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선한가정

차례
1. 작은 교회로서의 기독교 가정
2. 기독교 가정이 가져야 할 특징
3. 기독교 가정의 아내와 복종
4. 기독교 가정의 남편과 머리됨
5. 기독교 가정의 자녀와 순종
6. 기독교 가정의 부모와 양육
7. 가정 교육에 대한 구약의 모델
8. 자녀 훈계의 바른 자세
9. 불신 배우자와의 선한 가정
10. 결손 부모 가정과 성경의 가르침
11. 이혼과 재혼의 성경적 관점
12. 성경적 가정의 기능과 형식

제1장
작은 교회로서의 기독교 가정
 
 성경을 보면, 가정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교회, 즉 하나님의 '큰 가정'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 내용이 아주 적고 간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가정에 관해서는 네 구절만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골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골로새서의 전체 95절 가운데서 특별히 가정에 관해 다룬 부분은 위 네 구절 뿐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주제를 놓고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체 155절 중 가장 관련된 말씀은 겨우 열여섯 절뿐입니다(엡 5:22엡 5:22-엡 6:4).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왜 이렇게 가정을 별로 강조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이나 다른 성경 저자들이 가정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들은 가정이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최초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요?
 
 신약의 나머지 서신들을 보면, 이 질문들이 더 복잡해집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편(로마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가정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살전 2:7-11에서만 가정을 예화로 들었으며 아래의 네 서신에만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즉 고린도전서에서는 여러 유형의 결혼 문제를, 디모제전서에서는 과부들의 부양 문제를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에서는 디모데의 가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으며, 디도서에서는 아내와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지켜야 할 바람직한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가정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았고 야고보서와 유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의 세 서신서와 계시록에서도 역시 가정에 관한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신약의 서신에서 특별히 가정 문제를 다룬 것은 베드로전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왜?"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초이후로 발생한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이 대부분 가정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가정 생활에 관한 지침서 하나 제대로 우리에게 주지 않으셨을까요? 신약 성경이 이 중요한 공동체, '가정'에 대해 지면을 별로 할애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주님은 가정에 관해 좀 더 직접적인 말씀이나 교훈을 남겨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정에 관한 내용이 성경에서 이렇듯 양적으로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만 가지고 하나님이 가정보다는 교회를 더 우위에 두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가정이 교회와 거의 동일한 기관이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발생하기 시작한 초대 교회 때는 한 개인의 가정이 하나의 지역 교회였습니다(고전 16:15).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드리던 것이 금지된 이후로 가정은 그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자력으로 교회당을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그 일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의 의미는 대부분이 '가정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의 내용을 통해 매우 중요한 결론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나 다른 신약의 저자들이 교회에게 하신 말씀 모두가 가정에 대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의 내용은 각 가정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정 생활에 대한 가장 좋은 지침서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는 가정을 포함하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은 하나님의 '작은 교회'(Mini Church)이며, 교회는 '큰 가정'(Large Family)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가정을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신약 저자들이 직접적으로 가정에 관계되는 문제에 촛점을 맞춘 부분도 간혹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가정이라고 하는, 좀 더 작은 테두리에서의 신앙 공동체에 간접적으로 적용됩니다.

성숙한 가정의 표식-믿음, 소망, 사랑
 
 바울이나 다른 성경 저자들이 말하는 '성숙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식(標識)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자신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교회에 대해 편지를 하면서 그 교회 전체의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특히 사랑에 관해서 그랬습니다(골 1:3,4; 살전 1:2,3).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어느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그것을 계발하도록 권면했습니다(엡 1:15-18; 살후 1:3,4).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세속 문화에 동화된 채 반목과 질시를 일삼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 13:13; 고전 14:1)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큰 가정이라면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인 성도 가정의 성숙도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 오빠 등 그 가족 전체가 몸소 보여 주는 믿음, 소망, 사랑의 정도에 따라 결정될 수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어른들의 모범된 생활 모습을 늘 바라보며 성장한다면 그들은 올바른 삶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먼저 어른들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지 단순히 말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변화가 없는 이상 우리 자녀들은 현재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본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세 가지 믿음, 소망,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봅시다.
 
 첫째로, 믿음(faith)이란 하나님을 믿는 능력,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서라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능력입니다. 순탄할 때나 역경에 처했을 때나 항상 하나님 앞에 신실하며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비극이 닥쳤을 때, 하는 일마다 꼬이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꼭 붙잡고 의지하는' 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둘째로, 소망(hope)은 믿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망은 특별히 영생(永生)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한 변함 없는 믿음과 성경적인 확신을 말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가족들이 영생에 대한 믿음, 구원에 관한 확신을 어느 정도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랑(love)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여 주신 모습과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으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곧 교회와 가정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신약의 저자들도 그들이 보낸 편지에서 교회와 가정을 거의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성숙한 가정의 표본-빌레몬 가정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성숙한 가정들 가운데 두드러진 예는 바울이 쓴 빌레몬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은 단 한 장으로 아주 짤막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띄울 때, 그를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몬 1:1)라고 지칭하면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몬 1:2)라고 문안을 합니다.
 
 그는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빌레몬의 성숙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본문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감사와 기도 내용에 대해서는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 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몬 1:4-7)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의 삶 가운데 나타나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소망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한  다감한 아버지로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빌레몬의 본은 그의 온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버지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는 모델이 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있어서 한 가정의 가장 앞으로 쓴 편지는 그 가정 전체에게 쓴 편지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빌레몬의 성숙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으로 보아 그의 가족 전체가 성숙한 신앙으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계속해서 흥미있게 진행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라고 하는 젊은이를 위해서 빌레몬에게 간청을 합니다. "사랑을 위하여"(9절몬 1) 말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 빌레몬은 바울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기 노예들을 학대하지 않고 동등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신자로,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로 대해 주었습니다(엡 6:5-9; 골 3:22-골 4:1). 그러나 오네시모는 무책임하며 배은 망덕한 청년이었고 성경 말씀과는 무관하게 천방지축으로 살았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이 베풀어 준 새로운 성도간의 관계와 자유를 악용하여 벨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물론 재산도 훔쳐서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붙잡혔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옥중에서 바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며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사랑이 넘치는 권면에 감동되었습니다. 이 노사도와 젊은 노예청년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도왔으며, 그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로마의 자기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제공해 주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일이 인간적으로는 매우 섭섭했겠지만 과감히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도 이 때문이며 그는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그의 주인 빌레몬 사이의 다리가 되어 주고자 했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몬 1:10-12).
 
 바울은 오네시모와 정이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레몬에게 편지할 때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필치로 오네시모와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빌레몬에게 내재되어 있는 사랑의 마음, 곧 그의 성숙한 믿음을 겨냥해서 말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이런 점을 잘 포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빌레몬과 같이 성숙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러한 접근법이 가능합니다.
 
 당시 도망친 노예는 사형에 처했던 로마법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네시모와의 친분을 내세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인격으로 인정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시다시피, 빌레몬은 바울의 가장 가깝고 좋은 동역자 둥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잘 것 없는 종,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주인 몰래 도망친 사형받아 마땅한 종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는 바울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해서 오네시모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몬 1:13)
 
 다음으로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의 너그러운 주인이자 소유자임을 인정하면서 그가 주의 일에 헌신할 수 있도록 ㅑ峠構?간청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로마에 머무르는 일에 대해 빌레몬이 승낙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구절에 이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몬 1:14).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근거로 간청합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5, 16). 바울의 이 말은 빌레몬을 깜짝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과 같은 인격으로 올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분의 귀천 없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바울의 견해(갈 3:26-28)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라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 1:16,17).
 
 이 부유한 친구를 향한 바울의 잔잔하면서도 끈질긴 간청은 다음 내용에서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전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몬 1:18-20).     
 
 바울의 마지막 간청은 빌레몬이 분명히 응해 줄 것을 믿는다는 확신으로 끝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몬 1:21). 물론 이쯤되면 빌레몬이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었을 터이고 바울도 이 점을 겨냥했을 것입니다.
 
 위의 사례는 빌레몬의 평상시 가정 생활을 깊숙이 들이다 보게 해줍니다. 빌레몬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살아 있는 모델로서 자신의 가족을 잘 섬겼습니다. 부자였지만, 믿음과 소망과 그리고 겸손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가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노예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는 모두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대했으며, 심지어는 노예들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와 자매로 대우하였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손님 대접하기에 정성을 다했으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 집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맺습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게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몬 1:22).

성숙한 가정을 만들려면...
 
 신학시대에 있어서 모든 가정은 작은 교회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실 어떤 가정은 그 자체가 지역 교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역 교회를 향한 서신들은 곧 각 가정에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믿음, 소망, 사랑은 가정과 교회 모두에게 있어서 성숙의 표식(標識)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현재 어떤 표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한 내 가정은 얼마나 성숙해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가 '신약의 초대 교회' 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주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가정은 '초대 교회 당시의 가정' 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자녀에게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보여 준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입니까? 스스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위기가 닥칠 때, 당신은 가장 먼저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불평이나 불만을 늘어 놓고 원망하다가 다른 사람(아니면 하나님)을 탓하지는 않습니까? 초조해 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습니까? 근심과 걱정으로 녹초가 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먼저 눈을 감고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줍니까? 어려운 일이 닥칠 때도 여전히 하나님이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주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사실을 믿습니까? 뿐만 아니라 늘 신중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믿으며 행동합니까? 아시다시피 자녀는 부모가 나타내는 모든 행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부모된 자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녀는 부모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울까요?
 
 자녀가 당신과 함께 신앙 체험을 한 경우가 혹시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입니까? 당신의 믿음을 실제로 시험할 수 있었던 일을 자녀와 함께 겪은 적이 있습니까?
 
 이 점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지금 당장은 가진 돈이 없지만 곧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됩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아이에게 믿음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무책임을 가르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녀와 함께 가까운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습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 다시 말해서 선생님이나 친구의 태도와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어떻습니까?
 
 이런 경우 우리를 위해 늘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과 친해지도록 도와 주고 싶어하시는데, 우리 편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행위가 없는 믿음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당시의 가정처럼 우리의 가정을 성숙한 가정으로 가꾸려면 먼저 당신의 상황, 건강, 여건 등이 좋을 때나, 나쁠 때 그 어떠한 때에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의지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질문: 자녀(혹은 이웃)가 당신의 생활 중에서 믿음에 관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우리의 소망은 어떻습니까?
 
 부모로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확고하게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소유했다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지금 당신은 삶의 초점을, 소망을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장차 올 세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굳게 믿습니까? 진정 하루 주님이 오실 날을 소망하며 생활합니까? 그렇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당신은 어떠한 자세를 보입니까? 그들을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하며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는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적극적인 자세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성도된 우리의 소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려고 노력하십니까?
 
 초대 교회 당시의 가정처럼, 빌레몬의 가정처럼, 우리 가정을 성숙한 가정으로 가꾸고자 한다면 부모된 당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질문: 자녀(혹은 이웃)가 당신과 일상 생활을 같이 하는 가운데에서 소망에 관해 배운 적이 있습니까?

3.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 주며 생활합니까?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자녀에게는 또한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당신의 생활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 온 가정이 성숙되길 원한다면 먼저 어른된 당신이 사랑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질문: 자녀(혹은 이웃)들이 당신의 평소 모습에서 사랑에 관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까?
 
 이렇듯 구성원이 보여 주는 믿음, 소망, 사랑은 성숙한 가정임을 나타내는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로서 당신은 말로써가 아닌 모범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를 이뤄가야 합니다.
 
 가장이 온 가족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빌레몬의 경우처럼, 대화로써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의 모본인 것입니다. 또한 온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 되게 만드는 것도 가장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이 손님을 잘 대접하게 되면, 그 가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처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이 믿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는 어머니가 먼저 자녀와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을 보여 주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앞으로 다시 살펴보겠지만, 성경은 적재 적소에 맞는 말씀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아버지라고 다 나쁜 남편, 나쁜 아버지는 아닙니다. 사실 어떤 불신자들은 가정을 돌보고 사랑하는 일을 말만 앞세우는 신자들보다 더 잘 감당합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가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의 과제
 
 '질문'난에 제시된 내용을 깊이 되새겨 보십시오. 당신은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당신은 가족 전체의 성숙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가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끌어 가기 위해 당신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가정의 과제
 
 1단계. 이 장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십시오. 그리고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선정하십시오. 믿음입니까, 사랑입니까? 가족이 함께 또는 각자 마음속으로 조용히 이 문제를 생각해도 좋습니다.
 
 2단계.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이웃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토의해 봅시다.

제2장
기독교 가정이 가져야 할 특징
 
 초대 교회시대에 있어서 기독교 가정이 특별한 사회 단체로 여겨졌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가정과 비기독교 가정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작은 세상인 비 기독교 가정
 
 일반적인 역사 서적을 통해서는 초대 교회시대 당시의 가정 생활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성경을 추적해 보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축소판이 가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회상은 가정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따라서 기독교 가정이 '작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듯이, 비기독교 가정은 '작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초대 교회 당시 이방 사회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각 믿지 않는 가정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면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탕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이 구절에는 당시 이방인들의 생활 태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의 영안은 어두워졌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난 채 무지함으로 굳게 닫혀 있었으며, 그들의 삶은 허무와 무감각 그리고 더러움과 방탕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도 그 시대의 잘못된 사회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종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살았던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인 마지막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도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의 시기에 대해서는 계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는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오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바울이 죽음 직전에 쓴 마지막 편지에 담긴 내용은 그 당시의 사회상황이 이러한 종말적 사고와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살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 3:1-5).
 
 이 모든 특징들은 당시 믿지 않는 일반 가정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부모를 거역하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에 대해 존경심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속에서 '자녀들'이란 단어를 대부분 어린 자녀들이 아니라 다 자란 성숙한 자녀들, 철이 든 자녀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이렇듯 철이 든 상태에서도 부모를 거역한 모습이 비 기독교 가정, 곧 '작은 세상'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가정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
 
 한편 믿지 않는 일반 가정의 모습이 이러했다면, 이방 세계 속에 터를 잡고 있던 기독교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몇 가지의 설명을 통해 방송과 쾌락으로 얼룩진 이방 세계의 관습 가운데서도 성도의 가정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권고합니다.
 
 이방인들의 생활상을 서술한 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여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0-24).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비록 과거에는 믿지 않는 이방인과 같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알며 따르는 자들이므로 성도들의 가정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욕심과 세상 유혹을 따라 생활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정과는 그 모습이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받은 새로운 지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가정과 교회에서 혹은 믿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일러 줍니다. 성도는 오랜 관습에 젖었던 옛 모습을 벗어 버리고 이제 그리스도를 닮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
 
 자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성실: "도적질하는 자는 더 이상 도적질하지 말고"(엡 4:28)
 
 근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남을 위한 생활: 일하는 목적은 "빈궁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함"이 되어야 한다(엡 4:28)
 
 신중함: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엡 4:29)
 
 관심: "오직 덕을 세우는 데는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엡 4:29)
 
 영적 예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믿는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한 이 구체적인 권면에 이어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4:31-5:2).
기독교 가정에 대한 특별 지침
 
 교회에게 준 바울의 교훈이 곧 가정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가족 관계에 초점을 두고 언급한 말도 몇 가지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신앙 생활 전반에 관하여 교훈하다가 이방 가정과는 다르게 기독교 가정이 가져야 할 특징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의 도리로써 다음 네 가지로 전략하게 지적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엡 5:22)
 
 남편이 아내에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자녀가 부모에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엡 6:1)
 
 아버지가 자녀에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바울의 의도를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의 전체적 문맥, 즉 성경의 문맥과 그 시대의 문화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종', '사랑', '순종' 등을 개별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아내와 아이들은 늘 남편 혹은 아버지의 의견과 주장을 따라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가족 관계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종과 사랑과 순종의 원리는 이와 다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복종'은 아내에게만 요구되고 '사랑'은 남편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순종'이나 '공경' 역시 자녀에게 국한되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엡 5:21).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뿐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 행해야 합니다(엡 5:2). 그리고 권위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살전 5:12, 13; 히 13:17).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는 안되며 '양무리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벧전 5:3). 그리고 그리스도 이들은 모두 '서로' 시험들게 하는 일을 피하고 '서로' 가르치며 권면해야 합니다(골 3:16).
 
 바꾸어 말하면, 가정은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 존중하며 사랑해야 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들에게 관심과 자애로써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특별히 가정을 향해 이렇게 교훈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당시의 문화와 성경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적어도 두 가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 남편들의 아내 사랑,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순종, 부모와 자녀 양육이라는 이 네 기능들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그 당시의 문화적 상황과 사회의 제반 여건상 이 기능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두 장을 읽다 보면, 여러분 가운데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여권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분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도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편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귀에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잘못 언급된 것이 있으면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 저 역시 배우는 입장에 있으니까요.

1. 가족간의 역할 제정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 곧바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그에게 온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여성들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남자의 부양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도 에베소에 있는 기독 여성들에게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3)라고 하면서 이 점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사랑으로 훈계할 권한을 주셨고 또한 자녀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지워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십계명의 제5계명이 부모들에게 자녀들의 개성을 말살할 정도로 통제하고 훈계하는 권리를 준 것은 아닙니다.

2. 가족간의 역할 제정에 대한 심리적인 이유
 
 하나님이 제정하신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도리에는 심리적인 법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사람들의 심리적인 면과 어우러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신학적인 면과 심리적인 법칙이 조화되지 못한다면, 사람은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언급한 가족 관계는 우리들의 유익을 위한 조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안정과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하나님을 나약한 분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 주신 가족의 역할 분담을 무시해 버린다면, 참된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혼란과 파탄만을 가져오게 됩니다.

성도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독특한 계획
 
 하나님이 성도 가정의 구성원들에게 각자가 담당할 특별한 역할을 정해 놓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그의 종 바울을 통하여 재차 강조하시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이 하라"(엡 5:22)고 합니까?
 
 첫째, 아내가 자시 남편을 주장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해 놓으신 규범이기 때문입이다. 그런데 그 당시 이방 세계에서는 그 반대되는 경향이 다분히 있었고, 특히 에베소 지방에서는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둘째, 아내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습성이 되었습니다. 사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그 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셋째,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고 대항하면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아내는 심리적으로 불행과 불안을 점점 더 심하게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남편에게 순종하면 스스로 내조자로서의 기쁨을 느낄 뿐 아니라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넷째,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는 온 가족의 행복을 창출하는 성량제가 되며, 나아가 믿지 않는 가정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성은 주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하신 가장 큰 사명인 복음 증거 사역을 훌륭히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바울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가정에서 남자가 지도자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해 놓으신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성을 노예처럼 생각하는 문화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성을 전시하던 당시 사회 관습속에서 성도된 남편들은 더더욱 아내를 사랑할 굿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부부의 관계가 원만해질 뿐만 아니라 가정 전체가 행복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편이 아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온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조화를 이루게 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까운 이웃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자녀들을 향해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엡 6:1,2)고 권고합니까?
 
