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과 그리스도인의 구제


<말씀> 마태복음 6:1-4


<본문 속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 생활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구제, 기도,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 어떤 동기로 의(구제)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까? 


  2.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구제의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3. 구제의 대가는 누구 갚아 주십니까?


  유대 전통 가운데는 구제의 행위와 의를 행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특히 구제는 종교법에서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행하는 자는 그 덕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구제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도 잦고, 허식의 주제도 많았습니다. 본래 ‘외식’이란 ‘배우’의 뜻으로 ‘하는 체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기>


1. 구제 동기

  예수님께서 구제를 함에 있어 은밀히 하라고 강조하신 이유는 우리가 자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구제하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제의 진정한 동기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우리를 구제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제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책임감과 의무감, 자기 영광을 위한 구제가 아니라, 정말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함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구제, 기도가 함께 가지 않는 구제는 바른 구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구제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구제하는 자에게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제를 즐거이 하는 자는 나누어 준 것보다 더 풍족하게 채워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눔으로 발생하는 가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문제인 것입니다. 비워짐 이상의 채우심을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는 이상 우리는 구제함에 있어서 아까움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은밀히 구제한 자에게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실 뿐 아니라, 나누는 것의 기쁨을 우리의 심령 가운데 허락하심으로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홀트 아동복지단체를 만든 해리 홀트는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32년 전 한국전쟁이 막 끝나가던 해 가을 무렵, 미국의 오래곤주 유게네 마을회관에서는 종교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영화는 종교영화라고 하기보다는 한국전쟁이 낳은 고아들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들을 보살펴 줄 손길을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끝이 났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그 영화를 본 한 농부 부부도 그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농부인데, 우리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런데 그 날 이후 이 부부에게는 날이 갈수록 그 영화의 내용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땅을 일부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전쟁 혼혈 고아 8명을 데리고 돌아와 성심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실려 알려지자 여러 곳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연락이 왔고, 또 혼혈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오자 그들은 보람을 느끼며 전적으로 이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가 바로 홀트 아동복지단체를 만든 해리 홀트입니다.


1.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제가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목장에서 은밀하게) 이야기해 보시고, 그 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보십시오.

 

 *다음주 공부: 제22과 그리스도인과 환경, 사11:6-9

22과 그리스도인과 환경


<말씀> 이사야 11:6-9


<본문 속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어울려 하나가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1. 6절의 그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예수님의 초림 때   (2) 성령이 오실 때    (3)예수님의 재림 때  


2. 어디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3.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이가 나오는 것을 빼고는) 타락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린 양, 염소, 송아지, 암소 같은 약한 동물과 이리, 표범, 사자, 곰 같은 강한 짐승이 함께 어울어지는 모습은 자연과 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어린 아이와 독사가 장난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화해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아담과 하와이 관계는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신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미움과 시기와 살인과 전쟁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는 인간이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자연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땅은 엉겅퀴를 냄으로 인간을 괴롭힐 뿐 아니라, 인간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자연을 훼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물, 대기, 소음 등 모든 환경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볼 때 환경 문제는 단지 보여지는 현상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즉 성경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서만 창조세계를 온전케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배우기>


1.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오해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28-29의 말씀(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을 들어서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서 착취와 억압, 파괴의 주범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배의 개념은 봉사의 다른 형태입니다. 다스림은 보호, 수호, 보전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을 지키며 가꿀 것을 명하시는 것입니다.


2. 청지기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우리를 통하여 통치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맡은 청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파괴된 것처럼, 청지기로서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 본문에서 공부한 것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화평을 일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적용하기>


일: 일회용품을 쓰지 맙시다.

이: 이용합시다. 버스나 전철을.

삼: 삼갑시다. 합성세제 사용을.

사: 사용합시다. 중고용품을.

오: 오늘도 물, 전기를 아껴 씁니다.

육: 육류를 줄이고 옷은 검소하게 합시다.

칠: 칠일 째는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도록 삽시다.

팔: 팔지 맙시다.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에 마음을 팔지 맙시다.

구: 구할 것은 ‘작고 단순한 것’, 멀리할 것은 편하고 빠른 것‘

십: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겸손합시다.

십일: 십시일반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십이: 십이 개월을 성실히 신앙 생활합시다.


1. 위의 내용은 ‘기독교환경운동 연대’라는 단체에서 펼치는 ‘12가지 생활지침’입니다. 위의 내용을 참고하여 내가 환경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는 지 이야기 해 보십시오. 

 

 *다음주 공부: 제23과 그리스도인의 인격, 엡4:13-15

23과 그리스도인의 인격


<말씀> 에베소서 4:11-15


<본문 속으로>


1. 본문에서는 성숙한 사람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2.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3.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권면하고 있으며, 어떻게 자랄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그리스도의 교회(에베소 교회)는 서로 사랑함으로 참된 것을 하여(복음의 진리를 말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위하여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과 일치를 강조합니다.

  우리 인격의 완성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학습이나 수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한영교회와 가정교회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으로 행하며 진리로 권면하며 나아갈 때 함께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배우기>


1. 믿음과 인격

  우리가 말하는 인격이란 청렴한 선비나 매너가 좋은 신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즉 죄로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가능한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참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들인다는 것은 구원의 시작임과 동시에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새출발입니다.


2. 인격 성장과 교회

  인격 연마는 산에 들어가 도를 닦듯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혼자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 성장은 교회 안에서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 성장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교회 성도들의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 생명의 삶을 비롯한 앞으로 진행될 삶공부들(새로운 삶, 경건의 삶, 제자의 삶,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등)은 여러분의 인격 성장을 격려하고 도전할 것입니다.

  가정교회의 목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수님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하여, 예수님 닮게 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목장에서의 기도와 섬김은 목원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보고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지금 나의 성품 중 그리스도의 성품과 닮은 것은 무엇이며, 부족한 점은 어떤 것입니까?


2. 믿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소망은 그리스도를 닮아 온전한 인격으로 자라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읽을 거리>


다이아몬드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네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투명도’입니다. 보석과 사람은 맑음의 정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둘째는 ‘무게’입니다. 가벼울수록 다이아몬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셋째는 ‘색깔’입니다. 가치있는 보석일수록 신비한 빛을 발합니다. 인간의 삶에도 나름대로의 빛과 향기가 있습니다.

넷째는 ‘모양’과 ‘결’입니다. 보석은 깎이는 각도와 모양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가치 있는 사람은 주위를 향해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이아몬드가 지닌 네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참다운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그분의 피로 씻음을 받고 그 분의 손길로 빚어질 때 비로소 ‘걸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24과 열매가 있습니까?


<말씀> 누가복음 13:6-9


  과수원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과수원에 가 보았다면 배나무, 포도나무에 종이 봉지를 씌워 놓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나 벌레가 먹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농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실과가 될 만한 것들에 봉지를 하나씩 정성스럽게 잘 씌워 주었습니다.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가지치기며 어느 것 하나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기대에 차서 봉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열매가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실 때 기대하시는 것은 열매입니다.


