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서

차례
1. 죽음, 인생의 마지막 원수
2. 죽음, 더 이상 금기시 할 수 없는 것
3. 죽음, 공포의 대와
4. 나이 어린 사람들의 죽음
5.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6. 빌려온 시간을 얼마나 오래
7. 생사의 선택
8. 슬픔을 통해 배우는 것
9. 죽음을 위한 준비
10. 죽은 자의 두 처소 천국과 지옥
11. 신자의 죽음의 유익
12. 내가 죽기 전에

제1장
죽음, 인생의 마지막 원수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구겨진 철판조각과 깨진 유리조각들이 마치 부서진 인형처럼 고속도로에 널려 있었습니다. 화염과 경찰차와 앰블런스와 깜박이는 적색등은 갑작스럽고 불길한 공포의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한때는 뽐내던 값비싼 스포츠카가 자금은 휴지처럼 꾸겨진 채 내동댕이쳐져 있었습니다. 흐믈흐믈해진 육체는 앞좌석과 핸들에 꽉 끼인 채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살 것인가 혹 죽을 것인가? 박살난 그 육체는 노련한 외과의사에 의해 다시 제모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플라스틱 판자로 덮여서 시체 공시소로 아무렇게나 운반될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잃고 고통을 당하지만 지금도 매일 이러한 사고들이 미국의 고속도로 위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극한 슬픔을 당하지만, 이러한 재난은 너무나 우리 주위에 흔하게 일어납니다. 이제는 엄청난 대형사고만이 신문의 표제를 장식할 뿐이며 갑작스레 생명을 잃고 운명이 뒤바뀐 사람들은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너무나 늦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운전자는 어떠합니까? 그는 장래 계획에 그와 같은 갑작스런 운명의 변화를 계산해 넣었을까요? 그러한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살아 왔을까요? 영원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죽음과 재난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종종 신문을 통해 또다른 유명인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또는 전화나 편지로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상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며 죽음이 가져다 주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나는 1986년 가을 복음전도집회를 시작하기 전 파리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아주 평온한 날이었는데 나는 갑자기 그 아름다운 도시가 무언가에 의해 포위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오 러쉬아워 때 시끌벅적한 한 백화점에서 폭탄이 터져 부인들과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때는 바로 테러분자들의 공격이 계속되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임지는 테러리즘의 새 유행을 '현대의 문둥병'이라고 하면서 그 사건을 맹공격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갑작스런 재난에 대해 결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는 이유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소견이 있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끔찍한 가능성과 우리 전도팀이 예기해야 할지도 모를 결과에 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재난에 대해 예기하기를 꺼려 합니다. 우리는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잊기 원하며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또 우리는 스스로 자위하기를 '급작스런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발생한 것이지 나에게는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죽음, 최종적으로 확실한 것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 그리고 기근에 관한 뉴스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로부터 수백만의 전염병 환자들, 수천 명의 사상자, 수마일의 감염지역, 몇 달 혹은 몇 년 계속되는 기근, 또 통계숫자로 표시될 수 있는 모든 재난에 대한 뉴스를 접합니다. 물론 통계숫자와 미디어를 통한 전달 통로는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연중 무휴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C.S.루이스는 "전쟁이 죽음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항상 필연적이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를 데려갑니다. 죠지 버나드는 비꼬듯이 이렇게 썼습니다. "죽음에 대한 통계 숫자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사람은 차례대로 한사람 한사람 죽는 법입니다."
 
 기독교 수양관에서 개최된 가족주간 행사 중 한가지 소식이 날라 들어왔습니다. 캠프장에서 많은 아이들을 가르쳤던 한 부부가 집으로 돌아가 4개월된 아기의 방문을 열었을때 아기가 침대에서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은 갑자기 침울해 졌습니다. 벤과 셀리에게 왜 이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까요? 그녀는 삼십대 후반이었고 그 아기는 첫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아기를 보러가기로 예정된 시간 바로 직전까지 유치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그녀의 반 아이들은 선생님의 아이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벤과 셀리의 학생들과 교회 성도들은 벤쟈민이 태어났을 때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아이를 데려가셨을까요?
 
 죽음은 흔히들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하필이면 왜 내가, 왜 지금, 왜 이러한 일을 당하는가?'
 
 왜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가? 성경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9:27).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공평합니다. 400여년 전 영국의 작가 죤 헤이우드는 "죽음은 높은 자나 낮은 자를 똑같이 만든다"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음과 싸웁니다. 그리고 장시간 죽음을 피할 수 있고 우리의 상식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그러한 특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 특권을 주장할 수 잇고 호소하거나 흥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주적인 적입니다. '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한다고 그 현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잘 계획된 우리의 삶에 파고 들어와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마치 죽지 않은 것처럼 말함으로써 그 주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흔히들 '그는 이생을 작별했다' 혹은 '그는 사라졌다' 혹은 '그는 저세상으로 갔다'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러나 육신이 땅에 묻히고 죽은자의 영혼은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고픈 것 이상입니다.
 
 부친이 아직도 살아계시느냐는 질문을 할 때 중국인들은 '너의 부친은 아직도 그곳에 실아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대답은 '그는 그곳에 건재하시다'이든가 아니면 '그는 그곳에 안계시다'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고대사회에서 조차도 거의 쓰이질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많은 얘기들을 듣습니다. 어떻게 하면 젊게 보이는지, 또는 세련되게 하는 법이라든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좋은 인상을 주는 방법, 우정을 맺는 방법 등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럴듯한 야망들이지만 그러나 이 현실세계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시편 기자는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시 39: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인생을 최고의 것으로 꾸려 나갈려면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장인이신 넬슨 벨 박사는 오래 전에 이와 같이 쓰셨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불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준비의 문제입니다.

사실을 인정하라
 
 죽음이라 불리우는 원수와 싸우려면 그것에 대해 배워야만 합니다. 그래야 죽음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또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들의 죽음을 위해서도 그러합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전술가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적이 저 너머에 있다면 나중에 그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던 당시 상황을 기억합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는데 일본 군부는 그것을 '젯트(Z)작전'이라 명명했습니다. 그들은 일년 전부터 미국 태평양 함대의 심장부인 진주만의 전함과 항공기들을 폭파하기 위해 폭격 작전을 수립하여 놓았습니다.
 
 1941년 여름 나는 아내 룻의 처가댁 식구들과 함께 워싱톤을 방문했습니다. 벨 박사는 국무성 고위 관리들을 만나 일본의 기습공격을 경고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거절당했습니다. 다른 충고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미국은 진주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못했고, 어리석게도 다가오는 재난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궁극적인 원수에 관한 경고를 무시할 수 잇는 것일까요?
죽음에 관한 침묵의 음모를 성경 말씀으로, 현실적 접근을 통하여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수년 전 '죽음은 휴일을 앗아간다'라는 연극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제목은 흥미를 자아냈고 불가능한 주제를 훌륭한 드라마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란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곧잘 부정합니다. 그것은 그들 마음으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주제입니다. 혈기 왕성할 때 그들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마도 그 나이에는 그런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특히 세월이 좋을 때, 모든 것이 풍성하고 경제는 왕성하며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 그러합니다. 우리 배가 꽉 차 있을 때 죽음이란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사람에게 죽음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생각케 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곧 실존적인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사람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종종 그러한 질문들은 심각한 패배 혹은 손실을 당할 때, 좋은 시절이 사라지고 파티가 끝난 아침 이후의 현실을 직면할 때 찾아옵니다. 만일 이성과 감정을 갖춘 사람이라면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사실 몇몇 교육자들은 죽음이 벽장을 나와서 교실로 들어갔다고들 말합니다. 나는 요즈음 캠퍼스 내에서 죽음 문제가 성문제보다 더 인기 있는 주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시체 공시소를 찾아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묘소를 지정해 놓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죽음이란 인기있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견해는 아직도 최고의 뉴스거리가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대사회가 핵폐기물, 군사적인 대량학살, 자연재난 등으로 인해 젊은이들로 하여금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TV폭력도 한 가지 요인이라고 봅니다.
 
 죽음에 관한 과학적 접근 방법은 죽음이 개인적인 점들을 토론하는데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감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잇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도움 없이는 죽음의 수수께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빼놓고는, 죽음이란 영원히 알 수 없는 도깨비로 남아 있을 것이고 불쌍한 인생들을 계속해서 삼켜버릴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신 바대로 죽음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또 동정하는 마음으로 접근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외쳤듯이 죽음이란 마지막 원수이지만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이 이 책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죽음, 썩어질 원수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친구가 아니라 원수임을 피력합니다.
 
 죽음은 왜 우리의 적일까요? 난 지금 고통과 질병과 노쇠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햇볕 아래서 뛰어 노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그 생명을 앗아가 버리는 죽음이라는 원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원수는 젊은 남녀가 결혼하기도 전에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조종사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의 소망을 꺾고, 젊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린아이들을 고아로, 아내를 거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중에도 한 사람이 죽어갈 것입니다. 죽음이란 채 끝나지 않는 심포니처럼 창창한 경력들과 삶의 조각들을 남겨둡니다.
 
 한 여인이 나에게 그 남편의 죽음에 관해 알려왔는데 그녀는 그것을 '시기 적절치 못한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날 아침 두 번이나 나에게 전화를 했어요. 병원에서 일주일간 심장치료를 받고 회복이 되어서 집으로 온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집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어요. 의사가 그에게 간단한 트레드밀(실내에서 달리기에 사용하는 기구) 운동을 시키고 퇴원시킬려고 했는데, 남편은 30분쯤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트레드밀 위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병원에서 통지해온 거예요. 그때 그 충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난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 중의 일부라는 사실로 긍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젊은이가 죽거나 혹은 어린이가 죽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슬픈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남편을 잃었어요. 그는 나의 인생 전부였답니다. 우린 60년간 부부생활을 하였습니다."
 
 프랭크 고이는 클리블랜드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리조나주 피닉스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집에 있었고 프랭크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하였습니다. 프랭크와 아내 버지니아는 매우 매우 오랜 기강 동안 애정이 깊었던 부부사이였습니다. 그들은 프랭크가 클리블랜드 메이 회사 사장직을 그만두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프랭크는 사업차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전화 도중 아내는 "아프다"고 말했고 프랭크는 "여보 당장 병원에 가보도록 하시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수화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즉시로 피닉스에 있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수분 안에 의사가 그의 집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아내의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녀는 전화도중 죽은 것입니다. 프랭크에게는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내를 잃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지금 그는 하늘 나라와 더욱 가깝게 살고 있습니다.

죽음, 하나님 계획의 원수
 
 "하나님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나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계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이 원수는 멸망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교훈하십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5,26).
 
 사망은 왜 하나님의 원수인가요? 그 이유는 죽음이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반하여 우리의 생명을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죄나 고통, 질병이나 죽음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것임을 알려줍니다. 사망은 죄의 삯이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자유 의지로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기전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일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경고를 비난하였고 그들이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단의 거짓말을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은 모든 인생과 다른 모든 생물(식물과 동물)의 보편적인 운명입니다. 죄와 죽음이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고통에 빠뜨렸음과 이 시대 마지막에 영광스럽게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죄가 제거되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대로 회복될 것임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이-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리라"(롬 8:19-21).
 
 당신은 만일 인간의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성경이 침묵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엘리야와 에녹처럼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갔을 것입니다. 신체적 죽음을 모르는 성도들이 장차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살아있는 성도는 죽지 아니하고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15:52).
 
 한 아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디 있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아담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몇 가지 반응들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스티브 맥퀸처럼 죽음을 부정합니다. 그는 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윌 로저스처럼 죽음을 비웃습니다. 그러나 로저스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조지 번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음을 믿지 않아요." 그러나 그들은 마릴린 몬로처럼 삶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자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음에 복종합니다. 가엾은 앤볼린이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사무치는 사연을 적고 있습니다.

오 죽음이여 나를 잠재우라 나를 평안케 하라
나의 가냘픈 심장에서 연약하고 순결한
나의 인생을 떠나게 하라
조종을 울려라 슬픈 죽음의 종소리를 울려라
그 소리가 나의 죽음을 알리는구나
죽음이 나를 부른다
죽음이 나를 부른다 거기에는 묘약이 없구나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운명론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그것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는 삶이 없고 죽음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큐러스는 그리스도가 나시기 3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는 죽음에 관하여, 우리가 한 가지 주제에 몰두했을 때 그러한 것처럼,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모든 악 중 최고로 악질인 죽음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한 죽음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막상 죽음이 왔을 때에는 우리가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극단을 달립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전신마비에 걸립니다. 그들은 죽음 중에서도 임하는 하나남의 사랑과 보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갖은 애를 다씁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죽음의 두려움에서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란 항상 '놀라운 해방'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리시키는 원수입니다. 확실히 죽음에는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늙은이나 젊은이, 선과 악, 기독교인이나 이방인이거나를 불문합니다.
 
 죽음에 대한 각자의 반응은 딱 부러진 어떤 범주로 분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일반적으로 주위 사람과 유사합니다. 성경은 이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시, 거부 혹은 두려움이라든가 또 다른 태도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인정하는 태도에 있어서 이를 반항하거나 거부하거나 겁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천국이라는 실재로 우리를 이어가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삶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금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또 이 책을 쓰는 것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어떤 절박감을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믿는 자들은 죽음을 이기는 복된 소망을 가졌음으로 우리 스스로 이 죽음이라는 원수를 문에서 기다린 것처럼 '어서 오십시오'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억지로 맞이한다고 해서 믿음이 약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나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우리는 병적으로 죽음을 겁내기 보다 실질적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거론조차 하기를 피하는, 그러나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평안을 찾고,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고 농담까지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내가 확신하기에는 우리는 분명코 자신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2장
죽음, 더이상 금기시 할 수 없는 것

"천하에 범사가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 3:1,2)
 
 나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습니다. 목사 직분에 있어서는 좋은 교육 배경이라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나는 그 과목이 나에게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장래 목회가 세계적인 사역이 되었을 때 얼마나 유용하게 될 것인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풍습과 전통이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하는 사실은 나에게 대단한 흥미거리였습니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미술과 음악, 문학과 또다른 분야를 엿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50여년 이상 생을 살아온 우리들은 머리를 흔들며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은 그들의 손자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 하면서 우리를 흉내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옷 맵시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식적인 시대, 그 다음에는 말할 수 없는 시대. 그리고 지금은 '우울한 소리'의 시대입니다. 지난 10년간 죽음에 관해 쓰여진 책은 지난 세기에 쓰여진 양보다 많습니다.
 
 수백 년 전 죽음은 하나의 의식이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오면 죽어가는 자는 원탁의 기사에서 랜슬롯 경이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한 뒤, 그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뻗고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하였습니다. 머리를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던 것입니다.
 
 죽음은 자신의 규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자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죽음의 관습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한 역사가가 중세기의 죽음의 태도에 관한 연구를 한 뒤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멘데의 주교 길라움 두란에 의하면 죽어가는 사람은 바닥에 드러눕고 반드시 얼굴은 하늘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TV 영웅들의 죽는 장면은 "욱"하는 것으로 죽음을 표현합니다. 그들을 갑작스럽게 밀치거나 폭발하거나 떨어져 죽습니다. 도대체 후손에게 유언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라는 식의 임종 장면이 용감무쌍한 행동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좀더 로맨틱한 시대에는 햄릿의 말과 같은 것이 유행하였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러한 말로 죽음의 추악함을 위장하였습니다.
 
 지난 세기 임종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공적인 의식이었습니다. 대부분 친구들과 친척들, 어린아이들이 그 곁에 있습니다. 당시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고 갖가지 반응들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관심을 쏟고 또 다른 사람은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임종시의 장면은 그랜드 센트럴 벽과 같습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부터 의사들은 기초적인 위생 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임종시의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종 직전의 며칠은 죽는 자가 하나남과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간으로써 죽는 자의 권리로 간주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마지막 계획과 신앙고백을 적은 유언장이 준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패트릭 헨리의 유언을 살펴봅시다.
나는 지금 나의 전 재산을 가족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또 한 가지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이다. 만일 가족들이 그 믿음을 갖고 있다면 내가 그들에게 한푼 어치의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유해질 것이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믿음을 물려주지 못한다면 설혹 내가 그들에게 온 세상을 준다하더라도 그들은 정말로 가난해질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유언장의 내용이 상당한 변화를 겪습니다. 경건 조항과 무덤의 선택, 종교기관에 헌납, 의연금 등에 관한 사항들이 사라져 버리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단순히 부동산을 분배하는 법률적 조항만의 유언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유언장은 이제 완전히 세속화되었습니다.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세속화는 사회의 비기독교화 현상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내가 오늘날 흥미를 갖는 것은 기독교인의 유언의 내용이 과거의 것으로 돌아오고 있는 기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는 죽음의 장식물들이 새로운 관심을 끌었습니다. 장례행렬이 있고, 상복이 있고, 묘지가 준비되고, 방문객들이 줄을 잇고, 무덤까지 행진합니다. 생으로부터의 이별 장면이 갖가지 모습들로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관습이 변했습니다. 20세기가 되자 과학 기술과 통신과 삶의 스타일이 엄청난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고 죽음은 별볼일 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세속화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오래되지 않아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임종의 자리에서 쫓아내었고 임종 장면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죽을 병이 걸리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어 결국 가족들이 제외되게 되었습니다.
 
 금세기에 있어서는 우는 습관조차 또한 거부되었습니다. 공동체는 동료의 죽음에서 점점 더 소외되었습니다. 영국인 조트레이 고레는 개인적인 일련의 체험을 토대로 죽음과 애도의 자세에 관한 변화를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915년 루시티니아호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931년 그는 시체를 처음 목격했고 애도의 관습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 그는 절친한 친구 두 명을 잃게 되었고 전통적인 애도의 관습이 거부됨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1955년 그는 '죽음의 외설책'이라는 책자를 발간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섹스가 빅토리아 시대에 부끄러운 일이었듯이 죽음이 현대에 수치가 되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의 금기가 다른 것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장례식에서 소외됩니다. 심지어 자식들인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고레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1961년 자기 형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촌에 관해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 조카 아버지의 장례는 어떤 의식 없이 치러졌고 심지어 비밀에 가까울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인 엘리사벳이 오래 전부터 그와 얘기하는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1971년판 현대 심리학 잡지의 한 설문조사에서 25세된 여성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두살 때 나의 어머니는 백혈병으로 죽었다. 나는 어머니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서 깜박 졸다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오빠와 나를 무릎에 앉히고 슬프게 흐느끼면서 '예수님이 너희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우리는 다시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 얘기는 우리들에게 있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이 아이들에게 묘사될 때, 그 어린이가 하늘과 영생의 소망을 미리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예수님이 엄마와 아빠를 데리고 가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따라서 방금 앞서 얘기한 젊은 여성이 후에 상담치료를 해야만 했었는데 그 일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 아내 룻은 위튼 대학 학과 동료의 죽음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앤 킹 블로허라는 친구인데 그녀는 아빠와 다섯 아이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또 다른 친구 헬렌 모르켄은 암으로 죽었는데 전화로 룻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합니다. "하나님 권속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팔이 연장된 것이다." 룻은 그녀에게 찬송가 카세트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모친을 위해 수집해 놓은 것인데 나중에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습니다. 그 카세트 제목은 '본향을 향하여'입니다. 헬렌은 그것을 한 시간 가량 들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가족은 그녀 주위에 서서 그녀가 하늘 영광 가운데 들어갔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지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화되지 또 다른 중대한 변화가 가정에 발생하였습니다. 사단의 존재가 현저하게 무시되었고 하나의 신화로 전락하였습니다. 악마의 실체를 믿었던 사람일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악마의 위력을 인정치 않거나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옥은 불신자들과 어떤 믿는 사람들의 눈에 포기되었습니다. 또는 단순히 세상의 필요악 정도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몇몇 신학자들 조차 지옥에 관한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쟁, 기근, 테러, 탐욕, 증오 등은 이 세상의 지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지옥이란 고대 역사의 잿더미의 일부라고들 믿게 되었습니다. 지옥이 더 이상 명백한 약속의 말씀이 되지 못하자 죄 또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혼란한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해결책으로 과학, 교육, 사회적, 도덕적 수단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죄를 인정치 않게되면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실재성을 부인하게 됩니다.
 
 지옥을 부정하는 사람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누가 천당에 가고 누가 가지 못하는가? 만일 천당에 못가면 어디로 갈 것인가?"
 
 현대 사회에 지옥은 재미있는 주제가 되질 못합니다. 죠지 갤럽은 지옥이란 주제에 관한 연구를 시도하였고 재미있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전국적인 설문 응답자 중 미국인의 53퍼센트가 지옥을 믿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퍼센테이지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고소득층에게 있어서는 엄청나게 떨어졌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갤럽 조사는 사람이 많은 교육을 받고 수입이 높을수록 지옥을 믿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천당은 어떤가요 갤럽 조사에 의하면 66퍼센트가 선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영원히 보상받는 천당을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지옥보다는 천당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나는 특히 천당을 믿는 사람들이 그 이상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때 흥미를 느꼈습니다. "천당에 가면 어떻게 살 것인가? 유능하고 선하며, 공정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가난하게 살 것인가?"
 
 개신교 중에서 침례교 26퍼센트, 루터교 20퍼센트, 감리교의 16퍼센트만이 천당의 생활은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조사는 또한 개신교의 24퍼센트만이 천당의 처소를 믿고 있고, 카톨릭교는 41퍼센트가 믿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개신교나 카톨릭교나 왜 이렇게도 천당에 대한 확신이 낮을까요? 그것은 천당을 묘사하는데 있어 지옥을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는 불과 유화이 타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과잉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럼으로써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포기했거나 왜곡하게 되었습니까? 혹은 이 세상의 삶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죽음 이후의 삶을 완전히 무시하게 된 연유일까요? 예수께서는 지옥을 어두움으로 묘사했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 8:12).
 
 또한 예수님은 지옥의 두려움을 묘사하기 위해 가능한한 강력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옛날처럼 강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는 나라들을 여행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은 갤럽 조사의 결과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게 됩니다. 즉 기독교가 가장 큰 종교단체인 나라들보다도 미국인들이 지옥을 더 많이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데 스웨덴은 22퍼센트, 영국 23퍼센트,. 서독 25퍼센트, 스위스 25퍼센트, 네델란드 28퍼센트,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낮습니다.
 
 갤럽의 연구에 의하면(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처럼 사람들이 지옥보다 천당을 더 믿는 이유는 지옥이 죽음처럼 사람들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60분'이라는 미국의 뉴스 시간에 재키 글리슨은 몰리 세이퍼와 함께 진행을 맡아 보면서 자기는 지옥이나 천당과 같은 사후의 생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재키와 나는 과거 수년간 이 주제에 관해 몇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영혼과 육신을 지옥에서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이 거짓말한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천당에 관한 구절은 믿지만 지옥에 관한 것은 거부합니다. 19세기 후반 유명한 법률가요 무신론자인 로버트 잉거솔은 지옥에 관하여 매우 비판적인 강연을 한번 하였습니다. 그는 지옥을 가리켜 "종교의 허수아비"라고 비꼬았고 그것이 얼마나 비과학적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부정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술취한 사람이 청중 가운데서 올라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봅, 당신의 강의 잘 들었소, 당신의 지옥에 관한 연설은 훌륭했소. 그러나 봅, 그것을 확신하길 바라오 내 믿음도 당신께 달려 있으니까."
 
 일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병사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가 유행하였다.

오 무덤이여,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지옥의 종소리가 울린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고나해 얘기하며 다른 사람들이 가야할 곳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는 꺼려합니다. 지옥이란 그들에게 있어서 히틀러나 스탈린만이 가야할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한 사람은 자기 일에 몰두하며 세금을 내고 자선기금을 지불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리라면, 그리스도를 쫓는 자들에게 있어 죽음 이후의 삶은 풍성한 삶입니다. 그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선한 하나님이 사람들을 벌하실 리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인도주의자들이거나, 성경의 지옥에 고나한 인기없는 구절들을 무시하고픈 종교가들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그들은 옳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멸망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믿듯이 약속을 이루시는 데 지체치 않으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성경은 매우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육신만을 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살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보다 더 심각한 무엇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르르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은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사실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면, 무엇보다 먼저 이 말씀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인간의 영혼을 운명지울 수 있는 권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경외'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경외'란 쩔쩔매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도리어 생명력있는 존경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경외 사상에 대해서 배웁니다. 만일 그에 관한 깊은 존경심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그 단어에 관한, 보다 근접한 이해를 얻는 셈입니다.
 
 문제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룩하며 우리가 성경적 의미의  선과 악을 구분한다면 지옥이 존재함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악이 어떻게 비쳐지는가를 인간이 이해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점수가 매겨지는 성적표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입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고귀한 희생으로라야 용서될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 시대
 
 오늘날 죽음의 체험은 공개적으로 토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듣거나 읽는 내용은 성경의 교리를 혼동케하고 그들이 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문을 야기시켰습니다. 좋은 예가 죽음에 가까운 인기있는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진실성을 의심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장마비나 다른 병 때문에 이러한 체험을 합니다. 그들은 영혼이 일어나 자기를 살리고자 애쓰는 의료팀을 굽어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죽은 친척들의 영혼, 친구들의 영혼을 본다거나 어떤 이들은 밝은 빛을 만나고 그 빛의 인도로 어떤 터널을 지나 말할 수 없는 황홀한 체험을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생생하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경우를 들었습니다. 예외없이 이러한 체험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소시킵니다.
 
 초자연적 이러한 체험들은 전통적이 유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육신에서 일어나 이상한 소리를 듣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인 곳을 떠다니다가 어떤 발광체를 조우하게 됩니다. 이런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은 변화됩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단지 미국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문화와 다른 민족에게도 있습니다. 게다가 심리적 작품과 종교 의식들은 이러한 경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U.S.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1983년 7월 11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평가들이 이러한 체험을 단순히 진정제나 뇌속의 화학반응 등에 기인한 꿈, 날조, 환각작용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5, 6권의 책들이 이러한 현상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코네티컷 대학에 설립된 국제유사죽음(New Death) 연구기관은 이러한 분야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많은 연구를 통해서 죽음의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고 코네티컷 대학의 심리학자 케네트 링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사 죽음의 체험이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죽음이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뿐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들이 영원한 진리의 기초가 될 수는 없고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우리의 신념의 초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점검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고나한 성경의 정의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은 한 번 죽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가능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앞서 얘기한 유사죽음에 고나한 얘기 중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믿는 자이든 불신자이든 이러한 체험에 있어서 죽음이 결코 부정적인 결과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만일 모든 죽음의 체험이 동일하다면 심판이나 지옥은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 이탈의 체험의 원출처가 무엇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죽음의 진실과 구원에 대해 사람들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것은 하늘 안식에 대한 기독교인의 확신에 대응하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죽음에 고나한 보다 나은 이해를 얻기 위한 욕망을 '새로운 강박 관념'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 주제를 생각함에 있어 균형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 때 우리는 바울이 골 1:27에서 얘기하는 '영광의 소망'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죽을 때 의사들이 하나님과 의견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운 질문은 위스콘신주 메디칼 대학의 약학과 조교로 일하는 사람이 던진 질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이러한 질문에 봉착할 것이며 죽음의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직시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얘기해 줍니다. 신체적 죽음은 영혼이 신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약 2:26).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유물론자들에게 있어 죽음은 멸절을 뜻합니다. 힌두교와 불교도는 죽음이란 환생을 뜻합니다. 태러리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죽음이란 자기 주장에 대한 보상의 길을 제공합니다. 모슬렘 시트 교도들은 그들이 죽이는 이단들(특히 기독교도나 유대인들)로 인해 천국에서 기쁨과 같은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언제 사람이 죽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최근의 역사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열심히 토론되어온 주제입니다. 죽음학이라는 비교적 생소한 단어가 생기고 학과가 생겼습니다.. 죽음학은 죽음의 과학 곧 죽음에 대한 연구인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죽음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데이비드 뎀프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죽음은 전통적 종교 생활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한 죽음은 자연 질서의 일부라는 믿음도 사라져 버렸다. 또한 죽음은 자연 질서의 일부라는 믿음도 사라져 버렸다. 죽음이 신학적으로 조명되었을 때, 고통자체가 영적 승화를 이루는 수단으로 생각되었을 때, 사람이 죽음 이후의 삶을 믿었을 때, 죽음은 보다 더 잘 용납되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가 채플린 필 메인리입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 메디칼 센터에서 수년간 봉사해온 자비심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수신기를 차고 다녔으며 어떤 의사의 환자가 죽게 되면 그 의사의 도움 요청에 신속히 응할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슬픔에 잠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사무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의료시설 중 하나인데 채플린 메인리는 매일 그 방 벽에 사망자 명단을 걸어 놓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의학적 용어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의학적 죽음은 심장이 멎고 혈관 압력을 느낄 수 없고 신체 기온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필수 기능이 정지할 때 그 환자는 죽었다고 일반적으로 동의합니다.
 
 진짜 죽음은 뇌파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한 경우입니다. 일단의 의사들, 법률가들, 신학자들,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하버드의 한 위원회는 '뇌사'가 무엇인지를 결정했습니다. 네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1. 무반응
2. 숨쉬기와 운동의 정지
3. 반사 작용이 없음
4. 평탄한 뇌파기록
 
 가장 완전한 죽음에 대한 정의는 '필수 기능의 회복 불가능한 손실'이라고 여겨집니다. 즉 죽음은 신체적인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모든 의사들, 법률가들, 문외한들이 죽음의 정확한 순간, 죽음의 과정에 대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몇몇 사람의 의학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소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 친구 하나가 턱슨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의 병명은 폐렴과 러시아 감기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그는 세 번이나 숨을 멈추고 의학적인 죽음의 증상들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공호흡에 의해서 세 번이나 회생하였습니다. 그가 퇴원할 때 아리조나 데일리 스타지는 머리기사에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거의 죽었던 사람이 집에 돌아왔다. 간호원들은 이것을 기적으로 믿고 있다."
 
 의사들은 종종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 의사 협회는 "의사의 사회적 책무는 생을 유지시키며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사들까지도 언제 생을 지탱시켜야 할지 논쟁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소생한 것은 요즈음 유행하는 의료적 마술 이상의 것입니다. 예컨데 엘리야가 어린아이 하나를 회생시켰던 경우입니다. 그 아이는 병이 심하였고 곧 숨이 끊어졌습니다(왕상 17:17). 그리고 엘리야는 아마도 우리가 얘기하는 인공호흡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 위해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데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왕상 17:21).
 
 엘리사 또한 적십자의 긴급구조코스를 밟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아이가 있는 집에 들어가 기도하고 난후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 4:3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문 의료인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매년 내가 신체검사를 받는 메이요 병원의 전문의들에게 그러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도 종종 죽음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압니다. 의사들은 죽음에 대한 최종 권세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권세만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의사와 환자의 딜레마입니다.
 
