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1

(주의 만찬은 빵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1-3)

1. 표징과 본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고 종이 아닌 아들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일을 걱정하시는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평생 먹여 주신다.2 또 그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이 계속되는 너그러움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담보물을 주셨다. 즉 독생자의 손을 거쳐 그의 교회에 행한 성례 영적 잔치를 주시고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는 떡임을 확증하시며, 이 떡을 우리의 영혼이 먹음으로써 진정하고 복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요 6 : 51).
이 숭고한 신비를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며, 이 신비는 아주 위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도 면밀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이 한량없는 보화를 교회에서 빼앗으려고 오래 전부터 검은 구름을 퍼뜨렸으며, 그 후에 이 광명을 덮어 버리기 위해서 논쟁과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 이 거룩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도 똑같은 술책을 사용했다.3 그러므로 나는 우선 문제를 무지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한 다음에 사탄이 세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사용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겠다.
첫째, 표징은 떡과 포도주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서 우리를 중생시키신 후에 교회라는 그의 공동체에 접붙이시며 택함을 받은 그의 권속으로 만드신다. 그와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서 생명을 가지게 하시고, 우리의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양식을 주심으로써 지혜 있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신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힘을 회복하며4 하늘 영생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운을 얻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된다는 이 신비는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5 우리의 적은 능력에 가장 적당한 보이는 표징으로 그 신비의 형상을 보여 주신다. 참으로 담보물과 표를 주심으로써6 우리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알게 하신다. 이 잘 알 수 있는 비교는 아무리 미련한 마음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이 신비스러운 복의7 목적을 알 수 있다. 곧 주의 몸이 이미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면서, 우리는 지금 먹을 수 있으며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 독특한 희생의 역사를 우리 속에서 느끼고 또 우리의 영구적인 음료가 되기 위해서 주의 피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흘려졌다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시려는 것이다. 거기에 첨가된 약속의 말씀도 이 뜻을 알린다.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전 11 : 24, 마 26 : 26, 막 14 : 22, 눅 22 : 19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미 희생된 그 몸을 받아먹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명령의 의도는, 우리 자신이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란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다(눅 22 : 20, 고전 11 : 25). 이것은 우리가 맛보도록 그 거룩한 피를 우리에게 제공하실 때마다(그 피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한) 그가 이미 자신의 피를 흘려 확인하신 그 언약을 얼마간 새롭게 하시고 또 존속시키시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상속하신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가질 수 있다. 또 그가 이미 들어가신 천국은 그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서도 분리할 수 없으며, 그가 우리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지시고 우리에게서 그 책임을 면제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8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3.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우리는 이 성례에서 모든 일에 대한 완전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목전에 계시며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해야 한다.9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며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마 26 : 26-28과 고전 11 : 24의 융합, 막 14 : 22-24, 눅 22 : 19-20 참조). 받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것이 우리 것임을 알리며, 먹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와 일체가 됨을 알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의 몸을 주시며 피를 흘리신다고 엄히 말씀하심으로써 그 두 가지가 그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몸과 피를 취하셨다가 다시 내놓으신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 성례의 강한 힘이-그 힘의 거의 전부가-"너희를 위하는" 또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말씀에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 주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서 주시지 않았다면10 지금 그 몸과 피를 분배할지라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로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게 하셔서 그것이 우리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그래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11 일종의 유추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떡을 받을 때12 우리는 곧 비교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곧, 떡이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피의 상징으로서 포도주가 제시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포도주가 신체에 주는 유익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비슷한 영적 유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영양을 주며 유쾌하게 하고 힘을 주며 기쁘게 하는 것이다.13 저 가장 거룩하신 몸을 주시며 피를 홀리신 사실에서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을 받는가를 잘 생각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여러 가지 성질은 유추해서 그것을 우리가 받을 때에 얻는 일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때에 성만찬으로 말미암아 보장된 약속- 이것은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느끼는 신비이다. 4-7)

4. 성만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그러므로 성례에서는 더 이상의 생각이 없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 6 : 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 6 : 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다(요 6 : 48,50).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십자가에서 그 약속이 실천되며 모든 점에서 성취되었다.

#449 제17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효력을 산 체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또 구원에 이르도록 먹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름을 성례에서 빌려 오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14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죽을 성질을 공유하게 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실 때, 또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가 받으시고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실 때,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삼켜 없애실 때(벧전 3 : 22, 고전 15 : 54 참조)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육을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입히실 때에(고전 15 : 53-54 참조) 그는 자신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5. 믿음으로 참예자가 되는 법15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서 할 수 있으나 성찬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가 떡을 끊임없이 먹을 때에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고 그 떡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떡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셨다가 죽지 않으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아니실 것이다.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효력과 결과가 영원 불멸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떡이 되실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답게 표현하셨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 : 51). 물론 이 말씀의 뜻은 그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영적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몸은 죽음을 당하시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거에 그가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몸을 버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의 몸을 떡으로서 주셨다.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몸을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어 먹게 하시며, 성찬의 거룩한 신비로 자신을 주시는 것을 확인하시고, 외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내면적으로 성취하심으로써 매일 그의 몸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표징을 지나치게 찬양함으로써16 신비 자체를 애매 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 이 떡에서 신자들은 영생을 위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저 고귀한 설교에서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하신 말씀은(요 6 : 26이하)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무엇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께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참여하는 것을 "먹는다" 또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 몸에 영양을 주려면 떡을 보는 것보다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이, 영혼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영적 생명을 얻으려면 그에게 진실로 또 깊이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나는 이것은 믿음으로 먹는 것에 불과하며 다른 먹는 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즉 그들에게는 먹는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살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17 그의 살을 먹으며 이렇게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라고 말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먹음이 곧 믿음이요 나에게는 먹음이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로는 사소한 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가르치지만(엡 3 : 17),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사도의 말을 믿음의 현저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믿음에 의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심으로써(요 6 : 48),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존할 뿐 아니라 떡을 먹으면 몸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6. 이 일에 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생각

그리고 (그들이 수호자로 여겨서 인용하는) 어거스틴은, 우리가 믿음으로 먹는다고 했을 때에 먹음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나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널리 나타나신 분으로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와 결합시켜 그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분으로서 받아들인다고 첨부한다. 나는 저 표현을 전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뜻을 정의할 때 그것이 완전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이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을 본다. 예컨대 그는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On Christian Doctrine)라는 책의 제 3편에서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라는 어구는(요 6 : 53) 하나의 비유이다. 즉 우리는 주의 수난에 참여하며,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상했다는 사실을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또 베드로의 설교로 회개한 3,000명은(행 2 : 41) 그들이 잔인하게 흘린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마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주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믿음의 유익을 칭송하며 우리의 몸이 떡을 먹고 기운을 얻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18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 의해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드신다"19고 하였다. 그의 말은, 이런 선은 믿음 이외의 근원에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한 상상으로 생각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할뿐이다.
성찬을 외형적인 고백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금 말하지 않겠다. 성례를 총괄적으로 다룰 때20 이미 그들의 과오를 충분히 논박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독자들은 잔을 "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부르실 때에(눅 22 : 20) 믿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속이 표현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약속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찬을 바르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7.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

더우기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교제인가를 알리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에 참여할 뿐이라고 하며 살과 피는 말하지 않는다.21 나는 이 사람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피는 참된 음료요(요 6 : 55),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고(요 6 : 53) 한 것과, 또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이 그들의 좁은 묘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우선 그들의 묘사를 간단 명료하게 처리하고 그 다음에 그들과 반대로 과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논하겠다. 이 엉터리 박사들은 조잡한 생각으로 먹고 마시는 데 대해서 어리석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 동시에 그리스도에게서 그 자신의 살을 벗기고 그를 하나의 환상으로22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들과 긴 논쟁을 하게 되겠으나 이것은 이 위대한 신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것이며, 나의 지성으로는 이 신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이 신비의 숭고함을 나의 유치한 척도로23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오히려 나는, 독자들이 이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정신적 관심을 국한시키지 않고 내가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쓴 후에도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적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정복당하고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는 오직 경탄할 수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을 할 수가 없고 혀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비록 그럴지라도 나는 어떻게든지 나의 견해를 요약하겠다.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믿으며 경건한 사람들의 찬성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8-10)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먼저,24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말씀 즉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배운다(요 1 : 1). 즉 생명의 원천이었으며 만물은 항상 이 원천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요일 1 : 1) 혹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기록하여(요 1 : 4),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속에까지 흘러들어 그들에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힘을 불어넣으셨다고 한다
또 후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가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게 하신 때에만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첨부한다(요일 1 : 2). 그는 이미 피조물들에게 그의 힘을 부어 주셨지만, 사람은(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생명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어) 도처에서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받으려면 말씀과의 교제에 영접될 필요가 있다.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충만하다고 들을지라도 우리의 안과 밖에 죽음만이 보인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확신과 안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명의 그 원천이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동참하리란 것을 알려 주신다. 그는 또 그가 거처로 삼으신 우리의 육에 생명을 주시며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영생의 양식을 얻게 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 : 48,51)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이실 뿐 아니라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취하신 육신에 그의 힘을 부으셔서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러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그의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으로 음료이며(요 6 : 55), 신자들은 이 양식에서 영양을 얻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육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특별한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이와 같이 그들이 쉽게 생명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그들 앞에 생명이 값없이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가슴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의미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 그 자체에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처음 상태에서는 죽을 성질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또 영생을 입은 지금도 그 자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는 우리에게 전달할 생명이 충만하므로 "생명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나는 키릴루스와 함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 : 26)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 앞에서 가지셨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때에 가지신 은사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인성에도 생명이 충만해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한 사람은 동시에 생명에 참여한다고 가르치신다.25
우리는 잘 아는 예로 이 일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물은 샘에서 마시며 샘에서 긷고 수로를 통해서 밭에 그 물을 대지만, 그 자체에서 흘러 나와 이렇게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이 있어서 그 근원이 끊임없이 물을 제공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살은 다함이 없는 풍부한 샘과 같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 안으로 흘러오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이제 하늘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사도도 이런 뜻으로 말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 : 23). 그러나 그는 "머리"시며 (엡 4 : 1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락하고 상합하여‥‥‥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 : 16)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 : 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과 몸으로 우리와 전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결합되는 그 긴밀한 교제에 바울은 더욱 훌륭한 이름을 붙여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의 지체"라고 했다(엡 5 : 30). 끝으로, 모든 말보다도 더 위대한 이 일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그는 강화를 "이 비밀이 크도다."26라는(엡 5 : 32) 감탄문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바울은 너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경탄하는 편을 택했는데 그런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히 미친 짓이라고 하겠다.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요약하면, 떡과 포도주가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는다. 영혼이 그리스도에게서 참으로 영양을 얻어야만 그 표징의 유추가 적용된다. 또 이 일이 있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얻어야 한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27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생명을 우리의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시키듯이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성찬에서도 증거하시고 인을 치신다. 성찬에서 그는 무익하고 허무한 표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하신 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실현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또 영적 잔치에 참석하는28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이 의미하는 실재를 제시하시며 보여 주신다. 비록 신자들만이 그 실재를 받아 유익을 얻지만 그들은 이 크고 너그러운 은혜를 진정한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말한다(고전 10 : 16).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며, 의미하는 실체의 이름을 표징에 준 것이라고29 항의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나는 물론 떡을 떼는 것이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본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도 우리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본체도 보인다고 올바른 추론을 한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허망한 표징을 제시하신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떡을 떼는 것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참으로 표현하신다면, 그가 참으로 그의 몸을 제시하며 보이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 손에 그의 몸의 상징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 몸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이는 표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확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그 몸 자체도 받았다는 것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외형적 표징과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스콜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잘못 표현했다 그리고 화체설도 하나의 예다. 11-15)