<본문 속으로>


1. 포도원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2. 포도원을 찾아온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가 화가 난 이유,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3. 이때에 포도원을 지켰던 또 다른 등장인물의 대답은 무엇입니까(8-9절)? 그가 요청한 시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4. 두 등장인물은 각각 누구를 비유한 것입니까?

  

5. 본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로 대답해 보십시오.



<배우기>


  ‘열매’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52번 나옵니다. 이 ‘열매’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를 통해 열매라는 단어를 20번이나 사용하시면서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믿음의 사람이 ‘나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과실나무와 같이 열매 맺는 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과실나무는 꽃을 보기 위해서나 재목으로 쓰기 위해서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열매를 위해 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과수원 주인이 과실나무를 심고 열매를 기대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열매는 맺어도 되고 안 맺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나무가 아닌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신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말 그대로 ‘무화과’나무입니다. 꽃을 보기 위한 나무가 아니라 열매를 보기 위한 나무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언론인이며 무신론자였던 마가릿지는 인도의 캘커타를 여행하면서 그곳에 있는 테레사 수녀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테레사 수녀가 그곳에서 많은 환자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목격한 후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한 인간의 생애를 그토록 헌신케 하겠습니까? 자기를 버리고 온전한 헌신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한 신앙인의 열매를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신 일이 있습니다(마 21:19-21).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고자 하셨으나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때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저주는 단순히 무화과나무를 향한 저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너희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보기에 화려한 ‘꽃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찾으셨을 때 기뻐하시는 ‘열매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적용하기>


1. 예수님 믿기 전과 비교해서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에게 일어난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19-24, 열매 맺는 힘>

25과 열매 맺는 힘


<말씀> 갈라디아서 5:19-24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 원문을 보면 아홉 가지 열매 사이에는 ‘과’나 ‘와’ 같은 조사가 없습니다. 이 말은 아홉 개의 열매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할 때, ‘일체구면’(一體九面)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열매가 하나 맺혀지면 나머지 열매들도 함께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들은 어떻게 맺어지는 것일까요? 오늘은 무엇으로 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투, 행동, 차림새 등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 모두를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참 믿음의 소유자인지 알겠습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스도인 됨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매우 명쾌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지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그리스도인 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열매에 달려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근본을 알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말씀을 읽게 됩니다. 본문은 모두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열매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본문을 둘로 나눈다면 몇 절에서 나눌 수 있습니까?


2. 오늘의 말슴을 이해하려면 갈라디아서 5장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큰 선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선물은 무엇입니까?


3. 이 선물을 받은 자는 위에서 말씀하신 “(   )의 멍에”를 매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갈 5:13)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에 속한 사람은 어떤 일들을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19-21절)


5. 22-23절에는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아홉 가지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홉 가지를 빼고, 앞 뒤를 이어 붙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금지할 법이 없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배우기>


  사람은 누구나 열매를 맺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가 어떤 열매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육체에 속한 사람들은 “음행, 더러운 것, 술수, 분쟁, 시기 등” 많은 혼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는 어떻게 맺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으로 맺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함은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살아 움직이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만이 열매를 계속해서 이루어가게 하시는 능력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징은 크기, 부피,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희락의 사람으로, 화평의 사람으로 ---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7-8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역시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적용하기>


1. 아직도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19-24, 열매 맺는 힘>

26과 사랑 1


<말씀> 마가복음 16:1-6, 마태복음 22:37-38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가장 먼저 나온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사랑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속으로>


  예수님께서 성경 전체의 진리를 두 마디로 요약해서 가르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태보음 22:37-38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리고 이 말씀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믿는 사람의 행동 강령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먼저 나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의 이야기입니다.


1.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1절)


2. 그들은 무엇을 준비해 두었습니까?


3. 그들은 언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또, 이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2절)


4. 그들에게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 염려는 무엇이었습니까?(3절)


5. 그들의 염려는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4절) 그리고 누구를 만나서 어 떤 소식을 듣게 됩니까?(5-6절)



<배우기>


  사랑하면 우리는 이 땅의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큰 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 자체이시면서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간곡한 부탁을 하시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 13:34)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으면 보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사랑이 가능합니까?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여인들은 비록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여인들은 주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향품을 준비하여 그분 곁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사랑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인 ’부활‘ 사건에 첫 목격자로 설 수 있게 만든 동기였습니다.


<적용하기>


1. 마음이 가는 대상과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사랑입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과 어떻게 가까이하기를 원하십니까?


<눅 10:30-37, 사랑 2>

27과 사랑 2


<말씀> 누가복음 10:30-37


<본문 속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은사가 다 나와 있습니다. “능력 행함, 예언함, 영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고전12:10) 등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소유했으면 하는 성령의 은사가 줄지어 나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결론은 어떤 은사, 어떤 삶의 태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도 제일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고전13:13). 


  본문은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두 번째 큰 계명인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로 주신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은 한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라고 질문하였을 때 그 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결과는 ‘영생’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1.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도중에 어떤 일을 당했습니까? 그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30절)



2. 31절과 32절에서는 두 사람이 길을 지나가게 됩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31-32절)



3. 세 번째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이 사람은 유대인과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까?(33절)



4. 세 번째 나타난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어떻게 했습니까? 그가 행한 일을 낱낱이 적어 보십시오(33-34절).


5.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고 물으신 이후 대답하는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37절)



<배우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한 인간을 향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향해서 자신의 몸을 움직여 나갑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사랑으로는 세상을 살릴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행함이 있는 믿음”(약2:17)을 통해 열매가 맺혀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종교적 열심을 통해서 알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행동으로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이 진짜 사랑의 열매가 영생의 복을 입게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적용하기>


1. 현재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빌 4:4-7, 희락>

28과 희락


<말씀> 빌립보서 4:4-7


  웃음이 담긴 짧은 글이나 이야기만 들어도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우리 몸은 수백억 개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자의 가운데는 핵이 들어 있고 바깥쪽에는 전자들이 끊임없이 돌면서 생명의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크게 웃을 때 이 전자 운동은 급격히 빨라지면서 몸에 좋은 에너지를 무수히 만들어 내고, 그 에너지가 저항력이 되어서 암세포도 죽일 수 있는 강한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방긋 웃기만 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의 시작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는 ‘기쁘다’는 말이 16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순교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의 편지 한 구절마다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희락’의 헬라어 원어는 ‘카라’(chara)입니다.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경 3곳의 말씀을 통해 참 기쁨의 의미를 발견해 봅시다.