 때때로 죽음이란 문제는 너무나도 미묘하여 극도의 고난 가운데 욥이 던졌던 질문이 언급되곤 합니다. 그는 묻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욥 28:12,13).
1968년 존 스타키쉬라는 62세 된 사람이 휴스턴 성 누가병원의 쿨리 박사로부터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심장 기증자는 36세 된 클래른스 닉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닉스는 한 떼의 무리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뇌를 다쳐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뇌파 활동이 없었고 호흡은 멎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심장은 얼마간 계속 박동했습니다. 클리 박사는 닉스의 몸에서 심장을 떼내어 스타키쉬에게 이식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사와 기증자와 닉스의 가해자들간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자 윤리적 문제가 야기되었습니다. 닉스를 구타한 사람들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재판에서 닉스의 심장을 떼어낼 때 그의 심장은 아직 박동하고 있었다고 변호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의사들이 닉스를 죽인 살인자라고 공격하였습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어떤 의사는 당시 닉스의 뇌가 활동을 중지했고 호흡이 멎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증언한 반면 또 다른 의사는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신체적 죽음의 정의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따라서 내가 그 질문에 최종적으로 과학적 정답을 내릴 마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어떤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기는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 생명이 끝나게끔 결정하십니다. 혹자는 인생의 결정은 이 장(章)의 끝부분이 될 뿐이지 이 책의 마지막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예컨데 구약에서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고치시고 15년 생명을 연장해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죽은지 사흘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내가 믿기로 하나님은 의사들로 하여금 현재 의료기술을 통해 신체적 생명을 연장시키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는 상상치 못하던 일입니다. 나는 인간의 영혼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노련한 의사들의 재능에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들을 치료하며 그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죽음이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아직도 인류가 직면한 궁극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오늘날 죽음을 연구하며 토론하고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못됩니다. 어떤 젊은 목회자가 로스앤젤레스의 한 교회에서 개최된 일련의 세미나에 관하여 말해 주셨습니다. 다섯 가지 주제 중 하나가 죽음이었는데 가장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는 '죽음에 관한 종교 윤리적인 문제들'이란 강의가 매우 인기있는 강좌입니다. U.S.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죽음에 관한 새로운 이해'라는 주제의 특별기사를 보도했습니다(1983. 7. 11).
 
 이제 금기가 하나 제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의 과정에 관한 문제에 뛰어드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이해하고 죽음의 체험에 적용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이해해야만 할 때는 우리가 아직도 건강하고 숨을 쉬고 있는 이 때입니다. 정신건강에 종사하는 사람들, 철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심지어 의사들까지도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같이 말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느니라"(고전 2:5)
 
 죤 트랩은 300여년 전 생존했던 영국의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도 적절한 때가 있다. 만일 그가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그 시간을 택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현실적으로 다루게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복잡한 우리 인생을 살려면 또 어쩔 수 없이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3장
죽음, 공포의 대왕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욥 18:14).
 
 한 친구가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막 들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파티 석상의 대화가 일순간 잠잠해 졌습니다. 한 정신병 전문의가 말했습니다. "나는 죽음이 끔찍해." 그는 건장하고 멋있고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곧 자신의 나약한 휜소리에 쓴 웃음을 지었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바를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의료술과 진료 기술이 날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죽음의 공포를 진정시킬 방법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새롭게 생겨난 정신병의 일종이 아닙니다. 인류가 있은 이후로 항상 있어온 문제입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로 거인 골리앗과 상대하였고 모든 적들을 추적하여 섬멸시킨 용감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절규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찢어지듯 괴롭고 죽음의 공포가 나를 덮치옵니다. 무서움과 공포가 온 몸을 뒤덮어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립니다"(시 55:4,5 공동번역).
 
 죽음을 맞이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도는 그 나이와 여건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다윗이 이 말을 한 때는 골리앗과 맞서 싸우던 10대 청소년기가 아닙니다. 그가 늙고 병들고 친구들로부터 배척받았을 때 일입니다. 때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의 공포가 현저하게 증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또 야외 생활과 장거리 보행으로 체질이 다져졌습니다. 그런데도 갈리리 지방에서 흔히 이는 동풍이 휘말렸을 때 절망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질렀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 8:25 새번역). 그들은 죽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내 친구 잭 블랙은 두려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두려움은 불안, 놀람, 경악, 당황, 전율, 공포를 말하는 감정이다."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누구나 이 감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공포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이것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정상적이며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리고 죽음, 죽음의 경험은 미지의 대상입니다.
 
 과학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킨 지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 이전보다 오히려 커지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합니다. 비록 이 사실을 감추거나 부정하려고 하지만 말입니다. 어떤 정신병 전문의들은 죽음의 공포가 많은 정신질환을 유발시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응급 의료 시설이 죽음의 공포를 증대시킨다고 믿습니다. 응급시설 때문에 사람들은 사람이라기 보다 물건처럼 취급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 사람들의 80퍼센트는 가정보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보다 심해지고 있다는 다른 증거입니다. 죽음은 고독한 일입니다. 데이비드 뎀프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병원들은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환자가 죽을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해 환자에게 감추려고 하며, 임종 시간이 다가오면 환자를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격리시킨다."

죽음을 감추려는 노력
 
 어떤 사람들은 죽을 가능성이 많은 환자에게 사실을 말해주면 환자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믿습니다. 환자가 "나 죽을 것 같애"라고 체념섞인 소리를 하면 "아니야, 그런 소리 하면 안돼. 너는 우리 모두와 함께 오래 살거야"라고 거짓말로 격려하기 십상입니다. 이런 거짓말을 하기는 가족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아주 자상하고 환자를 가장 많이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을 감추려는 노력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서, 특히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는 생각하기 싫어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는 것에 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비록 그런 생각이 두렵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내가 진실과 사랑이 필요한 때에 억지 웃음을 짓는 사람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내 아내 룻이 암으로 죽어간 목사 사모님 한 분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계속해서 회복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전화를 했을 때 그 환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아무도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아. 제발 나한테 천국 이야기를 해줄래." 그들은 한 시간 이상 동안 놀라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함께 웃으면서 하늘의 집에 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다른 여자분이 자신의 오빠 병간호 간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오빠는 격리 병동에서 중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분은 환자에게 감염될까봐 가운과 마스크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환자는 여자분의 미소나 손길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환자의 몸에는 호스가 꽂혀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자분은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오빠, 며칠 후면 여기서 걸어 나가게 될거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힘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늘나라로 가는 중에 있다는 사실을 그 여자분에게 말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환자는 이틀 후에 죽었습니다. 그 동생은 그에게 쓸데없는 기대감보다 영원한 집에 관해서 확신있게 말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희망과 자비로운 진실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이와 같은 순간에 우리를 지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뿐입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죽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사실을 감추려고 자주 노력하지만 이것이 죽음의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합니다. 물론 우리들 안에는 대부분 가능한 한 육신의 생명을 오래 유지하려는 강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명한 목표가 앞에 있으면 그때까지 살려는 강한 욕망으로 인해서 임종이 연기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내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와 그 아내 죠아니가 장기간의 유럽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일리노이에 있던 장인이 불과 며칠 밖에 살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 모아서 "마지막으로 죠아니를 보고 싶구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딸과 사위의 여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병세를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계획대로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였고 장인은 열흘 후에 사랑하는 딸의 품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스토니 브룩에 있는 뉴욕 주립 대학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의 보고에 따르면 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이 자신들에게 아주 중요한 날까지는 목숨을 연장해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서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명절등 이런 현상은 유명 인사의 경우 더욱 뚜렷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들이 남의 주목을 받기 때문입니다. 필립스는 이 유명 인사들이 자기 생일 수개월 전에는 죽이 않고 생일 후 3개월 이후에 거의 대부분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습니다. 예를 들면 토마스 제퍼슨과 요한 아담스가 7월 4일에 죽은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이날은 그들이 독립 선언문에 서명하지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코리 텐 붐의 죽음을 들은 그날을 기억합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게쉬타포의 손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준 유명한 네델란드 여성입니다. 그후 그녀는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악명 높은 레벤스버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녀의 여동생은 그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코리는 석방되어 30년 이상이나 전세계를 두루 다니며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하였습니다. 코리의 이야기는 영화「피난처」와   그의 여러 권의 책에서 전 미국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과 동역자들은 그를 위해서 대대적인 생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지막 5년 동안 그는 병상에 누워서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생일 잔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코리는 1983년 4월 15일 그의 95번쨰 생일에 눈을 감았습니다. 한 친구의 말처럼 이 날은 코리의 생애 중 가장 멋진 생일 잔치였을 것입니다.
 
 코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죽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던 오랜 여생을 마쳤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더 이상 할 일이 남아있지 않다고 느껴서 금방 죽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은퇴 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를 가지고 계속 활동하는 사람들보다 일찍 죽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잃고 홀로 남은 사람들이 일년 이내에 죽었다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습니다.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에 생의 의욕이 없어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느끼지 못하면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이게 됩니다.
 
 데이비드 램프시의 연구에 의하면 60세 이상의 노인 260명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죽은 것이 두렵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10퍼센트에 불과하였습니다. 저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비율이 그렇게 높은 선상은 거의 같은 비율(77%)의 사람들이 내세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있는 통계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생의 활기가 어느 정도 떨어진 때에도 믿음을 통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것은 신자인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는 내세가 영화 속의 집처럼 공허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문제임을 확증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나이나 건강, 가족, 사회적·종교적 배경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죽을 수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병원에서 한 고비를 넘기거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후에는 "살아 있다는 것은 참 좋구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은 의외로 죽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군목인 필 매늘리는 자신이 군병원 목사로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주 평안히 죽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의사들이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는 극심한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는 "평안히 잠들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G.K.체스터톤은 "자비의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삶 때문인 듯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부분 예상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이 닥치고 나면 두려움은 상당 부분 사라지고 맙니다.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할 것을 생각하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떨지만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서는 뛸듯이 기뻐합니다. 내 생각에는 죽음도 이와 같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실제 죽음의 순간에 다가서면 그 두려움의 위력은 시들해지고마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세상과 이단들
 
 죽음을 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태도 가운데 하나는 "나는 그런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죽음에 대한 부정입니다. 물론 이 말이 우리에게 절대로 죽음이란 사실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이 태도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도 우리가 날마다 죽음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어야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사들이 죽음의 부정이 치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죽지 않아"라는 태도가 생명을 연장하는 확신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는 웃는 것입니다. 어떤 재미있는 사람들은 찾아와서 "나는 죽을 가치도 없나봐"라고 합니다. 유우머는 우리들의 보호 기재입니다. 죽음까지 웃음거리로 만들고 죽음의 공포를 무시할 여유를 줍니다. 우리는 웃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나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근심은 우리의 용기를 꺾고 정서, 불안 혹은 공포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소(高所), 대중, 혹은 여행 공포증과 매우 흡사합니다. '사망 공포증' 즉 죽음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은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두려움이며 남편이나 아내, 또 자녀들을 과잉 보호하며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렇게 마귀의 세력을 파쇄하셨는가 하는 것과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류의 강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남자나 여자는 두려움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또 다른 태도로는 죽음이 다리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주장을 보면 죽음은 과도기적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죽음이 '우주적 영원계'로 건너가는 영혼들의 광명한 영계(靈界)라고 하는 몇몇 사교(邪敎)들의 사상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영성주의, 동양의 신비주의, 환생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신비 신앙들은 매혹적인 해답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제거해 주지만 그 값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합니다.
 
 이 책에서 나의 목적은 사교들의 다양한 신앙이나, 다른 존재 혹은 다른 생애로의 '신비한 전이'를 믿는 신앙의 위험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죽음 이후의 삶에 이르는, 보다 낫고 보다 확실한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이 확신이 없이는 생전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사교들이 매혹적인 해답들을 제시하지만 그것들은 진리에 근거한 해답이 아닙니다. 이들 중에는 너무 웃기는 것이어서 과연 제정신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과거 사교 신자였던 사람들을 치료하는 산디에고의 정신과 전문의 셀돈 B. 쟈브로우 박사는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사교가 2,500개를 상회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사교에 입교한 후 얼마 동안 생활에 진보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약과 알콜을 끊습니다. 그러나 사고의 능력을 희생합니다. 그 그룹이 그들의 모든 생활의 초점이 됩니다. 가장 심각한 점은 그들 중에 정서에 심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웨스트 코스트 신문에 한 사고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사고는 환생을 믿는 수천 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고, 그 교주는 자신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생에서는 밧세바, 모나리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였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른 인물로 환생한다고 믿는다면 이 생에 대한 책임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또 다른…또 다른 기회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음을 보는 태도가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생을 사는 태도를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은 부당한가?
 
 나는 전에 어떤 사람이 자기 일생을 뉴질랜드의 면양 목장에 비추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양의 아주 멍청한 습성을 이야기할 때 성경에 자주 나오는 양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로 어떻게 그렇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수를 쫓아갑니다. 공격을 받으면 대책이 없습니다. 특히 두려움의 공격을 받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안심시켜 주십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것이 그림 속의 떡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매애 매애' 울고 평생 동안 초지를 찾아 정처없이 헤매면서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곤 할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위대한 고전인 '천로역정'에서 용감씨가 정직씨에게 한 순례자에 관해서 묻습니다. "당신은 순례 여행 중인 두려움씨를 아십니까?" "예 아주 잘 알지요. 그는 내 생전에 만난 순례자 중 가장 골치 아픈 사람중의 하나였습니다." 정직씨가 대답했습니다.
 
 죤 번연의 묘사처럼 두려움씨는 '골치아픈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씨의 요소가 우리 모두 안에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아주 고통스러운 느낌입니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한다거나 신체적인 중병보다 훨씬 심한 아픔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 타인이 되었을 때, 즉 우리의 입과 마음이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절규가 묵묵부답이 될 때, 그때 옵니다. 양이 목자 없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캄캄한 데서 걸려 넘어질 뿐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방으로 헤매고 서로 부딪히며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설 때마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잭 블랙 목사님이 자신의 수년간의 목회 생활을 돌아보시면서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회지에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냥 평범한 두려움이 아니라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극심한 두려움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외없이 신앙적 정체감을 거의, 아니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까운 가족도 없었습니다. 바위덩이 같은 아집은 있지만 자존심은 형편없습니다. 그리고 생에 지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인간상과 가난하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둘러선 가운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을 비교해 봅시다. 우리의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준비하도록 우리들을 훈련시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준비는 예외입니다. 나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을 주제로 한 설교를 지금까지 거의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500번 이상이나 두려움에 관해서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일년 동안 거의 매일 하나씩 묵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몇 개만이라도 묵상하십시오! 여기에서는 서너 개만 살펴봅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26:24).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구원을 보라"(출 14:13).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신 3:2,22).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눅 8:50).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 1:17).
"고난을 두려워 말라"(계 2:10).
 
 잠깐만 있어 봅시다. 그러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두려워 말라'고 말하는 반면 또 '두려워하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살펴보건대 둘다 맞습니다. 두려움이란 양면을 가진 말입니다. 이것은 무서움, 심한 걱정을 특징으로 하는 감정입니다. 후자는 신뢰와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가 냉혹한 간수에게 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설설 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대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말하는 의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 33:6). 이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을 볼 때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입니다.
 
 무서워하는 것이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수시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의 조그마한 손이 커다란 그 아버지의 손에 꼭 잡혀 있는 것을 보면 신뢰를 자아내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의 산중에 비가 오고 꽁꽁 얼어붙어서 꾸불꾸불한 길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과 걸으면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나무 사이로 미끄럼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 손을 잡고 있을 때에는 덜 무서웠습니다. 애들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는 것은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를 신뢰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꼭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서워 하셨는가?
 
 우리가 알기로는 인류 역사상 죄없이 출생하고 죄없이 살다가 죄없이 죽은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고민하고 근심하여 두려워 하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보내신 최후의 몇 시간 동안 그 작은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보다 극적인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장면을 상상해서 예수님이 체험하셨을 엄청난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틀'이란 의미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샐러드나 요리 원료로 우리들에게 아주 친숙한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틴 지방의 값진 주산품입니다. 감람산은 신약에 자주 나오는데 특히 예수님의 경건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수시로 제자들과 함께 앉으셔서 장차 닥쳐올 일들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또 하루의 피곤한 일을 마치고 기도와 휴식을 위해서 저녁마다 물러가신 곳도 바로 이 감람산이었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감람나무들은 이 겟세마네 동산 안에 있습니다. 오늘날 예루살렘 방문객들은 이 나무들을 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가서 만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호기심에 찬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성지 순례 기념품을 구하느라 이 고령의 꾸불꾸불한 나무를 훼손하는 까닭에 보호시설을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올리브 열매를 따면 거대한 맷돌에 넣어 누르고 으깨어서 즙을 짜 값진 올리브유를 얻습니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비천과 패배, 더 나아가 죽음의 맷돌이 예수님을 갈아서 극도의 고통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기름 짜는 장소인 겟세마네의 정신적인 고통은 너무 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거룩하신 아버지께 면제를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뜻일 경우에만 말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친구를 얼마나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최대의 시련 시기인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원하셨고 필요로 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공동 번역). 예수님은 친구들, 그를 따르겠다고 자신있게 말한 그 친구들, 그 친구들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땅에 쓰러져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을 이기지 못한 친구들은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그를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한 그 제자들은 앉아 졸면서 예수님을 위로하는 정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그 고통이 컸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이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까? 의학 사전에 보면 이 상태를 '크로미드로시스'(Chromidrosis)라고 규정합니다. 강렬한 정서적 압박이 실제로 혈관을 확장시켜 혈관이 터져서 땀샘과 연결되게 되는 상태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엄청난 감정을 이해할 정도도 못 됩니다.
 
 예수님은 세 차례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해결책이 있었습니까? 잠깐만이라도 이와 같은 죽음의 전율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다가오는 십자가 처형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거닐고,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시고, 결혼식에 참석하시며 친구들과 함께 먹고, 배를 타고, 유월절 절기에 성전에서 일하시는 등의 즐거움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은 원수였습니다. '할만하시거든'이라고 기도하실 때 그는 그의 임박한 죽음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재차 확인하시고 싶었습니다. "

"어디 다른 길은 없는가?"
 
 그러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간구에서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잔'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나(시 23:5) 하나님의 진노를(시 75:8)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기도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므로 이 '잔'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십자가에서 겪으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의 죄와 죄책을 지셔야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도무지 생각지도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그 진노의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할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던지신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주권적인 의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심으로 그 해답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처리하실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죄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 채 그냥 용서하시려고 한다면 공의, 곧 잘못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며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만일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그냥 심판하신다면 우리들에게는 영생과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롬 3:23).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구원의 길을 마련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이 무서운 딜레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 뿐이었습니다. 해묵은 갈등이 이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죄없으신 분에게 지워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더럽고 다 떨어진 낡은 오바처럼 우리의 죄를 옷입으심으로 그 죄-우리의 죄, 나의 죄-는 십자가 위에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한 최후의 속죄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는 우리에게, 깨끗하고 반짝 반짝한 새 옷처럼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죄는 심판되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이 무서운 곤경을 놓고 자신 속에서 싸움을 하였지만 결국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체념의 한숨섞인 기도가 아닙니다. 철저한 신뢰의 야무진 음성으로 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아버지의 뜻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전폭적이며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함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자신이 세상 죄를 위한 희생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실하게 자각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지상 사역의 최우선 과제임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심이 드러난 곳입니다. 그는 순종 혹은 불순종의 선택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보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함께 느낄 수 있으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사단은 예수님의 전사역을 통하여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역 초기 광야에서의 시험은 겟세마네의 시험에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주께서는 헌신적인 3년간의 생활과 마지막 주간의 스트레스를 겪고 난 후 이 시점에서 유혹에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어떤 불신자들은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은 나약함의 표시였다고 말합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극한 정서적 갈등없이 죽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어떤 대의를 위해 죽는 것, 혹은 국가나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과 온 세상을 위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세대의 집적된 죄악을 위하여 죽는 것은 완전히 별개입니다. 예수님은 살인, 간음, 사기, 거짓말에 대하여 그외 인류의 다른 모든 악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유한한 이성(理性)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비판하는 한 사람이 대학 강의실에서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놓고 고통하지 않았습니다. 냉정하게 독이든 사약을 마셨고 머리를 끝까지 자랑스럽게 꼿꼿이 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이스의 위대한 선생이자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확신에 충실하기 위해 사형을 기꺼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만을 위해 죽었습니다. 인류 역상의 어떤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상으로 신체적인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고통의 본질에 있는 흑암의 세력과의 싸움은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단을 쳐부술 수 있었던 인간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과 우리의 선택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죽어 없어지고 너희는 살아 남는구나 그러나 우리 중에 눅가 더 나은 길을 가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비교하면서 진기한 대조에 놀랐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살해서 죽었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나도 십자가와 자살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하나의 생명과 한 번의 죽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살 수도, 우리 자신의 이기심 속에서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남을 위해 죽는다는 사고가 놀랍습니까? 예수께서 아버지께 '예'라고 하셨을 때 그 '예'가 예수께 무엇을 의미하였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고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 때 우리는 이미 그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달리셨듯이 우리의 죄악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매일 아침 산책을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성구를 암송합니다. 그는 어느날 아침 다음 성구를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 반대는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대신 우리 자아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우리의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 올리브 나무 숲에서 "공포의 대왕"이 그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이슬 젖은 땅에서 피와 땀이 뒤섞이도록 기도하실 때 공포가 그를 엄습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극심한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서 그 죽음의 공포를 제거해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갖는 것을 창피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기진해 있을 때 힘을 주시고 우리가 겁에 질려 있을 때 용기를 주시고 우리가 상심하고 있을 때 위로해 주십니다.
 
 생활 가운데 두려움이 찾아올 때(예,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믿음이 그 큰 두려움을 패퇴시키고 우리에게 승리를 줄 것입니다. 아는 것이 두려움을 방지하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알면 두려움과 싸울 능력을 갖게 됩니다. 승리의 열쇠는 다음과 같은 솔로몬의 말 속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잠 1:7).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 자들의 땅에 있을 동안 그것을 함께 탐구할 수 있습니다.

제4장
나이 어린 사람들의 죽음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유년기나 청소년기의 자녀 혹은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게 빼앗기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쓰립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비극적인 손실로 슬픔에 잠긴 내 가정 식구, 동료나 친구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노인이 돌아가시는 것은 우리가 예상합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을 훔쳐갈 때 죽음은 정말 잔인한 도둑 같습니다. 칼 정은 "이것은 문장 중간에 찍힌 마침표이다"고 하였습니다.
 
 비행기 충돌 사고로 가장 친할 친구를 잃은 한 소년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시를 썼습니다. "너무나 너무나 커서 채울 수 없는 공허감." 이 말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죽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합니다. 만약 성경에서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성경은 시로 가치없는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일찍 죽는 비운에 직면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 장에서 나는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몇 가지 모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아픔에서 그들이 발견한 성경의 대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룻의 동생
 
 사람들은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간수합니다. 내 아내는 1925년 그녀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오랫동안 그녀에게 위로의 원천이었습니다. 벨 박사는 중국의 의료 선교사로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의사와 함께 내전, 마적, 일본 침략 등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짓고 확장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룻은 중국 북부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아버지가 그 중요한 편지를 쓰신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가 생정에 하는 작은 일들이 다음 세대 어떤 사람의 절실한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나와 아내 룻은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젖먹이인 넬슨 벨 2세는 10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18일간 앓다가 죽었습니다. 벨 박사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와 버지니아는 그가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애기 곁에는 우리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평화스러웠는지요! 아무런 허둥거림도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이 너무나 잠잠하게 우리를 떠나서 하나님께 돌아갔습니다.
애기가 떠남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쓰라림이 남았고 우리의 팔은 텅빈 것을 느꼈습니다. 아! 그러나 우리는 그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뻤습니다. 이 일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였을 뿐이며, 하늘의 생활을 고대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와 기쁨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애기를 돌려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불평도, 다른 약을 썼더라면 하는 후회도 없습니다. 가능한 일은 모두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애기가 아플 때 우리는 우리가 직접 간호하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 추억은 지금도 나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는 완벽하리만치 건강한 애기였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내가 그 때까지 본 아이들 가운데 가장 우량아였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 뿐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습니다.
나와 버지니아는 애기가 죽었을 때 우리가 직접 눈을 감기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버지니아는 바로 로스와 룻의 학교가 있는 탈보츠로 갔습니다. 그는 딸들이 이 소식을 중국인을 통해서 듣기 보다 직접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딸들은 그 소식에 실신할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달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위대한 소망을 아주 자세하고 분명하게 전해주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해가 지자 우리는 그를 안식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배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가 그곳에 온 많은 중국인 친구들에게 복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묘지(수리 병원 소유)를 떠나 올 때 버지니아는 나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찬송이 있는데, 눈의 눈물은 억제할 수가 없군요." 무덤에서 우리는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란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영원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우리에게 갑절로 소중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소망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여기 중국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꽃 피울 기회조차 얻지 못한 짧은 생애에서, 배울 기회조차 얻지 못한 그 마음에서, 자랄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무덤에 누워 있는 그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질문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야만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더 나은 지혜와 분별력을 원하며, 마치 분실한 돈이나 감추인 보물을 찾듯이 그것을 찾고 있습니까? 그러면 지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지식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신뢰하는 일의 중요성을 곧 배우게 될 것입니다"(잠 2:3-5).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예, 죽음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안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난을 주신 이유를 안다면 그 재난으로 인한 고통이 훨씬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왜 하나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게 허용하셨는지 평생토록 이해하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때는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의미에 대하여 정확한 해답을 얻기도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8살난 아들이 졸지에 죽고 난 뒤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어느날 오후 캔트는 그의 새 비행기를 타보려고 친구와 함께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 도중 추락해서 두 소년은 즉석에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캔트는 대학에 들어가 항공 공학을 공부할 예정이었고 선교 항공 협회(Mission Aviation Fellowship)의 파이롯이 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부모들의 말에 의하면 1963년 우리의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 때가 9살이었고 이제 18살이 되었을 때 그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갔습니다.
 
 그렇지만 이 9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 이 소년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서 걸쳐 성장하는 것 이상으로 성숙하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주제 논문을 한편 썼는데, 이 논문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이해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학교 과제에서 어떻게 전도 대회에 가게 되었고 다음 사실을 확신하였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영적 요소는 성경이 죄라고 부르는 것 때문에 내 삶 속에 없었습니다…. 이 순간 그래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위해 행하신 것을 인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로 내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도록 해 주시도록 아뢰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캔트의 생애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이루기 전에 짧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도록 해달라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까? 추락사고 이후 수년간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생명의 불확실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추도 예배에 참석한 한 저명한 의사는 확신을 얻어 그의 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범세계적인 기독의사 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캔트의 부모들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졸지에 자녀를 잃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습니다.
 
 죽음이 갑자기 특히 아이들에게 닥칠 때, 그 충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위로가 없다면, 그 상심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로할 길은 정말 막막합니다. 한 여인이 제재소 뒤에서 통나무에 깔린 자기의 6살 난 아들을 발견한 뒤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간호원이었기 때문에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나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근처 캠프장에서 달려온 향의에게,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되지 않을지 물었습니다. 그는 일어서면서 그린 버몬트 지방 사투리로 대답했습니다. '병원에 가봐야 해줄 일이 없습니다. 차라리 영안실로 데려가는게 낫겠습니다.' 그때 나는 아스러져서 피투성이가 된 아들 곁에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크래그가 본향으로 돌아간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친구들과 사람들을 올려다 보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크래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크래그는 천국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있답니다. 그는 지난 봄에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지요. 나는 그가 예수님의 품에 평안히 있는 것을 압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때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땅을 치면서 가슴이 메어지도록 통곡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평안과 힘을 주셨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필요했었습니다. 그 이후 나와 내 남편은 매순간마다 끊임없이 그분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7).
 
 나에게는 샌디라는 이름을 가진 잘 생기고 똑똑한 조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레이톤 포드와 제인 포드 부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지기를 싫어하는 특출한 운동 선수였는데 고3때 한 경주의 마지막 부분에서 거의 주저 않을뻔 하였습니다. 신문들은 비틀거리면서도 경주를 놓치지 않으려고 골인선에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실었습니다. 검사 결과 그에게 아주 희귀한 김장병이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이 병은 이따금씩 그의 심장 박동을 자나치게 빠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으로 인해 불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샌디는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캠퍼스 리더와 초교파 기독교 연합의 회장이 되었고 그의 증거로 많은 생명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묵은 심장병이 재발하였습니다. 많은 논의와 기도 끝이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주일 오후 그를 방문한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뉴욕에서 노스 캐롤라이나 몬트리트의 우리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샌디의 여자 친구와 함께 내 여동생인 제인이 들어와서 우리는 함께 이야기 하고 기도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후 나는 윈스턴 살렘에 가서 그의 아버지 레이튼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곳 교회에서 1주일간 집회를 인도하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샌디를 하나님께 의탁하였습니다. 목요일 의사가 수술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의 심장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샌디의 생동하는 젊은 생애, 그렇게도 꿈과 기대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으로 가득차 있던 생애가 끝났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샌디의 죽음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분을 신뢰할만 합니다. 내 아내 룻이 가장 알맞은 해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샌디에게 주신 일이 달성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후 샌디의 삶과 죽음에 관한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수천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념 기금이 조성되어 매년 선교와 복음 전도를 위해 준비하느라고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샌디의 죽음을 이용하셔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명을 일으키셨습니다.
 
 내 조카 샌디의 추도 예배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의 생애는 일찍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완성된 것입니다.
 
  고 죠 베일리는 그가 직접 경험한 청소년의 죽음에 관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세 자녀를 잃었습니다. 하나는 18일만에 수술 받다가, 하나는 다섯 살 때 백혈병으로, 또 하나는 열여덟살 때 썰매 사고 후 가벼운 혈우병이 복합되어, 죠는 말합니다. "모든 죽음 가운데 아이의 죽음이 가장 이상하고 견디기 힘듭니다." 그는 부모의 슬픔을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덧붙여 말합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일부가 묻힙니다."
 
 "사람의 모든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안"(빌 4:7, 새번역)을 무심 혹은 무감각인 것으로 평가한다면, 이것은 실수입니다. 애기 혹은 청소년을 잃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심정에서는 격정이 솟구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분명한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7, KJV).
 
 "죽어가는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어요." 어떤 어머니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이 경우 이러한 시험을 체험해 보지 않은 우리들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시험이 믿음에 옵니다.
 
 이 시험을 맛본 죠 베일리는 말합니다. "중병에 걸린 아이의 응석을 받아 주는 것은 그에게 잘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는 무엇보다도 아이를 특별 대우하기 보다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평소처럼 대해 주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어렵겠지만 체벌도 해야합니다. 물론 아픈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해야 되겠지요."

에리카의 경우
 
 에리카는 로렌과 데이브의 첫 애기였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인형이었고 테이브가 청년 담당 목사로 있는 교회 회중들에게 대인기였습니다. 그런데 수개월 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에리카가 목을 잘 가누지 못했습니다. 한 살이 되었을 때 문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에리카는 보통 애들처럼 성장하지 못하였습니다. 걱정에 한 젊은 부부는 애기를 의학 전문가들과 신경 전문의에게 데려가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아직까지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희귀병에 걸렸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두 살 때 에리카는 병에 대한 모든 면역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폐렴에 걸려 병원엘 들락날락 했습니다. 로렌은 교회 활동을 등한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룹 성경 공부도 포기하고 모든 시간을 에리카 간호에만 쏟았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아이의 감염만 막으면 건강해질 것 같았습니다.
 
