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팔복 강해

서론
 
 일반적으로 마태복음 5-7장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산상수훈이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갈릴리 호수 부근의 산에 올라가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가르치신 산상설교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교의 대헌장이라고도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의 삶에 적용되거야 할 황금률이며 그리스도교 도덕의 근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세대주의자들은 이 윤리가 너무나 고상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미리 천년 왕국에 속한 자들이 지킬 규례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이 규례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이는 성도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통하여 이 산상수훈의 내용을 빠짐없이 몸소 실천해 보이셨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시금석으로서의 산상수훈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산상수훈을 시작하는 첫머리 마 5:1-12부분을 팔복이라 부른다. 구약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라면 산상수훈의 핵심은 팔복(Beatitude)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이 부분엔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바람직한 신앙 자세와 그에 따르는 하나님이 주시는 여덟가지 복이 소개되고 있다.
 
 한편 여기에서 제시되는 여덟가지 복은 현세만 국한되거나 물리적인 것들이 아니며 보다 종말론적인 성격을 다룬 것으로 영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복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자신의 왕으로 모시려하는 자들이 맛보며 누릴 수 있는 현세적 복이기도 하다. 즉 천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도래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 시민된 자들은 이러한 복을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팔복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팔복은 상호 유기적이므로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 놓는다면 곧 팔복이 연합하여 가르치고 있는 교훈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팔복은 하나의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각 선(line)을 우아하게 그려야 함과 동시에 선과 선의 결합이 자연스러워야 훌륭한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팔복 해설은 이와 같은 입장에서 팔복 하나 하나를 다룸과 동시에 성도가 추구해야 할 천국 윤리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교훈들과 어떤 유대감을 갖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간구하는 심정으로 한 부분 한 부분을 읽어나간다면 과거 갈릴리 바닷가 어느 야트막한 산에서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자들이 느꼈던 진한 감동을 오늘날 우리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산상 수훈의 첫머리가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유의해 보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인에게 저주를 선포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선포함으로써 설교를 시작하셨다. 실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케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함직한 일이 아닌가?
 
 또한 가난한 자,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또 얼마나 기이한가! 전에 그 누가 그런 자들을 이 땅에서 복 있는 자로 여긴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오늘날 신자가 아닌 그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복 있는 자로 여기고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가르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인가 이다.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인가? 흔히 세상에서 부러워하고 찬양하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며 자만하는 성품이지만, 심령의 가난은 이러한 성품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사를 자기 뜻대로 과감히 해 나가기로 마음 먹으며, 바로처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출 5:2)라고 말하는, 독자적이고도 도전적인 태도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나는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가치도 없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극도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서만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역사를 체험한 증거이다. 바로 탕자가 먼나라에서 "비로소 궁핍"하게 되었을 때(눅 15:14) 맨 먼저 각성하고 스스로의 위치에 대해 확인했던 바로 그 마음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마 11:5) 그들의 귀에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따라서 심령의 가난, 즉 자신이 비어있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그것은 나의 의가 모두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는 고통스러운 발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최선을 다한 행위조차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께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며 가증스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생긴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은 믿음의 소극적 측면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자신이 극도로 가치없음을 인식하는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고서 영적으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요 6:48-58)에 앞선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채우시도록 자아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것은 영적 결핍의 인식이며 궁핍의 인식이다. 이 때 이 첫 축복은 기본적인 것이 되며, 거듭난 모든 영혼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근본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눈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는 흙 속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은 그릇된 가르침과 세속성에 의해 그 자리를 비록 떠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이킬 방법을 알고 계시며, 또한 자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으로 반드시 돌이키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축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기르는 방법은 주 예수께서 마 11:29에 계시해 놓으셨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을 소유한 아는 복되다고 선포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그가 본성적으로 지녔던 성품과는 정반대 되는 성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요, 은혜의 거룩한 역사가 그의 속에서 일어난 증거를 그가 처음으로 확실히 소유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심령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외부에서 참된 부요를 찾게 하기 때문이고, 그가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2장
둘째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애통한다는 것이 인간 본성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귀찮고 지겨운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며 본 성적으로 유쾌하고 즐거운 일에 동참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본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귀에는 그것은 감동적인 복음이다.
 
 복을 받았다면 왜 "애통"하는가? "애통"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역설을 풀 열쇠를 가지고 있다.
 
 본문을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감탄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과 같이 말씀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세상의 논리와는 완전히 모순된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부유하고 쾌활한 자를 행복한 자로 여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행복하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모든 종류의 슬픔을 다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슬픔 중에는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도 있는 것이다(고후 7:10).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위로를 약속하신 애통은 영적인 것에 제한되어야 한다. 즉 복된 애통은 우리의 본성의 부패성과 우리의 행위가 야기한 엄청난 죄를 느끼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함을 깨달은 결과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위로를 약속하신 애통은 경건한 슬픔(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 자각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팔복 가운데 첫째 복은 그리스도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선포하신 축복이며, 우리는 이것을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가치없는 존재라는 것들 느끼도록 각성된 사람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제 그러한 가난에서 애통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사실 가난의 뒤를 따르는 애통은 실제로도 가난의 단짝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되는 애통은 앞선 가난이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별이나 고난 또는 실패에서 오는 애통 이상의 것임이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있는 것으로 말한 애통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절실한 궁핍에 시달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
라 놓은 불의에 대한 애통이며, 우리가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우리가 믿었던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항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애통은
항상 심령의 가난과 동행한다(피어슨 박사).


 예수님께서 축복을 선포하셨던 애통하는 심령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 눅 18:9-14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의 생생한 대조가 눈에 뜨인다.
 
 먼저, 첫번째 부류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이다. 그는 하나님을 쳐다보며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칠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말한 그대로 모두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죄의 문제를 전혀 해결치 못한 채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자기는 몰랐을지라도 그의 훌륭한 옷은 누더기이며 그의 횐 옷은 더러운 채로였다.
 
 그 다음 부류는 세리이다. 그는 멀리 서서 시편 기자의 말대로 자기의 죄악이 자기에게 미쳐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시 40:12) 모습을 보인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칠 뿐이었다. 자기 속의 부패함을 의식하고서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는다. 이 사람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 왜냐하면 그는 심령이 가난했고 죄로 인해 애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된 첫 표시가 있다. 심령이 가난해져 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죄 때문에 애통해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어느 한 교회에 속해 있거나 직분을 맡았다 하더라도, 천국을 본 적도, 그 곳에 들어간 적도 없는 사람이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겸손하고 회개하는 마음에 계셔 주신다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가! 이것은 구약에서도 거듭해서 거룩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즉, 그 눈에 하늘조차 깨끗하지 못하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성전이 아무리 장대하다 해도 그곳에서 적당한 거주지를 찾지 못하시는 분-사 57:15;사 66:2를 보라)께서 하신 놀라운 약속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귀절이 우선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죄에 대한 자책에서 오는 애통이지만, 결코 그것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애통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반드시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실로 진실한 신자에게는 애통할 거리가 많이 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병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라고 외치게 된다. "얽매이기 쉬운"(히 12:1) 불신과, 머리카락 수 보다 더 많이 저지르는 죄들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비탄이 된다.
 
