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자유

차례
1. 그리스도인의 고난
2.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1장
그리스도인의 비밀인 고난
 
 당신은 지금 고난에 직면하여 낙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욥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고 했습니다. 이 곳과 또 다른 여러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얼마나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또한,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욥 14: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 2:22,23에서 솔로몬 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러한 말씀들은 고난이 지닌 비밀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한 질문은 바로 그리스도가 나시기 이전의 세대를 살아왔던 신자들을 당황케 만들던 동일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만물의 기원에 관한 책, 곧 창세기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고난이 죄로부터 기인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한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기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6-19).
 
 이 구절 속에 '수고'와 '고통'이라는 말이 몇번이나 사용되고 있는지 유의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담에게는,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통과 수고가 바로 죄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죄가 없었다면, 고통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값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이미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타락함으로 인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그의 안에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롬 8:28)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연 이러한 고난을 견딤으로 인해 얻게 될 대가는 무엇일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벧전 1:7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억해 두어야 할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여러 모양의 시험이 주어지는 이유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해주실 수 없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고난을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미리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고난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과연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고난을 피하도록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임을 알기에 만일 그가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는 고난을 피하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데 우리는 의견이 일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난이 더더욱 풀기 힘든 비밀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면은 만일 그가 처음에 우리를 고통에서 피하게 하실 수 있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반문되는 질문은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의 비밀은 아직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때로 '왜? 왜? 왜? 나에게...'하며 계속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만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을 비롯하여 자연계 또한 함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통을 보며 인간은 왜 그럴까 하고 계속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수고-어머니의 수고-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하시겠다고(창 3:16)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이 납니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라고 한 욥 14:1의 말씀은 인간의 삶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친 후에도 그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몹시 그리워하는 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도처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맹인이 된 연고로 눈을 가지고도 볼 수 없습니다. 귀는 또한 듣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어떤 이들은 귀머거리인 연고로 듣지 못합니다. 손은 일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질병이 그것을 마비시켜 아무 쓸모없게 만들기도 하고, 폐는 숨쉬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암에 걸리면 결국 숨을 쉬지 못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또 두뇌는 생각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어떤 고통을 두뇌에 가해져 그것을 파괴시켜 못쓰게 해버리기도 합니다. 즉 고통은 우리 주위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통에는 육체적인 괴로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뇌도 포함됩니다. 일생의 꿈과 소망이 완전하게 부서져 버리는 정신적 파산이 있는가 하면 절친하던 친구가 위급한 때에 우리를 배반하기도 합니다. 평생의 반려자로 맹세했던 사람이 그 약속을 파기하는가 하면, 믿었던 자녀가 집안에 큰 수치를 끼치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죄는 슬며시 우리에게 다가와 남은 생애동안 평생을 후회하며 지낼 큰 실수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어째서 이런 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을까요? 그같이 철저히 어두움에 쌓인 고통의 비밀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는 걸까요? 아니 그분은 관심도 없으신 걸까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없는 것일까요? 이같이 투쟁과 눈물의 골짜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대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은 영영 없는 것일까요? 물론, 거기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고통의 비밀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한, 더 이상 비밀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욥의 예
 
 모든 성경 중에서 고통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책은 바로 욥기입니다. 이 책은 전체가 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특히 맨 처음 두 장은 그 책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첫 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8절).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2장3절에서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절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정말 의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계속된 두 번의 재앙을 겪은 욥에게는 소유도 가족도 건강도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런 고통이 단순히 그의 죄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여 욥에게 죄를 어서 자백하라고 몰아대었습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참소해댔지만, 그 말들은 욥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사실은 만일 욥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현대의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 곡 이 세상의 지혜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처방을 해주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 또한 욥이 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전혀 설명을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욥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주었을 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혹심한 고통과 친구들의 비난은 욥으로 하여금 자기 변명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신 처음 목적과는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욥은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당시의 전체적인 상황을 한꺼번에 봄으로서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욥기는 계속 진행되어 나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인 사단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인가에 대해 칭찬하시고 나자, 사단은 교묘히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야 당연합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 한가지 이유는 주께서 그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를 산울로 두르시고 보호해 주셨지요. 이제 그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한 번 빼앗아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고 말 것입니다." 사단의 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도 자신있게 답변하셨습니다. "좋다. 내가 허락하니 가서 한 번 그리해 보아라." 사단은 욥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았으나 욥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1장의 맨 마지막 절은 욥의 처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평가였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절).
 
 사단이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하나님은 "보아라. 욥은 그의 신실함을 지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건강을 한번 빼앗아 보십시오. 그리하면 욥이 정녕 대면해 주를 욕하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건강을 빼앗아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은 욥기 겪는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욥으로 하여금 그토록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첫째, 욥의 고난이 곧 사단이 거짓말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욥의 시련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말씀은 입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욥의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욥의 변함없는 충성심이 입증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심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할지라"(욥 13:15)고 선언한 그의 말 속에 함축되어 나타납니다.
 
 고통이 끝났을 때, 욥은 아주 원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재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선언함으로써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욥이 받은 고통의 마지막 결과는 다음과 같은 그의 증거를 통해 나타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욥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고난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핵심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고통의 결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난을 받기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바 대로 의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욥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결과로 그는 "내가 스스로를 한한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갖가지 고난은 그리스도꼐서 받으신 고난에 비교해 본다면 너무나 하잘 것 없는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면 그에 대해 많은 불평을 늘어 놓는 대신 스스로를 한(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욥이 받은 복
 
 욥기 마지막 장은 욥이 겪은 고난 뒤에 무엇이 뒤따라 왔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12절은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고통에 관하여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히브리서 12장 11절의 말씀과 동일한 진리입니다. 위의 구절 중, 특히 '후에'라는 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시험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함께 쓰여져야 할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루시는 방법에 대해 불평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또 부당하게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후에-징계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나니'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렇난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가져다주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빌 3:10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위대한 소망을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귀하셨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제2장
고난의 근본 원인
 
 비록 고난이 갖가지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에 빠져 타락하게 한 후,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저주를 받아"(창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라고 하신 구절을 통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구절이 여자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라." 또한 이 구절은 아담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마도 당신은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 관련된 일이다. 도대체 그 일이 나의 고통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졌기에 그 일은 당신의 고통과 상관이 있습니다. 오늘날 고통은 왜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모든 인류에게 죄와 고통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롬 5:12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시작과 기원에 관한 책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과 동물과 식물의 기원에 대해 말해 줄뿐만 아니라, 고통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초래한 죄의 기원에 대해서도 말해 줍니다. 그것을 어찌하여 만물이 원래의 모습 대신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성경의 뒷부분에서, 하나님은 만물의 원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지만,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만물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된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죄와 수고와 고통의 시작,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게 된 기원에 대해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창 1:26,27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말은 사람이 단지 육체적인 모양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즉 자신을 재현하신 것입니다. 그는 신들을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그 자신의 영적인 형상을 재현해 놓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과만 일치되도록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책임을 갖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이와 같은 목적을 가지셨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남자를 만드신 후, 또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1,22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자는 남자로부터 만들어졌기에, 남자에게 일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일한 또 하나의 사람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시고자 그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가 아담의 갈비뼈로부터 만들어졌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23)고 말했습니다. 즉 두 사람은 서로 교제를 나누며 또 하나님과도 교제를 나누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에덴 동산에 그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동산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 또한 완전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고통도 괴로운 일도 그들을 실망시킬 아무런 일도 없는 곳에서 완전한 기쁨과 조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환경과 관계 속에서 아무 눈물도 고통도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사람을 만드셨고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 당시 비극적인 일은 하나도 존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름답고 놀라운 교제만이 있었습니다.

사단이 개입하다
 
 사단은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관계를 파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사단은 고후 11:14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창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사단이 바라던 것은 하나님과 그가 만드신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일이었습니다. 사단을 하나님의 원수였기에 고통이나 수도를 알지 못한 채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던 이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기 원했습니다. 사단을 사람이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것을 도저히 참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때 사단은 그 자신도 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한때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특권을 얻기도 했었지만, 후에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해 자기의 의지를 내세우다가 그만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사 14:12-14).
 
 사단은 하나님을 대항해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고자 시도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이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지만, 사단은 그로 하여금 미움을 가지게 하고자 동산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겸손하도록 만드셨지만 사단을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오직 선한 것만을 알기를 원하셨지만, 사단을 사람으로 하여금 악한 것을 맛보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사단은 하와를 꾀어 오직 선한 것만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도록 만들고자 시도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자신의 자녀들을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 계통의 초등학교로는 아이들을 보내기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는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이 말한 논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이 만들었어. 네가 아는 것이라곤 선한 것뿐이잖니. 그러나 만일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와 같은 사단의 주장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보다 훨씬 더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죄에 빠지게 되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종하도록 만들겠다. 난 나를 섬기도록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 놓고 분리시켜 버릴 것이다." 사단은 그 자신을 위해 사람을 원합니다. 곧 그는 사람이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들어가 여자를 속이며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스스로 행동해 보라고 꾄 그 사단의 계략은 바로 이런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여자의 이기심을 충동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귀를 기울여 듣고 그 말에 따랐으며, 이기심을 좇아 행동했으므로 그만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 죄는 곧 여자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녀를 그녀의 남편으로부터도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아담은 아직 선악과를 먹지 않았었기 때문에, 하와는 하나님과는 물론 아담과도 교제가 끊겨 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담은 오직 하나님과만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언급이 없으므로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 교제가 단절된 채로 지냈는지에 대해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의 자의적인 선택
 
 아담은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아내와도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내의 범죄 이후 아담은 홀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와도 하나님과도 교제가 끊겨져 버린 자기 아내에게로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편과의 교제를 위해 아담은 다른 한편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와 교제하고 싶은 소망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소망보다 더욱 커지게 되자, 그는 결국 자신도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꾀임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성력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4). 즉 아담의 죄는 고의적인 선택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어져 있던 생명줄을 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단의 편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추구하는 삶을 바꾸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시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사람에 대해 무엇을 하실까요?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신 사실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여전히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을 했을지라도, 그것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변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엡 2:4,5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했다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서 죽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그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위해 한 일을 예비하셨습니다. 요 3:16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자, 그들은 애써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동산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죄로 인해 교제가 단절되기 전까지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와 주시기를 사모하여 기다리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몸을 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교제를 끊어 놓는 죄의 쐐기를 박아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9절)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했을 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그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는 일을 중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손상되어 버린 것을 보수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했을 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그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는 일을 중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손상되어 버린 것을 보수하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는 죄의 선동자인 사단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사단은 뱀의 모양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음가 같이 저주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4, 15).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결국에 가서는 사단을 누르고 승리하게 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는 어느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보다도 더더욱 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가 고통 당하시는 모습이 사 52:14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그리스도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했던"(사 53:3) 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우리는 다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기"(사 53:6) 때문입니다. 이것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에게서 분리되어 버린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스스로 짊어지신 고통입니다. 물론, 사람을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 속에는 당신과 나를 위한 고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죄값을 치루시고자 죽으신 그 고통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을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고통과 수고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삶은 그들 자신보다 하나님께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고통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며 그가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므로 사람의 죄에 대한 해결책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즉 그는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기 위해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만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고후 5:18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고통은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되어야 할까요? 그 누구도 고통이 끝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쫓겨 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완전히 회복되며 모든 눈물이 씻겨지게 될 그 때까지 고통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계 21:4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악의 고통을 당하신 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제3장
최악의 고통을 당하셨던 분, 그리스도
 
 고통의 근원을 추적하여 밝혀냈으므로 이제 우리는 결코 다시 우리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특히 인간을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견디셨던 그 모든 고난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지만,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기꺼이 고통과 죽음까지를 감수하셨습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구원의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단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영원히 방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는 최고의 대가가 지불되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그의 독생자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벧전 1:20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그의 구원을 계획해 놓으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받았음을 언급한 다음, 20절은 그리스도를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된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또한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그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롬 5:12은 다음과 같이 엄중한 말로써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나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3:23 역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첫 사람 아담 안에는 오직 죽음과 고통이 있었을 뿐이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죽음과 고통을 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딤후 1:10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은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계 21:4에 기록된 것과 같이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이렇게 재앙과 고통이 늘어만가는 원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을 부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시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은 계속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 오기까지 그 고통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고통이 지닌 비밀을 푸는데 있어 한 빛을 던져 줍니다. 고통은 대환난이란 최고봉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가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년 동안, 지상에서의 고통은 최고의 극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던져져서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은 영원히 끝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과 재앙들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아무 관심도 없으시단 말인가 하고 의문 부호를 던집니다. 물론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 고통을 당하며 죽게 하시기까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고통은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의지적으로 자기 길로 가기를 선택한 인간, 바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죄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계속 그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땅에 계셨던 당시 불신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또한 오늘날의 수많은 불신자들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신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사람에게 알려진 고통 중 가장 크고 처절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는 죄-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시기 위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받으신 고통이 헛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통받으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합당한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부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영원한 형벌을 피하게 되기를 빕니다.

제4장
그리스도인의 확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받기 시작하면, 종종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합니다. 나는 정말로 구원을 받은 걸까? 하나님이 이것을 내게 허락하신 것일까? 내가 정말로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두시는 걸까? 고통을 받는 동안 기억해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통 당하는 목적은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고통에 대한 가르침 또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근거로하여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또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신 사실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과 구원받은 이후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관계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선언한 엡 1:3 말씀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벧전 1:3은 또한 이와 유사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두 구절은 모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되어 집니다. 그리고 두 구절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그리스도인이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주시되"(엡 1:3), 그리고 "그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벧전 1:3)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사용된 시제를 주목해 보십시오.
 
 엡 2:6에서 사도 바울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과거형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부활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육체적 부활이 과거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육체의 부활이 이미 과거에 일어난 것처럼 말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뜻하시고 시작하신 일은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성취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일을 시작해 놓고 때로 그것을 완성하지 못할 적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일들에 관해서는 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 시제로 선포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을 세 가지 시제, 곧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러한 시제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어떠한 때도 오직 현재일 뿐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가 그렇듯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로 뜻하셨다면, 그 자체가 이미 실현된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읽으며 과거, 혹은 현재의 사건 뿐만 아니라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들 조차도 하나님 편에서는 다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십시오. 특히 엡 1:4-7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자들이며 우리의 죄 역시 이미 해결되어진 문제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 볼 때 이러한 일들은 이미 이루어진 과거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벧전 1:3,4은 우리의 현재 위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고 우리를 통해 그가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영적인 탄생인 거듭남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디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탄생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 1:12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고후 5:18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시험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영구적인 것인지 혹은 어느 정도 효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해 보거나 검증해 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 과정 전체를 궁극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 실패를 각오하고서 한가지 방법으로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습니다. 그 보다는 부분적으로는 실패하더라도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함으로써 그 일을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내려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시행착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시행착오를 절대 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의 시종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이 계획하는 일은 곧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피조물들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보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은 이미 이루어진 일로서 성격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를 위해 하늘에 유업을 간직해 두시고 우리가 그 유업을 얻기까지 돌보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지상에서의 삶이 여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영광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순례자로서 때로는 고통과 시험과 시련으로 가득찬 길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험이 다가오든지,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신이 겪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꼭 알아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기업이 우리를 위해 더없이 안전한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겪고 있는 시험과 시련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복과 우리를 위해 간직해 두신 기업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므로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영적 상태나 행실이 성숙되어져가는 동안에조차, 그 위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內)이라는 우리의 위치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다만,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짐에 따라 우리의 상태는 변화되어 지는 것입니다.
 
 골 3:2,3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없음이니라". '너희가 죽었고' 라는 말은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너희가 이미 죽어있고"라는 뜻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는 구절 또한 엄밀히 말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는 의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하나님 안에 감춰진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두 번 다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한편에는 죽음이 있었던 반면, 또 다른 한편에는 생명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죽었지만, 그리스도와 동일한 위치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도-결코 그 어느 누구도-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위태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이 우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는지 모르나,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협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부터 영적인 생명을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멸하고 해하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멸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파멸시키는 것 또한 결코 가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주어집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는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4). 이것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확신입니다. 계속해서 골로새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어떻게 억제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는 것, 즉 영적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이며, '그리스도 안(內)'이라는 위치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의 근거
 
 베드로전서에 나타난 확신의 근거를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 안에 어떻게 계시되어 있는가를 보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벧전 1:3)고 했습니다. 벧전 1:23에서는 "너희가벧전 1:23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영원하기에, 그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새로이 생명을 얻은 우리 또한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새로운 생명에 대한 확신에 근거는 에베소서 2장에서 또한 강조되어 있습니다. 엡 2:8,9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10절에 제시되어 있으므로 8, 9절에 멈춰 버려선 안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은 구원에 따르는 결과-즉 선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8절과 9절이 구원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면, 10절은 구원의 목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자의 보장된 미래
 
 신자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지만, 그 중 세가지가 그리스도인들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접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됨과 동시에 '산 소망'(벧전 1:3)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 산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이 산 소망 중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보장된 우리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장차 부활하게 될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딛 2:13 역시 이 소망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처럼 놀라운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현재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고난을 두려워하고 그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한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요일 3:2,3 또한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모든 신자들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훈계도 아울러 받습니다.
 
 둘째로, 신자는 자신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기업을 잇게(벧전 1:4) 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나서 산 소망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기업을 이을 후사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업에는 네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썩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주신 이 기업은 사망과 썩음이 해를 입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기업은 또한 '더럽지 않은 것'입니다. 이 기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그것을 더럽히거나 오염시킬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 기업의 특징은 '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됨으로 얻는 산 소망 중 하나인 이 기업은 본래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즉 그 기업은 늘 최고의 가치를 유지하며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성장과 발전의 시기가 지나가면 그 뒤에는 반드시 쇠퇴와 멸망이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기업은 결코 쇠하지 않습니다. 이 기업의 네 번째 특징은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기업을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기업은 지금 하늘에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업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를 보장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또한 그것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장차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새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육체적 고통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하신 바 된 기업에 대해 설명한 후,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은 자"(벧전 1:5)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얻을 기업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위해 기업을 보호해 주시며 또한 그 기업을 위해 신자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그의 기업을 받게 될 그날까지 보호하심을 입게 될 것이라는 증거를 주셨는데 그 증거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증거를 '우리 기업의 보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엡 1:13,14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하려 하심이라." 보증이란 말은 '첫 불입금', '증거금', '계약금', '담보물'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구매자들은 진심으로 무엇을 사겠다고 확정했을 때 보증금을 지불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의 나머지도 주어지게 될 것에 대한 보증으로 신자에게 주어졌습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리라는 것을 확신케 해주십니다. 사람은 때로 약속된 지불금을 갚지 못할 경우가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신 것은 반드시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벧전 1:5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 그 즉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기업을 주실 것을 보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엡 2:8), 그런 다음 그 믿음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벧전 1:5에서 말하는 '구원'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주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이것은 또 어떤 종류의 구원일까? 나는 이미 현재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구원에는 세가지 면이 있음을 알게 될 때 그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이들 세가지 면이란 과거, 현재, 미래와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을 때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기 때문에, 결코 심판에 이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죄의 권능과 그 지배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현재적인 과정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 3)
 
 벧전 1:5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원이 세 번째 측면, 즉 미래에 이루어질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살전 4:16,17에서도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구원의 세가지 면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있어 영혼의 구원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생활의 구원은 현재의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고 몸의 구원은 장래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에 의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생활의 구원과 몸의 구원까지도 또한 보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보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벧전 1:3)된 것이므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도 우리에게 기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기업의 내용은 엡 1:18,19에 기록된 바울이 기도 중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임을)...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기업은 성도들 자신이 될 것입니다!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각 개인이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인 참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업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살핌과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5장
고난 중에 누리는 기쁨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유업을 위해 그들이 보호받고 있음을 확신시켜준 뒤,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학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6). 여기에서 우리는 엄청난 역설과 접하게 됩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크게 기뻐하도다."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중에 어떻게 크게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근심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5절에 언급되어 있는 구원-즉 우리가 받을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이며 최종 완성 단계인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하는 가운데 이 최종적인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롬 8:22, 23)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신자는 최종적으로 육신을 구속받은 후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이미 여기서 말하는 이긴 자인 것입니다. 요일 5:4,5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승리 외에 또 다른 측면에서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 승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이러한 승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상급을 받게하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는 것은 그 안에서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것입니다.
 
