3. 신앙고백의 필요성

1)세례를 줄때 아무에게나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세례 받는 자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아주 간결하고 기본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사도신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고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2)자녀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3)이단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니케아종교회의에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에 도전한 이단을 물리친 것으로 기독교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합니다.


<배우기>

  신앙은 지 정 의 3가지 요소가 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 지식만 가지면 안 된다고해서 지식을 아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라는 것은 지식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제외한 마음이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분명한 내용을 가진 종교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믿을 뿐 아니라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공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선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례라는 것이 있고, 교회의 정식교인이라는 명부도 있는 것입니다. 공적인 고백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어질 수 있게 합니다. 연약한 신앙이라도 공중 앞에서 고백한 뒤부터는 고백에 충실하기 위해서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내적고백과 외적인 입으로의 시인이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사도신경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교회에 주어진 귀중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을 하면서 고백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의 내용을 담는 온전한 그릇이 되기를 결단합시다.

94과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 창17:1, 21:1-3

  사도신경은 성경 전체를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부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

  전능이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능은 하나님의 전 성격을 나타낸 말로서 못하실 것이 없는 완전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죄를 짓는 일을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과 모순 되는 것은 행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정을 할 수 없고(딤후 2:13), 거짓말을 할 수 없으며(히6:8), 죄를 지을 수 없으며(약1:13), 불합리한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이란 하나님의 완전성과 조화, 일치되는 것은 무엇이나 행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99세 된 아브라함과 경수가 끊어진 사라를 통해서 약속하신 후손 이삭을 출생하게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작정하신 선하신 뜻을 다 행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2.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하나님

 그분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시139:8-10). 사람은 거주의 제한을 받습니다. 아들의 집에 있는 아버지를 딸의 집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은 육으로는 세상에 오셨고 영으로는 사람의 마음 안에 와 계십니다.  

3. 무소부지(無所不知) 하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세시는 분입니다(눅12:7).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하는 일, 생각, 나의 모든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시 139:1-4). 그러나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내가 행한 대로 최후의 날에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은 물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우리의 모든 행위를 눈동자같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영원자존자(永遠自存子:스스로 계신분, I am Who I am)하나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과 모든 물질세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그냥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십니다. 무원인적 존재자입니다. 무조건적 존재자이십니다. 독립적인 존재자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이 넉넉한 분이십니다. 영원히 다함이 없는 원천이십니다. 영원히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십니다. 영원히 스스로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배우기>

  사도신경의 첫 부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내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서 나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적으로 능하신 하나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주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그때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것이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당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십시오. 당신의 삶을 하나님은 지켜주시고 섭리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요즘 예배 때마다 부르는 찬양 곡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 그 찬양을 부를 때 오늘 배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며 불러봅시다. 고백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 올 것입니다.

95과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말씀> 창1:1, 히11:3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창조의 의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인간이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을 발명(창작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조는 아닙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찾는 것을 발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창조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은 것에서 찾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식을 낳습니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창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식은 부모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은 동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2. 진화론의 허구

 우주의 기원을 진화론으로 이해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진화의 여러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세상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에 있는 생명체는 아미노산으로 되어있고, 아미노산이 단백질을 구성하기 위해서 우연히 합쳐 만들어질 확률은 10의 130승 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합쳐져서 우연히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인 아메바가 될 확률은 10의 1,676,230승 분의 1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우연히 생겨날 확률로 생명체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는 진화론은 허무맹랑한 가설이고 허위입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미국의 카프란 박사는 창조자가 없이는 생명이 생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3.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1)말씀으로 창조하심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첫 장부터 계속해서 “ 하나님께서 가라사대˙˙˙˙˙있으라” 하심으로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고 증거합니다. 천지만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수백만년, 또는 수억만년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만물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이 능력의 말씀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요, 은혜체험의 원인입니다.


2)세상을 섭리하심

  하나님께서는 6일에 걸쳐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도 여전히 그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협력하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보호하고 유지시키신다는 뜻입니다. 보존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향해 베푸시는 끝없는 은혜입니다. 협력이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것들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통치란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들의 존재하는 뜻에 적합하도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입니다. 통치, 즉 다스린다는 말은 무엇에 그 목적을 정해주고 그 목적 달성에 합당한 방법을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며, 창조신앙은 자기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고백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현실을 존중히 여기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외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또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연대감을 굳게 해 줍니다. 인간은 분열하고 싸우며 미워할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96과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말씀> 신6:4-9

