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기쁨

차례
1.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2. 아버지여 내게 주소서
3.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4. 이에 스스로 돌이켜
5.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6. 아버지여 아버지여
7.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8.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9. 저희가 즐거워 하더라
10. 저가...즐겨 아니 하거늘

제1장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뛰어난 교사이셨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그분을 대면하는 모든 자들은 진리를 전달하심에 있어서의 그분의 숙달된 기술을 증거해야만 할 것이다. 인간 역사를 통틀어 봐도 그분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고, 그분만큼 효과적인 가르침을 편 교사는 없었다. 예수께서는 적재 적소에서 예리한 비유를 들어 사용하셨지만, 그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능력에 있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그 비유의 말씀들이 단순해 보이나 실은 훌륭하고 놀라우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도 재능이 풍부하고 지각있는 성경 학자의 지적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가르침과 교훈을 주고 있다.
 
 비유가 전통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배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비유'란 "천사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라고 정의되어 왔다. 이것은 훌륭한 정의이긴 하지만,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의 독특성을 설명해 주는 정의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교사들(예를 들어 그 당시의 랍비들)도 천상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를 통해 그러한 것 이상의 일, 즉 보다 구체적이고 보다 의미심장한 일을 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비유가 천상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라는 것은 전혀 틀림이 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다른 세상' 즉 영적 실제의 세상인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한 의도로 작정되기도 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비유 중에서 탕자의 비유,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의 표현을 빌자면 '고독의 아들'(forlorn son)의 비유만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도 없다. 또한 그 비유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것도 없다. 제멋대로였던 한 아들과 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한두 번쯤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채용된 이 유명하고도 친숙한 비유를 말함에 있어서 한 가지 위험한 점은 우리 마음이 이 이야기로부터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즉, 이 이야기의 세세한 국면들은 이미 오래 전에 다 알려졌으므로 더 이상은 여기에서 배울 점이 없다고 쉽사리 단정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곧 이 비유를 처음 착상해 내신 분의 거룩한 인격을 망각하는 인간의 무능함도 망각하는 처사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새로이 들으려는 열심을 갖고 겸손히 그분 앞에 선다면, 전에 이 오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진리를 잡게 될 것이다. 또한 영적 현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될 것이며 구원 계획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며 그분의 말씀은 곧 그분의 생명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이 책을 읽을 때는 필자가 당신에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음성과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읽으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 3:15) 하는 것은 성경과 또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 비유는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한 아들이 아니라 '두 아들'이라는 점이다. 탕자 외에 그 형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본장의 서두(눅 15:1, 2) 부분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거기에 보면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두 계층'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편은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또 한 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 2).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두 아들 다 그리고 두 범주의 사람 모두 다 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즉각 지적되어야 한다. 그들은 한 가족, 한 백성 내에 속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두 가지 비유, 즉 아흔아홉 마리의 양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도 백 마리의 양이 한 무리의 양떼를 구성하고, 열 드라크마가 모여 하나의 보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두 범주의 사람들의 연관성이라 하겠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집의 양떼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언약의 축복과 유익을 함께 물려받을 자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께 대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심판과 또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의 초두에서 뚜렷이 말씀하신 것, 즉 탕자는 마침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로 영접되지만 지각없고 율법주의적이고 자기 의에 빠진 큰 아들은 정죄받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연관성의 틀 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세리와 죄인들은 모두 동일한 민족적 배경, 동일한 영적 특권,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언약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첫 번째로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합 관계 내로 무서운 심판의 칼을 들이미신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5, 마 23:13, 마 23:33). 이 비유의 첫 마디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말씀의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경고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한 가족에 속한 이 두 부류의 구성원들 사이에 날카로운 분계선이 그어짐을 볼 수 있다. 그 한 편은 탕자이고 가망도 가치도 없어 보이고 형제라 칭함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모습은 그의 위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게 만든다. 그에 관해서 좋게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탕자일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아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네 복음서가 거듭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시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바로 그러한 자를 위해서였다. 그 일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 13).
 
 그리고 이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삭개오의 경우를 들어보자.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로마 정부에 고용된 세리 계급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의 민족에게는 변절자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 10)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자 없는 자, 지도자 없는 자, 왕 없는 자, 구주 없는 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그리고 그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날의 우리 모두를 위해 오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간의 차이점만이 대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양떼를 먹이지 않고 오히려 흩어버리는 '악한 목자'와, 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으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메시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차이점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렀으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이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1-6).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고 말씀하셨다.
 
 소위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양떼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율법주의라는 짐을 지우고 여러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소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인 것으로 입증되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선언하고 말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 이하의 이 아름다운 말씀은 바로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주장에 반대하여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 여기 이 첫 번째 예에서 말씀하고자 하셨던 것은 일반적인 죄와 염려와 무거운 죄의식이 아니라, 인간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율법의 무거운 짐과 비참함과 죽음밖에 가져다 줄 수 없는 구속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심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순종과 죄를 찬양하시지도 않고 또한 의롭고 경건한 삶에 이르려는 시도를 중상하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영광스럽게도 아무 조건없이 거저 주어지는 구원의 특성을 오해의 여지가 없는 말로써 역설하고 강조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지만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는 이 서두에는 보다 중요한 내용이 아직 더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는 말에 즉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비유의 내용이 전개되어감에 따라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라는 모습을 통해 결코 사람이 아니신 한 분(One)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점점 뚜렷해진다.
 
 이 이야기의 가장 중심적인 전제는 이 말씀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사역 뒤에 누군가가 있어 사건의 진로를 이동시키고 방향을 지도하면서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탕한 젊은 아들의 아버지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군가란 바로 하나님이시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비유는 하나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인간을 위해 사랑하고 염려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비유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다른 두 비유인 잃은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 비유 둘 다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다니시고 또 발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피곤함을 모르며 능동적이고 또한 승리하는 기쁨이 있는 그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분의 나라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관하여 지극히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 죄인, 파멸자, 특별히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진 자를 본다. 또한 길가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다가 그 아들을 긍휼로써 맞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도 본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복음이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고,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이며, 거스린 자와 거스림을 당한 분이 화목케 되는 것이며, 이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이 주도자가 되시어 자애와 연민의 팔을 내밀어 너그럽게 죄인을 당신에게로 불러들이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비유의 한계 내에서 그리 많이 언급 되어지지 않은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비유 속에 그리스도의 존재는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사실의 중요성을 잘못 판단하면 복음의 개념에 혼동이 올 수도 있다. 즉, 구원과 기쁨과 화목과 평강의 좋은 소식은 그분없이도 알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혼동에 빠진 사람들은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가 길을 잃은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 한 분만의 은혜로우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는 호소력이 있지만 지극히 잘못되어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런 사고 방식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영혼의 무한한 가치이다. 이런 생각은 죄의 심각성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은 결코 은혜롭기만 한 분이 아니시다. 선하심만이 그분의 유일한 속성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도 하다. 그분의 공의에 관한 진리는 매우 엄위로운 것이어서 결코 지워 없어지거나 부인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의에 따라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범죄 사실을 그냥 없애시지 않으실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고, 따라서 그러한 것은 당연히 치리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이 줄어든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분의 선함이란 죄를 간과해 주는 능력, 본질상 그분 고유의 속성에 배치되고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움과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 징계되지 않은 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속성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것은 공의가 실현되지 않은 채 죄인을 받아들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신다거나 그들의 죄값이 치러지지 않은 채, 다시 말해 범죄한 사실이 그대로 남아 있게 한 채로 받아들이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가리워지고 죄책이 제거되며 죄인이 의롭다 선언될 수 있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하나님 고유의 속성에 충실하신 분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복음의 경이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전혀 참 복음이 아님을 늘 선포해야 한다. 그분이 없이는, 그분의 십자가 없이는, 죽음에서 부활하실 때 뒤에 남겨 놓으신 그분의 빈 무덤이 없이는 구원이나 화목에 대해 결코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어떤 역할을 하시든지, 어떻게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으신지를 아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에 관하여 우리 시대의 위대한 복음주의적 신약 학자 리더보스(Herman N. Riderbos)의 주목할 만한 글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선지자이실 뿐만 아니라 왕국의 왕이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비할 데 없는 방법으로 죄의 사면을 선포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구원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감당하시고 획득하시고 당신의 이웃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는 분이 되기도 하셨다.
 
 예수께서 순전한 신적 은혜의 행위로서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과 자기 계시(self-revelation) 내에서 자신의 메시야적 권위와 사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간에 본질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 것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수께서 죄사함과 구속에 대해 전파하신 것은 모든 능력과 권위를 부여받은 인자로서의 거룩한 사명에 의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부여받은 모든 사명과 자신을 '여호와의 종'이라 기록한 말씀을 실행해야 할 분으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죄사함을 포함하여 구원은 그분의 인격에, 그분의 사명이 이행되는 것에,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귀속되어 있다."
 
 이 말은 사실을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탕자의 비유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복음 전체가 이 비유에서 말해진 것에 근거하여 정의된다고 단정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우리에게 복음의 한 국면을 나타내 보여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국면이란 먼저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관계가 있고,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분의 인격과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이 비유에 등장하고 계시지 않지만, 즉 비유의 내용에는 그분께서 당하신 수난이나 죽음, 부활에 관한 암시가 전혀 없지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고 그분의 입술로부터 우리는 성부의 불쌍히 여기심과 선하심과 사랑을 배운다.
 
 이 비유가 전개됨에 발판이 되고 있는 구속의 전메시지는, 가장 깊고 완전한 의미에서, 그분 고유의 인격과 거룩한 권위에 귀속된 메시지이다. 그분은 이스라엘 집과 온 세상의 잃어버린 양에게 오신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그분이야말로 이 비유가 베풀어지는 이유가 되시는 분이며, 이 비유의 내용과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되시는 분이며, 구원과 생명과 기쁨의 유일한 근거이자 소망이 되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시다. 그분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백성들의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믿는 자를 위한 이 오래 참으심과 불쌍히 여기심과 심판의 메시지가 지체 또는 영원히 취소되기 전에 우리는 얼마나 겸손해져야 하고 또 감사해야 하겠는가? 탕자의 비유는 가장 높고 깊고 거룩하고 위대한 의미에 있어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했다시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롬 8:1)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속의 선포를 그 뼈대로 삼고 있는 이 비유의 진정한 위치와 중요성을 파악하게 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는 성부의 긍휼이 효력을 발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며, 우리 죄인들은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완성된 사역이라는 토대 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지켜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3-7).

제2장
아버지여 내게 주소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탕자 비유의 서론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야기 자체로 좀더 깊이 들어가 한 젊은이의 영적 편력에 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세리와 죄인을 대표하는 사람, 즉 '의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떼 중에 수없이 많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인 죄인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그렇게 본다면 이는 이방인인 우리에게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허물과 궁핍 가운데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며 그분의 긍휼하심으로부터 떨어져 파멸과 비참함과 절망을 겪고 있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잃어버린 사람의 그 초상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그 어디에나 이런 사람들을 향한 자애로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음 중에 붙잡혀 온 여인 이야기에서도 그녀를 고소하던 자들이 자기 양심에 찔려 다 흩어지고 나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본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수치심과 복받쳐 오르는 회한에 겨워하며 그녀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 11).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사람, '죄인'이었던 한 여인에게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
 
 주님께서는 죄에 물든 자, 세상의 곤고한 자, 눌리고 상한 자, 뉘우치는 자를 대하실 때에 그들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결코 가혹함이나 정죄함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분의 태도에는 용납과 자애와 긍휼과 용서가 있었으며, 또한 감사하게도 새롭게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는 기쁨과 소망과 능력이 있었다.
 
 보편적인 죄인을 의미한다는 견지에서 탕자는 바로 우리 자신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암시했었다. 분명 그렇다. 그 젊은이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여느 사람과 다르다거나 특별히 중요한 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비범한 젊은이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서두에는 그가 다루기 어려운 청년이었다거나 불량한 청년이었다는 지적이 전혀 없다. 그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말들을 많지 않지만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리라고 추측할 만한 이유는 많다. 또한 우리가 그의 아버지에 관해 알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그의 가정 환경도 유복하고 건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에 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신 것은 그의 가정과 가족 환경을 충분히 묘사하지 않으려고 그러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다 선명히 지적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 젊은이는 얼마나 좋은 아버지를 가졌는가! 그에게 결핍된 미덕이 한 가지라도 있었는가? 그는 신실했고 믿음이 있었으며 인내심과 지식과 동정심도 있었다. 그는 자녀들의 필요를 부족한 없이 채워주는 아버지였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 아들의 인생 결로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었든지 간에, 비난은 전적으로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과 구속력 있는 영향력을 등을 돌리고 떠난 그 아들이 받아야지 그 아버지가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그 아버지가 지혜와 사랑과 연민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거듭거듭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그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한 부분인가? 그분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 관한 이 원형적인 묘사의 말씀에는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출 34:6, 7)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가 제일 처음 조명해 본 진리는 이러한 국면의 진리가 아니다. 여기서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다른 측면에 있다. 즉, 자신의 아들을 통해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한 대책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오래 참으심과 선하심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의 그 후의 행동이 결코 어두운 빛깔로만 채색되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젊은이의 가정 환경은 목가적으로 보인다. 그런 아름다운 환경에서 그런 비참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다. 그런데도 그 가정에는 '탕자'가 있었다고 그 비유는 말한다. 그 젊은이는 탕자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 그의 모든 특권과 기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죄는 결코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죄는 사람(persons)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가장 깊고 고원한 의미에서 죄는 그분(the Person)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죄는 우리가 국외자적인 입장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자가 표본을 분석하듯 그 다양한 국면들을 하나하나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분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인 양, 나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부터 공격해 들어오는 것인 양 죄에 대해 추상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가 나타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죄는 사람에 의해, 피조물, 더욱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피조된 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다른 피조된 사람에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나님께 대하여(거스려) 저질러지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청년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비유의 전체 내용은 바로 그 사실에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비난이 그 아버지에게로 돌려져서는 안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자녀들의 그릇된 행동이 부모측의 잘못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질적인 면 또는 도덕적인 면에서 자녀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자녀들의 인생에 있어 부모에게 맡겨진 책임은 실로 엄청나며 결코 가볍게 취급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렸을 때 부모가 소홀히 했던 부분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 없는 한 나중에 고쳐지기가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고치기 어렵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경우, 마땅히 가야 할 길로 가도록 그들을 훈련시키지 않았을 경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을 경우,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경우, 후에 그들의 삶에 실패라는 결과가 뚜렷이 나타나면 부모는 그 책임을 다 져야 한다.
 
 하지만 죄로 인해 파멸된 인생에 대해 그 부모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아들이나 딸의 인생이 파멸에 이르게 되면 부모들도 틀림없이 어쩔줄 몰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대해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고 또 어떤 어리석고 파멸된 인생이든지 모두 용서해 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경건하고 신실한 부모에게도 불행한 자녀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부모는 자녀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없다. 그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의 경우에서도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이 젊은이가 길을 잃고 헤매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볼 때, 먼저 우리는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것이 그의 본질적 죄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죄가 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주된 죄였다고 말하는 것은 악에 있어서 그 뿌리가 아니라 단지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셈이 되고 만다. 그가 안고 있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의 그릇된 행동이나 개인적인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도 나쁜 일이긴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그의 마음이었다. 그는 부패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반항하는 마음과 본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보편의 문제이기도 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이것이 바로 탕자의 죄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런데 이 비유의 내용은 이 점을 좀더 분석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의 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소원한 상태로 만들었는데, 이 소원한 상태에는 우리가 뚜렷이 식별할 수 있는 '몇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첫 번째 단계로 먼저 그 젊은이는 자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는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했다. 필자는 이 섬뜩하고 부당한 요구가 어떤 한 순간의 불만족에서 비롯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이렇게 먼저 요구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 동안 그의 마음속에 속박에서 자유로와지고 싶다는 생각과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과 그러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수단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왔음이 분명하다. 똑같이 닮은 두 사람이 있을 수도 없다. 한 편은 집에 머물러 부모님과의 관계 내에서 그것을 의지하면서 살 수 있고 또 자기 소유가 아니며 자기에게 지배권이 없는 그 집의 규칙과 규정에 기꺼이 따르며 지낼 수 있는 반면, 다른 한 편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 운명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를 고대하면서 그런 구속을 못견뎌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일정한 나이가 된 자녀가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기간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종말에 슬픈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자녀들을 자신의 품에 안고 있으려고 하고, 심지어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는데도 어렸을 때와 똑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하는 부모들은 아주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취급을 당한 아이는 자기 개성을 강탈당하고 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갖지 못한 채 성인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거나, 또는 폭발 단계에 다달아 가족들간에 유대 관계가 비극적으로 분열되어 부모와 자녀를 하나로 묶어 주어야 할 이해의 띠와 그 연합이 붕괴되거나, 이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탕자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독립에의 욕구는 결코 옳은 것이 못된다. 그의 아버지는 소유욕이 강하지도 않았고, 자기 아들을 자기의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욕구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억압적인 권위를 행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상황은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단 한 마디도 아들을 꾸짖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는다. 아들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화도 내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가 아들의 정당한 개성이나 주도권을 빼앗고자 했다는 것은 전혀 그에게는 해당이 안되었다. 아버지에게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잘못은 오직 아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의 그 요구, 유산에 대한 그의 욕구, 세상에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을만한 수단에 대한 요구는 사실상 영적 독립 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원하는 것, 그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전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전제같은 것은 아예 있지조차 않았다) 아버지의 증거와 모범과 거룩한 삶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그는 신실하게 믿는 가정의 울타리 내에서 사는 삶은 누릴 만큼 누렸다. 그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 아들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못 견뎌했으며 그 위치에 부과되는 의무, 순종, 제재(그에게는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다) 등의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이는 결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오래된 이야기이다. 즉, 역사의 초두에서 인간이 최초로 하나님께 반항한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1-5).
 
 이 비유에서 탕자가 아담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담의 범죄와 그의 부패한 본성을 물려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있는 욕구의 뿌리도 역시 동일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이것이 그가 바라던 바였다. 하나님처럼 되기를, 스스로 선과 악을 알기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를, 믿음과 경건의 모든 제재를 다 벗어버리기를, 자기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가 되기를 그는 바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는 바로 죄와 죄인의 모습 아닌가?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의 본질이 아닌가? 결국 교만이란 자기 자신의 방식을 원하는 것,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는 것, 외적인 권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것, 참되며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지워 없애고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는 보좌 위에 자기가 대신 앉으려는 것이 아닌가?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인간이 무지와 비참함과 파면의 어두운 밤은 바로 이 지점,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보나르(Horatius Bonar)의 노랫말은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잘 표현하고 있다.

양떼를 떠나서 길을 잃어버린 나
목자의 소리 싫어서 먼 길로 나갔네.
방탕한 이 몸은 불효 막심하여
부친의 음성 싫어서 먼 길로 나갔네.


 바로 그렇다! 집, 양떼, 아버지의 사랑, 그분의 선한 감화력, 그 분의 자애로움, 불쌍히 여기심, 지혜, 은혜가 우리에게 아무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본성의 성향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선함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설사 길을 잃고 헤매게 될지라도 우리는 자기 자신의 길을 갈 것을 구한다. 물론 그런 자신의 행동을 우리는 적극적인 범죄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옳은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연인 한 쌍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경우 또한 그러했다. 남자 쪽은 이미 두 아내에게서 등을 돌린 전력이 있었고, 그것은 별다른 사유가 없는 이혼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 번씩 신부를 맞을 예정이니 필자에게 결혼 예식을 집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당한 사유가 없는 이혼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지를 이야기해주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결혼이 비합법적인 것임을 지적해 주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자, 그 젊은이는 자기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만일 행복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런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대적되는 인간의 '권리' 같은 것은 없다. 결혼에 있어서든지 사업에 있어서든지 혹은 개인적인 인간 관계나 그밖의 다른 사고나 행동의 영역에 있어서 거룩한 법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러한 요구나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와 똑같은 자로 만드는 셈이 된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 한에 있어서 그는 "나에게 중요한 것을 자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라고 선언한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어떤 외부의 힘도 자신의 처신을 인도해 줄 행동 지침을 제시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유 행위자로서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권적 권리를 가진 자이길 원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탕자의 행동에 대한 비유의 설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에 만족해 하지 못하고 독립을 선언한 데서 더 나아가 이제 그는 반항과 유리의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든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눅 15:12, 13).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멀리하는 일의 이 두 번째 단계는 더욱 적극적인 양상을 띠어, 마침내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가 갈 수 있었던 곳 중 가장 먼 곳으로 가서 살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제한하는 불편하고 답답한 속박에서 해방되기로 일단 마음을 정하자, 이제 더 이상 그의 영혼의 집으로 간주할 수 없게 된 집과 그 자신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악을 향해 내려가는 그의 길에는 큰 거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악을 향해 내려가는 그의 길에는 아주 뚜렷한 진전이 있게 된다. 죄는 항상 갈급해 하고 요구가 많은 법이다. 잘못된 일을 행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는 지체없이 첫 번째의 죄악된 행위로 치닫게 된다. 자유가 주는 들뜬 기분,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는 짜릿함,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다는 데에 대한 분명한 만족감 등 이러한 것들은 한두 가지 행동에 만족하도록 사람을 놓아 두지 않는다. 첫 번째 발걸음이 또 두 번째 발걸음을 떼어 놓게 만든다. 한 가지 허물은 두 가지 세 가지 허물을 만들어 내고, 그런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결국에는 파멸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형편에 따라 우리는 죄에도 정욕이 있다는 것, 곧 전적인 자포자기(total abandonment)로써만 진정시킬 수 있는 정욕이 있다는 것을 때때로 망각한다. 전적인 자포자기란 곧 성품이 철저히 황폐화되는 것, 즉 명성이나 성실성이나 선함이나 진실함 등이 완전히 박탈되는 것을 말하나.
 
