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minster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 문답 연구

序論


1. 문제제기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칼빈의 신학적 사상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한 칼빈주의적 성격의 신앙고백서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최후의 신앙고백이라는 것과 그 신학적 입장도 16-17세기를 이어 철저하게 각 교리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독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기에 본 고백서는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1)
이러한 본 신앙고백서에 대한 평가를 오늘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MC:이후로는 이 약자로 표현)이 스콜라주의적이라고 하면서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2)
이러한 평가의 결과로 현대는 신조나 요리문답 방식의 교육체계를 거의 폐기하는 방향으로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본 신앙고백서의 기본적 사상은 정확한 성경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본 신앙고백서들의 각각의 조항들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한 시대에 자리잡았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그 성경적 입장이 개혁주의의 독특한 성격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즉 17세기의 역사적인 상황을 갖고 있지만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가장 철저하게 바른 성경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고백했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산물로서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순순한 성경의 의미는 오늘날도 여전히 성도에게 있어서 바르게 고백되어야 할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개혁주의의 교회에 도전해 오고 있는 많은 非개혁주의적 교리들과 특히 신비주의와 아르미니우스적 사상들을 배격하고 바른 성경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저자는 WMC를 연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문제제기를 제기하고 이것에 대한 바른 연구를 찾아가고자 한다. 첫째는 17세기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가 자리하고 있는 역사가 바로 17세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거리 때문에 오늘날 WMC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형태가 너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20세기에서 17세기의 WMC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바르고 순수하게 WMC의 정신을 드러내고 바르게 신앙고백을 받는 것인지를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3)
두 번째로는 WMC에 대한 정확한 개혁주의적 연구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늘날 이 연구가 거의 K. Barth의 입장에서 연구 되고 있는 형편이며 또한 복음주의적인 접근으로 성경적인 철저한 의미를 많이 잃어 버리고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많은 시간과 작업이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분량상 본 논문에서는 중요한 특징들만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WMC와 대,소요리문답(약자:WM大, WM小)을 전체적으로 비교해서 바른 의미를 찾아가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 엄밀한 개혁주의적 독특성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20세기 들어와서 미국에서의 WMC에 대한 수용 방식의 특징과 또한 한국에서의 수용 방식의 특징이 어떠한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필요성은 위의 복음주의적 접근 방식 때문에 오늘날 많은 장로 교회에서 본 신앙고백서을 명목상으로는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켜가는 것의 의미를 상실해서 신앙고백의 위치가 거의 없어지고 더 나가서는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있기 때문에 이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결국 이런 연구를 통해서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본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켜가는 것이 역사적 장로교회와 일맥 상통한 입장인지를 밝혀 내며 또한 그럴 때 이 고백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될 것인지를 확인해 가야 할 것이다.




本論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

특히 본 신앙고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입장을 고려해야만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종교적 배경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가교회 내지 민족교회가 형성되었다. 영국은 왕조가 종교의 방향을 좌우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즉 헨리 8세, 에드워드6세, 메리여왕,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1세, 찰스1세등 왕조의 변화에 따라서 개신교와 카톨릭의 세력이 좌우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대륙에서 돌아온 개혁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청교도(Puritanism)역사를 창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퓨리탄은 영국 국교의 카톨릭적 요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교역자의 부도덕과 기성 영국 교회의 도덕적 이완과 잘못된 교리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개혁교회적교회 정치와 정.교분리원칙 및 보다 순수한 칼빈 신학을 수립하려고하였던 것이다.4)
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본 신앙고백서는 작성되었으며,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그 목적에 있어서 보다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을 형성하려고 신앙고백서 작성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당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아르미니우스적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바른 성경적 입장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5)

WMC는 왕조와 분리된 의회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신학자 총회를 소집하여 영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식, 권징, 정치를 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여 가까이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나 대륙의 개혁 교회와 일치케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통해서 작성되었다.6)
참석자들은 151명으로 30명의 평신도 사정관7)
과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이 장로교8)
소속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 감독교회파9)
와 독립교회파10)
와 에라스티안파11)
등이 있었다.12)

또한 요리문답의 성격도 매우 중요하다. 대요리문답은13)
주로 성인과 목사의 교리교육과 설교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특히 WMC의 각 조항을 더욱 자세하게 주석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리고 이 대요리문답은 James Ussher의14)
특징을 가장 많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Ussher의 대요리문답을 보게되면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의 가치와 특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율법에 대한 이해, 즉 도덕법으로서의 10계명에대한 특징을 칼빈의 신학적 기초에서 잘 드러내 주고 있다.15)
소요리문답은16)
대요리문답의 주제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아이들의 교육용으로 작성되었다. 이 요리문답들에서는 교회정치와 권징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요리문답서들은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 위해 의회로 보내졌으며, 에딘버러 총회는 1648년 7월 20일에 대요리문답을, 7월 28일에는 소요리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이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라고 선언했다. 이 결정사항은 1649년 2월 7일,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비준을 받기도 했다.17)
이와같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WMC와 요리문답를 표명하면서 교리로서의 기독교와 생활로서의 기독교 사이에 선택의 자유를 엄히 거절하고 오직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전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 되어지도록 노력했던 것이다.18)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앙 조문의 특징

WMC 구조의 주된 특징은 전체가 하나의 조직신학적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6-17C 동안 많은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 만들어 졌지만 WMC처럼 성경 전체의 주제를 체계화 시킨 고백서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WMC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정리하게 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지면상 세부항목을 전부 다루지는 못하고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개혁주의 교리의 특징들이 어떻게 WMC에 정리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9)
순서는 WMC의 작성 구조에 따라서 정리를 하고자 한다.

1) 성경론

(1) 개혁주의적 성경론의 위치

WMC에서 성경론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전체의 구조 가운데서도 가장 초두에 위치함으로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당시 청교도들이 전체 개혁주의 교리 체계를 어떤 기초 위에서 시작했었는지를 제시해 주는 중요한 이해이기도 하다. 특히 개혁주의 체계에 있어서 '성경론'은 종교 개혁의 기초를 마련하는 중요한 주춧돌이 되기도 했으며 또한 그 이후 개혁주의를 특징짖는 중요한 표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곧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주제로 당시의 모든 종교개혁의 방향을 설정해 주었던 내용이다. 그리고 칼빈을 이어 개혁주의 신자들의 회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적 회심'과 대조적인 '성경론적 회심'으로 개혁주의 회심의 특징을 제시하기도 했다.20)

여기서 우리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개혁주의적 표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살펴야만 바른 개혁주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로만 되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정확한 의미를 받아들이고 고집할 때만이 "오직 성경"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성경에 대한 단순한 해석학적 원리로서만 아니라 일찍부터 전기독교교리와 기독교 철학의 정초 및 바른 생활에 관련하여 오직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원칙으로 제시한 것이 적정과 절도의 규범이다. 우리가 성경을 유일한 경건과 삶의 규범이라 고백하였을 때, 성경이 구원의 방도로서 사용되는 것에 제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21)
으로서 오직 그것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따라서 영적인 모든 대적들을 대적하고 이 세상에서 그것에 따라서 살고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2)
, 또한 이러한 해석학적 규범을 통해서, 칼빈은 이런 확고한 원리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혹은 그 성경의 증거들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엄밀하고 확실하게 침묵하기를 원했던 것이다.23)24)

이처럼 칼빈의 적정과 절도의 규범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은 "여기에서 모든 종교적인 교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적정과 절도의 규범을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있다. 즉 감추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고 알고자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25)
물론 여기에서, 다르게 한 번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에 대한 경우 규범에 맞게 매우 적합하도록 사색하는 것, 즉 매우 주의 깊게 행하면서, 사고나 말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적정의 이러한 최선의 한계는, 우리가 배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스스로 교리의 결말을 지어야 함에 있어서 조차도, 생각하고자 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긍휼로 주워진 피조물들 가운데 그 모든 재화들로부터 저를 확신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26)
이와 같은 적정과 경외의 근본적인 엄밀한 규범을 칼빈은 해석학적 근거의 구체적인 표현27)28)
으로 제시했던 것이며, 이러한 의미가 바로 "오직 성경"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은 '성경론'을 전체 교리의 체계로 제시 하면서 당시 17C의 非성경론적인 정신들을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에 가장 크게 非성경적인 정신으로 기독교를 도전했던 것은 로마 카톨릭 성경관이었다. 이들은 성경의 '명백성'을 부정하고 오직 교회의 해석을 통해서만 성경이 이해되고 또한 그 권위를 소유할 수 있다고하여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욱 높이 제시하였다. 다음으로는 재세례파의 성경관으로서 이들은 성경 자체를 종이문자로 인식하고 오직 성령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교통을 성경보다 더욱 높이 세웠다. 다음으로는 아르미니우스적 성경관의 도전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받아 들이면서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성경의 실제적인 위치와 권위를 제시했다. 그럼으로 많은 성경의 내용들이 변질되거나 아니면 삭제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경향 속에서 개혁주의자들은 위의 세입장 모두를 배격하면서 가장 바른 성경적인 성경관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취지를 이해하게 될 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경으로'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 내용은 WMC의 '성경론' 정신과 판이하게 다른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성경관에 대한 인식이 위의 세가지로 대표되어(근대에는 자유주의를 통한 성경비평학도 등장) 동일하게 도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29)
이런 경향을 보아서도 WMC의 성경관은 17C 당시의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지켜져야 할 중요한 성경관임을 알 수 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경론 이해

이제 1장의 중요 사항들을 복음주의적 관점이 아닌 개혁주의적 관점에 살펴보고자 한다.
①항: 여기에서는 일반계시의 충분성과 특별계시의 필요성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분리되거가 혼합될 수 없는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방편임을 지적하고 있다.30)
특히 둘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특별계시를 통하여 일반계시의 자리를 회복하는 연결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최고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간다고 제시되고 있다.31)
두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계시를 기록으로 전달해 주셨는지를 제시하는데 그 원인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다.32)
마지막으로는 이전의 계시 전달 방법이 중단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성경계시의 종결을 의미하는 중요한 개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그 어떤 추가나 삭제가 제시될 수 없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 이유가 매우 합당치 않음을 제시하고 있는데 WMC에서는 그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하신 뜻에 의지하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더 이상 성경계시를 넘어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 향한 가장 큰 모독과 도전의 행위로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의 결정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②항: 이 부분의 가장 주된 특징은 두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란 부분이다. 이것은 1항의 연속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직접적인 계시를 성경으로 제시하셨기에 '기록된 성경'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권위를 갖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많은 非성경론자들이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해 왔으며 그럴 때 마다 개혁주의자들은 기록된 성경이 곧 하나님 자신의 말씀임을 지켜왔다. 非성경론자들은 때로는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포함'33)
되었다는 방식등 다양하게 '동일'의 개념을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기초해서 기록된 성경이 곧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는 정신에 의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 안에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성경으로 더불어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34)
라는 이해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정경으로 인정하게 되는 중요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감동"35)
과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란 표현을 읽게 된다. 특히 후자의 고백은 율법의 제 3사용에 대한 개혁주의의 독특한 고백이다. 즉 이것은 1항과 2항의 연결 속에서 개혁주의자들의 삶의 방식을 제시해 주는 내용인 것이다. 즉 스스로 삶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방식으로서의 삶을 언급하는 것이다.36)


④-⑤항: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체가신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 만큼 오늘날 수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내용도 드물다. 그 이유는 바른 개혁주의적 성경관이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큼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 발생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은 더 이상 성경 말씀의 권위를 느끼지 못한다. 설교시에도 단순한 이야기나 담화 정도로만 인식하지 그 말씀자체에 생명을 두지는 않는다. 또한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성경의 특징은 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기독교에 접근하려는 큰 도전이 있다. 이것을 WMC는 철저히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전체의 목적"이란 표현은 이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성경의 내용이 비록 인간의 삶과 업적과 또는 그 과정을 다루고 있을 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제시하려고 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아 가야하는 것이다.37)

⑥항: 성경의 명료성과 충분성에 관한 것으로서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명백히 제시되는 방식이다. 여기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을 인간 생활의 필요한 모든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 정신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서의 성경 추론을 제시한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단순히 성경의 말씀을 되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성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도록 성경을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예배와 정치에 관련된 부분으로서 뒤에서도 다시 언급되겠지만 여기서는 그 원리만을 언급하겠다. 성경 안에는 모든 세세한 부분을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선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충분함을 지적하시고 인간 생활의 세부적인 사항들은 성경의 전체 정신과 흐름에 따라서 그 시대마다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셨다. 이처럼 여기서 제시하는 3가지는 개혁주의의 성경관인 오직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서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할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38)


⑧항: 성경 사본에 관한 문제를 언급한다. WMC는 원본은 상실되었지만 사본들이 섭리에 의해 완전하게 보존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많은 정경 비평 연구가 시도되면서 성경의 정경성과 권위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특히 칼빈의 주석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사본 비평을 오늘날 칼빈 연구자들은 정경 비평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칼빈의 의도는 사본상의 차이를 지적하고 또한 신약의 구약이용에 있어서의 특징이 문자 그대로의 인용이 아니라 그 본래의 의미에 충실한 기준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형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 뿐이다.

⑨항: 성경 해석에 관한 사항이다. WMC에서 취하고 있는 가장 큰 성경 해석 원칙은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서 해석 한다"는 원리를 갖고 있다. 이 원칙은 17세기 당시 중요한 논쟁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김영규 교수는 이 방식은 위클리프나 루터, 부처, 불링거등이 제시했으나 이것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 방식에 머무르는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원전으로 혹은 원전 자체로부터 연구하는 인문주의적 방식이었던 것이다.39)
그러나 WMC에서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 한다"라고 했을 때 이 표현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칼빈이 제시하였던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입각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1장 전체에 흐르고 있는 성경관이기도 한 것이다.
WMC에서는 1장에서 뿐만 아니라 대,소요리문답의 성례 부분인 말씀에서도 이것을 명확히 언급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외적인 방편을 통하여 자신의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데 그중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말씀인 것이다.40)
특히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읽고 듣게 함으로써 계몽시키고, 확신시키고, 겸손하게 하며, 그들을 자기 자신들로부터 몰아내어41)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형상을 본받게, 뜻에 복종, 강건케, 시험과 부패에 저항할 수 있도록, 은혜로 양육, 마음을 거룩케, 위로로 굳게한다고 이어 고백하고 있다.42)
이런 표현은 성경이 단순히 원전으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전 삶에서 주의깊고 절제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석과 적용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정신은 개혁주의의 전체 성경관에 대한 가장 큰 독특성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⑩항: 이표현은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의 자리를 제시하고 있는 의미이다. 4항의 성경의 권위와 연결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결국 이것은 1장 전체를 정리하는 핵심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되는 의미는 온 우주의 역사의 최종 주권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명백히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WMC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표현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 하나님께서 성경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셨음을 하나님 스스로 확증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경으로 하여금 나의 순수한 즐거움이 되게 하소서(Sint castae deliciae meae Scripturae)"라고 이 정신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또한 전체 개혁주의의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오직 성경(Coram Deo, Sola Scriptura)"으로만 살려는 표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하며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8:20)"의 말씀의 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2) 삼위일체론적 구성과 특징

이제 WMC 본 조항으로 들어가게 되면 신론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본 논문에서는 2가지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즉 "삼위일체론적인 이해의 개념"과 신론 중심적인 사고로서 "하나님께 영광"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외에 예정론과 선택, 섭리는 Dort신조를 통해서 참고하도록 하겠다.


(1) 삼위일체론적인 이해

① 개혁주의 삼위일체 이해
WMC의 본 조항 33개의 주제 모두가 어느 한 위에 편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삼위일체적인 균형을 가지고 전체에 골고루 표현되어 있는 것은 매우 놀라운 특징이다. 특히 각 조항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어거스틴과 칼빈의 전통을 따라서 통일적 경륜의 형태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들이 위격들에 따라 나누어 질 수 없다는 말이다.43)
어거스틴에 따르면 "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든 여호와 하나님이든, 하나님은 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할 때도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말하는 것이다."44)
이런 이유 때문에 각 위격을 말할 때도 "같은 삼위일체 안에서 고유한 개체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혹은 피조물과의 관계에 관한 말로서 드러난다. 즉 실체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가 하나요 위대하시고 선하시고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45)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46)


첫째: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이 존재하신 대로 그렇게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 삼위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역사한다.
둘째: 그 실체 혹은 본질에 관계해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선하시다, 영원하시다, 지혜로우시다, 전능하시다는 말이지 각 위격에 관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함께 실체인 것처럼, 동시에 함께 위대하시고 동시에 함께 선하시며 동시에 함께 거룩하시고 자체에 따른 다른 것이 무엇이든지 동시에 함께 그러하다.
셋째: 위격들 상호간에 발생과 발출과 관련해서, 나시고 나오시는 주체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넷째: 이렇게 위격들 상호간에 뿐만 아니라 피조물과 관계해서도 하나요 동일한 실체의 성부, 성자, 성령이시오 창조주 하나님과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으로 같지 않고 특별히 물질적인 피조물 형태로 말미암아 분리되어 계시될 수 밖에 없다.47)


②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삼위일체론 특징
위의 통일적 경륜 형태의 삼위일체 구조가 WMC에는 잘 표현되고 있다. 먼저 2장 자체에서 1-2항이 통일적 속성으로 제시되고 있다. '살아 계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간다' 여기서 각각의 표현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 삼위일체로 이해한다. 다음으로 3항에서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다'라고 표현한다. 3장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부분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되어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 2항 '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듯한 -----', 3항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7항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든지----', 8항 '하나님께 향한 찬송과 경외심과 경모심을 일으키게 하며----'등등이다. 이런 모든 표현은 전체가 통일적 삼위일체 형태이다. 또한 각각의 위격의 특성도 통일적 경륜의 구조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3장 5항에서 '하나님께서 ---- 그리스도 안에서 ----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성령에 의한 사역이다) 하셨다', 6항에서 하나님은 택하신 ---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 받았고 ---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고'등등이다.48)
이처럼 WMC주의자들이 사고하고 있던 삼위일체론적 구조는 매우 놀랍다. 결코 어느 한 위에 편중되지 않고 성경에서 제시되는 대로 하나님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③ 오늘날 삼위일체론 이해의 특징
위와 같은 의미로 성경 전체를 삼위일체 구조로 이해하며 접근하기 시작할 때 그 형태와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이럴 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삼위일체의 이해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빈약한지를 알게 된다. 더나가서는 극단적인 이단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즉 대부분 순복음교회의 신비주의적의 영향으로 과거 이단으로 정죄 되었던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한국 교회에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아리안주의가 제시되기도 하는 형편이다.


