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가슴에 이 평안을

차례
1. 기도
2. 삼위 하나님
3. 믿음, 연합
4. 성도의 삶
5. 회개. 구원
6. 사랑
7. 섬김. 자비. 교제
8. 찬양. 감사. 은혜
9. 후배 사역 자들을 위한 조언
10. 죽음

제1장
기도

사소한 것까지도

성도들의 신령한 생활이 주는 아름다움이란 거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조그마한 태도 속에 담겨져 있다. 가장 세밀한 부분에까지 정결하게 정돈되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향기라고 할 수 있겠다. 만일 우리 삶의 부분부분을 관찰해 본다면 진실로 그것 자체만이 갖는 순수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생각과 말을 무분별하게 하는 사람은 곧 눈에 띄는 행동에서도 무분별하게 행하며 조심성이 없다. 또한 묵인하는 자는 더 큰 문제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하루하루를 근신하며 살고, 한 걸음을 주의하며 내딛는 자세는 진실한 순례자의 생의 자세인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지만 주의 깊게 생각하는 행동 속에서 경솔하고 무분별한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유익한 것을 찾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런 기도를 한번 시작해 보라.
"주님!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생각을 인도해 주옵소서. 이방을 나갈 때 저의 생각이 세상의 두려움에 잡히지 않도록 간섭해 주십시오. 오늘의 일과 속에서도 당신의 임재 앞에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해 주시고 제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지 죄를 지어 당신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려고 베개에 몸을 던질 때 그것마저도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깨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저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
"저의 걸음을 인도하소서"라는 이 간단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갖고 주님께 의뢰하게 된다. 이 훈련, 즉 삶의 사소한 부분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훈련을 전진해 나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쳐흐르기를 소망한다.

기도의 열정

그리스도인의 참된 열정은 그의 기도 속에서 아주 분명히 드러난다. 그도 모임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기도 소리를 조용히 들어 보라. 그것은 신성한 문구를 나열한 것도 아니고 또 진부하게 되어 버린 은유를 되풀이한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기도한다. 그는 천국 문에 다가가 문고리를 잡고 문이 열릴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그는 천국 문을 붙들고 마치 문을 밀어내듯이 문빗장과 자물쇠 고리들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 싸우기보다는 가사의 큰 문제에서 삼손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엘리야와 같이 이런 사람들은 천국을 닫거나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오!
우리 속에 그러한 힘은 더욱 엄청나게 내재되어 있다! 우리에겐 기도하려고 일어서자 마자 그들의 열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러한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물론 공적인 기도뿐 아니라 그들 개인의 가적인 기도도 진실하고 진지하다. 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더 굳은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요구할 때에 우리가 거절되지 않는 것을 더욱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천사에게 말하길.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지 않겠노라"고 붙드는 불굴의 의지가 요구된다.

바쁠수록 선행되어야 할 기도

때때로 우리는 너무 바쁜 나머지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크나큰 실수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이 곧 시간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루터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렇게 때문에 세 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 그는 평소 기도하는 데에 그만한 시간을 드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아주 바빠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의 일과가 아침 일찍 시작되면 자연히 우리는 "어떻게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해 나갈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헨리 헤브록은 행진이 여섯 시에 시작되는 아침이면 언제나 네 시에 일어나서 성경을 묵상하고 그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만일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차적인 의무를 수행할 시간을 주셨다면, 마땅히 그는 일차적으로 중요한 일을 행할 시간을 틀림없이 주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하는 것이 최고의 의무이며 우리는 이것을 제쳐둘 만큼 중요한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지 않다면 어떠한 책임도 희생시킬 필요가 없을 만큼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실제로 하나의 일이 다른 일과 충돌하는 대신에 상호 도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에드워드 페이슨이 대학생이었을 때, 너무 수업이 많고 치러야 할 시험들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개인적인 기도 시간을 이전처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습관을 좇아 거룩한 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헌신하는 데에 마땅한 시간을 드렸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과 깊은 기도의 교제 후에 행한 공부가 이전에 1년 정도 해야 완성할 수 있던 것이 일주일 안에 완료되는 체험을 고백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이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배나 늘리게 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께 그의 시간을 드린다면 우리는 모든 필요한 목적들을 충분히 성취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더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는다면 당신의 다른 일이나 약속들이 쉽게 풀릴 것이다.

끈기 있는 기도

당신이 단 한 번의 충격을 나무에 가한다고 해서 열매들이 항상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흔들어라. 그리고 또 다시 흔들어야 한다. 언젠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렸을 때, 당신은 이리저리 나무를 흔들어야 한다. 온 힘을 다하여 발꿈치를 들고 가지를 붙잡으려고 해야 하며 마침내 과일들이 떨어지도록 흔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방법이다. 은혜의 열매들이 당신의 무릎에 떨어질 때까지 생명나무를 흔들어라!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간절히 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끈질기게 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기도이다. 당신의 이웃에게는 거부될 수밖에 없는 그 자세가 그리스도께는 받으실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오! 그대의 방에서 이것을 시작하라.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그대의 골방으로 돌아가라! 당신의 침상 한 모퉁이에서, 조그마한 장롱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만날 때에 그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나님의 영께서 당신의 기도를 주장하시길, 주께서 당신의 기도가 계속 되도록 간섭하옵시길 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천국의 문은 불굴의 의지로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며 거부하지 않는다. 주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은 마침내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주께서 나의 목소리와 탄식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당신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사오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께 기도하리이다."

열심의 동기

만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는다면-이 말에 유의하라.
나는 예언적으로 말하고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쉿"하고 조용히 만드신 후 예배당 벽에다가 "슬프도다"라고 쓰실 것이다. 죄인인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많은 은혜를 받았을지라도, 만일 그만큼 사랑하고 더욱 섬기지 않는다면, 오! 나의 하나님, 나로 하여금 저주가 이 교회에 임하는 것을 보지 않게 해 주옵소서. 최소한 제가 살아있는 날까지는 당신의 축복이 우리 교회에 계속 내리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가 세상의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별이 되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 일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지 않는다면,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는 여러분이 이방 세계를 돕기를 바라지만 우선 이 서울이라는 이방 문화의 중심지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하기를 원한다. 만일 여러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최소한 기도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른 아침의 경건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보면 이슬방울들이 여전히 나뭇잎 끝에 달려 반짝거리고 소녀의 얼굴빛같이 붉은 새벽의 여명이 남아 그 아름다움을 열어 젖힌다. 이것은 늦게 일어나는 자는 놓치는 광경이리라. 이름 아침의 경건에는 표현할 수 없는 멋과 신선함, 그리고 찬란한 빛의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우리는 신앙의 어린 시절에 다른 때 볼 수 없는 순진한 믿음과 꾸밈없는 단순함을 지녔었다. 그때에는 지식이 부족했을지라도 더 큰 사랑이 있었으며 비록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못했어도 성경에 대한 단순한 믿음은 더욱 강했었다. 믿음의 깊이는 없었을지라도 그때에 확실히 향긋한 신자의 멋과 향기와 에메랄드빛 푸르름이 넘쳐흘렀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나안 땅 곧 쁄라땅 다음으로 가장 즐거운 영역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태양이 뜰 무렵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시간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때는 질 좋은 사랑의 진주가 뿌려지고 희망의 새가 부르는 감미로운 음악으로 즐거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의 싹이 튼 그리스도인은 염려나 세상의 짐 때문에 눌리지 않고 그에게는 오직 그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엔 아무 관심도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그 많은 혼란으로부터 그는 자유로우며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막을 그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젊은이는 그의 주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 이 복된 아침의 시간, 그 신선한 영적 체험이 다시 나에게 주어진다면! 순수한 그 열정과 한 마음으로 쏟아붓던 그 헌신과 사랑이 다시 한 번 나를 사로잡았으면!
그리하여 오로지 주만을 향해 뛰어갈 수 있었으면! 오! 이른 아침 이슬 같은 그 영롱한 사랑과 거룩함이여!

고요한 묵상의 귀중함

주님 앞에서 영혼이 조용히 엎드려 보낸 시간처럼 힘을 북돋아 주는 것도 없다. 다윗 왕은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이렇게 거룩하게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봉오리 터진 꽃이 햇살을 마시듯, 사진기의 감광판이 그 앞에 높인 상(像)을 빨아들이듯 우리의 마음은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고요한 분위기, 이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까닭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신들의 내적인 빈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요야말로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백향목의 궁전이나 다름없다. 바로 그 깊숙이 들어선 거룩한 자리에는 아름다운 왕께서 거닐고 계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침묵이여! 나 그대의 정체를 아노라. 보다 더 깊숙한 마음의 수문(水門), 하늘을 고향으로 삼고 있는 자손, 입의 서리, 마음의 봄날 씨로다." 언변의 은사도 값지지만 어떤 면에서는 침묵의 관습은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하다.

주님의 중재로 열납되는 기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하여 매우 귀여운 예를 들어 설명한 사람은 암브로즈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마치 아빠를 즐겁게 하기 위해 꽃을 모으려고 정원에 뛰어드는 조그마한 아이들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무지하고 어려서 꽃과 함께 잡초들을 꺾게 되는데 그 중에는 독초도 섞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상한 혼합물을 손에다 쥐고 생각하기를 이런 저질의 잡초들이 아빠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본다. 그때 엄마는 문에서 아이를 보고는,
'얘야, 넌 네가 무엇을 모아 쥐고 있는 줄도 모르는구나!' 하시며 잡초들과 꽃이 섞여 있는 다발을 끌러서 풀은 다 버리고 오직 향기로운 꽃들만 남겨 둔다. 그리고 거기다가 아이가 꺾은 것 보다 더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모아서 한데 묶어 완전한 꽃다발을 만들어 아이 손에다 쥐어주면 아이는 그것을 들고 아빠에게로 곧 갈려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쏟아 놓는 탄원들과 탄식을 어머니의 부드러움보다 더욱 포근히 다루시고 감싸주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고쳐주신 후에 기도들 중 하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게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술이 있기 때문에 그의 손에서 우리의 꽃들은 더욱 아름답게 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촌스럽게 꽃들을 다발로 묶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완전한 화환으로 배열하시어 각각의 꽃들이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발산하게 하신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나의 기도로 간 구하신 후에 내가 내 기도를 살펴볼 수 있다면, 난 아마 많은 부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내가 간 구하지 않는 기도들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으로 충만하게 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한 순간이라도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대신 주님의 무한한 은총과 비천한 기도만으로 내버려두시지 않는 그의 간섭 앞에 얼굴을 붉히며 감사하게 만든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가 소중한 향기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사랑의 품속에서 정제되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나님께 절대 향기로운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당신은 당신의 어린아이들의 이야기 듣는 것을 즐거워한다. 어린 딸아이가 새 옷을 원하는 때를 당신은 가장 잘 알고 있다. 또한 아들에게 새 교과서가 언제 필요한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딸 메리 가 자기 옷에 대해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든지 간에,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물어 오기 전에 벌써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필요를 깨닫도록 하고 아버지가 그 필요를 채워 준다는 사실을 아이들 스스로가 인식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이들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당신 앞에 와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즐거워하고 또 기꺼이 듣는 것이다. 때로는 잠깐 멈추어서 "왜 내가 이런 것들을 내게 주어야 하니"라고 묻는다. 당신은 자녀들이 조르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이 혀짤배기 목소리로 졸라대는 모습과 당신의 목을 껴안고 뽀뽀하는 것이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이들이 자기네의 짧은 논리와 사랑스러운 포옹으로 당신의 마음을 설득하는 것을 내버려둔다. 그것은 아이들 뿐 아니라 당신도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인간들보다 훨씬 높으신 분임을 상기하자.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같이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배우도록 명령하신다. 만일 악한 우리라 할지라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좋은 선물을 줄 줄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선포하시기를 그는 우리를 아들로서 대우하고 다루신다고 하셨다. 그 다음 말씀이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아비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본문은 그렇게 난해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교제하기를 심히 기뻐하신다. 주께서는 자녀들이 당신께 마음을 털어놓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들과 필요를 펼쳐 놓는 것을 사랑하시면서 필요를 다 채워 주신다. 당신의 소원과 탄원에 절대로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는 아름다운 향기이다.

기도의 영

우리의 주님께서는 사람이 항상 기도해야 함을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기도의 영 안에서 항상 기도해야 하며 기도할 준비가 늘 되어 있어야 함을 의도하셨다. 마치 늘 전투를 했던 고대의 기사들이 적을 낙마시키기 위해 불쑥 창을 던져 버리지 않고 오히려 즉시 손을 뻗을 수 있게 항상 무기를 몸에 차고 있고 또 어떠한 상처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가 되겠다. 그 굳센 용사들은 종종 무장한 채 잠들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가 잠들었을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의 영(정신)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연이라도 밤에 깨어 있다면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다. 위의 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거룩한 것을 구심점으로 영향을 받는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영국 해안에 해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마련해 놓은 횃불과 망루와도 같다. 항상 불꽃을 내며 타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건초와 성냥이 늘 준비되어 있어서 모든 건초더미가 지정된 순간에 불꽃을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도 절규하는 기도가 자주 있게 되는 그러한 조건 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일을 멈추거나 계산할 것을 내버려 둘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무릎을 꿇고 마음을 낮추는 것이다. 영혼은 은혜의 보좌 앞에 소리 없고 간단한 호소를 울리는 것이다.

사소한 것도 주게 아룀

내가 알기로는 우리 대부분이 사소하고 성가신 일들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 걱정거리들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 말해서는 안 된다고 추측하는 듯하다. 이것은 우리의 자존심 때문이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대한 것들이 실제로 얼마만큼 큰 것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의 사소한 것들은 우리와 같이 미미한 피조물에 비해 상당한 양의 파편들이 아닌가. 미미한 자들에게는 중대한 관심사이자. 그리고 우리를 향해 전적으로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은 이미 너무도 자신을 낮게 하여 강림하셨기 때문에 혹 우리가 그를 끄집어내릴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만일 당신이 잃어버렸다거나 아이들의 손이 부었거나 혹은 지금 당장 당신을 괴롭히고 있는 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면, 주님께로 나아가도 좋다. 아버지께 있어서 자기의 어린 자녀를 괴롭히는 사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당신을 염려하여 살펴보기 위해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시며 참새 한 마리도 이유 없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세고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이 매일 걱정거리를 가져오는 것을 어찌 방해가 된다고 하시겠는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인생의 사건들과 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당신과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시기 원한다. 당신과 함께 그 문제를 생각하고 풀며 전적으로 당신과 동거하고 연합하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인생이 갖는 온갖 굴곡들, 즉 기쁨과 슬픔과 소통들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더 많이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싶어하며 우리가 그에게 기쁨으로 반응해 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제2장
삼위 하나님

그리스도의 조화로운 성품

우리 주님의 성품을 가만히 묵상해 보노라면, 거기에는 어떤 하나의 특정한 기질이 우세하거나 두드러지는 일이 없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 자신에게만 강하고 특유한 기질이 응집해 있어서 베드로의 한 특성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의 경우도 하나의 아름다운 성품이 당신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그의 다른 장점들이나 품위 있는 특성들은 관찰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의 성품 중 어떤 덕이 가장 순수하게 두드러지며 빛나는가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을뿐더러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주님의 인격은 마치 고전이 아니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각각의 특성 하나 하나가 나머지 전체와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일 당신이 고전미를 드러낸 작품을 본다면 아마도 전체적으로 빈틈없는 그 미적 감각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반짝이는 눈이라 든다 혹은 세워진 코나 산호 같은 입술이니 등등으로 따로 분리시켜서 작품의 우수함을 말할 수 없게 된다. 각 부분을 서로 나누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미에서 얻는 감명이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이와 같은 완성된 성품은 우리가 노력하여 우리 안에도 이루어야 될 성품이다. 가장 희귀한 향기를 발하기 위해 모든 좋은 향기들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께서만이 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찾고 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허락하시는 성품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의 성품은 한 마디로 묘사되지 않는다. 요한 이나 베드로, 혹은 바울의 인격의 특징들은 우리가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특이한 양태를 지니지만, 주님의 인격은 우리의 묘사력으로는 그릴 수가 없는. 측량할 수조차 없는 성품을 지니고 계신다. 그에게는 뛰어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것이 있으며,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며 각 부분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어져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도 사모하고 닮아가야 할 것이다. 영원한 우리의 훈련과 싸움의 목표도 주님의 이 성품을 우리의 인격 속에 이루는 것이다.

내 영혼의 기쁨 그리스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해 설교할 때 대학에서 배운 것이나 혹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재료로 하여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설교는 내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한다. 내 영혼의 가장 중요한 기쁨의 원인과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또한 경험하였던 것들에 대해 설교한다. 몇 년 전에 나는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였으나 심한 죄의식 때문에 나의 마음은 늘 무거웠고 두려움 때문에 분열되곤 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할 때는 혼자 골방으로 달려가 울며 기도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을 가졌지만 나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도 괴로웠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께서는 어떤 죄일지라도 그에게 나아와 믿는 자에게 사해 주시는 은혜가 넘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복음을 듣자마자 구세주께 나를 의뢰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된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더욱더 나를 하나님께 의탁하고 내 영혼의 온갖 짐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 그 사역 아래 내려놓음으로써 비로소 깊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체험한 바로는 나의 영혼의 짐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빛보다 더 빨리 어둠과 절망에서 헤어 나왔으며 기쁨이나를 휘감았다. 그 시간 이후로 하나님은 상처 입고 절망에 빠진 영혼은 누구든지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기뻐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기쁨으로 살아갈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가장 나약했던 나의 인격이 강하여졌고 무분별하게 타오르던 정열도 차츰 사라져 갔다. 나의 기질들은 점점 안정되어졌고 대신 새로운 삶의 원리들이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나는 변한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다 망가져서 다시 새롭게 갈아 끼워 만든 것처럼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보증을 설 필요조차 없을 만큼 확실하다. 하나님은 날 위해서 실로 엄청난 일을 하셨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그의 얼굴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신다. 그를 찾는 모든 이를 위해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보여 주실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마음과 바른 영혼이 있다. 나는 체험하였고 또 알고 있다. 그것은 마치 죽음 속에 완전한 행복이 있고 이별 속에 그리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히 무엇인지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으며 또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증언을 의심할 것인가. 아마 나의 진실을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참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인격이 올바르다면, 그리고 당신이 내가 진실을 말하는 줄 안다면, 나의 증언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싶다. 이런 간증을 좀 더 사려깊고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내 영혼의 모든 열망을 다해 진실하게만 말하고 싶다. 당신뿐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 지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십자가에 달리 사 승천하신 주님의 피와 공적을 의지하는 것만큼 복된 일이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신학적 불가사의

어떤 사색가들은 예정론이나 자유의지 같은, 유익보다는 혼동을 일으키는 주제에 집착해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그 어두운 불가사의한 문데, 즉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 예정해 놓으셨으며 이성을 가진 인간은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가 등의 물음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밀턴은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악마들과 천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그 수수께끼를 푸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불가사의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위로를 앎으로써 우리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위로 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과 그리고 그 분의 자비와 공의에 대항할 만한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사실이다.