 에리카의 생존 투쟁은 로렌과 에리카에게 절망적으로 되어갔습니다. 의료 기관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로렌에게 말했습니다. "에리카가 낫지 않는 것은 다 너의 믿음 부족 때문이야." 그때 로렌은 자신의 신앙이 어느정도 바닥이었는지 기억합니다.
 
 이른 아침 데이브는 어린 딸의 상태를 알기 위해 갔습니다. 그때 딸의 피부가 평소 핑크빛과는 달리 거무스레한 회색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에리카를 급히 병원 응급실로 옮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전기 충격을 주고 에리카를 소생시키기 위한 응급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에리카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데이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애를 집으로 데려 가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나 봅니다. 감사함니다. 우리는 그분의 돌보심과 그분의 시간을 의지합니다."
 
 로렌이 두 번째 애기를 임신하고, 에리카의 질병이 그 병원 간부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점차 두 번째 애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전학 전문가는 로렌과 데이브에게 그들의 애기들 중에 동일한 질병을 가지고 태어날 확률은 1/4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데이브가 병원에서 나가고 없을 때 에리카의 담당의사가 로렌이게 유산을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인이 이 임신을 중단시키기를 원하는지 그 여부를 알기 위해 적어도 양수 검사를 생각해 봅시다"고 했습니다.
 
 유산을 권유 받았다는 말을 듣고 데이브는 화를 냈습니다. "그것은 지옥에서나 할 소리야!" 그날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영적인 것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외에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다음 두 주간 동안 이 젊은 부부는 격심한 정서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루는 데이브가 이렇게 썼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용기를 내고 있고 어쩌면 아직 에리카에게 투병의 기회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불과 2-3일 후에 그와 로렌은, 에리카가 또 발작을 일으켜서 쓰러지면 소생시키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써야 할까라는 심각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런 결정에 우리가 어떻게 가담할 수 있지? 우리는 이와 같은 시험에 직면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다른 것은 어떤 것도 다 소용이 없다."
 
 유산을 제의했던 의사는 데이브와 로렌에게 그들의 침착함이 자신이 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중에 고통을 당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솔직히 인정합니다. 우리가 따로 있을 때 붙들고 울고 같이 괴로워합니다…. 어떤 때는 남과 함께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느낍니다." 데이브의 말입니다.
 
 어린 에리카의 이땅 생명의 마지막 날 그 부모는 중대한 결정을 즉시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에리카를 살리기 위해 비상 수단을 쓰기 원하는지 의사가 물었습니다. 부모들은 이제 "아니오"라고 말할 시간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로렌은 에리카를 품에 안고 조용히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 딸의 생명이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리카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 때문에, 병원을 찾아오는 친구들과 기도하는 교회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리카가 죽은 후 데이브와 로렌은 건강한 딸을 둘 더 얻었습니다. 유산하라는 병원의 권고를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에리카의 이야기는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부모들은 에리카가 병원에 있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로렌은 말합니다. "시간이 병을 치료하지 않습니다.…문제는 우리가 그 치료의 시간을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블랙 잭의 말처럼 긴 삶이나 짧은 삶, 하나님께는 둘 다 마찬가지로 귀중합니다.

로빈의 이야기

지난 30년 동안 전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은 2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간 작은 소녀의 삶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로빈이란 이름을 가진 소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다운 증후군을 앓았습니다. 그는 이 심장병 때문에 오래 살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날 로빈의 어머니는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어느 목사님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과 부군께서는 곧 우리 주님께서 이 아이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바를 받게 되실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아이들이 세상에 오도록 허용된 것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인내와 지각을 배우고 더욱 경건하게 될 것입니다. 로저스 부인 당신은 정말 주님께 복받은 분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스런 로빈이 언젠가 이세상에서 훌륭하게 넉넉히 보상받을 것을 확신하실 것입니다."
 
 로빈의 부모인 로이 로저스와 데일 에반스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데일이 쓴 '알지 못하는 천사'(Angel Unaware)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데일은 그날 고통스러웠던 의사와의 면담을 기억합니다. 들은 것은 가망 없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아이가 아파하는 데도 손 쓸 수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이야기 합니다.
 
 데일이 그 작지만 놀라운 책을 썼을 때. 데일은 자신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애기, 로빈이 마치 하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썼습니다. 로빈이 아빠에 대해서 말합니다. 불구된 자녀들을 바라보면 언제나 마음이 상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왜 아이들이 고통을 받도록 허용하실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이는 "전에는 한 번도 성경을 본적 없었지만"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아이를 가진 덕분으로 새로운 로이 로저스가 태어났습니다.
 
 데일은 주님께서 로빈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두 아이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로이와 데일에게 견디기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운 교훈 때문에, 그들이 다른 고통받는 자들에게 베푼 도움 때문에, 하나님께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골짜기 안의 평안'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죄책감
 
 아이가 아플 때 부모들은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하며 자문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죄책감이 고통을 가증시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책감이 "내가…을 하기만 했더라면"이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그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을 거듭거듭 돌이켜 봅니다. 나는, 어린 딸을 공원에 데려가 개울에서 놀게 놓아 둔 일로 수년 동안 자책하며 지내는 한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감기가 걸렸는데 그것이 악성 폐렴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평생동안 자신의 행동을 나무랐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를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요 9:2). 그들은 고통이 언제나 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의 죄에 의한 직접적인 결과로 생기는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 것들에 둘려싸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경의 예에는, 그리고 청정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께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내 말의 뜻은 태어나면서부터 고통 당하거나 병들었거나 사고를 당해 죽은 아이들의 부모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벌하시는 것이 우리가 죄 지은 까닭이라고 믿는다면, 이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책을 좌절과 잘못된 죄책감을 낳고 또 남편이나 아내를 원망한다면 병든 아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가정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가정 파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녀는 우리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떤 부모들에게는 이 사실이 충격을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양육하느라 18-20년을 보냅니다. 이 기간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이행할 시기입니다(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나이가 되면 우리 자녀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른이 되었다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자녀입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의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느 때든지 우리의 자녀를 당신의 집으로 옮겨가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오셔서 "이제 네 어린 자녀의 모든 교육과 양육을 내가 맡고 싶구나"라고 하시면 기쁘게 아이를 그분의 손에 맡겨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타까웠습니다. 선생님은 온종일 가르치시느라 피곤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꼬마들이 온통 예수님 주변에 밀려 듭니다. 여러분이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 어머니들은 아들, 딸들이 예수님을 만지기를 원했고, 제자들은 쉬쉬하며 아이들을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팔을 내미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고 그냥 둬라. 하늘 나라가 아이들의 소유인 것을 모르니?"


 
 당연히 우리 모두가 어린 아이의 단순한 믿음과 신뢰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는 특별히 어린이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어린 아이의 어머니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작은 아이를 수년간이나 우리에게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아이들 다시 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재결합입니까! 영생을 선물로 주시다니 얼마나 멋진 주님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틀림없이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집으로 부르시는 것을 보니 이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어려서 죽은 아이들을 천국으로  영접하시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윗도 그의 갓난 아들이 죽었을 때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3)이라는 말로 이 소망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잠깨기 전에 죽는다면
 
 아이들이 이 짧은 기도를 중얼거릴 때 그들 중에 얼마나 그 의미를 생각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기도는 "주님 내 영혼 받아 주세요"로 마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부모님들은 이 기도를 무시하고 심지어 어떤 부모님들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들에게 죽음을 어떻게 말해 줍니까?
 
 내가 농장에서 자랄 때에는 죽음이 매일 겪는 실제였습니다. 가축들이 새끼를 낳고 또 얼마는 죽습니다. 죽음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애완동물과 함께 컸습니다. 동물 중의 얼마는 어쩔 수 없이 죽었습니다. 장황한 심리적인 설명이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 아이들은 죽음이 인간 경험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고 예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딸 애니 로츠가 이 나라의 유명한 성경 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애가 13살쯤 되었을 때 멋진 경찰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개가 죽었습니다. 물론 애니는 눈물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애가 그 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요! 나는 그 애를 서재로 데리고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하시고 장차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들을 가르쳐 주고 계시며 이 일로 인해서 그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애니와 가졌던 그 짧은 특별한 시간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애의 삶이 이러한 사건들과 성경 공부로 튼튼해질 때 장차 그 애가 어떤 인물이 될건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실 애완동물은 아이들에게 죽음을 가르칠 좋은 수단입니다. 동물의 죽음은 아이들이 그 죽음을 진지하게 대하고 아이의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그 아이가 친구나 친척의 죽음이라는 피치 못할 운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죽음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대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 현명한 부모님이라면 금방 밖에 나가서 그 사랑하는 동물을 대신할 새 강아지나 고양이를 사옵니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쓸데없이 너무 오래 슬퍼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멋지고 잘 따르던 짐승들은 가족 식구와 같고, 없어지면 아쉬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동물이 또 아이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됩니다.
 
 아내 룻이 어려서 중국에 있을 때 타르 베이비라는 이름을 가진 잡종개가 있었습니다. 그 개가 죽었을 때 애들은 담장 근처에 묻었습니다. 1980년 아내가 남동생 클레턴, 또 두 여동생 로사, 버지니아와 함께 태어난 곳을 방문하였을 때, 갖아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타르 베이비의 무덤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50년이 지났지만 아내는 그 개의 무덤이 어디있는지 기억해 내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죽음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죽음에 관해서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식구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나누는 시간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 나는 언제나 그들 주위에 있어서 그들이 날마다 격은 일들 모두를 들어줄 형편이 못되었습니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 보다는 많이 함께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애들의 엄마는 어떻게 자기들의 모든 문제를 들어줄 수 있었는지 애들은 이야기합니다. 만약 애들의 엄마가 주위에 없으면 외조부모인 벨박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애들에게 말해주기란 생활 가운데 가장 말하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잘 배려된 거짓말도 무뚝뚝한 진실보다 해롭습니다.
 
 일곱 살 난 죤은 삼촌이 잠자러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후 며칠동안 죤은 잠을 자러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깜깜한 자기 방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죽은 사람을 여행갔다고 말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죽음은 여행이 아니라 종착지입니다.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작별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버렸다는 의미가 되며, 또 돌아오리라는 쓸데없는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녀에게 죽음을 말할 때 하나님이 잔인한 분으로 비취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애들이 "하나님이 베티 숙모를 데려 가셨단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길래 이렇게 사람을 빼앗아 가는가?"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조카 캐빈에게 그의 형 샌디가 죽은 사실을 말할 때, "샌디는 하늘에 있단다"라고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죽음에 관해 사실을 숨김없이 다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늘을 상상하면 위로를 받을 것이며 더 이상 고통이나 문제가 없는 곳을 설명해 주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에 관해서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무서워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이나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하면 됩니다.

죽음의 사실
 
 아이들은 죽음을 하나의 놀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쏴 죽여" 이것은 심각한 명령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은 경찰과 도둑놈이 혹은 노스 캐롤라이나 집 근처의 산에서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위장복을 걸치고 '대 수색 섬멸 작전'을 위해 람보 칼을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그들이 자람에 따라 우리는 '죽음의 사실'을 가르치는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죽음의 사실'은 자연스런 반쪽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대량 죽음'의 시대에서 남아메리카의 지진 소식, 주요 도시들의 비행기 사고, 대서양 군도의 허리캐인 피해나 아프리카의 기아 등의 죽음 소식으로 우리는 무차별 폭격을 받아 무감각 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어린이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약 15,000개 정도의 죽음 영상을 본다고 추정됩니다. 심리학자들은 텔레비젼에서 폭력들의 증가가 성장하는 어린이들의 생활에 이미 심각한 결과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문의 보도나 스크린의 영상들이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죽기까지는 자기와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집니다. 바로 이때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가가 정확한 말을 사용해서 말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1986년 첼린저 우주선의 비극적인 폭발 후 크리스타 멕콜리프 선생님의 반에 속한 학생들은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실제와 슬픔을 감내하는 쓰라린 시간을 보냈습니다. 승무원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아픔은 그 처참한 폭발 장면을 텔레비젼 화면에 반복될 때마다 가증되었습니다. 그날 그 뉴스를 본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슬프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데는 진실이 회피보다 쉽습니다. 신자들은 출생, 신체, 영혼에 관한 어린이들의 질문을 정직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기 이전에, 어른들이 장례 절차를 이해하고 죽음에 관해 말할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죽음 가능성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른들이 분노를 표출할 때처럼 죽음을 감정으로 느끼고 그것을 눈물로 몸짓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어린이들의 편지에서 한 남자 꼬마가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 사람이 죽으면  무엇과 같은가요? 아무도 나한테 말해 주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알고 싶어요. 죽고 싶지는 않아요. 당신의 친구, 마이크."
 
 만약 내가 마이크에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선 그의 옆에 비스듬히 앉아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이크야, 언젠가는 모든 것이 죽는단다. 사람이 죽으면 그들이 살던 몸은 숨쉬는 것이나 움직이는 것, 보는 것, 듣는 것을 못해 그 몸의 주인은 더 이상 아프지도 걱정도 하지 않지. 그것을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하면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영적인 몸을 가진단다. 얘야. 너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하고 건강한 새로운 몸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단다. 이 몸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몸이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
 
 마이크나 그와 같은 모든 어린이들에게는 단순하고 정직한 대답과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만약 마이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맞게 된다면 남에게 자기 행동을 판단받지 않고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무관심이나 분노를 보일 수도 있고, 애기짓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내 친구 하나가 자기의 11살 짜리 아들에 관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큰 형이 죽고 난 뒤 매어달리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녁에 부모가 외출하려고 하면 웁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이는 어디고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보이 스카우트와 함께 1주일간 떨어져 있었는데 그 팀이 캠핑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위경련을 일으켰습니다. 다행히 유능한 상담자가 있어서 남아 있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18세가 되기 전에 부모와 사별하는 어린이는 6명 중 1명 꼴이며, 오늘날 이혼 자녀수 통계를 보면 수백만의 미성년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죽음 보다 더 나쁜 손실의 희생물이 됩니다.
 
 내 마음의 부담 가운데 하나는 이 희생물인 아이들에게 교회가 사랑의 손길을 뻗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처 입고 분노하는 아이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믿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며 이 아픔의 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른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호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 전체의 의무입니다.
 
 어린이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른들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스테판은 11살이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2주간 집에 머물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 친구들은 '너는 네 아버지 돌아가신 것이 슬프지 않은 것 같애. 아버지가 그립지도 않나 봐'라고 했습니다. 나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 애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한 애는 심지어 '네가 울지 않는 걸 보니 너는 아버지가 죽은 것이 좋은 거지'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친구들은 단지 너를 볼 댇 모두 다 자기들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얼마나 슬플까 생각하면서 네가 슬픈 모습으로 있어 주기를 바라지. 그러나 실상 네가 집에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야'라고 함하셨습니다."
 
 나는 다른 한편의 모든 스테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 정말 천국은 있단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오셨고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서 한 장소를 준비하시러 돌아가셨단다."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아이가 죽었을 때 부모들은 그 아이를 아주 고상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버린 아이는 어느 누구보다 가장 완벽한 아들이나 딸이 됩니다. 적어도 그 어머니나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는 말입니다. 나는 한 여인이 평생동안 죽은 딸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여인은 언제나 그 딸 "꼬마 루사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애가 마치 성자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을 실제 상태 이상으로 미화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쓰라린 추억을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것만 간직하는 치료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결과로 가족 관계는 더 가까워지기도 하고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예전과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의 죽음 때문에, 특히 첫째나 외동일 경우, 결혼 생활에 심각한 긴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정확한 연구가 실시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권위자들은 자녀의 죽음 이후 75퍼센트 정도의 부부가 갈라선다고 판단합니다. 특히 그들이 적절한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도움은 있습니다. C.S.루이스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할 때는 속삭이시고, 깨달을 때는 말씀하시며, 고통할 때는 소리 치십니다. 하나님의 확성기 소리는 귀머거리 세상이라도 벌떡 일어서게 하십니다."
 
 어린이들이 우리의 정신을 차리게 하고 무릎을 꿇게 하는 꼬마 나팔수일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천국의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니라"(마 19:14).

제5장
죽음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사방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박사는 미국의 위대한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의 첫 부인은 12살도 안된 세 자녀를 남겨 놓은 채 30대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반하우스는 장례식 설교를 직접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럴 때 아버지는 엄마 잃은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장례 예배를 드리러 갈 때 반하우스씨는 가족을 태우고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고속도로에서는 큰 트럭 한 대가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반하우스씨는 씁쓸히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 큰 딸을 돌아보면서 물었습니다. "얘야, 트럭에 깔리는 것과 트럭 그림자에 깔리는 것, 네 생각에는 어느 쪽이 낫겠니?"
 
 그 어린 딸은 의아해 하면서 아버지를 보고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림자에게요. 그림자는 다치게 하지 않으니까요."
 
 그때 반하우스씨는 세 자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너희 엄마는 죽음에 깔린 것이 아니고 죽음의 그림자에 깔렸단다. 그러니까 무서워할 것 없단다." 장례식에서 그는 시편 23편의 본문을 사용했습니다. 이 시편은 그 진리를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하우스 박사의 경험에서 나온 이 예화는 수많은 설교가들이 사용하였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많은 가족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죽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종착지가 아니라 여정입니다.
 
 한때 노예 상인이었던 죤 뉴우튼은 회심한 후 영국 교회에 위대한 설교가와 찬송 작사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2년 전인 1807년에 건강이 너무 약해서 거의 강단에 설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설교할 때 누군가 부축해야 했습니다. 죽기 직전 움직일 수 없이 그의 방에 갇혀 있을 때 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역마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하는 사람과 같다네. 여행자는 매순간마다 도착을 기다리며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지.... 나는 이제 포장이 끝났고 소인도 찍혀서 발송 준비를 마친 우편물이네."
 
 여러분은 뉴우튼에 관해서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쓴 찬송시는 전세계에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자비로운 주 하나님."

죽음을 부정하는 위험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느리고 덜컹거리는 역마차이든지, 아니면 빠르고 쾌적한 젯트기 여행이든지 골짜기를 지나는 이 여행에는 분명히 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행해야 되며, 길을 가는 동안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자세와 가치관에 끊임없이 공격을 받습니다. 죽음이란 주제가 탁상공론이 분명히 아니지만 자신의 죽음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몸을 잘 관리한다 하더라도 심각한 죽음의 문제를 직면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어떤 때는 신체나 정신적 조건에 여지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비기독교적인 문화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을 때 닥쳐오는 절망을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캐드린 햅번은 허세를 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죽음을 유머 감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배울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래야겠지요. 여러분이 제 나이가 되면 여러분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바퀴에 펑크가 나서 고칩니다. 그 다음에 또 정비소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더 이상 고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유머가 정말 심각할 때가 옵니다. 죽을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을 때 껄껄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첫째 반응은 "당신이 틀렸을 겁니다. 나는 아니에요"입니다. 나쁜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일단 믿지 않으려 합니다.
 
 부정은 아주 위협할 수 있습니다. 한 유명한 비뇨기과 의사가 오랫동안 아래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왔습니다. 계속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서 유사한 증상을 진단하였지만 자신의 상태가 의학의 도움을 받을수 없게 되기까지 치료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나쁜 소식 듣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안듣는 쪽을 택했던 것입니다.
 
 롯 코프 박사는 임상 종양학을 전공한 크리스챤 의사로서 수년 동안 중병에 걸린 환자들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의 글에 의하면 "내가 환자들을 관계하면서 보아온 부정의 중요한 결과 중 첫 번째는 부정이 환자들을 부분적인 귀머거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병원 간부가 제스(환자)에게 그의 병은 넓게 퍼져서 수술할 수 없는 암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그가 들은 상당 부분에 대해서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 하나뿐이 아닙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는 의사의 말을 거부하고 치료의 필요성을 부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환자들은 의사의 진단을 듣고 좀더 나은 진단 결과를 말해 줄 의사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물론 적절한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부정이라고 간주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비정통적인 방법을 찾아 자신의 현상태의 실제를 직면하는 대신 일시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느라 시간과 돈을 낭비합니다.
 
 부정이 반드시 나약함의 표시인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감정으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정이 보호 기제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정서적으로 그 사실을 조절할 수 있기까지 그 사람을 위협적인 상황에서 지켜줍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부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다른 사람과 하나님의 도움-을 차단하게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상처)이 없다고 말해서는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렘 6:14,  LB). 그러나 우리 몸상태에 대한 진단이 불쾌할 때는 무시하고 싶어집니다.
 
 필 매늘리 군목의 이야기는 진실을 감추는 부정의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지독한 화상을 입은 한 아이가 로스앤젤레스의 USC 메디칼 센터 화상 병동에 입원했습니다. 그 아기의 어머니는 그 애기가 죽을 때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원이 그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애기의 상태가 어떤지, 어느 시간에 방문하는 것이 좋을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호원과 매늘리 군목은 그 여인을 정중히 대하면서 애기의 죽은 사실을 인정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할 때 참 힘드셨습니다. 거듭거듭해서 자신이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해 주었지만 제자들은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주님께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다고 주님을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롯 가르치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마 16:21,22).
 
 베드로는 예수님이 진실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실의 아픔과 치유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부정하는 단계에 있을 때 반응하는 한 방법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그에게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스코프 박사는 "만약 이런 반응이 그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라면 그런 반응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경고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4시간 안에 자신의 죽음 사실을 직시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 동안은 악몽이겠거니 하며 짐짓 속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한 부정을 대하면서 거기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불과 몇 주 혹은 몇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살아 남아서 몇 년이 지난후 그 진단을 비웃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신자들은 의학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굳게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뜻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줄 실제적인 대답은 이것일 겁니다. "예, 압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나 나를 위해서 어떤 것을 준비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의사의 치료를 믿고, 고쳐 주시도록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시다." 한 의사는, 중병에 걸린 환자가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말할 때마다 "기다려 봅시다"라는 대답은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만약 고쳐 주지 않으시더라도 나중에 환자들은 죽음의 실제를 직시할 것입니다.

승자가 없는 게임
 
 어떤 종류의 부정은 환자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알리지 맙시다"라는 태도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중병에 걸린 사실을 압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말해 줄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그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고통스러운 대화를 회피합니다. 또 그의 아내는 남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분위기를 유쾌하게 유지해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매우 무거운 짐이 되지만 가족과 가정 경제에 관해서 필요한 질문들을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환자가 건강하다면 결코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환자에게는 충격 주기를 무서워합니다. 모두가 다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반대로 병에 걸린 사람에게 자신을 그대로 표현하고 병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은 이런 관심사들을 무시하는 대신에 귀를 귀울이면 어떻겠습니까? 외로움이나 절망을 달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문제들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욥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는 항상 그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는 재산을 다 뺏겼고, 아들 딸들은 식사 도중 돌풍이 집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깔려 죽었습니다. 또 자신은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지독한 형태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아내와 형제들도 그를 피했고 아이들은 그를 보고 달아났습니다. 그를 사랑하뎐 사람들이 다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는 한때 그를 존경하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호의를 가진 친구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그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한 친구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형벌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고 말합니다. 다른 친구는 그가 깨끗하고 착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현대적인 모습으로 우리들 사이에 있습니다. 확실치 않은 진리인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선 갑작스럽고 우발적인 죽음에 앞서는 질병과 고통에 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거룩하고 건강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완벽한 인종으로 남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하나님의 이두 대작을 망쳐 놓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를 결정한 결과로 죄와 아픔, 죽음이 낙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는 질병과 죽음의 첫째 원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있은 그 시각 이후로 지금까지 고통과 사망은 모든 인류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리스도인의 과로한 봉사도 질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헌신적인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장차 올 일의 환상을 보았을 때 기진해서 수일간 앓았습니다(단 8:26,27).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자주 일어나는 질병과 육체의 약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고전 2:3, 공동번역)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켰고, 또한 자신의 문제를 제거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나는 목숨과 건강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일꾼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쉴줄을 알았더라면 보다 오랫동안 사역하였을 목사님들도 압니다.
 
 오늘날 질병의 주요 원인은 긴장이 가중된 우리의 생활 스타일입니다. 심장병과 궤양, 각종 암은 우리의 저돌적인 일 추진과 분별없는 생활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음식과 휴식, 정신적 안정의 필요를 무시하면 신체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저는 우리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시련을 겪게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항상 알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생을 주님께 헌신해 온 사람이 고통당하고 경고를 주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볼 때, 저도 이해하기 힘들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라도 말입니다.
 
 나의 오랜 친구였던 고 헐버트 오카이어씨는 그의 책 '성경의 모든 약속들'에서 성경에서 발전한 몇 가지 질병의 목적을 설명해 줍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질병과 고난의 다른 목적은 죄짓는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강화하시기 위해 고삐를 바싹 조이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무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곧게 허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고난은 또한 다가올 영광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벧전 4:12,13).
 
 또한 고난은 우리에게 남을 위로할 자질을 갖추어 줍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은 우리가 평안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하는 자가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연해서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세계는 거대한 병원입니다. 가장 어두운 질곡을 지나는 여행 시기는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최대의 기회입니다.
 
 제인 포울과 헬렌 포울은 결혼한 지 65년이나 되는 그리스도인 부부입니다. 헬렌은 생애 마지막 주간에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제인이 얼마나 충실한 남편인지를 보여준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온종일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내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그 요양원의 직원들과 방문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 바로 지금 고통의 시간을 겪고 있는 분이 있는지요? 그것은 여러분을 괴롭히는 육체적 질병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인간 관계, 경제적인 어려움, 혹은 다른 이유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화를 냅니까?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현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여러분에게 부당한 처사를 했다고 생각되는 주변 사람들을 혹독하게 처벌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요구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을-심지어 여러분의 고통까지도-그리스도께 내어 드리고 여러분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소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도록 요청하셨습니까?
 
 나사로의 병 소식을 들으셨을 때(후에 그는 죽었고 예수님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이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요 11:4).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힘을 구할 때 동일한 말씀이 우리의 고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원한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우리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윌리암 W.킨슬레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단지 우리가 사랑과 확신을 가지고 긍겔 향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우리의  정신을 낙담시키고 불구가 되게 하고 불사르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의 능력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의 자비의 햇빛 안에서 늘 온전히 녹아 내린다. 그는 우리를 고통에서가 아니라 고통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한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방법으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고난의 짐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평안을 체험하도록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죽음의 5단계
 
 엘리자베스 쾨블러 로스는 환자와 환자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의 과정에서 거치는 5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알아낸 세속 심리학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정, 분노, 타협, 포기, 수용, 이 다섯단계를 누구나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일관되게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의료나 심리학분야에 종사하는 분들도 대부분 이 점을 인정합니다. 이 단계들은 공존할 수도 있고, 뒤집힐 수도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에게 있어서 이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마리안 홀튼은 50년 이상 동안 중환자들을 간호하였고 질곡을 지나가는 환자들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1940년대 간호학교 학생시절에 처음으로 혼수 상태에서 죽어가는 환자 곁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기계 간호보다 손간호 였다고 그는 말합니다. 의자를 병상 곁에 바싹 당겨 놓고 오랜 그리고 지루한 철야 근무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주간 동안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못하던 환자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병상에 일어나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베개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대부터 마리안은 중환자 근무를 자원하였습니다. 죽는 경험에 관해서, 죽음의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마지막 순간을 넘기는 환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죽음의 부정은 아주 강렬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겠다고 고집합니다. 마리안은 어떤 소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급성 백혈병 마지막 단계였는데 계속해서 캐나다를 가겠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간호하는 사람들은 그 소원이 실행될 수 없는 것을 아는데 어떻게 도와주어야 합니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사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마리안은 간호원들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게 너한테 참 즐거운 일이구나. 어디 캐나다에 대해서 말해줄래! 네가 언제나 가고 싶어하던 곳은 어딘데?" 혼자의 부정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병에 집착하지 않게 해 주는 것이 정직한 방법입니다.
 
 우리 어머니께서 마지막이실 때, 로우즈 아담스 부인은 어머니에게 외출용 의상을 입혀 드리곤 했습니다. 물론 그분도 어머니가 나가실 수 없다는 걸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 드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분노와 무관심을 통한 부정
 
 분노는 중환자에게서 나오는 또 하나의 아주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어떤 환자는 아주 화가 납니다. 그래서 아침에 간호원이 체온을 재러 들어올 때, "꺼져 버려. 꼴도 보기 싫단 말야!"락 소리지릅니다. 마리안 홀튼은 어떤 환자가 가득 찬 오줌통을 자기에게 집어 던진 일을 기억합니다. 간호하는 사람들은 환자의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한 가지 방법은 유머입니다. 후에 마리안은 격정이 끝났을 때 문틈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물었습니다, "헤이, 이젠 들어가도 괜찮아요?" 환자는 자기가 간호원에게 경우없이 너무 거칠었던 것을 알고서 웃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친구가 되었습니다.
 
 부정의 다른 형태는 우리가 마지막 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환자가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들' 가운데는 의식이 아주 분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간호원들의 보고에 의하면 가족들, 심지어 병원 요원들까지도 혼수 상태의 환자 곁에서 마치 그가 이미 죽은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일단 온 식구들이 사경을 헤매는 사랑하는 분의 병상에 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다른 활동을 위해서 하나씩 돌아갑니다. 그래서 정작 환자가 가장 많이 필요로 할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자 앞에서 "왜 이렇게 안 죽어!" 혹은 "나는 하나님께서 얼른 데려가셔서 그걸로 끝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 간호원은 비록 의사가 이 환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환자의 필요를 돌보아 주면서 계속해서 조용히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환자가 기적적으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이 간호원의 목소리를 듣더니만 "아 나에게 이야기해 주던 분이 당신이었군요"라고 이야기 했답니다.