  하나님 아버지란 말은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서는 혁명적인 언어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 것은 생명을 담보한 고백입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은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야웨’대신 ‘아도나이’라는 하나님의 인공적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사도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신경 중에서 세 번째 고백인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아버지 되신 하나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롬8:15)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이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습니다(엡2:3).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면(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어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칭호는 바로 ‘아버지’란 표현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늘이라는 공간에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멀리 계시기 때문에 닿을 수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땅에 있는 피조물과 다르다는 의미이며, 땅에 계신 아버지와 구별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계십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전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J. C. 밀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기도의 황금문이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문부터 통과해야 한다. 아버지란 명칭은 우리에게 정당한 출입을 보장해 주는 티켓과도 같다. 이것이 없으면 그 누구도 그 앞에 설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신 분이시며, 인식을 초월해 계시고 능력은 끝이 없으며 영원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은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찾아오셔서 나와 대화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3.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아버지나 가문의 아버지가 아니라 온 세계 인류의 아버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주기문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은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인종, 지식, 빈부, 지위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칼빈은 ‘우리 아버지는 형제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칭호’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신자들이 하나의 공동체이며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의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를 진실히 사랑하는 자녀는 또한 그의 가족에게도 사랑과 선의를 베푸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바치는 사랑과 열정을 그의 백성, 그의 가족, 그의 상속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배우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는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세분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참 신이시며, 유일하시며 참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심으로써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부르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어진 삶을 당당한 믿음으로 자신 있게 살아갑시다.  

97과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말씀> 요1:1-4, 14-18

  사도신경의 첫 번째 부분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면 두 번째 부분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백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교리인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 외아들이란 독생자를 가리키는 말로 유일하고 특별한 아들을 말합니다. 70인 역에서와 헬라어로 된 유대의 문헌에서는 ‘노모게네스’가 여러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유일한 아들 또는 딸’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1장 14절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아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을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으로서 지금까지 구약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 주십니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 은혜,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그림들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을 보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도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그리스도”

예수님은 또한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20장31절에서는 복음서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혹은 메시야)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세움을 입은)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이사야 11장등). 성령 충만하여 공평과 정의로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사랑과 희생으로 백성들을 섬기는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목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섬김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지신 십자가는 바로 섬김의 왕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절정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 주”

   “주”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여호와”에 대한 번역으로 우리의 주인, 우리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요20:28).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풍랑 이는 바다도 꾸짖으셨고, 우리를 괴롭히는 질병과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셔서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주인이시기에 우리의 삶을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의 주인이요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되신 예수님께 당신의 삶 전부를 맡기십시오.

  

<배우기>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발견하시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십니까? 주님으로 고백하는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내 삶의 주관자가 내가 아닙니까? 삶의 근심과 걱정을 내가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 분은 여러분의 삶의 고민을 해결하십니다. 그 분은 여러분의 아픔을 만지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98과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말씀> 마1:18-25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역사 속으로 오셨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천 년 동안 고백해온 이 고백이 우리의 삶과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라고 가르칩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고”(마1: 18), 천사는 이 사실을 요셉에게 전해 주었습니다(마 1:20). 또 누가복음 1장 35절에도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적인 아버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성령과 마리아의 결혼을 통하여 예수님이 출생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이적이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담긴 하나님의 특별한 이적인 것입니다.

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는 인간이 생각하여 만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인간에게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고, 그분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실제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서 아기로서 여자에게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다윗의 자손’(메시야)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후손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시는 섬김의 왕으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참된 지도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믿음을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아기를 갖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하지만 마리아가 이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이 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마리아의 무흠함이나 신성이나 승천설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배우기>

예수님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고 만날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처럼 마치 죄가 있는 것 같이 사람의 육신을 입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3-4


99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말씀> 요한복음18:33-40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부분이 없습니다. 지난주에 예수님 탄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내용보다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구원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구원역사에서의 고난과 사도신경에서 언급된 빌라도에 대한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구속역사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며칠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셨던 생애 전부에 나타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습니다. 어린양으로서 모든 고난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정점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삶이란 한마디로 고난으로 점철되어있습니다. 그는 자기 땅에 왔으나 늘 나그네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었고, 이방인들은 그를 능욕하고, 침 뱉었고, 채찍질하고, 죽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유다는 배반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잠자고, 도망치는 제자들도, 친척도, 가야바도, 빌라도도, 헤롯도 모두 그를 대적했고 급기야는 하나님도 그를 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한 고난의 역사입니다. 결국‘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이 고백은 성경전체에서 나타난 고난의 구속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 왜 하필 빌라도를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신경에는 이름이 넷이 나옵니다. ‘하나님’, ‘예수’, ‘마리아’그리고 ‘빌라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마리아는 당연히 나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아니요,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여 죄 없으신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의 사형을 언도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했을까요? 그리고 사실 예수님은 빌라도 보다 가룟 유다나 유대인들에게 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예수를 풀어주려고 노력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그의 아내도 함께 노력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고백할까요? 여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성입니다. 예수님은 디베리우스 시저의 시대에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세계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를 통해 그 당시 로마제국이 존재했고, 그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임으로 그 총독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기록은 예수의 탄생과 고난이 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실제인물인 빌라도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본디오 빌라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 된 인간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말하고 채찍질만 해서 놓으려고 했습니다. 특별사면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은 원칙적이고 법적인 것만 말하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것은 유대인이지만 법적으로 최후 선고를 한 것은 역시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을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법적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 그 선택은 바로 빌라도 자신입니다. 그는 법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인간의 죄를 대변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임에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배우기>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실재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의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했고,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웅의 순교와는 다르며 종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참 인간으로 고난 받고 죽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고백은 예수님이 육체를 가진 몸으로서 실제적으로 죽으셨음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신조에 나타나 있는 구속 역사라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빌라도의 책임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비단 빌라도 개인의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변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를 고백할 때마다 역사적인 빌라도에 내가 함께 대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고백이 나와 연결되는 것이며 진정한의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00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말씀> 이사야53:3-6