 첫째,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모에게 온전히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어린 자녀에게 있어 하기 힘든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순종과 섬김의 도가 뿌리에 흔들리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인 사회에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셋째, 순종과 공격이 자녀들과 부모들의 삶에 조화와 행복을 창조해 주는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에게 본이 되어 간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합니까?
 
 첫째, 아버지가 자녀 양육의 궁극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버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자녀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양육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당시에도 아버지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의 뒷전에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로 남자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가지며 활동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기 때문에 자녀 교육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셋째, 한 가정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제정해 놓으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가족 모두가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이 정말 가정을 돌보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 실제로 불신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산 증인으로서
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이어 주는 가교(架橋)
 
 모든 지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모든 가정은 '작은 교회'이므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에 대한 목적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언급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제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공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이것이 각 지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기독교 각 가정이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역시 이 계획의 일환(一環)입니다. 사실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문화에서나 가정은 사랑을 대변하는 기관이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안식처가 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성도 가정은 복음을 전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기관이요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증거하기 위해 믿음의 가정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강조한 첫 번째 내용을 통해 살펴봅시다. 한 가정이 지역 사회에서 산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아내는 주께 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주 안에서 순종하고, 아버지는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고 주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양육하면 됩니다. 이런 가정이 되면 가족 모두가 하나 되는 일체감을 맛보며 나아가 이웃에게 사랑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과제
 
 다음 내용 중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해 서술한 항목을 골라 기도 제목으로 삼으십시오.
 
 * 나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귀하게 여기고 특히 남편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나는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하며,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나는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귀하게 여기고 특히 아내를 대하는 태도와 행동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아내를 사랑하며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면모가 드러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 나는 자녀로서의 역할을 귀하게 여기고 특히 부모님을 대할 때 잘못된 태도와 행동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귀하게 여기고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을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양육하고 교훈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의 과제
 
 다음의 약속을 지치기 위해 우리 가정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한 번 상의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이 지역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에게 맡겨 주신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하겠습니다."

제3장
기독교 가정의 아내와 복종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 골 3:18)고 한 바울이 권면은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내용에서 가장 심하게 논란이 되는 것들 둥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지난 70년대에 특히 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므로 바울의 이 말을 광적이거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일축해 버립니다. 곧 그것은 한 개인의 편협한 의견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또 일부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면서 바울을 사회성이 전혀 없고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자기 중심적인 인물로 속단하거나 이보다 더 심하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최근의 '여성 해방론자'들도 과격한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을 믿는다고 하는 일부 기독 신자들까지도 바울의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도 하나님이 남편들에게 이러한 권위를 주신 적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이 잘 사용하는 용어는 '인류 평등'입니다. 이들은 갈 3:28에 기록된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바울의 말에 의지해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며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성경적으로 입증하려고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바울이 당시의 종교적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바울이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셈이 되고 맙니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성경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 점에서 실수를 범했다면 다른 많은 말씀, 예를 들어 기독교의 대 진리 '이신 득의(以信得義)'에 관한 그의 생각에 실수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성도들은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바울의 말이 절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즉 그의 말에 신약 당시 교회의 문화적인 배경이 포함되어 있는 정도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이들은 바울의 말이 현 20세기에 있어서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역사상 어느 특정한 시기와 교회의 특정한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당시의 문화 상황에 국한되는 내용이 실제로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시 신자들에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고 권면했는데(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살전 5:26; 벧전 5:14), 이 말의 중점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서로 사랑으로 인사해야 한다는 점이지만, 그 인사의 형식이나 방법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에서는 일반적인 인사 방법이었고 또 오늘날도 어떤 문화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간에 그렇게 인사하지만, 우리 문화에서는 그 방법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엡 5:22와 골 3:18에 나오는 복종에 관한 바울의 명령도 이 범주에 들어갈까요? 과연 복종에 관한 성경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복종할 것을 권면한 바울이나 다른 성경 저자의 복종 명령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이 요구하는 대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성구 몇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주관적인 해석, 즉 성경을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하라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타락 이전과 이후의 남녀 관계
 
 복종이라는 개념은 바울 혼자서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바울의 말에 대한 성경적인 권위는 하나님의 창조 가사에 깊이 뿌리 박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창조하셨습니다.
독처하는 것이 그리고는 "사람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말씀대로 시행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1,22).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예배 문제에 대한 토의를 하면서 창조와 관련된 위의 성경 구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 11:8,9).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창조 순서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 타락 전에 하나님의 계획에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고 말하면서 이 진리를 더욱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독특한 형상을 남자에게 먼저 적용한 것은 창조 때부터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여자 또한 남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물론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와도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 지음받았습니다.
 
 베드로도 이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그는 먼저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벧전 3:1).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같은 장 뒷 부분에서 베드로는 구약시대 여성의 예를 들면서 남편된 자들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설명합니다.
 
 "전에...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 3:5,6).
 
 따라서 신.구약에서 동시에 복종과 하나님의 질서를 설명하는 말씀들을 단순히 문화 차이의 문제로 해석하는 일은 그리 타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남자가 창조 때부터 가정을 다스리는 권위(authority)를 가진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처음부터의 계획입니다. 태초부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여자와 남자의 관계는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하여 먼저 화와가, 그 후에 아담이 불순종하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범죄한 결과 이들에게 미칠 죄의 영향에 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신 말씀입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그러므로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여자로서의 위치는 타락 이전부터 있었지만 죄의 결과 타락함으로 인해서 좀 더 분명해진 셈입니다. 이렇듯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이후, 남녀간의 모든 문제는 다시 조정되었습니다. 남자는 죄를 범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남용하고 오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에서의 여성의 복종
 
 성경에서 무엇이 문화적인 문제이고 무엇이 초자연적인 문제인지, 다시 말해 무엇이 상대적인 내용이며 무엇이 절대적인 내용인지를 해석할 때, 중요한 점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복종의 개념이 문화적인 면에서 문제시될 수 없다는 두 번째 증거는, 바울이 이 개념을 교회 내의 남녀 관계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교회와 가정의 특수한 관계를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복종의 원리에 어긋나는 여러 가지 대외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조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말한 내용과 동일한 점을 강조합니다.
 
 "여자는 이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11,12).
 
 이 본문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창조 순서를 언급합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3). 또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순서도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물론 아담도 죄를 지었지만 먼저 죄를 지은 것은 하와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남녀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이나 교회 어디에서든지 남자는 우선적인 책임과 권위를 가지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종'의 의미
 
 '여자의 복종'이라는 개념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이 해석들 대부분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알려면, 역으로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살펴보면 됩니다.
 
 1. 성경에서 여자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내들을 향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는 구절(엡 5:22) 바로 앞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복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여기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뿐 아니라 아내에 대한 남편의 복종도 포함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을 결혼 관계로까지 확대시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
 
 2. 성경은 교회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여자들이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보면, 우리는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몸과 그 몸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위해 협력하여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이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 즉 남자와 여자 모두가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전 14:34)는 바울의 말과 상충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서로 어긋나게 보이는 '가르침'과 '잠잠함' 두 가지를 기능으로 생각하면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능은 여러 가지 양식과 표현의 형태를 가질 수도 있고 심지어 '비표현'의 형태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 기능을 말할 때 그 양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양식이 없이는 기능도 있을 수 없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경은 에베소나 골로새 교회에서 여자들이 사용한 양식들을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당시에는 그 기능에 따른 양식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십시오.
 
 초대 교회에서 특히 고린도 교회의 일부 여자들은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담당하면서부터 자기들이 남자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고 하여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특별한 역할이 복종이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사실 이런 지도 체제는 많은 혼란과 무질서를 유발시켰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임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그들의 행동을 오해하며 의아해 하지 않겠느냐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고전 14:23).
 
 바울이 고린도와 에배소 교회 내에서 일어난 이 문제를 다룰 때, 그 곳의 성도들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용히'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논리상의 문제를 일으키지만, 당시의 그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남자 위에서 권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한 바울의 명령에 의하면, 사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든 여성도들이 복종의 원리를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남자가 머리 됨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아내에게 복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여느 타종교나 사회 단체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여자들의 지위를 높여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남녀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칩니다. 잘못 해석하면 남성 우월주의자로 취급받기 쉬웠던 바울조차도 이 점을 아주 확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천국에서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막 12:25). 천국에는 성별(性別)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영화된 것처럼 보시기 때문에(롬 8:30), 영적인 면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고 분명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반면에 성경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가 아직 영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아직도 우리는 죄로 오염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남녀간의 분명한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조건이나 생식기 혹은 외관의 차이 그 이상의 문제를 말합니다.
 
 사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영적으로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동시에, 믿는 여자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벧전 3:7)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구절에서 남자들에게 "저는 더 약한 그릇이요......귀히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일부 여자들은 아 말을 들을 때 반발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조 때부터 여자는 남자만큼 강하지를 못했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여자의 뼈대는 나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여자들이 아주 힘든 일도 충분하게 감당해 낼 만한 능력을 갖추어 이미 여러 분야에 진출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적인 면에서도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들의 대부분이 남자들과 맞붙어서 프로 미식 축구를 할 만큼 강하지는 못합니다. 여자들에게는 신체 구조상, 바꿔 말해 하나님의 계획상 뛰어 넘을 수 없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남편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3. 성경은 큰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여자에게는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역사를 훑어보거나 현재 우리 사회를 보아도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는 위대한 여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 또한 남자들의 업적 못지 않습니다. 미술이나 음악, 과학, 정치, 언론 분야에 있어서도 대가들 가운데 여자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바울도 신약시대 당시에 남자 못지 않은 사역을 감당한 몇몇 여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도왔는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빌 4:2,3). 그리고 남편 아굴라와 더불어 복음 전파를 위해 봉사한 브리스킬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롬 16:3,4; 고전 16:19).
 
 그러나 여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남편을 잘 내조하는 일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위대한 남성 뒤에는 항상 위대한 여성이 있다'는 말은 상투적인 문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저의 업적을 위대하다고 평가하기에는 성급하지만 제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도 제가 이룩한 일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제 아내의 공으로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낙담해 있을 때 용기를 주고,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쓰러졌을 때에도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던 사람은 오직 아내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여자로 하여금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가장 기본적인 목적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의 종이나 노예로 피조되었다고 말하지 많습니다. 여자는 돕는 자,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남자의 다른 한쪽으로서 돕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는 남자의 보완자(補完者)로 피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가정 생활에 있어서 남자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 독특한 균형을 고린도전서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전 11:9)고 명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주안에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4. 성경은 여자가 자기 의견이나 감정을 표현하면 절대 안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내가 자기 감정, 예컨대 속상한 것이나 걱정 등을 표현하지 못하게 억압하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것은 '성경'의 권위로 아내를 눌러 버리려고 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남편의 이런 행위는 아내의 영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며 여자의 가치를 격하시킵니다. 이것은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존중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업을 상속할 자'(벧전 3:7)로 알라고 한 베드로의 권면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롬 12:10),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서로 위로하라"(갈 4:18)고 하는 명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 같이 돌아보아야"(고전 12:25)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만일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전 12:26)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아내를 잘 보살펴 주지 않는 남편, 아내의 불평을 잘 들어 주지 않는 남편, 아내의 심리적.신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남편은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여성의 복종을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자아(自我)와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성경은 여자가 사회 활동을 하며 전문적인 경력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여자가 있을 곳은 가정뿐'이라는 매우 편협된 견해를 피력합니다. 맞습니다. 성경도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결혼한 여자에게 있어서 가정은 가장 중요한 곳이며, 또한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면서 뒷바라지하는 일은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하고서 말입니다. 만약 전문적인 경력을 쌓거나 물질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이 의무를 팽개친다면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딛 2:4,5).
 
 그러나 결혼은 여자를 가정 주부로만 붙들어 두려는 것 역시 성경의 원리에 위배됩니다. 여자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주부로서의 모든 임무를 다 감당하면서 동시에 사회에서의 다른 일도 훌륭히 수행해 낼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31장에 나오는 '지혜로운 아내'를 한 번 살펴봅시다. 이 여인이 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는 "밭을 간품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간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는"(잠 31:16-20) 일이 있습니다.
 
 6. 성경은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자기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받는 신체적, 심리적 학대에까지 복종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불행하게도 남편의 자기 중심적이고 악한 행실로 인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복종하려고 애를 써도 남편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녀는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아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성숙한 성도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교회의 장로님이나 목사님과 상담을 하고 조언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혼자서 짊어지고 가기에는 그 짐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마 18:15-17; 약 5:13-16).
 
 그렇지만 경고해 둘 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단 한 번도 순종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을 단순히 인정받지 못하는 순교자처럼 생각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복종이 무엇인지를 정의합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이 좋은 형제, 자매들은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직시할 수 있게 되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앞의 상황으로 돌아갑시다. 만약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자기 힘에 벅찬 신체적, 심리적 학대를 받아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처지라면 시급히 거기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에 앞서 아내는 언제나 남편의 태도와 행동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살펴본 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성경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여자들은 누구나 먼저 우주를 지으신 그 하나님이 남자를 위해 특별히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자'로 창조되었습니다. 남자의 인성을 보완하기 위해 여자는 매우 독특하게 설계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여자는 남자에게 없는 능력을 부여받은 셈입니다. 타락 이전에는 머리로서의 남자와 그 돕는 배필로서의 여자의 위치가 재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이 모든 관계를 왜곡시켰고 결과적으로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머리 됨과 여자의 복종은 타락으로 인해 재삼 강조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이 모든 문제들은 회복되었습니다. 믿는 남편과 아내는 일체감과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체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며 그 의미성도 강해지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완전하게 동등한 관계입니다. 다만 기능적으로 남자가 머리이고 여자는 그 권위에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회심했다 해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역할을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잘 수행한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아내 혼자만의 복종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내 사랑이 과연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20세기의 딜레마
 
 오늘날 일부 여자들이 '여성 해방'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자기의 고유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생활의 모든 면에서 남녀 평등을 부르짖고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근본적인 뿌리인 죄로 소급해갑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이는 우리 개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 무엇이 많은 여자들로 자기 역할에만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유사 이래로 믿지 않는 자들의 생활을 보면 남자는 여자를 자기 목적을 위해 마음대로 이용해 왔습니다. 현시대에도 일부 남자들은 여자들을 한낱 장난감, 노리개, 자기 쾌락을 위한 도구로 밖에 취급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는 여자라면 이러한 남자들의 태도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하게 여자가 물질적이고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팔든지 간에 관능적인 광고를 필요로 하고 그 모델로서는 자연스럽게 여자가 지목됩니다. 현대의 지각있는 여자들이 남자들의 이런 이기적인 놀음에 반발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여자는 이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이기심에 대항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다소 열등한 인간, 특정한 역할에는 한참 모자라는 인간으로 취급받아 왔습니다. 게다가 여자가 남자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려고 할 때 남자는 여자의 고유 역할을 들추어 내면서 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자가 이러한 남자의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간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자들은 어디를 향하여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습니까? 이들이 하는 행동에 대한 권위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는 안목을 지닌 여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것을 거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여자들은 과거에 남자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이 죄성에 의해 충동을 받아 하나님의 원리와 상관없는 해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나친 행동이 쉽게 나오게 되며 너무 성급하게 결단하고 움직임으로 인해 이 세상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고대하는 해결점을 결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심지어 믿음을 가진 여자도 믿음을 가진 남자들로 인하여 낙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죄성(罪性)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믿음을 가진 남자들 가운데에도 믿지 않는 남자와 똑같이 자기의 독선적인 이익을 추구하는데 성경을 오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자라면 '이럴 수도 있겠다'라는 예상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믿는 남자일 경우에는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난을 받아 마땅한 여자들도 일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거부합니다. 타인에게 복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분의 은혜와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셋째, 여자가 자기 역할에만 적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을 하나 더 지적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적 배경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현 사회에서 여자는 대개 가사보다는 전문 직종을 위한 교육을 주로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여자들이 하는 역할은 하나님이 처음에 의도하신 바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여자를 억누르면서 '네 자리나 지키라'는 식으로 대한다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뿐입니다.
 
 여자도 스스로가 자신의 내부에 가사보다는 전문 직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린 갓입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이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고 기독교적인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과제
 
 1. 남편 혹은 아내로서 잠시 자신의 태도를 평가해 봅시다. 어떻습니까? 자신의 생활이 성경의 원리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내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까? 자신의 배우자에게 지나치게 잘못 행동하는 면은 없습니까? 또 남편으로서 아내의 심적인 갈등을 잘 이해합니까? 아내가 자신에게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행동합니까?
 
 2.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체제에 젖어버렸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현재 우리의 태도 가운데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 면은 어떤 것입니까? 참된 성경의 가르침에 의지해 이 세상의 부정에 맞서고 있습니까? 결혼 생활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의 과제
 
 가족들과 함께, 아니면 소그룹으로 모여 이 과의 내용을 토의해 보십시오. 이제는 우리 자녀들에게 결혼의 원리를 심어줄 시기입니다. 만약 세상의 가치 세계와 맞서는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4장
기독교 가정의 남편과 머리 됨
 
 성경에서 여자와 남자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는 '복종'입니다. 만약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이고 또 그 말씀이 정확하다면(나는 분명 이렇게 믿습니다), 이 '복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계획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개념을 두고 지금까지 신자, 불신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너무나 큰 오해를 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여자에게만 국한해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복종의 의미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태도에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로서 누구나 다 서로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 '복종'이 여자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될 때 '무조건적인 복종'이란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종에 대한 이런 해석은 성경에 위배됩니다.
 
 한편 문화를 구실로, 또 그 문화가 일부 성경 저자들(특히 사도 바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복종'과 '머리 됨'이라는 두 개념을 동시에 없애버리려는 자세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사실 성경을 올바로 주해하려면 당시의 문화적인 상황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혼 관계에서 '머리 됨'의 개념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성경을 오늘날의 사회 여건에 맞추어 자신에게 편리하게 해석하려는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입니다. 특히 여성 해방 운동가들이 그렇습니다. 또한 그들이 머리 됨의 개념을 무시한다는 것은 믿는 다고 하는 일부 신자들의 극단적이며 편협적인 견해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의 사상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상대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조차 성경의 가르침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남녀 평등이라는 실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머리 됨' 사상을 송두리째 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 주신 본은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줌으로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장 큰 분이면서도 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요 13:12-17).
 
 성경에 나타나는 부부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앞장에서부터 성경이 가르치는 복종의 개념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 됨'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종'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혼은 한 사람의 의사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아내의 남편에 대한 관계를 바로 정의하려면, 역으로 남편의 아내에 대한 관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머리 됨에 대한 오해
 
 성경은 결혼 생활에서 남편이 머리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여자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2, 23).
 