(2) 하나님께 영광

① 오직 하나님께 영광
WMC의 신론적 특징 중에 중요한 두 번째는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적을 오직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역사적 개혁주의의 중요한 주제였다. 특히 엄밀한 개혁주의의 특징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모든 非개혁주의적 교단들이 거세게 인간론적인 가치관으로 성경과 하나님께 도전할 때 마다 순수한 개혁주의는 인간 중심적인 사고관을 배척하고 오직 신론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의논에 기초한 "하나님 영광"사상을 지켰던 것이다.49)


②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제시된 하나님 영광 사상.
WMC의 각 조항을 살펴보게 되면 WMC 학자들이 이 부분에 얼마나 많은 주의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위의 삼위일체적 사고의 표현이 전체의 조항 가운데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듯이 이 주제 또한 각각의 조항안에 각 주제를 떠 받치고있는 기초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WMC정신이 성경의 바른 정신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표현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세밀한 부분에 있어서 까지 인간론적인 사고가 개입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을 보게된다. 결국 이러한 정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사라질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이 높아지고 또한 하나님만이 모든 역사 위에 남으시도록 했던 것이다.50)
각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51)

2장: 또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 지극히 의로우신 뜻의 계획대로 만사를 행하신다(1항),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 가지고 계시므로 홀로 자기 안에서 자족하신다 ---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피조물에게서 영광을 찾지도 않으시고, 오직 그들 안에서, 그들로 인해서, 그들에게 또는 그들 위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뿐이다52)
--- 자기의 기뻐하시는 바를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 그가 요구하시기를 기뻐하시는(2항).
3장: 하나님은 ---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 정하셨다(1항),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3항), 하나님께서 --- 그의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목적과 그 마음의 은밀한 계획과 기뻐하심에 따라 ---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다 ---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5항)53)
,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 그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 정하셨다(6항), 하나님은 --- 헤아릴 수 없는 뜻에 따라 --- 주권적 권세의 영광을 위하여 작정하신다 ---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송케 하시기를 기뻐하셨다(유기자:7항).

③ 오늘날 하나님 영광 사상에 대한 이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 영광"이란 표현이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모른다. 각 교단 마다 모든 종교적 행사에 있어서 가장 앞에 내어놓는 표어가 이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목상의 표현일 뿐 바른 성경의 의미를 이미 퇴색한 형태이다. 정확한 의미를 고집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형편에 따라서 변용시키거나 아니면 말만 내세우는 정도인 것이다. 인간론적인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명목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적 신앙의 내용들을 행하면서 이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목적, 방식등이 가득찬 것이다. 이것은 3계명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모독하는 큰 죄인 것이다. 그나마 장로교 자체 내에서도 이 구호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WMC 조항들 속에 나타난 의미는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왜 이것을 개혁주의자들이 철저히 고수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특히 대,소요리문답의 설명을 이해하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문을 보게되면 다음과 같이 묻고 대답한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답: "사람의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 표현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 부분을 2문에서 정확하게 답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사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할 것을 지시하셨습니까?" 이 질문을 보게 되면 이미 "하나님께 영광"이란 인간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에게 자신을 영화롭게 할 것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어떻게"까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답을 보면 더욱 명확해 진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를 즐거워 하고 영화롭게 할 것을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성경만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규칙"으로 제한함으로 결국 위의 "성경론"과 연결되면서 WMC학자들은 오직 성경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하나님께 향한 가장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정신에서 결국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는 신앙원리가 개혁주의의 원리로서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3)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이해

(1) 개혁주의 신,구약 통일성 개념

신,구약 통일성의 개념은 위의 "성경론"의 이해 방식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교회 역사 속에서 늘 논쟁의 주제로 제시되었다. 많은 이단들이 신,구약 통일성의 특징을 오해하고 변질시키려고 할 때만다 개혁주의는 끊임없이 신,구약 통일성의 바른 형태를 고집해 왔다. 김영규교수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언약의 통일성'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신,구약 즉 둘 안에는 하나의 같은 신앙, 한 언약, 구원에 이르는 한 길이 표상되어 있다. 차이는 다만 형식에(in dem vorm) 있고 이것이 그와같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이는 하나님은 참으로 한 분이시지만, 사람들이 다르고 그 때문에 역시 다양하게 양육되었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계속적으로(successief steeds) 더 풍부하고 더 판명하게 계시하시고 있다"54)
고 한다. 즉 동일한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원리가 보존되어야만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구약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게 되면 많은 이단들을 통해 제시 되었던 것처럼 구약이 소흘히 여겨지거나 폐기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구약안에 신약이 감추어져 있고 신약안에 구약이 드러나 있다(in Verere Testamento Novum latet et in Novi Vetus patet). 구약은 신약의 감추어진 것이요 신약은 구약의 계시이다(Vetus Testamentum Novum pracoccupat et Novum interpretatum est Votus. Vetus Testamentum est occultatio Novi, et Novum est revelatio Verteris). 차이는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한 것이다( ? ? ? ? ? ? )"55)
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육신과 더불어 그리고 그 이후에 비로소 역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성령은 그의 일을 오순절날 그가 부어짐과 더불어 비로소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다. 창조가 삼위일체적인 사역인 것처럼, 재창조 역시 첫 순간부터 삼위의 사역이었다. 창조의 타락 이후에 흘러나온 모든 은혜는 성부로부터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그들에게 이른다. 성자는 타락 직후 중보자로서, 첫 사람을 대신한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등장하였고 그가 부패시키고 내버림을 받았던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셨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위로자(개역성경:보혜사)로서, 그리스도를 던짐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적용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통찰과 지식에 있어서 모든 변화와 발전과 진보는 피조물의 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성부는 영원한 성부이시고 성자는 영원한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위로자이시다. 그 때문에 구약은 신약과 본질과 실체에 있어서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계속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경륜하고 더 풍부하고 더완전하게 하였고 따라서 인류가 계시의 지식과 소유 및 그 기쁨에 있어서 진보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고 같은 분으로 남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역사를 처음 땅에서 역사의 중간에서 성취하였고 성령이 오순절에 처음 부어졌고, 하나님은 은택들을, 그를 통하여 거절하고 적용할지라도, 이미 역시 구약시대에 완전히(ten volle) 분배하였다. 구약의 성도들은 우리와 결코 다른 방식으로 구원되지 않는다. 믿음도 하나요, 중보자도 하나이며 구원의 길도 같고 은혜 언약도 같다"56)
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점은 먼저 삼위일체의 실체적인 통일성을 인식해야하며 또한 이 신론의 기초에 의해서 같은 구원의 서정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구약 통일성 이해

신,구약 통일성은 7장의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33개의 전체 조항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기도 하다. 7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언약은 --- 아담에게와 또 그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이약속되었다(2항)', '주께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은혜 계약이라 칭하는 둘째 언약을 맺으셨다. -- 예수에 의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제공하셔서 ---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 믿을 수 있게 하기를 약속하셨다(3항)'. 바로 이 내용이 삼위일체의 실체적인 통일성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은혜가 은혜계약을 통하여 모든 시대의 택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즉 삼위일체의 통일성과 구원의 서정의 통일성이 동시에 언급되었다. 다음으로는 '이 계약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 서로 다르게 집행되었다57)
-- 이것이 예표와 규례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 그 당시에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약속된 메시아 신앙으로써 선민을 가르치고 양육하기에 충분하고 유효하였다. 이 메시아에 의해 그들은 온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58)
이것을 가리켜 구약이라 한다(5항)' '복음시대에 있어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매 --- 이 언약은 -- 보다 더 충분히, 명확히59)
나타나며 영적 효과를 가지고 온다. 이것을 신약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실체가 다른 두 개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은혜 언약>60)
이 다양한 경륜 아래 있는 것뿐이다.61)
특히 WMC학자들은 이 통일성의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62)
라는 구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외에도 WMC의 특징은 33개의 모든 조항들의 근거 구절을 신,구약 전체에서 골고루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약적 주제도 구약에서 그 의미를 찾는 방식과 구약의 주제를 신약에서 찾는 방식은 WMC의 탁월한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해하고 있는 증거가 된다.

(3) 오늘날 신,구약 통일성 이해

신,구약의 통일성에 대한 잘못된 형태는 초기 교회 시대부터 시작되었다.63)
즉 마르시온, 마니교, 영지주의, 세르돈, 16세기에 와서는 루터파, 자유영성파, 아그리콜라, 코케이우스, 17세기를 지나서는 아르미니우스, 웨슬레, 경건주의, 현대에 와서는 자유주의학파, 신정통주의, 신비주의, 오순절, 로이드 죤스, 장로교의 성경신학적 방식 -- G. 보스등이 속한다. 이중에서 특히 더욱 주의를 요하는 방식은 보스를 토대로한 성경신학 방식이다. 성경신학은 '코케이우스의 언약 방식'64)
을 도입해서 신, 구약의 구성을 계시의 점진적 발전 과정으로 이해함으로 성경자체를 계시적인 그 자체의 가치로 이해하기 보다는 역사적인 발전의 과정에 더욱 중심을 두어서 구약의 많은 계시적 가치를 단순히 역사의 한 과정으로 흘려보내고 있다. 그 결과 신약의 구속역사를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성경 전체를 묶으려고 해서 구약과 신약의 조화와 통일성을 깨뜨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가치를 스스로 축소 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4) 구원의 서정에 대한 위치65)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구원사역을 전개함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은 구원의 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그 순서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 '구원의 서정'(Ordo Salutis)라고 부르며, 종교 개혁의 산물로서66)
개혁신학의 유산인 것이다. 개혁주의적 구원의 서정의 특징은 철저히 인간론적인 협력이나 공로나 행위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행위가 우선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인간의 자리를 없애거나 무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 표현의 조화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교회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쟁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67)
이처럼 개혁주의적 구원의 서정은 우리의 출발점을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분의 구속적 행위에 있어서 그것은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라는데 두는 것이다.68)

WMC 신학의 구원의 서정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지위, 즉 율법과의 관계에 의존하며,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에세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69)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서정에서의 각 항목마다에 하나님의 역사(은혜)를 배제하지 않으며,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칭의'는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중생이 회심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70)
특히 구원의 서정 전체가 예정론 안에 포함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71)
이것은 인간론적인 방편들을 모두 거부하는 표현이다.
WMC에서는 이 서정의 구성이 10장--18장까지 이루어져 있다. 그 순서를 보게 되면 다음과 같다. 소명-->[칭의 --> 양자]72)
--> 성화 --> 신앙--> 회개--> (선행) --> 견인--> (구원의 확신) 특히 각 항목 중에서 철저한 개혁주의적 의미를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소명에서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예정하신모든 사람들만을 그가 정하시고 기뻐하신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 효력있게 부르시기를 기뻐하셨다"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기초한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73)
이것은 알미니안적인 보편구원설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말씀과 성령에 의한 부르심과 중생을 고백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것은 알미니안적인 획기적인 회심이나 즉각적인 방식의 회심이 아니라 성경론에 기초한 회심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 때문에 구원의 초청부분도 개혁주의는 성경론적 방식으로 부른다.74)
칭의 부분에서는 "그들 안에 무엇이 일어났거나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이며, 신앙 자체 즉 믿는 행동이나 다른 어떤 신앙적 순종을 ---- 전가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여기에 보면 알미니안에서 제시하는 자신 스스로 신앙에 인식하는 행위나 받아들이는 행위 마음의 상태나 행동까지도 거부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75)
또한 "신앙이 칭의의 유일한 도구이다"라고 고백함으로 조건에 의한 신앙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여기서 조건과 도구의 개념은 개혁주의와 알미니안 가운데서 끊임없이 논쟁되었던 주제였다. 성화에서는 "그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실제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거룩해진다","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끊임없이 힘을 공급받으므로 ----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 온전히 이룬다"라고 고백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특징은 성화 조차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부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최근에 와서는 신,인협력설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WMC는 성화 그 자체가 표면적으로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적인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자리를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76)
선행 부분에서는 성화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선행은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의 열매와 증거이다"라고 하는데 즉 선행이 구원이나 축복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적 성격임을 분명히 했다. 알미니안은 이것을 조건으로 늘 강조하고 제시했으나 WMC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경을 명백히 했다. 또한 기초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 가운데서 명령하신 것이다. 사람에 의해 성경의 근거 없이맹목적인 열심히나 어떤 선한 의도를 가장하여 고안해낸 것은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특히 일반적인 열심이나 선한의도 조차 거절하고 있는 것은 WMC만이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다. 결코 어느 작은 부분에서 조차도 인간의 것을 거절하고자 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 기초는 오직 그분 자신으로부터 나온 그분의 말씀만으로 제한한다. 이것은 앞의 "성경론"에 기초한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견인과 확신인데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이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1항)"라고 한다. 알미니안은 계속적으로 신자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고하여 성도의 궁극적인 위로를 파괴했다.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이생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1항)".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은 신앙의 궁극적인 확신을 갖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 이것을 깨뜨렸다. 또한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라는 곳에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감정적 확증이나 경험을 단편적인 구원의 확신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에 끊임없이 도달하려고 더욱더 인간적인 구원 방식으로 치달으게 되었다. 그러나 WMC는 인간으로 부터의 확신이 아닌 진리 자체에 대한 확신을 가장 분명한 확신으로 제시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명확히 했다.


5) 예배와 정치

WMC의 예배와 정치 부분은 엄밀한 개혁주의의 주된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장로교가 개혁주의내에서 칼빈의 정신에 가깝고 가장 엄밀한 개혁주의가 된 것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의 개혁이었다.77)
이런 정신은 '칼빈의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의 논문에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관점으로 '예배와 구원, 성례와 교회정치'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이 내용은 역사적으로 엄밀한 개혁주의의 노선을 정리할 때도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6가지 요소'78)
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회에 있다',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등 3가지가 예배와 정치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개혁주의(퓨리탄)들의 순수성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WMC의 순수한 정신인 것이다.


(1) 예배

WMC에서 예배에 있어서는 예배의 본질적인 개념도 중요할뿐더러 예배의식문제도 매우 중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10계명의 1-4계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기초하고 있다. 즉 10계명을 따라서 '대상', '방식', '자세', '시간'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특히 WMC에서는 1-4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의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그 본질적 기초는 대,소요리문답을 통해서 접근할 때 분명하게 제시된다. 각 계명에 따라서 가장 중요한 예배의본질과 의식 내용만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계명: 104문: "그만을 생각하고, 명상하고, 기억하고, 높이고, 공경하고, 경배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모하고, 경외함으로 그에게만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예배의 형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정신을 정확히 부정적인 형태로 105문에서 다시 정리해 준다. "하나님께 당연히 드릴 것을 무엇이든지 생략하거나 태만히 하는 것과 그를 모르고 잊어버리고 오해하고 그릇된 의견을 가지며 하나님게 합당치 않는 악으로 그를 생각하는 것과 그의 비밀을 감히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 꼬치 파고 들려 하는 것이다" 이런 이해 때문에 WMC학자들은 성경의 매 구절마다 가장 바르고 순수한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켜가기 위해 그 어떤 인간적인 접근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성경의 의미를 변질 시켰던 알미니안 방식을 이러한 이유에서 거부했던 것이다.

2계명: 108문: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 가운데 제정하신 종교적 예배와 규례를 받아 준수하고, 순전하게 전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즉 1계명에서 제시된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권위로 인해서 예배방식 자체는 오직 그분에게서 나옴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속성에 가장 알맞게 예배하도록 결정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속성 자체를 변질시키거나 오해할 것을 막기 위해서 "모든 거짓된 예배를 부인하고 미워하며 반대함이며, 각자의 위치와 사명에 따라서 거짓된 예배와 모든 우상 숭배의 기념물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저항적인 원리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79)


3계명: 112문: "하나님의 이름 ---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거룩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 거룩하고 또는 경외함으로 생각하고 명상하고 말하며 글을 써야 한다" 이 정신 때문에 기독교는 곧 "경건"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즉 거룩한 경외감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인간의 전 삶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정신이 스며들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죄된 형태를 "하나님의 이름을 명한 대로 사용하지 않음과 무지하게, 헛되이, 불경하게, 모독적으로, 미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함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호기심으로 파고들거나 오용함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곡해하여 신성을 모독하는 농담, 호기심에 넘친 무익한 질문, 헛된 말다툼 혹은 그릇된 교리를 지지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라고 고배했던 것이다. 이 정신들을 보게되면 특히 목사의 무지함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방식 조차도 헛된 호기심으로 나가지 않도록 했으며 적정과 절도의 원칙에 따라서 오직 성경 안에 머무르려고 했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4계명: 116문: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지정하신 정한 날, 특히 칠일 중에 하루 온종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함은 온종일 거룩히 쉼으로 할 것이다" 이 것은 역사속에서 퓨리탄들은 곧 '엄숙한 주일 성수자들'이라고 할 정도록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나 '거룩히 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 형편이다. WMC학자들이 이해했던 기초는 위에서 제시했던 신,구약의 통일성과 율법과 복음(율법의 제3사용)의 의미에서 이해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58:13-14, 겔20:12-14등과 같은 의미를 매우 중요한 주일의 정신으로 이해했다.80)
즉 하나님의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는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와 또한 그분 자신의 영광을 더럽히지 않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했던 것이다.81)


이처럼 1-4계명을 통해서 바른 예배에 대한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82)
이것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 예배의식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제시되었던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골로새서 2장 23절의 해석문제와 적용이 그 주된 내용인 것이다. 여기서 '자의적 숭배'83)
에 대한 이해가 전 개혁주의 예배의식을 결정하게되는 중요한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의 규범적 원리를 개혁주의에서는 오직 성경의 원칙에 따라서 적용하는 중요한 정신인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망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지시에 따라 어떤 가견적 예배 대상 앞에 혹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면 안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한 예배를 스스로 결정하신다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주권 사상은 위의 "성경론"과 또다시 연결되어 오직 성경의 규범을 따라서 그 방식을 찾는 정신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인간 자의적인 그 어떤 생각이나 아무리 선한 의도나 행동 조차도 금지하는 정신인 것이다. WMC학자들은 이런 정신을 가장 순수한 성경의 정신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오늘날 시대적인 변화에 맞추어야만 교회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여러 가지 자본주의적 정책이나 시장정책, 철학적인 방식으로 예배를 변형시키거나 창작하는 것이 위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비성경적인 정신인지를 알 수 있다.84)
결국 퓨리탄 정신에서 WMC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배의 요소들을 정리하게 되었다. "신앙고백, 기도, 시편찬송85)
, 말씀, 성찬"86)
등이다.87)


(2) 정치

① 초판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 소집권의 권한 문제.
WMC의 정치 부분에서는 크게 두부분의 중요한 부분을 들 수 있는데, 첫째로는 원문상의 국가 위정자의 종교회의 소집 권한에 대한 문제이며, 둘째로는 장로 정치에 대한 문제이다. 특히 WMC의 원문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초판(1647)에서 23장 3항88)
과 31장2항89)
이 문제가 되고있다.90)
이 부분에서 국가 위정자가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또한 대회와 협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 있다고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가 의회의 건의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입은 것을 많은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인을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을 통해서 이 문제는 곧 수정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재판 원문은 수정된 형태의 조항을 사용하고 있다. 즉 국가 위정자의 종교 회의 소집권한과 대회와 협의회의 권한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직 교회 지도자만이 그 권한을 갖을 수 있다고 명시되었다.91)


② 장로회(unitati)정치 방식과 "may be"(지교회와 노회와 관계문제) 논쟁92)

첫 번째로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uni)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는 것이다.93)
웨스트민스터 총회당시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적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낸 사람은 샤무엘 러더포드와 스티븐 마샬, 죠지 길레스피등을 들 수 있겠다. 샤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란드 교회개혁시에도 아르미니안주의와 싸우는 글을 발표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논쟁과정에서도 회중교회의 입장과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반박의 글들94)
을 발표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후에도 러더포드95)
와 뜻을 같이하여 또한 다니엘 코드레이가 회중교회를 비판하는 중요한 논쟁의 책을 썼다. 극단의 분리주의자들인 브라운주의들과 달리 상당히 건전한 회중교회의 입장은 화란과 신대륙에 있는 회중교회들이었다.
이미 화란에서 장로교입장에 강한 John Paget(?-1638)과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에 의해서 독립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의 근원으로 돌아가, 좀 더 건전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의 교회관들도 비판받게 되었다.96)
이 논쟁의 중심은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 교회언약(Church-Covenant)으로 연합되어 날을 정하여 공적인 예배와 성례를 위해 모인 조합(company)으로서 교회 회중자체가 완전한 교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교회(one head-Church) 혹은 주교회(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장로회(unitati)정치의 중요한 특징은 복수 장로들에 의한 치리인 것이다. 사도는 교회의 정상적인 치리를 수행하기 위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할" 것을 명령하였다.97)