11. 성례의 의미와 본체와 효과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항상 인정되었고 지금도 건전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가르치는 대로) 나는 성찬의 거룩한 신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물질적인 표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우리의 미약한 능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진상으로서 이것은 동시에 그 상징들에 의해서 표현되며 전시된다.30
이 진상의 성격을 잘 아는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에 나는 대개 세 가지 것을 지적한다. 즉 의미와 의미에 의존하는 본체와 이 두 가지에서 나타나는 힘 또는 효과의 세 가지다. 의미는 약속에 포함되었으며 약속은 표징에 내포되어 있다. 본체 또는 실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효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
이 모든 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으나,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하는 궤변을 인정하지 않는다.31 약속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외형과 단순한 지식에서 머물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에게 참여하며 즐기라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신자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과 의를 가지며 그의 죽음에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은혜들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에서는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나는 말한다. 즉 참으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고 모든 순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의해서 제시된다. 무슨 까닭인가? 첫째는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이제 나는 미신이 고안해 낸 엉뚱한 혼합물을 검토하겠다. 여기서 사탄은 신자들의 마음을 하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가 떡이라는 요소에 고착되신 것같이 상상하는 사악한 오류를 그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교묘한 장난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심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의 재주꾼들이 조작한 임재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에 임재해 있어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으며 삼킬 수 있다고 한다. 교황 니콜라스는 베렌가리우스에게 그의 회개의 증거로서 이런 형태의 자설을 취소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그 사용된 말이 너무도 괴상했기 때문에, 주해서(Gloss)의 저자는 독자들이 현명한 경계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베렌가리우스의 것보다 더 악한 이단설을 거기에서 연역해 낼 위험성이 있다고 외쳤다.32 그래서 피터 롬바르드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면 서도 나중에는 다른 생각으로 기울어졌다.33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에 공통된 일반적인 특색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며, (이미 하늘에 받아들인 바 되어)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돌아오실 때까지(행 3 : 21) 하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끌어다가 썩을 요소들 밑에 둔다거나 몸이 어느 곳에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못한 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34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몸과 영과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의 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이 줄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수로와 같아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성질과 소유는 수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35 우리는 태양이 지구 위에 광선을 부음으로써 본질의 일부를 지상에 던져 지구의 소산물이 나게 하고 기르며 자라게 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어째서 태양에 비교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은 그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빛이 적을 것인가?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일을 말할 때 그 힘을 전적으로 성령에 관련시킨다. 한 구절이 여러 구절을 넉넉히 대표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롬 8 : 9).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가하는 일을 배제하지 않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며 우리 안에 모시게 하신다고 가르친다.36

 

13.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 떡을 하나님으로 오인한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런 야만적인 불경건에 공포를 느껴서 더 신중하게 말을 한다.37 그러나 그들도 기만적인 궤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제한된 또는 육체적인 모양으로 포함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38 그러나 다음에 자기들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양식을 생각해 낸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하는 "떡의 형태"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떡의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할 때 거기 남아 있다고 하는 횐 빛에 그 본질을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는 성례에 포함되었으면서도 하늘에 여전히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련성의 임재가 아닌 임재를 주장하지 않는다.39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말을 인용해 오지만 그들 전체의 공통된 목적은, 전에는 떡이던 것이 성별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떡의 외형 밑에 숨어 계신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가 보이는 것이며 성별 후에 떡의 형태 아래 숨어 있으며 덮여 있다."40 이와 같이 떡의 형상은 우리의 눈이 살을 볼 수 없게 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런 말로 어떤 함정을 파려고 하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사태 자체가 분명하게 알려 준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도자들까지 얼마나 큰 미신에 붙잡혀 있었는가 하는 것과 지금도 교황 제도하의 교회 지도자들이 미신에 잡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붙어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진정한 믿음인데도, 그들은 거기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임재를 조작하고, 그런 임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교묘한 궤변으로 인하여 떡이 하나님으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화체설

여기에서 저 가공적인 화체설이 생겼고 그들은 지금 다른 신조보다 이 사상을 위해서 더욱 맹렬하게 싸운다.41 이 공간적 임재를 처음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의 본질과 혼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허구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떡이 재료가 되어 몸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형상 밑에 숨기 위해서 떡의 본질을 없애버리신다는 것이다.42
그러나 그들이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의 일치한 의견까지43 멸시하고 저 괴물을 나타낼 정도로 무지하고 우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는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가끔 "변화"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표징의 본질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비에 바친 떡은 보통 떡과는 훨씬 다르며 지금은 떡이 아닌 무엇이라는44 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성찬이 지상적인 부분과 천상적인 부분으로 성립된다고 도처에서 분명하게 선언하며 지상적인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떡과 포도주라고 해석했다.
우리의 논적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그들의 교리를 확인하기 위한 지지를 고대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주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반대하기 위해서 고대를 내세운다. 화체설이 대두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더욱 순수한 교리가 아직 강성하던 더 좋은 시대뿐만 아니라  순수성이 다소 부패했던 시대에도45 화체설은 알려지지 않았다.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이 떡과 포도주란 것을 분명한 말로 인정하지 않는 고대 저술가는 한 사람도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신비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간혹 여러 가지 칭호로 그 떡과 포도주를 구별한다. 성별 할 때 비밀한 변화가 생겨서 이제는 떡과 포도주가 아닌 무엇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는 것은 내가 방금 말한 바와 같다.4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물질적인 요소들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고, 이제 그 요소들은 단순히 배에 들여보내기 위한 보통 음식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다. 요소들에서 영혼을 위한 영적 양식과 음료가 제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가 있다면 한 가지 물건이 다른 물건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전과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동의한다. 만일 그들의 상상에 일치시키려는 것이라면 나는 세례에서는 어떤 변화를 느끼는지를 문의 할 것이다. 이는 교부들도 여기서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썩을 요소에서 영혼을 영적으로 씻는 일이 생긴다고 말하면서도 물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은 주의 만찬에서 "이것은 내 몸이라"(마 26 : 26)고 하신 것과 같은 일이 세례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뜻이 분명한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는 말에 있는데, 이 변화라는 말의 뜻은 성찬에서나 세례에서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궤변으로47 자기의 공허함만 나타내는 자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그러나 성찬에서 표현되는 진상에 대한 살아 있는 형상이 죄적인 표징에 없다면 성찬의 의미는 부적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자기의 살이 양식이 된다는 것을 외형적인 상징으로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떡이 아닌 떡의 빈 외형만을 내주셨다면, 우리를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추 또는 비교는 어디에 있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의 형태를 먹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세례에서 물의 형상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는 씻긴다는 확실한 보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런 거짓된 외형은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상의 표징이 하늘의 것과 동일하지 않으면 성례의 본질은 말살된다. 따라서 만일 진정한 떡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비의 진리는 우리에게서 소멸된다. 다시금 나는 반복한다.48 성찬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약속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약속(요 6 : 51)의 볼 수 있는 증거에 불과하므로, 보이는 떡은 영적인 떡을 나타내는 중개물의 직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려고 주시는 모든 은혜를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떡의 외형만 있고 떡의 진정한 본성은 남아 있지 않는다면, 바울은 왜 우리가 모두 한 떡에 참여하는 한 떡과 한 몸이라고 추론했는가?(고전 10 : 17)

 

15. 화체설의 근거와 이론

그들이 먼저 오류에 미혹되지만 않았더라면 사탄의 간계에 속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싸여 사람의 입으로부터 위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공상을 하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즉 그들 사이에서는 성별은 요술의 주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떡이 성물이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마치 세례의 물은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 첨가될 때에 즉시 우리를 위해서 전과 다른 것으로 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비슷한 다른 성물의 예를 보면 이 점이 더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물은(출 17 : 6) 성찬의 포도주가 우리에게 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조상들에게 표시하는 표이며 표징이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고전 10 : 4). 그리고 그곳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과 가축도 물을 마시는 곳이었다. 예를 통해서, 지상적인 요소들을 영적으로 사용할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 요소들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이 약속을 확인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자주 반복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들어올리려고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부르기는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떡 밑에 숨어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완고한 생각으로49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공간을 뛰어넘어 하늘 저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더 유해한 대책으로 시정하려고 한다. 지상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요구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 이미 더 조잡한 표현이 사용되었으나 화체설은 아직 인정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 신비에서는 영적인 실재가 떡과 포도주에 결합되었다고 모든 사람이 말했다.50
용어에 대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대답을 하노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문제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해서 비록 뱀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전과 같이 지팡이였다고 한다(출 4 : 2-4, 7 : 10). 그러므로 떡은 새로운 본질이 되지만 오용에51 의해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며 이것을 합당치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 찬란한 이적과 그들이 조작한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환상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 또는 근사점을 발견하는가? 마술사들은 술법을 사용하여 자기들도 자연 질서를 초월한 신적 능력으로 피조물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애굽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모세가 나서서 그들의 속임수를 들춰내고 그의 지팡이가 다른 모든 지팡이를 삼키게 함으로써 그 무엇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자기편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출 7 : 12). 그러나 그때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현재의 경우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조금 지나서 지팡이는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왔다(출 7 : 15). 그뿐 아니라 그 일시적인 변화가 본질적으로 생겼는지 혹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언급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예언자는 그것을 뱀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변화가 아닌 것을 변화라고 암시하는 것같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마술사들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인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52 이것과 바울의 말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예컨대 "우리가 떼는 떡"(고전 10 : 16), "이 떡을 먹으며‥‥‥때마다"(고전 11 : 26),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행 2 : 42) 및 기타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 애굽 사람들의 눈이 마술사들의 주문에 속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의 경우는 사태가 더욱 의아스럽다. 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시고 그 뱀을 다시 지팡이를 만드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천사들에게 육체를 입히셨다가 잠시 후에 다시 벗기시는 것과 같이 쉬웠다. 만일 이 신비의 성격이 같든지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들의 해결책에 그럴 듯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외형적인 상징의 진정한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이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진실하고도 합당한 약속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확실하다.
그리고 한 가지의 오류는 다른 오류를 생기게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화체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을 너무도 어리석게 곡해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싫다. 예언자는 그의 떡 속에 나무가 들어 있다고 불평함으로써(렘 11 : 19) 잔인한 원수들이 그의 떡 맛을 쓰게 만들었다는 뜻을 표시한다.53 다윗도 그의 떡이 쓸개로, 그의 음료가 식초로 더럽혀졌다고 비슷한 비유로 한탄한다(시 69 : 21).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비유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주장하려고 하며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는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며 수치를 묻어 줄 망정, 예언자의 참 뜻에 반대하는 원수로서 싸움을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치욕을 더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몸의 편재설을 편협한 문자적 해석이라고 반대하는 이유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관한 견해를 설명한다. 16-31)