 성도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한숨 짓고 절규한다. 때때로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 방황하려는 성향, 주님과의 영적 교제의 결여와 주님께 대한 우리의 엷은 사랑 때문에 우리는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지 않을 수 없다(시 137:2).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슬픔에 젖게 하는 애통의 이유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경건(딤후 3:5)이 사방에 있고, 많은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릇된 교리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끔찍한 불경이 행해지고 있으며, 주님의 백성 사이에 분열이 있고, 형제간에 싸움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서 끊임없이 성도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끔찍한 세상의 악과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간적인 고통도 우리로 하여금 속으로 신음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 대해 더욱 더 애통해 할 것이다. 이것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체험이다. (시 119:53;렘 13:17;14:17; 겔 9:4)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선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은 양심을 짓누르는 죄를 제거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세주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에게 성령께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적응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결과 성도는 그리스도의 속죄 피의 공로를 통해 값없고 완전한 용서함을 얻게 된다.
 
 이 거룩한 위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이다. 자신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 열납되어졌다고 확신하는 자의 마음에 이 평강이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고치시기 전에 치시며, 높이시기 전에 낮추신다. 마찬가지로 먼저 공의와 거룩함의 계시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일상 체험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핑계 할 수 없는 잘못에 대해 애통해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자기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요일 1:7) 확신에 의해 위로를 받는다. 비록 도처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괴로워 하지만, 그는 사탄이 영원히 지옥에 던져지고, 성도가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서 주 예수와 함께 다스릴 때가 속히 오고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진정한 위로를 얻는다.
 
 주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징계의 손을 대시지만, 그리고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히 12:11)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모두 자기에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을 성취하는 것임을 깨달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신자라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후 6:10)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종종 마라(Marah)의 쓴 물을 마셔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나 하나님께서는 그 옆에 그것을 달게 할 나무를 이미 심어 놓으신다(출 15:22-26).
 
 그렇다. 애통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거룩한 보혜사에 의해, 즉 주의 종의 사역과 그리스도인들의 격려의 말과 (이러한 것들이 없을 때) 성령께서 크신 권능으로 기억의 저장소에서 꺼내 마음에 분명히 생각나게 한 귀한 약속의 말씀에 의해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가장 좋은 술은 최후를 위해 남긴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고난이 덮치는 긴 밤 동안에 신자는 간고를 겪은 자(사 53:3, King James Version에서는 man of sorrow라고 되어 있다)라고도 불리는 주님과 교제를 나눠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함께 받아야 할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는 말씀을 기억하라. 구름 한점없는 아침이 밝아 올 때 우리가 받을 위로와 기쁨이 어떠한 것이 될지! 그 때 "슬픔과 탄식이 달아 나리라"(사 35:10). 그 때 계 21:3, 4에 나오는 하늘의 큰 음성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
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
나갔음이리라.


제3장
셋째 복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상당한 견해차가 있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인내, 또는 체념의 심령으로 이해했고, 어떤 사람들은 비이기심 또는 극기의 심령으로 여겼다. 또, 온순 내지 비 보복의 심령, 즉 조용히 고통을 감수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정의에는 각각 어느 정도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그 정의들이 온유라는 단어가 지닌 충분히 깊은 뜻을 캐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정의들이 모두 팔복 가운데 이 셋째 복의 순서에 주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으로는 온유를 겸손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온유한 자는" 즉 겸손한 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입증하는 다른 구절이 있는지 살펴보자.
 
 성경에서 처음으로 온유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은 민 12:3이다. 온유한 성품에 대한 이 구절의 기록은 앞부분의 기록과 대조를 이룬다. 즉 앞 부분에서 모세의 누이와 형인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다음과 같이 비방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러한 말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만과 오만, 즉 스스로 명예를 찾고 구하는 마음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명제로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는 구절이 뒤이어 나오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자기 형이나 누이의 심령과는 정반대되는 겸손한 심령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세는 실로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히 11:24-26에 기록되어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는 교훈을 준다.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지상의 부에 등을 돌리고서 사려 깊게도 왕궁에서의 호화로운 삶보다는 힘든 순례자의 삶을 택했다. 모세의 겸손은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처음으로 그에게 나타나 주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낼 소명을 주실 때도 다시 나타난다.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 얼마나 놀라운 겸손이 풍기고 있는가? 참으로 모세는 온유했다.
 
 위에서 제시한 온유의 정의를 뒷받침하며 또한 그렇게 정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성경 구절들이 또 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리로다"(시 25:9), 이 말씀의 뜻은 겸손하고 스스로 낮추는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께서 지도하고 가르치기로 약속하신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여기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온유 내지는 겸손이 잘 보여지고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분명히 이 말씀은 잘못을 저지르는 형제를 바로 잡는 데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자에게 겸손의 심령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닌가? 마땅히 성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한다.
 
 이처럼 겸손이란 말이 온유란 말을 설명한다. 이 두 단어가 엡 4:2에서 다시 결합되어 있는 점에 유의하라. 여기서는 그 순서가 "겸손과 온유"으로 되어 있다. 사려깊게도 마 11:29과 반대되는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두 단어는 동의어임에 틀림없다.
 
 이상의 여러 설명으로 성경에서 온유의 의미가 겸손이라는 것을 확정지워 보았다. 이제 이것이 본문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 보고, 그리고 나서 그러한 온유가 표현되는 방식을 규정해 보자.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이 팔복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영혼 속에서 체험적으로 실현되는 순서대로 나타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먼저, 심령의 가난, 즉 나의 부족함과 아무 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단계가 있다. 그 다음, 잃어버린 자 된 나의 형편에 대한 애통과 하나님을 거역한 나의 끔찍한 죄에 대한 슬픔이 있다. 그 다음으로 영적 체험의 순서에 의해 영혼의 겸손이 따른다.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여 자신의 무가치함과 결핍됨을 인식하는 자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흙 속에 던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역에서 사용하신 자인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4, 5).
 
 사도들이 사용한 무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감찰하고 책망하고 겸손케 하는 성경의 진리였다. 이것이 성령에 의해 효과적으로 사용될 때, 견고한 요새, 즉 죄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숨기는 피난처인 강한 편견과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변명을 무너뜨리는 강한 힘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교만한 상상과 인위적인 이론, 즉 구원에 대해 새롭게 거듭난 마음에 반대하던 모든 육적인 생각의 원수들이 말씀으로 사로 잡히게 될 때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모든 죄인은 바리새인과 같아서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한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첫 조상인 아담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의 수치를 가릴 것을 만드는 위선된 성향을 물려받았다.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산출된 제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열납되려 한 가인처럼 살고 있다. 한 마디도 말해, 우리는 개인의 공로에 의거하여 하나님 앞에 서려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써 구원을 사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써 천국을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겸손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육적인 생각과는 너무나 먼 거리감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란 모든 자랑거리를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교만한 마음에는 받아 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한 몫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며,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긍휼의 문제이고, 영생은 그것을 오직 자비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위해 빈 손으로 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에게는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의 악하고 가련한 상태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그의 귀에는 아름다우며 한없는 위로를 제공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의 영생은 영적 가난에 몸부림치는 자에게 적합한 것이다. 은혜, 즉 지옥에 가야 마땅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고귀한 은총을 바로 자신이 받아야만 된다고 여기는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소견대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는 생각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거부는 곧 영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꺼이 자신이 하나님 자비에 몸을 맡겨야만 하는 거지임을 인정하고 흙속에서 하나님께 절하게 된다. 한 때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종 엘리사가 알려준, 겸손을 요구하는 말에 반항하였지만, 그는 결국 교만의 병거(chariot)에서 내려와 주님 앞에서 흙 속에 앉는 것을 기뻐하게 된다.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나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종이 말한, 겸손케 하는 말씀 앞에 굴복했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자기의 무가치성을 인정할 때 거룩한 은총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거룩한 축복을 받는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부으사 가난한 자(K.J.V에서는 the meek, 즉 온유한 자라고 되어 있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 하심이라"(사 61:1).
 