죄인의 무감각

만일 당신이 어떤 장소에서든 죽은 사람을 건드리거나 찔러 보면 시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죽었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와 같다. 그들은 시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할지라도 그들이 보이는 반응이란 피상적이고 금방 사라질 뿐, 다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제 길로 돌아갈 뿐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생명을 버린 피 흘린 사랑이 그들에게는 어리석은 얘깃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교자가 아무리 천둥소리와 같은 어조로 명령과 경고를 할지라도, 심지어 하나님께서 몸소 크고 두려운 음성을 들려주신다 할지라도, 숲과 바위들은 떨리는 반면 완고한 인간의 심령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 신앙 가운데는 반항적인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곧 도래한다고 경고를 해도 소용이 없다. 설교 가들의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될 만한 용어로 경각시키는 메시지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지혜롭고 아름답게 전한다 하더라도 귀머거리는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께로 나아가 탄식하는 것이다. "주여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으오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나나이까." 너무도 끔찍한 무감각 속에 자연인의 마음은 푹 빠져있다. 그러나 죄라는 독성에 철저히 중독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을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치유하기 위해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날마다 성도들의 마음 문 밖에서 "내게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 다오!"라고 외치시고 계신다.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려는가.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이며, 이제는 또 우리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여 마음의 문을 열 것을 간곡히 원하시고 계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영혼 속에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라. 그래서 그대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마음을 비워 드리며 주권을 내어 드려라. 주의 약속의 말씀들은, 우리가 대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노크 소리와도 같다. 주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서 이 약속들을 나와 함께 누리자. 이 모든 것은 다 너희를 위한 약속이 아니냐. 또한 이 약속은 이미 내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더냐." 성경 말씀 속에 있는 많은 경고들과 권고의 말씀도 알고 보면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노크소리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외적인 환경을 통해서 우리 내면에 임하는 가장 큰 은혜도 바로 이 노크 소리가 아니겠는가. 강압적으로 물건을 다루듯이 우리를 대하시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진심 어린 우리의 항복을 받아 내시기 위해 지금도 주님은 오해 참고 계시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이 은혜를 받아 누려라. 그리고 너의 진심을 내게 다오! 이 모든 축복은 널 위해 내가 주는 것이니 네 마음을 나를 햔해 열어 놓아라" 우리가 당하고 부딪히는 온갖 괴로움도 어떻게 보면, 우리의 속마음을 여시려는 주님의 간절하신 열심히 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모든 재산과 육신을 소모해 버리는 질병, 부러진 뼈, 폐결핵에 걸린 어린 딸,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녀들, 집의 화재, 파산한 배 그리고 부도가 난 수표 등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음성인 것이다. "이런 세상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기쁨이 될 수가 없다. 이 썩어질 것들에서 너희를 위로할 만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너희의 생을 보증할 만한 것이라곤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다. 오직 나만이 너희의 삶의 근거이며 원동력이다. 왜냐하면 나로 인해 너희가 살았고 너를 먹고살도록 새롭게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너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로 돌아와야 한다. 나를 중심에 모셔들여라. 나 이외에 신이 된 이 모든 우상들을 내가 깨뜨려 버렸다. 그것들로부터 오는 일시적인 즐거움도 내가 끊어 버렸으니 나에게 너희의 진심을 바쳐라. 그리고 내가 주는 위로와 평안을 받아 누려라." 이런 주님의 노크 소리가 당신에게는 하찮게 보일른지 모른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너무 굳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이시며 영원토록 우리의 신랑 되시는 분에 관하여 우린 너무 인색하고 무관심하다. 그래서 주님은 늘 우리의 문 밖에서 선 채로 밤을 지새우며 문을 두드리시고 또 두드리신다. 때로는 고난으로, 혹은 설교자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음성을 발하시나 여전히 마음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능력의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능력에는 썰물과 밀물과 같은 변화가 없다. 일단 간섭하시면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는 그 손 안에 그 전능성이 있다. 오, 만일 우리가 그 전능함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역지에 대장이신 그리스도를 모셔 들여 자기 교회를 위해 싸우시고, 자기의 종들 곁에서 사역하도록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놀랄 만한 기적들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는 결코 궁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궁핍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난이 주는 자유함

쓴 키니네 한 모금으로 열이 사라지는 것처럼 쓰디쓴 고통의 잔은 우리의 솟구치는 자존심과 세속 성을 꾸짖는 역할을 한다. 만일 고난이 우리를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기준 이상으로 높일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질투하시어 대적하도록 자극하게 될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살아온 길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이 타고난 죄악인지 더러운 부패 성향, 저주스러운 타락성과 우리가 길러온 증오스러운 정욕들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고난의 사나운 길을 따라 계속해서 던져짐으로써 이것들의 참된 실체들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망에 속한 죄악의 병폐들로부터 잘라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예리한 칼날인 것이다. 이 두 개의 날을 가진 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들과 우리 안에서 잠복해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성들을 깨끗이 도려내시는 것이다.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이 피상적이고 관념적이기 쉬우나 고난에 처하면서부터 죄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진실로 바로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시인하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죄악의 부자 유로부터 자유 함을 회복하게 된다.
성도의 모든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여러 가지 점에서 기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도 기적에 의해서였다. 또한 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어 구원하신 것도 기적이었다. 그의 배와 관련된 것 역시 기적이 대부분인데, 배에서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던져 수많은 고기가 잡혀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가 된 것도 기적에 의해서였다. 그의 성난 검이 제사장의 하인의 귀를 떨어뜨려서 주께서 다시 만지심으로 고쳐진 기적도 있었고 그의 장모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으로 열병에서 회복되기도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연결되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집을 바라볼 때 집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입을 옷을 생각할 때는 그것들이 사랑의 의복으로 보일 것이며 매일의 양식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신물로서 감사의 제목이 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회고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불타오르고 가장 낮은 환경조차도 아름답게 빛나도록 만든 환한 부분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친척과의 관계 속에 두드러지도록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 중 각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그를 회복하셨어"라는 말이나, 혹은 "주께서 그에게 영생을 주시어 내 기도를 들으셨어"라는 고백이 있도록 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 아디들, 하인들 모두가 '사랑하시는 의사'로부터 치유의 손길을 체험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가족들이 '주께 거룩함'이 되게 하소서! 또한 모두가 주께서 위대한, 광대한 일을 행하셨기에 기뻐하며 찬양토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소서! 아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며 두 날 가진 어떤 칼보다 더 예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거듭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말씀을 연구하거나 묵상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불같은 뜨거움을 불러일으키신다. 처음엔 우리에게 단지 문자에 불과한 성경 말씀이었지만, 거룩한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로잡으시면 그것은 혀가 되어 우리의 심령 속에 말을 하기 시작한다. 성경 속에 사건은 호렙산의 메마른 떨기나무같이 초라하고 별로 대단한 관심을 일으키지 않지만, 성령께서 임하시면, 보라! 그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처럼 천국의 광채를 발하기 시작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신발을 벗지 않으면 안되었던 모세의 심정이 되어 감동과 경외하는 마음을 지닌다.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평범한 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주장이 진실인 것은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 마치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주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이 성경 구절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느끼게 된다. 가끔씩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정으로 보여진다. 성전 문의 기둥들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진동되고 주의 사자들이 성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천사들과 함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도다"라고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에 권두 삽화처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여기에 계신다. 이 성경이야말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의 문이다." 정말 그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진실로 성경은 영혼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보배롭고 아름다운 돌로 장식하여 안팎을 순수한 금으로 싼 곳으로 하나님의 실존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가장 거룩한 거처이다. 이 때문에 제사장들은 자주 성전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서 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거룩하신 성령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로 문자들을 살아 있게 하시며 또한 실제로 우리에게 산 말씀이 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아주 이상하면서도 또한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이 말을 마음에 깊이 묵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을 참으실 수가 없으시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이 무자비한 질투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태양은 지정된 시각이면 낮이라는 문으로 나타나 땅을 밝히기 시작한다. 정확히 그대로, 셋째날 아침 일찍이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는 잠에서 깨어나셨고 거기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 이는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돌무덤 앞에 있는 바위를 굴러뜨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의의 태양이 일어나신 것이다. 위대한 신랑께서 그의 방에서 나와 그 즐거운 행진을 시작하였다. 부활하신 구세주를 바라보는 것은 황홀한 광경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의 발 앞에서 자세히 보고 그를 경배했을 것이다. 생각건대, 만일 천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부활의 첫 아침, 거룩하신 승리자 예수님께서 죽음의 억압에서 일어나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본 그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 더 이상 숨기지 않으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여태껏 밝히지 않았던 그 불가사의한 사건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조차 되어지지 않았던 그 일들이 모두 주님에 의해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주께서 방에서 나오는 주님의 시간(때)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은, 비록 명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미리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과 아버지에 관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나그네처럼 여행할 때 자신을 숨기시던 일을 포기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명령하시며 친구로서 가까이 하신다. 주님이 죽으셨을 때 성전의 지성소 베일이 찢어졌고 그가 부활하시자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이 영광과 아름다움의 옷을 입고 나아 오셨다. 얼마 동안 그는 사라지셨지만 곧 비밀스러운 상아궁의 방에서 돌아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보이셨다. 그날에 주를 보는 모든 눈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버려진 자의 구세주,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척된 자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가족들 가운데서도 잊어버린 바 된 자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이 어머니의 가슴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 되고 아버지의 뺨엔 노기를 띠게 하는 것이 돼 버렸다. 그들은 어떤 훌륭한 사회 속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다. 그들은 낙인찍힌 남자와 내놓은 여자가 돼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 땅의 법 앞에서조차 소외된 자들이 있다. 정의의 손이 그들 위에 내려지고 법의 구속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실로 중죄인으로 낙인찍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사회적으로 배척 당하는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찾아오신다. 사회의 문이 그들을 향해 닫혀질 때 하나님의 은혜의 문은 오히려 열린다. 사람들이 전혀 희망이 없는 경우라고 입을 모으고 병균이 옮지 않기 위해 문둥병 환자들을 격리하며 외면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시며 환부를 만지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문 밖에서 내 쫓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불러들이신다. 그들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고 방탕의 끝이 다하여 그들 스스로가 다 소모되어서 마침내 병들어 쓰러질 때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들어가시고 우리의 말씀으로 속삭여 주신다. 고통과 괴로움에 의해 더 큰 관심을 표현하시며 불속에서 그들을 끄집어내어 은혜의 영광의 자리로 그들을 옮기시는 것이다.

제3장
믿음. 연합

오직 주만을!

들판을 달리는 수사슴은 시냇물 외엔 아무 것도 찾지 않는다 불쌍한 사슴이 다른 자연적인 욕구를 가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때로는 푸르른 평원이나 그늘진 숲이 그립기도 하지만, 지금 사냥꾼에게 쫓기어 지치고 숨이 찬 사슴에게는 물이 없으면 곧 죽을 것만 같은 생각뿐이다. 시냇물, 차가운 냇물이 흘러내리는 개천, 그 신선한 샘물만이 그리웁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만일 그대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고자 한다면 그대는 단 하나의 욕망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대의 모든 애정과 열정을 다 기울여 한 분 하나님에게로만 전 마음을 쏟아야 하며 그대의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리라!
주님을 향해 그대 스스로 어떤 조건이나 약속을 꺼내 놓을 수가 없다. 만일 주께서 비록 채찍을 가지고 그대에게 가까이 가실지라도, 그가 오시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된다. 그대가 만일 오로지 주님과만 동거하기를 갈망한다면, 어떠한 가난이나 병들어 눕는 것이나 혹은 사별이나 주어진 어떤 상황일지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가 주님과 사귀기를, 그분과만 연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철철 넘치는 포도주 통을 원하거나 옥수수가 가득 찬 창고를 요구하거든 내버려 두라. 그대가 진정 사랑하는 분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 충분하리라. 주님을 만나거든 붙잡고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당신 영혼의 그 끝없는 갈증과 배고픔을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대가 쉬지 않고 주님을  찾고 사모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만이 주시는 충성한 의미와 위로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며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초대 교회의 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는 연약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보다는 우리가 약하지 않다. 그들은 배우지도 못했고 세상에서 부요하지도 않았다. 그들 중 대부분이 어부였으며 절대로 교양있는 능력의 소유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을 짓밟은 자들은 싸움터에 나아가 정복하는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아가 휘두를 때마다 그들의 저들은 혼란에 빠져 버렸다. 그들이 싸우며 죽어간 것이 사실이다. 제재들 중 많은 이들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고 다른 이들은 야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가운데서도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겼다. 초대 기독교는 그 시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전 세계를 살리는 한 씨를 남겨 두었다. 만일 우리가 초대교회 교인들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면, 그들과 같이 거룩한 삶으로 충만하며,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널리 전파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을 것인 바, 우리의 연약함이 오히려 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그의 전능하신 은총을 펼치시는 발판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함께 뭉치고 그리스도와 더욱 연합하라. 그 대열에서 벗어나지 말라. 싸움의 함성에 귀를 기울여라! 또한 믿음을 굳게 붙잡으라. 전쟁터에서 남자와 같이 자아를 포기하라. 그러면 지옥의 문이 당신을 대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만군의 왕께서 우리를 싸움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는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

병든 아기가 있을 때, 엄마의 귀가 아기의 소리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보면 참으로 놀랍다. 자애로운 여인은 아기를 곁에 우리고 잠들어 버리지 않는다. 만일 간호사를 고용했다면 아마 10분 정도 아기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아기가 한밤중에 물을 달라고 울거나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숨가쁜 소리만 내쉴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누가 듣겠는가. 어머니 외엔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엄마의 귀가 아기의 숨소리가 그토록 잘 들리는 것은, 아기의 마음속에는 엄마의 귀가 있기 때문이며 엄마의 마음속에는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꼭 이와 같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상한 심령이 있다면, 하나님의 귀는 이미 그 불쌍한 죄인의 가슴에 있다. 그 상한 심령의 고동소리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듣고 계시는 것이다. 감히 입술에 다 옮길 수 없는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와 온 전신을 적시어 흐르는 회오리의 눈물방울 소리, 탄식과 고통으로 적시어 흐르는 회오리의 눈물방울 소리, 탄식과 고통으로 갈라지는 마음 깊은 곳의 울부짖음을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다 듣고 계신다. 그만이 홀로 죄인의 심정 한 가운데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은 여러 번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로 당장 나아오라. 만일 그대가 가쁜 숨소리밖에 낼 수 없을지라도, 또한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되기를 바라고 용서받기만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그 갈망을 누르거나 깨버리지 말라. 또한 하나님께서 거부하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 그가 당신의 소리 없는 외침을 다 듣고 계심을 잊지 말아라. 물같이 당신의 심령을 그분 앞에 쏟아 부으라.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당신의 문제와 모순들을 그분께서 맡으시고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깊은 연합 속의 평안

오! 주님 안에 머무르기를 고백하고 갈망하는 그대여!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깊숙이 거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있을 때에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 반석 안으로 깊이 들어갈 경우, 그대는 안정감을 훨씬 뛰어넘는 행복감에 넘칠 것이다. 바위 위에만 있는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기 쉽고 빗물에 젖기가 십상이다. 또한 아침의 찬 이슬에 축축해지며 작열하는 태양 빛에 노출되어 녹일 것 같은 더위에 시달린다. 그러나, 오! 바위 안에 깊숙이 거하는 그 사람은 날씨가 어떻든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햇빛이 내리 쬐든지 간에 그것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오! 그리스도께로 완전히 그대의 전 존재를 드려라. 그로 인한 터질 것 같은 생명의 충일 감으로 넘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센 땅에 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이 경험! 그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이 생명에의 체험은 그의 나라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같고 하늘의 것을 땅에서 맛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평강도 더욱 풍성해지며 온전하게 된다. 우리 마음의 가장 깊숙한 지성소는 가장 거룩하고 흠없는 그분만의 거처인 것이다.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의 전 마음과 전 존재를 다스리실 때에, 우리와 우리가 속한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며 자기 색깔을 다시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혁명이 그 깊은 지성소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온전하게, 고요함 속에 출렁이는 생명만이 우리를 감싸 안게 될 것이다.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으로 소위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가진 기쁨을 저울에 한 번 올려놓아 보자. 당신의 기쁨은 진실로 순수한 것인가. 거기에 뒤섞인 그 무엇은 없는가. 당신의 마음의 찻잔은 앙금 하나 없이 안과 밖이 깨끗한가. 당신의 즐거움은 아무런 슬픔의 옷자락 한 올도 없는 순수 무구한 것인가. 게다가 그 기쁨은 지속적인 성질의 기쁨인가. 어떠한 경우에도 소멸되지 않는 그런 기쁨인가. 그대가 태양이라 부르는 그것은 전혀 지지 않는 것인가. 당신이 소유한 부귀는 스스로 날개를 달고 날아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좀이 슬지 못하며 도적이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가. 당신의 기쁨은 늘 마음을 채울 만큼 강렬한 것인가. 당신은 한 번도 당신의 기쁨이 시드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는가. 영원토록 그것을 근거로 살 수 있으며 또한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당신이 누리는 그 쾌락으로 인하여 당신은 날마다 고상해지며 품위 있게 되어지는가. 그 기쁨은 점점 당신을 높은 수준의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향상시키며 더 큰 능력과 힘을 개발해 나가고 있는가. 의무라는 길을 좇아가는 당신에게 그 기쁨은 진정한 힘과 에너지를 공급할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도와주기도 하는가.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 당신의 발 밑에 함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악한 길로 계속 가도록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심사숙고해 보자. 만일 내가 던진 이 질문들이 바른 것이라면 당신은 현재 처한 자신의 상황을 경멸하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참된 기쁨과 평안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주님과의 동거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비결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님과 자신의 하나됨을 분명히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 도덕적인 덕목들을 얻으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꽃을 꺾어, 뿌리도 없이 작은 화단에다 찔러 넣는 어린아이들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점진적인 믿음의 성숙을 추구해 간다면, 때를 맞춰 황금빛 꽃받침에 하늘빛 꽃망울을 터뜨리게 될 알뿌리와 살아있는 씨들을 골라서 깊이 심는 정원사처럼 지혜로워질 것이다. 그것은 진정 축복된 일이 아니겠는가! 주님과 연합하는 것에는 괴로움이나 아픔이 전혀 없다. 사랑하는 주님과 동거하며 함께 걷는 생애에는 지겨움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흠 하나 없는 태양과도 같다. 이지러지지 않은 보름달이다. 절대 쇠하지 않는 바다이다. 주님과 동거하는 것은 영원까지 흐르는 강물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온 축복이다.