16. 반대론

다른 사람들은 표징과 표시되는 것과의 사이에 유추가 없으면 신비의 진리는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성찬의 떡은 참으로 지상적인 썩을 요소의 본질이며, 그 자체 내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 밑에 그리스도의 몸이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54
만일 그들의 말이, 진상은 표징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이 신비에서 떡이 제시될 때 몸도 함께 제시되는 것이라는 뜻이라면55 나는 강하게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떡 속에 둠으로써 몸의 본성과 반대되는 편재성이 몸에 있다고 하며 또 "떡 밑에"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므로, 우리는 숨겨져 있는 궤변을 잠깐 폭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문제 전체를 정식으로 논하지 않고 다만 적당한 곳에서56 곧 하게 될 논의의 기초만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이지 않고 무한하며 떡 밑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몸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올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색깔로 숨기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간적 임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은 공간적인 결합과 접촉이나 조잡한 형태의 포괄 관계가 아니면 살과 피를 나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한번 경솔하게 생각한 오류를 완강하게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가진 일이 있는 유일한 부피는 하늘과 땅만큼 크고 넓다고 자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태에서 아기로 나서 자랐으며 십자가에 달렸다가 무덤 속에 계셨는데, 이것은 출생과 사망과 그 밖의 사람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해서 일정한 섭리에 따라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또 부활하신 후에 그의 평상시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이셨으며 (행 1 : 3, 고전 15 : 15) 하늘로 올리우셨고(행 1 : 9, 눅 24 : 51, 막 16 : 19) 승천 후 마지막으로 스데반과(행 7 : 55) 바울에게(행 9 : 3) 보이셨는데, 이것도 그가 하늘에서 왕이 되신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같은 섭리에 의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57 이것은 마르키온을 지옥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58 그리스도의 몸이 이런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유령이나 환영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교묘한 핑계를 사용한다. 성찬에서 주시는 몸은 영광과 불멸의 몸이며, 따라서 몸이 여러 곳에서 성찬 밑에 포함되어 있거나 어디에도 없거나 또는 아무 형태도 취하지 않더라도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날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어떤 종류의 몸이었는가? 잠시 후에 내주시려는 죽을 성질의 몸을 주셨다는 것은 그때 하신 말씀이 증거하지 않는가? 그들은 그가 이미 산상에서 세 제자가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마 17 : 2) 말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광채를 보이신 것은 제자들에게 영생 불사의 맛을 미리 보이시려는 뜻이었다. 또 그들은 거기서 이중의 몸을 보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영광으로 장식된 그리스도의 몸을 본다. 그러나 처음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분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맞으며 기운이 다해(사 53 : 4) 나환자같이 부끄럽게 쓰러질 시간이 임박했었다(사 53 : 3참조). 그때에는 전혀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한 곳에서는 죽을 것, 낮은 것으로 보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불멸하는 또 영화된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그것은 마르시온에게 큰 창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들의 견해가 옳다면 같은 일이 매일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상징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고 그들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59 그러나 이런 해괴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수치를 전혀 수치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건드리지도 않는 우리를 공격하며 무서운 모욕을 가한다.

 

18.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만일 그들이 주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고착시키고자 한다면,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것이다. 떡은 잔과는 별개로 제시되므로 떡에 붙은 몸은 잔에 있는 피와 나누어질 것이다. 그들은 몸이 떡 속에 있고 피가 잔에 있어서 각각 차지하는 공간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몸과 피가 서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감출 도리가 없다.
병재( 在)에 의해서 피는 몸 안에 있으며 몸은 피 속에 있다고60 하는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전혀 불합리하다. 몸과 피를 포함한 상징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눈과 마음을 가진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가서 그리스도 나라의 영광 속에서 그를 찾는다면, 상징들이 완전하신 그에게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떡이라는 상징 하에 그의 몸을 먹게 되며 포도주라는 상징 하에 그의 피를 따로 마시게 되어 결국에는 그를 완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그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몸으로 승천하셨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즉 아버지의 권능과 존귀와 영광으로 다스리신다. 이 나라는 공간 가운데 위치가 한정되거나 경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어디서든지 뜻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며 아무런 방해도 받으시지 않는다. 권능과 힘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시며 자신의 백성 중에 항상 계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안에 계시고 마치 육체로 계시듯이 그들을 지탱하고 강화하며 살리며 해를 받지 않게 하신다. 요약하면,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며 자신의 영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19.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61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62(이렇게 하게 될 경우 분명히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끝으로, 그의 키를 낮게 하거나 여러 조각을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 분배하거나 그가 하늘과 땅에 가득한 무한한 부피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진정한 인성에 배치된다. 우리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제한이 있다. 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해서는 안 된다-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세상의 썩을 요소들 밑에 두거나 지상의 피조물에 고착시킨다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⑵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한하다고 하든지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시다고 한다면 이 둘째 제한을 어기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만 제거한다면,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표시되는 바와 같이 주의 몸과 피를 참으로 또 실질적으로 나눠 가지는 일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신자들은 상상력이나 이해력만으로 받지 않고 다름 아닌 영생을 위한 영양으로서 본체를 즐긴다는 뜻을 표현해야 한다.
사탄의 무서운 마술이 여러 사람의 정신에 착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세상이 견해를 싫어하거나 편견 때문에 변호의 길이 막힐 까닭이 없다. 확실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모든 점에서 성경과 일치한다. 불합리한 점, 막연한 점, 애매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진정한 경건과 건전한 교훈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거슬리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다만 궤변가들의 무지와 야만성이 교회를 지배한 시대에는 이런 밝은 광명과 계시된 진리가 부당한 압박을 받았다. 지금도 사탄은 말썽꾼들을 통해서 온갖 비방 중상으로 진리의 위엄을 더럽히려고 이 문제에 유달리 애를 쓴다. 따라서 이것을 더욱 신중하게 주장하며 변호할 필요가 있다.

 

20. 말씀으로 제정하심

그런데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행동 자체를 논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특히 여기에서 가장 그럴 듯한 항의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씌우는 부당한 오명을 벗기 위해서 먼저 그 말씀부터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세 복음서 기자와 바울이 기록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마 26 : 26, 막 14 : 22, 고전 11 : 24 참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 : 26),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 11 : 24). 잔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 : 28, 막 14 : 24). 그러나 바울과 누가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한다(고전 11 : 25, 눅 22 : 20).
화체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대명사는 떡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성별은 말씀의 내용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대명사가 가리킬 수 있는 본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63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에 대해서 양심적이라면,6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그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허구는 떡이던 것이 지금은 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집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을 자기의 몸이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떡을 집으셨다. 그러므로 그 떡을 아직 보이고 계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그 형상에 옮기는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est"("몸이다"의 "이다")라는 말을 "본질이 변화된다"는65 뜻이라고 해석해서 더욱 무리하고 난폭하게 왜곡된 주해로 도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체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다"를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언어에서도 들은 일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에 떡을 남겨 두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매우 다르다. 그들 중에서 온건한 편인 사람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고수하지만 후에 그 엄격한 태도를 버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떡 안에 그리고 떡 밑에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66 그들이 주장하는 정체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말했고 앞으로도 곧 더 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다만 말씀만을 논하려는데, 그들은 그 말씀에 의해서 떡은 몸의 표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든 은유를 피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게 지적하신 말씀에서 그들 자신의 아주 다른 용어로 비약하는가? "떡은 몸이라"고 하는 말과 "몸은 떡과 함께 있다"고 하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떡은 몸이라"는 단순한 발언은 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난관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더 대담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말한다면 떡은 몸이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문자론자임을67 확실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떡이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그런 분명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그들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의 전체가 제공된다고 모든 사람이 일치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하고 썩을 요소에 대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모독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말과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는 말은 서로 뜻이 같으냐고 묻고자 한다. 다르다고 인정한다면(그들은 싫더라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디가 다르다는 것을 대답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즉 떡은 성례적인 의미에서68 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일반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문법으로 검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나는 모든 문자 고수파에게, 누가와 바울이 잔을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부를 때(눅 22 : 20, 고전 11 : 25) 그들은 앞 문장에서 떡을 몸이라고 부를 때와 같은 뜻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신비의 한 부분에 대해서 품은 존경심을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똑같이 품었기 때문이다. 말이 간단하면 뜻이 막연하고, 더 긴 이야기가 뜻을 더 잘 밝힌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자주 한 마디 말에서 떡이 몸이라고 추론할지라도 나는 여러 마디 말에서 떡은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적합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바울과 누가가 한 것보다 더 충실하고 확실한 해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미 주장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감소하고 싶지 않다.69 그들이 말에 대해서 맹렬하게 싸우는 미련한 고집을 논박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바울과 누가의 권위에 의해서 나는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그의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생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싸우는 것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하므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감히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없노라고 아무리 외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는 이유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는 타당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우는 이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확인된 언약은, 우리를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저 비밀한 교통이 그 언약에 결합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확고한 말씀의 비유적 해석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본체와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본체의 이름이 비유적으로 상징에 주어졌으나 매우 적절한 유추가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풍유와 비유를 말하지 않겠다. 내가 도피처를 찾으며 목전의 문제에서 이탈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표현을 일종의 전유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신비한 일들을 논할 때 보통 전유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예컨대 "할례는 언약이라"(창 17 : 13), "어린양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출 12 : 11), "율법의 희생은 속죄라"(레 17 : 11, 히 9 : 22)와, 끝으로 "물이 흘러나온 광야의 반석은"(출 17 : 6), "그리스도시라"(고전 10 : 4)라는 표현들은 뜻을 옮겨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이름을 옮길 뿐 아니라 보이는 표징의 이름도 표징이 의미하는 것에 붙인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으며(출 3 : 2) 언약궤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르고(시 84 : 8, 42 : 3)70 비둘기를 성령이라고(마 3 : 16) 부른 것과 같다. 상징은 그 의미하는 것과 본질이 다르지만 후자는 영적이며 하늘의 것이요 전자는 물질적이며 지상적이므로, 상징은 성별에 의해서 대표하게 된 그 본체를 상징하는 단순한 빈 표일 뿐 아니라 그 본체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본체에 붙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창출한 상징들이 목전에 있는 것의 표지라기보다는(상징은 목전에 있는 것을 잘못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목전에 없는 것들의 형상이면서도 없는 일들의 명칭으로 장식되는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들은 그것들이 항상 명확하고 틀림없이 의미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차용하며 이것들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심히 유사하며 근사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를 "비유파(tropists)"71라고 부르는 등 불쾌한 재담들을 많이 덮어씌우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 그들은 우리 성례에 관한 어구들을 성경의 일반 어법에 따라서 설명했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만, 성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이 전유에서 일종의 공통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영전 음료가 솟아난 반석을 그리스도였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이(고전 10 : 4)-반석은 보이는 표징이었고 그 밑에 영적 음료가 참으로 있었으나 영적 음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을 떡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떡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우리가 참으로 먹도록 제시하실 때 사용하신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가 새로 안출된 것이라고 경멸하는 사람이 없도록, 어거스틴이 같은 방법으로 느끼며 말한 것을 소개하겠다. "만일 성물들이 그 표시하는 사물들과 유사점이 없다면 그것은 전혀 성물이 아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사점으로 인하여 성물은 자주 실물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성물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대표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피인 것과 같이 믿음의 성물은 믿음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비슷한 구절이 많지만 일일이 그것을 열거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것이다. 이는 이 한 구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들은 저 거룩한 분이 에보디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동일한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성례에서 전유가 자주 또 보통으로 사용된다고 단정할 때 성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은 경박한 회피다. 이 회피를 인정한다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을 추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동물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으므로 소와 말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논법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거룩한 분이 다른 곳에서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이상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의 표징을 주셨을 때 그것을 그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으셨다고 한다. 또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내력은 놀랍다. 이는 자기의 몸과 피의 형상을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는 잔치에 유다를 부르셨기 때문이다"72

 