 또한 이런 말씀도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K.J.V에서는 the meek,즉 온유한 자라고 되어 있다)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우선적으로 영혼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굴복할 때 내려진다. 또한 온유는 그리스도인에 의해 열매 맺고 그리스도인을 통해 생겨나는 "성령의 열매"(갈 5:22, 23)의 한 본질적 양상이기도 하다. 훈련과 고난에 의해 온화해지도록 교육받고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기게 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온유의 심령이다.
 
 온유는 생활에 있어서 모욕과 해를 참아 견디게 하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성도라 하더라도 그의 훈계와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며, 자기보다 남을 낫게 인정하도록 인도하고, 자신에게 선한 것이 있으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로 돌리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참된 온유는 나약함과는 철저히 구분된다. 행 16:35-37이 이것을 잘 증명한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하다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수감되었다. 그 다음날 관리들(magiska-tes)이 그들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바울은 간수들에게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속 중 한 사람이 안나스에게 심문당하는 주님을 쳤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23).
 
 온유한 심령의 완벽한 실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백성들은 비록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 할지라도 이 복된 심령이 변덕을 부려 종종 솟구쳐 오르는 육신적인 것에 의해 흐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3),에 스겔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겔 3:14). 요나가 기적적인 구원을 받은 후에도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된 것을 읽을 수 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욘 4:1). 겸손한 복음 전도자 바나바조차도 분한 마음으로 바울을 떠나 갔다(행 15:57-39).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를 주는가? 우리는 실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 주님께서는 시 37:11을 인용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약속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라는 시편 기록의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온유한 자는 현세의 좋은 것들을 크게 누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탐욕스럽고 악착같은 심령에서 벗어나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해 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시 37:16). 만족은 온유한 심령이 맺는 열매 중의 하나이다. 교만하고 마음이 들떠있는 자는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 악인이 궁궐에서 누리는 것보다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오두막집에서 누리는 복이 훨씬 더 큰 것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리라."(잠 15:16)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앞서 말했듯이 팔복 가운데 이 셋째 축복은 시 37:11을 인용한 것이다. 아마도 주 예수께서는 신약의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구약의 언어를 사용하셨을 것이다. 요 6:50-58의 피와 살 및 요한복음 3:5의 물은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 나오는 땅도 역시 그렇다. 히브리어와 회랍어에서 땅이라고 번역되는 주요 단어들은 문맥에 따라 문자적인 의미 이상으로 영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주님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
안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주님은 구약
의 예언의 언어로 새로운 축복을 말씀하고 계신다. 육신에
의한 이스라엘(이전의 섭리 아래 놓인 외적인 하나님의 백
성)은 영에 의한 이스라엘(새로운 섭리 아래 놓인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이다. 그리고 전자의 (지상적) 유산
인 가나안은 후자의 유산을 이루는 천상의 영적 축복 전체의
모형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섭리 아
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고유한 축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상속자, 즉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롬 8:17). 또한 그것은 "그리
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엡 1:3)
축복받는 것이며, 가나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통해 볼 수
있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죤 브라운(John Brown) 박사


 의심할 바 없이, 이 축복은 온유한 자가 궁극적으로 "의의 거하는 바... 새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제4장
넷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팔복 가운데서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복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각성된 사람의 마음 상태를 보여 준다.
 
 첫째로, 결핍감, 즉 나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의미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
 
 둘째로, 자아에 대한 판단, 즉 나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 및 형편없는 나의 상태에 대한 슬픔이 있다.
 
 셋째로,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노력의 중단, 즉 자신의 공로에 대한 모든 주장의 포기 및 하나님 앞에서 흙 속에 내려앉아 내 자리를 잡는 겸손함이 있다.
 
 그런데 여기 넷째 복에서는 영혼의 눈이 매우 특별한 이유 때문에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진다. 내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없는 의를 갈망하기 때문인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의라는 단어가 사용된 정확한 취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의 쓸데없는 논의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확실히 하는 최상의 길은 이 용어가 사용된 구약 성경의 기록을 신약의 서신에 의해 밝혀진 밝은 빛으로 비추어 보아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떨어지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 45:8) 이 구절의 상반절은 비유적인 언어로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을 가리키며, 하반절은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가신"(롬 4:25) 주님의 부활을 가리킨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원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 46:12, 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아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사 56:1).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라"(사 61:10).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과 동의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위의 인용한 성경 구절들은 보다 복음을 완전히 설명하는 로마서에서 확연히 밝혀진다. 롬  1:16, 17상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또 롬 3:22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5:19에는 다음과 같은 복된 선언이 있다.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법적으로 구성된)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법적으로 구성된) 의인이 되리라".
 
 롬 10:4에서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는 놀라운 선언을 발견하게 된다.
 
 죄인에게는 의가 있을 수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 각자 모두를 위한 완전한 의를 그리스도 안에 두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우리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모두 만족시키는 이러한 의는 우리의 대리자이자 보증인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제 이러한 의가 믿는 죄인에게 전가(즉, 법적으로 귀속)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옮겨진 것과 꼭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놓여진 것이다(고후 5:21). 지금까지 살펴본 몇 안 되는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한 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완전한 의라는 결정적이고도 복된 주제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간단히 요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우리의 영혼이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강렬한 욕구이다. 그러면 이러한 영혼의 욕구는 어떻게 생겨 나는가?
 
 첫째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우리 마음에 계시하신다. 결코 상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완전한 기준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저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것을 상기시켜 주신다.
 
 둘째로, 자신의 처참한 빈곤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서 떨고 있는 영혼은 자신에게 서는 아무런 도움을 찾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깨달음 때문에 애통하고 신음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신도 그러한가?
 
 셋째로, 성령께서는 이 때 심한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을 그 마음에 일으키시는데, 이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는 죄인은 위안을 찾으며, 자신의 외부에서 오는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 때 믿는 자의 눈은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이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지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복처럼 이 넷째 복도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이키기 전에 느끼게 되는 첫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죄인의 마음 속에서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갈망을 가리키기도 한다.
 