이 원리는 오늘날 많은 회중안에서 광범위하게 무시되고 있다. 빈번하게, 교회는 ,효력면에서, 종교적인 독재자(dictator)가 되어가는 목사들의 변덕(whim)아래서 운영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가 회중 투표를 통해서 중대한 사안들을 결정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각 사람들은 다스림안에 동일한 지분을 갖고 있는 셈이 된고 만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조직은 성경적인 틀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늘 지적되어 왔었다. 성경은 연합된 자격으로 다스리는 장로들로 구성된 집단의 손에 회중에대한 치리을 부여하였다. 장로들이 집합적으로(collectively) 다스리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속력있는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98)

특별히 사무엘 러더포드에 따르면, 회중교회의 교회관은 G.Voetius의 동의99)
이외에는 전유럽개혁주의들로부터100)
인정이 되지 않는 주장으로서 그 근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소키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돌리고 있다. 한편 같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란드 총대인 Robert Baillie는 독립교회의 참된 근원을 재세례파에게 돌리고 있다101)
.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비판 서적들 중에서도 죠지 길레스피의 「아론의 싺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London 1646)이란102)
책이 개혁주의 장로교 입장을 변명한 결정적인 책이었다. 거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고작으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에서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정치원리들을 비판하는 장로교의 원리를 한 마디로 장로회 자체(unitas)에 교회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원리로 설명하였다103)
. 이 회 자체(unitas)에 주어진 권리와 회중교회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그것만이 교회직원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본질적인 교회전체(Totum essentiale)에게 주어진 권리 사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104)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105)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 예를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라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106)
이나 위원회들107)
,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들로 인해서 장로교 정치는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는 늘 교회 개혁을 일으킬 때 마다. 위와 같은 정신에서의 정치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장로교 정치제도와는 근본적인 차이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의 정치는 지교회 형태로는 회중교회 성격이 강하고 교회 내에서는 감독정치(17세기와는 다른 감독형태-- 오히려 카톨릭의 감독형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WMC의 장로정치가 소개되어 역사적 장로 정치의 특성들이 속회 회복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구조 비교.10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의 상호 구조를 잘 정리하게 되면 어떤 신학적 구조에 기초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각 신조의 부족한 부분을 그 자체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본 저자는 조직신학적 구조와도 비교함으로 더욱 체계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4. 20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수용 방식의 특징들

1) 미국 상황 및 한국 상황

1729년에 WMC가 미국 장로교회에 바른 신앙고백을 대표하는 신앙고배서로서 채택이 된 이후로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이중에서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까지 미국의 신앙고백에 대한 입장은 다양한 변화를 격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 WMC은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109)
도전이 더욱더 거세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를 통해서는 신앙고백적 형태가 완전히 거부되고 바로 성경을 각각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신정통주의를 통해서는 신앙고백을 받지만 역사적 전통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태로 WMC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이 WMC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가에 따라서 역사적인 바른 개혁주의의 정신에 서기도 했고 또한 非개혁주의적 입장에 서기도 했던 것이다.
즉 단순히 WMC만을 고백하고 받아들인다고 역사적인 바른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님을 미국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WMC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WMC의 기본 정신이 전혀 표출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적인 정신들이 더욱 교회에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명목상 WMC를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류는 WMC를 받되 역사적인 전통에서 동일한 정신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수정하고 현대의 정신과 변화에 맞게 해석해서 받아 들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 또한 결국 WMC의 성경의 순수한 정신은 전부 잃어 버리고 현대의 인문주의적 경향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WMC가 어떤 정신에서 어떻게 받아 들여져야만 역사적으로 바른 성경적인 입장에 서게 되는지를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먼저 미국 장로교회가 어떠한 형태로 WMC를 변형 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1706년에 미국의 장로교는 노회를 조직하여 바른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기위해서 모임을 갖었다.110)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1716년에 대회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신학적 입장으로 인해 1729년에 가서야 WMC와 대,소요리문답이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 채택되었다.111)
그 이유는 두입장으로 나누어 졌기 때문이다. 즉 엄격한 서약을 요구하는 견해와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적 입장을 채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견해로 나누어져서 나중에는 모두를 수요할 수 있는 일종의 타협의 형태로 채택이 되었던 것이다.112)
그러나 후자의 입장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대한 서약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으로 나갔으며, 결국 교회의 결정에 대해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사태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결과 1903년에 WMC에 대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WMC의 개정을 시도했던 것이다.113)
그 후에 더나가서 결국 자유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24년 오번선언서(An Affirmation Designed to Safeguard Unity and Libert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결국 장로교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에 도전하는 무리를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로교의 바른 정신이 급속도록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927년에는 미국 장로교 총회가 그동안 총회적 차원에서 채택해온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문서의 구속력을 해제하기도 했다.114)
이런 변화 WMC에 파괴를 의미하는 변화였던 것이다. 이렇게 WMC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1934년 Barth를 통해서 바르멘 선언이 공포되었다.115)
Barth는 이 선언을 고대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려고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116)
그러나 이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변질된 WMC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WMC는 보다 철저한 바른 성경의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백되어 졌다면 바르멘 선언은 독일의 나치 정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민족적 위기 의식에 의해서 이런 사회문제를 극복하고자 신앙고백의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결국 바르멘 선언을 통해서 신앙고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 되면서 미국에서는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을 발표하게 된다.117)
결국 이 고백도 성경적인 의도에서 고백되어진 것이 아니라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회적인 위기의식에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백된 것이다.118)
그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 부분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로저스는 3부분으로 이것을 나누어 지적한다.

첫째 성령의 교제로 말미암은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은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이다.
둘째 "화해의 사역"은 사회에서의 화해사역을 포함한 교회의 선교를 논한다.
셋째 인간생활의 환경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진 화해의 성취.

이처럼 "화해의 신학"을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과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게 요구하는 화해의 선교는 모든 시대의 복음의 핵심이다"119)
라고 표명하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WMC내용과 중심 정신을 모두 버리고 파괴된 형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화해는 죄인의 중생이 아니라 사회적인 화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 선언을 통해서 해방신학, 여성신학, 과정신학, 흑인신학 등의 화해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미국적 영향이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초기 12신조도 이미 엄밀한 WMC의 정신이 삭제된 형태로 축소되었으며120)
, 이후에 WMC를 장로교 표준문서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어떻게 받는 것이 순수하고 역사적인 전통적 개혁주의의 성격인지 전혀 표명되지 않고 미국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던 것이다.121)
그렇기 때문에 한국 장로교회에서도 여전히 명목상 WMC만 가지고 있는 형편과 또는 계속적으로 각 교단과 사회적인 형편에 맞게 재해석해서 적용하는 형태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WMC 당시의 순순한 성경적인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변질되어 버리고 결국에는 WMC폐기 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122)
그나마 구프린스톤의 입장에서 WMC를 소개하려고 박윤선 목사가123)
초판 WMC를 한국에 소개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석만124)
교수의 WMC 해설집은 최소한의 엄밀한 개혁주의적 정신에 입각해서 해석되어진 귀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 개성연을 통해서 WMC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 박윤선, 뻘콮, 바빙크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 지금까지 연구되어온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계보에서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WMC 당시의 순수한 성경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정신으로서의 신앙고백적 입장이 한국 교회에서는 너무나 빈약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結論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WMC는 전통 장로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이 평가하고 있듯이 당시의 시대적인 영향을 제시한 표현이 아니라 비록 시대적인 특성속에 표현되었어도 그 의도는 순수하고 엄밀한 성경의 의미를 고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바른 성경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잠시 살펴 보았지만 그 본래의 순수한 정신이 모두 변질되고 오용되어서 지금은 WMC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된 것이다. 과거 청교도들이 이 WMC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던 역사를 보게되면 오늘날 장로교인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을 것이다. 그만큼 WMC 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의미가 상실되어 있는 것이다. 핫지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125)
를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이다. 결국 오늘날 非개혁주의자들도, 이단들조차도 WMC를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WMC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즉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정신에서 받아들이는지를 명확히 해야만 역사적으로 바른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게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본 저자는 결론적으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김영규 교수가 제시한 방식을 제시한다. 즉 바른 개혁주의에 서기 위해서는 오늘날 구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을 통해서 화란의 바빙크신학과 또한 17세기를 통해서 칼빈과 어거스틴과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말한다.

20세기 초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인 H.Bavinck와 K.Barth가 자신의 신학의 기초를 세울 때, 17세기 개혁신학으로 돌아가 시작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7세기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떻게 돌아가고 누구에게 돌아가느냐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H.Bavinck는 17세기 개혁신학의 오랜 교과서와 같은 『순수신학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를 재편집하였고 K.Barth가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강의할 때 17세기 개혁신학에 대해서 편집한 H.Heppe의 책(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으로 돌아가서 강의하였다. 그 당시 Ernst Bizer가 재편집할 때 K.Barth가 그 머리말을 썼다. 문제는 그의 신학은 로마서주석을 통하여 잘 알려져 그런 명성 때문에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교의학에 대해서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미 그의 신학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여 교의학을 강의하려고 했을 때, 비록 그가 성경이 그 교의학(eine evangelische Dogmatik)에 있어서 성경이 그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자기의 신학으로 17세기 신학을 평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126)


여기서 그는 바른 개혁주의의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근래의 가장 바른 신학자의 사상(바빙크를 언급)을 통해서 17세기의 바른 신학적 입장을 거쳐서 칼빈의 신학과 함께 어거스틴으로 그 다음은 교부시대로 돌아가야만 성경적인 바른 개혁주의를 정립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인 바른 개혁신학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이미 자기신학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신학으로 역사적 개혁신학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WMC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자기신학으로 돌아가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신학의 내려놓고 역사적으로 바른 선을 통해서 WMC입장으로 들어가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WMC의 순수한 성경적인 정신이 자신에게 그대로 흡수되고 그것을 가장 바른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구프린스톤에서 화란의 바빙크와 영국의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선을 연구해야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고백을 변형시키지 않고 순수한 성경의 고백을 목숨처럼 여기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둘째로는 단순히 WMC만을 연구할 수 없고 이 고백서가 표명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수 많은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서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함께 논의하고 있는127)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의 의미들을 함께 충분히 살피는 방식으로 WMC에 접근해야만 왜 WMC가 그러한 신앙적 선언을 성경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표명하게 되었는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는 위에서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WMC 이면에 보다 더 철저한 성경적인 의미를 제시한 많은 신학자들의 입장들이 있다. 이 부분을 찾고 연구해서 WMC입장을 더욱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세가지 방식으로 WMC를 연구해야만 당시의 순수한 정신을 그대로 찾고 또한 그 정신을 오늘날 우리들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순수한 정신이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적인 시대의 문화적 표현이 아니라 철저하고 바른 성경적인 의미를 찾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WMC는 철저히 실천적인 입장을 갖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성경의 바른 의미의 고백을 단순히 어느 한 사람의 교리나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고백해야 할 신앙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WMC의 참된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WMC의 순수한 의미가 드러나게 될 때 역사적으로 WMC가 갖는 개혁주의적 독특한 자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WMC의 개혁주의적 특징은 두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는 가장 앞에서도 제시되었던 것 처럼 "하나님 앞에서 오직 성경(Coram Deo, Sola Scriptura)"으로만 살려는 특징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a Gratia)의 사상인 것이다. 즉 말씀을 통해서 모든 예배와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이런 정신은 소요리문답의 1문을 작성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람의 첫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본 저자도 WMC를 정리하면서 소요리문답의 1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미의 풍성함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결국 위의 두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소요리문답 2문의 답이 되는 것이다.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법이다"
이렇게 WMC가치와 특징이 바르게 드러나게 되면 WMC의 각각의 조항들이 역사적으로 엄밀한 개혁주의의 중요한 교리적 내용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WMC의 후손들이 동일한 엄밀한 개혁주의, 아니 본 저자는 오히려 엄밀한 성경정신이라고도 말하고 싶은 이 자리에 선다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논의하고 살펴본 것처럼 역사적으로 WMC학자들이 행했던 것처럼 가장 바른 성경의 의미를 찾는 것과 또한 바르지 않는 非성경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배격하는 이 두 자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갖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소유되어야 진정한 개혁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
결국 우리는 왜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서들을 살펴야 하는지 처음의 의도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게 될 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렇게 염려하고 두려워 했던 정신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128)
라는 정신을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거나 오용하거나 곡해하는 것이 제3명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겉는 것이며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임을 우리는 기억하며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작업을 마치면서 우리는 겸손함과 간절한 소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의 무지로 변질된 진리로 인하여 우리가 슬프고 아프며, 우리 마음속이 아프고 우리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게 하소서, 오직 주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無理)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주옵소서,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129)
그렇게 됨으로 이땅에 다시 한 번 진리의 꽃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도록 하옵소서"




[부 록]


여기서 마지막으로 이단에 대한 정의를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엄밀하고 순수한 성경적인 정신의 개혁주의 사상을 정리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 어디까지를 바르지 않은 非개혁주의적 성격으로 규명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非개혁주의 사상을 왜 그렇게 역사적 개혁주의자들은 목숨을 걸고 배격했는가? 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역사속에서는 늘 非개혁주의적 성향을 포용하고 같은 기독교의 분파로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非성경적 입장으로 배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대문에 오늘날도 바른 개혁주의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바른 개혁주의 사상을 갖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반대되는 정신을 끊임없이 배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정신은 분리 될 수 없는 것이며, 이 둘을 함께 갖을 때 그것이 엄밀한 개혁주의자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여기서는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사상과 WMC 총회에 위의 정신을 가장 강력하게 표명한 George Gillespie, (Truth and Heresy)의 글에서 이단의 특징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130)
그럼으로 오늘날 우리들도 어떠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Ⅰ. 이단의 정의

그는 이단 명칭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단(heresis)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편당(sect)이란 단어로 대신 쓰였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5장17; 15:5; 24:5; 26:5; 28:22절의 경우와같이 참으로 이단적인 견해로 간주되었다. 사도는 이단(heresis)이란 단어를 그의 서신에서 두 번 사용하였는데, 이단과 분열(heresies and divisions), 또는 다툼과 불화(strife and variance)간의 어떤 구별과 구분을 가하였다(고전11:18-19; 갈5:20). 모든 분열과 다툼, 또는 불화는 이단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구절에서 이단은 분열과는 다른 어떤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아라비아어와 그것을 번역한 것은 선행하는 구절가운데서 분파(schism)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으며 게다가 이단이란 단어를 첨가하고 있다. 즉, skismata kai heresis(분열과 이단) 즉, 이는 너희 중에 반드시 분열(종교적)과 이단이 있을 것이며, 너희들 중에 경건한 자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단지 이단(heresies)이 분열(division)의 의미로써 쓰여졌다고 이해하는 자들은 사도의 핵심을 간파하지 못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도가 사랑의 법칙에 반대하는 분파적 분열(skidmata)을 말한 후에, 덧붙여 Dei gar kai heresis.... 이는 너희 중에 이단이 있어야 하리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가 말한 바가 너희 중에 분열(divisions)이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단지 분파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욱 나쁜 이단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도대체 이단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작가의 맹목적 추종없이, 나의 대답을 성경 그 자체에 근거를 두고 제시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긍정적인 차원에서 답하고자 한다."

Ⅱ. 부정적인 차원에서의 이단

1. 이단은,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오류가 너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지므로 지금까지 성경에 의해서 논쟁되어지는 모든 오류에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 것도 아니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다룬 근본적인 몇 가지 문헌에 대해 파괴적인 어떤 오류도 이단이라고 제한지어져서도 안될 것이다. 일차적인 문헌에 의하면, 만약 당신이 그러한 진리를 지식이나 믿음 없이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을 얻도록 하지 못한다. 순교자 피터가 이단을 정의할 때, 그는 근본적인 오류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성경에 반대되는 오류를 이단이라고 말하였다(LOc. Com, 2권 4장 50절). 그래서 칼빈은 교회안에서 거짓된 교훈으로 갈라지게하는 것을 이단으로 이해하였다(강요. 4권 2장 5절).131)
Walles는 이단적인 교회는 그 근본적인 면에서 오류가 있거나 근본위에 세워진 몇 가지 다른 것들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였다(tom. 1, p. 57).
베드로가 이러한 이단을 그 근본,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거되어져야 할 것으로 말했을 때, 그는 교회들에게 그것이 너무 사소하게 여겨져서 단순한 이단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것을 "멸망케 할 이단"이라고 상기시켰다(벧후2:1).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요하고 근원적인 원리들을 근본적인 진리로 이해하게 된다면(나는 우리가 새로운 시작자들(new beginners)에게 세워놓은 첫 원리 또는 교리(cathechism)의 가 나 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으로서 공통적으로 세워진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풍성하고 웅장한 개혁교회의 교리(cathechism)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개혁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계명으로 주어지고 배우고 알도록 요구되는, 구원얻도록 하는 그런 모든 진리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이단이란 항상 어떤 근본적인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2. 장로회 재판을 통해서 훈계를 받았고, 그 이후에 계속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고집하는 자는 (장로회 재판을 통해서 훈계를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단이 아니다라고 우리는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디도서 3장 10절에서 이점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는 그가 그러한 훈계를 받기 전에 이단임을 암시한다.

Ⅲ. 긍정적인 차원에서의 이단

긍정적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 것들이 이단을 일으키도록 만든다고 나는 확신한다.
1. 몇몇의 사역자나 교회 구성원들에 의해 오류가 발생한다. 나는 참된 교회나, 또는 교회 회의를 참석하거나 참된 교회임을 고백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나 바울 모두, 베드로후서 2장1절,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 이단이 교회들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신에서, en humin, 너희 가운데서(among you), 즉 그리스도인인 너희 가운데서라고 첨가하고 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20:30). 그래서 성경은 가시적인 교회 없이 함께 모이는 무리들을 향해 이단이란 말로 지칭하지 않고 이교도, 또는 불신자로 표현하고 있다.

2. 오류는 그것을 첫 번째로 고안하거나 그것을 발의하는 데 있어서나(이단의 교주가 이런 경우에 해당함), 또는 그것을 견지하고 그것을 고집하는(모든 이단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임) 양자에 있어서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선택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성경에서 그것에 부여하는 이름에서 발견하게 된다. 즉, heresis, hereomai, 내가 선택하다(I choose)란 의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해의 때에, 그러한 오류를 강제적으로 고백하도록 강요당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이라고 부르지 않으며, 만약 자발적으로 그리고 강요없이 그러한 것을 고백하였다면,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른다. 참으로 그들은 오류라고 알고 있는 것을 고백하기전에 죽음을 당하든지, 극심한 고문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짓게되는 그들의 죄는 이단이라고 불릴 수가 없는데, 이는 이단자들이 자신의 오류 안에 그것을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고수하게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고려에서, 터툴리안은 이단자들을 autokatakritos 즉, 자기자신을 비난하다(condemned of himself)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자신을 비난하는 것을 자신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단을 배척할 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내가 그를 배척한다면 그 때 나는 그를 잃는 것이며, 그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의 멸망은 그 자신으로 인한 것이며 이는 그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영혼의 기쁨이 가증스러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단자들을 autokatakritos, 또는 자기 비난자들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며 안전하다.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의 빛과 자신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알게된 원리들을 향해서 달려가기 때문이다. 곧 그러한 지각은 많은 위험스런 결과들을 수반하게 된다.