 그렇다면 '머리 됨'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전에 반대로 성격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첫째, '머리 됨'은 결코 '독재'가 아닙니다. 남편들 가운데, 아니 믿는 남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남자들이 머리 됨의 권위를 결혼 생활에서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강압적인 군대의 상관처럼 자기 가정을 마구 뒤흔듭니다. 늘 명령조로 말하며 자신의 눈짓 하나에도 즉시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혹시라도 반대할 기미가 보이면 미리 억압해 버립니다. 이런 행위는 결코 '머리 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어린애 같은 응석에 가까우며 이기주의적인 사고 방식에 의한 행동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둘째, '머리 됨'의 위치가 자동적인 존경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남편들에게 가정에서 머리의 위치를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아내나 자녀들이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마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떤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한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벧전 3:7) 그 아내는 심리적으로 심한 고층을 겪을 것입니다. 존경은 존경을 낳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남편에게 주신 권위를 남편 스스로가 노력해서 차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서 존경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남편에게 맡기신 이 귀한 자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머리 됨'이라는 말 자체는 모든 결정권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남편만이 유일한 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곳은 성경에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머리 됨의 개념에 권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아내는 가정의 중대사에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다거나, 혹은 결정의 과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로 쓰인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의 실제적인 의미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머리 됨에 대한 성경의 의미가 무엇이냐'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머리 됨'도 성경의 본문과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그 본래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머리 됨'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바울은 다음의 구절에서 이 사실을 자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3). 그리고 다시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하라"(엡 5:25)고 힘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됨에 대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남편의 '머리 됨'에 관하여 설명한 후 이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되신 것같이 남편도 아내와의 관계에서 머리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남편도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심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1. 비유의 한계성
 
 일반적으로 '비유'눈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사용했던 것과 같이 의사 전달의 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사상이나 개념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의 초점은 결혼 생활에 있어 남편이 가정에서 머리가 되는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합니다.
 
 사전에서는 '비유'를 일반적으로 '부분적인 유사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비유는 설명하고 있는 사상의 모든 면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비유로 어떤 사물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원래의 개념과 동떨어진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이 든 비유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과 그 분의 무한한 사랑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한계성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위를 묘사하는 이 문맥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라고 언급합니다.
 
 물론 바울의 비유가 남편들에게 "당신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들이 권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권위를 해석하고 정의할 때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 완벽하셨습니다. 그 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셨지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인성의 연약함 때문에 손상되지는 않았습니다. 여느 사람과 같이 시기하고, 자만하며, 화를 내는 등 자유 자재로 행동하도록 사단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이런 감정들이 자신의 생활 속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허용조차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들의 특징은 불의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 분은 진실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비유도 다른 모든 비유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더구나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2. 비유의 진정한 의미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의 역할을 다 감당해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분을 조금씩 닮아 가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고후 3:1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표본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자녀들 곧 성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靈)이 우리의 능력과 위로와 자신감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지만 그 분을 닮는 일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만약 그가 이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활을 본받은 것같이 그들도 바울 자신의 생활을 본받으라고 권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11:1). 또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엡 5:2)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에베소 교회에 있는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남편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아내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비유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최대한의 노력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아내를 어렵고 힘들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함으로써 극복하여 일보 전진함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자세와 행동
 
 믿는 남편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또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려면 남편은 어떠한 자세와 행동을 취해야 합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안을 간단하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정과 교회의 유사점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모든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떠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3,4).
 
 그리고는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에베소서 5장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비유,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유를 여기서도 사용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는 에베소서에서만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1. 이타적인 자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5,6).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왕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직접 죄를 지으신 것은 아니지만 성육신(成肉身)을 통해 우리의 타락한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러한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이타적(利他的)인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2. 겸손의 자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스스로 '자신을 비우셨습니다'(빌 2:6,7). 또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인데도 하늘의 영광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언제까지나 동일하신 하나님이면서도 그 분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빌 2:7). 이는 곧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다'(빌 2:8)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겸손인 것입니다.
 
 3. 희생의 자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사람의 죄가 죽음의 형벌을 요구하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의 극형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도, 그 분은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비유(比類)에서 실천으로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의 비유는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는 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이타적인 자세
 
 믿는 남편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구실삼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남편된 자는 어떤 일에 대해 혼자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결단이나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이런 결정은 아내와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야기했듯이,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합니다(골 3:19). 또한 자녀들을 낙담시켜서도 안됩니다.(골 3:21). 남편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가족을 돌보며 아내의 개인적인 성장을 도와주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목표는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엡 5:26,27)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2. 겸손의 자세
 
 남편은 머리의 지위, 곧 가정에서의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음과 동시에 자신이 종이란 사실도 명심해야 합니다. 절대로 아내 위에 군림하려 들거나 남편이라는 점을 비장의 무기, 또는 자기 변호의 방패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심적인 고통, 걱정거리와 스트레스 등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와 자신을 하나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남편들에게 있어서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베드로의 명령은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여기서 베드로가 의도하는 바는 남편된 자들은 아내의 연약함을 채워 주며 아내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이 열심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못박아 이야기합니다.
 
 흔히 여자들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바울의 가르침은 남자들에게 권력을 편중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실 믿는 남자들 가운데도 죄로 인해서 마음이 완악해진 사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나는 너희들의 기도는 안 듣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권위를 마구 남용한 남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엄격한 제재입니다.
 
 3. 희생의 자세
 
 이것은 바울이 했던 비유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희생 문제만 나오면 아주 피상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지 않으면 누구나 이렇게 되고 맙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아내의 유익을 위한 것 같은데,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내면에는 남편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바울은 이것을 신자나 비신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속성인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로 간주하는 듯합니다. 바울은 남편의 자기 중심적인 심성을 다시 한 번 지적하며 희생을 촉구합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28-30).

나의 과제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다음 세 가지 기본적인 자세를 천명합니다.
 
 (1) 이타성
 
 (2) 겸손
 
 (3) 희생
 
 이 세 가지 자질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한 번 재평가해 봅시다. '그리스도가 사랑하셨듯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다음 항에서 당신의 삶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난에 표시해 보십시오.
 
 주의 사항: 만약 믿는 남편이라면 아내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1. 이타적인 면
* 철저하게 이타적임                                         ( )
* 이기적인 면보다는 이타적인 면이 많음                      ( )
* 이타적인 면보다는 이기적인 면이 많음                      ( )
* 철저하게 이기적임                                         ( )
 
 2. 겸손
* 철저하게 겸손하고 온유함                                  ( )
* 교만한 면보다는 겸손한 면이 많음                          ( )
* 겸손한 면보다는 교만한 면이 많음                          ( )
* 철저하게 교만하고 자만심이 많음                           ( )
 
 3. 희생
* 철저하게 희생적임                                         ( )
*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면보다는 희생적인 면이 많음      ( )
* 희생적인 면보다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많음      ( )
*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임                         ( )

우리 가정의 과제
 
 가정의 온 식구(혹은 그들의 멤버)들이 이 과의 내용을 복습한 후 각자 위에서 제시한 문제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 다음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주의 사항: 특히 남편과 아내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해서 서로가 상대방에 관해 어떻게 느끼는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나누어 지고 있는지 평가해 보십시오.
 
 경고: 두렵지만 실제 모습에 지견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제5장
기독교 가정의 자녀와 순종
 
 오늘날에도 그렇거니와 과거에도 '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부터 순종은 늘 문제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불순종의 잠재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범죄한 것은 분명 하와였지만 아담도 바로 그 뒤를 따라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불순종은 죄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말았습니다. 이 불순종의 행위는 그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해 우리의 가족 관계는 상당히 불편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의 결혼 방식에 있어서는 복종이니 사랑이니 하는 개념들이 아예 인식되기조차도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남자나 여자의 마음 속에는 이기심과 오만, 자기 중심적인 생각들만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믿는 남편과 아내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 4:17)고 권면합니다. 아내된 자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엡 5:22). 또 남편된 자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하라"(엡 5:25)고 권합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영향을 입은 것은 결혼 관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서 파생되는 다른 관계, 다시 말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말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사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 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롬 1:29,30).
 
 또 그는 특별히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끼친 죄와 영향력을 지적합니다. 먼저 자녀에 관해서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30,31)고 하면서 자녀들의 악을 드러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많은 이방 가정들은 신앙을 가지지 않았던 때에는 위에서 바울이 열거하고 있는 이런 악을 마구 행했었습니다. 에베소와 골로새 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엡 4:17-24; 골 3:5-11). 그래서 바울은 이전의 습성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살아가는 그들을 향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어야 하는 새로운 관계만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녀에게도 그가 부모에 대해서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와 행동을 가르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그렇다면 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에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살펴보기 전에 본문의 '자녀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용어가 미성년 자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주목하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십대 후반이상, 다시 말해서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든 성숙한 자녀를 향하여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서신에 나오는 바울의 말이 자녀 개개인을 향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 내용이 담고 있는 복잡한 명령을 그들이 충분히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점을 가정할 때 바울이 성숙한 자녀들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녀들'이 해당하는 헬라어 '테크논'은 주로 후손들 전체를 가리키는 데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살펴보면, 그 의미에 있어서 나이가 많은 자녀를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몇몇 경우에는 아예 장성하여 어른이 된 자녀를 대상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자녀들'이 미성년 자녀가 아닌, 보다 나이가 든 성숙한 자녀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성숙한 자녀를 가리키는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자신의 미성년 자녀만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미성년 자녀들은 아직 이 말씀으로 훈계를 받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그 결과 자녀의 행동에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자녀가 자라감에 따라 순종은 점점 어려워지기만 합니다(좀 더 자세한 내용은 8장에서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형들이 부모에게, 또 자신의 부모들이 조부모에게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 가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먼저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말대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 하나 자세히 살펴봅시다.

순종의 교리적인 이유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대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바울이 "주 안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엡 6:1)고 말했을 때, 그가 의도했던 의미는 바로 이 경우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주님 때문에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그 뜻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하는 것이니라"(골 3:20).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바울의 말을 부모가 그리스도인일 때, 다시 말해서 부모가 '주 안에 있을 때'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번역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모가 아직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믿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아내들에게 한 말도 있지만(벧전 3:1-6). 만일 이와 같은 생활이라면 바울은 순종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이 편지 앞부분에 이미 상술했던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지위를 가졌으며 이젠 너희 총명이 더 이상 어둡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지 않으므로'(엡 4:18).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예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는 의미입니다. 물론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으로 지적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요약하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지위 때문입니다. 그는 '주 안에' 있습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귀한 피로 산 사람입니다. 부모와 더불어 새로운 가정, 즉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엡 6:1). 그러면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 드는 자녀를 행해 예수 그리스도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아주 멋진 본을 보여 주십니다(눅 2:41-51). 예수님의 가족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유월절에 참예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절기가 끝난 후 예수님의 부모, 즉 요셉과 마리아는 친지 및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다 간 후에야 어린 예수가 그 무리들 가운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예수를 찾아보았지만 정작 그를 발견한 것은 3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 동안 예수는 성전에서 율법 선생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년 예수의 질문과 대답이 너무나 심오해서 모세 율법에 정통한 이 사람들도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물론 예수를 잃어버린 그 상황에서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 마리아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의 그러한 격앙된 꾸중을 한동안 가만히 듣고 있었으며,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도 나사렛으로 돌아가 순종하여 받드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하신 본을 보게 됩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타적이고 겸손하며 자신을 내어 주는 희생의 자세와 행동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구세주가 되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이 되신 사실에서도 이미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에서도 12세 때 이미 모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셨는데도 겸손하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본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조금만 학식이 들어가도 부모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모든 젊은이들이 보고 배워야 할 위대한 모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모의 권위에 절대 순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순종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의 이 논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에 근거한 것입니다.

순종의 개인적인 이유
 
 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에는 아주 개인적이며 실제적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 근거의 하나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예로 듭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시내산에 있을 때 받은 것입니다.(출 20:1-17)"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과, 하나님은 이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몇 가지 '개인적인 유익'을 더해 주신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이 약속은 먼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가나안 땅의 특별한 축복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권위로 이야기를 펼치면서 이 약속을 일반화시켜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녀들을 위한 개인적인 유익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면 이 유익들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는 네가 잘 되고"(엡 6:3)라는 말로 답합니다. 길에서 아무 젊은이나 붙들고 "부모에게 순종하면 너희들의 삶이 언제나 장미원같이 아름답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낱 우스갯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도 지금 기막힌 행복의 비결을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격하는 자녀 대부분이 그 삶에 더 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녀가 순종하면 할수록 더 규제하고 억압하는 부모는 없으며,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경우에 있어서도 자녀가 부모에게 순복하면 오히려 그 부모로부터 더 많은 자유와 신뢰를 얻게 됩니다.
 
 부모님이 여러분을 신뢰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그 분들을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부모님께 여러분이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기쁘게 해드리고 편한 여생을 보내도록 해 드리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시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신의 피와 살인 자녀들과 아귀다툼하며 사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에게도 부모님과 힘 겨루기를 하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이 난제들을 극복하는 열쇠는 순종과 공경뿐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기를 원하십니까?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부모님께도, 자신에게도 좋은 결과가 옵니다.
 
 이 법칙에도 몇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자녀 중에는 정말 자기 중심적이고 부모님의 사랑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완전히 잘못되어 자기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성경도 무조건적인 순종을 굳이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 위에 군림하여 잔인하고 못되게 굴더라도 아내는 그에게 항상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은 명령과 본을 통해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엡 5:29)고 가르칩니다. 이는 복음 전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라고 요구한다면 이 때 그 자녀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을 먼저 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부모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부디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요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지를 꼭 확인하십시오. 우리들에게는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위를, 비록 그것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 합리화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민거리가 있다면, 또 그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면, 부모님께 불순종하기 전에 교회의 목사님이나 다른 성숙한 성도에게 먼저 상의하십시오.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 분들의 조언을 구하십시오. 그 일에 직접 개입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성숙한 장년 그리스도인은 이런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 놀라운 지혜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예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학생이 세례를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부모님이 허락을 하지 않아 나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 학생의 동의를 얻어 이 문제를 상의하려고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날은 학생의 어머니만 집에 계셨는데, 나는 "이 학생은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두 분은 이 학생의 부모님이시니까요."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 그 부모님과 아들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며칠이 지난 다음 그 학생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학생의 어머니도 남편에게 내가 방문한 것과 또 부모의 허락 없이는 세례를 베풀지 않겠다고 한 나의 뜻을 전달하면서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하락해 주도록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그 아버지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아들의 세례를 허락한다고 알려온 것입니다.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신앙의 선배를 찾아가 조언과 도움을 구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순종하는 자녀가 되려고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잘못된 행동을 계속하신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네가...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바울은 젊은이가 부모에게 순종하기만 하면 '장수'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까?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부모님께 불순종하는데도 이 땅에서 장수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 긴 여행을 불행하게 보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는 청년이 부모님과 아무 상의도 없이, 아니면 의논을 하긴 했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그냥 무시하고서 철없고 무책임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합시다. 만약 그녀가 믿지 않는 여자인 경우는 더 큰 문제겠지요.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결국 이혼을 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설사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또는 아직 파탄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또다시 어기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이미 금이 간 결혼 생활이나마 영위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될 것입니다.
 
 요행히도 새롭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는 사람도 있겠으나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도무지 극복하지 못한 채 더욱 잘못된 길로 빠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번 불손종의 결정을 내리면 이것이 두고 두고 옳지 못한 결단과 실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이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뿐만 아니라, 신앙 선배들의 조언과 충고를 무시하면 결국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한 여생을 보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한 결혼 생활이 너무나 비참해서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반면에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고 하신 이 약속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경우에 장수를 보장하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불순종하는 자녀에게는 그의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하여 그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음을 분명히 부여 주십니다. 1세기 당시의 사회에서는 못된 패거리들과 어울려 다니면 죽기 십상이었습니다. 이 점은 오눌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은 교통사고와 약물 남용뿐 아니라 부모님께 불순종한 결과 빚어지는 다른 요인들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매우 죽어갑니다. 어떤 경우에는 착한 아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범죄에 연루되기도 합니다. 감옥에 가보면 실제로 아무 죄를 짓지 않았으며 또 그럴 생각도 없었던 아이들이 너무 억울하게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건이 났을 때 단지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범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예는 자녀가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 데 매우 실제적인 이유를 확충해 줍니다. 부모님께 순복하는 일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진리입니다. 모세 시대에도, 바울 시대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날을 고대하며 믿는 자여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면에 있어서도 본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순종-그리스도인의 의무
 
 바울은 엡 6:1-3에서 특별히 자녀들을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순종'이란 말은 자녀에게 국한되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복종이 여자에게만 국한되 않고, 사랑이 남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복종이나 사랑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순종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태도와 행동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순종을 권면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고용주에게도 순종하십시오. 바울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한 구절에서 종들에게 "종들아 두려워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엡 6:5)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보면, 이것은 고용주를 존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하면서도 자녀 앞에서 자신의 고용주를 욕하고 무시하며 그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모순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고용주가 부당하다고 생각된다면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그 억울함을 표출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할 때도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도저히 그 고용주를 용납하지 못하겠으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다른 직장을 찾는 편이 오히려 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자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1세기의 노예에게는 이런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노동위원회도 물론 없었습니다.
 
 또한 정부의 권위에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권위에 순종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13:1과 디도서에서 이 점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여 순종하며...예배하게 하며"(딛 3:1).
 
 우리 시대에서 이 말은, 비록 법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도로의 교통법규를 지키며, 일단 정지를 충실히 지키는 등 법을 존중하는 것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위반이나 거역이란 말은 감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정당한 방법을 통한 개혁이나 변화는 좋지만 말입니다. 이것도 20세기의 자유 세계에 사는 사람의 축복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법을 우리 손에 넣고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자세는 절대 안됩니다. 예외가 꼭 한 가지 있는데, 이것은 법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라고 명령할 때입니다. 이때는 확실한 선택을 반드시 해야 하지만 반역이나 비기독교적인 방법은 안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자유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선택을 요구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의 지도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결정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 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교회에서 성도를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대한 책임을 감당하듯이 성도를 잘 이끌어 줄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영적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하여 부모들에게 상당히 강력하게 부모로서 행해야 할 덕목을 요구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양떼들의 본이 되고 위탁받은 자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벧전 5:3).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되 서로 사랑하고 복종하며, 존경하고 순종하는 관계입니다.
나의 과제
 
 삶의 영역에서 순종하기가 제일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은 어느 것입니까?
 
 * 부모님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일(주의: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어나 아직 미혼인 상태에서 부모님을 떠나 혼자 생활한다고 해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책임을 면제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부모님이 우리의 생활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실 권리는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 고용주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일
 
 * 정부 지도자들과 법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일
 
 * 영적인 지도자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일
 
 신앙 생활의 약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당장 시도할 일을 하나씩 기록하십시오.

우리 가정의 과제        
 
 시간을 내서 이번과를 복습하십시오. 부모로서 자녀를 권면하여(장성한 자녀라 하더라도) 가정의 법과 규칙에 대한 느낌들을 서로 나누게 하십시오. 그런 후에 자녀에게 그것들이 공평하다고 느끼는지 한 번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자녀가 말하는 내용을 잘 들어 주십시오.

제6장
기독교 가정의 부모와 양육
 
 이젠 다 성장했지만 우리 딸들이 네 살, 다섯 살 때의 일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아주 유치하고 단순한 얘기였지만, 그 뜻은 매우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불현듯 생각났는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아니?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시래!"
 