22. "이다"라는 말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모르는 고집 불통의 사람이 "이것은‥‥‥이다"73라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이 신비는 다른 모든 신비와 다르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쉽다. 그들은 이 연결 동사는74 강조하는 힘이 있어서 비유적 표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떡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75이라고 부르는 곳에도(고전 10 : 16) 이 연결 동사가 있다. 그러나 참여는 몸 자체와는 다르다.
참으로 성물들이 고려되는 곳에는 거의 같은 말이 나타난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est의 미래형)"(창 17 : 13),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76이니라"(출 12 : 11, 12 : 43 참조). 요약하면, 바울이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est의 완료형)"고 할 때(고전 10 : 4)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는 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보다 강조하는 힘이 적은가?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est의 과거형)"고 말할 때(요 7 : 39)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계시다")의 힘은 어떤 것인가? 만일 그들이 자기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존재하기 시작하신 것같이 그의 영원한 본질이 파괴될 것이다. 끝으로,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est의 부정형) 한(딛 3 : 5)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를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세례가 분명하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2 : 12) 그들을 가장 강력하게 논박한다. 그는 사람의 몸과 비교한 다음에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첨부한다(고전 12 : 12).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체들에게 있는 독생자를 의미한다.
이 정도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선전하지만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그런 중상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들보다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다룬다. 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완고한 태도를 옹호하는 구실을 주기만 하면 그 말씀의 참 뜻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들의 안이한 확신이 보여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검토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입술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인간적 감각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증스럽게 교만을 부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비난이 얼마나 편파적인가 하는 것은 대체로 이미 밝혔고 또 앞으로 더 밝히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지시하실 때 즉시 응답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정한 뜻을 연구하는 것이 죄냐 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23. 순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 선량한 선생님들은 학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문자에서 조금이라도 탈선하는 것을 금지한다.77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을 "용사"라고 부를 때에(출 15 : 3)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너무도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을 사람과 비교해서 한 것이라고 믿는다.
참으로 고대의 신인 동형 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이 정통 교부들을 괴롭힌 것도 오직 이 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컨대 "하나님이 보신다"(신 11 : 12, 왕상 8 : 29, 욥 7 : 8 기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민 11 : 18, 삼하 22 : 7, 왕하 19 : 28 기타), "그의 손을 펴셨다"(사 5 : 25, 23 : 11, 렘 1 : 9, 6 : 12 기타),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사 66 : 1, 마 5 : 35, 행 7 : 49)고 하는 어구들을 열심으로 모았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몸을 빼앗는다고 항상 외쳤다.78 이 원칙을 인정한다면 한정 없는 야만적인 사상이 믿음의 빛을 덮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 광신자들이 성경의 일점 일획을 남기지 않고 들춰내서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주장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들은 어떤 해괴하고 어리석은 말인들 하지 않을까 ?
반대론자들은, 역경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위로를 준비하신 그리스도께서 막연한 말씀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는 사실상 우리의 주장을 지지한다. 떡은 몸의 상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하신 것은 비유라는 것을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런 해괴한 일에 반드시 마음이 어지러워 졌을 것이다. 요한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제자들은 조금만 난해한 문제에 부딪혀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시겠느냐고 서로 물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도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요 14 : 5-8, 16 : 17), 그렇다면, 모든 이성이 거부하는 것 곧 자기들이 보는 곳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떡 밑에 포함되어 있다는 불합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 떡을 먹음으로써 찬성의 뜻을 표명한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와 같은 뜻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이름이 표징에 옮겨진다는 것을 즉, 성물들에는 드물지 않은 이 일을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와 같이 제자들에게도 확실하고 분명한 위로가 되었는데 그것은 수수께끼에 가려진 위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해석을 듣고 뒷걸음질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이 마귀의 홀림에 빠져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어려운 수수께끼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비유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만일 우리가 이 어구를 정확하게 고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잔과 떡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떡을 몸이라고 부르시고 포도주를 피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혼동된 반복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과 피를 서로 가르는 구분이다. 사실 떡과 같이 잔에 대해서도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며, 반대로 떡을 피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만일 이 상징들을 채택한 목적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나는 물론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아무리 몸을 빼려고 해도, 떡이 피며 포도주가 몸이라는 이 불합리가 항상 그들의 오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들은 떡과 몸은 서로 다른 물건임을 인정하면서,79 한 쪽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다른 쪽을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옷과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옷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옳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모욕을 주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미친 듯이 왜곡하며 혼동한다는 것과 우리는 충실하고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우리는 실지로 증명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에게 불어넣고 있으니, 이 궤변가들이80 얼마나 부당한 일을 우리에게 하는지는 독자들이 쉽게 판단할 것이다.

 

24. 우리의 해석은 이성에 지배되었다고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그러나 부정직하다는 수치를 완전히 씻어버리려면 또 한 가지 비난도 말살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의 이성에 매여서 자연의 질서가 허락하며 상식이 명령하는 것밖에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다고81 호언장담한다. 이런 사악한 중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친 주장을 보라고 권고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이 신비를 인간의 이성을 표준으로 측정하거나 자연 법칙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로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지만 우리의 몸은 떡과 포도주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과학에서 배웠는가를 나는 묻는다. 영혼을 살리는 이 힘은 어디로부터 육체에 오는가? 누구든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기뻐하는 일도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주장을 맛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밀한 힘을 경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선량한 열성가들은 자기들을 위한 기적을 조작해서는 그 기적이 없어지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도 사라지게 한다.
나는 내 교리의 의도를 성실하게 생각하라고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하고자 한다. 나의 주장은 상식에 의존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날개를 타고 이 세상을 초월한 다음에 하늘을 향해서 높이 솟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살과 피의 본질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외형적인 상징과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이 간단한 말에 포함된 많은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우둔하다는 정도를 넘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태어나 죽음을 당한 살에서 우리의 영혼이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을 빌린다는 것 이상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하늘과 땅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그 멀고먼 거리를 넘어 서로 연결될82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되어,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어느 정도로 국한시키려고 한다는 추악한 거짓말로 우리에게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은 미련한 오해를 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궁색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가 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다고 단정한다. 죄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히 4 : 15, 2 : 17 참조). 우리의 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 자체의 일정한 부피를 가졌고 한 곳에 있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같은 살이 여러 다른 장소를 점유하며 아무데도 없으며 따라서 부피나 형태가 없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말한다. 미친 사람이여, 왜 그대는 하나님의 권능이 살을 동시에 살이 되게 하며 또 살이 되지 않게 하라고 요구하는가? 그대는 하나님께서 빛을 동시에 빛과 암흑이 되게 하시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은 빛이며 암흑은 암흑이고 살은 살이기를 원하신다. 물론 원하실 때에는 빛을 암흑으로 만드시며 암흑을 빛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빛과 암흑이 다르지 않기를 요구한즉 그대는 하나님의 지혜의 질서를83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살은 살이고 영은 영이어야 한다. 만물은 각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와 조건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의 조건은 일정한 장소에 있어서 크기와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을 취하셨으며,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살에 부패하지 않는 성질과 영광이 주어졌고 그 살에서 자연과 진리가 제거되지 않았다.84

 

25. 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밝힌 말씀이 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85 즉 말씀의 뜻을 밝히는 해석의 은사를(고전 12 : 10) 교회에서 추방하는 권리를 우리가 그들에게 허락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옛날 신인 동형 동성론자들이86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던 때나 마르키온과 마니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또는 유령 같은 몸을 생각하던 때와 같은 말씀이다. 이런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려고 했다. 예컨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 : 47). 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 : 7)라는 말씀을 인용했다.87
그러나 이 대식가들은 그들 자신의 두뇌가 조작한 괴물에 의해 자연 질서가 온통 뒤집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권능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상상한 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보이지만 땅에서는 무수한 떡조각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는 추론을 하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에서 주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신체적으로 먹는다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에 끌려서 성경 전체가 큰 소리로 반대하는 이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조금이라도 감소한다고 하는 비난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권능에 최고의 찬양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고 비난하며, 그리스도의 입으로 약속된 일은 상식으로는 믿기 어렵다고 해서 배척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는 전에 말한 것을 반복한다. 믿음의 여러 가지 신비에서 우리는 상식의 인도를 받지 않고, 배우겠다는 고요한 태도와 온유한 정신으로 야고보가 교훈한 바와 같이(약 1 : 21) 하늘에서 내련 주신 교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문제에서는 우리가 유익하고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혀 생각하시지 않은 기적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 공상에서 여러 가지 추악한 불합리가 생겨날 때에, 그들은 이미 경솔하게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의 심연에 뛰어들어 이 방법으로 진리의 빛을 끄려고 한다. 여기서 그들의 다음과 같은 교만하고 괴팍한 태도가 생겨났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방밑에 숨어 계시는가를 알고자 하지 않고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중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연구함으로써 성경 전체와 같이 이 구절에 대해서도 건전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
처음에 언뜻 생각난 것을 덮어놓고 경솔하게 붙잡는 변태적인 열성을 우리는 취하지 않는다. 도리어 부지런하게 명상한 후에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시는 뜻을 받아들인다. 이 뜻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 반대되는 모든 지상의 지혜를 내려다본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 뜻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도 항의하지 못하게 하며 그 교만을 꺾어 감히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했다. 성경에 그다지 통달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우리의 설명은 성경의 일정 불변한 용법에 비춰볼 때 성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모두 안다.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본받아,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눅 1 : 34) 묻는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6.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제의한 교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연역되었으며, 그 말씀의 권위를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경건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될 것이기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이 점도 밝히겠다. 부활하신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며88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보관되어 머무신다는 것은(행 3 : 21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증명하는 구절들을 거만하게 회피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겠다(요 14 : 12,28, 16 : 7), 세상을 떠나시겠다(요 16 : 28)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은 떠나신다는 것은 죽을 성질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89 그러나 이런 논법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과 같이 자기의 부재중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령을 대신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부재중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을 생명의 상태를 취하려고 하늘 영광에서 다시 내려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반대 현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보내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육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항상 이 세상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마 26 : 11, 요 12 : 8).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자기가 항상 가난하거나 가련한 상태에 있거나 이 짧은 생명의 욕구에 예속되지 않으리라는 뜻을 말씀하신 데 불과하다는 것같이, 이 말씀을 깨끗이 말살했다고 생각한다.90 그러나 이 구절의 전후 관계는 분명히 이런 해석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곤궁이나 빈곤이나 지상 생활의 가현성이 문제가 되어 있지 않고 경배와 영예가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름을 부은 것을 제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낭비이며 거의 사치에 가까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낭비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그런 영예를 받도록 항상 함께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 26 : 8-11)
그리고 어거스틴은 조금도 애매 모호한 점이 없는 말로 우리의 설명과 같은 설명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체의 임재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20). 그러나 말씀이 입으신 육에 관해서는-처녀에게서 나시고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셨다가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놓였다가 부활로 나타나신 그 육에 관해서는-'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왜? 신체적인 임재로 40일 동안 제자들과 교제를 가지셨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두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행 1 : 3,9). '그가‥‥‥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 : 6). 그는 하늘에 올리우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막 16 : 19). 그러나 그는 여기에 계신다. 그의 위엄의 임재는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 1 : 3). 그의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항상 우리는 그를 모시고 있으나 육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옳다. 교회는 육의 임재에 따라서는 그를 수일 동안 모셨을 뿐이며 지금은 믿음으로 그를 가졌으며 눈으로는 볼 수 없다."91
여기서 어거스틴은(역시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사이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혜 안에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는 놀라운 일을 포함시킨다. 다만 우리는, 이 참여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물질적 요소 밑에 포함되어 있는 가상한 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만지며 볼 수 있는 살과 뼈를 가지셨다고 증거하셨다(눅 24 : 39, 요 20 : 27).
또 "떠나간다"와 "올라간다"라는 말들은 떠나며 올라가는 것같이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실지로 그 말에 표현된 대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하늘의 일정한 구역을 한정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이것이야말로 들추어내기를 좋아하는 무익한 질문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92

 

