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카톨릭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소멸하는 모독 행위이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

1. 로마 교회의 교리

사탄은 이런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짙은 어두움으로 덮어 희미하게 만들고 더럽히려고 애썼다-적어도 교회 내에 그 순수성이 유지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귀가 한 표징을 들어 올려 성만찬을 희미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서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을 때에 무서운 가증한 일은 극치의 절정에 달했다. 마귀가 극악한 오류로 거의 전세계의 눈을 멀게 한 때에 이 일이 있었는데, 곧 미사는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제물과 예물이라는 신념을 그가 퍼뜨린 것이다.
나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파들이1 처음에 이 교리를 어떻게 용인하였는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의 난해하고 교묘한 주장을 우리는 물리친다. 그런 주장을 아무리 궤변으로 변호하더라도 그것들은 성찬의 찬란한 빛을 흐리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로마의 적그리스도와 그의 예언자들이 전세계에 감염시킨 견해를 상대로 싸우려 한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기를 바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2
이것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의 조직이 일종의 유화 수단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속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보속을 드리기 위해 날조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사도 이 관념을 표현한다.3 그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는 뜻은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악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았으며, 외형적인 선 밑에 악폐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고,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라는 말한 마디에 믿음의 전체가 포함되었다고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찬란하게 장식할지라도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빼앗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명한다면, 이 가장 무거운 도끼로도(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끊어서 파헤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가 있겠는가? 이 빛이 그 밑에 숨은 악을 폭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덮개가 있겠는가?

 

2.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

그러면 제일 처음에 한 말 즉 미사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한다는 점을 밝히겠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들이 일정 기간 임명을 받는다고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제사장으로서 성별을 받으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을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제사장직도 영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계승할 후계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므로 뒤를 계승할 대리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영원히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셨다(히 5 : 6,10, 7 : 17,21, 9 : 11, 10 : 21, 시 110 : 4, 창 14 : 18). 이 신비는 오래 전에 멜기세덱에게서 예시되었다. 성경이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한 번 소개한 후에 다시는 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은 그의 생명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유사점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 매일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그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런 대신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빼앗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우편에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제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보좌할 뿐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여전히 존속한다고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라. 사도의 말이 그들을 붙잡고 도망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장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많은 제사장들이 생겨난다고 한다(히 7 : 23). 그러므로 죽음의 장애를 받으시지 않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동료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멜기세덱의 선례로 무장하여 그들의 불경건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했으므로(창 14 : 18) 이것은 그들의 미사를 미리 보인 것이라고 그들은 추론한다. 떡과 포도주를 주는 점에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4 이것은 너무도 천박하고 미련한 생각이어서 논박할 필요조차 없다. 멜기세덱은 행군과 전투로 지친 아브라함과 동행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어 그들의 기운을 북돋우려고 했다. 이 행위와 제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세는 저 거룩한 왕의 친절을 칭찬한다(창 14 : 18). 이 사람들은 성경에 아무 말도 없는 신비를 조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과오에 다른 색을 칠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말씀이 곧 뒤따르기 때문이다(창 14 : 18). 그들은 사도가 축복과 관련시켜 한 말을 왜곡해서는 떡과 포도주에 적응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했다(창 14 : 19). 여기서 사도는(그보다 더 훌륭한 해석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의 탁월한 지위를 추론한다.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히 7 : 7). 만일 멜기세덱이 음식을 준 것이 미사의 제물을 예시하는 것이었다면,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가려내는 사도가 그런 중대한 일을 잊었을까?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그들은 사도 자신이 제시하는 논법을 격파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죽을 성질의 인간들이 제사장이 될 권리와 영예는 없어졌다고 사도는 주장한다(히 7 : 17-19).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나는 미사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제단을 쌓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즉시 전복시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히 9 : 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가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나 송아지의 희생의 효력과 힘이 약했다는 것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영원히 깨끗하게 하는 힘이 없다고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한 번 행하신 희생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한다(히 9 : 26).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 : 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 : 14). 이런 말들에 사도는 다시 첨가해서, 우리는 단 한번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주목할 만한 말을 한다(히 10 : 18,2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으로(요 19 : 30) 이 뜻을 표시하셨다. 우리는 사람이 운명할 때에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5 생각한다. 운명하시려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그의 한 희생에 의해서 모두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확언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희생을 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것인 양 그리스도의 이 희생 위에 매일 수많은 조각을 잡아매도 좋을 것인가? 이 희생은 단 한 번 행한 것이며 그 힘은 전적으로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확언할 뿐만 아니라 높이 외치며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완전하며 무력하다고 고발하지 않는가?
매일 수십만 번씩 희생을 드리도록 마련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유일한 희생으로서 아버지 앞에 드리신 그 수난을 묻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명백하고 공개된 진리와 싸우려고 한 것은 4遊翅?사탄이었다는 것을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거짓말의 조상이 자기의 기만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간계를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희생이나 또는 다른 희생이 아니라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마귀는 말한다.6 그러나 이런 연막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사도는 이 문제를 논할 때에 항상 다른 제사는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 한 제사는 단 한 번 드려졌고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더 비밀의 틈새로 빠져나간다. 즉 미사는 반복이 아니라 적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궤변도 간단하게 반박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번 제물로 바치신 것은, 그의 희생을 매일 새로운 예물로 확인하라는 조건이 아니라 그의 희생의 혜택을 복음 선포와 성찬 집행에 의해서 우리에게 분배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하고(고전 5 : 7) 우리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명령한다(고전 5 : 8). 십자가상의 제물이 우리에게 충분히 분여되어 우리가 향유하며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곧 이 희생을 우리에게 적당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4. 말라기 1 : 11에 의한 주장

미사의 희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이상의 어떤 근거를 말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예언에서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오리라고 약속하신다(말 1 : 11).7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부르심을 받으리라는 문제를 말할 때에, 예언자들이(그들에게 권하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묘사하기 위해서 율법의 외형적인 의식을 사용한 것은 새삼스럽거나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이방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를 믿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더 똑똑하게 알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항상 자기 시대의 예표를 통하여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묘사했다.
예컨대 주께로 향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며(사 2 : 2-3, 미 4 : 1-2),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각양 각색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고(시 68 : 29, 72 : 10-11, 사 60 : 6이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신자가 받게 될) 하나님께 대한 더 풍부한 지식을 꿈과 이상이라고 표현한다(욜 2 : 28). 그러므로 그들이 말라기에서 인용하는 것은 이사야에 있는 다른 예언과 같다. 이사야는 앗수르와(사 19 : 23) 애굽과(사 19 : 19,23 참조) 유다에(사 19 : 24) 각각 제단이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성취된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둘째, 지금 그 제단들이 어디 있으며 언제 쌓은 것이냐고 묻는다. 셋째, 그들은 이 나라들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같은 제단이 각각 배정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런 일들을 깊이 생각한다면, 이사야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가 전세계에 퍼지리라는 것을 자기 시대의 적합한 예표를 통하여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자주 보기 때문에 더 열거하려고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 이외의 다른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도 가련하게 속고 있다. 신자들은 지금 주께 진정한 제사와 깨끗한 예물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곧 말하겠다.8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는 이제 미사의 셋째 기능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참으로 죽으신 사실을 소멸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이 확정되는 것과 같이, 우리 주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인하셨다(히 9 : 15-17). 이 유언을 감히 변경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무엇을 첨가하는 자들은 주의 죽으심을 부정하며 무시하는 자들이다. 미사는 새로운 전혀 다른 유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사는 드릴 때마다 죄의 새로운 용서와 의의 새로운 획득을 약속하며 따라서 지금은 미사의 수만큼 유언도 많아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이 새로운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아니, 수많은 죽음으로 이 수많은 미사의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진실로 죽으신 사실을 말살한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은가? 미사는 직접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유언이 있으면 유언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기 때문이다(히 9 : 16).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 유언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제물은 반드시 죽여서 바쳐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순간마다 수많은 곳에서 잔인한 죽음을 당하셔야 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바쳐야 했다면 그는 천지 창조 이후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한다(히 9 : 25-26). 나는 그들이 곧 대답하며 우리를 중상모략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일이 없고 지금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비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과 사가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불경하고 사악한 교리의 어리석은 결과를 밝히려고 할뿐이다. 나는 사도 자신의 말로 이 점을 증명한다. 비록 그들이 이 희생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9 백 번 항변할지라도 나는 사람의 변덕에 따라 희생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신성 불가침의 제도가 붕괴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8┠종?한다는 사도의 확고한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히 9 : 22).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이제 나는 미사의 넷째 기능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우리가 인정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점을 논해야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용서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의 용서를 가져다주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미사에서 죄의 용서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자신을 구속한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고 호언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탄의 사자들은 이미 이런 교리를 퍼뜨리며 현재 이 교리를 선전과 칼과 불로 옹호하고 있다. 즉 우리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바칠 때, 우리는 예물을 바치는 이 행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친다.10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속의 한 예로 보며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속자인 것을 깨닫는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는 무엇이 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만찬에서 용서의 확약에 인을 치실 때에, 제자들을 이 행위에서 머물라고 하시지 않고 그의 죽음의 희생으로 그들을 보내시면서, 성찬은 회상하게 하는 것(이른바) 기념행사라는 것을 보이신다. 즉 이 행사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속죄 제물이 단 한 번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희생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첨부해서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에 묶지 않는다면 그 이해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이제 마지막이다.11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 기억하게 하신 장면인 성찬은 미사에 의해서 제거되고 파괴되며 폐지된다는 점에 도달했다. 참으로 성찬 자체는 하나님의 한 선물이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치르는 값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속으로서 받으신다고 한다. 이 희생과 성찬의 신비가 서로 다른 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여기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배은 망덕 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배은 망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우리는 생명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된다는 것을 약속한다 미사의 희생은 아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셔야 한다고 한다. 성찬은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분배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로 뭉치는 그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분열시킨다. 마치 성찬이 사제들에게 이양되었다는 듯이 신자들을 대신해서 제물을 드려 주는 사제가 있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하게 된후로, 성찬은 주의 명령대로 신자들의 교회에 나눠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미사가 잠입할 문이 열렸고, 이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영적 교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수찬 정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물을 먹으려는 사제들이 모든 신도에게서 자기를 격리시키기 때문이다.12 (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거니와) 아무리 많은 군중이 참석했을지라도 신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때에는 나는 그것을 개인적 미사라고 부른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

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나는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정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드린 예물들에서 온 것 같다.13 그래서 고대 저술가들은 대개 복수형을 썼다. 그러나 나는 용어 문제의 논쟁을 피하고, 개인적 미사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성찬을 받아서 우리끼리 나누라는 것이 아닌가?(눅 22 : 17) 바울은 이 명령을 어떻게 지키라고 가르치는가? 떡을 떼는 것 즉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고전 10 : 16) 그러므로 한 사람이 받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때 거기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 한 사람은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받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명령에 의한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나눠야 할 것을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말씀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떡을 떼지 않는 곳에는 주의 만찬이 없으며 변태적이요 거짓된 모방뿐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거짓된 모방은 곧 타락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위대한 신비를 타락시키는 것에는 반드시 사악한 결과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미사에는 사악한 남용이 있다. (종교에서는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잘못을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제물을 나누지 않는 관습이 일단 잠입한 후에, 그들은 교회의 어느 구석도 빼놓지 않고 수많은 미사를 행하며 신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서로 하나가 되는 신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미사에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떡을 제시해서 그것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선전하게 하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약속을 주신 뜻은 결코 불결하고 부정한 자들이 언제든지 또 어떤 악한 목적을 위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지킴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기쁨을 소유하라는 뜻이다.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이외에도 이런 타락은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에는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 중에서 특히 파렴치한 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우리가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고대 교회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14 또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면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강론을 끝내기 전에 우리의 미사 박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즉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여러 가지 제사보다 더 힘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시는 줄을(삼상 15 : 22) 그들도 알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데 대해서 그들은 명령을 받은 일이 없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아무나 제사장직의 영예를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만이 얻으며,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 제사장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셨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을(히 5 : 4-5) 그들도 듣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사제직에 대해서, 그것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영예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지 않은 그들 자신이 악하고 경솔한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제직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 일획도 찾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제가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간주했는가?

만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 여기저기에서 문장을 떼어다가 그것을 권위로 삼고서, 성찬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고안한 가짜 제사를 시인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경우 고대 저술가들은 이런 모독 행위를 절대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물론 그들은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어디서나 선언하듯이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유일하고 진정한 제사에 대한 기념이라는 뜻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면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실 미래의 희생 제물에 대한 예언을 찬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거룩하게 바치며 또 그 몸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바친 희생에 성대한 기념을 축하한다." 여기서 그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뜻을 집사 베드로에게 보내는(이 글의 필자가 누군지를 나는 묻지 않지만) 신앙론(Con- cerning Faith to Peter the Deacon)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15 "우리를 위해서 육신이 되신 독생자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라. 그에게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에게 구약 시대에는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지금은 그에게 (그와 한 신성을 가지신)아버지와 성령에게 전세계의 거룩한 교회가 떡과 포도주를 끊임없이 드린다. 저 육적인 제물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드리실 그리스도의 살을 예시했으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흘리실 그의 피를 예시했다. 그뿐 아니라 이 제사에는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뜻이 포함되었다."16
따라서 어거스틴 자신도 여러 구절에서 이 제사는 찬양의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끝으로, 우리가 주의 만찬을 제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바치신 특이하며 진정하고 유일한 제사에 대한 기념과 형상과 증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자주 발견할 것이다.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권 24장에도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저 특이한 제사를 논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제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그 유일하고 진정한 중보자는 그가 희생을 드린 분과 여전히 하나이며, 그가 위해서 희생을 바치신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며, 희생을 바친 이와 희생으로 바친 것도 하나이다."17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예를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18

 

11. 교부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신에서 이탈했다

우리는 고대 저술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광경이 거의 우리 눈앞에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전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갈 3 : 1). 그러나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이 기념 행사에 대해서, 주의 제정 정신과 맞지 않게 오해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성찬론에는 희생이 반복된다는 적어도 새롭게 된다는 듯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19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명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성찬은 하나님의 만찬이라고도 하며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만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고대 저술가들에게 불경건이 있었다고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은, 나는 그들이 이 신비 전체에 대해서 경건하고 정통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며, 주의 특이한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다소의 허물이 있었던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이나 복음의 성격이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괴팍한 신비로운 해석만은20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순수한 제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 그림자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

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만일 부지런히 깊이 생각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모세의 제사와 우리의 성찬 사이의 차이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세의 제사는 오늘날 성찬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지만(레 1 : 5) 그 보여 주는 방법이 달랐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희생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명령을 받아 예시했으며 그리스도 대신에 희생 동물이 제시되었고 제물을 드릴 제단이 있었다. 요컨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릴 희생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도록 모든 일을 행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후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제정해 주셨다. 즉 아들이 그에게 드리신 희생의 유익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 대신에 잔치상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 대신에 성직자들을 성별하셔서 거룩한 잔치를 분배하게 하셨다.21 신비가 숭고하고 신성할수록 더욱 경건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적인 지성의 모든 외람된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만을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또 성찬은 주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경우, 우리는 사람의 권위나 오랜 규정으로 인하여 주의 성찬에서 털끝만큼도 어긋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미 잠입한 모든 과오를 일소하려고 할 때에, (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그들을 저 유일한 제정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며 이 원천에서 영원한 원칙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전 11 : 20이하).