 그 애들은 아무 의미도 모른 채 말했겠지만 옆방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마음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때 나는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 딸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나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육신의 아버지인 나는 잘났든지 못났든지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애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내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설명해 주는 내용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통해 배워 나갔던 것입니다. 자기들이나 어머니 또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행동 등에서 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자녀 양육에 관한 문제를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골 3:21).
 
 이 구절을 보면, 바울이 아버지들에게만 권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성경 본문과 당시의 문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부모 모두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버지들을 지적했다는 면을 중점으로 보면 교육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흐름도 자녀 양육의 무거운 짐을 근본적으로는 아버지에게 모두 지우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분명히 부모 모두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창 1:27). 그러나 가정에서 가지는 남자의 권위와 지위는 우주 내에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하게 간주되었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성(母性)'이 더욱 두드러져 이 사실이 처음 크게 왜곡되어 전해졌다 하더라도 그 곳도 맨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대부분 여성적이기보다는 남성적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사실은 하나님이 남성적인 성품을 가지셨다는 견해를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자녀 양육을 거론할 때 아버지들을 지목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버지들, 혹은 부모들에게 편지하면서 먼저는 해서는 안되는 일에 대해서, 그 다음에는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차분히 이야기해 나갑니다. 이 두 가지 내용, 곧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에는 아주 포괄적인 교육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아비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당시에 이방인 아버지들은 대부분 자기 자녀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에 대해 그리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이 과거에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상기시켜 줍니다. 예전에 그들은 '감각 없는 자'였습니다(엡 4:19). 말을 함부로 했으며, 때로는 '악독과 노와 분'을 그대로 쏟아 놓기도 했습니다(엡 4:29,30; 골 3:8).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젠 더 이상 이방인들이 하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로 말입니다.
 
 오늘날 믿는 부모들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나 행동들로 인해 자녀들이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이 노여워하거나 괴로워하고 심지어는 낙심하게까지 된다는 점을 또한 예상해 보셨습니까? 이제 부모로서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바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신체적으로 학대함.
 
 믿는 가정을 포함한 그 어떤 가정에서도 야만적인 징벌은 재고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물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회초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자녀의 잘못에 대하여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더라도 반드시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믿는 부모라고 하면서도 어린 자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러 상처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고생하게끔 만들어 놓은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것은 분명 잘못된 행위이고 또한 죄입니다. 바울의 경고는 이런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유는 부모들이 자기의 복받치는 감정을 자녀들에게 그대로 쏟아 붓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분노와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 대한 증오는 분명히 별개인데도 불구하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식으로 흥분된 감정을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징계는 이미 사랑의 벌이 아닙니다. 또한 자녀에게 그런 징계를 하는 부모는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2. 심리적으로 학대함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야만스럽게 매질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이들은 말로써 그와 똑같은 일을 저지르곤 합니다. 어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인격적으로 짓밟힐 때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심한 불안을 느낍니다. 이런 심리적인 학대는 아이들에게 신체적인 학대보다도 훨씬 심한 증오와 고통, 좌절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또 정신적인 영향은 육체적인 영향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지속적입니다.
 
 3. 자녀에게 무관심함
 
 이것은 특히 바쁘신 부모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은 사업이나 사회 활동 혹은 교회 생활로 너무나 바빠서 자녀들을 위해 할애할 시간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러한 무관심도 자녀들에게 일종의 분노와 고통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이런 면에서 더 어려움을 겪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고 너무 분주하여 자기 아이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와 목회자의 자녀들은 부모에게 소외당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에 대해 분노와 적대감을 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감정들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까지 확대되기도 합니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시당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님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따라서 자기들로부터 부모를 빼앗아 간 그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향입니다. 이런 경우 심리적인 문제는 영적인 것으로까지 비화되기 십상입니다.
 
 4.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함
 
 어른들은 자녀의 입장을 전혀 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무슨 일을 결정하거나 상황을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이럴 때 아이들은 자신이 부모들로부터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 분노합니다. 이것은 우리 어른들이 오해를 받을 때 화가 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을 이해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대부분 그 나이 또래에 어른들이 겪었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기본적인 필요는 같지만 그것을 채우는 방법이 문화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어른들의 세계, 부모들의 필요에 너무 집착하느라고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의 관심이 무엇인지, 또한 그들의 진정한 문제거리가 뭔지 조차 모를 정도가 되면 정말 곤란합니다. 만약 부모들이 그들을 잘 모르고 또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녀들의 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자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함.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게 높은 기대를 하여 아이의 기를 꺾어 놓기 일쑤입니다. 이것도 자녀를 분노와 좌절에 이르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사람이 됩시다. 자녀들의 능력과 성취도는 나이에 따라 다르고 개인차도 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이들에게 동일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부모가 어렸을 때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자녀를 통해서 대리 충족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자녀의 자아 형성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6. 자녀들을 실적으로 평가함
 
 이것은 많은 아이들이 가장 크게 좌절하는 요인입니다. 자녀가 자신의 기대치에 도달하면 귀여워해 주고 응석을 받아 주면서, 만일 그렇지 못하면 벌을 심하게 주고 박대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니는 마음속에 적의를 품게 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도 자기 부모와 같이 자신을 대한다고 단정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 자녀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착하게 굴면 나를 받아 주며 은혜를 베풀고, 내가 악하게 행동하면 배척하고 벌 줄거야."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변덕이 죽 끓듯하는 부모의 모습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죄악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제재를 가하실 뿐 절대로 실력이 없다하여 우리를 박대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인정하기만 한다면 항상 우리를 받아 주시는 분입니다.
 
 7. 자녀들에게 자신의 목표와 생각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함.
 
 부모이기 때문에 자기 자녀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들에게 그 점을 주지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청소년기에 접어 들었거나 이 시기를 거친 자녀들이라면 직업이나 사회 관계, 심지어 신앙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결정을 내리길 원합니다. 이런 일들을 부모가 자기 식대로 강요하면 오히려 부정적으로 반발만 일으킬 뿐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만약 부모가 본을 보였고, 진리를 가르쳤으며,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절대로 부모에게서 받은 인상을 떨쳐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의심하고 회의를 품는 시기가 왔다 하더라도 부모의 견해와 삶의 방식 및 믿음을 그대로 수용하게 될 것입니다. 단 이것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먼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다음에 차분히 가르치십시오. 자녀들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갈등 그리고 두려운 문제들을 상의해 올 때 무척 기뻐하는 표현을 하십시오. 그들이 부모에게 자기 문제를 들고 오는 것은 부모와 함께 상의하면 마음에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경우 당황하여 많은 것을 가르친답시고 장황하게 설명하다가 그 분위기를 망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8. 부모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음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때 가장 하기 어려워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녀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얘야 미안하구나"라고 말하는 것, 그게 그토록 힘듭니다. 부모가 실수할 때, 자녀들도 대개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권위를 무조건 세우는 부모가 아닌 자신의 실수도 인정하는 진실된 부모로서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위대한 진리를 몸소 본으로 가르치는 격이 되어 말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교육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게 되고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에 크나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주 안에서 양육하라
 
 바울은 부모가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나서 이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교훈합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곧 부모가 스스로 본이 되는 일과 바른 교훈을 가르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1. 직접 본을 보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보다 부모가 직접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부모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고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를 닮아갑니다. 특히 청소년기로 들어서는 아이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려 하고, 목소리도 그대로 흉내내려고 합니다. 만약 부모가 큰 소리로 거칠게 말하거나 고함을 지르면, 아이들도 그와 같이 따라 하게 됩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들의 요구에 민감하고 그들을 대할 때 진실하며 이해심을 많이 보이면, 그들도 그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그 분이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좋은 본을 보이면 됩니다.
 
 2. 바른 교훈을 가르침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행한 자신의 사역을 설명합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1,12).
 
 여기에서 바울은 먼저 아버지가 자녀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아버지는 각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 부며 그들의 개인적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는 가정을 돌볼 뿐만 아니라 그 구성원인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의껏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표현했습니다.
 
 첫째, 부모는 자녀들을 꾸준히 '권면'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로 그들을 격려하고, 부모가 그들의 관심사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자녀들이 잘 성장하면 부모가 얼마만큼 자랑스러워하는지, 심지어는 그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부모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주목을 끌려면 당연히 문제를 일으켜야겠지요. 심한 경우에는 관심을 받기 위해서 아픈 매질도 감수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부모가 자녀의 심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우리는 자녀들을 잘 이해하고 꾸준히 사랑으로 권면합시다.
 
 둘째,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었을 때 '위로'해 주는 일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아픔과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자녀들이 짜증이 나거나 상처 입은 마음으로 집에 돌아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부모로부터 듣는 첫 마디는 무엇입니까? "너 그러면 안돼!"라는 식의 꾸중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얘, 너 오늘도 많이 힘들었구나. 어디 나한테 이야기 좀 해 줄래?" 하면서 자기 아픔을 알아준다면, 그 분노와 상처는 얼마나 쉽게 사그라지고 마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에게도 유난히 힘든 날이 있듯이 아이들에게도 그런 날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며 그 느낌 역시 똑같습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자기 아픔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이 계속 꾸중만 듣게 되면 분노하게 되고 결국에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쉽게 치유하기 힘든 상태가 됩니다.
 
 부모의 책임은, 아이들을 위로하고 비록 그 감정이 남을 미워하는 것일지라도 자기 심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또 그 문제를 바로 볼 수 있게 지도해 주는 일입니다.
 
 아이들의 감정 표출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 세련되지 못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때로는 어른들처럼 모순과 나약함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친구들에게 비난받을 때가 자주 있지요. 그러니까 아이들의 기분이 늘 명랑하지 않다고 해서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 부모는 자녀들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기 사역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의 관점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경계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도록 자녀들을 격려하는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살전 2:10). 그런데 바로 이 말이 바로 앞절과 연결되어서 나온 점에 주의하십시오. 살전 2장 9절에 의하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성도가 갖춰야 할 이 세 가지 기본 자질을 생활로 직접 보여 주었습니다. 곧 본을 통하여 그들에게 올바르고 경건한 삶에 대해 경계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올바르고 경건한 삶에 대한 경계는 바른 가르침과 본을 통해서 만이 가장 큰 효과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죄와 그것이 주는 위험, 그리고 그에 따른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주저하지 말고 경계하고 교훈 해야 합니다. 물론 먼저 부모 스스로가 죄에서 떠난 생활을 보이면서 경계해야 하지요. 이것은 부모에게 맡겨진 교육적 책임 가운데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모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안식을 찾는 것뿐임을 자녀들이 깨닫도록 바른 교훈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에게 하시는 말씀
 
 자녀를 양육하고 관심을 가지는 일은 부모된 자들에게만 국한되는 책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성도들은 서로에 대해 '부모'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피차 비방하지"(약 4:11) 말고, "서로 원망하지"(약 5:9) 말아야 합니다. 또 "서로 판단하자"(롬 14:13) 말고, 오히려 "피차 가르치며 권면"(골 3:16)해야 합니다. "매일 피차 권면"(약 3:13)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히 10:24)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사람들을 대할 때, 분노와 고통과 실망이 따르는 대신 화합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나의 과제
 
 1. 부모로서 당신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당신의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합니까? 잘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에는 +표, 태도나 행동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표를 하십시오.
 
 * 신체적인 학대없이 적절한 징계를 가한다                             ( )
 
 * 정신적인 학대없이 적절한 징계를 가한다                             ( )   
 
 * 자녀들을 무시하지 않는다                                           ( )
 
 * 자녀들의 문제와 필요를 이해한다                                    ( )
 
 * 자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
 
 * 자녀들을 실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 )
 
 * 나의 목표와 바램을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고 좋은 가르침과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로 바른 본을 보여 준다                         ( )
 
 *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 )
 
 * 자녀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 )
 
 * 늘 긍정적인 말로 자녀를 격려한다                                   ( )
 
 * 자녀의 마음을 헤아려 주며 위로한다                                 ( )
 
 * 적절한 경계로 경건한 생활을 한다                                   ( )
 
 2.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신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경계하며,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사람을 골라 적어 보십시오.

우리 가정의 과제
 
 남편으로서, 혹은 아내로서 자신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위의 점검표에 체크하며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어 보십시오. 자녀들을 돕는 말에 대해 부부가 함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보십시오. 아주 구체적인 목표를 말입니다.
 
 친구들과 연락해서 낙심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상의하고 어떤 일부터 우선적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십시오.

제7장
가정 교육에 대한 구약의 모델
 
 바울을 믿는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책임은 자녀 양육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살전 2:11,12).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과정에 대해 바울이 제시한 모델은 앞의 제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매우 상세합니다. 여기에는 인류 역사 가운데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든지 간에 가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중요한 문제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공적인 부모가 되는 데 있어서 갖춰야 할 모든 요소와 사상 그리고 실천 방안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은 가장 효과적인 자녀 양육의 방법으로서 부모와 일상 생활이 자녀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러면 이제 구약의 모델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안에는 부모들을 위한 다음 세 가지 교훈, 곧 헌신과 가르침과 세상 것을 버림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신명기 6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개인의 헌신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상).
 
 이 말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간곡한 부탁과도 같은 권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와 부도덕을 일삼았던 부모들의 죄로 인해 40년간이나 광야를 헤매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루한 방랑 생활이 이제 막 끝이 난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는 지금 약 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곧 약 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도자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복습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관심은 우성 제1계명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진수를 이루는 이 계명을 이미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에 시내 산에서 천둥과 같은 음성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2-5).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분명히 우상 숭배를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심의 삶 주제로써 섬기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우상, 곧 금송아지에게 절하여 그 분의 말씀을 어겼고, 그 결과 하나님의 준열한 진노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이 말은 하나님만이 절대자시며 그 분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경고와 함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는 이방 세계의 거짓 신들에게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날 모세가 선포한 메시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신관(神觀), 곧 하나님에 관한 관념 이상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그들의 감정과 의지뿐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며 그들의 삶을 완전히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5,6).
 
 모세는 여기서 각 개인이 하나님께 전심 전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려면 그분의 계명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기서 말하는 사랑에는 절대적인 순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앞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신 6:3). 그런데 이런 종류의 순종은 반드시 감정의 근원인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또 인격의 근원인 영혼에서 솟아나와야 합니다. 여기 신체에서 나오는 에너지 역시 들어가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 지.정.의 모든 것을 전념해야만 사람은 그 분 앞에서 진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시내 산에서 비참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했을 뿐 그분께 자신을 진정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자신이 주제가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욕심, 불안감, 야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그래서 옛 생활로 되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그들에게 앞에서 결코 자신을 헌신하지 않은 그들의 결과는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율법을 주시면서 예상하신 대로 그들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면서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따라서 모세는 과거 우상 숭배와 부도덕으로 말미암아 광야를 유랑하다 죽었던, 또한 자녀들에게 '우상 숭배'라는 큰 죄악을 남긴 자들의 실패를 자녀들이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께만 전심전력하고 헌신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일상생활 중의 신앙 교육
 
 개인적인 헌신에 관한 말씀에 이어 모세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훈계해야 할 것인지를 자세하게 일러줍니다. 그래야만 부모 세대에 겪은 '광야의 방랑 생활'이 자녀들 세대에 되풀이되지 않게 될 테니까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물론 이 가르침은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의중을 깨닫고 있습니다. 모세는 부모가 그 자녀들에게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음식을 대할 때는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했습니다. 산책을 나갔을 때는 그처럼 안전하게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땅을 주심 하나님을 찬양해야 했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밟게 해주겠다는 그 분의 약속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저녁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누울 때는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감사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또 아침에 일어날 때에는 아무런 압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의 율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매일 매일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생활 속에 옮겨 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은 자발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헌신과 여기 가르치는 일은 아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의 언어와 동작을 통해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것으로 소화시켰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앉았을 때든지, 걸어갈 때든지, 누워 쉴 때에든지, 아니면 일어날 때든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 말씀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생활 방식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손목' '미간'등 모든 신체 하나 하나, 그리고 '문설주'등 구조물 구석 구석에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어 있으려면 하나님의 진리가 우선 '마음 안에'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신 6:8,9).
세상적인 것을 버리자
 
 마지막으로 모세는 또다시 광야 유랑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도록 출애굽 제2세대들에게 세상적인 것은 다 버리라고 교훈합니다.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유랑 생활을 했던 것은 애굽의 세상적인 제재를 새롭게 혼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식탁 위에 좀더 색다른 반찬을 올렸으면 해서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동경하기까지 했습니다(민 11:5,6).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받는 도중에도 이들은 그가 내려오기까지 참지 못하고 애굽에서 행했던 우상 숭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들의 연약성을 이해했습니다. 그가 이후 이들의 변덕과 불평을 40년간이나 견디며 지내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바로 눈 앞에 있는 가나안 땅을 내다보면서 출애굽 제2세대들에게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우물을 얻게 하시며...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0-12).
 
 제 생각 같아서는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여호와의 풍성하신 축복을 체험하며 살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싶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그 과정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비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 산에서의 참담한 실패 이후 또 다른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다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그들의 후손들이 또다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사사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삿 2:8-12).
 
 한 민족의 생활 양식이 한 세대만에 어쩌면 이토록 달라질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 제2세대인 그들에게 미리 경고했지만 그들은 부모로서 모세의 말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과 자녀들에게 성경을 이야기 해 주는 일에 방심했습니다. 자신과 자녀들 모두 가나안의 죄악에 오염되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몇 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을 위한 교훈
 
 이상에서 살펴본 구약의 모델은 모든 시대이 모든 가정이 유익한 가르침으로 배울 만합니다. 오늘날 믿는 부모가 직면하는 문제들은 다양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과 다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 구약의 원리와 대조하여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려면 단순히 말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삶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체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가장 효과적인 가정 교육의 방법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되 부모의 일상 생활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로만 가르치고 교회에나 보내면서 부모들은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삶을 산다면, 이중적으로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세속 심리학자들도 인간의 행동이 가치 전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인정합니다. 수천 명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성장 유형을 관찰한 영국의 심리학자 해드필드(J.A. Hadfield)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동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행동의 기준과 도덕 의식을 개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동들에게 도덕적 금연 한 마디 가르쳐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도덕적, 비도덕적 기준을 개발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있어서 인품은 교리에 관한 그 어떤 논리 정연한 설명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격은 가르침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하나님께 대한 전심 전력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영혼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달해야 합니다. 단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 전체에 스며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자녀들과 자연스러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교육이 이루어지는 데는 우리가 누구이든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육만큼 절대적이면서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에 연결시킬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어갈 때, 또한 누울 때나 일어날 때나 언제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이야기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런 때야말로 정말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속적인 대화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또 정신을 차려 주어진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나무 숲을 지날 때, 아름다운 산을 올라갈 때 또는 들판을 지나 드라이브할 때는 하나님의 찬조에 대해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아이들을 다독거려 재울 때나 새 아침을 맞이할 때만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가르치기에 좋은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서 보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공급하심을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기에 또 한 가지,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랑으로 수고하는 엄마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게 해 줄 기회가 언제 또 있겠습니까?
 