   피 묻은 복음을 가슴에 품고 불꽃같은 구령의 열정으로 어두운 땅들을 누볐던 믿음의 선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핍박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한 것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살아 역사했던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는 영혼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해하고 고백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십자가를 만났습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꽃같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십자가와의 만남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잘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십자가가 낯설다면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나머지 모든 신앙의 경험들은 모두 불안할 뿐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은 지금 여러분으로 하여금 불꽃처럼 살게 하기에 충분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하여 살아야 할 존재들임을 늘 뼈저리게 자각하는 현재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를 아는 지식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아는 지식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생애는 아픔과 고통과 분투의 연속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허물을 인하여 당하신 고통은 없었습니다. 그 분의 고통은 모두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사53:5-6).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신 고난이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과 우리 후손이 지을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를 지은 자처럼 아버지의 진노를 담당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이렇게 그분의 희생적인 고난과 죽음 위에 있고, 하나님과 이룬 화목도 그분의 처절한 고난의 대가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사53:3-6).


3. 십자가를 아는 지식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은 하나님께 올린 기도였습니다. 중보자로서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사죄의 탄원이었습니다. 자신은 십자가에서 흉한 고통과 수치를 맛보시면서 주님의 관심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던 것처럼 너희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세상에서의 능욕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죄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심장에 못을 박았던 그 원인이었으며, 바로 우리를 섬기던 예수그리스도의 손을 못 박게 했던 이유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버리되 혐오하기까지 버리고 악을 미워하되 저주하기까지 미워하며 떠날 것을 십자가는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배우기>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을 고백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커다란 진노의 대상이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 전에 죄인을 향한 사죄의 기도를 드립니다.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참으시고 죄인을 향해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불이익과 수모가 있습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피흘리기까지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피흘리기까지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붙들린 삶이며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고 십자가에 사로잡혀서 마지막 승리를 얻을 때 까지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1과 “부활하신 예수”

                     

<말씀> 사도행전 2:29-36

   신학자 월리엄 바클레이는 “그리스도의 신앙의 중심은 부활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참뜻을 몰랐을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한 착한 어른이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친 것에 끝나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것은 부활이다.” 라고 말합니다. 바클레이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와 더불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사도신경의 중심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고백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사건에 대한 기사배열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의 부활 그 자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견해를 달리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태는 예수의 ‘빈무덤’을 강조합니다. 죽은 자와 산자의 관계는 다른 어떤 것 보다 무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후 분명히 돌로 무덤 문을 막고 밀봉까지 하고 로마 병사들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누가의 경우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모두 걸었는데, 그 자리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증시켰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각각 강조점은 다르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 주는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임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 부활에 대한 반론     

  부활이후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사건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기적설입니다.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고 잠깐 기적했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타묘설인데 여자들이 새벽 미명에 잘못 찾아 빈 무덤을 보고 예수가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도난설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끝으로 환상설로 실제 부활이 없었는데 이를 굳게 믿고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제자와 여인들이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의 사건인 양 퍼뜨렸다는 주장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곧 순교의 역사입니다. 과연 제자들과 역사상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의 목숨을 아깝지 않게 내어 놓으며 순교를 했는가? 그것은 부활이 확실한 사건이었고 이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의 생명이 너무도 분명한 것임을 알고 또 믿었기에 죽음을 넘어서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데 있어 그 숱한 순교자들의 순교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부활은 2천년의 긴 시간동안에도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3. 부활의 능력

  부활의 능력은 칭의하심에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곧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칭의입니다. 또한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증거합니다. 부활은 사랑의 확증입니다. 십자가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분하게 증명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는 하지만 거기에 다시 사시는 역사가 없다면 하나의 감상주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를 살리는 역사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또한 의의 증거입니다. 우리에게 있을 부활의 능력을 확실하게 예고해 주시고 약속해 주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할 것임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심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부활에의 약속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동력이 됩니다. 그 약속을 의지하고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게 됩니다. 