 

13. 희생의 성격

sacrifice (희생, 제물, 제사)와 Priest(제사장, 사제)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와 언쟁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내가 이 논의에서 이 말들을 사용한 뜻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모든 거룩한 의식과 종교적 행동을 "제물"이라는 말로 표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용법에 의하면 희랍 사람들이  , 혹은  , 혹은 라고 부른 것을 제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모두 이 말에 포함된다.22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과 구별해야 한다. 즉 신비적 해석을23 허용할 수 있는 구별이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그림자를 가지고 제물의 보편적인 진리를 그의 백성에게 보이려고 하셨다. 제물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제물은 보속의 의미로 죄를 위해서 드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면제되었다. 또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상징과 경건의 증거였다. 이런 제물은 어떤 때에는 간구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빌고, 어떤 때에는 감사의 형식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증거하며,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경건의 표시로서 새로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이 번제와 전제와 예물과 첫 이삭과 화목제였다.24
따라서 우리의 제물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교육적 의미로 하나는 "찬양과 경외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25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고 또 드리는 경배와 예배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원한다면 "감사의 제물"26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무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자기의 몸과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제물은 "화목의 또는 속죄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심판에 대한 보속을 행하고 죄를 씻어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씻음으로써, 모든 불결이 제거되고 순수한 의가 회복된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 하에서 속죄하기 위해서 바친 동물을 희생 제물이라고(출 29 : 36)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거나 죄를 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예표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생은 실제로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으로 성취하셨는데 이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의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확인하셨다(요 19 : 30). 즉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며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희생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떤 다른 희생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다.

 

14. 미사를 판매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며 의를 얻는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 희생에 대해서 극악한 치욕과 참을 수 없는 모독을 가한다고 단정한다. 새로 예물을 드리는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미사를 드리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의 광태는 한정 없이 확대되어, 그들의 미사는 그들이 마음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특히 지정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위해서 공통적으로 평등하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은 사소한 일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이 상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그들의 미사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가 받은 값을 받을 수는 없었으나 조상과 어떤 유사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숫자를 같게 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30개에 팔았으나(마 26 : 15)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계산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동전 30개로 판다.27 유다는 한 번 팔았으나 이자들은 몇 번이든지 판다.
헌물을 바침으로써 사제들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푼 후에 속죄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부인한다. 신약의 제사장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히 9장). 그리스도에게 모든 제사장직이 옮겨졌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모든 제사장직이 종결되고 폐지되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옛날 제도를 폐지하시고 새 제도를 만드시지 않았으므로 사도의 주장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 : 4). 그러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도살하는 자라고 호언하는 이 모독자들은 어떤 철면피를 쓰고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자칭하는 것인가?

 

15. 유사한 허식과 망상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 제 2 권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옛날의 속죄제를 논하면서, 악한 사람들이 이런 제물에 의해서 자기의 비행이 가려져서 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며 마치 신들과 계약을 한 듯이 더욱 마음을 놓고 방탕하게 생활하는 그 우매함을 비웃는다. 플라톤은 여기서 현대의 미사가 행하는 속죄의 관습을 언급하는 것같이 보인다. 불공평한 거래로 과부들을 괴롭히고, 고아들의 물건을 강탈하며, 빈민을 괴롭히며, 협잡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위증과 사기로 남의 소유를 점령하며, 폭력과 공갈로 남을 압박하는 것이 악한 짓이란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 모든 일을 반복하고 이런 짓들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진실로 이 문제를 잘 검토한다면, 이 사람들을 가장 격려하는 신념이 있는데 곧 그들은 값을 치르는 것같이 미사의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푼다고 또는 적어도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쉬운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이런 속죄제를 드리면 지옥에서28 받을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짐승같이 미련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현대 미사의29 대부분과 매년 행하는 기념 행사는 악한 자들을 일평생 가장 잔혹한 폭군이었던 자들과 가장 욕심 많은 강도였던 자들과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자들을 연옥의 불에서 빼내기 위해서 값을 치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우리가 "감사의 제물"30이라고 부르는 둘째 종류의 희생에는 사랑의 의무가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을 존귀하게 한다.31 또 이 둘째 종류에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행위가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저 더 큰 제사 곧 우리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는 제사에 의존한다(고전 3 : 16 기타). 외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은 우리 자신을,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며 그 영광을 더욱 나타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거나 죄의 용서를 얻거나 공로로 의를 얻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죄책이 면제를 받은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 기꺼이 열납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언자의32 말에서 안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이 제사는 계속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 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 : 11). 우리는 결코 이 제사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피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33고 명령한다(롬 12 : 1, 벧전 2 : 5-6 참조).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의미가 있다. 사도는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언중에 모세의 율법에 있는 육적인 제사와 대립시킨다.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라고 한다(히 13 : 16). 그래서 빈궁한 바울을 도운 빌립보 교회 신자들의 관용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신자들의 모든 선행은 영적 제사인 것이다.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나는 왜 증거를 많이 찾아내려고 하는가?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율법의 외형적인 지도하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민족에게 공통된 진리가 육적인 제물의 기초가 되었다고 예언자들이 분명하게 선포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과 같이 올려지기를 기원했다(시 141 : 2) 호세아는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입술로 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며(호 14 : 2-3), 다윗은 "영화롭게 하는 제사"라고 부른다(시 50 : 23, 51 : 19). 사도도34 그를 따라 감사를 "찬미의 제사"라고 부르고 그것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설명한다(히 13 : 15). 주의 만찬에는 이런 종류의 제물이 없을 수 없다. 성찬에서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고전 11 : 26)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곧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는데(벧전 2 : 9), 이는 사도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부르는 찬미의 제사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중재자가 계신다. 우리를 위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고유를 아버지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히 9 : 24)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신다(히 10 : 20).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시며(히 13 : 10 참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시라고(계 1 : 6) 말한다.35

 

18. 미사는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미사라는 이 가증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소경이 볼 수 있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잔에 넣어 드리는 미사는 세상의 모든 왕과 백성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든 자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만들며 졸음과 현기증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짐승들보다도 더 둔감해진 그들은 구원의 배를 조종해서 전적으로 이 죽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확실히 사탄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포위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 이상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든 적이 없다. 진리의 원수들이 현재 미친 듯이 잔악한 수법으로 싸우는 것은 바로 이 헬렌36이라는 음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헬렌과 같은 음녀를 상대로, 영적 음행이라는 가장 가증한 행위로 몸을 더럽히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미사의 순결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구실로서 여러 가지 야비한 악폐를 제시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들에 새끼손가락 하마도 대지 않는다. 미사를 이용한 그들의 비열한 장사와37 불결한 이익, 한정 없는 탐욕 등에도 나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사의 가장 거룩한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단순한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지적할 뿐이다. 이 거룩한 점이 있기 때문에 미사는 수백년 동안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지극히 위대한 신비를 그 존귀성에 합당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큰 일일 것이다. 또 나는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추악한 부패상을 이 신비들과 혼합하고 싶지 않다. 미사가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를 아무 부속물이 없는 상태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철두철미하게 온갖 불경과 훼방과 우상 숭배와 신성 모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

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신약 시대의 초기부터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 교회에 전해지는 두 가지 성례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의 전부를 이제 독자들은 간단히 알게 되었다. 세례는 이를테면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신앙 생활의 입문이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되는 양식이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인 가족들에게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과 한 믿음과 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이 세례도 하나뿐이며(엡 4 : 4-6) 이는 자꾸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해서 분배되어 일단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 성례 이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례는 없으므로 신자의 교회는 다른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성례를 제정하는 것은 사람이 선택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분명하게 설명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을38 곧 이해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리시며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성례를 제정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사 40 : 13, 롬 11 : 34) 이 점을 이해할 것이다. 즉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우리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며 무엇을 거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짐하며 믿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표징을 내놓고 하나님의 의도나 약속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표징을 주셔서 우리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더 간단하게 또 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더 분명히 말한다면, 결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이더라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힘으로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성례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셋째 성례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도 원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보통 성례 이외에 시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성례를 주셨다. 예컨대 만나와(출 16 : 13, 고전 10 : 3), 반석에서 흐르는 물과(출 17 : 6, 고전 10 : 4), 놋뱀과(민 21 : 8, 요 3 : 14), 그밖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런 변천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이런 무상한 형태에서 머물지 말고 더 좋은 것, 폐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된 후로 우리는 사정이 훨씬 달라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골 2 : 3). 한없이 풍부한 이 보화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갈망하고 바라보며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영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며(고전 15 : 24) 우리에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요일 3 : 2)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만을 구하며 배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시대를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요일 2 : 18), "모든 날 마지막"(히 1 : 2) 또 "말세"(벧전 1 : 20)라고 부르며, 공연히 새로운 교리나 계시를 기대해서 속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 1-2), 아들만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으며(눅 10 : 22),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고전 13 : 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범위 내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런데 교회 안에 새로운 성례를 만드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것과 같이, 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도 사람이 조작한 것을 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물을 넣으면 포도주가 변질되고 묽어진다. 누룩을 뿌리면 반죽한 덩어리 전체가 시어진다. 그와 같이 사람이 자기 생각을 첨가할 때 하나님의 신비는 더럽혀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집행되는 성례들이 그 시초의 순결성에서 많이 타락한 것을 본다. 어디를 보아도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례가 성립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언급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은 무수한 의식에 짓밟혀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세례에서는 (우리가 이미 당연한 비난을 한 것같이)39 빛나며 주시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 즉 세례 자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매장되었으며, 이런 것 외에는 일년에 한 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조각의 성찬뿐이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1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

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성례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을 본다면, 교훈을 잘 받고 건전한 사람들은 호기심에 더 끌리거나 주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이외의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것을 성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며 모든 학파와 설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아직까지도 깊이 자리잡고 있다.2 따라서 나는 남아 있는 다섯 가지의 소위 성사들을 낱낱이 엄격하게 검토해서 그 기만을 벗기고, 단순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성사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 이름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은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며 이 이름이 남용되는 것을 공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만물의 주인이며 따라서 마음대로 사물에 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경건한 태도만 유지된다면 다소 부정확한 말을 쓰더라도 용인할 수 있다. 나는 사물이 말을 따르는 것보다 말이 사물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사란 말은 문제가 다르다. 일곱 성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라는 정의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 일곱 가지를 모두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고 한다.
진실로 면제집(the Sentences)의 대가 롬바르드 자신도,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사들은 그것들이 예표하는 것을 줄 수 없었으므로 그것들이 성사라고 불려지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한다.3 나는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훌륭한 약속으로 장식하신 상징들을 성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 쪽으로는 사람이 제멋대로 고안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없이 행하는 의식들에 이 영예를 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사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꾸든지 아니면 그 단어 사용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종부 성사는 성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상과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추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오류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용어 자체를 문제로 삼아 그들에게 도전한다. 여기서도 그들은 이 의식에는 외형적인 표징과 말씀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이것을 성사라고 인정한다.4 명령도 없고 약속도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반대할 수밖에 아무런 대책이 없지 않은가?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용어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서 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무적의 논리로 확인한 것 즉 성례 제정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 진실으로 성사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해서 신자의 양심에 용기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 양심은 사람에게서는 결로 이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나 천사가 이것을 증거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사 40 : 13, 롬 11 : 34)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과 합당한 권위로 증거하신다. 성사는 하나님의 언약 또는 약속에 날인하는 장이다. 그러나 물질과 이 세상의 원소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 형성되고 예정되지 않으면 약속에 날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사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이런 위대한 신비를 이런 비천한 물질 속에 숨긴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적절한 말과 같이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사와 다른 의식들을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므로(행 7 : 60, 9 : 40, 20 : 36, 21 : 5, 26 : 14) 신자들도 무릎을 꿇으면 곧 성사가 될 것이다. 제자들은 동쪽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하므로 동쪽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성사가 될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각처에서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며(딤전 2 : 8) 거룩한 분들은 자주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고 하므로(시 63 : 4, 88 : 9, 141 : 2, 143 : 6) 두 손을 펴 드는 것도 성사가 될 것이다. 결국 성자들의 모든 몸짓이 성사로 변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이 더 곤란한 문제들과 관련이 없다면 여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만일 그들이 고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숫자가 언제 잠입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가? 경건에 관한 모든 외형적인 의식과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어거스틴의 증언을 인용하겠다. 그는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이 논의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복음서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우셨다는 것이다(마 11 : 29-30). 따라서 새로운 백성의 사회를 단결시키는 수단으로서, 수가 아주 적고 지키기 쉬운 그러면서도 의미가 매우 깊은 성례를 정하셨다. 이것이 곧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별하는 세례와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기타 정경에 시인된 것이다."5 또 기독교 교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자신과 사도들이 몇 가지 표징을 지정하셨다. 그것은 수가 많지 않고 쉽게 행할 수 있으며, 뜻이 극히 숭고하고, 극히 깨끗하게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세례와 주의 몸과 피의 기념이다."6 왜 어거스틴은 이 신성시되는 "일곱"을 말하지 않는가? 만일 당시의 교회에서 일곱이 확인되었다면 그가 빠뜨렸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다른 데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참으로 세례와 성찬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두 가지 신비가 특히 존귀하고 다른 의식들은 지위가 낮다는 뜻을 무언중에 표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성사의 박사들에게는 주의 말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굉장한 거짓말로 자랑하는 고대 교회의 찬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위 성사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 하라. 4-13)