 우리가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무리 애써도 이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며 또한 세상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5:9-11). 그렇지만 세상의 영향을 입어 그의 가치 세계에 동화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런 경로를 거쳐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도착하자 그 것의 신, 곧 물질주의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물질의 축복을 받고 나니 축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은 곧 잊혀지고, 결국에는 '야, 드디어 학수 고대하던 것을 이루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녀들은 부모들의 그 교만한 말을 믿었습니다. 교육의 결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게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부터 더욱 짙어진 타락의 색조는 이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은 해야 될 일보다 훨씬 강한 매력을 갖도록 합니다. 사단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립니다. 세상은 좀 더 흥미롭고, 좀 더 짜릿하며, 좀 더 자극적인 놀이를 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과 죽음입니다.
 
 20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앞세워 물밀듯이 침투해 들어오는 세상적인 영향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이 사용하는 도구는 텔레비젼, 문학, 영화, 세속적인 학교 체제 그리고 일반적인 생활 방식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계할 것은 우리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유입되는 세속적 영향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파멸당하는 데는 한 세대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의 이중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 중 한 가지 기준에 맞춰 생활할 것입니다. 애석하지만 그것은 바로 세상의 기준입니다.

나의 과제
 
 부모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생활 방식을 평가해 보고, 다음 질문들에 대해 가능한 한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1.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내 것으로 만들었는가? 다른 사람들, 특히 내 자녀들이 나를 볼 때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2. 나는 평소에 성경 말씀을 어느 정도 이야기해 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을 향한 그 분의 뜻이 나의 일상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되어 있는가? 나는 자녀들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기 위해 기회를 잘 활용하고 있는가?
 
 주의할 점:이것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생활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번지르르한 말장난이나 외식적인 겉치레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3. 나는 세상의 영향, 바꿔 말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이 지금 세상으로부터 입고 있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가?
 
 주의할 점:나의 생활에 대한 세상의 영향 정도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 내것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가정의 과제
 
 갈 5:19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은 육신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비교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수 있기 위해(특히 부모로서)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제8장
자녀 훈계의 바른 자세
 
 어떤 면에서 보면 훈계라는 주제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아니 겁이 나기조차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현재 이 세상에 서로 상충되는 목소리, 서로 상반되는 이론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야 되든 안되든 이론 하나쯤 더 내놓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사람에게 직접 '실험'하는 일은 무척 위험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어떤 재난을 불러 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 개인에 있어서 훈계란 인생 전체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충고가 바른 권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이보다 더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킬 만한 주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이론이 되는 대로 자녀를 양육해 왔거나 교육 철학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밀고 나왔거나 간에 부모들에게는 큰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많은 실수를 지적당하고 그것이 아이들의 인격에 미칠 지속적인 타격을 지목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이미 실시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교육 방식을 중간에 고치라고 지시하는 격이 되므로 좌절과 불안감 그리고 어쩌면 분노를 일으키게 할 수조차 있습니다.
 
 셋째, 이 문제는 아주 민감함 것이어서 혹시 오해받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이 사항을 다룰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민하고 부담스러운 문제를 다룰 경우에,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의도를 잘못 파악하여 전혀 다름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훈계 문제에 있어서 좀 더 균형잡힌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훈계에 대한 네 가지 관점
 
 본장에서는 일반 학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훈계라는 주제가 성경만 가지고 다룰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이 우리에게 근본적이고 심오한 안목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다루어야 하는 우리에게는 성경이 주는 것 이상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깊은 내용을 분명하게 위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폭넓은 기초 지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특정한 주제를 살펴보려 할 때 우리는 성경을 그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훈계 문제를 다룰 경우, 우리는 성경을 바로 보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 관점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그 세가지란 역사적 관점, 문화적 관점, 심리학적 관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학문의 대들보 격인 성경의 관점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 역사적 관점
 
 '극단으로 치우치는 위험'은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교육 정치, 경제, 신학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접근 방식과 해석원리들은 양극단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띠어 왔습니다. 자녀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벤자민 스포크 박사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훈계를 하지 않고 자유를 좀 더 많이 부여하는 교육 방식을 채택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스포크 박사는 많은 오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지난 한 세대 동안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지제력과 책임감이 결여된 생활 양식에 젖은 나약한 아내로 길러 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결과 전적으로 스포크 박사 한 사람만의 영향으로 빚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0-30년간 자녀 양육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자유주의 교육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은 훈계를 시대에 뒤떨어진 한낱 보수적인 방식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이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만약 우리가 심리학 이론을 따르지 않고 성경을 따랐더라면 오늘날 교육이 이 정도로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이 말은 옳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저술된 제임스 딥슨 박사의 [징계의 용기(Dare ro Discipline)]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기독교 도서 목록에 첨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저술가인 딥슨 박사 역시 '극단으로 치우치는 위험'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반대편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교훈과 심리학적인 도움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만을 갈조하면서, 성경과 상관없는 내용은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역사는 우리에게 '극단으로 치우치는 위험을 주의하라'고 경고한다는 사실입니다. 극단적인 견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옳지 못합니다. 그것은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문화적인 관점
 
 문화, 특히 서구 사회의 그것은 자녀 양육과 훈계에 있어서 다른 요인보다도 부모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복잡 미묘한 상황들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복잡한 텔리비젼의 채널, 궁금하기 짝이 없는 벽면의 콘센트, 가스나 전기스토브의 알록달록한 스위치들, 아이들의 눈 높이와 딱 들어 맞는 찬장의 손잡이 그리고 주방 기구와 싱크대 등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생활한다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화병이나 공중에 매달린 화초 또는 수놓인 식탁보와 같이 절대 만져서는 안될 물건도 없을 것이고 또 갖가지 그림으로 잔뜩 꾸며 놓은 유아용 변기도 없을 것입니다. 이 변기는 자기 자식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짓을 하는지 이웃들에게 자랑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지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날과 같이 생활 전반에 걸쳐 문화적 편리와 발전이 없던 그 이전의 시대에 살던 아이들은 얼마나 편했겠습니까? 그들은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종이 기저귀나 꼭 끼는 쉐타 그 외 잡다한 것들을 억지로 입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멋진 카페트를 더럽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서도 언제 어디서나 '자기 볼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식당에서 사용하는 유아용의 높은 의자, 즉 하이 체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정말 아이를 안고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쁜 일과는 보내는 무모들을 위한 물건입니다. 서너살까지 엄마의 품에서 시간을 보내던 이전 시대의 아이들과 따사로운 숨결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이런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오늘날의 아기들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의 아기들에서는 '하루에 세끼'라고 하는 식사문화사 문화의 고정틀도 없습니다.
 
 또한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는 어떻습니까? 불과 몇세기 전만해도 길거리에서 노는 두 살박이 아이를 당시의 교통 수단인 말이나 마찬가지고 달아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문제는 분명합니다. 과거에는 지금까지 말한 편의 도구나 악세사리들이 없어도 아이들이 잘 자랐습니다. 오늘날 개발 도상국의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현대 서구문화와 유독 부모와 자녀들의 생활을 너무 복잡하게 만듭니다. 부모들은 저마다 분주하여 다정한 상호 교제가 없으며 문화의 편리함 속에서 아이들이 접촉하고 느껴야 할 사랑의 보살핌은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또 아이들은 그 흐름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 양육과 비행 청소년 문제의 뿌리가 대부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아이들의 생활 방식을 옛날 시대로 다시 되돌리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지금에 와서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아이들을 힘들에 하는지, 또 '20세기'의 생활 방식이 주는 이런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3. 심리학적 관심
 
 그 동안 심리학자들은 어린이들의 이상 행동을 유발시키는 원인에 관하여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행동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잘못된 훈계에 연유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부모들의 기대가 조석으로 변하기 때문에 심리 상태가 불안해진 아이가 있고, 지나친 억압으로 인해 늘 불만과 증오에 차 있는 어린이도 있습니다. 또 부모의 주목을 끄는 방법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여 일부러 잘못을 저지르고 엉덩이를 맞으려는 아이가 있는 반면에, 가정의 도덕 기준이 너무 높아 양심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아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부모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착해지기를 포기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또한 성적(性的)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도 있습니다. 대개 이런 아이의 부모는 무척 난폭하고 거칩니다. 자연적인 충동에 따라 행동했다가는 또 얻어 맞지 않을까 겁을 먹어 억지로 변을 참는 아이도 있습니다. 또 자기를 학대하는 부모에게 반항하는 뜻으로 아무 곳에서나 변을 보는 아이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이야기는 크리스챤 부모들과의 상담에서 나온 사례들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문제들은 유아 때부터 회초리를 통해서만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는 자녀 훈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 심리학자들이 그러한 크리스챤 부모들의 태도에 발발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사실 더 큰 비극은 신자들이 자녀 훈계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바로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부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 그 자체를 거부하는 실태입니다.
 

 어린이의 심리를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아이들, 특히 유아기에 있는 아기들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이 과정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인 요구가 이것들과 심한 마찰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막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의 두 살박이 아이는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는 단계로 들어갑니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물건은 무엇이나 다 직접 만져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복잡 미묘한 사회에는 만져 보고는 싶은데 그러면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널려 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차서 만져보고 싶고 따라서 해보고 싶은 아이들의 충동이 이 상황에 부딪힐 때, 그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특히 이런 충돌의 주요 요인이 부모라고 할 때, 즉 부모가 "안돼!", "못써!", "하지마!"하며 저지시켰을 때 , 만지고는 싶지만 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부모들이 혼자 지니고 있으면서, 부숴뜨리거나 방바닥에 늘어 놓거나 아니면 길거리에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할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한 번 상상해 부십시오.
 
 이런 때에 나타나는 현상을 원죄에 묻든 부모의 완고한 성품과 아이의 자연적인 성향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위의 신기한 물건들이나 현상들을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의 내적인 강한 욕구를 '원죄로 말미암은 죄의 본성'으로 간주합니다. 극단적인 일부 부모들은 이 욕구와 자제와 분별력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어린 아이 시절의 자연스러운 성향임을 무시한 채 아이의 욕구의 표현과 그것이 일으키는 문화와의 충돌을 '원죄의 죄악된 의지'로 규정하고 이것을 훈계를 통해 반드시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욕구를 죄로써 단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복잡 미묘한 현대 문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자녀 훈계와 원죄의 본성에 관해서 성경은 과연 어떻게 가르칩니까? 다시 말해서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4. 성경의 관점
 
 성경이 말하는 바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분명히 성경은 훈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잠언에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또 '회초리'를 징계하는 것이 적절한 수단이라고 강조합니다. 아이들을 꾸짖고 바로잡으라고 하는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저자가 말하는 대상에 어린아이들, 특히 세 살 아래의 유아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에 놀라실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신자들은 잠언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아이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회초리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잠언 22:6의 '가르치라'는 말씀을 배질, 특히 회초리를 사용하는 징계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의 말씀은 믿는 지도자나 부모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그런 내용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잠언을 주의 깊게 공부하고 구절 하나 하나를 그 전체 문맥에 맞추어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첫째, 잠언은 주로 장성한 자녀의 옳지 못한 행실을 바로잡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잠언에 나타나는 훈계의 말씀은 매우 깊이 있는 교훈과 상징적인 단어를 모두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성숙한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잠언 초두에 나오는 서언 부분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잠 1:8-16).
 
 여기에서 솔로몬은 꼬마 이상의 도둑질, 심지어 상인에 연루될 위험에 있는 그런 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에 나오는 내용이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특히 자기 아들에게 '이방 계집'과 '음녀'의 유혹을 경고합니다(잠 2:16; 잠 5:1-3; 잠 6:23,24; 잠 7:6-23; 잠 23:26-28). 그리고 그는 "음녀와 함께 즐기기"보다 "소시의 짝을 즐거워하라"고 타이릅니다(잠 5:18-20). 또 돈을 빌리는 일에 관여하지 말고(잠 6:1),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 수 있을 때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잠 10:1-5) 교훈합니다. 그 뿐 아니라 훈계를 받아들이라고 충고하고(잠 13:1),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 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잠 19:26).
 
 이와 같이 잠언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이 내용은 전반적으로 장성한 자녀들, 특히 아들들을 일차 대상으로 한 훈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회초리 사용을 언급하는 구절 중 대부분은 혹독한 채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당시에 회초리로 때리는 방식은 행동이 극히 반항적인 젊은이나 어리석은 노인들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잠언에서 사용된 '나하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를 살펴봅시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말이 '아이'로 번역되었지만 다른 성경에는 주로 '젊은 사람', '젊은 사람들' 혹은 '소년', '소년들'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갓 태어난 아이들을 모사할 수도 있겠으나 주된 율법은 다 큰 자녀들 혹은 청년, 특히 장성한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언의 전체적 맥락 또는 특정한 문맥에서 이 말을 '젊은 사람' 혹은 '소년'으로 번역하지 않고 왜 '아이'라 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잠언에서 '아이'로 번역된 이 히브리어 단어가 정확하게 몇 살짜리를 가르키는지 꼭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언의 전반적인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경우 저자의 말은 나이가 든 자녀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라고 짐작하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징계의 방법으로 특별히 매를 사용하라고 말하거나 암시하는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아주 심각한 비행을 바로잡기 위해 혹독한 체벌을 가할 경우에 해당되었습니다.
 
 잠 10:13-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지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 13:24-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7:10-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
 
 잠 18:6-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 19:29-심판은 거만한자를 위하여 예비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잠 20:30-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서랍 속에 깊이 들어가느리라.
 
 잠 22:15-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 내리라.
 
 잠 23:13, 14-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권하리라
 
 잠 26:3-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잠 29:15-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으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지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이스라엘의 체벌 교육과 그 목적을 철저하게 이해하려면 그 문화적인 배경과 성경의 내용을 좀 더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년 전 발덴스버거(Philip G. Baldens-perger)는 이 주제를 연구한 다음 몇 가지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 동양인들이 손에 늘 가지고 다니던 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중 제일 일상적인 것이 참나무 막대기로 석 자에서 석 자 반 정도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향상 겨드랑이 밑에 끼고 다녔습니다. 정부관리, 고위 장교들, 세관원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은 이 짧은 막대기를 이용해서 미리 겁을 주고 또 필요하면 그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마구 사람들을 때렸습니다." 이런 경우에 쓰인 좋은 막대기는 매듭이 40개나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종들을 벌주는 데 사용하던 '세베트'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출 21:20; 잠 10:13).
 
 만약 이것이 구약 성경의 매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며, 지금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혹독한 훈계와 처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계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한 예로,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목해 보십시오.
 
 "사람과 가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유수히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사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신 25:1-3).
 
 이 관습은 초기 기독교시대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 로마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매'로 때렸습니다(행 16:22).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고후 11:24).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특히 잠언이 가리키는 매는 무엇을 아주 잘못하였거나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 훈계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특정한 범죄에 대해 가장 강력한 처벌을 내릴 때는 돌로 쳐 죽였습니다(레 24:13,14). 반면에 이 매질은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에게 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매질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해도 자녀가 죽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강조합니다(잠 23:13,14).
 
 여기에서 우리는, 잠언의 이 말씀들을 자녀 양육이나 아주 어린 아이들을 훈계하는 데 적용하는 것은 분명히 솔로몬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오히려 히브리 사회 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범죄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 말씀들을 근거로 자녀 양육이나 가정에서의 훈계를 위한 이론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아이들의 행동에 예기치 않은 문제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불신자인 어린이 교육 전문가들로부터 이것이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아의 성향에 대한 오해
 
 성경을 심각하게 잘못 설명하고 적용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앞의 심리적 관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어린이의 본능 속에 있는 자연적인 성향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의 발현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죄성, 곧 원죄는 육신의 악한 정욕을 추구하고 그 정욕대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고집을 피우고 울어댄다고 해서 그것을 다 악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이것은 죄성의 발현이라기 보다는 그 성품이 아직 다듬어지지 않고 분별력이 없는 어린 아이 시절에 거치는 자연적인 성향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린 아이 안에 있는 죄성은 생활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한 아이가 성장하고 자라가는 과정에서 이것은 주변 상황에 의해 크게 좌우되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아이가 신앙적 분위기가 잘 갖추어진 환경에서 계속 자란다면 그런 분위기에 맞는 성격과 인품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회심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 불신앙적인 태도가 만연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다면 그 특징, 즉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의 고집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이로 자라도록 신앙으로 양육하고 그들이 건강한 자아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불완전한 행동을 보일지라도 애정어린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두 살짜리 아이가 드러내는 행동을 완전히 자란 성인이 저지르는 죄악과 같은 종류로 분류하는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이유는 어른인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아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른들 속에 있는 죄성의 출현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을 아이들, 심지어 갓난 아이에게까지도 그대로 적용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마치 어른들이 자제력을 상실하여 저지르는 행위와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또 아이들에게서 표출되는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어른들에게서 나타나는 이기적인 행동과 유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성적인 관심과 호기심을 어른들의 성범죄처럼 보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어린 아이 속에 있는 이런 성품을 보고 그들이 지금 죄를 짓고 있다고 확신하여, 그것을 제거하려면 아이들에게서 매나 엄격한 말로써 통제하고, 비난하며 죄를 억지로라도 끄집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도 앞에서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 내리라"(잠 22:15)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만, 문제는 우리가 '미련한 것'을 잠언 저자의 말대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저자가 말하는 '미련한 것'은 청년들에게 나타나는 타락된 행위들을 가리킵니다('미련한' 행위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잠언 26장을 주의해서 읽어 볼 것).
유아들의 자연적인 성향
 
 심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특히 어린 시절에 여러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언급해 왔습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성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단계들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1. 탐구 단계(1-2세)
 
 한 두 살 때 오는 탐구의 단계는 가장 중요한 성장 과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아이들은 이 시기에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들의 강한 충동이 문화적인 요구와 직접적인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지나친 규제를 받게 되면 다음 두 가지 중 한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아주 조용하고 말을 잘 들으며 질문이 없는 성격이 되거나 둘째, 아주 반항적인 성격이 되어 늘 매맞을 짓만 하게 됩니다. 첫째는 태어날 때부터 신체적, 정서적 에너지가 모자라게 보이는 듯한 아이를 가리키며, 둘째는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올바르지 못합니다. 힘이 부족한 아이에게는 탐구심을 가지도록 의욕을 북돋우어 주어야 하고, 반면에 힘이 넘치는 아이에게는 그 에너지를 쏟아 발산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어느 경우든 아이의 탐구 의욕은 부모가 개발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 욕구는 나중에 그 아이가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가장 좋은 자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탐구 의지를 꺾어 버리는 대신 키워 주고 그것을 사용할 출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모방 단계(1-2세)
 