꼭 필요한 한 가지 일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도 유일하게 필요한 것이다. 지금 내 주변의 많은 것들이 매혹적이고, 황홀한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다. 쾌락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다. 나는 그 음성을 듣는다. 하지만 나는 "너의 노래에 귀기울일 수 없다. 다른 이의 음성을 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이다"라고 답변한다. 철학과 학문이 나를 매혹시키고 있다. 나는 부득불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인본주의적인 학문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혜를 먼저 추구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진주나 에메랄드는 모두 귀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막에서 굶주리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닌가! 금과 은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몇 상자가 되건 상관없이 그러한 상황에서 절대적인 것은 분명히 양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지상의 매혹적인 모든 것을 잃어버리더라도 우리의 근본적인 필요를 먼저 취해야만 할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다. 당신이 원한다면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라. 그러면 '피스튜에인'이란 단어가 단지 '믿는다'란 의미뿐 아니라 '의지하다, 신용하다, 맡기다, 위탁하다' 등등으로 쓰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믿음이란 뜻의 핵심은 '확신'과 '위탁'이다. 그러면 믿음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겠다. 즉, 당신의 믿음은 신뢰하는 믿음인가. 또한 당신은 유일하게 구속할 수 있는 영광의 주님에 대해서도 신뢰를 두고 있는가. 신용뿐 아니라 확신까지 있는가. 신조나 교리가 당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르부음을 받은 구세주에게 위탁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다. 이점을 기억하라. 만일 당신이 간음하지 말라는 정통교리를 배우고 또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기록된 교리를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달 속의 인간의 존재 유무나 우주 속의 성운의 존재 유무네 대한 믿음과 같은 관념적인 믿음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 그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사실은 두드러진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분명한 증거는 거듭남, 즉 중생이다. 또한 거듭난 자로서 갖는 삶의 변화와 믿음의 증거, 즉 신뢰와 확신, 맡기는 생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

내가 학장으로 있던 대학이 문을 열게 되었을 때, 거의 1년 동안은 내가 가진 재산이 모두 바닥 나 버리게 되었다. 가진 돈은 하나도 없고 학교를 계속 운영해 자갈 다른 수단은 전혀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바로 이 학교에서 목회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을 돕느라고 가진 것을 또 몽땅 털어서 주었다. 그 때 나의 속사정을 알고 있던 한 친구가 뒤에 남아 있다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라고 털어놓자 그 친구는 "자네에겐 훌륭하신 은행가 한 분이 계시지 않나"하며 응수했다. "맞다네. 이제 내겐 아무 것도 없으니 그 분을 의지하고 싶다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가. 자네 이걸 놓고 기도해 보았나" 하고 그가 다시 말했다. "물론 했지" 라고 말하자. 그는 "그렇다면 그분께 맡겨 둠세.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아닐세. 주일날 말한 적은 없어." "어디 한 번 말해 보게나."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그러다가 나는 주일날 친구의 말대로 어려움을 회중에게 말했었다. 그후 처음으로 한 은행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존경하는 교수님, 저희 은행에서는 어느 알 수 없는 숙녀 한 분이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수님께서 사용해 달라시며 이백파운드를 맡기도 간 사실을 교수님께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이 이백파운드의 돈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받아 보지 못했던 액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해서 주어졌는지. 혹은 누가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다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직접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일 이후로 성공적으로 학교를 운영해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사건은 많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켜 더 큰 유익을 가져오게 했다. 바라기는, 교회는 교회로서, 그리고 목회자는 목양인으로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한 조언자이시며 또 뛰어나신 경영자"가 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진실한 자의 마음과 손길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간에 거기에는 천사의 날개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믿음의 검과 모세의 중보의 기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 나타난다. 당신은 오로지 믿기만 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분께 전폭적으로 맡기면서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

소중한 것은 깊은 곳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 땅 위에서 영원토록 머무르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거룩하고 영적인 상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적인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다 심어 놓은 마음인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천국을 향한 영원에의 욕망은 자연인의 본성과 반대된다. 그것은 마치 물건을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는 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본성 속에는 미래를 향해 현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내키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조개처럼 우리는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꼭 붙어 있다. 얼마나 자주 우리의 영혼은 어둡고 불편한 좁은 껍질 속에 갇힌 부화되지 못한 병아리와 흡사한가! 혹은 우리는 벽에 늘어붙은 담쟁이덩굴처럼 눌러 앉으려고만 한다. 세상의 일 속에 갇힌 인생이 껍질을 깨고 위대한 진리의 세계를 직면하여 더 밝은 빛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란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원이라는 미지의 바다로 항해하기가 두려워서 해변가에서 마냥 떨고만 있는 것이다. 헛간 같은 이 육체가 우리 눈에는 더 소중하게만 보이는 것이다. 항아리 안에 드러누워 있지 못하게 하시고 성령의 날개를 주어 높이 날 수 있도록 간섭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 항아리가 부서지는, 껍질이 깨어지는 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면, 마치 흙이 태양을 찾듯 영혼은 자기의 하나님을 곧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해진 영혼이 준비된 자유 속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거룩함과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고 또,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시었다. 이 거룩한 갈망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슬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푸르른 초목들이 갈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바싹 발라 버릴 때, 얼마나 소나기와 이슬을 그리워하는지! 그러다가 때마침 찬이슬이 대지를 향해 하강할 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성령의 이슬이 우리에게서 메말라 버릴 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삭막하며 찬양은 또 얼마나 비참하게 흐르는가! 오! 성령이 우리로 말미암아 거절되고 제한 받는 것은 어느 곳이나 언제든지 거기엔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없는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늘은 이슬을 내려 주리라" 이 말은 마치 그 곳에는 많은 수분과 이슬이 남아도는 것 같이 들리리라.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믿을 만큼의 신앙이 있고 또 그것을 구하고 찾는 열정이 있다면, 우리는 가장 풍성하게 성령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같은 성령의 이슬방울을 떨어뜨려 주실 것이다. 만일 오늘 새벽에 내리지 않았다면 오후의 묵상 시간이나 저녁에 잠들이 전에 임할 것이다. 오! 하나님. 당신의 성령이 없는 우리의 헌신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벙어리처럼 침묵하는 것이 더 낫나이다. 당신의 가장 복되신 성령의 능력 없이 교회가 시도하는 모든 일이 무엇 하나 열매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당신을 소유했을 그 때에야 모든 것이 선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셨으므로, 주 성령에의, 오시어 당신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가운데 온전히 드러내십시오! 아멘. 아멘.

생을 위한 모토

다음의 찬송을 자신의 모토로 삼고 살아가라.
내죄 속해 주신 주께 힘과 정성 다하니
나의 온갖 언행 심사 주를 위한 것일세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354장)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싸우는 여러분은 싸움터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간구컨데, 그분을 위해서 가정을 떠나 싸움터로 나가라. 비겁한 사람같이 후방에 남지 말라. 가정의 평안함을 추구하지 말고 그분을 위해 싸움터로 향하라. 심한 번뇌와 고통으로 지셨던 그분의 십자가에 의지해서 외치노니 "그분을 위해 전진하라." 여러분의 육체에 "그분을 위해서" 라는 문구를 기록하라. 그로 인하여 여러분은 주 예수님의 표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육체가 아니라면 영혼에 그 문구를 기록하라.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분의 종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재산에 그 문구를 기록하라. 그리고 그 모든 소유물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다"라는 표찰을 불이라. 여러분의 자녀들도 그분을 위해 바쳐라. 모든 시간도 그분에게 드리고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도 그분을 위해,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을 준비를 갖추라. 그러면 예수님 덕택에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접받을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묶는 믿음의 끈

언젠가 엄청난 힘을 내는 커다란 엔진을 본 적이 있다. 새로운 모형의 그 기계는 스스로 작동이 되지 않고  또 아무런 자체 동력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계의 엔진에 벨트를 연결하자, 정말 엄청난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볼 때 정말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과 교회라는 유기체가 떠올랐다. 상상해 보라! 이 둘을 연결시킬 수 있는 벨트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름 아닌 살아있는 믿음. 즉 산 믿음이다. 당신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형제여! 그 벨트로 속도 조절 바퀴를 연결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이 역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작동될 것이며 그 영광스러운 역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보좌에 계신 분으로부터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믿음만이 그 능력을, 그분의 지혜와 빛을 가져오게 한다. 하나님의 힘은 우리의 연약함과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통해서 나타나고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라. 당신이 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가 우리를 축복하시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만드시겠노라고, 그래서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리라고 스스로 맹세하셨다. 우리 모두는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사들이 아닌가. 우리의 이수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의 샘물을 마시게 되리라고 약속되지 않았는가.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또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그의 품 안에 있다.

믿는 삶

믿음이란 응접실 탁자 위에 놓인 과자 부스러기나 주일날 입고 가는 옷과 같이 부수적인 것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농가의 헛간과 들에서, 가게에서 그리고 거래소에서 실제로 활용되어지는 실용적인 원리이다. 믿음이란 평범한 주부와 하인들을 위해 베풀어진 은혜이며 서민의 가정과 가장 가난한 작업장 위에 부어진 선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구두장이가 신앙을 가지고 구두를 손질하며 양복장이가 믿음으로 옷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원리에 따라 사고 팔아야 한다. 당신의 일상의 직업 속에서 원리로써 작용되어져야 하며, 그 믿음이야말로 시험을 이겨내는 실제적인 산 믿음인 것이다. 당신은 가게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장사를 다하고 나올 때까지 기독교여, 안녕!" 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다. 믿음과 삶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육체 가운데, 즉 일산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

개별적인 신앙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기란 놀랄 만큼 쉽다는 것을 발견한 적이 한번도 없는가. 내가 구세주를 찾고 이었을 때, 구세주께서 회개한 다른 심령들을 용납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지옥 맨 밑바닥에 갈 정도로 사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주님 앞에 나아오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 자신에게는 비록 할 수 없으나 나와 비슷한 조건의 상한 심령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용기를 주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도록 충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을 믿게 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신앙을 적용할 때는 참으로 쉽지 않다. 즉, 나 자신의 온갖 죄악이 다 깨끗해졌고 그토록 방탕하던 내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납되어졌으며 악마가 나로부터 멀어지고 나의 영적인 질병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가 구원하는 믿음을 가졌든지 안가졌든지 간에 이 사살은 믿어야 한다. 오! 나의 주님! 당신께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고치신다는 것을 알지만 나의 병을 못 고치신다며 불신하였거니와 주님의 신실하심을 모독하지 않았습니까. 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여! 제가 당신께 한계선을 긋고 제한 지점을 두어서 "당신이 나를 포기하실 수 있으나 내가 죽어버리는 한 그렇지 못하십니다"라고 무언중에 말하지 않았나이까. 당신의 십자가의 보혈은 어느 정도의 능력만을 가졌을 뿐 나의 죄를 씻길 만큼은 충분치 못하다고 상상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절망하면서도 교만하게 그분의 은혜로우신 중보와 그 공적에 대하여 감히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우리 스스로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께로 이끌어 온 극단적인 자들 마저도 능히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들 중 쫓겨난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당신의 죄에 대한 사죄와 자신의 구원을 믿는 개별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당신은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가. 모든 성패를 하나님께 맡긴 채 당신은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스스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분께 던져야만 한다. 그렇게 한다면 진정한 믿음, 즉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 어린아이가 어머님께로부터 선물을 받아 쥐고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어머니를 껴안고 키스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일은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구원받은 자와 하나님 사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운 감사의 포옹을 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사랑에 진심으로 감격해 한다. 그리하여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기쁨에 겨워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워서 우리의 말로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좋은 것이다. 무더운 날, 여행자가 옷을 벗어 제끼고 시원한 시냇물 속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행로를 계속할 수 있는 새로운 활력을 얻는 것처럼 한 영혼이 기도와 찬양 속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배움으로써 실제적으로 그 영혼은 천국의 시냇물-생수의 강에서 흘러 나오는 물줄기-에서 목욕하게 되며, 천국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된다.

제4장
성도의 삶

거룩한 말씀의 명료함

곤고할 때마다 나는 성경이 얼마나 명료한가를 깨달음으로써 감탄하곤 한다. 그렇다. 곤고할 때 친구에게 의논해도 바른 충고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 무릎꿇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답변하신다. 의문에 싸여 있을 때, 난처한 경우에 또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심초사할 때 아침 시간에 읽은 말씀에서나 또는 당신 앞에 놓인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 해결의 방향이 주어진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이 있는가. 그런 말씀들은 거룩한 말씀의 여러 부분에서 천사처럼 대기하고 있다가 사명을 받고는 당신의 마음에 위로와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거룩

그리스도가 힘있게 증거되는 것은 교회가 어느 정도로 거룩하느냐와 비례한다. 오! 만일 성도들이 참으로 순결하다면 우리의 증거는 마치 그루터기에 붙은 불이나 옥수수단에 타오르는 횃불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세상에 관심을 덜 갖고 더 많이 지도하고 더욱 경건하다면, 시온 군대의 행진으로 말미암아 열방이 흔들릴 것이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은 확실하게 밝아올 것이다. 만일 교회가 사도와 같은 삶을 사는 자들을 수용하고 많이 양육한다면 생활은 없고 웅변에만 능한 설교자들을 자연스럽게 바꾸게 될 것이다.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고통 가운데서 인내함으로써 시련과 유혹을 견디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만 장식된 은혜를 가정과 사회에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면, 교회 강단이 텅 비어도 나는 만족할 것이다. 문제는 교인들 개인의 인격적. 신앙적인 거룩과 성결한 삶인 것이다. 이 거룩함과 성결은 충동적인 열정이나 선풍적인 어떤 경건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혜성과도 같이 일시적인 광채와 영광을 발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부패한 세대의 칠흙같은 어둠을 연연히 밝혀주는 고요하고 은은한 빛을 내는 별과도 같다. 성도와 교회의 거룩함은 오직 끈기있는 순종의 결과이다. 이것이 주님을 증거하는 강도를 결정할 뿐 아니라, 이 세상과 역사의 운명을, 그 존폐를 방향짓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를 정화시키는 박해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뿌려졌던 성도들의 피는 지중해를 가득 메웠을지 모른다. 모든 순교자의 따뜻한 피가 끝없이 계곡 속으로 쏟아져 내려왔다면 모든 대서양의 물이 진홍색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순교당한 하나님의 성도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거의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의 고통과 승리를 모두 언급하기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으로 부족할 것이다. 이런 박해는 교회를 정화시킨다. 거짓되고, 형식적이고, 성실치 않은 자들은 모두 교회에서 떠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배교도 일삼았으니 진리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찢겨진 어깨로 십자가를 지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진실한 밀은 무의미하게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순교자의 피세례를 통해 새 원동력을 얻는 것 같고, 교회가 고문과 위기 속에 처할 때 가장 큰 능력과 권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 같다. 교회의 군병들은 순교자의 진홍빛 면류관이 그들 앞에 모일 때에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교회는 정화되거나 결코 해를 받지 않는다. 교회는 이런 시련과 고통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위대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풍부한 결실

때때로 정원에는 열매를 너무 많이 맺어서 버팀목을 받쳐주지 않으면 가지가 부러질 것 같은 그런 나무가 있다. 그처럼 교회에서도 어떤 성도들은 스스로 쓰러질 듯한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정열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트신 은혜로운 약속으로 그들을 든든히 받쳐 주시기를 기원한다. 정말 이런 모습이 우리 모두가 상태가 아닌 것이 유감스럽다. 가끔씩 당신은 정원사에게 "이 계절에 저 나무는 열매가 하나도 없나 보지요. 열매 맺을 때가 됐는데..."라고 말하곤 한다. 그때 정원사는 그 나무를 쳐다보고 또 살피고 훑어 보고는 마침내 "나무 맨 끝 가지에 조그마한 열매 하나가 달려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더 많이 맺을지도 모릅니다" 라며 대답하곤 한다. 바로 그 나무와 같은 상태가 많은 신앙 고백을 하는 자들의 영적 현실이라는 것이 염려된다. 신자들에게는 열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모두 생명이기 때문이며, 생명은 무릇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터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라기는 당신을 열매 하나만 맺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간섭하실 것이다. 또한 열매가 많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무되시는 주님께 속한 것이지 스스로 맺은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한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구원의 영광을 자신도 누리게 된다. 진리와 의로 말미암은 성숙과 전진이 있다면 그에게 면류관이 쓰여질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풍성한 과실과 아름다운 영광과 찬사는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영광이 돌려져야 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앙의 중간지대란 없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해 있거나 아니면 그분의 적에 속해 있다. 즉 값비싼 보혈로 사신 바 되었거나 아니면 여전히 사탄의 종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 중간지대에 머물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신앙의 중간지대란 없다. 두 군대가 언덕 양쪽에 배치하고 있을 때 그 사이 계곡에 서서 그 양쪽의 군병이기를 고집할 수 있는가. 이렇듯 당신은 임마누엘 군대의 일원이든지 아니면 그 반대편 군대의 군병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노력은 어김없이 실패할 것이다. 마크 안토니는 사자 둘을 묶어 타고 로마 거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유다 족속의 사자(예수님)를 무저갱의 사자(사탄)와 함께 멍에를 씌우는 자는 없을 것이다. 어떤 자도 자신이 술 취하지 않고서는 거리의 양쪽으로 걸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려고 애쓸 때, 혹은 영생을 얻고서 영적으로 죽은 자처럼 살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자의 영과 혼이 마비가 돼있지 않은가 논할 수밖에 없다.

최상의 지식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산 중턱에서 길을 잃었다. 거기에 1/4 마일의 깊이가 되는 무시무시한 절벽이 있다. 그 너머에는 수렁이 하나 있어서 사람이 일단 이 수렁에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가 없는 곳이다. 저쪽은 숲으로 우거져 있다. 만일 뒤엉킨 길 한 가운데서 방향을 놓치면 해가 뜰때까지 길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때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약 반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 우리의 친구인 철학자는 그런 경우 매우 중요하며 또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그가 그 길을 잘 알지 못할 경우 우리는 곧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서사시 중에서 훌륭한 문구를 인용하여 우리를 즐겁게 하는 고전문학자는 우리가 갈 길을 알 수 있고 해질녘에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학자보다도 우리가 밤을 샐 수 있을 오두막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는 머리 빗지 않은 가난한 시골 소녀가 우리에겐 훨씬 소중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길을 아는 것이다.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학식있는 자의 세련된 강연도 아니며 날카로운 논리적 토론도 아니다. 우리가 단지 바라는 것은 처녀든 젊은이든 간에 우리가 갈 인생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 또한 당신과 내가 보았거나 앞으로 보게 될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과 축복을 돌리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와서 생명과 구원과 천국으로 이르는 길을 보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일 것이다.