1. 사도행전 16:19-34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가운데 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결하려는 간수를 붙잡고 바울이 전한 말씀은 무엇입니까?(행 16:31) 간수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까지 크게 기뻐하는 역사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행 16:34)


2. 무너진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한 느헤미야는 수문 앞 광장에 백성을 모으고 학사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아멘 아멘”(느 8:6)하며 그 말씀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울지 말고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느 8:10)고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느 8:10)


3. 빌립보서는 우리의 기쁨이 단 한 번에 그치는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일회성 기쁨이 아닌 계속되는 기쁨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빌 4:6)


<배우기>


  여러분은 "천지창조"란 아름다운 오라토리오를 쓴 하이든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한 번은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음악은 항상 그렇게 경쾌하기만 합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나는 달리는 작곡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느끼는 생각에 따라서만 노래를 지으니까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내가 쓰는 음악의 선율은 춤을 추고 내가 든 펜이 기뻐 뜁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참으로 기쁜 마음을 주셨기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당신은 기쁨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의 상태인데 어떻게 계속적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조건이 있을 때에만 기뻐합니다. 좋은 물질이 생기면, 합격하면, 승진하면... 등의 좋은 조건이 생길 때에만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른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항상 기쁘다’는 것은 기쁨이 솟아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태양이 있을 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늘 그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심령 상태를 의미합니다.


<적용하기>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 66:10-14, 화평>

29과 화평


<말씀> 이사야 66:10-14


  우리나라의 첫 인사는 “안녕하셨습니까?”입니다. 이 ‘안녕’에 해당하는 성경의 단어가 있으니 그것이 곧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이며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오늘날까지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무엇일까요? ‘샬롬’의 평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이며 개인적인 평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이며 세계적인 평화입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두 가지가 모두 완전하게 이루어진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재 당신의 모습 속에는 어떤 화평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땅에는 어떤 평화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을 품으면서 다음의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1. 로마서 1:29-32을 보면 평화가 깨어진 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롬 1:32)라고 불릴 만큼 악독한 자들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에게서 평화가 깨어진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롬 1:28)


2. 믿음의 사람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를 누가복음 2장14절에 나오는 천군 천사들의 합창 소리와 함께 들어보십시오. 이 찬송 소리는 무엇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3.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4.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서 66장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천천히 읽어 보면, 최후의 승리자를 어떤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까?(11-12절)


<배우기>


  오늘 본문에서 “슬퍼하는 자여”(10절)라고 부르는 자들은 바로 이 땅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평강을 강같이”(12절) 넘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가 충만한 그 자체입니다.

  그 평화를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12절),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1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품보다 더 따뜻한 품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의 품보다 더 아늑한 품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을 빨고, 잠을 자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소유할 자이며, 그 축복으로 오늘날 평안을 이루어갈 수 있는 피스메이커(peace-maker)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제대로 된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은 우리로 하여금 때로 염려병 환자가 될 정도로 많은 걱정을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목자에게 “평화로다”라고 들려준 천군 천사의 합창은 예수님의 탄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평화가 깨어졌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는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용하기>


1. 믿음의 사람인 당신은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평화의 4가지 방법을 참고하셔서 말씀해 보십시오.

(1) 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

(2) 많은 소유의 욕망을 포기하고 현재에 자족하라

(3) 항상 자신을 낮추라

(4)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다려라


2. 당신 주위에 분쟁이나 다툼이 있다면 어떻게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감당하시겠습니까?

<삼상 26:8-12, 오래 참음>

30과 오래참음


<말씀> 이사야 66:10-14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는 한국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이한 정신적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정신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해도 서양의 의술로는 효과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가슴통증과 소화불량, 때로는 호흡 곤란을 호소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 병이 서양 사람에게는 없는 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병명을 ‘Hwapyung"(화병)이라고 정식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이 질병은 유교적인 엄숙주의를 강요받은 사람들, 특히 한국 여성들 가운데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증세‘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도 오래 참아야 함을 배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화병에 걸리지 않을까요? 오히려 화병이 치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속으로>


  ‘오래참음’이란 어떤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있지만 그것을 인내하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환경이 언제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인내의 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그 원인이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남의 숨어 있다가 언젠가 폭발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질병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인내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다윗은 사울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는 어떤 힘으로 견뎌 나갈 수 있었을까요?


1. 사울은 끊임없이 다윗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엔게디 골짜기까지 쫓아온 사울이 동굴에 들어가 “그 발을 가리우러”(용변을 보려)했을 때(삼상24:3),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삼상24:4)


2. 사울은 다윗을 죽일 결정적인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는 하길라 산에서 자신의 군대 삼천 명과 함께 다윗을 수색하는 작업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밤에 잠들었을 때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사울의 진 가운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때 자고 있는 사울을 보고 다윗의 용사 중 하나였던 아비새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8절)


3. 아비새의 충성에 대한 다윗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다윗이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10-12절)



<배우기>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잇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혈기와 힘, 지략으로 충분히 사울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고 또 참았습니다. 자신이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참기만 했다면 그는 스스로 병에 걸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때로는 낙심되는 일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네 살까지 말을 못하고 일곱 살까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 선생님에게 “작곡가가 될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디슨을 가르친 선생님은 에디슨이 너무 바보라서 공부를 배우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아이디어가 없다고 신문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파스퇴르는 대학에서 화학 과목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가능성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지금 손을 놓고 있습니까? 어떤 괴로움이 당신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까? 다윗은 후에 왕위에 오름으로써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약1:4) 없는 멋진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역사를 당신도 이룰 수 있습니다.


<적용하기>


1. 야고보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인내의 결과로 얻었던 좋은 결과들이 있다면 이야기 해 보십시오.

<눅15:18-24, 자비>

31과 자비


<말씀> 누가복음 15:18-24


  자비는 ‘선함’, ‘너그러움’, ‘친절함’을 말합니다. 사랑의 큰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자비이기에 사랑, 양성과 잘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봄의 따뜻함입니다. 이 따뜻함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만물을 깨웁니다. 사람도 이 따뜻함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너그러움이 살맛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본과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납하셨음을 알고, 그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배웁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면 진짜 주인공인 아버지가 가려지게 됩니다. 이 비유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1. 비유의 시작인 누가복음 15:12에 보면 작은 아들은 매우 당돌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요구입니까?


2.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모든 재물을 낭비하게 됩니다.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 그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눅 15:15)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말해 보십시오.


3. 마지막 순간에 아들이 생각해 낸 것은 무엇입니까?(눅 15:17-19)


4.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작은 아들을 만나자마자 어떻게 했습니까?(20절)


5. 집을 나갔던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선언은 무엇입니까?(22-23절)



<배우기>


  둘째 아들은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아들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하여 모든 불경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매질을 하고 내쫓아도 시원치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그러움으로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크기와 넓이입니다.


  ‘노란 손수건’이란 이야기를 아시죠?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빙고’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석방되기 전, 아내에게 편지를 섰습니다. 그는 돌아가는 버스에서 승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아내에게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집 앞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달라고 편지에 섰습니다. 그래서 만약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 버릴 것입니다.”

  고향 집에 버스가 다다르자, 승객들은 모두 조바심 어린 눈으로 창문 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습니다. 참나무는 온통 노란 손수건 물결로 덮혀 있었습니다.20개, 30개 아니, 수백 개의 손수건이 바람에 마구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에 늙은 전과자 빙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자비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이 감동을 전하시겠습니까?