<배우기>

  부활은 기독교의 유일한 신비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약동하는 힘을 부여해 줍니다. 사망을 이기는 승리의 삶이 펼쳐집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해주시는 칭의의 표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확증입니다. 다시 사는 역사가 없다면 우리의 종말론적 신앙도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셨으며 또한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특권을 주셨으므로 이 일에 증인된 우리의 세계 선교사명이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102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


<말씀> 막16:19 ; 롬8:34

  사도신경의 이 고백에 관한 웃지못할 일화를 소개합니다. 8.15 해방 직후 경남 합천 야로교회에서 세례문답을 하는 중 당회장 목사가 어느 60쯤 되는 부인에게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셨는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 훤하게 외웠건만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연습할 때 하나님 우편이란 말을 듣긴 했지만 당황한 탓에 무슨 우편인지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는 중 우편국이 생각났다. 그는 득의만만하게 “예! 지금 야로 우편국에 계십니더! ”라고 대답하므로 요절폭소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르칠 때 뜻을 풀이하고 구체적으로 이해시키지 않고 무조건 외우게 한데서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고 고백합시다.

               

<본문 속으로>

1. 성경은 예수님의 승천과 우편에 계심을 증거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 누가복음 24장 50-51절, 사도행전1장9절 등의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우편에 좌정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6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라고 합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의 승천을 본 사람이 바울 때에 태반이나 살았다는 말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 우편에 서서 신자를 격려하고 도와주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사도행전 7장56절에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습니다. 이 증거로 말미암아 그는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누가 거짓을 위해 생명을 버릴 자가 있겠습니까?


2. 최고의 영광을 회복하신 예수님

  우편이란 문자적으로 오른편을 말하며 ‘오른’이란 오른편이라는 말도 되지만, 또 다른 표현으로는 영예의 자리, 정의의 편, 율법의 위치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옳게 여기시고 높이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하나님 우편’이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의 처소로 이해되어야 합니다(엡1:20-21).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하나님요, 온 세상의 왕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베드로 전서 3장 22절에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심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주가 되셨으며, 정죄당하는 자가 아니라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요, 마귀와 전 인류를 심판하시는 최종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셨으니 최고의 영광을 회복한 것입니다(빌2:6-11).


3.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우편에 앉으셔서 무엇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사역을  다 이룬 뒤에 이제 영광의 자리에서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는 중보자의 사역을 하늘에서도 계속하고 계십니다(롬8:34). 그리스도는 참 하늘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주가 승천하신 후에도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도우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스데반의 순교한 장면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대부분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으나 여기서는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합니다(행7:55-56).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순교하는 충성된 종 스데반 집사를 끝까지 격려하며 하늘 문을 열고 서서 맞이하려는 주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고 좌정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령을 보내주신 일입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은사들을 주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고 승천하신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배우기>

  사도들의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고 통치하고 온 세상의 왕으로서 세상을 교회를 보호하며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계심을 내가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면서 성도들을 격려하며 도와주시는 고마우신 분입니다. 또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각양의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승리하신 주님이시요.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의지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3과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말씀> 마16:27, 벧전1:6

   초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벌거벗은 몸에 부글부글 끊는 납이 부어지기도 했고, 피 묻은 야생동물 가죽이 입혀 진 채로 사람과 굶주린 개들의 사냥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연성 기름에 흠뻑 적셔진 후에 불타기도 했고, 기계와 동물들에 의해 사지가 찢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처참하고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들은 고난을 기뻐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에겐 다시오실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교적인 신앙이 사도신경의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과를 통해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어떻게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할지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리로서’는 ‘거기서부터’라는 뜻입니다. ‘거기’란 바로 앞의 고백에서 언급한 하나님 보좌 우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온 세상의 왕으로 마지막 때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다시 세상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첫 번째 이유는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25장31절 이하에서 주님은 이것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서 분명히 말씀하셨고, 16장 27절에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베드로 전서 1장 6절은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들이 잠시 세상에서 핍박과 고생을 당할 것이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심판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완성하는 최종적인 사역입니다. 이 심판의 날은 믿는 자에게는 상급을 받는 영광의 날이요, 믿지 않고 죄 가운데 지내던 사람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2. 예수님은 언제 다시오십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시기는 2천년 동안 교인들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이 곧 오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재림에 대한 관심이 조금 덜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때 당장 오실 것 같았던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 재림에 대한 관심은 또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악용하는 이단들에 의해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재림교리는 위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때 교회에서는 영생과 함께 재림에 대한 용어 사용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기도 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너무도 정확하게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모두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시기와 때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마24:36). 다시 오시리라고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나 어느 날 오신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마 24장)을 보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3.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내세의 기업, 영원한 기업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내세의 기업에 대한 기다림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는 마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동적이며 행동적입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임하실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최선을 다해 선교와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배우기>

   초대교회는 메시지와 삶에서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눈앞에 있음을 생각하며 환란을 참고 열심히 전도하며 살았습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다시 만날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내 개인의 종말이 오든,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든, 주님께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04과 “성령을 믿사오며”