3. 진리를 배척하는 오류를 선택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단자들은 어두움을 빛으로, 그리고 빛을 어두움으로,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바꾸어 놓는다. 미혹하는 영과 악마의 교리에 유의하는 그들은 또한 "믿음에서 떠난" 자요(딤전4:1), "진리를 대적하는" 자요(딤후3:8), "진리에서 돌이킨" 자들이다(딤후4:4). 그들의 노정은 ad quem(오류를 향한 시작; to which)일뿐 아니라 terminus a quo(오류로부터의 마지막; end from which)이다.

4. 고백되어지고 마음에 새겨짐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추문이 되고 유혹이 되는 오류가 그것이다. 비록 (다른 여러 가지의 죄들뿐만 아니라) 이단이 그러한 사상 속에 숨어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에 심판에 속한 것이지 사람의 판단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단들은 심지어 인간들안에 숨어있다고 할지라도 확실하게 알려졌으며 분명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이단자들은 회피되고 거부당해야하는 수치스러운 자들이며(롬16:17;딛3:10). 이는 그들의 오류가 알려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성경을 바탕으로 하거나 또는 필연적인 결과로인해 성경으로부터 추론된 몇가지의 주되고 부차적인 진리에 반대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성경 안에서 문자적이고 구절적인 것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세계안에는(in the Christian world who contradicted that which is literally and syllabically in scripture) 절대로 어떠한 이단자들이 있을 수 없다. 가장 저주스러운 이단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대신에 성경에 대한 동의을 요구할 것이지만, 그러나 성경의 말씀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게되는 모든 진리에 동의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기초로 한 결론적인 어떤 진리에 반박하는 모든 오류를 이단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경이 죄를 지은 모든 자들을 "행악자들(workers of iniquity)"로 간주하지 않음같이, 오류를 저지른 자를 모두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비록 참된 본질적인 면에서 묵과될 수 있는 죄와 오류가 없지만, 모든 죄가 극악무도하고 가증스런 죄가 아니며 모든 오류가 이단은 아닌 것이다. 이단들은 분열보다 더욱 큰 악행으로 언급되지만 마치 모든 오류가 이단인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고전11:18-19).

6. 교회를 불란케 하며, 그후에는 권징을 폐기시키며, 당파적으로 견지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Errare potero, heticus non ero, 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이단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단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들의 신앙을 던져버리게 하는, 속이는 자요 미혹하는 자이다(딤후3:13; 행20:30; 딤후2:17-18; 롬16:17-19; 벧후2:2). 이단자라고 알려지고 주목받은 모든 자들은 분열을 일으켜서 자신들에게 제자됨과 추종자가 될 것을 동조시키거나 또는 그들을 이끌어 나와서 자신의 편을 강화시키는 분열주의자들(schismatics)이다(그런 의미에서 이단(heresis)은 종종 종파(sect)의 의미로 쓰여졌다, 행5:17; 15:5; 24:5; 26:5). 이러한 까닭에, donatists들은 키프러스 사람들에게 이단을 전해줌 없이 이단자들로 비난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 낯선 사물의 변절이여(says Vincentius Lirinensis, Advers. Het. [AgainstHeretics], cap. 11), 동일한 주장을 하는 자는 카톨릭으로 판단받고, 그 추종자들은 이단으로 심판받았으며, 그 주모자들은 방면되고, 그 제자들은 비난받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왕국의 아이들이었으나 지옥은 그 주창자들과 그것을 고수하는 자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단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6가지 중) 이 마지막 구성 요인은 아라비아 해석자에의해 힌트를 얻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9절에서, 이미 살펴본대로 그는 분열(schism)과 이단을 결합하였으며 참으로 그 기원에 있어서, kai[그리고]와 주장을 하는 것(rising of speech)은 이단의 가슴안에 분열을 가지고 그것을 조장하는 것과 같이 이단을 설명한다. 나는 당신의 분열에 대해 들은 것을 부분적으로 믿는데, 이는 "편당이 있어야", 즉 분열이나 그 이상의 어떤 것의 양자 모두가 있어야 한다고 사도 말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은 강요4권, 2장 5항에서, 교회의 교제를 깨뜨리는 것과 불란에 빠뜨리는 것을 이단자들과 분열주의자들 양자가 하는 일로 말하였다. 이는 이단자들이 교리 안에서 동의하는 교회의 교제를 깨뜨리며, 분열주의자들이 때로는 믿음과같은 부분에서 동의를 하더라도 사랑의 관계로 묶여있는 교회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길레스피는 새로운 교리적 형태로 기존의 역사적 바른 교리를 어지럽히는 방식의 이단의 특징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탄의 최고의 기만과 의도가 "새 빛들(new lights:새 교리, 더욱 발전된 교리라고도 할 수 있다)"이란 이름 또는, 개념아래 이 세상에 유입되어 왔다. 뱀이 새 빛의 개념을 가지고 이브를 기만하지 않았던가?(창3:15)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사도가 우리의 눈앞에 제시한 본보기를 통해서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사탄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안에 있을 것을(고후11:13-14, 계2:2) 경고하고 있다. "새 빛들"은 그리스어로 Nea xelidon으로, 기만하는 단어(beguiling word)가 된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을 기만하는 단어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지금 새 빛으로 외쳐대는 그러한 것들의 대부분이 빛(lights)도 아니며 그렇다고 새로운(new)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빛이 아니라 함은 모든 참된 빛이 연역되는 말씀으로부터가 아니기 때문이며, 새로운 것이 아니라함은 이미 이전에 활동하고 존속되었던 것과 매우 같기 때문이다. 도덕율 폐기론주의, 재세례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보편 구속, 보편 구원, 그리스도의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왕국, 성도들의 양심의 자유 등이 이 세대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고 논박되었다. 만약 그것이 빛이라면, 독립성 그 자체는 최근에 뜨기 시작한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는 이미 오래전에 교회 회의와 의회들이 논의하고, 숙고하고, 협의하고, 충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법적 제재를 가하고, 책망하고, 비난의 고통하에서 어떤 것을 즐겨야 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교의가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도르트회의 제23차 회기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전제들을 보라. 아울러 Eposcopii Disp. Theol. [에피스코파우스(시몬 감독)의 신학적 논쟁] 3부 54장 9-10제, 3부 22장 4-5제 11항을 보라.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10가지로 이 운동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이런 정신을 오늘의 개혁주의자들도 부지런히 이어받아서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수 많은 교단적 입장을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

① 그것은 오랜 어두움 뿐만 아니라 선하고 오랜 빛까지도 몰아내는 거짓된 새 빛들이다. 의술에서 처럼 파라클레스파 의술이 갈레노스파 의술을 파괴할 때, 그것은 극도로 위험스러우며 오래전 입증되어진 원리들을 전복시키게 된다. 그러나 신중하고 솜씨있게 취급될 때, 그것은 매우 선용될 수 있는데, 이는 갈레노스파 의술을 온전케 하며, 갈레노스파 의술만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욱 빠르고, 쉽고, 유쾌하게 처리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in divinity), 그러한 새 빛들은 옛 빛을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고 향상시키며 완전케 하며 훌륭한 선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참된 빛들을 파괴하고 몰락시키는 새 빛들과, 오래되고 선한 방식에서 우리들을 멀게 만드는 새로운 방식들은 전적으로 혐오스럽고 회피되어져야 한다.

② 몇몇 사람들이 선한 옛 빛을 몰아낸 것 뿐만 아니라 거대한 애굽의 흑암을 몰고온 것들을 자랑하는 이러한 많은 새 빛들이 있다는 것이다. "흑암을 광명"으로 삼으며 "광명을 흑암"으로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5:20).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신적인 권위, 영혼의 불사, 택자들을 향한 영광의 영원함과 유기된 자들에게 임할 고통 등과 같은 믿음의 기본적인 조목들이 의문시되고, 부인되고, 비난받을 때, 거대한 흑암이 유입되었다고 말하고자 한다. 만약 그러한 믿음의 근간들이 흔들린다면, 의로운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그래서 구주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으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③ 확실한 진리(비록 근본적이거나 정황적이지 않더라도)를 모호하게 만드는 그러한 새로운 빛을 주의하라. 우리가 어떠한 죄악도 언급해서는 안되며, 그래서 어떠한 진리도 언급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그것은 아주 사소하지 아닌가?" 모든 진리들로 하여금 매우 가치로운 것이 되도록 하자. 진리를 사서 그것을 팔지 마라. "이 진리는 질서(discipline)에 관련된 사안이니 지나도록 하자, 그것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칼스타트(Karlstadt)와 루터(Luther) 양자의 삶에 있어서 멜키올 아담(Melchior Adam)은 비밀 참회, 음식의 구별(difference of meats)의 철폐와 교회안에서 조상(彫像)들을 몰아내는 문제에 있어서 칼스타트의 엄격함, 열정, 진보성을 불쾌하게 여긴 루터로부터 야기된 커다란 사악함을 보았는데, 그 것은 루터의 부재중에, 그와의 논의와 이해없이, 비텐부르그에서 칼스타트에 의해 저질러진 일로 말미암아 루터의 감정이 격해졌던 것이었다. 루터는 이러한 사안들에 있어서 칼스타트의 엄격함과 열심히 교리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요점들을 방해하고 지연시켰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통탄할만한 성찬주의 논쟁의 첫 발단이었으며, 그로 인해 독일내에 커다란 불화가 야기되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의 교회 안에 있었던 질서에 관한 논쟁들을 주목하고, 읽고,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논쟁들이 더욱 더 높아졌음과 사소한 일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거부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자들이 나중에 중요한 일에서도 소홀히 여김을 알 수 있었다.

④ 어떤 확실한 진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교회안에서 현재 견지되고 고백되어지고 있는, 확실하고 분명하며 오류가 없는 진리, 마치 인간들의 판단은 무오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제재를 받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 저런 믿음의 조목들을 확신하고 무오하게 설득되어질 수 없음같이, 그러한 진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새 빛을 주의하라. 성경은 신자들이 확실하고 무오한 진리의 지식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이는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원만한 이해의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골2:2) 기도했을 때, 그가 기도한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 즉 그분은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며, 전능하시며 등, 그분의 본질과 속성이니, 성부의 신비와 거룩한 삼위일체안의 한 구별된 위격이시며 영원한 발출이신 그리스도의 신비, 그분의 인격과 본질과 직무와 탄생, 열정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간섭, 이것들이 사도가 우리들에게 가장 충분하고 확실하게 깨닫게 한 것이다. 데오빌로가 그랬던 것처럼(눅1:4), 디모데도 그가 이미 배운 것들에 확고히 설 것을 권고받고 있다(딤후3:14).

⑤ 의로움의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은 새 빛을 경계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쫓을찌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8:20). 사람이 그들 자신이 일으키는 빛을 따라 행할 때 그들은 흑암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환상들은 새 빛들이 아니다. 진리의 말씀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과거에 Weigelian의 광란적인 환상이 있었는데, 성경 말씀으로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에 의해 계시된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더 풍성한 지식과 빛을 주시는 그 때가 온다는 주장이었다(그들은 그것을 seculum Spiritus Sancti[성령의 시대]라 불렀다). 사도가 고린도전서 2장 7절에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것은 성경안에서 풍성히 계시되었다. 우리에게 설교되어지고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였던 것이었다(벧전1:12).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을 것인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그것은 분명한 명령이셨다-역자주). 이러한 오류에 관하여, Brochmand. System. Theol., 1권 6부 2장 12문을 보라.

⑥ 새 빛을 자랑하고 으시대며 자만심에 빠져있는 자들을 주의할찌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의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2-33).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그렇게 제재를 받아야 한다면, 사적인 개인의 영은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내에서, 이미 받은 교리, 치리, 정치, 또는 예배의 형태에 배치되는 새로운 빛들을 모든 겸손함과 순종함으로 지적이고 경건한 교회회의(synod)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했다. 로크리주의(Locrean)의 엄격함이 너무 심해서, 어느 누구도 새 빛에 따라 행해서는 안되며 그의 목에 밧줄을 걸어서, 만약 그 의도가 선하면 살려주고 약하면 교수형에 처할 정도였다. 그래서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우리에게 말한다(Adverb. Timocr[티모그라테스에 반박하며]). 나는 이러한 엄격함을 새로운 빛을 소개하거나 교회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야기시키려는 것들에 대해서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강화에서 데모스테네스에 의해 기록된 아테네인들의 법을 여기에 적용하고자 한다. 아테네인들은 로크리(Locri)처럼 멀리 빗가지 않았지만, 만약 그 의도가 주장자의 노소를 불구하고, 선한 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될 원로회에 대해 제시되고 순응하지 않는 경우라면, 어느 누구도 그 새 빛을 아테네에 들여올 수 없을 것이다.

⑦ 분열시키는 새 빛을 주의하라. 참된 개혁주의 교회나 개혁 노정에 있는 교회로부터 분리하거나 새 교회를 모으는 것은 최소한의 성경적인 근거도 가지지 못한다. 우리가 한 교회안에서 이런 저런 잘못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서로를 훈계하고 선한 방향으로 일깨우도록 명령받았지, 그로부터 분리하도록 명령받은 것이 아니다(히10:24-25). 쯔빙글리(Zwingli)는 취리히에서 동의하지 않는 형제들(dissenting brethren)인 재세례파들과 우호적으로 협의를 하였고, 그들이 참된 개혁주의 교회로부터 이탈해서 교회를 모을 때까지, 세속적인 힘으로써 그들을 억압하고 제한하는 어떠한 노정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그리됐을 때, 그들은 고통을 받을 수 없었거나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을 구금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고였다.

⑧ 드러내 보이지 않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새 빛을 경계하라. 진리를 구석을 찾지 않는다. 이는 그곳에 빛이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마5:15).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0-21).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나는 같은 장 18절과 대조를 하기 위해서, 그들의 길이 더욱 더 어두워져서 그 어둠이 밤이 될 때까지임을 덧붙이고자 한다. 자신들이 견지하려고 했던 그 판단과 의미를 선언하기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석했을 때, 회의 참석자들은 그것을 부정하였고 에피스코프스(Episcopus)가 그 나머지 사람들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답했음을 나는 전해들었다. "Dies diem docet[광명이 광명을 인도한다{Day instructs day}]" 그것은 그들이 견지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희가 하나의 분명한 모델을 끄집어 낼 수 없는, 이시대의 분열주의자들 에게도 해당되지 않겠는가?

⑨ "열매없는 어둠이 일에"(엡5:11) 참여하는 새 빛을 거절하라. 어떤 것이 죄됨을 저들의 양심이 안다는 진술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사악함에 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비난하고 언급하고 탄원하지 못하도록 삼가며, 그들 자신이 시선을 끌고 관대히 여겨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한 나라안에서 공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 시선을 두지 못하도록 삼가는 기만적인 새 빛들이 있다. 그러나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새 빛인척 하며, 온유한 양심을 가진체 하는 어떤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을 다른, 그리고 상이한 길(그들 자신을 죄악된 길로 저주하는) 의 사람들과 그들의 공통 원인에 있어서 결합하거나 연합하는데 찬동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의 위대한 신 디나(Diana)와 양심의 자유를 외치며 장로회의와 교회회의에 의한 교회치리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회중을 정결케하며 추문받는 자를 성찬식에 금지시키는 것 때문에 장로교인들을 조력하지 않는 그들이 어떻게 반대로 분열주의자(Separatists), 재세례파(Anabaptists), 도덕율 폐기론자(Antinomians), 소키니우스주의자(Socinians), 에라스무스주의자(Erastians), 추구자(Seekers)들을 이교도를 용인하는 측면에서 조력하는지를, 내가 말하건데, 하나님께 그리고 그들 자신의 양심에게 이점에 대해 답변하게 될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그 해답을 찾도록 하자. 다시 새 빛으로 가장한 많은 이들이 또 다른 측면에서 흑암과 교제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어둠 속에 묻혀있는 이단으로부터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새 빛들"이 아리우스주의자(Arians), 마니교도(Manichees), 노바티안(Novatians), 도나티스트(Donatists), 명상 수도승들(Contemplative Monks), 탁발 수도사(Friars), 포티니안(Photinians), 소키니우스주의자(Socians), 아르미니우스주의자(Arminians) 등으로부터 빌어왔던가? 어떤 새 빛도 낡고, 찢어지고, 썩은 넝마로 기운 거지의 새 외투보다 빛나지 않는다.

⑩ 사람들로 하여금 더 좋을 것이 없는 것들을 보게하는 그러한 새 빛을 멀리하라. 그것은 아무런 덕도 세우지 못한다. 그러한 Boetiagmata[어리석은 어둠], 몇몇의 공허한 영이 소멸되는 무의미함과 교만함을 낳을 뿐이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딤전6:20-21).