 물론 이것은 이미 그런 과정을 밝고 있는 사람에게 쉽사리 납득시킬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이상 그는 어느 누구의 어떤 말에도 결코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는 남의 충고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상실한 것이다.
 
 도덕적인 타락의 길을 공공연하게 앞서가고 있는 사람이든지, 남이야 손해를 입고 파멸되든 말든 상관없이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정상을 향한 사다리를 비정하게 오르는 사람이든지, 혹은 그저 단순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경건치 못하고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든지, 그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해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지각없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어쩌면 당신도 그런 사람일지 모르지만) 이 진리, 즉 악은 늘 굶주려 있고 목말라 하며 물러날 줄 모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 진리는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사실이다.
 
 의식적으로 자기 몸을 파괴하거나 자기 영혼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부당한 것, 금지된 것,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죄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자체가 바로 그러한 열매를 맺게 한다고 성경은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죄의 이러한 자기증식적인 특성에도 심판을 내리신다. 세상 사람들의 불경건함을 고발하는 위대한 고발문에서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1:24, 25). 그리고 나서 그는 또 이렇게 반복한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롬 1:26). 그리고 세 번째로 또 이렇게 선언한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이런 식의 결말을 맺을 의도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창조주가 아닌 자기 자신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생각은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결말은 그렇게 나타난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탕자의 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려 했다는 데 대한 첫 번째 신호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자신의 몫이 될 유산을 미리 요구했다는 점이다. 올바르게 행동하자면 그는 정상적인 경로를 따라 그것이 자기에게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결코 달가워할 수가 없다. 가끔씩 우리는 주위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런 경우를 듣고 볼 때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난 가정의 가족 관계가 뭔가 부자연스럽고 가족들 간의 사랑의 열도가 매우 낮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겨 줄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부모의 죽음을 예기하는 행동은 필시 가족들 간에 의사 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거나 상호간에 존경심과 사랑이 거의 다 파괴된 탓에 나온 행동이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뭔가 시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미리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이나 사랑을 전혀 개의치 않는 무분별한 행동을 그 젊은이는 한 것이다.
 
 이제 집에서 독립하여 자기 생각대로 모든 구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먼 나라,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갈망해 왔던 그 나라에서 그는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그(의) 재산'이라는 말을 보라.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그에게 넘겨 주었고, 그래서 그는 합법적으로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것은 그의 재산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에게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자기 기분과 자기 욕구대로 처분하여 쓸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아버지가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요구하여 성공적으로 얻어 냈던 모든 재산, 부와 소유물은 아버지의 것이었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 돈을 어떻게 쓰든지, 어느 곳에서 그 돈을 다 낭비하든지, 심지어 그 먼 나라에서도 그는 그 재산의 소유자인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 모든 행동의 책임을 져야 했다.
 
 여기에 우리가 도저히 피해 나갈 수 없는 아주 불안한 진리가 한 가지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분과 멀어진 가운데 인간의 전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 무엇을 소유했건, 어떤 사람이건,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건,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자유 행위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왔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일을 했을 때, 그가 망각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실을 망각하여 선지자들로부터 준열한 질책을 받고 다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예들을 보고 또 본다. 당신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도, 이제까지의 행동거지를 뒤돌아보아도 그 사실을 망각했기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 당신의 재능, 당신의 지위, 당신의 가족 등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잠시 동안 그것을 맡고 있도록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전혀 자기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재산을 허랑방탕한 삶에 다 허비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아무 할 말이 없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한 남자나 한 여자든, 한 사회나 전문명 세계든 하나님께서 단지 맡고 있으라고만 하신 것을 생각없이 경솔하게 다 탕진하고 결국에 가서 벌거벗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죄당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말이다.
 
 영적인 독립 선언, 아버지와의 교제에 대한 불만족, 먼 나라로 가서 아버지와 멀어짐, 아버지의 재산을 무분별하게 허랑방탕한 삶에 다 써버림, 이 모든 것은 죄인인 인간의 체험을 묘사하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이 사방에서 파멸과 비참함과 깊은 불행과 불만족만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는 탕자이고 아버지의 아들이며 창조주의 손으로 빚어진 산물이다. 하지만 그는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 한때 그가 누렸던 관계나 그가 등을 돌려 대었던 기쁨, 그리고 그가 지고 있는 엄청난 빚은 때때로 망각할 수 있겠으나, 그가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 즉, 비천해지고 가난해지고 마음 상한 그 탕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과 자애로움 가운데 집으로 다시 돌아와 죄인의 유일한 구주 되시는 분 안에서의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로써 영접되기까지 그가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곤고함과 죄짐을 지고
나는 하늘 바라보며 거기 들어가길 원했네.
하지만 악한 자가 머물 집은
그곳에 없지
그래도 나는 오라 하는 음성을 듣는다네.

이 악한 내가
그 거룩한 땅 순전한 영광 가운데
서기를 감히 바라다니
하지만 나를 향해 가까이 내미시는 손길 있으니

하늘의 길을 밝고자 할 때도
악은 날마다 나와 함께 했지.
그러나 내 귀에는 은혜로운 소식 들려오니
회개하라, 고백하라,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리니!

내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음성
나를 향해 내민 손은 그분의 손
내 모든 죄를 속해 주시고
보좌 앞에서 나를 흠 없게 하시는 것은
그분의 보혈이라네.
스톤(Samuel J. Stone)

제3장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이 슬픈 그림도 그러나 그 젊은이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슬픈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을 그는 출세를 할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그는 비참한 삶이 아니라 쾌락이 있는 삶을 동경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누리는 만족감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번영하고 출세하려는 부푼 희망을 안고 길을 떠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자기 권리가 부인된다거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방해를 받는다거나, 기회가 무시된다거나, 약속이 파기된다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과 자기 손 안에 잡힌 쾌락만을 생각했다. 자기 자신의 뜻과 결정에 따라 인생을 살아 보려는 시도에서 그를 돌이키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주인, 자기 영혼의 대장이자 관리인이었다. 우리는 그가 자기가 자란 가정의 모든 구속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올 때 그의 전존재를 온통 사로 잡았을 들뜬 기분과 기대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음의 그의 인생 경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해 보아야 한다. 그에게는 돈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서 나온 돈은 그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켜 주지 못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고 싶었던 것을 살 수 있었다는 것과 문자 그대로 순간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그것을 다 떠 없앴다는 것뿐이었다.
 
 돈은 그에게 친구를 사 주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이었는가? 그들은 그에게서 뭔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선까지만 그와 그것을 함께 누리면서 그의 충실한 친구로 남아 있었다.
 
 돈은 그에게 사랑을 사 주었다. 아니, 적어도 그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을 사 주었다. 후에 그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형은 그가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고 말했다.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돈이 다 없어지고 나자 그는 그 여자들에게 사랑이 전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큰 혼동, 즉 정욕과 사랑을 구별 못하는 혼동에 빠져 있었고, 전에 자기 아버지의 인품에서 매일매일 보았었던 보다 순결하고 고상한 감정과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정욕은 그것을 살 수 있었던 돈이 사라지자 역시 덧없이 사라져 버려 더 이상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돈은 집과 아버지를 망각하게 해 주었다. 양심의 소리를 온갖 쾌락으로 가려 덮으면서 무분별하고 방종한 삶을 사는 동안 내내 그는 뒤에 두고 떠나온 것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소망,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고자 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깨끗이 잊느냐 하는 것이었다.
 
 돈은 그에게 그 자신을 사 주었다. 아니, 그가 그 자신이라 생각했던 것을 사 주었다. 집에 있을 때는 자기 표현이 불가능했었다. 아무리 자기 아버지의 집이긴 했지만 자기 집이 아닌 그 집에서 그는 아들, 그것도 장자가 아닌 그저 한 아들이었다. 그 집은 경건과 사랑이 있고 연민과 기쁨이 있는 집임에 확실했으나, 아울러 훈육과 원칙이 있고 또한 순종이 있는 집이었다. 그곳은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재능과 자신이 기대하는 만큼 성장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먼 나라에 가면 그는 발전할 수 있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으며, 그가 되기 원하던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그는 독립적 존재일 수 있는 권리와 개인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아니 어리석게도 그렇게 했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가 자기 표현(self-expression),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다고 생각한 특권을 살 수 있었던 돈이 다 사라지고 나자 즉각 그는 자기가 무엇을 성취했다고 하는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을 다 허비했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추구하고 만족과 쾌락을 구하는 데 나날을 다 소비했으며, 그가 늘 하고 싶어 하던 것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아니,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 다 바닥나 버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다. 그 많던 재산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없어져 버릴 수 있겠는가? 그는 상당 기간을 지낼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어디로 갔는가? 그 돈이 그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치 못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 돈이 바닥나 버렸다. 단 한 푼도 없이 다 바닥나 버렸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구나 그의 문제를 가중시킨 것을 그 먼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 나라, 그가 그렇게 동경하고 전신으로 자신을 다 바쳤던 그 나라에서 그는 굶주려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는 궁핍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먹을 것과 마실 것, 생존의 제일 필수품에 대한 궁핍을 깊고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다 없이 한 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4)라는 이 짤막한 말씀 속에서 실로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행복한 사람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곤궁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궁핍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사실 자신의 참혹하고 불행한 상태를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탕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 이익을 찾는 곳에다 자기 인생과 소유를 다 허비했다. 그들은 궁극적인 실체가 없는, 결국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일에다 시간을 허비했다. 그런데도 그런 상황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깨닫지조차 못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자기 실현을 향한 질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어렴풋하고 불분명하게나마 의식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 상태에서 참된 기쁨과 영속적인 만족의 유일한 원천에서 영원히 단절된 그 상태에서 그들은 죽는 것이다.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무언가 궁핍함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첫 발걸음이다.
 
 지금 우리는 탕자의 영적 순례에 있어서의 첫 단계와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암시해 주는 첫 번째의 긍정적 신호를 살펴보고 있다. 그 신호는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그 젊은이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운 모든 것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생활을 했는지 보여 주는 말씀 바로 뒤에 나오고 있다.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기 비로소 궁핍한지라." 탕자는 범죄하는 삶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곤고함과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궁핍했다!
 
 이제 우리는 이야기를 따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는 궁극적으로 아무 만족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 행위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이는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그 방종의 세월,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허랑방탕한 삶,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죄인들과 함께 먹어 버린 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모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4-16).
 
 범죄는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행위에는 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죄악에 아무리 만족감도 없다는 뜻을 아님을 기억하라. 범죄에는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아주 비뚤어져 있어 금지된 행동 노선은 오히려 아주 잘 따르는 특성이 있다. 우리 안에는 하지 않아야 될 일인 줄 알면서도 하는 일이 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도다"(롬 7:19).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불순종하는 데 특별한 즐거움이나 만족감이 꼭 뒤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죄악의 죄악성, 그 금기성, 금지되고 제재되는 것이라는 바로 그 성질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보라. 아이들에게는 하지 말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하게끔 하는 것이 된다. 법으로 금하여지고 그릇된 것이라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한다는 데에 따르는 흥분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쾌감을 준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그만큼 타락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 범죄 행위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아예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범죄 행위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에게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훔쳐 내는 도둑은 그럼으로써 자기의 탐심을 만족시킨다. 그의 탐심은 다른 사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방법을 궁리하게 한다. 한 나라를 상대로 해서 국가적인 경제적 세력을 갖고자 하는 대담 무례한 사람이라면 계획을 세우고 미리 짜서 도박을 하기도 할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정하게 남을 짓밟기도 할 것이며, 다른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넣기 위해 아무런 찔림없이 조롱도 할 것이다. 간음하는 자는 그러한 쾌락의 뜬구름 같은 속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정욕을 불태운다. 술주정뱅이는 술을 마심으로 몸과 정신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술로써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는 그 정도의 위험과 손해를 무릅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할 수 없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술은 그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주는 것은 비단 그러한 죄뿐만이 아니다. 소위 '보기 흉하지 않은 죄'(respectable sin)에도 역시 즐거운 흥분감이 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지만, 자기의(self-righteous)에 빠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한 자신의 우월성(도덕적인 면에서나 심지어 신앙적인 면에서도)에서 상당한 쾌감을 느낀다. 교만한 자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취감, 자수성가했다는 것, 이러저러한 면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성공했다고 해서 느끼는 유능하다는 의식, 이러한 것에서 그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업적에 만족감을 느끼어 다음과 같이 자랑하는 말을 한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 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
 
 하지만 이 말로 인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었었다. 자기가 이룬 큰 업적에 대한 성취감을 한껏 누리는 데에도 분명 이렇게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다.
 
 죄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지는 않다. 죄는 실로 다양한 종류를 갖고 있다. 우리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흔히 정죄하는 그러한 형태의 행동들만이 죄악이라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려 한다. 죄악됨이 분명한 행동을 정죄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도 한 가지 죄 되는 사실이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탐욕이나 정욕이나 살인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일에 대해 그가 만족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은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안에 있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무분별한 자, 방종한 자, 자기 의에 빠진 자, 교만한 자, 이 모든 자들이 결국에 이르게 되는 곳은 어디인가?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 31).
 
 필자는 범죄 행위에 만족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만족감은 없다고 말했다. 탕자는 돈이 다할 때까지 즐겼다. 그의 돈은 오직 그 자신만을 위하여 쓰여졌다. 하지만 돈이 바닥나 한 푼도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이 즐겼던 것이 순간적인 즐거움에 불과했고, 그것의 끝은 공허와 절망과 불행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악이 이렇게 영원한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죄악의 능력은 순식간에 다 고갈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는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인생의 특징적 모습이기도 하다. 믿지 않는 자의 인생은 배고프고 목마른 인생,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인생이다. 욕망은 이것 혹은 저것으로 일시적으로는 충족될지는 모르지만 뿌리깊은 불안감과 불편함은 곧 되돌아올 것이며, 그러면 사람은 또 다른 어느 곳, 동일한 죄가 더욱 심화된 상태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또 하나의 죄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또 다시 흥미의 도는 엷어지고 쾌락의 양도 적어진다. 죄악에는 궁극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죄악의 권세는 순식간에 흩어져 버린다. 특정한 형태의 처신에서 느끼는 모든 '행복감'은 오래지 않아 그것을 누리던 바로 그 사람의 입에서 쓸개처럼 쓰디쓴 맛을 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습관의 힘은 강하다. 오랫동안 해오던 행동을 갑자기 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것에 대한 매력을 잃은 지 오래되었어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습관에 묶여 있는 그 사람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또 하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죄악에서 궁극적인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가 아닌 것이다(시 32:9).
 
 우리가 이 비유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분별하도록 방종한 삶에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허비하고 굶주림과 목마름을 당하고 있는 이 탕자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죄악된 인간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탕자는 아직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절연된 삶에 안주할 수가 없다. 이는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말이다. 인간은 보다 좋은 일을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육적 존재이자 영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성도 없고 영혼도 없고 의식도 없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되지도 않은 동물처럼 사는데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그러한 사실에 대한 사고를 중지하면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 전혀 다름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그 인간의 삶에는 탕자의 그것에서처럼 영속적인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왔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소원한 유리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안에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거나 우리의 양심이 다 파괴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보다 좋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아직도 다른 것, 보다 지고한 것에 대한 의식이 남아 있다. 물론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아와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중심으로 한 삶, 강퍅한 삶,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고집스럽게 반항하는 삶은 원래 인간에게 예정되어진 삶이 아닌 궁핍하고 겉만 그럴 듯한 삶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6, 27).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을 바로 이러한 의도, 이러한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어떻게 죄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만족을 줄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말하건대, 삶이라는 이 중대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죽음과 심판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불순종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직시해 보아야 한다. 만일 인생이 노화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또 다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그것이 과연 존경할 만한 삶이든 아니든, 당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것은 끔찍한 망상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에는 끝이 있다. 범죄는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족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탕자가 이제 궁핍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깊은 곤고와 비참함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가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죄악에 궁극적인 만족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그 다음 단계를 분석해 볼 수 있게 된다. 범죄에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은 그것이 궁극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굶주림만을 야기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고 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시는데 쓰신 말씀으로서(마 4:4). 이 진리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 말씀대로 사람은 이기심과 쾌락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지구라는 이 별 위에 자기 혼자인 것처럼, 자기 자신 아니면 기껏해야 자기 이웃에게만 책임을 지는 그런 존재로는 결코 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4-16절). 이 비참한 상태가 바로 얼마 전에 자기 몫의 유산을 얻어가지고 넓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개척하러 나온 교만하고 자족적인 젊은이가 처하게 된 상태이다. 그는 필요한 것을 무한히 공급받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어떤 형태로 살든 자유롭고 호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졌었다. 그런데 이제 공급의 근원이 말라붙어 버렸다. 돈은 다 없어져 버렸고 빵 한 조각 살 돈도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닌 다른 여러 가지 대안들을 시도해 보려는 사람이 있다. 탕자도 처음에는 그랬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길을 찾으려던 탕자의 첫 번째 시도였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들을 수없이 많이 시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더 극심한 형태의 죄악 속으로 자신을 던져 버린다. 그들은 죄악의 자기증식적인 성질을 일종의 정신적, 영적 마취제로 이용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한동안은 잊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일시적이나마 성공적인 처방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절망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 죄의 문제에 대한 그런 접근 방식은 결국 자살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 깃을 계속 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개혁의 길을 취한다. 이들은 자신의 질병에 스스로 투약을 하고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깨끗이 하고자, 그리고 예전의 습관을 버리고 삶의 방식과 스타일을 바꿔 보고자 한다. 사실 개중에는 하향의 과정을 멈추고 자신의 도덕적 위치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개혁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그 자체로서 아무리 가치가 있는 행위라 하더라도 인간의 영적 틀(frame)의 그 쇠약한 상태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우리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사이에 생긴 장벽을 제거시켜 주지도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거짓 종교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우리는 참을성을 뽐내는 사람이 많은 시대, 종교란 모두 대동소이하다고 추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에는 사람이 무엇을 믿든지 진실하게만 믿고 또 그 믿는 것에 따라 살려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편만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에 비추어 본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이론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확신컨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도 온전히 신실하게 신앙할 수가 있다. 그들도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화평한 삶을 살 수 있고,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으며, 박애주의를 실현할 수 있고 공동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지극히 존경할 만한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들이 믿는다고 고백한 진리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생활 태도에서 자신이 믿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지만 생활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비그리스도인은 거짓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거짓을 믿는다. 거짓말에는 도움도, 구원도, 용서도, 삶을 건설한 든든한 기반도 없다. 거짓말을 아무리 믿어도 여전히 굶주린 상태, 돼지가 먹는 것을 구하는 상태, 여전히 그 먼 나라에 있는 상태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어떤 노력을 해도 그는 더 약해지고, 더욱더 절망적인 외로움에 잠기고 영혼을 갉아 먹는 암인 죄악 속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젊은이가 자기 자신의 궁핍을 점점 자각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일부였음을 기억하라. 그는 자신이 진정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지만, 서서히 그런 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일에 역사하고 계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어떤 지점 그 이상에서는 전혀 도움을 베풀 수 없는 인간적인 아버지가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따라서 탕자가 좌절과 불만족과 영적 굶주림 가운데서 분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음을 당신을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먼 나라에서 굶주림과 궁핍과 외로움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그 긍휼과 은혜의 손을 내밀고 계시다. 그 손길이 닿는 곳은 무한하여 깊게 갈라진 거대한 틈을 메꾸어 주고, 영적으로 빈곤한 자, 쇠약한 자, 죄와 허물 가운데 틈을 메꾸어 주고, 영적으로 빈곤한 자, 쇠약한 자,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자까지도 감싸 주신다. 그 넓으신 손길, 늘 뒤에 함께 하시는 사랑, 그 끝없고 무한한 동정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로 표현한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평강도 없고 쉼도 없고 만족도 없던 이 길 잃은 탕자를 옳은 길로 효과적으로 가두시어, 방탕한 생활로 빈털털이가 되었던 그 먼 나라에서 다시금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바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심이었다. 구원이나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의 영적 순례의 각 단계는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일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께서 그냥 내버려 두었더라면 탕자는 머나먼 타향, 쥐엄 열매조차 주는 사람이 없는 그 불모의 땅에서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계속되는 아버지의 사랑은 결코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단계, 즉 궁핍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가 꿈꾸었던 삶에 대한 불만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늘 승리하시는 구원의 은혜의 증표였다.