<말씀> 요14:16-17; 26

  화란의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분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분은 결코 불가해한 공간 밖으로 나오지 않으신다. 이리저리 운행하시며 정의를 내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그분은 여전히 신비롭다.” 이 말을 통해 성부와 성자의 분명한 구분에 비해 성령의 이해가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역사하심을 우리가 느낄 수는 있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현상적인 특징 때문에 성령님의 인격성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에 대한 지나친 광신주의적인 자세나 지나치게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위 ‘성령시대’ 혹은 ‘은혜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기에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분에 대해 올바르게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성령은 우리를 구원하십니다(딛3:5; 행2:38).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내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거듭난 생명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이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2.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합니다(갈4:6).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증명해 주는 분이 성령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예수 잘 믿고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도 병에 걸리면 저주받았다고 하고 병이 나으면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십일조 안 바쳤더니 사업이 망했다고 하는가 하면 헌금을 많이 냈더니 사업이 잘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복과 저주의 긴장 관계 속에서 항상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 성령을 받았는지 의심해 봐야합니다.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왜 아버지를 의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조금 실수한다고 해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끊는 육신의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조금 잘못한다고 해서 버리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어 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범죄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시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것을 늘 우리에게 확증해 주십니다.

  

3. 성령은 우리를 거룩한 성화의 삶으로 인도합니다(갈5:22-23).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말씀 가운데 주님의 심정과 뜻을 알려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분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나 인격은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납니다(갈5:22-23).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로 이런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게 되는 삶, 성화의 삶입니다.


<배우기>

   아라비아 사막에 길을 잘 안내하기로 유명한 안내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넓은 사막에서도 결코 길을 잃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비둘기 사람(The Dove Ma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늘 가슴에 통신용 비둘기 한 마리를 안고 다녔는데 가느다란 끈을 비둘기의 다리에 매어 놓았습니다.

  광대무변한 사막에서는  사방이 사막이요 지평선뿐이어서 누구나 쉽게 길을 잃습니다. 더구나 모래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가면 사막의 지형 형태가 전혀 다르게 변해 버려서 표준으로 한 목표물이 잠깐 사이에 없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그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 방향을 바로잡았습니다. 이렇게 고마운 비둘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고, 그래서 ‘비둘기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인생의 사막 한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둘기의 인도함을 받은 비둘기 사람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사단의 세력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믿음의 길을 올곧게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105과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사오며”


<말씀>행20:28, 골1:18 , 엡1:22-23 ; 2:19-20,   

   세계교회를 놀라게 하며 경이적인 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교회는 성장의 위기와 함께 영적인 위기까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위기는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여 세속화되고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의 모습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회복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의 피로 사신 거룩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고백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올바른 청사진을 가질 때 올바로 고백하며 올바로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1.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이후 분명한 형태의 제자들의 모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새 이스라엘, 새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구약에서의 하나님 백성에 대한 개념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폐쇄된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던 이방인이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과는 무관한 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참여한 자녀가 된 것 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이 선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택입니다. 이 은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성도들은 생명을 구원하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 은혜를 경험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기 위해 모인 선택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니”(골1:18) 이 말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알기 쉽게 가르쳐 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머리’란 바로 권위의 대명사로 이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주권자요, 왕입니다. 그가 “자기 피로 사셨기” 때문에(행20:28) 교회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그러기에 그리스도만이 교회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왕적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엡1:23). 이 사실은 온몸의 건전한 발육이 머리의 지시에 순종하는데 있는 것처럼 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조금 한 분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진리가 우리에게 너무도 피상적이요, 교회생활에 정착이 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왕권이 외면을 당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의 자만스런 큰 소리로 왕이신 그리스도의 음성이 잘 들려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머리요, 왕으로 모시며 그의 말씀만을 전하고 그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태도를 나타낼 때 교회의 교회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생명의 친교를 나누는 교회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로마의 지배층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생명의 친교를 깊은 곳에서 나누고 있으니,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초대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서로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경험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영적인 은사들을 서로 나누면서 봉사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웃의 무거운 짐을 나의 것으로 알고 연민과 연대의식으로 괴로운 이웃의 십자가를 나누어졌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로부터 무한한 생명과 빛을 공급받고 성장합니다. 사랑과 봉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초대교회는 인간을 돕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교회가 서로 나누고 경험하는 생명의 친교는 이웃의 문제와 짐들을 실천적인 사랑으로써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받은 은혜이며 교회의 사명입니다.      