 탐구 단계 다음에 오는 것이 모방 단계입니다. 아이들은 한 살에서 두 살 시기가 되면 무엇이든 흉내내고 싶어합니다. 이때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은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모방은 아이의 인지 능력과는 무관한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어서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도 우리 문화에 사는 아이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한두 살 된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가 하는 일을 뭐든지 다 따라하고 싶어합니다. 엄마가 찬장에서 후라이 팬을 꺼내는 것을 보면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합니다. 또 아빠가 텔레비젼을 켜면 아빠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대개는 손등을 찰싹 얻어 맞거나 "안돼!"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그러면 아이는 이 말이 담고 있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곧 깨닫게 됩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부모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금방 모방하게 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이 시기에 접어들면, 아이는 우리의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굴면 초조한 모습을 보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취하며, 불안해하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성격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이를 늘 톡톡 때리면 타인을 때리는 습관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한 두 살짜리 아이를 절대로 때려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규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누구나 탐구와 모방의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현명한 부모라면 이 과정을 잘 활용하고 주변 환경을 정돈해서 꾸중이나 때리는 일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3. 일체감을 갖는 단계(2-3세)
 
 아이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좀 더 발전된 단계가 이 시기에 찾아옵니다. 이 시기 동안에 아이들은 부모의 인격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성향은 세 살 정도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대개의 아이들은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일체감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들과의 만남에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원만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에게 애착을 느끼면 느낄수록 아이들은 그만큼 더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4. 인격 형성 단계(3-4세)
 
 아이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정은 네 살 정도에 찾아오는 인격 형성 단계입니다. 아이들은 이때 처음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며, 생활 전반에 걸쳐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또 이 단계에는 사물을 철저하게 따지려는 성향을 갖게 되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상을 인지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아이들이 정말 복음을 이해하고 자신이 본래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자신의 인격 속에 있는 이중성, 즉 의식적으로 나쁜 일을 하고 싶은 충동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욕구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깨닫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단계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때가 바로 옛 성품에 관한 교리가 그 빛을 드러내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부터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이들 속에 있었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이 그들의 생활에 강한 추진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자신은 이 힘을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부모나 교사들은 이 능력에 대해 꼭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잠언에 나타난 자연적인 성향
 
 재미있는 사실은, 잠언도 이 '자연적인 성향'을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잠언에서 훈계를 받는 대상으로 나타나는 '아이'라는 표현도 그다지 나쁜 번역은 아니지만, 의미상으로는 그것이 '소년'을 가리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잠언 22:6을 읽어 봅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훈계할 때 주로 매를 사용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저명한 구약 주석가 델리취는 이 구절을 존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나아갈 길에 맞는 교훈을 가르치라. 그러면 나이가 들더라도 그 교훈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또 이 구절에 주석을 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훈, 교육은 그들의 성향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교훈의 방식은 성장 단계, 특히 그 특성에 따라 규정되어야 하며 교육 방법은 젊은이의 정신적, 신체적인 성장 정도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물론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성장 단계'는 분명히 자연적인 성향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상태에서 일어나는 성장의 과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성장과 보조를 맞춘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스려서 교육을 시행한다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서너 살까지의 훈계
 
 1. 세 살까지의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강한 탐구심이 문화적인 장애물에 부딪혀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부모들은 먼저 이 장애들을 제거해서 아이들과 환경 사이에 긴장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특히 한 살에서 두 살 반 사이의 아이를 둔 부모들이 중요시해야 합니다.
 
 2. 두 살짜리 아이를 둔 부모들은 그 아이가 모방을 즐기면서 자기를 발견하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말로 이 자연적 성향을 마음껏 표출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능하면 "하지마!"라는 말은 피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요리, 세차, 정원 손질 등 집안 일을 따라 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그런 기회를 주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을 돕는 일거리를 주는 것도 좋습니다.
 
 3. "안돼!"라는 말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또 "꼭 해야 돼!"라고 강요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떤 심리학자는 부모들이 "안돼!"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만약 그 말을 하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을 모아 아이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면 십중 팔구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부모들은 "안돼!"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항상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4. 젖이나 노리개 젖꼭지 떼는 일을 서두르지 마십시오. 구약 당시에는 만 세 살이 넘도록 엄마품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히 서둘어서 젖을 떼면 아이들의 정서에 심각한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기 이유식을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안정감을 상실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5. 대소변 가리는 일을 아이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부모와 일체감을 가지려 하는 그들의 성향을 잘 이용하십시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좋은 본을 보여 주는 것으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십시오. 대부분 화장실에 들어가면 문을 닫는데, 아이들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런 교육의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딸에게는 엄마가 본이 되어 주고, 아들에게는 아빠가 본을 보여 주십시오.
 
 아이들이 대소변을 가리는 평균 나이는 대개 세 살 정도입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절대로 부모 중심적으로 아이의 일을 처리하지 마십시오.
 
 6. 아이를 훈계하는 것은 곧 매를 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이론은 잠언의 회초리 사용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어리더라도 꼭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계를 그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면 매가 꼭 필요해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별일이 아닌데도 우선 매부터 들고 보자는 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7. 매맞는 이유를 아이가 이해한다면 체벌의 효과가 훨씬 더 커진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면 자기가 왜 매를 맞아야 하는 지를 아는 정도의 능력은 충분히 가집니다. 그 이전에는 회초리가 주로 조건 반사를 일으키는 작용밖에 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신체적, 감정적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나타내는 반응을 겨우 얻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건 반사도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본능과 관점을 고려하려고 애쓴다면, 이런 경우를 최소화하면서도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8. 아이들을 대할 때, 나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 있다면 무엇을 원할는지 생각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다루십시오. 우리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너무 기대하면 안됩니다. 또한 아이들은 지치면 우리보다 몇 배 쉽게 좌절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시오. 배고플 때는 우리보다 참을성이 모자라고, 또 감수성도 일반적으로 우리보다 예민하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아이는 기분이 언짢을 때 금방 신경질을 내기 쉬운데, 이런 경우에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내가 속상했을 때 심정이 어떠했는지, 또 아이가 왜 기분 나빠하는지 그 원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9. 훈계한 뒤에는 아이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잘 관찰하십시오. 다음 내용을 기억해 두면 아이에게서 나타나는 징후를 식별하고 우리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a. 매사에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조용한 아이
 
 b. 너무 공격적이고 화를 잘 내는 아이, 즉 혼을 내려고 할 때 늘 같이 맞서려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싸움을 잘 거는 아이
 
 c. 너무 예민하고 겁이 많은 아이
 
 d. 자기가 한 모든 일에 대해 불만족해 하는 완벽주의적인 아이
 
 e. 자신에게 곧잘 화를 내면서 짜증내는 아이
 
 f. 지나칠 정도로 남과 협력하지 못하는 아이
 
 g. 자꾸 남을 속이려는 아이
 
 h. 부모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주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
 
 이런 징후들은 보통 아이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나타나지만 과도한 규제를 받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서너 살을 넘어선 아이의 훈계
 
 1.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수시로 매를 접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매를 대는데도 아무 결과가 없을 경우, 이는 너무 어려서부터 엄격한 규제를 박아서 오히려 비뚤어진 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 증상은 자기에게 좀 더 관심을 보여 달라고 부모들에게 간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어렸을 적부터, 무슨 짓인가를 해서 부모를 화나게 하지 않으면 아무 관심을 끌 수 없다고 생각해 온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이유 있는 부정적 행동은 일단 묵과하고 긍정적인 행동은 칭찬해 주도록 하십시오.
 
 물론 어렸을 때 너무 훈계를 하지 않아서 좋지 못한 버릇이 생긴 아이들은 회초리를 지속적으로 듦으로써 그 행동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시간 내에 눈에 뛸 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오히려 문제만 악화시키는 게 아닌지 한 번 점검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럴 때는 좋은 상담자를 찾아 도움을 구하도록 하십시오.
 
 2. 6-9세 정도의, 나이가 좀 든 아이들 가운데 불안정하고 화를 잘내는 정서적으로 뭔가 좀 불안해 하는 아이는 늘상 부모를 달달 볶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합당할 경우 그냥 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3. 훈계를 지속적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너, 매맞어!"했으면 그 말이 단순한 경고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꼭 확인시켜 주십시오.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닌데 "한 번만 더하면 매맞어!" 이렇게 말하지는 마십시오. 아이에게 때리겠다고 경고하기 전에 먼저 매질이 이 경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말했으면 그 말대로 꼭 실행하십시오. 매질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아주 잘못되지 않았으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일관성이 없는 훈계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불안감은 곧 분노로 이어집니다.
 
 4. 십대를 다룰 때는 훈계와 아울러 함께 문제를 토론하고 또 함께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협력이 잘 안되면 문제가 될 만한 행동과 그에 따른 제재 방법을 조항으로 정하여 규율을 정해 놓고 그것을 어길 경우에는 철저하게 시행하십시오.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신체적인 제재 없이도 훈계를 잘 받아들이기는 합니다.
 
 5. 기억하십시오. 잠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주 심한 비행을 저질렀을 경우이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훈계 방식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다스리던 시민법의 영향을 받아 처벌 형태가 이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부모들은 신앙의 원리를 따라 모든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 이 극단적인 형태의 처벌 방법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과제
 
 자녀에게 나타나는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는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무조건 때리는 것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것도 반대합니다. 자녀 성장 단계에 유효적절한, 우리가 할 수 있는 훈계의 방법들을 함께 이야기 하십시오.

제9장
불신 배우자와의 선한 가정

성경은 이상적인 결혼과 가정 생활의 지침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곧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지 그 기본 원리를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이상적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다음 네 명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먼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제인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녀는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기껏해야 주일 예배에나 참석할 정도의 초신자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그녀에게 외출이 잦다고 불평합니다. 더욱이 그녀가 교회에서 알게 된 친구들에 관해 이야기하면 남편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죤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죤은 여섯 살 때부터 신앙 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죤은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죤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는 말씀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죤은 고등학교 때 한 여학생을 만나 사귀다가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때는 아내가 곧 교회에 나가리라고 기대했지요.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내는 교회에 가지 않았으며 아이들과 함께 성경 읽는 것도 싫어하고, 영혼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화부터 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죠엔의 경우는 또 다릅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영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합니다. 또 가정에서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거나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는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라곤 도무지 읽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죠엔의 교회 활동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중립적일 뿐입니다.
 
 보브의 경우는 믿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가 문제입니다. 보브의 아내는 그의 열성적인 신앙 생활 때문에 되도록 빨리 이혼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공동 관심사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각자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서 새로 시작합시다." 그는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부딪히자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부 중에 어느 한 쪽만 그리스도인이어서 원만하지 못한 가정 생활을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집에 살면서도 형식상으로만 부부인 그리스도인들도 많습니다. 서로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고 매력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무슨 해결책이라도 나와 있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가장 기본적인 해답들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려면 부부간에 사랑과 존경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 생활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이런 상호작용이 있을 때 사랑과 존경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이 되면 한 편은 이타적이 되는 반면 다른 한 편은 이기적이 되며, 한 편은 늘 주는 반면 다른 한 편은 자기 몫만 챙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부부 사이는 악화되고 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결국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어려운 난관을 헤쳐나가고 극복하기 힘든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는 성경의 원리가 몇 가지 있습니다.

멍에가 기울어질 때의 성경의 전략
 
 사조 베드로는 불신자와 결혼한 신자들에게 몇 가지 특별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우자에게 말로만 전도할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권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베드로는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인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여기에는 특히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정결', 다시 말해서 성적으로 정숙한 생활이 포함됩니다. 아내의 생활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면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베드로는 내적인 아름다움, 곧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이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기뻐게 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여인들의 외모 단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매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인들은 이런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믿지 않는 남편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 베드로가 말한 의도입니다.
 
 이 사실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남자들에게 여자들이 외적인 아름다움(베드로는 이것을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라고 합니다)는 매혹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결혼 관계는 외모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외적인 미모로 남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관심을 자기에게 지속적으로 끌 수 있는 것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관능적인 광고 등을 통하여 이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고, 뭇 남성들은 매우 피상적이고 근시안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 삶을 허비하며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겠지만, 불행하게도 남자들은 대부분 여자들에게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은 여자의 외모에 현혹되어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남성들은 순간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며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이용하는,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척하다가 차버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남자들이 원하는 것, 남자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는 것은 분명 이것이 아닙니다. 신자건 불신자건, 영적인 사람이건 육적인 사람이건 남자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아름다움"(벧전 3:4),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외적인 아름다움은 다분히 현혹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길을 끌고, 보는 순간 마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의 매력적인 외모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혼 생활을 유지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운데 속이 텅 빈 여자가 있다면 남자에게 이보다 더 역겹고 실망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다면 외적인 아름다움의 감동은 쉬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말한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은 반대로 무엇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늘 바가지를 긁는 여자, 항상 징징거리는 여자, 남편에게나 아이들에게 매일 짜증투로 이야기하는 여자, 이런 사람은 베드로가 말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거칠고 퉁명스런 말투는 인간 관계에서 거부감을 일게 만듭니다. 남편의 위신을 깎아 내리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등 남편의 자존심에 둔감한 여자는 행복한 생활을 망칩니다.
 
 아내의 이런 행동은 남편의 마음에서 사랑의 문을 닫게 합니다. 나는 남편이 퇴근 후에도 집에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혹시 쉬는 날이 있으면 아예 혼자서 여행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거의 대화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웬만큼 도덕심이 강한 남자가 아니라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기가 십상이지요. 성격이 싹싹하고 상냥하며 대화도 잘 통하고 이해심이 깊은 여자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내는 이런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오도록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한 마음 때문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순환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남자들이여! 결혼 생활은 상호 협력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아내들에게 권면을 한 후, 바로 이어서 남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벧전 3:7). 바꾸어 말하면, 믿는 남편들이 권위만 내세우고 이기적이면 믿지 않는 아내를 도저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비록 믿지 않는 아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그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롬 5:8).
 
 여기서 베드로가 아내와 남편에게 권면하는 말을 전체 문맥에 비추어 살펴봅시다. 베드로는 이 편지의 일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 다음의 내용을 보면 '이방인'의 범주에 위에 있는 왕들(벧전 2:13), 방백들(벧전 2:14), 노예 주인들(벧전 2:18), 그리고 믿지 않는 배우자들(벧전 3:1-7)이 모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너무나 고통이 심하고 마음이 아파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여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세상적 권위에 복종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결혼 생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최고의 모범이 되십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배우자를 돌아서게 하는 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믿는 아내가 믿지 않는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베드로는 마치 믿는 사람과 결혼한 것처럼 '좋은 아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편을 사랑하십시오.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남편에게 충성하십시오. 그에게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을 보여 주십시오. 과거 경건한 여인들의 본을 따르십시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으니라"(벧전 3:5,6).
 
 어떤 경우에는 남편 때문에 아내들이 겁을 내며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이 초대 교회 당시의 문화에서는 더욱 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불순종하는 아내를 남편이 즉시 마음대로 벌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서 내쫓는 정도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의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말은 지금도 유효한 것입니다. 비록 문화적인 상황은 변했지만 근본 원리는 그대로 남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만한 부부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말 진실되고 변함없이 상대방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준다면 결국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실생활의 문제 적용
 
 성경의 원리나 이상론을 이야기하는 것과 하루 하루의 복잡한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완전히 다 해결하기도 어렵겠지만 그 중 일부를 해결했더라도 또 다른 어려움에 빠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 배우자와의 선한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서 다음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베드로가 제시한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히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게 아닐까요?
 
 첫째,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반응을 보장하시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지 않는 배우자가 그리스도께 돌아온다던가 혹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나 행동을 보인다던가 하는 약속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라도 신앙 인답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상대방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인간적이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배우자의 변화를 기대하는 데도 오히려 문제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화를 내면서 더 강한 압력을 가해 상대방의 의도를 시험하려 합니다. 배우자의 자상하고 친절한 행동이 진일된 것인가를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단단히 준비하십시오.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십시오.
 
 2. 상대방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런 상황을 얼마나 오래 견디어야 합니까?
 
 반응이 전혀 없을 때에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변화되리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인답게 행동한다는 것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 아니면 한 주간 반짝' 달콤하게 행동하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며 왜 변화가 없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잠깐 반짝이는 '친절'은 소용없습니다. 지속성이 없는 행동은 오히려 혼동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를 돌아서게 하는데 있어 당신의 노력 여하는 어떠한지 다음의 점검표를 활용해 보십시오. 당신의 결혼 생활, 가정 생활에서 아래와 같은 부정적인 면들이 과연 얼마나 제거되었습니까?

믿는 아내를 위한 점검표
 
 다음 내용은 여러분 자신의 믿지 않는 남편에게 어떤 태도와 행동을 보여 주는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입니다.
 
 * 나는 믿지 않는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
 
 * 나는 남편의 친구나 다른 사람의 직업을 부러워하는 눈치를 절대 보이지 않는다.
 
 * 나는 남편의 스케줄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 나는 남편에게 신뢰하지 못한다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 나는 공석에서 남편을 당황하게 하지 않는다.
 
 * 나는 남편에게 빈정거리거나 비꼬는 말투로 대답하지 않는다.
 
 *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남편의 위신을 격하시키지 않는다.
 
 * 나는 남편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 나는 남편과 언쟁하지 않는다.
 
 * 나는 친구를 만나는 일 때문에 남편의 뒷바라지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 나는 언제나 집을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해 놓는다.
 
 * 나는 우리 집이 남편에게 편안한 곳이 되도록 하기 위해 늘 애쓴다.
 
 * 나는 남편의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려고 노력한다.
 
 * 나는 공적인 장소나 사적인 자리에서 남편을 무시하지 않는다.
 
 * 나는 자신을 늘 매력적으로 가꾸고 있다.
 
 * 나는 돈을 아무렇게나 규모 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 나는 남편에게 믿음이 좋은 친구에 대해 생각 없이 이야기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 나는 남편 또는 가족간의 관계가 타인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도록 주의한다.

믿는 남편을 위한 점검표
 
 다음 내용은 여러분이 믿지 않는 아내에게 보여 주는 태도와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 나는 네 가족과 아내에게 충분한 수입을 제공한다.
 
 * 나는 아내가 가정을 잘 돌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 나는 스케줄을 잘 조정해서 아내와 함께 보낼 시간을 만들어 놓는다.
 
 * 나는 아내에게 예의를 잃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다.
 
 * 나는 언제나 아내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
 
 * 나는 내가 늘 아내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 나는 아내의 불평을 신경질 부리지 않고 잘 들어 준다.
 
 *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를 가는지, 매일 어떤 일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아내에게 이야기해 준다.
 
 * 나는 식사 시간을 잘 지키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사전에 전화를 하여 알려준다.
 
 * 나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기 위해 시간을 마련한다.
 
 * 나는 아내를 도와 힘들고 어려운 집안 일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 나는 아내에게 가사 일에서 벗어나 친구를 만나거나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 나는 아내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갖는다.
 
 * 나는 아내의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 나는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 나는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 나는 아내에게 다른 여자, 특별히 믿음이 좋은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삼간다.
 