삶의 정도를 걷는 자

시세에 영합하거나 중도 정책만을 취하려고 가능한 적게 실수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서 큰 실수를 가끔씩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삶 전체는 타협과 죄악과 불행으로 일관되어 있다. 설사 그들이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발을 질질 끌며 가거나 내내 가시에 찔린 발을 이끌고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정도만 가려고 하고 정도에 거슬리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내가 그 길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바로 갈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다. 고통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 앞에 항상 그들을 유혹하는 타협과 우회의 길이 나타나지만, 그들은 언제나 "나의 이 모든 십자가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확신하는 바에 충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었던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 길로 인해 더 부유한 자는 못 되었으나 더 행복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완전함, 그리스도인의 목표

한 젊은 예술가가 그의 작품을 시작할 때 비록 그가 프락사이델레스 조각품이나, 아펠레스 명화에 비견될 만한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나름대로 최고의 기준을 설정해 놓을 것이다. 그는 일단 작품을 시작하려고 할 때 불완전한 작품이 아닌 최고의 수작품을 모델로 연구한다. 그는 라파엘을 연구하고 또한 미켈란젤로가 시도했던 것을 배우고자 한다. 이런 예술가에게 누군가가 "무엇을 그리려고 하십니까? 라파엘이 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같은 식의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까? 결코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그를 냉소하고 조롱한다면 그것은 곧 이런 그 예술가에게는, "전당포에 가서 별로 가치없는 그림들을 구입해서 복사나 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고의 작품을 모델로 해서 연구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최고의 목표는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완전한 거룩함,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목표에 이르는 것은 너무 어렵고, 수많은 실패를 거듭할 뿐 결코 그 목표에 완전함이라는 목표는 내게 정당치 않다" 라는 변명을 하면서, 낮은 목표를 설정하면 그것은 쉽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함 이외의 다른 목표는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 사랑하는 자여! 완전함을 목표로 삼고 나아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경주의 목표에 이르도록 힘을 주시리라.

일관성 있는 바른 진리의 길

진리로 살아가는 가람은 폭풍이 몰아치는 날에 거센 바람을 맞으며 항해하는 선원과 같다. 그는 우선 그 폭풍을 피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렸다가 나중에야 실제 목적지를 향하여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진리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바람이나 조류에 관계없이 정한 방향으로 곧게 나가는 증기선과 같다. 증기선은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배의 동력은 배의 내부에 있지, 바람이나 파도라는 외부적인 요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하다. 그는 가난하더라도, 즐겁게 진리의 길을 따라가고 그의 가난을 축복으로 바꾼다. 만일 그가 부자라면 가난할 때, 그를 인도했던 동일한 영적인 원리가 그를 주장할 것이다. 그가 한 나라의 정치인으로 선출된다면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올바로 처신하는 방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분의 길은 영원하므로 그가 매일 아침에 "내가 오늘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내가 오늘 어떠한 방법으로 하루를 살아갈 것인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류에 영합하기를 밥 먹듯 하는 정치인들은 대중의 미음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항상 민감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우리들은 사람들의 의나 날씨의 변화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태양이 빛나든 말든 우리는 꾸준히 하나님을 섬기며, 정의를 행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쌓아 놓은 행복

분별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떤 사람도 농부가 옥수수 씨를 밭에 뿌리는 것을 보고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창고 속에 넣어둔 옥수수도 중요하겠으나 애써 씨를 뿌리는 일은 더욱 가치있는 일이라 하겠다 농부는 옥수수를 파종하기 위해 씨가 될 만한 옥수수를 모아둔다. 농부는 보물과 같은 씨앗을 이 논두렁에서 저 논두렁으로 옮기며 정성스레 심는다. 그는 절대로 이것이 손해라고, 허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라 결실함으로 얻을 많은 수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어쩌면 이와 같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가운데 뽐내며 활보하는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라질 기쁨을 포기하는 것은 상실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즐거움을 관심 밖에 두는 것, 우리가 더 엄청난 신분과 특권을 가진 자임을 숨기는 것 등은 손해가 아니다.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자기 부인을 기뻐하는 것이 어찌 지는 일이며 상실하는 것이겠는가.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중상과 모략이 헛된 일이란 말인가. 죄로 인해 고통하며 애통하는 그 시간이 허비하는 시간이란 말인가. 아니다. 결단코 그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더해 주는 일이다. 진실로 그것은 온 세상의 심판주가 오셔서 자기 백성의 달란트를 회계하실 때, 천국 창고에 영원히 보관될 기록이 될 것이다.

행복은 내적인 것

마음의 생각이란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향기를 발산해야 되는 꽃과 같다. 바울과 실라가 착고에 채였어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왕좌에 앉아 있던 헤롯은 양심에 어긋난 비겁한 행위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활짝 핀 금작화를 본 린네우스는 그 속에서 순 황금을 본 듯이 기뻐하였으나 수많은 백만장자들은 정원과 온실을 거닐면서도 그 가운데서 아무런 기쁨도 건져내지 못하는 것이다. 팍팍한 빵 껍질 한 줌이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경우 노래가 흘러 나오지만 일천 에이커의 곡식을 수확하고서도 그 마음이 가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계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그 정복이 이뤄졌을 때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그 반면 한 피트의 땅도 갖지 못한 농부가 고난을 기뻐하고 어려움과 비난 속에서 오히려 영광스러워하는 모습을 본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은 밖에서 거두어 모은 열매가 아니라 우리 안에 심기워진 씨가 자라서 맺은 부산물인 것이다. 참으로 행복이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며 우리 안에 있다.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영혼의 깊은 비밀 가운데서 정자를 마련하고 산책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닐까! 진정 가장 탐스럽고 향긋한 인생의 과실은 영혼의 내면 속에서 무르익은 인격의 열매가 아니겠는가.

땅에서의 준비

우리는 이 땅과 천국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앞으로 일어날 그 모든 일의 목적과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은혜로우신 주님의 음악회를 위해 각자의 현을 연주하는 하프와 같아. 지금 조율사가 우리를 제 위치에다 정돈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각 현을 따라 손으로 청소를 한다. 모든 선율에 있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을 다듬기 위해 한 현씩 음을 바르게 조율하고 그 다음 현으로 넘어가서 손질을 한다. 조율사는 정확한 선율이 울릴 때까지 각 현을 계속해서 만진다. 당신의 고장난 그 마지막 현의 손질이 끝났을 때, 아마 당신의 현은 아름다운 음을 울리기 시작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나쁜 빚을 진 그 최후의 순간에서나 혹은 기울어져 가는 일로 두려워할 때, 다른 현들이 연주되어진다. 그리하여 지금과 천국 사이에서 당신은 모든 자신의 현을 질서정연하게 놓을 것이다. 모든 선율이 제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당신은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기를 기대하는 곳에 가본 적이 있는가. 조율하는 방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치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공장에 가 보면 아마도 망치의 시끄러운 소리와 날카로운 톱니 소리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당신은 "바로 피아노를 만든 곳이구나"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 공장은 분명 피아노를 연주하는 곳은 확실히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주를 위한 악기들을 제작하시는 곳이며, 조율하는 곳이다. 그래서 마침내 영원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될 그 날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음을 내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악기들을 다듬고 깎으며 손질하시는 것이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완전한 음색을 내어 영원토록 찬양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우리 각자의 개성

유머 감각이 뛰어난 어떤 사람은 때때로 절제하고 싶을 때조차 자신도 모르게 유머가 튀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유머 감각을 조련시켜야 하는가. 간단히 말해 주님의 멍에를 그의 유머 감각에 걸어야 될 것이다. 유머 감각이 천하다거나 불결하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 유머가 주님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아름다운 것이 되리라. 반면 우울한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잇다. 이런 성격도 주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되어진다.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는 어떤 면에서 찬양의 진수인 엄숙한 멜로디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희랍의 뮤즈 신들은 그들이 우울해질 때에 절정의 상태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종달새가 나이팅케일이 아니라고 해서 지저귀는 것을 멈추며 참새가 홍망울새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못낸다고 해서 그 지저귐을 멈추던가. 주님께서 심으신 모든 나무여, 찬양케 하라. 숲속의 나무들이여 손뼉치며 찬양하라. 과실수와 백양목도 함께 찬양케 하라. 청년과 노인과 어린이들도 모두 함께 주의 이름을 찬양하라.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음성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각자의 그 독특한 음성으로 찬양하라. 주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타인의 음성을 빌려 찬양토록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모든 개성을 사용해야 한다.

주님의 겸손으로 존귀하게 된 인격

오, 나의 영혼이여! 이제 그대는, 아버지가 멀리 떠나 버려서 더 이상 그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깊은 바다를 건너며 울부짖는 불쌍하고 외로운 고아와 같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더 이상 벌거벗긴 채 힘없이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울지 않아도 된다. 마치 그 아이 아버지가 멀리 사라져 버려서 그 필요와 요구를 모르는 것 같이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당신의 창조주께서는 당신과 같이 되셨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시고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점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다. 오, 인간이여. 그대를 위하여 그런 소식이 있었는가. 불쌍한 인간, 그대는 먼지에 불과한 약한 벌레와 같으면서 천사보다 더 낫고 그대의 머리를 곧게 세우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련한 인간, 연약하게 태어나 수고로이 살아가고 이마는 땀으로 덮이고 마침내 죽어 벌레가 먹어 없어지는 그대는 천사들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다음으로 인간이며, 천사장이라 할지라도 그 사이에 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우리와 같은 형제요,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태어나셨고 살으셨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존귀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쇠해야 될 육체의 일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있었을 때 나는 그의 도움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믿었을 뿐 아니라, 내 영혼 속에서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느낄 수조차 없었고 울고 싶고 탄식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더욱더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갈증을 느꼈지만 내가 느끼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를 실제 필요로 하는지 감각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이 마음이 철석처럼 굳어 있어서 마치 무덤에서 갇힌 자와 같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 그때 내게 눈물을 달라고 얼마나 애원했던가! 회개하고 싶었으나 정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믿기를 원하고 원했으나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속박된 느낌에 사로잡혀 마음은 어지러웠고 결국은 마비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겸손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간섭하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육체의 신뢰와 믿음을 끊으셔야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일어나는 갈등 때문이었다. 육체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한 자가 갖는 믿음이 아니다. 영혼을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로부터 생겨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육체의 일의 열매인 그런 후회나 갈등은 회개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꽃은 반드시 시들어야만 하고 또 성도에게는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씨만이 우리를 완성으로 이끄는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천국을 상속할 후사들은 육체의 의뢰나 혈육에서 난 그 무엇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것이 아니며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난 자들이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일이 성령의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의 일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시들고 쇠하여질 것이다. 육체의 결국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로 던져지는 풀과 같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헌신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오늘날 거짓 제사장들은 바알의 제사장처럼 화려한 제복을 입고 나타나서 제사장 신분을 행하나 그들은 다곤, 바알의 제사장이거나 지옥의 제사장이지, 하나님의 제사장은 아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제사장인 것이다. 오, 형제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의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케 하기 위해서이지, "우리에게는 성직자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자"는 식의 특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나는 당신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행해야 할 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당신 역시 하나님을 스스로 섬기고, 내가 섬기고 있는 만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나는 나의 직무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고 있다. 어떤 때는 그 짐이 너무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당신을 위한 대리인이 되는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을 피로 사신 바 된 자이시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 그러면 그 헌신은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시련 중의 인내

어떤 이가 육신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하여 불평할 때 그것은 마치 파리들이 말을 괴롭힐 때나, 마차의 바퀴살이 빠져서 바퀴가 삐거덕거릴 때 말이 머리를 뒤흔들며 괴로움을 표현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어떤 이가 그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늘상 불평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군인이 농사꾼 소년보다 전쟁터에서 잘 싸우지 못한다면 그는 군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보다는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더 기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구세주께서 끝까지 참으셨던 것처럼 그분의 제자들 역시 오래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옳지 못한 충고이다. 찬송하며 인내하라는 충고가 더 적당한 것이다.

인내하는 복

시련을 참아내기란 얼마동안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인내하는 그 어려움 속에는 축복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좋은 약일수록 쓴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용기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아마 하늘나라 진주문에 이르기 전에 다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고 혹은 원수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수는 이미 정복된 자이며 그대의 발아래 쪼그려 있을 것이다. 그의 목을 누르면서 당신은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영광스런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 힘을 내어 계속 전진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신자들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잊지 말라. 당신이 걸어가는 생의 바다 위로 휘몰아쳐오는 물결들은 마침내 당신이 원하는 항구로 인도해 주는 계절풍과 같을 것이다. 오직 인내하는 신앙만이 이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게 한다. 일찍이 요한 사도가 이렇게 힘주어 외치지 않았던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이 세상의 총 주권자가 누구시며 인생의 막대기와 고통의 채찍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이가 누구신가.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사탄보다 능히 더 크신 분이 아니신가! 그는, 우리 인간을 이 모든 것을 통해 그의 말씀 앞에 온전히 순전하도록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진정 환난이나 시련에 좌초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기뻐할 이유가 되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거 빨리. 더 가까이 주님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항구로 이끌어갈 시련이며 환난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빈곤함

하루를 지탱할 만한 새 힘이 부족할 때 우리는 결코 아침에 일어날 수 없고, 과거의 죄를 씻어주는 은혜의 강이 없다면 밤에 잠자리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항상 필요를 느끼며 산다. 그리스도와 함께 삶을 시작한 젊은 시절에는 청년의 강한 열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고 장년기에는 이 세상의 염려로 말미암아 몹쓸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노년기에도 삶의 종국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해 갈 수 있게끔 하는 은혜를 간직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임종의 순간조차도 평안히 누워 죽을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고, 위로 가운데 눈을 감을 수 있기 위한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삶의 처소를 준비하지 않으셨다면, 그곳에 거할 처소도 없었을 만큼 그렇게 우리는 빈곤하다. 이렇게 바닥 물로 가득 찼듯이 우리는 빈곤함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집에 머무르며 "나는 수년 동안 지탱할 식량을 저장해 두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 어떤 필요에 직면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나는 가난하고 곤핍하다"라고 고백해야 할 것밖에는 없다.

성장하기 위하여

저기 손에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라. 마치 못에 상처나 주지 않을가 염려하는 듯 조심스럽게 못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을 주목해 보라. 그는 얼마나 일에 몰두하는지 옷을 벽에다 대도 세게 망치질을 해서 빠지지 않는지를 확인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을 놀 듯이 하지만, 가장 성실한 사람들은 그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일을 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 일에다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 낚는 어부

우리가 벨라기오를 방문했을 때, 나는 코모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몇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배에다 횃불을 켜 놓았고 그 불빛에 이끌려 고기 떼들이 배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고기를 어떻게 하면 잘 잡는지를 우리 모두 알 필요가 있다. 고기를 끄는 고기 밑밥이 있는 줄을 잘 알 것이다. 고기를 잡기 위해 고기 밑밥이 사용되는 것 같이 우리는 사람을 끄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설교가는 언어의 상징과 이미지 혹은 그것에 대한 설명을 사용해서 사람을 감동시킨다. 당신은 먼저 직접적인 요점을 던지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약간 비스듬하게, 간접적인 말을 함으로써 그 속에서 핵심을 끄집어 내고 연결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람을 났는 어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지혜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영혼을 상처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핀과 그물을 들고 우물가로 나간 모든 소년이 모두 고기를 잡아오는 것은 아니다. 고기는 노련한 어부를 원한다고 볼 때 고기와 고기를 잡는 자 사이에는 무엇인가 일치점이 있다고 하겠다. 나는 이자크 월톤이 고기를 많이 잡은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지 않는다. 마치 그는 사람을 낚는 그 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영혼을 구할 목적으로 훈련되고 연관된 자들이 도처에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동료들을 자연스럽게 보살폈고 그들 속에서 진실을 던질 수 있는 기회들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친절을 받은 그들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또 나를 어떻게 다룰지 아는 사람은 여기 이 사람이다"라고 말을 했다.

인간의 힘의 근원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게 특별한 형태의 힘을 각각 부여하셨다. 어떤 생물은 사냥개의 울부짖는 위험에서 바람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민첩한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물은 넓게 날개를 펼치어 사냥꾼의 총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갈 수가 있다. 어떤 동물은 뿔을 가지고 적을 막아내는 힘이 있고 다른 것들은 이빨을 사용하여 찢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에덴 동산에 있을 때의 사람은 다른 동물과도 비교하기에는 작은 힘을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인간이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 그의 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이 자기의 능력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는지를 아는 한에서는, 인간은 모든 주변 환경을 저항없이 다스릴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그가 찬란하게 발산해 내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야말로, 공중의 새와 들판의 동물들과 바다의 고기들을 다스릴 수 있는 인간의 주권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낙원에 있을 때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왕관없는 왕으로 전락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에의 그림자와 인간의 힘의 근원에 대해 발견하려는 갈망과 추억들이 기억 속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와 상관없이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인간은 초월적인 도움을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나는 이런 인간의 본성이 진실하다고 믿으며 기도에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은 마치 물이 존재하는 이유가 갈증에 대응하기 위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기도하도록 인간을 지으신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질 응답과 축복을 준비해 놓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음

어린아이가 잔인한 부모 때문에 집을 뛰쳐나가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이가 부드러운 엄마와 사랑이 넘치는 아빠를 버리고 나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만일 양이 더 많은 녹초지를 찾아서 황폐한 헛간을 떠난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푸른 초장도 많고, 많은 샘물이 콸콸 흘러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숲속으로 뛰어 달아났다면 그것은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똑같은 것이 인간이다. 스스로 보좌를 포기하고 더러운 곳에 주저앉은 존재들이다!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찌꺼기를 얻기 위해 황금을 내버렸다. 아름답고 붉은 왕국 옷을 벗어 던지고 누더기와 거지옷을 스스로 걸친 자들이다. 화려한 궁전이 싫다고 뛰쳐나와서 마굿간에 살고있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그 대가는 피조물이라는 실존을 망각한 화려하고 환상적인 자유였다. 조물주와 같이 되리라는 근거없는 망상이었다. 태양빛을 등지고 어둠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해 온 인간의 역사! 달콤한 봄날같은 언약과 지저귀듯이 들려오는 성령의 부드러운 음성을 싫어하셨고 만개한 장미꽃과 백합화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한 채 얼음과 같이 차가운 동굴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버린 인간의 현실이다. 하나님을 버린 그 대가 만큼, 사탄이 내건 거짓된 약속처럼, 과연 인간은 자유로운가.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아니지 않는가.