 성도들은 다양한 간격을 두고 이 은혜를 거듭 체험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기를 갈망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보아 이 굶주림과 목마름은 하나님을 찾는 거듭난 영혼의 갈급(시 42:1), 주와 더 가까이 동행 하고자 하는 갈망,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더 완벽히 일치하 고자하는 바램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에게 원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거룩한 축복을 바라는 새로운 인간 본성의 열망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은 참으로 역설적이어서 육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생명의 떡이시며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는 주님과 생명력 있는 연합을 이룬 사람이 아직도 굶주리고 목마를 수 있을까? 물론이다. 거듭난 마음을 가진 자는 항상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동사의 시제에 유의하라. "주렸고 목말랐던 자는 복이 있나니"가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독자여, 당신도 그러한가? 아니면 당신이 이미 이룬 것에 흡족해 하며 당신의 조건에 만족해 하고 있는가?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항상 참된 성도가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빌 3:8-14).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본문의 상반절처럼 이 부분도 이중적인 성취, 즉 첫 성취와 계속되는 성취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영혼에 굶주림과 목마름이 생기게 하실 때는,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가련한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실 때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이끌려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일한 의로서 그리스도를 환영하게 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때에 그는 기쁨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이 새로 발견한 의로 고백하고 주 안에서만 자랑함을 가진다(고전 1:30, 31).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성도"(고전 1:2;고후 1:1;엡 1:1;빌 1:1)라 부르시는데, 이들은 술취하지 않고(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 충만을 계속 체험하게 된다(엡 5:18). 또한 그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으로 충만하게 된다(빌 4:7).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우리는 언젠가는 슬픔이 섞이지 않은 거룩한 축복으로만 충만해질 것이다. 또한 이때 우리는 우리 안에 모든 사랑과 복종의 일을 행하신 주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로 충만해질 것인데(빌 2:12, 13) 이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 역사의 가시적 열매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이 "여호와를 찾는 자"(시 34:10)에게 주지 않을 수 없는 "좋은 것으로, 주리는 자를 배불리셨으며"(눅 1:53), 주님의 풀밭에 있는 양인 우리들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우리의 잔이 넘치게 된다(시 23:5, 6).
 
 그러나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고전 2:9)을 미리 맛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에서 우리는 완전한 거룩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을"(요일 3:2)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는 영원히 죄 문제를 해결받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주리지 아니하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아니 할"것이다.


제5장
다섯째 복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 가운데 이미 살펴 본 처음 네 가지의 복에서는 영적 각성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명확한 과정을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여 가르쳐 주셨다.
 
 첫째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심령의 가난이다.
 
 둘째로, 죄에 대한 자각, 즉 경건한 슬픔(고후 7:9,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되어 있다)을 낳는 죄의식이 있다. 이것은 애통이다.
 
 셋째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겸손하게 된다. 이것은 온유이다.
 
 넷째로, 그리스도와 구원을 바라는 강렬한 열망이 뒤따른다. 이것은 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소극적인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단지 그것은 믿음을 가진 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복 가운데 나머지 네 가지 복에서는 믿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적극적인 선, 즉 새로운 창조에 의해 맺게 되는 열매와 변화된 성품을 가진 자가 누리는 축복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되는 순서에 있어서도 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본문이 공로 장사꾼에 의해 얼마나 도매금으로 왜곡되어 왔는가! 성경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잘못된 주장을 뒷받침할 양으로 이 구절을 하나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 주님의 의도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긍휼을 기대해야 할지 그 토대를 놓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주님의 긍휼하심을 맛본 참 제자의 성품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자비로움(긍휼히 여김)이야말로 이미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나타내어야 할 하나의 특성이다.
 
 문맥상 이 복이 차지하는 위치가 그 해석에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팔복 가운데 앞서 나오는 네 가지는 성령에 의해 깨닫게 된 사람의 마음에서 최초로 일어나는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바로 앞 절에서는 영혼이 그리스도를 찾아 굶주리고 목마르다가 주님에 의해 채워진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충만함의 첫 결과이자 증거가 나타난다. 즉, 주님의 긍휼을 얻어 구원 받은 죄인이 이제는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 긍휼을 베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구원의 거룩한 은혜를 인간 행위에 의한 것으로 뒤집어 엎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놀라운 긍휼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
 
 자비로움(긍휼히 여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웃과 그리스도인을 향해 은혜로운 의향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온유함과 자비심이다.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괴로움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보는 심령이다. 또한 죄를 범한 자를 관대히 다루게 하고 복수하는 일을 꾸짖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은혜이다.


 그것은 용서하는 심령이다. 그것은 보복하지 않는 심령
이다. 그것은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여
해를 해로 갚지 않고 악 대신에 선으로, 미움 대신에 사
랑으로 갚는 심령이다.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하
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죄 용서받은 영혼은 긍휼의 아
름다움을 알게 되며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것과 같은
은혜를 자신과 같은 죄인이었던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기를
갈망한다(A:T. 피어슨 박사).


 이 긍휼히 여기는 기질의 근원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는데도 친절한 의향이나 괴로움을 당하는 자에 대한 동정, 그리고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이 아무리 감탄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축복을 선포한 그 자비로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육신의 상냥함에는 영적 가치가 없다.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에 의거하여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다섯째 복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붙잡힌 자가 그 긍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긍휼이 있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자비로움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속에 심겨진 새로운 본성의 산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같이 하잘것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동정과 오래 참으심을 묵상할 때 우러나온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주 예수의 고난을 통해 내가 건짐을 받은 그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더욱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거룩한 은혜에 진 빛을 의식하면 할수록 나에게 잘못하고 해를 주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더 긍휼을 베풀어 주게 될 것이다.
 
 자비로움(긍휼히 여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날 때 받는 영적 본성의 한 속성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자비로움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발견되는 많은 긍휼의 반영일 뿐이다. 또한 자비로움은 자비로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으로 생기는 한 결과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베풀어지지 는 않는다. 때로 육신의 방종에 의해 막히거나 좌절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일반적 경향과 그 생활의 주류를 고려할 때 자비로움이 거듭난 새 사람에게 빠뜨릴 수 없는 특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시 37:21)
 
 조카 롯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한 후에, 아브라함이 뒤쫓아가 곤경에 처한 롯을 구해낸 것은 긍휼 때문이었다(창 14:1-16).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그처럼 가혹하게 학대한 후에 요셉이 그들을 아무 대가 없이 용서한 것도 긍휼 때문이었다(창 50:15-21).
 
 미리암이 모세에게 반역하여 여호와께서 문둥병으로 그녀를 치신 후에, 모세가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 라고 부르짖었던 것도 긍휼 때문이었다.
 
 사울이 다윗의 손 안에 있었을 때, 다윗이 자기의 적인 그 악한 왕의 목숨에 손대지 않은 것 또한 긍휼 때문이었다.
 
 슬프게도 이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그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시 109:16) 하였다고 전해진다.
 
 롬 12:8에서 사도 바울은 긍휼을 베푸는 심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가난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돈을 주는 것이지만, 참으로 이 사랑의 원리는 고통받는 자에 대한 모든 연민에도 적용된다.
 
 긍휼은 자발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즐거움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이것이 도움받는 자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며 고난 당하는 자들의 슬픔을 가라앉힌다. 봉사에 더 많은 가치를 주는 것은 바로 즐거움을 동반할 때이다.
 