4. 고대 교회의 관습

고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장성하면 감독 앞에 서서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학습 교인이 된 어른들은 믿음의 신비를 올바르게 배워 감독과 회중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유아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아직 교회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으므로 소년기의 마지막이나 청년기의 초기에 부모가 다시 한 번 감독 앞에 데려다가 당시에 사용된 일정한 교리 문답 형식에 따라 심사를 받았다. 이 행동 자체가 이미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었지만, 더욱 존중하는 의미에서 안수하는 의식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청년들은 믿음이 인정된 후에 엄숙한 축복을 받고 물러갔다.
고대 저술가들은 이 관습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7 교황 레오가 한 말이 있다. "이단에서 돌아온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게 하지 말고 그가 받은 세례에는 성령의 권능이 없었으므로 감독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라." 여기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령을 받는 의식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그가 한 말의 뜻을 다른 곳에서 설명한다. "이단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르는 안수례에 의해서 믿음을 굳게 하라. 그는 세례를 받았으나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롬도 루시퍼파에 대한 반대론에서 이 점을 말한다. 나는 제롬이 이 행사가 사도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또 그는 이 축복하는 행위가 감독들에게만 허락되었으나 법적 필연성보다도 감독직에8 대한 경의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완화 조건까지 첨부한다.9 그러므로 나는 일종의 축복 형식에 불과하다는 안수례에 전심으로 찬성하며 지금 그 순수한 사용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5.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실체를 거의 소멸하고 일종의 가장된 견진을 하나님의 성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에서 죄의 결백을 위해서 받은 성령을 주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세례를 통하여 중생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싸워 나갈 힘을 더해 주는 권능이 견진례에 있다고 말한다. 견진례를 행할 때에는 기름을 바르며 일정한 선언을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이 거룩한 십자가의 표를 치며 구원의 성유로 너를 견진하노라."10 모두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일점 일획도 보여 줄 수 없다. 그들의 성유가 성령의 그릇이란 것을 그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진하고 미끈미끈한 액체인 기름을 보지만 그것뿐이다. 어거스틴은 "물질에 말씀을 더하라, 그러면 물질은 성물이 될 것이다"11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그 기름에서 기름 이외의 무엇을 보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말씀을 내보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들이 성물을 분배하는 일꾼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또 그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더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꾼이 지켜야 할 첫째 법칙은 명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을 하라고 한 명령을 보이라, 그러면 나는 한 마디도 더 말하지 않겠다. 만일 받은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그 대담한 보복 행위를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왔는지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다. 만일 그들이 "사람에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세례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너무 중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감히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마 21 : 25-27). 그러므로 견진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그것을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복시키려면 먼저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진실로 그들은 사도들의 선례를 들어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무 일도 경솔하게12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며, 만일 그들이 사도들을 진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8 : 14-17). 누가는 이 안수하는 일을 자주 언급한다(행 6 : 6, 8 : 17, 13 : 3, 19 : 6)
나는 사도들이 한 일 곧 그들이 받은 직책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듣는다. 주께서는 그 때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놀라운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은사를 부어 주셨으며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그 은사들을 나눠주시고자 하셨다. 나는 이 안수에 어떤 깊은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들이 이 의식을 행한 것은 안수를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 천거하며 이를테면 바친다는 것을 이런 몸짓으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그 때에 행한 직책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안수하는 일도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니 안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령의 지도가 없으면 교회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목마른 사람들은 자기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 불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요 7 : 37, 사 55 : 1, 요 4 : 10, 7 : 38 참조).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이 배우들은 어떤 점에서 사도들을 추종하고 있는가? 성령의 분명한 권능이 즉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안수로 그것을 실현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수할 권리가 있다고 장담하는가? 사도들이 안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을(요 20 : 22) 성령을 받는 성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사도들의 기도로 명백한 성령의 은혜를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사도들이 안수한 목적은, 그 후손들이 원숭이들처럼 단순한 흉내로 아무 유익이 없이 냉담하고 공허한 가짜 표징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안수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사도들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그들의 변태적 열성을 제하면 사도들과의 유사점은 없지만),13 그들이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 그 기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기름에서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쳤는가? 누가 기름에 신앙을 굳게 하는 권능을 돌리라고 가르쳤는가?14 바울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떠나라고(갈 4 : 9) 가르치며 이런 유치한 행사에 구속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배척하지(골 2 : 20)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기름을 "구원의 기름"15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기름은 배를 위한 것이요 배는 기름을 위한 것이나 주께서는 두 가지를 다 폐하실 것이다(고전 6 : 13 참조) 사용하면 없어지는 이 모든 무력한 물질은 영적이고 결코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대는 세례에 사용하는 물이나 성찬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도 같은 척도로 판단하느냐"고 묻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리 앞에 제시되는 물질의 본질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물질 위에 새기신 형상이며, 이 성물의 힘은 전적으로 이 형상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물질이 그 본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례에서 우리 눈앞에 놓이는 떡과 포도주와 물에 대해서는 바울이 한 말이 항상 적용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 6 : 13) 그것들은 이 세상 형적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 : 3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성물이 된 점에서 그 물질은 우리를 육신 안에 붙들어 놓지 않고, 참으로 또 영적으로 가르친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먹여 키우는가를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이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세례에서는 죄의 결백을 위해서 견진례에서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며, 또 세례에서 우리는 중생해서 생명을 얻고 견진례에서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견진례가 없으면 세례가 올바르게 완성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다. 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가?(롬 6 : 4-5)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의 육을 죽이며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서는 "우리로 또한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롬 6 : 6)하며,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라고 한다(롬 6 : 5). 이것이 바로 전투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든 점에서 그들이 잘 복종하는 체하는 교회는 왜 존경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밀레비스 회의의 결정보다 더 강력한 반대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누구든지 세례는 다만 죄의 용서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누가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행 8 : 16) 말한다. 누가의 이 말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롬 10 : 10). 누가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힘과 보이는 은혜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행 2 : 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 : 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면 여기서 사탄의 악하고 위험한 기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을 세례에서 몰래 떼기 위해서, 세례에서 진실로 받는 것을 그의 견진례에서 받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리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세례에 속한 약속을 세례에서 분리해서 다른 데로 이전한다. 우리는 이제 이 훌륭한 기름 바르는 것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한다(갈 3 : 27).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하게 하는 약속은 세례에서 받지 않았다"16고 말한다. 처음 것은 진리의 음성이요, 나중 것은 허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견진례에 대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바른 정의를 할 수 있다. 즉 견진례는 세례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세례의 기능을 엄폐하거나 내지 폐지한다.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또는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으로 더럽혀진 기름이며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 암흑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기를 신자는 모두 세례를 받은 후에 안수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주교의 견진례를 받아 성유를17 바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된다고 첨가한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속한 일은 모두 성경에 지시되고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교의 진정한 형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 배우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늘 진리와 그리스도의 교훈 전체는 그리스도인의 초보에 불과하고, 기름이 그들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 문장 하나로 성유를 받은 일이 없는 모든 사도와 많은 순교자들이 정죄를 받는다. 그 당시에는, 그들 위에 부어서 기독교의 모든 세밀한 점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 기름, 아니 아직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이 사람들 자신이 자기의 주장을 훌륭하게 논박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되는 신자들에게 세례 후에 기름을 바르는가? 그들의 양떼 가운데 있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왜 그대로 버려 두는가? 빠뜨리면 반드시 중대한 죄를 쓰게 될 일을 신자들이 빠뜨리는 것을 왜 그렇게 비겁하고 나태하게 버려 두는가? 갑자기 죽어서 기회가 없었던 사람 이외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을 그들은 왜 더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견진례가 멸시받는 것을 그렇게 너그럽게 버려 둠으로써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언중에 고백하고 있다.

 

10. 카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거룩한 기름 바르는 일을 세례보다 더욱 존중해야 된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로서 세례는 모든 사제들이 행할 수 있지만 견진례는 주교들의 손으로만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8 그 까닭은 자기들의 조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를 함부로 멸시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 모독적인 입이로다! 너는 너의 악취 나는 입김과 중얼거리는 주문으로 더럽혀진 기름을 감히 그리스도의 성례에 대립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별한 물과 비교하는가? 그러나 너의 무례함에는 이것들은 사소한 일이었고 너는 심지어 이것을 원했다. 이런 말들이 바로 거룩한 교황청의 대답이며 사도적 삼각좌의 신탁이다.19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광증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견진례를 더 존중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견진례가 더 큰 힘과 유익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더 훌륭한 사람들이 신체의 더 훌륭한 부분 즉 앞이마에 행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또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더 유리하고 견진례는 덕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이유를 말함으로써 스스로 도나투스파임을 폭로하지 않는가? 그들은 성례의 가치를 집행자의 가치에 따라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교의 손은 더욱 가치가 있으므로 견진례도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겠다.20 그러나 주교의 이 대단히 위대한 특권의 근원에 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변덕 이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들만이 성령을 주었으므로 사도만이 그 권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주교들만이 사도인가? 대체로 주교들은 사도인가? 그러나 이 점도 우리는 양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왜 같은 논법으로 주교들만 성찬의 피에 손을 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주께서 사도들에게만 피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평신도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왜 주장하지 않는가?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면, 왜 주교들에게만 주셨다고 추론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는 사도들을 단순한 사제들로 만들고 여기서는 현기증이 나서 방향이 달라지고 갑자기 사도들을 주교라고 한다. 끝으로,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울은 그에 의해서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행 9 : 17-19). 나는 이 한 가지를 첨가하겠다. 만일 이 직책이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주교들에게 속한다면, 왜 그들은 감히 그것을 일반 장로들에게 이전했는가?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우리는 이 일을 읽을 수 있다.21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하나님의 세례보다 견진례를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들의 다른 이유들도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가? 견진례에서는 기름을 이마에 바르지만 세례에서는 머리 위에 바른다고 한다.22 세례에서는 기름을 쓰고 물은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악한들이 그들의 누룩으로 성례의 순수성을 더럽히려는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데 대하여 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23 성례들은 인간의 수많은 조작품들에 끼여 있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빛을 보일 틈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그때 내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 자신의 선생들을 믿으라. 그들은 세례에서 물을 무시하고 전혀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기름만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는 이마도 물에 적셔진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물과 비교할 때 그대들의 기름에는-세례에서 쓰든지 견진례에서 사용하든지 간에-일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기름의 매매 가격이 더 비싸다고 주장한다면 그 더 많은 값으로 인하여 본래 거기에 있는 가치까지도 더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철저하게 추악한 사기를 비밀리에 퍼뜨리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견진례는 세례보다 덕을 더 많이 증진시킨다고 지껄이는 그들의 셋째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을 폭로한다.24 사도들은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보이는 은혜를 나눠주었다. 이 사람들의 기름은 어떤 점에서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한 가지 모독 행위를 여러 가지 모독 행위로 감싸는 이 지도자들은25 물러가도록 하라.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려고 애쓰기보다 끊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명할 만한 논거를 빼앗긴 것을 알고서, 그들의 상습대로 견진례는 가장 오랜 관습이며 여러 시대의 찬성으로 확정된 것인 듯이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안 될 것이다. 성례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견진례가 성례로 인정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에 대해서 정확하게 논하고자 할 때 어디에서도 두 가지 성례밖에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은 견진례가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믿음의 피난처를 사람들에게서 구한다면, 이 자들이 성사라고 사칭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결코 성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된다. 고대인들은 안수에 대해서 말하는데 과연 그들은 그것을 성사라고 했는가? 어거스틴은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단정한다. 이제 그들은, 그는 안수를 견진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유적인 것 또는 화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악한 구별을 하면서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의 책이 현존하며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다. 만일 어거스틴이 그 책에 쓴 의미를 왜곡한다면, 나는 그들이 나를 여전히 질욕하는 것을 버려 둘뿐만 아니라 내게 침을 뱉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 그는 분파 행동을 버리고 교회의 연합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주께서 평화의 유대에 의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도록 안수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례를 반복하지 않고 안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차이점을 알려 준다. "안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안수의 의미란 것은 다른 구절을 보아도 분명하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은사이며, 사랑이 없으면 다른 거룩한 것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가 무가치하다. 그 사랑의 유대를 위해서 바르게 돌아선 이단자들에게 안수를 하는 것이다."26

 

13. 진정한 견진

나는 성례의 기형적 유령이라고 할 이 견진례가 나타나기 전에 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 그 관습이 보존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들이 공상하는 견진례로서 남기자는 뜻이 아니다. 견진례를 말하면 반드시 세례를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어린이들이나 청년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교육 방법으로서 보존하자는 것이다. 최선의 교육 방법은 이 일을 위해서 지도서를 준비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기독교회가 찬성하며 반대하지 않는 신조의 대부분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포함시켜야 한다. 열살 된 어린이가27 교회 앞에 서서 신앙을 고백하며 신조마다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어떤 점을 모르거나 이해가 불충분하면 가르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보는 데서 어린이는 하나의 진정하고 진지한 믿음을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 규율이 지금 시행된다면, 자녀 교육은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등한시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반드시 각성시킬 것이다. 자녀 교육을 무시하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문제에 관해서 견해가 더욱 일치하게 될 것이며 신앙에 대한 무지도 적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신기한 사상에 경솔하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조직적인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

14. 고대 교회내의 참회

다음 자리에 그들은 고해를28 두고 어지럽고 무질서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서 양심은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회개에29 대한 성경의 교훈과 그들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했다. 이제는 고해를 하나의 성사라고 하는, 지금까지 교회와 학교에서 지배적인 의견을 확립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가를 간단하게 논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교회의 의식을 구실로 삼아서 그들의 조작품을 확립하려고 하므로 우선 그 고대 의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겠다. 고대인들이 공적인 회개에 있어서 준수한 의식은 지정된 보속을 이행한 사람들을 엄숙한 안수에 의해서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안수식은 죄를 용서한다는 표징이었고, 이 표징에 의해서 죄인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섰으며, 교회는 그의 죄에 대한 기억을 말소하고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받았다. 키프리아누스는 안수를 자주 "평화의 수여식"30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행위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며 신자들의 존경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감독의 권위가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제 2 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회개하는 사람을 장로가 미사에서 공중 앞에 화해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결정했다. 또 오랑주 회의에서는 "참회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화해의 안수 없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라. 만일 병이 나으면 참회자 중에 들어가고 때가 차면 감독에게서 화해의 안수를 받게 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제 3 차 카르타고 회의는 "감독의 허락이 없으면 장로는 참회자를 화해시키지 말라"31고 결정했다. 이 모든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유지하고자한 엄격성이 과도한 관용 때문에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회자를 더욱 신중하게 검토할 것으로 기대되는 감독이 심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다른 구절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성직자 전체가 안수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적당한 기간을 참회한 다음에 성찬에 와서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받는다."32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일은 타락했고 마침내 공개적인 참회와는 별도로 사적인 사유에도 이 의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라티아누스는 공적 화해와 사적 화해를 구별했다.33
나는 키프리아누스가 말하는 고대의 관습은 거룩하고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판단하며 현대에도 회복되기를 바란다. 최근에 생긴 관례에 대해서 나는 감히 배척하거나 혹평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참회에서 안수하는 것은 사람이 정한 의식일 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해 무익한 외형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다. 물론 멸시할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천거된 의식들보다 지위가 낮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카톨릭 교회와 스콜라 학자들은(왜곡된 해석으로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상습자들이므로) 여기서 성례를 찾아내려고 고심한다. 갈대에서 옹이를 찾는 자들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34 그러나 죽을힘을 다한 후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려서, 문제는 복잡하고 미결 상태이며 애매 모호하고 혼란한 채 여전히 두통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회개, 바꿔 말하면 통회의 표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통회가 이 성사의 본체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외형적인 고해와 내면적인 회개가 합해서 한 상징일 것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성사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에 불과 하며 내면적인 회개는 성사의 본체 및 성사라고 말한다.35 그뿐 아니라 죄의 용서는 본체일 뿐이지 성사가 아니라고 한다.36
우리가 위에서 제출한 성례의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성사를 검토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제정하신 외형적인 의식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정의가 그들도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이 가장 거룩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이는 성례들은 육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성례를 계단으로 삼아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올라가게 하시려는 것이다."37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에서 그들은 이와 유사한 무엇을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을 성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서 한 가지 일을 보고 다른 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형태가 있고 이해되는 것은 영적 결실이 있다."38 이 말과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적 결실을 대표하는 외형적인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짐승들을 그들의 투기장에서 죽이기 위해서, 만일 여기서 성사를 구한다면 외면적 또는 내면적 고해보다 사제가 선언하는 사면(absolutio)을 성사라고 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한 자랑이 아니겠느냐고 제의한다. 이 사죄 선언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신념을 강화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소위 열쇠의 약속 즉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마 18 : 10, 마 16 : 19 참조) 약속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새로운 율법의 성사들은 그 표현하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사제의 사면을 받아도 이런 사면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혹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항변이다. 그들은 성찬에서 이중의 먹음을 가정하여 (선악간 모든 사람의)예전적인 먹음과 (선한 사람들만의)39영적인 먹음을 구별하는데, 왜 그들은 이중의 사면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그 문제를 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40 다만 나는 여기서, 그런 의심 때문에 사제의 사면을 성사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입을 빌려서, 보이는 성사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면적 성화가 없는 보이는 성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서만 성사는 그 표시하는 것을 실현한다"고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나 다른 사람들은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전자는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만 후자는 오직 선인들에게만 해당된다"41라고 한다. 그들이 무척 애를 쓰면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렇게 분명한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리석게도 속았을 뿐만 아니라 밝은 햇빛42 속에서도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사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것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단정한다. 첫째로는 그런 성사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기서 전개되는 의식은 사람이 조작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성사의 의식은 하나님만이 제정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위 고해 성사에 관해서 만들어 낸 것은 거짓이며 협잡이다.
그들은 이 가짜 성사를 "파선 후의 둘째 판자"라는 적당한 이름으로 장식했다. 세례에서 받은 결백의 옷을 죄로 더럽힌 사람은 고해에 의해서 그 결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제롬의 말이라고 한다.43 그들이 설명하는 뜻대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누가 했든지 간에 분명히 불경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가 죄에 의해서 말소된다는 생각이다. 또 죄인이 죄의 용서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은 것을 회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며 세례에서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신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제롬이 거칠고 부적당하게 말한 것 즉 교회가 파문해야 할 정도로 세례에서 떠난 자들은 회개함으로써 세례를 회복한다고 한 말을 이 훌륭한 해석가들은 자기들의 불경건에 맞도록 고쳐 버렸다.
그러므로 세례를 고해 성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이는 충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보장의 인장으로서 주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의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것은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에서는 분명히 이런 해석을 확정된 원칙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어거스틴이 쓴 것으로 보이는 소책자 베드로에게 주는 신앙론(Concerning Faith to Peter)에서는 세례를 "믿음과 회개의 성사"44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저자가 불분명한 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는가? 복음서 기자의 말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 그는 "요한이‥‥‥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한다(막 1 : 4, 눅 3 : 3).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 : 14-15을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