 벧전 4:12,13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현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가 함께 즐거워 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이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쁨과 슬픔의 차이점을 깨닫게 된다면 이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은 내면에 있는 견고한 기반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어 이 기반이란 영원한 결과가 수반되어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즉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 놓으신 것, 그것을 근거로하여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내면적인 것에 속하는 반면, 슬픔은 외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환경이란 일시적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만 지속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수많은 혹은 여러 가지 시험을 겪고 있다 할지라도 왜 기뻐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고통 중에서조차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에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행복은 외적으로 발생되는 일을 근거로 합니다. 그것은 환경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인이 환경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다고 해도, 그는 환경에 상관없이 주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경 중에서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다. 슬픔 또한 외적으로 발생되는 일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의 기쁨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환경에 의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의존합니다. 기쁨은 주님과 우리 영혼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믿음에 의해 나타나게 됩니다.

시험의 기간
 
 벧전 1:6을 통해, 우리는 시험이란 '잠깐' 지속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기간 동안 주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가지 시험'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여러가지'라고 번역된 낱말은 '갖가지 종류의 다양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의 의미는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일생동안 갖가지 종류의 시련을 경험하게 됩니다.
 
 시련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에 관계없이 우리는 고전 10:13의 약속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어느 때에라도 기억될 수 있도록 암송해 두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은 각자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이나 시련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신실하심에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믿음 뿐만 아닌 그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시련은 그것이 필요할 때 필요한 것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것은 벧전 1:6에 나오는 '필요할 때마다(if need be)라는 말에 의해서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필요할 때마다(if need be) 오는-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히 11:35-38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영웅들 중에 몇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사람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의 믿음을 인해 크게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약 1:2에는 사도가 기록한 바 용기를 주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들이 우리 삶속에서 이루게 될 일로 인하여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 연고로, 시험은 각각 그 모양을 달리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할 때 주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적절한 모양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큰 책임을 감당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욱 큰 시험이 부여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너무 멀어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므로, 역시 큰 시험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종류가 어떤가에 관계없이 우리는 그 시험이 우리 안에서 이루게 될 일로 인하여, 그리고 그것이 잠시 동안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항상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제6장
믿음의 시련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여러가지 시험'이 주어지는 이유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고 명백히 밝혔습니다. 특히 '너희 믿음의 시련'이라는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믿음이란 모든 영적인 생활의 기반이 됩니다. 만일 믿음이 올바로 서 있다면 그밖의 모든 것 또한 올바로 서게 될 것이고, 만일 믿음이 무너지면 그밖의 모든 것 또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즉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육신적인 영역에서조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도 이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농부는 곡식을 심고 믿음으로 그 씨가 열매 맺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분명히 그는 전에도 그렇게 되는 것을 이미 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시 그렇데 될 것을 믿고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결코 곡식을 심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런 신뢰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신뢰하여 우리의 돈을 여러 가지 부문에 투자함으로써 이러한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합니다. 모든 것에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기에, 그것이 진짜인지 혹은 거짓된 것인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느낌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 차이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롬 10:17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한, 우리가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입니다.
 
 이러한 믿음과는 달리 느낌은 환경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나는 The Back to the Bible 사역 중의 하나를 위해 필요한 일정한 액수의 돈을 놓고 오랫동안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 그 정도의 돈이 들어오게 되리라고 느껴지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내가 꽤 오랫동안 기도해 왔기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었고, 그 돈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주님과 더불어 느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그 돈이 들어오게 될 것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느낌이 믿음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 기도했습니다. "저는 나의 느낌이 어떠하든 그와는 상관없이 말씀을 믿겠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믿음에 응답해 주셨으며, 그 분의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액수의 돈을 보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느낌은 환경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1:7)고 강조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게 해주므로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믿음은 금보다도 꼭 이 세상에 속한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없어질 것이지만, 믿음은 그헐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이 생의 삶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상급과 복을 얻게 되는 천국을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때, 믿음은 참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결실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금이 '불로 연단되어' 정련되어진다 할지라도(벧전 1:7) 우리의 믿음은 그 금보다 더 귀합니다. 금이 얼마나 순도가 높은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불로 단련시켜봐야만 하듯, 우리의 믿음도 깨끗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거쳐야만 합니다.
 
 욥의 믿음은 금이 단련되는 것 만큼이나 혹심한 시험을 거쳤습니다. 그 고난 중에서도,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습니다. 욥은 혹독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번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정신적 고통은 친구들의 훼방과 거짓된 참소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한때 욥이 동요되기는 하였다 할지라도, 후에 그는 더욱 굳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고난 중에 욥은 전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고, 또 하나님은 아주 멀리 계신 듯 보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욥의 탄식으로 미루어 볼 때 욥이 그렇데 느꼈던 것 만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 9). 욥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와 같은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단련받은 후 에는 정금과 같이 나오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욥은 비록 자신이 당한 상황에 대해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일하고 계시며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음으로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또 결코 그를 버리지도 않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당신도 고통과 시련이 심각할 때때로 하나님이 당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진 적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때에는 모든 것이 몹시 암담하고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며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 두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어떻게 하실 것과 또 당신을 어디로 이끌어가실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욥과 같이 당신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단련하신 후에는, 당신이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시련 그 너머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모든 것이 잘 되어가지 않는다고 느낄런지도 모르지만 그 느낌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또한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낄는지 모르지만 그 느낌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결코 느낌이나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면 그 믿음이 당신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히 11:1에 따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삶이 우리가 장래에 받게 될 것을 근거를 두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
 
 하나님은 당신과 나의 삶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10)라고 했습니다. 후에, 그는 하나님께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욥 34:21-23). 욥이 무엇을 깨달았는가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에게 부당한 것을 허락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며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신다"고 말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잠언서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관심 밖의 일이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당신을 불안하게 합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위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두려워 떨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생활 가운데 죄가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전부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만일 당신의 양심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면, 당신은 그에게 죄를 자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시련과 어려움, 고통 수고 심지어 실패조차도 모두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이해해 주십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선자라고 부른 것과 같이, 당신의 친구들 또한 당신이 겪고 있는 어떤 시련을 인해 당신을 큰 죄인처럼 여기고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당신의 고난이 어떤 숨겨진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당신의 등 뒤에서 수근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들의 그릇된 참소를 공공연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친구들의 취해야 할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죄악의 탓으로 돌이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을 알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잠 20:24은 말합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꼐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예레미야도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렘 10:23,24)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는 "주여, 당신이 나를 징계하실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소서 그러나 자비와 친절오 해주소서"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갖고 계시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욥 23:10)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단련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렘 17:10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하나님은 "내가 이 모든 것을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심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후 모세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을 보아도 잘 나타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되 언제나 그 목적을 갖고 행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검증해 보십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앞에서 낮아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현재 경험하고 있는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더 잘 참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어떤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견딜 수 있는 더 큰 인내심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어떤 목적을 위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가 화를 내는 일들은 점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 용기, 믿음, 인내심, 사랑, 충성심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마음가짐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러한 것들 중 한가지에 대해 심한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련이 얼마나 혹심한 것일는지 몰라도, 당신은 반드시 고전 10:13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신실한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우리의 시험이나 시련을 사단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분명, 사단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많은 괴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가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계시어 다스리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에 의해, 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분량까지만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시험을 받도록 허락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욥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계점 그 이상의 시험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하는 도구 그 이상의 것을, 즉 사단을 다스리시며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 1:11)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그가 하고 계시는 일을 아는 분이십니다. 욥은 이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또한 그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고난에 대한 욥의 반응을 주목해 보십시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그는 언제 경배했습니까?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가족, 종들과 모든 소유물들을 잃어버린 후였습니다. 욥이 자신이 입은 손실에 대해 나타낸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아"(2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아이를 하늘로 데려가셨을 때 우리가 고백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욥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2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비록 욥이 그 누구보다도 큰 시련을 받고 고통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영적 생활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즉 영적인 영역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존하므로- 시험되어져야만 합니다. 즉 믿음은 그 확실성이 입증되어져야만 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영적으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믿음을 실제로 갖고 있는가 갖고 있지 않은가를 증명하기 위해 시험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욥은 앞날을 내다보며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습니다. 욥은 그가 받은 시험으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벧전 1:7이 기록되어지기 수세기 전에 살고 있었지만, 그 말씀 안에 담긴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 금을 단련시킬 때, 제련시키는 사람이 그것을 들여다 보면 자기 모습이 비취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정금같이 나오기를 소망하거나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욥에게 있어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우리도 하나님과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목적에 대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받는 시험의 결과에 대해 욥이 어떻게 그토록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목적이란 실패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한 엡 1:3 말씀도 우리에게 역시 이것을 확신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축복들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들 중 대부분이 우리에게는 장래에 부여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빌 1:6을 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집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구절은 "여러분-The Back to the Bible Broadcast(백투어 바이블 방송)-을 통해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써서 편지를 보내 주시는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종종 잘못 인용되곤 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하시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온전케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영생을 누릴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것을 시작했고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낼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시작하신 것을 끝내 마치실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진리가 다음과 같은 축복의 말씀이 기록된 히브리서 13장 20, 21절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의 확신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 자신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그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빌 3:12-14). 예수 그리스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바울을 사로 잡으셨고 바울은 그의 삶 속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일이 끝가지 지속되어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시험과 시련들을 포함해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런 확신으로 인해, 바울은 딤후 1:12에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능히 그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있기에, 나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당신도 하남님께 대해 그와 같은 확신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7장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징계
 
 히브리서 12장은 고난의 문제에 대해 수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히 12:6-10).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고자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으로부터 우리는 징계란 거룩함에 이르는 훈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징계'란 말은 '잘못을 바로 잡아주어 훈련시키는 것'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징계'란 단어는 형벌로서의 의미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준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계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허라하시는 고난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체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그러한 질문은 던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히 12:7,8을 보면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인정하시는 증거임이 분명합니다. 육체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서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고자 그를 징계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가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가 보시는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만드셨고 또 유용하게 쓰임받도록 우리를 성숙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한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즉 징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아들이 아니요 사생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징계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외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는지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아무런 징계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재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는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기 보다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벌과 하나님의 징계의 차이점에 대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그의 죄에 대한 형벌이 십자가 위에 전부 쏟아 부어졌기 때문에 결코 죄 때문에 형벌을 받지 아니합니다. 히 10:10은 말합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요일 1:7을 통해 우리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같은 책 1장 9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징계가 주어지는 원인입니다. -즉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를 깨끗케 하기 위해 징계를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롬 8:1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죄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죄에 대하여 사람에게 두 번 벌을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으며 우리가 그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모든 죄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것은 결코 죄를 더 지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오용하여 죄에 대한 책임이 이제는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 많은 징계를 불러들일 따름입니다.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은 벌을 주시지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징계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자가 되십니다. 즉 그의 자녀가 되기까지 우리는 그를 결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요 1:12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모든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은 전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의 자녀는 아닙니다. 단지 그의 가족으로 태어날 때에만 비로소 그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가족이 아닌 사람이게는 심판을 내리시지만, 그의 가족이 된 자들에게는 그들안에 가장 최선의 것을 이루시기 위해 징계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벌은 결코 죄인의 유익을 위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로움을 나타내고, 그의 주권을 입증하기 위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잘 되게 하기 위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자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유의해 보십시오. 형벌은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로움을 입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징계는 그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형벌을 단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므로 결코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징계는 그의 자녀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조차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인 연고로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자녀인 것과 나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당신이 내 안에서 일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주시니 저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징계의 종류
 
 다윗의 삶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징계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됩니다. 그는 나이 들어 심각한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습니다. 시 32:3,4에 나타난 그의 신음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며 징계하실 때 그가 했던 말입니다. 시 119:67에서도 다윗의 기도 내용이 나타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같은 시 119:71에서도 그는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와 같이 다윗이 겪은 고난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를 되새겨볼 때 우리는 모든 고난이 곧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징계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의에 대해 스스로 만족감을 누리며 살던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의롭게 여기거나 자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받은 징계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욱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욥은 스스로 그가 받은 고난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재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 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 6)
 
 이번에는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시련은 어떤 드러난 죄나 내면에 숨긴 허물을 바로 잡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품을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있어 고난은 곧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또 여호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도 멀리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벗'이란 호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잘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사도 바울이 받았던 고난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 또는 훈련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았던 목적은 고후 12:7에서 그가 기록한 말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이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계시를 받은 연고로 그만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바울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늘상 그것을 인식하는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를 없애 주십사고 주께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9절 하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보고 그것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인지, 혹은 훈련받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예방을 하기 위한 것인지를 진단해 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이 무엇 때문에 주의 징계를 받고 있는지에 관해서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로부터 교훈을 받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곡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는 사람을 보고 조급히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사자는 이유를 잘 알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드보다 더욱 심한 고난을 겪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 땅에서 혹은 천국에서 하나님이 매우 중요한 일을 맡기시고자 그를 준비시키는 연고일런지도 모릅니다.

깨끗게 함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하나의 이유가 말 3: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 하나님은 연단하는 분이십니다.
 
 죄의 대가가 이미 치루어졌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본성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더럽힌 연고로 우리는 단련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었기 때문에 다시 회복되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고 계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이 아무런 고통없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롬 8:28,29에 따르면, 하나님은 여러 가지 과정을 통해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속에 있는 죄 때문에 파괴된 자신의 형상을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므로써 죄로 인한 심판에 대한 문제는 해결이 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리의 삶이 완전하게 변화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이후에라야 우리는 이생 뿐 아니라 그 후에 누리게 될 영생을 위해서도 합당하게 준비된 자가 될 것입니다.
 
 사 48:10에서 하나님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풀무란 금과 은을 단련시키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무의 역할을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의 결과로, 사람은 선과 악이 혼합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찌끼를 분리시켜 제거해 버려야만 한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하나님을 깨끗케 하시는 자로 나타내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사 1:25에서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합물을 다 제하여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미 말 3:13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깨끗케함을 받은 자들이 의로운 제물을 그에게 드릴 수 있도록 깨끗케 하는 자로서 앉아 계십니다. 깨끗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풀무를 얼마나 뜨겁게 하셔야 할까요? 또 그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어야 할까요? 이런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데, 깨끗케 된 금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언제 발견하시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결정되어질 것입니다. 그는 세밀하게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고전 10:13에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까지 우리를 주목해 보실 것입니다. 고난의 진정한 목적은 영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고통은 잠시 뿐이 것으로서 짧은 시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잠시동안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영원을 위해 준비되어 지도록 해주십니다.
 
 당신은 탈곡기가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알곡과 밀짚은 기계를 통과하는 동안 빻아져서 잘게 부수어 집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있는 쭉정이를 참으로 중요한 것으로부터 갈라내기 위해 울로 하여금 영적인 분리기를 통과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 대해 행하시는 일을 마치 토기자이가 진흙에 대해 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 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1-6).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도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손에 두시고 그가 원하시는대로 모습을 만들어 가십니다. 아마 당신은 토기장이의 처사가 너무나 가혹하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욥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릇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셨습니다.
 
 나는 가공되지 않은 원 상태로는 단지 1달러 정도에 불과한 한 개의 쇠덩어리가 여러번 거듭 불에 달궈지고 망치로 두드려져 단련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는 70달러 정도의 가격이 나가는 바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동일한 쇠덩어리는 또 수천달러의 가치가 있는 시계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시련이 없어질 금보다 더욱 귀한 이유인 것입니다. 불은 찌끼를 제거합니다.
 
 벧전 4:1,2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꼐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죄를 그쳤음이니"라는 구절은 신자가 다시는 죄된 행위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가 이미 죄의 권능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동일한 진리가 로마서 6장 14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열매를 맺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 이와 같이 깨끗케 하고 난 후의 놀라운 결과를 유의해 보십시오. 그것은 '더 많은 과실'을 맺게 되고 그 후에는 '수많은 과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요 15:8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의 결과 얻어지는 것은 히 12:11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의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의의 평강한 열매'는 오직 '글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들에게만 맺어지는 것이란 사실을 유의해 두십시오. 어떻게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연달하게 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의 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온전케 함
 
 하나님은 또한 그의 자녀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즉 그들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4가지 중요한 결과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온전케'라고 번역되어진 말은 '완성하다' 또는 '완성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강하게 원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굳게 하기 원하십니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굳건한 터 위에 서있지 못합니다. 날씨가 좋으면 그들의 기분도 좋고 날씨가 나쁘면 또 그들의 기분도 나빠집니다. 이러한 이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굳게-더욱 안정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하기 원하십니다. 시련은 그 다음의 시련이 닥칠 때 좀 더 쉽게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해줍니다. 조금씩 더 큰 시련이 임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신을 아브라함을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맨 처음, 그는 그의 본토와 고향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그와 함께 있던 유일한 혈육인 롯과 결별해야만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대단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 성장하여 소년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시련은 설상가상격으로 엎치고 덮쳐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겪는 가운데, 아브라함은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터를 견고케 하기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고난 결과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그 안에서 믿음의 터가 견고해졌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르락 내리락 요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산 정상에까지 올라가 있는가 하면 그 다음날은 골짜기 아래로 곤두박질해 버리고 맙니다. 한때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지만 잠시 후에 최악의 상태에서 방황합니다. 사업이 실패하거나 가족에게 큰 질병이 닥칠 때 절망하고 요동하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가 하고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아래 위로 요동치 않는 신실한(even-Keel)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시며 또 필요로 하십니다. 오직 성숙하고 온전케 되고 굳게 되고 강하게 되며 터를 견고케 한 사람들만 영적 전쟁에서 끝까기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엡 6:12,13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자기를 버리게 함
 
 하나님은 또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라는 원리를 배워야만 합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이 원리가 옳다는 것을-특히 우리가 계속하여 실패를 경험하고 난 후에-깨닫게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당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이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사도 바울을 또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 15).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을 통해 자기를 버리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하고 연단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이기적인' 삶입니다. 자아는 그 자신의 권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삶이 중심을 '나'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옮기게 해줍니다. 고후 1:4이 강조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 진리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 가질 것을 가르칩니다.