 성경에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라고 되어 있으니, 반드시 주님은 주님의 이러한 훈계에 응하는 심령에 주목하실 것이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상생활을 통치하시기 위해 제정하신 원칙 내지는 법칙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말씀으로 요약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남을 대할 때 자비롭게 대하는 그리스도인은 동료들에 의해서도 자비로운 대우를 받을 것이다. 왜냐 하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마 7:2)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와 인자(K.J.V.에는 mercy, 즉 '긍휼'으로 되어 있다)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잠 21:21)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에게 긍휼을 보여 주는 사람은 그것에 의해 스스로 얻는 것이 있다. 즉 "인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잠 11:17)하는 것이다.
 
 자비와 동정을 베풀 때는, 이기적인 사람이 가장 크게 느끼는 희열과도 감히 비교가 되지 않는 내적 만족이 생긴다.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잠 14:21)이기 때문이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먼저 "인애(K.J.V에서 mercy, 즉 '긍휼'으로 되어 있다)를 기뻐" 하시는(미 7:18) 하나님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근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만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자비로운 그리스도인이 남에게 은혜를 베품으로써 자신의 영혼에 생겨나는 기쁨을 맛볼 뿐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그 통치하는 섭리 속에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자비로움이 동료의 손길에 의해 그에게 다시 돌아가도록 역사하시며 그 그리스도인도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진리를 다윗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시 18:25). 한편, 예수께서도 그 제자들에게 이와같은 말씀으로 훈계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축복 역시 앞서 말한 네가지 복에 속한 약속처럼 그 최종 성취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딤후 1:16, 18에서는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얼굴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유 1:21에는 또한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주께서 영광중에 재임하실 때 구속된 백성으로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고백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제6장
여섯째 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팔복 가운데 여섯째 복도 주님의 적, 즉 바리새인들처럼 진리의 투사로 자처하여,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감히 주장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성결을 자랑해 온 대적들에 의해 행위에 의한 구원의 증거 구절로 도매금으로 왜곡된 것이다. 그 어느 때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옛사람의 완전 정결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미혹당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완전히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육적인 본성이 뿌리뽑혀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지을 욕망이나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사람들조차도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천명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물론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헛된 속임수를 뒷받침하기 위해 속죄의 법적 유익을 나타내는 성경 구절에 편승한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7)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타락을 조장하는 더러운 악의 모든 자취로부터 깨끗하게 씻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이 법적인 죄의 말소로 인해 효력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을 가리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한 것은, 성령께서 중생(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시기 전에 있던 내적 성향과는 완전히 다른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새 성향에 대해 말한 것이다.
 
 마음의 청결이외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거룩한 성도의 생애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노아는 술에 취했다(창 9:21). 아브라함은 속였다(창 12:13). 모세는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민 11:21).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욥 3:1). 엘리야는 공포에 떨며 이세벨로부터 도망쳤다(왕상 19:3).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친했다(마 26:58,마 26:69-75). 아마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가 확립되기 전에 저질러진 일이 아닙니까!"
 
 사실 그렇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계속해서 그런 일이 있어 왔다. 사도 바울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독교인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또 그의 체험은 어떠했는가? 그렇지만 로마서 7장을 읽어 보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했을 때, 악이 그의 앞에 있었다(21절). 그의 지체 속에는 한 다른 법이 그의 마음의 법과 싸워 그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그를 사로잡아 갔다(23절). 그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김에도 불구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겼다(25절).
 
 사실은 우리에게 부정한 것이 남아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는 점을 발견하고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장 결정적인 찬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일단은 본문을 더 면밀히 살펴보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산상수훈의 어느 부분을 해석하려 하든지간에 맨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 설교하시던 대상이 유대주의 속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는 점이다. 성령의 깊은 가르침을 받고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우리 주님이 무리들 앞에서 설교를 하실 때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속한 영원한 성결 또는 청
결의 특징과, 그 특징에 결합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무언 중에 언급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로 오염된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 여
호와께 따로 성별된 백성이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 의식을 통해 살아 계신 유일한 참
신이신 자기들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러
한 신분을 소유하고 이러한 특권을 누리는 것을 유대인들은
자랑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신분과 더 높은 특권이 메시야의
통치를 받는 신민이 될 사람들에게 속했다. 그들은 외적으
로도 거룩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성소에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볼"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사람이라야 했다. 이렇게 볼 때, 유
대인의 외적 신분 및 특권과 대조하여, 메시야의 신민들의
영적 신분과 특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 앞에 제시된
이 귀절은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진리로 충만해 있다
(죤 브라운 박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이 중생할(거듭날) 때 받는 새 마음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거룩한 역사가 각 개인의 영혼에 일어난 결과로 생긴 성품의 도덕적 변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 두 가지 양상의 진리가 모두 여기에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이 복이 일련의 팔복 중에 차지하는 자리로 보아, 우리 구주께서 축복을 선포하신 마음의 청결은 거듭남에 동반되며 뒤따르는 내적 정화인 듯 하다. 따라서 내적 청결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자연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그리스도에 의해 경건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청결의 시발점은 성령께서 행하신 고귀한 중생의 역사임에 틀림 없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시 51:6)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 영적 청결은 요즈음 기독교계에 일어나고 있는 단순한 외적 쇄신 및 개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널리 보이는 것은 행위에 의해 구원을 찾는 손의 종교이거나 정통 교리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머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K.J.V에는 heart, 즉 '마음'이라 되어 있다)을 보신다"(삼상 16:7). 말하자면 주님은 지.정.의를 포함한 내적 총체를 보신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인도하실 자기의 백성에게 "새 마음"(겔 36:26)을 주셔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외모가 아니라 속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다. 이러한 값진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열납되어지는 것이 바로 청결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미 암시되었듯이 우리는 이 여섯째 복이, 중생 때에 받는 새 마음과 하나님께서 영혼에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 뒤따르는 인격의 변화를 모두 포함한다고 믿는다. 먼저, 마음의 청결에는 "중생의 씻음"(딛 3:5)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성질을 씻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씻음의 결과 이제 우리는 아래의 것 대신에 위의 것에 생각을 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한 뒤에 따르는 마음의 변화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때 모든 신자들이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행 15:9)을 겪게 된다.
 
 이에 동반되는 것이 양심을 씻는 일(히 10:22)인데, 이것은 죄의식의 짐을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결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롬 5:12)는 내적 깨달음이 생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팔복 가운데 여섯째 복에서 언급하시는 마음의 청결은 훨씬 그 이상의 것이다.
 