타협을 통한 부정
 
 다음 단계는 타협입니다. 한 라스베가스의 쇼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가 암 마지막 단계에 와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1년전 그는 자기 가슴에 덩어리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증상을 무시해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는 몸이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불구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을 건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화가 났습니다. 곧 자신의 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병상에 기대 앉아 매일 화장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이 번쩍번쩍해질수록 점점 괴로웠습니다. 어느날 예쁜 간호원이 그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쇼걸은 그 간호원을 보고서 홀튼 간호원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서라도...처럼 될 수  있다면". 그리고는 간청하는 듯한 타협을 뚝 그쳐버리고 애처롭게 말끝을 맺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줄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쇼걸을 그때 마지막 부정, 마지막 타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자신의 처지를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는 이걸 혼자 감당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너다. 나를 의지해라." 그 위대하신 의사는 우리의 짐을 지기를 원하시며 또 지실 능력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에게 넘겨 드리려고만 하면 말입니다. 삶과 죽음은 손수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치유
 
 어린 에리카가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했을 때,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의 완쾌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에리카를 데려 가셨습니다. 같은 시각 다른 병원에서는 론 스토크가 격심한 발작을 일으킨 후 집중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수백명이 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론은 회복되었고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간호 결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론은 치료하시고 에리카는 치료하지 않으셨을까요?  한쪽의 믿음이 다른 쪽보다 덜 열성적이고 약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치료해 주십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치료하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와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룻의 자매 로사가 휘튼 대학 4학년이었을 때 학교 예배실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급송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맹장염으로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 벨 박사에게 인턴 과정을 마친 캔 기서 박사가 로사와 함께 병원으로 갔습니다. 로사의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들은 그의 복강이 결핵성 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로사는 안정을 위해서 수개월 동안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룻과 로사가 기거하는 기숙사의 사감은 일광 욕실을 이 젊은 환자에게 내어 주었고 룻은 로사를 간호하느라 수업을 빼먹었습니다. 로사의 건강은 호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로사가 정상 생활로 돌아가기 직전 폐에서 출혈이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로사의 몸 전체에 결핵균이 침투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사사 옮겨간 작은 병원에서 의사는 한쪽 폐에 횡경막 신경 절제 수술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횡경막 신경을 항구적으로 폐쇄해야 하고 나머지 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1주일에 한차례씩 기흉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벨 박사가 중국에서 돌아와서 로사를 건조한 기후인 뉴멕시코의 어느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룻을 로사와 함께 머물면서 그의 태도를 관심있게 지켜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위선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방이 자신을 실제보다 더 좋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보다 못하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로사는 후자에 속합니다. 그녀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 보이'잡지를 보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누가 방으로 들어오면 보던 것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로사는 열성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예수님께서 여기 땅 위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고치러 온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란 점을 알았습니다. 또 야고보의 글도 읽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 지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 로사는 물어서 이 가르침을 따르는 작은 교회를 찾아 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을 청하고 그분들이 와서 로사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로사는 일어나서 정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결정하고 병원 치료를 중단 하였습니다. 의학적으로만 말한다면 로사는 출혈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룻은 로사의 결정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을 기억합니다. "아빠는 걱정하셨어요. 아빠는 의사이기 때문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로사를 인도하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빠는 로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셨지요. 아빠는 병원으로 달려온 수간호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경건한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수간호원은 '벨 박사님, 로사의 생활 속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좌절시키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사는 정상 생활을 회복했습니다. 양폐가 원래 모습대로 확장되고 완치되었습니다. 후에 뉴 멕시코에서 로사를 치료하던 두 의사가 아버지께 이야기했습니다. "벨 박사,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당신 딸의 설명밖에는 달리 충분한 설명을 드릴 수가 없군요."
 
 룻의 말로는 그가 알기로 그때 이후 지금까지 로사는 심한 병에 걸린 적이 없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치료하십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곧 죽을 사람의 생명을 남겨 두실 때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 아들인 프랭클린은 비참한 상황등을 여러번 겪었습니다. 특히 한 경우는 아직도 우리에게 생생합니다. 이 일은 그가 텍사스에 있는 르토르노 대학 학생일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는 비행 교습을 받고 있었습니다. 봄 휴가 때 그는 며칠간의 휴가를 우리와 함께 보내려고 비행 교관과 부인, 또 다른 한 친구가 함께 플로리다로 날아 왔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려고 이륙한 날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 위로 날아 올라갔을 때 전기 장치에 이상이 생겨 비행기의 모든 불이 다 꺼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구름 아래로 하강했습니다. 그러자 미시시피 주, 잭슨시의 불빛을 볼수 있었고 선회를 계속하다 드디어 소형 비행장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불이 다 들어와 있었고 유도등도 반짝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조종사는 그렇게 잘 협조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관제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오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단지 우리는 비행장 주변의 친구들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 뿐입니다. 그 친구들이 만약 어떤 사람이 밤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해서요. 우리는 그들에게 '자 이제 불을 켭니다'하고는 불을 켰습니다. 바로 그 때 여러분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지역에 비행하는 비행기가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하나님은 프랭클린이 그때 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2년쯤 뒤에 그의 비행 교관은 추락 사고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어떤 때는 건지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영국에 룻의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제니퍼 라르콤인데 복합경화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병을 고쳐 주시도록 기도했지만 점점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사방에서 사람들은 만약 그와 하나님 사이에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면 치료를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고백하지 않은 은밀한 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몰아 세웠습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 말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제니퍼는 영국의 출판사인 호더 앤드 스토튼사로부터 그의 경험을 책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치료를 넘어'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습니다. 룻은 서문을 서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룻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제니퍼에게 분명히 "안돼"라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일을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신자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고 베드로는 재판받으러 가기 전날 밤에 천사들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행 12:5-11).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3가지인 것을 압니다. 그것은 "그래, 안돼, 나중에"입니다. 오순절 후 초대 교회는 심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죽음이 신자로서 전능자 앞으로의 이동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삶뿐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치료나 죽음으로부터의 건지심은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샘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개월 전에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흉칙한 병이 점점 발전되어감에 따라 그는 혀와 얼굴에 여러 차례 수술을 맡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신유은사 집회에 데려갔다 돌아와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다 나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고통이 점점 심해질 때 샘의 마음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보러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아내는 자꾸 친지들과 이웃들을 초청해서 샘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샘은 죽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치료에 대한 비현실적인 믿음은 부정의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데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치료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치료 능력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래" 혹은 "안돼"하고 하시는 대답을 들을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욥은 이런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주께서〕병상에서 저를 붙들어 주시리니 자리를 떨쳐 일어나게 되리라"(시 41:3, 공동 번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알 때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너무나 실제적인 병실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곳은 극한 고통 가운데 죽음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환자는 평온하기만 했습니다.

놀라운 애미 카마이클의 생애
 
 1956년 나는 인도에 가서 애미 카마이클이 살았던 인도 남부 틴네벨리 지방을 방문했습니다. 애미는 케직 회가 지원한 최초의 선교사이자 일생 동안 40권의 색을 저술한 여류 작가입니다. 그는 자신이 양녀로 입양되어 온 인도에서 56년 동안 일했으며 휴가를 내어 영국의 고향에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가 마지막 20년을 보냈던 곳을 방문하는 영예를 가졌습니다. 이 기간동안 애미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곳은 소박한 작은 방이었습니다. 붉은 타일이 바닥에 깔렸고 몇 개의 집기, 그리고 창문 밖에는 커다란 새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새장에서 새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침대에서 일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나는 그를 간호했던 여자분이 집 내부를 보여 줄 때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 보잘 것 없는 장소에 서 있었지만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해 계셨습니다. 애미는 어두움의 질곡을 거쳐 갔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신체적 약함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큰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기간에 대부분의 글을 썼습니다. 그 책들은 지금도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옷은 최근에 '죽음의 기회'라는 책에서 애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책은 큰 도전을 주는 책입니다.

기도는 다 응답된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뒤져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약속들을 많이 찾아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붙들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고쳐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치료를 위해 기도했는데도 치료받지 못할 때 신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고 믿기 쉽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신자들은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사실을 직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부족이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느냐 안하시느냐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종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인물들의 생김생김을 보십시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 이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큰 구원을 받았고 믿기 어려운 난관들을 믿음으로 견디었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우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히 11:36,37).
 
 이들은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지만, 세상의 기쁨은 그리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 더 좋은 종착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의 도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죽음에서 건짐을 받지 못한 것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거니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당하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영예를 마련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형수의 설교
 
 벨마 바필드는 노스 캐롤라이나 농촌 출시 여인인데 1급 살인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이 삶과 죽음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1978년 벨마는 4사람을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피살자에는 그의 어머니와 약혼자가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마약에 환각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상처의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처방된 안정제에서 시작됩니다.
 
 벨마는 어릴 때는 근친상간, 어른이 되어서는 처방전 남용의 희생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한 후 수감되어 독방에 갇혔습니다. 어느날 밤 간수가 방송 주파수를 24시간 복음 방송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우중충한 방, 자신의 감방에 자포자기하며 혼자 앉아서 벨마는 복음 전도자의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 들어오시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들락날락 했고 하나님에 관해서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이 전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의 회심은 진실했습니다. 사형수로 대기하는 5년동안 그는 많은 감방 동료들에게 봉사했습니다. 그의 놀라운 회복이 알려지자 바깥 세계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벨마는 룻에게 편지를 썼고 둘 사이에는 진정한 친분이 생겼습니다. 룻은 벨마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형 대기 감방을 놀라운 강단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서 당신이 할 하나님의 일이 남아있기 때문에 당신을 이곳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황량하고 외롭고 외로운 감방을 당신 앞에 놓여있는 영광에 비교해 볼 때, 당신을 위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어서 집으로 오너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딸 애니는 특별히 허락을 받고 여러 차례 벨마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슬픈 이야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진실한 사랑, 옥중에서의 그의 아름다운 증거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지막 선고 이전에 벨마는 룻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8월 31일에 사형 집행을 받는다면, 나는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죽는 은혜인줄로 알 것입니다. 마치 그분이 나에게 구원의 은혜와 사는 은혜를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벨마는 그날 밤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룻과 나는 그의 영광 가운데 평안이 있음을 알게 될 때까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벨마 바필드는 미국에서 22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여사형수였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어두움의 질곡을 걸어 왔습니다. 추도 예배에서 휴 호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위엄있게 죽었고 목적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벨마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의 산 증거입니다."
 
 룻은 벨마의 장례 예배의 축도 때 낭송하기 위해서 다음 시를 지었습니다.

머나먼 황폐의 땅에서,
종내에 찢기고 찢으면서
죄의 슬픔을 억누르던
삶의 광야에서
밤낮의 긴장과 오욕에서
안전한 집으로
집으로 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간절한 부모처럼
하늘 아버지는 기다리신다네
자녀들이 돌아오기만을
하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열광적인 영광스런 환영
또한 그의, 그의 기쁨
-한때 십자가를 지고 능욕받으신 분-
하나님의 자녀의 죽음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소중한고!
누가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대로 모든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2-10). 이것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 고난과 죽음을 맞이할 때 가장 절실한 말씀입니다.
 
 병든 친지를 간호하는 친구나 가족의 모습이 자신들의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합니다. 어색해서 주저하거나 많이 아픈 사람 근처에 가지 않음으로 불유쾌한 상황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가족만 고통 당하게 내버려 두게 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일생을 살면서 어두움의 질곡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남들이 우리를 대우해 줄 때 얼마나 그들을 좋아하겠습니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마가렛트 버미아는 나이지리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가 임신 7개월이 되었을 때, 작은 종양에 대한 검사 결과 악성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종양 제거를 위한 수술 수주 후에 남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몇 년 동안 기적적인 회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점차 더 많은 종양이 나타났습니다.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그는 사람들이 그를 보는 태도에 예민해졌습니다. 그래서 죽기 6개월 전부터 교회의 여성 단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또 자신이 간호받고 싶었던 경험에 비추어 어떻게 간호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나누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생각의 일부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느낌을 정직하게 나누십시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억지 웃음을 짓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의 무기력함과 근심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걱정의 표현입니다, 수다를 떨거나 과장하지 마십시오. 진실되게 이야기한다면 어린아이라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사변적(思辨的)인 설교를 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들고 가서 본문을 길게 읽는 사람은 재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마음으로 느끼는 한 절 정도를 함께 나누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장황한 신앙 토론에 첨벙 뛰어들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환자들의 이야기는 잘 준비된 것입니다. 투병은 매우 외로운 여정입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받으실 때, 그 죽음을 혼자 외롭게 맞이하기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세 제자에게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어가는 사람도 사람으로 대하십시오, 어떤 때는 우리의 태도가 중환자의 정서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환자들을 병실에 가두어 놓고 뒤에서 귓속말을 하고 환자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적인 관계입니다.
 
 어떤 여자분이 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모친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그녀는 수년 전에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의 영정을 병상 곁에 있는 탁자 위에 놓아 두었습니다. 그러자 이 혼수상태인 어머니는 다른 쪽으로 돌려 눕혀 드릴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남편의 영정 쪽을 향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결국 그 딸이 간호원에게 이야기를 해서 어머니를 돌려 눕힐 때마다 영정도 그 방향으로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십시오. 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때, 그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아십시오. 마가렛트 버미어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을 때, 신자인 친구들이 와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암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아픔과 질병을 사단의 사역의 일부로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십시오. 그 의미는 모든 것 때문에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감사하라고 합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할 때, 이것은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다 선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소망을 갖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보다 크십니다. 어떤 때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찾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은 언제나 있습니다. 환자들이 무언가 기다리게 도와주십시오…어떤 특별한 사람의 방문‥여러분이 다시 들릴 시간들.
 
 내 어머니는 의식에 참여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손녀 가운데 하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원은 어머니의 기력이 약해서 결혼식장에 갈 수 없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옷입으시는 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어쨌든 그 순간에는 어머니께 희망을 드린 거지요. 결국 자신은 가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평안해 하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실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더라면 아마 몹시 언짢아 하셨을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쾨불러-로스는 죽음과 죽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환자의 신앙이 최후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실 믿음 있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극소수의 사람은-나는 아주 깊은 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임종이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많은 환자들은 마지막에 더욱 믿음을 찾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믿음이 효과가 없습니다."
 
 죽는 사람을 많이 보아 오신 우리 장모님은 죽음의 순간 신자와 불신자의 반응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분노와 근심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로 인해서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고통이 없는 몸으로, 그리스도처럼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미래의 소망입니다.
 
 질곡의 여정은 정말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갈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 종착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제6장
빌려온 시간을 얼마나 오래?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
 
 "내 병이 너무 심해서 기계 장치로밖에 살 수 없을 지경이 되거든 의사에게 말해서 플러그를 뽑도록 하세요."
 
 재클린 코올이 44세이었을 때, 장로교 목사인 그의 남편 해리 코올은 이 고통스러운 요청을 존중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재클린은 1986년 봄에 뇌출혈로 쓰러져서 41일째 혼수상대였습니다. 그의 상태가 가망 없어 보이자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소원에 따라 혼수상태인 아내를 죽게 버려두라는 명령을 의사에게 내리도록 매릴랜드 법원에 요청했습니다. 판사는 희망을 포기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판결했고 그로부터 6일 후 재클린은 눈을 떠서 미소를 지으며 남편에게 기쁨의 키스를 돌려 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뻐서 말했습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죽을 권리를 둘러싼 문제라는 물을 흐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현대처럼 이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의 논의를 재촉하는 시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언제나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전 3:2). 하지만 현대에는 생명을 연장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와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빌려온 시간을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합니까? 얼마나 오래가 너무 오래입니까? 여기에 해당하는 의학적, 법률적, 도덕적인 원칙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기준이 무엇입니까?
 
 안락사와 죽을 권리의 논쟁은 곧 낙태 논쟁과 함께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복잡한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권리와 안락사(고통 당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행위)라는 주제를 혼동해 왔습니다. 이들은 동일한 문제가 아닙니다. '죽을 권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한 경우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비상한 혹은 과감한 수단의-보통 값이 비싼 기계를 사용하는 생명 유지 수단을 말함-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각 개인의 권리라고 정의됩니다. 생명은 신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의도적이고 무리한 생명의 박탈을 결코 용서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낙태와 안락사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입니다. 동시에, 특별한 의료 수단으로밖에는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경우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이 진행되도록 허용하는 행위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연장과 죽음의 연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관들을 몸 여기저기에 꽂고 있는 환자의 병상 곁에 서 있으면 우리는 진정한 의술이 이렇게 잔인하게 보일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의 치료가 어느 면으로 보나 비인간적일 때 우리는 이러한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생명 유지 기구를 사용할 건지 말건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까? 의료 종사자들과 로스앤젤레스 변호사 협회, 캘리포니아 병원 협회는 생명유지 장치의 유지와 철거에 관해 몇 가지 충고를 합니다. 그 첫번쨰 원칙은 우리 각자에게 적용됩니다.
사용 가능한 치료법의 유익, 위협 및 그 결과들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받고 치료에 관해서 자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비록 이러한 결정이 개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알고서 동의를 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의 권리이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1986년 미국 천주교 주교들이 발표한 한 성명서는 "우리는 또한 '특별한' 수단-즉,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거나 너무 무거운 부담을 내포하는 수단-을 거부할 환자의 권리를 인정하며 옹호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선택의 권리는 모호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 혹은 연장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더 이상 내릴 수 없게 될 때를 예상하여 '사망 선택 유언'을 작성할 것을 주장합니다. 사망 선택 유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없을 때를 예상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것입니까?
 
 사망 선택 유언은 사람이 마지막 요구를 할 정신적 역량이 있을 때에 기록해서 서명해 놓은 하나의 문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문서는 그 사람이 식물인간 상태 혹은 돌이킬 수 없는 혼수상태로 있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과감한 수단' 혹은 인위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진술한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이것이 괜찮은 생각인 것처럼 들립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생기기 전, 미래에 우리가 어떤 치료를 원하는지 명백히 해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불행스럽게도 이것을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 건강이 상당히 좋은 상태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망 선택 유언서를 작성한다면 현재의 생각에서 그 극적인 상태가 되면 어떻게 느낄 것인지를 판단해서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시각에 도달했을 때는, 나의 느낌은 판이하게 달라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생의학 윤리에 관한 연합 특별 위원회가 내어 놓은 기준들은 현명하게 말합니다. "권리를 가진 환자가 생명 유지 기구의 유지나 철거를 지시했을 때에도 환자의 직계 가족과 상의하고 가족들의 소원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이 권장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사망 선택 유언'들이 안락사와 자살과 같은 문제의 행위들을 정당화시킬 수 없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임신 중절 반대 운동을 위한 주교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찬물을 끼얹는 선언을 발표하여 그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사망 선택 유언을 지지하는 어떤 제안들은 죽을 권리 운동 그룹들에 의해 조장, 촉직되고 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안락사의 실질적인 합법화로 가는 디딤돌로 보인다."
 
 미국 주정부들은 '사망 선택 유언'의 유효성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차이를 없애고 단일법을 제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방 입법이 그 해답입니까? 나는 이러한 입법을 제안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윤리적 관심사를 언급할 뿐입니다. 이와 같은 입법이 생명을 보존하고, 자살과 살인을 방지하고, 의료직에 있어서 건전한 윤리를 지속시키는데 유익이 됩니까? 이것이 커다란 규칙입니까? 입법이 과정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환자 및 가족과 의사간의 대화를 장려합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의가 생명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져 있습니까? 소위 말하는 '죽을 권리'에 대한 입법을 고려하기 전에 이 모든 질문에 철저하게 "그렇다"는 대답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이 주제들을 조심스럽게 기도하면서 상고하고 사회적으로 문제화될 때 이와 같은 논쟁에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각자 '사망 선택 유언서'가 우리 자신들이 쓰기를 원하는 문서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의 느낌들을 그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재클린 코올의 경우에서처럼 최종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동적 안락사란?
 
 전화벨이 울려서 모든 대화가 뚝 끊어졌습니다. 우리 가족의 한 친구는 먼 지방에서 생명 유지 장치로 연명하고 있는 어머니를 걱정하다가 이야기를 뚝 그쳤습니다. 그녀는 글쓰는 일을 위해 곧 유업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송별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의사와 가족 식구들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계획한대로 여행을 떠나도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의사가 장거리 전화를 해온 것입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아주 불편한 상태에 있습니다. 나 자신과 우리 병원 간부들의 의견은 환자의 상태가 회복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무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무모한 노력이 계속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오빠와 상의해 봐야 되겠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습니다. "무모한 수단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의사는 호스와 주사, 그리고 치료 방법의 목적과 결과를 하나씩 설명하였습니다. 내 친구는 의료 용어를 하나씩 따라 하다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파랗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나더러 우리 어머니를 죽이는 결정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후에 그의 오빠와의 상의와 목사님의 권면, 친구들과의 기도를 거쳐서 그 생명 유지 혹은 '무모한' 수단을 중단하자고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내 친구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이것이 현대 전문 용어로 말하면, '수동적 안락사'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전문 용어를 들으면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어지지만, 정의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수동적 혹은 부정적 안락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특별한' 생명 유지 수단 혹은 '무모한' 노력의 사용을 중지, 혹은 단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죽음을 연장시킬지도 모르는 행동을 그만두고 대신에 자연스럽게 죽임이 진행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 친구의 어머니는 87세이셨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놀라시겠지만 그분은 생명 유지 장치 없이 93세가 되도록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스스로 우롱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어리석음보다 큽니다.
 
 생명 유지 장치에 대한 정의도 갖가지 입니다. 의료계, 법조계 인사로 구성된 생의학 윤리 위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 유지 장치란 생명에 중요한 기능을 인위적으로 유지, 회복 혹은 대신하고, 이러한 절차를 운용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담당 의사의 판단으로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연장하는 역할만 하는 중재로 규정된다."
 
 1986년 4월 미국 의학 협회 법률 고문은 '생명 연장 의술의 유지 혹은 철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므로 이런 정보를 잘 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1986년 여름 기독교 의학 협회 저널(Christian Medical Society Journal)에 실린 것입니다.
의사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무는 생명을 유지하고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있다. 한 가지 의무 수생이 다른 의무와 상충되는 곳에서는, 환자는 그의 가족의 선택, 혹은 환자가 스스로 능력이 없을 경우 법적 대리자의 선택이 우세하다. 환자의 선택이나 공인된 대리자가 없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유익을 최우선으로 행동해야 한다.
의사는 인륜적인 이유에서 또 동의를 얻어 격심한 고통을 경삼시키기에 의학적으로 필요한 바를 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임박한 중환자를 죽도록 허용하기 위해 치료를 중단 혹은 생략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죽음을 유발시켜서는 안된다. 가능성이 있는 생명 연장 의술의 실시가 스스로 자신의 유익을 의해 행동할 능력이 없는 환자에게 최상의 유익인지를 결정할 대 의사는 인도적인고 평안한 상태에서 생명을 연장시킬 가능성이 무엇인지, 전에 표현된 환자의 소원, 가족 혹은 화자의 보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엇인지 결정해야 한다.
죽음이 임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환자의 혼수 상태가 의심할 여지 없이 회복 불가능하고 진단의 정확성을 확인할 안전 장치가 있고 환자의 간호에 책임이 있는 사람의 동의가 있으면, 생명 연장 의술의 모든 장치를 중단하는 것이 비윤리적이지 않다.
생명 연장 의술에는 약물 처리, 인위적 혹은 공학적 호흡, 영양 혹은 수화물 공급이 포함된다. 중병 혹은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의 환자를 다룰 때, 의사는 치료의 유익이 그 부담 보다 큰지 판단해야 한다. 언제든지 환자의 존엄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한 그리스도인 의사의 견해에 따르면 이 법적 기준들은 모든 생명 유지 장치의 철거에 대해서 매우 허용적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나는 쟁점들이 옳은지 그른지, 흑인지 백인지를 봅니다. 하지만 생명 유지 조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은 어쩌면 장차 우리가 해야 하는 결정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저명한 뉴 잉글랜드 의학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은 "의학에서는 가망 없는 환자 치료보다 더 복잡하고 더 논쟁의 여지가 많고 더 정서적으로 부담되는 표제는 거의 없다. 기술은 동정과 법률적인 선례의 부족함과 맞선다. 따라서 논쟁이 불가피하다"고 했습니다.
 
 이 의사들의 어려움이 또한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평생동안 부딪히게 될 복잡하고 정신적으로 부담이 많은 쟁점입니다.

능동적 안락사란?
 
 능동적 안락사는 부작위가 아니라 작위입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무익한 고통 혹은 무의미한 존재를 마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취하는 적극적인 자비의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극약이나 아사(餓死)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견해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범죄 행위에 해당합니다. 여류 작가 베티 로린의 경우를 들어 봅시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하는 것을 도와준 자신의 역할을 공개합니다.
 
 1986년 봄 이 뉴욕의 작가는 여성들의 오찬 모임에서 자신이 어머니의 생명을 끊는 약을 투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난소암이었고 딸에게 죽게 도와달라고 호소해 왔습니다. 로린과 그녀의 남편은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의사들에게 전화했습니다. 드디어 한 암스텔담의 의사가 치명적이지만 고통은 없는 환약을 조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이 경험을 기술하면서 그가 어떻게 이런 결정에 이르게 되었고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이야기합니다. 그 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로린은 종요히 말했다. '난 알아 최악의 경우 내가 체포될꺼야. 최선의 경우 체포 안될 수도 있지.'" 내가 알기로는, 그녀는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또 그녀의 행동에 그리 많은 반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안락사 요구 쪽에서 보면 우리가 숨한번 내쉬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미국과 다른 많은 나라에 이미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필요없는 고통을 근절시키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몇몇 의사들도 글을 통해서 능동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버나드 박사는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 시술 후에 커다란 악명을 얻었습니다. 안락사와 자살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몇 년 전에 '좋은 삶, 좋은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인격적인 신의 존재나 실제적인 천국, 지옥의 존재에 깊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 더 말할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의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습니다."
 
 버나드 박사는 자기 나라에서는 능동적 안락사를 살인으로 간주하고 사형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안락사를 실시해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임상 의학에서는 지금도 능동적 안락사가 확고한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의학 통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만도 10,000명의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미국 의학 협회가 생명 연장 조치의 중단에 관한 지침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 내용은 약물 처리와 인공적 혹은 공학적 호흡, 영양, 수화물 공급의 중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음식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전신 사지 불구(quadriplegic) 뇌성마비 환자인 엘리자베스 바우 비아는 굶어 죽을 권리 투쟁으로 전국적인 톱뉴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판사는 이 요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격렬한 법률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병원 직원들과 미국 시민 자유 연맹이 편을 드는 가운데 문제는 공개적인 대중의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결국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이 음식물 투여를 위한 튜부의 제거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생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생명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음식물 투여를 위한 튜브의 제거를 보니 과거 나찌 독일이, "쓸모없는 입은 먹지말라"고 한 끔찍한 사실이 되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전범 문제 최고 고문실의 고문이었던 레오 알렉산더 박사는, 독일 의사들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275,000명을 안락사시킨 끔찍한 일의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안락사 운동에 있어서 기초적인 것으로서, 이와 같이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생명도 있다는 견해를 수영한데서 발단되었다. 이 견해도 초기 단계에서는 병이 중하고 오래된 환자에게만 적용되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자들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 사회적으로 비생산적인 사람, 이데올로기적으로 불필요한 사람, 인종적으로 불필요한 사람, 급기야는 모든 비독일인들을 다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경향에 원인을 부여한 아주 오랜 근원은 재생 불가능한 병자에 대한 견해였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런 가능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안락사를 고무 조장하려는 노력에서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능동적 안락사를 동조하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명한 의사들이 "생명 연장은 잔인한 것이야"라고 말한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얼핏 듣기에는 이 말이 얼마나 온정적인 것 같습니까? 그러나 신자나 불신자 모두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성경의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알다시피 죽음은 불가피합니다. 그렇다고 서두를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귀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간섭하셔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환자를 회복시키실 능력이나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신 32:39).
 
 "주님, 죽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한 기도이며 간청이었습니다. 모세는 병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워주신 집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모세는 음식과 생활 조건을 불평하고 자신이 한계점에 이르도록 원망하는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진정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민 11:15, 공동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모세를 죽이시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관야를 지나 약 속의 땅 경계에까지 갔습니다.
 
 엘리야는 바일의 선지자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악한 왕비 이세벨이 복수하고 말겠다고 벼르자, 두려움을 모르던 그가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 나무 아래 주저 앉아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식사와 물, 즉 생명에 필수적인 요소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엘리야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온 몸에 종기가 났습니다. 그의 살은 벌레가 먹었습니다. 피부는 진물이 줄줄 새고 썩은 순무처럼 문드러졌습니다. 쪼그라들고 약해져서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이를 갈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들도 욥처럼 울부짖고 말 것입니다.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욥 6:9).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 욥도 죽이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때 고통에 찌들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욥과 함께 있었다면, 음식을 빼앗아 버리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게 하였을 것입니까?
 
 성경은 '식물인간 상태'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돌보는 문제에는 아주 분명합니다. '플러그는 뽑더라도'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중단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시카고 대학 프리츠 의학 학교 임상 윤리 센터의 데이비드 쉬드마이어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법원과 우리 사회는 환자에게 음식을 중단시키는 일을 승인하는 쪽으로 급속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임상 의사로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많은 분들과 생각을 같이 합니다. 만약 지금이 목소리를 높일 때가 아니라면 그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음식은 언제나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자살로써 하나님께 갈 수 있나?
 
 에스키모인들은 늙어 병들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집 바깥으로 혼자 나갑니다. 그리고 그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잠을 청합니다. 그런데도 가족들은 내다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자살 행위를 방조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죽음의 방법입니다.
 
 지구의 많은 종족에게 있어서 자살은 집단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이슬랜드나 그린랜드, 시베리아의 전설에 보면 생명이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때 자살을 하는 것이 하나의 규범입니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부족들은 의식적인 자살을 실시했습니다. 그것은 왕이 죽으면 왕비들과 노예들, 궁중의 일원들이 따라 죽는 것입니다. 세계의 주요 종교들 가운데 불교, 힌두교는 자살을 허용하고 천주교와 유대교는 정죄합니다.
 
 오늘날 엄청난 수의 십대들이 자살을 합니다. 나이 어린 삶을 포기하며 일찍 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문제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이럴 때 많은 경우 심각한 정서적 질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온전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비율이 적은 경우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중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했기 때문에 도피구를 찾는 심정으로 자살을 택합니다.
 
 미국에서 자살은 범죄입니다. 자살 미수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살 방조는 살인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자살을 합법화시키고 인정되게 하려고 로비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타임지에 '자살하는 법'에 관한 팜플렛을 발행한 한 영국 단체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팜플렛에는 자살방법을 열거하고 자살을 위한 특수약을 소개하면서 총기사용, 손목 끊기,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는 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좌절이나 절망감과 싸우는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살은 매우 관심있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 주제에 관해서 자세한 지침을 주지는 않지만 생명과 소망의 편에서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우리가 자살과 또 많은 연관 쟁점들을 연구한다면 성경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자살의 실제적인 고통은 뒤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떨어집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던 애니 그레이스 쉐이닌은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또 자살한 자기 어머니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병에서 도피하기 위한 자살이라 하더라도 자살은 처절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자살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존심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물론 때때로 삶이 도무지 지기 힘든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이 주는 해방은 삶의 승리가 아닙니다. 운명에 대한 자아의 궁극적인 정복이 아닙니다. 희망의 무참한 포기이며 인간 정신의 패배입니다."
 
 또 이 캘리포니아의 어느 한 여인은 이렇게 씁니다.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자살이 유일한 해결책일 만큼 심할 수는 없습니다…자살은 고통의 끝이 아닙니다. 단지 살아남은 사람들의 어깨에 그 고통을 지워놓는 행위입니다." 그리고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마칩니다. "아무튼 나는 살고 싶지 않았지만 나를 억지로 살려 놓은 의사, 간호원, 정신과 의사 여러분께, 내 폐가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며 아무 소망이 없었을 때 내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신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우리의 몸을 죽일 권한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는 몸을 돌본다고 하지만 그 방법이 바로 우리 자신을 날마다 조금씩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연하게 목숨을 버리는 행위와는 다릅니다.
 