   

<적용하기>


1. 당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마25:31-40, 양선>

32과 양선


<말씀> 마태복음 25:31-40


  양선이란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베푸는 착한 행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선행의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전철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에서부터 자기의 전 재산을 헌납하여 학교를 세우는 일 등 모두가 선한 일에 속합니다. “도둑도 자신의 자녀는 도둑질하지 않고 착하게 살기를 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심지어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힘쓰는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본문 속으로>


1.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칭찬하셨습니까?(35-36절)


2. 의인들이 예수님의 칭찬을 듣고 자신들의 한 일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어느 때 그런 일들을 했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이 그 일을 누구에게 했다고 말씀하십니까?(40절)


3.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한 일을 심판할 때는 언제입니까?(31절)


4. 이런 선한 일들을 행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입니까?(34절)



<배우기>


  우리는 작은 친절이나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더 힘있게 선한 일을 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작은 호텔에 노부부가 나타났습니다. 그때는 행사로 인해 호텔마다 만원이었기 때문에 방을 구할 수 없었던 노부부는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텔은 이미 만원을 이룬 지가 꽤 되었습니다. 그때 호텔의 한 종업원이 “여기에도 객실은 없지만, 제 방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쓰시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의 방을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이 종업원의 친절을 눈여겨본 노부부는 다음 날 아침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는 바로 1천9백여 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소유주, 존 제이콘 아스터였습니다. 그는 작은 친절을 베푼 이 야간 종업원을 전격적으로 아스토리아 호텔의 총 지배인으로 삼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호텔 총 지배인보다도 더 나은 상급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보답을 생각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는 자는 참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적용하기>


1.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당연한 신앙의 큰 덕목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착한 일을 하라고 떠올려 주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실행하기 위해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삼상13:8-14, 충성>

33과 충성


<말씀> 사무엘상 13:8-14


  당신은 ‘충성’이란 단어를 어디서 많이 들었습니까?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군인들이 경례를 붙이면서 “충성!”하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이 ‘충성’이란 ‘진실된 마음으로 가득 찬 신뢰’(faithfulness)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원칙에 착 달라붙어 있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제복을 입는 이유는 전투에서의 위장과 군대의 일체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뜻을 품으면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사울의 모습에는 그런 일사불란한 마음, 자신의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군인의 모습이 있습니까? 왕이자 장수였던 사울의 실패를 통해 진정한 충성의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1. 믹마스에서 수많은 군대와 마병으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와 맞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황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삼상13:6-7)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기야는 사울에게서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어떤 명령을 내립니까?(9절)


3. 사무엘이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물었을 때 사울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대답은 옳은 대답입니까, 아니면 틀린 대답입니까?(11-12절)


4. 사무엘은 사울의 대답을 듣고 어떻게 대답합니까? 그는 사울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지적합니까?(13절)


5. 사울에게 내려진 저주는 무엇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찾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삼상13:14)



<배우기>


  사울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흩어지는 백성들을 모으려고 했고, 전쟁에 나가서 싸우기 위해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방법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없었습니다. 사울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알았지만 그것을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일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일에 비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링컨(Abraham Lincoln)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힙니다. 그는 17세 때 건축자재를 파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눈이 오는 어느 날, 한 고객에게 물건을 팔고 거스름돈을 주었는데, 오후에 계산을 해보니 35센트를 더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35센트를 들고 2마일이 넘는 눈길을 헤치고 그 고객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 낮에 제가 계산을 잘못해서 35센트를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당한 재력가였던 그 사람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를 보고 링컨의 정치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도움이 뒤따라왔던 것입니다. 무엇이든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때 세상의 상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적용하기>


1. 여러분 주위에 있는 성도 중에서 충성된 일꾼이라고 생각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어떤 점이 충성된 일꾼으로 불려질 만합니까?


<시편37:7-11, 온유>

34과 온유


<말씀> 시편 37:7-11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 온 다음날부터 수진이는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서울 깍쟁이, 서울 깍쟁이~”라고 놀려댔고, 특히 짝궁은 고무줄을 하면 다 끊어 버리고, 치마를 입고 온 날이면 “아이스케키~”하면서 달아났습니다. 수진이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엄마에게 학교가 가기 싫다고 때를 썼습니다. “엄마가 내일 학교 가서 잘 이야기할 테니 기다려.” 수진이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다려라 이놈! 넌 이제 혼났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쉬는 시간에 엄마가 오셨습니다. 엄마는 선생님에게 가지 않고 복도에서 짝궁을 만나더니 한쪽으로 가서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짝궁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 이후로 짝궁은 한번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궁금해서 엄마에게 물어 보자 엄마는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낮은 울타리“ 142호 중에서 축약)


당신이 수진이의 엄마라면 위의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수진이 엄마는 수진이의 짝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본문 속으로>


  ‘온유함’이란 모든 부드러움을 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단점을 참고, 그 사람의 성숙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다가가서 마음을 열도록 격려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온유만큼 강한 것은 없다. 진정으로 강한 힘만큼 온유한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어떤 악한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가운데 쓴 고백입니다. 얼마나 괴로운 지경에 있는지 “악인”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1. 먼저 악한 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역사를 이룹니까?(7절 중반절) 그런데 믿음의 사람에게 강력하게 권면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7절 초반절, 후반절)


2. 우리는 악한 자로 인해 평상의 마음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툰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8절)


3. 악한 자는 끝까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됩니까?(9-10절)


4. 악한 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대항하지 않은 자에게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온유함이 나약하지 않은 이유를 발견해 보십시오.(11절)


<배우기>


  예수님의 온유를 배웁시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에서 나옵니다. 내가 생각하고 대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함이 온유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적용하기>


1. ‘행복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 때문에 행복합니다’, ‘--- 때문에 행복합니다’라고 이유를 붙여 가며 기도합시다. 모든 이유를 붙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변의 일들,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행복 기도’는 릴레이 기도로 드립니다).


2. ‘온유 기도’를 드립니다. ‘---에 온유케 하소서’ ‘---에 온유케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많은 기도를 드린 후에 ‘온유한자의 복을 받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마칩니다(‘온유 기도’는 개인기도로 드립니다).


<고전9:24-27, 절제>

35과 절제


<말씀> 고린도전서 9:24-27


  마라톤은 인생에 비유될 만한 운동입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일반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하루에 20km가 넘는 거리를 매일 연습하고, 때로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의 연습으로 숨쉬기가 힘든 상황까지 가기도 합니다. 대회를 앞두고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탄수화물만 집중적으로 먹는 식이 요법도 병행해야 합니다. 이런 고통스런 연습의 과정 때문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황영조 선수는 “연습 도중에 가끔은 버스에 뛰어 들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 많은 연습들의 대부분은 절제로 이루어집니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즐기고 싶은 모든 것을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끊는 것입니다. 신앙도 경주입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길에 얼마나 많은 절제가 필요합니까?


