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과 고난을 함께 하는 사람 - 룻


<말씀> 룻 1:14-18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힘들다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고난을 빠져 나가보려고 나름대로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로또 복권을 통해, 어떤 이는 거짓과 술수를 통해서라도 고난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룻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룻은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 놀라운 전환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본문 속으로>


1. 룻이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룻 1:1-2). 모압 땅에서 첫째 아들은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결혼하였습니다. 둘째 아들도 모압 여인인 룻과 결혼하였습니다. 두 아들마저 죽고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며느리들에게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였습니다(룻 1:8).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룻 1:14-15).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있다면 고생할 것이 뻔한 일임에도 룻은 시어미니인 나오미와 함께 했습니다. 룻은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신을 떠나면서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시어머니의 백성과 시어머니의 신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룻 1:16). 이 모습은 선민이었던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가난 때문에 도피를 선택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베들레헴에 도착한 룻은 사회적 보장도 없고, 경제적 보장도 없는 낯선 땅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의 삶은 고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룻을 위해 보아스를 예비하셨습니다(룻 2:1).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모압이라는 족속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원을 약속하신 민족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민족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룻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룻이 모압 여인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계보가 룻에게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이방인을 통하여, 때로는 여인을 통하여, 때로는 율법을 어겼던 죄인을 통하여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룻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대신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냥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라, 메시야의 계보에 드는 영광까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룻의 인생이 바뀌었듯이 우리 인생도 바뀔 수 있습니다.


<배우기>


   오늘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장애물을 피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장애물을 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바로에게 도전하지 않았다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정복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기꺼이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갈등과 장애물, 삶의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가장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오늘날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신다면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결코 어떠한 공식이나 미봉책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고난받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지금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걷기로 결심할 우리를 위해 이미 도움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적용하기>


1. 내가 극복해야 할 갈등이나 고난은 무엇입니까?

52과 감동을 주는 사람 - 다윗


<말씀> 삼상 24:17-22


  바람과 태양이 한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더 빨리 벗길 수있는지 내기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바람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고자 매서운 바람을 휘몰아쳤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불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꼭 붙잡아 바람은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태양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따스한 태양 빛으로 온 거리를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 외투를 꼭 잡고 있던 나그네는 따스한 날씨 앞에 스스로 외투를 벗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세워 나가야 할 우리 기독교인들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진정 변화시키는 것은 명령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본이 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이 그들을 감동시킬 때 그들은 변화될 것입니다. 瀏릿摸?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다윗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전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어떤 한 부분만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사기꾼이라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통해 감동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균형을 갖춘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 역시 전인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뛰어난 영성 때문에 다른 부분들을 간과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다윗은 영성만 뛰어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매만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떠는 골리앗을 이길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7:49). 그리고 그는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남들보다 뛰어난 체력을 가졌습니다(삼상 19:8). 또한 다윗은 시편들 중에서 73편 이상의 작품들을 쓸 만큼 지적인 면에서도 우수하였습니다.

  다윗은 사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다윗에게 몰릴 정도로 그는 사람들 사이에 신망 받는 존재였습니다(삼상 22:2).


2.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조급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때에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때에 하나님을 움직이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삼상 16:13) 즉시 왕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이 실제적인 왕으로 추대된 것은 그의 나이 삼십 세였습니다(삼하 5:3-4). 다윗이 왕으로 세움을 받기까지는 많은 사건들을 통한 성숙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시편의 시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기간이 결단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기간동안 다윗은 사울에게서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서 판단해 주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삼상 24:12-15). 그래서 사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될 기회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배우기>


   휴 다운스는 행복한 사람은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좋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조건에 좌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때에는 행복해 하지만 조금만 잘 못 되어도 사람들은 금새 불행해집니다. 이러한 면에서 다윗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이려고 왔던 사울 왕까지도 감동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다윗처럼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감동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가 됩시다.

  

<적용하기>


1. 다윗처럼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과연 어떤 부분을 노력해야할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53과 삶의 지경을 넓힌 사람 - 사도바울


<말씀> 행 9:10-23


  만약, 사도바울이 없었다면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어야 했을 것이며, 복음이 유럽을 거쳐 아시아에까지 확산되는 세계선교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처럼 사도바울을 알지 못하고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없고, 복음전도와 선교를 이야기 할 수 없는 기독교역사상 위대한 인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적들과 대치하여 영적전쟁을 하는 선교현장의 상황에서 순간순간 성령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성경기록들과 사역의 풍성한 열매는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바울을 통해 성령 충만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여 성령의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본문 속으로>


1. 영안이 열려 삶의 지경을 넓혀주는 성령 충만

   성령 충만과 예수를 믿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라고 말했던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믿고 따랐던 자들입니다. 사울 또한 다메섹에서 강한 빛을 받고 쓰러져,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역사는 얼마 뒤에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일어납니다. 일어난 현상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고 표현된 사건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된 세상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으로 아무리 목이 쉬도록 기도하고, 매일매일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드린다 해도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란 없습니다.

    

2. 욕심을 내어버리게 한 성령 충만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모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모든 일에 내가 ‘아멘’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기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모든 욕심를 버리는 것입니다.그리고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의 삶은 자기의 자랑과 욕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고백(빌3:7-9, 빌4:11-13)을 통해 그의 삶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이야기>

  어떤 흑인이 눈물을 흘리며 교회 앞 계단에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어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교회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습니까?” “예, 저는 지금 슬픈 마음이 있어 교회에 들어가 예수님의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저 교회는 백인들만 가는 교회라 저와 같은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흑인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대답을 하고 눈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는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흑인의 손을 잡고 “괜찮다. 네가 그 교회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슬퍼하지 마라, 저 교회는 나도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란다.”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배우기>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의 역사는 삶의 지경을 넓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을 볼 때,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그때가 비로소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갈 곳이 없고 서로 이야기할 곳이 없다면 성령 충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눈에 있는 비늘이 벗겨져야만 합니다. 우리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역사를 가지고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동일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없는 것이 핑계일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권력이 없는 것이 핑계일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시간이 없는 것이 핑계일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의 연조가 짧은 것이 핑계일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욕심의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적용하기>

1. 신앙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영적인 세계가 열린 경험이 있습니까? 경험이 있다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나눠봅시다.   

54과 사랑을 고백한 사람 - 베드로


<말씀> 요 21:15-22

 우리인생의 비극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1821년 나폴레옹의 무덤비문에는 “나는 나의 유골이 쎄느 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서 안식 취하기를 원하노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가 사랑한다고 고백한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수없이 죽음의 전쟁터로 내몰려져야 했습니다. 자신의 야망에 포장된 병든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 한없는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고통 하는 그를 예수님은 사랑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또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 베드로를 통해 베푸시는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배워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사랑의 대상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물으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에 걸쳐 말씀 하셨는데 주목할 것은 세 번의 ‘양’이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의 양은 ‘알니온’(arnion)으로 ‘갓 태어난 양’ 입니다. 두 번째,“내 양을 치라”고 하셨을 때의 양은 ‘프로바티온’(probation)으로 ‘청년기에 있는 양’입니다. 세 번 째, “내양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의 양은 ‘프로바톤’으로 ‘성장이 끝난 양’을 의미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과 내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내 기호에 맞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알니온’은 나보다 어리고 유치한 사람, ‘프로바티온’은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 ‘프로바톤’은 나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으로 이 모두를 다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행동은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의 종류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사랑의 종류에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사랑은 ‘아가페’ 로 시작해서 마지막 세 번째에는 ‘필레오의 사랑’ 즉 ‘핏줄의 사랑’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으로 결론 맺기를 원하셨는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주님을 향한 사랑이란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랑’ 이었습니다.