제4장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제 예수님의 위대한 비유 속에 등장하는 탕자의 영적 편력에 있어서의 그 다음 단계를 계속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그 젊은이가 궁핍 가운데서 범죄에는 끝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삶에서는 궁극적인 만족을 찾을 수 없고 오직 영적인 굶주림과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알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궁핍을 감지했다는 것은 힘없는 발걸음이었지만, 발걸음의 방향만은 옳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 관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한 변화가 효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온 변화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사랑과 결과였던 것이다. 이제 그를 따라 좀더 나아가, 자포자기와 죄악의 삶에서부터 멀리 두고 온 집을 향해 점차로 돌이키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에 특별히 주목해 보라. 스스로 돌이키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이는 그에게 다시 정신이 들어 건강하고 건전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구약성경에는 이 진리를 회화적으로 예증하는 사건이 있다. 바벨론의 위대한 왕 느부갓네살은 치솟은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교만에 대한 심판으로 그에게서 온전한 정신이 떠나가고 또 사람들로부터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본다. 그는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그와 같이 해서 일곱 때를 지난 후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대로 그것을 아무에게라도 주시는 줄을 알아야 했다. 때가 이르렀을 때, 즉 "그 기한이 차매" 왕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체험한 바를 우리에게 들려 준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단 4:34, 37).
 
 이렇게 여기에서도 우리는 탕자가 자신의 죄악과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자 마침내 제 정신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탕자는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죄를 감지하는 것과 죄를 뉘우치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음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전자, 즉 자신의 부적당함을 감지하는 것은 거의 인간 보편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탕자는 방탕하고 방종하던 가장 어두운 시절에 있어서조차도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의해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죄악됨,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지각을 갖고 있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롭다.
 
 "네, 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답한다. 무론 요점을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고 있고, 인간이 마땅히 되어야 할 바대로 살지 못하며, 모두 어느 정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 의식을 가짐과 동시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세상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 그렇다는 생각으로 그 죄의식을 경감시켜 버리는 것이다.
 
 조금 더 나은 경우를 든다면, 인간 보편의 이 죄의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에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그 죄의식은 종교적인 일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있어 근본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비범한 업적을 이루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기가 흠있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자각은 거의 보편적인 자각이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그분께 일종의 예배를 드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은 이와 전혀 다르다.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죄를 뉘우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의 죄악됨과 그 마음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깨닫고 있는 사람은 죄의 뉘우침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는 말이 자신이 꼭 해야할 말인 것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기독교적인 일, 죄의 이 깨우침,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로써 탕자의 체험에 투영되고 있는 인간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한 이 인식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이델버르크 요리문답서는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기 위해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라고 묻고 나서 이렇게 답한다.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나의 죄가 커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어떻게 내가 그 모든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해방되는가 하는 것이요, 셋째는 그러한 구속에 대해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제 2문항). 우리가 여기서 엄격하게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물론 첫 번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를 뉘우치는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같은 근본적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의 은혜이니 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의 사역자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 죄인이 그의 지은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공의로운 율법에 배치하는 것으로서, 위험하며 더러우며 추악하다는 사실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다가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통회하는 자들에게 향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될 때, 그의 죄를 슬퍼하며 미워하며 죄를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그와 동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노력하게 된다"(15장 1, 2조).
 
 죄를 뉘우치는 탕자가 그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 늘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동일하다. 근본적인 진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바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의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이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각으로서, 반드시 그리스도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복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죄는 진실로 뉘우친다는 것이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실, 질책당해 마땅한 자신의 죄과를 시위하기 위해 어떤 행위(work)를 하는게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바로 이렇게 죄를 뉘우치는 것, 자아와 자기 의와 하나님 앞에서의 가식과 교만을 철저히 버리는 것, 전적으로 거룩하신 분의 존재 앞에서 인간 그 자체는 벌거벗고 궁핍하고 소망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성령께 속한 일이지 결코 죄인인 인간의 공로에 의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당신은 죄를 뉘우쳐 본 경험이 있는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감지하게 되면, 자신이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어느 정도 의식하게 되면, 바로 그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는 철저히 역사하신다. 죄의 뉘우침이 표현되는 인간적인 수단으로써 회환과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슬픔도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이 영적으로 진정한 어떠한 상태인가에 대한 바른 깨달음, 즉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그 죄로 인한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 앞에서 자신은 죄 많고 질책받아 마땅하며 죽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깨닫는 것이다.
 
 필자는 탕자도 늘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 그는 거기에 대해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비록 먼 나라에서 방종한 삶을 즐기고 있을 때였을지라도 그가 믿음의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거나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의 돈을 착복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간음한 자, 독선적인 자, 남을 미워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자신의 죄, 그리고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믿지 않을 만큼 타락한 불경건한 자는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돌이켰을 때에야 비로소 탕자는 죄의식, 자신에게 도덕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단순한 자각 그 이상의 무엇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어렴풋이 죄를 뉘우치기 시작한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젊은이는 자기 자신에게 저지른 일로 인해, 과거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그 죄의 깊음으로 인해, 자신이 걷어차 버린 사랑으로 인해, 그가 가라앉아 있는 그 깊은 심연으로 인해 슬플 정도로 늙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그가 마침내 깨달았다는 데에는 순전한 증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마음을 돌이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죄를 뉘우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에서 가장 소망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겠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죄를 뉘우친다는 것은 곧 그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그 사실에 압도당했다는 것,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이 저지른 모든 사악한 죄를 깨달았다는 것, 자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는 수직적인 관계내의 것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음을-즉, 궁극적으로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나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지른 죄었음을-감지했다는 것에는 죄인을 이끌어 오심에 있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 뉘우침에는 항상 수반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경외케 하기 위해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시 130:4) 주님께서는 달콤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설득시키신다는 것이다(이는 반드시 단번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탕자가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단계에 있어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탕자는 자신이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 있고, 또 스스로 고안해 낸 방책도 자신을 구제해 줄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한때 그가 그렇게도 열렬히 보기를 갈망했던, 그리고 출세할 수 있는 터전이 되리라 확신했던 그 먼 나라에서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 그리고 아들로서 그 집에 살던 시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나는 주려 죽는구나"하고 그는 외쳤다. 그는 지금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어떤 일이라도 해보려고 그 먼 나라의 한 농부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 젊은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지극히 꺼려지는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부유한 집의 아들로서 큰 특권을 누렸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돼지 먹이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그가 알고 있었던 바와 충돌되는 일이었다. 돼지는(레위기 법에서 보면) 부정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궁핍한 그는 몸과 영혼을 부지하기 위해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고 말았다. 그러나 돼지치는 일로도 충분치가 않았다. 그 땅에는 큰 기근이 늘어 노동력은 값싸졌고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가 새 직업에서 번 것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사실뿐이었다. 곧 그는 필사적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때 그는 "나는 주려 죽는구나"하고 말했음이 분명하다.
 
 탕자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그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돈은 다 없어졌고 친구들도 돈과 함께 가버렸다. 그는 단순히 유산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잃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그렇게 탐냈던 그것조차 이제는 그때만큼 커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구함을 상실했다. 그가 전에 지녔었던 청정함은 그 방탕한 삶과 함께 가버렸다. 그가 아는 한에 있어서 그는 사람들로부터의 동정심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고향도 잃어버렸다. 그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왔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다 가버렸다. 남은 것이라곤 '아버지의 집' 생각뿐이었다. 그때 그는 소망을 잃은 상태였었다. 과거를 반추할 수는 있었지만, 사실 과거를 회복하고 복구할 기회가 없어 보인다면 단순히 그것을 반추하는 것에서는 거의 위로를 얻을 수 없다. 다만 그는 예전에 아들로서 살았던 집에서 하인 자리라도 하나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그저 캄캄한 절망뿐이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죽을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이렇게 그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것은 보다 심오한 의미를 지닌 어떤 것의 상징 내지 묘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우리가 바로 그것을 파악할 것을 의도하셨었는데, 이 사실은 탕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로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고 말했다. 당신이 보시다시피, 그 젊은이는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어떤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2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1-5).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비그리스도인은 문자 그대로 죄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이 말의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모든 경우마다 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소망을 다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선포할 이유가 없다. 영적으로는 죽었다 해도 육신적으로는 아직 살아 있기에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고, 또 구원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해 죽었다. 그의 모든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소망의 상실과 하나님께 대해 죽었다는 느낌은 늘 병행한다. 그러므로 탕자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와 또 스스로 고안해 낸 방책의 무력함을 파악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아마도 구약 시대의 선지자 미가가 제기했던 것과 아주 흡사한 의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가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6, 7).
 
 미가 선지자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내 힘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까?"를 자문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당신은 놀랄 것이다. 그렇지는 이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시피,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탕자는 이 단계에서 아직 그렇지 못했지만,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마 탕자와 마찬가지의 상황에서라면 당신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죄를 뉘우침에 있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다루시고 성령께서 순전히 역사하실 때 우리가 첫 번째로 깨우쳐야 할 것은-이는 죄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저질러지는 것이란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이 세상에는 공로를 쌓기 위해, 또는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구원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은혜에 속하는 일이다. 소망은 내가 어떤 일에 기여할 수 있느냐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영광스럽고도 영원한 사역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처한 위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 본질을 갑작스럽게 인식했을 때 탕자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요치 않은 일에 전력 투구하면서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과 악함을 남에게 숨기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죄와 불순종과 자기 만족(self-sufficiency)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mind)과 정신(spirit)은 그러한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감출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있는 기능이 잠재되어 있고, 그 힘 또한 엄청나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가는 길은 아무리 가도 끝이 없다.
 
 그러나 그럴 때면 반드시 어떤 일이 생긴다. 결혼 생활에 파탄이 올 수도 있고 자녀들이 등을 돌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은밀한 죄, 도둑질, 술 취함, 부도덕한 행동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때, 가족과 친구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 실상은 근거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 실제 그의 내면적 성품은 알려진 것과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생활 체계가 황폐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할 때, 그때 그는 회한에 겨워할 것이고 양심이 일깨워질 것이며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때 그는 모든 것에 아무 대책이 없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그런 상황이 영원히 계속되어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사건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절망감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전보다 더 결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탕자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을 회개에로 이끄시는 경우도 있다(롬 2:4). 이미 행해진 일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놓을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크고 밝고 영광된 소망은 바로 그 절망감이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람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으니라"(사 44:22)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밝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 19).
 
 다음으로 우리는 아래 말씀의 세 번째 의미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는 도움을 받으려면 자신의 외부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파악했음을 여기서 보여 준다. 앞에서 이미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은 필연적으로 위와 같은 사실에 이르게끔 한다. 그로 하여금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고 절규하게 만들었던 그 캄캄한 절망은 처음 보기에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없고 도움이나 구원의 가능성도 전혀 없는 절망으로 보인다. 그는 생명을 부지할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채 먼 나라에 있었다. 먹을 것을 얻지 못한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까지 탐을 냈다. 인간이 그보다 더 비천한 상태에 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돌아서서 그 사랑을 거부했으며, 아버지가 전심으로 애착을 가졌었던 은혜의 언약을 저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에서 자기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방탕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다 허비하였다. 그가 한때 소유했던 것, 당연하게 여겼던 것, 그리고 멸시했던 것과 그 사이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 사건도 그렇게 진행되겠지만, 거의 굶어 죽게 되고 육신이 지극히 허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먼 거리를 가서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여기서의 거리는 단순히 미터 단위로 측정될 수 있는 물리상의 거리가 아니다. 만일 그런 의미뿐이라면 이 문제는 우리에게 그리 큰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 거리의 주된 의미는 영적인 것이다. 그는 한때 그의 권리였던 것을 상실했다. 그는 때가 되기도 전에 자신의 유산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날려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그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사람들의 동정심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그들의 도움으로부터 차단된 채 죽어가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제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호소하거나 아버지의 사랑을 되찾기를 바랄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랑이 결코 사실된게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위대한 비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증거하고 계시다. 그러나 탕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자신이 돌아올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길가에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한때 그가 누렸던 그 사랑과 그 관계 그리고 그가 고의적으로 포기했던 아들 자격이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생각이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처음에 돈이 다 떨어졌을 때 그는 그 나라 사람에게 붙어 살았고, 그 주인은 돼지를 치라고 그를 들로 내보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존했고, 그 능력은 전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 돌이켜 그는 과거를 생각하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발단인 셈이었다. 유념할 것은, 이러한 생각이 아주 확신있는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의 가장 큰 열망은 아버지 집의 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의 소망은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그는 자기 아버지를 얼마나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 14) 탕자에게는 위와 같은 관념아 없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전혀 낯선 것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을 직접 체험하고 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최소한 그의 생각의 방향만은 건전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그 이름, 그 권리, 오래 전에 버린 그 오랜 관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죄를 뉘우치고 각성한 상태에서 그는 도움의 유일한 원천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 먼 나라에 있지 않았고, 그 먼 나라의 백성 한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있지도 않았고, 돼지를 치는 일에도 없었으며, 실의와 의심과 절망 속에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반짝이는 불빛이 있다는 것, 소망의 한 줄기 광선이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아니, 그는 자기 자신을 회복했다기보다 회복을 당하였다. 그 구원의 광선은 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적이고 견고하고 변함 없으신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죄와 실패와 잃어버림의 상태에 있는 우리도 탕자처럼 모든 집 중의 집, 모든 아버지 중의 아버지인 하나님과 또 죄인을 위한 그분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이 비유의 의미를 올바로 깨우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한 마음과 뉘우치는 한숨으로
죄인인 이 몸
떨리는 음성으로 주님께 외칩니다.
용서하시는 당신의 은혜는
풍성하고 값이 없으니
오 하나님, 긍휼히 베푸소서!

내 근심하는 가슴은
깊은 죄의식에 짓눌려 있으니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이
나의 기원하는 바라.
오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는
멀리 떨어져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나
당신은 내 모든 고뇌를 아십니다.
오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엘벤(Cornelius Elven)

제5장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탕자의 영적 편력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죄의 본질이 점차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과 마음에 어떤 긴급한 필요 의식이 서서히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의 밑천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돈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비참함이 얼마나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는가를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빵을 구걸하는 거지 행색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영혼이 거지된 상태에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그 상태에 대한 치료약을 필요로 했다.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이 말은 자신의 결핍과 비참함과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고통스럽게 그리고 머뭇거리며, 그러나 확실하게 마침내 감지하기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탕자가 원상태를 회복함에 있어 그 다음 단계는 또 어떠했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필자는 이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 말씀에는 얼마나 방대하고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가! 그는 제 정신을 찾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지각이 되돌아왔다. 우리가 보아 왔다시피, 위의 표현은 그 젊은이가 자신이 진정 어떠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 파악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게 되었고, 또한 그러한 뉘우침을 통해 자기 자신이 대책이 없는 절망 상태에 처해 있고, 또 스스로 고안해 낸 구제책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먼 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다시 한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는 또한 도움을 받으려면 자기 외부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로 하여금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외치게 만든 그 암담함은 언뜻 보기에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캄캄한 절망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을 그쪽으로 취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닌다. 자기가 스스로 구제할 수 있다는 더 이상의 확신이나 기대도 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가 원상태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증거는 그의 마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는 먼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다. 그곳에서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능력(돈)이 다하자 그에 대한 욕구 또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옥죄고 있던 죄악된 성향이라는 속박의 고리는 그는 자신의 손과 발로 부숴버렸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있어 그러한 큰 혼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자유란 구속이 없는 것, 상황이 어떻든지 자기가 되고 싶은 대로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속박과 의무를 벗어던지는 것, 우리가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과거로부터의 도덕적 종교적 교훈을 제거하는 것, 어떤 형태로든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아무런 제한없이 표현할 권리를 가지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라 생각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바가 되고 있다.
 
 하지만 잠깐 멈추고 다음과 같음 것을 생각해 보라(정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을테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구속이라 생각해 왔던 것, 즉 인간의 사악함과 정욕에 제재를 가하는 구속보다 더 무서운 새로운 구속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 방향을 좇아 자유를 아무 제재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허가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자기 자신과 그 모든 것을 죄악의 사슬에 묶어 놓는 것이며,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사도 바울은 똑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이러한 면에 있어 사람이 견지할 수 있는 관계에는 단 두 가지가 있다. 즉, '죄의 종'이 되거나 '하나님의 종'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세 번째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탕자는 첫 번째를 택했었다. 그렇다. 그는 죄의 종이었고, 그것의 의미를 이제 자기 내부로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상 그 먼 나라의 끔찍한 속박, 죄의 속박, 그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속박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삶의 방향은 변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소망이 무너졌다는 것은 동시에 영혼이 빈곤하고 궁핍해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행하는 데 지쳐 있었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는 데 피곤해져 있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렇다면 이 젊은이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것이 바로 돈과 재산을 다 탕진한 일이었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보라. 만일 그가 재산을 다 탕진하여 먼나라에서 동전 한 푼 없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재산을 중보 기도 갖는 것에 있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자신을 치유시키고 구속시키고 회복시키고 성취시키는 도움은 자신의 외부로부터 온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 단계에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탕자가 옳은 방향 감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이는 주목해 볼 만한 일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아버지로부터 기대했던 것은 아주 제한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잘못을 저질렀고 관계 또한 파기되었을 때,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자신을 전과 같이 받아들여 주리라 기대하기가 어렵다. 탕자는 주제넘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이것이 그가 취한 생각의 방향이기도 한 동시에 그 생각의 한계점이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위대한 사실은, 이 젊은이가 이제 되찾은 제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와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말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옛것은 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비유의 그 다음 구절에는 어떤 말들이 나오는지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8-20).
 
 이 말씀은 엄청나게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적인 회개' 혹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렇게 답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의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바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아 자기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미워하고 그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곧은 결심과 노력으로 새롭게 순종하는 것이다"(87문항).
 
 이는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 지극히 중요한 방식을 주목할만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회개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공부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에 있어서의 출발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구원의 첫 단계가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이 일이 있기전 탕자의 인생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 회개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에 대해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바를 간과하는 것이다. 그 계획의 기원은 세상이 있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인간이 그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 형에 처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행 2:23)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긴 해도 회개는 거룩한 은혜를 체험함에 있어 사람이 의식적으로 취할 수 있는 제일 첫 번째의 단계이며,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 소망,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는 입구이다.
 