 청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러움과 혼란된 정서가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성실이자 순수이며 한마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갖추어야 할 한 자질로서, 우리는 그것을 경건한 단순성이라 정의 하고자 한다. 그것은 교묘함과 이중성의 반대이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은 악의 뿐만 아니라 교활과 위선도 치워 버린다. 따라서 단순히 겉으로 나타나는 청결한 말과 의롭게 보이는 외적 행복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의로운 동기와 의도의 청결함이 하나님의 자녀의 성품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중요한 시금석이 있다. 내 생각을 위의 것에 두고 있는가? 내 동기는 깨끗한가? 나는 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모이는가? 사담에게 보이려는 것인가, 아니면 주님과 만나 주님과 그 백성들과 함께 감미로운 교제를 누리기 위함인가?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에서 또다시 팔복에 속한 약속들이 단순히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성취를 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 영적 눈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똑똑히 보며 그 속성의 뛰어남을 인식한다. 영적 눈이 단순하여져서 세상의 분요로운 것으로부터 시선을 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에 속된 것을 볼 수 있으며 몸 전체가 진리의 빛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진리, 즉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믿음 속에서 그들은 "하
나님을 볼 것"이다. 그 진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으로(고후 4:6), 말하자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자하심이 합해진 광채를 훌륭하게
드러내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마음이 청
결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똑똑하고 만족스럽게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즐거운 교제를 누린다.
그는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다. 하나님의 생각이
그의 생각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된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현세에서조차 이렇게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강렬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훨씬 더 친밀해진다. 이전
세대(dispensation)의 특권과 비교하여 볼 때 지금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지만(고후 3:18), 더 높은 섭리
(economy)의 특권에 관하여서는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면에 있어서는 부분적
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
분적인 것이 폐해지고 온전한 것이 올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며,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알게 될 것이다(고전 13:9-12). 또는 시편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시 17:15). 그전
까지는 부분적인 것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 때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이 말씀을 완전히 이
해하게 될 것이다(죤 브라운 박사).

제7장
일곱째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일곱째 복은 팔복 중 가장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화평케 하는 자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범위를 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화평(평화)을 사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화평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서 피상적이 나마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인에게서도 가끔 발견되는, 일치와 조화에의 사랑이 투쟁과 분규에의 증오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일곱째 복에서 언급하는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한 참된 해석을 모색하는 데에 길잡이가 되는 것으로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1) 당시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성품, (2) 본문이 일련의 팔복에서 차지하는 위치, (3) 그 다음의 복과의 연결 관계 등이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심한 경멸과 증오로써 이방 민
족들을 대했다. 그들은 이방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민
에게 정복당하거나 멸망당할 때까지, 메시야의 지휘아래
일련의 공격전이 끊임없이 가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러한 사고는 의심할 바 없이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나는 바
이방 민족을 척결하였던 선조들의 경험에 대해 읽은 것을
기초로 한 생각이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면 분명히 유대
인들은 이교도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복
수해 줄 왕인 메시야 밑에서 일할 "복 있는" 자의 칭호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구원의 사역을 속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사역은 그들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
또한 그것은 그 질서를 세운 분의 탄생을 축하한 천사의
찬송과 얼마나 아름답게 일치하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
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죤 브라운 박사)


 화평케 하기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있기 전에 먼저 당연히 화평의 영이 있어야 하지만, 이 일곱째 복은 성품보다는 행위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산상수훈의 전반부에서 주 예수께서 자기 왕국의 신민이자 시민인 사람들의 성품을 정의하고 계시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선 주님은 거룩한 역사가 일어난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경험하는 첫 체험의 견지에서 그들의 상태를 묘사하고 계신다.
 
 처음의 네 축복은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마음이 경험하는 소극적 은혜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민들은 스스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의식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고 자신의 빈곤하고 죄악된 영적 상태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겸손한, 즉 온유한 사람이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않고, 다른 데서 오는 의를 갈망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이 네가지 복에 이어지는 그 다음의 세 가지 복에서 주님은 그리스도의 신민들이 경험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은혜를 지적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긍휼을 베푼다. 성령으로부터 영적인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만큼 단순해져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만드신 화평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화평을 누리게 하는 데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를 갈망한다.
 
 팔복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곱째 복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이 복과 바로 다음에 오는 복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관계이다. 앞의 여러 복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팔복이 명백히 한 쌍씩 묶여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었다. 심령의 가난에는 애통이 늘 수반 되며, 온유나 겸손에도 하나님의 의를 찾는 굶주림과 목마름이 수반된다. 인간을 향한 긍휼은 하나님을 향한 청결한 마음에 연합되며, 화평케 하는 것은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과 쌍을 이룬다. 따라서 팔복 가운데 여덟째 복을 설명하는 10-12절이 일곱째 복을 설명하는 9절을 푸는 열쇠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다른 관점으로부터 일곱째 복으로 접근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옛 계약하의 자기 백성과, 새 계약하의 자기 백성에게 각각 주신 임무간에 현저히 나타나는 대조를 고려해 보자.
 
 율법이 주어진 뒤 이스라엘은 칼을 들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여호와의 적들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에게는 화평을 선포케 하는 다른 명령을 주셨다. 이같은 복음의 경륜(gospel dispensation)을 통해 항상 우리들은 십자가의 사자로서 만민에게 나아가, 본성적으로 우리 주님과 원수된 사람들의 회개를 통한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
 
 둘째로, 이 화평케 하는 은혜는 그 앞 절에 언급된 여섯 가지 은혜를 보충한다. 이 복이 팔복 가운데 일곱번째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아마 바로 이 화평케 하는 속성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성품에 완전성과 전체성이 갖추어진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주님의 의도였다는 점이다.
 
 확실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은 화평의 사신으로서 보냄을 받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같은 죄인들의 구원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독교 신앙이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물려받는 복된 유산을 나누어 갖게 되리라고 기대할 권리가 없다.
 
 셋째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이 문제와 우리 주님이 마 5:10-12에서 언급하고 계시는 핍박 사이에는 명백한 연결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성품과 기본적 체험의 이 두 양상을 나란히 언급하심으로써 제자들이 본분을 다하는 중에 당하는 반대가 그들이 부름받아 섬기는 의무에 충실한 결과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케 함이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상대로 하여 적극적으로 싸움을 하고 있는 패역한 사람들을 하나임께 화해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하나님 손에 쥐어진 도구라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참고, 요 15:17-27).
 
 이에 대한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설명이 매우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과 반목한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는 사람들(고후 5:20) 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몇가지 이유들을 상당히 길게 다루었다.
 
 주석가들은 이와 같은 일곱번째 복에서, 합일을 꾀하고 사이가 멀어진 자들을 다시 가깝게 하는 사람에게 선포된 그리스도의 축복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도 그것이 매우 복된 행동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내주에 힘입어 평화와 일지된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는 점에 완전히 동의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여기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때만이 획득할 수 있는 평안을 간절히 바란다(욥 22:21). 믿는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골 1:19, 20).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화평의 왕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발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고" 있어야 한다(엡 6:15).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증거할 준비가 죄어 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아름답도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의 발이여!"(롬 10:15). 우리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 모두가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사실 그들은 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평화를 누린 후에는 다른 사람들도(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 평화에 이끌려 나아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넓은 의미를 적용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한 말씀은, 거친 물결을 잠잠케 하기를 기뻐하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며, 어려움을 처리하고 제거함으로써, 그리고 혹독한 것들을 중화시키고 가라앉힘으로써 우호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행위를 본 받고자 하는 심령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볼 수 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일컬음이라는 단어는 "승인됨"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들을 자기 아들로 인정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히 13:20)이시다. 놀라운 속
죄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다(엡 1:10). 그래서 기독교 진리의 영향 아
래에서 화평케 하는 자된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속에서 "순종하는 자녀들이"(벧전 1:14) 하나님과 함
께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같은 행동 원칙으로 활기에 차
있음을 보여준다(죤 브라운 박사).