미주

1)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미간논문, 1996, p. 50. 또한 WMC의 큰 특징은 Dort신조의 핵심적 내용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 현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연구 논문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런 형편 속에서 출간 되고있는 몇 편의 논문 조차도 대부분 K. Barth입장에서 연구 되고 있으며, 그 평가는 칼빈주의에서 벗어난 스콜라적인 교리적 체계라고 평가되고 있다. 오형극 교수도 자신의 논문에서 "17세기 영국사회의 종교적 상황과 신학적 풍토는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많았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나 사회생활에 관한 신앙고백이 우리와 맞지 않았으며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도 번쇄적인 정통주의의 경직성을 띠고 있었다"라고 WMC를 스콜라적으로 평가하고 있다(오형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총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9, pp. 5-6).
3) 여기에 대한 연구는 결론적인 부분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핵심 문제가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적인 의미로서 제시하면서 또한 더 연구 되어야할 과제로서 제시하기 위해서 결론 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특히 17세기로 돌아가는 개혁주의의 성격에 대해서는 김영규 교수의 "17세기 개혁신학"을 참고하는 것으로 하고 본 논문에서는 WMC에 해당되는 부분만을 다루고자 한다.
4) 이형기, 이형기 편역,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 301.
5) A.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p. 8. 17. 아르미니우스 사상은 도르트회의 이후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A.A. Hodge는 당시의 왕실파가 칼빈 사상을 버리고 이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당 시대의 주 세력으로 등장한 카톨릭의 신앙표준서들의 신학적 입장을 아르미니우스 사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6) J. L. Carson/ D. W. Hall [eds], To Glorify and Enjoy God. A Commemoration of the 350th Anniversa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Edinburgh: Banner of Truth 1994, ⅶ. 구체적인 회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1643. 6. 12. 회의소집법령이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통과됨.
1643. 7. 1 회의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모임
1643. 9. 25. 의회와 회의가 정식으로 "엄숙한 동맹과 계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함.
1644. 8. 20. 신앙고백서 작성을 위하여 위원회가 임명됨.
1644. 12. 11. 회의가 교회정치양식의 최종자료를 의회에 보냄
1645. 1.4. 의회가 공예배를 위한 지침서(Directory of Publich Worship)를 인정함
1646. 12. 4.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어 의회에 제출됨
1647. 4. 29. 신앙고백서의 성경인증이 의회에 제출됨.
1647. 8. 27. 신앙고백서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에서 인정 받음
1647. 10. 22. 대요리문답서가 의회에 제출됨
1647. 11. 25. 소요리문답서가 의회에 제출됨
1648. 4. 14. 요리문답서들이 최종적으로 의회에 제출됨
1649. 1. 30. 챨스 1세가 처형당함. 1649. 2. 22. 회의의 최종적인 공식집회. 1652. 3. 25. 회의가 해산됨
7) 의회의 상원의원 10명과 하원의원 20명으로 구성
8) 조병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박윤선 박사, 개성연 연구자료, 1998, p. 4. 장로교회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성직자의 동등성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계급적제도를 주장한다. 지교회는 서로 결합되어 있고, 노회에 종속되면, 노회는 국가적인 총회에 종속된다(1646판). 여기에는 두가지 주장이 있었다. 하나는 장로교회제도는 하나님의 권리에 의하여 신약성경에 제시된 유일한 제도라는 의견이며, 하나는 장로교회제도는 단지 신약이 가르치는 교회의 원리들에 가장 잘 일치하는 제도라는 의견이다.여기에는 William Gouge, Twisse, Gataker, Palmer, Temple, Matthew, Newcomen등이 속해있다. 또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특출난 대표자들도 포함된다. 본래 Alexander Henderson, Robert Douglas, Samuel Rutherford, George Gillespie, Robert Baillie등 다섯명 이었으나 Robert Douglas는 회의에 불참하였다.
9) Ibid. 이 파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아일랜드의 대주교 James Ussher의 입장을 따라, 감독의 기능을 신약의 교훈하고 설교하는 목사보다는 세속 군주처럼 이해하였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실제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직 두명이 참석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Brownrigg, Westfield, Prideaux, Dr. Featley,
10) Ibid. 회중교회파라고도 하며 이 그룹은 지교회가 자율성을 가진다고 하였으며, 물론 이들은 교회들간에 연합과 국가와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특별히 이 그룹에서 활동적이었던 인물들은 소위 "다섯 반대 형제들"이라고 불리우는 Thomas Goodwin, Philip Nye, Sidrach Simpson, Jeremiah Burroughs, William Bridge였다. 그 외에 Carter, Caryl, Phillips, Sterry등이 있다.
11) Ibid. 이 그룹은 스위스의 의사이며 신학자인 Thomas Erastus(1524-83)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회치리는 오직 국가의 승인에 의하여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회행정은 국가정치의 손에 놓여져야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은 소그룹이었지만 의회의 많은 에라스티안주의자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Lightfoot, Coleman, Selden.
12)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William Twisse, Charles Herle, Jhon White, Arrowsmith, Tuckney, Edmund Calamy, Joseph Carlyle, Thomas Colmen, Thomas Gataker, Thomas Goodwin, Philip Nye, Joshua Hoyle, John Lightfoot, Stephen Marshall, Herbert Palmer, Edward Reynolds, Francis Rous, Lazarus Seaman, John Selden, Richard Vines, Thomas Young(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om,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p. 231-247).
13) Philip. Schaff, Creeds of Christenom,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 269. 이 작업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부총장이요 신학교수였던 Dr. AnthonyTuckney의 공로가 컸다. 이 대요리문답은 다른 어떤 요리문답도 따르기 어려운 요리문답적 기술을 발휘한 역작으로, 신학의 전 체계를 대중적인 형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큰 특징이다. 여기에 관련된 발표된 논문은 다음의 것이 있다. {오덕교,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의 안소니 터크니의 역할과 대, 소요리문답 작성에 미친 그의 영향, 신학정론, 1987(5월)}. 그는 여기서 터크니의 입장과 영향을 잘 소개해 주고 있다.
14) Ussher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하도록 두 번이나 초대를 받았으나 참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Ussher의 철저한 교리들의 성경적인 해석은 웨스트민스터에 영향을 끼쳤음을 웨스트민스터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James Ussher의 십계명에 대한 문답식 해석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요리문답의 십계명 문답 비교, 개성연 연구자료, 1988).
15) James Ussher, A Body of Divinitie, or The Summe and Substance of Christian Religion, London, 1647, p. 331
16) Ibid. pp. 269-270. 소요리문답 작성 위원회의 소집책임도 역시 터크니 박사가 맡고 있었다. 대요리문답을 간략하게 압축하고 세심하게 논리적인 답변을 구사한 것은 John Wallis목사 였다. 이 요리문답의 탁월성은 매우 높아서 당시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칼빈주의적)에서 채택되었다. 그 탁월성을 Baxter목사는 다음같이 표현했다. "내가 본 것들 중 최상의 요리문답이요, 기독교 신앙과 교리를 가장 잘 요약해 놓은 요리문답이며, 정통사상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시험해보기에 가장 적합한 요리문답이다", 또한 Thomas Carlyle는 현대의 유물주의를 반대하면서 "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어렸을 때 배운 이 요리문답서의 제1문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가 점점 더 심오하고 자세하게 물어진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소요리문답에 대한 탁월한 해설집은 17세기 당시의 것으로는 (Thomas Vinsent, 홍병창역, 소요리문답해설, 여수룬, 1993/ Thomas Watson, The Ten Commandments, 이기양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이 있으며 최근의 것으로는 G.I. Williamso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64.
17) Philip. Schaff, op. cit., p. 268.
18) G.I. Williamson,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강해, 문성출 역, 양문출판사, 1989, p. 29.
19) 17세기 개혁주의 역사 속에서 개혁주의의 중요한 독특성에 대한 주제는 김영규 교수의 17세기 개혁신학을 중심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1.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 2. 언약의 통일성, 3.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 4.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 5.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6.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 모든 특징들이 WMC에 모두 제시되어 있는 것이 WMC의 큰 특징이다. 이것을 보아서도 WMC가 얼마나 역사적인 바른 개혁주의적 신앙의 표현인지 확인할 수 있다.
20) John. Calvin, 기독교 강요(1536년판), 양낙흥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p. 28-32. Battles는 이러한 구조적인 이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칼빈 신앙의 핵심은 그의 "회심의 성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1536년판 강요의 제1장 처음 몇 페이지에(아홉 페이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율법에 관한 자신의 비평을 담은 장의 처음 몇 페이지에서 그것을 집중된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출간된 강요의 개정판들은 이러한 사상들이 증보될 강요의 전체에 확산되어 일종의 중심 원리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Ibid., p. 32). 또한 김영규 교수도 이러한 칼빈 회심의 독특성을 루터주의와 대비되는 개혁주의의 중요한 특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회심의 성격과 내용이 루터의 인간론적인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성경론'이란 것이다(김영규, 기독교 강요 강독 강의안, 안양대 신학대학원, 1996. p. 1). cf) Jhon Murray, Calvin on Scripture and Divine Sovereignty(Grand Rapids: Baker, 1960), pp. 35-51 "갑작스런 회심을 초래한 중요한 의미를 정확히 파악 하다보면, 성경의 중요성과 그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직접듣고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칼빈의 회심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졌으며, 이는 그의 신학의 핵심처럼 성령의 내적인 증거를 통해서 주어졌다. 성경의 절대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놀라운 확신으로 인해서 종교개혁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어떤 개혁 사상가들보다 칼빈에 의해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다". 이외에도 (김재성, 요한 칼빈의 회심, 신학정론, 1992. 3월호. pp. 171-217)에서 이 중요성이 지적되고 있다.
21) 이 개념은 매우 중요한다. 즉 성경핵석의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실천적 성격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것에 관한 연구는 본인의 ("칼빈이 제시한 율법의 제3사용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 끼친 영향 고찰", 안양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에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것을 참고 하기 바란다.
22) 김영규, 조직신학편람, 안양신학대학원 강의안, 1998. p. 12.
23) 나는 이것에 대해 난해하지 않고 억지로 꾸며대지 않고 왜곡하지 않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물흐르듯 알기 쉽게 해석하고자 한다(Inst1536, p. 276).
24) 건던상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침묵을 지키든가 혹은 가볍게 또는 대충 그것들을 다루실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기꺼이 단념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John, Calvin, 기독교 강요,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한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4(1559판). 1. 14. 3).
25) 김영규,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신학정론 11권 2호, 1993, p. 583.
26) Ibid, p. 584-585.
27) 김영규, 조직신학편람, op, cit., p. 17. cf. 김영규 교수는 이러한 칼빈의 특징은 칼빈만의 특징이 아리나 당시 16세기에 개혁주의 교회의 신학자들의 전형적인 방식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화렐, 비레, 카피토, 부처, 미콘니우스,그리네우스등이 있다(Ibid).
28) 칼빈은 강요를 저술하면서 이 원칙을 가장 중심된 해석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롬12:6의 바울의 고백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이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성경의 모든 해석을 시험하는 아주 명백한 규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만일 우리의 해석이 이 믿음의 규칙에 의해 평가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Inst1536, p. 49) 바로 위의 부분이 초판 전체를 살펴볼 때 적정과 절도의 원칙임을 알 수 있다.
29) 로마 카톨릭의 전통 강조관, 신비주의의 영적 체험관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부분적 수용관등이 있으며 이 외에 자유주의의 성서비평학과 신정통주의의 계시관 등 오늘날은 성경관에 대한 더욱 혼란한 시대 속에 있다. 또한 김성봉 교수도 (개혁신학의 적극적 가능성, 안양신학대학원, 미간논문, 1996. pp. 1-6).이 부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유일무오한" 이라는 표현을 지적하면서 오늘날 성경관의 의미가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모호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단들도 오직 성경으로란 의미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30) 김영규 교수는 이런 WMC의 표현은 일반계시의 불충분성과 성경의 필연성에 대한 고백은 카톨릭 신학과 대립되는 칼빈의 맥이 어떻게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 사이에 이의없이 합의되고 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별히 "자연의 빛과 창조의 섭리의 사역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분명히 하나님의 선과 지혜의 능력을 계시할지라도,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에 필연적인 하나님과 그의 뜻의 지식을 주기에 불충분하다"에서 사용된 구문의 성격이 이를 더욱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관련된 특별계시의 필연성 뿐만 아니라 기록의 절대적 필연성의 목적과 관련해서도 칼빈의 표현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김영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개성연 연구 자료, 1998. pp. 2-3).
31) 이런 이해는 바빙크에 의해 바른 개혁주의적 특성으로 제시되었다. 즉 특별계시가 바로 일반계시를 인정하고 가치화하였으며 그 자체를 넘겨받아 참된 것을 융합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은 일반계시 안에서 모든 비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갖고 인간의 이름을 가진 모든 것과의 접촉점을 가지며 그렇게 일반계시가 모든 인간을 함께 모은다. 그리해서 일반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되고 회복되도록 인류를 보존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일반계시가 바로 자연과 은혜, 창조와 재창조, 현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서로 깨뜨릴 수 없이 결합을 유지시키고, 그런 일반계시 없이는 전 우주적인 존재와 생명과의 결합을 잃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또 다른 카톨릭주의를 만들고, 소키누스의 사상, 조로아스터교, 마니교를 새롭게 하게 된다고 하였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Ⅰ, 김영규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p. 292-294). 이렇게 이해 되어야만 오늘날의 극단적인 이원론적인 신앙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32) ①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② 잘 전파하시고, ③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시기 위함.
33) 박윤선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이 Barth방식의 계시관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바르트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것을가지시고 말씀해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또한 어떤 의미로 성경은 권위를 가지는가? 그것은 그것 스스로에게 권위를 붙이지 않을 때에만 권위를 가진다. 우리는 성경을 계시 그것과 한 가지로 볼 때에 성경에게 욕을 돌리며 그것이 원하지 않는 짓을 해 준다"라는 말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성경이 곧 하나님의 계시 그자체가 아니라는 의미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박윤선, 칼빈주의의 최대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 신학지남, 1980. 188호. p. 96). 결국 이러한 바르트의 성경관은 한국 장로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즉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Q.T방식이 이 신학적 근거에서 나온 원리인 것이다. 곧 내자신이 느낀 그 말씀이 그 순간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실정은 참으로 두려운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제시했던 그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 같이 이르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렘14:14-15)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곧 여호와의 순수하고 바른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올 맞이 할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자체가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것이다.
34) T. Vinsent, 성경소요리문답 해설, 여수룬, 1933, p. 35. cf) 이와 같은 대표적인 표현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WMC 1장 4항),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으로써 또는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WMC 1장 5항),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에서도 나타난다(WMC 1장 10항).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성경에서 말하기 때문이다(WMC 14장 1항), WM大. 157문.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35) WMC에서는 성경의 영감설의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36) 이 고백은 개혁주의 신자의 삶의 특징을 나타낸다. 즉 적정과 절도의 삶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철저한 진리 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삶을 개척해 가도록 두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정신은 소요리문답으로 이어진다. 2問: 하나님께서는 무슨 규칙을 우리에게 주사 어떻게 자시를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 할 것을 지시하셨습니까.? -- 질문 자체에 이런 정신이 철저히 스며들어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직접 제시하시겠다는 것이다. 答: "기록된 말씀"은 -- 지시하는 유일한 규칙입니다.
37) WM大 5문: 성경은 주로 무엇을 가르칩니까 ?
답: 성경은 ---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이 표현은 알미니안적인 인간 중심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관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에서 개혁주의에서는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를 가장 대표적인 구절로 이해했다(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608).
38) WMC 1장 8항에서도 삶에서의 성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 안에 풍성히 내주하여 그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예배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인내와 위안을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러한 정신은 칼빈의 정신에 바르게 기초된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성경구절을 개혁주의자들은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하려 함이라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등등에서 이해했다.
39) 김영규, 조직신학편람Ⅰ,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안, 1998, p. 13.
40) WM大. 154문. 말씀과 성례와 기도
41) 자신의 헛된 호기심과 욕심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억제하고 오직 성경이 의도하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께서 그를 몰아가신다는 의미이다.
42) WM大. 155문 cf) 157문도 이런 정신에서 표현된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해석) 하는가?" 答. "성경은 높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고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로서만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함과, 성경의 내용 및 범위에 주의함과 묵상과, 적용과, 자기부정과(이것이 헛된 망상과 호기심의 거절을 의미한다), 기도로써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WM小. 90문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부지런함과 마음의 준비와 기도로서 임하여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마음에 간직하며, 우리의 생활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이 외에도 '설교'부분에 언급되고 있다.(설교 자체는 성경 해석이 전제되어야 하는 작업이기에 여기서 잠시 함께 언급해 보고자 한다) WM大. 159문. 어떻게 설교 해야 합니까? 答. 바른 교리{성경 그 자체의 뜻:(딛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를 전파하며, --- 명백하게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할 것이며,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지혜롭게, 자신들을 청중들의 필요들과 능력에 적용시킬 것이며, --- 하나님과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성실하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회심, 건덕과 구원을 목표로 한다. 또한 듣는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정신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듣는 그 자체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함으로 듣게 되기 때문이다. WM大. 160문. 答. 근면과 준비와 기도로써 듣고 그 들은 바를 성경으로 살펴보고 진리이면{다음 구절은 모두 위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들이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고전10: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준비된 마음으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받아 들이며, 그것을 묵상하고, 참고하며, 그것을 그들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그들의 생활에서 그 말씀의 열매가 맺혀져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표현 속에서 칼빈이 제시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의미가 성도의 삶에 성경을 통해서 전 인격적인 기초로서 자리잡게 되어 그렇게 해석되고 또한 적용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43)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의 역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즉 외부를 향한 역사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에 있어서 공통적인것이다"(Meichior Leydecker).
44) Augustinus, De Trinitate, Ⅵ, ⅶ, 9. (J. Forbes, 조직신학, 개성연 1998년 가을 연구자료, p. 5. 재인용). cf) 이런 특징이 WMC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2장 3항에 삼위일체를 다루기에 앞서서 통일된 하나님의 한 속성을 1-2항에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다.
45) Ibid.
46) Ibid. pp. 6-8.
47) 이 외의 더욱 자세한 내용은 아다나시우스의 내용을 참고로 한다.
48) 이외에도 33개 조항 전체에 골고루 표현되어 있다. 지면상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만 언급해 보고자 한다. 4장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매우 선하게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5장에 만물의 대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장 지혜로우시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무한히 선하심은 그의 섭리에 잘 나타나 있다, 6장에 하나님은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그 자신의 영광에 부합되도록 이를 허용하기를 기뻐하셨다, 7장에서 하나님은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 성령을 주어 --- 믿을 수 있게 하기를 약속하셨다,
8장에는 더욱 특별한 특징을 보게된다. 즉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주제임에도 통일적 경륜의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신학"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중심」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1항: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그의 독생자 주 예수를 ----,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 구속받고 칭의되고 성화되고 영화되게 하셨다, 2항: 삼위일체의 제2위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부와 한 본체이시며 동등이시나----성령의 권능에 의하여---태어났다, 3항: 주 예수는 --- 성령으로 성화되시고 --- 성부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있는 것을 기뻐하셨다. --- 아버지의 부르심에 의한 것--- 성부께서는--- 맡기시고--- 수행하도록(성령에 의해)그에게 명령하셨다, 4항: 주 예수는 ---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성령으로 각 사역을 모두 이루심, 즉 잉태, 고난, 십자가죽음, 부활, 승천등; WM小29문: 어떻게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신 구속의 참여자가 되는가? 답: 성령께서 --- 구속을 효력있게 적용함으로 된다)--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5항:주 예수는 ---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 아버지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시고, 성부께서 주신, 8항: 그리스도께서는 -- 그의 성령으로 효과적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9장: 하나님께서 --- 회개시키셔서(그리스도로)--영적으로 선한 것을 --의지력과 능력을 주신다(성령으로), 10장에 하나님이 -- 예정하신 --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영으로 밝혀 --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효력있게 이끄신다, 이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 성령에 의해 살아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택함받은 아이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때와 -- 성령을 통하여 --- 그리스도에 의해 중생되고, 11장에 하나님은 --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이며---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성령에 의해) 받아들이고, 3항:그리스도는 ---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 그들을 위하여 주어지셨으며(성령의 적용으로), 4항 하나님은 영원부터 --- 그리스도는 떼기차매 -- 그러나 성령이 적당한 때에, 12장: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 양자되는 은혜에 참여하는(성령으로) 자들로 만들어 주신다-- 양자의 영을 받고 -- 아버지로서 내리시는 징계, 13장: 그리스도의 죽음심과 --- 그의 말씀과 ---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 경건이 없이는 주를 볼 수 없다, 14장: 믿음의 은혜는 --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다 ----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 그리스도만을 믿고,
15장: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성령으로) 될 때 --- 하나님께로 돌아와서(성령으로) --- 사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16장: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성령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 성령의 실제적 감화가 필요하다 --- 선행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 그리스도로 용납되었기에 ---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다 --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안에서 -- 상 주시기를 기뻐함, 17장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성령으로 효력있게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의 효력과 그들 안에 성령 --- 의존된 것이니, 18장: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 내적인 증거요-- 서령의 증거이다--- 이 성령은 -- 보증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 수 있도록 성령이 능히 깨닫게하여 --- 성령 안에서 평화와 기쁨이 넘치며-- 하나님께 향한 사랑과,
19장: 하나님은 --- 한 법을 주셨다 -- 의식의 일부는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와 행적 --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 강화하신다 --- 그리스도의 영이 억제하며--- 행할 수 있게 하신다, 20장: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자유는 -- 하나님의 정죄하는 진노, 저주에서의 해방이요--- 하나님의 영과 더 충분히 교제 --- 하나님이 세워 주신 권력과 그리스도가 값주고 사신 자유는, 21장: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드려야 하며,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 --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예배 --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의 성려의 도우심에 의해 그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 거룩한 휴식(성령의 다스림을 통한)을 지켜야 한다, 22장: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해서 맹세 -- 서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할 것 --- 서원이 열납되려면 믿음(그리스도)과 --- 자비를 감사하거나(성령으로),
23장: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정치와 권징을 정하셨으므로, 24장: 하나님은 결혼으로 --제정하셨다 -- 오직 주 안에서 결혼, 25장: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하나니의 집과 가족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모으시고 --자신의 임재와 성령에 의해 효력을 낸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26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성령과 신앙으로 연합된 --- 신앙고백에 의해 하나님께 예배함, 27장: 성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나타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 은혜는 다만 성령의 역사와 -- 말씀에 의하여 발생한다, 28장: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의 제정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서 --- 성령에 의해 나타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29장: 우리 주 예수께서 제정하시고-- 그 일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송의 영적 봉헌일 뿐이다--- 신앙에 의하여 내적으로 참여하는 자 -- 영적으로 받는다-- 영적으로 자란다 -- 영적으로 신자들의 믿음에 임재한다, 30장: 주 예수는 교회의 왕과 머리로서 --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의 거룩한 고백을 옹호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해 권징은 필요하다, 31장: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잘못되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한 --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기 --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하신 하나님의 규례이기 때문, 32장: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간다--- 하나님의 낯을 뵈오며 ---의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 33장: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 심판을 정하셨다 -- 그에게 아버지의 모든 권세와 심판이 위임되었다 -- 그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 주 앞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과 유쾌함을 받으나(성령으로) 이처럼 33개의 모든 조항에서 통일적 경륜의 형태가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9) 이런 중요한 특징을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개혁주의는 역사 안에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까지 올라가며, 선택이 교회의 핵심적 원리이며,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物)의 원인( )을 추적하며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 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정신"이라고 한다(Herman. Bavinck, 개혁주의 교의학, 김영규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 208).
50) 이런 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구절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계15: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51) 지면상 나머지 부분은 각주로 처리한다. 특히 의도적으로 WMC의 전체 조항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WMC학자들이 이 부분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복음주의적인 인간론적인 접근의 WMC이해를 막고 신론적인 WMC이해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1장: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선언하셨다---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1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전체의 목적(5항),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 하나님의 뜻은 모두 --- 적혀 있다(6항), 4장: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서---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1항), 5장: 하나님께서는 --- 자유로우며 변함없는 자신의 뜻의 도모에 따라 --- 그의 지헤와 능려과 공의와 선하심과 긍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신다(1항), 하나님은 ---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로이 역사하신다(3항), 6장: 하나님은 ---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그 자신의 영광에 부합되도록 이를 허용하기를 기뻐하셨다(1항),