 브로드웨이와 런던에서 대성공한 연극 '어쨌든 누구의 생명인가?'는 자살과 안락사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쟁점은 엡 6:12에 묘사된 바대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조금씩 생명의 신성함이 잠식 당하고 있습니다. 적자 생존이 우리 엘리트주의자들의 철학이 되어야 합니까?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빕니다.
의문들
 
 죤 쉐릴은 '어머니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힌 그의 책에서, 어머니의 생사를 놓고 자신이 해야 하였던 결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한 듯하고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의사에게 "정맥 주사를 놓아달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쉐릴은 의사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튀어나올 줄 알고 긴장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몇 가지 생각할 기준을 그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로써 모든 식구의 의견을 모으고, 의사의 동의를 얻은 후 드디어 어머니의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해 주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건강하고 맑은 정신일 때 들어야 할 중요한 질문을 몇 가지 정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노인이 위기를 넘기도록 의사가 도울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각이 있고 건강이 견딜만하겠는가? 아니면 새로운 위험이 생기거나 상태가 악화되어 고통이 있겠는가?
2. 환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가능한 한 오래 생존하고 싶은 욕망을 피력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오늘밤 우리에게 사용 가능한 특수 보조 기구들을 사용하지 않고 죽게 두기를 원하는가?
3. 환자의 현재 태도는 어떤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우리의 생각이 변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대화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4. 가족의 태도는 어떤가?
5.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알기로는 그분의 생명은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아름답다. 어머니의 소천에서 우리는 증거를 여러 차례 보았다(우연, 호의, 보통 때와 다른 준비). 이것은 하나님의 격려였고, 지금 생각한다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 시간의 신호를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본다.
죽음이 끝인가? 물론 이것은 다른 모든 질문에 영향을 미치는 질문이다.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전혀 다르게 맞이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른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빌려온 시간이며 우리는 우리의 유산을 가능한 한 지혜롭게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전한 정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른 정신이 있을 때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병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직시해야 할 가장 큰 도전 가운데 하나입니다.

죽음이 올 때
고요하게 오는가
누구의 말처럼 살금 살금
힘들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누워 있을 때
잠을 청할 때
백발이 성성할 때 서운하게
젊은 날에 괴로워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
모든 것을 얻는다네
-아 내일을!
왜 눈물을 흘리는가?
잔혹한 죽음
확신할 수 없지만.
경건한 사람의 객사
악인의 형통
죽음이 누구를 칠지라도
부활의 주님을 아는 자여
빈 무덤을 아는 자여!
-룻 벨 그래함-

제7장
생사의 선택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삶…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서 선택해야 할 지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느 정도의 위엄을 갖추고…가능하다면 95세쯤 되어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아…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그 다음에는 우리가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잠재 의식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히 고요히 평안하게 죽음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삶은 우리가 그럴싸하게 세워 놓은 계획을 따르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우리들은 대부분 가족들이 기억하며 인용할만한 무엇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질병이나 노쇠가 우리 육체를 황폐화시키고 영정의 얼굴은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스냅 사진의 얼굴과는 영 딴판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고 이생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의사가 품위 없는 두 죽음의 모습을 말로 묘사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생명유지 장치에 연명하다 죽는 죽음입니다. 혼수상태로 육체의 껍데기 생명만 한없이 지속시키는 인공호흡기. 간혹 팔딱거리며 계속 움직이는 뇌전도, 두 세 개의 정맥 주사, 코와 방광에 꽂힌 튜브, 여러 수치를 균형있게 유지시키기 위해 매일 모이는 여러 가지 회의, 그리고 매일 2,000뷸씩 끝없이 올라가는 치료비.
 
 얼마나 끔찍한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점점 더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알렌의 경우가 그 한 예입니다. 알렌은 수개월 동안이나 이렇게 유지해 왔습니다. 보험은 다 타 썼고 돈도 바닥이 났습니다. 이 때는 아내도 그가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면회오는 것도 중단되었습니다. 알렌이 죽었을 때 아내에게 남겨 준 유산은 쓰라림과 회의뿐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병원 기록을 보면 무진장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너무 잔인하고 끈질기고 경제적으로 파산하게 만듭니다.
 
 품위없는 죽음의 두 번째 모습은 요양소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수주,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환자는 요양소 직원에게 매여 있습니다. 요양소 직원들은 환자의 편의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침대 테이블, 옆방(혹은 옆침대)에서 나는 신음과 코고는 소리, 악취 제거용 소독제 냄새가 전부입니다. 드디어 죽음이 오면 먼 친척에게 연락이 가고 요양소 직원은 수심을 띤 목소리로 전화에다 대고 장례 절차를 지시합니다.
 
 불행히도 이 묘사, 이 사실은 매우 흔한 현상입니다. 요양소 관리자 아무에게나 물어 보십시오. 그가 수년간이나 그 곳에 있었지만 보호자가 명목상으로 몇 번 찾아온 것밖에 없는 환자들에 관해서 이야기 해 줄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죽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버림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노쇠한 사람을 집에서 부양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요양소가 큰 행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환자가 품위있는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철저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친구가 저에게 그의 어머니가 '요양소'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유품을 가지러 갔을 때, 요양소 직원은 창고방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사진들, 화초, 옷가지들이 쑤셔 넣어져 있는 비닐 쓰레기 봉지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에 그의 슬픔은 가증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양소를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요양소는 정말로 환자를 염려해 주고 인정 많은 인사가 운영하는 훌륭한 곳입니다. 나는 저명한 설교가인 반스 하브너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만년에 아주 훌륭한 시설을 갖춘 요양소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림받고 품위없는 대우와 대조적으로 소수의 친구나 가까운 가족이 주위에 있고 개인적인 문제들이 안정되어 있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지낼 확실한 미래가 있는 가정적인 분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룻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어머니는 혼자 살아가시기에 점점 어려움을 느꼈숩니다. 그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룻은 어머니를 한 동안 산장에다 모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집을 원하셨습니다. 그곳이 어머니가 돌아갈 곳이었습니다.
 
 룻은 "어머니는 평생 동안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셨지요. 또 남이 하는 음악을 듣기도 좋아하셨고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룻의 어머니가 죽기 얼마전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산사람들이 즐기는 찬송이라고 해서 죽어가는 사람도 반드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룻은 그가 가진 레코드 앨범을 다 뒤져서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다고 생각되는 레코드를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테이프에 옮겨 녹음해 주었습니다. 룻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간단히 녹음 재생기를 가지고 마음대로 껐다 켰다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신 몇 주간 동안 아름다운 옛날 찬송들을 몇 시간이고 계속 들으셨습니다."

더 어려운 결정
 
 룻의 어머니의 경우 우리는 생명을 연장 혹은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말 것인지 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지 않았고 완전한 사랑의 간호가 필요했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것이 어머니가 원하는 간호였는가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나에게 가까운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그의 남편이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기구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그 부부는 그 결정을 하기 이전에 이런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와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 친구 고 프란시스 쉐퍼의 부인 에디스는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남편의 방으로 불려 들어갔습니다. 6명의 의사가 프란시스에게 가망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 하면서 부인에게 기구 집중 치료를 하기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는 한 의사가 "일단 환자에게 기구를 사용하게 되면, 우리는 플러그를 뽑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견해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에디스는 수년 동안 프란시스와 함께 생명의 귀중성에 관해서 이야기했었고 만약 할 말이나 할 일이 남아 있을 경우 수분이라도 큰 차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그러나 단순히 죽음을 연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절대적인 산술적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요. 여기에는 큰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에디스 쉐퍼는 남편을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남편이 육신을 떠나면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가 주님과 함께 있게 될 때까지 내 곁에 두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집으로 가고 싶어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전에 나에게 집으로 데려가 남은 시간 동안 그곳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결정에 동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프란시스는 집으로 왔고 에디스는 그의 침대곁에 그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갔다 놓고 음악을 틀어 놓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나는 그가 좋아하던 레코드를 틀었습니다. 베토벤, 바하, 슈베르트, 헨델, 열흘 후인 1984년 5월 15일 헨델의 메시야가 울리는 가운데 프란시스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공개된 죽음
 
 나는 품위있는 죽음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준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허버트 험프리는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 미국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는 상원 위원으로, 후에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경력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몇 달 동안 미국 대중의 모델 역할이 되어 죽어가면서 위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암은 대부분 쉬쉬하는 병입니다. 누구보다도 그런 입장에 있을 험프리는 이 두려운 문제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1977년 담당의사는 진찰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물론 험프리의 동의하에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수술 불가능한 종양이 생겼고 상태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미국 내에서 죽음과 죽음 과정에 대한 선두적인 저술가이자 교사인 에드윈 슈나이드만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문둥병자나 부랑자를 보듯이 험프리를 피했지만(치명적인 암은 사회적인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임) 그의 인물됨과 죽음에 대한 처신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대중은 험프리를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또 괴벽한 유우머로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자세를 지켜보았습니다. "암 걸린 험프리의 특별한 공개 죽음은 일종의 '바람직한 죽음'에 대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암, 건강 상태, 죽음에 대한 그의 기록들은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어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줄 것입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험프리의 상원에서 한 발언들은 품위있고 우아한 죽음의 자질들을 아주 멋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대의 치료법은 우정과 사랑입니다. 전국에 걸쳐서 나는 이것을 느꼈습니다. 의사들, 화학 요법, 방사선 요법, 약, 간호원들, 임상 의사들 모두  아주 아주 유익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믿음, 어려운 일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과 친구들의 우정어린 친절과 관용 없이는 치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바를 말해 주었습니다… 우정, 친절,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

사람에 따라 다른 선택
 
 우리가 알다시피 죽음의 얼굴과 목소리는 다양합니다. 폴 터니어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의식이 또렷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죽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이 있다면 얼마나 인상 깊겠습니까! 내가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한 젊은 여성이 꽃같은 나이에 중병에 걸려 누웠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회복되지 못할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은 친척과 친구들의 명단을 작성하고서 한명씩 한명씩 병상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을 위해서 마음에 품고 있는 메시지를 전해줄 힘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을 만난 그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도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의 생명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을 때 이런 식으로 초청받아 간적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들 사이의 대화는 얼마나 깊이 들어가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극단적인 죽음 사이에서 죽습니다. 품위있는 죽음과 아주 품위없는 죽음 말입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평균 수명의 연장, 공중 건강의 진보와 위생 개선, 노인들에게 비교적 편안한 주변 환경 등은 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사망 원인이 심장 혈관 질병, 암, 중풍, 복합성 당뇨 등 퇴행성 질환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요 의료 활공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사들이 조심스럽지만 값비싼 치료법으로 환자들을 과잉 치료하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의료 과오 소송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 이 경향은 '무모한 치료'로까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반대 경향으로 실용주의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만약 환자가 쓸모없게 되면, 최소한의 치료도 중단합니다. 한 그리스도인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이 점점 궁해지고 개인의 생명의 가치가 떨어져 감에 따라 사람들은 후자에게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돈이 많이 들면서도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치료로 환자의 품위를 손상시키기 보다는 투병기와 회복기 동안 그 품위를 보장해 주는 적절하면서도 사랑이 담긴 방법을 찾아낼 수는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일반 외과 의사인 C.에버렛 쿠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은 대화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내 아내는 내가 극약을 주사해서 세상을 하직하게 하는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또 나도 내 가족이 치료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치료 기간을 충분히 길게 끌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는 아내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고통스러운 생명을 연장해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쿠프 박사도 훌륭한 성경 연구생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의 책임
 
 환자도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치료비를 충분히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유력하거나 유명한 인물은 자상하고 사랑이 담긴 치료를 받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따르던 자들은 어리둥절 했습니다. 언제 그들이 이렇게 고상한 일들을 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생명의 가치에 우리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그 방법 몇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제발 떠나지 마세요.
 
 나는 현대 문명의 두드러진 현상중의 하나가 외로움이라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파티 석상에서도 외롭게 있을 수 있습니다. 군중들 속에서 혹은 시골에서도 외롭게 있을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유명한 부자도 무명의 가난뱅이도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죽어가는 환자를 집어 삼키고 그 마지막 몇 시간을 '버림'이라는 고문실로 만들런지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것은 주변 사람들의 자세 때문입니다.
 
 첫째, 독백하는 자세입니다. "애, 좀 어떠니? 좋아보이는데!" 환자는 지금 느낌이 어떤지 이야기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관심사를 피력하고픈 심정입니다. 그러나 의사나 친구들의 고압적인 자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뻣뻣한 입술' 증세를 보이고 맙니다. 그들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충고하는 일방적으로 '또 올게' 해버립니다. 약속은 하지만 지키지는 않습니다. 이런 경우 신자들은 신앙적으로 '기도할께'라고 말합니다. 그래놓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오히려 버림받은 기분을 조장하는 자세입니다. 환자는 병 혹은 사고로 인해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취급을 당합니다. 어떤 때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듯이 그들 앞에서 이야기 하면 마치 그들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강아지라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면 지각이 있어 압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귀를 쫑긋 세웁니다. 예수님은 '이 소자 중 지극히 작은 자'를 말씀하시며 동물 애호가들도 인간이 개보다는 나은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입니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삶들은 신호를 보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민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애." 이것은 자포자기의 말이 아니라 이해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니야 너는 오래오래 살꺼야" 하는 식으로 무관심하게 대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거꾸로 됩니다. 성실성은 병실 창문틈으로 모조리 날아가 버린 듯합니다.
 
 요양소에 있는 사람들도 중환자와 마찬가지로 사실 버림받은 상태입니다. "나는 그를 언제나 과거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어." 이것은 합리화에 불가합니다. 이 버림받은 증거는 신체적인 접촉에서도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입술에다 입을 맞추어 주었는데, 그 다음에는 이마에, 그 다음에는 멀찍이에서 손키스로 대신합니다. 외로움이 점점 커져갑니다.
 
 나는 만약 야곱의 가족이 야곱을 버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임종 직전에 야곱은 아들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각자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언하였습니다. 어떤 아들들은 강력한 권고를 받았고 어떤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죽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33).

중환자를 위한 하나의 배려
 
 몇 년전 칼럼니스트인 죠지 윌이 뉴스 위크지에 '좋은 죽음'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나는 그 논설을 오려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미국 국민의 태도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해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윌은 이렇게 말합니다. "퇴행성 질환에는 강한 '공격적인' 치료가 실제적으로는 아무 유익없이 환자의 고통만 가증시키는 시점이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환자를 위한 관심은 품위있는 죽음에 관한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논설은 안락원(安樂園)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서구 세계에서 급속하게 팽창하고 있는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개념입니다. 미국에서는 비교적 새롭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황금률 원칙을 따르는 면에서는 오래된 개념입니다.
 
 중세에 있는 중세식 안락원은 성지 순례를 떠난 순례자들이 그 오랜기간 동안 휴식하고 양식을 공급받던 피난처였습니다. 때로는 안락원이 수도원 근처에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안락원 가운데 하나는 스위스 알프스에 있는 성 버나드 안락원이었습니다.
 
 현대적 안락원 운동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양호사인 시실리 사운더스 박사가 처음에 성 크리스토퍼의 집을 설립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델로 안락원을 세웠습니다. 안락원은 죽어가는 환자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줍니다. 그 첫째 목적은 만성적인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입니다. 한 안락원의 의학 책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는 때는 없습니다. 질병 치료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환자의 편의를 위해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 크리스토퍼 집의 목적은 사랑으로 돌보고 모든 종류(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인)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의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안락원은 공동체 가운데 치료적 공동체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살도록 도와주고 그 가족들이 살아남도록 도와줍니다.
 
 죠지 윌은 말합니다. "대안으로 안락원 치료가 있으면 안락사의 요구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안락원의 대안이 없으면 안락사 입법 운동이 늙고 힘없고 사회가 자신들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압력을 계속 행사할 것입니다. 병이 치료 불가능할 때 이런 사람들은 처절한 자신의 고통과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인위적인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며 죽을 권리를 '죽을 의무'처럼 보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한때 그렇게도 중요하던 물질적인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터니어는 말합니다. "성공의 추구, 실패하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 이것은 젊은 때로 충분합니다. 이러한 오랜 노력이 가져온 열매가 무엇이든지간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하잘 것 없게 보일 것입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평온함입니다."
 
 평온함은 시편 23편의 '잔잔한 물'입니다. 평온함은 노인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대면하였을 때 말하던 것입니다. "주여 이제는 제가 만족히 죽을 수 있습니다."(눅 2:29, LB).
 
 평온함은 안락원 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평온함은 품위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보호를
 
 안락원 운동은 계속해서 커져가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생명을 위협하거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을 알고 있으면, 안락원이 합리적이고 사려깊은 치료 대안을 제공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안락원에 들어가게 됩니까?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하면, 그 환자는 병원 치료 대신에 안락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환자를 안락원에 맡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죽어가는 사람은 집에 있고 의사, 간호원, 그밖에 의료 종사자, 성직자, 가정 의료 보조원, 훈련된 사회 봉사자 등으로 구성된 지원 팀이 개인적이며 포괄적인 간호를 맡습니다. 이 지원은 환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가족을 도와줍니다.
 
 샌디에고에서는 죽어가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진 6명이 안락원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그 규모는 점점 커져서 10년 이내에 3,200명의 환자와 그 가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오늘날 그 기준에만 적용된다면-기준이란 단순히 중병으로 몇 일, 몇 주, 혹은 최대한으로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으면 됨-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피부 색깔, 종교, 경제적 지위, 어떤 것도 이런 기구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되거나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깊이 감추어져 있던 인간적인 필요가 표면으로 부상합니다. 가족들이 어떤 때는 무기력감을 느끼고 어떤 때는 화를 냅니다. 감정을 숨길 수 있겠으나 너무나 고통스럽게 되면 노출됩니다. "안락원의 목표는 이런 능동적이고 자연적인 감정의 표출을 돕고 그래서 환자의 마지막이 마땅히 그래야 되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사랑과 보호의 분위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샌디에고 안락원의 대중 관계 책임자이자 목사인 분은 모두 조원과 자원자들의 역할이 보호와 보호 행위를 조화시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가정 보호 봉사에는 매일 가정 방문, 사적인 일과 사업상의 일 지원, 간호, 심부름, 영적 심리적 지원 등이 있습니다. 환자가 죽은 후에도 안락원은 슬픔을 당한 기간 동안 계속해서 가족들을 돕습니다.
 
 안락원 조원에 의해서 가족들의 분위기가 바뀐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임종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른들은 4살짜리 손녀에게 다른 방에 가서 놀고 할아버지 곁에는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거실에 앉아 울고 있는 10대인 손자들을 집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한 안락원 직원이 꼬마가 집 모퉁이에서 홀짝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우니?"
 
 "어른들이 할아버지를 못 보게 해요. 막 호통을 치시잖아요!" 꼬마는 울먹였습니다. "어른들은 할아버지를 무섭게 하려고 하나봐요."
 
 안락원 조원은 가족들에게로 가서 말했습니다. "애들이 할아버지를 보고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들여 보내세요."
 
 그 부모들은 마지못해서 아이들을 방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꼬마는 발뒤꿈지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이 거기 와 있는지 할아버지가 모르는 것 같았는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서 할아버지 옆에 누워 꼭 껴안았습니다. 다른 손자들도 침대 옆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고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어린 소녀는 그 경험, 또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 혹은 할아버지의 임종 순간에 옆에 있었던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를 보면 안락원의 보호는 다른 좋은 효과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간호를 받을 때 환자의 침체감, 불안, 분노의 감정이 감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락원 계획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집에서 죽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코네티컷 주의 뉴헤븐에서는 집에서 죽은 사람의 비율이 10퍼센트에서 7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봉사에 종사하는 직원들과 자원자들로 인해서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면이 하나 더 늘어났습니다. 바라기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환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기회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소경의 이야기가 생각나십니까? 거기에 보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 필요가 충족되고 눈을 뜨게 된 한 사람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치료하신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았고 그 위로와 사랑의 원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의 필요가 충족될 때 그는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성취하실 수 있는 바를 보는 시야가 개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그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현재 미국의 치료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경향과 같은 긍정적인 어떤 일에 참여할 때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남을 섬기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에이즈(AIDS) 바이러스에 의한 죽음에 관한 현재의 무서운 예견이 사실로 나타난다면, 이와 같은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가 아주 시급해질 것입니다.
 
 죽어가는 아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부모들을 하나님께로 인도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안락원의 목사님은,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이 통찰력이 어른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은 아주 공공연하게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관해서도 어른들보다 훨씬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치명적인 환자들은 어느 시점인가 자신들의 현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거의 지원없이 환자와 그 가족이 그것을 견디어내도록 버려두었습니다. 이제 상황이 바뀐 지금, 기독교 공동체는 특히 종교적 배경이나 연고가 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안락원에는 직접 봉사할 자원자가 필요합니다. 이들은 '안락원의 심장'이라고 불려집니다. 직접 봉사할 자원자들은 환자와 가족들의 특별한 친구들입니다.
 
 자원자들은 대화술, 고통과 증상 처치법, 슬픔과 사별의 아픔을 위로하는 법, 영적인 치료, 도덕적인 문제, 그리고 마지막 처리 등과 같은 분야에 걸쳐 훈련을 받습니다. 이런 기술들이 복잡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익혀두어야 하는 사람의 기본 자질이며 재능입니다. 이것은 또 수천 명의 사람들을(20세기 말에 사람들이 점점 장수함에 따라) 도와 마지막 순간에 어느 정도 품위를 유지하게 할 수 있는 동정의 표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종 시간에 와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것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롬 15:4)됨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오늘도 그를 믿는 사람들의 가슴 안에서 이 땅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없이 자비의 철학을 펼치는 인본주의 철학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해왔고, 더 많이 사람을 사랑하고 더 많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돌보는 그리스도인.'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단체들의 표어가 되어야 하며 깃발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사별한 자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가 의미 있음을 믿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의 사랑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저들이 알겠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줄 우리의 사랑으로 알겠네"라는  찬송 가사처럼.

제8장
슬픔을 통해 배우는 것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골 2:2).
 
 그 자매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비극적인 사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례식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실 때 그녀는 예배당 맨 앞줄에 앉아서 잠잠히 듣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정돈되어 있어서 누가보면 평온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마지막 기도가 끝나자 친구들은 관옆을 줄지어 지나가고 가족들은 눈물로 부둥켜 안았습니다. 다 끝난 후 이렇게들 말했습니다. "모두 참 잘 견디는데, 특히 그 애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셔." 그 뒤 부모들은 집에서 격려의 말을 해주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접견했습니다.
 
 며칠 후 남편은 아내가 부엌 바닥에 앉아서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 자매가 '대단히 강인'한 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매 역시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슬픔 감정에 못견디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한 사람인 프란세스 노스 여사는 비극적인 사고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부인의 강인함, 심지어 쾌활함에 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일반적인 평가는 "이런 승리는 주님밖에 주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프란세스는 발목이 잡힌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자니 주님을 내려놓는 것 같은데 어떻게 슬픔을 나타낼 수 있었겠습니까?
 
 수개월이 지났을 때 룻은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프란세스가 두문불출 은둔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룻은 프란세스와 오랜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가 갔을 때 프란세스는 혼자 앉아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룻은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대꾸가 전혀 없거나 한마디로 끝냈습니다. 이윽고 프란세스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한 것을 깨닫고서 룻은 의사에게 전화해도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프란세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룻이 전화를 했을 때 의사는 그를 즉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해심이 많고 다정한 그리스도인인 그 의사는 프란세스로부터 오랫동안 해결하지 않고 눌러 놓기만 했던 슬픔의 위협 신호를 발견하고서 치료를 맡았습니다.
 
 지금 프란세스는 정상이며 남편이 사고를 당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모양이나 태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상태를 판단하면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미소를 벗겨 보십시오. 그러면 절망적인 결핍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슬픔은 여러 가지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슬픔의 외관은 무관심, 일에 대한 집착, 분노, 쾌활, 기타 여러 가지 감정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슬픔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슬픔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할 때 남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슬픔은 사실이다.
 
 슬픔은 여러 가지 상실에 따라 옵니다. 직업이나 친구의 상실일 수도 있고, 애완 동물이나 물건의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결혼 관계의 상실을 죽음만큼이나 쓰라린 슬픔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슬픔은 우리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매년 슬픔을 당하는 비율은 250가정 가운데 10가정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는 죽음과 죽는 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므로 특별히 죽음으로 인한 절망과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슬픔과 슬퍼하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볼 많은 원칙들은 다른 형태의 상실, 다시 말해서 결혼, 파란 등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우는데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슬픔이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으면 우리 생활의 시각을 잃게 할 수 있습니다. 한 친구가 자기 어머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을 너무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지 17년이 되었는데도 남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통곡을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아내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나도 당신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는데 그렇다고 17년 동안 당신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을 거예요."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사별을 당해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을 표현하면서, '애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생은 가야하고
사자(死者)는 잊어야 한다네
생은 가야하고
착한 사람이라도 죽는다네
애니여 아침을 드시오
댄아 약을 먹어라
생은 가야하고
나는 그 이유를 잊었네


 예수님도 슬품에는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사 53:3,4은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예언했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슬픔은 필수입니다. 성경은 야곱이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겼다고 생각을 했을 때, "야곱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메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해서 애통"해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들렸을 때, 다윗이 그의 슬픔을 표현한 시는 세대를 거듭해서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죽음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을 때. 이 때만큼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을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은 보편적입니다. 슬픔을 처리하는 방법은 개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슬픔의 감정
 
 죄책감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나오는 고통스러운 느낌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만약…만'이라는 합창을 시작하기 쉽습니다. "만약 위생병만 그렇게 늦게 오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 차만 사주지 않았더라면", "만약 나만 거기에 있었더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만약 조금만 더 같이 시간을 보냈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돌보아 주었는지 말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죄책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실제적 죄책감과 의식적 죄책감입니다. 어떤 때는 이 둘이 뒤엉켜서 우리가 어느 것을 겪고 있는지 모르기도 합니다. 실제적 죄책감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했거나 하나님에 대한 서원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알거나 느낄 때 옵니다. 거짓 죄책감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무엇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때 오는 일반적인 슬픈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벨마 바필드는 자기가 저지를 범죄 때문에 처형되었으므로 실제적 죄책감을 알았고 체험했습니다. 다윗 왕도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살해를 명령한 후 틀림없이 실제적 죄책감으로 고통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며 불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친구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완전한 사랑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불완전하면 할수록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의식화하는 일이 그만큼 더 필요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가족의 생활 수준 이상으로 화려한 관, 호려한 무덤을 만드는 것 등은 죄책감을 속죄하려는 방편 가운데 하나 일는지 모릅니다. 나는 여기에서 장례식 절차를 비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기로는 그것들은 각 가정의 사정이며 사려깊은 판단에 속한 문제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죄책감이 안도감의 결과로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환자가 너무 오랫동안 앓다가 드디어 죽은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 때는 "이제 고통을 벗어 나시게 되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렇게 감사했기 때문에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관계에 있던 사람이 죽었을 경우 살아있는 사람은 자책적인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릴 때 양부모를 다 잃은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숙모의 손에서 자랐는데, 그녀는 이 아이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아주 가끔 형이 찾아왔으나 형도 이 아이를 무시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21살에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 숙모와 형이 갑자기 와서 의사에게 소리소리 지르고 인척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려내라고 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전에 무관심했던데 대한 죄책감이 슬픔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슬픔이 복받치면, 자신들이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비난하거나 정죄하기도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 내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밖으로 이끌어 내셨을 때 마르다가 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때문에 불신자들 보다 잇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라, 그러면 용서하시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실제적이건 의식적이건 죄책감은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고백은 용서를 가져오고 용서는 자유를 가져옵니다.
 
 어떤 언어에서나 치료하는 말 가운데는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가 가장 많이 들어갑니다. 하물며 쓰라린 죄책감에서 영혼이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반드시 남을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슬픔은 또 일상적인 삶에 대한 흥미를 꺼버립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쉘돈 바나우컨은 아내가 젊은 나이에 죽은 후 그의 유명한 책 '잔인한 자비'에 이렇게 씁니다. "세상이 끝났는데 어떻게 만사가 계속될 수 있지? 어떻게 한 사람이, 그리 크지도 않은 사람이 우주만큼이나 넓은 공백을 남겨 놓을 수 있을까?"
 
 사름을 잃어버린 후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음식도 맛을 잃고, 음악은 공허해 보이고 아무것도 만족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때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길거리에 걸어가는 사람이 다 죽은 그 사람 같아 보이고, 예고없이 고통이 찾아 옵니다.
 
 슬픔의 다른 모습은 분노입니다. 한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자매가 여성도들이 모이는 방으로 들어가 최근에 남편을 사별한 분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 과부가 다음과 같이 쓰라린 반문을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나에게 이렇게 했을까요? 나는 이제 두 아들을 키워야 합니다. 어쩌면 더 싼 집을 찾아서 이사해야 될는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나를 엉망으로 남겨두고 죽었어요." 이 과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억제해 온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다음에 자신의 독설로 인해서 남편 품위가 손상된 것을 후회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가 표현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죽은 자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 없을 때, 슬픔을 당한 사람은 다른 희생양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사, 간호사, 병원, 친척들을 비난하고…또 비난할 사람을 찾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비난하지 그럽니까? 이것도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소리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어찌하여 내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내 반석이신 여호와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하리로다"(시 42:5-9).
 
 예수님은 마르다가 자신의 무덤을 비난할 때 이유를 대거나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참으시며 이해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공연한 분노의 대상이 된다면 이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이 안정될 때를 기다리고, 안정되면 그 때에 토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픔의 감정들이 뒤엉키면 평상 생활로 돌아가기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죽은 사람과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삶을 암울하지 않게 보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계속 살아가기를 바라는 주위 사람들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친구들이 무정하고 인정머리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처럼 스토아 철학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슬픔을 삶의 과정의 정상적인 한 부분으로 봅니다. 어떤 때는 슬퍼하다가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우울은 흐린 날과 같습니다. 구름이 태양을 완전히 가려서 태양이 비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지급 '무덤 속에'있다고 하는데, 그 표현이 정말 적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슬픔을 헤쳐나오기 위해서 정서적, 신체적, 영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슬픔을 견디어 내는 힘을 줍니다. 믿음은 회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빛난다.
 
 우리는 각자의 슬픔을 견디어 내는 기막힌 대답이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 친구는 W.그래함 스크로우지의 말을 몇 마디 나에게 인용해 주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잃었을 때 이 말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슬픔이 활동하게 놔 두십시오. 슬픔의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발을 내어 딛으십시오. 쓰라린 잔을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마시십시오. 슬픔이 주는 모든 추억, 모든 희망들을 하나씩 생각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것들-그들이 입던 옷, 그들이 쓴 편지, 그들이 읽던 책, 그들이 앉던 의자, 그들이 듣던 음악, 그들이 부르던 노래, 그들이 걷던 길, 그들이 하던 놀이, 그들이 앉던 교회의 자리, 그 밖에 많은 것들-을 보면 날마다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린 무엇이 되겠습니까? 슬픔을 가라 앉히기 위해서 과거와 단절되기를 원하십니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슬픔 속에서 새로운 기쁨을 맛보는데, 그것은 찢긴 가슴을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에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슬픔이란 병에 대해서는 잘못된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건강하려면 무엇보다도 슬퍼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내가 받기로는 하나님께서 눈물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선한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물샘을 사용하면서 당혹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물샘이 작동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며 감정이 풍부해서 눈물샘에서 눈물이 흘러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용기와 눈물을 상반되는 것으로 보면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히 남성들은 눈물을 유약의 표시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구약을 보면 용감한 사람들도 소리질러 울었습니다(욥 2:12). 눈물이 비남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놓고 울었습니다(삼하 1:12). 요아스 왕은 선지자 엘리사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왕하 13:14).
 