  깊은 자책감을 겪어 본 사람만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가증스런 현장에서 도망치면서 느꼈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지막 다정하시고 연민 어린 사랑의 눈동자가 그를 얼마나 괴롭혔겠는가!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죄의 눌림 가운데 찾아온 주님에 대한 고백은 분명 특별히 사랑할 이유가 베드로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배우기>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사람들을 향하여 말을 건네시고 다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말라! 왜 너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이 너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느냐? 사랑은 바보 같은 것이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단다. 네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으면 족할 것이지 다른 사람이 목숨을 버리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상관 없단다. 너만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요21:22) 

  네가 나를 사랑할만한 이유가 분명하다면, 이제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분명히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

   모두를 사랑하십시오! 모두를 품으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던 것처럼 먼저 여러분들이 입을 여십시오! 실망과 좌절에 차있던 제자들이 사역자로 변했던 모습을 기대하십시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환경과 삶의 방식이 변화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명을 내어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역사, 용서와 회복의 역사, 삶의 기념비적인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주변의 신앙의 동반자들 중에 그를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가슴깊이 느낀 경험들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55과 정직한 사람 - 요셉


<말씀> 창39:6-23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거짓말을 접하게 됩니다. 위급한 순간 작은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 때로는 거짓말로 위기를 넘겼을 때 스스로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사탄을 가르켜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요 8:44). 거짓말은 귀여운 장난이나 삶의 지혜가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에 더렵혀지지 않은 깨끗한 그릇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멀리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과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요셉의 인생을 통해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인생의 단계를 거친 사람 - 요셉

   오늘 우리는 요셉이라는 한 인물을 주목하려 합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부당한 고난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배신으로 인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버림받고 배신당했다는 고통이,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떨어져야 한다는 외로움이 요셉을 더욱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는 노예생활 가운데서도 성실히 일한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순결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그는 옥살이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인생이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곳에서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희망 없이 2년 동안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도구로, 위대한 제국 애굽의 재상(宰相)으로, 가뭄으로 굶주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산 사람 - 요셉

   요셉은 13년 동안 고통스럽게 세월을 경험하였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고통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닥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 의해 고의적으로 저질러진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받은 상처 또한 의도적인 것이었습니다. 의롭게 살려는 것이 오히려 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옥살이 기간에도 꿈의 해몽을 통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기대할수록 절망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비록 형들이 저지른 행동은 옳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난을 바라보는 요셉의 마음자세는 그의 삶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하여 특징지어 말한다면 ‘역경 중에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습관이며 태도였습니다.


<배우기>


   요셉의 위대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많이 거론되는 것은 그의 정직함입니다. 요셉은 유혹을 거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정직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었고, 정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사람만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을 가리는 사람은 유혹에 노출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먼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요셉은 인격(人格)이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행동도 하나님과 전적으로 관계가 있음을 알았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일에 정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요셉은 자기 인생의 모든 아픔의 과정을 겪은 이유를 해석하는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창45:5-8). 나의 아픔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56과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 - 솔로몬


<말씀> 왕상 3:4-15


오늘은 우선순위에 대한 주제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우선순위’라는 말은 ‘파레토의 원리’로 설명이 됩니다. 흔히 20/80 원리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시간과 에너지, 돈과 사람들을 당신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20%의  일에 투자하기만 한다면, 그 우선적인 20%의 일들이 당신에게 80%의 성과를 안겨다 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신앙에 대입시켜 보면, 우리들의 삶의 원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 삶의 상위20%, 즉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써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솔로몬을 통해 바른 신앙의 우선순위를 배워봅시다.  

   

<본문 속으로>


1. 기도에 우선순위를 둔 왕 - 솔로몬

   솔로몬은 많은 영화를 누렸던 왕이며, 지혜가 남달랐던 왕이었습니다.그는 무엇에 우선순위에 두었기에 다른 왕들이 되고 싶어하는 왕, 다른 왕이 누리고 싶어하는 영화를 누린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솔로몬은 자신의 머리만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기도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3장 3절의 ‘제사하며 분향하다’는 말씀은 ‘계속해서 예배한다’, ‘계속해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기도는 결정적인 필요의 순간이나 다급한 위기의 순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일상의 삶 가운데 늘 예배하며,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힘들 때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에서도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2. 지혜를 우선으로 삼은 왕 - 솔로몬

   솔로몬에게 있어서 삶의 선택, 즉 우선순위는 자기를 수(壽)도 아니요 부(富)도 아니며, 원수의 생명을 멸(滅)하기도 구치 아니하였고, 단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거나 지도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히 인생을 사는 것과 현명하게 인생을 사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솔로몬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합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상 3장 12절에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로운 마음이란 원어로는 ‘렙쉐마’로 ‘듣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지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 그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까지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배우기>


   우리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결정하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삶을 책임지실 것이라고 하신 약속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지혜를 선택했을 때, 하나님은 부수적인 다른 부분들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수적으로 덧붙여 주시는 것들에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도 더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부를 위해 목숨을 걸거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른 우선순위를 둔 인생은 참으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향력이 우리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히11:38)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삶의 부수적인 축복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 등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축복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의 근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적용하기>

1. 솔로몬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이 맡은 왕의 역할을 위해서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직분과 직장 일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나누어봅시다.

 57과 훈련받은 사람 - 모세


<말씀> 히브리서 11:23-26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문제 속에 살아갑니다. 친구문제, 학업문제, 진로문제, 취업문제, 가정문제 등 문제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앞에 산적한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모세의 삶이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출생에서부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문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 문제들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도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1. 문제 가운데 태어난 사람 - 모세

  모세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가 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그는 내적으로 매우 혼돈되어 정체성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가 되는 교육을 받으면서(행 7:22), 유모로 들어온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히브리인의 정신교육도 함께 받았습니다(출 2:9). 두 가지 상이한 교육 속에서 어린 모세는 내적인 혼돈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문제는 내적인 혼돈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동족을 못살게 구는 애굽인을 살해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왕자로써의 부와 명예 속에 살던 모세는 40년 동안이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지냈습니다. 이 시간들이 모세의 자화상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을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양치기 생활을 끝내고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모세의 모든 문제가 사라졌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안타깝게도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출 4:10). 게다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로 왕에게 나간 모세의 말을 바로 왕은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왕은 10가지 재앙을 겪고 나서야 히브리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후에는 홍해가 모세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는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먹을 고기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출애굽 하는 중에 많은 적들을 만났습니다. 출애굽의 고통 가운데서 자신을 지지했던 백성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모세의 삶에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문제에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지도자로 굳게 섰습니다.


2. 하나님의 지도자 - 모세

  하나님의 지도자 모세는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사람을 쳐죽인 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출 2:12; 민 12:3). 스스로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말하던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출 4:10; 신 1:1). 하나님께 백성들에 대해 불평하던 그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이 지워짐을 각오하고 백성들의 죄 사함을 간청합니다(출 17:4; 출 32:32).

  이 같은 모세의 변화는 순식간에 이루진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앞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그 문제를 통해 훈련받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세 앞의 여러 가지 문제는 결코 모세를 넘어뜨리고 실패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통해 훈련받아 하나님의 지도자로 곤고히 설 수 있었습니다.

   

<배우기>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만큼 우리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수리가 빠른 속도로 평형을 유지하며 안정감 있게 날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장애물은 다름 아닌 공기입니다. 만약 독수리에게 공기가 없는 진공상태에서 날아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장애물인 공기가 없으니까 더 잘 날아갈 수 있을까요? 진공상태에서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비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바로 그 요소가 동시에 비행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문제는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지만, 우리를 성장시키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두려움의 대상이나, 피해야 할 것으로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를 이겨내는 힘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십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문제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훈련의 과정일 뿐입니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훈련의 시간들을 이겨갑시다.

   

<적용하기>

1. 지금 내 앞을 가로막는 문제는 무엇이며, 그 문제를 통해 나의 어떤 부분이 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누어봅시다.

 58과 자신을 아는 사람 - 세례 요한


<말씀> 요한복음 1:19-23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자기정체성과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이란 내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미이고, 삶의 의미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삶의 지표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돌아봄과 동시에 내가 믿는 신앙의 확신에 대한 문제이기에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 속으로>

1.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았던 사람 -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요 1:7).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 될 때에도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사명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요 1:19-23).

  사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사명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으며, 예수님이 사역하시기 전에 이미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였고, 그는 자신에 대해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지지에 현혹되어 교만해 지거나,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였습니다(요 1:20).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하였습니다(요 1:23).

  이처럼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왕조차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음에도(막 6:20), 자신을 높이지 않고 받은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는 칭찬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눅 7:28).


2. 사명의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지닌 사람 -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단지 자신의 정체성만을 분명하게 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의 궁극적인 목적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명확한 이해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고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29).