 3.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다 실천했는데도 여전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분명히 정의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상황이란 우리가 더 이상 대처하기 불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도무지 극복하기 힘든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생활에서는 믿음이 신실한 성도나 교회의 목사님에게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을 신앙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넘도록 돕는 것은 그분들의 의무입니다. 사실 정말로 불가능한 상황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잘못되어 상대방이 어떻게 대해 주든 막무가내로 우기며 그 인격을 마구 유린합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에게도 물론 사랑으로 대해야 하지만, 그 잘못된 반응에 대한 책임을 깨닫도록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4. 만약 믿지 않는 배우자가 이혼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않으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2-15).
끝으로 한 마디
 
 물론 앞의 점검표는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한 성도들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끼리 결혼한 경우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이 지침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생활하려고 노력한다면 결혼 생활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경우가 하나 있습니다. 부부가 다 신자이지만 한 쪽은 영적인데 반해 한 쪽은 육적인 신자이어서 가정 내에 심한 갈등과 어려움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경우에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첫째, 마치 불신 배우자와 결혼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경우에 준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없으면 교회 목사님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둘째, 교회의 징계가 필요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한 지체인 신자가 계속해서 항상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신자인 배우자를 학대하는 것도 죄입니다), 물론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죄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을 가해야 합니다(갈 6:1,2).

우리 가정의 과제
 
 위의 점검표를 가지고 부부가 함께 서로를 평가해 보십시오. 상대방이 특별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어디라고 느끼는지를 표시하고 그 이유를 잘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개선될 것인지 함께 이야기하십시오.
 
 만약 아직까지 독신이라면 베드로뿐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했던 다음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의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

제10장
결손 가정과 성격의 가르침
 
 진은 이혼녀입니다. 그녀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과 함께 월세 아파트에서 생활하며 직장에서 사무원으로 1주일에 40 시간씩 일을 하여 돈을 법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는 거의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진의 한 달 수입으로는 각종 공과금을 내고도 가족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활하는 진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뒤부터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그녀는 하나님의 축복을 놀랄 정도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진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일 년 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귀더니 결국 가정까지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진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늘 외롭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후부터는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서로 힘을 합해서 생활해도 살아 나가기 어려운 것인 현실인데, 진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그녀는 빌 4:13 말씀을 가장 좋아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녀는 이 구절을 늘 생활 속에 적용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하루 동안에도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같이 느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은 언제나 주 안에서 승리했습니다.       
 
 진은 결손 부모로서 힘겨운 삶을 헤쳐 나가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결손 부모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높아만 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어느 한 쪽이 아이들을 양육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등 원래 둘이 함께 감당하라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책임을 혼자서 지고 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무슨 말로 이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결손 부모를 어떻게 대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책임 있게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손 가정의 모범적 실례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를 위해 감당해야 할 책임에 대하여 비유와 실례를 들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는 존귀를 더 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12, 고전 12:21-26).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결손 부모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상황을 낱낱이 확인하여 구체적으로 도울 수는 없지만, 결손 부모와 그 자녀들이 살아가는 데 지침이 될 만한 내용을 제시해 줄 수는 있습니다. 성경에는 결손 부모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는 실례가 두 가지 나옵니다.
 
 1. 자주 장사 루디아
 
 루디아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사역할 때 첫 번째로 회심한 사람으로, 여자 사업가였습니다. 성경에는 루디아가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행 16:14)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를 처음 만난 장소는 기도처, 바로 빌립보 시 외곽에 위치한 강변 모래밭에서였습니다. 그녀는 유대교에 입교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는 했지만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구원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셔 들였습니다. 성경은 루디아의 회심에 대하여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중하게 하신지라"(행 16: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루디아의 가정에 관해 알 수 있는 내용은 그녀가 편모라는 점입니다. 그녀에게 가정이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누가가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행 16:15)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 가족 모두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루디아는 온 식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초청하여 자기 집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루디아의 초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실제로도 그녀의 집이 빌립보의 첫 번째 집회 장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같이 바울의 선교를 도운 자요 빌립보 교회의 성장을 도운 자인 루디아가 편모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루디아는 자주를 파는 상인으로서 성공한 여자 사업가였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불행한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생계를 혼자서 도맡아 훌륭히 꾸려 나갔습니다.
 
 둘째,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가족들도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녀는 여자였지만 그 당시 가장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가족들에게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루디아는 자녀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가 내린 결정에 온 가족이 무조건 따를 정도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을 것입니다.
 
 셋째, 루디아는 구주를 영접한 후 그녀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여 바울과 그 동료 선교사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종들을 대접하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미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길 원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루디아가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삶의 우선 순위가 더욱 선명해진 것입니다.
 
 루디아가 당시의 남성 지배 사회체재에도 불구하고 별 탈 없이 가정을 잘 꾸려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 요인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먼저 삶의 우선 순위를 정하고 계획성있게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녀로 하여금 유럽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2.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
 
 유니게는 실제상으로는 남편이 있는 여자였지만 아들 디모데의 영적인 양육을 혼자 감당했다는 의미에서 '편모'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녀는 '믿는 유대 여자'였고 남편은 '헬라인'이었다고 나타나 있습니다(행 16:1).
 
 유니게는 오늘날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믿지 않는 상태에 있는데, 여자가 먼저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아버지요 좋은 남편이라 하더라도 자녀에 대한 영적 양육의 책임은 자연히 성도인 여자가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디모데 가정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니게는 이 영적인 교육의 책임을 아주 잘 감당해 냈습니다. 그녀는 경건한 여자였고 믿음의 어머니였습니다(딤후 1:5). 바울은 장성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어린 아들을 영적으로 훌륭하게 기르신 그 어머니의 노고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그리스도인의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부모 둘 다, 특히 아버지가 교육을 책임지는 것입니다(엡 6:4).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 여건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또 유니게의 경우처럼, 비록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주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쪽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적의를 가지고 있을 경우입니다.

오늘날의 결손 부모를 위한 실천 방안
 
 결손 부모라도 자녀 교육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배우자가 없어서 모든 문제를 전부 혼자 책임져야 한다든지, 배우자가 믿지 않기 때문에 자녀의 영적인 교육면에 대해서는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책임을 혼자서 감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생활 속에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짐을 혼자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짐을 지고 갈 수 있게 서로 도울 수 있고 또 그럴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혼으로 현재 결손 부모가 된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절대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결손 부모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로 인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사실 이혼 사유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자신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혼자 도맡으려고는 마십시오. 상대방은 무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실패자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바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아무리 무겁고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써 깨끗하게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자학하는 일은 이젠 그만하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다면 이젠 주를 위해 일하십시오.
 
 자신의 처지를 더 이상 한탄하지 마십시오. 물론 배우자의 이혼이든 사별이든 간에 결손 부모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힘겨운 일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을 것이며, 삶을 원망하며 좌절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계속 한탄만 하고 있으면 문제는 더욱 악화됩니다. 이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결손 부모가 된 데 대한 분노와 미움을 극복하십시오.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으면 자신의 심성이 약해집니다. 우리의 이런 감정은 가까운 사람, 특히 자녀들에게 나타나게 되고 이웃들과 가까워지는 것도 방해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없이 소모시킵니다. 이런 힘을 우리는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를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분께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과 평화의 왕국으로 초대받지 않았습니까? 그 분과 한 몸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망치지 마십시오.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다른 사람의 입장에 한 번 서 보십시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가능하다면 자꾸 과거를 생각하는 일은 피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내 삶을 대신 살아 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 더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교회가 당신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어려운 상황을 책임질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주변 환경의 희생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눈 앞에 닫친 문제를 아무렇게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구실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됩니다. 굳건하게 서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십시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이혼한 한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를 이용만 하고 자녀 양육비는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그녀의 생활에 관여하는 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즉시 변호사에게 연락해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당당하게 맞설 수도 있습니다. 복수를 한다든다가 법을 아전 인수격으로 이용해서는 안되지만, 위의 사례와 같은 때에는 그냥 묵과할 수만은 없습니다. 바울도 이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롬 12:17-19). 누구에게나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자신의 권리를 그냥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삶의 목표를 몇 개 설정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입각하여 우선 순위를 정해 놓고 그에 따라 생활하십시오. 이 일은 누구나 다 해야 하지만 결손 부모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래야 합니다.
 
 꼭 기억할 것은, 우리 생활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분과의 관계를 결코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읽고 기도하십시오. 아울러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게을리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위로를 얻으십시오.
 
 그 다음은 우리 자녀들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영적 어느 면이든지 먼저 아이들의 필요를 가장 잘 채워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생활하십시오.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무조건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사랑을 베풀었어도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오래도록 간직된다는 점을 꼭 염두에 두십시오.
 
 일시적인 안정만을 위해서 재혼하지는 마십시오. 결손 부모들 가운데는 여우를 피하려다가 범을 만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에 대해 무책임한 한 사람과 결별하자마자 곧 다른 배우자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외롭고 우울하고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쉽게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런 재혼은 또 다른 파국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내가 아는 성도들 중에도 불신자와 결혼을 해서 그 문제가 한없이 복잡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자신과 성격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심과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편벽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바탕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불행으로 이어질 결혼이라면 차라리 혼자 사는 편이 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한 지침
 
 성도들이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결손 부모와 그 자녀들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를 파악하십시오. 먼저 결손 부모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이해, 격려가 필요합니다.
 
 아무렇게나 판단하는 자세를 피하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공평하시고 끝없는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도 결손 부모, 즉 부부 중 하나가 죽거나 별거 혹은 이혼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이런 비극을 자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결손 부모와 자녀들에게 다가가십시오. 그들은 부모님의 보살핌과 사랑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쏟더라도 그 자녀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한 젊은 부부와 상담했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더 이상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이들의 결혼 생활을 지속시키려 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아이를 두고 부인과 이혼하기로 결심했고 이런 그의 마음을 누구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떠나 버리고 나자, 딸과 함께 남겨진 부인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기 시작했고 나는 매주일 만나는 이들 모녀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아이와 놀아 주기도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친해지려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떠나버린 아빠 역할을 대신하려 했지만 이런 내 노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빠나 엄마의 사랑을 모두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요구를 어느 한 사람이 다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결손 가정의 한 아이를 정하여 그 아이에게 서서히 관심을 가지고 다가간다면, 그 아이와 부모에게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놀라운 결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효과적인 제안을 두 가지 하겠습니다.
 
 먼저, 교회의 유치부와 주일 학교의 교사를 남녀 같은 수로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로도 결손 가정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결손 가정 가운데 아이를 교회에서 돌보아 주길 원하는 부모에게 서식을 나눠주고 그것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하십시오. 또 그 아이들을 돌볼 성도들에게도 같은 서식을 나누어 주고 작성하여 제출하게 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이 둘을 1:1로 서로 연결시켜 주면 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결손 부모가 아이를 돌보아 주는 성도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거나 또는 도와주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한꺼번에 주려고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남의 자녀를 돌본답시고 자기 자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자칫하면 감정이 개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혼자된 엄마는 자기 아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는 남자 선생님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선한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 불미스런 결과로 끝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런 경우에 대비해 부부가 같이 한 아이를 돕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 가정의 과제
 
 가족 전체가 한 결손 가정과 교제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가정을 위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며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 등, 두 가정이 함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입니다.

제11장
이혼과 재혼의 성경적인 관점
 
 최근들어 이혼률이 해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1940년대에는 6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했고, 20년 후인 1960년대에는 4쌍마다 1쌍이 이혼했으며, 1970년대에는 3쌍마다 거의 1쌍씩 이혼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반전시킬 만한 커다란 변화가 없이 계속해서 이와 같은 추세로 나간다면, 2000년대에는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1쌍이 결혼하면 다른 1쌍이 이혼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실화되고 있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일고 있는 세상적 조류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부부 중에도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인해 고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극복하고자 이혼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비근한 예로, 어떤 지방에서는 수십 명의 이혼자들이 한꺼번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인 일도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혼이라는 악몽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게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새로운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 이혼하려는 부부가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이들을 돕겠습니까?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조화롭지 못한 불행한 결혼 생활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더 이상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자기 배우자보다 가른 사람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고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또한 서로의 관계가,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처럼 냉랭하여 함께 있는 것조차 아주 불편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상담해 주겠습니까?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겠습니까? 아니,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혹시 여러분 자신은 아닙니까?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도 있겠으나 그것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가능성이 큽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지침은 인간적인 모범 답안만 제시할 뿐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 상담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전문 카운셀러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들의 조언이나 견해에는 개인적인 주관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공통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관점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관점
 
 성경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 우리가 믿고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성경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친구들, 동료 교사들, 목사님들 중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학 사상이나 관점에 따라 주장하는 바는 달라도 합치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재림 등과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결론을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즉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성경에 명확히 기록된 내용에 한해서만 교리화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신중하게 의견을 검토한 후 발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신중하게 의견을 검토한 후 발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일이든지 성급하게 결정하는 데 익숙해져서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하는 때가 매우 드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뇌리에 맴돌고 있기에 더욱 그렇지요. 또한 우리는 흑백이 분명하지 못할 경우에는 대단한 실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본장에 제시된 의문점 가운데서도 정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성경이 뚜렷한 답안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20세기의 특수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생활에 나타난 개별적 문제에 대한 해답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는 계시의 말씀으로 주어진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정도를 서두로 해두고 결혼과 이혼, 재혼에 관해서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내용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이혼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계획에는 원래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결혼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에 남은 한 쪽이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롬 7:1-4; 고전 7:8,9; 딤전 5:14).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편과 아내로 묶어 주셨을 때는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기까지 영구히 함께 사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는 말씀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연합'이란 말은 아주 강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이것은 곧 결혼 관계의 항구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신성한 결혼 생활로 들어가는 부부를 향해 하나님이 원래 가지고 계셨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바로 이 구절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이렇듯이 이혼은 하나님의 본래 계획과 완전하신 뜻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히 못박으셨습니다.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말 2:15,16).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습니다. 죄는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는 왜곡되고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도 포함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는 이혼과 재혼의 문제가 제외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이혼하라는 말은 없지만 이혼을 허용하신 이유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신명기 24:1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내가 '수치되는 일'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이혼 증서'를 내어 주라고 합니다. 이 수치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위의 두 경우에서는 남편과 아내 모두 재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신 24:2,3).
 
 이 말씀의 본 의미는 이혼의 허용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이혼과 재혼을 어쩔 수 없이 용납하시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예증과 사례가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특수한 상황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한 가지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신명기 24장에 나타나 있는 '수치되는 일'이 어떤 종류의 부정을 말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것이 성적인 부도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간음죄는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는데 여기에는 사형에 관한 말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레 20:10; 신 22:22). 뿐만 아니라 신명기의 예는 여자의 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벌해야 합니까? 남자에게는 면책 특권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막 10:11,12; 요 8:11). 이 점에 관하여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죄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은 내용이나 성경이 침묵하는 내용조차 아전 인수 격으로 이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일부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말씀을 되풀이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도 이런 의도에서였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이 질문의 동기는 예수님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마음에서 유발된 것입니다.
 
 위의 질문을 이해하려면 일부 유대 지도자들이 신명기 24장 말씀에 대해 해석한 내용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은 유대 율법에 보면 남편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만약 아내가 밀가루 반죽을 떼어 놓지 않거나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으면...만약 아내가 머리를 묶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거나 거리에서 수다를 떨거나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하면...또한 (아내가) 목소리 큰 여자일 경우 목소리 큰 여자란? 집안에서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이웃에게 들릴 정도."
 
 만약 이 해석이 하나님의 참 뜻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다면 오늘날 이혼의 사유에 저촉되지 않는 여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위의 율법은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탈을 쓴 남자의 악한 본성이 여자를 얼마나 억압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는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최초의 결혼으로 소급해 올라가 말씀하십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있었던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의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쭈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약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4-9).
 
 신명기 24:1-4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혼에 관한 말씀 중에서 이혼을 명령하는 듯한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모세의 말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약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마 19:8).
 
 그러나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도 우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모든 질문에 대답을 주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제시하신 '음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성경 학자들도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각자 의견을 달리합니다(음행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르에이아'는 NIV에서는 '불성실한 결혼 생활', KJV에서는 '음행'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불법적인 성행위나 건전하지 못한 생활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고전 5:1에서는 이 말이 근친 상간으로 번역되었고, 행 15:20에서는 이성간의 관계를 다룬 유대인의 법 혹은 남녀를 위한 성에 관한 법률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듯합니다).
 
 그러면 성경 학자들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다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혼과 재혼에 관한 모든 해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본래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에는 이혼과 재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부부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재혼을 허락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결혼이란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에게 책임을 추궁하셨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엄연히 두 사람의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 파괴될 경우, 어느 쪽이든 그 책임의 비중이 더 큰 쪽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죄는 '보편적으로' 적용되지만 심판은 '개별적으로'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는 어느 한 편이 큰 잘못을 범하게 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노력하던 상대편까지도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한편의 부조화로 더 이상 결혼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어떤 죄라도 더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세 번째 내용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간음이나 살인은 중죄에 해당하지만 이것마저도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도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
 
 사도 요한도 이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말씀 가운데 이혼과 재혼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은 면이 좀 있을 수 있겠지만 용서에 한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깨끗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능력과 가치를 저하시키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혼과 관계되는 죄'를 아주 특별하게 취급하며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듯 성경을 잘못 이해한다면 우리는 말씀과 일치되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치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예로서 다윗 왕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인 그 당시에 다윗 왕은 간음에다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죄값으로 처형되어야 마땅했습니다(레 20:10).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용서에 관한 예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용서의 '도구'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율법을 인용하며 그 여자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이라고 쓰썼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씩 슬금슬금 그분을 떠나가고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이 무얼 쓰썼을까 늘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각 사람들이 지은 간음죄의 횟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받은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그 여자와 다를 바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녀를 징벌할 권리가 없다고 스스로 느낀 것입니다. 무리가 모두 떠나간 뒤 그 여자와 단 둘이 남게 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용서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11).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약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구약시대에도 정죄의 법보다 더 높은 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용서의 법입니다. 이 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고하신 희생을 생각하면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상대편을 받아들일 때 드디어 그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네 번째 내용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죄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혼과 재혼에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우리가 인정하고 수용해야 하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일치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고도 모르는 체 그냥 무마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구성을 결혼의 이상으로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이상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그 결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죄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그 결과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런 사실은 다윗의 경우에서도 발견됩니다. 비록 그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그의 잘못된 본을 따라 죄를 지은 자식들로 인하여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비의 죄를 그 자식 삼사 대까지 보응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출 20:5)이 적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영구성이라는 하나님의 결혼에 대한 이상을 깨뜨리게 되면 그 영향력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끼치게 됩니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혼으로 인해 파생된 불행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한 부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까지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바로 자녀들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대로 우리는 이혼과 관계된 성경 말씀을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혼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죄가 사람들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실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죄가 아무리 흉악하더라도 말입니다. 넷째,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에서 파급되는 악영향까지 모두 제거해 주겠다는 약속은 결코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오늘날의 이혼과 재혼 문제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네 가지 교훈에 근거해서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경의 특수하면서도 얼마 안되는 예증들과 교훈을 참고한다면, 현 시대에 이혼이나 재혼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충분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정에 대해 일일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 네 가지 교훈적 충고를 이용해서 성경의 예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석하고 적용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지침이 없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혼과 재혼 사례들이 서로 모순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교훈을 비추어 생각해 보면 조화 일관성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질문과 답변들은 특수한 상황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입장을 진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확증적으로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조심스럽게 객관적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1.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생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용서의 법에 관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관한 한 모든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면 다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죄의 결과까지 완전하게 정리해 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혼의 결과는 개인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또 자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이혼이 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쉽게 지워 버릴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뇌세포의 구조상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태를 늘 비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과거에 너무 집착해서 혼란과 불행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기회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감정상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치유됩니다.
 