 만약 공석상에서 울기가 곤란하거든 사석에서라도 마음놓고 통곡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감정을 표출하지 않은 채 위엄을 갖추려고 하고 힘만 내보이려고 한다면 신체적으로 큰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랜저 웨스트버그는 '좋은 슬픔'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메디칼 센터의 목사로서 오랫동안 의사들과 환자들 가까이서 일해 왔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점차 깨닫게 된 것은 내가 본 많은 환자들이 아픈 이유가 슬픔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우선 환자들은 신체적인 병 때문에 의사에게로 갑니다. 이들 가운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지난 한두 달 동안 겪었던 커다란 손실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들에게서 그 손실에 관계된 핵심적인 문제들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내가 보기로는 사람들의 큰 손실을 처리하는 방법과 질병 사이에 있다고 생각되는 관계만큼 밀접한 관계는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습니다."
 
 USC 메디칼 센터의 목사 필 매늘리는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1/4은 해결되지 않은 슬픔 때문에 입원한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잭 블랙 목사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통곡하고 정신없이 운다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 행동하고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슬픔을 표출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임을 입증하며, 용기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신체적으로 볼 때 슬픔의 심한 증상 가운데 하나는 목이 꽉 막혀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한 자매가 이렇게 말합니다. "먹을 수가 없어요. 목이 꽉 잠겨 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남편이 죽고 난 뒤 잘된 점 하나는 몇 년 동안 그렇게 빼려고 했던 살이 빠진 점입니다. 남편이 지금 내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답니다. 한 친구가 그 말을 되 받아서 "그래 내 생각에는 지금 보고 있을꺼야"라고 했습니다.
 
 다른 증상은 호흡이 가빠지거나 뱃속이 텅빈듯한 느낌입니다. 슬픔에 관한 한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한때는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막연한 비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 가운데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은 이 단계에서 자신들의 몸을 돌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적당한 음식을 먹고 필요한 휴식을 취하고 정신 자세를 좋게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특별히 좋게 느껴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당황함도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쉬운 감정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요."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두려움의 걱정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집중력을 상실합니다. 이것은 당혹감만 증가시킵니다. 그 다음에는 당혹감이 일종의 정서 마비 상태를 유발시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가장 친밀하고 아끼던 사람이 죽었을 경우, 나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 없이 어떻게 그 고통스럽고 깊은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슬픔이나 당혹감이나 두려운 시간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 13:5). 그리고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그분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 7:8).
 
 그리스도인은 이 빛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던 한 어머니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굳게 잡고 항상 암송하던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도무지 식사할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도 방에 들어가 혼자 있고 싶어질 때, 그녀는 문을 열어놓고 "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반복해서 생각합니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평생 말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그때 이후 여러 위기를 지날 때마다 그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궁극적이며 정당한 소망이 있습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소망이 조금씩 조금씩 실감나게 될 때, 이제 자신들이 슬픔의 과정 중에서 회복 단계에 와 있음을 압니다. 극심한 슬픔을 느끼는 주기가 점점 없어지며 그 기억들이 점점 덜 고통스러워져서 마침내 그 슬픔은 아름답게 느껴지며 억지 웃음 대신 진정한 웃음이 됩니다. 소망의 말씀들이 눈에 뜨이고 평안과 심지어 기쁨도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살으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우리는 부활시에 우리 구주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결합할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 아노니"(고후 5:6).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서 나오는 위로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하지만 격심한 슬픔을 경험한 분들은 결코 예전과 같은 상태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더 강해지거나 더 약해집니다. 궁극적으로 어느 쪽이든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한 가지 일을 속히 끝내고 다른 일로 넘어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대부분 그 손실들을 차분히 견디어 낼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애곡과 상장을 두르는 것은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유명인사 가운데 상장(喪章) 두른 사람으로는 모친상을 당했을 때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우즈벨트 대통령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슬픔의 표식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르지 슬픔을 당한 사람만이 슬픔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얼마나 아픈지 압니다. 그러나 똑같은 두 사람이 없듯이 슬픔의 상황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잘 대비하려면 깊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잡을 필요가 있기 전에 미리 그 약속들을 받아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믿음으로, 슬픔을 당한 다른 사람들을 잘 살핌으로, 아직까지 해가 비칠 때에 영력을 길러 놓음으로 믿음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비가 시작되어야 비로소 우산을 준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산이 필요하기 이전에 이미 손에 들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를 위해 친구들의 도움도 받아야 합니다. 기꺼이 도움을 주기도 해야 하지만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위로하는 법을 알려면 우리가 먼저 위로를 받아 봐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이시로다"(고후 1:3, 4).
 
 음악가인 남편이 죽은 후 아주 특이하게 나이 많은 부자 과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이 죽은지 20년 동안 남편의 음악 스튜디오를 그가 죽었을 때 당시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피아노의 자물쇠를 잠그고 아무도 피아노를 치거나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매일 그방 입구에 서서 기억을 되살리며 과거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누가 자기 곁에서 슬픔에 찬 자기를 도와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며 이해하고 그 남은 삶을 도와줄 사람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내 아내가 말하는 바로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와서 어머니를 가장 잘 위로해 드린 사람들은 과부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직접 깊은 슬픔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자동차 사고로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할머니를 한꺼번에 잃은 소녀에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아이와 수년을 함께 지내는 부모에게 우리가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딸이 힐사이드 부랑배들에게 강간 살해된 부모들의 심정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이해 능력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나는 이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힘과 위로의 원천이 되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 제안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시 51:10). 우리는 여기에 이해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 사려깊은 마음을 더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을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벧전 3:8). 성 페트릭은 다음의 기도를 자신의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머리 안에
내 이해 안에 계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눈 안에
내 모습 안에 계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입 안에
내 말 안에 계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가슴 안에
내 생각 안에 계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임종에
내가 떠날 때 계시옵소서.


 어떤 때는 성도들이 상가를 방문하면서 긴 성경 본문, 짧은 설교 몇 편, 권면을 준비합니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음 한 예를 보십시오. 한 젊은 부부의 가정에 '유아돌연사증'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아기가 죽었습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집에 모였는데 젊고 아직 미혼인 신학생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최근에 배운 승리와 확신에 관한 성경 내용을 모조리 열거해 나갔습니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그랬겠지만 그 설교는 마치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이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방을 빠져나갔고 결국 슬픔을 당한 두 부부만 남아서 마지못해 그 감각이 둔한 신학생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둘째 제안은 듣는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합니다. 그러나 듣기는 힘듭니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우리들에게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없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충격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또 하면 싫증을 느낄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자매가 자신의 성경 선생님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선생님이 집에 오셨습니다. 자매는 선생님이 무슨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시거나 성경을 인용하시거나 성경 이야기를 하실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람들이 왔다가 가곤 하는 동안 그저 쇼파에 앉아만 계셨습니다. 음식이 차려지고 치우고 또 사람들이 다 갈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쇼파에 그대로 앉아 계셨습니다. 드디어 그 자매가 지쳐서 옆에 앉으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어떤지 이야기해 보세요." 그후 오랫동안 그 자매는 충격과 슬픔을 당했을 때 자신에게 깊은 감동을 준 사람으로 그 말 없으신 성경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들으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음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부르짖음을 들으심으로 어떻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지를!
 
 더그 매닝은 그의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는 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걸어다니는, 감동적이고 인격적인 집중 치료 기구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셋째 제안은 슬픔을 당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말에 충격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악몽일 수 있으며 손님이 와 있을 때에도 삶과 현실이 왜곡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딸이 죽은 후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다 낡은 스웨터를 옷장에서 꺼내 입고 부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정신이 사나운 아버지는 친구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이건 내 낚시 스웨터잖아. 왜 이걸 네가 입고 있어!"
 
 그 심정을 이해하는 친구는 아무 말없이 스웨터를 벗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시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몇 년 후 그는 그날 밥의 일을 소상히 기억하면서 그 친구가 자기에게 꼭 필요한 때 그곳에 있어 주어서 감사했습니다.
 
 넷째 제안은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것을 유가족이 결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좋겠니?"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간단하고 잛게 하십시오.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구를 빙빙도는 지루한 기도 내용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제안은 묻지 말고 필요를 알아 차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화 받을게." "장의사에게 같이 가서 장례절차를 의논해 줄게." 혹은 "부엌 일은 걱정하지마. 내가 다 처리할게." 이렇게 미리 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좋지 않은 말 가운데 하는 "필요하면 전화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제안은 상처가 치료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위로하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 기념일, 생일, 명절, 죽은 날, 이런 날들은 지내기 힘든 날들입니다. 이런 날들을 기억하고 저녁에 초대하거나, 전화 혹은 엽서라도 보내주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이 많은 그리스도인 한 부부는 여러해 동안 매년 친구의 아들이 죽은 날에 전화하거나 꽃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들인 잊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소망-가장 중요한 것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비록 슬픔 가운데서라도 조만간에 조그마한 소망의 빛을 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 아픔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가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됩니다. 다음에는 서너 시간, 그 다음에는 하루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밤에 잠을 잘 잡니다. 음식 맛도 돌아 왔습니다. 천천히 회복이 시작됩니다.
 
 신자들에게는 성경에서 소망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말씀인데, 전에 여러 차례 읽었던 구절이 갑자기 아주 분명하게, 새롭고 더 깊은 의미로 떠오릅니다. 슬퍼하고 있는 엄마에게 멀리 있는 딸이 전화를 하면서 과거에는 그 구절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야단합니다. "엄마 들어보세요. 롬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씀이 놀랍지 않으세요?"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의 어머니와 또 어머니와 같은 분들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란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사실에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소망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안에서 우리의 서망을 발견합니다. 믿음과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슬픔을 비껴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견디어 내며 경험을 통해서 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 나는 죽음을 원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료인 슬픔까지도 원수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슬픔은 삶의 란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더 밀접한 관계를,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더 돈독한 유대를 맺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더 넓은 손길을 뻗칠 수 있습니다.

죽는 법과 사는 법
 
 나는 태어나서 몇 년 동안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챨롯트 근처에 있는 목조 농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살 때 새로운 붉은 벽돌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집을 9,000불이나 들여 지었고 방이 많았습니다. 또 웃음과 책, 음식과 통조림 만드는 냄새, 무엇보다도 사랑의 분위기로 넘치는 살만한 집이었습니다. 그 멋진 집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잠언 말씀이 기억납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3, 4).
 
 내 아버지 프랭크 그래함은 농부였습니다. 아버지는 건강하고 정직하셨기 때문에 농장 일꾼들과 우리 자녀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는 우리가 말 안듣고 못된 짓을 했을 때, 아버지 허리띠의 따끔한 맛을 지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화나시거나 실망하셔서 체벌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어머니는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나는 눈물을 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보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남편이 아이들을 혼낼 때 나는 언제나 남편 뒤에 서 있었다."
 
 이 시골 아이에게는 틀림없이 매가 필요했고, 또 매를 맞을 만큼 잘못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내 어머니 모로우 코페이 그래함은 시골에서 나서 시골에서 성장하셨습니다. 18살 때의 어머니 사진을 보면 그 당시의 전형적인 깁슨 걸의 머리와 매혹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고 가는 허리와 살짝 웃는 미소를 띤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여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분 중의 하나입니다. 또 나에게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는 나에게 재미가 하나도 없었는 데도 말입니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에게 경건 서적을 읽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지겨워 죽겠다고 생각한 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손장난도 하고 유리창 밖을 멍청히 내다 보거나 손가락을 꺾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날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를 가족 의사에게 데려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얘는 힘이 남아돌아서 도무지 가만있지를 못해요." 가끔 나는 그때 어머니가 내 극성에 지치셔서 조언을 구하지 않았나 생각들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네 자녀를 키우랴. 또 농부의 아내로서 일을 하랴 무척 바쁘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도 오후 내내 콩을 뽑으시고 통조림을 만들 준비를 하시면서 부엌에 서 계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께서 선반 위에 올려 놓으신 과일과 야채 통조림들을 기억합니다. 통조림하는 계절이 지나면 찬광에 적어도 500병 이상을 저장하셨습니다. 그러시고도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지요.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성경을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십대의 소년이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계셨습니다. 스코필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셨지요. 어머니는 뉴욕에다 신앙 서적을 우편 주문하셨고 탐욕스러우리만치 열심히 책을 읽으셨습니다. 집에는 우리가 읽을 책이 언제나 놓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사랑스러운 여인을 예비하셨고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룻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어머니를 닮았고 그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룻을 만났을 때 룻이 어머니보다 훨씬 훌륭하게 느끼셨기 때문에 아주 흡족하였다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치셨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어머니 일생의 증거는 내가 현재의 나로 형성되도록 도와주셨고 내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면에 어머니의 마지막 몇 년의 증거와 죽음은 내게 죽는 법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종까지 우리 가정에서 사셨고 놀라운 정신으로 섬기셨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가정 기도를 좀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4-15세 되었을 때 우리는 가정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기록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남편이 없이 무릎 꿇고 기도하던 그 때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함씨는(어머니는 남편을 지칭할 때 아주 공손하셨습니다) 톱에서 튕겨 나온 나무 조각에 얼굴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틀이나 사경을 헤매었습니다. 나는 침실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남편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시도록, 다시 한 번 건강을 주시도록 애원하면서 신음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가 그렇게 필요했던 것이지요."
 
 내 아버지는 그 생명의 위협 이후 오래 더 사셨습니다. 그리고 1962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46세된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어머니의 생활을 부지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19년간도 슬픔이나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년에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 그 아름다운 한 모범이셨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기록하십니다. "자녀들이 다 결혼해서 제 갈길로 간 이후, 그리고 남편의 죽음 이후로 나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습니다. 나는 빌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엄청난 책임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또 내 다른 자녀들, 손자 손녀들. 증손들을 위해서, 그리고 전세계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세계 어디에 있든지 내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요?

부드러운 마음
 
 한 저명한 정신과 전문의는 인간의 제일의 임무는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간단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집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내 어머니는 바로 이 일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2년 동안 내 어머니를 돌보신 분은 로우즈 아담스 부인이었습니다. 그분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로우즈는 가끔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신학교 과정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을 마음대로 기억 인용하고 매일의 삶 속에 적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웬만한 목화자 보다 나았습니다. 신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어머니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도다"(사 28:10)에서 배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어머니는 여러 지식을 다 모아서 그 지식으로 말할 수 없이 많은 생명들에게 감화를 끼친 부인이셨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제일의 격려자였습니다. 내가 설교하는 것을 처음 들으신 것은 챨로트에서 40마일 떨어진 옛날 회당 건물에서 였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였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 후에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바로는 그날 저 때문에 너무나 긴장하셔서 식은 땀으로 다 젖으셨다고 합니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내 목소리가 너무 컸다고 생각하셨답니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습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아버지 어머니는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이 말씀을 붙드셨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어머니께서 항상 나에게 말씀하신 것은 복음을 전할 때 단순하게 전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주님께로 가시기 2주전 어머니는 똑같은 말씀을 내게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 저는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을 전하려고 합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것을 전할께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쥐시더니만 "나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자기 자식을 믿으시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나는 어머니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을 기억하면서 로우즈 아담스 부인이 어머니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들을 때, 다른 사람들도 어머니의 모범을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병이 다 낫고 병원에서 집으로 오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깨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그 사람의 생애를 사용하지 않으신단다." 어머니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에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을 즐기셨습니다. 어머니는 주님께서 두통을 통해서 자신을 다루셨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은 우리가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로우즈는 사랑이 많고 재미있고 열정적이며 가슴만큼 웃음이 큰 부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와 2년간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로우즈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머니는 이런 글을 써서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폭풍이 다 지나간다면 당신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이
구름 한 점 없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로우즈와 어머니는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에는 어머니께서 성경을 읽으시고 로우즈에게 적용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날 동안 약함과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영적인 양식이었습니다.
 
 내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가르치신 최초의 성경 가운데 하나는 전 12:1이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날이 없다고 할 때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손자 손녀들에게도, 증손들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고 우리 모두에게 젊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 공부하는 법을 배우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결코 공부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목사이신 로스 로우즈 박사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더 많이 배우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기만을 원합니다." 목사님은 "이건 참 놀랍지 않습니까?…그녀는  89세의 고령이시고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는 가장 완벽한 분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더 많이 배우고 싶어 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로우즈 아담스 부인은 우리에게 어머니께서 어떻게 위엄있고 정확하게 성경을 읽으시고 그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를 풀어 주셨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의 진수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로우즈는 '사막의 생수'라는 잡지 여백에 그 말씀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하셨던 말씀들을 몇 가지 적어 봅니다.

명철한 마음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어머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실 때 그것은 자연석을 짜르는 것과 같습니다. 돌은 다듬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어서 내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생각이 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우리는 그분의 하늘 성전에 알맞는 돌로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그분처럼 되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지상 생활의 목표입니다. 그분은 하늘 성전의 석동이며 목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다듬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아직도 그분의 귀한 손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채석장에서 빠져나가려고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모든 돌은 각각 쓰일 곳이 있습니다. 그 돌이 필요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이 말씀을 읽으신 그 날 어머니는 몹시 약해지셨습니다. 그렇지만 로우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언제나 자상하게 늙고 즐거운 마음을 갖기를 원합니다.…불평하기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단이 내 고통을 이용해서 억지로 불평하게 만들려고 애쓴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나를 둘러싸신다는 이렇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약함과 싸움을 끝낸 그 다음부터 차차 평안과 침착을 더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내려 덮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십니다. 반대편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고 있습니다. 우리가 면류관을 쓰려고 한다면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겟세마네를 가지고 있습니다.…예수님처럼." 어머니는 만약 성령에 충만하고 주님과 함께 걷는다면 고통이 오지 않으리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잔인한 가르침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머니가 죽는 것을 두려워 하셨습니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혼자 있게 될까봐 두려워 한다고 로우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가실 때 어머니는 그 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을 항상 아쉬워하셨습니다. 로우즈는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마지막 여정
 
 일련의 작은 발작이 있은 다음 어머니는 자주 정신이 혼미해지셨습니다. 정신이 맑아지실 때 로우즈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렇게 되면 나는 내가 무얼하는지 모르니까 내 준비가 다 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내 얼굴에 화장을 옅게 하고, 그렇다고 요란하게 보이지 않게 하세요. 단지 사람들에게 흉칙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자상하시게도 이 노인은 끝까지 우리에게 매력적이시고 싶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는 아름다우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시면 드실수록 매력만 더해 갔습니다.
 
 어머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께로 갈 길을 자꾸 연기하시는 이유는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야"라고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봉사입니까!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까지도 곤경 가운데 있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오랫동안 해오시던 습관처럼, 로우즈에게 몇자 적어 보내어 얼마간의 돈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죠지 베블리쉐이의 레코드르르 듣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매일 그 레코드를 트셨고 "내 영혼아 잠잠이", "천사를 보내 지켜주시네", "놀라운 은총"이란 찬송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몇 달동안에는 저녁이 오는 것을 보면 무서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밤이 너무 깊어요"라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로우즈에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관해서는 계 22:5를 인용,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1981년 5월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우즈, 머지 않아 주님께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실 것을 느껴요. 나는 애곡이나 슬픈 마음을 원치 않아요. 행 27:22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사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1981년 6월에 나는 볼티모어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나는 매일 전화를 해서 어머니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물었고 로우즈는 찬송가 테이프를 듣고 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테이프는 몇 년 전 룻이 장모님을 위해서 녹음했던 것입니다. 내 아내는 음악이 가진 위로를 알았고 위대한 옛날 찬송을 몇 곡 카세트에 편집해서 '본향을 바라보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룻의 어머니는 테이프 레코드를 침대에 놓고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시면서 감명깊은 찬송을 듣곤 하셨습니다. 몇 년 후 우리는 이 테이프를 우리 텔레비젼 시청자들에게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내보낸 책이나 테이프 중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6월 15일 나는 프랑스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로우즈는 어머니께서 그날의 말씀으로 골 1:9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나는 수천마일 밖에서 약함과 고통의 병상에 계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 격려의 성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어머니가 더 많이 계셨더라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머니는 위대한 연설도 명석한 책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의(主義)외에는 다른 위대한 주의를 신봉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학의 학위도 없었고 사회적 명사 칼럼에 게재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도하는 법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위해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준비하시는 듯합니다. 6월말경 어머니는 계속해서 하늘로 가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로우즈는, 천국에서 자신의 집은 아주 작고 할 일이 많지 않은 반면 어머니의 집은 아주 커서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천국에서도 어머니의 집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셨을 때 어머니는 로우즈에게 침대 발치에 한 남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누군지 아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좋은 사람 같아 보이느냐고 로우즈가 물었습니다.
 
 "예, 아주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아마 당신의 보호 천사일겁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물으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들어온 여자는 누굽니까?"
 
 이때 로우즈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 밖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아, 지난 두주 동안 당신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누가 당신과 함께 있었어요. 지금도 당신 곁에 서 있어요. 그는 분명히 당신의 보호 천사일 것입니다. 자 이제 교회 갈 준비를 해 줘요."
 
 1981년 8월 초에 어머니는 갑자기 자정 무렵에 일어나셔서 거실 바닥에 깔개를 깔고 막 잠들려고 하는 로우즈를 불렀습니다. "로우즈, 애들은 모두 다 기차를 타고 있어요?"
 
 "염려 마세요. 그래함 할머니, 전부 거기에 있어요." 로우즈가 대답했습니다. 로우즈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곧 어머니가 아까보다 더 고집하셨습니다.
 
 "로우즈, 우리 애들이 다 기차를 타고 있는지 확인 좀 해줘요." 아마도 어머니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애들이 자기와 함께 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믿기론 그때 어머니는 모든 가족이 다 구원 받았는지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8월 8일 우리 형제 멜번, T.W.월슨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얼마나 룻과 메어리 헬렌(T.W.의부인)을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며느리들에게 이야기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며느리들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는 자주 집을 떠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안식구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우리 모두에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잃은 영혼 찾는 일에 충성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반 혼수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아주 큰 목소리로 선언하셨습니다. "삯도, 고통도, 아픔도, 죽음도 없다.…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인가!"
 
 로우즈는 그렇게 약하신데 어떻게 그렇게 힘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급히 침대 옆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괜찮으세요?"
 
 "내가 아직 혼수상태에 있습니까?"
 
 "예, 그래함 할머니."
 
 "아직 내가 죽지 않았어요? 우리가 다 천국에 온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로우즈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당신하고 함께 있으니까 아직 천국에 온 것이 아니에요."
 
 "그래요! 그러나 아무튼 아름다운 날이에요." 어머니는 한숨을 몰아 쉬셨습니다.
 
 어머니는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지셨고 신음하시는 것 같았고 작은 소리로 찬송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로우즈는 어머니의 입 가까이에 엎드려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 말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시…편…1…4" 그리고는 깜박 하셨습니다.
 
 로우즈는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셨는지 알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시 149:5에 줄을 그은 것을 기억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찬송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평소의 성경 암송 습관에서 그때 필요한 성구를 기억해 내신 것입니다.
 
 "그래함 할머니, '아버지여 아버지의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려는 거예요?"
 
 어머니의 팔은 뚝 떨어지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온종일 평안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일단 로우즈가 그 방을 나가려고 하자 하품을 하시는 듯했습니다. 로우즈는 어머니의 팔을 모아드렸고 어머니는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가셨습니다.

제9장
죽음을 위한 준비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룻이 모아둔 옛날 신문 스크랩을 흩어 보다가 1957년 5월 5일자 "저 마지막 날을 대비하라"는 제하의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30년 전 내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생각하면서 추억에 잠겼습니다. 그때 그 기사의 유우머스럽고 아이러니한 일이 머리에 스쳤습니다.
 
 1957년 5월 5일은 우리가 뉴욕 대회를 시작한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중요한 집회를 개최하라는 도전을 받아들인 후, "이 초청은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맹렬한 반대를 그래함의 머리에 올려 놓았다."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나는 걱정했습니다. 내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할 것이라고 룻이 생각하지 않을는지!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그곳에 6주간 동안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중이 없었던 때는 둘째날 밤 뿐이었습니다. 그 집회는 우리의 가장 성공적인 미국 대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도 집회를 황금의 저녁 시간대에 전국적인 텔레비젼 방송을 시작한 것도 이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였습니다.
여행을 위한 준비
 
 그러면 어떻게 그 마지막 날을 대비합니까? '내가 깨기 전에 죽는다면'이라는 잠자리의 옛 동요의 내용이 실제가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세상의 집을 혼란상태로 놓아 두렵니까? 아니면 정돈 상태로 놓아 두시렵니까?
 
 한 젊은 목사님은 1년에 한차례씩 사모님에게 물으신답니다. "만약 내가 지금 죽는다면 어떻겠소…어떻게 하겠소?" 이 말씀은 슬픔을 연습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전화하고 중요한 서류는 어디에 있고 재산 처분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연습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아주 흥미있는 연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 내외는, 이 우스운 죽음의 연습이 집을 정돈해 두기 이전에는 갖지 못할 마음의 평안과 열린 대화를 가져다 준다고 말합니다. 이 두 분은 남들이 70대가 되어서야 시작하는 일을 30대에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 둔다면 유족들의 고민이 얼마나 많이 덜어지겠습니까?
 
 이시야 선지자는 "너는 집에 유언하라(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라는 하나님의 비정한 메시지를 히스기야왕에게 전했습니다. 이 소름끼치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의 청지기 직무 가운데 핵심적이면서도 자주 간과되는 국면에 예리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들 각자의 책임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살아 있을 때, 죽을 때 유족들에게 남겨줄 재물들을 분배하기 위해 영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을 때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준비단계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 사실에 관해서 탁 터놓고 이야기 하려고 하지 않는 한 나머지 단계로 나아갈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의 반응이 항상 일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수년전 수술을 했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친한 친구 둘을 불렀습니다. 룻을 함께 있지 않았지요. 아내에게는 사태의 심각함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집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가족, 그리고 사역을 위해서 그 친구들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가지는 완전한 평안과 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두려움이 교차되고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어느쪽 감정도 우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백중세였던 것 같습니다. 고통 때문에 그 기억이 가물가물해 졌지만, 분명히 나는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죽음을 맛본 것은 대서양 상공의 비행기 안에서 였습니다. 그때 나와 룻은 유럽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무일없이 비행하다가 갑자기 폭발이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흔들리고 고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접시가 쟁반에서 떨어지고 승객들은 의자 여기저기에 막 부딪혔습니다. 우리는 폭탄 한 방으로 모두가 끝장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란에 대해서 잠깐의 안내 방송이 있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때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죽음 가능성을 즉각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사히 착륙했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주신데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나는 휫튼 대학 전 학장이신 V.레이몬드 에드만 박사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죽음을 맛본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에쿠아도르 선교사였습니다. 그곳 안데스 산중 인디언들 가운데서 일하다가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죽음이 그를 죄어 들어오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친구들은 관을 사놓고 부인을 도와 상복을 염색하고 있었습니다. 에드만 박사는 그때 하나님의 압도하는 사랑을 체험하고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나니"(고후 5:1)라는 놀라운 약속을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에드만 부인은 그 상복을 입지 않은 것을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 에드워드 영은 '지체는 시간의 도둑'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또한 지체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 의식의 도둑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러 슬픔을 자아내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슬픔을 자아내게 됩니다. 청지기 직분이란 우리가 교회나 기독교 단체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상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청지기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방법으로 자신의 소유를 관리하고 처분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지기 직분은 우리가 생전에 드리는 십일조에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되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그 젊은 목사님 내외분처럼, 마음으로 할 일들을 연습해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성 프란시스를 발견하고 "만약 당신이 10분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는 "이 일을 다 마치려고 애쓰겠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10분 대신에 10일이 필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집 정리
 
 우리의 죽음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로 물질적인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있습니다. 벨 박사는 이 부분에 있어서 나에게 큰 교훈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 박사님은 나에게 유언장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그분의 서류들이 파일철에 완벽하게 분류 계수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세상 재물들을 어떻게 처분하기를 원하셨는지 추호의 혼란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지침서를 작성하고 또 가장 중요한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놓는일의 귀중함을 배웠습니다. 여기에는 통장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보험 서류는 어디에 철해져 있는지, 금고 열쇠는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문제들이 다 들어갑니다. 우리의 보화는 천국에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유족들에게는 우리가 이 땅에 남겨두는 물건들이 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유언장에 교회와 또 일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합니다.
 
 수년 전 나는 에드만 박사가 휫튼 대학 공보에 쓴 원고를 하나 보았습니다. 그 제목은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었고 청지기직에 관한 그내용이 나에게 두고두고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예측 못할 죽음에 대한 준비를 다 마쳤다. 최근 우리 부부는 유언장의 날짜를 고쳤다. 이것이 4년째 수정이다. 그 때는 네 아이가 꼬마였고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한 기독교 기관과의 종신 부동산권 계획을 마무리지었다. 우리는 많이 기도하고 계획을 세운 후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와줄 수 있는 분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구하였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든 적든, 하나도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돌아가신 가족의 서류를 찾고 재산을 정리하는데 수주, 어떤 경우에는 수개월, 수년이 걸렸다고 하는 아야기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암으로 별세하신 좋은 그리스도인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죽기 오래 전에 임종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데까지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몇 개월을 남기고서 분명히 결단을 내릴 수가 없으셨습니다.
 
 부인은 재산이 적절히 처리되어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남편의 일처리를 의심하지 않았고 집을 정리하는 남편의 지혜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일 년도 채 못되어 자신이 상속할 재산은 한푼도 없고 빚 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정든 집을 팔 뿐 아니라, 딸도 대학을 그만두고 보잘 것 없는 직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명한 의사의 부인이며 상류 사회의 귀부인이었으므로 그때까지 생활비를 버는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졸지에 자신과 자녀들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처지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히스기야에게 "네 집을 정리하라"는 이사야의 경고가 실제로는 우리에게 더 많이 적용될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장례식을 계획하자
 
 여러분은 결혼식 계획을 직접 세우셨습니까? 무슨 기념식이나 생일등 특별한 파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계획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장례식 계획을 세운다해서 무엇이 이상합니까?
 
 나는 장례식 설교를 많이 해보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돌아가신 분의 뜻을 어느정도 아는 유족들은 가신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초조해 하지 않고 부드럽게 장례 절차를 마치는 것같습니다. 린든 죤슨 대통령이 공직에서 은퇴한 다음 나에게 한 진지한 부탁을 기억합니다. 텍사스 주의 오스틴에 있는 죤슨 도서관 헌당식에서 내가 기도했습니다. 그 뒤 죤슨 대통령은 나를 데리고 칸츄리 힐에 있는 자신의 목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페더내일스 강가에 있는 상수리 나무 밑으로 걸어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언젠가 자네는 내 장례식 부탁을 받고 이곳에 올걸세. 그때 자네는 바로 이나무 아래에 서고 나는 바로 저기에 누워 있겠지." 하면서 그 장소를 가리켰습니다. "자네는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하겠지. 그때 자네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게. 아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주었으면 하네."
 