27. 위에서 말한 올라간다는 뜻

그러나 우리는 왜 "승천"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는가? 이 말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하늘은 그리스도의 지배의 위엄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천 자체의 모양은 어떠했는가? 바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높이 들려 올라가시지 않았는가? 복음서 기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워 가셨다고 하지 않는가?(행 1 : 9, 막 16 : 19, 눅 24 : 51) 이 영리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것을 신자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보는 데서 구름 가운데로 들려 가셨다고 말한다. 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임재를 우리가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가 일순간에 사라지시거나 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시기 전에 구름이 그를 싸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공중으로 높이 들려 올라가시며 구름이 그의 아래 있음으로써(행 1 : 9) 다시는 그를 땅 위에서 찾을 수 없으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우리는 그의 주소는 이제 하늘이라고 추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도 하늘로부터 오실 그를 기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빌 3 : 20). 그러므로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경고하며, 하늘로 올린우신 이 예수는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다(행 1 : 11).
여기서도 건전한 교리의 원수들은 한 미봉책을 강구해서는 그것을 영리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땅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백성 사이에 보이지 않게 계시며, 그 때가 되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시리라고 생각한다.93 이것은 저 천사들은 이중의 임재를 암시했으며 단순히 제자들을 승천의 목격자로 만들어 아무 의심도 남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천사들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그대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그는 그의 하늘나라를 되찾으셨으므로, 이제부터 그대들은 그가 세상에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하늘을 독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그의 곁으로 모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8. 어거스틴의 증언

그러나 이 기형적인 교리의 수호자들은 고대 저술가를 특히 어거스틴의 시인94에 힘입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완고한 시도를 간단하게 폭로하겠다. 그들은 박식하고 경건한 분들의 글에서 증거를 수집했다.95 나는 남이 이미 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원하는 사람은 그분들의 노작에서 그러한 것을 찾도록 하라. 나는 이 문제에 관련된 어떤 자료도-어거스틴의 글이라도-모으지 않고, 몇 가지 증언만으로 그가 전적으로 우리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96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즉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희생 제물이 분배된다는 생각이 그의 저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같이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인데, 그는 그것을 "감사" 또는 몸의 성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뜻으로 "살"과 "피"라는 말들을 썼는가를 구태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물들은 그 의미하는 것과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그 이름을 믿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몸의 성물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 자신이 설명한다. 잘 알려진 다른 구절도 이 설명과 일치한다. "주께서는 표징을 주셨을 때에, 서슴지 않고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 떨어져 입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기록했다고 다시 항의한다. 물론 그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며 그는 이 두 가지 말을 서로 연결시킨다. 이 신비가 실행된 후에 떡은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그의 발언은 이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이 일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행할 때 기적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일이라고 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의 논적들이 경솔하게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신비로운 떡을 제자들에게 내주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손에 들고 계셨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유사성을 표시하는 부사 "이를테면"을 넣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빵 속에 참으로 또 진실로 들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밝힌다. 물론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공간 내의 위치를 빼앗긴 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데도 없으므로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능을 행사하시는 성찬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구차한 궤변이다. 그리스도의 살에 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이 거룩한 분은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살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으나 그 본성은 제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이 살의 형태로 각처에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할 때 그의 몸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반드시 각처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위격이며 둘이 다 한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며, 사람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하늘에 계신다." 만일 그가 논한 교리에 반대되는 일이 성찬에 있었다면, 이 중대한 성찬의 신비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을까? 그러나 조금 뒤에 있는 말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성찬도 이 일반적인 주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전적으로 각처에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즉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몸으로서 하늘의 어느 곳에도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연합시키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담겨 있어야만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실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유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표징을 통해서, 세례의 성례를 통해서, 성단의 양식과 음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표시하는 상징가운데 그가 미신적인 의식을 넣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의 임재와 십자가의 표징을 비교할 때 그는 두 몸을 가진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밝힌다. 하늘에 보이게 앉아 계시면서 떡 속에 비밀히 숨어 계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가 곧 뒤에 첨가한 것을 보면 된다.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고, 살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옳다(마 26 : 11).
그들은 그가 곧 첨가한 말이 있다고 반박한다.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 : 20)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서 그들은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몸과 항상 대립되는 권위에 한정되었고, 살은 분명히 은혜나 권능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영적으로 함께 계시기 위해서 자기의 신체적 임재를 철회하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에는 그가 살의 본질과 성령의 권능을 구별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어거스틴은 자주 같은 종류의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과 건전한 교훈의 표준에 따라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신체적으로도 계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도 그들에게 와서 계실 것이며 세상에 있는 교회 전체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리라고 하셨다"(마 28 : 20, 요 17 : 12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신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구원하기 시작하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영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신체적으로는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 "신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임재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신적 권능을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우리 위에 부어 주신다는 것을 밝힌다.

 

2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임재라는 속임수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데, 이제부터 그들이 얼마나 그 속에 잘 숨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리스도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말을 그들은 성경에서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신이 건전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가면 밑에 숨어 있지 않다면 성찬 때에 그 몸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과 우리와의 논쟁점이다. 그것은 결코 한 원칙으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본래 그대로 보이지만 성찬에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립되느냐 하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베드로의 증거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은 그를 마땅히 받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행 3 : 21).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공간의 각처에 계시나 형태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영광의 몸의 본성으로서는 잘못이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모든 경건한 사람이 당연히 가증하게 여기는) 세르베투스의 불건전한 생각이 따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삼켜졌다는 것이다.97 나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을 영화된 몸이 받은 한 은사라고 한다면, 몸의 본질이 말소되며 신성과 인성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에,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서 한 곳에서는 보이게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의 부피로 존재하는 몸의 본성은 어디 있으며 몸의 통일성은 어디 있는가? 터툴리안은 훨씬 올바른 주장을 했다. 즉 성찬식에서는 영적 생명의 담보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것이며 또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98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도 영화된 몸에 대해서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셨다(눅 24 : 39).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는 만질 수 있으며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살의 실재성을 증명하셨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살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조작한 특별 섭리란 것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주장하시는 뜻을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시므로 유령이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의 본성에 고유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을 제거한다면, 몸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어느 쪽으로 몸을 피하든 바울은 그들이 조작한 처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는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한다(빌 3 : 20-21).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특성들을 우리도 가지게 되어, 모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몸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심한 불합리를 믿을 우매한 사람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어느 공간에도 들어 있지 않는다는 특성을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육신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우리도 그와 공통된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우리의 육신으로 그와 함께 같은 영광에 참여하는 동참자와 동반자로 만드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을 취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보속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으로 수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부활하실 때에도 동일한 참 육신을 받으셨고, 그 육신을 하늘로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어느 교리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승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 우리가 부활하리라는 보증을 가지고 하늘로 가셨다는 것이다.99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이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부활하지 않으며 천국에도 올라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소망은 얼마나 무력하고 덧없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몸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의 부피와 형태를 가졌다는 것이 몸의 진정한 본성이다. 자, 이제 사람의 마음과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는 이 미련한 허구는 사라져라!

어떤 의도로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다고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결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상징에서 머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지상에서 철회하기를 원하셨고,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여인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금지하셨다(요 20 : 17). 마리아가 진정과 열성과 경외의 태도로 급히 주의 발에 입맞추려 했을 때,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까지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금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에서만 자신을 찾기를 원하셨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그는 후에 스데반에게 보이셨다고(행 7 : 55) 하는 그들의 항의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처소를 바꾸실 필요가 없이 그의 종의 눈에 여러 층의 하늘을 꿰뚫는 맑은 시력을 주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행 9 : 4).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닫힌 무덤에서 나오셨으며(마 28 : 6) 닫힌 문으로 제자들에게 들어가셨다고(요 20 : 19) 항의한다. 이 사실도 그들의 오류를 옹호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위를 걸으셨을 때에 물이 포장 도로와 같은 길을 제공한 것같이(마 14 : 25) 그가 가까이 가셨을 때에 단단한 돌이 길을 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의해서 돌이 옮겨졌다가 그가 통과한 다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 닫힌 문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딱딱한 물체를 통과하셨다기보다는 거룩한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셔서 비록 문은 잠겨 있었을지라도 놀라운 방법으로 돌연히 제자들 사이에 분명히 서 계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신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누가복음의(눅 24 : 31) 기사를 그들은 인용하지만 이것도 그들에게는 유익이 되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만 없어진 것이다. 같은 증인 누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을 때 주께서는 알아볼 수 없는 새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눅 24 : 16).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처소에 따라 다르게 만들며 그 자신과도 다르게 만든다. 요컨대 그들은 그렇게 상상함으로써 직접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인 말로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한 영을 만들어 낸다. 또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혀 반대되는 여러 가지 성질을 부여한다.2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이중이라는 필연적 결론이 발생된다.

 

30.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배척한다

보이지 않는 임재에 대해서 그들이 지껄이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무한성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을 것이며, 무한성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떡 밑에 넣어 두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각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떡 밑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저 편재성이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도입했다.3
그러나 성경의 확고하고 분명한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가 증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적인 몸의 한도에 따라 국한되어 있었다. 또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모든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전에 계시던 곳을 떠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마 28 : 20) 인용하지만 이 약속도 몸에 적용할 것이 아니다. 첫째, 항구적인 연결이 성립하려면 성찬 집행과는 별도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신체적으로 거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성찬의 떡 밑에 넣어 두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사납게 싸울 타당한 이유가 없다. 둘째, 문맥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의 살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고, 다만 제자들에게 무적의 원조를 약속하여 사탄과 세상의 모든 공격에 대항해서 그들을 보호하며 지탱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신 다음에, 그들이 주저하거나 또는 사명을 수행하더라도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지 않도록 그가 함께 계시겠다는 확약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들은 반드시 보호를 받을 것이며 아무도 이 보호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들에게 만사를 혼동시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모양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을까?
분명히 일부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부끄러운 무지를 폭로해서 큰 수치를 당할지언정 오류는 추호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카톨릭 교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오히려 용서할 수 있으며 적어도 과격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투쟁열에 취해서, 그리스도 안에는 양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육신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마치 양성의 결합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어떤 중간적 존재가 합성됐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유티케스가4 그렇게 가르쳤고 세르베투스도 그의 뒤를 따랐다.5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양성이 있지만 그 양성들은 각각 그 고유의 특징을 본래대로 유지하며 아무 손상을 받음이 없다고 분명히 추론한다. 그들은 유티케스가 당연히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부끄러워서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가 정죄된 원인을 무시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는 양성의 구별을 제거하고 위격의 단일성을 역설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사람을  또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들었다. 지금 그들이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오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혼합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 착란인가?
그들이 자기들 편을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 : 13),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 : 18). "속성의 교통"6을 멸시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거룩한 교부들은 오래 전에 속성의 교통이란 말을 만들어 유익하게 사용했다.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혔다고(고전 2 : 8) 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수난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육신으로 수난을 당한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는 또 하늘에 있는 인자였는데(요 3 : 13), 이는 육신을 따라 인자로서 지상에 살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늘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면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고 한다. 신성이 하늘을 떠나서 신체라는 감옥에 숨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은 비록 만물에 충만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해서 육체로 거하셨다는 뜻이다(골 2 : 9). 즉 본래대로 그리고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하셨다는 뜻이다.7 스콜라 학자의 상투적인 구별을 언급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는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8 이 발언의 힘을 스콜라 학자들 자신이 정직하게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라는 어리석은 공상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는 그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므로 항상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성찬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즉 그리스도 전체가 계시지만 완전히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판하러 나타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31.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에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비밀히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올리신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똑같이 즐길 수 있으리란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임재의 방법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이 올바른지는 독자들이 결정하라. 단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성찬에서 제거된다고 하는 중상모략은 그만 둬야 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32-34)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만일 누가 이 일이 어떻게 생기느냐고 문의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고상한 비밀이어서 나의 지성으로 이해하거나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고백할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한다기보다 경험한다.9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여 그 진리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 6 : 53이하). 나는 나의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먹게 한다. 거룩한 만찬에서 그는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그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며 마시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참으로 그가 친히 주시며 또 내가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위엄에 합당하지 않거나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양립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생각들만을 물리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으로 충돌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천국 영광에 들어가셔서(눅 24 : 26) 모든 지상적인 상태를 초월하셨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진정한 인성에 있어서 고유한 일들이 그의 인성에도 있다고 엄밀하게 밝힌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거나 이성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는 영적인 것이므로, 그가 교회에 대해서 역사 하시는 일을 이 세상의 이성에 예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 다른 신비들과 같이 이 신비도 사람이 집행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하는 일이지만 천상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10 몸의 임재는 이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임재인데, 이 임재는 강력한 권능과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부동의 확신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도 영생 불사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참으로 우리의 육은 지금 그의 영원 불멸의 살에 의해서 생명을 얻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영생 불사에 참여한다.