<본문 속으로>


  ‘절제’란 무언가를 부분적으로 ‘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을 운동에, 신앙의 사람을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처럼 당신의 목표를 확인하시고 훈련의 스케줄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신앙의 메달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1. 운동장에 있는 선수처럼, 바울은 우리 신앙의 경주는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해야 할 일을 어떻게 강조합니까?(24절)


2. 그렇다면 승리를 위한 첫 번째 핵심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25절)


3. 두 번째로, 승리를 위한 경주에 또 다른 권면이 있습니다. 승리를 위한 또 하나의 필수 사항은 무엇입니까?(26절)


4. 세 번째로, 끊임없는 노력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두렵다고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27절)


<배우기>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은 천년도 안 되는 기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이라는 사람은 로마 멸망의 이유를 다섯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이혼의 증가와 가정의 파괴였습니다. 둘째, 지나친 소비풍조였습니다. 셋째, 쾌락 추구와 스포츠의 잔인화였습니다. 넷째, 적의 위협으로인한 지나친 군비증강이었습니다. 다섯째, 혼란한 종교였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원인을 종합하면 한 마디로 절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풍요로웠고, 사치는 극대화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을 즐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누려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희망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상급이 썩을 것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못 박습니다. 주신 것을 감사하고, 최대한 절제할 때 자신도 살고 모든 사람도 살 수 있습니다.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자신의 다른 것을 포기할 때 그 승리는 값지고 아름답습니다. 최후의 면류관을 위해 달려가는 당신의 발걸음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 아름다운 승리를 위하여---.

   

<적용하기>


1.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빠지기 쉬운 탐닉 증세가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신앙의 경주에게 절제해야 할 증세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1) 카페인(커피 등)   (2) 집착(자녀, 보석, 취미 등)   (3) 허풍, 수다  

  (4) 신용카드   (5) 돈   (6) 과식   (7) 일 중독   (8) 쇼핑

  (9) TV시청   (10) 전화, 휴대폰 사용   (11) 인터넷   (12) 영화



36과 법을 주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19:1-6; 20:1-2


  이제 우리는 12주 동안 십계명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 열 가지 계명 혹은 열 가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이 법을 주셨고, 이 법은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자료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법을 ‘오늘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십계명을 공부하는 첫 시간, 오늘은 십계명이 무엇이고, 왜 하나님께서 이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을 읽고 다음의 빈 칸을 채워 보십시오.


1. 십계명은 (        )께서 (        )에서 (            )에게 주신 10개 조항의 법이다.


2. 십계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의 본문을 참조하여 빈칸을 채워 봅시다.

<           관계>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         )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      )을 만들지 말고 ---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3계명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           ) 일컫지 말라

제4계명 (         )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관계>

제5계명 네 (       )를 공경하라

제6계명 (      )하지 말라

제7계명 (      )하지 말라

제8계명 (      )하지 말라

제9계명 네 (      )에 대하여 (         )하지 말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       )을 (         )말라


3.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출애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이들을 진입시키시기 전에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들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과정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변화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자격은 ‘거룩함’이었습니다. 거룩함의 원뜻은 ‘구분’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구분된 삶은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을 지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그 율법의 근본원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배우기>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을 배워 나가는 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원칙입니다. 이 십계명과 여기서 파생된 여러 율법들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잘 것 없는 약소민족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 법과 오늘 우리의 삶 사이에는 매우 큰 시간적, 공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생각이 십계명 안에 들어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 역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십계명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공부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적용하기>


1. 구원받은 당신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본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나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 배운 십계명 말씀 중에 가장 부족한 부분은 어떤 것입니까?

37과 제1계명


<말씀> 출애굽기 20:3


  세상에는 종교와 문화에 따라 많은 신이 있습니다. 1세기에 바울은 아테네에 갔을 때 사람들이 많은 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숭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행 17:23). 요즘에는 여러 종교들의 장점만을 혼합시켜 만든 신흥 종교들이 마치 ‘진보된 종교’인 양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고, 여러 종교 모두에 구원이 있다고 믿는 ‘종교 다원주의’가 보편적인 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3, 표준새번역)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본문 속으로>


1.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유혹 가운데 있습니다(마 4:8-10 참조).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만이 참 신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      )이시요 (   )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4: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   )이요 (   )요 (    )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     )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    )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2. 현대인에게 있어서 “다른 신”의 의미는 다음의 여러 차원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돈- 돈을 사랑함이 (     )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     )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학문- 항상 배우나 마침내 (      )에 이를 수 없느니라


쾌락- 쾌락을 사랑하기를 (      )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4)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방해하는 것이면 곧 그것이 “다른 신”(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두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한 사람이 (    )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    )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4.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제1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인 이유입니다.


<배우기>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길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의 절대성 역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만이 참 신이십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믿고 살아 구원에 이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부정하는 세상 풍조 가운데에서 우리가 언제나 마음에 품어야 할 진리입니다.

   

<적용하기>


1.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확신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두 마음을 품게 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나눠봅시다.


2. ‘하나님만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38과 제2계명


<말씀> 출애굽기 20:4-6


  제2계명은 우상 숭배를 금하는 법입니다. 제1계명에서 말하는 ‘다른 신’이 우상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때, 제2계명은 제1계명에 대한 반복적인 명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제2계명은 구체적으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까지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규칙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나 모두 인생의 불확실함과 인간의 유약함 때문에 우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본문 속으로>


1. 불안한 마음이 형상을 만들게 합니다.

  우상이란 하나님 아닌 어떤 형상을 가리켜 신이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출애굽기32장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자 하나님의 존재 역시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        )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          )이라 하였도다 ---(출32:8)


2. 하나님은 어떤 형상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으로 만든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        )에 비기겠느냐(사40:18)


3. 따라서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는 일은 허망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상이 결코 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형상임을 지적합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                 )이라(시115:4)


  본문의 ‘너를 위하여’(출20:4)라는 표현과 같이 사람들은 우상을 만드는 행위가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무익하고 허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는 일입니다.


4.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고백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       )을 다하고 (       )을 다하고 (     )을 다하여 주 너의 (           )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


<배우기>


  사람은 자신이 찾는 무엇인가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우상이나 점술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십계명의 제2계명을 통해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 칭하는 행동을 경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마음 품는 것을 용납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적용하기>


1.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드립시다.

39과 제3계명


<말씀> 출애굽기 20:7


  우리는 간혹 대화 가운데 ‘하나님’, ‘주님’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에 관계된 명령입니다. ‘망령되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우’의 뜻은 ‘헛되다’, ‘거짓되다’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헛되게’ 혹은 ‘거짓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은 이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1,2계명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잘못된 의도와 태도로 부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본문 속으로>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는 내용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실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였고, 하나님은 이런 죄에 대해 단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까요?


1.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격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되게 일컫는 것이며, 그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결심이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약한 의지나 예상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 때문에 본래 순수했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욕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3.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믿음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진실된 믿음으로 부르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     )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     )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        )는 누구냐 하며---(행19:13-16)


4.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배우기>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뿐 아니라,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게 만드는 행위까지도 제3계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입으로 범하는 죄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도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도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분만을 예배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3계명의 올바른 적용입니다.