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셋째 거짓 성사는 종부 성사이다. 이것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으로 사제만이 사람의 임종시에 행하며 그때 다음과 같은 형식의 말을 한다. "이 거룩한 도유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가장 인애하신 자비로, 네가 봄으로써 들음으로써 맡음으로써 또는 맛봄으로써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지어다" 그들은 종부 성사에 두 가지 힘 즉 죄를 용서하며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혼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들은 야고보가 이 성사를 제정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이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 : 14-l5)45 이 도유는 우리가 위에서 안수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46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며, 사도들을 본받으려는 것이지만 이유도 없고 유익도 없다.
마가의 기사를 보면, 사도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고 병자를 고치며, 병자를 고칠 때에는 기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하였다(막 6 : 13).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이것과 관련된 말이다.
이런 외형적인 일에 있어서 주와 사도들이 아주 자유롭게 행동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런 의식에 깊은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 하셨을 때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바르셨으며(요 9 : 6) 어떤 소경은 만져서 고치셨고(마 9 : 29) 어떤 소경은 말씀만으로 고치셨다(눅 18 : 42).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어떤 병은 말만으로 고쳤고(행 3 : 6, 14 : 9-10) 어떤 병은 만져서 고쳤으며(행 5 : 12,16) 또 어떤 병은 기름을 발라 고쳤다(행 19 : 12).
그러나 도유와 그 밖의 방법들은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도유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징을 보고 이런 위대한 권능의 근원을 깨닫게 하며 사도들의 권능으로 돌리지 않게 하려는 상징에 불과했다. 기름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다(시 45 : 7).
그러나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동안 나타내기를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가 영원히 놀라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눠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지금은 도유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런 권능을 나눠주는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그들은 도유를 성사로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다른 상징들을 성사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실로암 같은(요 9 : 7) 목욕하는 못을 지정해서 병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몸을 잠그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헛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도유하는 것보다 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청년 위에 엎드림으로써 그를 살렸는데(행 20 : 10), 왜 그들은 죽은 사람 위에 엎드리지 않는가? 왜 침과 먼지로 성물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다른 예들은 한번씩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야고보가 명령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교회가 아직도 하나님의 이런 복을 받던 시대를 대표해서 말한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지금도 같은 힘이 그들의 도유에47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다르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우롱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생명과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게 되면 감각과 시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신체의 살아 있는 감각을 속이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물론 주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그의 백성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같이 필요할 때마다 그들의 약함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주시던 보이는 권능이나 기적은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였으며, 사람들의 배은 망덕도 한 원인이 되어 일찍 소멸하고 말았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이 받은 치유의 은사는 그들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따라서 아무 효력도 없는 썩은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기름을 그렇게 부르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해서(마 3 : 16, 요 1 : 32) 모든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들 자신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도유는 성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도 아니며 아무 약속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된다. 참으로 우리가 성사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란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점을 요구할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 의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요구한다. 지금 할례를 기독교 교회의 한 성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첨부된 것이지만,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없으며 거기에 관련된 약속도 같은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종부 성사에 관해서 맹렬히 주장하는 약속을 우리가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 자신도 체험으로 그것을 밝힌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병을 고친다기보다는 죽이고 난도질하는 것이 더 능한 이 백정들이 이 의식을 행하는 것도 잘못이다.

 

21. 카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정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도유에 관해서 야고보가 지시한 일은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도저히 득세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들이 이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실행한 도유가 옳다는 증명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모든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기를 원하는데(약 5 : 14), 이자들은 병자가 아니라 이미 운명하려는 임종시의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48
고통을 완화하는 강한 치유력이 또는 적어도 영혼에 위안을 주는 칠이 그들의 성사에 있다면, 기회를 놓치기 전에 치료하지 않는 그들은 잔인한 자들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도유하기를 바라는데 이 사람들은 젊은 사제만을49 도유자로서 허락한다. 야고보서에 있는 "장로들"이란 말을 "사제들"50이라고 해석하며 복수를 사용한 것을 한 장식이라고 하는 것도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당시의 교회에는 사제들의 큰 무리가 있어서 성유를 가마에50a 들고 긴 행렬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야고보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단순하게 명령하는 것은 보통 기름을 바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가복음에도 다른 기름 이야기가 없다(막 6 : 13). 이 사람들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이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많은 입김으로 더워진 기름, 긴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아홉 번 무릎을 꿇어 인사한 기름이다. 세 번 무릎을 꿇으면서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기름이여" 하고 인사하며 다시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성유여" 하고 그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향유여"51라고 한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푸닥거리를 배웠는가? 야고보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 만일 죄가 있으면 용서를 받으리라고(약 5 : 14-15) 즉 그의 죄책이 면제되고 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름이 죄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병석의 형제를 위해서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가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소위 "신성한" 즉 가증스러운 도유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고 사악한 거짓말을 한다. 야고보의 증거를 제멋대로 함부로 악용한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익을 얻는가를 보라. 우리가 이 증명에 더 애를 쓰지 않도록 그들의 연대기까지도 우리의 곤란을 덜어 준다.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로마 교회를 주재한 교황 이노센트는, 장로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나 후손들이 필요한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라는 관례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연대기의 저자 시지베르이다.52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

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그들의 목록에서 넷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품 성사인데,53 이것은 다산적이어서 일곱 성사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일곱 성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셀 때에는 열 셋을 세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또 모두 한 사제직을 향한 단계이므로 한 성사를 구성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없다. 분명히 각각 다른 의식이 있고 또 그들도 각각 다른 은혜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인정한다면 일곱 성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또 그들 자신이 분명하고 똑똑하게 일곱 가지를 선언하는데 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같이 논의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첫째, 그들이 신품을 성사라고 선전할 때 얼마나 많은 또 어떤 불쾌한 불합리를 우리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가를 우선 간단히 취급하겠다. 둘째, 교회들의 성직자 임명식을 대체로 성사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겠다.
그들은 일곱 가지 신품 즉 성직 계급을 말하며 그것을 "성사" 라고 부른다. 일곱 신품은 수문품과 강경품과 구마품과 시종품과 차부제품과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그들은 이 일곱 계급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한다고 까지 말하며, 이 직위들에 승진되면 그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승진됨에 따라 은혜가 증대되며 더욱 풍부하게 쌓인다고 한다.54
그런데 이 수효 자체는 성경을 왜곡한 데서 신성시하게 되었다. 이사야는(사 11 : 2) 여섯 가지만을 말하는데, 그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권능에 대해서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는 여섯으로 국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는 성령을 "생물의 신"(겔 1 : 20), "성결의 영"(롬 1 : 4), "양자의 영"(롬 8 : 15)이라 하고,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총명한 자들은 개선교회의 모습을 따른다고 하면서 일곱 신품이 아닌 아홉 신품을 말한다.55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삭발을 첫 계급으로 그리고 주교직을 마지막 계급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삭발을 제거하고 대주교를 한 계급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시도루스의 구분은 다르다. 그는 성가 대원과 강경사를 구별해서, 성가 대원은 노래를 부르며 강경사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성경을 낭독한다고 한다. 교회법은 이 구분을 따른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것을 따르고 어느 것을 피하라고 하는가? 우리는 일곱 신품이 있다고 할 것인가? 스콜라 학파의 대가 롬바르드는 그렇게 말하지만 가장 유식한 학자들은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학자들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거룩한 교회법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56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거룩한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이렇게도 의견이 일치한다.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 계급에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동료로 만들어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 내셨을 때(요 2 : 15, 마 21 : 12) 문지기의 직분을 다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요 10 : 7) 하심으로써 자신이 문지기이심을 알리신다.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심으로써(눅 4 : 17) 강경사의 기능을 다하셨다. 귀먹은 벙어리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셔서 그를 다시 듣게 만드셨을 때에(막 7 : 32-33) 구마사의 직책을 다하셨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하심으로써(요 8 : 12) 시종이심을 증거하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요 13 : 4-5) 차부제의 일을 하셨다. 만찬에서 몸과 피를 분배하셨을 때에 부제의 일을 하셨다(마 26 : 26).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마 27 : 50, 엡 5 : 2) 사제의 역할을 다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기록한 것이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웃지도 않고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 해서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활함을 가장 잘 발휘해서 "시종"이라는 칭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며 시종을 세촉 봉사자라고 부른다.57 이것은 마술 용어라고 나는 추측하는데, 여하간 어떤 나라나 어떤 국어에도 없는 말이다. (시종의 라틴어 acoluthus의 어원인)          를 희랍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정색을 하고 이런 의견들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내 자신이 당연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여자들까지도 이런 말에 속지 않도록 그 허망한 정체를 폭로시키고 지나가야겠다. 그들은 굉장히 찬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강경사와 성가대원과 문지기와 시종들을 임명해서 각각 직책을 위임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소년들이나 적어도 그들이 "평신도" 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시키고 있다. 촛불을 켜며 병에서 포도주와 물을 따르는 것은 그런 일로 살아가는 소년이나 가련한 평신도가 제일 많이 하지 않는가? 바로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또 그들이 역시 교회 문을 열고 닫지 않는가? 시종이나 문지기가 교회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누가 본 일이 있는가? 어려서 시종의 일을 하던 사람이 시종으로서 성직자가 되면 시종의 일을 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은 어떤 칭호를 가지게 되면 그 칭호에 해당하는 직책을 버리려고 신중하게 계획하는 것 같다. 그들이 성사에 의해서 성별되며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무일도 하지 않게 만들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직책을 태만히 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면,58 그들은 동시에 그들이 굉장히 치켜세우는 성직들이 현대 교회에서는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시종으로 성별되지 않으면 초와 병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소년들과 세속 사람들에게 그 일을 시키며 성별된 입술만 불러야 한다는 성가를 소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그들의 교회는 전적으로 저주로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또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구마사들을 성별하는가? 나는 유대인들에게 구마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나 그들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행 19 : 13). 이 거짓 구마사들이 한 번이라도 그들의 공적 직무를 실행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정신병자와 학습 교인과 귀신 들린59 사람들에게 안수할 권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귀신을 이해시킬 수 없다. 귀신들은 그들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명령한다. 그들 중에는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 십분의 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급 성직에 대한 그들의 막연한 말은 무식하고 불쾌한 거짓말들을 꿰맨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교회 제도를 논할60 때 옛날 시종과 문지기와 강경사들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는 다만 성직의 일곱 계급이라는 이 최신식 발명에 반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이 신발명에 대한 이야기는 무식한 악덕 변호사들 곧 소르본느 신학파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쓴 글에서만 읽을 수 있다.

 

25. 성별 의식, 특히 삭발식

이제부터 그들이 사용하는 예식들을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성직자로 채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 공통된 상징을 준다. 즉 머리 꼭대기를 깎아서 왕적 위엄을 나타내게 한다. 성직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벧전 2 : 9). 그러나 모든 교회에 주신 것을 독점하며 신자들에게서 빼앗은 칭호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교만하게 자랑한 그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교회 전체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이자들은 그 말을 왜곡해서는 삭발한 소수에 대해서만 "거룩한자가 되라"고 한 것같이(벧전 1 : 15-16, 레 20 : 7, 레 19 : 2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만을 산 것같이(벧전 1 : 18-19), 또 그들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같이(벧전 2 : 5,9)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유도 말한다. 머리 꼭대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마음을 주에게 개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 : 18) 하나님의 영광을61 보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입과 눈의 과오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머리를 깎는 것은 세상 것을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에 남아 있는 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보존하는 좋은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일은 상징으로 표시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소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7 : 51). 그들은 이런 일들을 정수리로 상징했으므로 직책도 잘 이행한 것으로 믿고 실제로는 전혀 직책을 이행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이런 사기와 협잡으로 언제까지 우리들을 기만하려는 것인가? 약간의 머리털을 깎음으로써 성직자들은 풍성한 세상 물질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귀와 눈의 정욕을 죽였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욕심이 많고 미련하고 정욕적인 계급이 세상에 또 있는가?62 왜 그들은 거룩하다는 허위의 표징을 외형적으로만 보이면서 진실로 거룩함은 드러내지 않는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이제 성직자들의 삭발은 나실인들로부터 근원과 근거가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예전들은 유대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아니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까지도 서원이 있어서 성결하게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행 18 : 18) 그들이 덧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무식만을 폭로할 뿐이다.63 이 기록은 브리스길라에 대한 것이 아니며 아굴라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삭발은 바울과 아굴라의 어느 편에도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선례가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즉 바울은 성화를 위해서 삭발한 일은 없고, 삭발한 것은 약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것뿐이다. 나는 평소에 이런 서원을 경건의 서원이 아니라 사랑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온유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 자신이 자기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같이 되며 운운하는 말로 밝혔다(고전 9 : 20).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임시로 순응하기 위해서 한 번만 단기간 동안 그렇게 했다. 이자들이 나실인들의 성결 행위를 본받으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것은 옛 유대교를(민 6 : 18, 6 : 5 참조) 계승하는 척하면서 다른 유대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직자들은 머리를 길러서는 안되고 공처럼64 깎아야 한다는 교서는 이런 종교적인 의혹에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록된 것이다. 남자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서 가르친(고전 11 : 4) 사도가 마치 성직자의 공같이 빡빡 깎은 머리 모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것을 보고,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예전들의 효력과 가치에 대해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직자의 삭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여성적인 남자나 또는 남자답지 못한 매끈하고 우아한 맵시를 내려는 사람들만이 머리를 길렀기 때문에, 성직자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좋은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머리를 자르든지 깎든지 해서 여성적인 장식을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삭발이 유행하게 되자 어떤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자기들의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머리를 길렀다.65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장발이 유행하게 되고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과 같이 항상 장발이던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자, 성직자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짝지어서 머리를 깎은 것 같다. 마침내 더 부패한 시대가 와서 모든 이전 풍속이 악용되었거나 또는 미신으로 타락했을 때, 성직자들의 삭발은 미련한 모방뿐이고 아무 이유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신비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성사를 인정하게 하려고 그 미신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 문지기들은 성별될 때에 교회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경사들은 성경을 받는다. 구마사들은 미친 사람들과 학습 교인들에게 사용할 주문을 받는다. 시종들은 초와 병을 받는다. 이런 의식들에는 비밀한 힘이 있으며 또 이런 물건들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와 표시가 될 뿐 아니라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의식들을 성사로 인정하려고 하므로 성사의 정의에 따라서 그렇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결론을 언급한다면, 나는 스콜라 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이런 하급 계급들을 성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들 자신이 이런 계급들은 원시교회에 없었고 여러 해 후에66 고안된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포하므로, 하나님만이 제정하시는 것이니 천사나 사람이 제정해서는 안 된다. 약속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28. "사제"와 "장로"

아직 남은 세 가지 계급을 그들은 "중요"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중에서 소위 차부제를 여기에 옮겨 온 것은 하급 계급이 생겨난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 계급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성직"이라고 불러서 존경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의 규정을 부정직하게 남용해서 자기들의 구실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로 또는 사제의 계급을 먼저 논하겠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이라고 하며, 장로나 사제의 임무는 성단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서품식에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는(레 5 : 8 참조)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는 표로서 성체를 담은 성반을 받으며, 축성하는67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으로서 두 손에 기름을 바른다.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68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씀은 일점 일획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그들은 이 이상 더 사악하게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미사를69 논할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선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제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해하는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지명하고 성별하셨으며(시 110 : 4, 히 5 : 6), 그리스도에게는 생명의 끝이나 후계자가 없게 하셨다(히 7 : 3). 그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화목의 제물을 드리셨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계 1 : 6, 벧전 2 : 9 참조).70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 즉 우리 자신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바쳐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죄를 대속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받은 직책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 직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그들의 사제직은 불경하며 신성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이 의식을 감히 성사라고 부르는 그들은 철저히 사악하다.