신자들을 흠이 없게 세워줌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그의 앞에 흠이 없이 설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 그들의 삶 속에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유다가 하나님을 가리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 1:24)라고 했을 때, 그는 이와 같은 세우심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그리스도 앞에 교회가 어떻게 세우심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앞에 교회가 어떻게 세우심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 27).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흠이 없이-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는 보상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의 삶 속에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상고해 보고 난 후, 우리는 그 모든 고통에 대해 하나님이 전부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의 앞에 기억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해 두십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였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고통에 대해 전부 알고 계시며 또 그것을 하나하나 기록해 놓으셨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격고난 이후에도 사도 바울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롬 8:18). 이것이 바로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난을 당했던 사람의 간증입니다.
 
 바울이 겪었던 고난의 일부를 우리는 고후 11:24-2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난 중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이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현재'의 고난(롬 8:18)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러한 언급을 했습니다. 그는 고난이란 단지 지상에서의 그의 생애와 관련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이미 치룬 연고로 그들이 견디어 내야 할 어떤 고통도 단지 이 세상에서 목숨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만 찾아올 뿐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관한 바울의 언급은 영원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영광은 정말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미 우리에게(unto us) 계시되어졌지만, 앞으로 우리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몸을 입게 될 때에는 우리 안에(in us)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영화롭게 될 몸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 21).
 
 영화롭게 될 몸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될 영광의 일부일 뿐입니다. 만일 당신이 불구이거나 혹은 소경이거나, 또는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현재의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장차 오게 될 영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변화된 마음 또한 가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 때 우리는 영원히 온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며 왜 우리가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 안에 나타나게 될 영광 속에는 그리스도와 닮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 29절이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장래에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에 대한 사실은 요일 3:2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나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성경 말씀을 상고해 볼 때 우리가 겪는 고통에 보상이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떤 고난일지라도 장래에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잠시뿐인 것이며 또 없어져 버릴 것이지만 뒤따라올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고난은 세상에 속한 것이지만 영광은 하늘의 것입니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서로 비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한순간의 영광이 일평생의 고난을 능가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그가 당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장치 뒤따라 올 영광으로 그의 고난을 보상해 주실 것이란 사실을 알 때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영광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현재의 고난과 비교조차 될 수 없습니다.

제8장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
 
 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통해 혹심한 고난을 통과했지만, 그의 시선은 고난을 너머 그 위에 있는 목적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후 4:8, 9)고 했습니다. 그의 시선이 변함없이 고난 그 위에 있는 영광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이것이 고난 중에 바울이 가졌던 태도였습니다. 겉 사람은 모든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 후패해 가고 있었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그것은 '환난의 경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선은 그가 이 생에서 겪고 있었던 고통과 환난이 아닌, 장차 올 영광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바울에게 이루어진 것이 또한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시선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것에 고정시켜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어 줍니까? 히 12:10로부터 우리는 징계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것-그것이 우리 삶의 최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기억해 두어야만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여기서 '후에'라는 중요한 낱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이 글을 기록한 기자는 일시적이며 보이는 것보다 영원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이 아닌, 장래의 상급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극심한 고난을 겪을 사람으로 추측되어 지는데, 아마도 사도 바울이 아닌가 하고 여겨집니다. 그는 높은 학문을 연구한 뛰어난 성직자였지만, 고통 가운데 지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에 의해 좌절하는 대신 장래를 내가 보았고 '후에' 올 것을 인해 즐거워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 9). 바울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던 이유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것은 단하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얻고자 애썼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그를 얻기 소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이룰 수 있는 의를 가지고 발견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AM로 말미암은' 의를 가지고 발견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 위해 의를 구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고 또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의를 언급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의가 바로 히 13:21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 구절은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닮기를 열망했습니다. 당신도 이러한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고난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소원
 
 빌 3:10에서 사도 바울은 부연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노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까지도 원하고 있습니까?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 없이 그의 부활의 권능을 얻기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수단입니다. 고난, 곧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도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해줍니다. 부활할 때 우리가 그와 같게 될 것이지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의 부활의 권능에 대해 어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빌 2:5-8은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천국의 삶을 잠시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 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영광을 기꺼이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 아무도 심판을 피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헌심을 보고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빌 2:12-14에서 바울이 보였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바울은 지난 날의 고난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장래를 바라보는 데에 그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비록 이후에 더 많은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해 줄 것이므로, 그는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기 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당신 또한 바울이 얻고자 했던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 원하십니까? 그리고 그의 충만히 내주하심에 대해서도 알고자 합니까? 당신은 그의 형상을 본받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육체대로 살면 한 사람의 야곱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때는 영적인 거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기억하도록 그의 환도뼈럴 치시고 그에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바울 또한 그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기 때문에 그는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된다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수년전 성경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나는 오른팔과 손가락 하나를 제외하고는 온 몸이 불구자인 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를 방문하러 갔을 때, 나는 그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세에서 등을 받치고 무릎 위에 타자기를 올려 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은 손가락 하나를 가지고 그는 어떤 내용의 글인가를 열심히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한줄을 다 마쳤을 때, 그는 타자기의 캐리지조차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역시 그와 같이 불구이지만 약간은 제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동생은 필요할 때마다 매번 캐리지를 옮겨 주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타이프를 치던 그 사람은 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기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 그가 강의실에까지 갈 수 없었으므로 학생들이 그의 방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과 불구인 그의 동생은 나이가 많으신 그들의 어머니가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천국으로 데려감을 입은 후 일주일이 못되어, 그의 어머니와 동생도 죽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부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장차 올 영광에 고정시킬 때, 우리는 역시 심한 고난 중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유진 클라크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많은 분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만큼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듯 고통스러운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단히 훌륭한 찬양을 작곡해 오고 있는데, 그 중의 상당량이 Back to the Bible에 의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깊은 고난을 바탕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란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 곳은 백만장 이상의 레코드로 만들어져 세계 도처에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노래가 고난으로부터 낳아진 것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원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서 8장 28-30절
 
 고난의 궁극적인 목적은 롬 8:28-30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어떻게 그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도 창세기 3장에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았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속의 길을 열어놓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과 징계에 즐거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안에 다시 회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반드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시작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역경들은-시련, 어려움, 슬픔, 손실, 고난, 고통, 실망-모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4:17에서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 듣게 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과함으로써 이루어지기에 그것들은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들 모두가 로마서 8장 28절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이 그가 언급한 것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이 그가 언급한 것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 우리를 좌절케 만드는 일, 우리로 하여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게 만드는 괴로움과 시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들이 '합력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 그것들은 도무지 우리를 위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의 삶 속에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하고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히 12:11의 '후에'라는 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어떤 특별한 일이 왜 나에게 중요한가 하는 이유를 결코 알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퍼즐을 끼워 맞추는 일과도 같아서, 퍼즐이 완성되기 전까지 각 조각들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한 개의 조각은 그 자체만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고 난 후 우리는 그 퍼즐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합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유의해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 있지 않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당장 선한 것만을 원합니다. 나쁜 것이나 실망을 가져다 주는 것은 그 무엇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풍작을 거두었다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농사에 실패했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실패도 역시 선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직장을 잃고 나서 당신은 그것을 아주 좋지 않게 여길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고 계신 일을 잘 아시는 분이시며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이 강조했던 선은 우리에게 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선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도 선한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롬 8:28에 기록된 약속이 당신에게 성취될 것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 약속을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라는 말의 헬라어 시제는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랑하는 자'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하나의 자격으로서, 이 약속은 오직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이 나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기 전 먼저 이 두가지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이 갖추어지고 난 후 우리는 담대히 이 약속의 성취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롬 8:28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를 요구할 수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 번째 자격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시는 사랑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한다'는 말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계 2:4은 어떤 신자들에 대해 "너희 처음 사랑은 버렸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이 또한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심지어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그를 사랑합니까? 시련과 시험이 당신을 더욱 그에게 가까워지도록 인도해 줍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실망하여 낙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토록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언젠가 나는 Back to the Bible 방송과 관련된 어떤 일을 놓고 오랫동안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도 때로 나는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가? 나는 여전히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고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사 30:18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니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때로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앙망케 하시고자 기도의 응답을 늦추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기다리십니다. 때로 그의 기다리심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를 앙망하여 마침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게 될 때 더 크게 그에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을 해준신다면, 아마도 우리는 곧 그에 대해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선하심을 금새 잊지 말도록 우리의 마음에 새겨질만한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에 대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욥이 친구들로부터 조소당하는 것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욥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당한 상황을 완전히 깨닫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런 다음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며 긍휼을 나타내셨습니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오랜 기다려 온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시는 과정을 기록한 가장 위대한 기록을 봅니다. 아마 당신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기 위해 어떤 일을 놓고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만일 당신이 진실로 그를 사랑한다면 당신을 변함없이 기뻐하며 그를 앙망할 것입니다.
 
 두 번째 자격은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이라고 하는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어떤 특별한 환경에 더욱 적합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당시늘 부르시고 그의 부르심을 당신이 즐거이 따라가도 있다면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네모난 못은 둥근 구멍에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신 환경에 적합하게 하시고자 잠시 당신을 깎고 다듬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하시려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이나 또 누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일을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당신에게 끊임없는 소망을-기쁨까지도- 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에 대한 목적을 알려 주십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바를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즉 그와 닮게 되도록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래도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당신이 불순종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엄하게 당신을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롬 8:17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즉 그와 함께 동일한 영광을 받기 위하여-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미래에 고난이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지만, 바울은 그 가능성으로 인해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대신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그는 선언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다코다주 남쪽에 있는 Black Hills에 서서 거대한 화강암 산을 쪼아 내어 만든 4명의 미국 대통령들의 돌로 된 얼굴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만일 그 돌덩이들이 살아서 말을 할 수 있다면, 돌로 만들어진 그 얼굴들은 돌을 폭파시키고 조각을 하는 등 모든 제작과정을 통해 그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네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양의 돌이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화강암 만큼이나 일하기 힘든 단단한 재료일는지 모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고난도 그만큼 더욱 심해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당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신 안에는 기쁨과 그의 뜻을 이루어 승리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아들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을 깎아내지 않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장래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우리의 장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을 알 뿐,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우리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사모하면 할수록 또 성령을 좇아 행하면 행할수록, 우리는 스스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삶을 누리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맛보고 있지만, 또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화로운 몸을 입고 그의 아들로서 하나님 곁에 앉히울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견디며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는 진정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너희 속에('통해서'가 아닌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제9장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되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바른 자세를 가져야먄 합니다. 히 12:11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이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러 고난에 의해 훈련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단련되어진'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어떤 자세를 가죠야 할 것인지를 상고하기에 앞서, 옳지 않은 자세에 대해 먼전 상고해 보겠습니다. 히 12:5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여기에서 우리는 경히 여기거나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분명히 봅니다.
 
 경히 여기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두 개의 전혀 다른 위험요소들입니다. 이 둘은 서로 상반된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해서 징계의 막대기를 비웃으려소 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완강히 고집하며 고통에 의해 겸손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다른 한 경우는 징계를 당하여 낙심하며 완전히 침체되어서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징계를 경히 여김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는 죄를 범할 수가 있지만, 특히 여기서는 그 중에서 네가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고난에 무감각해짐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를 갈며 그것을 견디어 보라'고 하는 육신적인 지혜만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고난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인이 그의 삶에 성장을 도와주는 역경을 무시하는 것은 곧 징계를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징계에 대항해 자신을 강팍케 하는 대신, 그것에 대해 마음이 녹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징계하시기 위해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무감각해지지 마십시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면, 그러라고 하지 뭐. 나도 어쩔 수 없잖아. 난 그걸 받아들이고 끝까지 고통을 견디어 보겠어.'라는 식으로 반응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녹이고 당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해드립시오.
 
 우리가 불평하는 것 또한 징계를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성격은 그것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의 진 가운데서는 수많은 원망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녀들의 원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1, 2절). 같은 장 22, 2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정치 아니한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단련시켜 약속한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도록 준비시키려고 해왔지만, 너희들은 어떤 자세를 취했느냐? 너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고자 하셨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기를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같은 장 2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이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29, 30절). 이것은 하나님이 원망하는 것이나 불평하는 것을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데스바네아라 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거기서 그 땅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아니 들어갈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들은 12명의 정탐꾸을 그 땅에 들여보냈는데 그 중 10명은 돌아와 말하기를,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도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속수무책인 상황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들로서는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었습니다.-성벽은 높고 거인들은 너무나 장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고 계셨던 것이거나, 아니면 시험하고 계셨던 것인데, 그들은 무조건 하나님께 대해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으로 인해, 그들은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것은 기꺼이 믿었지만, 안식처로 이끌어 들이실 것에 대한 믿음은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은 구속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40년간이나 고통을 안겨 드린 것입니다.
 
 시편 106편을 통해 우리는 또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정도가 심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작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시 106:24-26).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직 선한 것만을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했고, 결과적으로 그 땅을 유업으로 얻지 못했습니다. 그 땅은 즐겁고도 풍성한 삶,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터전을 상징합니다.
 
 혹 당신은 하나님의 시험과 징계에 대해 잘못된 자세를 취했던 연고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로 하여금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대신 원망하며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화난이 임할 때 얼마나 급하게 우리는 불평부터 늘어놓기 시작합니까? 첫 번째 환난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거지? 하나님이 진실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찌하여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말인가?'라고 되묻지는 않았습니까?
 
 고난 중에 경히 여기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는 진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 본 우리에게 시편 37편은 이 진리의 긍정적인 측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시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 같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우리는 악한 꾀를 써서 형통하는 자를 부러워하며 불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벌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각각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는 세 번째 방식은 그 징계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징계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경히 여긴다'라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징계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 가치를 의심하므로써 아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들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기까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롬 8:28, 29 참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또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를 기억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롬 9:20)고 말할 권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대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의 징계가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만일 내가 건강하다면, 좀 더 자주 정규적인 교회 모임에 참석할 수 있을텐데'라고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묻건대, 건강했을 때 당신은 얼마나 정규적으로 모임에 참석하곤 했습니까? 또 어떤 이들은 '내가 이렇듯 온통 사업에 실패를 겪지만 않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 더 많이 드릴텐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리고 있습니까?
 
 삶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당신은 의심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징계를 비난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징계를 경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주, 우리는 야곱과도 같이,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 42:36)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고 난 후, 이제는 그 형제들이 양식을 얻기 위해 베냐민 마저 데려가주자 할 때 야곱이 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해롭게 하려고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무지를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근시안적인 사고로 그의 전지하심과 겨룰 수 있을까요?
 
 화니 크로스비는 95년이란 일생을 맹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수백곡의 찬송 가사를 작사하여 진정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가졌던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To God Be the Glory'와 같은 노래를 쓸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고난에 대한 당신의 자세 또한 그러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는 또 다른 방식은 그 징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길을 바로 잡는 일에 부주의함으로써,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로 잡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징계의 막대기를 허락하셨건만, 만일 우리가 그로부터 배우기를 거절한다면 이 모든 것은 허사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질병, 실패, 가족의 죽음과 같은 불행이 일어났는데도,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살피거나 또는 삶에 대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찾고자하지 않는 자가 바로 이러한 진리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사실상, 징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부지런히 찾으므로써 우리는 종종 또 다른 징계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 3)고 기록한 것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는 동일한 장 5절에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권고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징계를 허락하신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꾸짖거나 책망치 않으리고, 그 문제에 대해 당신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은 종종 그 문맥의 뜻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원래의 뜻은 당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 구하면 그가 그 해답을 알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나는 한 절친한 친구로부터 장거리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가족에게 발생한 매우 심각한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네가지 문제에 대해 그들과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이 이처럼 심각한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원하시는 교훈을 계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했으므로, 하나님은 곧 그들에게 응답을 주셨고 그들은 그에 따라 자신들의 길을 교정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실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징계를 가져다 주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 기도로써 그에게 나아가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당신의 진실한 소원에 대한 간절함만큼 당신은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올바로 대처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오는 곤고함으로 인해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절망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고전 10:13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나리." 하나님은 시험을 거두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는 모든 필요한 은혜를 언제든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능히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자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견디지 못하고 낙심하는 모양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기기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소망을 잃고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 다음 그는 절망에 빠져 그가 당하는 시험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대신, 스스로를 포기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며 '주여, 당신이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고 계심을 저는 잘 압니다. 그래서 당신께 감사하며 믿음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전쟁에서 낙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기절할 때, 그는 의식을 잃고 꼼짝도 못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낙심하여 전쟁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던 날, 목사님은 우리 각자에게 특별히 성경 말씀을 한 구절식 주셨는데, 내가 받은 말씀은 지금까지 줄곧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구절은 딤전 6:12 말씀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한 선한 싸움은 육체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을 지칭한 것이었습니다. 즉 육체적 싸움이 아닌 믿음이 싸움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많은 괴로움과 영적인 시련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싸우며 마침내 승리를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시련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 갔던 것입니다.
 