  사실 세례 요한도 처음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요 1:31).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지금 자신 앞에 나아온 이가 ‘메시야’임을 담대하게 말하도록 하였을까요? 세례 요한 자신이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요 1:31). 그리고 성령이 내려서 머무는 사람이 보이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요 1:33). 그래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른 것을 보고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고 증거한 것입니다(요 1:34).

  어쩌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꿈꾸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나 사람들의 기준에 맞는 그리스도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가 예수님임을 알게되자 그는 자신의 사명대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때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목적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우기>

  우리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지지해 주고 박수 쳐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기에 자꾸만 연연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귀히 여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고백을 드리는 겸손한 주님의 일꾼인가 점검해봅시다. 또한 맡겨진 사명을 통해 나보다 이웃을 세워주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적용하기>

1. 나의 사명이나 봉사에 대해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왜 그 일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지 나누어봅시다.

 59과 동역자를 세워주는 사람 - 바나바


<말씀> 사도행전 9:23-31; 11:19-26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은 배려가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서로 먼저 손을 씻겠다고 수돗가에서 몸을 밀치는 유치원 아이들에서 시작하여 서로 먼저 타려는 전철역의 어른들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모습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타인을 배려하지 않은 나 중심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은 나 중심 문화 속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사귀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바나바의 삶이 그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바나바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속으로>

1. 사람들 앞에서 동역자를 세워준 사람 - 바나바

  크리스천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의 크리스천들과 교제하고 싶어했습니다(행 9:26). 그러나 예루살렘의 크리스천들은 사울을 그들의 교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사울)의 위장 회심으로 의심하였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을 더 많은 크리스천들을 색출해내어 처벌하기 위해 크리스천 행세를 하며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더라도 감정적으로 자기들의 동료들이 모진 고난과 고통을 당하도록 한 장본인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주기란 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 크리스천이라면 과연 사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사울을 피하고 꺼리는 상황에서 바나바는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제자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다메섹에서 그 큰 위험을 무릅쓰고 어떻게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였는지 확신을 가지고 설명해 주었습니다(행 9:27). 그제서야 제자들은 사울을 받아들여 함께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습니다(행 9:28). 이처럼 바나바는 사울을 사람들 사이에 세워준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동역자를 세워준 사람 - 바나바

  바나바는 사울(바울)을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만 세워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울을 사역의 무대 위에 세워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무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나바를 그곳의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파송했습니다(행 11:22). 바나바의 착한 성품,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 충만한 믿음의 사역으로 안디옥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행 11:24). 그러자 바나바는 직접 짐을 꾸려 다소를 향해 급한 발걸음을 떼어놓았습니다. 그가 다소로 향한 것은 바로 사울을 찾아 동역자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행 11:25).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함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사울이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두 지도자가 교회에서 1년 동안 가르치자 교인들의 삶이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이 신자들을 볼 때 꼭 그리스도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별명을 하나 지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별명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행 11:26).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첫 번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바나바는 사울을 세웠고, 사울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세웠습니다.


<배우기>

  바나바는 아무리 보아도 베드로나 바울처럼 무대의 중앙에 서서 조명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이력서 어디에도 그가 귀신을 내어쫓는 권능이 있었다던가, 병 고치는 은사가 있었다든가, 지식이 뛰어났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가 쓴 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꾸는데 크게 사용하신 사람입니다. 친구로 사귀어도 얻을 것이 전혀 없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처럼 바나바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동역자를 사랑했습니다. 이기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바나바는 상대방을 인간관계에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관계에 기초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나바를 통해 바울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바나바처럼 동역자를 세워주길 원하십니다. 세상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삽시다.

   

<적용하기>

1. 나는 어떻게 동역자를 세워줄 계획인지 나누어봅시다.

60과 믿음의 대를 이어간 여인 - 리브가


<말씀> 창세기 24:50-60

  과거에는 잘 생기고 예쁘게 생긴 주연만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주연보다 튀는 조연들이 주목받는 시대입니다. 조연이 주목받고 인정받은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훌륭한 조연은 성경이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선택에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아브라함 가문의 조연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연보다 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꿰뚫어 보았던 조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연보다 더 하나님의 구속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연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천만 인의 어미가 되었던 리브가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믿음의 대를 잇도록 선택된 여인 - 리브가

  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불러 이삭의 아내를 구하도록 했습니다(창 24:2). 이삭이 아내를 얻어 믿음의 대를 잇는 일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수많은 자손을 얻기 위한 시작이기도 했고, 신앙의 대를 이어가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오랫동안 타향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만은 가나안이 아닌 자신의 고향에서 얻기를 원했습니다(창 24:4). 이런 아브라함의 선택 기준은 후에 리브가에 의해서도 재현됩니다.

  늙은 종의 기도대로 며느리를 선택하는 일은 순적히 진행되었습니다(창 24:12). 늙은 종이 하나님께 기도한 선택의 기준은 친절과 온유, 그리고 사려 깊은 성품이었습니다(창 24:13-14). 늙은 종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아브라함의 친척 리브가였습니다(창 24:15). 가족들이 리브가에게 늙은 종을 따라 나설 것인지 묻자 리브가는 단호하게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창 24:58). 리브가는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타향으로 시집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심이었지만 그녀가 단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일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진행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창 24:50). 리브가는 갑자기 닥친 일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대를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2. 믿음이 대를 선택한 여인 - 리브가

  리브가는 아들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서로 싸운 두 아들은 태어나서도 전혀 다르게 성장해 갔습니다(창 25:27-28). 에서는 맏아들이었지만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했습니다(창 25:34). 그리고 헷 족속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습니다(창 26:34-35). 이 때문에 리브가가 믿음의 대를 이을 아들로 선택한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던 날, 리브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삭의 축복을 야곱에게 돌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창 27:8-10). 야곱은 주저하며 망설였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기만 했습니다(창 27:13). 리브가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 단순한 요식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람으로 선택된다는 뜻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은 야곱의 의지보다 리브가의 적극적인 의지, 대담한 계획, 재빠른 실행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리브가는 믿음의 대를 바꾸는 큰 사건의 기획자이자 실행자가 됩니다.

  리브가는 믿음의 대를 잇기 위해 큰 일을 해냈지만 사랑하는 아들 야곱과 헤어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길을 떠나는 야곱을 향한 어머니의 부탁은 아브라함의 바람과 한결같았습니다. 즉 이방 여인이 아니라 고향 사람을 아내로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속아서 야곱을 축복한 남편 이삭에게도 같은 말로 설득합니다(창 27:46). 이런 리브가의 바람은 야곱에게 축복을 돌린 행위가 단순한 편애 때문이 아니라 신앙적인 결단임을 보여줍니다. “천만 인의 어미가 될지어다”(창 24:60)라는 리브가 가족들의 축복은 리브가의 선택에 의해서 현실이 됩니다.


<배우기>

  리브가는 믿음의 대를 잇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보에서 리브가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소신껏 해냈습니다. 리브가의 역할은 단순히 가장의 내조자, 아들들의 어머니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삭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살폈고, 야곱보다 치밀하며 담대했습니다. 리브가의 철저한 신앙과 뛰어난 지혜는 담대함으로 인해 더욱 빛났습니다. 결국 리브가에 의해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당신의 가정에 당신이 있음으로 인해서 평안과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가정이 당신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가정이 당신의 지혜와 담대함으로 인해 해처럼 빛나기를 바랍니다.

   

<적용하기>

1. 하루 중에 가능한 시간을 정해놓고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61과 인생을 역전한 사람 - 라합


<말씀> 여호수아 2:8-14

  인생역전. 로또 복권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만든 주인공이 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매우 아름다운 성이었습니다. 라합은 광야처럼 척박한 땅이 아닌 아름답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성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도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여리고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은 간담이 녹을 만큼 두려운 소문이었습니다(수 2:9). 하지만 라합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라합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도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합니다. 행동하는 믿음과 지혜와 용기는 라합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했습니다.


<본문 속으로>

1. 믿음을 가진 사람 - 라합

  라합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본 사람은 아닙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을 뿐입니다(수 2:10).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의 역사를 확실히 믿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 앞에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고백합니다(수 2:9). 라합이 고백한 하나님 신앙, 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라”는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하나님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을 가리켜 믿음의 여인이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히 11:31).