<적용하기>


1. 오늘 공부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제3계명을 얼마나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가장 최근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던 경험은 무엇입니까?


40과 제4계명


<말씀> 출애굽기 20:8-11


  주일에 어떤 일을 하는가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 모임을 가지거나, 여러 봉사활동을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온전히 거룩하게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주일에 꼭 교회에 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의미에서 주일성수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본문 속으로>


1. 주일은 휴식을 위한 날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 10절을 함께 생각할 때 정작 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도 특별히 안식일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좀처럼 쉴 수 없었던 종들과 더 나아가 가축들에게 이 법은 휴식을 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일은 생업을 쉬는 휴식의 날입니다.


2. 주일은 예배의 날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10절)이라 규정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특별한 날로 정하는 근본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신 것에서 그 근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우리는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 모든 생태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          )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       )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       )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5:15)


  같은 안식일 규례를 명하는 신명기 본문은 그 권위와 근거를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 곧 구원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원의 능력과 주일이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적인 의미에서 ‘출애굽 사건’이 구원과 연결된다면, 신약적인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구원과 연결됩니다. 십자가 사역은 부활사건을 통해 정점에 이릅니다. 따라서 구약의 안식일 전통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로서의 주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요 20:19; 행20:7; 계1:10참조). 따라서 주일은 예배의 날입니다.


3. 주일은 교제와 봉사의 날입니다.

  안식일 규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해서는 안 된다.’는 복잡한 규칙들로 채워졌습니다. 심지어 의사의 진료행위가 제한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위인의 생일이나 죽은 날을 기념하여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행사를 열어 기념합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더욱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주일은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날입니다. 평일에 나누지 못한 가족간의 사랑과 이웃간의 사랑이 주일을 통해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기>

   

  주일은 예배의 날, 휴식의 날, 교제와 봉사의 날입니다. 이 날 우리는 과감하게 생업을 놓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섬겨야 합니다. 물론 주일이 아닌 나머지 6일 동안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일을 온전하게 지킴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의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성수는 성도의 의무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적용하기>


1. 당신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오늘 배운 주일의 세 가지 의미와 실천을 생각할 때, 당신이 더욱 힘써야 할 부분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1과 제5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2


  이제 십계명은 대신(對神) 관계에 대한 규정에서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대인 관계에 대한 규정의 첫 번째 규정이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높여 드려야 할 분은 부모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따라 성경이 말하는 에 대해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본문 속으로>


1.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를 올바르게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과 함께 해석되었습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      )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       )하라 이는 주 안에서 (          ) 하는 것이니라(골 3:20)


2. 효의 표현은 존경과 순종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         )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엡 6:1~2)


  많은 사람들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효의 근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효의 표현은 주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주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역시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엡6:4)해야 합니다.

3. 불효는 매우 큰 죄이자(딤전 5:8), 말세의 징표로 여겨졌습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고, 돌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불효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       )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4. 예수님께서도 효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눅 2:51). 예수님의 효는 어린 시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효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로 그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요 19:26~27).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도 순종하셨습니다(히 5:8). 참 인간이시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배우기>

   

  성경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요일4:20). 이와 같은 원리로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부모에게 하는 대로 자식이 나에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점점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메마르고 손상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는 부모를 주안에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용하기>


1. 지금 부모님을 최선을 다해 공경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한 부분을 어떻게 고칠지 이야기해 봅시다.

42과 제6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3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면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 계명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인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고의적인 행동이 아닐지라도 부주의에 의한 사고 혹은 분노에 의해서 우발적인 살인을 범하게 될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마음속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 스치는 생각일지라도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또 낙태와 안락사, 사형제도와 같은 어려운 문제들이 기독교 윤리의 영역에서 복잡한 연구와 토론을 반복하고 있는 것 역시 이 계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본문 속으로>


1. 하나님은 살인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신 19:21).

  살인을 한 사람은 보복 살인을 피해 도피성으로 피난해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받아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의적 살인의 경우에는 도피성 제단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했습니다(출 21:14).

  하나님은 살인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전을 건축하려할 때 다윗이 전쟁 가운데 저지른 살인으로 인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대상 22:8).


2. 하나님이 이처럼 살인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인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창 9:6).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성령이 거하시는 전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고전 6:19~20). 또한 살인은 하나님의 소유를 마음대로 탈취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살인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보다 성숙한 계명을 선언하십니다.

  신약 성경은 단지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를 문제삼는 율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살인의 동기에까지 시선을 넓힙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표출되기 전에, 우리 안에 생기는 악한 감정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비난, 저주, 분노와 같은 것들까지 금지합니다(마 5:21~24).

  신약 성경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책망하며(요일 3:15),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무에게도 (     )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           )하라(롬12:17~18)  


  예수님께서는 살인 금지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계명을, ‘이웃 사랑이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계명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마 5:43~44). 즉, 구약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랑(용서, 기도)하라는 계명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


<배우기>

   

  살인은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살인은 형법상으로 제재를 받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소유인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살인 금지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계명으로 성숙되어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 성도들 역시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적용하기>


1. 지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할 마음은 없으십니까?

43과 제7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4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간음이란 본래 ‘기혼자가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 이외의 이성과 맺는 불법적인 성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계명을 현대에 적용함에 있어서는 성폭행, 혼전 성 관계, 동성연애, 성 매매와 같이 정당한 혼인관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남용, 오용, 악용과 관계되는 모든 유형의 성행위라고 광범위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 개방 풍조에 따라 우리 사회의 성 윤리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성적인 불륜과 이혼을 소재로 나온 드라마나 영화를 흔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 윤리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성적인 범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성적인 범죄는 이스라엘 중에 절대 퍼져서는 안되는 악이었기에, 성경은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22:22).


2. 성적인 타락은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성행위는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은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고전 3:16~17).

 

3. 건강한 성 관계는 결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은 부모를 떠나 자신의 배우자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엡 5:31). 자신의 배우자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성 관계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고전 7:3).


모든 사람은 (         )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        )하시리라(히 13:4)

4. 예수님은 간음과 이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행동화되어 보여지는 성적인 범죄를 간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마 5:28). 또한 우리의 배우자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이혼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9:6).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막10:11~12).


5. 성적인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여 동침하고자 할 때, 요셉이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같은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할 수 없다고 말하며 동침을 거절했습니다(창 39:9).

  둘째로, 늘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행실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을 깨끗하게 할 것은 주의 말씀뿐입니다(시 119:9).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 범죄치 말아야 합니다(시 119:11).

  셋째로, 하나님의 도구로서 우리 몸의 용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려질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롬 6:13).