장로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천거하셨으며 나는 기꺼이 그것을 인정한다. 거기에는 의식이 있으며, 이것은 처음에 성경에서 취했고, 다음에 바울이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은사의 충실한 표라고 증거한다(딤전 4 : 14). 그러나 나는 이 의식을 셋째 성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직책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예를 기독교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다고 해서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자랑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과 성례를 맡는 관리인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임명하라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마 28 : 19, 막 16 : 15) 양떼를 먹이라고(요 21 : 15) 명령하셨으나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속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의 임무를 올바르게 맡아서 꾸준히 수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 28 : 20 참조).

 

29. 사제의 임명식

의식들은 현실과 잘 일치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때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셨다(요 20 : 22). 이 상징은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을 의미했다. 이 선한 사람들은 이 숨을 불어넣는 것을 보존하여 마치 그들의 목에서 성령을 불어 내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라"(요 20 : 22)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중얼거린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흉악하게 위조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어느 정도 예술적이며 뜻도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지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흉내내는 원숭이와 같다. 그들은 주를 본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다(요 11 : 43).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마 9 : 5, 요 5 : 8 참조). 왜 그들은 모든 죽은 사람과 중풍병자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입김을 불어 그들을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써 그의 신적 능력의 증거를 보이셨다. 그들이 입김을 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이며 거의 도전하는 것이 되지만 물론 효력도 없고 그 무능한 몸짓으로 그리스도를 희롱할 뿐이다. 참으로 그들은 감히 성령을 주노라고 주장할 정도로 후안무치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경험이 증명한다. 그들이 사제로서 성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변해서 나귀가 되며 바보가 변해서 미치광이가 된다고 경험은 외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점에 대해서 그들과 다투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의식에 반대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이적의 상징으로서 하신 일을 그들이 본받는다는 것이 원래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노라는 구실은 도저히 그들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변호가 될 수 없다.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누구에게서 도유법을 배웠는가? 그들은 사제직의 근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배웠다고 대답한다.71 그들은 자기들이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기들이 고안한 것이라는 것은 고백하지 않고 항상 나쁜 선례를 들어서 자기 변명을 한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계승했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모든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만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 모든 제사장직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또 히브리서가 주석 없이도 분명히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그 모든 제사장직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까지 모세의 율법을 좋 아한다면, 왜 수소와 송아지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참 으로 그들에게는 고대의 장막과 유대교적 예배 전체의 상당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송아지나 수소를 제물로 드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결함이다. 이 도유식이 할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이 행위의 가치에 대한 바리새적 관념과 미신을 덧붙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의의 근거로 믿었다. 이 사람들은 도유식에 영적 은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레위 족을 본받으려고 갈망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목자의 직책을 포기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표지를 새기는 거룩한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름은 먼지와 소금으로 씻어 버릴 수 있고 (더 단단히 붙은 것이면) 비누로 닦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지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72 기름이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흉내내면서도 그가 한 말을 잊어버렸는가? "만일 물에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물에 불과할 것이다. 물을 성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이다."73 그들은 기름에 동반할 어떤 말씀을 보이려는가?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할 것인가?(출 30 : 30, 28 : 41, 29 : 7 참조) 모세는 그밖에도 아론을 장식할 속옷과 에봇과 관과 거룩한 관에 대해서(레 8 : 7,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과 띠와 관에 대해서(레 8 :ㅍ13) 명령을 받았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죽여 그 기름을 불사르는 일에 대해서(레 8 : 14-16), 수양을 죽여 불사르는 데 대해서(레 8 : 18-21), 다른 수양의 피로 그들의 귓부리와 옷을 성별하는 데 대해서(레 8 : 22∼24), 그밖에도 무수한 예식에 대해서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기름 바르는 것만을 좋아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74 그러나 그들이 뿌려 받기를 원한다면, 왜 기름보다 피를 뿌려 받지 않는가? 확실히 그들은 영리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교를 꿰매어서 한 종교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는 기름은 소금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
남은 것은 안수례다. 나는 이것이 진정하고 영적인 임명식에서는 하나의 성사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웃음거리 연극과 안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으며 약속이 우리를 인도해 가야 할 그 목표를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표징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그 원래의 목적인 진실된 일에 적용해야 한다.

 

32. 부제

또 사도 시대와 어느 정도 순수하던 교회에 있었던 집사직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나는 거기에 해당한다는 부제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75 그러나 고대의 집사들과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부제들은 어디가 같은가? 나는 부제들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과실을 문제로 삼아 그 사람의 교리에 대해서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도 그런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부제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사도 교회가 집사로 임명한 사람들을 증거로 드는 것이 부정직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제를 돕는 것 곧 성사에 있어서의 모든 일이 세례와 성유와 성반과 성작의 일을 도우며, 예물을 가져다가 성단에 드리며, 성찬상을 준비해서 덮으며, 십자가를 들며, 신자들에게 복음서와 사도 서한을 읽어서 들려주는 일들이 부제의 직책이라고 말한다. 부제들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제 그들이 임명되는 절차를 보기로 하자. 부제가 임명될 때 주교만 안수한다. 주교는 피임명자의 왼쪽 어깨에 기도서와 영대를 얹어서 주의 가벼운 멍에를 받았다는 것을(마 11 : 30) 알게 하며 그의 왼쪽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바치도록 한다. 주교는 복음의 말씀을 주어 부제가 복음 선포자임을 인정하게 한다. 이 모든 일과 집사가 한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향을 태우고 성상의 먼지를 털며 교회를 청소하고 쥐를 잡으며 개를 쫓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임명한 사람을 마치 사도로 임명한 듯이 카톨릭 교회는 행동한다. 누가 이런 계급의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한 연극으로서 임명한 이 사람들을 그들은 앞으로 부제라는 거짓말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그 직책의 성격을 충분히 밝힌다. 그들은 부제들을 레위 족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근본과 시조는 레위의 아들들이라고 한다.76 그렇게 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예복을 빌려 부제들에게 입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33. 차부제

차부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적당하겠는가? 옛날에는 빈민구제 사업을 맡았던 그들에게 카톨릭 교회는 하찮은 일, 예컨대 성작과 성반, 물이 든 병, 성단에서 쓰는 수건 등을 가져오는 일과 손 씻는 물을 붓는 일 등을 시킨다. 그들이 예물을 받아 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탐식하고 저주를 받게 마련인 예물을 의미한다.
그들의 성별식은 이 직책에 아주 잘 일치한다. 차부제는 주교에게서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부주교에게서 물이 든 병과 기도서와 기타 폐물들을 받는다.77 그들은 이런 쓰레기에 성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위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78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만 말하면 흥분할 것이다. 즉 약속과 연결된 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또는 의식에서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확실한 약속이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약속을 확인하는 의식을 찾는다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또 그들이 사용하는 의식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성사가 있을 수 없다.

 

(에베소서 5 : 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

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맨 마지막은 혼인 성사이다.79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창 2 : 21-24, 마 19 : 4이하),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그것을 성사로서 집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80 또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규정이며, 농업과 건축업과 구두 수선과 이발업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법적인 규정이지만 성례는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확인하시는 외형적인 의식이 지정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에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신성한 일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연합의 표징이라고 말한다.81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시는 상징을 "표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표징"은 비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면, 나는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예리한 가를 밝히겠다. 바울은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한다(고전 15 : 41-42), 여기에 성사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신다(마 13 : 31). 여기에도 성사가 하나 있다. "천국은‥‥‥누룩과 같으니라"(마 13 : 33). 이것은 셋째 성사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라고 한다(사 40 : 10-11). 넷째 성사다. 다른 곳에서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라고 한다(사 42 : 13). 이것이 다섯째 성사다. 결국 어디서 끝이 나며 어디에 한계가 있을 것인가? 이런 논리대로 한다면 성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있는 비유와 직유의 수만큼 성사가 있을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은즉(살전 5 : 2) 심지어 도둑질도 성사가 될 것이다. 이 궤변가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지껄이는 것을 누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포도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시며(요 15 : 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요 15 : 1)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양떼를 거느린 목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 : 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 : 27)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런 비유들을 성사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82

 

35. 그들은 에베소서 5 : 28을 잘못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바울의 말로 우리를 공격하면서, 바울은 "성사"라는 말을 결혼에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83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 : 28-32)84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땅과 하늘을 혼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내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정하신 교회에 애정을 쏟으시는 것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고 한다(엡 5 : 28-29).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며 신부인 교회와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은 모세가 아담이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다(창 2 : 23). 바울은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와 우리에게서 영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확언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이며 그와 한 살이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요약해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호한 뜻에 속지 않도록, 자기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갈빗대 하나를 떼어서 우리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밀이다. 즉 그가 강하셨을 때에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도록, 그는 약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앞으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였다(갈 2 : 20).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을 경시에서 이 혼란이 생겼다

그들은 "sacrament"란 말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에 대한 벌을 온 교회가 받는 것은 옳은가? 바울은 "mystery"라고 말했다. 이 말을 번역한 사람은 이것이 라틴 사람들의 귀에 생소하지 않은 말이므로, 그대로 두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밀"(secret)이라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sacrament"란 말을 사용했으나 바울이 사용한 "mystery"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85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어학에 재주 없음을 요란하고 한탄하게 하자. 어학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일에서 오랫동안 가장 부끄럽게 속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 한 곳에 있는 "sacrament"란 말을 그렇게 고집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무시하는가? 디모데전서와(딤전 3 : 9) 에베소서에서도(엡 1 : 9, 3 : 3,9) 라틴역 성경의 번역가는 "mystery"에 대해서 항상 "sacrament"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실수는 용서하라.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86
그러나 그들은 혼인을 성사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나서 그것을 부정과 부패와 육적인 추악이라고 부르니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경거 망동인가? 사제들을 이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들은 사제들을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결합의 정욕을 막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적 결합 자체도 이 성사의 일부라고 하며, 이것만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자연에 합치하는 비유라고 가르친다. 남녀는 육체적 연합에 의해서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성사를 발견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영혼과의 성사로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으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성사로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을 여전히 성사라고 한즉 그리스도인에게 이 일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사는 서로 모순이 있어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교리에는 다른 불합리도 있다. 그들은 성사에서는 성령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성적 결합을 하나의 성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은 결코 이 결합에 임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87

 

37. 카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일로만 교회를 우롱하지 않고 이 오류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헛된 말과 사기와 비행을 첨가했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혼인을 하나의 성사로 만듦으로써 가증한 일들의 소굴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인을 성사라고 일단 결정한 다음에 그들은 혼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혼인은 영적 문제이므로 세속 재판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법을 정해서 그들의 전제력을 강화했으나, 어떤 법은 노골적으로 불경건한 것이었고 어떤 법은 사람에 대해서 심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부모의 승낙 없이 미성년자들이 혼인한 것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친척끼리의 결혼은 7촌 끼리라도 불법이고 설사 결혼했다 해도 취소해야 된다고 한다.88 그들은 모든 민족의 법과 모세의 규례에도(레 18 : 6이하) 반대되는 촌수를 만들어 낸다. 간음하는 아내를 버린 사람은 재혼할 수 없으며, 대리 부모는 서로 혼인할 수 없고 사순절전 제 3 일요일부터 부활절 후 8일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의 3주간 그리고 강림절부터 예수 현현 대축일까지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규정이 있다.89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오래 그들의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는 빠져나가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귀들의 등에서 사자 가죽을 벗기는 데 조금은 성공했다고 믿는다.

 

제 20 장

국가 통치1

(국가 통치와 영적 통치의 관계. 1-2)

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우리는 사람이 이중의 통치2하에 있다는 것을 확립했고, 영혼 즉 속사람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3 관계된 통치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둘째 통치 즉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에 대해서 논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토의해 온 영적인 신앙론과 이 문제는 성질이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하는 말을 보면 두 가지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니 부득이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한 쪽에서는 미친 야만인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제도를 뒤엎으려고 날뛰고 있는 동시에 또한 편에서는 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군주의 권력을 과장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지배에 대립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4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독을 다 억제하지 않으면 순수한 믿음도 없어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입증하게 되기 위해서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문제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앞에서 한 구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5 서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혼동을 피해야 한다. 복음은 자유를 약속하며 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왕이나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우러러본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위에 어떤 권력이 군림하는 동안은 자유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세계를 새로운 형태로 개조해서, 법원이나 법률이나 집권자나 자유를 속박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구별하며 덧없는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세속적인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서 찾으며 거기에 한정하려는 것은 유대적인 허망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결실이며, 이 영적 결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6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부여되는 자유는 전적으로 그 자체의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갈 5 : 1) 우리에게 명령하는 사도가 다른 곳에서는(고전 7 : 21) 종들에 대해서 그 입장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 이것은 국민 생활에서의 노예 상태와 영적 자유가 완전히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의 다른 발언들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며(갈 3 : 28), 거기에는 헬라 사람과 유대사람,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인과 스구디아 사람,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신다고 한다(골 3 : 11). 사도의 이 말들의 뜻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든 또는 우리가 어느 나라 법률 지배하에서 살든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구별이 상관없다는 것이다.