2. 믿음을 실천한 사람 - 라합

  라합은 입으로만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도왔던 행동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정탐꾼이 들키기라도 하면 정탐꾼과 자신은 물론 자신의 온 가족까지 죽을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의연하고 담대하게 행동합니다(수 3:4-6).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 준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탐꾼에게 이스라엘 진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할 만큼 침착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수 2:15-16). 야고보서 기자는 이러한 라합을 행함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약 2:25).


3. 믿음으로 축복 받은 사람 - 라합

  라합은 가나안 사람으로서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기생은 술을 파는 여자보다는 창녀에 가깝습니다. 라합의 삶에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천한 기생으로 살던 라합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이후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됩니다. 여호수아는 라합과의 약속을 지켜 라합과 그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려주었습니다(수 6:25). 라합이 받은 축복은 생명의 구원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기생으로 사람들에게 천대받으며 사는 대신 평범한 주부로 아이를 기르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라합이 낳은 아이는 보아스입니다(마 1:5).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결국 천한 기생이었던 라합은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배우기>

  라합은 비록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귀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라합에게는 그가 믿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만한 용기도 있었고 어려움을 헤쳐 나갈 만한 지혜로 있었습니다. 라합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택한 라합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펼쳐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라도 들어 쓰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자들이 아닌 허물 많고 부족한 이들을 들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허물이 아닌 그의 담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결국 라합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러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라합과 같은 믿음과 지혜와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쓰임 받는 복과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하기>

1. 그 동안 알고는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것 한 가지를 종이에 써서 방문에 붙여 놓고 매일 매일 실천하도록 노력해봅시다.

62과 하나님의 여장부 - 드보라


<말씀> 사사기 4:14-16

  여성해방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남성들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났던 여성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압도했던 그런 여성들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드보라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평시에는 남성들보다 더 뛰어난 지혜로, 전시에는 남성들보다 더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승리를 차지했던 여인이 드보라입니다. 드보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잘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셨던 하나님의 여장부, 드보라를 만나 보십시오.


<본문 속으로>

1. 존경받은 여인 - 드보라

   하나님은 드보라를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남자가 아닌 여자가 민족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사사는 보통 이스라엘에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아 전쟁등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단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사로만 기억되지 않습니다. 드보라는 평시에도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을 수행했던 사사였습니다. 드보라가 재판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2. 지도력을 가진 여인 - 드보라

   바락은 드보라의 명령을 받았지만, 전쟁이 두려웠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락은 자신이 믿고 따르는 드보라에게 함께 가자고 청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의 청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드보라는 무엇보다 앞장서는 지도자였습니다. 드보라는 확신있는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바락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확신에 찬 명령을 받고 적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드보라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앞장서는 용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드보라는 시스라와 그의 온 군대를 전멸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 성경은 남은 자가 없었다고 전합니다.


3. 감사와 찬양의 여인 - 드보라

  드보라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기쁨 속에는 자랑대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만이 넘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사들은 자신의 역할이 끝나면 곧 옛날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정시대에 왕들과 달리 스스로 권력을 탐하지 않는 신실한 사사들의 모습은 오늘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드보라도 전쟁에서 이긴 공을 내세워 권력이나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찬양하는 드보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참 신앙인의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배우기>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지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실 뿐입니다. 드보라가 사사로서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전쟁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백성들을 재판할 만한 능력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모든 일에 앞장서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리더십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군대의 장수를 뽑아 임명했지만, 그 자신이 뒤로 빠지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가야 할 길을 알리는 지도자의 자기 선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드보라를 신뢰하고 있었던 바락과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락은 그로 인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헛된 선입견들을 물리치십시오. 당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굴레를 벗어 버리십시오. 그렇다면 승리와 성취도 이미 당신 것입니다.

  신앙의 최고의 열매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승리와 성취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성숙한 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있지 말아야합니다.

   

<적용하기>

1. 2004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데 있어서 나에게 걸림돌이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63과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여인


<말씀> 사무엘상 1:21-28

  당신은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사실 약속을 잘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변석개(朝變夕改)라는 말처럼 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기자는 5:12에서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과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을 잘 지켰던 여인입니다.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약속이었지만 한나는 기꺼이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켰습니다. 한나를 통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되새기고 실천할 수 있는 신실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본문 속으로>

1. 아픔을 가진 여인- 한나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나요, 다른 하나는 브닌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신에게 자식이 없어 늘 슬퍼했습니다. 더구나 브닌나는 한나에게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한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그런 한나를 가엾이 여겨 제물의 분깃을 더 주며 사랑했지만 한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호의로 인해 오히려 브닌나는 더욱 한나를 격동케 했습니다. 한나의 아픔은 남편의 사랑과 위로보다는 아들을 얻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약속의 기도를 드린 여인 - 한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한가지의 결핍을 통해서 기도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결핍이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장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과 아픔의 불청객으로 착각하며 불평합니다.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으므로 브닌나의 격동으로 한나는 슬퍼하며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여호와께 바치겠다는 약속의 기도였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한 한나의 기도는 당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알려 줍니다.


3. 약속에 신실한 여인 - 한나

   한나는 아들을 바치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아들을 허락하셨으니 이제 나도 여호와께 아들을 드린다고 기도합니다. 젖을 뗀 아이를 떼어놓는 일이 어미로서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한나의 신실함을 인하여 그와 그 아들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바친 아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서 자라갑니다. 누구의 소유로 여겨 키웠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은 극과 극으로 달라졌습니다. 사무엘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을 치리합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를 마감하며 이스라엘의 왕조를 여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하며 초대 왕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습니다.

 

<배우기>

  한나는 자식이 없어 서러움을 당하던 평범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드린 믿음의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나는 비록 개인이 당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이 기도를 한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살리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한나의 서원 기도와 응답을 통해서 신실한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나의 서원이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한 인간의 신실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젖을 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드린 아들은 이스라엘을 치리하는 위대한 사사요, 영적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사무엘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한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키운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힘보다 하나님의 힘을 더 의지 합니까? 당신은 당신의 품보다 하나님의 품이 휠씬 넓고 평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약속은 내게 손해나 희생이 아니라 더 큰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따라 당신도 하나님께 신실하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입니다. 


<적용하기>

1. 하나님께 드린 믿음의 서원이나 결단을 혹시 잊고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지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다면 즉시 순종하도록 합시다. 

64과 지혜로 범죄를 막은 여인 -아비가일


<말씀> 사무엘상 25:23-35

  당신은 살아오면서 극심한 분노를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면 당신은 스스로 마음을 어떻게 다스립니까? 사실 강력한 분노는 자칫 이성을 마비시켜 자기도 모르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한때, 극심한 살인의 충동에 사로잡혔읍니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지혜와 겸손한 언행으로 다윗의 범죄를 막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남편과 가문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침착하고 지혜로운 언행으로 남편과 가문을 살리고 범죄도 막은 여인, 이 여인이 바로 아비가일입니다. 충신은 나라가 어려울 때, 참 성도는 환난 날에, 어진 아내는 집안이 어려울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아비가일을 통해 그의 지혜와 겸손할 모습을 배워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위기의 상황

   나발은 재물과 쾌락을 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고, 잔치를 즐기며 쾌락에 빠져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에게는 작은 것도 베풀지 않는 인색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미련한 남편과 지혜로운 아내, 두 사람의 이렇게 전혀 다른 성품은 다윗을 만나면서부터 사뭇 다른 인생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발은 당시 풍습을 따라 양털 깎는 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 나발에게 다윗은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다윗은 이에 격분해서 나발과 그 가문을 멸절시키려고 작정합니다.


2. 범죄를 막는 여인

   아비가일은 남편인 나발의 실수를 전해 듣고는 사태의 수습을 위해,  다윗과 부하들에게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다윗에게 먼저 보냈습니다.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나발은 불량한 사람으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최대한 몸을 낮추어 겸손하게 다윗을 대합니다. 비록 자기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아비가일은 남편과 가문을 살리기 위해 겸손히 땅에 엎드렸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인사를 했다는 것은 복종을 나타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주’라고 부르며 높였습니다. 아비가일의 이런 행동은 단지 아부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세우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또한 훗날 다윗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습니다.