 탕자 비유에 있어서의 이 국면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여기에는 '정직한 자기 평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음의 말씀 속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자신의 정신과 마음과 양심을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극도의 고통이 있고, 또 너무나 끔찍하여 도중에 절망해 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유발시킨 자기 평가와 자각은 자각이되,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끔 이끌어 주지 못하는 충격적이고 두렵고 당황스런 자각 사이의 차이점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탕자를 비롯한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의 소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대가로 받은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두고 목 매달아 자살한 가룟 유다의 소위와의 차이점이다. 자기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비로소 깨닫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 5)라고 절규하게 만든 그 극도의 공포를 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이 두 가지, 즉 세상의 슬픔, 회한,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극심하고 격정적인 후회와 경건한 슬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몇 가지 측면에 있어, 적어도 피상적으로는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 하지만 이 둘은 그 원인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들이 결국 생성해 내는 결과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회중들에게 이따금씩 계속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하고 또 심화되어 있든지 우리는 그 모든 죄를 덮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충분성을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목회자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은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일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와 유사한 또 하나의 위험성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너무 강조하고 역설하는 나머지 그분의 공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은 간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를 역설하는 것, 이 둘 사이에는 늘 어느 정도의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너무 배타적으로 강조되면 하나님을 말씀 속에 계시된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엄격하고, 고집세고, 무자비하며, 동정심 없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지금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을 애써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가 이와 정반대의 경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교(여기서는 특별히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의미한다)의 큰 강조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공의와 거룩하심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성에 주어지지 않고, 영적인 필요에 대한 어떤 인상이나 일반적 느낌을 유도해 내는 일에 주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인상이나 일반적인 느낌을 소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또는 '그분으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들어오시게 하는 것'으로 칭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마치 그 모든 것이 몇분 사이에 다 이뤄지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에 대한 자발적인 접근이 성경에서 말하는 패턴(pattern)과 본보기에 반드시 조화되는 것은 아니다. 확신컨대, 사실 그리스도에게는 아주 빨리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보다 훨씬 길 수도 있고 단기간만 소요되는 경우일 수도 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회개란 '자기 개인의 부적격함을 순간적으로 인식하는 것' 또는 '죄악의 결과를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개념은 하나의 오류로서, 결국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를 맺을 것이다. 우리는 회개를 쉽고 단명하고 순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본능적인 경향이 있어서, 탕자의 삶에 분명히 제시된 것과 같은 그런 솔직한 자기 평가의 필요 의식을 고무시키는 가르침은 즉각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필자는 어떤 의미에서도 복음주의를 경시하거나 비난할 의도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가 보다 복음적인 활동에 충분히 매진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데 너무 망설임이 많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이 있다. 먼저 우리는 각 사람을 대할 때 개별적인 존재로서 대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경우마다 다 일정한 양식을 좇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져야 할 사람 자체보다도 그 메시지의 전달 양식이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함에 있어 가장 주된 것을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지 어떤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결과를 위해 항해 방향을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죄인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것과, 그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이해하고 감지하게 하고, 또 그것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꼭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들어서 그가 "구원을 받기 위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외치기에 이르도록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점에 관련하여 최고로 필요한 것은 경건하고 거룩한 자기 성찰과 자기 평가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삶의 진정한 상태를 깨우칠 수 있다. 당신이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져 있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 없이도 사는 비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한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실에 대해 솔직해지고 담대해지라. 솔직히 그 사실을 고백하고 그 사실에 직면하라.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 사실을 인정하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시인해야 하지만, 먼저 자기 자신과 하나님께 대해 솔직해지라. 당신의 마음을 성찰하라. 거기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지를 직시하라.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지 말고,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상(image)에 부합되는 것만 보려하지 말고, 당신에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람직한 모습에 조화되는 것만 보려 하지 말고 진실된 것을 보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더 나아가 우리는 탕자의 영적 순례의 이 단계에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 젊은이는 이 점에 있어 아주 솔직했다. 그는 "내가 죄를 얻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 즉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와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에 등을 돌리고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렸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다. 그는 "내가 죄를 얻었다"고 아무 조건없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시인한다.
 
 이러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여기서 묘사된 정경은 존 번연(John Bunyan)이 '천로역정'의 서장에서 아주 회화적으로 기술했던 순전하고도 구도적인 뉘우침의 체험과 같다. 그 책을 잃어 보았다면(읽어 보았기를, 아니면 앞으로라도 읽어 보기를 바란다) 아마 다음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이 세상의 거친 황무지를 지나다 나는 동굴이 하나 있는 어떤 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잠을 자기 위해 그곳에 몸을 눕혔다. 잠이 들었을 때 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누더기를 걸친 웬 사람이 자기 집을 등진 채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등에는 큰 짐을 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그 책을 펴서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곤경에 빠져 그는 집으로 갔고,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의 절망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자제했다. 그러나 그의 곤고는 더욱 커져가기만 하여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기 마음을 털어 놓았다. '오,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여, 나는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 짐 때문에 이제 틀렸소. 게다가 듣기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하늘에서 내리는 불에 타 버릴 것이라 하오.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도를 찾지 않는다면 나도, 아내인 당신도, 그리고 귀여운 우리 아이들도 다 그 불 속에 던져져 멸망해 버릴 것이오.'
 
 아내와 아이들이 그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했음을 물론이다. 회심치 못한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과 맞부딪힐 때의 경우가 늘 이렇지 않은가? 그들은 그 사람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정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전혀 듣지를 않는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회오와 불길한 예감은 점점 가증되어가기만 한다. 번역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나는 그가 들판을 걸어가면서 그 책을 읽는 것을, 그리고 마음에 크게 근심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울부짖듯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까?'라고 소리쳤다.
 
 나는 또 도망갈 길을 찾기라도 하듯 그가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전도자(Evangelist)라는 이름의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선생님, 이 책에서 보니 나는 죽어야 할 운명이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따른다고 하는군요. 나는 죽기도 싫고 심판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수 많은 고통을 당하는데 어째서 죽기가 싫습니까?'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즉 죄짐)이 나를 무덤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뜨릴까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난 아마 도멧으로 떨어질 겁니다. 그리고 선생님, 감옥에 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심판과 그 집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하는 이런 생각들이 나를 울게 만듭니다.'
 
 '당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면, 어째서 그냥 그렇게 서 있는 겁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전도자는 그에게 종이 두루마리를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고 씌어 있었다.
 
 이는 현재 탕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특징지워 주는 바로 그 특성이다. 그는 안식도 없이 끊임없이 불안케 하는 죄악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된 행동과 죄를 뉘우치고 있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이야기한 바 있는 솔직한 자기 평가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성령의 감화력 아래서 하나님의 법, 즉 어느 육체도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을 비추는 법을 적용하여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공포를 느낀다. 알다시피, 우리의 행동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고 이웃들에게 아무런 피해나 손해를 끼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 가장 내심으로부터의 생각들조차도 사실은 타인과 관계가 없는 일이 아니며, 그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 의식이나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 그러한 것도 역시 '우리의 소행'(our own business)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 삶의 모든 국면과 측면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심판자되시는 한분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깨우쳐야 할 교훈이다. 하지만 그 교훈을 깨우치기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인간이 보편적으로 처한 상태에 대해 우리 양심과 또 성경이 고소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신속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또 교묘히 받아넘기는가! 필자는 그런 일을 거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듣는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는 데는, 우리 안에 진정한 뉘우침과 회개의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고백을 하는 데는, 그러한 변명과 함께 고백한 것이 요구된다. 그 순간에 있어서만은 다른 사람은 중요치 않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이 당신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롬 3:23) 못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에 개인적으로 연루된 사람이 바로 당신임을 아무 의문이나 의심없이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또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당신은 '사형 선고'라는 바른 심판을 받았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그 죄를 깨끗이 하고자 한다면 임박한 진노를 피해야 한다. 탕자가 그랬듯이, 그리고 번연의 작품에 나오는 순례자가 그랬듯이 솔직하게, 그리고 무조건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내가 죄를 지었다'는 이 고백에는 아무 조건도 없고, 말을 억제하는 것도 없으며, 스스로를 의롭다 칭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당신 앞에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꿇어
엎드려 당신께 지은 내 죄를 봅니다.
생각으로, 행동으로, 말로 지은 죄
그것들이 나를 슬프게 짓누를 때
나는 당신께 울부짖습니다.
오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주 나의 하나님
당신께 기도합니다.
진노로써 나를 치지 마소서.
선하신 당신의 신이 나를 떠나지 말게 하옵시고
오히려 내 마음 가까이 다가와
내가 진정으로 뉘우칠 수 있게 하소서.
오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랜스타드(Magnus B. Landstad)
  
 탕자의 영적 편력의 이 단계에서 그가 자기 죄를 고백했다는 것 외에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죄로부터 진정으로 돌아섰다는 것과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기를 열망했다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죄악됨을 깨우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보다 분명히 말하자면,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오는 말을 기억해 보라. 이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 그 자체에 아주 충실한 말이 되고 있다. "죄인이 그의 지은 죄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공의로운 율법에 대치되는 것으로서, 위험하고 더러우며 추악하다는 사실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하다가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통회하는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긍휼을 깨닫게 될 때, 그는 그의 죄를 슬퍼하며 미워하여 죄를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그분과 동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노력하게 된다"(15장 1조).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위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논의하다 보면, 예를 들어 '완전한 통회'(contrition)와 '불충분한 회오'(attrition)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완전한 통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애써 정의해 온 진정한 복음주의적 회개이다. 그 반면 '불충분한 회오'는 그와는 매우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도 회개의 한 형태로서 논리상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회개이다. 죄를 유감으로 생각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불충분한 회오'는 그 말의 신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 징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회계이다. 말하자면 '불충분한 회오'는, 죄는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깨우침이긴 하되 하나님께 대한 신뢰나 그분께 불순종하는 길에서 돌이키려는 확고한 목적 같은 것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 것이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를 징계하시려는 그분의 결단을 인지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그분과 동행할 것을 목적으로하고 노력'하는 게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죄와 불순종의 삶을 후회하게 되기까지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죄악의 진상을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무 결실도 없고 무익하고 공허하고 불만족스러운 죄의 특성을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가 결국은 서게 될 심판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죄에 등을 돌리게 되지 않는 한, 이 점에 있어서 탕자의 삶을 특정지워주는 회개,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 되어야 할 회개에는 이를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이 결코 어떠한 오해의 여지도 허용치 않는 영역이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겔 18:30, 3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리스도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을 대상으로 사역하게 하셨다. 그리고 직접 사도에게 말씀하셨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8). 이 말씀은 물론 다른 여러 사람들의 말로 보족되었을 수도 있다. 회개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성경은 "회개란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죄악을 버리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죄로부터 돌이켜서 하나님께 새로이 복종하려는 목적을 가짐과 동시에 죄악을 버리지 않는다면, 단순히 지옥과 징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는 회개라면, 그것은 전혀 회개가 아니다.
 
 '천로역정'의 그 주목할 만한 서장의 몇 구절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순례자는 거기에서 전도자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는 경고를 받는다. 이 엄숙한 메시지를 전달받은 후 그는 전도자를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어디로 도망가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전도자는 손가락으로 넓디넓은 벌판을 가리키면서 "저 들판 너무 좁은 문이 보입니까?"라고 물었다. "안 보이는데요."라고 대답하자 전도자는 "저 너머에서 불빛이 비취는 게 보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보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전도자는 "그 불빛을 따라 곧장 가면 그 문이 나올 겁니다. 거기 가서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하라고 말을 해줄 겁니다"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꿈 속에서 그 사람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집을 얼마 벗어나지도 않아, 그 사실을 눈치챈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오라고 그의 등에다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 소리치며 계속 달려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그는 벌판 한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이웃들도 그가 달리는 것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 중에는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위협하는 사람도 있었고, 돌아오라고 그의 등에다 대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 그를 강제로라도 데려오기로 한 사람 둘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고집쟁이(Obstinate)였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변덕쟁이(Pliable)였다. 이제 그들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그를 뒤쫓기로 했고 결국 얼마 안돼서 그들은 그를 따라 잡았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이웃들이여,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요?'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와 함께 돌아가자고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요.'
 
 '결코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들은 멸망의 도시(장망성: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에 살고 있지요. 내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당신들은 조마간 그곳에서 죽을 것입니다. 무덤보다 더 깊은 곳, 불과 유황불이 타고 있는 것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이웃들이여, 나와 함께 가십시다.'
 
 '뭐라구요?' 고집쟁이가 말했다. '친구들과 모든 즐거움들을 다 남겨 두고 떠나자구요?'
 
 '네'라고 그 사람 그리스도인(이것이 그의 이름이었다)은 말했다.
 
 '당신이 버리는 그 모든 것은 지금 내가 누리고자 구하는 것과는 조금도 비교가 안되는 것들입니다. 나와 함께 가서 그것을 취하면 나와 똑같이 편히 살 수 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는 모든 것이 충분해요. 같이 가십시다. 내 말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하는 것은 도대체 뭡니까?'라고 고집쟁이는 물었다.
 
 '나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기업을 구합니다. 그것은 하늘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데, 때가 되면 그것을 힘써 구하는 자들에게 주도록 되어 있지요. 원하신다면 이걸 읽어 보십시오. 내 책 속에 다 씌어 있으니까.'
 
 여기에서의 교훈은 지극히 평이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의 전후 순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보라(눅 15:18-20a). 탕자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런 말이 따른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는 먼 나라를 등뒤로 하였다. 그는 범죄 하였고, 그 사실을 슬퍼하였으며, 그 먼 땅에서 거의 파멸하다시피 한 자신의 불행에 대해 비참함과 절망감을 모두 겪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탄식하고 잃어버린 자신의 특권을 슬퍼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등을 돌리고 멀리 떠났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참되고 복음적인 회개의 근본이 되는 부분이다.
 
 죄 때문에 겪은 슬픔과 비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특히 복음주의적인 설교와 관련하여 이런 일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복음의 제의에 응답을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성찰하고 자기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 하지만 마음의 감동이 엷어지고 감동이 사라지면 곧 전과 똑같은 죄악과 경건치 못한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들은 회개 뒤에 따르는 행동으로써 그 회개가 그저 '말뿐만의' 회개였음을 증명하고 만다. 그것은 그저 '말'일 뿐이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는 한 순전한 회개란 있을 수 없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라고 번역된 헬라오 '메타노이아'(metanoia)가 바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을 아주 구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그 말은 '마음의 변화', '삶의 방향에 있어서의 반전', '전향'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회개를 한다는 것은 본질상 소극적인 성격의 어떤 일을 하는 것, 즉 죄를 멀리 치워 없애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것, 즉 불순종과 죄로부터 돌이켜 그 대신 하나님 쪽으로 돌아서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탕자의 인생 역정을 보면 회개의 이러한 국면이 얼마나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자기 아버지에게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끔씩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했을 때부터 그의 슬픔은 시작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제한과 제재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하여, 나중에야 자기 몫이 될 유산을 미리 요구했다. 그리고 바라던 것을 손에 넣자, "그후 며칠이 못 되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했다. 먼 나라에 있는 동안 그는 아버지의 얼굴과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썼다. 돈이 다 떨어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혀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운 대책과 생각으로 그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 타개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돌이켰을 때에야,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해 마침내 희미하게 의식했을 때에야,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나와 멀어진 상태가 얼마나 황막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를 향한, 집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여행도 시작됐다. 이제 그는 죄는 불순종과 반항의 길을 되돌아 보고 그리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용서와 화해가 있는 전방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다.

아버지여, 이 죄인을 용납하여 주시고
아드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소서.
아버지를 떠나간 지 벌써 오래되었고
길 험해서 곤한 몸이 이제 돌아옵니다.

전에 하던 헛된 일을 원통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엎드려서 용서하심을 빕니다.
은혜 감당못하오나 회개하는 영혼과
나의 약한 육신까지 감히 드리옵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려 주님 죽으셨으니
그 공로를 의지하여 주만 의지합니다.
아버지여, 용납하사 나를 품어 주시고
주의 사랑 품 안에서 길이 살게 하소서.
팔머(Ray Palmer)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위의 찬송 가사와 같은 체험을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독교 사역에 들어서서, 자기 자신과 또 자신이 죄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로 되돌아올 필요성을 많은 고통과 고뇌로써 깨우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저명한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생생하게 설명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우리는 위대한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생각할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모든 제도와 그것이 제시하는 처방책으로 혼란된 양심의 평화를 찾으려 수년 간 애썼지만, 그 양심의 평화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또 한 예로, 스코틀랜드의 2차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을 들어 보자. 그는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감리교 부흥 운동의 강력한 복음 전도자 존 웨슬레(John Wesley)도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의를 위한 절망적인 몸부림 속에서 생명을 찾으려 했으나, 마침내 그가 발견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마음을 구주께로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예에서보다 더 아름답고 힘있게 예시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는 최근 백여 년 간에 있어 가장 뛰어난 기독교 신학자이자 정치 지도자였다. 카이퍼는 특히 자기 나라 네덜란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컸다. 그는 힘있는 복음 설교자였고, 큰 대학(자유대학)의 설립자였고, 주요 기독교 정당의 당수였고, 비류가 없을 정도의 탁월한 신학자였으며, 몇 년 간 자기 나라의 수상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1898년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행한 [칼빈주의 강연](Stone Lectures on Calvinism)이라는 강의는 칼빈주의 분야에 있어 고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한때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리스도나 회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이 그런 사역에 임했었다. 그가 일련의 가난하고 무지하고 교양없는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고 구원의 의미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접촉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사역 초기에 한 지역 교회에서였다. 카이퍼는 두뇌가 명석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교양과 세련미를 갖춘 사람이었고 열심있고 경건했으며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도덕적이었고 존경할 만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아버지를 떠나 유리하고 있는 탕자이기도 했다.
 
 카이퍼 박사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그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의 친분을 통해서였다. 특히 피에트로넬라 발투스(Pietronella Baltus)라는 젊은 여성이 그의 인생에 크게 유익을 끼쳤다. 우연히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카이퍼가 행하는 설교의 성격을 노하면서 그가 회심해야 할 필요성과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피난처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카이퍼와 같은 위치의 사람이라면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주제넘다고 도도하게 무시해 넘겼을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마음이 갈급할 때면 곧잘 그녀를 찾아가 솔직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이퍼는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무력한 자유주의와 관계를 끊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되시는 분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섰다. 그 이후 평생 동안 그는 자신을 피에트로넬라 발투스에게로, 그리고 그녀와 같은 사람들에게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지냈다. 그리고 거의 50여년 후 , 1914년 여든 넷을 일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그 명성이 최절정에 달해 있던 카이퍼 박사는 네덜란드의 주도적 일간지의 편집인으로서 그녀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면서, "나로 하여금 나를 보게 해주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내 얼굴을 돌리게 해준 사람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했다.
 
 루터와 헨더슨, 웨슬레, 카이퍼가 겪은 체험은 역사를 통하여 다른 수천 수만 신자들의 체험이 되어 오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바로 당신의 삶에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의 경우는 주님께서 탕자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의 예증들일 뿐이다. 그들은 탕자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잃어버린 상태로부터, 그리고 방황의 상태로부터 돌이켜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덧붙여 말해야 할 것이 있다.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일에는 염려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이제 탕자에게는 뽐내는 기색이나 건방진 태도가 전혀 없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의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들된 자격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추측하지도 않는다. 그는 잃어버린 자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일고 있고, 단 한 가지 대안 외에는 아무 소망도 없다는 것, 다른 모든 대책을 다 소용없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오래 전에 버리고 떠나온 집과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로서의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그 따뜻하고 자애롭고 사랑이 있는 집의 종으로서 종처럼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간청해 보리라 결심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도 그와 같이 아버지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되, 권리나 특권이나 대권이나 우리 자신의 의나 그 어느 것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며 나아가야 한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토플레디(A. M. Tolady)

제6장
아버지여 아버지여
 
 지금까지 오랫동안 예수님의 탕자 비유를 공부해 왔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백미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먼 나라에서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죄악된 인간 삶의 종말이 어떠한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개는 그 자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아니 그보다 다른 어떤 분을 지향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의 정신 구조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아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는 탕자가 먼 나라에서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로 결심한 것을 보았다. 그에게 제 정신이 든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모습에 관해 다시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집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없음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아래 구절에서 우리는 그가 정말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라는 말씀을 본다.
 