 

2. 두 가지 "통치"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통치를 그 성질상 부패한 것,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마구 날뛰기를 좋아하는 광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외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대해서 죽은 우리는(골 2 : 10) 하나님 나라에 옮겨져 하늘 존재들 사이에 앉아 있으므로,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일에 대한 비열하고 세속적인 근심 걱정에 얽매인다는 것은 우리의 훌륭한 입장에 맞지 않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짓이라고 그들은 말한다.7 그들은 재판과 재판소가 없으면 법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재판이나 재판소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 죽이는 것이 불법이라면 왜 법률을 만들며 재판을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런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와는 서로 다르다고 우리가 방금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영적 통치는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하게 만들며, 이 죽을 덧없는 생명 속에서 영원 불멸의 복락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국가 통치에 지정된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현세 생활을 없애버린다면, 나는 이 모든 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조국을 갈망하는 한편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생활에는 이런 보조 수단들이 필요하다면, 사람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빼앗는 사람들은 바로 그에게서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 교회는 완전해야 하며 교회의 통치만 있으면 다른 법률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성에 대해서 우매한 공상을 한다. 극도로 엄격한 법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그렇게까지 완강하고 거만한 악인들이 만일 어떤 악한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짓을 할까? 악행을 억제하는 권력이 전혀 없을 경우 그런 악인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3-7)

3. 정부의 주요 임무

그러나 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더 적당한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8 여기서는 정부를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진실로 그 위치는 훨씬 더 귀중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밖에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치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9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10
내가 위에서는 종교를 바로잡는 임무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두는 것 같았는데11 지금은 그 일을 정부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 진정한 종교에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모독을 가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줘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정부를 시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경건에 대해서 법을 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앞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의 각 부분에 대한 나의 논의를 읽는다면, 그 명쾌한 설명의 도움을 얻어 문제 전체에 대한 사고 방법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12
그러면 먼저 집권자의 지위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당한 소명인가 그리고 그 지위의 성격과 그 권한의 범위는 어떠한가를 고찰하겠다. 다음에 기독교적 정부는 어떤 법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고찰하고, 그 법은 국민에게 어떤 유익을 주며 국민은 집권자에게 복종할 어떤 의무가 있는가를 마지막으로 고찰하겠다.

 

4.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주께서는 집권자의 지위를 시인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하시며 우리에게 극구 천거하신다.13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집권자로서 일하는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하시므로(출 22 : 8, 시 82 : 1,6) 이런 이름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임과 권위를 받았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표, 이를테면 대리자로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궤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명이다. 그는 "성경은‥‥‥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하셨다(요 10 : 35).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모세와 여호사밧이 유대 각 도시에 임명한 재판관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신 1 : 16-17, 대하 19 : 6), 사람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 : 15-16). 이것을 바꿔 말한다면, 지상의 모든 일에 대한 권위가 왕들과 다른 권력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인간성의 패악성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에서 유래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사를 처리하기를 기뻐하시며, 사람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그들이 법을 제정하며 재판소에서 공의를 실시하는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의 은사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도(롬 12 : 8) 이것을 가르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스리는 은사는 은혜의 다양함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배되며,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 은사를 사용해야 된다고 한다. 바울은 원시 교회에서 공적 규율을 유지하며 주관하는 신실한 사람들의 회의에 대해서 말하고 이 직책을 고린도서에서(고전 12 : 28) "다스리는 것"이라고14 부르지만, 정부가 하는 일도 이와 같은 것이므로 사도가 모든 종류의 공정한 지배를 우리에게 천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를 공정하게 논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명백하게 말한다.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롬 13 : 2),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한다(롬 13 : 1). 그뿐 아니라 주권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칭찬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한다고 한다(롬 13 : 3-4).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예를 첨가할 수 있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다윗과 요시야와 히스기야와 같이 왕위에 있었고, 어떤 이들은 요셉과 다니엘같이 고관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같이 자유를 얻은 백성들의 지도자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지위를 시인하신다고 언명하셨다. 따라서 정권은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무정부 상태를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은,15 비록 고대에는 왕이나 사사들이 무식한 사람들을 지배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써 실현하신 현재의 완전 상태와 그런 노예적인 통치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항의한다.16 이런 말은 그들의 무지와 교만만을 폭로할 분이다. 그들에게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완전성의 백 분의 일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물이 어떻든 간에 그들을 논박하기는 쉽다. 다윗이 모든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라고 권고했을 때(시 2 : 12), 그는 그들이 그 권위를 버리고 사생활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시게 하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열왕이 교회의 양부가 되며 왕비들이 교회의 유모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사 49 : 23), 그들의 영예를 빼앗지 않고 도리어 고귀한 칭호를 주어 하나님의 경건한 경배자들의 수호자로 삼았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에 특히 시편에 이런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시 21, 22, 45, 72, 89, 110, 132).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바울이 한 말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공중 집회에서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충고한 다음에 곧 그 이유를 첨부한다. "나아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 : 2). 이런 말로 바울은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

 

6.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 점을 위정자들은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직책을 다하겠다는 큰 자극을 받으며, 임무 수행에 따르는 곤란이 아무리 많고 중대할지라도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일꾼으로 임명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고결함과 슬기와 온유와 극기와 결백에 대해서 큰 열성을 가져야 하겠다고 자기를 스스로 일깨우고 격려할 것이 아닌가? 자기의 재판석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찌 뻔뻔스럽게 불공정한 재판을 허락하겠는가? 하나님의 신실을 발표하는 도구로 지정된 줄 아는 입으로 어찌 감히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하도록 지정된 손인 줄 알면서 무슨 양심으로 악한 법령에 서명할 것인가? 요컨대 주권자들이 자기는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의와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으므로(렘 48 : 10), 의로운 소명을 받고도 거짓된 행동을 하는 자는 더욱 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호사밧이 재판장들에게 임무 수행을 권면했을 때,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말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말로 인정했다(신 1 : 16).17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 함도 없으시고"(대하 19 : 6-7).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라고 한 말씀이 있다(시 82 : 1). 이 말씀은 주권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알리며, 앞으로 그들은 그 정치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서 그들이 임무에 대한 용기를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또 이 경고를 그들은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과오를 범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행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심판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사 3 : 14-15 참조). 또 그들은 불결한 일이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로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직책을 맡았다0?곰곰이 생각할 때에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7.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이렇게 많은 증언을 들으면서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기독교적 경건의 입장에서는 이 거룩한 직책을 배격해야 된다고 외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거룩한 직책을 비난하면 반드시 하나님 자신에게 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집권자만을 배척하지 않고 하나님까지도 버림으로써 자기들 위에 왕이 되시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삼상 8 : 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정부를 일체 배격하는 현대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첫째 되는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눅 22 : 25-26)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나 정부를 가지는 것을 일체 금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18 참으로 교묘한 해석가들이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 누가 제일 윗자리에 설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이 헛된 야심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그들의 직책은 한 사람이 모든 다른 사람들 위에서는 왕국들과는 다르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이 비교가 왕들의 위엄에 어떤 불명예를 주는 것이냐고 묻는다. 참으로 이 말씀은 왕위와 사도직과는 다르다는 것 이외에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뿐 아니라, 집권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고 인정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다. 바울은 그들을 통틀어서,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권세는 없다고 말한다(롬 13 : 1). 그리고 가장 유쾌하지 못한 일 즉 일인 집권이 다른 일보다 더 천거된다. 일인 집권은 모든 일을 자기 뜻에 굴복시키는 한 사람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예속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고대의 용감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정치 못한 판단을 막기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에 의해서 왕들이 군림한다고 명백하게 주장하며(잠 8 : 15 참고) 특히 왕을 공경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잠 24 : 21, 벧전 2 : 17).

 

(정부의 형태들과 집권자들의 임무 : 전쟁과 과세의 문제. 8-13)

8. 각종 정부 형태

국가 조직을 생각할 자격이 없는 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는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소일거리일 것이다. 또 이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할 수 없고 신중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토의의 성격은 크게 환경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계없이 정부 형태를 서로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제일 유용한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의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가장 쉽다. 철학자들이 논하는 정부의 세 가지 형태에 대해서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귀족 정치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19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귀족 정치 자체가 가장 좋다기보다는, 항상 공정하며 바른 생각만을 하는 자제력이 강한 왕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뛰어난 총명과 지혜로써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아는 왕도 드물다. 그러므로 사람의 결함이나 실패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정권을 운영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고 보다 견딜 만하다.20 그래서 여러 사람이 서로 돕고 가르치며 경고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불공평한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그 고집을 비난하며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증명하는 바이며, 주께서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제정하셔서 그의 권위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주께서는 다윗을 세워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좋은 형태 아래 두려고 하셨다(출 18 : 13-26, 신 1 : 9-17). 또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한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이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굳세게 노력한다면 나는 그들은 이 직책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한다. 참으로 집권자들은 전력을 다하여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방지해야 하며 침범 당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21 이는 그들이 자유의 수호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각성과 주의가 불충분하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해서 불충실하게 되며 조국에 대해서는 반역자가 된다.
그러나 주께서 다른 형태의 정부를 지정해 주신 사람들이 정부 형태를 바꾸려는 생각으로 바로 이 기능을 떠맡으려고 한다면, 이런 행동을 생각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무익하며 더우기 전적으로 유해한 짓이다. 그러나 한 도시만을 보지 않고 전세계를 본다면, 적어도 먼 지역들을 본다면, 여러 나라가 여러 가지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지혜롭게 배정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소들이 균등하지 않은 비례로 결합되는 것과 같이 나라들은 각각 그 독특한 부동의 형태에 따라서 가장 잘 단결된다. 그러나 주의 뜻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모두 필요하지 않다. 왕국들에는 왕들을 세우며 자유 도시들에는 원로들이나 시의원들을22 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사는 곳에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9.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고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집권자의 직책을 겸해서 설명해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그 직책을 어떻게 서술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설명하겠다. 그 직책이 율법의 두 돌판에 까지 미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속 학자들의 글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집권자의 직책과 입법과 공공 복지에 대해서 논한 사람은 반드시 종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터 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을 제일의 관심사로 삼지 않으면 원만하게 정부를 수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권리를 무시하고 사람의 일만을 돌보는 법률은23 앞과 뒤가 서로 뒤바뀐 것임을 모든 학자가 인정했다. 이와 같이 모든 철학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시하며 이 일에 대한 모든 민족의 관찰이 보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만일 그리스도인인 군주들이나 집권자들이 이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기의 태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가 대표하는 하나님과 또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권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며 선양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부패하거나 소멸되었을 때에 그것을 재건하거나 종교를 보호하여 순수하고 흠결 없는 종교가 번창하도록 한 거룩한 왕들을 성경에서는 매우 칭찬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성경은 무정부 상태를 악으로 인정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행했다고 한다(삿 21 : 25).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무시하고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확립하는 일에만 유의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증명한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지상 생활의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지배자들을 임명하시고 훨씬 더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해야 하는 일은 무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에 대한 열기로 날뛰는 과격 분자들은 유린당한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려고까지 한다.24
둘째 판에 관련해서, 예레미야는 왕에게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경고한다(렘 22 : 3). 시편 82편에 있는 충고도 같은 뜻이다. 왕들은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라고 하신다(시 82 : 3-4). 모세는 자기의 대리자로 임명한 사람들에게, "너의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명령하고 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라고 했다(신 1 : 16- 17).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으나, 성경에는 왕된 자들은 말을 많이 두지 말고 탐욕을 멀리하며, 형제 위에 교만하지 말고 주의 율법을 일평생 항상 묵상하며(신 17 : 16-19), 또 재판장들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며(신 16 : 19),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 곳에 있다. 내가 여기서 집권자들의 직책을 설명하는 목적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집권자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셨는가를 알리려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공중의 무죄와 겸손과 예절과 평온의 보호자와 옹호자로 임명되었으며 사회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은 이 모든 덕의 모범이 되겠다고 언명했다. 자기가 왕위에 오르면 어떤 범죄에도 찬성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자와 중상하는 자와 교만한 자들을 미워하고, 각처에서 정직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구해서 그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시 101, 특히 4,5,6,7절).
그러나 집권자들은 악인들의 침해를 받는 선한 사람들을 지켜 주지 않고 압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지도, 원조하지도 않는다면 이 직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거나 깨뜨리는 노골적인 악인들과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무기로서 받았다(롬 13 : 3).25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솔론(Solon)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는 모든 정치 조직은 상벌에 의해서 유지되며 상벌을 제거하면 도시들의 규율은 붕괴되고 소멸된다고 말했다.26 덕행에 대해서 명예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열의가 식는 사람이 많으며 엄격하게 벌을 주지 않으면 악인들의 정욕을 억제할 수 없다. 예언자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종합해서 왕들과 집권자들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고 명령했다(렘 22 : 3, 21 : 12 참조). 참으로 정의는 무죄한 사람들을 지켜 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은 담대한 악인들을 방어하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10.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그러나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곧 하나님의 법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금지하며(출 20 : 13, 신 5 : 17, 마 5 : 21) 하나님의 거룩한 산(교회)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고 예언했다면 (사 11 : 9, 65 : 25), 어떻게 집권자들은 경건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흘리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벌을 주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을 실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율법은 살인을 금한다. 그러나 살인자는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꾼들에게 칼을 주어 모든 살인자를 치게 하신다. 경건한 사람들을 해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는 사람의 경솔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모든 일을 명령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따르는 동안은 우리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행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정의를 억제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떤 법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일꾼들을 비난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위하여 보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롬 13 : 4). 그러므로 군주들과 다른 집권자들이 그들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경건과 의와 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딤후 2 : 15 참조), 우리는 그들이 이 임무에 전력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세가 주의 권능에 의해서 동족의 해방자로 임명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 애굽 사람에게 손을 댄 것도(출 2 : 12, 행 7 : 24) 이런 염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족의 신성 모독을 처벌하기 위해서 하루에 삼천 명을 죽인 것도 같은 동기였다(출 32 : 21-27). 다윗이 그의 임종시에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같은 뜻이었다(왕상 2 : 5-6,8-9). 따라서 그는 또 그 땅의 악인들을 진멸해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모든 행악하는 자들을 좇아 내는 것을 왕의 한 덕행이라고 했다(시 101 : 8).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라고 솔로몬을 칭찬한 것도(시 45 : 7, 44 : 8) 이 부류에 속한다.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던 모세가 왜 이런 야만성이 불타올라 진중을 왕래하면서 형제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만들었는가? 또한 일평생 극히 온유하던 다윗이 어떻게 임종시에 요압과 시므이의 백발이 평안히 묘지로 가지 못하게 하라고 아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유언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벌을 시행함으로써 그 잔인한 행위로 그들의 손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만일 사람을 아꼈다면 자기 손을 더럽혔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잠 16 : 12) 솔로몬은 말한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 20 : 8),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잠 20 : 26),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을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잠 25 : 4-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 : 15),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잠 17 : 11),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잠 24 : 24). 칼을 빼어 들고 죄인과 악인을 추궁하는 것이 집권자들의 진정한 의라면, 자포 자기한 악인들이 도살과 살륙을 자행할 때에 칼을 집에 넣어 두기만 하고 피를 흘리지 않는 집권자들은 최대의 불경죄를 범하게 될 것이며 선하고 의롭다는 칭찬은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돌연히 나타나는 잔인하고 가혹한 처사나 고소 당한 사람들의 암초라고 당연히 불려지는 법정은27 물론 배척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잔인성을 두둔하지 않으며, 항상 인자한 정신이 없이 공평한 판결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관용은 국왕들의 최선의 고문관이며 솔로몬의 말과 같이 왕위는 인자로 말미암아 가장 견고해진다(잠 20 : 28). 어떤 고대 저술가가 관용은 군주들의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28
그러나 집권자의 양쪽에 다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엄격으로 병폐를 고치기보다 해를 주게 되든지 또는 관용에 대한 미신적인 애착으로 가장 잔인한 온유에 빠질 수 있다. 즉 무력한 친절의 낭비로 파멸을 당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버려 두게 된다. 네르바(Nerva)의 치세 중에, 지배자가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불행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행하다고 사람들은 바른 말을 했다.29