7장: 주께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 언약을 맺으셨다(3항), 8장: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신 뜻을 따라 --- 임명하시기를 기뻐하셨다(1항), 성부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있는 것을 기뻐하셨다(3항), 9장: 사람의 의지는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만 --- 자유를 가진다(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얻게 되는 열매이다. 그래서 구원의 서정에서 영화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5항), 10장: 하나님이 --- 그가 정하시고 기뻐하신 때에 --- 효력있게 부르시기를 기뻐하셨다(1항), 택함받은 유아들은 ---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때 --- 구원을 얻는다(3항), 11장: 그리하여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의 칭의에서 영광을 받게 하신 것이다(3항), 13장: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거룩함의 최종목적은 영광스러움으로 입혀주신다. 3항), 14장: 믿음의 은혜는 그들의 마음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이다, --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주요한 역할은 은혜 계약의 효력에 의하여 칭의, 성화, 영생을 --- 받아들이며 의뢰하는 것이다(즉 모든 것이 은혜에 기초되어 있고 전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1,2항),
15장: 회개는 복음의 은혜이니, -- 그와 동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노력하게 된다(여기서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이다. 1,2항). 사죄는 ---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다(3항), 16장: 선행은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와 증거이다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즉 영화롭게하기 위한 열매이다. 2항), 선행은 조금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그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3항), 하나님께서 -- 비록 약점과 불완전함이 많이 있으나 --- 상 주시기를 기뻐하신다(6항), 불신앙자의 선행은 --- 올바른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선행은 죄로 가득하다(7항), 17장: 궁극적 구원은 --- 값없이 주시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 것이다(2항), 18장: 진실히 주 예수를 믿고 --- 선한 양심을 따라 행하기를 힘쓰는 자들은 은헤의 상태에 있음을 이생에서 확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1항),
19장: 이 율법외에 하나님은 --- 의식적 율법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다(3항), 율법의 3번째 용도는 영에 의해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 기쁘게 행할 수 있게 한다(7항), 20장: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가 되신다(1항), 신자의 자유의 목적은 --- 주 앞에서 두려움 없이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주님을 섬기려는(예배, 헌신, 영광을 드림) 것이다(3항), 21장: 하나님께는 -- 마땅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경외하고 사랑하고 찬송을 드리고 사정을 아뢰고 섬겨야 될 하나님이시다(영광을 드림. 1항),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2항), 어디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6항), 22장: 맹세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 경솔히 하는 것은 죄악이며(2항), 서원은 어떤 피조물에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할 것이다(하나님만이 취하셔야 하는 영광이기에, 6항),
23장: 온 세계의 주가 되시고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과 --- 이 목적을 위하여 칼의 힘으로 무장시키셔서 --- 처벌하도록 하셨다(이 부분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영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다. 1항), 24장: 하나님은 결혼으로 --- 함께 살도록 제정하셨다, 그 목적은 상호협조, 인류증가, 교회의 증가, 부정방지이다(모두가 하나님이 세운 질서를 더럽히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1,2항), 25장: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예배, 영광드림)하는 교회가 지상에 항상 있게 될 것이다(5항),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권리 침범이다(즉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 6항), 26장: 성도들은 사랑으로 상호간에 연합되어 피차 받은 은사와 은헤로 교통하며 --- 상호의 유익에 이바지하는 공사의 의무를 수행할 본분을 갖는다(1항){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다음 구절이 이것을 나타낸다. (요17:21-2)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7장: 성례는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혜계약의 --인치심이다.--- 그의 은혜를 나타내며 -- 하나님을 섬기는(예배, 영광드림) 일에 엄숙히 종사하도록 제정하신 것이다(1항), 28장: 세례는 -- 새 생활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표와 확증을 의미한다(영광을 위하여 삶. 1항), 약속된 은혜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의 정하신 때에 그 은혜에 속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6항), 29장: 그 일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찬송의 영적 봉헌일 뿐이다(영광드림의 표현. 2항), 무지하고 완악한 사람들이 -- 합당치 않게 참여하므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지어 자신에게 심판을 받게 된다(하나님 영광을 더럽혔기 때문. 8항), 30장: 권징은 그리스도의 명예(영광)와 복음의 거룩한 고백을 옹호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해 권징은 필요하다 -- 만일 하나님의 언약과 그 인치심을 --- 더러워지는 것을 방임하여 두면 교회에 내릴 하나님이 진노가 온 교회 위에 내리게 된다(영광 모독, 3항),
31장: 교회 회의는 교회의 유익을(교회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위하여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자주 회의를 소집하여야 한다(1항), 그 회의에서 ---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뜻에) 일치하는 한 귀중하게 또는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2항). 32장: 의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나 영광을 받으며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스런 몸을 닮게 될 것이다(3항), 33장: 하나님이 이 날을 정하신 목적은 피택자들의 영원한 구원에서 그의 자비로운 영광을 나타내시며 악하고 사악한 자들의 영벌에서 그의 공의를 나나태기 위함이다 --- 악인들은 -- 주 앞에서 또는 그 권능의 영광에서 오는 영원한 파멸에 빠지게 될 것이다(2항)
52) 이 부분은 위의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인간의 의지나 공로나 덕, 선행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는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개혁주의의 인간론의 기초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시고 취하심을 나타낸다. 이 정신의 연관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욥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욥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행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53) 이 부분의 결정적인 구절을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에베소서 1장에서 찾고 있다. 1절: 하나님의 뜻으로,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6절: 이는 --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9절: 그 뜻의 비밀을 -- 그 기쁘심에 따라, 11절: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12절: 이는 --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J. Forbes, 조직신학)
54) 김영규,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언약의 통일성, 미간논문, p. 3.
55) Ibid.
56) Ibid. p. 9.
57) 신, 구약의 통일성에 기초한 차이점의 이해는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이해이다. 특히 칼빈의 정신에 철저히 기초되어있다{Inst(1559). Ⅱ. 10-11장}.
58) 이 표현과 '성경신학'에서 말하는 구약은 장차 올 메시야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기억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분명히 다른 표현인 것이다. 즉 '성경신학'은 그 표현 자체에서 신구약의 구원방식 형태가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적용 방식에서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정확한 의미를 위해서 WMC를 비교해 보자. 8장 '중보 그리스도에 대하여'에서 6항에 "구속의 사역이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기까지는 그에 의해 실제적으로 수행되지 아니하였으나 구속의 효력과 효험과 은택이 세상의 시초로부터 만대에 계속적으로 약속, 예표, 제사에 의하여 피택자들에게 전달되었다."
WM大에는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57문: 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으로 속죄와 모든 다른 은혜 언약의 유익들을 끼친다. 58문: 우리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그 유익을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 참여하다. 59문:누가 속죄에 참여 하는가? 답: 그리스도께서 -- 사신(택한) 모든 사람들은 구속이 확실히 적용되고 효과있게 전달되어서, 때가 되면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 믿게 된다. 66문 택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연합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데 --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그러면서도 참으로(구약성도 실제적 연합) 또한 나누일수 없게 결합되는 것이다.
67문: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은혜의 역사로서 그의 택자에 대한 --- 특별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 그가 받을 만한 때에 말씀과 성령이 저희를 예수께로 초대하여 이끄시고, 저희의 마음을 구원받도록 밝히시며, -- 새롭게 하고 ---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답할 수 있게 하고 --- 전달된 은혜를 받으며 지닐 수 있게 하신 것이다. 68문: 택자만이 효력있게 부름을 받는가 ? 답: 모든 택자(신,구약 모두),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효력있게 부르심을 받는다. 이처럼 성도의 구원은 삼위일체의 공동적인 사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전 택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며 그 열매도 동일하게 베풀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59)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신학'에서는 이것을 성경의 언약 자체가 시대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발전되어 예전 것은 쇠퇴되는 것으로 말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것은 다만 명확성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판명성의 차이"라고도 한다. 이런 정신도 여전히 칼빈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은 구약에 대한 신약의 보다 높은 우수성을 표현한다(Inst1559. Ⅱ. ?. 12). 그러나 이것은 신약과 구약사이의 가치면에서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의 사람들 사이에서 훨씬 명료하게 표시되었고 더욱 널리 비췄다는 의미인 것이다((Inst1559. Ⅱ. ⅹ. 23). 그러면서도 칼빈은 복음의 명료성과, 그 이전 시대에 말씀이 좀 더 모호했던 시대의 사의의 구분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다.
60) 14장 1-2항 이 은혜 언약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택함 받은 자들이 -- 구언에 이르는 신앙의 주요한 역할은 은혜 언약의 효력에 의하여 칭의, 성화,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받아들이며, 의뢰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 내용이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61) 이외에 다음과 같은 표현도 있다. 2장.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셔서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이런 정신에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의 임재 인식에 대한 방식과 신약의 육신적인 예수의 인식에 대한 통일 성을 갖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을 형상화 시키고 조각화 하는 행위들에 대한 지적. 3장.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뜻에 따라 되어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1항). 하나님은 택하신 --- 정하신 것처럼 --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 즉 타락, 구속, 성령인도, 믿음, 부름, 칭의, 양자, 성화, 영화, 견인이다.(6항) 즉 전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서 영원히 동일하게 적용됨을 가리킨다. 6장. 그들은 온 인류의 시조였으므로 ---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되었고 또 동일한 죄에서의 죽음과 부패한 성질이 유전되었다.(3항) 11장 6항 '구약 아래서 신자들의 칭의는 이 모든 점에서 신약 아래 신자들의 칭의와 동일하였다'. 15장 3항. '회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다. 그러나 회개는 모든 죄인들이 반드시 하여야 하며 아무도 회개 없이는 사죄를 기대할 수 없다' 비록 구약의 성도들이 제사를 지냈지만 여전히 그 행위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가 동일한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17장 2항. 택자들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이 주시고 변치 않는 사랑에서 흘러 나오는 예정의 불변성에 의한 것이다. 즉 구약은 행위나 공로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동일하게 예정의 기초에 있다는 것이다. 예정의 원칙은 Dort신조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변화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동일한 것이다. 19장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위 계약으로서 한 법을 주셨다. --- 모든 후손에게 --- 영구히 순종할 의무를 가지게 하셨다'(1항), '이 율법은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계속하여 의에 관한 온전한 법칙으로 남아 있게 되었고 --- 십계명으로 선포되었다(2항)', 도덕적 율법은 의롭게 된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까지도 영구히 이것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의무를 달리 폐지하지 않으시고 더욱 강화하신다(5항)' 이런 원리에서만이 오늘날 10계명의 의미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다. 신구약의 통일성이 보존되지 않아서 오늘날 10계명의 가치는 성도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형편이다. 25장: '공동 즉 보편적인 교회는 무형적이다. 이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지는 피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된다' 즉 하나님께서 동일한 교회를 가지고 계심을 밝히고 있다. 27장: 5항 '구약의 성례가 표현하고 상징하는 영적인 뜻은 신약의 성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32장. 성경은 육체와 나뉜 영혼을 위하여 이 두 장소(천국과 지옥) 외에는 다른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는다. 즉 구약에서의 사후관도 신약과 동일한 형태임을 제시한다. 이런 인식을 할 때 구약의 많은 부분의 해석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하게 확증하는지 알 수 있다.
62) 히13:8
63) 김영규 교수는 신구약 통일성 문제가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은 마르시온과 마니교의 싸움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김영규, 언약의 통일성, op. cit., p. 1).
64) Ibid. p. 5.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 보다는 부속적인 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들여지면서 여러 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을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 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 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합리주의와 초자연주의는 구약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거의 의미가 없었다.
65) 각 세부조항은 WMC의 내용으로 하고 여기서는 주된 특징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특히 개혁주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98년 계보 연구자료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특징"을 참고하기 바란다.
66) 루이스 벌코프, 권수경.이상원역, 벌코프 조직신학 下,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 661.
67) 특히 펠라기안들의 등장이래로 구원 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며, 그 결과 하나님께서 중심에 위치하는 구원의 서정을 무시하고 그 논의조차 거부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으며 지금도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통해서 거세게 도전되고 있다.
68) 루이스 벌코프, 신복윤역, 기독교신학개론, 성광문화사, 1984, p. 211.
69) 벌코프, op. cit., p. 663.
70) Ibid. p. 664. 이것이 WMC의 구원서정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즉 WMC는 부르심을 중심으로 중생을 회심 앞에 두어서 구원의 출발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결정하심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을 결정하게 되는 핵심을 회심으로 잡고 이것을 중생되기 전에 앞에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결정은 결국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71) WMC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 부분의 자세한 것도 Dort신조의 예정론에 다시 언급된다.
72) 여기서 WMC와 WMC이전의 개혁주의적 견해의 차이를 비교함으로 WMC특징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비교가 있다. WMC나 Dort신조 모두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으나 칭의와 양자의 제시 부분에서는 앞선 개혁주의자들의 좀더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J. Forbes(1568-1638)의 조직신학을 통해서 자세히 지적되고 있다. 그가 제시한 구원의 서정의 본성과 관련하여 제시한 4가지 근거들이 이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은택들의 본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첫 근거로서 그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서 2장에서 7장까지 다루고, 그 하나님의 작정에서 사려하였던 두 가지 주된 내용은 그것의 실체와 그 주된 원인에 대한 것이다.
그 작정의 실체는 세 부분 즉 정해진 인격체들과 그들이 정해지는 목적, 그 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작정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 혹은 의지인데, 이 원인에 대해서 그 작정의 실체의 세 부분을 근거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양자를 위해서 누가 결정되어 있는지에 대한 그 인격체들부터 분명하하고 그들이 결정되는 그 목적으로부터 분명하며 그들이 결정되는 수단으로부터 분명하다는 것이다. 8장에서는 구원의 서정에 나타난 은택들의 본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두 번째 근거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9장 이하에는 하나님의 은택들의 서정, 특별히 양자와 칭의를 판명케하는 5가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Forbes의 입장은 양자로 삼음이 칭의와는 분리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것을 질서에 있어서 모든 구원의 서정에 선행시키고 있다. 즉 다른 모든 구원의 서정이 그것에 종속되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즉 양자직의 은택이 모든 것 중 처음이고 구원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결과적으로 의의 은택이요 경륜의 세 번째 질서는 성화나 영화의 사역이라고 한 것이다. 예정의 내용으로서 구원의 서정이 다루어 지지 않고 예정에서는 두 가지 축복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선택이란 의미를 분명히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예정의 축복으로서 기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선택과 양자가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되지 않는 개념들이 된 셈이다. 그는 이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를 들었다. 이처럼 그는 예정론 안에 이것을 두고 예정의 목적으로서 양자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WMC학자들의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작정에서나 구원의 서정 부분에서도 이런 해석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다만 17세기의 개혁주의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대로 칭의 다음에 양자직의 채택이 고백되어 있다. 작정에 대한 고백에서도 구원의 서정이 그 수단으로 기술되어 있어서도 칭의 다음에 아들로 채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그의 엄밀한 성경에 대한 해석에 기초된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 가운데 일하시는 독특성을 더욱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 전체가 이미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리를 잡았고 그분의 예정론의 가치와 효력이 가장 풍성하게 택자들의 삶에 베푸시는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J. Forbes, 조직신학, 미간논문, 1998, pp. 1-17).
73) 대요리문답에서도 "모든 택자들, 그리고 오직 그들만이 효력있게 부르심을 받는다"라고 한다.
74) 현대에서는 챨스피니의 영향으로 즉각적인 구원의 초청을 강조하 있다. 이것은 철저히 인간 자신의 판단에 따른 구원의 결정을 하는 형태이다.
75) 현대 교회의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대상자가 약간의 신앙적인 반응만을 보이면 곧 그를 신자로 취급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WMC에서 거부했던 내용들이 오늘날은 모두 신앙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교회에 들어와 있다.
76) WMC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구조를 제시한다. 즉 제1원인자와 제2원인자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그들로 인해서, 그들에게, 그들 위에서"일하신다. "만물에 의해서, 만물을 위하여, 만물 위에"(2장), "제일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저에 따라서 -- 일어난다. -- 같은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2원인의 성질에 따라 만사가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혹은 우연히 되어지게 정리하신다", "오히려 그것이 없이, 그것을 넘어서, 또는 그것에 대항해서 -- 자유로이 역사하신다(5장)",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심도 없으며, 제이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지도 않고 도리어 확립되게 하셨다(3장)" 이렇게 하나님도 일하시고 사람도 일하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은 결코 협력적 사역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전체적인 주권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기계적으로 두시지 않으시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자리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 구조는 인간의 논리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적 구조이기도 하다.
WMC 학자들은 다음의 구절들을 이런 구조에서 이해하였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77)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21세기를 대비한 개혁 교회상), 개성연 연구자료, 1998, p. 87.
78)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미간논문, 1996, pp. 11-15. 또한 장로정치에 대해서 바빙크는 "교회 체제의 모든 형식 중에서 칼빈에 의해 회복된 장로 정치가 사도시대의 정치에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79) 특히 109문에서 잘못된 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시 않으신 어떤 종교적 예배를 고안하고, 의논하고, 명령하고, 사용하고, 어떤 모양으로 승인하는 것들이다. 또 하나님의 삼위의 전부나 그 중 어느 한 위의 표현이라도 내적으로 우리 마음 속에나 외적으로 피조물의 어떤 형상이나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특히 여기서 각종의 선한 의도 조차를 배격하는 것이 WMC정신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적,외적의 형상을 소유하는 것도 강력한 신성모독 행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각종 종교적인 형상물들이 범람하고 있는지를 보게 될 때 WMC의 이런 조항들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80)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겔20:12-14)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고 나의 안식일을 크게 더럽혔으므로 내가 이르기를 내가 내 분노를 광야에서 그들의 위에 쏟아 멸하리라 하였으나,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목도한 열국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
81) 여기 안식일의 도덕법적 성격에 대한 WMC의 입장은 William. Twiss의 (The Sabbath Vindicated, London, 1646)에 잘 제시되고 있다. 그는 4계명이 철저히 즉 율법의 제3사용의 의미로서 중생한 신자들도 율법을 경건과 바르게 사는 규범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며, 도덕법(moralis-positiva lex:실정법적 성격)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서 동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법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영원한 법으로서 요구되는 법으로 제시하면서 구약에서 지켰던 안식일(의식적 방식은 제외) 정신이 WMC에 그래로 표현되도록 했다.
82) 또한 반대적으로 1-4계명의 정신에 따라서 변질되어 있는 오늘날의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일성수의 개념(정신 및 지키는 방식까지), 성전의 개념 및 교회용구에 대한 '성'(聖)용어의 남용, 각종 성구물들, 목사 및 각종 까운 및 색깔용품들, 십자가무늬 및 형태제작물, 성가대, 헌금명부낭녹 및 기록(주보에), 악기사용에 대한 문제, 복음송들, 각종 형상물들, 연극, 춤, 드라마 등등
83) (골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K. Reed는 "Worship"에서 구약과 신약또한 전통적인 청교도의 입장에서 예배의 독특성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84) 여기에 대한 최근 논문은 (김종인, 현대 개혁주의 교회론의 새로운 시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안양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이 있다. 여기서는 각종 오늘날 비성경적인 교회 운동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85) 시편찬송은 전 개혁주의 교회에서 철저히 지켜져 왔던 전통이다. 그 기초는 "(엡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의 말씀이다. 여기서 "시, 신령한 노래"에 대한 이해를 공통적으로 시편으로 이해하고 있다 H. Bavinck, 하나님의 큰일, op. cit. p. 525. 또한 여기에 대한 자료는 제네바 시편 찬송가집에 대한 논문을 참고 하면 좋을 것이다. 제네바에서는 시편을 악기 반주없이 운율에 맞추어서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근래 기독지혜사에서 시편 찬송가집이 나왔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150편 전체가 수록되었으며, 제네바와 영국에서 사용되던 것을 미국에서 번역하여 사용했고 이것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멜로디는 17세기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86) WMC 21. 3-5. 또한 이 모든 것들은 철저히 삼위일체적인 인식의 기초에서 예배되어져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드려야 하며,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한다" WMC 21. 2.
87) 이한 WMC의 예배 정신에는 이전의 중요한 역사적 기초가 있다. 즉 제임스 1세때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조항(각 내용은 뒤의 사무엘밀러 교수에 의해 다시 언급할 것이다)과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s and Sports on the Lord's Day:제임스 1세, 챨스 1세)을 출판하여 목회자들로 하여금 읽을 것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 사건이 있다. 특히 여기서 오락에 관한 포고문서(1633년 10월18일)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명목상 주일날 오락을 허용한 것은 민생복지에 목적을 두었다(온종일 거룩한 주일성수를 파괴하기 위한 것). ② 실제로 그 포고문서의 동기는 청교도의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였다. ③ 그 당시 오락과 스포츠의 금지는 주일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성일에도 타당한 것이었다. 이 왕명포고문서는 주일성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일요일 저녁기도후, 일요일 오후, 혹은 모든 신적인 예배종결후 그런 오락이나 스포츠를 허용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 당시 청교들과 엄격한 이들은 온종일 주일 성수를 강조하였다. 동시에 어떠한 정숙한 오락이나 건전한 놀이까지도 관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청교도의정신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예배모범에 정확히 반영되었다. ④ 주일날 오락을 허용하는 법은 최고 재판권을 가진 자들인 왕과 주교가 일체하여 일어난 핍박형태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청교도들은 스스로 그 법에 순응하거나 그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⑤ 따라서 이런 법들 때문에 청교도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이런 법에 순응하는자들(conformist)과 순응하지 않는 자(non-conformist)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순수한 청교도들의 바른 개혁주의의 원개념은 여기서 후자의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의 정신으로 굳어진 것이다(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op, cit., pp. 19-20). 이러한 역사적 내용을 볼 때 오늘날 장로교에서 지켜지고 있는 주일의 형태는 이미 카톨릭화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실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제시하고 또한 방치해 두고 있는 목사들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너무도 엄청난 것이다. 과거에는 목숨을 걸고 지켰던 것을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목사가 가장 앞서서 이것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게 하고 막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88) 위정자는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거나 천국 열쇠의 권세를 떠맡을 수 없다. 그렇지만 교회의 질서를 보장하고 통일과 평화가 보존되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전되게 하고 모든 불경건한 것들과 이단들을 억제하고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모든 부패한 요소와 악습을 예방하고 개혁하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이 정당하게 결정되고 집행되면 준수되도록 명령을 발하는 것은 위정자의 권한이요 또한 의무이다. 이 일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에 참석하여 무엇이든지 그 회의에서 처리 되는 것이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처리되도록 주선하는 권한이 위정자에게 있다.
89) 위정자들이 목사들과 이에 적당한 인물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하여 종교문제를 상의하고 충고하는 일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위정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공적인 적대 행동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스스로 가지는 직무에 따라 그들의 교회에서 파견된 다른 적합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 같은 회의들을 소집할 수 있다.
90) 초판: The humble Advice of the Assembly of Divines, Now by Authority of Parliament atWestminster, Concerning A Confession of Faith: With the Quotations and Texts of Scripture annexed. Presented by them lately to both Houses of Parliament, London/Edinburgh 1647
재판: The Confession of Faith, Together with the Larger and Lesser Catechisms. Composed by the Reverend Assembly of Divines, Sitting at Westminster, Presented to both of Parliament. Again Published with the Scripture at large, and the Emphasis of the Scriptures in a different Character. To which is annexed two Sheets of Church-Government with the Scriptures at large, The second Edition, London 1658
91) 23장. 3항 "국가의 위정자들이 말씀과 성례의 집행이나 하늘나라의 열쇠의 권세를 자기들의 것으로 취해서는 안되다. 혹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신앙의 문제에 간섭해서도 안된다".
31장 1항. "개교회의 감독자들이나 개교회의 치리자들은 교회를 파고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책과 권한으로 이런 집회를 결정하며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고 인정하는 대로 자주 소집할 책임이 있습니다." 2항. "노회와 총회들이 교역자의 입장에서 할 일은 ------ 호소를 받아 권위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92) 장로회정치와 may be논쟁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관계로 김영규 교수의 글을 중심으로 제시했다.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op. cit., pp. 11-12/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 사이의 소위 may be- 논쟁에 대해서(지교회와 노회와의 관계문제)}, 미간논문, 1998. pp. 221-232.
93) Kevin Reed는 그의 논문{Scriptural Church Goverment: 미간논문}에서 장로교 정치원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1)성경적 교회 직임자들(scriptural church officer) 2)교회회의(church courts) 3)고백적 기준들(confessional standards), 그리고 4)성경적 교회 구성원의 지위(scriptural church membership)이 있다. 이러한 원리들은 장로 정치(prebyterian polity)의 독특한 특성과 연결된다. 장로 치리(Presbyterian goverment)는 이러한 특성들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성립된다. 장로회의 규례(presbyterian order)를 지지하는 몇몇 교회들은 그 이름에 있어서 장로회가 아닌데, 이는 대륙적 개혁(Continental Reformation)으로부터 출발된 교회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회들은 여전히 장로회를 고집하는데 이는 그들이 교회 직임자들, 교회회의, 고백적 기준들, 그리고 교회 구성원의 지위에 관련해서 성경적인 원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94) Samuel Rutherford, A Peaceable and Temperate Plea for Pauls Presbyterie in Scotland,m London 1642; The Due Right fo Presbyterie or, a Peaceable Plea, for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fo Scotland, London 1644; The Divine Right of Church-Government and Excommunication., London 1646.
95) Samuel Rutherford, A Survey of the Survey of that Summe of Church-Discipline penned by Mr. Thomas Hooker, Late Pastor of the Church at Hartpord upon Connection in New England, wherein the Way of the Churches of N.England is now re-examined; Arguments in favour thereof winnowe; The Principles of that Way discussed; and the Reasons of most seeming strength and nerves. removed, London 1658.
96) 주 비판의 대상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Henry Ainsworth(1570-1622), Willam Ames(), Henry Jacob(1563-1624)1)