 하지만 그 말에는 난점이 놓여 있다. 아버지 앞에 자신을 낮추기로 한 이 탕자가 만일 아버지에게 거부를 당하고 내쫓기고 버림을 당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가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혈육간의 정을 끊은 것, 방탕한 삶, 훌륭하고 참되고 거룩한 것을 고의적으로 그리고 사악하게 멀리한 것 등은 그에게 재앙을 불러왔고,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자신분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냥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죄는 영원히 죄인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죄의 결과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만일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과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아버지가 실망과 슬픔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져 버려 기다림을 그치고 아들을 다시 보거나 받아들일 소망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의 그릇된 행동과 죄악에 합당한 태도로 탕자를 대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 먼 나라에서 길고 피곤한 여행 끝에 집에 돌아왔더니, 돌아오는 기간 내내 기대와 결단을 되풀이하며 와 보았더니 그를 반겨줄 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야 할 아버지, 그 앞에 은총을 간구해야 할 아버지, 그를 용서해 주고 그 집에서 종노릇이라도 하게 해줄 아버지가 안계심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이러한 의문들이 점점 불어나서 서로 이리저리 얼키고 설키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없다면 탕자의 존재는 무엇이겠는가? 죄인이 집으로 돌아와서 영접을 받지 못한다면, 상처를 치유받고 회복되고 용서받지 못한다면 죄인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위로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여기에 제기된 의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는 물론 중요하다. 서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웃들에게 어떻게 의롭고 예의바르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할까?-이러한 문제들의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다른 어떤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에 대해 중대한 오류가 저질러지고 있다. 인간은 인생의 도덕적, 영적 국면에 속하는 일의 개요 내지 본질을 다음과 같은 개념, 즉 인간 서로에 대한 비인간성을 고쳐 주는 것만이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광대하고도 결정적인 차원에 있어서의 아버지와 아버지 집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 세대는 하나님께 대하여 저질러진 죄의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 없으면 그 어떤 일도 의미를 가질 수 없건만 우리 세대는 그 관계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으며, 아무리 올바른 인간 관계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기초도 없고 받침대도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러한 인식이 부재한다는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이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있을 수 없음을 필자는 다시금 말하고자 한다. 아마도 당신은 삶과 죽음에 관련된 문제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 왔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가능한 한 자기 자신에 국한하여 살면서 남에게 큰 손해를 안 끼치고 황금률(마 7:12 ; 눅 6:31)에 따라 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죄의 문제와 하나님의 은혜를 고의적으로 무시해 왔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을 띠고 있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별 해가 없는 소일거리이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취하는 것, 자기가 죄인이며 구주를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만일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위로가 된다면, 그런 생각과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계속 추론해 온 사람, 아니 적어도 추론해 온 것처럼 사는 사람은 당신 외에도 많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사고 과정이 되기보다는 궁극적인 결과를 무시하고 단순히 삶을 있는 그대로 사는 과정인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그와 똑같은 사고 노선-아니 어느 정도는 행동 노선-을 밝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등록 명부는 장로교면 장로교, 성공회면 성공회, 침례교면 침례교, 또는 감리교면 감리교, 그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어떤 사람이고 자신을 그 명부에서 제거시키려고 하면 충격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화까지 낼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차 있지만, 슬프게도 그런 등록 명부가 교회의 삶에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적극적인 삶의 문제에 이르러 보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는 삶인지의 여부를 따져 보면, 그리고 사도 바울이 "성령의 생각"(롬 8:27)이라 칭한 것이 현시되고 있는 삶인가를 따져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매가 맺혔다는, 그리고 회개와 회심과 믿음의 순종이 있다는 데 대한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징치하는 것도 교회의 한 임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자기가 신앙을 고백한 교회의 회중적 삶 내에서 아무런 역할도 말고 있지 않은 자, 복음에 아무 관심이 없음이 명백한 자, 주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 아무런 표도 없는 자는 교회내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고 또 그들은 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분의 얼굴을 구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움 받아야 한다고도 성경은 밝히고 있다. 사실 그런 일에 무관심한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성경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요일 5:19)이라고 말한다. 이 악함은 탕자의 악함 만큼이나 크고, 탕자의 악함 만큼이나 악화되어 있고, 탕자의 악함 만큼이나 심각함, 탕자의 악함 만큼이나 크게 회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깊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그렇게 조금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진리의 거친 모서리를 문질러 없애 버렸으면 하는 사람, 죄인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원래 주님께서 정하신 것보다 요구가 적고 열심도 덜 필요하고 좀 덜 비천한 길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핍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자기 개인의 부적격함에 대한 일시적인 의식, 그리스도에 대한 감상적인 개념과 연계된 애매한 신앙고백, 교회와 믿음 생활에 대한 감상적인 개념과 연계된 애매한 신앙고백, 교회와 믿음 생활에 대한 느슨하고 별 요구가 없는 관계-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그리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이란 이런 것들 뿐이다. 교회의 명부에 등록이 되었으므로, 또 성경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줄기차게 입으로만 아첨함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고 더 이상 요구되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어쩌면 당신도 거기 속할지 모른다) 필자는 두렵다. 하지만 친구여, 그게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무분별한 사역자나 정신 상태가 해이한 회중들의 뒤에 서 계시면서 그들에 대한 약속의 보증이나 되어 주시지는 않는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요구는 무조건적이고 엄격하고 사람을 지극히 겸손케 하는 것으로서, 일점일획도 제하여지지 않는다.
 
 당신이 큰 무리 중에 있고 같은 마음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는 별 중요성이 없다. 단순히 사람들의 수효가 진리를 결정짓는 기준(criterion)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 당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들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그 수효의 많음은 결코 당신의 이익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심각한 영적 어두움과 현상황에 대한 무관심은 복음이 분명하고 힘있게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더욱 긴박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우리 인간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그것이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 문제라고 대답하겠다. 친구여, 당신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죄 때문에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당신으로부터 가리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분을 떠나서는 인생에 아무 실제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분을 찾지 못하면 지옥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지옥이란 말을 아주 듣기 싫어한다. 추측컨대 이 말이 잘 쓰이지 않게 된 것은, 성경의 지옥의 존재를 아주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가 그 단어를 여기 쓰는 것은 위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을 강제적으로 믿음의 방향으로, 하나님의 방향으로 어떻게는 몰아가기 위한 채찍질로 삼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필자는 단지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이 없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이 없으면, 탕자 비유에서처럼 기다리는 아버지가 없으면, 당신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전망으로써 이제 당신은 필자가 말하는 것의 진실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 진실이란 다름 아닌-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 문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이다-당신에게는 그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분을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 당신은 그분 없이는 살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탕자가 우리에게 남기는 최종적 교훈을 하나님 없는 인간의 영적 외로움이다. 처음에 그를 만족시켜 주었던 친구들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친구들은 그에게 돈이 있는 동안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 삶을 함께 나누었다. 하지만 돈이 다 없어지자 그들은 사라졌다. 모두 다급할 때에 의지할 수 없는 친구들이었고 잠깐의 즐거움을 위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결함을 팔아 버리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궁핍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나 가난한 구걸꾼의 짐과 염려를 함께 나눠 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돈 한 푼 없이 곤궁하게 되어 그 낯선 땅에서 돼지치기라는 가장 비천한 직업인이 된 탕자는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 그는 혼자였다. 다른 아무도, 그가 돌아볼 사람도, 자기말을 들어 줄 것이란 소망을 갖고 자비를 구할 사람도 없었다. 그는 완전히 버림받은 것으로 보였다.
 
 당신도 알겠지만, 혼자라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때때로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외로움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뒤에 홀로 남겨진 사람을 생각해 보라. 동년배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없어 진정한 친구를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된 사람을 생각해 보라. 인생의 한창 때가 다 지난 삶,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 과부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와 돌봄에서 단절된 사람을 생각해 보라. 잠깐 돌아보기만 해도 우리 주위에는 버림받았고 사랑받지 못 한다고 느끼는 사람, 사랑해 주는 이도 없고 돌보아 주는 이도 없는 사람, 인생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기쁨 또한 함께 나눠 줄 자가 없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육신의 고립이 반드시 외로움의 최악의 형태는 아니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홀로 된 외로움을 경감시켜 주는 어떤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남보다 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이긴 하되 그 외로움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리스도와 매일 함께 하는 것으로써 보상됨을 깨달은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꿀벌처럼 바쁘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사는 사람 중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필자 자신의 체험을 말하자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그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하나도 없는 낯선 도시에 혼자 있어 본 적이 있는데, 그때보다 더 심한 외로움을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우리 시대의 대도시들은 자기 나름의 방법, 즉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침묵으로 찾으면서 끊임없이 외쳐 보지만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하는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아주 많은 사람들과 육신적으로 가까이 있다 해도, 결코 혼자 살게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 영혼의 그 에는 듯하고 고통스러운 공허함의 견지에서 본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 이렇게 짤막하게 언급해 가지고서는 탕자가 겪었던 것과 같은 외로움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옛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탕자에게 돈이 많이 있어서 그들에게 호감과 매력을 줄 수 있었을 때에도 그들이 과연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들과의 관계는 순전히 외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행동을 함께 했다. 그들은 함께 즐겼다. 그들은 함께 돈을 썼다. 그들은 함께 쾌락을 누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으로는 이를 수 없었다. 후에 탕자가 겪게 되었던 외로움은 그의 내부에 늘 있어 왔던 것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가 짓밟고 무시했던 것, 그의 껍질만의 마음의 평화가 그로 하여금 부인하게 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궁핍하기 시작하자 겉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인 그때에야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를 깨닫고 그 격랑에 빠졌고 그 물결에 휩싸여 거의 익사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 잘 보라. 그의 외로움은 본질상 육신적인 것이 아니었다. 친구가 없음으로 해서 야기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음으로 인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 그에게 엄습한 외로움이었다. 돈은 다 써버렸고 친구는 가버렸다. 그는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태를 완전히 철저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였다. 그리고 결국 문제가 되는 유일한 일,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유일한 일은 그가 내쫓김당하고 멸시당하고 거부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까지 그의 인생을 받쳐주고 방향 지도를 해주신, 그의 전 존재를 구성해 주고 결정해 주던 아버지의 사랑은 이제 완전히 상실되었고 영원히 가버린 것처럼 보였다.
 
 절망에 가까운 심정이 그의 영혼을 위협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절망에 가까운'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절망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그 절망을 완전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의 앞날은 완전히 캄캄해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비참한 그의 영혼에 희미한 빛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탕자는 또 다른 탕자들, 즉 당신과 필자의 거울이자 한 양식이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 마침내 나에게 새로운 여명이 비춰오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때는 영혼이 끔찍이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이다. 즉, 자신의 실패와 영적인 외로움과 궁핍과 범죄 사실과 비난받아 마땅함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심판 받아 마땅함과 그분이 없는 나의 삶은 무용지물인 것을 직시해야 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어둠 가운데 희미한 빛이 비췸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여기서 탕자가 결국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따라서 버림받은 것이 명백한 사람, 죄를 뉘우쳐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자포자기했던 사람 등 그 어떤 사람도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버려진 아들이 영적으로 회복되어 가는 첫단계에는 우리의 시야 저너머에 또 하나의 어떤 사실, 즉각 그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고, 그 또한 알게 되었던 어떤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방탕한 아들과 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통받으시고 죽으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영속하는 그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절망조차도 우리를 빛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만일 죄인이 비유 속의 탕자와 같은 경로를 좇는다면, 그럴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 호세아도 그 사실을 매우 아름다운 표현을 써서 진술한 바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거기서 비로소...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호 2:15)라고 하셨다. 아골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위하기 시작했을 때, 패망한 여리고에서 보물을 훔친 아간이 심판을 받았던 곳이다(수 7장). 그래서 그곳은 치욕, 죄, 불순종, 심판, 소망없음을 상징하는 곳이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망 자체가 죽어 없어진 그 진노와 비참함의 땅을 취하셔서 소망의 바로 그 문, 회복과 죄 사함과 용서와 사랑의 문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일 하기를 기뻐하신다. 그 이유는 이제 우리가 간단히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놀랍게 선포되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하시는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잃어버린 자들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는 궁극적 위안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하면 어쩌나"하는 우리의 의심, 우리의 망설임, 우리의 의문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영광스럽게 긍정함으로써 대답되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은 당신이 있는 곳, 당신의 죄, 당신의 불순종, 스스로 황폐하게 만든 당신의 삶, 죽음으로 끝날 것 같고 무익해 보이는 당신의 존재 가운데에 임하여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고, 정말 혼자가 아니며, 전혀 혼자가 아니다. 그 사랑, 인도하시고 방향을 지시하시며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는 그 사랑은 탕자를 위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을 위해서도 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윌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편 1-3절)

제7장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탕자 비유를 공부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의 핵심적인 내용에 이르렀다. 즉, 탕자가 자기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에 이르른 것이다. 앞서의 세세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 장면을 위해서 있었던 이야기들이다. 물론 탕자의 인생 여정 자체도 이제 중반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의 뒤, 그의 건너편, 그의 위-무한히 휘-에는 그보다 더 탁월하게 중요한 어떤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아버지이시다.
 
 사형 집행인들이 예수님의 상한 몸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동안 그분께서는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놀랍고도 영원히 잊지 못할 기도를 드리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분의 간구는 자신을 못박는 로마 군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 그들은 바로 우리들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살 속으로 못을 박은 것은 우리들이고,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도 우리들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의 성육신이 있어야 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따라서 사형 집행인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것이며, 모든 죄인, 그분이 구원하시려는 모든 방탕한 아들과 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모든 회개한 탕자들의 아버지이신 그분의 아버지는 그분의 그 중재에 얼마나 충분하게 응답하셨는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 자체로부터나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각 장들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예들을 인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와 별개로,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해 우리가 지금 생각해 보고 있는 구절보다 더 감동적인 언급은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이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구절도 없을 것이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표현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포괄적이고 포용력이 있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도 넓다. 아버지가 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라. 그것은 방탕한 아들이 아니었는가! '보고'라는 말과 '측은히 여겨'라는 말이 서로 그렇게 근접해 있는 것은 바로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아들의 가엾은 처지를 보고 그 아버지의 마음에 전에 없던 동정심이 생겨났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에서는 그런 개념이 추출될 수가 없다.
 
 그보다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진리는 죄인의 상태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방해물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탕자는 자신을 지탱시켜 주던 아버지 집의 사랑과 염려에서 스스로를 단절시켰으며,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한 삶에다 허비했다. 부자관계를 파기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자기 자신을 죄악의 삶 속에 던져 버리고, 스스로 타락하고, 자신의 이름은 물론 아버지의 이름에까지 불명예를 끼치는 온갖 일을 다한 것은 바로 그였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의 그의 모습과 지금의 그의 모습 사이의 대조점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그가 먼 나라에서 돈이 다 떨어져 궁핍가운데 홀로 남아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을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그렇다.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시선이 가 닿은 사람은 예전의 그 아들이 아니었다. 우선 그는 외모부터가 달라졌다. 건강도 상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발에서 상처가 나 있었고, 쇠약해진 그의 몸에는 떠날 때 그가 지녔던 화려한 옷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금은 누더기가 다 되어 버린 옷이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외관상의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육신의 비참한 상태는 그 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즉 죄인으로, 반항자로, 제멋대로 감사할 줄 모르며 사랑받을 가치도 없는 방탕한 아들로 살아왔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처음에 그는 옷도 잘 입고, 체구도 좋고, 준수하며 자신에 차있는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악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께 대해 범죄했다. 그의 안에 심어졌던 악의 열매, 그의 옛 사람은 이제 명백히 드러나 그 누구의 눈에도, 자기 아버지의 눈에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죄와 비참함과 잃어버린 상태 가운데 있는 그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믿는 교훈은, 복음은 가장 악한 자조차도 품어 주기 때문에 복음이 가져다 주는 구원은 위대한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지신의 파멸 상태를 알고 용서와 회복을 구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임하는 사랑은 결코 우리가 받을 만해서 받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은혜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 우리의 죄와 반항심과 부패함은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 부분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구제된다면, 우리 죄가 사함받는다면, 영생과 죽음에서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러한 이해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여기 묘사하시는 또 하나의 대조, 즉 젊은이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예상했던 것과 정작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영접해 준 것 간의 차이로도 설명이 되고 있다. 먼 나라에서 돼지를 치면서 아버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자신의 슬픔과 회오를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그가 전전긍긍하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것을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의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염려와 불확실함이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 아버지에게 아들 행세를 할 권리가 이제 없다고 생각했다. 한때 그는 아들이었었으나 무례한 태도와 그 뒤의 방탕한 생활로 부자관계를 절연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아직도 아들로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아버지와의 사이에 과연 얼마만한 거리를 자초한 것인지를 생각할 때에 도저히 자신을 아버지의 아들로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반짝이는 한 줄기 소망과 기대의 빛이 있었다. 그는 계속하여 '내 아버지'에 대해서 말한다. 부자 관계는 아직도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소유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빚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로서의 권리와 특권과 대권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궁핍에 처하기 시작하자,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자 할 수 있는 일로 생각되는 유일한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그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 유일한 소망은 그의 아버지에게 있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에게 요청하기로 한 것은 아들의 신분이 아니라, 전에 더 큰 세상에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길 떠날 때 그렇게 기세 좋게 아무 미련없이 떠나온 그 집의 품꾼 자리였다. 이때의 그의 마음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 시편 기자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한때는 저버렸지만 이제는 그렇게 가고 싶은 복된 아버지 집에서 품꾼이나 문지기로 있는 것이 그에게는 먼 나라가 주는 위로나 호사, 매력, 그리고 영혼을 파괴시키는 부패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는 거기에 마음을 두었다.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모든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다 벗어 버리고 오직 아버지의 긍휼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탕자는 품꾼의 자리도, 문지기 자리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구약성경에는 제멋대로인 자녀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부모들에게 엄격히 규정된 사항을 말씀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자녀가 반항하고 불순종하고 제멋대로일 때 아버지는 그 자녀를 위와 같이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방탕한 아들을 이렇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기다려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아버지에게 그 세월은 얼마나 길었을 것이며 얼마나 전망이 없고 암담한 나날들이었을 것인가! 방탕한 아들이 돌아올 소망은 전혀 없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들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날마다 그는 길가에 서서 행여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못 볼세라 먼 곳을 바라보곤 하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탕자가 탐내던 자리인 품꾼 중의 하나가 그가 돌아온다는 것을 제일 처음 아버지에게 통고해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한다. 그 자신의 상처, 자신과 자신의 선함을 거스린 것, 타락되고 불명예스러운 아들의 삶, 이 모든 것을 아버지는 무시하지 않았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방탕한 아들에 대해 그가 느끼는 사랑을 조금도 소멸시키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에 대해 얼마나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가! 예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셨을 때 의도했던 진리는 이렇게 실제적이고 꼭 필요한 진리이다. 또 다음 말씀도 보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눅 5:31).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교만하고 자고한 자,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자,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치명적인 부분을 좀먹어 들어가고 있는 악하고 암적인 상태가 개선되어가고 있는 중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이 탕자처럼 은혜를 구하며 나아오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탕자 비유의 이 부분을 살펴봄에 있어 우리가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광대하고 뿌리 깊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탕자 비유 자체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 중요한 특성에 대해 그리 많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는 매우 자명한 사실임에 분명하다. 이 이야기 전체의 일관된 요소, 결코 변화가 없고 그 근거를 옮기지 않으며 아들의 고집과 반항에 영향을 받지 않고 번복되지도 않는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래서 아들이 그 먼 나라,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그 사랑은 탕자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주조하고 인도하고 밀어주면서 계속 존재하였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버지에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된 인생이 처한 상태를 결코 가지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는다. 죄를 뉘우치면서 용서해 주실 것과 회복시켜 주실 것을 구하면서 그분 앞에 우리 자신을 드러낼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게 아닌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선행하는 사랑이다. 이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보다 우위에 있고 항상 그보다 앞서가는 사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선행성에 대해 얼마나 많이 가르치고 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7-10). 그리고 같은 장에서 우리는 단순히 다음과 같은 말씀도 읽는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이 사랑은 단지 시간상으로만 선행하는 사랑이 아니다. 단순히 역사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였고 이미 지난 날부터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오늘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위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또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을 듣는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14).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8, 29).
 
 이는 하나님 사랑의 선재성, 선행성을 주제로 하는 말씀의 몇몇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백성들이 그분께 대해 어떤 사랑을 가지든 그것을 그들을 위해 그분께서 먼저 가지신 사랑에 유일하고도 견고하게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 복음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는 첫 번째의 말씀이 있고 그분께서 목소리를 높여 전능하신 명령을 내림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복음의 영광, 복음의 최절정을 이루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영원한 계획이라는 것, 그 분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은 영원히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통일성과 힘을 갖도록 받쳐 주고 장식해 주는 원칙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성, 주권, 선행성 그리고 영원성이다.
 
 따라서 토플레디(Augustus Toplady)가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여,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광은 오직 당신께만 합당하나니
우리는 당신의 면류관에서
감히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고
빼앗지도 못하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사랑에 관하여 강조되어야 할 세 번째 큰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에 있어 그것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구원하시는 특성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마음 자세도 아니고 그가 처해 있는 유감스런 상태에 대한 동정심도 아니다. 그런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것을 수동적이고 비효과적으로, 궁극적으론 아무 의미없이 정의한 것이다. 나의 비참함을 함께 나눠줄 사람이 있음을 알면 자기가 전적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로 조금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도움과 하나님의 도움 사이의 대조점이다. 물론 이웃들의 존재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수 없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준다. 다른 사람의 위로와 도움과 보조와 인도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유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당신은 어찌 되었겠는가? 혹은 지혜로운 선생님이 없었다면? 너그러운 친구가 없었다면? 하지만 감히 주장하건데, 영원의 문제, 죄와 심판과 정죄의 문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문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과 무가치함의 문제에 이르면 인간의 도움은 아무리 그 의도가 훌륭하다 해도, 아무리 현명하고 순전하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우리 앞에 영광스러운 사실 한 가지가 제시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순전히 이론적인 것, 역사상의 사건, 사실들과 유리되어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닐, 성취하고 구원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으시고 구하셔서 마침내 발견하시고 구원하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때에 그분을 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사 55:6).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시면서 다가와 우리를 발견하시고 당신께로 돌이킬 의지와 욕구를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아버지를 묘사하는 정경이 이 진리를 입증하고 있다. 아들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가 보라.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우리는 이렇게 아들을 받아들여 옛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능동적 사역의 궁극적 결과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 세 가지는 동류로 취급될 수 있는 것으로서, 모드 비슷한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목자는 무사히 있는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서, 결국은 그 양을 찾아가지고 데리고 온다.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은 여자는 집안을 샅샅이 뒤져 그것을 찾아내어 원래 있던 곳에 갖다 놓는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당신의 양, 잃어버린 당신의 보물, 당신의 아들을 찾으신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아니 능동적으로 그로 하여금 돌아올 수 있게 하기까지!
 