3. 칭찬 받은 여인

   다윗은 지혜롭고 겸손한 아비가일을 만남으로 분노를 누그러뜨립니다.  나발과 그의 가문을 치려던 다윗은 오히려 아비가일을 칭찬합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다윗에게 자신의 속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친히 보복하려던 것을 막아 준 아비가일에게 감사했습니다. 아비가일의 말처럼 나발은 하나님이 치심으로 인해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아비가일의 부탁처럼 아비가일을 기억했고,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배우기>

  분노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성품을 거칠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겸손한 언행은 사리를 분별하게 합니다. 나발은 돈과 쾌락에 눈이 멀어 다윗을 격분케 했습니다. 결국엔 두려움에 몸이 돌처럼 굳었다가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었습니다. 다윗도 분노에 떨며 살인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고 겸손한 여인, 아비가일을 만남으로 죄악의 길에서 돌아섭니다. 겸손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지혜는 범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합니다.

  나발은 미련한 말과 행동으로 가문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겸손한 언행으로 인해 가문을 구합니다. 여러분은 나발입니까? 아니면 아비가일입니까? 하나님은 거친 언사, 미련한 언행, 사리 판단을 가로막는 마음보다 지혜와 겸손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통해 당신의 뜻과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혜와 겸손이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적용하기>

1.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거나 싸우는 대신 마음속으로 찬양을 부르며 그 화를 누그러뜨립시다.

65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결단한 왕후 - 에스더


<말씀> 에스더 4:15-17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내 것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그 모습은 한결 강하게 나타납니다. 내 집, 내 자동차, 내 돈, 내 시간…. 내 것은 귀하게 여기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내게 있는 것들이 순수하게 나 자신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만약 암에 걸렸다면, 만약 전쟁터에서 태어났다면, 만약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것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에스더를 통해 과연 내게 주어진 축복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배워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위대한 역사의 서막

   사촌오빠 모르드개 밑에서 고아로 자라난 에스더는 수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고레스에 의해 포로생활을 끝내고 귀환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유대인들이 도처에 남아있었고, 에스더도 남아있던 유대인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아말렉의 우상숭배자인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는 그의 신앙적 유산을 이어받고, 양육되었습니다. 에스더는 고아에 유대인이었지만, 여자로써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바로 폐위된 와스디를 이어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에 2:17). 에스더 자신은 몰랐겠지만 사실 에스더가 받은 이 축복은 단순한 축복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할 어려움의 시기를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습니다(에 4:14). 

   

2.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역사적 결단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에도 유대인들을 위한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고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고를 따라 결단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유대인들을 다 모아 자신을 위해 3일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기를 약속합니다. 당시에는 함부로 왕에게 나아가면 사형에 처하는 법률이 있었고, 왕은 에스더를 찾지 않은 지 이미 삼십 일이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결단하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이같은 에스더의 결단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역사적 결단이었습니다. 


3 위대한 승리의 역사

  에스더는 하나님의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건 결단을 했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왕과 하만을 두 번이나 잔치에 초청하며 때를 기다리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왕 앞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 곧 자기가 유대인임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왕비로 누리던 명예와 물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건 일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자기 생명과 민족의 생존을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왕후의 절박한 호소를 들은 왕은 모략을 꾸민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에스더는 왕과 하만의 면전에서 하만을 지목했습니다. 에스더는 하만의 책략을 왕에게 고했고, 왕의 명령에 의해 하만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결국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던 하만의 조서도 무효로 돌아갑니다. 에스더의 용기 있는 결단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습니다.

 

<배우기>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구원, 건강, 시간, 명예, 재능, 물질 등 너무나 많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내 것이니까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주어진 축복은 나 자신만을 위한 축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축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해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내게 주어진 축복을 나 자신만을 위해 사용할 때, 내게 주어진 축복은 원래의 목적에서 변질되어 썩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내가 하나님을 위해 혹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시간, 봉사, 물질, 다양한 재능 등). 그리고 작은 것이라고 그것을 드리도록 결단하고 실천해봅시다.

66과  예수님께 끝까지 헌신한 여인 - 막달라 마리아


<말씀> 누가복음 8:1-3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기쁨이 넘칠 때 헌신을 다짐합니다. 어떤 성도는 물질로, 어떤 성도는 시간으로, 어떤 성도는 자신의 재능으로 헌신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헌신의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어떤 성도는 시간이 없어서, 어떤 성도는 다른 성도 때문에 시험이 들어서, 어떤 성도는 흥미를 잃어서, 어떤 성도는 능력이 부족해서, 어떤 성도는 힘들어서 헌신의 자리를 떠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기쁨에 넘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헌신의 자리를 떠나야 할지 고민 중이십니까? 아니면 이미 떠나셨습니까? 우리가 헌신의 자리를 떠날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다섯 가지도 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헌신하기 위해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께 헌신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함께 생각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받은 은혜에 감사한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 중에 만나 병을 고쳐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상태였습니다. 여인과 아이들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던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은 여인, 더군다나 귀신들린 여인을 만나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즉 병을 치유 받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그 공동체에 전적인 헌신을 합니다. 당시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거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은 아니었습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막달라 마리아로 하여금 헌신의 자리로 나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받은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할줄 아는 마음 때문입니다.

   

2. 끝까지 헌신한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소유, 곧 재산을 바쳐 예수님을 섬깁니다(눅 8:3). 누군가 강요했던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재산만 드린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곳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시간도 드렸습니다. 이 같은 헌신은 예수님이 환란 가운데 있을 때에도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그 때(막14:50),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곁을 지킨 것입니다(요 19:25). 예수님에게 헛된 기대를 품었던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절망하며 돌아섰습니다. 더 이상 에수님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였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무덤에서 장사 지낸 후에도 무덤을 찾아 울며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요 20:11). 이 여인은 명예나 권력욕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까지 찾아와 슬퍼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6-17).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기쁨에 차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최초의 여인이 되었습니다(요 20:18).

 

<배우기>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헌신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도, 십자가의 죽음도, 장사 지낸 무덤까지도 함께했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을 끝까지 헌신하도록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고 예수님을 떠날지라도,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 돌아서고, 제자들마저 배신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평생을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평생을 한결같이 헌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배웁시다. 그러면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끝까지 헌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격했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때의 감격을 다음 목장 모임 때까지 가족이나 친구에게 간증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헌신합시다.

67과  바울의 동역자 -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말씀> 로마서 16:3-4

  두 사람이 한쪽 발을 묶은 채 달리는 2인 3각 경기를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경기에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능력보다 두 사람의 호흡이 더 중요한 승리의 요인이 됩니다. 단순한 달리기도 호흡을 맞춰 달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달리기가 아니라 어려운 일을 누군가와 완전히 마음을 맞춘다는 것은 결단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맞춘 마음을 지속하기여 장기간 함께 일한다는 것은 더욱 힘이 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온전히 마음과 뜻을 맞추어 평생을 살아간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굴라와 부르스길라 부부와 바울입니다. 이들은 단 한 차례도 어그러짐이 없이 평생을 동역했던 사람들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삶의 통해 우리가 어떤 동역자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바울이 신뢰한 동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에서 살았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A.D. 49-50년에 있었던 황제 글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이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을 만나 그의 평생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행 18:1-2). 그들은 바울과 함께 천막 짓는 일을 하며 그의 선교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바울의 동업자이자 동역자였습니다(행 18:3). 좋은 관계에 있던 사람일지라도 동업을 하다가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이 부부의 관계는 조금 달랐습니다. 바울과 이 부부는 천막 짓는 일을 하며 함께 거하고 함께 일했음에도 서로 싸우거나 험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얼마나 그들을 신뢰했던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라며 칭찬합니다(롬 16:4).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전도를 마치고 에베소로 떠나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함께 이사해서 계속 바울의 선교와 목회를 도왔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이 부부의 헌신적인 도움과 동역이 있었습니다.


2. 제자 삼는 삶을 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당시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탁월한 학문과 신앙의 열심을 지닌 아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부족했던  자였습니다. 즉 그는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알았지만, 성령세례에 관해서는 무지했습니다(행 18:25).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요 3:5). 이 말씀은 후에 오순절 날에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경험함으로 확증되었습니다(행 2:1-4). 이 사실을 모르던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했습니다(행 18:24). 그러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를 책망하며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집으로 초대하여 하나님의 도롤 풀어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행 18:26).