<배우기>

   

  ‘우리의 머리 위로 나는 새를 막을 길은 없지만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짓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적인 유혹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유혹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적인 유혹은 대면해서 싸워 이겨야 하는 시험(test)이 아니라, 오히려 미리 피해야 하는 시험(temptapion)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나 문명이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적인 순결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적용하기>


1. 성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피해야 할 유혹은 무엇입니까?

44과 제8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5


  도적질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취하는 행위입니다. 때로는 탐심으로, 때로는 생존본능으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게 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적 소유권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권리나 정보 역시 소유의 대상이 되고, 도둑질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의 성서적 의미와 적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성경에서 말하는 도적질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1)인신매매

    하나님은 인신매매를 사람의 인격을 도둑질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신매매한 자를 죽여야한다고 엄중한 처벌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신24:7).

  2)마땅히 줄 것을 주지 않는 것

    마땅히 줄 것을 주며, 받는 것 즉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이 하      나님의 공의라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줄 것을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는 탐심의 또 다른 형태 입니      다. 이것은 분명 도적질입니다. 열심히 일한 품꾼에게 정당한 삯을 주      지 않는 것을 도적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약5:4).     

  3)뇌물

    뇌물을 받고, 바른 판단을 하지 않는 행위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출23:8).

  4)고리대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돈을 빌려주어 높은 이자를 받아 그들을 더욱 힘들고 어렵게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과 위배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곧(     )와 헌물이라

    (말3:8) 

    내 몸과 나의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 십일조인데, 그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명백한 도적질임을 말라기      선지자는 천명하고 있다.  


2. 도적질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탐심을 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물질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딤전6:10).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곧 탐심을 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2)삶의 기준을 올바르게 정하여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준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해진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자살한 정몽헌 회장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부자였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기준이 바꿔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난할지라도, 혹은 부할지라도 하나님 때문에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빌4:11-12).


     내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     )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     )께 두며(딤전6:17)


<배우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우리는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을 외면하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하기>


1. 나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합니까?

45과 제9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6


  ‘위증'(僞證)이라는 죄가 있습니다. 위증은 어떤 이유 때문이든지 고의적으로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판결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제9계명은 본래 이러한 재판 과정에서의 거짓말을 언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재판은 증인의 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 과정에서의 거짓말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잘못된 판결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이 제9계명을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 살펴보도록 합시다.


<본문 속으로>


1. 증언에는 책임이 요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재판은 증인의 증언에 의해 유죄여부가 판단되고 형이 집행됩니다. 증언은 재판에서 형 집행의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위증을 피하기 위해서 2인 이상 증인을 요구하고(신17:6-7), 또한 형이 집행 될 때,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증인이 가장먼저 죄인의 몸에 손을 대야 했습니다(신17:6-7). 증언한 사람이 위증을 했으면 위증자에게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만약 사형에 해당하는 위증을 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것입니다(신19:18-19). 결국 자신의 증언에 직접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진실된 진술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한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행위 역시 성경은 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레5:1)


2. 성경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진실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악한자의 편을 들거나,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 소속정당을 탈퇴하고, 새로운 정당으로 입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소신 없는 정치인은 예수님당시의 재판을 맡은 빌라도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 거짓증언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     )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    )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출23:1-3)

 *두호: 지나친 호의를 보이며 두둔하다는 뜻이다.


3. 구원받은 성도는 악한 말을 피하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나쁜 말, 상처 주는 말을 해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약3:8-9). 구원받은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말의 습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은 악마의 것이며, 옛 사람의 습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오직 다른 사람과 신앙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선한 말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     )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5).


   

<배우기>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한 입술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말은 우리의 인격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거듭났다고 하면서 말이 변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늘 우리의 말을 조심하여 거짓말, 상처 주는 말을 버리고, 참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할 것을 오늘 새롭게 결단하기 원합니다.


<적용하기>


1. 나는 내 자신의 이익과 친한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고의로 거짓을 행한 경험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말해야 할 때, 침묵으로 타인의 불이익을 방관해본적은 없습니까?

  

46과 제10계명


<말씀> 출애굽기 20:17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으면 그것을 얻고 싶어 합니다. 사회가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에 오염될수록 범죄율은 증가하고, 규모가 작은 범죄일 경우에는 그다지 큰 죄의식을 갖지도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계명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본문 속으로>


1. 성경이 말하는 마음의 욕심

   성경의 가치관은 사람의 행복이 물질의 소유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욕심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    )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      )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성경은 재물에 관한 욕심 외에 지식욕과 명예욕을 지적합니다. 무엇이든 많이 갖는 것이 오히려 올무가 되기도 합니다. 많이 알수록 오히려 번뇌와 근심도 많아진다고 지적합니다(전1:18).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들도 높은 자리에 앉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동기로 권력과 명예를 좇는 제자들의 마음을 지적하십니다(마20:26-27).


2. 욕심은 죄로 이어져 영적성장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본성은 죄로 훼손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렘17:9), 대표적인 것이 욕심인데, 욕심을 행동하면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약1:14-15). 결국 마음속의 욕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것입니다(마13:22). 씨뿌리는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삶에 적용해서 열매를 맺으려 할지라도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음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         )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3.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하라. 

   우리는 삶 가운데서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나친 집착으로  자신의 필요를 구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필요이상으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 6:33).  


4. 예수님은 이웃사랑으로 계명을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예수님은 능동적인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탐내지 않고, 거짓 증거 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면 기본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잘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막12:31).

   

<배우기>

   

  고대의 한 철학자는 만약 자녀에게 행복을 주려거든 돈을 주지 말고 그 마음속의 과도한 탐심을 없애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행복의 조건이 소유가 아닌 것을 우리는 지식으로도 알고 있고, 경험으로도 알고 있지만 실제 우리 마음속에서 욕심을 제거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삶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정결을 추구해 가야 하겠습니다.


<적용하기>


1. 스스로 자신을 평가해 볼 때 내 마음속의 어떠한 욕심이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47과 행함이 있는 믿음


<말씀> 마 7:21-27


  우리는 지금까지 십계명을 공부했습니다. 계명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십계명 공부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앎’과 ‘행함’의 연결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도 그것이 삶 속의 실천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다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으로>


1. 말씀을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무가 좋은지 나쁜지 열매를 보고 판단하듯이 사람의 행실을 보고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와 순종의 믿음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는 것에서 말씀을 지키는 순종의 믿음으로 이어져야 참 믿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           )라야 들어 가리라 (마7:21)

  

2. 실천이 없는 신앙은 위선입니다.

  성숙한 영성, 건강한 영성이란 마음속의 믿음이 진실한 행함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숙한 관계를 맺는 성도들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요일1:6). 우리의 사랑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요일3:16).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행하는 의 역시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고 책망합니다. 이것은 행위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       )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배우기>

   

  마더 테레사가 어느 나라를 방문했을때 가르침을 받고자 한 수사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인도로 가시는 길에 기차 옆자리에 앉아 좋은 가르침을 받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기차여행비는 제가 지불하겠습니다.”라고 하자 테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차여행비가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수사가 말했다. 그러자 테레사는  “그렇다면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그들이 저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참된 섬김과 나눔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적용하기>


1. 아래 십계명 묵상을 읽고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


<십계명 묵상>


1계명: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믿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합니까?