 살전 4:13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 여기에서 그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이 신자일진대, 우리는 소망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고통 중의 하나이므로 이와 동일한 원리가 다른 고토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너머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기에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은 환난이 그로 말미암아 연달된 자에게는 후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기에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갈 6:9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거두는 일의 대부분은 영원한 세계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에게로 이끄시고자 다시 오실 때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지워진 짐을 견디지 못하고 낙심한다면, 그때에는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낙심에 관한 문제는 눅 18:1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지혜가 부족한 자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 야고보의 말대로 기도로써 그에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 40:3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앙망하다'란 말은 '기대하다' 또는 '기다리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을 기대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 바로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대하며 앙망하기에, 결코 낙심하지 알ㄴ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해 친히 훌륭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히 12:1과 2절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너느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일깨웁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는 당신과 나를 영원히 그의 자녀로 삼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부끄럼움을 개의치 않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자녀가 되도록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히 12:3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범을 잊지 말라고 우리를 권고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 그가 우리를 위해 겪으신 모든 것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을-가시 면류관, 그가 당하신 채찍질과 모든 수난, 그에 대한 왜곡된 인식, 거짓 참소들까지도-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이 당하는 시련 때문에 마음 속으로 낙심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는 시련을 통과한 후, 승리하셨으며 지금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서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마다 힘이 되어 주십시다. 골 1:27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한대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하나님 자녀라는 신분을 의심하게 될 때, 즉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게 될 때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연고로 고통을 겪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찾아오면 곧바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이 겪는 고통이 찾아오면 곧바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시 34:19). 행 14:22 역시 의인이 받을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딤후 3:12 또한 이와 동일한 진리를 확증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만일 당신이 법에 따라 생활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가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과 그의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선언할 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십시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요 15:2에서 역시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당신을 과시를 맺지 않는 가지입니까? 고통을 인해 늘 불평하며 작심하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주의하십시오. 그러한 사람은 제해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옆으로 치워져 제거되거나 무용한 자로 방치되고 말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과실을 맺고 있는 가지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당하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며 또 우리가 계속 그를 앙망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징계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은 히 12:7,8의 말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를 참는다'는 것은 그 고통을 단순하게 견디어 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만일 당신이 징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도리어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한 번 점검해 볼 여지를 남겨 주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과 같이 대우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징계를 즐거움으로 참아내도록 격려해 줍니다.
 
 히 12:9은 우리가 그러한 때 어떻게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진정한 아버지마다 그의 가족의 행복에 관심이 있으며 그러한 관심의 표현 중에는 훈련과 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외인에게 그는 이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징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저를 아들과 같이 사랑하시기에, 아들과 같이 대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할 때 또한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몇 년이나 기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놓인 고난의 터널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둠의 구름은 결코 걷히지 않을 듯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해 왔다. 그러나 사태는 조금도 더 나아진게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지만, 그는 결국 나를 건져주시지 않았다.'
 
 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겠다'고 약속하였을 때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시 91:15에서 하나님은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 50:15도 그와 동일한 진리를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를 건져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건지다'란 말의 어원은 전쟁을 준비한다는 뜻에서 '장비를 갖추어 주다' 혹은 '무장시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고 군사로서 무장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인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그는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무장시켜서 능히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겠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환난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겠다는 것보다는 우리를 강하게 하심으로 능히 시련을 감당케 하실 것이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는 자세
 
 베드로의 첫 번째 서신은 특히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러나 우리를 적대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단지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할 뿐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구약의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부자였는지 몰라도 장막에 머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이 세상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고난당함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그것은 즐거이 고난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분이 어떠하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를 즐거이 감수해야 합니다. 벧전 4:16은 고난받는 자들은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 앞 구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들로 인해 고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며, 또 고난에 대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친히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사도 바울 또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니라"(딤후 3:12)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는 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저지를 악행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벧전 4:14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양쪽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들로 인하여는 그는 욕을 받게 되실 것이며 너희로 인하여는 그가 영광을 받게 되실 것이라](우리말 성경에는 없는 구절임)." 당신이 그리스도인인 연고로 당신을 조롱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보시오.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우리 보다도 많은 고난을 겪고 있지 않소'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이들로 인해서 그리스도는 욕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우리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그 무엇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고난받을 때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고 계신 일을 인해 그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로부터 힘을 얻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고 계신 모든 일을 인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그의 약속을 인하여 먼저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고전 10:13). 또한 고린도후서 9장 8절 말씀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깨우쳐 주는 진리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당신이 암송하고 있어야 할 구절입니다. 나는 수년전부터 이 말씀을 외워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에게 시시 때때로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그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항치 말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벧전 4:19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 받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미쁘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의지할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끝없다는 것과 또한 우리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그 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게 될 때 우리는 히 10:36 말씀의 진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벧전 5:10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좋은 관계를 갖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끊임없이 순종할 때 우리는 수많은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 37:5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인내와 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30여전 전,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나에게 이 말씀을 계시해 주셨는데, 그 때 나는 이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잡았으며 이 말씀은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 나에게 풍성한 영적 위로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범죄하여 그에 대한 대가로 고난당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이 애매하게 괴롭히는 고난을 우리가 받게 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고난을 받을 죄를 자초해서는 안됩니다. 벧전 2:19,20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감사할 것이나(thankworthy)-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감사할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받는 것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의미에서 '감사할 것(thankworthy)'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가 보디 알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와 동일한 진리가 벧전 3:14-17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주님, 나는 당신과 함께 동거하며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단련하시고 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을 압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됩니다. 비록 고난 중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이 갖지 못한 중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대답할 것을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항상 예비하십시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당신을 비방하는 것이 부끄럽도록 그렇게 사십시오. 당신이 고난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가 힘든다면, 몇 번이고 베드로전서를 거듭하여 읽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고난에 대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이 되십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단순한 모범 그 이상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육신하셔서 지상에 계실 동안 사셨던 바와 동일한 삶을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그대로 재현시키기 위해 오늘도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우리는 더더욱 완전하게 그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벧전 2:21-24은 그리스도께서 보인신 모범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3:18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목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였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아는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해주신 모든 일을 인하여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고 권고합니다.
 
 수많은 고난을 겪었던 사도 바울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10, 11)고 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속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 우리를 통하여 그의 삶을 사시도록 내어 드릴 때, 우리는 흠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빌 1:29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거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은 제자들이 채찍질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 이상 가르치지 말라는 엄명을 받은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엄명을 받은 이후 사도들의 행적을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리라"(행 5:4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 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우리는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벧전 4:19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모든 시련을 견디어내도록 도와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우리를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롬 8:28-30의 말씀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난 중에서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가를 보여 줍니다. 디모데에게 보내는 나중 서신에서, 바울은 그가 어떤 모양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난 후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고 디모데에게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데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던 연고로 바울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곳의 습기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딤후 4:13)고 써 보냈습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 4:21)고 한 바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그는 그 겉옷이 매우 급히 필요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디모데가 로마에 당도하기 전, 사도 바울은 이미 목이 베이는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울이 건짐을 받으리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던가를 알므로써 얻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지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거져내다'란 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험이 아무리 힘든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로 하여금 그가 겪고 있는 시련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 또한 믿었습니다. 시험의 모양이 어떤 것이든지에 관계없이, 바울은 하나님이 능히 그로 하여금 시험을 견디도록 강하게 해주시고 또 그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해 주실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고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시 91:14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이 구절에서 사용된 '건지다'란 말은 탈출구, 또는 구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시편 91편 15절-에 사용된 '건지다'는 '이끌어내가' 또는 '앞세우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서 '건지고'로 표현된 말이 수동태로 사용될 때 그것은 전쟁을 위해 준비하는 군사에게 장비를 갖추어 주거나 무장시킨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전 10:23에서 사용된 "피할 길"은 정확히 말해 "탈출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언제든지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십시다. 즉, 그는 항상 탈출구를 열어 놓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능히 시험을 감당케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상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지는 않지만, 우리를 강하게 하고 능하게 해주시어 언제든 우리로 능히 시험을 감당해 낼 수 있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사 시험 가운데서 건져 내시기만 한다면, 그가 원하시는 바 그리스도의 형상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10장
고난에 관한 권면과 실제적인 제안들

권면
 
 히브리서 12장은 우리에게 고난에 관한 몇몇 권면을 해주고 있습니다. 히 12:12-17은 이 점에 대해 특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12절).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새롭게 힘을 내어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떨리는 손발을 굳세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받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통을 허락하셨고 또 그렇게 하실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않으며", 또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않을"(히 12:5)때에만 오직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징계를 참으며"(히 12:7) "아버지께 복종"(히 12:9)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에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완전하게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심도 믿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3장에는 이 문제에 관해 특별히 위로를 주는 몇몇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기에 흔히 그 진리를 구원에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한 구원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것을 감당해 내고 있는 사람들-로서의 우리의 지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2절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우리의 결정에 근거를 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계속 이루어가실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끝까지 우리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시고 또 능히 그것들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는 또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시어 우리로 그와 닮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요일 3:3은 이러한 진리를 아는 자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꺠끗하심과 가치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은 힘을 내어 무거운 짐을 견디어 내어 모든 더러운 것에서 하나님이 그의 삶을 깨끗케 하시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끝까지 돌보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잇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다시 새롭게 힘을 내어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통해 그의 목적을 이루시도록 해드립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고 권면한 다음,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13). 여기서 '곧은 길'이란 요동치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서 끊임없이 굴곡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잇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해야만 합니다.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확신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선물을 보내온 후 그들에게 써보낸 답신에서 잘 나타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 바울이 '내가 배웠노라'고 말한 사실을 유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또한 사도 바울에게도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족하기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아무 관계없이 자족하도록 가르쳐 준 것은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 13).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필요를 채워준 것에 대해 감사했지만, 환경에 관계없이 주님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 불평도 없음을 그들이 알기 원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와 동일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히 12:13은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든 불신자이든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용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곧은 길을 만들라고 권고합니다. 그와 같은 증거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더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당신의 모습을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지 못한 그 무엇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때 당신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리를 깨끗케 만들어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증거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히 12:14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화평함을 좇아야만 합니다. 엡 4:3은 우리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히 12:14에서 말하는 화평은 우리가 노력하여 얻는 화평이 아닌, 우리가 지켜야 할 화평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삶속에, 그리고 우리 서로의 사이에 이미 이런 화평함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또한 우리에게 화평함과 더불어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성별' 또는 '분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는 거룩함은 전가된(imputed)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위치상으로 온전합니다. 이와 같이 전가된 거룩함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히 10:10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것은 또한 같은 장 14절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 전가된 거룩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3장은 부여된(impated) 거룩함-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활동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완성시켜 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함에 관하여는 히 13:20,21에 나타나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부여된 거룩함은 롬 12:1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부터 비롯되는 영적 활동입니다.
 
 히 12:15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필요를 채울 만큼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고도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스스로 사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치 않을 때, 쓴 뿌리가 나서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것은 우리 속사람에게 고통을 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주신 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서 이렇게 아뢰십시오. "주님 저는 저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당신의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고후 9:8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제거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는 말씀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충분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 주님 곁으로 가신 나의 사랑하는 아주머니 한분은 거의 15년간을 침상에 누운 채로 지내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를 방문한 적마다 우리는 그녀가 항상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활기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죽거든 그녀의 장례식 설교를 내가 맡아줄 것과 또 설교 본문은 고후 12:9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으로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도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자신에게 넘치도록 풍성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비록 침대에 누은 채였지만 그녀는 아주 경건한 삶을 살았고 또 풍성한 은혜를 누렸기에 그녀의 장례식에서 설교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쓴 뿌리는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의 삶에까지 그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심령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심령도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능히 고난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은혜를 얻으려면 주님의 도움을 힘입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님, 저는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이 시련을 능히 감당하기 위해 당신의 충분한 은혜를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은혜를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히브리서는 이제 실례를 들어 한가지 중대한 경고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6). 이것은 창 25:27-34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시장함을 못이겨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하자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요구했습니다. 에서는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그의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순간적인 육체의 만족을 위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란 값진 것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창세기 25장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흘히 여김이었더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에서는 그가 가졌던 장자의 명분으로 인해 그의 것이 되었을 뻔한 영적인 특권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영적인 축복은 야곱을 통해 오도록 되어 있었지만 야곱의 이처럼 장자의 명분을 얻으려고 교활한 꾀를 부린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며 동시에 에서 또한 그가 한 것같이 장자의 명분을 경흘히 여겨서는 안되었던 거십니다.
 
 골 1:27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한대로 우리가 가진 장자의 명분을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시듯, 사도 바울 안에도 내주하셨기에,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골 2:6-8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한 믿음으로 그 안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시련과 시험이 닥쳐올 때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철학과 '그저 이를 악물고 고난을 견디어 보라'고 하는 헛된 속임수를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이시지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롤 거하시기"(골 2:9)에 능히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10절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를 의지해야만 합니다.

실제적인 제안들
 
 축복의 열쇠는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맞는 바른 자세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시련이 닥칠 때 당신에게 도움이 될 몇몇 제안들을 여기에 첨가하고자 합니다. 이 제안들은 당신이 역경을 통과하는 동안, 당신으로 하여금 요동치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나타난 놀라운 진리드를 되새겨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당신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많은 환난을 겪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능히 건져주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 34:19은 우리에게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건지다'란 말은 '구출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무장시킨다' 또는 '장비를 갖추게 한다'란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련을 감당해낼만한 힘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시험이 제아무리 힘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피할 길을 열어 놓으사 당신으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마음에 되새겨 봄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십시오. 애 3:22,23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당신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능히 당신에게 오는 시험을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 41:13에 쓰인 바와 같은 말씀을 주목해 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회복하십시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사 26:3, 4의 말씀도 유의해 보십시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영어 성경에는 "능력(strength)"으로 되어 있음)이심이로다." 3절은 하나님의 평강에 대한 확신을 주고 4절은 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주 여호와는 영원한 능력이심이로다"라는 구절은 정확히 말해,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가 됩니다. 즉 모든 신자들은 견고한 기초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른 위로가 됩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되새겨 봄으로써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케 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역경을 겪는 동안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가를 알 때 당신은 또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욥 13:15)고 말한 욥을 기억해 보십시오. 욥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요동치 않는 신뢰를 보였던 사실은 당신에게 또한 힘이 될 것입니다.
 
 환경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약속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알 때 그에 대한 당신의 신뢰는 또한 회복될 것입니다. 사 43:2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나." 당신이 슬픔의 시내를 통과하고, 위험의 강을 건너며, 시험의 불을 통과하게 될 때 이 구절을 되새겨 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신뢰는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신뢰를 회복하고 그의 안에 자신을 굳게 세운 다음, 당신은 간절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눅 18:11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 50:15 또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능히 굳게 서서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시 34:4-9을 통해 우리는 또한 기도의 능력과 하나님이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이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라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신뢰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모든 필요에 넘치는 그의 은혜를 겸험케 될 것입니다.
 
 고난에 관한 또 하나의 실제적 제안은 그것을 당신의 복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고난은 축복으로 귀결되어 집니다. 당신의 시선이 고난 대신 그 뒤에 올 축복으로 귀결되어 집니다. 당신의 시선이 고난 대신 그 뒤에 올 축복에 고정되어 있을 때, 당신은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의 결과로 얻어지는 축복들 중 하나가 바로 인내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 약 1:2-4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시련이나 환난이 인내를 이루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 4)고 했습니다. 당신이 바울과 같이 이런 자세를 취할 때 고난 중에서도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4,5). 이런 말씀이 당신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지고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들은 곧 고난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고난의 결과로 얻게 되어지는 축복들입니다.
 
 시편은 고통을 통해 얻어지는 수많은 축복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함으로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71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을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에는 목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몸소 겪은 체험은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의로우신지를 그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난의 결과로 얻어지는 모든 축복들을 알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당신도 또한 이것이 곧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욥기 역시 고난으로부터 얻게 되는 축복들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엘립바스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 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7, 18)라고 말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중의 행동을 유의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나 다시 싸매시며 고쳐 주십시나.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고난 중에 당신이 해야 할 또 한가지 일은 전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말씀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 119:49,50). 다시 말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였고 그 말씀이 그를 격려하여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는 목자를 따르는 양과 같습니다. 목자가 양의 곁에 있을 때 양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23편 전체가 목자는 언제나 변함없이 양무리 가운데 머물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당신 곁에 계심을 확신할 때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내가 시련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지만, 그는 내게 응답하니 않는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히 13:5,6을 잘 살펴보면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옆에 계시며 또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전부 알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신 고난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지만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결국 무엇을 이룰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그는 고난의 가치에 대해 알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당신과 나는 그 가치를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므로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음을 또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 하오리까"(시 56:4).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거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3)라고 말함으로써, 이 시편의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으로부터도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가 그를 의지하기만 하면 이생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우리는 당연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실족지 않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고난에 관한 또 한가지 제안을 당신이 고난의 먹구름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당신은 말할런지도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십시오.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의 등은 틀림없이 심한 상처가 났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누울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 16:25). 그들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결과과 무엇입니까? 큰 지진이 났을 것이며 따라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며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져 버렸습니다. 죄수들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바울과 실라로부터 큰 감명을 받은 연고로 모두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만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엘리후가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욥 35:10) 하나님이라고 한 그분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와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6, 17)는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또 언제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로 말을 늘어놓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해 쉬지않고 기도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이 뜻이니라"고 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범사'에는 모든 고통과 고난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며 또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목적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가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자기보다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특히 도움이 됩니다. 갈 6:2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가운데 해야 할 일입니다. 롬 12:15은 다른 이들을 내 몸과 같이 여기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다시 말해, 자신을 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시련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승리의 삶을 위해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항상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은 혹심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열어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능히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것은 아무것도-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라도-없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십시오. 당신을 그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고난 주에 있는 당신을 잊지 않으시며 또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밖으로 넘치는-그에게서 우리에게로-사랑입니다. 그에게 복종하며 이렇게 아뢰십시오.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으며 또 나를 도우사 승리에 이르게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제11장
고난 너머의 영광에 대한 소망
 
 고난과 영광은 함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약 성격에 기록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고 있는 18개의 구절 중 15개가 그 뒤에 따라오는 영광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의 모든 구절이 그 결과인 영광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이면에 영광이 있다는 진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받는 고난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뒤에 올 영광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요 12:23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선언인 듯 보이지만 다음 구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3을 통해 자신의 죽으심을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때를 그가 영광을 얻으실 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의 시선은 고난 너머, 십자가 너머, 죽음 너머인 장래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 17:1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는 다시 '때'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슨 때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입니다. 고난 그 자체는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일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고 또 아들이신 그에게도 영광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 또한 고난 너머 그 뒤에 올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눅 24:2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스도는 어떻게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까? 그가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에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히 2:9은 말합니다. 그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지만, 인류는 그 관을 보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사도 바울일 것으로 짐작되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뒤에 오게 될 영광을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영광을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난와 영광은 함께 동반되어지는 것입니다.
 