자기의 과장된 생각으로 이 한계를 넘는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으로 단순하고 평이한 진리를 흐리게 할뿐이다.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나와 함께 잠깐 신중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금 논하는 성례는 그 전체를 믿음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몸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 못지 않게 우리의 믿음에 풍성하고 훌륭한 양식을 먹인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혼과 혼합된다느니 우리의 영혼에 주입된다느니 하는 그들의 생각을11 배척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의 본질에서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으신다면-참으로 그의 생명 자체를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다면-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모든 성경 해석이 따르기를 요구하는(롬 12 : 3,6) 믿음의 유추는 확실히 이 문제에서 우리의 견해를 현저하게 지지한다. 평이한 진리에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의 표준을 따르고 있는가를 반성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요일 4 : 2-3). 이 사람들은 숨기거나 또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육신을 빼앗는다.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성찬 참여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중대한 해를 가하게 된다. 우리가 가르치고 고대 교회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신비의 능력이 과거 400년 동안을 당연히 받을 존경을 받았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이었을 것이다. 무서운 분쟁을 일으킨 여러 가지 추악한 오류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나12 지금이나 교회는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고 또 당하고 있다. 동시에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과장된 임재 양식을 주장한다.

그들은 마치 경건의 전체가 속담에 있듯이 "이물과 고물"이13 그리스도를 떡 밑에 가두어 두는 데 있는 것같이 미련하고 경솔하게 생각한 이런 주장에 대해서 떠든다. 일찍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가, 또 일찍이 흘리신 그의 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소유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우리도 즐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가장 중요한 일들을 보지 않고, 아니 무시하고 거의 매장하면서 이 한 가지 곤란한 질문 즉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떡 밑에 또는 떡의 형태 밑에 숨어 계시느냐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우리가 먹는 방법에만 주의한다고 함으로써, 영적으로 먹는데 대한 우리의 주장이 모두 참으로 또 실제로 먹는 것과는 반대된다고 거짓되게 떠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둠으로써 육적 방법으로 먹고,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라고 함으로써 영적 방법으로 먹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신자가 받는 유익 또는 효과만을 말한다고 하는 그들의 항의 또한 옳지 않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자신이 성찬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결과는, 그의 죽음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그의 피에 의해서 우리가 깨끗해지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가 하늘 생명을 바라보는 경지에까지 높여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 성찬이라는 롬바르드가 시작한 우매한 공상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비뚤어졌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형태들은 성물이고 본체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물이며 본체다. 그의 신비로운 살은 본체요 성물이 아니다." 또 그는 "상징된 또 포함된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의 살이다. 상징되었으나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신비로운 몸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리스도의 살과 거기에 포함된 효과적인 영양을 그가 구별한 데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살을 성물이라고 하며 심지어 떡 속에 포함되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류이다.

여기에서 성례전으로 먹는데 대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이 생겼다. 그들은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도 비록 아무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 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상상했다.14
그러나 성찬의 신비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 자체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똑같이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인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추론한다. 만일 생명과 힘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불신자에게 준다면 당연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부당하게 쪼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분명한 말씀이 반대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 : 56). 그들은 이 구절에서는 성례전의 먹음이 문제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면 반드시 유익을 얻는다는 과오를 그들이 반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반론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것을 먹은 후에 얼마나 오래 그것을 보존하고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들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으리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배은 망덕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이 감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한다. 물론 나도 그것을 인정하며, 악한 사람들이 이 신비의 권능을 말살하려고 아무리 전력을 다할지라도 그 권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공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적 양식을 제공하며 이 영적 음료를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먹고 어떤 사람들은 도도하게 거절한다. 거절을 당한다고 해서 그 양식과 음료가 본성을 잃어버릴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비록 맛은 없지만 역시 살이라는 비교에 의해서 그들의 견해는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과 함께) 바꿔 말한다면,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서 얻어갈 뿐이다.15 이와 같이 성찬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참으로 성찬의 진리성과 효과는 여전히 감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외형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간다.

만일 악인들이 썩을 떡 외에는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면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그들이 항의를 한다면, 이미 대답도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받는 일 자체에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그의 변함없는 선하심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사람들이 거절하는 것을 언제든지,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며 참으로 값없이 제공하신다. 그리고 온 세계가 범할 수 없는 성찬의 완전성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자들에게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가 굳은 바위 위에 떨어지더라도 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만 흘러내리는 것과 같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 완고한 마음으로 물리쳐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씨가 불 속에서도 싹이 틀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말이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겠느냐고 하는 그들의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고 했다.
또 그들은 씨가 가시덤불 속에서 싹이 났으나 가시나무에 기운이 막혀 죽어 버렸다는(마 13 : 7) 그리스도의 비유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인 믿음의 가치를 논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다를 베드로와 동등한 동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유는 도리어 그들의 오류를 논박한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씨는 길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모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하신다(마 13 : 4-5). 이것을 보면,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완고한 마음이 방해물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막는다는 결론이 된다.

성찬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신자가 우물에 인도되어(요 4 : 6-15 참조)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생명을 퍼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후에 더욱더 그와 함께 자라 마침내는 그가 하늘 생명에서 우리를 그와 완전히 결합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성찬의 존귀성을 훌륭하게 칭송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고전 11 : 27) 항변한다.16 그러나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곧 그들이 정죄당한 것은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의 보증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짓밟음으로써 이 신비를 모독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34. 불신자의 성찬 참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생각

사람의 불신이나 악의 때문에 성례에서 무엇이 빼앗기거나 그 상징하는 은혜가 말살되지 않는다는 교리는 고대 저술가들 중에서 특히 어거스틴이 주장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개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언을 이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그의 말을 인용해서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들은 예전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으면서도 성령의 권능이나 은혜의 효험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중하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 : 54,50,51), 즉 그는 보이는 성찬뿐만 아니라 성찬의 권능을 받는 사람이요 참으로 외형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는 사람이며 그리고 이로 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합일체인 본체의 예전적 상징은 주의 성만찬에서 제시되어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지만, 성찬이 상징하는 본체는 누가 참여하든 모두가 다 생명을 얻고 아무도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제시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본체"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은혜라고 부르며 또 이 은혜는 본체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궤변을 쓰는 사람이 없도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가 이런 애매 모호한 말들을 일소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는" 것 중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보이는 상징만을 받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모든 의혹을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이 떡을 위해서는 속 사람이 굶주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모세와 아론과 비느하스와 그밖에 만나를 먹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출 16 : 14이하). 왜 그들은 보이는 양식을 영적으로 이해했으며, 영적으로 주렸고 영적으로 맛보고 영적으로 배부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도 보이는 양식을 받는다. 그러나 성찬과 성찬의 권능과는 서로 다르다. 조금 후에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육신으로 또 보이게 그 몸과 피의 표징을 이로 씹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그는 보이는 표징과 영적으로 먹는 것과를 대립시5껜? 이 대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은 영적으로 먹지 않아도 예전적으로는 실제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그들의 오류가 반박된다. 또 어거스틴은 불경하고 불결한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먹는 보이는 행동 이외에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말 즉 다른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떡을 먹었으나 유다는 그리스도의 떡을 먹었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몸과 피에 참가하는 일에서 분명히 불신자들을 제외한다. 그는 다른 데서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떡을 유다에게 주셨으며 그것으로 그가 마귀에게 묶여 넘어간 것을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가? 그와는 반대로 사탄의 사자를 바울에게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완성하시지 않았는가?"(고후 12 : 7)참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바울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고전 11 : 29) 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떡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도 악하게 받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가를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하게 말한다. 입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부정하는 악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논할 목적으로(또 악인들은 예전적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기 0㎸漫?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일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지체와 창녀의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6 : 15).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실 때에(요 6 : 56), 그는 그의 몸을 예전적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그 뜻은 곧 그리스도께서 먹는 사람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꿔 말한다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내 몸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독자들이 예전적으로 먹는 것과 실제로 먹는다는 이 대립을 잘 생각한다면 아무 의심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언명한다. "그대의 입을 준비하지 말고 마음을 준비하라. 이 만찬은 마음을 위해서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받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안다. 우리는 적게 받으나 그것으로 마음의 영양을 얻는다. 그러면 양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여기서도 어거스틴은 악인들이 먹는 것을 보이는 상징에 제한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앙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친다. 다른 구절에서도 어거스틴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상징들에 참여한다고 명백하게 말한 다음에, 후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만일 그들이 본체 자체를 받는다면 그는 자기의 입장에 더 유리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또 다른 곳에서도 먹는 일과 그 유익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만일 성찬에서 눈에 보이게 받는 것이 참으로 영적으로 먹으며 영적으로 마시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모든 사람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몸을 보이라. 어거스틴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진상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예전적으로 먹을 때에는 불신앙 때문에 실제로 가는 문이 닫히며 그렇게 먹는 것은 보이게 또는 외형적으로 먹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먹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보는 이 몸을 너희는 먹지 않으며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 흘릴 피를 너희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한 성례를 명령하였으니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너희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바로 그 몸이 성찬에서 제공된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먹는 방법에 주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이미 하늘 영광 속에 영접되어 지금은 성령의 비밀한 힘에 의해서 우리 위에 생명을 불어 보내신다는 것이다. 나는 어거스틴의 글에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1榴?"성례에서"라는 말을 첨가해서 자기의 뜻을 설명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영적으로 먹는데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혹 반대론자들이 내가 어거스틴의 말을 너무 자주 인용한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서 그들이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서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17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에 의해서 상징된다는 것을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키릴루스도 같은 의견이었다는 것은 그의 말이 증명한다. "녹은 밀랍에 다른 밀랍을 부어서 완전히 섞는 것같이, 주의 살과 피를 받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권능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예전적으로만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또 실제로 먹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또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까닭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바위와 돌이 빗물을 받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배척한다. 35-37)

35. 물질 숭배를 배척한다

이 일을 앎으로써 어떤 사악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성찬에 집어넣은 물질 숭배에서18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논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된다."
우선 그들의 병재설이19 부정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려는가? 그들은 몸에서 영혼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고 역설하지만, 어떤 건전하고 바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들은 삼단 논법으로 깨끗하게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시고 그가 임재하시는 모양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양심이 좀더 엄숙한 느낌으로 불안을 느낀다면 그들은 그 삼단 논법과 함께 곧 해체되며 녹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책임 추궁을 당할 때에 굳게 의지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사도들의 교훈과 모범이 자기들에 반대된다는 것과 자기들에게는 자기 이외의 권위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즉시 실신하고 만다. 이 충격에 다른 날카로운 가책도 부과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명령도 받지 않은 듯이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가 문제되는 마당에서 성경이 한 마디도 지지하지 않는 일을 그렇게 경박하게 시작해도 좋겠는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로 모든 생각을 하나남의 말씀에 복종시켰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받아 먹으라……마시라"는(마 26 : 26-27) 주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며, 성찬을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받으라고 하신 주의 이 명령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예배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명령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이런 신념처럼 귀한 것은 없다. 사도들의 선례를 보면 그들은 엎드려 숭배한 것이 아니라 앉아서20 받아먹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 사도 시대의 교회 관습을 보면, 누가가 기록하는 대로 신자들은 함께 예배하지 않고 떡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행 2 : 42). 사도들의 교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자기가 그들에게 전한 것은 주께서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 : 23).