 죤슨 대통령과 나는 인생의 짧음과 언젠가는 우리가 결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게 될것이라는 사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관해서도 상당히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죤슨 대통령의 죽음 소실을 들은 것이 리챠드 닉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15분이 지난 때였습니다. 1973년 1월 25일 나는 그가 부탁한대로 그 상수리 고목 밑에서 설교했고 장례식은 전국에 텔레비젼으로 중계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거칠고 복잡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워싱턴이나 텍사스에서 여러번 그와 함께 있었고 또 함께 기도하였던 것은 나에게 주어진 은전이었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던 그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죤슨 대통령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음에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는 패배자를 동정했고 어떤 인종이든지 어린이들과 친했고 가정 생활에 엄격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신앙입니다. 내 전기 작가인 죤 폴로크는, 내가 죽음, 심판,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나아간 신자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운 모험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새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린든 죤슨은 이것을 이해하였습니다....신자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잔인한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정복되었습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린든 죤슨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장례식에 지침을 줍니까? 우리가 그 장례식에 관계되기 때문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는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배우자, 자녀, 친구, 사업상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참석할 것입니다. 그 남은 사람들은 우리의 바램을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화장이나 아니면 매장 방법에 관한 무슨 지침을 남겨 놓았는지, 무슨 찬송을 부르고 싶어하는지, 유족이나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탈관이나 매관에 관해서 무슨 요구가 있는지?
 
 이런 계획에 대해서 아무런 지침이 없을 때, 또 이미 계획이 되어 있다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때 유족들은 힘든 결정을 내려야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장례 계획을 세울 때 가문의 전통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방의 관습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 지방에서는 시신을 보는 것이 애도 절차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족들은 사랑하던 분의 신체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마지막 절차입니다.
 
 나는 리챠드 닉슨 대통령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때를 기억합니다. 나는 그 장례식에 참석하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나는 닉슨 대통령을 알기 전에 이미 그의 부모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휫티어지방 퀘이거 시에서는 관을 열어 놓고 사람들이 그 옆을 일렬로 지나가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과 내가 관 옆에 서 있는데, 닉슨 가족이 들어왔습니다. 미래의 대통령은 어머니를 보고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그 모든 가족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에게 화장하는 것이 흉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장례식이나 장례 예배에 관한 사항을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개인 사정을 말씀드리면 나와 룻은, 우리가 어디에 묻힐지 알고, 또 장례식을 무서운 철야갸 아니라 귀향 '축하행사'로 치르라고 우리의 바램을 말해 놓았습니다.
 
 물론 장례식은 각자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그 계획에 대해서 내 구체적인 언질을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장례를 지시한 위대한 구약 성도들이 우리에게 몇가지 전례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렇게 자신의 바램을 피력한 후 평안히 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창 49:20, 창 49:3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 두 족장은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혈족에게 알릴 정확한 내용은 정리해 두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프랭클린 델라노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에 관해서 4페이지로 정확한 지침을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장남인 제임스 앞으로 된, 연필로 작성된 문서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만일 내가 임기 중에 죽으면, 백악관 동쪽 방에서 아주 검소한 장례식을 치르기 바란다. 헌화를 위한 유해의 공개와 포차, 영구차를 없애고 관은 검은 나무로 하되 아주 검소하게 해야 한다. 유해는 방부제 처리나 밀봉을 하지 말아라. 묘에는 벽돌이나 시멘트, 혹은 돌로 담을 쌓지 말아라"오 되어 있습니다.
 
 이 지침들은 아주 명확합니다.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우주벨트 가족 가운데 이 서류가 있었는지 알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서류는 장례식이 끝난 며칠후 그의 개인 금고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장례식을 잘 계획해 두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성스럽게 세워놓은 장례계획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장례 계획은 우리가 유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유언으로 무엇을 남겨놓고 싶어하는지 우리 자신보다 잘 전달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미덕을 칭송하고 우리의 단점들을 덮어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 가족에 대한 애정, 하늘의 소망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들 자신 뿐입니다.
장례식은 산 자들을 위한 것
 
 모든 문화에는 정서상의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기념식이 있습니다. 출생에서 사춘기,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중요한 변화는 예식으로 기념되었습니다. 따라서 장례도 살아남은 자들의 사회적, 정서적,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의 예식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신문의 칼럼니스트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장례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을 잘 위로하거나, 그들의 슬픔을 잘 견디도록 정말 도와주는 장례식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나는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인생에 전환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장례식에 많이 참석했고 또 집례도 했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의 삶 죽음의 증언을 통해서, 혹은 가족들의 말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사랑의 하나님께로 돌이킨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기독교적인 장례식이 영생과 부활의 복된 소망을 재확인시켜 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죽은 오라비 나사로로 인해서 마르다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장례식에서 유족들은, 마르다처럼 또 과거의 다른 많은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위로받는 장례식에 한 번도 참석해 보지 못했다고 하던 그 기자는, 자신이 내세를 믿지 않으며 자신의 영혼이 다른 세상에서 변화될 것을 의심스러워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회의론은 장례식의 의미를 박탈당하는데 일익을 감당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유족들에게 아무런 소망도 남겨주지 않습니다.
 
 장례식은 친지, 친척, 교회와 가족들이 슬퍼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리고 그들을 잃음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친구들이 돌아가신 분을 모른다 하더라도 구 시간은 유족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보여줄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식에서 돌아가신 분을 칭송합니다. 그와 동시에 장례식때, 혹은 그 전후로 유족들을 섬길 확실한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수년 전 한 그리스도인 자매가 편지를 써놓고 자신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친구들에게 발송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자매는 조그마한 한 텍사스 대학 영어 교수이며 헌신적인 성도였습니다. 그는 그 편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문학을 공부하면서, 아주 훌륭한 작가는 그 책의 마지막을 가장 멋있게 장식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나는 작가이신 하나님께서 쓰신 한 권의 책입니다. 이 책의 가장 멋진 부분의 장례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장례는 하늘대관식과 하늘에서 얻는 영생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유언은 필요한가?
 
 여론 조사를 보면 5명의 성인 가운데 한명은 유언을 써놓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유언을 남겨 놓지 않고 죽을 때 살아남은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책임을 절감합니다. 얼마전에 유력한 사업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큰 회사의 대표였는데 유언을 남겨놓지 않고 죽었습니다. 이정도의 서류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와 같은 일들이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사랑하는 유족들은 쓸데없는 어려움을 당하고 골치를 썩이게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 지체들 가운데 이렇게 큰 일을 당하는 분들이 이 일을 무시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곤란을 당합니다.
 
 유언이 무엇입니까? 요점만 말하면,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유산을 받도록 하려고 우리가 선택해 놓은 사람들 즉, 가족, 친구, 동업자, 그 뿐 아니라 기관들, 교회, 자선단체들의 명단을 적어 놓은 법률적인 서류입니다.
 
 한 번은 챨리 릭스와 내가 낡은 가나 항공 DC-3기를 타고 밤늦은 시간에 아프리카 서해안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심한 뇌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중 아무도 이 낡은 비행기가 무사히 비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챨리 옆에 앉아 있던 크고 건강한 한 나이지리아 사람이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비행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챨리에게 저 사람 왜 저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챨리는, 그사람이 이제 자기는 죽을 것이고, 죽어서 시체가 물에 빠지면 아들이 자기 시체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운다고 말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들이 아버지의 시체를 찾지 못하면 아버지의 유산을 하나도 상속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재산 안에는 개인의 소유 즉 자동차, 주식, 은행 이자, 가구, 귀금속, 우표 수집책, 서적, 기타 이와 유사한 개인 물건들과 같은 것이 들어갑니다. 내 생각에는 내 아내는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자신의 책을 꼽을 것입니다.
 
 내 장인이신 벨 박사가 돌아가시고 그 가족들이 장농을 열어 보았을 때, 그곳에 있는 것은 옷 두벌과 신발 한 켤레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떠나실 때 자신의 개인 소유를 완벽하게 정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가지고 계시던 이 몇가지 물건은 그 가족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재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과 건물 등 부동산도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유언장을 작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일반적으로 18세 이상된 사람은 누구나 유언장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언장이 명확히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진 재산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남겨 둘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집행자'를 지정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뒤 우리의 재산이 우리의 뜻을 따라 아니면 다른 법적 절차에 따라 다 분배될 때까지 우리의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나 은행, 혹은 회사를 말합니다. 이 집행자는 우리의 재산에 해당되는 모든 돈을 모아서 빚과 세금을 지불하고 나머지 재산을 유언에 기록된 사람들이나 기관에 줍니다.
 
 만일 집행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면 법원이 어떤 사람을 지명해서 재산 문제를 정리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우리가 지명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성년 자녀가 있으면 유언장을 작성할 때 후견인을 지정해야 합니다. 만약 양 부모가 동시에 죽거나, 편부모라면 이것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양부모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면, 자녀들이 어디에서 살고 또 우리가 그들의 양육을 위해서 남겨 놓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법원으로 넘어갑니다. 미성년 자녀들을 가진 부모들은 이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당장 유언장을 작성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장은 변호사가 작성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조건들하에서는 우리가 직접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필로 쓴다면, 다시 말해서 '자필 유언장'인 경우에는 법적으로 서명과 유언의 중요한 부분 전체가 자필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날짜가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증인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기 유언장이 모든 주에서 다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이 유언장이 합법성을 가지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고 또 다른 주로 이사갈 경우 그곳의 법률들을 점검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들의 목표와 소원이 동일하다고 믿고서 공동 유언장일 작성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변호사들과 행정 관리들은 이런 유언장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공동 유언장의 경우 두 사람은 각자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적습니다. 만약 이 공동 유언장이 확정된 것이라고 두 사람이 동의한 경우, 둘 가운데 뒤에 남은 사람이 나중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남편이 죽은 다음 공동 유언장을 변경한 한 자매를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남편은 그 중 둘에게 약간 더 많은 돈을 남겨 놓았던 것입니다. 몇년 후 이 둘이, 어머니가 자신들의 몫을 줄여서 모든 자녀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둘은 아주 흥분해서 나머지 둘에게 달라고 하고 거의 위협하다시피 해서 결국 원래(법적으로) 자신들에게 유산된 그 돈을 되돌려 받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어 뒤에 남은 배우자가 재혼한다거나 상속받게 되어 있는 자녀들이 무책임하게 될 경우 그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게 될 것인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 유언장은 두 부부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고상한 증거인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이런 유언장의 실제적인 결과는 아주 혼란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언장이 없이 죽으면 법원이 법률이 정하는 바대로 우리의 친척들에게 재산을 분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명시된 유언장을 남겨 놓지 않는다면 우리 재산이 친구들, 자선단체, 교회 등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가보나 보석, 가업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항을 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언장은 우리가 변경하거나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하시기 전까지 유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언장의 필요를 알고 작성해 둡니다. 그러고는 몇 년이고 변경하지 않고 그냥 놔 둡니다. "그래 나는 유언장 써났어." 아주 자신있게 말합니다. 하지만 그 유언장을 작성한 이후로 자녀들이 자라고 혹은 결혼하며 손자들이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세법이 바뀌고 재산 규모가 커져서 원래 유언장이 쓸모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유언장은 적어도 몇 년 정도에 한 번씩 수정해야 합니다. 법원은 우리의 가장 최근 유언장을 따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유언장을 작성하면 법률은 우리에게 많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작성하지 않으면 선택의 기회는 전혀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언장은 많은 기도와 깊은 생각으로 작성되어야 합니다. 개인에게 유산을 남길 뿐 아니라 교회나 기타 종교 기관에도 남겨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유언장에는 돈이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 이상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증거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유언장을 읽기보다 비문을 읽는 쪽이 그 사람 마음의 생각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우리들 대부분은 챨스 디킨스가 쓴 책들을 많이 읽고 느낍니다. 오랜 세월 동안 독자들은 그의 '피크윌 페이퍼스',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니콜라스', '니크레비'에 폭소를 터뜨리고 울었습니다. 또 그의 위대한 고전 '크리스마스 캐롤'이 공연되지 않고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영원히 기록될 것은 그의 위대한 책들이나 뉴욕 타임스지의 장황한 찬사가 아닙니다. 그가 그의 유언장에 남긴 유산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에 내 영혼을 의탁합니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신약의 가르침에 겸손히 인도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죽음을 위한 최선의 준비는 장례에 대한 자세한 지침도, 최근의 유언장도 아닙니다.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체험입니다. "믿음과...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딛 1:2).
 
 영생의 소망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더욱더 알아갈 때 그 가치가 더해갑니다. 우리의 존재는 날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래서 영원의 기대는 놀라운 것으로, 심지어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영원 세계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지의 세계로 가는 여행입니까? 아니면 간절히 바라던 영광스러운 영적인 순례 여행입니까?
우리는 모두 영원을 향해 가는 여행을 계속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종착지를 결정하게 될 표를 선택하고 예약합니다.

제10장
죽은 자의 두 처소 천국과 지옥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실물 크기로 된 7,000명 이상의 영적(靈的) 궁중 호위병 점토상이 중국 본토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이 대규모 점토상들을 발견하고서 우리 시대 최대의 발굴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습니다. 호위병들은 전차와 목기, 청동기 무기로 무장하고서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무덤 근처 마구간에는 금 은으로 된 마구를 갖춘 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엄청난 발굴 현장에서 우리는 죽음이 전장(戰場)으로 묘사된 것을 봅니다. 황제는 사후에 보호를 확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생의 종착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어떤 사람들은 상충되는 사상들과 싸워 왔습니다. 불교 신자들과 힌두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반복되는 환생을 겪고 있다고 믿습니다.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계속 전생하고 지속되는 생은 처음도 끝도 없습니다. 그들은 도 다른 육첼 화신 됩니다.
 
 도교 신자들은 죽음에 초연합니다. 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슬람의 신앙은 일곱 하늘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쾌락과 영적 축복의 처소입니다. 미국 인디언 문화는 '행복한 사냥지'를 말하고 대부분의 유대교 신봉자들은, 이땅에서 한 선행을 보상해 주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해놓으신 일 때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 4).
 
 동시에 천국에 관해서는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작자 미상의 한 시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를 맞을 때
우리가 천사들의 밴드에 동참할 때
우리는 그 영광스런 영지에서
인사하는 친구들을 알까?
옛날처럼 우리에게
반짝이던 그 눈동자를 볼까?
전에 같이 다정히 감싸는
그 사랑하는 팔의 촉감을 느낄까?
거기에서 우리는 서로 알까?
천국에 들어갈 자격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무슨 권리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까? 한 자매는 막 한 식구를 사별하고 나서 누구하고라도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긴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궁이를 고치러 온 수선공을 벽에다 밀쳐 세워 놓고 "만약 이 아궁이의 불꽃이 확 솟아올라 당신이 얼굴에 화상을 입고 죽는다면, 당신은 영원을 어디에서 보내게 되는지 확실히 아세요"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그 수선공은 너무나 놀라서 계산서를 잊어버리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천국행 티켓을 사 놓았다고 믿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대부분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이 땅에서 한 일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내 기록은 괜찮습니다. 나는 이렇게 착한 삶을 살았으니까 천국에 갈 겁니다."
 
 이 사람은 곤란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10단계로 나눌 때, 완전한 10단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안될 것입니다. '충분하게 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두 번째 대답은 이럴 것입니다.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지요? 나도 한동안 그 문제를 약간 생각해 보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나 이런 대답은 어머니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처럼 변명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우리들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특권과 가쁨을 주는 대답은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구주와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나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천국 입성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953년 최초로 작성되어 문화적 배경이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어 온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내 장인께서 아주 좋아하던 교리문답입니다. 장인은 서재 벽에 하리델베르그 제1문답을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습니다. "제1문, 삶과 죽음에서 당신은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 답, 나-삶과 죽음에서 육체와 영혼-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곧 자신의 피로써 나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고 나를 악마의 지배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케 하신 그분이  나를 아주 잘 보호하셔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내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목적에 틀림없이 합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그분은 그분의 성령으로 영생을 나에게 보증하시며 날 하여금 온 마음을 다 해 기꺼이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계속해서 그분을 위해 살게 하신다."
 
 "주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대언자, 우리의 변호사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소송 사건을 변호하시고, 지금 천국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땅에서 한 어떤 선행이나 고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만 근거해서 입성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사단에게 속아서 하나님은 복수심에 불타고,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을 거스리는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낼 준비를 다 해놓으신 감독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이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렇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 받을 유일한 권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방책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지옥으로 가려는가?
 
 지옥은 너무 오랫동안 신화나 허구의 탈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소의 실재를 부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이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에 반발합니다. 하지만 지옥의 개념은 기독교의 신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수세기 이전에 바벨론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는 땅'을 믿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스올의 영역 혹은 부패의 처소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기록하였고 그리이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땅'을 말했습니다. 고전 불교는 일곱 '뜨거운 지옥'을 인정하고 힌두교의 리그베다 경은 악한 남자와 부도덕한 여자를 위해 마련된 깊은 '심연'을 말합니다. 이슬람은 '일곱 지옥'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불신자가 지옥의 정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정확히 말씀하십니다(마 23: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 12:4,5).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생생한 지옥의 묘사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예수님이 하신 묘사일 것입니다. 부자는 생전에 나사로 돕기를 거절했습니다. 불쌍한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몹시 먹고 싶어 했습니다. 이 거지가 죽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흔히 천국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부자는 지옥으로 보내져서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재물을 가지면 곧 지옥에 간다거나, 가난한 것이 천국에 가는 권리를 보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떠나서 당하는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부자는 눈을 들고서 아브라함과 그 곁에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로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가 손가락에 물을 찍어 와서 그의 혀를 시원하게 해주도록 부탁해 달라고. "내가 이 불 속에서 고통한다"고 그는 절규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 세상 사이에 큰 구렁이 있고 그 구렁은 '고정'되어 있는, 혹은 영구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쪽에 있는 사람이 다른 쪽을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살아있는 동안 방향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 받았고 이제는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위해 살려고 결정한 그 결정의 결과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2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 말많은 지옥
 
 나는 "지옥은 어떻게 되지요?" "지옥에는 불이 있습니까?" 등과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받고 있습니다. 이 인기 없는 문제는 사람들을 불편하고 짜증스럽게 만들지만 나는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보편주의'를 가르칩니다. 즉 실제로는 모든 육체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이 아무도 지옥 보내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끝없는' 혹은 '계속되는'이란 말들이 실제로는 영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추방을 말하는 바로 그 형용사가 영원한 천국에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소멸되고 만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하는 확실한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든지 잃어버려지든지,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2의 기회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말합니다. 전도집회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그때 당장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제 영원 세계로 옮겨갈는지 우리는 모르는 까닭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인정하지 않고 알면서 일부러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많은 성구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1,42).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계 20:14,15)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옴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 것입니까?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의 대답은 분명하게 "그렇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무지와 고집, 이기주의, 죄악된 쾌락의 사랑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의 길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의 소망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 영원한 지옥에 해당된다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한 번 가정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 의사에게 왔습니다. 의사는 그병을 진찰하고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그 처방을 무시하고 있다가 며칠 후에 비틀거리면서 다시 병원에 와서 의사에게 말합니다. "내 병이 악화된 것은 당신 탓이요. 어떻게 좀 해주시오."
 
 하나님은 인류의 영적인 질병에 대해 치료 방법을 처방해 놓으셨습니다. 그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믿음과 신뢰입니다. 이 치료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끔찍한 결과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대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간에, 하나님과 모든 거룩하고 선한 것으로부터의 격리가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죤 밀턴은 그의 '실락원'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방이 둥근 끔찍한 지옥
불꽃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풀무
불꽃은 있으나 빛은 없고
오로지 저주의 광경만 보일 정도의
차라리 몰수 있는 암흑.
슬픔의 지대, 슬픔의 그늘
평안, 안식은 도무지 머물 수 없는 곳
소망은 전혀 없고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고통
천국을 기다리는가?


 천국이 아무리 영광스러운 곳이면 무엇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늘날 미국인의 생활 가운데 이상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71퍼센트가 내세를 믿지만(갤럽 조사 결과) 내세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이라고 하는 휘황찬란한 곳에서 영원히 지낼 것이라고 믿는다...우리가 천국을 간단히 무시하고 그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데, 이것은 좀 이상하지 않는가?"
 
 우리는 노년, 죽음, 에이즈, 죽을 권리, 육체 밖의 체험 등에 관한 글들을 점점 많이 봅니다. 그런데 잡지에서 천국에 관한 무엇을 읽거나 천국에 관한 책을 찾는 일은, 혹시 있다 하더라도, 아주 드뭅니다. 우리가 20세기 이전의 그림을 전시하는 화랑에 가거나 먼지가 뽀얗게 앉은 명시 선집을 보면, 과거에는 천국이 커다란 관심거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상과 설교에 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에 관한 무관심의 이유를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면 몇 가지 결론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먼저 미국과 대부분의 서방 세계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믿을만한 진통제, 넉넉한 음식, 아름다운 환경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유익한 것들로 인해 우리는 성경의 약속들에 대해 무디어진 듯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일들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영원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도 잇습니다. 우리는 텔레비젼에서, 이미 수년 전에 죽었던 사람이 펄펄하게 살아서 활동하는 것을 봅니다. 케리 쿠퍼나 마릴린 몬로, 죤 F. 케네디, 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잘 알려진 인사들이 필름에서 마치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처럼 연설도 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서 젊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경악할 정도로 증가한 요인 가운데 이것도 하나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이 이생의 종료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쾨블러-로스는 그의 죽음의 5단계에서 '수용' 단계가 가장 건전한 단계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소망은 치료과정에 거의 들어가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이 고요한 수용의 단계에 이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천국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난처하게도 보이고 어느 정도는 겁약하게 보였겠지요. 가치의 변동이 우리로 하여금 소멸한다고 생각하면 용감하게 보고 복된 영원을 고대하면 겁약하게 보게 만드는지요?"
 
 우리의 경험들이 땅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 중 어떤 이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공허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한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끝이 없는 한 존재를 상상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교육과 매스컴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시험관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라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외계 탐사를 통하여 우주에 관한 지식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시점에서 유한한 피조물들에게 무한이란 관념은 완전히 미스테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큰 미스테리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라도 무한의 깊이를 측정하거나 그 전망을 묘사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우리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우리의 목표는 이생에서의 성취를 지향하는 존재들이므로 우리가 천국을 예기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또 현대인들에게는 따분하게 들립니다. 영원토록 무엇을 합니까? 평생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은퇴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책임과 도전에서 해방되고 나면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활동이 걷 가치와 유용성과 동일시되는 시대입니다. "요즘 어떠세요?" "바빠요. 바빠!" 회전 목마의 속도가 떨어지면, 생명이란 음악도 사라져 버릴까요?
 
 영원에 비교할 때 우리의 매일의 삶은 한 번 숨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천국의 약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들을 믿는다면 천국의 얘기가 결코 따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쾌락보다 스릴 넘칠 것입니다.

천국의 약속들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교리 문답을 체험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실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이 뛰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부부가 아무말 없이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도 직접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기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방이 함께 있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알고 함께 있는 그 순간이 얼어붙어서 아무런 시간 지나가는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이것이 '천국이 아닐까요?' 여러분들도 "야, 이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느낌들이, 시간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은 징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산꼭대기'의 체험을 도무지 내려오고싶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이 일정한 장소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오늘날 집없는 사람들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 추운 날씨에서 많은 걸인들이 고생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편안한 집을 가진 우리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겠지만, 속 마음으로는 "오늘밤에도 잠자리와 따뜻한 집, 먹을 음식이 있어서 참 좋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집없이 지내보지 않으면 그 생활이 어떤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은 집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진짜 우리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로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1,2).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땅 위에 창조해 놓으신 아름다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마련해 놓으신 아름다운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랜드 캐년을 바라보면서 그 작열하는 장엄함에 압도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느 나라, 어느 대륙이나 장관(壯觀)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지상 천국'이라고 말하고 싶은 아주 좋은 곳이 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유럽에서 수백 번 설교하는 특혜를 누렸고, 스위스에서도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또 내 딸애는 스위스 심리학자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알프스를 아주 잘 압니다. 나와 아내는 알프스의 장관과 아름다음을 여러번 만끽했습니다. 그 봄꽃들로 뒤덮인 목초지, 당듀미디나 마테호른, 또 제네바에서 프랑스 북부해안가지는 30분만에 비행할 수 잇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보는 다이아몬드를 깔아놓은 듯한 물결로 반짝이는 역사적인 지중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런 추억들을 다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자연의 경이(驚異)들을 계획하시고 조성하신 분이 또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들에 비교하면 무색해지고 말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히 11:10).
 
 한 기독교 청년 기관의 대표로 전세계를 여행한 타고난 몽상가 앙드레 꼴레는 몇 년전 그의 아내인 앨리예나의 죽음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그의 아내는 불치의 뇌종양에 걸려 2년간 처절할 정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점점 팔과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머리나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완전히 장님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꼴레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앨리예나가 그래도 말을 조금 할 수 있을때에 그는 항상 이렇게 끝나는 시를 읊었습니다. '이 세상에 기쁨만 있다면 우리는 천국을 바라지 않겠지.'"
 
 천국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가 고안한 장소인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곳에서 우리의 유산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천국에서 받게 될 유산이 어떤 종류인지 나는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굉장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어떤 집을 방문해서 아름다운 은장식, 양탄자, 그림들을 보고 감탄스러우면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이거 다 가보야?" 그때 주인은 그것이 어머니의 소유였고 자신에게는 매우 소중한 물건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내 아내 룻은 진귀한 나무조각으로 상감된 예쁜 상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년전 그녀의 할아버지가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감탄하면서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룻은 "상속받은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은은 녹슬고 양탄자는 좀먹거나 낡아지고 상자는 수분이면 다 타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벧전 1:4)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산으로 받는 것들은 큰 복이 될 수도 끔찍한 재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책임한 상속자에게 남겨진 재물 때문에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왕의 자녀들로서 우리의 유산은 망하지도 않고 우리를 망하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 입니까!
 
 천국은 우리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분이 천국을 창조하셨고 소유하고 계십니다.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명심하고"(신 4:39).
 
 세상에 모든 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고통에 못이겨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시옵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며 지금도 내려다 보고 계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땅에 아무도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장이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천국은 무엇입니까? 천국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소유하고 계신 집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이 본부이며 하나님은 그곳에서 앉아 명령과 지시와 예언을 말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오늘도 귀에 들리도록 말씀하시는지 나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는 아직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화와 연극에서는 하나님을 무대 밖의 목소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굵직한 베이스 목소리로 배우들에게 경고하거나 배우들의 행동을 지시합니다. 이렇게 하면 시나리오가 재미있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잘못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신적 속성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지시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실 때 그길이 아무리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우리더러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라고 하지는 않으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늘에서 말씀하십니까? 첫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내가 전도 집회나 설교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그렇게 말할 아무런 권위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예를 들어 구약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또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3,000번 이상이나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혹은 이와 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에게 가장 믿기 어렵고 복잡하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말한 시편 기자의 찬양을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메시지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는 시편 기자의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선언하듯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고 완벽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 각 페이지들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도 바로 이분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양으로 천국을 떠나서 땅에 내려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그를 통해 이루시려고 의도하신 것을 완성시켰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셨으니 아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또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때 우리를 막으시는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을 보여주는 크고 분명한 지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하늘에서 직접 내리비취는 전조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영혼을 비추고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우리는 내적인 목소리가 성경에 맞는지 점섬하고 이것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의지나 감정이 아닌지 확인해야 하지만, 결코 이내적인 목소리를 꺼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가 또렷하게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인공위성에서 수신한 뒤엉킨 텔레비젼 신호처럼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수신기의 주파수가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더 분명하게 듣거나 영상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도 합니다.
 
 어떤 가족이 크로스 컨츄리 스키 타기를 하던 도중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눈보라를 만나겪은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열살난 딸은 1월중 가장 추운 날 밤에 광활한 벌판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영하 20-4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에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쓰러진 나무들 사이에 조그마한 움막을 만들고 생존 계획을 구상해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기도하고 찬송하며 또 운동도 하고 먹고 게임을 하자.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스키 자국을 찾아보도록 해보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작은 가족은 그들이 암흑 속에서 적어도 12시산 이상 동안 살인 적인 추위와 싸워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획을 실천했습니다. 그곳에서 뛰면서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친척들의 이름을 다 부르고 이야기를 꾸며내고 식품 이름을 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구절을 하나 기억해 내고 그 꼬마와 아버지가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되풀이 했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5-7).
 
 밤이 깊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나중에 이렇게 외상했습니다. "별로 소용은 없었지만 나는 눈보라를 막기 위해서 담요 한 장을 가족들 위에 들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마치 하나님께서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돌보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분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그 대답이 분명합니다. 어떤 때는 모호하고 어떤 때는 '기다려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분의 집에 그분과 함께 있을것이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 때문에 대화는 수정처럼 맑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천국에 없는 것은?
 
 천국에는 종파별 예배, 종파간의 차이, 강령들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성전 예배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중심이 되실 것입니다(계 21:22).
 
 나는 자랄 때는 장로교 신자였고, 나중에는 침례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모든 교회에 속해 있음을 느꼈습니다. 룻은 지금도 철저한 장로교인입니다. 그러나 그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모든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파와 교리에 대해서 열띤 논쟁을 벌입니다.
 
 하나님은 교단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으로 돌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나 주일학교 졸업장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물으실 단 하나의 질문은 "너는 땅에서 내 아들 예수와 함께 무엇을 했느냐?"일 것입니다. 우리가 구교 신자건 신교 신자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느냐 부인하느냐입니다. 어떤 특정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천국입성을 보증해 주지 않습니다. 코리 텐 붐은 이런 말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쿠키병 속의 생쥐는 쿠키가 아니다."
 
 천국에는 간접 지식이 없을 것입니다. 땅에서는 목사님, 선생님, 철학자들, 부모님, 작가들 등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 할 지 모르기도 합니다(물론 간접 지식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용할 지식을 주셨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를 돕도록 가르치고 전파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용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합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모든 지식의 원천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우리의 영적 지성이 완전해질 것입니다. 만약 천국에 천국일보가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읽은 기사를 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는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문을 잠글 필요도, 유리창에 창살을 댈 필요도, 경보 장치도 필요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다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는 문간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감 없이 금으로 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오늘날 두려움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어느 모퉁이에서도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인산 본성이 두려워할 것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천국에는 밤이 없을 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는 밤을 어두움, 무지와 같게 봅니다. 그래서 '깜깜하다'는 말을 씁니다. 또 빛은 이해의 상징입니다. 문제가 분명해졌을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제 환히 알겠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
 
 밤은 태양의 즐거운 아름다움을 가립니다. 비록 밤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밤이 없는 세계는 하나님의 빛으로 밝혀질 것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지상의 모든 전등빛들)은 참빛과 비교할 때 무색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에는 더 이상 고통과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소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화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꼐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잇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3-5).