2계명: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3계명: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4계명: 주일을 예배의 날, 휴식의 날, 교제와 봉사의 날로 지킵니까?

5계명: 주안에서 부모에게 존경과 순종의 효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6계명: 생명에 대해 얼마나 존귀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실천합니까?

7계명: 타락한 성문화 속에서 자신과 자녀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8계명: 눈에 보이지 않는 지적소유권을 도적질로 생각하고, 인식합니까?

9계명: 자신의 이익과 신변의 보호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는 않습니까? 

10계명:당신은 타인의 것에 대한 어떤 소유욕으로 힘들어합니까?



48과 믿음의 사람 - 아브라함


<말씀> 히 11:8-10


  오늘부터는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그들의 모범적 사례와 인간적인 연약함을 통해 오늘날 우리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그 첫 시간으로 ‘믿음의 아버지’, ‘하나님의 벗’ 이라고 불리운 아브라함에 대해 알아봅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삶 가운데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아브라함과 같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신앙적 모범을 제시받고 적용하므로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본과의 목적입니다. 


<본문 속으로>


1.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간 사람

   히11:8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확실하고 안정적인 청사진을 보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순종의 근거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창12:1)과 약속(창12:2-3)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함께 길을 떠난 조카 롯과의 여행 동기에서도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가장 확실하고 안정적인 인간적인 기반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 즉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신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선조요, ‘믿음의 아버지’, ‘하나님의 벗’으로 불리고 신앙의 아버지로서 존경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     )을 쫒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 였더라 (창12:4)

  

2. 약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인생의 큰 전환에는 순종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약점을 지닌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 가운데 보여준 너무나 부끄러운 흔적들을 성경은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창12:10-13,20:1-2). 이러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동행하심 가운데 일생동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 가는 일과 그의 영적 성숙의 깊이가 함께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의 본문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처한 삶의 자리와 그곳에서 고백된 하나님의 이름과 의미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아브라함의 영적성숙의 진행을 살펴봅시다.

 1)창14:19 - 천지의 주재    2)창15:1 - 방패, 큰 상급

 3)창17:1  - 전능한 하나님  4)창21:23 - 영생하시는 하나님

 5)창22:14. - 여호와 이레


3. 실력을 준비한  사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믿음이 좋으면 현실과는 무관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그의 인격(창13:8-9, 21:22)과, 전쟁의 위기 가운데 나타난 그의 용기와 전술가로서의 대처능력(14:14-16)등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현실적 삶이 결코 무기력한 삶이거나 현실도피의 삶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탁월한 위기대처 능력이 준비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는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언약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능력은 불확실한 삶의 상황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불안함과 불확실한 삶의 여정을 지속하며 강력한 영향력의 삶을 살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삶의 위기 순간들마다 친히 임재 하셔서 세우신 하나님과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아브라함이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1) 아브라함을 부르심과 동시에 주신 약속(창12:2-3)

2)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한 후 그가 받은 약속(창13:14-15)

3) 구십구 세의 나이에 아브라함에게 임한 언약(창17:19)

4) 모리아 산에서 받은 하나님과의 약속(창22:16-18)


<적용하기>


1.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순례자입니다. 당신은 가장 최근에 붙잡고 있는 언약의 말씀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49과 생각하는 사람 - 예수님


<말씀> 눅 12:22-31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덮어놓고 믿으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소위 신앙인이 되고 나면 사고의 기능은 멈추고 마는 것일까요? 이성과 신앙이 대립하는 것일까요? 신앙에 있어 생각하는 일은 멈추고 그저 ‘아멘, 주여 믿습니다’라고만 말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길일까요?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아도 생각을 멈추는 일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맹목과 맹종의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과 신앙, 앎과 믿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영역이 어디이며, 어떠한 관심권에 속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를 성경은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으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속으로>


1. 육신의 생각은 염려를 낳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염려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염려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으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였습니다. 결국 영의 생각이 아니라 육신의 생각을 할 때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어떤 생각에 집착되어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염려는 헬라어로 ‘메람나’라고 합니다. 동사는 ‘메림나오’인데, 이는 ‘메리조’(나누다, 분리된다. 쪼개어진다)라는 동사와 ‘누스’(마음)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염려란 마음이 나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염려는 감정이 나뉘고, 생각이 나뉘고, 판단이 나뉘고, 결심이 나눠져 실패와 불행을 초래하게 합니다.


2. 영의 생각으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염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 졌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많은 염려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염려의 원인이 단순히 물질의 부족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염려의 원인을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영의 생각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의 섭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자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손길은 나를 돌보시는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3. 영의 생각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을 보면 그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어떠한가는 곧 생각을 움직이는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딤후 1:7). 염려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4:23).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지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을 유지해야 합니다.


<배우기>


   우리의 기도는 분명히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맞춥시다. 영의 생각을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까마귀도 먹이시고, 들에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손길이 내 삶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용기 있게 발걸음을 내딛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당신이 생각하는 생존에 관한 걱정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50과 비전을 품은 사람 - 여호수아


<말씀> 민 14:1-10


  성경의 인물 가운데 아주 독특한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역할은 성서의 맥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리라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에게로 이어졌습니다. 단순히 이어진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의 성취가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엇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하는 지도자로 만들었을까요?


<본문 속으로>


1. 여호수아의 비전

  민수기 13:25~14:9까지는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탐지하고 난 후 일어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같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은 절대로 차지할 수 없는 땅이라고 비관적으로 이야기합니다(민 13:27~33).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흥분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민 14:1~4).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여호수아의 신앙적인 행동이 드러납니다. 그에게는 다수 사람들의 문제도, 자신이 어떤 불이익을 당할 것인지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우며 그 땅의 거민은 우리의 밥이라고 이야기 합니다(민 14:6~9). 이것이 정의요, 그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생명까지 위험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민 14:10).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있어서 목표는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장대함을 바라보며 놀랄 때, 그는 그 땅의 풍성함을 바라보며, 자신이 차지하게 될 놀라운 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2. 여호수아의 순종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40년 전 애굽을 떠날 때 하셨던 약속을 완결한 사람입니다. 그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취한 것은 특별한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방법을 회복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모든 민족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명령하십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 가량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전투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쟁은 이들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전투력이 아니라 이들이 과연 나에게 속한 백성인가 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 사이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도 그 선택의 사이에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실 것입니까? 선택을 하기 전에 한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도자란 자신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배우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그 후손들을 통해 지속되었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언약의 연속선상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와 주어진 언약의 완성을 위한 자신의 몫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약속의 땅을 정복해 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루어야 할 비전을 품고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언약의 삶들은 살았던 사람들의 시대와 환경은 다양했습니다. 비록 그들의 시대와 환경은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저희들이 순종하면 내가 저희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 백성은 내가 책임진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이루실 비전을 바라보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비전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