  또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게 헌신한 부부였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지금과 같은 독립적인 건물이 아닌 헌신된 개인의 집을 예배 처소로 사용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들의 집을 기꺼이 교회 처소로 제공하였습니다(고전 16:19). 이처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 삼아 동역자를 세우는데 헌신했습니다


<배우기>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역할과 영향력은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뒤에는 숨은 공로자들 또한 많았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가히 절대적이었고 그런 그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그런 헌신자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부부가 한 마음으로 바울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바울과 선교 사역을 함께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의 생활 방편까지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온몸과 마음을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아볼로를 집으로 초대해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가 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의 예배 처소로 제공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속한 가정교회에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제자 되고 제자 삼는 일에 힘쓰십시오. 제자 되고 제자 삼는 좋은 동역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나의 동역자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봅시다. 다음 모임때까지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편지, 전화, 이메일,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힘이 되는 말들을 전해봅시다.

68과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 - 유니게


<말씀> 디모데후서 1:1-5

  우리 주변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성공한 자녀를 둔 부모님이 썼다는 책도 사서 읽어보고,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한 채 그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그저 세상 사람들과 같이 그저 좋은 직업 갖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 자식이니까 내 뜻대로 강요하며 키워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시편 127:3).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상급인 자녀를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니게를 통해 그 답을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이방 문화 속의 유니게

  유대 여자 유니게는 헬라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행 16:1). 게다가 유니게가 살았던 루스드라는 이방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습니다. 루스드라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발을 못 쓰는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헤르메스와 제우스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아닌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 했습니다(행 14:8-15). 이런 곳에서 유니게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으로 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는 아들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법대로 할례를 행하지 못한 것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니게는 이방 문화 속에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기준으로 자녀를 양육하지 않았습니다.


2.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 유니게

  이방인들이 보기에 유니게의 양육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발달된 헬라문화와 지식이 아니라 성경으로 디모데를 가르치는 유니게를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니게는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딤후 3:16). 그래서 디모데를 어려서부터 성경으로 양육했습니다(딤후 3:15). 뿐만 아니라 자신도 성경을 통해 배운 대로 직접 행하며 살았습니다(딤후 1:5). 그렇기에 디모데는 어머니에게 배운대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행 16:2). 이처럼 유니게는 신앙의 유산을 디모데에게 물려주었던 훌륭한 어머니였습니다. 

   

3. 신앙을 물려받은 아들 디모데

  유니게는 디모데에게 튼튼한 몸이나 많은 재물이나 좋은 혈통을 물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 없는 신앙을 디모데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 디모데는 어머니의 사랑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까지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보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디모데와 바울을 만나게 하셔서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디모데의 신앙을 점차 성숙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선교에 동참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행 16:1-3). 하나님의 축복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디모데가 사역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고전 4:17; 딤전 1: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디모데를 바울의 뒤를 이어 초대 교회의 기반을 잡은 중요한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배우기>

  우리 나라에선 아직도 자녀에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물고기를 잡아서 주려고 하는 부모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도 그 재산을 다룰만한 능력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할 가치관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 재산은 오히려 독이 되고 타락의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가치관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바른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흔들리지 맙시다. 유니게가 디모데에게 신앙을 물려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을 물려줍시다. 그러면 그 자녀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결코 줄 수 없는 것들까지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신앙을 물려받은 자녀에게 주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사랑하는 자녀를 품에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한 후에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미래에 좋은 부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69과 삶이 변화된 여인 - 사마리아 여인


<말씀> 요한복음 4:25-30

  사람에게는 변화를 피하려는 본능인 항상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던지 원하지 않던지 우리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불과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변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의 변화가 발전적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나아가서 우리 이웃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요? 오늘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의 삶을 변화시킨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그 답을 생각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여인은 말 그대로 유대인에게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요 4:9). 게다가 남자가 아니라 여인이었습니다. 보통 여인도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들로부터 어떤 만족이나 안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남편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요 4:17). 이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가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소외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엔 희망의 싹조차 자라고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녀 스스로도 사람들의 멸시를 벗어나고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피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무더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가에 왔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께서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유대인이요 남자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것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요 4:7). 이 같은 관습을 뛰어넘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물꼬를 틉니다. 가장 기초적인 욕구인 갈증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육신의 갈증을 시작으로 예수님은 점차 사마리아 여인의 고독과 소외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영적인 갈급함으로, 대화의 주제를 넓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이야기 하셨습니다(요 4:14). 사마리아 여인은 비록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이내 남편 이야기를 통해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갑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낯선 유대 남자가 아니라, 선지자로 고백합니다(요 4:19). 이후 두 사람간의 대화는 예배, 즉 영적인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을 이 여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같은 점진적인 대화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3. 예수님을 알린 사마리아 여인

  사람들을 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 소식을 알리려 사람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달려간 사마리아 여인은 “내 과거의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고 외치면서 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렸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요 4:30). 그녀의 노력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청했습니다(요 4:40).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요 4:41).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의 구주를 믿는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요 4:42).

 

<배우기>

  소외된 삶을 살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물동이까지 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구원의 역사를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네 사람들 역시 사마리아 여인이 변한 것처럼 자신도 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가 상처에서 허덕이는 사람이 아닌 적극적이고도 힘찬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상처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길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변합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삽시다.


<적용하기>

1.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속상하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도 하나님께 받은 다른 은혜를 생각하며 미소지어봅시다.

70과 삶의 초점이 바뀐 여인 -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

                                          

<말씀> 마태복음 20:20-28; 27:56

  늘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땅만 살피며 사는 사람은 동전 몇 개는 주울 수 있지만 푸른 하늘은 보지 못합니다. 자기 속에 시선이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고 포용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지경을 넓히기는커녕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은 삶의 방식과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에 따라서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서 관심은 달라지곤 합니다. 세베대 아들들의 어머니라고 성경에 소개된 살로메는 예수님을 만나 시선이, 관심사가 그리고 삶의 초점이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의 초점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세속적인 관점의 여인

  세베대의 아들들이라고 본문에서 표현된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두 제자의 어머니는 요즘 말로 하면 치맛바람의 원조쯤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생계였던 어부 일을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두 아들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두 아들들의 출세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두 아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 합니다 (마 20:20-21).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두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과 가르침, 그리고 대중들의 반응을 본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서 한 가닥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답변을 들려주셨습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마 20:22).


2. 말씀으로 변화되는 여인

  이들의 무모한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이들과 제자들에게 인자의 사명에 대해 가르치십니다(마 20:26-28). 곧 섬기는 사명, 고난과 십자가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박한 심정으로 섬김과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듭되는 가르침과 교훈 속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식들의 출세만 바라던 그녀의 관심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기심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으로, 자기 자식들만 위하던 좁은 마음이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던 욕심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3. 순교자의 어머니가 된 여인

  기세등등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숨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몇몇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따르며 슬퍼했습니다.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그들이었습니다(마 27:55-56). 이들은 후에 예수님의 무덤에도 동행했습니다(눅24:1-12).

  살로메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비로소 그가 말했던 “내가 마시려는 잔”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 잔을 마시겠다고 성큼 대답했던 자신의 무지를 뉘우쳤습니다. 삶의 초점이 바뀐 이 여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안타까움과 슬픔을,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소망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세속적 영광을 구하려던 그녀는  순교의 제물로 드려진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초대교회 위대한 사도의 어머니로 남게 되었습니다. 


<배우기>

  우리는 때론 자신의 삶의 울타리 안에서 제한 된 삶을 살아 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울타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한 계단 뛰어오르면 이미 그곳에는 차원 높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갖고 봉사를 결심하고 나면 이미 그 봉사의 보람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로메는 이제 초점이 달라진 눈으로 예수님이 마셨던 잔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잔은 쾌락의 잔이 아닌 고통의 잔이었습니다. 영광의 잔이 아닌 멸시와 수치의 잔이었습니다. 출세의 잔이 아닌 십자가의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삶의 초점이 달라진 이 여인은 기꺼이 그 잔을 마십니다. 당신 앞에는 어떤 잔이 놓여 있습니까?


<적용하기>

1. 하나님께 자신의 좁고 편협 된 삶의 시각에서 벗어나 말씀 안에서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폭 넓은 삶의 시각을 가지게 기도해봅시다. 

71과 이렇게 기도하라

                                          

<말씀> 마태복음 6:5-13

  마틴 루터는 주기도문을 가리켜 기도의 ‘순교자’라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주문처럼 외우는 기도가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은 우리가 모임을 마칠 때 마무리하는 형식적인 기도문이 아닙니다. 초대 교부인 터툴리안이 말한 것처럼 주기도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잘 압축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부터 주기도문에 나타난 주제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주기도문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속으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 또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 주의하여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라고 말씀하신 후에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십니다.