 고난과 영광은 변화산상에서도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그리스도가 변형되신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다"(눅 9:31)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은 졸다가 깨어나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와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영광스런 그의 장래 모습을 잠시 보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의해 보십시오. 눅 9:36은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도 제자들이 보았던 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뒤에는 영광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이며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라 부끄럼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고하는 히 12:2은 고난 뒤에 오는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뒤에 오게 될 즐거움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그 너머에 있는 즐거움으로 인해 그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기꺼이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에 대해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는 것-그가 그의 시선을 고난 뒤에 올 영광에 고정시켜 두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구세주로 영접한 우리들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왜 그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걸까요? 우리의 삶속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인내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을 뒤에 올 영광에 고정시켜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영광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고난이란 작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장래에 많은 상급과 풍성한 영광을 얻게 되기를 원하시기에 현재의 고난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높임을 받으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빌 2:5-11에서도 고난과 영광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라고 한 말씀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그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드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아뢰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다스려 주십시오. 저는 당신께서 제 안에 살고 계신 것을 아오니 당신의 생각대로 따르겠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우리는 완전히 달라진 자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겸손과 그의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에 대해 말한 다음, 성경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9절의 '그러므로'란 말은 주 예수의 고난과 그 뒤에 오는 영광을 연결시켜 주는 단어입니다. 그는 지금 모든 정사와 권세 위에 앉아 계십니다. 빌 2:6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현재의 고난에 대해 원망하며 불평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 뒤에 따라왔던 영광에 관하여 계 5:11,12이 말하고 있는 바를 주목해 보십시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오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이 얼마나 장엄한 광경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까?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움 요한은 모든 만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광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레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환난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뒤에 올 영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두신 그의 목적에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이 점에 있어 우리의 본이 되시며, 모든 사람으로 뒤에 올 영광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지금 모든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어 승리를 얻도록 도와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난에는 항상 '그러므로'가 따릅니다. 즉 고난으로 인해 풍성한 영광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임한 고난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행하고 계신 일로 인해 그에게 감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말했습니다. 환난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어 주는지 주목해 보십시오.-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가 아닙니까? 이와 동일한 진리가 롬 8:17, 18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받는 고난은 보증된 영광으로 가는 통행권이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시간의 가손점에서 이 시련의 시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현재의 상황과 장래 상태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환난의 모양으로 다가오나 그때에는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과 비교해 볼 때 환난은 잠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의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장래의 영광을 얻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입니다. 현재는 장래를 좌우합니다.
 
 환난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며 또 우리로 하여금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장차 얻을 영광스런 천국으로 옮겨지게 될 그 때를 간절히 사모하게 해줍니다. 어느날 아버지 집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받으며 보낸 그 모든 세월에 대해 넘치도록 보상을 받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더더욱 넓어진다는 사실을 알 때 고나의 아픔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영광을 얻게 하시고자 고난을 택하셨음을 알고, 모든 고통과 시련 또는 좌절에 대해 롬 8:28의 말씀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고난 뒤의 영광에 대해 상고할 때 우리는 또한 요일 3:2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언젠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켜 두어야 합니다. 이 목표를 늘 우리 앞에 두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은 그 다음 구절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게 될 것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고난 뒤에 오게 될 영광을 확신할 때, 우리도 히브리서 기자와 같이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히 12:12)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굳세게 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삶 가운데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실제로 그에게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베드로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장래의 전망이 확실한 데에 두고 그것을 바라볼 때 마음의 허리를 동이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베드로가 강조했음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그에게 드리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새롭게 발견되는 기쁨일 것입니다. "장차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바랄지어다"라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즉, 이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오게 될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 뒤에 오게 될 영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깊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바울은 장래를 내다보며 다음과 같이 디모데에게 서신을 썼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비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6, 7).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참으로 많은 고난을 받아 왔기에 담대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당신은 주님이 나타나심을 기대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머지않은 장래, 예수 그리스도꼐서 자기 사람들을 위해 곧 돌아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까?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종종 나에게 '얘야, 난 위에 계신 이를 기다리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육체적으로 또 여러 가지 다른 면으로 몹시 고통을 겪고 계셨지만, 구세주와 주님되신 예수님을 만나 얻게 될 영광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그 때를 사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은 장차 오게 될 영광이 현재의 고난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딤후 2:12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이 구절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대한 올바른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들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며 의심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그를 부인한다면 그도 장차 베푸실 특권에 대해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
 
 롬 8:17 또한 장차 올 영광이 현재의 고난에 달려 있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의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와 동일한 진리가 계 3:21에도 역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니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먼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5:4은 우리에게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 의지하며 그로 하여금 우리를 통하여 그의 삶을 살아가시도록 해드릴 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의지함을 시련을 감당하게 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롬 8:37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에 그의 시선을 고정시켜 두심으로써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뒤에 올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고난 뒤에 올 영광에 대해 우리가 완전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 영광을 바라고 기대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 3:10,11에는 사도 바울이 장차 받을 영광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구절을 상세히 살펴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생명-곧 현재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뒤에 올 영광-을 본받기 위해 그와 함께 고난받고자 원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바울을 장래를 바라보며 바른 자세로 고난을 받아들였고 그 고난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죄에 대하여 죽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죽음에 참예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자유케 되었기에 죄는 더 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1)로 여겨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그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또한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시 116:15에서 우리는 이런 기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성도는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사랑의 선물이기에 그들은 여호와께 있어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말할 수 없이 심중한 고난을 당하심으로 대가를 치르시고 사신 바 된 자들이므로, 그러한 우리를 그리스도께 사랑의 선물로 주실 수 있게 될 때 성부께서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난의 결과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있어 귀중합니다.
 
 둘째, 성도의 죽음은 그들의 수고와 고난을 끝나게 해주는 것이기에 여호와께 귀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실 수도 거두어가실 수도 있지만, 만일 고난이 없다면 뒤에 올 영광은 결코 풍성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시므로 우리가 고난당하는 그 자체를 보실 때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될 때 그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죽음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예비하신 충만하신 은혜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영적, 육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죽음을 맞을 때 그가 성도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하게 이 모든 것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긴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결코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 때까지 받았던 것보다 더욱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새로운 날들의 시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성도들이 죽은 이후 곧 그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인해 기뻐하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땅위에서의 삶을 마치고 몸을 떠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됩니다. 이 진리를 빌 1:23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성도가 죽게 되면 곧 주님께로 가서 그와 함께 거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언젠가 그들이 그의 계신 곳에 있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예수님은 비록 세상에 계신 동안 이 말씀을 하셨지만, 자기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장래에는 그가 계신 곳에 함께 있게 되기를 진실로 바라고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통하여 얻으신 한없는 영광을 당신이 구속하신 성도들과 함께 나누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 먼저 그는 "내게 주신 영광을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니이다"(요 17: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실 것으로 약속하신 이러한 영광을 아직은 우리가 보지 못하나, 그것은 이미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습니다. 벧전 1:4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기 아니하는 기업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윌를 위해 놀라운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요 14:27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어떤 장래의 시간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장 그가 주시는 평안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때와 시가 언제인가 하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그의 영광을 우리와 더불어 나눌 수 있는 그 때까지 단지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땅에 계실 동안,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 이와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소유인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수한 환난과 시련들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보전해주사 그들이 고난을 받은 후에는 그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하여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를 바라볼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바라보며(Looking Unto Jejus)"라는 소책자에서, 데오도르 모노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에 직면했을 때에 오직 예수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닥친 고난을 헤아려 보고, 또 심각하게 과장하여 비통한 마음을 가지며 그로부터 이상한 만족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떠난 자가 겪는 고난의 결과는 죄를 깨끗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혹은 완전히 좌절하도록 만들 뿐이다. 즉 그리스도를 떠난 자가 겪는 고난은 인내가 아닌 패역을, 연단이 아닌 이기심을, 소망이 아닌 좌절을 창출해 낼 뿐이다(롬 5:3-5 참조). 오직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만 우리는 자신이 겪는 고난의 진실한 무게를 깨달을 수 있으며, 또 사랑과 감사함과 기쁨을 가지고 날마다 그의 손으로부터 그 고난을 건네받아 감수해 나갈 수 있다.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근원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지, 또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바울이 말하였던 다음과 같은 외침을 벅차 오르는 감격과 함께 부르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제1장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자유의 의미
 
 저는 어느날 백화점 진열장 앞을 지나가다 아름다운 나비가 수놓여진 티셔츠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나비와 함께 '나비는 자유롭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나비는 자유로운 나비가 되어 펄펄 날고있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얽매어 있는 것 같았고 공중으로 날아갈 수 없는 나비인 것 같아 애처롭게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자유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이 한마디 말은 우리의 가슴을 흥분시키고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대단히 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여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에 대해 말씀하셨던 대목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시며 많은 사람이 믿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0-36).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자유에 관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한 유대인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도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반문한 말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훈련시킨 목적으로 종종 노예 상태에 처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던 바로 그때에도 유대 민족은 로마 정부의 굴레 아래서 속박을 당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참다운 자유에 관해 이해하고, 그것을 향유하길 원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바 세가지 요점들에 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이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2) 인간을 자유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진리이다.
 
 (3)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제한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자유를 누리려 한다면 온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어느 쪽으로 달려야 할지를 규정하는 일정한 교통 법규가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의약품이나 돈과 같은 것들의 유통을 제어하는 어떠한 규정이 우리에게 없다고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무엇이든 다 행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세계는 혼동과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유란 제한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분이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자유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바를 여러분이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이요 권세인 자유입니다. 자유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우리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좋은 기회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엄청난 가능성 곧 막대한 잠재 능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천부적인 재능에다 영적인 은사를 덧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규정하신 일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 자유는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여러분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제공되는 기회를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도록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동산에 두셨을 때, 그들에게 규정에 의해 통제받고 보호받는 율법의 울타리로 둘러쳐진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유를 가졌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할 자유,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행할 자유는 부여받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자유하게 지으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 만드신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자유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해방시킨 내용을 기록한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전편을 통하여 자유에 관해 기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범죄했을 때에는 노예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대로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마다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음을 그들의 생생한 역사를 통해 깨달았던 것입니다. 확실히 성경은 자유에 관한 책입니다. 십자가는 자유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은 자유가 있는 곳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많은 단어가 자유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구원과 더불어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신뢰함으로써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4). 여기에서 '범한다'는 동사는 '죄를 습관적으로 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분과 제가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닌 악한 마귀의 노예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신뢰한다면, 죄에서, 형벌에서, 심판에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세력을 정복하면서 성령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종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가능성을 성장 발전시키는 데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는 데 자유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자유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
 
 인간을 자유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진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하늘로부터 좇아오는 세력과 지옥으로부터 좇아오는 세력 즉 두 세력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진리를 통해 역사하며 사단의 능력은 거짓을 통해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8:44에서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하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니라."
 
 사단은 그 거짓말을 이용하여 여러분들을 노예로 삼으며 그 노예의 굴레는 여러분들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사용하시어 여러분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그 자유는 여러분들을 완성된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은 우리의 첫 번째 조상 아담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반문함으로 의심하는 마음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창 3:1) 그런 다음에 그는 아담에게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창 3:5).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책임없는 자유, 결과 없는 자유를 제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사용한 거짓말은 "너희는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모든 거짓과 부정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경배하고 있습니다(롬 1:25).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하는 피조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에게 찾아온 변화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서 사단을 섬기는 자로 전락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세가지 다른 양태로 나타났습니다. 요 14:6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가 되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또한 요 8:36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32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진리를 아는 것이며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 17:17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 8:31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마귀의 거짓을 분별시켜 줍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아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다면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5:7에서 우리는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한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영감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셩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가르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낼 때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경고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여러분들 속에서 거짓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여러분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믿고 이 진리를 따를 때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귀가 주는 거짓을 믿고 이 거짓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마귀의 예속의 굴레에 묶이고 마는 결과를 얻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이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였다면 그는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복음서를 읽는다면 여러분은 여기 이 땅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 즉 그의 활동과 사역에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정치적인 속박 뿐 아니라 그보다도 더 한층 무거운 사슬이었던 영적이고 종교적인 속박 하에 놓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필요한 많은 유전들을 덧붙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오히려 속박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멍에가 사람들에게 지워져 있어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인간들이 첨가해 놓은 유전에 따라 행한 것을 성경상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모든 공포와 두려움에서도 자유하셨습니다. 그 분은 폭풍우가 휘몰아 치는 바다 한 가운데 배속에서도 평안히 주무셨습니다. 그 분은 원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갈보리 산으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나 제도에도 예속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은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에 관해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함으로 그 분에 관해 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매일매일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유에 이르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기서 그분에 대해 안다고 할 때 이 '알다'라는 동사는 단순히 지적으로만 아는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분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아는 앎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리구 그분께 기꺼이 신뢰를 바치십시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리라"(요 8:31).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을 송두리째 전폭적으로 맡겨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바 모든 것들을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과 마음에 채워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알아야 하며 그분을 기꺼이 신뢰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우리가 그분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를 더욱 의지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 순종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 죽음은 그들의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그들을 삼키거나 멸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죽음은 단순히 영광으로 인도하는 열린 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알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사랑하라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분에게 속해 있는 자유를 점점 더 많이 체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이 자유는 우리의 사고와 행위 그리고 언어 가운데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유쾌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삶아갈수록 여러분의 잠재 능력은 더욱 확연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전과정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나 재능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하등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용기를 상실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여러분은 더욱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자유를 체험할수록 더욱 많은 가능성이 여러분 앞에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가능성과 능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자유란 진리로 말미암아 통제받는 삶이며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양되는 삶입니다. 그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생생한 관계를 가지는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여러분이 이 자유를 누리는 그때는 그 분과 함께 행하고 대화를 나누고 또 그 분으로부터 배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신뢰하고 영접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저는 그 분들에게 강력히 권면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명을 완전히 그 분께 맡겨 버리십시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는데도 '나는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구가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가장 사악한 마귀의 꾀임이며 그의 예속의 굴레에 묶이게 하는 간교한 술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결과는 마귀에게 예속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고 하셨습니다.

제2장
그릇된 자유
 
 기독교인의 자유는 진리에 의해 통제받고 사랑에 의해 고양되는 삶에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성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짐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발디디고 있는 이 세상에는 하늘로부터 온 자유가 아닌 지옥으로부터 나오는 자유, 즉 거짓 자유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자유를 행하는 자들은 거짓의 영에 의해 지배받고 정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자유의 예는 베드로후서 2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3).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만일 너희가 우리 주 되신 구구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며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리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17-22).
 
 이것은 정말로 꼴불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한 이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몇가지 경고의 말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이러한 거짓 교사들이 아직 신앙적으로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두루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벧후 2:18의 말씀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그들은 아직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을 찾아내어 그릇된 자유를 누리도록 미혹하며 그렇게 함으로 마귀의 굴레에 예속시키려 하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러한 잘못된 자유에 미혹을 당하지 말라고 했으며, 아울러 이러한 자유가 왜 잘못된 것이며 위험 천만한 것인가를 다음 세가지 이유를 통해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릇된 자유의 출처
 
 우리는 그릇된 자유의 출처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에게서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진실한 사람들을 발견하는 곳에서 또한 거짓된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여러분들은 진리가 있는 곳에서 거짓을 발견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왕왕 있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적용시킴으로 사람들을 마귀에게 예속되는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그가 그 당시의 신자들에게 권면했던 말들을 우리는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벧후 2:1에서 이러한 거짓 교사들은 몰래 멸망으로 인도하는 이단을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치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일을 하며 그들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이 거짓 교사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본장 끝부분에서 그들이 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씻음 받은 돼지로서 결단코 양으로는 변화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거짓에 사로잡힌 자요 위선자들입니다.
 
 벧후 2:10은 이 사람들이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그들은 자기들만이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교만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며, 따라서 그들이 접촉하는 모든 대상들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벧후 2:10에 의하면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자들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전체를 통하여 이러한 그들의 행위가 더러움과 해로움, 사악함과 행악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나쁜 부분은 그들이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벧후 2:3에 따르면 그들은 '지은 말'을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지은'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platos'는 '꾸민'이라는 말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그러면 '꾸민'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어떤 말을 왜곡해서 사용한다고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의 사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꾸며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유라든지 구원, 죄같은 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너희로 이를 삼으니"라고 한 벧후 2:3의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그들은 오직 돈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 사실상 벧후 2:14과 벧후 2:18의 말씀은 그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믿음에 굳게 서 있지 못한 영혼들을 가만히 찾아가서 속이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사용하여 신앙의 초보자들을 미혹시키며 그 결과 경제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입니다. 벧후 2:17에서 베드로는 그들을 물 없는 샘이요, 비를 예보하고도 밀려가는 구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벧후 2:13의 말씀은 그들이 '너희 연회에서의 흠' 즉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서의 흠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인 체 하지만 실제로는 종교를 돈버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져 사단에게 예속되도록 이끄는 자들입니다. 이 거짓된 자유의 근원이 바로 거짓 교사드리기 때문에 그들의 유혹에 빠져 그릇된 자유를 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거짓된 자유는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고 여러분을 수렁으로 빠뜨려 더러운 자가 되게 합니다. 이러한 거짓된 자유로 여러분을 이끄는 거짓 교사들은 여러분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지은 말과 교만한 말, 또 허황된 말로 여러분을 속이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위선자요 협잡꾼들입니다.

그릇된 자유의 특성
 
 그릇된 자유는 그것의 근원과 그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지극히 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릇된 자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말할 수 없이 위험합니다. 자제를 강조하지 않는 자유는 여러분을 멸망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탕자는 자유를 원하였지만 책임은 원치 않았습니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참된 자유라 할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속박입니다. 이는 사단이 우리의 첫 조상 아담에게 에덴 동산에서 소유할 것을 권유했던 책임없는 자유인 것입니다. "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느냐? 하나님은 너희에게 참으로 이 동산 나무의 모든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그럴 필요가 없어! 너희는 자유를 행사해! 그렇다고 벌받는 것도 아니야"(창 3:1, 4, 5). 누구든지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무책임한 자유를 행사하라고 한다면 그는 지극히 위험스러운 자입니다.
 
 그릇된 자유의 두 번째 특성은 진리를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을 것이니 거기에 걸맞는 생활을 해봐." 심지어 그들은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그들의 거짓된 교리를 주입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말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은혜 아래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지 율법으로 구원받은게 아니야. 그러니 우리는 마음대로 살수가 있단 말이야." 그러나 바울은 롬 6: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왜곡된 지식은 잘못된 자유에 이르게 하고 이 자유를 행사한 자는 언젠가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계산하는 날을 맞게 됩니다. 이와같이 그릇된 자유는 책임을지지 않으며 진리를 왜곡합니다. 그릇된 자유의 세 번째 특성은 그러한 자유에는 형벌이 따르지 않는다는 말로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유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당장 나가서 이것 저것을 아무거나 행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따르는 어떠한 불리한 결과도 있을 수 없어. 거기에는 어떠한 형벌도 있을 수 없어." 그러나 그러한 자유에는 형벌이 있게 마련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롬 6:23), 죄를 범하는 사람마다 죽습니다(겔 18:4). 죄에 깊숙이 빠져 죄의 종이 됨으로 반복적, 습관적인 죄를 범하고 있는 자는 결코 거듭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유의 네 번째 특성은 그러한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돌이킬 수 없는 죄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자유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당신이 누리는 자유는 갈수록 흥미가 더해질거야. 당신이 죄를 즐길수록 당신에게는 점점 좋은 일이 생긴단 말씀이야." 그러나 죄는 사람을 속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점점 나아진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죄는 즐거움으로부터 시작하여 고통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되에 거하는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예 속의 굴레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범하는 죄의 양이 증가할수록 기쁨이 점점 더 경감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죄는 죄를 짓는 당사자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습니다.