 2. 어느 한 쪽이 상대방에 대해 불성실했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남녀간의 결혼 관계가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으로 인해 결혼 관계가 절대로 깨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비록 결혼 관계가 인간에 의해 깨어질 수도 있긴 하지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이 결혼 관계가 끝까지 유지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마땅히 용서해야 하는데, 그 대상 중에는 배우자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이혼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쪽이 성적인 부도덕을 저지르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나와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결혼 생활을 회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쪽에 대해서는 정죄하시지 않으며, 이혼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32과 19:9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적인 부분에서 '결혼 생활의 불성실'이 있는 경우에 하나님은 이혼을 허락하십니다.
 
 3. 결혼 생활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은 재혼이 가능합니까?
 
 그렇습니다.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경우에서의 이혼은 결혼 관계를 청산하고 그 사람에게 대시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인 부부 사이에서 비록 성적인 불성실은 없지만 성격상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전 7:10,11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 대답하고 있습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그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했던 질문(고전 7:1)을 우리가 다시 한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했듯이 이혼은 피하고 스스로 그 문제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적인 부도덕 이외의 이유로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간음죄입니다. 게다가 재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부부는 서로 화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대한 노력했는데도 화목하지 못한다면 이혼은 허용되지만 재혼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5. 부부가 둘 다 그리스도인인 경우, 한 쪽에서는 화합하려고 애쓰는 반면 상대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는 재혼이 정당화됩니까?
 
 만약 화합을 거부하는 쪽이 다른 사람과 먼저 재혼한다면, 이것은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때 남은 한 쪽은 성경의 예에 근거해서 자유롭게 되며 재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비추어 또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충만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한 쪽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대해 주는 데도 상대가 도무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하지 않고 요지 부동일 때는 믿지 않는 자로 간주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경우가 곧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다음 문제, 바로 그리스도인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을 때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6. 그리스도인이 믿지 않는 자와 결혼했는데 그 상대가 이혼을 원할 경우 어떻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배우자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그 상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고대해야 합니다. 이것은 벧전 3:1-7에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바와 같습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를 거론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날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을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2-15).
 
 이 구절에서 보면 믿지 않는 배우자가 상대를 떠나고 싶어하며 화합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그에게서 자유할 수 있으며, 재혼도 할 수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 7:15)라는 바울의 말도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처럼 결혼 생활에 더 이상 얽매일 것이 없다는 말은 재혼할 자유가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단 반드시 그리스도인과 재혼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제5항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만약 결합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믿는 배우자가 교회의 훈계조차 도외시한다면 화합을 원하는 배우자는 그를 불신자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배우자에게 이혼과 재혼의 자유를 부여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고전 7:15)고 한 바울의 말이 이 경우에 적용됩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쪽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 후에야만 가능합니다.
 
 7. 만약 믿는 사람이, 과거에는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모조리 어겼지만 이제는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라는 말도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지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결혼 생활에 관련된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에 따른다면, 우리는 혼전 성관계도 이같은 경우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성경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혼전 성관계를 당연히 허락하시지 않지만 이것까지도 관대히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건 불신자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을 경우(고전 6:16), 그 잘못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뢴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어느 것을 보더라도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흔히 부정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명시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성적 문란은 다 같은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이 이런 죄는 용서하시고 저런 죄는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결혼 생활 중의 성적 타락과 마찬가지로 혼전 성관계도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막상 결혼 생활에 직접 맞닥쳐서는 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인한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죄 용서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8. 이혼한 후 재혼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섬기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딤전 3:2과 딛 1:6에 나오는 장로의 자격 가운데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부분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헬라어는 단지 '한 여자와 한 남자' 혹은 '한 아내와 남편'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문법적으로 무척 애매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의도를 알아 보려면 좀 더 넓은 성경적, 문화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요구하는 자격은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이라면 남녀 문제에 있어서 오로지 자기 아내에게만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방 신전에서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말씀입니다. 1세기 당시에는 사회 지도자들이 신전에 소속된 여자들과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맺었으니까요.
 
 덧붙일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울 때는 반드시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타나는 자격 요건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의 경우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지 또 가정에 위계 질서가 잘 잡혀 있는지를 살펴본 후 결정해야 합니다.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사람은 대부분 영적인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것은 현재의 결혼 상태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런 사람은 영적인 자질 면에서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 모든 조건을 다 고려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혼한 후 재혼한 사람이더라도 다른 자질들이 다 성경에 제시한 요건에 부합될 경우라면 단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바울의 말을 근거로 그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함부로 반대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그는 살인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 유대교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그 당시 바울은, 자신은 율법에 충실할 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살인은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죄를 숨김 없이 고백하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 주셨고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의 전체 내용의 특히 용서를 강조하시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혼과 재혼을 살인보다 더 심한 잘못리라고 간주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인간을 다루시는 그 분의 방법에 전혀 맞지 않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단 이혼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결혼이 영구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현재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자신의 이혼 경력을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런 과거를 이야기 해봐야 사단으로 하여금 교회를 혼란하게 할 틈만 제공하게 될 뿐입니다.

재혼을 위한 실제적인 지침
 
 만약 여러분이 성경적 원리를 근거로 해서 재혼하려거든, 다음의 내용들을 고랴하여 결정하면 다소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현재의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가? 재결합을 위해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만약 배우자가 먼저 재혼했으면 물론 무의미하겠지만 말입니다.)
 
 2.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떤가? 최상의 상태에 있는가? 나는 영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는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런 점들입니다. 저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먼저 점검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재혼을 권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시 결혼한다면 필경 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3. 나는 심리적인 면에서 건전한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여러분 자신에 대한 견해를 기탄 없이 발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에게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면이 발견된다면 그 문제 먼저 해결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이혼의 중요한 오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할 점: 재혼을 생각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먼저 체크하고 해결해야 하는 부분은 상한 마음, 분노, 실망, 자제력 결여, 성적인 문제 등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심리적인 콤플렉스나 신체적인 이상으로 인해 첫 번째 결혼 생활에 실패했다면 두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요인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재혼을 하지 말라고 단도 직입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경제적인 안정만을 위해 재혼한다면 이 결혼도 곧 이혼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니까요.
 
 4. 현재 나의 심리 상태는 또 다른 가정을 꾸며 결혼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 만큼 건전한가?
 
 이혼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심리적인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신 상대방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상대에게 아무 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을 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라면 재혼을 생각하는 것은 정말 바보짓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재혼한다면 그대로 파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5. 나는 내 자신의 인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재혼을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유능한 신앙 상담자를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허심 탄회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고 여러분의 정신적 성숙도를 정확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조사를 의뢰하십시오.
 
 6. 내가 재혼하려고 하는 사람도 이혼자인가?
 
 상대방도 이혼자인 경우의 재혼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의 문제가 여러분의 입장과 똑같을 경우라면 그 결혼이 어려움에 처할 확률은 두 배로 커집니다. 더욱이 두 번째 이혼은 첫 번째 이혼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며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도 큰 어려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위한 과제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을 만났을 때, 본과에 나온 지침들을 이용해서 어떻게 도울 것인지 함께 토의해 보십시오.

제12장
성경적 가정의 기능과 형식
 
 에디스 쉐퍼(Edith Schaeffer)는 가정을 하나의 모빌(Mobile)로 비유했습니다. "가정은 변화무쌍한 모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 있는 모빌이어서 손으로 만든 것이나 박물관에 진열된 것과는 다릅니다. 기계, 동물, 식물 그 어느 모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람의 인격체로 구성된 복잡다단한 모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어떤 한 가지만을 비유로 들 때는 늘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빌을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비유한 것은 너무나도 적절합니다. 모빌은 언제나 역동적입니다. 항상 움직이고 변하며 가만히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모빌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한 남편과 아내가 결합하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부부의 인격과 소질은 가정에 무한한 창조성과 활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에 자녀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 생각,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가족의 구성원들은 모두 조금씩 변합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일어난 작은 변화가 가족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런 식으로 한 가정은 계속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겪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활동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비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구별되는 일반적인 차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가정의 기능 때문이며, 성경의 원리와 목표가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믿지 않는 가정과 구별되게 만듭니다. 이 기능과 원리, 목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20세기에도 기독교 가정을 이루기 위해 형식을 만들고 조직을 갖추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셩경의 목표와 기능, 원리
 
 지금까지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가정을 위한 성경의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 결혼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가정을 묘사하다 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하려면 아내와 남편 모두 자신의 이기심을 포기할 수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결혼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문제를 찾기 위해 노력은 하면서도 스스로가 먼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 중요한 지침을 곧잘 무시하곤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
 
 이 말은 세상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결혼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관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이후에 어느 한 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다른 한 편이 여전히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다 헌신적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부부중 어느 한 편이 이기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그런 가정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이는 우리가 문제를 미리 알고 있기만 한다면 그것에 대한 대처 방안을 준비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2. 두려운 현실
 
 성경에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에 절대로 변경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이 불변의 법칙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결과로 인해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이성과 교제할 때에는 자신을 끝까지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절제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인해 나중에 고민과 좌절에 빠지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십시오. 모든 일에 있어 가장 적절한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이 본래 정하신 계획대로 서로에 대하여 정당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그 시기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이 심리적으로 어떤 수치심도 느끼지 않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이미 작정해 놓으셨는데 매사에 너무 서두름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망치지 마십시오.
 
 수년 전 나는 미국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십대들 3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십대들의 생각이 어떤지를 알아 보기 위해서 40개 문항을 준비하고 각 문항에서 4가지 답(전혀 관심 없다, 조금 있다, 상당히 있다, 관심이 아주 많이 있다)를 제시했습니다.
 
 이 문항 가운데 하나가 '당신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었는데, 응답자 중 70% 이상이 '관심이 아주 많이 있다'에 답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젊은이들이 도덕적인 순결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가정의 영적인 세 가지 목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는 달성해야 할 세 가지 기본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목표와도 동일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의 바탕 위에서 행동하십시오.
 
 둘째, 소망을 더욱 크게 가지십시오. 가족 모두가 믿음으로 굳건히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바를 알고 또 아는 바를 믿으십시오. 성경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는 가정이 되길 소망하십시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십시오. 서로를 성심껏 보살펴 주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이고, 또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당신을 기꺼이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 것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사랑은 가정을 하나 되게 하며 가정으로 하여금 지역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줍니다.
 
 4. 가정의 네 가지 특정적인 기능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믿지 않는 가정과 구별되는 네 가지 기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의 여러 장에서 이 기능들을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복종, 사랑으로 머리 됨, 부모에 대한 순종, 그리스도인의 자녀 양육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들이 모두 '기능'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위의 기능들이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방법만 제시해 줄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제시한 [가정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참조하십시오.

가정에 대한 성경적 지침
 
 성경적인 가정의 기본적인 목표와 지침
 
 1. 결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한 상태인지를 확인할 것(롬 12:1,2)
 
 2. 결혼이란 남녀의 영원한 관계임을 인정할 것,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임을 인식할  것(마 19:4-6)
 
 3.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 생활에 장애가 될만한 일들을 미리 피하고 순결할 것
 
 4. 가정의 세 가지 기본적인 목표, 즉 온 가족의 믿음, 소망, 사랑이란 영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해 둘 것(고전 13:13)
 
 5.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고전 10:13)
 
 성경적 가정의 기능과 원리
 
 1. 기능:아내의 복종(엡 5:22,23)
 
   원리:a) 순종
 
   b)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
 
   c) 가족에 대한 사랑의 자세와 헌신
 
   d)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
 
 2. 기능:남편의 사랑으로 머리 됨(엡 5:25-33; 벧전 3:7)
 
   원리:a) 이타심
 
   b) 겸손과 섬김의 자세
 
   c) 자기 희생
 
   d) 이해심과 가족의 심리에 대한 민감성
 
 3. 기능:자녀의 순종(엡 6:1-3)
 
   원리:a) 존중
 
   b) 공경
 
 4. 기능:부모의 양육(엡 6:4)
 
   원리:a) 바른 아버지 상(像)
 
   b) 끊임없는 모범
 
   c) 자발성
 
   d) 훈계-사랑과 인내, 연령에 따른 차이와 개인의 성향을 보는 능력(신 6:6-9; 잠 22:6)

성경적 가정의 기본적인 형식과 구조
 
 이 부분에 있어서 성경은 미리 정해진 틀이나 조직 속에 우리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를 줌. 우리는 적절한 형식을 개발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목표에 도달하고 영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음.
 
 주의할 점:형식과 구조는 가정에서 매우 중요함. 만약 이것이 없다면 온갖 종류의 오해, 불안, 몰이해에 빠짐. 가장 중요한 원리는 우리가 형식에 속박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생활에 변화를 주고 융통성 있게 되는 것임.
성경적 가정의 형식과 구조에 대한 오해
 
 위에 제시한 내용은 이상의 기능들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 우리가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적절한 형식과 구조들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에 관해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가정의 형식과 구조에 대해서 두 가지를 혼동합니다.
 
 첫째,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성경에 거의 언급한 바가 없기 때문에 형식이나 구조 없이 무슨 일을 쉽게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형식 없이는 기능도 없고, 구조가 없으면 역할도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채 어떠한 일을 계획하면 그것은 곧 혼란과 혼동 그리고 비능률로 이어집니다.
 
 둘째로, 또 다른 오류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모두 성경의 기능 위에다 형식을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 보면, 성경이 요구하는 행위를 문화적인 행위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언제 만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앉고, 봉사는 어떤 식으로 하고, 일주일에 몇번 만나고, 누구와 말하고... 등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자유로워야 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형식 때문에 스스로를 구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살펴봅시다.
 
 1. 복종과 머리됨
 
 어떤 그리스도인은 복종과 머리 됨이란 개념을 여자는 절대로 집 밖에서 일을 하면 안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여자가 은행 구좌를 개설하거나 사업에 참여해 결정권을 행사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형식은 이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렇듯 규정짓지 않아도 우리는 결혼이나 가정 생활에서 복종과 머리 됨을 적절하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남편은 아내가 직장에서 일하면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을 아부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가정의 머리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이런 식으로 아내가 남편과 가정을 등한시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을 가지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결코 위배되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아내는 경제적인 문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행복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여자는 늘 남편의 보호 아래 살면서 사회 생활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입니다. 중요한 점은 가정의 기능을 위해 어떤 형식과 조직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이 성경의 원리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부부의 성적인 기능
 
 이 부분은 결혼 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실 이 기능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 속에 명시된 것으로 하나님은 가정의 영역 안에서는 이 기능에 관한 한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 관계는 규정하셨지만 결혼생활의 성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성행위시에 상대의 감정에 민감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아껴주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적인 기능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재생산의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결혼 생활에서의 성관계에도 지나친 규제를 가합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영향과 오해로 인한 것인데,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 없이 언제나 사랑 안에서 치유해야 합니다.
 
 3. 자녀 양육 방법
 
 자녀들을 주님의 가르침과 훈계로 양육하면 점차적으로 그들에 맞는 창조력을 개발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 양육에 있어 부모에게 어떤 고정된 틀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 자체는 자녀 양육과 훈계에 대한 부모의 자세에 끝없는 변화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이 아이에게 맞는 훈계 방법이라고 해서 저 아이에게도 맞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 한 명 한 명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해 주어야 하고 개개인의 독특한 요구에 맞게 응해 주어야만 합니다. 아이를 훈계하는 데 있어 정도(正道)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부모들에게 그들의 양육 방법에 대해 옳고 그름을 지적할 자격이 없습니다. 바람직한 자녀 양육 방법은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들의 요구와 성격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와 지침에 어긋나지 않으면 됩니다.
 
 4. 자녀들의 복종 방법
 
 자녀들의 복종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 표현법이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가정이나 복종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습니다. 다른 부모의 양육 방법이 자신의 방법과 다르다고 해서 그 부모를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원리와 기침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어느 부모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자녀에게 주장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원리와 지침에 비추어 부모가 원하는 바를 점검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 대한 요구가 지나치지 않았는가? 혹시 너무 이기적인 요구는 아닌가? 그것이 아이들을 무시한 처사는 아닌가? 지금의 생활 태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닌가? 부모의 사고가 아이의 생각과 동떨어져 있지는 않는가? 이성적으로 잘못 판단을 한 것은 아닌가? 지나치게 관대한 것은 아닌가?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태도가 다른 부모들과 판이하게 달라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나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부모의 태도는 곧 자녀에게도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생활 태도가 다른 부모와 너무 다르면 아이가 자기의 환경을 극복해 내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 저곳 다니면서 성공적인 자녀 양육이라든지 가정 생활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해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부모들에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이 모든 가정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람들은 그 방법이 자기 환경에 적절한지의 여부는 생각지 않고 무조건 모방하려고만 애씁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기본 목표, 원리, 성경적인 기능으로 되돌아가서 부모님들에게 이 방법을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하여야 자기에게 맞는 새로운 방법을 재창조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성경적인 접근법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이 원리들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 원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구리가 제안하는 방법에만 귀를 기울이는 예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객이 전도되어 원리보다 예증에 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론
 
 가정은 모빌과 같습니다. 가정은 인격체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늘 변하며 그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알다시피 모빌은 균형이 아주 조금만 맞지 않아도 움직입니다.
 
 바로 여기에 커다란 교훈이 있습니다. 꼭 필요해서 있어야만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실 형식에 있어서 변화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라는 '모빌'에도 바람은 불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람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더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말자"(엡 4:14)고 권면합니다.
 
 야고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약 1:5,6).
 
 그러므로 형식에 대한 자유는 언제나 성경의 진리에 부합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변적인 것은 굳게 잡아야 되지만 변동성이 심한 것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며 자유롭고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변화 자체를 위해 형식을 바꿀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자신이 겪게 될 불안감과 혼동을 이유로 변화를 거부하면 결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세상에 속한 가정들은 대부분 폭풍에 휘말린 배와 같습니다. 키가 다 부러지고 앞에는 암초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아무리 폭풍우가 몰아지는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다 할지라도 조금도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는 해로(海路)가 있고 자세히 그려져 있는 지도가 있고, 이미 이 길을 항해해 본 선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 축복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그리스도의 돕는 은혜로써 늘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가정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정의 과제
 
 각 과에 결론으로 나와 있는 과제를 다시 한 본 훑어보십시오. 여러분의 태도와 행동이 이 책을 공부하기 전과 비교해 볼 때 어떻게 달라졌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