<배우기>

 우리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 머리되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해야합니다.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받은 구원과 은혜는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적인 교회의 교회됨과 성도의 성도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06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 로3:10, 눅5:20, 갈2:20, 마18:15-35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나 같은 죄인의 죄까지도 주셨다는 확신을 얻는 순간 지금까지 그의 어두운 심령의 불안은 사라지고 형용할 수 없는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죄 받은 신자는 세상에서 맛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에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죄 사함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고 고백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죄란 ?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함으로 기독교에서는 모두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죄로 인해 우리에게 두려움과 고통과 좌절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화살을 쏠 때 과녁에 명중하지 못한 것을 죄(하말티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명중되게 순종하지 못하고, 생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미달 되었거나, 바로 하지 못한 삶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는 인생이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만족을 목표로 살았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회개하고, 충성하며 하나님의 뜻에 적중하도록 하지 못했기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올바로 적중해야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2.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눅5:20). 옛날 제사법에서는 양을 잡아 제단 위에서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후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의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양의 목을 쳐서 불사를 동안 죄인은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는데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지금 양이 불타고 있는 것과 동시에 나의 죄도 함께 타고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양과 함께 내가 죽는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제물과 내가 동일시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양이 불에 탄 다음 머리를 들고서 이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 볼 때 그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내가 못 박혀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내가 일체가 되어 나의 교만, 나의 욕심, 나의 자만, 모든 것을 못 박아 버렸다는 확신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과 경험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났음을 믿는 것입니다(갈2:20).


3. 죄 사함 받은 자의 삶

 하나님은 우리를 사죄하시면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용서받았으니 이제 용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됩니다. 의인이 된 것입니다. 죄인인 동시에 의인입니다. 그리고 의인으로서 남을 용서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마6:14-15). 마태복음 18장에서 보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1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탕감해 주지 않음으로써 먼저 탕감 받은 것을 취소당하고 옥에 갇히는 비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의 탕감을 받았는데 남이 내게 진 조그만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나의 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은총에 감사하여 남을 용서하는 삶이 사죄 받은 자의 진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배우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어느 날 기도 중에 사단의 속삭임을 들었습니다. 사단은 루터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목을 기록한 것을 보여주면서 은밀하게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네가 지은 죄가 맞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루터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지은 죄가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사단은 “이 같은 죄를 지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책망했습니다. 루터가 이 말을 듣고 실망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또 다른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죄는 내가 다 사하여 주었느니라”그것은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로 자책하며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들려준 주님의 죄 사함의 음성은 결국 큰 힘이 되어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죄의 종교입니다. 이 사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공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주어진 희생의 댓가입니다. 이 놀라운 사죄의 은혜를 감사하며 용서의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107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 고전15:42-44

   죽음을 흔히‘한계상황’(Limit situation)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죽음 앞에는 누구도 큰 소리를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이 모든 종교와 학문에서, 또 인간의 모든 제반 활동에서 강구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그냥 이 죽음을 인정하면서 순응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만큼은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했습니다. 바로 부활이 그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있는 형벌입니다. 생물은 살다가 소멸되어 갈 뿐 그들에게는 죽음의 의식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생긴 죄의 열매이며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롬5:12). 

  죽음을 말할 때 성경은 육체의 죽음뿐 아니라, 영적죽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마8:22). 죄란 생명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 그 자체인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므로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단절이요, 육적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요, 영원한 죽음은 영원 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아담은 육신은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고통과 좌절 그리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생명의 공급자이며, 생명의 본체인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8장 52절에서 ‘울지 마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선택된 백성, 즉 믿는 자의 죽음을  끝이라고 보시지 않고 ‘잔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집니다. 하나는 무감각의 상태로 쉰다는 것이고, 하나는 반드시 깨어난다, 즉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님은“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 영혼의 불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후에 우리의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서 영원히 안식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영혼이 아버지의 품안에 안기는 것이요 육신은 고생을 끝내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죄악에서 벗어나는 승리의 날이요 전쟁이 끝나고 쉬는 날이요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옮겨가는 행복한 날인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 초대교회의 한 순교자는  화형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맞이합니다. “오늘은 결혼식 날보다 더 기쁘다”


3. 성도는 마지막 날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신자는 믿을 때 예수님의 영으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씨는 때가 되면 반드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킵니다(롬8:11).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사는 몸의 성질은 어떤 것입니까? 부활한 몸의 체질은 땅에서 가진 체질과는 전혀 다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됩니다(고전15:42-44). 빌립보서 3장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한 성도들의 몸의 광채로 대낮처럼 밝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신령한 몸이 됩니다. 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영과 같이 몸이 자유롭게 된다는 말 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문이 닫혔는데도 출입하셨고 홀연히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떠나기도 한 것처럼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우기>

  죽음은 한계상황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한계상황이 아닙니다. 이유는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며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되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살수 있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을 믿고 죽음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에 땅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8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말씀> 요17:3

  불란스의 위대한 사상가 볼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기 전에 병상에서 의사에게 한말입니다. “나를 6개월만 더 살게 해주시오. 그러면 전 재산의 반을 드리겠소. 나는 죽어 지옥밖에는 갈 곳이 없소”라고 했습니다. 불후의 명저를 남기고 사상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도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초조하게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영생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상가도 아닌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믿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며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신앙고백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1. 성경이 말하는 영생