천국 향수병
 
 회사의 신입 사원 모집 담당자가 장래가 촉망되는 미래의 사원들을 방문해서 자기 회사를 설명할 때는 아주 그럴싸하게 이야기합니다. 거창한 저녁식사로 지원자들의 마음을 얻고 회사의 아주 멋진 청사진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 설명이 너무 흥미로워서 지원자들은 당장 입사하지 않고는 견들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하지만 입사하고 나면 신입 사원은 처음에 들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핑크빛인 것은 아님을 곧 알게 됩니다.
천국이 제시하는 것도 입사 지원자들 앞에 제시된 것과 같은 조건이 아닙니까?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설교가 중의 한사람인 밴스 해브너는 "나는 천국 향수병에 걸렸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나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죽고 싶은 소망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놀라운 곳입니다. 믿는 자들을 위한 유익은 이 세상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건너편
이것은 죽음이 아니네-영광이네

어두움이 아니네-빛이네
비틀거림, 주저함이 없고
믿음도-눈으로 보는 것이라네
이것은 슬픔이 아니네-가짐이네
나의 마지막 눈물을 흠쳤네
해가 뜨네-아침이네
나의 영원한 날!

이것은 기도가 아니네-
얼굴에 얼굴 대고 하는 대화.
듣고 보는 것.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이것은 간구의 마지막

고통을 이길 힘
고통의 어두운 기억은 다시는 없으리
어떻게 세상 삶을 견뎠을까?
이 얼굴과 얼굴로 만나는 기쁨을 알기 전에
오 나를 찾으시고 나를 구원하신
또 은혜로 나를 지켜주신 분.

제11장
신자의 죽음의 유익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한 작은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상쾌한 저녁의 적막감을 깨뜨리는 네온 사인도, 자동차 불빛도, 가로등도 없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무리 휘황찬란한 무대장치도 무색케 할 만큼 다이아몬드 빛으로 아롱져 있는 짙푸른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하늘의 잘못된 쪽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바른 쪽은 무엇과 같으리라고 생각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언젠가 저 하늘의 '바른 쪽'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천국에 갑니까? 천국은 무엇과 같을까요? 우리는 거기에서 무엇을 경험할까요? 나는 이런 질문들을 자문하면서 해답을 찾으려고 성경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눈을 언제나 다가오는 영광에 고정시킨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돌보라고 주신 책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목적지를 안다면 그것이 우리의 일상 생활을 보다 생기있게 만들고 이땅에서 우리의 문제들도 덜 번잡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죽는것도 유익'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현세의 존재를 회피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로 서두를 꺼냅니다. 이것은 가장 즐거운 형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의지하고 그에게서 힘을 공급받으며 그를 사랑하고 또 그의 사랑을 받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너무 하늘에 가 있어서 세상적으로는 좋지 않았다"고 바울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땅의 시민으로서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과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모두 우리가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언제 천국으로 가는가?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직선 루트입니다. 우리는 죽자마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회개한 도적에게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마울도 "내가...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라고 선언합니다. 또 재차 확인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6-8).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 우리는 천국에서 첫 숨을 쉬게 됩니다. 우리가 몸을 떠나면 즉시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재림 대에 우리의 영광스럽게 된 몸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거나 부활체를 입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본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예수께서 나시기 1400년 이전에 죽었고 엘리야는 예수님이 나시기 600년 이전에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들려 올라 갔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고 한적한 산 꼭대기에 올라가셨다. 그들이 보고 있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어 얼굴이 해처럼 빛났고 옷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희게 되었다.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그와 함께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때 베드로가 불쑥 말을 꺼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만약 선생님이 원하신다면 내가 처소 셋을, 하나는 선생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마 17:1-4 LB).
 
 제자들은 아직까지 부활체를 입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보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식별 가능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체에서 이탈해 있거나 유령같은 허깨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죽는 즉시 천국으로 가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다른 사람도 우리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문에 들어가면서 금방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 볼 사람도 있습니까? 예,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룻이 중국에서 있었던 경험을 하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룻이 살았던 선교지에 애드 탈보트라는 복음주의 선교사가 한분 있었습니다. 룻은 그를 다정하게 애드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딸 마가렛트 게이를 아주 많이 사랑했습니다. 딸이 죽은 다음 어느날 탈보트는 죽어가는 어느 중국인 여성도 곁에 있었습니다. 병상 곁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 그 여성도의 얼굴에 빛이 나면서 애드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고 마가렛트 게이도 그와 함께 있어요." 그 순간 방에 천상의 음악이 가득차고 여성도는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침상에 일어나 앉으시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구나. 나한테 팔을 벌리신다. 저기 벤도 있네. 두 눈과 두 발이 다 있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게티즈버그에서 눈하나와 다리 하나를 잃으셨더랬습니다.
 
 죽음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순수한 영적 존재로 있는 상태이며,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육체의 재결합과 영광스러운 부활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기능을 멈추고 죽을 때, 신자들의 영이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살과 뼈 그리고 모든 장기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경이로운 지체는 신자들의 영혼의 주거지입니다. 우리가 이 육체를 떠날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떠나고(빌 1:23).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우리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처럼 새롭게 되고 변화될 것입니다.
 
 한 중국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반군들이 중국을 장악했을 때 그 선교사 가족은 중국 내륙을 떠나야 했습니다. 해안 지방으로 도망하면서 그들은 매일 밤 농가에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날 밤 선교사 부인이 예상도 못하게 아주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선교사는 슬픔에 잠겨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시신을 낯선 땅에 묻어둔 채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지혜와 적절한 설명을 주시도록 기도했고, 그날 아이들에게 설명하려고 했던 내용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매일 밤 다른 농가에 머물렀던 일과 아침이 되면 떠날 시간이 되어 그 집을 남겨 둔 채 갈길을 재촉했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의 몸은 엄마가 살던 집이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집으로 오라고 하셔서 집을 뒤에 남겨 놓고 엄마는 갔다고 말했습니다.
 
 "이 집은 엄마의 집이고 우린 그 집을 사랑한단다. 그렇지만 이젠 엄마는 거기에 살지 않아. 그래서 우리도 엄마의 집을 여기 땅 속에 묻어두고 떠나야 해. 언젠가 하나님이 엄마의 집을 다시 일으키시고 천국으로 데려가셔서 영화롭게 해 주시고 영혼이 다시 들어오게 될 때까지 말이야. 엄마 영혼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단다."
 
 이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었고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 있는 것을 확신하면서 중국을 떠났습니다.
 
 만약 죽음의 두 단계를 이해하기 힘들다면  H.A.아이론사이드 박사가 이것을 예화를 써서 설명해 놓은 것을 봅시다. 그는 그 마을의 문닫은 가게를 예로 듭니다. "한 건물을 지나치다가 창문에 '내부수리중'이라는 표시를 보았습니다. 가게 주인은 가게를 다시 꾸미기 위해서 그 기간 동안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주인은 새로 단장된 가게를 다시 열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은 모습입니다. 신자들은 몸이 수리될 때까지 몸을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때가 되면 속사람은 새로워진 몸속으로 다시 들어올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가?
 
 많은 신자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기 전에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한 세대의 신자들은 몸의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적같고 놀라운 사건을 '휴거'라고 합니다. 이것은 비밀, 즉 이전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52).
 
 이것은 얼마나 신속한 변화인지 모릅니다.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동작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이 눈 깜박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눈 순식간(눈감는 순간)은 눈 깜박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의 죽을 몸이 죽지 않는 몸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외형적인 변화를 말하며, 본질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아는 사람들을 천국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이 언제 일어납니까? 이 일과 재림에 대한 예견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들은 "나는 예수님이 이세기가 끝나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나는 이런 예견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불순종하는 행위입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
 
 예수님도 "그러나 그 날과 그대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가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지 마라고 시대의 종말의 징조들을 주지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과 우리 시대의 징조들을 연구해 온 많은 성경 학자들은 휴거가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주님께서 재림의 징조라고 말씀하신 사건들이 점점 가속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들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점점 더 많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교회에서 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주변에서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려고 매우 조심합니다. 하나는 미래와 재림에 관해서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초한 지식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위험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을 무시하고 마치 재림이 쓸모없는 신화인 것처럼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전쟁과 범죄, 자유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모든 진실한 신자들에게는 '복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들어올려져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딛 2:13-15).
 
 휴거는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 혹은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 오실 때 일어날 것입니다. 불신 세상은 이것을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주를 볼 것입니다. 휴거는 예고 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집니다. 남은 자들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졸지에 없어져버린 사건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느라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휴거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모든 사람이 그를 볼 것입니다. 재림 때 예수님은 직접, 눈에 보이게 오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당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마 24:27).
 
 이때 죽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입니다. 이들은 죽지 않고 영광스럽게 된 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구약의 부활한 모든 성도들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 즉 십자가의 이쪽 편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구름'과 함께 재림하실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라고 예언했습니다. 또 히 12:1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것을 권고하면서 그 이유로 구름 같이 둘러싼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슥 14:5)고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아는 우리에게 이것은 얼마나 마음 설레는 미래입니까!

가치있는 여행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사건들의 순서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을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금 우리를 위해 마련되고 있는 하나님이 나라에 우리가 들어갈 것인가? 그 나라는 어떻게 생겼는가? 그리고 하늘 나라를 예기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나는 세계 각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호텔과 모텔에서 묵었고 각종 항공사를 이용하였고 다양한 외국 언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4계절용 수영장을 갖춘 휴양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전원 주택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향 집에 가는 것이 최대의 휴가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봄이나 여름, 아니면 가을이라도 저녁에 룻과 함께 앞 현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막 울기 시작하는 찌르르기 소리와 밤의 소리를 듣는 것, 혹은 룻과 함께 겨울에 탁탁거리는 장작불 앞에서 안락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이 그립습니다.
 
 나는 언제나 은퇴해서 이런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때를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특별한 힘을 주셔서 설교하고 글을 쓰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 나이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은퇴의 즐거움을 보류하고 계속해서 사역을 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는 천국을 더 많이 고대하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나를 복음 전도자로 부르셨고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전도 집회를 사랑합니다. 그곳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각 나라의 친구들이 나의 삶을 칭송하였고 가는 곳마다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를 다니는 동안 나는 문득문득 노스 캐롤라이나 산골에 있는 통나무 집의 평온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젊고 활동적이면서 자유롭고 싶을 때, 집은 벗어나고 싶은 곳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삶이 전쟁이 되었을 때 만약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집은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됩니다. 전도서에서 선생으로 나오는 솔로몬은 이런 사람의 심정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너는 천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솔로몬은, 나이 들어 허리가 굽고 이가 다 빠지고 눈과 귀가 어둡게 되면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고 말해 줍니다(전 12:5).
 
 현재 우리의 집은 헛간일 수도, 궁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하늘의 집은 밝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달리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영원한 처소를 고안하셨습니다. 땅도 땅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훼손 시켰습니다. 천국에는 환경보호원이 필요없습니다. 공기와 물을 정화할 필요도 택지 개발을 위한 자연 훼손을 비방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국을 보았을 때 그것을 묘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위해서 예쁘게 차려입은 신부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입니까! 우리 세 딸은 모두 결혼했습니다. 내가 믿기로는 셋 다 아주 예쁩니다. 그런데 결혼식날 만큼 예쁘고 빛이 난 적은 없습니다.
 
 우리 가족은 자녀가 다섯이고 손주가 18명이나 되기 때문에 한번 모이기가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것이 싫습니다. 내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계를 보고 다음 약속에 쫓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또 몇년간 서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이와 같이 슬픈 이별이 더 이상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의미를 잊어버립니다.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던 사랑하는 가족 혹은 가까운 친구들이 이제는 여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앞서 간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들, 형제 자매들을 볼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의 전례없이 다시 결합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기쁨을 아무리 마음대로 상상토록 내버려 둔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능으로는 그것이 무엇과 같은지 도무지 파악하기 힘든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 땅의 제한 속에 갇혀 있습니다. 수년 전 레베카 스프린저는 '나의 천국 꿈'이라는 작은 책을 썼습니다. 내 친구 가운데 하나가 남편이 죽은 후 이 책을 선물받았는데 이 책으로 큰 위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가 음미하고 그의 남편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을 누리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천국의 영광을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또 이 책은 19세기 초기의 야릇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환상적이고 성경의 진리를 정서적으로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하던 것들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합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할까? 우리 강아지는 어떻게 되지? 강아지를 위한 장소도 있을까?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님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모두 다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스프린저 부인은 여행기 '인트라 뮤로스'(대문 안에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감미로운 증거가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큰 행복을 주는 것들을 아주 자주 발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대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것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큽니다. 나는 예쁜 어린 소녀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본 일을 기억합니다. 그 후에 들어보니 그의 어머니가 슬퍼하며 안타까워 했던 말이 '아 저애를 맞아서 돌보아 줄 사람이 하나만 있다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천국에 가서 주님의 팔에 평안히 안겼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애를 달래며 이야기하고 있을 그 때 아주 예쁘게 생긴 앙고라 고양이 새끼 한 마리가 초원을 가로질러 달려와서 그 애의 품에 뛰어들어 나주 만족한 듯이 엎드렸습니다. 그 고양이는 그애가 너무 아끼던 것이었는데 몇주 전에 죽어서 그애가 그렇게 슬퍼하던 고양이었습니다. 그 애가 그 고양이를 알아보았을 때 얼마나 기뻐 소리지르고 안고 뽀뽀했겠습니까? 천국에는 이런 기쁨이 있습니다."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죽는 것이 유익이라면 이 땅에서 사랑하던 것들을 천국에서 더 많이 즐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에서도 결혼합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때가 자주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두개인들이 남편을 일곱 가진 여인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3-25).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 남편(혹은 아내)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본다면 왜 결혼하지 않지요?" 또 사두개인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한 번 이상 결혼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천국의 약속들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런 질문들이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하다는 확신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들은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죠. 나는 무덤 너머에 있는 생의 비밀들을 예수님께서 풀어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의 내일 전체를 그분께 맡깁니다.

옛 것을 새로운 몸으로
 
 과학자들은 불구자들에게 새로운 팔과 다리, 또 새로운 눈을 주는 쪽으로 놀라운 진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소경이 볼 수 있습니다. 신장과 심장 이식은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완전하고 완벽한 새로운 몸을 가질 것입니다. 현재는 우리가 멋없는 육체 가운데 살지만 언젠가는 그가 다시 오실때 그는 우리의 이 죽어가는 몸을 가지고 그의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빌 3:2).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몸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학 전체의 중심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회의론이나 음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3일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셨다는 사실을 말살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활 후의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이 두려워서 잠궈 놓은 문을 통해서 걸어들어 오셨습니다. 제자인 도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는 의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내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일주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잠겨져 있는 문으로 들어오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로 식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몸으로 돌아오신 후에도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도 언젠가 부활한 몸을 가질 것을 보증합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변화되듯이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변화 혹은 이상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멋지고 날개달린 나비와 그 털많은 벌레가 비록 다르지만 동일한 생물인 것을 우리는 압니다.
 
 부활은 우리의 위대한 소망입니다. 소위 성경은 '위대한 부활장'이라고 부르는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실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2-14, 고전 15:20).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믿지 못한 것은 죽은 다른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 신앙이 없는 삶이 무엇과 같은지 암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면 설교도 다 헛되고 믿음도 쓸모 없고 모든 신앙이 다 거짓된다는 것입니다.
 
 케내스 차핀은 그의 고린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삶을 사는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사람이 부활의 소망없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무엇과 같은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합니다."

초인적인 몸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육체는 어떤 종류입니까? 눈에 보이는 육체 외에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이 어떨는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여성들은 영화 스타나 모델의 사진을 냉장고 문에 붙여놓고 자신의 몸매가 그렇게 되었으면 하면서 봅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운동선수나 아니면 로키처럼 아무도 당하지 못하는 강한 신체를 가졌으면 하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상적인 신체'라고 말할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이상적인 신체를 가질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체가 무엇과 같은지 어느 정도 잘 설명해 줍니다.
 
 첫째, 부활의 몸을 땅에 심은 씨에 비교합니다. 씨는 싹이 나고 꽃을 피웁니다. 원예를 해본 사람은 조그마한 씨앗이 쭉쭉 뻗어 나는 큰 토마토 나무가 되고 또 노란 봉오리가 맺혔다가 커다란 토마토가 되는 광경을 보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압니다. 씨와 나무는 한 실체의 연속적인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보이는 육체도 죽음으로 심어서 부활의 몸이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은 동일한 개체입니다. 우리는 어떤 유전적인 모양만이 아니라 각자 분명한 신분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 15:43). 지금까지 무덤에 누워있는 육체는 무시당해 왔습니다. 이 육체는 나이가 차면서 낡고 질병으로 못쓰게 되거나 사고로 부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시에 이 육체도 영광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약함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죠니 애렉슨 타다는 휠체어를 집어던지고, 밥 피어스 박사는 암에서 해방될것입니다. 헬렌켈러는 보고 듣고 말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화상 입고 불구가 된 사람도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늙은 사람은 젊고 패기 왕성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체를 입은 우리는 육체의 약함을 전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에게 지워졌던 제한들을 천국에서는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썩지 않고 죽지 않는 강력한 주택을 가질 것입니다.
 
 "예 그것들이 지금은 약하고 죽어가는 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살 때에는 함이 넘치게 될것입니다. 줄을 때에는 단순한 인간의 몸이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초인적인 몸이 될 것입니다"(고전 15:43, 33, LB)
 
 이 성구를 볼 때 지금의 내 모습은 이렇지만 언젠가는 내가 빨간 케이프 타이즈는 입지 않은 슈퍼맨이 될 것을 생각하니 혼자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고무적인 희망이 있지만 나는 아직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위해서 이 현재의 몸을 할 수 있는 한 멋지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고전 15:53-58, 공동번역).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우리도 살것입니다. 그 분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도 가질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가지고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이 승리에게 삼켜졌습니다.

몸을 떠난 아름다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유익에는 아름다운 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시적인 오두막과 같은 몸을 관리하고 먹이는 일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 병든 세상의 압도적인 문제들을 거의 아니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지상 낙원은 이룩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와 질병이 너무 많습니다.
 
 신자들에게 주는 복음의 첫번째 큰 유익은 악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입니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빌 1:23)을 말하면서 어떤 것은 항구적으로 뒤에 남겨둔다는 뜻으로 말을 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남겨둡니다-모든 고통, 근심, 세상의 고민들 범죄와 마약, 전쟁, 증오, 기아, 모든 비인간적인 요소가 인간에게 주는 공포는 우리의 천국 생활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요한은 계시를 받을 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언뜻 보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도성에는 악한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계 22:3, LB).
 
 자유! 사람들은 이것을 찾아 헤매고 이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결코 자유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카우보이 노래가사처럼 "나한테 울타리를 씌우지 마세요"가 영원한 실제가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는 죽음의 두번째 유익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가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요일 3:2).
 
 우리의 상상력은 너무 무딥니다.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우리는 의로움에 있어서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죄성들은 다 없어지고 우리 기억에서 영원히 말소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에서 주님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 이땅에서 성령을 가지고 있고 성령께서 우리를 지도하셔서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제한되어 오류가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려고 몸부림 치지만 어떤 때는 훌륭한 성경 학자들까지도 성구의 정확한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풀기 어려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모든 '왜'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까? 천국에서 우리의 지능은 이 땅에서 가장 명석한 사람의 지능보다 훨씬 높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에서 예수님처럼 될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에게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아무 값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것입니다.
 
 다른 유익보다 훨씬 뛰어난 최고의 유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를 얼굴 대 얼굴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만져보기를 고대합니다. 내가 가서 그분과 함께 있게 되는 날 그날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이나 실망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맨션으로 나를 영접하시고 내 질문에 대답하시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그분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까요?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자네는 즉시라도 주님을 만나뵐 준비가 되어있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선포하고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나의 주님이요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 여러분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제12장
내가 죽기 전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스도인들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최후의 며칠간 사단은 그리스도인의 평안을 훔치려고 애씁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하더라도 질병이나 통증으로 인한 쇠약, 마음의 혼란들을 의심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 최대의 신학자이자 성경 교사 가운데 들어가는 어떤 분이 죽기 전에 나를 여러차례 불러서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확신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사람이자 성경 교사로서 훌륭한 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치에 관한 문제로 이렇게 번민하는가 하는 것을 나는 이해하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문제가 흔치 않는 일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때 사랑하는 사람들은 죄 감정을 부추김 없이 도와주고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세대에 있어서 코리 텐 붐 만큼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여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고난의 때에 실제 증명됩니다. 코리가 최초로 중풍으로 쓰러진 후 C.마이랜더 목사님은 몇 차례 심방을 오셨고 코리가 자신의 불행에 관해서 당황해하는 모습을 꼭 한번 보셨습니다. 중풍 환자들에게 흔히 있듯이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가에 대한 의심의 물결이 코리를 뒤덮었습니다. 코리가 충분히 말씀드릴수 없었던 것을 팜 로즈웰이 설명하였고 목사님이 코리에게 물었을 때 코리의 주름진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마이랜더 목사님은 성경을 펼쳐 들고 마 28장에서 예수님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코리에게 이 약속은 위대한 위임을 완성시키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 즉 그와 같이 아주 충성스럽게 일을 해온 사람들에게 하신 것임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코리의 얼굴에는 빛이 났고 확신에 차서 '항상, 항상, 항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하나님의 능력이 이기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위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평안한 죽음을 위한 징조
 
 헐버트 로카이어는 '죽음을 맞이하는 책'이라는 고서를 찾아낸 이야기를 합니다. 이 논문을 쓴 미상의 저자는 신자들이 직면하는 5대주요 유혹을 논합니다. 이것을 현대어로 본역하면 잘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1. 믿음이 유지되게 하라. 이것은 마지막 시간이 다가와서 의심의 구름이 마음을 뒤덮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신앙 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와는 무관한 듯합니다. 코리의 경우처럼 경우에 따라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어린 아이와 같아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2. 절망을 피하라. 마귀의 다른 계략은 과거의 죄를 들춰내어 신자들 앞에 쭉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 용서를 받았고 병적을 과거를 끄집어 내어 재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행 10:43)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초조함을 피하라. 우리가 늙어서 아니면 질병이나 사고로 죽게될 경우 참을성 있게 마지막 결말을 기다려야 합니다. 세계비젼과 사마리아인의 재원의 설립자인(지금은 내 아들 프랭클린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밥 피어스 박사는 백혈병으로 고생하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와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지금 완전히 '하나님 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알려진 어떤 기술도 나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최고의 사람이나 과학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공간에서 영광스럽게 살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시작되는 영역입니다. 만약 최고의 인간 기술과 천재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필요치 않으며 기적도 아닙니다. 기적은 인간의 재간이 최대로 미칠수 있는 영역, 그리고 성취 가능성의 영역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방'입니다!"
 
 밥 박사는 끝까지 참았습니다. 아니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4. 자만을 버려라. 사단은 신자의 믿음을 흔들거나 절망 혹은 초조하게 할 수 없을 경우 영적인 자존심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봐라 내가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했는지, 주님을 위한 내 봉사가 얼마나 큰지." 이렇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우리는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엡 2:9).
 
 5.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나는 다른 것보다 이것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소유에 사로잡히고 우리의 세상 의무에 몰두해 있으므로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기 보다 일시적이고 비항구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듭니다.
 
 우리가 이런 시험들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만난다면 다음 성경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성도들의 마지막 말

옛 찬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무덤을 침대만큼 두려워하며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심판날 영광스럽게 부활할 수 있게 죽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성도들의 죽음의 말은 가족이나 전기 작가가 기록해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믿음과 신뢰의 표현들은 인간의 기운이 진하게 되었을때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설명해 줍니다.
 
 26세기 스코틀랜드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피의 숙청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수천 명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수대에 매달리거나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타는 고통을 견디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참형을 받았습니다. 이 영웅들과 순교자들의 최후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6-18).
 
 고통의 최후 순간에 주님은 자기를 위해 고난당하고 죽는 사람들에게 할 말과 죽을 용기를 주셨습니다.
 
 패트릭 해밀턴은 유죄 판결과 사형 언도를 받았을 때, 24세의 스코틀랜드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화형대에 끌려가서 불이 타오를 때 겉옷을 벗어서 자기 하인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불속에 있는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 없구나 그렇지만 너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해밀턴은 사형 집행관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악한 사람아! 나에게는 죄가 없으며 내가 고통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때문임을 자네는 알지 않는가!"
 
 물길이 타오를때 이 점을 순교자는 부르짖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얼마나 오랫동안 어두움이 이 땅을 뒤덮을 것입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사람의 강포를 참으시렵니까?" 그는 불꽃에 산화되어 가면서 성경의 스데반처럼 기도했습니다. "주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도날드 카질은 스코틀랜드 순교사에 있어서 샛별입니다. 정부는 그를 "가장 선동적인 설교가이며 악질적이고 광신적인 모반자"라고 정죄하고 교수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는 교수대로 걸어가면서 그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하려고 계속해서 북을 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면류관을 쓸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나는 그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 오셨으며 마귀와 사람, 죄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주님을 찬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그들은 더 이상 나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행한 잘못에
대해서 무든 사람을 용서하고, 택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 것이 있다면 그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는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그들의 임무를 알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읽는 일, 설교, 기도, 믿음, 방황, 비난, 고통이여 안녕, 말할 수 없고 영광에 넘치는 기쁨이여 어서 오라.
 
 마틴 루터는 죽어가면서 같은 말을 세번이나 되풀이 했습니다.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 당신께서 나를 구원하셨나이다."
 
 죤 밀턴의 마지막 인사는 "죽음은 영원의 궁전을 여는 위대한 열쇠입니다"는 말이었습니다.
 
 벤허의 작가 리유 윌레이스는 주기도문의 일부를 입에 올렸습니다. "뜻이...이루어지이다."
 
 세익스피어는 마지막 유언과 유언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인생의 동참자가 될 것을 소망하고 또 확실히 믿으며 내 영혼을 나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원래 흙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침상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말은 "일생토록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십시오"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전세계를 볼 때 믿음 때문에 잔인함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시간에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의 확실함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견딜 은혜를 주시도록 말입니다.

우리에겐 책임이 있다
 

 우리가 죽기 전에 해결해야 하는 두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준비되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소유하시도록 요청했습니까? 전 세계의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제 믿음에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하시는 말씀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근본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사는가?"입니다.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이 죽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어떤 봉사를 할 것인가?" 여러분은 영원토록 지속될 일에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성경은 언젠가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결산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벧전 4:5).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입니다(롬 14:10). 그날에는 우리가 땅 위에서 한 일들이 과거가 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서 말해주고 선교를 지원하고 전도를 도울 기회가 지나가버렸습니다. 이 땅의 물건들을 굶주리는 자들에게 나눠줄 기회가 끝났습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이 무엇이든지간에 땅에다 쌓아 둔다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최종적인 시험
 
 집을 지을 때 우리는 먼저 기초를 놓습니다. 그 다음 벽, 지붕, 천정에 필요한 재료를 고릅니다. 어떤 건물들은 폐기 계획에 따라 해체됩니다. 멀리서 볼 대는 매끈하고 현대식으로 보일는지 모르나 이런 건물들은 시간의 시험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놓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초위에 집을 지어야 하고 우리가 해놓은 일은 치종적인 시험을 견디어야 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보상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 건축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밟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1-15).
 
 우리는 우리 일의 은밀한 동기와 그 성격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이기적인 동기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면 그 결과가 친구들과 가족에게는 고상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또한 우리의 능력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학식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일을 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지만 어린 손녀에게 성실하게 성경을 가르치는 할머니가 선교 헌금을 조금밖에 못했습니다. 또 맞벌이 하는 부부가 분에 넘치는 저택에 살면서 선교 헌금을 조금 했습니다. 이 둘은 똑같은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은퇴한 부부가 매주일 마다 헌금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교인 가운데 누가 얼마 헌금했는지 절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백만장자가 스테인 글래스에 이름을 새겨서 그것을 누가 기증했는지 모든 사람이 알게 하고 싶어합니다. 이 들은 똑같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목사와 교사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 방법을 놓고 가장 호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생활에서나 교리 면에서 남들을 잘못 인도하였다면 보상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라고 합니다. 이것은 본래 올림픽 경기의 투기장 심판석을 의미합니다. 즉 베마는 선수들을 벌주기 위한 심판석이 아니라 승리자에게 상주기 위한 심판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베마 앞에 설 때 이것은 그들의 업적에 따라 상받으려는 목적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베마 앞에 서는데, 구경꾼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사람으로 섭니다. 이 심판이 어디에서 있을 것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설 성도들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모든 성도들이 공적에 따라 상을 받는 졸업식입니다. 신약 성경은 이 상을 '면류관'이라고 부른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누가 면류관을 받고 누가 못받는지 보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교회를 짓고 머릿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자선 사업가 보다 가장 미천한 하인의 면류관이 더 많은 보석으로 반짝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구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의도를 아시고 우리가 은밀히 하는 일들을 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천국의 오분
 
 내 아내는 몬스리 무디의 기사를 하나 모아 두었습니다. 30년도 훨씬 이전에 나온 것입니다. 아내가 그 기사를 내게 주었을때 나는 이책을 저술하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꼭 필요한 순간에 자료를 주시는지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 책 서두에 나는 내 장인의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정말 살 준비가 되었다"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나는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 사는 법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시험이 내일일지 누가 압니까!
5분 후...
 
 순간일지 수개월을 기다린 이후일지 모르나 아무튼 나는 곧 우리 주님 앞에 설 것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새로운 각도로 나타날 것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즉 내일 할 일, 교회의 저녁식사 계획,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는지 못했는지 등이 순식간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내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 즉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먼 나라에서 있을 주님의 일을 위해 간절히(얼마나 짧은 지간에)기도하는 순간, 은밀한 죄의 고백과 용서등은 실질적이고 없어지지 않는 일로 드러날 것이다.
 
 천국에 간지 오분 후면 내가 전에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던 진리들에게 압도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내가 그분과 함께 있을 때 곧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또 문제는 내가 얼마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주었느냐, 그리고 내가 얼마를 주지않고 기지고 있느냐가 문제임을 납득할 것이다.
 
 천국에서는 그 동안 내가 무심코 흘려 보낸 시간의 천분의 일이라도 되돌리고,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못한 수많은 대화들을 다시 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것이다.
 
 천국에 간지 오분 후면 보다 충실하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동안 내가 하나님을 알기를 하나님이 원하셨을 때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하고 간절히 바랄 것이라고 믿는다.
 
 수천의 생각이 나를 스쳐가고, 나를 천국 집으로 오게 하신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나 자신의 목표없던 지상 생활에 놀랄 것이다. 나는 천국에서도 바램이 가능하다면...하고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늦을 것이다.
 
 천국은 실제이고 지옥도 실제다. 영원은 한 순간에 불과 하다. 우리가 주님의 성전에 간다면 즉시 봉사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마치 구원이 꿈인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처럼 살아야 하는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은 죄니라"(약 4:17).
 
 아직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을는지 모른다. 새해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실재하는 내일을 생각하며 지금을 살도록 도와 주소서!

본 향을 향하여
 
 나는 천국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최대의 바램은 내일을 예기하며 오늘을 살고 영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영접받을 준비를 갖추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나와 함께 이 여행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