 

11. 정부의 전쟁 수행권

그러나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수행하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영토 내의 평온을 유지하며 불온한 사람들의 선동을 억제하고 압제를 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악행을 처벌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개인의 평안과 모든 사람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나 선동적인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또는 남을 폭압하며 학대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 그들의 광증을 억제하는 것보다 더 그 권력을 적합하게 사용할 기회가 있겠는가? 법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법의 실시를 부패하게 하는 악인들의 노력을 겪는 것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몇 사람만을 해한 강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한 나라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버려 둘 것인가? 아무 권리도 없는 외국에 침입해서 괴롭히는 원수는 그가 왕이건 가장 미천한 사람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다 똑같은 강도요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공정성과 집권자의 직책으로 보아서, 집권자들은 공정한 처벌로 개인들의 비행을 무력으로 억제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맡아 지키는 영토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전쟁으로 방어해야 한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증거를 통해서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30

 

12. 전쟁에서의 자제와 인도적 정신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증거나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첫째, 전쟁을 해야 될 이유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있으며 집권자들이 그 지배 아래에 있는 주민을 방위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둘째,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말을 사도들의 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 정부를 조직하려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점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거기에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가 모든 전쟁을 배척한다면, 군인들이 구원에 관한 지도를 요청했을 때 무기를 버리고 군대에서 완전히 물러서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는 충고를 받았다(눅 3 : 14).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으므로 무기를 드는 것을 전혀 금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이라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는 것이 모든 집권자들의 의무다. 벌을 줘야 할 때라도 격분에 휩쓸리거나 증오심에 사로잡히거나 무자비한 가혹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벌을 받을 사람의 특별한 과실만을 보지 말고 그에게 있는 인간의 공통된 본성에 동정하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31 또 적에 대해서 즉 무장 강도에 대해서 무장해야 할 때에도 그렇게 할 기회를 찾아서는 안 되며,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면 주어진 기회도 피해야 한다. 전쟁은 평화를 모색하는 것같이 하라고 한 이교 철학자의 요망보다32 우리가 하는 일이 훨씬 더 훌륭해지려면, 우리는 무기에 호소하기 전에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끝으로,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느 쪽에서도 집권자들은 사적인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을 위한 고려만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권력을 남용하게 되며, 이것은 심히 악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전쟁을 하는 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수비대와 동맹 관계와 기타 민간 방위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수비대"는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 도시들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맹"은 곤란한 문제가 일어날 때에 서로 도우며 협력해서 인류의 적을 타도하자는 인근 군주들의 조약을 의미한다. "민간 방위 수단"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사물을 의미한다.

 

13. 정부의 과세권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공물과 세금은 군주들의 합법적인 수입이며, 이것을 그들은 주로 공무의 공적 경비에 사용하겠지만 호화로운 가정 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은 이를테면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위엄에 붙어 다닌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과 히스기야와 여호사밧과 그 밖의 거룩한 왕들은 또 요셉과 다니엘은(그들의 지위의 존귀성에 따라) 경건을 위반하지 않고서도 공공 경비를 많이 사용했고, 에스겔서를 보면 왕들에게는 많은 토지가 배당되었다(겔 48 : 21). 거기서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묘사했으나 인간 사회의 합법적인 왕국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주들 편에서도, 그들의 수입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재산이란 것과(바울도 그렇게 확언한다, 롬 13 : 6) 그것을 낭비하거나 약탈하면 반드시 분명한 불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요망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거의가 국민의 보혈이므로,33 아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잔혹 행위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는 필요한 공공의 재원에 불과하며 이유 없는 과세는 전제적 착취란 것을 그들은 숙고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군주들은 낭비와 사치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타오르게 된 그들의 탐욕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신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불쾌감을 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서든지 합당한 한도를 알아야 한다. 사사로운 개인들도 일반 시민의 공통된 지출보다 군주들의 비용이 많은데 대해서 경솔하고 파렴치한 비난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

 

(공법 및 재판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의 관련. 14-21)

14. 구약성경의 율법과 각국의 법

국가 조직에서 집권자 다음가는 것은 법률이다. 법률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이며,34 키케로는 플라톤을 따라 법률을 나라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법률이 없으면 집권자의 지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집권자가 없으면 법률에 힘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법은 무언의 집권자요 집권자는 살아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옳은 말이다.35
기독교적 국가는 어떤 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논제라고 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법인가 하는 긴 논의를 나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의는 끝이 없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가 목적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나는 간단히 지나가는 말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법은 어떤 것이며 어떤 법이 사람 사이에 실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겠다.

만일 여기서 위험한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모세의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국가의 관습법으로36 통치하더라도 나라는 바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 이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며 선동적인가는 다른 사람들이 고려하게 하고, 나는 이 생각이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모세에 의해서 발표된 하나님의 율법 전체는 보통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37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씩 고찰해서, 거기 있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해당되고 어떤 것이 해당되지 않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들도 도덕에 관한 율법에 속한다고 하는 사소한 문제에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이 구분을 가르친 고대 저술가들이 뒤의 두 가지가 도덕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도덕에 관한 율법은 변동이 없는데 비해서 다른 두 가지는 변하거나 폐지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에 관한 율법이라고 부르지 않고 첫째 종류에만 이 이름을 적용했다. 도덕에 관한 율법이 없으면 도덕의 진정한 거룩함이 지탱될 수 없고 올바른 생활을 위한 불변의 표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한다

우선 도덕에 관한 율법을 본다면 거기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순수한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또 한 부분은 진실한 애정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한다. 따라서 도덕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을 정돈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정해 주신 의의 표준 곧 참되고 영원한 표준이다.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뜻은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관한 율법은 유대 사람들의 후견인과 같았다. 여호와께서는 이를테면 유년기에 있는 유대 민족을 의식에 관한 율법으로 때가 찰 때까지 훈련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갈 4 : 3-4, 3 : 23-24 참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지혜를 완전하게 나타내며, 그 때에 비유로 예표하신 일들의 실체를 보이려고 하셨다.
재판에 관한 율법은 유대 민족의 통치를 위해서 주신 것이었으며 그들이 허물 없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공평과 공의의 형식들을 정하신 것이었다.
의식의 관례는 유대인 교회가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도록 했으므로, 경건에 대한 교훈에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경건 자체와는 구별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재판에 관한 율법의 형태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이 명령한 그 사랑을 가장 잘 보존하려는 의도만을 가진 것이었지만 사랑의 교훈 자체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경건이 의식에 관한 율법을 폐지하고도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재판에 관한 율법을 폐지했을 때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영원한 의무와 교훈은 여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각 민족은 자체에 유익이 있다고 례상되는 법을 만들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사랑이라는 영원한 표준에 일치해야 하며 형태는 틀린 지라도 목적은 같아야 한다. 도적들을 존중하며 난잡한 남녀 관계와 기타 더욱 추잡하고 더욱 어리석은 행위를 허용하는 야만적인 법들이 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법은 정의의 입장에서만 가증한 것이 아니라 인도적 정신과 예절 바른 생활의 입장에서도 가증한 것이다.

 

16. 법의 단일성과 다양성

우리가 모든 법에서 다음 두 가지를 검토할 때에 내가 한 말의 뜻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헌법과 그 헌법의 근거가 되는 공정성이다. 공정성은 당연한 것이므로 모든 법에서 동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법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이 동일한 목적이 모든 법에 적용되어야 한다. 헌법은 부분적으로 환경에 지배된다. 따라서 모든 헌법이 공정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동등하게 추구한다면 그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 율법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율법은 자연 법칙의 증거에 불과하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기신 양심의 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38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공정성의 개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만이 모든 법의 목표와 표준과 한계가 되어야 한다.
그 표준에 따라서 구성되며 그 목표를 향하며 그 한계를 지키는 법이라면, 그런 법이 유대인들의 법이나 우리의 법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배척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법은 도둑질을 금한다. 유대에서 도둑에게 준 형벌은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다(출 22 : 1-4). 다른 민족들의 상고 시대의 법들은 도둑질에 대한 벌로서 두 배를 배상하게 했다. 그 후에 생긴 법들은 나타나는 도둑과 나타나지 않는 도둑을 구별했다. 형벌이 다름에 따라 혹은 추방, 혹은 태형, 혹은 사형에 처했다. 위증에 대한 유대인들의 벌은 손해를 끼친 것만큼 유사한 또는 동일한 손해를 받게 하늘 것이었다(신19 : 18-21). 다른 나라 법에서는 큰 수치만 주거나 또는 교수형에 처하거나 십자가에 달았다. 살인죄에 대해서는 모든 법전이 사형에 처했으나 처형 방법은 달랐다. 간음죄에 대한 벌은 어떤 나라에서는 가벼웠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무거웠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모든 법이 같은 목적을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같이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위증을 처벌한다. 그러나 처벌 방법은 같지 않다. 또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이 유리하지도 않다. 어떤 나라는 살인자를 잔혹하게 처벌해서 무서운 본을 보이지 않으면 살인과 강도 사건이 빈발해서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층 더 가혹한 벌을 주어야 하는 시대도 있다. 나라의 치안이 문란해지면, 거기에 따르는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게된다. 무기가 힘을 쓰는 전시에는 벌에 대한 비상한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살벌한 기풍이 휩쓸 것이다. 가뭄이나 전염병이 유행하는 때에는 벌을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오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다. 극형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어떤 특수한 죄악으로 달리는 민족들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가기 위해서 이런 다양성으로 적절하게 대처하는데, 만일 이 다양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대해서 심한 악의와 증오심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는데,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발언이다.39 다른 법들을 시인하며 채택할 때에는 단순한 비교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나라와 민족의 상태를 보아서 한다. 모세의 법을 폐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원래 우리를 위해서 정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서 법을 주신 것은 그 법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며 모든 시대에 실시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을 스스로 지키며 보호하시기로 하셨을 때에 특히 그들에 대한 입법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래서 현명한 입법자답게 특히 그들을 고려해서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17.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자리에 둔 문제 즉 법과 재판과 집권자는40 그리스도인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유용한가를 검토하겠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문제는, 사사로운 개인이 집권자들을 어느 정도로 공경하며 어느 정도로 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집권자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복수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경건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41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 반대해서,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라고 단언한다(롬 13 : 4). 사도의 뜻은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셨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집권자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딤전 2 : 2). 우리가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이 불가하다면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게 하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집권자에게 도움을 호소하더라도 경건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람들을 취급해야 한다. 소송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소송을 해도 무서운 증오심과 맹렬한 복수심으로 날뛰며 고집과 앙심으로 상대자들을 파멸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리고 부정을 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법적 절차를 밟는다는 구실로 하여 그런 악행을 변호한다. 그러나 형제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해서 그 형제를 미워하거나 또는 해하겠다는 무모한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무자비하게 괴롭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18.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때에 한해서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고의 기소와 피고의 변호를 위해서 소송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즉 피고가 지정된 날에 출정해서 될 수 있으면 이의를 제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말하며 자기의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만을 옹호하려고 할 때에 그는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또 반대편의 원고도 신체와 재산에 부당한 압박을 받았을 때, 법관의 보호를 청하며 고소 이유를 말하고 공정하고 선한 결과를 구한다면 그도 역시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해하려는 생각이나 복수하려는 욕망이나 가혹한 증오심이나 투쟁욕을 일체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자에 대한 적의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며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의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악의로 차고 시기심으로 더럽혀지고 복수심에 찬 위협과 투쟁욕으로 타올라 사랑이 손상될 때에는 가장 공정한 주장을 위한 소송까지도 불경건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있다. 즉 마치 분쟁 중인 사건이 이미 평화롭게 해결되며 조정된 것같이, 사랑과 성의로 상대자를 대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소송을 바르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런 온건한 태도는 어떤 소송 사건에서도 볼 수 없으며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나도 현재의 사정으로 보아 공정한 소송 당사자가 드물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악으로 더럽히지 않는다면 이 원칙은 여전히 선하고 순결하다. 집권자의 도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실로 그 선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더욱 정성껏 경계해야 한다.

 

19.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모든 법정 투쟁을 엄금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과 깨끗한 자에게 깨끗할 수 있는 선물의 하나를(딛 1 : 15) 거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행동을 부끄러운 것이었다고 비난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바울은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중상을 논박하며 동시에 그들의 간계와 악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행 24 : 12이하) 법정에서 자기의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주장했으며(행 16 : 37, 22 : 1,25), 필요한 때에는 불의한 재판장을 기피하고 가이사의 법정에 호소했다(행 25 : 10-11).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한 명령과 모순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법정에서 복수심을 멀리 축출한다(레19 : 18, 마 5 : 39, 신 32 : 35, 롬 12 : 19). 사건이 민사에 관한 것일 때 사건을 공안 수호자인 재판장에게 순진하고 단순하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른 길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악을 악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롬 12 : 17). 이런 생각은 곧 복수심이다. 그러나 사형에 해당하거나 그 밖의 중대한 범죄인 경우에라도 우리는 고발자에게 불타는 듯한 복수심이나 사적 피해에 대한 원한을 품고 법정에 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를 해하려는 흉포한 사람의 노력을 방지하겠다는 생각만을 하라고 요구한다. 복수심을 버린다면 그리스도인은 복수하지 말라는 명령은 파괴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는 그리스도인은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의 손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며 압박과 괴로움을 받는 자들을 위해서 친히 복수하시겠다고 약속했으므로(롬 12 : 19), 자기나 타인을 위해서 법관의 원조를 청하는 사람은 천당의 보호자가 하실 복수를 앞질러 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법관이 하는 복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같이(롬 13 : 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시켜서 원수를 갚으신다.