  첫째, 성경의 영생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선물입니다. 결코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생을 하나님의 약속이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디도서1장2절에서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25절에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23절은 유명한 말씀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우리의 공로로 쟁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영생임을 의미합니다(롬6:23).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떠난 영생이란 없습니다. 빌립보서 1장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 두 사이에서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빨리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고생스러우며 불편하지만 너희를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복음의 전파를 위해 필요하고 어느 때든 시간이 어떻든 세상을 떠날 때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2. 영생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으로 얻는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요17:3).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서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며 그리스도 그 자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안다”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여 정신과 몸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완전히 합쳐지는 것을 “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내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곧 나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을 알아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깊이 알고 십자가의 참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둘째, 영생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믿으매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16절, 5장24절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었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영생을 가졌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즉, 현재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장40절에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는다.”47절에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한1서 5장13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전서 1장6절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등의 이 모든 표현들이 다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믿는 자들에게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3. 영생의 삶은 현재의 삶에서 출발한다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을 종합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 “성례”입니다. 예수님은 신비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여러 곳에서 하셨습니다. 자신의 살을 먹어야 하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먹고 마셔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도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 그 말씀을 받아야만 생명은 살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이고 약속된 선물입니다. 나의 공로와 고행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순종과 충성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좁은 길로 가야합니다. 그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좁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의 생을 영원한 생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통한 영생을 말하고 있지만, 영생의 시작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부터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지금부터가 영생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스와 함께 사는 오늘의 생, 그것이 영생으로 발전됩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는 생활, 그리스도와 충성하는 생활, 그 자체가 영생입니다. 

 

109과 “진리가 행복케 하는 가정”


<말씀> 고린도전서 13:1-7

  아침에 집에 나와서 거리를 헤매던 젊은이들이, 또 일터에서 온종일 직무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저녁이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이 세상에서 돌아가야 할 가정이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의 해리스라는 사람은 미국 사람들에게 “새해에 당신들의 최대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96%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원한다고 했고, 거기에 비해서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다는 사람은 1.8%밖에 안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전 인류가 바라는 소망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바람직한 행복한 가정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인내와 친절의 사랑을 가진 가정

  본문에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친절)하다”고 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될수록 우리의 성격은 조급해져서 참을 줄 모르고 불친절하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면에서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우리의 분노를 다 터뜨리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한걸음 나가서 우리의 행위에 적극적 친절함이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친절한 행위로 상대방을 위해서 적극적인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때로는 사랑을 감정과 느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의지적 결단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스텐튼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때 그는 링컨을 가르켜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하면서 고릴라를 보기 위해서는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고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에 가면된다는 등, 링컨에 대해 흉을 보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링컨은 아무 말 없이 참고 또 참았습니다. 링컨은 스텐튼을 존경했으며 예의 바르게 대했습니다. 더우기 링컨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스텐튼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4년 후, 마침내 링컨은 흉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턴튼은 링컨의 유해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에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며 모독한 사람을 변화시킨 힘은 사랑의 인내와 친절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이러한 사랑의 인내와 친절이 필요하며 이것이 행복한 가정으로 가는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2. 신뢰와 겸손의 가정

  본문에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질시하거나 경쟁의 대상으로 삼을 때 불신의 관계가 성립되기 쉽습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뢰감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때대로 시기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백만장자라 하더라도 남이 잘 되면 부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기의 감정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나쁜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이 잘 되면 것을 원치 않는 마음인데, 이것은 아벨을 죽인 가인의 피 속에 흘렀던 시기의 마음입니다. 시기하는 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서로에게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영국에는 여왕제도가 있고 영국 국가에는 여왕을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영국 국민들은 여자가 왕이 되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가정주부로서 남편을 받들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 엘리자벳 여왕을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혹 남편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라 하더라도 겸손히 남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와 같이 성공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며 성공한 가정은 겸손한 가정입니다. 


3. 예절과 품위가 있는 가정

  본문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절 바른 사람을 가리켜 신사, 숙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가정은 예전부터 예절이 무척이나 바른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개인주의의 유입으로 가정과 사회가 무례해져 버렸습니다. 성경의 “무례하지 않다”는 말은 헬라어로 매력이 있다 는 뜻입니다. 예절 바른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남의 부인에 대해서는 신사로서 예절을 지키고 남의 남자에 대해서는 숙녀로서 예절을 지키면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와 남편에 대해서는 무례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가정에서 남편을 대하는 아내가 아내를 대하는 남편이 품위 있는 예절을 갖출 때 더욱 매력 있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배우기>

 지금 시대는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사회가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부모도 친구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돈으로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내하고 친절하십시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겸손하게 섬깁시다. 예절과 품위 있는 인격을 통해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순종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갑시다.