 세상이 그들을 광신자라고 경멸하며, 종교학 교수가 그들을 편협한 종파의 신도로 간주하며 친지들이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시고, 그들을 구별하여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으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들 자신에게 증거하게 하신다. 그러나 미래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주님은 온 우주가 함께 보는 앞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실 것이다. 그들의 현재 생활 상태가 아무리 천하다 해도, 동료들에 의해 아무리 멸시와 오해를 받는다해도, 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따라서 성도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장차 영광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날 것을 고대해야 할 것이다(롬 8:19).


 제8장
여덟째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연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지만, 영적 지성으로는 쉽게 이해되는 이상한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이므로 신랄하게 비판 받기도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든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만족의 근원과 접촉하게 되었지만, 목마른 사슴처럼 영적 갈망으로 헐떡이기도 한다(시 42:1).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아름다운 곡을 만들기도 하지만, 날마다 깊이 신음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종종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것이지만, 세상의 금과 은을 다 주어도 그것에서 떠나지 않으려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역설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야!
 
 본문이 불러 일으키는 생각 역시 바로 이상과 같은 것이다. 단지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치고 욕을 먹는 자, 핍박받는 자, 비방을 받는 자가 복 있다는 결론을 누가 내릴 수 있겠는가?


 인간의 저주와 그리스도의 축복이 같은 사람에게 주어져
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강한 증거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모든 악한 말을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누가 했었겠는가? 그리고 악한 사람들이 정말로
이웃을 속이고 해치는 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미워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기 자신에 관한 의는 싫어하지 않
는다. 그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는 것은 하나님과 종교에 관
한 종류의 의일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대하여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데에만 만족하고 겸
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그만둔다면(미 6:8) 평안할 뿐
만 아니라 박수갈채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 것
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딤후 3:12). 그러한 삶이 사람
들의 경건치 못함을 책망하여 원한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
이다(앤드류 풀러 ).


 10-12절은 분명히 하나가 되어 이 일련의 팔복 중 여덟째이자 마지막 복을 이룬다. 이것은 이중적인 행동 방침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중적인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여덟번째 복을 두가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0절에 나와 있는 것은 팔복 전체의 부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그 앞의 여러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성품에 관해 묘사하신 사람들이 반드시 겪게 될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롬 8:7),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닳으면 닮을수록 하나님의 적들은 앙심을 드러낼 것이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옳게 살기 때문에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벌써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때문에 그들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나는 핍박은 방해와 조롱으로부터 억압과 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10-12절에는 일곱째 복을 보충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사탄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 추종자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는 그리스도인의 노력이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충성하면 투쟁과 싸움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평화가 깨뜨려진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것을 수행하도록 준비시키신다.
 
 이에 대한 증거는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가혹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사건이 증명했듯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11절에서 주님의 제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을 다할 때 받아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고난 세 가지를 언급하신다.
 
 첫째는 욕, 즉 말로 하는 욕지거리 또는 욕설이다.
 
 둘째는 보다 직접적인 핍박이다. 핍박이란 단어는 "뒤쫓다"는 뜻을 가진 희랍어 단어를 문맥에 맞게 옮긴 것인데 이 경우 (신체적으로나 말로써) "괴롭히다"는 뜻이 있다. 다소(Tarsus)의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히기 전에 교회에 가한 것과 같은 종류의 박해를 일례로 들 수 있다(행 8, 9장).
 
 셋째 유형의 고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신다.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기를 믿는 성도들이 당해야 할 명예 훼손과 중상 모략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이다.
 
 이 마지막 고난은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중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의 정도를 더하게 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만들어 내는 무수한 중상 모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다"는 말과 "나를 인하여"라는 말씀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대와 증오를 받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나 천박한 태도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벧전 2:19-24 참고).
 
 이런 의미의 박해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차지였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어떤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2).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며, 애굽에서도 의로움 때문에 투옥되었다(창 37, 39장). 모세가 욕을 먹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출 5:21;출 14:11;출 16:2;출 17:2 등 참고). 사무엘은 백성들로부터 버림을 당했다(삼상 8:5). 엘리야는 경멸을 당했고(왕상 18:17) 핍박을 받았다(왕상 19:2). 미가야는 증오의 대상이었다(왕상 22:8). 느헤미야는 억압과 모욕을 당했다(느 4장).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이신 주님 자신도 자신의 사역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행 7:54-60),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혔으며(행 4:3),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다(행 12:2). 이와같이 사도 바울의 신앙생활과 사역의 전 과정 역시 쓰라리고 무자비한 박해의 오랜 연속이었다.
 
 사실 오늘날 성도가 당하는 핍박은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 교회 시대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핍박이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아 법적인 신분에 대한 핍박으로부터는 보호를 받아 왔지만 사탄의 적의는 성도를 핍박할 다른 길과 수단을 찾고 있다.
 
 핍박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위로의 진리를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요 15:19, 20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철회된 적이 없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
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세상의 증오는 조소와 비난, 중상 모략 및 배척으로 나타난다. 거룩한 은혜로 인해 이 고난을 이겨야 한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0).
 
 주 예수께서는 여기서 주님께 헌신한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게 될 사람이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이들이 복된 것은 구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빌 3:10). 그들이 복된 것은 그러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며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하기 때문이다(롬 5:3-5). 그들이 진정 복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위대한 그 날에 완전히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값진 위로가 있다.
 
 십자가의 군사는 악한 자의 화살이 날아온다고 당황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거룩한 갑주를 더욱 단단히 졸라 매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려는 자기의 노력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이 악한 말을 한다고 해서 용기를 잃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불같은 연단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그리스도께 신실할 때 수반되는 고통은 끈기있게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환난 중에 기뻐해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1) 이 고통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에게 찾아 오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의 속죄를 위해 너무나 많은 고난을 받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위해 적은 고난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될 때 크게 기뻐해야 한다.
 
 (2) 이러한 연단에 의해 우리는 고귀한 순교자들과 교제를 나누게 되는데, 그것은 고통을 당함으로써 거룩한 선지자 및 사도들과 연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제에서 비난은 찬양이 되고, 치욕은 영광이 된다.
 
 (3)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하늘에서 큰 상이 약속되어 있다. 진실로 우리는, 현재의 투쟁이 아무리 모질어도 기뻐할 수 있다. 또한 잠시 죄의 즐거움을 누리기 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기 때문에(히 11:25) 주님의 확실한 약속에 따라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이다(롬 8:17).
 
 베드로와 요반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 간 것(행 5:41)을 기억하라. 그래서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감옥에 갇혀 등에 피를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찬미"했다(행 16:25). "더 낫고 영구한 기업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기의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사람 들도 있다(히 10:34).
 