 이 비유와 또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 내에는 인간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사이의 차이점이 대조되어 있다고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분이 보내시는 구세주는 그리스도이시다. 이 위대한 현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죄를 회개하고 믿는다는 조건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복음은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남녀노소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교회의 사명은 '모든 족속'(마 28:19)에게까지 미친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복음은 단순히 그것을 제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성경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에는 구원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임한다는 확실성도 있다.
 
 따라서 탕자와 마찬가지로 바로 이 진리에서 우리는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근거하여 행동하기도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의 뿌리는 우리의 사람됨에 있지 않고 영원에 있다. 아버지는 왜 이런 아들을 그리 반갑게 맞아들였을까?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버지 자신의 사람됨(person)과 존재된(being)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또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신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속성 중에 다른 것에 비해 하나님의 궁극적 존재를 보다 본질적이고도 보다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속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모든 덕과 탁월함 중에서 가장 하나님다운 것은 그분의 '남다름', 즉 그분의 초월성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분의 '거룩함'이야말로 그분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특성으로서, 다른 모든 특성들 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 어느 속성도, 즉 그분의 영원성이나 의로움이나 거룩함 등 그분의 속성 중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특별히 더 중요한 것으로 지목되어 높여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완전하시며 모든 속성에 있어 다 동일하시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하나님의 위대한 특성 중에 다른 것보다 비교적 더 훌륭한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 예를 든 특성인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고도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분의 최고의 영광이자 완전함이다. 그분은 우리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 있고, 또 죄와 뉘우칠 줄 모르는 죄인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가리워 덮어지게 하였고 대속을 가능케 하셨다. 즉, 그분은 그분의 피를 믿는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양자된 형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리트(Henry Lyte)가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제8장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서는 탕자 비유에 묘사된 것을 통해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동정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그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 설명된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보다 더 중요하고 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는 인간의 공허하고 무력한 동정심과 연민이 하나님의 능하시고 효과적이며 구원하시는 동정심과 대조되어 있다고 앞에서 이미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능히 이루실 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다는 아닌 것이다.
 
 성경 해석학자들 중에는 탕자 비유가 어떤 의미에서 복음 전체를 대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에반겔리움 인 에반겔리오(evangelium in evangelio), 즉 '복음안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gospel)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구원의 방법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다 이 안에 주어져 있고, 또 사실상 우리는 구주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의해 옹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은혜로운 용서하심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된다. 죄에서 놓임 받기 위해 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과 뉘우치는 마음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해석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인식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죄를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을 시에는 그 죄를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온유하시며 은혜로우시고 또 자비로우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을 이렇게 온화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영원히 징벌하신다는 개념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으로 끝이 나는, 즉 징계는 임박한 진노에의 전조가 아니라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고 가르치기까지 한다. 그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결국 모두를 구원하실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결국에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동을 깨우치고 인정하게 하시며 또 그분을 의지하게 만드신다. 하지만 죄값을 치르게 하시지도 않고 그저 은혜로이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복음이 탕자 비유라는 한가지 비유의 반경 내에 다 포괄된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똑같은 이유에 의해 위의 두 가지 말은 모두 부인되어야 한다.
 
 시내 산에서의 환상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시는 음성이 들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번죄 사실을 지워주기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병행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실의 엄청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절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을 거시다. 그분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내려 두실 수도 있었고 제멋대로 하게 두실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 이상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의 맹목성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당신 자신에 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로 하셨다. 그래서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이 인애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미 7:18).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분의 공의와 공평은 죄악이 징계될 것을 요구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에서 놓여남이 없다는 원칙은 성경의 아주 초두에서부터 제시되어 있다. 연속되는 구속 역사 전반을 통하여 그 위대한 진리는 계속 되풀이된다. 죄는 무한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저질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무한한 성격을 띠고 있다.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벌칙 이외에 그 어떤 법칙도 범죄나 죄악의 사실을 일소시키는 데 충분치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 주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함과 진실하심이 풍성하시다는 사실을 보면서 동시에 성막에서 맨처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전 그 자체에서의 희생의 피에 의해 죄의 본성을 일깨움받고 또 죄가 지워 없어지는 것은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이루어 지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그 축도를 볼 수 있고, 또 구약 시대에 있어 예배의 한 원리로서의 율법에 의한 동물 희생은 암시이자 상장이었으며, 그러한 것들은 궁극적으로 한 가지 사실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찬송가 작사가인 왓츠(Isaac Watts)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노랫말로 표현했다.

유대인의 제단 위에 뿌려진
모든 동물의 피로도
죄악된 양심에 평강을 줄 수 없고
얼룩을 씻어 줄 수 없네.


 레위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예배의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염소 그리고 어린 암소의 죽음 그 자체에는 권위도, 능력도, 효력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아니 두 가지 일을 하는데 사실상 한 가지나 마찬가지이다-그것은 죄의 심각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는 제공될 죄에 대한 궁극적인 처방책을 지시해 준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를 공설 도살장, 또는 대살륙의 종교라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그리고 신약 시대 예배의 대속의 중심 교리를 밝혀주기 위해서도) 대답하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구약의 예배를 그렇게 칭한다는 것은 곧 죄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심각할 정도로 결핍되어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희생 제사 제도에 있어 정작 거부되어야 할 것은 그런 제도가 생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인간의 죄이다. 잘못은 하나님이나 그분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예배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있다. 피를 흘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구약 시대의 제도에 있어 끔찍한 것은 그 행위 자체의 야만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려 할 때 꼭 그런 방식을 통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간들의 죄악됨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도 최악도 아직 이르지 않았었다. 유대인들이 제사 제도에 있어 동물 희생에 의한 피흘림의 무력함을 노래한 바 있는 왓츠는 계속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하늘의 어린 양 그리스도
우리의 모든 죄를 멀리 없애 주시니
보다 더 귀한 이름의 제물이라.
양보다 더 부요한 피라.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는 모두 갈보리 사건과 그분의 십자가 보혈을 지향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오셨을 때 그 제도는 모두 없어졌다. 예수께서 그들의 역할을 다 성취하셨기에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이 아름답고도 사랑넘치는 탕자 비유와 연관하여 소개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진다.
 
 복음 전체가 이 한 가지 비유의 좁디좁은 한계 내의 다 포괄되는 것은 아니라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적당한 맥락 내에서 이 비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사실이다. 아들을 보았을 때 아버지는 그를 측은히 여겼다. 이 말을 하나님에 관한 언급으로 생각하여 해석해 볼 때 그 정확한 의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지극히 크고 동정심이 지극히 많고 긍휼하심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방탕한 자신의 아들과 딸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주시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18-21).
 
 당신도 알다시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끊임없이 인간을 구하여 찾고 화목시키시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전적으로 효과적이고 또 성취하려는 특성이 강하여, 그러한 특성을 기반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내주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롬 8:32)고 말한다. 갈보리 십자가에 표현된 가장 고귀한 의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단순히 동정적이고 연민에 의한 정신 자세나 그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은 구원의 잠재성이나 가능성을 말해 주는 복음이 아니라 사실이자 행동으로 향해진 구원을 말해 주는 복음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아들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거기에서 조의 모든 두려움과 잔인함과 악함과 부패는 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거기에서 내 죄의 빚은 청산되었다. 거기에서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모두 제거해 주셨다. 거기에서 예수님까지도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롬 3:25) 세워지셨다. 거기에서 구원은 가능케 되고 그 실현에 근접하게 되었으며, 거기에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완전한, 그리고 최고의 발현으로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신은 다음의 말씀을 읽고 믿고 의지하는 것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위대한 진리를 뒤로 하긴 전, 탕자가 겪은 체험의 이 단계에서 이끌어 내야 할 중요한 교육이 아직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들의 확연한 결핍 상태와 아버지가 느끼는 측은지심 사이의  띠(bond)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앞에서 이미 이야기 했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 위에 마침내 탕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던 그 순간에 생겨난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은 애초부터 존재했었고, 스스로를 표현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과연 어느 순간에 보여졌는가를 알면,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이 죄를 뉘우친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긴 하되 떠나던 때와 똑같이 여전히 오만하고 지족적인 마음 자세로 돌아왔다면 상황이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지를 지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만일 그가 그랬더라도, 아버지는 아들이 방탕하고 죄악된 삶을 살 때 그를 사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고 돌아왔을 때처럼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밎추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일은 아들이 집을 떠날 때와 전혀 다른 태도로 돌아왔을 때를 전제로 하여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연민과 동정심에는 초점과 방향이 있다. 그 사람의 마음 자세와 정신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자기 자신을 건강하고 온전하며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셨던 섬뜩한 말씀을 기억해 보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견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세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5-33).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하지 않고 대책이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자기 의에 빠진 자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장에서 바울이 그 당시의 엄청난 부도덕함과 불경건성을 얼마나 무섭게 정죄하고 있는지 기억해 보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리고 당시 사람들 사이에 횡행했던 섬뜩한 죄목들을 나열한 후에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롬 1:24-32).
 
 죄인을 받아들여 주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불쌍히 여기심이 하나님의 의로운 명령을 부끄러움 없이 그리고 수치감도 없이 무시해 버리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친 죄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의 차이점은 곧 뉘우친 자와 뉘우치지 않은 자. 자기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자와 여전히 사악함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을 하지도, 해보려고 하지도 않는 자 사이의 차이점도 된다.
 
 최근에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피난처를 취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결국에는 모두가 다 구속을 받을 것이라는 개념을 가르치는 일련의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누구누구 구별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사실상 그분은 모든 사람의 구속을 성취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 또는 고의적으로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자도 언젠가는 모두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노선을 좇는 사람은 전도의 대상을 설교의 대상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남녀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들은 모두 그분의 것이고 그들이 그 사실에 무관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들은 모두 그분의 구속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터무니없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단 한 마디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라는 이름 외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행 4:12)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당대의 교양 있고 지식 있는 선남선녀들, 철학을 알고 종교를 아는 그들에게 행한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0, 31)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평이하게 설명된 것을 본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리고 주께서도 직접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그러나 경외스러운 말씀으로 이 사실을 확실히 언명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죄인이 죄를 뉘우치는 것과,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행사되는 것이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보았다. 어떤 의미에서 봐도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만한 점이 없다. 탕자의 경우에서만 보더라도 마침내 그가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염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일관성, 그리고 아버지의 찾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본문에서는 이 사실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지만,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다른 두 비유를 보면 이것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것은 목자의 찾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되찾은 것도 여인이 열심히 찾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이 비유들은 모두 하나로 취급되어야 하고 똑같은 결과를 말하고 있는 비유들이므로) 아들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고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게 해준 것도 그 아버지의 찾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는 그분 고유의 방법을 갖고 계시다. 우리는 교만하고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탕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똑같은 경로를 거쳐 죄를 회개한 자로서 천국 시민이 된다.
 
 아들이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보자, 그리고 그가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고 순전하고 깊고 철저한 회개를 했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리게 되자 그 오랜 헤어짐과 기다림의 세월 내내 그를 움직여 왔던 자애와 연민과 동정심과 자비가 한꺼번에 그의 마음에서 용솟음쳐 올라왔다. 그렇게 아들을 사랑하고 오래 기다려 온 아버지는 아들을 맞아들였고 또 용서해 주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1)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시편 32편에서보다 바로 이 비유에 훨씬 더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이 죄로 인한 아들의 슬픔과 부끄러움을 예기하고 또 앞질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먼 나라에서 준비해 온 말을 채 한 마디도 입밖에 내기 전에 아버지는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필자는 이 진리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파산한 인생과 오랜 죄의 역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정욕과 사악함에 얽매여 그것에서 풀려나기를 갈망하면서 찾아올 때, 필자는 그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고 그에게 밀어 닥쳤던 죄악된 세월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모두 그분의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그에게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친구여, 당신도 이 젊은이와 아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른다. 당신의 양심은 밤낮으로 당신을 괴롭힌다. 친구나 가족들 앞에서는 좋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내부에는 쏘는 듯하고 괴로운 아픔이 영혼을 괴롭힌다. 만일 오늘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한다면 당신은 아무 소망 없이, 하나님도 없이 그 날을 맞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은 뭔가 더 좋은 것, 마음속의 공허감을 메꾸어 줄 수 있는 그 무엇, 당신 내부에 있는 절제할 수 없는 것과 연단할 수 없는 것과 정욕을 근절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당신은 화평을 원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그분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하고, 또 그분을 구하는 것을 두려워해 왔고 어쩌면 부끄러워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당신에게 말하건대, 주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과 비슷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셨으며 또 이 말씀으로 그분 자신께 나아오라고 격려하신다.
 
 당신은 그분께 무엇을 드려야 하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스스로를 변명하겠는가? 그냥 허비해 버린 세월과 기회를 정당화시킬 만한 어떤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답할 말은 이것 외에는 없다. 탕자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나아오라! 당신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논하지 말고 또 이유로 내세우지도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면서 나아오라.

제9장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지금까지 보아 온 바에 의할 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탕자 비유와 대다수 인간의 체험 사이에는 병행되는 사실이 많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해 보면 보잘 것 없고 지극히 부적당하긴 해도 인간 관계 내에도 아버지가 잃었던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의 사랑과 적어도 무언가 비슷한 것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런데 이제 비유는 그것의 영적 진리와 단순한 인간적 이야기 사이에 전혀 상응하는 것이 없는 지점에 이른다.
 
 부모들은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면 분명히 기쁨으로 그 자녀를 맞이할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헤어짐이 종료된다는 데 대한 안도감, 그 자녀와의 소원함에 결코 대책이 없지는 않았고 또 자신에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던 자녀의 파산된 삶이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대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들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유 속에 나오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안심되었을, 그리고 얼마나 감사했을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아버지나 어머니를 막론하고 집을 떠나 길을 잃은 아들 혹은 딸에 대한 생각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없애고 그런 것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정신치료를 받아야만 살 수 있을 지경에까지 이르른 사람도 있다. 그런 부모들은 그 옛날 야곱이 했던 것과 아주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할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가정 내에 뭔가 뒤틀리고 부패한 요소가 있어 그것이 아들 요셉과의 사별을 초래하였음을 알고 위로받기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창 37:35). 그리고 또 우리는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는 말씀도 본다.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있을 때에는 뉘우침과 돌아옴이 있고 관계 회복이 있다. 자녀가 마침내 자신의 그릇된 길을 고치려고 마음먹을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이 기쁨으로 고양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체험에는 그러한 기쁨의 감정에 수반되는 다른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의적이고 파괴적인 방황의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만회할 수 없는 손해를 입어, 설사 부모가 그 방탕한 자녀를 되찾아 안도감과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해도, 과거가 완전히 원상복구 될 수 없다는 슬픈 사실이다. 그 잘못 보낸 세월-반항과 불순종과 실의와 죄악의 세월-은 부모와 자녀가 화해를 할 때에조차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후회는 남고 기억은 지워지지 않아 그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번민케 한다.
 
 목사인 필자는 그러한 체험이 부모들에게 어떤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 많은 사례들을 보아 왔다. 한 가지 생생하게 기억되는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한 젊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 가족을 남겨 두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경우이다. 지금까지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가 버리고 간 아내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였다. 그 가족들을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늘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당했을 사람은 그의 노부모일 것이다. 그 노인들의 집을 찾아가 대화라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그 제멋대로인 아들의 그릇된 행동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은 그 노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들의 여생은 사랑하는 아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가 종적을 감춰 버린 일로 어두운 그늘이 질 것이며,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종적을 감춘 아들을 기다리며 보고파 할 것이다. 그에게서 편지라도 한 장 온다면, 전화라도 한 통 걸려 온다면, 살아있다는 것만이라도 알려 준다면, 뒤엉켜 버린 인생의 꾸러미를 가족들과 함께 풀어 보려고 후회스럽고 유감스런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음을 알려 온다면 그 부모에겐 얼마나 안도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 노부모에게 들려오는 것은 침묵, 너무도 완벽하여서 아들이 죽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침묵뿐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돌아와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 보라. 어떻겠는가? 노인들이 기쁨과 안도감으로 아들을 다시 맞아들이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물론이다. 또한 그들은 아들이 다시 가족과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한때 그가 의도적으로 경멸하고 조소하던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하지만 상처, 부끄러움, 그늘은 남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기다림의 시를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돌아와, 다시 돌아오라.
흘러가 버린 시간이여!
오늘밤 다시 한번 나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주렴.

어머니,
메아리조차 없는 바닷가에서 돌아와
옛날처럼 다시 나를
당신의 가슴에 품어 주시고
근심으로 주름잡힌 내 이마에
입맞춰 주소서.

내 머리는 희끗거리기 시작했고
당신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내 선잠을 지키시니
어머니, 나를 흔들어 재워 주소서.
흔들어 재워 주소서!
알렌(Elizabeth A. Allen)


 방탕한 아들과 딸들이 우리들 중에는 얼마나 많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아 계시든 그렇지 않든지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고, 지난 날은 결코 되부를 수 없으며, 이미 행한 일은 다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이 비유에서 이제 우리는 영적 진리가 인간의 체험과 전적으로 차이가 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말씀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안도감 이상의, 기쁨 이상의, 그 허비해 버린 세월에 대한 유감의 빛을 띤 즐거운 이상의 감정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아버지, 그리고 아들도 역시 벅찬 기쁨을 누린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말씀은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곧이어 이렇게 외친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리고 온 식구들은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환영하여 맞아들이는 기쁨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시다.
 
 그 기쁨은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그 기쁨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우리 삶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 또한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거룩한 의미가 있어서 인간의 일상적인 체험과 이해 범위를 넘어선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 말씀들은 곧 그분의 자기 계시이다. 우리가 그분에 관해 어느 정도나마 알고 있는 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 3:15)하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또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이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선함이시며 진리"(소요리 문답 제 4문항)이시라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이 창세 전에 이미 시작되어 구약 시대에 조금씩 분명하게 이행되어 갔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 사랑과 불쌍히 여기심으로 충만해 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이며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8-13).
 
 하나님의 모든 탁월하심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영광스럽고 그분은 자신의 모든 덕과 속성에 있어 무한히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이 이 비유 속에 이 모든 진리들이 놀라울 정도로 확증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언가 새롭고 다른 것을 계시하고 있다. 새롭고 다르다는 것은 죄인의 뉘우침에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심(누가복음 15장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비유 모두에서 발견되는)을 여기에서처럼 이렇게 도처에서 강조하거나 암시하는 경우는 없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용어를 하나님에 관하여 쓰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의미에서도 역시 그렇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보다 앞서 나온 다른 두 비유를 잠깐 생각해 보라. 백 마리 양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던 목자의 비유를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그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때문에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찾도록 다녔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했음을 우리는 본다. 구주께서는 이 말에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덧붙이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그리고 똑같은 장에 있는 두 번째 비유,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었던 여인에 관한 비유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잃은 동전을 발견할 때까지 부지런히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자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에 결론과 해석을 덧붙이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니라."
 