 

110과 행복한 가정 만들기 Ⅱ-“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가정”


<말씀> 창 2:18-24

  어느 시골교회에 새 목사님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목사님은 그 마을에서 잘 알려진 한 성도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목사님이 다녀간 후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오자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새로 오신 목사님이 다녀가셨어요.”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목사님은 ‘이 가정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느냐’고 물으셨어요.” “그거야 우리가 훌륭한 신앙 가문출신이라고 말하면 되쟎소.”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목사님이 물으신 것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럼 우리가 매주일 교회에 출석한다는 말을  안 한 모양이지?” “여보, 목사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집에 거하시느냐’고만 물어보셨단 말이에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이 가장 행복한 가정이요, 성경적인 가정이라는 말이겠지요. 행복한 가정은 주님을 그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입니다.


<본문 속으로>

1. 가정을 설계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생을 만드셨습니다. 그런 후에 가정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즉 가정 설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의 출발점인 결혼은 인간이 고안한 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루신 거룩한 제도입니다. 창조사역의 일부인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고전7:7-8)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셨다고(창2:18) 성경은 말합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하나님께서는 독처하고 있는 아담에게 배우자를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서 자녀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시작입니다.


2. 가정 설계법칙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유대 지경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가정에 대한 귀한 교훈을 말씀해주셨습니다.  5절과 6절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정설계법칙의 진리를 알아보겠습니다.


1)독립의 법칙(“부모를 떠나서”) -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단순히‘분가’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가정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뜻입니다. 첫째, 육체적인 독립, 그리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심리적 독립이 두 번째입니다. 인생의 연륜을 가지고 계신 부모님의 지혜를 배우고, 지도를 받아야 하지만, 모든 결정을 부모가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심리적 독립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 독립이 그것입니다. 2) 연합의 법칙 (“아내에게 합하여”) - 배우자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연합니다. 서로의 단점은 용납하고 보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3) 하나 됨의 법칙 (“한 몸이 될지니라”) - 가정의 탄생은 둘이 모여 하나가 되면서 시작됩니다. 불완전한 반쪽이 서로 제 짝을 찾아 온전히 맞추어 지는 것이 하나 됨입니다. 부부는 가치관과 목표, 육체까지도 둘로 분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이는 의무이면서도 동시에 부부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4) 친밀성의 법칙(“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 하나님이 맺어주신 가정은 비록 허물이나 약점이 있더라고 친밀함이 깨져서는 안 됩니다.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오히려 그 약점들 때문에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2:25). 이것이 부부의 친밀감입니다.


3.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보여주는 가정으로

  가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가정을 자기 마음대로 관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쳐야 합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가정은 어떠한 가정입니까?

1) 아버지가 영적 제사장으로 우뚝 선 가정(고전16:13)입니다. 2) 어머니의 양육과 사랑이 샘물처럼 흐르는 가정(딤후1:5)입니다. 3) 자녀들이 주의 훈계와 교훈으로 양육되는 가정(신6:6-7)입니다. 4) 이단 사상에 현혹되지 않는 가정(딛1:11)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 배우자, 자녀 모두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 우리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온전한 창조질서 가운데 거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정의 자화상입니다. 가정이 천국의 모형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적용하기>

1.‘예수님의 가정설계법칙’이 우리 가정에서는 얼마나 지켜지고 있습니까?

2. 가정의 건강도를 체크하고 평가하여 보완해야 할 부분을 결단해 봅시다.

3. 교회나 목장에 가정의 어려움과 아픔이 있다면 그 가정을 회복시켜주시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중보기도를 드리십시오.


<가정 건강지수 체크리스트>

다음은 가정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기본 질문들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건강지수는 얼마나 높은지 진단해 보십시오.


1. 우리 가족은 같은 삶의 목표와 비전을 추구하고 있다.

2. 나는 매일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고 드린다.

3. 우리 부부는 평소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갖고 있다.4. 부부 간에 갈등이 생겨도 그로 인한 후유증은 생기지 않는다.

5. 평소 배우자와 나누는 육체적인 사랑에도 만족한다.

6. 자녀들의 친구나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웬만큼 알고 있다.

7. 가계수입과 지출을 규모 있게 관리하고 있다.

8. 양가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거나 아니면 안부전화를 드린다.

9. 신앙생활에 관한 한 가족 구성원간에 갈등이 없다.

10. 우리 가정은 평소 다른 가정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기의 가정을 스스로 정직하게 체크해서 점수를 합산해보십시오.

점수에 따라 자기 가정의 건강도를 평가해봅시다. 


* 40점 이상 :박수를 쳐 드려야합니다. 가정의 건강을 잘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듯이 가정의 건강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더욱 낮아지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30-40점 이상: “조금만 더 노력하시면 훌륭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져 보십시오. 조그만 더 가정에 관심을 가진다면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 20-30점 사이:“가정생활에 어려움이 오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분발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 20점 이하 : 평소 가정생활에서 어려웠던 점은 없으십니까? 현재 가정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반성해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늦었다고 생각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가정의 건강지수를 높이기 위해서 보완해야 할 부분을 구체적으로 결단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