 

36. 이런 숭배는 미신이며 우상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경건한 독자들은 이런 숭고한 문제에서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떠나 우리 자신의 두뇌의 공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불안이 없어질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늘로 높이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도와 영적 신비들의 높은 곳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이 성찬이 하는 일이라면, 외형적인 표징에서 그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는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떡 앞에 엎드려 거기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미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상징들에 우리의 겸비한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니케아 회의가 금지한 것은 확실히 이 폐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21 같은 목적으로 옛날에는 성별하기 전에 회중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마음을 높이 들어올리라고22 권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신중하게 보고한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따라다닐 수 있는 곳에서 거두시고 자신에 대한 우리의 육적인 사고 방법을 일소하셨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회상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마음을 높이 들어 하늘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를 찾으라고 한다(골 3 : 1-2). 이 원칙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둔하고 육적인 개념이 가득한 위험한 예배 방식을 고안해 낼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에 대한 예배를 고안해 낸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상상한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배에 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성경이 빠뜨렸을 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은사를 주시는 분 대신에 그 은사를 경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 숭배인가? 여기에는 이중의 죄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예배를 피조물에게 옮길 뿐만 아니라(롬 1 : 25 참고), 하나님의 거룩한 떡을 가증한 우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선물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욕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귀와 눈과 마음과 지성과 혀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훈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교사 즉 성령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전진하므로 아무것도 다른 데서 얻어 올 필요가 없으며 또 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면 기꺼이 알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37. 성별된 떡으로 행하는 미신적인 의식들

그러나 한번 올바른 한계를 넘은 미신은 한정 없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은 더욱더 타락했다. 표징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성찬의 제정 정신과는 전연 이질적인 의식들을 만들어 냈다. 이 경배는23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만일 성찬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는 표징에서 머물지 않고 하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만이 합당한 경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실로 그들은 떡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장담하는가? 그들은 소위 성체를 성별해서는 행렬에서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보고 경배하며 기도하도록 엄숙하게 전시한다. 그것이 어떤 권능으로 올바르게 성별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물론 그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받아 먹으라"고 하셨다고 나는 항의한다. 나의 이 항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약속과 명령이 결합되었을 때에 명령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로 분리되면 약속도 전혀 약속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비슷한 예를 보면 이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는 약속을 주셨다(시 50 : 15). 만일 사람이 베드로나 바울에게 기도하면서 이 약속을 기대한다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모든 사람이 외치지 않겠는가? 그러면 먹으라는 명령을 무시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지체가 잘린 약속만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과는 이질적인 의식들에 악용하는 사람들의 소행이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과 결합된 명령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약속을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의 떡을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미 성찬이라는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돕는다는 것을 논했다.24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 주께서는 이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그 은혜를 우리 손에 쥐어 주시며 우리가 그것을 깨닫도록 깨우치신다. 동시에 이런 풍성한 은혜를 잊지 말고, 합당한 찬양으로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며 감사함으로 축하하라고 충고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것을 행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가르치셨다(눅 22 : 19). 바울은 이 말씀을 "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니라"고 해석했다(고전 11 : 26). 즉 생명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이구 동성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고백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도 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찬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주의 죽으심을 (심판하러)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명령은(고전 11 : 26) 우리의 믿음이 성찬에서 인정하는 것을-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찬의 둘째 사용법이며, 이것은 외형적인 고백으로 나타난다.

 

(특히 중요한 점들 : 상호간의 사랑, 설교의 동반, 병든 영혼의 약, 합당하게 먹음, 합당한 형식과 빈번한 집행. 38-46)

38. 성찬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서 성찬을 제정하셨다.25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떡은 이 단결을 표현한다. 떡은 많은 밀알로 만들었으나 그 밀알들이 섞여서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한마음으로 일치 단결해서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6 바울의 말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나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 : 16-17). 우리가 이 생각을 깊이 명심한다면 성찬에서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즉 아무 형제라도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하거나 박대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모양으로든지 넘어지게 한다면, 우리의 비행은 반드시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학대하게 된다. 우리의 형제들과 불화하면 반드시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반드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형제들은 우리의 지체이므로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그들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몸의 일부에 고통이 있으면 그 고통은 전신에 퍼지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형제가 어떤 곤란을 받으면 버려 두지 말고 깊이 동정해야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자주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부른 데에는27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도 그를 본받아 서로 헌신을 약속하며 실행하라고 권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자극할 수 있겠는가?28

 

3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2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고 한 말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고백을 연습하거나 의무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거나 하는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설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하에서 일어나는 것같이 성찬을 말없는 행사로 만드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짓이다. 그들은 성별의 힘을 전적으로 사제의 의도에 의존시킨다.30 이 신비의 뜻은 누구보다도 회중에게 설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이 처리한다. 따라서 또 다른 오류가 생겨났다. 즉 성별을 완성하는 약속은 물질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물질들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향해서 내 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떡을 먹으라고 제자들을 향해서 명령하시며 그들이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리라고 약속하신다. 바울도 약속이 떡과 잔과 함께 신자들에게 제공된다고 가르친다. 분명히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마치 물질이 들어야 한다는 듯이 말씀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덕을 세우며 그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떠나지 않으며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효력을 나타내는 산 설교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에 병자들에게 분배하기 위해서 성별된 떡을 남겨 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병자들이 받을 때에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낭독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이 신비의 뜻을 바르게 설명하고 표징을 분배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침묵에는 남용과 과오가 따른다.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고 신비의 뜻을 설명함으로써 받는 사람이 유익하게 받게 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성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성별의 효과가 병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그런 성별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고대 교회의 선례가 있다고 말한다.31 나는 이 말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오가 큰 폐해를 일으키는 이런 중대 문제에서는 진리 자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40.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한다는 뜻

우리는 주의 만찬의 이 거룩한 떡은 영적 양식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참으로 귀한 진미가 된다. 그것을 맛볼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이심을 느끼고 감사할 마음이 생기며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권고를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이 빵을 받아도 믿음이 영양과 힘을 얻지 못하며, 감사할32 생각이나 사랑할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무서운 독약이 된다. 물질적인 음식도 나쁜 체액이 가득한 위에 들어가면, 또 그 자체도 상하고 썩은 것이면 영양보다 해를 준다. 그와 같이 이 영적 양식도 악의와 사악으로 부패한 영혼에 들어가면 더욱 큰 파멸을 일으킨다. 양식 자체에 과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주의 축복으로 성결하게 된 것일지라도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딛 1 : 15)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한다(고전 11 : 27,29). 믿음의 흔적도 없으며 사랑하겠다는 열의도 없이, 돼지같이 성찬에 뛰어드는 이런 사람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몸이 자기들의 생명이란 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만큼 그 몸을 모욕하며 그 존엄성을 박탈한다. 끝으로, 그들은 그런 모양으로 받음으로써 그 몸을 모독하며 더럽힌다. 또 그들은 형제들과 불화해서 멀어져 있으며 감히 그리스도의 몸의 신성한 상징과 자기들의 불화를 섞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고 분할되지 않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주의 몸과 피를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더럽히는 그들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이렇게 합당치 않게 먹는 그들은 자신의 정죄를 초래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성찬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다른 보장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고발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되며 자기의 유죄 판결에 날인한다. 또 그들은 미움과 악의로 형제들에게서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기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령한다(고전 11 : 28).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즉 사람은 각기 자기 속으로 내려가서33 홀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충심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가? 그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를 주며 함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누어 줄 용의가 있는가? 자기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되는 것과 같이 자기편에서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는 그들을 자기의 지체로서 아끼고 보호하며 돕기를 원하는가? 이런 것들을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의무들을 우리가 지금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정성껏 노력하며 향상시켜서 일단 출발한 우리의 믿음이 매일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다.

 

41. 누가 "합당"한가

합당하게 먹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할 때, 그들은 보통 가련한 양심들을 무섭게 괴롭히면서도 올바른 결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합당하게 먹는다고 했다. 그 "은혜의 상태"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린 상태라고34 해석했다. 이런 교리는 지상에 있던, 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에서 제외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멸망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전력을 다하더라도 전진이 없을 것이며, 합당하게 되고자 굉장히 애쓴 다음에도 결국 가장 합당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상처를 고치려고 그들은 합당하게 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힘 자라는 데까지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모든 행위를 검토함으로써 통회와 고백과 보속으로 자기의 죄를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적합한 곳에서 이 속죄의 성격을 밝혔다.35 현재 문제가 된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이런 대책들은 자기의 무서운 죄에 놀라고 낙심하는 양심들을 위해서는 너무도 무력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만일 주께서 의롭고 결백하지 않은 사람을 성찬에 참가시키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하려면 엄중한 경계심이 필요할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는 무엇인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전력을 다했다는 확신을 언제 가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정확한 확신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에 대한 죄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고전 11 : 29) 무서운 금지령 때문에 문은 항상 잠긴 채로 있을 것이다.

 

42. 믿음과 사랑은 필수 조건이지만 완전성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교황 제도에서의 지배적인 교리의 성격과 그것의 출처를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떨며 슬퍼하는 가련한 죄인들에게서 성찬의 위안을 빼앗는다. 그러나 성찬에 의해서 복음의 모든 기쁨이 죄인들 앞에 제시된다. 참으로 악마가 죄인들을 가장 신속하게 멸망시키는 방법은, 지극히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먹이고자 하시는 이 양식을 맛보지 못하고 먹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멸망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서, 이 거룩한 잔치는 병자를 위한 약이며 죄인을 위한 위로이고 빈민을 위한 희사라는 것과, 건강하고 의롭고 부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먹지 못하면 신체의 힘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굶주려 기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므로, 우리 안에 그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우리의 추악함과 우리의 소위 합당치 못함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그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만들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실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낮춰서 하나님께서 들어올리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고발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게 하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찬에서 권면하시는 그 연합을 갈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므로 우리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정신과 한 마음과 하나의 말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절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선한 것도 없고 죄로 더럽혀져서 거의 죽게 된 우리가 어떻게 주의 몸을 합당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즉 우리는 빈민으로서 친절한 희사자에게 가고, 병자로서 의사에게 가며, 죄인으로서 의롭게 만드시는 분에게 그리고 죽은 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타당성은, 첫째로 만사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둘째로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충분한 사랑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불완전한 것을 키우시며 더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36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우리와 일치하면서도 타당성의 표준 자체에 대해서는 아주 그릇된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믿음과 또 우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등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같이 이 가장 거룩한 만찬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의 견해가 인정된다면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죄책이 지적될 것이므로, 성찬을 받는 것은 반드시 합당치 못한 행동이 되겠기 때문이다. 성찬을 헛되고 불필요한 것으로 산들 정도의 완전성을 성찬을 받는 사람에게서 요구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다. 이는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곧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43.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