1.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점

1)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5-6절) - ‘외식하는 자들’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으며,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당’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개인적 관계인 기도에서조차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였으며, 그들의 기도는 한낱 인본주의적 종교의식에 불과했습니다.

 

 2)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기도하라(6상) -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은밀하게’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곧‘하늘에 계신 아버지께’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인 교회나 공공장소에서 기도할지라도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바라보고 진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면 그것이 곧 골방기도요, 은밀한 기도입니다.


 3)중언부언하지 말라(7절) - 중언부언이란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방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는 종교적 열심의 표현으로서의 기도가 아닌 의미 없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염불이나 주문처럼)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나 혼자 만의 독백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나누는 대화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통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아버지께 묻고, 듣고, 자신의 뜻을 아뢰는 것이어야 합니다.  

2. 주기도문 


 1)구조 살피기

   가) 기도의 대상-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

   나) ‘하나님’청원-당신의 이름, 당신의 나라, 당신의 뜻(9-10절)

   다) ‘우리’청원- 일용할 양식, 죄 사함, 시험과 악에서 구원(11-13절)

   라) 송영-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


 2)내용 살피기

 청원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 과 관련된 부분이 있고 그 뒤에 ‘우리’와 관련된 부분이 있습니다. 전반부의 ‘하나님’ 청원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송영과 더불어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한 주기도문에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도 들어 있습니다. 후반부의 ‘우리’ 청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청원에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육적인 필요에서부터,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 영적인 필요까지, 인간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망라되어있습니다. 즉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필요에 이르기 까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청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교회)에게 이루어져야 할 것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는 단지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때로는 내 아픔을 이야기하고 나의 소원을 아뢰기도 하겠지만,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 분의 성품들을 우리 마음에 되새길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고 담력을 얻습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가 조화롭게 담겨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로 날마다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가십시오


<적용하기>

1. 우리 기도가 우리 자신의 간구에 너무 많이 치우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향한(하나님영광, 나라, 뜻) 기도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72과  하늘의 계신(기도의 대상Ⅰ)


<말씀> 마 6:9-13

  지난 주에는 주기도문의 서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번 주에는 주기도문의 본론에 들어가서 기도의 대상 첫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하늘에만 계신 분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즉 ‘땅’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늘에 계신’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본문 속으로>

1.  이 세상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뿐만 아니라 이 땅에도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있어서 미지의 세계, 초월의 세계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하늘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주에 한정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능히 구원할만한 능력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2.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위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낮고 낮은 땅에도 계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은 가장 비천하고 낮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가운데도 함께 계십니다. 요한복음의 제일 첫 장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시다는 고백은 하나님께서 늘 인간의 삶 가운데 함께 계시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우라노’라는 표현은 두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서는 단수로 사용되며, 이때 하늘은 일정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오늘 공부하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에서는 복수(하늘들-우라노이스)로 사용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즉 삼층천의 모든 하늘을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경외와 신뢰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

  하나님은 예배와 경외의 대상입니다. 신뢰와 존경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고백에는 하나님이 경외의 대상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에는 하나님은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우러러 바라볼 분’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품어야 할 온전한 마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나는 (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     )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7:7).

 

<배우기>

  여러분은 지금까지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해 왔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셔서 세상 그 어떠한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까? 또 그러한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 곁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 이제 경외와 신뢰를 가득 담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기도하는 자세가, 기도하는 방향이, 기도하는 목적이 달라질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위에서 배운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의미를 이해하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73과  우리 아버지여(기도의 대상Ⅱ)


<말씀> 마 6:9

  주기도문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주기도문은 기도가 공식적으로 딱딱한 것이라는 선입관을 깨뜨립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부르듯 그렇게 자연스럽고 친근한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본문 속으로>

1.  ‘아바 아버지’ 이신 하나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첫 번째 만나는 단어는 바로 ‘아버지’입니다. 원어로는 ‘아바’(Abba)입니다. 이 ‘아바’라는 표현은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즉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이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를 가장 친밀하게 부르는 표현이 ‘아바’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빠’라는 말이 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를 때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다감합니까? 주님은 이렇게 친밀하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우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라는 부름 속에는 그 이름을 부르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즉 교회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교회를 염두에 둔 기도여야 합니다. 교회, 형제자매들이 항상 우리 기도의 관심사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동시에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위한 기도와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완전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아버지라는 말이 좋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아버지들은 불완전하며 도리어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불완전한 아버지와는 다른, 우리가 기대하는 완전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완벽한 아버지. 죽은 아들을 살리신 전능하신 아버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전능하시고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서 부족하신 것이 없으며 우리에게 없어서 못 주실 것은 없습니다. 인간 아버지가 아니라서 우리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법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우리의 죄악을 아십니다. 아실뿐만 아니라 치료하시고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만 주고 싶어 하시고,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사랑 많으신 아버지입니다.


<배우기>

  우리의 기도 대상이 되시는 분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부요함을 자녀인 내가 상속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모자람이 없는 그 하나님의 부요함을 내가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요함을 쓸 수 있게 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기도는 나와 ‘우리’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또한“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상처주고, 무능력한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의 모든 것을 아시며 도와주시는 완전한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사랑 많은 이 아버지를 진실한 마음으로 불러봅시다.

  

<적용하기>

1. 위에서 배운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 즉, “아빠, 우리의 아버지, 완전한 아버지”라는 의미를 생각하며 나의 기도에 적용해 봅시다.

74과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말씀> 마 6:9

  우리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처음 하는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입니다.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이름이 영광을 받으신다’,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당사자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을 통해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은 대상을 부르기 위한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한 존재의 인격과 가치를 나타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엘로힘 등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을 섬기던 개인이나 집단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했습니다(출3:14). 그 외 하나님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창22:14).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승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 거룩과 신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경외하며 찬양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들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2.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생활, 고백, 그리고 우리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이름이 참으로 거룩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거룩해집니다. 시편33편21절에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알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요? 위대한 사상가  파스칼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십니까? 혹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대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의하여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방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전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로마서 2장24절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이 엄청난 경고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도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경고가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생활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마5:16).


<배우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길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거룩한 삶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때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여김을 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적용하기>

1. 나의 삶과 생활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이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드리기로 결단해봅시다.

75과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

<말씀> 마 6:10

  두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지극히 내세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제한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에서는 좀 더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도의 의미와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늘나라”라고 하면 제한된 공간의 어떤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말씀 하신 하늘나라는 단순히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어떤 장소라기보다 어떤 상태입니다. 주님이 통치하시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지도자의 통치 권한이 미치는 범위, 그 영역을 가리켜 대한민국 이라고 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거침없이 나타나는 장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믿은 개인의 마음과 그 마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삶의 가치관이 바뀌고 내면의 변화가 넘쳐나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가정의 주인이 예수님처럼 되어 살아갈 때 그 가정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사회, 이 나라, 이 세상 곳곳에서 예수님이 삶의 주인이 되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원어 성경을 토대로 하여 다시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온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 세상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침투하여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부터 이 땅으로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이 죄 많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임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단순한 기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대한 우리의 책임을 말해 줍니다. 이 책임을 어떻게 순행합니까?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전파와 함께 확장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최대의 사명은 곧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전하십시오.


<배우기>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각종 질병, 기아, 공해,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 주님의 다스림으로 새로이 변화됩니다. 어둠의 권세가 궤멸되고,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며, 부정과 부패가 난무한 곳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새로이 세워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지평은 매우 어둡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는 그 어둠의 지평 저편에 환하게 동터오는  새날을 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적용하기>

1.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합시다. 나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영광의 통로로 사용 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76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말씀> 마 6:10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 번째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함께 살펴보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알아봅시다. 