 

20.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하시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겉옷을 주라고 명령하신다(마 5 : 39-40).4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복수심을 철저하게 싫어하여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해를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용과 인내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들은 중상과 손해를 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들이다. 악인들의 악의와 사기와 조롱에 대한 방비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모든 재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태연 자약해서, 한 가지 해를 받으면 다른 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일평생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만을 자신에게 약속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눅 6 : 28, 마 5 : 44 참조), 선으로써 악을 이기려고 노력해야 한다(롬 12 : 21).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승리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복수를 가르친 것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의 몸이 상하고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그런 해를 받는 즉시 악인을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마 5 : 38이하).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평온하고 온건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원수에 대한 친절을 유지하면서도 법관의 도움을 얻어 자기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사회 복지에 대한 열의로 극악한 죄인 곧 죽음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죄인의 처벌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 여러 가지 교훈을 바르게 해석한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악인이 선하게 되기를 원하므로 악인의 악의를 참고 견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선인의 수효를 증가시킬 수 있으며 악인의 악을 본받아 스스로 악인의 무리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둘째, 이 교훈들은 밖에 나타나는 행위보다 속마음의 준비 태세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심과 호의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하면서, 겉으로는 그들에게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잘되기를 원해야 하기 때문이다.43

 

21.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소송을 죄악시했다고 하는 항의 역시 잘못이다(고전 6 : 5-8). 그의 말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 내에 소송에 대한 과소한 열기가 팽창해서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들의 종교가 불신자들의 조롱과 악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바울은 첫째, 그들의 과격한 분쟁으로 인하여 복음이 불신자 사회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비난한다. 둘째, 교우들끼리 이렇게 싸우는 것을 책망한다. 그들은 자기의 손해를 인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서로 남의 소유를 탐내며 까닭 없이 서로를 공격하며 가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덮어놓고 모든 논쟁을 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친 듯한 소송 열을 배격한 것이었다.
자기가 손해를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싸우기까지 한 것을 바울은 그들의 과실 또는 약점이라고 부른다. 조그마한 손실에도 곧 분개해서 법정에 달려가 고소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분노로 너무 많이 기울어지고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기독교 신자는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한다. 법정에 가면, 돌아올 때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되지 않을 수 가 없다. 손해가 너무 클 때 그리고 사랑을 잃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법에 호소하더라도 바울의 말에 배치되지 않는다. 요컨대(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이)44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좋은 지혜를 각 사람에게 줄 것이다. 사랑을 버리고 하는 일과 사랑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분쟁은 절대로 공정하지 못하며 경건하지 못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불의한 통치자도 공경하며 순종하라. 22-29)

22. 공경

집권자들에 대해서 그 지배 아래에 있는 국민이 해야 할 첫째 의무는 그들의 지위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45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한으로서 주신 것으로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자로서 존경해야 한다. 세상에는 집권자에게 큰 경의를 표시하며, 순종할 만한 집권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회 복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집권자들을 일종의 필요악으로만 인정한다. 왕을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명령은(벧전 2 : 17)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과 왕을 경외하라고 가르치는 것도(잠 24 : 21) 같은 뜻이다.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말에는 왕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생각이 포함되었다. 왕과 하나님을 연결한 솔로몬은 왕은 거룩한 존귀와 위엄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도 우리는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롬 13 : 5). 사도의 말의 뜻은, 국민은 다만 군주나 통치자가 무서워서 그들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반항하면 즉시 복수할 무장을 하고 있는 원수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개 굴복한다). 국민이 집권자에게 복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게 된다. 통치자들의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집권자들의 인물을 논하지 않는다. 우매나 나태나 잔인성 그리고 악행이 가득한 악한 행실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하거나, 이 악을 덕이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집권자의 지위 자체는 영예와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권자들을 높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들도 공경해야 한다.

 

23. 복종

여기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즉 통치자들을 충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그들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야 하며,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방위 임무를 맡거나 그 밖의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복종심을 실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롬 13 : 1-2)라고 바울은 말한다.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한다(딛 3 : 1). 또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말한다(벧전 2 : 13-14).46 그리고 복종하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통치자들의 안전과 번영을 하나님께 빌라고 첨부한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 : 1-2).
여기서 아무도 자기 기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집권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집권자를 모욕하고도 형을 받지 않을 수 있을 듯이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이 모욕에 중벌을 줄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뿐 아니라 나는 사사로운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도 일종의 복종으로 인정한다. 개인으로서의 시민은 자기를 억제해서 공적인 일에 일부러 간섭하거나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기가 손을 댈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자기 손을 묶어 놓아야 한다. 자유로운 손을 가진 것은 집권자뿐이므로 문제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은 명령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배자가 명령할 때 사사로운 시민은 공적 권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군주들의 자문관들을 보통 그들의 귀와 눈이라고 하기 때문에,47 군주들이 명령으로 임명해서 일을 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손이라고 할 수 있다.

 

24.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한 집권자는 참으로 그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즉 국부,48 시인이 말한 국민의 목자,49 평화의 수호자, 의의 보고자, 무죄한 사람을 위한 복수자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부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어리석다고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군주들은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아무관심도 없이 자기의 쾌락만을 추구해 왔다. 또 일부 군주들은 자기 일에 열중해서 법과 특권과 재판과 청탁 편지를 경매에 부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반 국민의 돈을 빼내서는 심히 어리석은 증여에 낭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강도질을 하고 집을 털며 부녀자를 강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따라서, 이런 자들을 집권자로 인정해서 가능한 한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에 설복당할 사람은 많지 않다. 집권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직책에도 어긋나는 이런 큰 치욕과 범죄 속에서는 집권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으며, 선행하는 자를 표창하며 행악자를 벌하기 위해서 임명된(벧전 2 : 14) 하나님의 사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배자의 존귀성과 권위를 가르치지만 그들은 이런 사람을 지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런 타고난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사람들은 합법적인 임금들을 사랑하고 공경한 것같이 항상 폭군들을 미워하며 저주했다.

 

25.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앞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공정하고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뿐만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든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비록 군주로서의 직책을 조금도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또한 복종해야 한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안전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집권자의 직책을 그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증거하시며 집권자들에게 한계를 지정하시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집권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그에게서 권위를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통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애의 진정한 표본의 증거이며,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은 국민의 사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우셨고, 지배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합법적인 권력에 주신 거룩한 위엄을 부여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여기에 대한 확증을 첨가하겠다. 그러나 악한 임금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내리시는 진노란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욥 34 : 30, 호 13 : 11, 사 3 : 4, 10 : 5, 신 28 : 29). 아무도 내게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나 남의 가정을 더럽히는 간음하는 자나 남을 죽이려고 애쓰는 살인자와 같이 왕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성경은 이런 모든 재난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깐 머물러 사람들의 마음에 잘 이해되지 않는 이 일을 증명하겠다. 아무 영예도 받을 가치가 없는 심히 악한 인간이라도, 만일 공적 권력을 잡고 있다면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그의 공의와 심판의 사자에게 주신 저 고귀하고 거룩한 권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복종에 관해서는 가장 훌륭한 왕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그에게 드릴 그 공경과 존경을 악한 지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려야 한다.

 

26.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성경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우리에게 자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나게 하므로, 나는 우선 독자들이 그 섭리에 주의하여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배치하며 원하시는 대로 임금들을 임명하시는 섭리의 특별한 작용을 신중하게 고찰하기를 바란다. 다니엘서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며 왕들을 혹은 폐하시고 혹은 세우신다(단 2 : 21,37). 마찬가지로, 이는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다(단 4 : 17) 성경에는 이런 구절들이 많은데 이 예언서에는 특히 많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정복한 느부갓네살이 어떤 임금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강력한 침략자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정복자였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애굽 땅을 정복한 수고 때문에 그에게 그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다(겔 29 : 19-20). 또 다니엘은 그에게 말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단 2 : 37-38). 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에게 말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단 5 : 18-19). 우리는 하나님에서 어떤 왕을 임명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에, 왕을 공경하며 두려워하라는 저 하늘 명령을 곧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가장 악한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두신 자리에 서슴지 않고 두게 될 것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들에게 저 받을 고통에 대해서 경고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 8 : 11-17) 왕들은 율법에서 모든 자제와 근신하는 훈련을 받았으므로, 물론 이런 일들을 왕의 권리로서 할 것은 아니었다(신 17 : 16이하).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권리라고 하였다. 백성은 복종해야 하며 항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곧 왕들의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횡포는 극도에 달할 것이나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즉 왕들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27. 예레미야 27장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그러나 예레미야서에 명심할 만한 구절이 있다. 상당히 길지만 우리의 문제전체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나는 내 큰 능과 나의 든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그의 땅의 기한이 이르면 여러 나라와 큰 왕이 그도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마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 : 5-8,17).
저 가증하고 잔악한 폭군이 왕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는 폭군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왕위에 앉았으며 왕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므로 그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것은 불법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왕의 권위를 세우는 동일한 명령이 가장 무가치한 왕까지도 임명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생각하며 눈으로 본다면 결코 선동적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은 그 공적에 따라서 처우해야 한다고 하며, 우리에게 대해서 왕답지 못한 왕에게 우리가 피지배자로서의 예를 다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은 선동적인 생각이다.50

 

28. 왕 개인을 존엄하다고 하는 성경의 증거

그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유한 것이었다고 하는 항의는 무가치하다. 우리는 주께서 어떤 이유로 그 명령을 확인하시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 : 6), 그러므로 그를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 : 17)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라를 받은 것이 분명한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어떤 사람을 왕위에 오르게 하실 때에는 그의 통치를 원하신다는 결의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이점에 관한 성경의 일반적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잠언 28장에서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라고 하며(잠 28 : 2), 욥기 12장에도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라고 한다(욥 12 : 18).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섬기고 사는 것뿐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글에는 또 다른 명령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간 바벨론이 평안하기를 힘쓰며 그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나라가 평안하면 그들도 평안하겠기 때문이라고 하신다(렘 29 : 7). 여기서는 모든 재산을 잃고 고국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정치적으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다른 구절에서 우리의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과는 다르다(마 5 : 44). 여기서는 정복자의 나라가 안전하며 평안하도록 기도해서 그들도 그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에게 왕으로 지명되어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을 때에도 무고한 박해를 가하는 사울의 목숨을 여전히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왕국의 영예로써 사울의 생명을 성별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했다(삼상 24 : 6). 또,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다(삼상 24 : 10). 또,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했다(삼상 26 : 9-11).

 

29.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최대의 존경을, 따라서 최대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자주, 우리는 인물을 검토해서는 안 되며 여호와께서 불가침의 위엄을 새기신 그 직위를 여호와의 뜻에 의해서 그들이 지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반복한다.
그러나 통치자들도 통치를 받는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점을 근거로 삼아서 공정한 지배자들만을 섬겨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논리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책임을 지니고 있다. 가령 부모와 남편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심히 냉혹하고 난폭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엡 6 : 4) 자녀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므로 지치게 만든다고 하자. 아내를 사랑하며(엡 5 : 25) 연약한 그릇으로 인정해서 아끼라는(벧전 3 : 7)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심한 학대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자기 구실을 하지 않는 그 악한 자들에게 여전히 순종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각각 "그들의 등에 달린 주머니를 보려고"51 해서는 안 된다. 즉 남의 의무를 묻고자 해서는 안 되며 자기의 유일한 의무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잔인한 군주가 우리를 학대할 때, 욕심이 많거나 방탕한 자가 우리를 착취할 때, 태만한 자가 우리를 무시할 때, 악하고 모독적인 자가 신앙을 이유로 우리를 괴롭힐 때, 이런 때에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비행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비행은 꾸준히 주의 채찍으로 징계를 받는다(단 9 : 7 참조).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되며 불안과 초조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생각해야 한다. 이런 병폐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주의 도움을 간청할 수 있을 뿐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보의 물과 같이 하나님이 마음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잠 21 : 1).52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의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시 82 : 1)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입맞추지 않는 왕들과 땅의 모든 법관들은 주의 앞에서 넘어지며 부서질 것이다(시 2 : 10-12). 불의한 법을 제정해서 빈민을 불공평하게 재판하며 미천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도 모두 여호와 앞에서 멸망할 것이다(사 10 : 1-2).

 

(그러나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 우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30-31)

30.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나타난다. 어떤 때는 그의 종들 가운데서 공공연한 복수자를 일으키셔서 악한 정부를 처벌하며 부당한 압박을 받는 그의 백성을 참혹한 불행에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어떤 때는 다른 의도를 품고 다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열광을 인도하셔서 이 목적을 달성하신다. 그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셨고(출 3 : 7-10), 옷니엘을 시켜 수리아 왕 구산의 폭력에서 구하셨으며(삿 3 : 9), 다른 왕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그 밖의 압제에서 구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을 애굽 사람을 통해서 누르시고 애굽 사람들의 거만을 앗수르 사람들을 시켜 꺾으셨다. 앗수르 사람들의 흉포는 갈대아 사람들로, 바벨론의 오만은 고레스가 메대 사람들을 굴복시킨 후에 메대 사람들과 바사 사람들로 꺽으셨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배은 망덕과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하고 완고한 태도는 앗수르 사람들과 혹은 바벨론 사람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쇄하며 처벌하셨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합법적인 소명에 의해서 파견되었고, 그들이 무력으로 왕들에 대항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왕들에게 주신 그 존엄성을 조금도 침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에서 무력을 받아 우세한 힘으로 열등한 힘을 굴복시켰다. 이것은 왕들이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과 같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되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실행했으나 그 마음에는 오직 악행만을 계획했을 뿐이다.

 

31.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행위가 그 자체로서는 어떻게 판단되든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 성취하신다. 즉 거만한 왕들의 피비린내 나는 흘을 꺾으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신다. 군주들은 듣고 떨라.53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집권자들의 권위를 멸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집권자들이 가장 무가치한 사람들이며 악행을 다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더럽힌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하나님의 지극히 중대한 명령으로 확립되었으며 존중할 만한 위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폭한 독재를 시정하며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이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곧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복종하며 고통을 참으라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사사로운 개인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왕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다면(예컨대 고대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 로마 집정관들에 대한 호민관,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 그리고 현재 각국 국회가 중요 회의를 열 때에 행사하는 권한 같은 것) 나는 그들이 왕들의 횡포한 방종에 대하여 그 직책대로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미천한 일반 대중에 대한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체한다면 나는 그들의 이 위선을 극악한 배신 행위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된 줄을 알면서도 그 자유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54

 

32. 인간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집권자들의 권위에 마땅히 복종해야 된다고 했지만 그 복종에는 항상 한 가지 예외가 있어야 한다. 실로 예외라기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즉 우리는 이런 복종으로 인하여, 모든 왕들의 욕망도 마땅히 복종해야 할 분에게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왕들의 모든 명령도 그분의 명령에 양보해야 하며 왕들의 권력은 그분의 위엄 앞에 굴복해야 한다.55 그분을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분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왕들의 왕이시며, 주께서 입을 여실 때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더 중요시해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들 위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존경하지 말라. 이런 경우에는 집권자들이 가진 위엄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최고의 권력 앞에 굴복한다고 해도 그들의 위엄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다니엘은 왕의 불경건한 칙령에 복종하지 않은 자기가 왕에게 어떤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단 6 : 22-23).56 이는 왕이야말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 사람들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여 자기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악한 포고에 순종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호 5 : 13).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새로운 우상을 따르게 되었다(왕상 12 : 30). 그들의 자손도 같은 식으로 왕들의 명령에 곧 복종했다. 예언자는 그들이 왕의 칙령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을 엄하게 책망했다(호 5 : 11). 거짓된 겸손은 결코 칭찬할 수 없다. 조정에 있는 간신들은 겸손을 가장하고 단순한 백성을 속이면서, 자기들이 왕명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죽을 인간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셔서 그들로 인류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듯, 또는 지상의 권력을 주신 분 앞에서는 하늘의 권력들도 떨고 굴복하는데도 그분에게 복종한다면 지상의 권력이 축소된다는 듯이 생각한다. 나는 절개를 지키는 데에는 어떤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왕은 항거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며, 솔로몬은 "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다"고 했다(잠16 : 14). 그러나 하늘의 사자인 베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행 5 : 29) 칙령을 선포했으므로, 우리는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받는 편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자. 또 우리의 용기가 꺾이지 않도록 바울은 또 다른 자극을 주어 우리를 격려한다. 이는 곧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회생하셨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악한 욕망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고전 7 : 23).

하나님을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