그릇된 자유로 인한 결과
 
 베드로는 우리가 잘못된 자유를 피하여야 할 세가지 이유, 즉 잘못된 자유는 어디에서 나오며 또 그 특성은 무엇이며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을 결국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그릇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가는 종착지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예속의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벧후 2:19에서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릇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은 결국 얽매이고 정복을 당합니다(벧후 2:20). 그들은 이러한 거짓 교리를 사용하여 당신을 그들의 종교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난 후 그들은 당신들로 말미암아 이득을 취하여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그들은 당신을 강탈하고 착취하고 멸망시킵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제시한 그릇된 자유는 결국 당신을 심판 아래로 인도합니다.
 
 저는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심판은 받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롬 8:1).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한 그릇된 자유를 누리려 하는 자는 그의 생애 가운데 혹독한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목회 사역을 하면서 저는 그러한 잘못된 교리를 신봉하고 또 그들이 생각했던 자유의 개념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징계와 채찍을 받아야 했던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임박한 멸망'(벧후 2:1)을 자초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심판날'이 예비된 자들입니다(벧후 2:9). 잘못된 자유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비탄과 속박과 시련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드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천사들에 대해 지적하면서 범죄한 천사들이 당할 심판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벧후 2:4). 사단은 천사들을 타락하게 했는데 그 천사들은 어떠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종말이 자유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쇠사슬에 묶여 있는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5절에서 그는 노아의 홍수 직전에 살던 세상 사람들의 상태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때 당시의 사람은 자기들의 판단하에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쾌락을 만끽하였으며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그때 심판이 몰아닥쳤습니다. 벧후 2:6-8에서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 가운데 살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구태여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끔찍한 죄악들을 열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들이 그들을 자유하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죄의 속박 가운데 놓이게 되었으며 멸망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4절에서 사단은 천사들을 미혹케 했다고 했습니다. 5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6-8절에서 우리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만약, 당신과 육체와 악마를 위해 산다면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는 당신을 단지 예속과 징계와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 5:13에서 옳은 견해를 제시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이것은 우리가 정녕 살아야 할 바른 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에 의해 통제받고 사랑으로 고무되는 삶을 살게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참된 자유를 누리길 갈망한다면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십시오. 죄의 자유는 속박이나 그리스도에게로의 속박은 오히려 자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 죄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거짓 경고에 관해 경고를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아직 하나님 말씀 가운데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신앙이 얕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잡다한 이단사설을 전파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경계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으시겠지요. 당신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지요. 다들 불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우리에게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과 사단과 육체의 요구를 따라 쾌락을 즐기십시오. 거기에 따른 책임이나 형벌이나 대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에 관해선 하든 걱정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생활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약속하겠지만 실제로는 점점 나쁘게 될 것이며 당신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서운 징계의 채찍을 감내해야만 할 것입니다. 잘못된 자유는 이와같이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로 통제받고 사랑으로 고무받는 삶입니다.
 
 당신은 어떤 거짓 교리를 신봉하는 그룹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까? 거짓된 모든 것들은 어느날 갑자기 지옥불에 던져짐을 당할 것입니다. 오직 참된 것만이 영속할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제3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기독교인이라면 율법에서의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일단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규범과 절제도 없는 삶을 살아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율법에 근거해 있지 않고 은혜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약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율법의 일곱가지 단면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단면들은 우리에게 왜 율법이 주어졌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행하셨으며, 우리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멍에로서의 율법(The Law as a Yoke)
 
 갈 5:1에서 우리는 율법의 첫 단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고 행 15:10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행전 15장에서 논란이 되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의 여부였습니다. 교회 안에 몇 명의 율법주의자들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이방인들도 율법 아래 속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요"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결론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멍에 아래 둘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율법이 멍에에 비유되는 것이 되겠습니까? 멍에는 누구에게 사용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나 말에게 사용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제어하기 위해 멍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선한데 그들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은 환경이나 돈이나 교육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죄인이며 그에게는 동물성이 주어졌고 그러므로 그에게는 제어하는 수단으로서의 멍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명확하고도 유일한 이유는 인간을 일정한 규율 하에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죄에 물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세상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교통 법규가 나에게 지정해 준대로 행하고 속도 제한 표시에 따라 오른쪽 차선에서 운전하고 있는 한 나에게는 운전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왼쪽 도로에서 두 배의 속도로 운전하리라고 결심한다면 이미 나는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 있으며 통제의 멍에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의 의로운 심판을 계시하였으며 또한 인간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룬 분이십니다. 갈 5:1은 우리에게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멍에를 메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멍에를 메기 위해선 바로 서지 못하고 두 손을 땅에 짚고 구부려 있어야 합니다. 멍에는 여러분에게 짐이 되며 부담을 지우며 괴로움을 더해 줍니다. 멍에는 여러분을 괴롭히는 역할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제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을 때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 갈 3:13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울르 속량하였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누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멍에를 메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마 11: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울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는 외부적인 율법주의의 멍에를 내부적인 사랑의 멍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살아있고 생동감 있는 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었습니다. 그분의 멍에가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메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오히려 가벼운 것입니다. 그것은 가벼운 멍에이며 우리가 지기에 적합한 것이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멍에를 받아들이길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멍에입니다. 율법의 멍에는 사람을 속박하고 가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는 인생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멍에입니다. 율법의 멍에는 불안과 고통을 가져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는 우리의 영혼에 쉼을 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더 이상 율법의 멍에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멍에는 속박의 굴레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그 모든 요구를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나무 위에서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과 저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우십니다. 그리하면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안식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후견인으로서의 율법(The Law as a guardian)
 
 율법의 두 번째 단면은 갈 4:1-5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그 민족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미성숙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어린 아이를 돌볼 인도자나 가정교사와 같은 후견인이 필요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가정에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는 종들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학교에 데려 갔다가 학교가 파한 후에는 기다렸다가 집으로 데려오는 등 그 어린이를 온종일 지키고 보호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이스라엘이 미성숙하였을 동안에 이들을 내내 지켜 돌보아왔던 후견인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어린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 어린이를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어린이가 철이 없어 아무 일이나 막무가내로 하려고 할 때 엄격히 제동을 겁니다. 우리는 이 어린이에게 "얘, 큰 길로 나가면 안돼" 혹은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 가서는 안돼"라고 금지하는 말들을 합니다. 어린이는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어른과 같은 식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후견인이 필요합니다.
 
 유대 민족이 영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하여졌을 때 그들의 메시야인 구세주가 그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관계로 맞아들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율법에서 속량하시고 그들에게 성인된 아들의 신분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갈 4:4,5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분'이란 말은 '가족 가운데서 성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인에게는 더 이상 보호자나 후견인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인은 그들을 인도하거나 보호하고 보살피기 위한 하인이나 가정 교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나는 성숙해지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율법 아래 거한다면 성숙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린 아니가 아니라 성인된 아들로서 가족 가운데 당당한 지위와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전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밖에 있는 어떠한 규정이나 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갈 4:6,7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을 보내셨던 그가 보내신 성령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교사나 다스리는 자로서의 율법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가족 가운데 어른의 지위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족 가운데서 성인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린 아이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여러분 안에 주셨음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율법에 복종하는 종과 같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자녀와 같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의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집 종으로서의 율법(The law as a slave girl)
 
 갈 4:21-23에서는 율법의 세 번째 단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율법은 계집 종으로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하갈과의 관계에 그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후사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하녀 하갈을 아내로 취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기꺼이 수락하였습니다. 하갈에게서 곧 이스마엘이라는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는 실제적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은 이삭을 학대하였고 가정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녀와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갈 4:30). 여기에 나오는 비유는 사라와 하갈 사이에 있습니다. 사라는 자유자에 속하는 여인이었고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습니다. 사라는 천국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하갈은 속박에 묶여 있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갈 4:24-26을 주목해 봅시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갈은 율법의 언약인 지상의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은혜의 언약인 천상의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자유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스마엘은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자들을 예표하며 이스마엘은 육체 안에서 태어난 자들을 예표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죄된 성품을 갖고 태어났으며 이스마엘과 같이 문제아가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듭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이삭이 태어난 경우와 같이 새로운 성품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성품으로 거듭난 자들은 주님께 온 정성을 다 모두에게 기꺼이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갈 4:30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여러분은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가족으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의미하여 사라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들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이 세사름은 신령한 삶을 사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의 옛 생활을 하는 자 곧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들이 아니라 자유하는 여인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는(영적인 의미에서) 하갈이 아닙니다. 율법이 여러분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여러분을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의 어머니는 천상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사라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좇아 위에서부터 태어난 자들이며 종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하녀와 그 아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율법이 물러가면 육체도 물러가야 합니다. 고전 15:56에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이것을 하지 말아"라고 말할 때 나의 옛 성품은 "나는 그것을 행하고야 말 것이야"라고 합니다. 율법이 "저렇게 행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할 때 나는 "싫어, 그렇게는 못하겠어"라고 소리칩니다. 옛 성품은 율법을 알지 못하지만 새로운 성품은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굴레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태어났으며 그래서 율법의 속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결혼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종과 그녀의 아들을 내오 쫓으라"(갈 4:30)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율법과 은혜를 결혼시키지 않습니다. 율법은 다만 이 기능만 가집니다. 율법은 내게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쳐주고 죄를 깨닫게 해 주며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죄는 죽음으로 인도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후견인이나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족 중에서 성장한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종되었던 하갈의 아들들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로서 자유를 획득한 자들입니다.
 
채무 증서로서의 율법(The Law as a bond of indebtedness)
 
 골 2:14에서 우리는 율법의 네 번째 단면인 채무 증서로서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어느 누가 어떤 사람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다면 여러분들은 채무 증서가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를 다르시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우리는 본래적으로 그리고 자범적으로 율법에 빚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우리를 거스렸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항상 거스리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스릴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더욱 낙심케 하며 그것을 도저히 순종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수고한다 해도 우리는 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 속으로 어느 누군가를 미워만 해도 그는 이미 마음 속에 살인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저는 우상 앞에 절한 일이 없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사실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제일 순위에 속하였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충성하며 무엇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외부적으로는 율법의 수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내적으로는 온갖 종류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거스릴 뿐만 아니라 대적하기도 합니다.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롬 7:12). 율법이 악하다고 하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만일 거룩하고 의로운 그리고 선한 율법이 우리가 얼마나 나쁜 죄인인가를 보여 주었다면 우리는 나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죄인이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나쁜 것을 사용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는 율법과 같은 선한 것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얼마나 악한 존재자들인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우리의 마음 상태의 타락이 어떠한 정도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채무 증서를 갖고 있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파산 상태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7:40-50을 보십시오). 한 사람은 500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다른 사람은 50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의 품삯과 같았음). 이들 두 사람들은 이 빚지 돈들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빚을 내준 사람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파산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이 파산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부유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가난하고 비참하고 눈 멀고 헐벗을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은 것입니다(사 64:6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표준에 맞추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빚을 청산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셨습니다(골 2:14).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우리가 빚진 그 모든 빚더미를 일시에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서 위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를 지우거나 삭제하기 위해 물이나 다른 어떤 액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문서에 기록된 것을 도말하셨을 뿐만 아니라  문서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그들 삶의 중심부에 되돌려 놓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그는 성소 휘장을 두 조각으로 찢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막혀있는 담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 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모든 의식은 완성되었고 모든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었고 모든 빚은 청산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었습니다(엡 2:14을 보라). 이제는 더 이상 인종의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만 주어졌던 그 율법은 이방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인종에 따른 구분은 완전히 도말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얽매었던 의문의 증서를 완전히 도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빚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대신 그 빚을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 생의 중심부에 있지 못합니다. 그 중심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갈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순종을 해야 합니까?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진 율법 때문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심기어진 생명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한 책임감만으로는 우리가 지고 있는 빚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빚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청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롬 13: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골 2:14은 채무의 증서는 도말되었고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따라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빚을 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규범이나 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 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 율법이 지금 우리 마음 속에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의 의로운 표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소원과 능력을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림자로서의 율법(The Law as a shadow)
 
 우리가 골로새서 2장을 계속 읽어나가노라면 율법의 다섯 번째 단면인 그림자로서의 단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골 2:16,17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 교회 안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은혜를 혼합한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신자들이 구약의 절기나 월삭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그들로 하여금 너희에게 성일(연중 축제)이나 새달(월삭)이나 안식일(주중 예배)을 인하여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했습니다(16절). 이 모든 특별한 날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의 일부분이었습니다(17절).
 
 이와 동일한 진리가 히 10:1에서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와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늘의 영적인 실체들은 현세적인 것들에 의해 비유적으로 표현됩니다. 성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의 예표입니다. 동물로써 드리는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로 다시금 들어간다는 것으 빛에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 이는 실체를 버리고 그 실체의 사진을 중시하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새 신부가 남편의 사진만을 중요시하며 거기에다가 자신의 사랑을 다 바치고 그 남편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는 마치 아들이나 딸이 그들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진에다 경의와 존경을 표하며 실제 부모님에게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장차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7). 그림자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빛이 물체 앞에서 비쳐질 때 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절기나 안식일이나 월삭이 실체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앞으로 도래될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는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는 말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언제나 필요로 할 모든 실체를 감싸 놓으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 가운데 살고 있으며 어두움 가운데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속박의 멍에 아래로, 그리고 후견인이나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며, 계집종과 채무 증서의 속박 아래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림자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거울로서의 율법(The Law as a mirror)
 
 야고보서 1장은 율법의 여섯째 단면에 대해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거울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약 1:22-25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고 자시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율법은 죄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서 여러분의 얼굴이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얼굴이 더럽다고 해서 그 거울로 여러분의 얼굴을 씻어낼 수 없습니다. 거울은 여러분이 더럽다는 것을 보여주나 그것이 여러분의 얼굴을 깨끗케는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거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나는 죄인이며, 그러므로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알 때,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거울이 된다고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거울)을 들여다 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집니다. 율법은 절대로 아무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는 거울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거하게 될 때에 말씀은 거울이 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여러분을 변화시킵니다. 종래는 여러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율법 아래 둔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울 속을 들여다 보고서 여러분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알게 되는 것 뿐입니다. 율법은 당신이 '죄인이요'라고 정죄할 수는 있을지언정 여러분을 더 낫게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여러분을 더 나쁜 모습으로 화하게 합니다.

남편으로서의 율법(The Law as a husband)
 
 율법의 마지막 율법의 단면은 롬 7:1-4에 나와 있는대로 남편으로서의 단면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의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여인이 일단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그녀는 영속적으로 그 남자에 속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복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그들에게 지시를 하고 그들 위에 주권을 행사하는 남편과 같았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은 다음에 나오는 바울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그 남편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죽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율법은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죄인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과 새로운 관계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셨을 때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 대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율법 아래로 되돌아간다면 그 율법은 여러분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게 되면 여러분은 그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삶의 새로운 단계로 부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이 아니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이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사랑과 생명의 관계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율법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여러분들은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통제하기 위한 규정이나 법칙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행복한 가정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랑과 생명으로 이루어지는 생생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분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가진 모든 충만한 것들을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누리는 모든 부요함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언젠가는 여러분들은 그 분의 집에서 영원히 안식을 누리며 행복만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그리고 그 분이 가진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 분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분의 미래를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자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의무나 괴로움을 더해 주는 무거운 짐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덧입음으로 새로운 신령한 삶을 누리며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놀라우신 주님과 사랑하며 살며 또한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바로 우리의 남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써가 아닌 생명과 사랑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목메이며 사모하던 일입니까? 그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위험한 것들을 모두 떠받쳐 보호해 주시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를 계속적으로 축복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기꺼이 순종을 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율법의 일곱가지 단면들을 음미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후견인과 같이 우리를 제재하고 계집종처럼 아무런 유업을 얻지 못하게 하고 채무 증서와 같이 우리에게 빚을 요구하는 그 율법의 멍에 아래 더 이상 처하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림자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 모습의 더러움을 보게만 하는 거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놀랍고도 충만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함을 입었습니다.

제4장
죄로부터의 자유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가지 원수, 즉 세상, 육체, 악마와 끊임없이 전쟁을 해야만 합니다. 이들 세 원수들은 우리의 죄된 옛 생활로부터 나옵니다. 바울은 엡 2:1-3에서 우리의 옛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즉 세상)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즉 사단)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즉 육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 세상 주관자들에 복종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사단의 능력의 지배를 받았으며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이 세상 원수들에게서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도 그들은 나의 최대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공격하여 넘어뜨리려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원수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투쟁의 대열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가 승리를 얻도록 준비해 놓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육체의 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히 죄없는 삶을 산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1:8).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롬 6:1에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만을 따르기만 해도 고의적인 죄에 대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간단한 세가지 동사 즉 '알다'(know), '여기다'(reckon), '드리다'(yield)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로마서 6장 최초의 열 구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에 관하여 말하였으며, 그런 다음 11절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것을 여겨야 한다고 말하였으며, 12-23절에서 우리가 드려야 한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는 지성으로는 아는 것을, 감정으로는 여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지로서는 드리는 것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교훈 '알라'(know)
 
 바울은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에서 인간의 죄에 관해 다루었습니다. 그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정죄를 받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렇나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며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4장과 5장에서 논증하였습니다. 그는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것을 그는 보여줍니다. 그는 5장에서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죄로 오염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는 타락한 자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어느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나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20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자들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가 행위로써가 아니라 은혜로써 구원함을 받았다면 우리는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얻기 위한 수단으로 계속 죄를 지어도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역사함으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저는 '성도의 견인'(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 즉 일단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이따금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글로 써서 기르기를 "목사님, 만일 사람들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그들은 나가서 또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러한 반론이 그릇되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세가지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죄에 대하여,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죄에게 정복당한 죄인
 
 우리는 죄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본장에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는 죄가 죄 범한 자를 노예로 삼는다고 말했습니다. 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시작을 하나 나중에는 그를 자신의 종의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죄와 유희를 즐기고 있을는지 아니면 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이지만 아마도 죄에 관한 생각이 마음 한편 구석에서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대해 저는 경고를 합니다. 죄라는 것은 처음에는 손님으로 가장하여 들어옵니다. 그런 다음에는 여러분과 서로 잘 알게되고 친구가 되고 좋아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서 죄는 여러분을 얽매며 예속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죄는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에게 기쁨을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죄는 결국 여러분의 종이 아니라 여러분의 주인이 되고 그 주인은 폭군이 되며 그리고 그 폭군은 멸망시키는 자가 됩니다. 죄는 언제나 자유로 시작을 하나 결국은 파괴와 예속의 상태로 몰고 갑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한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이 말씀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 과거의 상태에 관해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가 자신들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섬기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죄에서 벗어나고'(롬 6:7), '죄에게 종노릇 하지 말아야 한다'(6절)라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공동보조 노선을 취하여 죄를 단호하고 과격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기 원했던 첫 번째 항목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단호하게 경고하기를 우리가 죄를 허용한다면 그 죄는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돌변할 것이며 그 폭군은 파괴자, 멸망시키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죄는 언제나 자유로 시작해서 파괴와 멸망으로 끝장을 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죄를 정복하신 그리스도
 
 둘째로 바울은 우리에게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함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2-10).
 