<본문 속으로>

1.  하나님의 뜻은 영혼구원과 성도의 거룩한 삶에 있습니다

   ‘뜻’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델레마’로 영어의 ‘will’, 즉 의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지를 의미하며 성취를 지향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기 원하시며, 또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들도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의 성취에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39절에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며,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 가운데 으뜸은 우리의 영혼구원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합당한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거룩하다’의 의미는 구별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2.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의 성취)

1) 기도해야합니다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 사회, 즉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늘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고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 적용, 복종되는 하나님의 사회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현실과 땅의 현실은 다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처한 현실은 하늘의 현실과 얼마나 다릅니까? 이 세상과,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차이가 없어질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자기를 부인해야합니다

  “땅에서도..이루어지이다”는 하늘나라의 이상이 이 땅에서도 성취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죄인들에게 거절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는 혼란과 오류와 갈등과 수많은 어둠이 깔리고 있습니다. 지구 역사의 혼돈과 사람 마음 속의 온갖 갈등의 가장 깊은 원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며, 순종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방식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도 ‘나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뜻’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통해서 제자의 완전한 자기부인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배우기>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려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 가운데 소원을 두고 행하고 계십니다(빌2: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되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불가피했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기부인의 진정한 제자의 삶을 살아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적용하기>

1.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직장)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생각하고 결단해봅시다.

77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말씀> 마 6:11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기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이고, 뒷부분은 ‘우리’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우리는 앞의 세 가지 간구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에 관한 부분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에 관한 부분에는 우리의 먹을 양식, 죄, 시험, 악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제일 첫 번째로 나오는 기도는 “양식을 주옵소서”입니다. 그만큼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기도내용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까? 함께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1)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그 날에 족한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기도의 가르침을 통해 매일 매일의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는 마음을 경계하도록 하셨습니다.

 2)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갖기 원하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그 날에 꼭 필요한 만큼만을 모으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모았다가 만나가 썩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 즉 내 삶에 꼭 필요한 것들 이상을 탐하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3)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는 일용할 양식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양식을 주옵시고

 1)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식에는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모두 포함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당시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육의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양식은 먹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앞의 세 기도 제목대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양식을 위한 이 기도는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위한 간구도 포함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여 갈라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과 육이 합쳐진 온전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서는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육의 양식을 구하라는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먼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시고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마4:4).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의 양식과 연결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양식과 더불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배우기>

 예수님은 가난으로 굶주린 백성들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탐욕스러운 자들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도 담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이상을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통해서 나의 양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양식을 나누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순히 육의 양식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영의 양식도 함께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육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도 애써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경건과 예배를 통해, 봉사와 나눔을 통해 우리는 영의 양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영의 양식을 구함으로 육과 영이 함께 건강하고 성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적용하기>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또한 당신은 영의 양식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78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말씀> 마 6:12

  영국의 유명한 기독교 문학가인 C.S.루이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구도 정신을 상실한 시대’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 중의 하나로 현대인들이 더 이상 죄를 향한 진지한 접근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오늘날 ‘죄악’이라는 단어는 실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며, 죄를 극복하기 위해 눈물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날마다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주님의 기도를 통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갑시다.      


<본문 속으로>

 

1. 죄인임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범죄하고 있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죄라는 단어는 본래 빚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빚, 그런데 갚지 않고 있는 빚들-우리가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할 빚이 있음에도 갚지 못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죄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17절에서 야고보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교회를 향해, 이웃을 향해, 가족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온갖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빚이며 성경은 그 빚들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2. 죄를 자백하는 기도입니다

  칼빈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는 것은 갚아야 할 빚을 갚고 있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마틴 루터는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겸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용서와 죄의 반복만을 거듭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자백을 포기함은 더 큰 범죄 속에 빠지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발을 씻어도 또 다시 더러워진다고 아예 발 씻음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발을 계속해서 씻을 때 우리는 깨끗함의 필요성과 계속해서 깨끗해져야 하는 자기 인격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백은 영혼을 청결히 보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요일1:9).


3.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죄짓는 사람은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다시 풀어서 쓴다면 이렇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제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를 용서하신 일 때문에 제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거기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과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타인을 용서하는 자가 자신의 죄 용서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

  독일의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은 유명한 ‘코리 텐 붐’여사는 전후에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닿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고 예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찾아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그녀에게 손에 입 맞추며 다가갈 때, 가까이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니 포로수용소에서 그녀의 옷을 벗기며 채찍을 가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언니는 그 남자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 그녀가 받았던 조롱을 생각할 때 그녀의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의 진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나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는 것을 믿나이다. 주여! 믿나이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영혼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그녀는 새로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달았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는 엄청난 환희의 순간이었다고 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용서 받는 삶 그리고 용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적용하기>

1. 용서하기 힘들었던 사람을 용서한 후 받은 은혜와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79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말씀> 마 6:13

  마틴 루터는 잠들기 전에 항상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를 드렸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루터가 드렸던 기도는 끊임없이 유혹이 밀려드는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노력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문을 가르치심으로 우리에게 유혹을 이길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 위한 시험과 악에 대해 알아봅시다.

       

<본문 속으로>

 1.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시험(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교육적 의미의 시련(test,traing)이 아닌 파괴적인 시험(temptation)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피해야 하는 시험으로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F. B. 아이어 라는 설교가는 “하나님은 우리를 오르게 하기 위해 시험하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내려가게 하기 위해 시험한다”고 말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에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며 무모한 짓에 불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란 기도의 가르침은 바로 이 시험에서의 해방과 보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이 시험이 초래할 수 있는 깊은 파괴와 타락과 어두운 상황의 미궁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길 바라는 보호의 기도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서 하나님은 파괴적인 의미에서, 그 사람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누구에게도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시험은 오직 마귀에게로부터 옵니다.


2.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다만”이란 말은 “그러나” 혹은 오히려 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러나(오히려)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시 풀이하면 “하나님 내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을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악”은 악한 존재 즉 사탄(Satan)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이시여 나를 악한 자, 사탄에게서 구원해 주시옵소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파괴적인 시험의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사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인간의 약점을 알고 이 약점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즉 유다의 돈을 사랑하는 약점, 삼손의 여인을 사랑하는 젊은 정욕, 베드로의 큰소리치는 기질, 롯의 물질 사랑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약점을 통해 사탄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적인 유혹, 인터넷의 유혹, 돈의 유혹, 권세와 명예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악에서 건져주시기를, 죄를 짖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족들과 그리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 모두 함께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우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유혹에 빠뜨리며 죄를 짓게 하며,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 유혹을 이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하셨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심으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활가운데는 온갖 유혹과 악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자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날마다 영적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악과 악한 자들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통해 유혹을 이기고 악과 싸워 승리하는 능력의 신앙인으로 자라 가십시오.

 

<적용하기>

1. 지금 당신에게 사단으로 하여금 시험(유혹)의 빌미가 되는 약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점검해 보고 시험과 악에서 구하기를 기도 합시다 .

80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말씀> 마 6:13

  드디어 주기도문의 마지막 내용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배우는 내용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 살펴본 기원과는 달리 ‘송영’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송영을 찬송으로 부릅니다. 주기도문의 송영은 기도문으로 되어 있으며,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주제는 나라, 권세,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송영에 담긴 뜻은 무엇입니까? 주기도문의 송영에 담긴 뜻을 함께 살펴봅시다.

       

<본문 속으로>

 1. 나라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고자 하시며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왕으로 모시어 주님 앞에 참으로 복종할 때 하나님의 왕국이 이룩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국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이 나라의 번영이 아닌 한층 더 차원이 높은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그리스도께 속한 나라로 복음화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메시야왕국을 대망하며 왕국의 건설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알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광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정치적인 공권력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때로는 인권을 유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송영의 이 ‘권세’는 세속적인 힘과는 다릅니다.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주님께만 의존하여 인생을 살고자 할 때 그는 그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부활의 능력이 역사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출구를 제시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당시 교황의 법정 재판전날 부패한 가톨릭의 거대한 세력에 맞서서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실망과 좌절로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가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를 구원한 것은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은 경험을 찬송가 384장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인격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권세와 능력이 부활의 힘으로부터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는 곳에 그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 땅에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며 그리스도의 이적과 인격, 그의 생애는 하나님 영광의 결정체였던 것입니다. 죄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현재 불신의 역사는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물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이 오기까지 그 영광이 주님께만 영원히 있음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기>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도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엇을 구하며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망설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배운 주기도문을 통해 이와 같은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주기도문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이 이 기도를 드릴 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하게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마침내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리고,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헌신의 결단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예수님을 닮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신실한 성도들로 자라 가십시오.

 

<적용하기>

1. 지금까지 주기도문의 가르침을 통해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기도생활에 어떤 부분을 보완하고 적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