 이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와 오해와 억압을 받는 성도들이 성령의 거룩한 은혜에 의해 이 귀중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꼭 필요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맺음말
팔복과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진 선물인 팔복에 대한 묵상이 우리의 생각을 복되신 우리 주님께로 돌리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지금까지 애써 밝힌 것처럼,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성품과 행위의 지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체험 과정에 의해 우리 속에 형성되는 만큼, 우리는 완전한 본보기이신 주님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는 단이 희미하게 반영되는 여러 영적 은혜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는 모두 가장 밝게 드러나며 가장 훌륭히 예증되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이러한 완전함이 한 두 가지에서 뿐 아니라 전생애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주님의 "전체가 사랑스러운" 이유이다(아 5:16).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도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제 주님의 값진 선물인 팔복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있어 얼마나 완벽하게 적용되었는지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란다(요 16:14, 15).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자기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려고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주님께 대해(고후 8:9)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게 되는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소유주이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취하신 가난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주님은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 말구유에서 지상 생활을 시작하셨으며, 청년기와 성년 초기에는 목수의 작업대에서 땀을 흘리셨다. 공적인 사역이 시작된 후,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천명하셨다(눅 9:58).
 
 예언의 영에 의해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적 발언(messianic utterance)을 추적해 보면 주님이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심령의 가난을 거듭 토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시 69:29),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 소서"(시 86:1),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 109:22).
 
 둘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는 참으로 애통하는 자의 왕이셨다. 구약의 예언은 주님을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K.J.V에는 man of sorrows, 즉 '슬픔의 사람' 이라 되어 있다) 질고(grief)를 아는 자"으로 보았다(사 53:3). 안식일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과 논쟁하시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가르치려 하시면서 주님은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셨다(막 3:5).
 
 주님이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기 전에 탄식하신 것을 보라 (막 7:34).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을 유의하여 보라 (요 11: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마 23:37)라고, 사랑받는 그 도시를 바라보며 슬퍼하여 하신 말씀을 들어 보라. 겟세마네의 어둠 속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히 5:7) 아버지께 간구를 쏟아 놓으신 주님의 모습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라.
 
 두렵고 놀라운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라.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애 1:12)라고 애처롭게 탄원하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셋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성품을 보라. 복음서에서 성육신하신 영광스러운 주님의 사랑스러운 겸손을 보여 주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주님에 의해 복음을 전파할 자로 선택된 사람들을 유의해 보라. 주님은 현명한 자나 학식 있는 자 또는 신분이 높은 자를 뽑지 않으셨다. 그리스도 께서 선택하신 12명의 제자 중 적어도 네명은 어부였고, 한 명은 경멸의 대상인 세금 징수원으로서 로마 정부에 고용되어 있었다. 주님의 교제에서도 온유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님은 부자와 유명 인사를 찾으시지 않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셨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나타나는 놀라운 온유함을 보라. 거듭거듭 주님은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가서 그를 위해 이루어진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또한 다른 사람을 도우는데 있어서도 겸손하신 주님의 태도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려 할 때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위선자와는 달리, 주님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자선을 베푸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떳떳치 못한 인기를 멀리하셨다. 군중이 주님을 우상으로 만들려고 했을 때 주님은 그들을 피했다(막 1:45;막 7:24),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주님께 그 형제들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재촉했을 때,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고서 비밀리에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요 7:2-10). 주님이 예언을 이루시면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타내실 때에도 아주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슥 9:9;요 12:14).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잘 예증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것이 인간 그리스도 예수의 내적 삶의 성격을 얼마나 잘 요약해 놓았는가! 성육신 이전에 성령께서는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사 11:5)라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리 알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9)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실 것을 보여주셨다.
 
 열두 살 난 소년이었을 때는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물으셨고, 공적인 사역을 시작 하셨을 때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라고 천명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선언하셨다.
 
 성령께서는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시 45:7). 주님은 이처럼 의를 행하는데 있어 구약의 예언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주님을 우리는 마땅히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 불러야 한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주목해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긍휼의 화신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땅의 수치와 바꾸신 것은 바로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죄인들을 향한 긍휼 때문이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그 백성을 위해 저주거리가 되신 것도 바로 그 놀랍고도 아무데도 비할 바 없는 긍휼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하신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히 2:17)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긍휼을 베풀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도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유 1:21). 그것은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 주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긍휼을 나타내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이다(딤후 1:18).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라. 이것도 그리스도에게서 완벽하게 예증되었다.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벧전 1:19)이셨다. 인간이 되셨지만, 더럽혀지지 않으셨고 죄의 더러움에 조금도 물들지 않으셨다.
 
 주님의 인성은 완전히 거룩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다(눅 1:35). 주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에서 떠나 계신다"(히 7:26). "그에게는 죄가 없다"(요일 3:5). 그러므로 주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셨다(고후 5:21).
 
 이처럼 주님은 깨끗하시다(요일 3:3). 본성이 절대적으로 청결하셨기 때문에 그 동기와 행동도 늘 깨끗했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요 8:50)라는 말씀으로 주님은 자신의 사심없는 지상 생활 전체를 요약하셨다.
 
 일곱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화평케 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우리 구주께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말씀이다. 주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이루신 분인 것이다(골 1:20). 주님은 화목 제물로 세우심을 받았다(롬 3:25). 말하자면, 깨뜨려진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고 그 공의와 거룩함을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힐 자가 되신 것이다. 이처럼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셨다.
 
 주님은 또한 유대인과 이 방인 사이에서도 화평을 이루셨다(엡 2:11-18).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조상 다윗의 보좌의 후광에 둘러싸여 앉아 계시며(행 2:29-36) "평강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데,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사 9:6, 7).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는 죄와 타락의 결과로 찢겨진 이 땅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롬 8:19-23). 따라서 우리는 확신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서 화평을 회복시키실 때를 바라볼 수 있다.
 
 여덟째,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묵상해 보라. 계 12:4에서 주님에 대해 상징적으로 언급된 표현으로써 알 수 있듯이 의로우신 주님만큼 철저히 핍박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언의 영에 의해 주님의 고난받으심은 이렇게 천명되었다.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시 88:15) 예수께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고향 나사렛에서 가르치셨을 때는 사람들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다(눅 4:29). 성전 경내에서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돌을 들어 치려"했다(요 8:59). 주님의 사역 전체를 통해 예수의 메시야 되심과 메시야 사역을 반대하던 대적들은 주님 뒤를 따라 다녔다.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께 귀신 들렸다고도 했다(요 8:48). 성문에 앉은 자가 주님을 거스려 말했으며, 취한 무리가 주님을 가지고 노래했다(시 69:12).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을 할 때는 사람들이 주님의 수염을 뽑았고(사 50:6)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내리기도 했다(마 26:67). 그 뒤 주님은 군사들에 의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후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갈보리로 끌려 가셨다.
 
 죽어가는 그 시간조차 주님은 평안 속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갖은 모욕과 비웃음으로 핍박을 받으셨다. 이러한 주님의 모진 고난과 비교할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받아야 하는 핍박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이처럼 팔복에 속한 각 약속들 모두는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은 더없이 주님의 것이다. 실로 애통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사 53:11).
 
 온유의 화신이신 주님이 이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셨으나, 이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의가 그 백성에게 전가된 것을 보시고 완전히 만족하신다. 마음이 청결하기 때문에 주님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고 계신다(마 11:27). 화평케 하는 자로서 주님은 피값을 주고 산 자녀들 모두에 의해 하나님의 외아들로 인정받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핍박 받는 자로서 주님이 받으실 상은 너무도 크다. 왜냐하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빌 2:9-11).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주님을 본받는 자되며 주님과 함께 하기를!(시 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