1. 그는 옥스포드에서 공부하였고(1581 BA., 1586 MA.), Middelburg에서 10년 동안(1606-1616) 목회하였다가 London으로 돌아가 회중교회를 세워 회중교회의 어머니 교회가 되게 하였다. 화란에서의 초기 생활을 알려지지 않았고 1599년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가심에 대한 신학적 논쟁에서 비로소 알려졌다(Survery of Chirst's Suffering and Descent into Hell, 1597; A Treatise of the Sufferings and Victory of Christ in the Worke of our Redemption declaring that Christ after his Death on the Corsse went not into Hell in his Soule, Middelburg 1598). 그는 Francis Johnson과는 달리 영국교회와의 분리를 반대하여 영국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하였다(A Defence of the Churches and Ministry of England, Middelburg 1599). 그의 회중교회적인 경향은 레이든의 W.Ames와 J.Robinson와의 우연한 대화과정에서 강화되고 깊어졌고, 런던으로 가서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Biografisch Lexicon voor de Geschiedenis van het Nederlandse Protestantisme III, Kampen 1988, 194-195).
, Francis Johnson(1562-1618), John Robinson(1575-1625), Thomas Hooker(1586-1647), John Cotton(1584-1652), John Davenport(1597-1670), Hugh Peter(1598-1660). 이러한 회중교회적 영향은 이후로 유럽과 미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물론 한국도 해당된다. 이런 영향을 K. Ree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아메리카대륙 내에서 특별히 치명적인 경향은 독립성(independence)의 증대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투쟁적으로 자신들의 자율성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다른 교회적 회의(ecclesiastical assembly)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과 공통적인 치리를 받지 않음을 교만하게 자랑하고 있다. 즉, 그것은 그들이 분파(schism)가 미덕인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독립성의 외적 증대는 준교회 기관(parachurch agency)과 자기임명적 목회(self-appointed minister)의 궁극적인 산업(industry)의 발전인 것이다. 교회안에서 구성원의 지위(membership)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개인은 어떤 곳이든 교회에 가입(joining)함 없이,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의무를 수행함없이 평범하게 참석할 것이다. 구성원은 그들 자신의 개인적 선호를 따라서, 어떤 믿음이나 삶의 양식을 실질적으로 채택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심지어 교회가 명하는 어떤 교정적 행동없이 공개적인 추문이나 교리적인 이상(異常)이 계속되도록 용납되어진다. 마지막 분석에서, 이러한, 소위 교회라고 불리우는 상황에서 교회 무정부주의(ecclessiatical anachy)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교회회의와 성경적인 고백주의에 대한 적절한 호소는 이러한 독립성의 병폐로부터 교회를 회복시킬 것이다."
97) 행14:23, 딛1:5.
98) K. Reed, op. cit., p. 4.
99) 사무엘 러더포드의 증거외에도 특별히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M.Bouman, Voetius over Het Gezag der Synoden, Amsterdam 1937.
100) J.Calvin, Th.Beza, Peter Martyr, H.Zanchius, F.Junius, D.Pareus, W.Whitaker, Tilenus, Professors of Leyden-J.Polyander, A.Walaeus, A.Thysius, A.Rovetus - J.Piscator, W.Bucanus,
101) Robert Baillie, Anabaptisme the True Foundation of Independency, Browinisme Familisme ..., London 1647.
102)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장로교의 정치제도는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다.{George Gillespie, 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London 1646 (it will be cited by the new edition, Virginia 1985). pp. 83-84}.
① 장로교에서는 임직권과 교회 치리권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한 단체에게(unitati), 즉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로 모인 의회에게 주어진다.
② 장로교 정치에서는 공의회 의장의 항존권(지금 노회장, 총회장이 회의 이후 계속 권한을 행사하는 행위)을 부정하고 그 권을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절한다.
③ 장로교 정치에서는 동료 성직자들에게 묻거나 자문을 받는데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동일하게 열려 있다는 것)
④ 장로교 정치는 한 지교회를 넘어서 더 많은 지교회에서 설교하고 성례를 집례하는 그런 목회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⑤ 성공회 고위 성직자는 목사들의 힘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만큼 전적으로 치리하는 장로나 집사의 직책을 부정한다.(장로교는 목사, 장로, 교사, 집사를 인정)
⑥ 장로교 정치가 행하는 회중적인 장로직이나 지교회 안에 치리권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성공회)
⑦ 그들은 장로교 정치가 행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직무가 없는 목회자들을 임직한다.(오늘날 음악목사, 행정목사, 등등)
⑧ 장로교 정치는 목사들에게만 아니라 치리 장로들에게 결의권을 준다.
⑨ 장로교 성직자는 교회 회중이나 장로들에 의해서 선정된다.
⑩ 성공회 고위 성직자들은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양심들을 절대적으로 결합하는 법을 만들 수 있고 그들 자신에 의해서 무관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의식이나 제식에 대해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감금하며 벌금을 과하고 폐위시키며 출교시켰다. 장로교 정치는 이런 것들을 증오한다.(오늘날 교회에 행해지는 많은 직무들의 방식이 성공회의 원리에 있다)
⑪ 성공회 고위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판단과 개인적인 자유 재량에 의해서 성경을 찾아 근거들을 보도록 하거나 그들의 결정들과 법규들을 사람들이 조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장로교 정치는 사람의 양심 위에 군림하지 않고 어떤 것이든 성경의 검증을 허용하며 양심을 강요하지 않고 행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한다.(목사의 절대적인 권위에 무조건 순종해야하는 오늘날 형태와 비슷)
⑫ 성공회는 여러 가지 추문자들이나 알미니안주의자들 및 교황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에게 목회의 문을 열어 놓은 반면 인정된 자(바른 개혁자)에게 그 문을 닫았다. 장로교 정치는 그 반대이다.
⑬ 장로교 정치는 세속법적이고 시민법적인 권세를 가지지 않는다.

이것과 함께 사무엘 밀러의 장로교 정치특징은 다음과 같다.(Samuel Miller, Presbyterianism: the Truely Primitive and Apostolical Constitution of the Church of Christ, Philadelphia 1835. p. 68). 여기에는 앞에서 제시 했던 퍼스 5개조항도 포함된다.
① 장로교는 모범 예식서들을 거절하였다.
② 장로교는 주일 이외에 교회력의 명절들(성탄절, 부활절)을 지키지 않는다.(그는 구약의 의식법 아래 있었던 것을 신약시대에 지킬 수 없고 그 기원들이 이방 세계적인 명절들과 적응 속에서 발달하였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칼빈의 신학과 동일)
③ 세례 집례시 양부모 이외에 대부나 대모를 거절하였고 십자가를 긋는 것도 거절하였다.
④ 장로교는 견신례를 거절하였다.
⑤ 장로교는 성만찬 집례 시 무릎을 꿇는 것을 거절하였다.
⑥ 장로교는 사적인 성만찬의 집례를 거절하였다.
⑦ 예수의 이름으로 인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이 의미는 어떤 것인지 확인하기 좀 어렵다)
⑧ 공적 예배에서 외경 낭독을 거절 하였다.
⑨ 장로교에서는 청교도의 오랜 전통에 따라서 카톨릭에서 예배 의식에 사용되었던 성가나 올갠 등을 상용하지 않고 시편을 음율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대표적인 성격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인 장로교 정치제도를 살펴보면 지금의 장로교는 거의 非장로교의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로마 카톨릭이나 성공회, 회중교회, 특히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알미니안 방식의 정치 제도로 구성되어 있는 많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참으로 이런 장로교회의 현실은 슬픈현실인 것이다. 자신의 것을 거의 잃어 버린 모습인 것이다.
103) 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Vindicated (London 1646), Harrisonburg 1985, 83; G.Gillespie, A Treatise of Miscellany Questions: wherein Many usefull Questions and Cases of Conscience are discussed and resolved, Edinburgh 1649, 97-110 (= The Works of George Gillespie, II, 41-46).
104) 여기서 may be 에 대한 논쟁이 거론된다.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은 독립교회와 최소한으로 타협된 형태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보다 철저한 장로교의 정치원리의 특징을 may be논쟁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지교회들과 노회 정치의 종속 관계를 'must be',또는 'may be'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Richard Vines에 의해서 적극적 입장과 1644년 3월 12일에 12가지로 독립교회파에서 제출된 것과 조정되어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으로 결정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 사이의 소위 may be- 논쟁에 대해서(지교회와 노회와의 관계문제)}, op. cit., pp. 221-232.)
① 여러 회중들에 속한 장로들의 연합된 노회는 그릇된 목회나 개별적인 장로직의 불충분성의 경우들에 있어서 자문하고 권고하고 호소를 받기 위해서 함께 만날 수 있다.
② 개별적인 장로직들 외에도 공동 원인들이나 호소들, 교회들 사이의 복잡한 이견들, 모든 교회들 안에서 준수되어야 할 질서 원칙들에 준하는 대회나 총회가 있을 수 있다.
③ 그런 노회들이나 회집들은 그리스도의 체제요 한 형제가 다른 형제 위에 있거나 한 회중이 다른 회중에 관계하는 것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
④ 그런 노회들은 교리적으로 교리 내용을 선포하고 그들 경내에 있는 교회를 사이에 교리적인 논쟁들을 결정하는 열쇠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
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나 다른 이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어떤 직원들이나 다른 지체들을 시찰하거나 소환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
⑥ 소환된 사람은 노회나 공의회 앞에 나타나야 하고 고소받거나 의혹되는 그런 교리나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여야 한다.
⑦ 그들이 그들 경내의 교회들 안에 그런 교리나 사실에 반대하여 선포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
⑧ 노회와 그들의 시찰 아래 있는 교회는 그런 선포에 근거하여 분파나 이단으로 빠진 교회들과 교제를 그만 두는 것처럼 노회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의 소환에 나타나기를 거부함으로 인하여 교제를 그만 두어야 한다.
⑨ 각 회중의 장로들은 노회에 앉을 수 있고 그들의 형제들과 공통적으로 회중 전부나 일부에 관한 모든 문제들이나 소송 사건에 대한 자문할 수 있다.
⑩ 목사나 장료의 임직, 유형, 파면, 출교에 있어서 각 장로직은 노회의 충고를 추구함에 없이 그것을 처리해서는 안된다. 당사자의 관계 없이와 동일한 자의 동의없이 진행하여 결정해서는 안 된다. 교리에 대한 책벌에 있어서 그리고 곤란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⑪ 많은 회중들에 공통적인 공동적인 원인들에 있어서 개별 장로직은 관련된 자들이나 노회에 대한 지식과 일치없이 결정할 수 없다.
⑫ 노회에 의해서 출교되었다고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자를 교제할 자로 영접할 회중은 없다.