 지금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이 비유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신 것은, 그리고 강조하고 계신 것은 죄인이 구원받는 데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누가복음 15장은 아름다움이 특히 돋보이고 있는 장 중의 하나로서 장 전편에 흐르고 있는 그 기쁨이 깨끗이 반향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가 죄인이 구원받은 데 대한 하늘의 기쁨이 표현된 후렴구로 끝을 맺는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그런데 세 번째 비유에서는 이 사실이 보다 더 확실히 드러난다. 탕자와 그의 귀환에 관한 이야기인 전반부의 결론 부분과 동생의 귀환에 대한 형의 반응이 기록된 후반부의 결론 부분, 이렇게 두 번씩이나 아버지는 분명 떨렸을 음성으로 가장 크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완전한 기쁨을 다음과 같이 공포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 얼마나 천상의 기쁨이 충만한 음성인가! 이는 아버지의 음성, 과거로는 우리의 구속 계획이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 안에 이미 확정됐던 창세 전의 영원한 과거로까지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치며, 미래로는 그분께서 속량하셔서 마침내 다시 집으로 돌아온 모든 탕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거하며 그분과 함께 통치하며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그분과 함께 찬양할 날까지 울려퍼질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필자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그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인 모습만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신들 편에 서서 해주신 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한다. 그들은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인해 그분을 찬양한다. 그들은 죄악을 사해 주심에 대해, 그리고 그분께서 약속하시고 서약해 주신 생명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을 감정이 있고 인간의 삶에 연관된 존재, 죄 때문에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는 분, 죄인의 회개에 대해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시는 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하는 당신의 자세가 만일 위와 같다면 당신은 그분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그 놀라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18).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면에 있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온전히 영화로우시다고  말하지만, 이 말씀의 주된 의미는 그분께서 긍휼을 보여 주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벌써 그렇다는 말씀을 들었다), 죄를 뉘우치고 믿는 죄인은 환영을 받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 죄를 사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즐겨 행하시는 활동이라는 진리를 주장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하나님은 뉘우치지 않는 사악한 자에게 어쩔 수 없이 죽음의 선고를 내리시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맞아들이시는 데 기쁨을 느끼신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 5).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하지만 진정함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러한 태도는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사실 또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거니와 놀랍기도 하다. 그분의 긍휼을 입는 자들의 무가치함 하나만을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는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구원하시는 데서 기쁨을 느끼시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적으로 의로우며 거룩하신 분, 영원에 거하시는 분, 하나님이신 분, 불완전함이나 부정함은 전혀 갖고 계시지 않은 분이 왜 자신께 반항하고 자신을 계속 멸시하며 자신의 완전한 말씀을 발 아래 짓밟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셔야 하는가? 순전한 죄의 뉘우침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에 경외감과 경이감은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메섹에서 사흘 밤낮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로 비참한 가운데서 지내다가 마침내 자신의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음과 그분의 거룩한 법이 요구되는 바에 따라 의로운 정죄를 받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 바울처럼(행 9장),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자신들을 향해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에 대해 기쁨을 가지실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전적으로 의로우신 분이 죄악된 인간들에게로 직접 다가오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제네바의 위대한 개혁자 죤 칼빈(John Calvin)은 그의 자서전 중의 소중한 한 단편이라 해도 좋을(그 자신의 영적 순례 행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인) '사도렛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Sadolet)에서 이 일에 대한 그 자신의 체험을 얼핏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이렇게 적어 내려간다. "내 자신을 성찰하거나 내 마음을 주님께 고양시킬 때마다 격렬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아 정화나 만족 그 어떤 것도 나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을 뚜렷이 응시하면 할수록 내 양심을 찌르는 고통 또한 예리해져서 내 자신을 잊음으로써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내게 위로나 위안이 되어 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되기까지 계속됐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 마음이 진정으로 집중이 될 때면 마치 누군가가 내게 빛을 비춰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어떠한 오류의 진흙탕 속에서 딩굴었는지, 내가 얼마나 더러워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진흙과 먼지로 더럽혀졌는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다가오는 영원한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으면서, 내 지난 삶의 방식을 통탄과 눈물로 정죄하고 난 후에는, 내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의 길에 함께 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과묵한 표현 방식은 부분부분 자세히 설명하는 것보다 개혁자의 이 증거를 더욱 힘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의식과 무거운 죄짐 아래서 고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직접 다가가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칼빈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루터도 못했고, 어거스틴도 못했으며, 바울도, 그리고 탕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이것의 신비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 신비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영원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인정하고 믿고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의 무가치함을 생각할 때 이 점에 있어서의 그분의 태도는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고 앞에서도 말했다. 하나님께서 긍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분명 놀랍고 영광스러우며 예상밖의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기뻐하심에 대해 구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연관된 어려움을 훨씬 강력하게 지적해 주는 요소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그 기쁨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그 엄청난 대가 때문에 하나님은 그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없는 다른 모든 은총의 표시나 사랑과 교제와 죄사함의 언약이 다 공허하고 의미없는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 주는 실례이며, 그분과 그분의 희생 없이는 하나님의 긍휼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육신에 처한 자들의 죄를 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세상에 보내셔야 했다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가! 본능적으로 생각할 때 이는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과연 그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필연성에 대해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숭고한 사실은 그 일이 사실 그대로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일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죄값을 치르기에 그보다 충분한 것은
다시 없으니
이제 하늘 문을 여시고
날 들어가게 하시네
알렉산더(Cecil F. Alexander)

물론 탕자 비유에서 이 위대한 필연성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미 말했다시피, 복음의 전 영역이 여기 다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 몇몇 국면들만이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암시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 비유를 읽다 보면 아들의 방황에 대해 아버지가 느끼는 어떤 고통 같은 것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동정과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아버지로서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상당한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선한 목자의 고통과 고뇌와 자기 부인에 관한 어떤 느낌이 우리에게로 전달되어져 온다.
 
 클레판(Elizabeth Clephane)은 이 이야기에 담긴 애수를 다음과 같이 포착했다.

"주여, 당신은 여기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까?"
하지만 목자는 대답하셨네.
"그 한 마리 양은 나를 떠나
위험한 곳에서 방황하고 있지.
길이 험하고 거칠지만
나는 그 양을 찾으러 가야 한단다."

그러나 속량 받은 자 중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기까지 주님께서
얼마나 깊은 강물을 건너셨는지
얼마나 어두운 밤을 지내셨는지
아는 사람 없으니
거친 들에 울리는 외침 소리-
그분은 들으셨네.
병들고 도움 없어 곧 죽을 양의 외침을.

"주여, 산길을 따라 흘려진 핏방울은 어찜이니이까?"
"그것은 내가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찾아 데려오기 위해 흘린 피란다."
"주여, 당신의 손이 그리 찢어지고
갈라짐은 어찜이니이까?"
"오늘밤 가시에 숱하게 찔렸단다."


 여기에는 아버지께서 탕자의 구속을 위해 치르신 대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살펴볼 때, 그분께서 엄청난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롬 8:32)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대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 5).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마 17:5).
 
 그럼에도 하나님은 탕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사 53:10) 하셨다. 그리고 그 무서웠던 때,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삼위 가운데 제 2위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시며 그 인격의 명백한 형상이신 그분께서 지옥과 같은 외로움과 고뇌 가운데 버려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던 때를 생각해 보라.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그때와 같이 영원한 결과를 내포했던 순간, 그때와 같이 큰 신비에 가려졌던 순간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이 죄인에게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치러져야 했던 대가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크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너무 많았으므로, 바울은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 직접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의 희생물과 화목의 수단이 되게 하셨고, 그로 인해 그분의 영원한 공의는 성취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분은 구주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셨다고 했다(롬 3:25, 26).
 
 주님께서 어떻게 긍휼을 기뻐하실 수 있는지 자문해 보라. 회개하는 죄인을 두고 어떻게 하늘에서 기뻐함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히 7:26) 유일한 분의 생명과 영혼이 우리 되의 대가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구주의 보혈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분은 나를 위해
그분을 죽게 만든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네.
놀라운 사랑! 내 하나님!
어떻게 나를 위해 죽으실 수 있었을까?
신비하기도 하여라!
불멸하시는 분이 죽으시다니
그 신기한 계획을 그 누구라 밝히 알 수 있을까?
스랍 중 우두머리가 그 거룩한 사랑의 깊이 재어 보려 하나
헛되도다.
이는 모두 긍휼이라!
땅으로 경탄케 하라.
천사들로 더 이상 묻게 하지 말라.
웨슬레(Charles Wesley)

그렇다.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의 죄와 그 죄로 인해 우리에게 내려진 저주를 기억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성부께서 탕자들을 대신하여 죽도록 성자를 내려보내신 것,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치러진 무한한 대가를 생각해 봐도 분명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진리가 우리 힘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라 해서 그것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도 그것은 우리의 경외감과 경이감의 크기를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과 그 긍휼을 기뻐하심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무력함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다 강력하게 인상지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기쁨이 이 비유와 신자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 기쁨을 나타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버지가 얼마나 즉각적으로 아들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비유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이 뜨거운 애정에 감동받았을 것이 분명한 탕자가 먼 나라에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준비하여 연습했던 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그가 하려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안 들은 것처럼, 주위에 둘러서서 부자의 상봉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종들에게 소리친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물론 아버지가 그 아들이 새로이 깨우친 겸손함, 먼 나라에서 보낸 그 오래고 곤고하며 슬프던 징벌의 세월이 지난 후 그에게 찾아온 회한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아들이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조금도 아니었다. 즉, 출세를 위해 집을 떠날 때처럼 거만하고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고 기뻐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들에게 임한 변화에 대해 아버지가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은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뉘우침의 뜻을 표현하는 것을 일부러 막으려 한 것이 아니다. 그럴 시간이 없었고 그것은 그의 성품에 맞지 않았다.
 
 아들이 신경써서 준비한 말을 끝까지 계속하도록 허용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가 제의한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심각하게 고려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탕자는 "나를 당신의 품꾼의 하나로 삼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상 서로 정반대인 명제가 주목할 만하게 대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 하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품꾼의 자리를 요청한 아들의 목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비록 허랑방탕하긴 해도 그가 여전히 자신의 아들이라고 한 아버지의 신중한 선언이다.
 
 그러한 선언이 있은 후, 아버지는 곧바로 그의 아들된 자격을 회복시켜 주는 일에 착수한다. 다 헤어진 탕자의 옷이 벗겨지고 대신 제일 좋은 옷이 입혀졌다. 발에도 제일 잘 만들어진 신이 신기워졌고 손가락에는 훌륭한 반지가 끼워졌다. 그리고 축하 잔치를 위해 살진 송아지도 잡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방황하던 아들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는 것,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모든 증표가 다 취해졌다. 그리고 온 식구가 보는 앞에서,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그를 다시 소유했고, 그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그를 다시 자신의 마음에 두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 앞에 설 때 거기에는 단 한 가지 관계밖에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인 그가 어떻게 아버지의 품꾼의 하나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집을 나가 헤매긴 했어도 그는 실제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위치를 완전히 회복받으려 한다면 그 위치는 마땅히 아들의 위치여야 했다.
 
 하나님의 가족에는 두 부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 중에는 간혹 보통의 그리스도인과 좀더 고상하고 금욕적이고 수도승 같이 독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별지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세속적이며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과 의기양양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려 하는 사람도 있다. 즉,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안다고 추정되는 사람과 그분을 구주로도 주님으로도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를 구별지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본질상 그런 의심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구주이시며 주님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는 평화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과 금욕적으로 사는 것이 평범하게 사는 것보다 더 거룩하고 영예로우며 하나님께 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두 부류가 있을 수 없다. 주님에게는 의붓자식이 없다. 아들인 자는 모두 완전하게 아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단 한 명도 아버지의 집에 고용되는 천한 품꾼일 수 없다.
 
 이 사실은 죄인을 구원하시고 받아들이시는 데 있어 하나님께서 느끼는 기쁨의 강도를 최대한 분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긍휼을 베푸시는 데 그분이 느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죄인들에게 어떤 신분을 허락하시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아들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것이 양자 삼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 있어 우리가 유의할 것은,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리를 모두 상실했지만, 그분은 은혜로써 우리를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주시고 자신의 아들과 딸로 삼아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을 인해 단순히 그 본성에 근거하여 그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적 긍휼이라는 영원히 확보된 근거 위에서 그리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 15).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나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분명 우리는 본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진리보다 더 영광된 소식은 결코 들어보지 못할 것이다. 하늘은 잘못을 뉘우치는 한 명의 죄인에 대해서도 기뻐한다. "뭐라고! 이처럼 방탕한 아들의 회심에 대해 하늘이 기뻐한다고?"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계시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키겠는가!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회심을 하면 즉각 그들을 아들과 딸로 삼으실 생각을 갖고 계시다. 확실히 그분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형벌 받을 죄는 결코 면죄하지 않으신다(출 34:7). 하지만 그분은 무한하신 긍휼과 은혜로 죄인에게 깨끗함받고 새롭게 되며 그 빚을 소멸시킬 방도를 제공해 주신다. 그 방도란 바로 갈보리에서 흘리신 그 아들의 피를 말한다. 그리고 그 영광스럽고 하나님다운 일에 그분은 즐거움을 느끼신다.

천둥치는 계곡과
가파른 산꼭대기로부터 천국문에 이르기까지
한 기쁨의 외침이 울려 퍼졌으니
"기뻐하라!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천사들도 보좌에 둘러서서 화답하네,
"기뻐하라! 주님께서 잃었던 자를 다시 데려오시네!"

제10장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 비유의 전반부이자 가장 중요하기도 한 부분의 결론을 내려 보았다. 하지만 아직 비유 전체의 논의를 다 끝낸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서로 균질적이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는 탕자와 그의 죄, 아버지와의 결별과 뉘우침, 그리고 아들 자격을 회복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고, 후반부는 두 아들 중의 형, 즉 집에 남아 있던 아들을 다룬 것이다. 탕자 비유를 언급할 때 우리가 즉각 떠올리는 것은 분명 두 아들 중의 동생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된 관심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동생의 영적 편력이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탕자와 아버지와의 재회장면을 묘사해 주신 후에도 집에 있던 맏 아들에 대해 계속하여 부가적으로 무언가를 말씀해 주신다.
 
 언뜻 보기에 서로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두 형제가 이 비유에서 서로에게 대적되는 입장에 서도록 그려져야 한다는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다. 물론 누가복음 15장을 구성하고 있는 세 비유에는 똑같은 점들이 아주 많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과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 사이의 대조점을 볼 수 있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에 대립되는 것으로 안전하게 주인에게 속해 있는 아홉 드라크마가 나와 있다. 그리고 숫자상의 차이는 크게 줄었지만, 세 번째 탕자 비유에서도 역시 한편의 잃어버렸던 아들과 또 한편의 그대로 남아 있던 큰 아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본서의 서두에서 검토해 보았던 누가복음 15장의 서두 부분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끔 하고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여기서 예수님은 무엇은 하고 계시는 것인가? 각 경우마다 그분은 죄인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말씀하신다. 구주께서 죄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분께서 무엇을 해주시게 되었는지는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다. 이제 우리는 그분께서 청중 가운데 있는 또 다른 범주의 사람들에 관해 무엇을 말씀하실 작정인지 계속 의문을 가져 보아야 한다. 즉, 안전하게 그대로 있는 양떼들, 잃어버리지 않은 드라크마, 그리고 결코 탕자가 아니었던 아들에 관해 그분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두 아들 중의 형에 대해 말씀하시는 방식에 종전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당신은 즉각 알아차릴 것이다. 그분은 매우 축약된 형태로써 탕자의 인생 이야기를 윤곽만 들려 주신다. 자세한 설명은 얼마 안되지만 우리는 젊은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그가 체험한 바에 공감을 가질 수도 있다. 결국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이야기의 초두부터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탕자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기까지 맏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는 이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일종의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겨우 한번 등장한 것이다. 탕자가 변화한 사실은 그 형의 궁극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와 비교해 볼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둘 중 맏아들에 대해 우리가 들은 바가 거의 없긴 해도 우리는 이야기 전체에 함축된 의미로써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아주 분명히 알고 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는 올바른 사람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의롭고 마음 편하며 회개할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 있는, 아흔 아홉 중의 하나이다. 그는 예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 13)고 말씀하셨을 때 그 '건강한 자' '의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한 사람의 바리새인이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을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말은 뭔가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느낌을 준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한할 때 바리새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탕자의 형에 대해서보다는, 아버지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크든지 간에 탕자에 대해 훨씬 더 편안한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개념에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 팔레스틴 땅에서 바리새인은 독선적인 위선자,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다가 생각하며 자신의 경건성을 세상 앞에 시위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바리새인은 정직한 자, 속이 찬 사람, 당시 사회의 지위, 업무 관계에 있어서 성실한 사람, 지극히 진지한 신앙을 가지고 생활의 모든 영역에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즉, 바리새인들에게 아주 나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직함이 아주 결핍되어 있었다거나 부도덕하다거나 불성실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탕자 비유의 형에 관한 몇 구절을 덧붙인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를 가능한 한 가장 생생한 방식으로 지적하고 예증해 주시기 위해서였다.
 
 필자는 탕자 비유의 이 후반부를 생각할 때 '회심의 촉매제적인 결과'라 칭할 수 있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촉매가 무엇인가? 과학적인 의미에서 촉매란 그 자체는 영원히 변화되거나 없어지지 않고도 화학 변화를 일으켜 줄 수 있는 비교적 소량의 물질을 말한다. 촉매는 다른 화학 물질에 있어서의 반응을 야기시키되, 그 자체는 그 화학 변화에 직접적으로 혹은 영구적으로 관련되지 않고도 그런 반응을 일으킨다. 즉, 비유의 말미에는 일종의 비화학적인 촉매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한 물질, 즉 탕자가 다른 한 물질인 그 형에 대해 어떤 반응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 부차적인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반응이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라. 탕자는 이야기의 모든 것이고 그의 형은 이 이야기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보아 온 바와 같이 탕자는 부랑아였고, 낭비가였고, 배은망덕한 자였으며, 자기 마음대로 쓰기 위해 아버지의 사후에나 자신의 몫이 될 유산을 미리 요구한 비정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손에 넣자 아버지가 알지 못하고 그 제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먼 나라로 떠나 버렸다. 유산이 다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실패작으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가 다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지가 분명히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돈이 다 없어지자 일은 그와 같은 경로를 따라 진행되었다. 탕자의 형으로서는 그 사건들을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악한 동생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영접을 받는 것이었다. 확신컨대, 동생은 그런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그렇게 따뜻한 환영을 받아야 했을까? 아버지는 그가 정말로 변화했는지 보기 위해 얼마 동안이라도 유예 기간을 둘 수는 없으셨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왜 내가 한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을 그 쓸데 없는 탕자에게 주시고 장자인 내가 한번도 누려 보지 못한 일을 해주실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는 말은 맏아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오히려 화만 돋굴 뿐이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이에 맏아들에게 그런 반응을 유발시킨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맏아들의 심정이 진정으로 어땠는지를 지적해 주는 것은 탕자의 귀환, 그 모든 허송 세월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진정으로 뉘우치면서 복종적이고 순종적인 아들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형과 동생의 관계, 아니 그보다 그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를 논의함에 있어서는 탕자가 이제 자기 아버지와 가장 자유롭고 가장 완전한 은혜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염두에 두신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착한 형은 냉대를 받고 그렇게 부끄럽고 사악한 죄를 많이 지은 동생은 아버지에게 그렇게 넘치는 환대를 받는 것이 왠지 정당치 못하게 보일 것이다. 아버지의 승인과 지지를 얻은 것은 탕자의 죄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고, 어느 면에서 보아도 그렇지 않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전반적인 상황은 맏아들이 보기에 매우 불공정한 처사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자기 동생이 살아온 것과 같은 삶을 너그럽게 봐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 30).
 
 그러나 사실 그는 이 일의 진정한 요점을 놓치고 있다. 아니 그보다 그는 이 일의 본질상 요점이 무엇인지 그것을 간파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죄를 승인하지도 않았고, 죄를 마땅히 다루어야 할 어떤 것보다도 가볍게 취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런 일로 아버지를 고소할 수 없다. 하나님도 역시 죄를 승인하신다는 비난을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죄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신다거나 또는 가증스럽고 추하고 심판받고 죽어 마땅한 것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보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 성경에 단 한 줄이라도 있는가? 죄를 처리하는 데 드는 대가가 그렇게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데 그분께서 어떻게 하실 수 있었겠는가? 아니다. 이는 죄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는 취급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주권적인 은혜가 얼마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으로 나타내 보여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맏아들은 바로 그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탕자는 아들 신분을 회복했다. 하지만 강조점은 다음 말씀위에 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짤막한 비유 속에 두 번씩이나 반복된 이 말씀은 여기서 발생한 일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 주고 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 신분을 부여받은 것은 그가 타고난 어떤 권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상실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죄를 뉘우친 자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청을 기억하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얻은 아들로의 지위는 권리에 의해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덕분에 그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가 '받은' 대접은 그가 받아 마땅한 대접의 정반대였다. 즉, 그는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로서 그것을 받은 것이다. 사람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은혜는 전혀 은혜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권리로써 얻을 수 잇는 것만을 얻는다고 한다면 은혜는 소유할 수가 없다. 은혜를 얻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진정으로 대조가 되는 것은 고의적으로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그 사랑을 버린 아들과, 여전히 충실하고 복종적이어서 그 사랑의 호의를 입을 자격이 있었던 아들과의 차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아버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회개한 탕자와 그러한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회개하지 않은 맏아들 사이의 차이점이 대조되고 있다.
 