주님, 이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나의 마음의 창문으로 떠오르는 기쁨에 넘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의지가 강하며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조용하고 안정된 태도에 잘 훈련이 되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데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죄악의 물결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데에 심지를 굳힌 자이다. 이리저리 요동하는 사람은 대단히 나약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급하게 서두르지만 늘 일을 그르친다. 그러나 내면에 기쁨으로 가득찬 사람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온전한 자신의 힘 속에서 잠자코 있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겸손하지만 견고하고 확고부동한 자이다. 그는 온갖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또한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며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한다. 그의 소망은 황금으로 된 닻과 같으며 그것을 의뢰하여 은혜의 휘장 안에 담대히 들어갈 뿐 아니라 자신을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의 능력은 과장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실제적으로 발휘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행복감 속에서 그는 자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그것을 행할 뿐이다. 참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참아낸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에 부어지는 성령의 능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어 보인다. 어려움이 닥칠 때 그의 약점은 하나님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반면 그는 조용하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또한 승리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그 내면에 흐르는 빛 때문에 외부적인 빛의 과장이나 장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제5장
회개.구원

간구의 바른 자세

전쟁터에서 부상으로 넘어져 있는 군인은 의사가 다가왔을 때 혹은 앰뷸런스와 함께 의무병이 왔을 때, "내 상처는 아주 가벼워"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해 버릴 경우 그곳에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수시간 동안 이곳에서 출혈하고 있었고, 심한 부상으로 거의 죽을 것 같군" 이라고 외치게 된다. 이런 외침만이 보다 신속한 구조는 받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병원에 후송되었을 때, "내 상처는 가벼워서 곧 회복될꺼야"라고 간호원에게 말하지 않고 의사가 즉시 치료해 주고 두 배의 배려가 취해질 것이라는 희망 속에 의사에게 진실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도 이같이 해야 된다. 기도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고통과 무능함과 위험과 죄를 털어놓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모든 상처를 내어놓아야 한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편지를 주님께 펼쳐 보였듯이 주님께 모든 죄들을 눈물과 큰 소리로 내보여야 한다. 그러면서 " 이 모든 어려움에서 저를 구원해 주시고, 이 어둡고 사악한 것으로부터 당신의 자비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 죄를 회개하라. 구원이 은혜 가운데 있기에 당신이 해야 될 것을 지혜가 가르치리라.

아무리 사악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토설치 않고 무엇인가를 숨기고 가리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사악하기까지 하다. 우리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이미 그것 자체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어떤 사람은 썩은 부위를 드러내 놓으며 도려내 달라고 의사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여기를 좀 깊이 자세히 살펴 주세요. 그리고 제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진단해 주십시오 상처를 내버려두지 말고 확실하게 고쳐 주십시오." 이 환자와 같이 의사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맡길 때 그의 치료와 회복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자유롭게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부을 때, 그에게는 진정 희망이 있다. 어떠한 사악한 죄인일지라도, 아무리 뼈 속까지 썩은 상처투성이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대 의사되신 주님께서 고칠 수 없거나 사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가장 능력있고 유일한 분에게로 기꺼이 달려가야 되며 또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은혜라는 통로가 활짝 열려 있으므로 더욱더 희망이 있는 우리가 아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 피에 자신의 죄와 상처를 담구어라. 그리고 지은 죄에 대해 가슴을 찢으며 통회하고 그 죄를 미워하며 돌이키라! 아무리 많고 깊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아라. 그리스도는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다.

가장 필요한 구원

만일 당신이 공평하게 일한다면 부(富)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영혼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황금으로 만든 관일지라도 저주받은 영혼에게는 초라한 보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쫓겨나는 그 비참함이 보물을 산처럼 쌓는다고 누그러질 수 있겠는가. 그 가엾은 사람이 한 때 백만장자였고 그의 부귀가 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임할 둘째 사망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겠는가. 아니다! 건강이나 부귀를 구원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명예와 명성도 그와 필적할 수 없다. 진실로 그것들은 단지 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이상한 매혹을 준다. 오! 선생님들이여! 만일 세상에 있는 모든 하프 현들이 당신이 영광을 노래하며 울려 퍼지고, 모든 트럼펫이 당신의 명성을 선포한다면 어떤 큰 목소리가 "나를 떠나라, 너 저주받은 자여!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고 외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구원! 구원! 구원! 이 세상에서 구원과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상품은 은보다 더 나으며 그 이익은 정금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영혼의 순수함

올 겨울 눈(snow)을 본 적이 있는가. 그때에 눈(eyes)이 부시도록 찬란한 그 은빛의 제전을 보지 않았던가! 당신이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눈 위에 놓았을 때, 아마도 그 깨끗한 흰 종이가 눈과 비교되어 누렇게 보이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랄 것이다. 다윗은" 내가 눈보다 희게 되리라"고 노래하였다. 그런데 당신도 알 듯이 눈은 단지 지상적인 순백이고 피조게의 순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씻은 그 순백은 천상의 것이며 거룩한 순백이다. 그 순백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이다. 눈은 곧 녹으며 사라진다. 어디에 그 순백이 있는가. 눈과 순백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인에게 준 순수를 더럽힐 만한 죄나 유혹이란 아무런 힘이 없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순백은 이 땅의 것이나 그 어느 것으로도 더럽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것인데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도덕

도덕주의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부도덕한 자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역시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임종시 당신이 존경을 받으며 죽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줄 것인가. 당신에게는 단지 한 가지 것만이 부족한데 그 부족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한 가지만 부족하다"라는 말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조그만 구멍으로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조그만 구멍으로 인해 선박이 침몰된다면 그 선박에는 단지 조그만 구멍이 있을 뿐이라는 말로 선원들을 안심케 할 수는 없다.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이 건강해도 단 한가지 병으로 그는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기관만 온전했으면 그는 오래 살 수 있었을텐데 라는 말은 그에게 조금도 위안을 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불신앙이라는 죄 외에 다른 죄가 없거나, 삶이 기쁘고 유쾌하더라도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타락한 존재이며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당신이 누구든지 불행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새로운 탄생의 필요성

어느 날 바닥이 지독히도 더러웠던 이태리 북부의 한 계곡에 있는 여인숙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집 주인에게 그 더러운 바닥을 문지르라고 충고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그 바닥이 문지를수록 더 더러워지는 진흙으로 된 것임을 알고 그만 두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 부패한 성품이 개선될 가망성이 없다는 것과, 단지 새 성품이 심겨져야 되거나 그의 깊숙한 더러움이 세척되어야만 할 것을 깨닫는다. 사람은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다. 우리의 마음은 수리해야 될 경우가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져야 될 부분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당신 영혼의 영원한 문제들에 대해서 실수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실수는 치명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반석 위에 굳게 서서 조만간 영혼의 흔들림을 맞게 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거주하는 거실의 침대 위에 누워있을 때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조용한 발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죽음의 경고를 듣게 될 것이고, 의사가 당신의 친구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이제 희망이 없소"라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미지의 세계를 응시하게 되고 영원의 심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당신이 두려움에 휘어잡힌다면 당신은 심히 깊은 계곡에 어두움에 들어가기라. 그러나 오, 사랑하는 자여!
그때에 당신이 확실할 수 있다면 참으로 기쁨 중에 마지막 때를 맞이할 것이요. 승리 중에 영원 가운데로 입성하게 되리라. 만일 당신이 현재에 방종하고 당신의 지위를 살피는 일에 있어 등한히 한다면 과연 그때에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기쁨 이전의 회개

어떤 천(직물)은 거기에 장식될 빛나는 색상들을 물들이기 전에 적실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혼도 찬란한 환희의 색감을 받아들이기 전에 회개의 이슬로 적셔져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은 단지 젖은 종이 위에 인쇄되어진다. 당신은 소나기 후에 내리는 빛보다 더 찬란하고 깨끗한 햇빛을 본 적이 있는가. 태양이 빗방울을 보석으로 바꾸었을 때, 꽃들은 목욕한 후에 더욱 신선한 미소와 얼굴을 드러내고 부벼대고, 물방울 떨어지는 가지 위의 새들은 더욱 환희에 찬 목소리로 노래한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잠시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회개의 빗물에 흠뻑 적시어지면 용서하는 사랑의 빛난 햇살이 기쁨이라는 꽃들을 온누리에 만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환희의 궁전으로 올라가는 걸음들은 일반적으로 눈물로 촉촉히 젖어 있다. 죄로 인한 슬픔은 미의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며, 거기에서 손님들은 "여호와의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말로 위로를 받을 슬픔에 잠긴 자들이, 주님의 산상설교 중에서 "애통하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기를 참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죄사함, 그 기쁜 순간이여!

나는 내 죄가 사해졌을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정말로 한 순간이었다. 나는 가련한 존재였고 내 죄는 밤낮으로 나를 두렵게 했고, 심지어 지옥의 문가에 나를 앉아 있게 했다. 그러나 "나를 보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라는 그분의 초대의 말을 듣고 이해했을 때 나는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이 나를 바라보시므로 산같은 내 죄가 제거되었기에 나의 상태는 놀랍게 변화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 분을 뵈었을 때, 나의 죄는 사함을 받았고, 내 기쁨은 넘쳐 흘렀다. 그때는 나 자신을 억제해야 했고,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 기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만일 어떤 이가 "할렐루야"를 외친다면 나는 가장 큰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었다. 오! 성령에 의해서 죄사함의 축복을 받았을 때의 기쁨이여! 나의 형제여, 당신은 그 죄사함의 기쁨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그것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듣고 읽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은, 과거에 당신이 거역했던,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은혜의 구원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모든 선한 일은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점점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하나님의 기르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절정에 이르게 된다. 만일 나의 손가락이 낙원의 황금문 빗장에 있고, 내 발이 벽옥으로 된 문지방에 있다면, 그래서 나를 거기까지 이끈 은혜가 더욱 나를 완전하게 하고 순례의 길을 완성시킬 수 없다면, 난 천국에 들어갈 마지막 걸음을 떼어놓지 않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이것이 요나가 흑암의 깊은 대학교에 있는 물고기 뱃속 학과에서 깨우친 신학이다.

구속의 위대함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이 작은 브리탄 섬이나 몇몇 다른 국가들을 얻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마치 그의 왕관에 장식할 보석처럼, 이 둥근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기 위해죽으셨다. 나는 둥근 세계 전체가 왕관에 있는 진주와 같이 여전히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적들을 항복시킬 때까지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셔야만 하고 또 지배하실 것이다. 온 바다를 하얗게 만드는 돛은 남쪽에 있는 섬들을 향해 주님의 심부름꾼이 되어 줄 것이며, 메마른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들은 먼 오아시스나, 배회하는 배두인족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게 할 것이다.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놋 문은 부서져 버린다. 주님의 사자를 향해 닫아 버리는 철로 된 문빗장은 망가지게 된다. 오래된 미신의 체제는 다 소멸되어야 하며 두더지와 박쥐가 이방 나라의 유일한 벗이 될 것이다.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당신이 탄식했던 그 이유는 하늘이 축복한 것이다. 영원한 천명(天命)은 그리스도의 보좌를 지키는 사자와 같이 서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센 팔은 선택된 자들의 복수를 위해 드러나 있다. 십자가의 깃발이 높이 달려 있을 것이다. 승리의 함성이 곧 높이 치솟은 천국의 아치문들을 진동시키게 될 것이며, 반면 지옥은 공포의 소리에 떨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하시고 죽지 않으시며 보이지 않으신 왕이 모든 정사와 권세들을 꺾으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라를 바칠 것이다.

거룩한 중생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빛을 만드셨다. 그 다음에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기어다니는 생명, 걷는 생명, 물에서 사는 생물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만드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창조하신다. 죄악을 멀리하며 땅을 기어다니는 생명, 봉사하며 걷는 생명, 회개의 거룩한 물 속에 헤엄치는 생명, 천국을 향하여 믿음의 날개로 날아가는 생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구분하시고 바다로부터 마른 땅을 분리하신 것 같이,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은 부패된 옛 생명과 새 생명을 분리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본래의 생명 -결국은 사망에 처하게 될-과 영원히 분리되고 대적하는, 거룩하고 썩지 않는 생명을 주셨다. 마침내 창조 사역이 모두 끝났을 때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던 것처럼 그는 우리에게 닮은 인간을 만드셨던 것처럼 그는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명령을 주신 후,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우리 안에 새롭게,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렇다. 그 형상은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 속에 있다. 그것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골격은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위대한 조각가는 이 거친 인간 대리석 덩어리에다 자신의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모든 특징들을 다 볼 수 없다. 거룩한 인상은 아직 뚜렷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인은 보신다. 그는 구별되지 않는 무리의 본성 속에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드러날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이미 보고 계시는 것이다.

천국의 고귀한 신분

가장 가난한 시골 여인을 데려 오라. 나이 많아 늙어 여위고 주름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고, 매우 무식한 여인이라도 좋다. 그러나 그녀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고, 성렴님께서 항상 그녀 안에 내재해 있다면 나는 모든 황제와 왕들보다 그녀를 더욱 존경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실질적으로 그들보다 높은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존귀한 신분을 얻게 됐으나 세상의 왕들은 대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치루고 보좌를 차지하게 된다. 요컨대 그들의 왕좌는 순간적이요 세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하늘 보좌에 계시는 왕의 혈통에 속하게 된다. 그녀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녀가 그의 축복을 받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천국의 거주도 그녀 없이는 완전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획도 완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녀는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

오늘 당신의 정원을 산책해 보라. 모든 과일나무들이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공기 속에 갖가지 향기를 뿜어 내고 높은 목소리로 새들이 노래할 때, 당신은 "그래! 확실히 봄이 온게야. 봄이 우리에게 미소를 가득 짓고 있구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도, 어둡고 추운 밤도 이 봄을 막을 순 없었다. 봄을 알리는 꽃봉오리가 맺히는 향긋한 날들은 성장과 온화함으로 늘 시작되어 왔다. 심지어는 하루 해가 길어졌을 때 조차도 우리는 그렇게 큰 진전을 보지 못하는 데 그것은 그만큼 추워도 길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좀 온화한 날씨를 즐기게 되면, 밤에는 얼얼한 서리를 맞게 된다. 그러나 확실히, 그리고 점차적으로 나무의 엽맥들은 수액으로부터 생기로 채워지고 봉오리들은 처음으로 부풀어져 그 영광을 드러낸다. 반면에 어머니같은 대지는 식물의 뿌리를 만들어 내고, 나무에게는 신선한 활력을 공급하며 나무들이 푸르게 줄지어 서도록 모든 에너지를 뿜어 준다.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가을의 황금빛 낙엽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와 꼭 같이 그리스도의 통치는 섭리라는 씨줄과 날줄로 짜여지고 있다. 비록 주님은 오래 전에 승천하셨지만,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그에게 이끌어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재림은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 자라면 이 사실을 거의 볼 수 있다. 그의 나라를 다가오고 있다. 지저귀는 새의 날은 가까이 있는 것이다.

제6장
사랑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신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의 끈으로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주께서 성도들의 본성을 건드리시기 전에, 혹은 그들에게 주님 자신으로 인한 기쁨을 주시기 훨씬 전에,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그 마음에 품으시고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택한 자들을 주목하셨고 기쁨으로 그들을 지켜 오셨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사랑

내가 알고 있는 훌륭한 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겐 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것들이 많았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를 추적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즉, 그녀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 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오! 그 문제라면 절대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절대로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단지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시지 않고는 우리 마음 안에 자생(自生)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라고 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열매이지 뿌리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며 당신 속에 어떤 선을 강요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해도 좋다. 주님의 입장에는 어떠한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흔들리는 것은 당신 쪽에서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문제가 사라짐을 받아들여라. 주님과 당신 사이에 남아 있는 문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오, 우리의 마음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는 구세주께서 우리같은 이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지 않았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주 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성도의 지병, 사랑

솔로몬의 아가서에 보면 사랑 때문에 생긴 두 가지의 병이 있는데, 그 하나는 신부가 그녀의 주인의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주인의 존재를 소유했을 때 생기는 병이다. 신부에게 신랑은 너무 영광스러운 존재여서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녀는 죽은 자처럼 되고 만다. 그 때에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만일 당신이 이 두 번째 사랑의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처음 것이, 즉 주인의 존재를 갈망하는 그것이 이 사랑에 도달하는 분명한 출입구임을 잊지 말아라. 나의 형제 자매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기까지는 그대들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이 진리를 마음에 굳게 새기기를 바란다. 또한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대들이 진심으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 곁에 있구나. 나는 그에게 말을 할 수가 있으며 그가 준 사랑의 기쁨 안에 내가 있도다"라고 고백할 때까지는, 울부짖음과 눈물이 그대에게 끝없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랑없이도 만족한다면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대는 반드시 얻게 되리라. 만일 그대의 열망과 목마름이 주님과 그대 사이의 막힌 돌벽을 녹일 수 있다면, 그 어떤  철벽일지라도 그리스도와 당신을 막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지칠 줄 모른다면, 주님은 자신을 당신에게 계시하시며 또 풍성히 채워주실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의 온갖 일시적인 매력과 추구하는 바와 진미들을 끊어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얻고자 한다면, 그 어떠한 가난한 심령일지라도 그리스도가 그에게 채워지며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이 영원히 거할 처소를 당신 안에다 마련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을 당신의 중심에 모셔들일 길이 있다. 주님의 사랑이 당신을 이끌기도 하지만, 당신의 사랑으로도 주님을 당신 안에 임하도록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두려워 말라. 주님을 모셔 들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비나답의 수레와도 같이 되리라. 어쩌면 지금 당장 그대는 환희로 넘치는 그대의 길을 달려갈 것이다.