 로마서 5장과 6장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대속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6장에 와서 내가 그와 함께 죽었노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었습니다. 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지만 6장에서는 그가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5장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형벌을 짊어지시기 위해 죽었다고 서술했으나 6장에서는 그가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5장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됨을 얻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얻은 자들의 성화(聖化, santification)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대속 사역으로 인하여 죄와는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가집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세례는 회개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동시에 일어납니다(고전 12:13).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하였으며 성령을 또한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 나타난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말한 이유가 됩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인 우리가 어떻게 과거의 죄된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서두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 롬 6:7에 의하면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나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죄가 살아서 역사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니라"(롬 6: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새로운 위치를 이해하시고 새로이 정립하는 계기가 되도록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여러분은 그의 안에서,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가 장사 지낸 바 되었을 때에 여러분의 옛 생활은 그의 안에서, 그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된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셨을 때 여러분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 그와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죄와는 새로운 관계를 가집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
 
 셋째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관하여 무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섬길 주인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사인 포시드(P.T.Forsyth)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자유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을 찾는데 있다고 늘상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올바른 주인을 만나게 될 때 올바른 자유 또한 얻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면 여러분은 죄를 섬기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패배감과 절망, 낙담, 허무 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면 여러분은 비로소 승리의 생활, 활력있는 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이 얻은 생명 속에서 기쁨과 승리를 맛보면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주인을 올바로 선택하셔야만 합니다.

두 번째 교훈 '여기라'(reckon)
 
 바울은 롬 6:11에서 연이어 자신의 주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로마서 전체에서 '여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조마이'(logizomai)를 19번 사용했습니다. 가끔 이 말은 '전가하다' 혹은 '계산하다'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가 제시한 두 번째 교훈, 즉 '여기다'(reckon)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긴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상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참되다고 주장하고 거기에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십만원을 꾸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수표로 간편하게 바꾸어 여러분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수표를 받아보고 나서 "음, 이건 참 예쁜 수표로구나 여기에 있는 그림은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수표를 주머니에 꼬깃꼬깃하게 접어 넣고 그것을 계산해 볼 생각조차 않은 채 나돌아 다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장 은행에 가서 이서를 하고서 현금과 바꿀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보낸 그 수표를 신뢰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행 안에 돈이 있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성경이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여러분들에게 "갈보리 산상에 몇 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세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앙에, 다른 두 강도는 양편에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저 갈보리 산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두 강도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그 성경은 동일하게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참이라고, 진리라고, 생명이라고 믿는 것을 뜻합니다.
 
 '여긴다'는 말은 어떠한 체험을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다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성도들이 너무 이기적인 체험에만 치우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로마서 6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죄는 나에게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니지만 나는 죄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나는 단순히 감정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부추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인정하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긴다'는 말의 바른 뜻입니다.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믿음 가운데 살고 행하고 또한 그 믿음대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있어서 참인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은 내 생활에 있어서 유일한 진리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있으며(소극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고 있습니까?(적극적인 면에 있어서) 여기서 중요한 말은 '주님'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고 있습니까?
 
 본 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을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최초로 언급한 것은 '아는 것'(know)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범죄의 결과는 죄에 예속되는 비참한 상태로의 전락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혹을 하며 죄를 짓는 자를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며 종래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종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써 죄의 종된 상태에 놓여있던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는 자신이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서 이제는 섬길 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가르침은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 속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있어서 참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교훈 '드리라'(yield)
 
 로마서 6장 가운데서 바울은 세 번째 교훈으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 6:12). 여기에서 우리는 죄와 육체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저는 저의 라디오 청취자들로부터 인간의 육체가 악한 것인지에 관하여 묻는 편지들을 받곤 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 안에서 역사하는 힘(성경에서는 '육체' 혹은 '옛 사람'이라고 부름)이 있어 이것이 우리의 몸을 죄짓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을 '못하게 하라'(Let not)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의지에 대해 요청하는 권면입니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진리를 알아야 하며, 우리의 가슴으로는 진리를 여겨야(즉 믿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로는 이 진리에 따라 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죄는 처음에는 손님같이 오나 이윽고 친구가 됩니다. 그 후 죄는 친구를 종으로 삼으려 그 위에 군림합니다. 여러분은 죄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죄가 여러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라"(롬 6:13). 여기서 '병기'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무기'를 뜻합니다. 그것은 또한 인간 생활에 필요한 '도구'라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 우리의 발, 우리의 혀 등 우리의 모든 지체들은 죄를 짓는데 사용되는 불의의 도구가 될 수도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 자체는 의로운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 몸을 주관하는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큰 차이가 빚어집니다. 만일 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면 여러분은 불의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이라면 여러분은 거룩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바울은 '죽은 자들로부터 산 자'인 살아있는 제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영광스런 몸으로 하늘 나라에 계십니다. 그의 영광스런 몸에는 갈보리 십자가의 흔적을 지녔기 때문에 그는 친히 살아있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바 하늘 나라에 계신 성도들의 유일한 공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상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삭은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자신을 아버지께 드렸고 제단 위에 자신을 묶어 바쳤던 것입니다. 그는 결박을 당한 채로 고의로 죽음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 죽이는 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면 이삭은 이미 죽었고,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산 제물로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롬 12:1,2에서 이와 비슷한 진리를 적용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너무 익숙하게 들어보던 구절이라서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당연한 것으로 간과해 버리거나 묵과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로마서 6장에 나타나 있는 '드린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
 
 하나님은 여러분의 몸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주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나 실제로 이 일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령한 일 중의 하나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려고 하신다면 여러분의 몸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인간의 몸을 취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는 몸, 즉 교회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글을 쓰시기 위해 저의 손가락을 사용하십니다. 그는 어떤 가정을 심방하시기 위해 저의 발을 사용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해 저의 입술을 사용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도구, 즉 여러분들의 각 지체들(온 몸)을 돌보아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동차 개스 탱크에 모래를 집어넣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차는 곧 망가지고 부숴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간혹 어리석은 짓들을 행합니다. 방탕한 생활로 자신의 몸을 망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로 온전히 바쳐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바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몸을 그의 제단에다 거룩한 모습으로 바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
 
 바울은 롬 12:2에서도 연이어 중요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나는 나의 몸을 그 분께 드릴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도 그 분께 드려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마음을 그 분께 드리지 않으면 그것이 사단에 사로잡힌 채 내 몸과 행위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가 곧 행동으로 나타나게 됨을 쉽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롬 12:2). 여러분들은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위엣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그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시 1:1).

우리의 의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자"(롬 12:1).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아울러 우리의 의지가 그분께 바쳐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슴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부응하는 사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들로 인하여 여러분 자신을 아낌없이 그분께 드려야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드림의 결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쳐 드린다면 놀라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6에 따르면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에는 내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그 율법이 오히려 내가 범하려 하는 욕망을 일으켜 준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나의 성품과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결단코 죄를 제어할 수 없으며 또한 죄인을 변화시키지고 못합니다. 율법은 오직 죄를 드러내는 역할만 합니다. 너는 죄인이라고 규정지우고 정죄하는 역할만 행합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일로 인해 어린이들에게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행하려는 반감을 갖게 될 것이며 그것을 행하기 위해 어떤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은 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여러분과 저는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나님께 바쳐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를 주관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께 우리의 지성과 가슴과 의지를 자원하는 심령으로 바쳐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을 때 그 분은 성령으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옛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가슴 후려한 것이 되겠으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 18).
 
 바울은 이 교훈을 롬 6:19,20에서도 적용시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여기서는 놀라운 자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에게 결박되었고 의의 행위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 롬 6:21에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 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옛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셨는지요. 저는 꿈에라도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옛 생활을 그리워 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가져다 준 축복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세상으로 되돌아 가서 육신의 방법대로 살도록 유혹을 받을 때에는 이전에 여러분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때의 일들을 그들에게 상기시킴으로 그때의 비참한 정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탈출해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오직 부추와 양파와 마늘만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삶에 좋은 것들만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감독자들의 사슬과 속박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 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1, 22).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경이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에게 드림이 되었다면 우리도 그러한 열매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23절). 사도 바울은 구속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불신자들을 위해 이 구절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롬 6:23의 이 말씀을 한 지방에 모인 회중 신자들을 위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삼손은 죄의 삯이 무엇인가를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면 죄는 그의 주인으로 둔갑하며 나중에는 폭군이 되고 그 나중에는 멸망시키는 자가 됩니다. 사울 왕은 이 사실을 깨달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거두어야만 하셨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요일 5:16에서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위하여 일을 하면 여러분들은 그 죄가 지불하는 삯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질 것이며,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롬 6:23)으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선택은 여러분들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십시오(know).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만 합니까? 죄가 여러분을 노예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이러한 노예 상태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사실과 여기에서 여러분이 섬길 주인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십시오(recon).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참이라고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고 믿으십시오.
 
 드리십시오(yield). 여러분의 몸과 마음과 지성과 의지를 한데 묶어서 하나님께 바쳐 드리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여러분의 육신의 삶을 정복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십시오. 이 말씀은 매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결코 시험받지 않는 높은 수준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끔 우발적인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이 취해야 할 태도는 주님앞에 나아가 "주님, 저는 너무나 연약한 죄인입니다. 저의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이고 여러분은 그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금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련의 새로운 시작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말씀에 따라 살기위해 기도드릴 때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며 신앙 생활을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될 것이며 그 자유를 더 한층 고양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을 때, 그 분은 여러분을 죄의 형벌 즉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에서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풍성한 삶과 자유로운 삶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노예로 만드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아들로 삼으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중요한 말씀-아십시오, 여기십시오, 드리십시오-을 명심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이 온전히 주님께 바쳐지는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고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제5장
인간 관계와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영적인 지도자들이 고지식한 독재자들이 되거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종노릇하게 된다는 것을 불행한 일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고후 1:2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라."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우리가 사람에게 종노릇 해서는 안된다는 근본 원리를 제시했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받는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오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17-24).
 
 우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여기 나타나는 '자유'라는 주제를 세가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배경(Setting)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맥의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면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새로운 자유를 남용하고 오해함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심각한 죄를 범하였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성에 젖어 있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갈 3:28은 본장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열쇠가 되는 구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니라."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이 진리를 알았으나 이에 대해 너무 극단적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자유를 방종의 도구로 이해하고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함을 받았으니 남자나 여자나 구별이 없다. 그러니 결혼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결혼 관계를 폐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결혼 관계를 통해서 승리와 축복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 여자들은 그들의 자유를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가되 어느정도 한계가 있었으나 남자들을 그것을 극단적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따로 있을 수 없다"(갈 3:28). 바울은 이 교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고린도전서 7장 17-20절에서 다루었습니다.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되려고 하였으며 그 증거로는 그들의 몸에서 언약의 표시를 지워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되려고 애를 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니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그들의 국적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 해도 나의 국적이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나 자주자도 따로 없습니다"(갈 3:28). 바울은 이 교훈에 대해서는 고전 7:21-24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어떤 종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우리는 더 이상 주인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주의를 하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원치 않으시는 것을 행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뒤엎어 버리고 싶은 그릇된 유혹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종들에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갈 3:28).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도 여러분의 천성적인 고유한 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구원받은 이방인들이라도 그들의 국적과 민족의 뿌리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종이나 자주자가 없습니다만 당신의 사회적 경제적 신분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존속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구원은 신령한 변화입니다. 또한 구원은 가정, 사회, 직장에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그리스도인 개인을 변화시킨 후 그를 통하여 그가 속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가 남용되어서도 방종으로 나아가서도 안된다고 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습니다.

의미(meaning)
 
 이제는 본 문맥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즉 누구든지 현재 처해 있는 그 상황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변화를 시키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형제들아 각각 그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17, 24). 여러분은 현재 처해있는 상황 그대로 지내십시오. 즉각적으로 뭔가를 변화시키려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대신 내부에서 발생하는 조용한 변화를 기대하십시오.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는 자유하였지만 남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어떤 교회 목회자도 자신의 교회 교인이 생활에 영적인 독재자로 군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주일학교 교사도 자신의 반 학생의 생활에서 영적인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땅 위의 어떤 사람에게도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도록 말씀하셨습니다(마 23:8-12를 보라).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한 이를 가리켜 영적인 아버지로 호칭하기도 하지만(고전 4:15) 영적인 아버지가 그리스도께로 인도된 사람의 삶에 독재자처럼 군림해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노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그들의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노예들입니다. 주인들은 그리스도의 종들로 생각되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인들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의 지배하에서 자유하나 이것이 여러분을 독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인종적인 변화도 일으키게 하지 못합니다. 변화는 바로 당신 내부에서 나오도록 하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현재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내부로부터 변화를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 4가지 논증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고전 7:19)라고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존재임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살은 7장 18, 20-22, 24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사실상 그는 '부름받다'(Called)란 말과 '부르심'(Calling)이란 말을 본 문맥에서 9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이 말씀은 여러분이 직장에서 승진했을 때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너무 급격한 변화를 꾀하는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말미암아 거룩한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은사를 받았습니다
 
 고전 7:17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눠준다'란 말은 '그에게 맡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사회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의 직업, 우리의 재능은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두 번째 논증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에 의해 할당을 받았습니다. 노예의 신분에 있는 어떤 사람은 "내가 종이 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따지거나 토론할 대상이 못됩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에 따라 나눠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아시며 변화를 일으키시고 싶어 하실 때에는 그 변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유를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설치고 다니는 등 급진적인 변화를 꾀하려고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우리가 우리의 현 상태를 더욱 좋게 개선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위치라면 우리는 그 분께서 그것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그의 뜻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종들에게 이 말을 했을 때에는 그들에게 향상을 위한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의 세 번째 논증은 고전 7:23에서 제시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는 여러분이 그것에 지불하는 값에 따라 측정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값을 치루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 존재인가를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들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종은 자신을 산 자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신 바 되었으므로 그 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고전 7:24에서 바울은 네 번째 논증을 제시했습니다. "각각...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일을 하며 뉘우치라고 하신 그 곳에서 충성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않는다면 신령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위치에 머무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내주하실 때 그는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변화의 사역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적용(The Application)
 
 인간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한 세 번째 단계는 그것을 어떻게 적용시키는가에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이 진리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종노릇 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도 있습니다. 잠 29:25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동떨어져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알 바가 아니나"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닙니다.
 
 저는 주중이나 주말 쯤이 되면 이러한 문제들에 봉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써서 제게 그들의 모임이나 혹은 집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대부분 거절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모든 곳에 갈 시간이 없으며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저를 초청하도록 인도하셨다고,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같은 날 각각 다른 여섯 군데의 장소로 나를 인도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동시에 여섯 군데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여 단순히 사람을 기뻐하게하여 했다면 나는 병원 신세를 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섬기는데 급급해 하지말고 하나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너희 종이 되었다"(고후 4:5)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종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교인된 여러분들에게 한마디 말씀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목회자는 여러분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 목사님이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나 혹은 불성실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의 목회자는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기 위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이따금씩 여러분들에게 '아니요'라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식사나 혹은 이러저러한 일로 저를 초청하곤 하였는데 저는 자주 "그것 참 안됐습니다. 저는 지금 갈 수가 없어서요"라고 거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못마땅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저는 묵상도 해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 합니다. 저는 저의 삶의 우선 순위에 따라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계명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 15:9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계율, 즉 사람의 계명에 귀기울이지 않도록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대단히 많은 관습이나 유전 즉 전통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될 수 없는 인간이 만든 계명과 유전들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요 5:41-44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칭찬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저는 흔히 그리스도교 사역자들이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그들의 칭찬받기를 구하며, 어떤 학교로부터 학위를 얻거나 중요한 모임에 강사로 쓰임받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극히 경계해야 할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사고 방식입니다.
 
 바울은 갈 1:10-12에서 인간의 권위에 대해 경고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은 의당 나를 주관할 권위를 갖고 있으며 정부 역시 나를 주관할 권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로 우리의 사역을 간섭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사역 역시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이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굽실대고 그들의 권위 앞에 비굴해 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를 조심하십시오(고전 2:5).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마 10:24-28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몸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을 동시에 지옥에 빠뜨릴 수 있으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이나 유전에 머리를 숙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 듣는 일에 그리 신경쓰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전횡적인 횡포와 그 권위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해하거나 당신이 하고 있는 사역을 그만두게 하지 않을까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주관하거나 당신의 사역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주의하십시오. 사람들의 지혜에 귀 기울이십시오. 대신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너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할까 싫어할까 혹은 그들이 당신의 사역을 인정할까 인정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소신있게 일할 수 있는 자유! 이러한 자유를 발견하는 일이야 말로 굉장한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이며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의 종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23절).

제6장
과거의 죄에 대한 후회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그 과거에 의해 적잖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죄와 과거에 대한 후회와 과거의 실패 등에 의하여 지배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있어서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키의 역할을 해야지 뒤로 끌어당기는 닻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딤전 1:12-17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노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의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 보면서 자신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실패나 과거의 죄 그리고 과거의 실수에 의하여 구속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들로부터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하면 과거로부터 자유하게 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강도 즉 내일의 두려움과 어제의 후회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상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원한과 실패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과거에 의하여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과거의 전횡적인 횡포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 위에서 명확한 단안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바울은 과거 자신이 행했던 행동이 옳지 못했다는 것을 여기서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독했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는 사기꾼이야! 그는 메시야가 아니야!"라고 공공연히 외쳐대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백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백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박해자요 가해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만 무도한 자였습니다. 현대의 유사어로 표현한다면 그는 '깡패'였다는 말이 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즉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는 딤전 1:13에서 '긍휼'을 언급했으며 또 다시 16절에서도 이를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딤전 1:16) 딤전 1:14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고백하였으며 악을 행하였노라고 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죄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의 모든 죄-를 완전히 도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의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포하셨으며 이 사실은 천지가 변해도 변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시다"(롬 5:1). 우리는 과거를 바라보면서 주의해야 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현재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우리가 중생, 즉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는 새로운 성품이 있으며 이 새 성품은 우리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래서 죄의 노예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시어 해방을 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 뭐래도 과거의 노예가 아닙니다.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리심으로 완전히 철저히 은혜롭게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또 너희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1:14;골 2:13).
 