이런 장로교의 입장을 김영규 교수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① 장로교적인 개혁주의는 개혁교회 내 순수 교회 정치 원리에 대한 개혁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개혁주의의 완전화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내에 교리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성경적인 완전한 개혁을 추구한 개혁주의라고 표현해도 좋다.
② 웨스트민스터 정치 모범은 순수 장로교적인 것은 아니고 독립파 교회주의자들의 조화와 합의 형태라는 것이다.
③ 순수 장로교적인 입장에서의 교회관은 지교회 자체로서 완전한 교회가 아니고 노회와 총회 아래 있을 때 지교회는 완전한 교회라는 교회관이다.
④ 순수 장로교적인 입장에서의 지교회는 노회나 총회의 종속관계이고 그 관계는 'may be under-관계'보다 'must be under-관계'이고 다만 개혁 교회 내 혹은 장로 교회 내에 'may be under-관계'가 허용적이라 할 수 있다.
⑤ 상회의 개념은 항상 totus-개념이 아니라 totum-개념(Prebyterium, consessus prebyterorum, totum aggregatum, sensu collectiva)이라 할 수 있다.
⑥ 장로 교회 정치 원리에 있어서 totus-개념이 있다면 그리스도에게만 totus-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105) 이런 장로교의 정치의 중요성을 사무엘 밀러교수(프린스턴 신학대학)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통합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춰볼 때, 교회 치리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음이 명백하다. 즉 교회정치의 시행(administration)뿐 아니라 형태(forms)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보다 사활이 달린 것만큼 중요하게(vitally) 교회의 평화와, 순결과, 교화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남겨주신 "바른 말씀(form of sound word)"뿐 아니라 교회 질서의 형태(form of ecclssiastical order)를 "굳게 지키는(hold fast)"것은 결코 그분에게 드리는 충성됨에 있어서 사소한 부분이 아닌 것이다(딤후1:13)"(K. Reed, op. cit., p. 2). 이러한 정신에서 결국 엄밀한 개혁주의는 참된 것을 찾는 것과 또한 바르지 않는 것을 분명히 배격해야하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106. 당회의 의장(Moderator)은 목사이여야 하고 공석일 때 노회에서 임시당회의장(Interim Moderator)를 임명한다. 노회에서 뽑힌 노회의 의장은 1944년까지는 6개월 임기이였으나, 1966년부터 1년임기로 변경되었다. 노회는 회원 3인 이상이 요구하였을 때, 언제든지 회집할 수 있다(a pro re nata meeting). 총회의 의장은 그 교회의 의장이 아니요 교회의 권위자나 대교회 대변인이 아니다는 것이 중요하다(He is Moderator of the Genenral Assembly and not, as is often misrepresented, Moderator of the Church of Scotland. ....... He is not a minister plenipotentiary, a 'Church Leader', or an authorized spokesman of the Church)(cf. A. Herron, Art. Moderator, in: Dictionary of Scottish Church History & Theology, ed.by N.M.de S.Cameron, Edinburgh 1993, 596-7). 각 치리회들(courts-Kirk Session, Presbyterie, Synod, Genral Assembly)의 의장들의 기능은 개혁주의의 역사에서 오래된 것이다. 처음 스코틀란드 교회의 '제 2 권징조례(The Second Books of Discipline)'에 정의되어 있으나, 그 근원은 제네바 의장제도로 알려지고 있고 영국에서 Thomas Cartwright의 정치지침서에서 가장 정확하게 정의되었었다(김 영규, 월터 트레버스의 장로교 정치원리(unpublished), p.2 note 4, 26-27).
107) 대한 예수교 장로교의 전신이 북장로교 헌법에는 집행위원회들의 기능에 대해서 맡긴 일만 하고 발기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고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108) 구조 비교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조병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박윤선 박사, 개성연 자료, 미간논문, 1998, pp.5-6. cf) 제임스 B. 그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대조 해설, 성광문화사, 1997, pp. 5-8. 또한 김의환,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생명의 말씀사, 1994, pp. 17-171.에서 참고 하였으며 빠진 부분은 본 저자가 찾아서 제시했다.
109) 특히 신정통주의의 입장을 잘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20세기 들어와서 그동안 자유주의를 통해서 신앙고백 자체가 부정되고 있던 흐름속에서 그나마 신앙고백의 자리를 세워야 함을 신정통주의에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근래 발표되고 있는 신앙고백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는 거의가 Barth주의에 있는 학자들의 논문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 신앙고백을 받고 고백하는 교회의 입장은 자연적으로 Barth주의에 입각한 표현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Barth주의가 어떻 정신에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바른 성경적인 정신의 신앙고백 형태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현대 인문주의적인 정신에서 신앙고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10) 당시 장로교의 교단들은 웨일즈 장로교인, 스코틀랜드 장로교인,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장로교인, 불란서 위그노파, 화란, 독일, 스위스 장로교인들이 있었다(김길성, 장로교 표준문서에 대한 서약, 신학지남, 1993, 가을호, p. 144).
111) 논쟁의 이유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교회들은 교회의 질서와 유지를 위해 오직 성경만이 충족한 표준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들 출신 목사들은 본국에서 하던대로 교회의 교리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WMC에 서약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Ibid), 이런 경향은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Marsden은 이런 경향이 18-19세기에는 구편(Old Side:철저한 고백주의)과 신편(New Side:회중 장로교회)으로 나누어지고 20세기에서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구파와 신파로까지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112) 이런 입장은 WMC의 문자까지의 수용 또는 적어도 WMC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의 수용을 함의하는 "엄격한 서약"을 뜻하는가, 아니면 그 중요한 교리에만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느슨한 서약"을 뜻하는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후자의 입장이 결국에는 신정통주의에서 다시 부활되었던 것이다.
113) 1903년의 영향이 결국 한국에도 그대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WMC를 받아들이는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워필드와 같은 신학자는 이 작업을 끝까지 반대 했었다. 이 개정 작업의 결과 예정과 선택론에 대한 수정작이 실시 되었으며(보편구원쪽으로), 33개 조항의 WMC에 2개의 조항을 더하게 되었다. 즉 34장 성령에 관하여, 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대하여 부분이다. 결국 이 작업은 WMC를 현대의 정신에 맞추어서 재해석하는 인문주의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33개 조항안에 이미 성령에 대한 자리가 아주 풍성하게 스며들어 있음에도 현대의 오순절의 영향으로 장로교 안에서도 성령운동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선교에 대한 부분도 이미 예정론 안에 강한 선교에 대한 인식이 있음에도 현대교회의 교회의 신학중심을 선교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형편에 맞추기 위해서 개정했던 것이다. 결코 교회는 선교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내용이 어떻게 남아 있는 것인가? 가 중심인 것이다.
또한 이런 역사적인 변화를 김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WMC가 변형된 형태임을 지적하고 있다. "특별히 북장로교의 경우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개정하면서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해서 각 34장과 35장으로 첨가하였고, 16장과 22장,25장을 수정하였는데, 맹세거절에 대한 죄를 부정하고 카톨릭 입장을 적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고백하였고 이방인들에 선이 있음을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처럼 무시해서는 않된다는 입장을 찬양할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와 이방세계의 종교와 대화하고 수용하고자 준비로서의 수정이였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과 10장에 관한 해석으로서 선언문을 첨가하였는데, 이 선언문이 바로 그 당시 미국 장로교회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선언문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영원한 작정교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유화, 구원의 은혜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교리와 조화한다는 선언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죄인의 죽음을 원치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충분한 구원을 제공하셨고 그 구원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시며(adapted to all) 복음 안에서 값없이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셨다는 선언이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에 대해서 유아로 죽은 자는 누구나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때와 장소, 및 방법에 의해서 중생되고 구원받는다는 선언이였다. 비록 해석의 차원에서 선언한 것이었지만, 아르미니우스보다 더 진보적이고 웨슬레주의에 가까운 선언이였다.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되지 않는 입장이였고 이것이 선교지의 분위기와 잘 맞는 실제적인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된 인도 장로교회의 12개 신조는 선교지의 분위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모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바빙크도 이 사건을 위의 김영규 교수의 형태로 평가 했으며 그 결과 그는 미국의 칼빈주의 미래가 낙관적이지 않다라고 까지 그 위험성의 결과를 지적했다(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k Ⅰ, op. cit., p. 246).
114) 이형기, 신앙고백들의 형성과정 및 해설, (성숙한 교회와 영적성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교육부, 1987, pp. 121-122. 이러한 변화를 벌콮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반알미니안적 태도는 대부분의 부흥운동과 홀리니스 운동을 염두에 둔 것이며, 그의 고백주의적 완결성과 강인성은 화란 전통 가운데 명백한 체계 및 교리주의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화란 개혁파 교회의 교인들은 미국 개신교의 교리적 축소주의를 계속하여 비평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는 교리를 몇 가지로 나열하는 근본주의나 본질적인 교리들을 전혀 나열하지 않는 현대주의는 비슷하게 보였으며, 성경만을 외치는 작은 집단들은 단지 대교단들의 교리적 무지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에 좌측에서는 자유주의로 표류하고 우측에서는 경건적인 자아 흡수로 빠져드는 가운데 고백주의만이 현대 문화의 도전과 유혹에 버금가는 자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김성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벌코프, 개성연 연구자료, 1998, pp. 2-3).
115) 이 고백은 루터파, 개혁교회파, 연합파등이 모여서 독일의 나치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116) 잭 로저스, 차종순역, 장로교 신조,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p. 210.
117) 로저슨 바르멘 선언과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67년 신앙고백은 유럽에서 칼 바르트와 여타의 인물들이 일으킨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운동이 1930년에 미국에서 전개되기까지 그 지속적인 가치를 확인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Ibid. p. 223). 또한 이 고백은 고대 3개신조와 스코틀랜드, 제2스위스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바르멘 선언을 포함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소요리문답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특이한 것은 대요리문답이 삭제되었다. 특히 법안 및 안건심사위원장을 맞은 다위는 대요리문답을 삭제한 것은 적법하고 현명한 처리였다고 했다. 결국 역사적으로 지켜져오던 전통적인 입장이 완전히 퐈괴되었던 것이다.
118) 위원장인 다위는 다음과 같이 1967년 고백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7세기가 종교개혁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과 동일하였다. 웨스트민스터는 후기- 종교개혁 선언으로서 결코 근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콜라 신학시대에 기초된 권위와 법률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교권적이며 정치적인 절대주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Ibid. p. 232). 또한 고백서 서문을 보면 이 입장이 전통적인 WMC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67년 신앙고백의 목적은 오늘날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신앙고백과 선교의 통일성에로의 교회의 요청에 있다. 이 신앙고백은 "교리적 체계"도 아니며 모든 전통적인 신학의 주제를 총망하라하지도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과 화해의 선교는 모든 시대의 복음의 핵심으로서 교회는 요청한다. 우리 세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를 특별하게 요청한다"(Ibid)
그리고 179차 총회에서는 "1967년 신앙고백을 다른 교회들에게, 즉 로마 카톨릭, 정통파, 그리고 개신교들에게 기도하는 관심과 연구를 촉구하고 또한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입, 즉 성경에 따라서 수정될 수도 있음음을 겸손하게 알린다"라고 알리고 있다. 이런 입장은 결국 에큐메니칼의 정신을 중심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는 W.C.C의 가장 대표적인 입장인 것이다.
119) Ibid. p. 240.
120) 12신조는 1904년 영국의 장로교회가 인도의 장로교회를 위하여 제정하고 채택하게 한 것으로서 WMC를 발췌 요약하는 한편 1890년 작성된 영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도 참작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도 본 신앙고백서의 전통에 속하여 있었던 인물들이었으나 그들은 이것을 교회의 공식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또한 그는 선교지 교회의 문화적 및 신학적 상황에 대한 이유 때문이었다(오형극, op. cit., pp. 5-6). 특히 초기의 장로교의 신학적 특성을 김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공동성경번역사업,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갑자기 형성되기 전후의 선교정책의 분위기는 복음주의 교회(one evangelical Church)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만들려는 분위기이였다. 이런 합동운동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감리교의 집회운동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후 한국교회부흥의 모범이 되었고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말은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선교사들을 보낸 교회에서 한국에 있어나는 일년의 분위기를 1901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과 같은 운동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한 12신조의 특징은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고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나타나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선교지 신학의 한계이면서 사실 아르미니아누스주의가 빠졌던 같은 사고위험성을 허용하는 성격이 다소간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교파를 가릴 것 없이 단일교회형성에 대한 요구가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요구이였고 우리 교회는 유아기 교회로서 역사적인 개혁교회 고백득의 입장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교회이였다."라고 지적한다(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op. cit., pp. 2-3).
121) 1963년 예장 합동 채택, 1968년 예장 통합 채택, 1973년 예장 고신 채택, 1974년 예장 대신 채택. 오형극 교수는 1960, 70년대에 한국교회는 WMC를 채택할 때에 미국교회의 수정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것은 초기 12신조가 1903년의 미국북장로교회의 수정정신에 입각해서 받아들여진 이후 한국의 WMC에 대한 정신은 1967년의 미국 신앙고백 개정 정신을 이어 받으면서 동일한 신학정신의 형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오형극, op. cit., pp. 6-7). 또한 1972년 새 신앙고백(바르트의 바르멘 선언 입장), 한국 기독교인들의 선언(1973), 1976년 우리들의 신앙고백, 1984년 한국 신학자 서명, 1986년 대한 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1987년 제5문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교회 선언(NCC) 등의 최근 신앙고백적 형태들도 위의 역사적 정신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된다(이형기, 세계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p. 718-732). 이와 같이 WMC를 변질된 형태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있어서 오늘날에 와서는 17세기 당시의 순수한 성경적인 의미의 고백으로서의 WMC정신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122) 이와 같은 한국 장로교의 실정을 김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최근 퓨리탄에 대해서 어는 정도 소개되었어도 회중교회적인 퓨리탄들이 대부분이 소개되었고 진정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많이 소개되지 않고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고 더구나 칼빈 이후의 유럽 개혁주의자들의 소개들은 극히 적었다. 이런 면에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진정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잘 못한 셈이 된 것이다. 하물며 전체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어느 것이 바른 노선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op. cit., p. 5). cf) 이근삼 교수도 한국 장로교가 장로 교회라는 간판을 갖고 있으면서 장로교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도외시하며, 무시하고 정통적인 장로교 계승과 신조상의 발전을 외면하고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p. 178).
123) 박윤선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영음사, 1994. 와 신학지남에 발표한 글들이 있다. "칼빈주의 최대표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위기신학", 신학지남, 1980, 188호. 특히 그는 합동측에서 마지막으로 이 글을 발표하고 떠났으며, 또한 합신을 시작할 때 이 글을 다시 발표함으로써 WMC의 가치를 표명했다(조병수, op. cit., p. 2).
124) 조석만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및 주기도,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1997. 특히 그는 본 해설집에서 서론(pp. 1-46)적으로 밝히고 있는 부분은 박윤선 박사의 해설보다 더욱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 --1867년에 프린스톤리뷰에 실린 하지 박사의 논문, A.A. 핫지박사의 신앙고백 주해의 부록에 실렸음--를 언급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바른 개혁주의적 신앙고백 입장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그는 "모든 개혁파 신조들 중에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큼 순수한 칼빈주의를 표명함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균형있는 즉, 어떤 신조들처럼 본질적인 진리를 하나도 빼지 않았고, 어던 다른 신조들 처럼 생략했으면 좋았을 것을 포함하지도 않은 신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받아야 하는지는 언급이 없다. 이외에 김준삼, 신조학, 대한 신학, 1978초판. 등도 최소한의 해석으로 표현되어 있다.
125) 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ennsylvania: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p. 399-429.
126) 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 op. cit., p. 1.
127) 여기서는 계보 연구 자료인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을 모두 포함한다. 즉 고대 3개 신조와 제네바 신앙고백, 요리문답, 제1,2스위스 신앙고백서, 프랑스 신앙고백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Dort신조 등을 말한다.
128) (고후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129) 렘4:19-22의 내용, 살후3:1-2의 내용. 고후13:8의 내용.
130) George Gillespie의 이단에 대한 신학적 사상은 Augustin과 Calvin의 신학적 사상에 철저히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저 Augustin의 이단의 종류(고대 88가지)에 대한 글(S. Aurelii Augustini, Hipponensis Episcopi "De Haeresibus" ad Quodvultdeum)을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단의 종류가 있다. Simoniani. Menandriani. Salurniniani. Basilidiani. Nicolaitae. Gnostici. Carpocratiani. Cerinthiani, vel Mcrinthiani. Naxaraei. Ebionaei. Valentiniani. Secundiani. Ptolemaei. Marcitae. Colorbasii. Heracleonitae. Ophitae. Caiani. Sethiani. Archontici. Cerdoniani. Marcionitae. Apellitae. Severiani. Tatani, vel Encratitae. Cataphryges. Pepuxiani, alias Quintilliani. Artotyritae. Tessarescaedecatitae. Alogii. Adamiani. Elcesaei, et Sampsaei. Theodotiani. Melchisedeciani. Bardesanistae. Noetiani. Valesii. Cathari, sive Novatiani. Angelici. Apostolici. Sabelliani, sive Patripassiani. Origeniani. Alii Origeniani. Pauliani. Photiniani. Manichaei. Hieracitae. Meletiani. Ariani. Vadiani, sive Anthropomorphitae. Semiariani. Macedoniani, Aeriani. Aetiani, qui et Eunomiani. Apoltinaristae. Antidicomaritae. Massaliani, sive Euchitae. Metangismonitae. Seleuciani, vel Hermiani. Proclianitae. Putriciani. Ascitae. Passalorynchitae. Aquarii. Coluthiani. Floriniani. De mundi statu dissentientes. Nudis pedibus ambulantes. Donatistae, sive Donatiani. Priscillianistae. Cum hominibus non manducantes. Rhetoriani. Christi divinitatem passibilem dicentes. Triformem Deun putantes. Aquam Deo coaeternam dicentes. Imaginem Dei non esse animam dicentes. Innumerabiles mundos opinantes. Animas converti in daemones et in quaecumque animalia existimantes. Liberationem omnium apud inferos factam Christi descensione credentes. Christi de Patre nativitati initium temporis dantes. Luciferiani. Jovinianistae. Arabici. Hevidiani. Paterniani, sive Venustiani. Tertullianistae. Abeloitae. Pelagiani, qui et Caelestaiani.
이상 이단의 교리적 내용을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가르쳐지는 많은 교리적 내용들이 이 이단들의 내용에서 온 것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시급히 이 부분을 연구해서 장로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단적인 교리 내용들을 걸러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이단들의 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전통 장로교라고 주장하면서도 스스로 옛 이단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특히 B. B. Warfield는 이런 모순적인 형태를 20세기 미국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B. B. Warfield, "Calvin Luther. Augustine", 칼빈총서, 기독교문화협회, 1993, pp. 22-455).
131) 특히 칼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 않아도 그의 심판이나 섭리를 등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부인하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교리만을 갖는 방식은 결국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축소해서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기에 결국 무신론자와 동일하다고 지적한다{Inst(1559). Ⅰ. 4. 2}, 또한 시편주석에서도 "그들이 명백하고 솔직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능력을 박탈한다는 이야기다. 자, 이제 만일 하나님게서 무기력한 존재만으로 만족한 나머지 재판관으로서의 직무를 포기해 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그는 한낱 우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Comm, 시편Ⅰ. p. 306)"라고 지적한다. 결국 이런 형태는 특히 알미니안의 방식의 전형적인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