이상적인 결홍

때때로 우리는 순결한 사랑 위에 기초를 두고 서로를 존중함으로 굳건히 서 있는 이상적인 결혼을 보게 된다. 그러한 결혼에서 남편은 다정다감한 머리로서 행동하고, 진정한 배우로서 아내와 이상적인 결혼 관계를 현실화시키며, 그리스도와 함께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기쁨을 얻는다. 그의 인격과 성품, 그의 애정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은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녀의 눈에 있어 전부인 것이다.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참된 사랑은 남편에게 속해 있으며 오로지 그에게만 있다. 아내는 남편의 동행과 동거와 사랑 속에서 가장 달콤한 위로와 만족을 발견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와 작은 세계이며 그녀의 낙원이고 선택한 즐거움이다.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기꺼이 자기만의 기쁨을 제쳐 두고 오히려 그를 기쁘게 하는 데서 두 배나 되는 즐거움을 느낀다. 아내는 남편의 인격 속에 자신의 인격을 기쁨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다름 이름을 찾지 않으며 남편의 명예는 그녀 속에 반사되고 그녀 또한 이것을 즐거워한다. 그녀는 죽어가는 숨결로도 남편의 이름을 지키며 그녀가 남편을 위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충분히 안심하게 된다. 가정이라는 영역은 아내의 왕국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행복을 창조해 내고, 가정의 안락함은 그녀 일생의 사업일 것이다. 남편의 미소짓는 감사는 아내가 찾는 보상의 전부가 된다. 심지어 옷을 고를 때도 아내는 남편의 취향을 고려하고 아무런 거북함없이 남편의 충고를 다른다. 그 뿐 아니라 남편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불친절했기 때문에 흐르는 남편의 눈물은 그녀에게 심한 상처를 주게 될 것이다. 그녀는 어떤 나그네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또 어떤 재판관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결코 행동하지 않는다.그녀의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만족케 하면 그려는 기뻐할 것이다. 남편은 인생에서 많은 장애에 부딪히게 되고 어떤 것은 아내가 전혀 이해 못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들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장애를 물리칠 수 있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 남편은 아낌없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그렇게 한다. 인생에 있어서 그들의 장애물은 서로의 공유물이 되고 그만큼 어려움도 가벼워진다. 그들의 사랑은 너무도 내심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서 아무도 어느 것이 첫째이고 두번째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아이들이 건강하고 힘차게 크는 것을 보는 것과 유용한 사랑으로 명에를 얻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등이 모두가 아내와 남편의 관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내와 남편은 완전히 하나이다. 그들의 소망은 한데 어우려지고 그들의 마음은 나뉠 수가 없다 점점 더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친밀한 교제는 일치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을 동시에 똑같은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올 때 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행복한 여자와 남자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천국이 이 땅에서 발견된다면 그들이 천국을 가진 자들이다! 마침내 그들 두 사람은 너무도 결합되고 줄기에 꼭 접붙여져서 그들의 노후에는 애정어린 애착과 공감하는 심정을 풍성하게 나타내 준다. 이 때문에 질병이 올지라도 그들에겐 고통이 경감되고 병이 주는 부담은 오히려 새로운 사랑의 유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뜻이 하나가 되고 감정과 사상, 마음이 일치되는 것이 너무도 행복해서 그들의 인생이라는 두 개의 개울은 그들이 갈라놓는 둑을 가라앉히고 마침내 연합된 실존하는 하나의 넓다란 물결이 되어 그들 공동의 기쁨이 더 없는 행복의 바다로 들어갈 때까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번식시키는 것

사랑을 번식시키는 것은 죄에 대한 의식이며 용서함 받는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는 마음이다 만일 당신과 내가 지난날의 죄악에 대해 더 깊이 느낀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혹은 우리의 죄가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의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가 당할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의 우리처럼 차가운 마음의 사람들이 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첫사랑
당신은 당신의 마음속에 복음이 마치 폭풍처럼 밀어닥쳤던 그날을 기억하는가. 거대한 진리의 망치가 인간 영혼의 성문을 향해 내리쳤던 그때를 당신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복음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당신은 기둥과 빗장을 굳게 하고 대항해 얼마나 맞섰는지를 기억할 수 있으리라. 가끔씩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시적인 감정은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때의 당신의 감정은 마치 "아침 하늘의 구름과 이른 새벽의 이슬"과도 같았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당신을 구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은혜의 맹공격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섭리와 은혜가 함께 당신 영혼의 아성을 포위하였고 그 성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대포가 날라갔다. 당신은 궁상맞게도 성(영혼) 안에 큰 기근이 들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굳게 걸어 잠궜던 문을 열었다. 당신은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 강한 충격을! 매 주일마다 듣는 설교가 얼마나 선선하게 그대 영혼을 울렸는지를, 그것이 마치 천국의 공성망치처럼 새롭게 몰아치는 강풍이었는지를! 그러다가도 자주 당신의 옛 편견에 벌벌 떨고 새로운 장벽을 또 굳게 세워 놓지 않았던가. 당신의 마음은 무서운 정의의 일격 아래 벌벌 떨었지만 그나마 사탄의 도움으로 타락한 옛 성품은 자존심의 쇠꺽쇠와 무감각이란 놋빗장을 받쳐서 좀더 아성의 문을 보호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마침내 어느 축복된 날에 -당신은 그 날을 기억해 내는가- 복음의 공성망치가 결정적인 은혜의 일격을 가했을 때, 그 아성의 문은 활짝 열리고 평화의 임마누엘이 정복자처럼 구원의 전차를 몰고 영혼 깊숙한 곳으로 진격해 오셨다. 우리의 고집은 꺾이었고 격동하던 감정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우리의 영혼은 은혜로우신 주님의 통치 아래 겸손히 엎드린 것이다. 그날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에 너무도 영광스러웠으며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온전히 아름다운신"분이셨다. 그 감격의 날에 마음의 탁자 위에다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이날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진정으로 대관식을 거행하시는 날이다. 또한, 우리의 영원한 출생일이기도 하다." 영광의 주님이 피묻은 옷을 걸치신 채, 손에는 용서와 축복의 선물을 가득 안으시고 우리의 영혼 속에 들어오셨을 때, 심장의 종소리는 환희에 차서 멀리 멀리 울려 퍼져 나아갔다. 기쁨의 오색 테이프가 신선한 기분 속에 휘날리고 마음의 오솔길은 장미꽃 화환으로 뒤덮여졌다. 우리의 사랑의 샘터에서는 달콤한 붉은 빛 포도주가 길어 올리우고 영혼을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에 겨워했다. 이 모든 것은 구원이 우리집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영광의 왕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 오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맨 처음 우리와 함께 먹기 위해 왕께서 식탁에 앉으셨을 때의 그 달콤했던 감송향 내음이여! 구세주의 임재가 얼마나 우리의 내실을 충만히 채우고 말았던가! 그날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공포로부터 우리가 구원되었을 때에 복음은 진실로 영광의 복음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복음이 그대들의 메마른 심령을 촉촉히 적시어 줄 것이다. 진리는 향긋한 몰약처럼 우리의 영혼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첫 사랑의 계절에 복음을 듣고 싶은 열정으로 도랑을 파고 울타리를 건널 수 있었다. 한마디의 말씀이 그대의 사모하는 마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었던가! 그 처음 사랑으로 되돌아가자. 첫 사랑의 신선함과 가슴설레이는 대면과 재회를 주와 함께 회복하라.

제7장
섬김.자비.교제

거룩한 말씀의 명료함

곤고할 때마다 나는 성경이 얼마나 명료한가를 깨달음으로써 감탄하곤 한다. 그렇다. 곤고할 때 친구에게 의논해도 바른 충고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 무릎꿇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답변하신다. 의문에 싸여 있을 때, 난처한 경우에 또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노심초사할 때 아침 시간에 읽은 말씀에서나 또는 당신 앞에 놓인 성경의 어떤 구절에서 해결의 방향이 주어진다. 당신은 이러한 경험이 있는가. 그런 말씀들은 거룩한 말씀의 여러 부분에서 천사처럼 대기하고 있다가 사명을 받고는 당신의 마음에 위로와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영원한 섬김

태양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빛을 비추어 오고 있지만, 태양이 자기의 일을 멈추고 움츠러들려 한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작의 계절들을 허락해 주셨다. 그렇지만 그가 우리의 경작에 축복하시는 일을 그만하신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매일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강물을 들이키며,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암시나 하나님께서 공급을 끊으신다는 징후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손이 머무르는 꿈을 꾸는 것인가.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삶은 어떤 삶일까. 어떤 한 사람이 자시의 주인을 섬기는 것에 70년을 흔들리지 않고 성실히 인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사실 우리 시간의 절반이 수면과 육체의 원기 회복에 소요되고 그 다음엔 대부분이 세상의 바쁜 일을 위해 쓰여진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우리 중 대부분이 일주일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시간만을 주인되신 그리스도께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를 오랫동안 섬기고 있노라고 쉽게 말을 한다. "사랑하는 주여! 당신의 손을 우리의 입술에 대시어 다음에는 참으로 주를 섬긴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옵소서. 또한 우리의 나태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사랑의 주권을 저희가 모독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구원하소서!"

철저한 섬김

나는 어떤 주인이 식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종들은 먹고 만족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다양한 요리들을 주인 앞에다 배열한다. 주인은 찬 음식을 맛보기도 하고 오븐에서 갓 구워낸 빵을 먹어 본다. 그러나 미지근한 차와 반밖에 구워지지 않은 케이크 때문에 입맛을 잃고 그것들을 치우게 한다. 주님께서는 차갑게 식어서 신음하고 있는 당신을 주목하시고 당신을 뜨겁게 하실 것이다. 또한 뜨겁게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섬기고 사랑하는 당신을 돌아보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중간인 미지근한 사람에게는 주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지근한 신앙을 용납지 않으신다. 그것에 신물을 느끼시는 것이다. 현대의 신앙은 주께서 받아들이실 만하기 보다는 훨씬 매스꺼운 것이 되고 말았다. 만일 바알이 신이라면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면 그를 전심으로 섬겨라. 신앙의 핵심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온전히 섬겨라. 당신의 영혼을 완전하게 당신의 신앙에 던져 넣으라.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에게 명령하노니, 한걸음 물러나서 자신의 신앙에서 요구하는 그 값(희생)을 계산해 보라. 왜냐하면 바알에게 일부를 주고, 그리스도를 반만 섬긴다면, 당신은 내어버림을 당하고 영접받지 못하게 되는 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더 이상 당신과 상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그를 송축하고 섬기라. 왜냐하면 오직 완전한 섬김과 나누이지 않은 충성심만이 주께 열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섬김

우리는 "주께서 저로 무엇을 하게 하실런지 보여 주소서" 라고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내가 할 일, 즉 일반적으로 옮은 무엇이 아니라 특별히 내가 해야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나의 가정부는, 아마도 내가 연구할 때 날 위해 종이를 정돈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적당한 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조그마한 감사밖에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만 만일 그녀가 이른 아침, 먼 시골 마을로 설교하기 위해 떠나려 할 때 커피 한잔을 가져다 준다면, 나는 훨씬 그녀의 봉사에 감사를 느끼고 표시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성도들은 "만일 내가 이러 저러한 위치에 있다면 어떻게 계속해 나갈 수 있는가, 만일 내가 집사가 되거나 좀더 높은 신분의 직임자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염려한다. 그대의 길을 그냥 가자! 그리고 그대의 주인이 시키는 그것을 하라. 그대 스스로 가진 위치에서 일하는 것 보다도 주께서 그대에게 정해 주신 곳에서 더 좋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봉사하는 일을 선택하고 뽑을 때는, 그대는 전혀 종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전혀 종의 정신인 섬김의 본질에는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보좌로부터 주어지는 명령만을 기다리오니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가르쳐 주소서" 라는 마음의 자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구원받지 못한 자를 생각할 때
신문에서 읽었던 한 소년에 관한 기사가 연상된다. 브리스톨 해협에 위치한 론디 섬의 거대한 바위 위에 두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갈매기 알을 차자 다니고 있었는데 그중 한 소년이 실족하여 낭떠러지로 미끄러졌다. 그의 형이 비명을 듣고 가보니 동생이 울퉁불퉁한 바위에 매달려서 허둥대고 있었다. 그 형은 너무 놀란 나머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동생의 몸이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 덜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생각에 발만 동동 구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오늘 나는 여러분 중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그 동생의 위험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형의 심정을 가지고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헛된 소망에 매달려 있거나 안식이 없는 곳에서 쉼을 얻으려 발버둥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 영원한 복음을 가진 강한 날개의 천사가 당신 아래에서 "지금 떨어지시오. 내 팔에 떨어지면 내가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겠소!"라고 외치고 있다. 이 천사는 언약의 사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러분이 그분 안에서 해결을 찾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몸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기를,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은 떨치고 안전하게 옮겨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영광스런 복음을 송축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자비를 즐겨하시는 하나님

자비는 베냐민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 자비 안에서 모든 일을 즐겨하셨다. 자비는 그 분의 우편에 앉으신 아들이시다. 그러나 그 자비를 베푸셨을 때를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슬픔의 아들로 불려야 하리라. 왜냐하면 그 자비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겪는 슬픔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분은 장사를 즐겨하거나 예술과 직업에 푹 빠져 있는 사람처럼 자비를 즐겨하신다. 그리고 각 사람들은 그분의 즐거움을 좇아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능숙하게 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비를 즐겨하신다. 그는 자신을 자비에 의탁하셨다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내밀어 자비로 정금홀(忽)을 잡으시면서, 죄인에게 "내가 와서 이 홀을 잡으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실 때-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가장 하나님다우시고 행복해 보인다.

봉사의 근거인 자비

고아원 운동장의 의자에 앉아서 우리는 위원회의 한 형제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때에 주위에 있는 어린이들과 어울려 놓고 있던 8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이가 나아와 우리에게 다가와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스펄전씨, 두분 사이에 앉고 싶어요." "그렇게 하렴, 봄.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겠니?" "스펄전씨, 아버지가 없어서 다른 고아들과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 한 어린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어린 애들은 어머님이나, 고모님이 계셔서 한달에 한 번씩 방문해서, 사과나 오렌지를 받게 되고 약간의 용돈도 갖게 되지만, 이런 어머님도, 고모님도 없는 고아들은 선물을 주기 위해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런 고아들에게 반드시 찾아와 용돈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실은 그런 고아가 바로 저라구요, 스펄전씨." 그 고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분이 눈시울을 적시며 그에게 6페니를 주었다. 그러자 그 고아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불쌍한 그 아이는 방문의 날이 다가올 때마다 어느 누구도 찾아와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던 그 괴로움을 쏟아 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환언한다면 이 때 어린 봅이나 해리같이 고아였던 한 성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지 않은가. "지옥으로 보내져 마땅한 죄인이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그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가 구세주의 삶의 원리대로 다른 이들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스펄전씨? 그런자가 바로 저라구요."

자비의 집으로의 초대를 거절함

비둘기가 지쳤을 때 방주가 기억나서 즉시 노아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오, 지친 영혼이여, 그대는 방주를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리로 날아가지 않는가. 어떤 이스라엘인이 본의 아니게 그 동료를 살해했을 때 도피성을 알고 있는 그는 피의 보복이 두려워 그 안전지대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대를 피난처를 알고 있고 매 안식일마다 우리가 길가에 안내판을 설치해도 여전히 구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밤이 되면 헐벗은 부랑아와 거리의 방랑자들은 피난처를 찾아 돌아다닌다. 그들은 비오는 날 건물의 처마 아래 있는 참새처럼, 우리 구빈원(poorhouse) 주위에 몰려 있다. 가엾게도 그들은 숙소와 한 조각의 빵을 구걸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난한 수많은 저 영혼들은 자비의 집이 불 밝혀져 있고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이곳으로"라는 초대 문구가 적혀 있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왓츠의 친구가 구절처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련한 선택을 함으로써 초대받기 보다는 오히려 굶주려 있기로 한다." 참으로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넘치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받은 자여, 잠시 조용히 서서 우리 은총의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를 묵상해 보라. 깊고도 넓은 강이 그대 앞에 있으니, 그 강의 근원지를 추적해 보라. 은혜의 언약과, 무한한 지혜의 영원한 목적 속에 불어난 강을 바라 보라. 그 비밀의 근원지는 작음 샘물도 아니고, 졸졸 흘러내리는 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능력으로 충만하여 솟아오르며 분출하는 온천이다. 바다라는 샘조차 거기에 비할 수 없고 심지어 천사조차도 영원한 사랑의 샘을 측정할 수 없으며 그 절대 은혜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이제 냇가를 따라가면서 그 모든 수로를 표시하라. 그 강이 얼마나 깊고 깊은가와, 횡당하려 할 때 그 강은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라. 또한 더렵혀진 자들이 와서 어떻게 깨끗해지는가를 주목해 보고 그들 각자가 그 물에 몸을 씻음으로 어떻게 우유같이 희어지는지도 주목하라!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이 성스런 냇물에 실려와서 몸을 씻게 되는지 그리고 그 물을 만진 순간 그들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도 살펴보고 강둑에 누워있는 병자들의 몸에 강물이 튀겨서 떨어질 때 그들이 어떻게 회복되는가도 지켜보라! 양쪽 강 기슭에 울창한 신록들이 대지를 어떻게 덮고 있는지도 바라 보라.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과 행복이 피어난다. 강 기슭의 무수한 나무의 잎들이 시들지 않고 때마다 항상 열매가 맺히는 것도 살펴 보라. 이 모든 것들이 이 강물로부터 생명을 갖게 되고, 물로 가득찬 이 하나님의 강으로부터 마시우게 된다. 또한 그 능력의 강을 따라 수천의 돛단배의 향연, 각 배마다 색깔의 돛을 휘날리며 기쁨으로 만선되어 있는 축제를 놓치지 마라. 그 배들이 자비의 물결을 따라 절대 지복(至福)의 대양으로 얼마나 행복하게 흘러가는지를 바라 보라. 이제 우리는 자비의 그 능력있는 근원에 다다랐다. 이제 믿음의 날개를 펴고 저 번쩍이는 대양으로 날아가지 않겠는가. 어떤 해안도 이 대양에 한계를 정해 줄 수 없고, 어떤 음성도 그 깊이와 넓이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깊은 밑바닥에서,  조용한 수면에서 한 음성을 듣는다. "여기에 사랑이 있노라."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룩되어져야 할 평화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일부 떨어진 나뭇잎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다른 형제와 소원하게 지내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로서 합당한 정도 이상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교회만큼 그렇게 기독교적 사랑으로 잘 엮어진 교회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있고, 구석에 쌓여 태워져야 될 쓰레기들도 있다. 형제들이여, 주위 형제들의 어떤 잘못을 볼 때마다 그것을 지워버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형제가 조그만 실수를 범했을 때는 그에게만 가서 말하고, 온 교회에 퍼뜨려서 시기와 의심의 대상이 되도록 하지 말라. 그저 떨어진 나뭇잎은 주워서 없애 버려라. 어느 형제가 당신을 분노케 했을 때는 단지 그를 용서해라. 몇 일 지나지 않아 당신도 같은 용서를 필요로 할지 누가 아는가. 누구든지 온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온유하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자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그것을 나타내라. 모든 이가 화평케 하고자 애쓴다면 왕의 정원에서 평화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왕이 걸어 들어오실 때 모든 것이 아름답고 질서정연하게 되어 있고 온갖 꽃들도 화사하게 피어있게 되어 그 왕과 자녀들은 함께 기쁨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주께로부터 오는 안식

오! 매일의 염려 속에 노예가 돼 버린 가련한 사람이여! 만일에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의지한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긴다면, 그대는 얼마나 즐거울꼬! 살고 있는 집은 더 이상 넓혀지지 않고 수입은 그렇게 늘지도 않는다. 그 속에서 당신은 스스로 가련해지고 지쳐간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안식을 누릴 수도 있다. 비록 상황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더 낫다고 생각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재산을 늘리는 것이 그외 마음속에는 전부일 수도 있고 혹은 마음을 재산에다 다 쏟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만족하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우리를 그의 사랑의 죽음으로 씻기시고 거룩한 은혜의 물 속에 우리를 완전히 잠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염려들로부터 완전한 인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주님 외에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도 온전히 믿을만하거나 안식을 주지 못한다. 그만이 어디에서 안식과 평강을 얻게 되는 지를 아신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 분 자신이 바로 해결사이시다. 무릇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긴 자마다 평강을 모르는 자 없고, 안식을 못 누리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 영원한 안식을 우리 안에 심기 위해서는 먼저 피를 쏟는 씨앗의 죽음과 썩어짐이 있었고, 뿌리를 뻗쳐 내는 목숨건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수고하지도 않고서 이 선물을 멋쩍게 받아들고 있을 뿐이다.