 저는 이러한 체험을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아이언사이드(Dr.Ironside) 박사님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서 신뢰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죄, 즉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서 "저는 제가 구원받게 될 때에 예수님이 저의 과거의 죄는 사하실 수 있어도 미래의 죄는 사하실 수가 없으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언사이드 박사님은 조용하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당신의 죄 중에 얼마만큼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핵심입니다. 당신은 예수 믿기 전에 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오늘날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생애를 절름발이로 만들지 마십시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죄를 지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체험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불렀으나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과거의 죄의식에서부터 해방을 받았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과 그의 형제들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속여 종으로 팔아넘긴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애굽에 와서 바로 왕 다음가는 권력의 제2인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만약 과거에만 집착하였다면 그의 형제들을 처치할 권세를 갖고 뭔가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울면서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그의 형제들은 요셉의 자신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요셉은 울면서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과거에 의해 속박을 당하지 마십시오. 오직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이것이 첫 단계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진정한 회개의 증표들 중 하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거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마 6:14, 15). 우리 주님께서는 남을 용서함으로써 진정으로 회개한 증거를 나타내 보여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은 18장에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서로들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0)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면 490번이 됩니다. 하지만 나의 형제는 똑같은 죄를 내게 490번이나 반복하여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죄를 490번이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당신은 당신의 형제가 당신에게 행한 것을 생각할 적마다 그를 용서하라"라는 뜻에서 이같이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어느 왕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왕은 돈을 계산하던 중 어느 신하가 많은 돈을 착복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은 그 신하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그 빚을 갚고도 명령하였습니다. 그 신하는 왕 앞에 엎드려 용서해 달라고 애걸복걸 간청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왕의 앞에서 물러난 후 자기에게 불과 몇 푼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신하는 그를 붙들고 흔들며 "내게 빚진 돈을 당장 같으시오!"라고 엄중히 문책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신하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으나 그의 동료의 조그마한 빚은 탕감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고문하는 자에게 넘겨져 자기 빚을 다 갚기까지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의 착고에 매여 괴로움을 당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22).
 
 윌리엄 생스터(william sangster)는 영국이 낳은 감리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어느 성탄절 날 그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려고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는 카드 보낼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만은 이 카드를 보내어서는 안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안돼?"
 
 "목사님은 그가 목사님에게 어떻게 대했던 것과 어떻게 말했는가를 잊어버리셨나요?" 생스터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 그래 그래. 이제 생각이 나는 군. 하지만 난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기로 했어".
 
 우리 모두는 과거에 남들이 자신에게 잘못했던 것들을 기억하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의 허물을 용서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의 엄청난 실수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용서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본 대의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당신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거짓말장이 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들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성질이 머리 끝까지 올라왔어. 그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단 말야"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어느날 화가 나서 한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는 또한 분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내리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와 같은 부정한 생각을 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들 말합니다. 다윗은 부정한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마침내 부정한 행동을 범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라고들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만한 자는 "나같으면 그런 나쁜 짓을 행치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내가 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자체가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생각들을 여러분의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녀에게 말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싶어", "내가 그에게 행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싶어"라고 말하겠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파묻고 있으면 오히려 문제만 야기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하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면 여러분들은 기도와 찬송의 생활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과거에 한 행위에 대해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딤전 1:17).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모본으로서 또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예증으로서 사용하게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원통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에 대한 고민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드리는 일로 바꾸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은 죄에서부터 시작하실지라도 무언가 좋은 것을 이루실 수 있음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것들로부터 무슨 좋은 것들이 나올 수 있을는지 알지 못하지만 다만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저는 흔히 교인들에게 다윗이 두 번의 큰 죄를 범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곤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질렀으며(육신적인 죄), 그리고 백성들을 계수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영적인 죄). 다윗이 백성의 수를 계수한 죄의 대가로 7만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통하여 이루신 결과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결혼하여 솔로몬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자신의 어리석은 죄를 고백했을 때, 그는 그가 산 땅 위에 제단을 만들었으며 그 땅 위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한 인간의 두가지 큰 죄를 거두시고 그러한 죄악된 행위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는 선한 일을 이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옳지 못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로 인하여 쓰라린 결과를 당하였으며 그 죄를 고백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범과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자신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가장 커다란 죄악을 취하시어 거룩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시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수행하고 계십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케 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세가지 단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범과를 용서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여러분의 모든 범과를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버리셨습니다(미 7:19). 그는 모든 죄드를 등 뒤에 두셨습니다(사 38:17). 그것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시시라 했습니다(히 10:17).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같이 그 분은 여러분의 죄과를 여러분에게서 옮기어 버리셨습니다(시 103:12).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충만하고 무한한 자유를 받아들이십시오.
 
 둘째로, 다른 사람의 범과를 용서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 좋지 못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께 그것을 자백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러한 행위는 여러분에게 자유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유는 용서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일시적인 싸움이나 오해 등의 문제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말하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고 죄된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뒤에 있는 것들을 지어버리라"(빌 3:13)고 서신을 써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위해 꿈꾸며 살아야 하는게 과거 속에 얽매여 산다는 것은 스스로 속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당신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결단코 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체질을 아십니다. 그는 당신이 흙으로 돌아갈 연약한 존재임을 아십니다(시 103:14). 당신은 당신이 과거에 범죄하였던 일만을 기억하고 고민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어리석은 행위를 멈추십시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찬양과 기도로 바꾸는 일입니다. 당신은 간단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행했던 그것을 돌이켜 볼 때마다 그것이 저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당신에게 그것을 맡기렵니다. 저는 당신이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대로 당신의 범죄 사실에 대한 고민을 찬양과 기도로 바꾸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이 되시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의지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두 강도-내일에의 두려움과 어제의 범죄-사이에 못박히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과거의 속박에 묶여 있다면 그 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맡기십시오. 그는 여러분의 어제와 오늘의 하나님이 되시며, 내일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는 진정 여러분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제7장
물질에 대한 염려와 탐욕으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본장에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근심 걱정과 물질로 인한 속박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물질에서 구원받는 이 일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물질로 가득찬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 물질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가짐으로 물질에 지배받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출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거슬다만 '짐을 짊어지고 있다' 혹은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인 마 6:19-34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한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려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리라".
 
 영어의 '염려하다'(worry)란 말은 '얽히다'를 의미하는 고대 앵글로 색슨족의 언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서 '걱정하다', '괴로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끊어지다' 혹은 '분리되다'를 의미합니다.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얽매는 것입니다. 염려는 또한 당신을 분리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염려는 모든 종류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물질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결심을 굳게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걱정의 주요인은 물질에 대한 지극한 관심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가 물질에 얽매이고 있다는 증거중 하나는 우리가 물질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물질에서 자유를 얻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물지레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물질을 소유하는 자체는 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 1:31에서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 몇가지 면에서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물질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이 우주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물질들이 존재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하고 사람들은 사랑받고 섬김을 받도록 지음을 받았으며 물질들은 사용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만드셨으며 악한 것은 전혀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물질이 나쁜 방법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물질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은 좋았다고 창 1:31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물질 세계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만드셨고 그렇게 창조된 물질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너희 부친께서도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삶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들도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 중 꼬마 아이가 잼 만드는 기계를 보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또 소리를 지르면서 "잼 먹고 싶어 잼을 달란 말야!"라고 엄마에게 보채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가 소란을 피우니까 당황하였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들이 그 아이가 그렇게 보채고 소란을 피워도 끝내 그에게 잼을 사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설교였습니다. 이 어린 꼬마 아이는 물질을 원했지만 그것을 받는 데는 어떤 제한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물질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 "그가 얼마를 남겼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문명이란 불필요한 것들을 무한정 축적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물질에 얽매여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사용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딤전 6:17에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며 이것을 잘 사용함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기를 즐거워하며 동정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왜 나쁘지 않은가에 대해 다섯가지 이유를 밝혀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물질은 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을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물질이 우리를 소유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에 대한 두 번째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충성된 종이 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잔인한 주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 6:21에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물질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가리켜 '탐욕'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우리가 더 많은 물질, 더 큰 물질, 더 훌륭한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말합니다. 이렇게 탐욕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물질로써 인생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물질에 얽매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물질에 얽매이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며 근심걱정 속에 얽매이게 됩니다.
 
 우리의 심사가 온통 물질 문제로 휩싸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마 6:22,23에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생각이 물질에 얽매여 있다면 그 물질은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속 사람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이 부분에서 인간의 양심에 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여러분의 속 사람에게 빛을 들여보내는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창문에 때가 끼이거나 이물질이 부착되면 될수록 적은 양의 빛이 들어올 것이며 그 다음에는 빛이 어두움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만일 내가 물질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그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그 물질은 결국 나를 어두움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때는 물질이 이미 주인으로 둔갑해 나를 호령할 것입니다.
 
 물질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물질은 여러분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여러분의 의지도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두 갈래로 나누어진 삶은 멸망받을 삶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물질을 위한 삶을 산다면 그 물질은 여러분의 주인으로 둔갑하게 될 것이며 끝내는 여러분의 삶을 파괴할 것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물질에 사로잡힌 결과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25절에서 이같이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물질을 우하여 살고 물질을 사랑하고 그것을 구하는데만 급급하면 너희 속 사람은 타락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 증거는 염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에 대해선 염려하지 마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여러분은 염려한다고 키를 더 크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염려는 여러분의 생명을 단축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잃어버린 자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 32).
 
 염려는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은 불순종의 증거입니다. 불순종은 그 마음 속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물질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우리가 그 물질에 의해 소유당하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어떤 부자가 이사오고 있던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퀘이커 교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퀘이커 교도는 이웃에 이사오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가구와 비품들과 장신구들을 그가 살 집으로 운반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퀘이커 교도는 그의 새로운 이웃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십시오. 제가 한 말씀 좀 드리고 싶습니다."
 
 "예, 말씀하시지요."
 
 "당신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에게 한 번 와 보시지요. 제가 그런 것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훌륭한 철학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다음 세 번째 교훈으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마 6:33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바꾸어 말하자면 이는 당신의 생애 중심부의 위치에서 물질을 제거해 내고 그 자리에다 하나님을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물질이 당신의 삶의 주인 노릇을 한다면 그 생은 너무나 값싼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주인이 되시면 당신 삶의 모든것들은 적재적소에 위치하게 되고 당신의 인생이라는 '가구'에는 합당한 가격의 꼬리표가 부착될 것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들이 제가 보기에 형편없이 값싼 물건인데도 그것에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물질을 얻는 데 시간을 보내고 정력을 바치고 온 신경을 거기만 몰두하고 있을 때 여러분은 값싼 인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물질만능주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채 지내다가 여러분의 아이들과 친구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병원에는 건강을 되찾기 위하여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 중 대분분의 사람들이 물질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입원한 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걱정과 물질욕에 대한 끊임없는 충동으로 인해 마음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들 삶 속에 주인이 되셔야만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첫째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기도와 찬송과 말씀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매 주 첫째날에 교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첫 번째 요소-가장 중요한 것-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첫 번째 대상으로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사람과 물질은 각기 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뿐만 아니라 그 분에게(그 분의 규정과 그 분의 의에)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의 주' 혹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계획하고 운용하는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물질의 전횡적인 횡포에서 해방시키실 때 우리는 참 자유와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신문을 읽고 모든 광고물들을 보아도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이웃이 우리가 가진 것보다도 더 값비싸고 화려한 것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더 이상 괴로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에 현재 갖고 있는 그것으로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의 절반, 혹은 일부가 아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사"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37편 25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여러분들의 걱정이 여러분들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음을 경고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으며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노동자, 목사, 아들, 딸로서의 노릇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모든 염려를 여호와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지금부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생애 중심부에 모시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는 매일매일의 삶을 그 분께 바치며 그의 규칙과 의에 복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저는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 것이며 그가 저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고 하는 약속을 믿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물질로부터 자유를 얻기 원한다면 이상과 같은 몇가지 진리들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종해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둘째, 물질이 우리를 소유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죄악이다.
 
 셋째, 하나님이 모든 것이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씩 살아나가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믈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충실하게 살아나가십시오. 매일 매 순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그가 여러분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나가십시오. 여러분은 다만 하루씩 살아나가는 법을 배우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지 않는 것은 소유할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신령한 생명의 가치와 관련하여 진정한 물질 소유의 개념을 배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물질 위에 부착된 잘못된 가격표를 떼어 냅시다. 만일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분께 당신 삶의 전부를 맡긴다면 하나님께서는 영광 가운데 그의 풍성한 대로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제8장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자유에 대한 가장 커다란 체험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미래에 일어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롬 8:18-23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자유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고난과 영광의 대조(Contrast Between Suffuring and Glory)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현재와 미래에 관련된 몇가지 대조되는 내용들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조되는 내용은 롬 8:18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모든 피조물을 원래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고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이 세상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이 피조물들은 영광스런 피조물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온갖 현상들은 고난과 그 이후에 도래하는 영광에 대한 모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만물 가운데서 불 수 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세상 도처에 고난과 신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추수기가 올 때 영광이 도래합니다. 처음은 고난 그 다음은 영광, 이 패턴(pattern)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도 나타난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주제는 베드로전서에서도 반복적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은 고난을, 그리고 그 다음은 영광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본(模本)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광스럽게 창조된 이 세상에 얼마 후 죄가 들어왔고 죄가 들어오자 고난이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첫 번째 사람 아담의 타락이 어떻게 이 세상에 죄, 고난, 죽음 그리고 정죄를 가지고 왔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동일한 진리를 고후 4:16-18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리 갈수록 늙어지고 그래서 점점 노쇠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이와 정반대로 새롭게 변모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차로 예수님과 같이 변모되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고통은 예수님께서 장차 이 땅 위에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임할 그 영광의 영원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땅의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며 잠시 잠깐 머물러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 자녀들에게 임할 영광스런 미래의 자유를 바라보며 그 가운데서도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대함과 나타남 사이의 대조(Contrast Between Expectation and manifestation)
롬 8:19에는 고난과 영광의 두 번째 대조되는 내용인 기대함과 나타남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이 구절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피조물이 열렬히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루 속히 나타나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이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 모든 자연 만물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다시 올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매일의 삶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라만상 모든 자연 만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기다림'은 열렬한 기다림, 마음을 조이면서 발 끝으로 서서 잔뜩 긴장한 가운데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기대함에 대조가 되는 것은 나타남(현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자연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나타남'(manifested)으로 번역된 이 말은 18절에서 '나타나다'(reveal)로 번역된 말과 동일한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계시록(Revelation)이라는 이름에서 사용된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계시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의 존재가치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은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노라"(요일 3: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와같은 굉장한 영광,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롬 8:21)에 들어갈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받을 유업에 관해서 언급했습니다. "자녀이며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미래의 영광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상속받든지 우리고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지금은 기대하는 때이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그것은 명백히 현현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가 점 없고, 흠 없게 될 때에, 그리고 우리가 변모되어 그의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게 될 때에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허무와 소망 사이의 대조(Contrast Between Vanity and Hope)
 
 우리는 롬 8:20에서 고난과 영광의 세 번째 대조되는 내용-허무와 소망-을 보게 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서 '허무'라고 하는 말은 '무익' 혹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담의 아들 '아벨'이라는 이름이 바로 이러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아들에게 '허무'를 뜻하는 아벨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허무'란 말은 전도서에서 모두 38번 나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전 1:2). 이것은 '숨'(breath)이나 '증기'(rapor)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다 허무한 것들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침에 신문을 읽고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도대체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군"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이렇게도 하찮고 무익한 것들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피조물들의 허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 두셨습니다. 그는 당신에 대한 계획을 세우셨으며 이 계획은 소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소망은 "그렇데 되면 좋을 텐테"하고 바라는 희망사항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날에 고작 자전거 한 대를 갖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년 소녀의 소원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바라는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확신입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복된 확신이며 이 확신은 현재 내 생애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 이 계획은 조만간 성취될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 4). 오늘날 세상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복된 소망, 즉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광스런 자유'(롬 8:21)에 대한 기대가 성취됨을 보고 그로 인한 기쁨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속박과 자유의 대조(Contrast Between Bondage and Liberty)
 
 우리는 롬 8:21에서 고난과 영광 사이에 나타나는 네 번째 대조되는 내용-썩어질 속박과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런 자유 사이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느니라." 이제 우리는 왜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 피조물들은 우리가 들림받을 때까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피조물들은 우리가 영광을 체험할 때까지 영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다시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구속자의 오심을 그토록 사모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피조물들은 속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은 속박되어 종노릇하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21절). 그러나 피조물들은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까? 그들은 속박과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받게 됩니다. 그들은 어떠한 종류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현재 썩어짐과 부패와 멸망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부패된 가운데서 흙이 나오고 흙에서 생명이 나옵니다. 생명, 죽음, 썩어짐의 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죄와 죽음의 율법에 굴복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의 몸은 흙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우리의 몸은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를 입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과 죽음의 주기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매년 봄이 오면 모든 피조물들이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영원히 존재할 것을 기대하면서 발아되어 자라다가, 가 이 오면 이것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것은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부패하고 죽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날엔가 죽음이 없고 썩어짐도 없고 부패도 없고, 더러움도 없는 영원한 나라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탄식과 구조 사이의 대조(Contrast Between Groaning and Redemption)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탄식과 구속이라는 대조되는 내용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롬 8:22, 23).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22절). 모든 피조물들은 현재 탄식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인이 해산할 때의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 봄이 오면 모든 피조물들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아시키기 위해 해산의 수고와 같은 몸부림을 칩니다. 그렇지만 때가 지나면 그것은 예년의 것들과 같이 썩어집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과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절). 우리는 단순히 관절염이나 류마티스, 두통 때문에 신음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최대의 고통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오실 것을 대망하는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을 위하여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이 영광을 바라보며 신음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과 저도 이 영광을 바라보며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23절)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앞으로 받게 될 지극히 큰 영광 중 제1차적인 보증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하늘 나라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제1차적인 보증이 있다. 이 보증은 너희의 마음속에 재누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다. 성령은 너희에게 대한 나의 보증으로 주어진 것이며, 장차 내가 너희를 하늘 나라로 데려갈 것이며 나의 영광에 참예하게 하리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장차 영광에 참예하게 하리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장차 영광스러움 몸, 즉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과 썩어짐 혹은 삶의 모든 아픔과 고난에 종노릇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21절)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롬 8:30에는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영광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자된 것과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이미 구속되었으나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우리의 몸도 구속받게 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가지 확실히 알고 있는 바로는 고난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이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알지 못한다면 영원히 고난받을 각오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오늘날 모든 인생들은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모두 이러저러하고 복잡다단한 문제들로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십시다.
 
 인생의 모든 허무는 어느날 소망의 실현으로 대신케 될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된 것이 하나님 자녀의 영광스런 자유로 대신케 될 것입니다. 탄식하던 것도 우리 몸의 구속 곧 양자됨으로 대신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실 때에 우리가 거기서 함께 나눌 영광과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일지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