 참된 종교의 본질, 성경에 대한 믿음의 핵심은 은혜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도 탕자가 처했던 처지에 이르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개인적 인생사가 어떻든지 간에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영적 진리의 본질 그 어느 것도 파악치 못하고 만다.

은혜로써 나는 구원받았네.
값없이 주어진 풍성한 은혜로!
내 영혼은 믿고 의심치 않았네.
왜 이 약속의 말씀 앞에서 망설이는가?
성경이 언제 거짓된 것을 가르치던가?
아니다! 그러면 이 말씀 언제나 진리로 남으리니
은혜로써 당신도 천국을 얻으리라.

은혜로써!
그 누구도 감히 자기 공로를 주장치 못하네.
우리의 공로와 행위는 아무 가치 없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구속자 그리스도 예수를
죄 많은 이 세상에 보내 주셨네.
그분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고
우리는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았네.

은혜로써!
오, 이 약속의 말씀에 주목하라.
죄로 눌림 받을 때면
사단이 혼란된 양심을 괴롭힐 때면
당신의 마음이 안식을 구할 때면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보내 주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 전혀 없네.

은혜로써!
믿음의 근거는 확실해졌으니
하나님이 참되신 한 이 또한 견고하리.
성인들이 영감으로 기록해 놓은 것
당신의 말씀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명하신 것
우리 온 믿음이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은혜, 그 아들 안에 있는 은혜뿐이리.
쉐이트(Christian L. Scheidt)


 당신도 위와 같은 구원의 확신에 이르렀는지 자못 궁금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납득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바로 이 진리일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은혜로만 말미암으며 또 하나님의 순전하고 순수한 은혜 없이는 영원에 대한 소망도 없다고 가르치고 전파하며 해설하고 선포할 수 있다. 그리고 난 후에,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탕자가 마침내 깨우치게 된 것이 여전히 그들에게는 아주 낯선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일에 참예할 수 없을 듯이 보인다. 물론 그들은 이 일에 참예할 수 없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기까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는 영적 생명도 없고 복음의 중요성을 감지할 능력도 없이 죄와 허물 가운데 아직 죽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몰이해와 인식 부족, 인간 본성에 있어서의 죽음 상태는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길에 놓인 궁극적인 장애물로서 늘 존재한다. 그런데 이 같은 장애물은 과거에서보다 현재에 훨씬 더 위험한 상태가 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그것을 신봉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삶의 방법으로 삼고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 삶의 도덕적 패턴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영적, 초자연적 종교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난관, 불의, 손상된 관계등의 문제에 적용될 뿐인 종교, 또는 그보다 약간 나을 뿐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성경은 그러한 일들을 상당히 많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전도시키는 것이고 진리를 와전하고 곡해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꾸 문제가 생기고 관계가 붕괴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새 생명이 창조될 필요성과 결코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 사회와 또 전 세계에 걸쳐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는 그 섬뜩한 비참함과 속박과 불의에 대해 우리는 감히 무관심으로 방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회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에 대한 언급 없이도 변형될 수 있다고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어떤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들에게 크게 필요한 것은 그 말의 성경적인 의미를 충분히 살린 한에서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구속받은 방탕한 아들과 딸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구속받지 못한 맏아들과 같은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가장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관계를 맺고 아들된 위치를 회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았다. 이제 맏아들과 그의 태도를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면, 탕자가 그의 아버지와 은혜에 의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맏아들은(그 자신의 견해와 또 그 자신의 바라는 바 내에서) 은혜에 의한 관계가 아닌 법적 속박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해진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실 아주 분명하다. 탕자는 은혜에 의해 자기 자신이 아들임을 확인했다. 그 반면 맏아들은 율법에 의한 아들이었다. 탕자는 자기 자신에게 아들 자격을 획득할 만한 공로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는 반면, 맏아들은 자기가 힘들여 번 모든 것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었다. 탕자는 구원을 다름 아닌 하나님의 긍휼로 본 반면, 맏아들은 모든 것의 기초를 단순한 복종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두었다.
 
 처음에는 맏아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말하기가 힘들게 생각된다. 그에 대해 기록된 바를 보면 그는 탕자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먼 나라로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한 삶에 낭비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뜻에 고의적으로 반항하지도 않았고,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에 담긴 단순한 사실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없다. 그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자기 아버지에게 선하고 착실하고 충실한 아들이었고 비난 받을 일도, 아버지를 놀라게 할 일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자기 의에 빠져 있다고 하여 동생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그를 정죄할 수도 없다. 예수께서는 맏아들의 선한 행동을 인정하시되 그것이 그 동생의 그릇된 행동보다 결국에는 더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다 죄인으로 정죄하지만,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차이점의 정도를 모두 지워 없애는 것이라거나 절대적인 견지에서 모든 사람을 다 동등한 수준에 놓는 것이라거나 정직하게 사는 삶의 가치와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한 아버지의 이 두 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적인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건설적인 삶을 살았지만 두 사람 다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맏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서두에서 보았다시피, 세리와 죄인들(탕자)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맏아들) 사이의 차이점은 즉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심한 경멸을 받았었다.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라고 늘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들이 해석해 놓은 율법의 엄격함을 감당치 못하는 자들을 '소망이 없는 자'로 간주했다. 하물며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얼마나 더했겠는가? 율법은 그들에게 가혹했고,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서나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은 그들에게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그러한 도덕적 율법적 정직함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죄를 양적인 견지에서 보았고, 구원이란 점점 더 많은 신용을 쌓기 위해 율법에 충분히 순종을 돌리는 행위로 간주했다. 확실히 그들은 은혜에 대해서도 잘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정도로 은혜로우셨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교리는 온통 행위와 공로와 순종을 통한 '하나님 은총의 획득'이라는 교리 일색이었다. 물론 그들은 아무리 바리새인일지라도 율법을 요구하는 무흠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기록장에 불순종의 행위보다는 순종의 행위가 중보 기도 기록되게 하여, 심판 때에 이러한 일들의 비중을 측정하는 시간이 오면 후자가 전자보다 무게가 더 나가게끔 하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은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율법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비극이자 무서운 점이었다. 나중에 예수께서는 현재 논의 중에 있는 이 문제를 보다 평이하게 설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0-13).
 
 이 말씀은 곧 두 무리 사이, 탕자와 맏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 자신의 입으로 한 말에 의해 정죄를 당한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 들어가자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즉, "나는 저 망나니 동생처럼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만 하고, 들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당신의 모든 말씀에 순종했다"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그의 고소 내용은 아버지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것, 충실하고 근면한 섬김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는 것, 정직하고 올바른 자보다 파렴치하고 방탕한 자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점에 있어 그가 화를 냈다는 것,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보여 준 환대에 대해 분개했다는 것은 이 일 전반에 대한 그의 치명적인 몰이해를 지적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이해란 단순히 양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죄란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일련의 불순종의 행위로 엮어진 것이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지 못하는 삶만을 그는 죄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심중을 보지 못했다. 그는 동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죄는 그 양과도 관계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죄란 단순히 사악함과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다. 방탕한 동생은 먼 나라에 가 아버지로부터 육신적으로 떨어져 살았지만, 그 자신은 줄곧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서 아버지로부터 멀어지지도 않았고, 따라서 뉘우칠 필요도, 죄사함 받을 필요도, 은혜와 신분 회복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왔다. 그가 그런 생각을 마음에 갖고 그렇게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 계속 머무는 한, 즉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율법과 법적 의무의 견지에서 보는 한, 외적으로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그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 공공연히 방탕하게 살았던 그의 동생과 다름없이 죄와 허물 가운데에 죽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교훈을 깨우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나는 술주정꾼이 아니고 간음도 안 했고 도둑질이나 거짓말도 안했으므로 선한 사람이고, 따라서 죽음의 때가 다가와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당신을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명칭으로 불리워지는 것을 당신을 절대 거절할 것이다. 당신은 독선과 외식을 혐오하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런데 죄와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는 이 맏아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죄가 당신을 파멸시켰고, 부작위의 죄도 결국은 극악무도하고 공공연한 죄만큼이나 나쁜 것임을 증명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당신도 역시 여느 탕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크게 필요로 한다.
 
 죄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상태를 의미한다. 10세기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신령한 집필가였던 앤드류 보나드(Andrew A. Bonar)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훌륭한 목회자 가정 출신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훌륭하고 정직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죄인이며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는 사실을 깨우쳐야 했다. 19세를 갓 넘었을 때(그때 그는 결코 탕자가 아니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내(육신의) 생일은 지나갔으나 나는 거듭나지 못했다. 나는 '내 친구들은 영원히 내게 잃어버린 자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취해질 것이고 나는 남겨질 (버림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탐구적이고 비범할 정도로 힘있는 말인가? 그것이 바로 당신이 깨달아야 할 점이다.
 
 "나는 거듭나지 못했다."
 
 "나는 거듭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방식으로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 중에 "거듭나지 못했다"는 이 무시무시한 자기 분석의 구도적인 자세를 가져 본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사실들을 탕자 비유 그 자체의 말씀 속에 극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셨다. 동생과 비교하면서 맏아들은 큰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순종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만 빼고 모든 면에서 자기 동생과 아주 딴판이었다. 동생은 지위나 가족의 전통, 그리고 의무 이행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순종적인 아들인 자신은 바로 그러한 것들에 자신의 생애를 걸지 않았던가! 그가 자기 동생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장점에 무지하고 자신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느꼈던 것과 똑같은 심한 경멸감을 가졌던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내내, 작은 아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아무런 소식도 못 듣고 있을 때, 그는 아들의 방탕함에 대해 아버지가 느끼는 슬픔에 동정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은 동생과 같지 않고 탕자 동생보다 무한히 더 훌륭하고 더 큰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데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떤 만족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의 권리를 독점적으로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니 오직 그만이 아버지의 은총과 아버지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아들 중의 장자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아들의 반항 때문에 결국은 유일한 아들이 되었고, 그로 인해 아버지가 가진 것은 모두 그의 것이 될 판이었다.
 
 두 아들 사이에는 틀림없이 오랜 긴장감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다. 맏아들의 거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이 동생을 성나게 했을 것이며 그를 더욱더 무책임한 존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의 바로 그 무책임함과 경솔함은 이미 형으로 하여금 상당한 자긍심과 자기 가치 의식을 키워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를 화나게 만들었고, 그것은 둘 사이에 적대감을 형성시켰고 그것을 더욱 가중시켰다. 하지만 형은 하는 일 모두를 보는 사람의 눈에 들게 하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충성심, 책임감, 신실함, 순종의 표본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의 생활 단 한 군데에라도 결점이 있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익을 위해 그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그가 아버지를 속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아버지보다 더 감지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어느 누구도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나타낸다. 우리 마음을 구하고 설득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맏아들을 우러러 보고 그를 존경했으며, 그의 말과 그가 보여 준 모범을 보고 그의 사람 됨됨이를 평가했다. 이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 다 사랑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닮을 수 없거나 발걸음조차 좇아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아주 대단한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그런 사람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정직한 인물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이 맏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뜻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 그의 삶의 진로가 갑자기 방해를 받는다. 그가 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그는 동틀 녘부터 해질 때까지 늘 일했고 아버지와 자기 자신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한까지 열심히 일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염려와 불안의 세월 내내 아버지는 이런 일을 기다려 왔고 맏아들도 표면상으로는 아버지와 함께 동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 아들이 돌아올 것과 그가 아들 자격을 회복할 것을 믿었지만 맏아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설령 그렇대 해도 그가 상상했던 동생의 귀향과 회복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그것과 전혀 달랐다. 그가 들에서 일하고 있을 동안 탕자는 집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환영을 받았고, 잘못을 용서받았으며, 아들의 위치를 회복했고, 마치 집을 떠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아들의 자리를 부여받았다. 게다가 해질녘이 되어 하루 일을 다 마친 맏아들이 연장을 손에서 놓고 집으로 돌아와 봤더니 집에서는 탕자가 돌아온 것과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일은 근면하고 성실한 맏아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그를 찾지도 않았다.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동안 그는 들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냉대 가운데 버려진 것처럼 보였고, 아버지는 그의 성실한 섬김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을 알고 있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이 소유한 가장 좋은 것, 그의 모든 사랑을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다 날리고 온 그 방탕하고 제멋대로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작은 아들을 위해서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이때 그가 처음 들은 소식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이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 소식을 들은 그는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다."는 말을 우리는 본다.
 
 지금까지 말해 왔다시피, 언뜻 보면 맏아들이 그렇게 불만을 가진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탕자가 돌아온 것에 대해 이 아버지가 느끼는 기쁨을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근면하고 자기 의무에 성실한 사람이라면 동생이 돌아온 것을 반기는 아버지의 기쁨이 너무 지나친 것에 대해 맏아들의 마음에 솟아오르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비유의 해석 배경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로 비유되는 분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다라서 그분께 대해서는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없다. 그분이 제멋대로인 아들을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탕자가 돌아온 것을 와서 함께 축하하자고 말하기 위해 아버지가 집 밖으로 나와서 맏아들에게 했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는 아버지의 행동에 공정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맏아들의 마음과 정신 자체에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대상은 누구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불가사의한 목적에는 숨겨진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볼 때, 그리고 특히 탕자 비유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눅 19:10) 오셨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 또 다른 곳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 13).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또 다른 비유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 결론 뿐에서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물론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세상에는 구원받기 위해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한 곳에서 분명히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모순이 생기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가 아니다. 즉,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온전하다'(Whole), '바르다'(just), '의롭다'(righteous)고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온전하다', '바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잃어버린 자', '병든 자' 그리고 '죄인'으로 깨닫게 된 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구별지어 생각해야 할 사항이다. 맏아들은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온전하고 건강하다가 생각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탕자의 귀환을 그렇게 기쁘게 반긴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에 비해 그의 행동이 상대적으로 우월했든지 간에, 자신의 온전함과 의에 대한 그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도 동생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크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사실 두 아들 중의 맏아들이나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죄를 뉘우치고 회심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전하지는 않다. 죄사함받는 것, 구원받는 것, 아버지의 은혜를 회복하는 것, 이것은 그의 필요이기도 하고 당신의 필요이기도 하며 필자의 필요이기도 하다.

예수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죄악으로 가득찼고
내 영혼은 캄캄하고 간악하며
그 속에 내 마음은 죽어 있습니다.
나는 언제라도 내 피난처 될 수 있는
깨끗케 해주는 샘물이 필요합니다.
지극히 귀하신 당신의 피는
이 죄인에게 온전한 의지가 됩니다.

예수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심히 곤궁하며
낯선 순례자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 땅 위에 쉴 곳이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길 가는 나의 기운을 북돋아 주시고
의심하는 내 발걸음 인도하시며
내 힘과 내 반석이 되어 주소서.
휫필드(Frederick Whitfield)


 이 비유의 말미를 보면, 탕자는 이제 자기 아버지와 무조건적이고 가장 완전한 은혜의 관계에도 돌입한 반면, 맏아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자기 자신의 욕구 때문에 은혜의 관계가 아닌 법적 의무의 관계에 여전히 매여 있는 것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이 차이점이 왜 갑자가 우리에게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는지 그 이유에 계속 주목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회심의 촉매제적인 효과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다시피, 촉매는 자기 자신은 변화되거나 손실당하지 않고 다른 물질의 화학 반응을 촉진시키는 물질이다. 여기서 탕자의 행동은 비화학적인 촉매로서,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관계의 존재(Presence)는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의 그것의 부재(Absence)를 뚜렷하게 지적해 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탕자는 하나의 촉매이다. 그는 자기 형이 회심치 않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 그 형의 마음은 늘 이 비유에 나타난 그대로였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이 온전하고 의로우며 바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공로라는 근거 위에 아버지와 화합되고 있음을 늘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저편에는 언제나 분노와 반항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탕자였던 동생이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의 진정한 상태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순전하게 회심한 사람, 삶이 변화된 사람,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지 전에는 숨겨져 있던 분노나 악한 뜻, 자기 의, 그리고 죄악된 교만함을 드러나게 만드는 촉매로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그 역사의 촉매제이시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 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 구분하셨는지를 볼 수 있다. 그 두 범주의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과 그 반대로 그분을 거침돌과 부딪히는 돌로 생각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다른 구약성경의 말씀(시 118:22)을 인용하셔서 직접 이렇게 선언하신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 21:42, 44).
 
 그분, 즉 돌은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확장해서 보면 그분은 우리 모두의 역사의 돌이시다. 사람은 그분의 은혜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거부하여 결국 깨어지고 부쉬지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그 촉매제이시라면, 역사의 결정적인 요인이시라면, 그분의 백성도 그분을 좇아 촉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도 성경은 역시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써 보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탕자 비유의 말미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제 죄사함받고 제 위치를 회복한 탕자는 형에게 사망의 냄새로 작용한다. 자기 의라는 맏아들의 돌벽(stone wall)은 이제 그 스스로 금이 가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단순히 법적인 기반에 근거한 것이었음이 명백해졌다. 그에 관해서 다른 어떤 말을 할 수 있든지 간에 맏아들의 마음속에는 전혀 은혜가 없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증거가 되는 것은 한때 탕자였던 아들이 그 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이제 하나님 은혜의 상징이 되어 아버지의 집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해 온 곳 어디에서나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회심하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어떤 반응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때로 그 반응은 아주 격렬한 것일수도 있다. 예를 들어, 초대 교회 때 교회의 확산에 수반되었던 끔찍한 핍박의 경우만을 보아도 그렇다. 로마 제국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만은 무력으로써 근절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무서운 고난 또한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사실상 성경과 은혜의 복음으로의 희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죄인의 구주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다. 베네룩스 3국에서는 알바 공작(Duke of Alva)과 필립 2세의 잔인한 군사들에게 수천 명의 신도가 죽임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크랜머, 리들리, 라티머 같은 사람들의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커서 결국 그들은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믿음을 위한 담대한 몸부림 속에서 불란서 위그노(Huguenot)들이 느꼈을 고뇌 또한 기억할 수 있다. 그러한 몸부림 가운데서 꼴리니(Gaspard de Coligny)같이 지극히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도 신앙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선교하다가 순교한 영웅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속량하시어 왕의 이름으로 망망한 대해를 건너 적지로 들어갔고, 그곳에 편만한 어둠의 세력에 그 존재 자체를 위협당했고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
 
 현재의 우리들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면 언제나 그에 대한 반작용이 있다. 그것은 결코 누구의 명령을 받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진리에 반하여 있다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아는 사람들의 원리와 헌신과 증거에 반대하는 것은 맏아들로 하여금 탕자에 대한 적의를 폭발시키게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요인에 근거하는 행동이다.
 
 현대인은 이성에 의해, 과학에 의해, 경험적으로 '아는'것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처럼, 그러한 이성과 과학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경멸한다. 기독교가 비과학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참 과학과 배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곧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요, 그래서 그분의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을 다스릴 모든 법칙을 지은 그 하나님이시기도 한데, 어떻게 두 분(창조주 하나님과 보존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성적인 현대인으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단죄하고 거부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그러는 데에는 훨씬 깊고 훨씬 심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2:14의 말씀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거 그들의 선조에 비해 더 과학적이지도, 더 합리적인 것에 대해 인도받지도 않는다. 인간은 기계의 형태를 따라 사고하는 컴퓨터가 아니다. 인간은 지성 뿐만 아니라 감성과 의지도 갖고 있다. 그러고 복음에 대한 그들의 반감은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우리 신앙의 비합리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죽어 있는 그들의 상태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그런 위치에 선다는 것, 그런 관계에 있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분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으면서도 그분께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상태,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분께 다가가려 하지 않다니!
 
 "저(탕자의 형)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다른 어린 양도, 다른 이름도,
하늘이나 땅, 바다에 다른 소망도 없습니다.
죄의식과 부끄러움에서
몸을 숨길 곳도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내 믿음은 낮게 타오르고
내 소망도 낮게 타오르나
오직 내 마음의 갈망만은 울부짖나니
깊디깊은 궁핍과 화 가운데서
당신께 울부짖습니다.

주님, 나는 죽었으나 당신은 생명이시고
나는 차갑지만 당신은 사랑의 불길이십니다.
내게는 천국도 없고
내 머리 누일 곳도, 본향도 없습니다.
주님 외에는!
로제티(Christina G. Rosset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