둘이 하나보다 낫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격려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교우 관계의 최상은 섬김이다.전적으로 혼자 애쓰는 사람은 자기의 기질에 좌우되어 너무 높거나 혹은 너무 낮은 기분 상태에 빠져서 검열관이 되었다가 또는 의기소침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 사람보다 낫다. 둘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두 가지의 일을 완성할 뿐 아니라 자주 함께 협동함으로써 그 힘을 7배나 증가할 수도 있다. 그들의 주와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사는 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며 그리하여 마치 한 사람처럼 함께 천국을 뜨개질해 가는 그리스도인 동반자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자들이다. 연합은 곧 힘이지만, 고독은 연약함이다. 아주 오래되어 수려한 너도밤나무는 다만 홀로 바람을 이겨내고 잔디 위에 머리를 수그리지만, 숲속에 있는 나무들은 서로를 받쳐주면서 폭풍이 몰아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양들은 함께 무리지어 산다. 이런 사회성은 기독교의 존재 양식이며 특성이다. 형제를 찾아 발견하는 것은 큰 값어치가 나가는 진주를 발견한 것과 같다. 또한 진주를 얻은 것도 순금을 축적한 만큼의 가치가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중에서 그들은 행복을 느낀다. 수도원적이거나 은둔자적인 삶은 우리 주님의 아름다우심 이상은 아니다. 오히려 거룩한 교제야말로 기쁨으로 섬기고 전진하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주님이 선택한 방법이다. 더불어 사는 것, 어우러져 살므로써 지어져 가도록 교회를 허락하신 주님이시다. 서로 서로 연결되어 머리되신 주님에까지 자라도록 지체로써 존속하는 것이 바로 신자의 삶인 것이다.

위선자

언젠가 나는 벽난로 위에 놓인 돌로 만든 사과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한 아이를 기억한다. 그때 그 돌로 된 사과는 너무도 진짜 사과와 흡사했고 색깔마저도 똑같아서 아이가 군침을 흘릴 정도였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 사과를 또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을 먹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였다. 만일 그 사과가 익어서 향긋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면, 비록 조건이 적당치 않더라도 부드럽고 맛있는 사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혹 적도의 태양볕이 그 사과에 내리 쬐인다 하더라도, 혹은 헐몬(헤르몬 산)의 이슬이 그 위에 내린다 해도, 그 사과가 먹기에 적당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딱딱한 대리석으로 된 물질 자체가 거인의 이빨마저 부수뜨린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선적인 신앙인과 아주 흡사한 모습이다. 그는 어린 아이를 조롱하는 속이 딱딱한 사과와 같으며 성령의 열매를 단지 흉내만 내는 자이다. 교회 내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주님의 인정을 받은 듯이 행동하고 성전의 진짜 금전처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심판의 보좌 아래서 쓸모없게 된 돌과 같이 버림을 받을 것이며, 영원토록 질책과 불명예를 벗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겁한 겁쟁이들 속에서 용감한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겠는가. 두 명의 군인은 똑같은 연대 복장을 하고 있다. 둘 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무찌르겠다고 고함을 친다. 그들의 용맹을 시험하고 증명하는 길은 전쟁뿐이다. 내면의 불안이나 갈등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겁쟁이들이 영웅처럼 행세하기가 쉽다. 반면에 진정 용감한 사람들은 뒷전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면, 알맹이와 쭉정이가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기치 않는 때에 임하는 하나님의 자비

여행자는 언덕을 오르거나 골짜기를 내려가면서 펼쳐지는 예기치 않았던 경치와 장면을 대하면서 많은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만일 단번에 그 모든 정경들을 다 볼 수 있다면 나머지의 여행은 지루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러나는 그 신선함과 경이로움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들은 삶의 생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섭리로부터 예기치 않게 나에게 내려온 그 자비의 손길에 대해 감사한다. 그렇게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의 공급이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나에게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바 그분의 공급은 마치 동전을 주조하셔서 내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처럼 모든 경이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제8장
찬양.감사.은혜

늘 찬양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명상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에 기도가 전부라고 한다면 쉽사리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찬양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매일 찬송을 불러라. 찬송을 소리내어 부를수 없는 상화이라면, 콧노래라도 불러라. 많은 직장인들이 지각없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조그만 여유를 왜 갖지 못하겠는가. 매일 아침 눈뜰 때와 저녁의 커튼이 내려질 때 찬양을 드리자. 그리고 잠을 이룰 수 없는 고요한 밤중에도 우리의 마음의 향에 불을 붙이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주님을 찬양하자. 주님 전에 나가 회중과 함께 있을 때마다 우리의 찬양이 단지 입술의 언어만이 되지 않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게 하자.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찬양,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 영생하시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그런 찬양을 드리자.

전인격적인 찬양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본질적 자아이고 본연의 성품이며, 영혼 중의 영혼이고 생명중의 생명인 진실한 자아로 주를 찬미케 하자. 나의 하나님께 진실되고, 가장 진실된 나 자신의 생명으로 주님을 송축하는 시간을 보내도록 하자. 영혼은 우리의 가장 선한 자아이다. 머지않아 벌레의 먹이가 될 것이고, 기껏해야 흙으로 돌아갈 우리의 육체로만 주님을 찬양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창조받았다고 증명해 줄 수 있는 우리의 내적이며, 영적인 존재로 그분을 송축해야 한다. 나의 가장 고매한 영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가식적으로 성가를 부르는 음성이 아닌,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으로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별 생각없이 호산나를 외치는 그런 입술로가 아닌, 깊이 숙고하며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육체라는 좁은 영역에만 찬양으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끝이 없는 사고의 날개를 타고 영혼이 날아오를 수 있는 무한대의 영역까지 찬양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로 주님을 송축해야 한다. 그 영혼은 시간을 초월하는 우리의 영원한 자아이며,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심판대를 지나,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영원한 사랑 속에 승리감을 느끼며 영원히 거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불멸의 영혼이 어떻게 멸망할 것에 그 힘을 쏟을 수 있는가. 가장 실제적이고, 영속적인 존재로서 어떻게 사라져 보릴 그림자를 좇아가려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이 아들 예수님 안에서만 영생을 주셔서 하나님의 삶과 흡사한 삶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인데 어떻게 허무한 계획을 쌓을 수 있는가. 가치없는 물질에 몰입되지 않도록 그 거룩한 주님을 송축하자. 날개 위에 자신을 싣고, 여섯 날개 가진 그룹처럼 하나님을 찬송하자.

영으로 드리는 찬양

오르간과 성가대가 회중을 대신해서 찬송을 드릴 때, 사람의 마음이 홀로 찬양받으셔야 될 주님보다는 음악의 공연에 더 몰두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주님의 전은 그분 자신을 위해서만 거룩하게 사용되어져야 하는데, 지나치게 자주 오페라 전당으로 사용되는 것 같고 회중들은 찬양하는 모임이라기 보다는 단지 청중으로 전락해 버렸다. 복음의 향내를 풍기지 않는 모든 것이 배제되었다 하더라도 대단히 조심하지 않으면 단순한 찬양 속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쉽게 가사와 멜로디에만 매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으로 찬양하는 것만이 열납되어진다. 우리 자신을 좀 더 즐겁게 하기 위해서나, 우리의 음악수준이나 합창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모이지 말고, 영원히 영광받으실 왕 중 왕의 발등상 앞에서 우리의 찬양을 드리기 위해 모이자. 진정한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찬양이다.

찬양의 시간

환난이 당신의 곡조를 어지럽히기 전, 거룩한 찬양을 드리자. 할 수 있는 동안 대기를 찬양으로 메우자. 아직 식탁에 양식이 있는 동안, 기근이 우리를 위협한다 하더라도 찬양을 드리자.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집 주위를 웃으며 뛰노는 동안, 당신의 뺨에 홍조가 있는 동안, 아직 물건들이 남아  있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건전하고 건강한 동안, 찬양의 노래를 지존자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당신의 주인이며, 찬양받으실 구세주께서 당신의 선하고 기쁜 찬양 속에 거하시게 하자.

늘 고백해야 할 감사

극빈한 사림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후원해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 노인은 행복을 감출 수가 없어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그 감격을 이야기하였고 그때마다 그는 가장 뿌듯한 느낌을 가지곤 했다. "여보시오, 저기 하얀 집에 사는 저 높은 분이 누군지 아시오. 내가 입고 있는 이 좋은 옷을 그가 다 주었다오! 그 분이 나를 본 즉시로 난 누더기를 입지 않게 되었소. 난 저기 아래에 있는 아주 멋있고 좋은 집에 살고 있는데 저 집도 저 분이 지어 주신 것이오. 그냥 아무 대가도 주지 말고 살라고 했다오. 그는 마음껏 자기 땅에 돌아다녀도 좋다고 했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오!" 자기 은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그 노인에게는 너무도 큰 기쁨이었다. 우리 모두가 그 노인을 닮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어떤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무엇을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 스스로는 자랑할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비참한 벌레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 속에 복음을 맡길 만한 그 무엇이 있었다면 그 모든 것은  나의 혀보다 더 많은 일을 날 위해 이루신 나의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받았을 뿐이다.

영적 체험의 사계절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각 단계를 가지고 서로 비교하거나 어느 것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낫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우화적일 수 있겠지만 이것을 일년의 사계절과 비교해 보자. 봄의 아름다움과 포근함 한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다. "아, 날씨가 너무 변덕을 부리는구먼! 이 3월의 바람과 4월의 빗방울들이 저다지도 변덕을 부려 오고 가는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니 아무것도 믿을 만한 게 있어야지. 내게 더 안전한 여름의 영광을 주었으면 ..." 그러나 그들이 여름의 더위 속에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로 온통 젖게 되었을 때는 또 이렇게 불평을 한다."요컨대 우리의 주변에는 온갖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역시 봄의 신선한 충격과 신록의 생동감이 훨씬 더 사랑스러워, 마치 전진하는 꽃의 군대와도 같은 봄날의 꽃들이 더 뛰어나게 매력 있었지." 그런데 사실 봄과 여름을 비교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 둘은 다르다.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영적 가을에 있다. 아마도 가을이 가진 색다른 보화들을 소중히 여기기 보다는 어떤 이들은 그 해의 평화로운 안식을 무시할 것이며 슬프게도 지는 낙엽을 장례식 설교와 비교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여름과 가을을 대조하고 어느 하나를 자은 것보다 더 찬양하게 된다. 어느 한 영적인 단계를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나는 그를 반박하고 맞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영적인 단계에는 각각 그 나름의 의의와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탁월할 것이다. 이제 갓 중생한 어린 그리스도인의 열정을 믿은지 오래된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경험과 비교하고 어느 것을 선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다, 성도의 영적 체험들은 그 단계에 맞게 생명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젊은 신앙의 벗들이여! 그대들이 지닌 그 강렬한 열심과 정열은 계속 다듬어지고 지혜로 다스림을 받아 성숙한 모습으로 닮아져야 된다. 염려키는 그대들이 새로운 체험에 의한 신앙적 열의 만큼이나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이제 갓 흐르기 시작한 강물과도 같이. 그대들은 급류처럼 흐를 수 있을지 모르나 물 밑의 깊이나 넓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전진하여 싸우고 있는 나의 벗들이여! 당신들에게는 크나큰 내적인 갈등과 혹독한 압박 속에서도 계속 전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대들이 가지는 하나님과의 진지한 교제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납득, 자신의 무력감에 대한 깊은 인식,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그대들의 인내와 충성 들, 이 모든 것들은 그대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는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것들이다. 그대들이 선 각자의 위치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대의 그대됨에 기뻐하며 찬양하라!

최후까지의 은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가장 가치가 없는 자라도 그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가장 큰 자에게 내린 것과 동일하게 가장 미미한 사람에게도 주어지기 떄문이다. 그리스도는 큰 자를 위한 것과 같이 약한 자 한 사람을 위하여 자시의 보혈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스도는 가장 강한 성도의 보증이 되실 뿐 아니라 너무나 연약한 성도에게도 확실한 보증이 되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는 맏아들이 사랑스러운 만큼이나 조그마한 어린 아들도 귀엽기가 한량없다. 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자도 주의 품 안에서 쉴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양 무리 전부를 품은 만큼이나 어린 양 한 마리를 품으시기 때문이며 영원한 은혜가 사도들과 순교자들에게 확실했던 만큼 이름없는 그의 백성들에게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 훼방받지 않으시며 그리스도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성령은 실패하시지 않는다. 언약은 파기될 수가 없으며 맹세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이 흘리지 아니하였고 중보의 기도 소리가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고 무시된 채 하늘로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보호되며 또 보호받을 것이다. 비록 이 지구의 주축이 되는 지주가 구부러진다 할지라도 이들 중 하나도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다함없는 위로

아무리 당신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대상일지라도, 당신의 마음의 왕좌에 모실 만큼 어울리는 것은 아무것도  다. 당신에게 주어진 하나님과 그 모든 것들을 비교한다면 그것들은 견줄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설혹 당신이 사랑하는 남편의 넓은 가슴이 다정스럽고 믿음직하게 여겨진다 할지라도, 죽음이 거기에 내려앉을 때는, 당신이 영원히 기댈 만한 위로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상황이란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 생의 하늘 아래서 마치 별처럼 반짝거리며 생기를 주는 것으로는 어린 자식들의 눈망울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아이들이 당신의 또 다른 우상이 되어 있다면, 이들이 주는 광채가 희미해지고 엄마의 역할이 주는 기쁨에 곰팡이가 끼기 시작할 때면 당신은 얼마나 서글퍼지겠는가! 소멸되지 않는 기쁨과 영원한 위로를 맛보며 사는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여수룬의 하나님같은 이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 된다면, 그렇게 될수록 상처 입은 마음은 적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적당히 누리고 거기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걸지 않는다. 서로 반역하는 영혼에는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달빛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희미하다. 태양빛 아래에서는 모두가 무색해져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것이 유일하게 영원히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다함이 없고 변치 않는 위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때맞추어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가 오기 전엔 영원한 위로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기원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이 주는 위로로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사랑을, 그 영원한 보살핌을 대신할 수가 없다.

섭리라는 배

이 세상에서 가장 노련한 선장이 이끄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선장일지라도 항해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도저히 가늠할 수 벗으며 절대적으로 안전한 여행이라고 약속할 수 없다. 거기엔 언제나 그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서양의 파도, 큰 회오리 바람 그리고 태풍이 그 훌륭한 배를 조만간 휩쓸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환호 속에서 항구를 떠나왔던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섭리라는 배에 들어갔을 때 키를 잡은 이는,  온갖 파도를 노련하게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가 항구를 떠날 때 항구에서 일어난 일 뿐 아니라 피난처에서 일어날 일까지도 미리 아신다. 주님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모든 물결의 높이와 넓이와 그 힘을 느끼시며 알 수 있으시다. 또한 그는 바람을 각 종류대로 다 알고 계신다. 비록 그 바람이 제어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닥친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각 바람이 몰고 오는 것과 통과하는 속도를 가늠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 존재인! 그러한 섭리의 멋진 배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근 것을 미리 준비하시고 미리 정하신 주 예수님과 같은 선장을 모시고 항해하는 우리의 삶을 얼마나 평안하고 멋진 것인가!

구름기둥과 불기둥

내 생각에는 구름기둥이란  단지 장막 중심부에서부터 일어나는 연기기둥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연기기둥이면서 또한 그것은 큰 천막이나 덮개처럼 이스라엘의 전 장막을 덮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넓고 험난한 광야에서 그들은 태양의 타는 열 속에서도 질식하거나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 구름기둥은 시원한 그들을 만들어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광야를 지날 수 있었다. 밤이면 그들의 야영지는 마치 어둠 속에 갇힌 거대한 성읍같이 되었다. 그러나 불기둥이 런던이나 파리에서 사람이 만든 기술로 빛나는 그 어떤 빛보다도 더 훌륭한 빛을 그들에게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그 엄청난 불꽃기둥이 모든 집과 거주지를 환하게 비추었기 때문에 사실상 거기에는 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항상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품 속에서 보호되었다. 만을 그들이 얼마 동안 진을 떠나 태양별 아래서 길을 잃을지라도 순식간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들이 자기들의 은신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혹시 밤에 잠깐 동안이라도 방황하게 될지라도 그 커다란 불꽃 램프가 다시금 그들을 안식처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함께 하신다. 괴로움과 슬픔의 밤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로의 불길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여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를 둘러 싸 안는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위로자 되시는 성령 안에서 기뻐 뛰노는 것이다. 낮이면 약속된 가나안 땅을 향해 이 타는 광야를 지나갈 때면, 세상이 찌르는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자 하나님은 끊임없이 포근한 사랑의 실체이신 자신을 개입시키신다. 그래서 천국으로 전진해 가는 동안 우리 머리 위에 우리를 드리우고 있는 천국의 방패를 바라다 보게 되는 것이다.

전심으로 드리는 찬양

공중에 나는 새들이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는지, 특히 새들이 지저귈 때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게 그 자그마한 몸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저귈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새들은 그 지저귐 속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놓고 마치 그 지저귐으로 자신을 전부 소비해 버릴 것 같이 지저귀는 것을 볼 수 있다. 날개를 흔들고, 목청을 떨고, 새의 모든 부분이 그 지저귐을 돕기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살펴보면 놀랄만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방법일 것이다. 두세 데나리온에 팔리는 그 새들이 하나님을 그 정도로 찬양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진심으로 그분 앞에서 찬양해야만 하는가.

찬양의 옷

"찬양의 옷"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옷일까. 금이 장식되었거나 고급모직이거나 다양한 색깔의 수가 놓였거나 아니면 먼 나라에서 들여온 화사단 비단일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이 찬양의 옷에 비교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성가로 자신을 두르고, 항상 찬양대원으로 지내며 동일한 목소리가 아닌, 한결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찬양을 우리의 생명이신 절대의 지존자 앞에 밤낮으로 끊임없이 드린다면 그는 가장 행복한 자일 것이다. 오, 애통하는 자여! 이 찬양이 당신의 분깃이 되게 하라. 지금 찬양의 시간을 가져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양의 옷으로 당신을 덮을 것이다. 죄사함과 병 치료와 돌보아주심과 교회의 부흥 및 구원받은 죄인들을 생각할 때 너무 감사한 나머지 당신의 삶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고, 슬픔의 옷이 기쁨의 찬란한 옷으로 바뀔 것이다. 비록 그러한 변화가 놀라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슬픔의 영을 대신한 찬양의 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찬양이 내적이고 심오한 것은 물론 외적이고 가시적인 옷이 되도록 하라.