성찬의 외형적인 집행에 대해서는 예컨대 신자들이 떡을 손에 쥘 것인가, 신자들끼리 나눌 것인가? 각기 받은 것을 먹을 것인가? 또 잔을 집사들에게 돌릴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인가? 또 떡에는 누룩을 넣을 것인가? 넣지 않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것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흰 것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은 불필요한 것이며, 교회의 생각대로 어느 쪽을 채용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떡을 손에 쥐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끼리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눅 22 : 17). 역사서들을 보면, 누룩을 넣은 보통 떡을 써 왔는데 로마 감독 알렉산더가37 처음으로 무교병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기한 것으로 일반 사람들의 눈을 끌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건전한 경건을 가르쳐야 한다. 나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명이 없고 너절한 연극은 이미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의 감각을 속일뿐이지만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나며 신자들에게 훨씬 풍부하고 감미로운 영적 위안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미신에 속아 정신이 둔해진 사람들을 마음대로 인도하면서 사람들을 종교에 잡아 둔다고 한다. 이런 신기한 짓들을 오래 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옹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고대에는 세례에서 기름을 사용했으며 액막이가 사용되었다는 것과38 사도 시대 직후에 성찬은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부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고질적인 당돌한 태도에서 온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항상 제멋대로 경솔한 짓을 하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아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에 비추어 천사들과 온 세상을 판단하게 하신다(고전 6 : 2-3, 갈 1 : 8).
그러면 이 복잡한 의식들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성찬을 교회 앞에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39 집행한다면 합당한 집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중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설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목사가 성찬의 제정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사는 우리들에게 이 거룩한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며 원래 이런 잔치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들을 노래하든지 또는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하며,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이 끝난 후에는 진지한 믿음과 신앙 고백을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권고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한다.40

 

44.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성찬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면, 현재의 통례와 같이 일년에 한번,41 그것도 형식적으로 받도록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주 성찬을 받도록 제정하셨고,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이런 회상에 의해서 믿음을 강화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며, 또 성찬을 자주 받음으로써 상호간의 사랑을 증진하고 서로 사랑을 증명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결하는 데서 사랑의 유대를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표를 받아 그 상징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관련된 모든 의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하여, 필요하고 능력이 미치는 대로 아무도 형제를 해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며 도울 수 있는 일을 빠뜨리지 않도록 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것이 습관이었다(행 2 : 42). 이와 같이 교회의 집회에서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이 철칙이 되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고전 11 : 20). 그후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가 계속되었다.
아나클레투스와 칼릭스투스의 교회법에 성별이 끝난 후에는 교회 밖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참여해야42 한다고 하였다. "사도적"이라고 부르는 고대 교회법에도 "끝까지 남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로서 마땅히 교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디옥 회의에서도 교회에 들어와서 성경 말씀을 듣고도 성찬에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허물을 고치기까지 교회에서 제거하라고 결정했다. 제 1차 톨레도 회의에서는 이 규정이 완화되었으나 적어도 온화한 용어를 사용했으나 역시 설교를 듣기만 하고 성찬에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를 하라고 하고, 경고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제명하라고 결정했다.43

 

45. 참여할 의무에 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견해

거룩한 분들은 이런 법을 정해서 성찬을 자주 받는다는 사도들 자신이 정한 관습을 유지하며 보호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빈번한 성난 참여가 신자들에게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등한시해서 점점 폐지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말했다. "이 일의 신비는 즉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의 신비 어떤 곳에서는 매일 주의 식탁에 진설하며 매일 그 식탁에서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받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에 이른다."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제 1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몸과 피에 매일 참여하며,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날에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성찬을 제공하지 않는 날이 없고, 어떤 곳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또 어떤 곳에서는 일요일에만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반 사람들은 간혹 더욱 해이해졌기 때문에, 거룩한 분들은 그런 무관심을 묵인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을 엄격하게 책망했다. 에베소서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설교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잔치를 욕한 사람에 대모해서 '왜 식탁에 앉았느냐'고 묻지 않고 '왜 들어 왔느냐'고 묻는다(마 22 : 12). 신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악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초대를 받고 잔치에 와서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먹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잔치와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와 같이, 당신들은 이 가장 거룩한 음식을 받으려고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을 때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당신들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참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겠는가? 당신은 저는 합당치 못합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기도에 참여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 기도는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려는 준비이기 때문이다."44

 

46. 일년 일회의 성찬 참여에 반대한다

일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제피리누스가 이 명령을45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형태를 가진 교령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그의 명령은 교회를 위해서 그다지 불리한 조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이 성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시에 성찬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세속 우상 숭배자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표징으로 그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저 거룩한 분은 질서와 제도를 위해서 모든 신자가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날을 정하였다. 제피리누스의 성찬 규정을 후인들이 악하게 왜곡해서는 일년에 한 번 성찬을 받으라는 법을 만들었다.46 그 결과로, 거의 모든 신자가 한 번 성찬을 받으면 남은 일년 동안의 의무를 깨끗이 다했다는 듯이 아무 관심이 없이 지낸다.47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처사였다.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아무도 강요할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을 권고하며 고무해야 한다. 타성적으로 태만한 사람들은 책망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굶주린 사람같이 이 풍성한 식사에 모여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년에 하루만을 지정해서 남은 일년 동안은 사람들을 태만하게 만드는 이 관습을 내가 처음에 마귀의 간계라고 불평한 것은 부적당하다고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우리는 이 악습이 이미 크리소스톰 시대에 잠입한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긴 것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한 큰 불균등을 통탄했다. 신자들은 어떤 때에는 깨끗한 때에도 자주 오지 않다가 부활절에는 깨끗하지 못하면서도 왔다고 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아, 관습이로다! 아, 외람된 생각들이로다! 그러므로 매일 진설해도 허사요, 우리가 성단 앞에 서 있어도 허사로다.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사담이 하나도 없도다."48 크리소스톰은 결코 그의 권위로 이 관습을 승인한 일이 없다.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47-50)

47. "한 가지만 행하는 성찬"을 논박한다

성찬의 절반을 하나님 백성의 대부분에게서 도둑질하는 또는 강탈하는 다른 규정이49 같은 곳에서 생겨났다. 피의 상징은 소수의 삭발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의 특별 소유이지 불경한 평신도에게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벧전 5 : 3) 이렇게 부른다. 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든 사람이 마시라고 했다(마 26 : 27). 사람들은 감히 새로운 반대되는 법으로 그 명령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마시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이런 입법가들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그들의 투쟁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 거룩한 잔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불상사가 생길 위험성이 있다는 구실을 내세운다. 이것은 그런 위험성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예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실로 그들은 하나만 있으면 넉넉히 둘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미묘한 논법을 사용한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그것은 그 몸에서 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몸은 병존에 의해서 피를 포함한다."50는 것이 그들의 논법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조금 고리를 늦춰 제멋대로 하게 버려 둘 경우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주께서는 떡을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기의 피라고 부르신다. 인간의 이성은 담대하게 거기에 반대해서 그 떡은 피며 포도주는 몸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과 표징을 써서 자기의 몸과 피를 구별하신 것은 아무 이유도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를 하나님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고 하는 태도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전체를 의미하셨다면, "이것이 내 몸이라, 이것이 내 피라"고 하시지 않고 "이것이 내라"고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14 : 27, 요 18 : 5, 눅 24 : 39).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떡과 따로 잔을 제정하셔서 자신은 우리의 양식과 동시에 음료로도 완전 무결하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절반을 빼앗긴다면 그가 주시는 영양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가령 그들의 구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즉 병존에 의해서 피가 방 속에 있으며 몸이 잔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그들은 여전히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강화를 경건한 사람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궤변을 물리치고 이중의 보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규정에서 받는 유익을 굳게 지켜야 한다.

 

48. 사도들은 다만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마귀의 사자들이(성경을 조롱하는 그들의 상습에 따라) 궤변을 지껄이는 것을 안다. 첫째로 하나의 단순한 행위에서 교회가 항상 지켜야 할 원칙을 연역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행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이 명령하신 말씀이다(마 26 : 27). 그리고 바울도 그것을 이런 행위로서 기억하고 하나의 고정된 명령으로서 지키라고 권고했다(고전 11 : 25).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택해서 "희생을 드리는 자"의 계급에 가입시키신 사도들만이 이 성찬에 참가하는 허락을 받았다고 그들은 다른 구실을 내세운다.51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들은 이 질문들에서 도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쉽게 논박을 받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전연 없는 이 해결책을 어떤 신의 말이 그들에게 주었는가? 성경에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이 열둘이었다고 한다(마 26 : 20).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희생을 드리는 자"라고 불러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떨어뜨리지 않는다(우리는 적당한 곳에서 이 용어를 논하겠다52).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열두 제자들에게 주셨지만 그들도 같은 일을 하라고 즉 서로 나누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더 좋던 시대로부터 사도 시대 후 일 천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두 가지 상징에 다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성찬에 참가시키셨는지를 몰랐던가? 여기에서 머뭇거린다든지 질문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타락한 파렴치일 것이다. 교회 역사서들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들이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53 터툴리안은 말한다. "육신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이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영양을 얻기 위해서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에게 말한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손으로 주의 거룩한 몸을 받으시겠나이까? 어찌 주의 귀중한 피를 폐하의 입으로 감히 마실 수 있겠나이까?" 제롬은 "성찬을 집례하며 사람들에게 주의 피를 분배하는 사제들"을 언급한다. 크리소스톰은 말한다. "구약 율법에서와 같이 사제가 일부분을 먹고 회중이 다른 일부분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한 몸과 한 잔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성찬에 속한 것은 모두 사제와 신도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 어거스틴도 여러 구절에서 같은 뜻을 확언한다.54

 

49. 후대까지 평신도도 잔을 받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인가? 희랍계와 라틴계의 저술가들의 책을 모두 읽어보면 이런 증거는 풍부하게 발견될 것이다. 또 교회에 약간의 성실성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이 관습이 폐지되지 않았었다. 로마 최후의 감독이라고 불러도 좋은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시대에도 이 관습을 지켰다고 말한다. "어린양의 피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제 들음으로써 안 것이 아니라 마심으로써 알았다." "그의 피는 신자들의 입에 쏟아졌다."55 그의 사후 400년을 지나서 모든 일이 이미 타락했을 때에도 이 관습은 아직 남아 있었다.
또 단순한 관습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침범할 수 없는 법으로 인정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제도에 대한 경외심은 그 때에 왕성했고, 주께서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임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겔라시우스도 그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성체의 한 조각만을 받은 후에 잔은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미신에 매여 있으므로, 성찬 전체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연 참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신비는 분할하면 반드시 큰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이유들에 유의했으며 그 이유들은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었다. "장차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피를 흘리라고 가르치거나 권고할 수 있는가? 또는 우리가 우선 교회 내에서 그들이 성찬 참가의 권리로서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순교의 잔에 합당하게 만들 수 있는가?" 교회법 학자들이 겔라시우스의 저 명령을 사제들에게56 국한시킨다는 것은 너무 유치하므로 반박할 필요조차 없다.

 

50.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잔을 줄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셋째,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에 대해서는 단순히 먹으라고만 하시고 잔에 대해서는 모두 마시라고 하셨는가?(막 14 : 22-23, 마 26 : 26-27) 의도적으로 사탄의 간계에 반대하려고 하신 것과 같다.
넷째, 만일 주께서 성찬에서(그들이 말하는 대로) "희생 드리는 자"들만을 존중하신다면, 누가 감히 주께서 제외하신 외인들을 성찬에 참가하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또 주만이 주실 권한이 있는 선물에 대해서 그가 명령하시지 않는데 누가 감히 자기에게 권한이 없는 그 선물에 참여하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들에게 주의 명령과 모범이 없다면, 어떤 확신으로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을 감히 일반 신자들에게 감히 분배하겠는가?
다섯째,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전한 것을 주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은(고전 11 : 23) 거짓말이었는가? 후에 그는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두 상징에 다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전했노라고 언명한다(고전 11 : 26). 모든 사람이 아무 차별 없이 참여하는 허락을 받는다는 관례를 바울이 주에게서 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거의 전부 쫓아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는 하나님에게서 받았노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1 : 19).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감히 교회의 이름으로 이 가증한 짓을 숨기며 옹호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명령을 언제든지 유린하며 폐기하는 적그리스도가 교회인 것같이 또는 종교가 번성하던 사도 시대의 교회가 교회가 아니었던 것같이 행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