우리의 가진 전체로 찬양하라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회상해 보라. 기억의 실로 그분의 은혜의 보석을 엮어 찬양의 목에 매달아라. 가을철에 산림의 잎들을 헤아릴 수 있고, 타작 마당의 작은 먼지들을 헤아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분의 모든 인내하심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는가 그런즉, 셀 수 없는 그의 자비하심을 인하여 기꺼이 그 분을 찬양하자. 그리고 양심으로 하여금 이제는 주님의 용서하심을 측량케 하고 그분의 은혜를 찬미하게 하라. 갈보리의 진홍색 보혈방울을 세어보고, "내 죄가 씻음을 받았네"라고 외치라. 평강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셨고 공의를 바다의 파도처럼 넘치게 하셨던 구세주를 찬양하자. 기쁜 날을 주셨으니 시편기자처럼 기쁨의 감정으로 거룩한 찬양을 드리자. 인애와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우셨고 우리의 입술에 선한 것을 채워주신 그분을 송축하자, 그러면 우리의 젊음은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리라. 오늘 여러분의 내면의 모든 것이 평화로운가. 시편23편과 같은 목가(牧歌)시를 불러라. 고요한 당신의 영혼으로 하여금 수금과 비파로 주님께 찬양의 소리를 내게 하라. 당신의 나날들이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는가. 그러면 주님께 악기로 찬양을 드려라 오늘 당신은 즐거운가. 기쁨의 환희를 느끼는가. 그러면 소고와 춤으로 주님을 찬양하라. 혹 내면에 갈등이 잇고, 그 갈등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가. 그럴 때는 비파로 찬양하라.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찬양 중에 당신과 함께 그 싸움에 참여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싸움을 끝내고, 전리품을 나눌 때 커다란 제금으로 그분을 찬양하라. 어떤 감정 상태에 있든지 관계없이 창조주의 이름을 송축하도록 하라.

주님의 위로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러 간다. 땀을 흘려 열심히 노력한 결과 마침내 그는 거액의 돈을 손에 쥐게 되었고 그것은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러나 돈이 주는 위안은 "영원히 지속되는 위로"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진 돈을 써 버릴 것이고 또는 몽땅 잃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에다 투자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니면 죽음이 그를 찾아와 그 모든 재산을 다 내버려 둔 채 그를 끌고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돈이랑 기껏해야 일시적인 위로 이상은 되어 주지 않는다. 혹은,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지위를 얻게 되고 그는 신분이 저명한 인사로 인정된다. 그가 기울인 모든 노력에 대해 이러한 명성은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가져다주는 위로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두통이나 마음의 번민을 느낄 경우, 자신의 경력과 명성이 그를 낫게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영혼이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될 때, 그는 우울증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도 전에 수많은 전문서적들을 뒤집어 엎어버릴 것이다. 그의 위로란 너무 변덕스럽고 덧없으며 그것은 단지 간헐적으로 그를 기분좋게 할 뿐이다. 모두가 다 "지속적인, 영원한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위로는, 그들이 그 위로로 말미암아 인내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을 능가할 자가 없다고 담대히 확신하는 바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시험들, 즉 고난과 타격과 감정의 격발, 시간의 상실 등등의 시련들을 견딜 수 있다. 아니 그들은 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통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끝없는 위로가 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천국 리허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창조된 궁극적인 목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천국에 가까이 가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천국에서 내가 하게 될 일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아마 난 곧 하프를 연주하게 되리라. 조심스럽게  하프를 연주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아버지의 보좌 앞에 가서 찬미할 노래들을 미리 연습하도록 해주기를 원한다. 천국에서 읊을 싯귀는 이 땅에서 어떤 훌륭한 시인들의 합작품 보다도 훨씬 감미롭고 풍부한 내용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노래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찬미의 내용과 동일할 것이다. "그들은 천국에서 어린 양을 찬미하고, 우리는 그 아래에서 함께 입을 모아 노래하네." 천사들이 찬양하는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을 감사하는 것이며, 이 것은 역시 우리 노래의 주제이기도 하다. 가치없이 미미한 죄인된 자들을 위해 부어진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임마누엘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은 천사들과 우리의 찬미 내용이다. 이제 나이가 많이 드신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본향에 가까이 계신 것으로 인해 진심어린 축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더욱더 그 날이 올 수 있도록 찬양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의 땅, 그 약속의 나라가 더욱 밝게 빛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걸음을 늦추지 마시고 더 재촉하십시오. 진주문 가까이에 다 왔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비록 육신은 점점 쇠약해 가지만 찬송을 힘차게 부르십시다. 그래서 주님과 온전한 하모니를 이룰 때까지 더 감미롭고 아름다운 찬송을 부릅시다.

제9장
후배 사역자를 위한 조언

귀한 예수님의 이름

만일 예수 그리스도외의 다른 주재로 수년 동안 많은 회중을 결속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용납하지 않겠다. 얼마 동안 그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인 발명으로나 아름다운 시로써 세인의 귀를 매혹시킬 수 있고, 심지어 탁월한 웅변술로 가벼운 귀를 지닌 다수의 청중들을 감동 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조만간 등을 돌리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이제 모든 것을 알고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음악을 연주하라. 비록 뛰어난 재주가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성품과 행동의 하모니를 들려주라. 그리하면 당신의 청중들은 오직 그 연주에만 만족할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할지라도 그 신선함과 충만함은 결코 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살아있는 설교의 전부는 그리스도

나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과 열정적인 클라이맥스 그리고 열변을 토하는 결론, 현란한 문체와 배우같은 불필요한 제스처로 설교하는 목회자는 결코 사람의 갈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진정한 설교자가 아니라, 출혈하는 심장을 결코 만족 시킬 수 없는 객담같은 헛된 야이기나 퍼뜨리는 가짜에 불과하다. 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은 슬픈 마음을 가진 이를 향하여 어떤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만, 어떤 음악도 그 슬픔으로 돌릴 수 없음을 기억하라. 단지 예수님으로 가득찬 설교를 하라. 그리스도가 높이 들려지고 회중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를 볼 수 있게 하라. 향기 좋은 향수처럼 그분의 이름을 쏟아버려라. 그것은 상처받은 마음에 연고의 역할을 할 것이고, 그때의 행해진 설교는 당신에 영혼에 겨같은 설교가 아닌 밀같은 설교로서 인식되리라.

하나님께 위임받은 목회자의 담대함

학식있는 청중 앞에서 두려워 떠는 목회지가 있다. 과연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그러한 자세를 갖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어느 설교자는 예배당 뒤편에 하얀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앉아있는 사람이 노회나 총회의 목사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싹 긴장하여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한다. 과연 그러한 두려움을 갖는 것이 설교자에게 합당한가, 과연 그러한 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당신의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데 주위에 당신보다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지성인들이 있다면 아무말도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실진대 당신이 청중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겁장이처럼 행동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주님의 성령이 당신에게 임하고 있다고 확신할 때 당신은 담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우리의 소명감을 확실히 깨닫고 담대히 그 일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속죄소와 친밀한 사역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역을 담당했던 자들을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속죄소, 즉 하나님이 계시는 자비의 보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학과정을 통하여 학생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게 되는 영적이며 깨끗한 성결에 비교해 볼 때 조잡하고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본격적인 사역을 준비하고있는 한 사역자에 있어서 기도는 그릇을 빚어내는 토기장이의 도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가 서재에서 갈고 닦는 그 모든 연구는 기도의 골방에 비교해 볼 때 무가치한 것일 수 도 있다. 우리는 개인기도 속에 성장하고 영력을 갖게되며, 승리하게 된다. 사역하는 데에  영역을 갖게 되고, 긍휼하게 여기는 데에 민감하게 되며 다른 이를 인도하는 데에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공부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기도는 우리를 성인으로 만든다. 우리의 거룩한 사무실의 성스런 가구들은 단지 간구의 창고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영적 전쟁 속으로 들어간 후에 기도만이 우리의 무기를 빛나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회고

사랑하는 자여, 그리스도에 관해 들은 사실과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여러분 의 마음을, 그분께서 과거에 행하신 인애를 풍성히 간직할 수 있는 금잔으로 만들고, 또 우리 선조들이 수년동안 공급받았던 하늘의 양식인 만나 광주리로 만들어라. 여러분의 기억을 여러분이 듣고, 느끼고, 알고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으로 채우고, 여러분의 사랑이 그분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도록 하라. 그분을 사랑하라! 여러분 마음의 석고 상자를 쏟아내고 사랑의 값비싼 향유가 마음의 향유병으로부터 흘러나와 주님의 발을 흠뻑 적시게 하라. 이같은 향유가 없다면 슬픔의 눈물로 그이 발을 씻고, 당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분의 발을 닦아내라.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라. 축복받은 하나님의 아들, 당신의 영원한 사랑의 친구이신 그 분을 사랑하라.

두려움 없는 목회자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이 어리석은 자로 불리거나, 도적이라 불리거나, 심지어 악마라고 불리워질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목회사역에 무능한 자 되리라. 또한 돌팔매질 당할 것을 두려워 한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하리라. 진정한 목회자는 종종 그의 설교 강단인 오명을 일으키기 쉬운 장소라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던져진 모독과 비난을 통해서 그러한 대우들은 세상이 항상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들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강단에 서 있는 일에 만족하게 된다. 은총 가운데 맺어진 언약을 의지하고 그리스도께서 강권해서 우리에게 맺게 했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쁨, 위로와 평안이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강단에 서서 언약을 지켜나갈 것이다.

선교사의 명예

내가 하나님의 은사로 선교사가 된다면 백만장자로 죽는 것을 거절하겠다. 내가 선교사가 되기에 적합하다면 왕으로 세월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왕과 가문, 계급과훈장, 왕관과삼중관, 모두를 함께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이 세운 기초 위가 아닌 외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명예로운 건축과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그 위엄에 비교되지 않는다. 나는 선교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해 타국에서 사역하는 명예로운 남자중의 남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상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런 왕관을 쓰지는 않았지만 인간중의 진실한 왕임에 틀림없다. 설교를 마친 후 그것에 만족하게 되기란 오랜 시간이 지나서이다. 나는 여태까지 내 자신이 만족스런 설교를 했는지를 거의 기억할 수 없다. 여러분은 모른다. 왜냐하면 매 주일마다 집으로 돌아갈 때의 거의 나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설교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으며 여러분의 마음과 양심을 건드려 줄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는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는 불인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태우려고 하면 검은 숯덩어리로 변하고 만 석탄이기 때문이다. 만일 설교단에 서서 내가 설교를 연구할 바로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를 말할 수 있다면 실로 그때 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여러분의 영혼을 감동시키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실 것이고 우리 역시 스스로 약점을 최대한 사용하여 더 큰 힘을 내도록 분발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느린 동작과 민첩함의 차이를 알고 있다. 만일 이 복도를 따라 포탄이 천천히 굴러 온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포탄이 느리게 굴러올지라도 그것의 크고 거대함 때문에 아마 당신은 무서워서 의자에 꼼짝도 못한 채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소총 한 자루와 아주 작은 탄알 하나를 주었다면, 추측컨대 그 탄알이 예배당으로 날아갔을 때 여러분 중 일부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힘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위한 일의 지식을 마구 채워넣는 자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능력은 부족하지만 힘과 불로 채워지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열정으로 전진하여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위대한 자이다. 이 사람은 가장 진지하고 진실된 영적인 삶을 사는 자이며 가장 높은 경지에서 참된 생명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참된 생명력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새 생명으로서의 자신의 본성에 따라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산다.

제10장
죽음

세상과의 작별

인생의 밧줄이 느슨해져서 이 땅을 떠나게 될 때가 가까워지면, 그것이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죄악이 넘실거리고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떠나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고난당하고 슬픔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구출되어 영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과, 또 거기에는 더 이상 슬픔과 눈물이 없다는 사실로 기뻐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연약과 고통과 아픔이 끊이진 않았으나 하나님의 권능으로 들림받게 될 것으로 인해 오히려 즐거워한다. 죽음이 연이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었으나 이제 사망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작별을 고하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그런 자비와 은총이 우리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하고 적막한 세상은 그래도 기쁨을 건질 수 있었고 사막같은 곳이지만 장미와 같이 일시적이고 사라져 가는 아름다움을 주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기는 하되 저주하며 작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차가운 전율과 슬픈 추억만을 남긴 채로도 떠나가지는 않게 되리라. 대신 남아있는 전경들과 하나님께서 더 오래 체류시키는 그의 사람들과 따뜻한 악수를 나누며 헤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베풀었던 선행과 자비가 평생토록 함께 한 것 같이, 이제는 우리를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도록 도와 준 그들을 축복하면서 영광스러운 얼굴로 이 세상과 적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준 훈련장이 아니었던가. 주어진 생명과 환경 및 선악 간의 사람들과 사건들 등등이 모두 나를 위해, 나의 수련과 성장을 위해 존재했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제 영원히 이 곳을 떠나 아버지의 집에 거하게 되는 감격에 찬 착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고귀한 죽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정말 좋은 체험이요, 자세이다. 상한 심령과 아픈 가슴으로 주님 앞에 눕는 것은 더 귀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 발 앞에 죽은 것처럼 엎드리는 것은 가장 값진 일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속에서 누가 그렇게 되었을지를 알게된다. 모세는 희미한 빛과 함께 여호와의 존전에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들을 필요가 있었으나 사도 요한은 모세보다는 훨씬 더 앞선 수준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더욱 낮아졌고 무한하신 주권자 앞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죽음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또한 그로 인해 그 안에서 생명을 얻는 일은 더욱더 경이로운 일이다. 만일 내가 절박한 죽음을 요청하는 그 순간에 주님을 뵈었다면, 나는 기꺼이 죽음으로써 순교를 당하려고 할 것이며 그 축복은 죽는 고통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 우리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체와 타락한 본성을 죽이라고 요청하실 때는, 우리는 지나친 요구사항이라면서 물러나기 십상이다. 만일 주님의 이러한 요구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우리는 타는 갈증에 빠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두 날 가진 검이여! 나를 둘러싼 모든 죄악들을 깨뜨려 버려다오! 바라건대, 주위 얼굴의 광채가 내 속에 있는 죄의 뿌리들을 파헤쳐 태워버리기를! 주는 흰말을 타고 달려 내 영혼의 전부를 정복하시고 사탄과 그의  노예였던 나의 모든 것들을 던지시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당신의 발 앞에 복종케 하소서! 주의 크신 은혜로 승리하신 말 앞에서 나는 죽은 자되어 엎드러질 것이다. 이것은 나를 살리는 죽음이요 고귀한 죽음이다.

죽음, 피할 수 없는 삶의 종착지

"모든 육체는 풀이라." 인간의 전 역사는 풀밭에서 한눈에 보여진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람은 푸른 연한 풀처럼 태어나서는 어린 생명을 위협하는 유년의 찬서리를 맞게 된다. 그는 점 점 자라 성숙해진다. 그리고는 풀이 꽃으로 장식되고 초목이 여러 가지 색상으로 무늬지듯이 사람은 아름다움의 옷을 걸쳐 입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 후엔 그의 힘은 사라져 가고 그 아름다움도 주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새로운 세대가 그 뒤를 잇게 되고 마침내 그는 사라진다. 우리네 삶과 같이 풀도 무성하다가 곧 말라버린다. 사람의 아들들은 적절한 때의 자라나서는 푸른 잡초 마냥 곧 시들고 만다. 이같은 죽음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야만 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현주소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죽음의 실재를 망각하여 살아가지 않는가! 공동묘지는 우리가 사는 사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지만 영구차가 규칙성있게 오고가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다음 죽을 차례가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검은 옷을 입고 공동묘지를 찾을 때가 있다. 언젠가 그 검은 수의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입혀 줄 날이 올 것이며 당신은 자신의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오! 삶의 덧없음이여. 그대는 침대에서 내려와 그대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여 그를 만나야 한다. "당신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는 기도가 그대에게서 끊어져서는 안되며 호흡처럼 숨쉬며 살아가야 될 것이다. 죽음만큼 오늘의 나를 정신차리게 하는 것이 없으련만, 우린 모두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려하고 그 망각 속에서 영혼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죽음과 함께 모든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사실인 만큼이나 심판은 사실이며 현실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죽음을 기억나게 하는 것

우리는 우리 주변의 환경 즉, 자연을 통해 우리가 죽어야 될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년이 어떻게 오고 가는가를 생각해 새들이 지저귀고 아름다운 꽃이 핏기 시작함으로써 봄이 왔다가 이내 여름이 오고, 그리고 곧 가을이 다가온다. 얼마 안 있어 그 해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런 과정은 하루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요한 아침이 밝아 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화창한 대낮이 된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으면 저녁 서리가 내리고 하루해는 지고 만다. 미풍에 흩날리는 감미로운 향취를 발하는 모든 꽃도 죽음의 발걸음을 듣고 떨게 된다. 어쩌면 꽃들은 시들기 위해 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 아래 영원히 사는 존재가 있을까. 눈을 들어 자연을 바라 보라. 어느 때 생성되었다가 변화되고 결국은 사멸되고 마는 자연의 섭리를 주목하라. 요컨대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돼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일종의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분명히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시하여 준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 역시 우리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가를 예시하여 준다. 심장이 멈춰지고 우리의 피의 흐름이 끊길 인생의 마지막 날을 예시나 하는 듯 우리의 머리칼은 흰색으로 바뀐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장차 사라질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 신체의 일부분인 치아가 빠지는 것이 아닌가. 고통과 통증, 시력의 감쇠, 청력 감퇴, 떨리는 무릎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모든 신체가 냉정한 시간의 흐름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명확한 경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기득권을 취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의 가정에 어려움을 허락하시고 육체에 질병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나라, 천국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의 주변에 펼쳐져 있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목해 보아라. 그리하여 항상 준비하기 바란다.

본향을 기다리며

이 땅 위에서 여러 해 동안을 자기의 하나님만 섬기며 헌신하여 나이가 들고 자연의 원리에 따라 곧 본향으로 잘 준비를 하는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큼 더 아름다운 광경이 없다고 생각된  다. 그 사람은 선물로 받은 성령을 즐거워 하지만 그에게 약속되고 보증된 성령의 충만한 열매를 늘 갈망하는 자이다. 그는 요단 강 끝 울퉁불퉁한 바위에 앉아 천국에서 들려오는 하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속히 육신이라는 물 주전자가 물통에서 깨어지기를 기다린다. 또한 육의 바퀴가 다 닳아지도록 마침내 그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영이 돌아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귀가하는 발자국을 기다리고 아이들은 어두운 밤에 엄마의 따뜻한 굿 나잇 키스를 기다린다. 이것이 우리의 기다림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와 같이 영원한 나라와 또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는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그분을 기다리며 만나 보려는 희망을 간직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그리움으로 말미암아 환난 속에서도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으며 우리의 눈빛은 사랑과 그리움에 더욱 반짝이게 된다. 본향을 향한 기다림과 영원히 식지 않는 갈망과 소망을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무엇이 꺾을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