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장

맹세 :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맹세의 본질 : 맹세에 대한 일반적 오해. 1-7)

1. 타락과 여러 가지 위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매우 귀중한 피의 값으로 교회의 자유를 사셨건만 그 교회가 잔인한 압제에 눌리며 산더미 같은 전통에 거의 압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 사람의 개인적 광태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일을 허락하신 것도 정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 지운 짐을 모두 지고도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 자기만이 부담할 짐을 더 많이 찾아내며 자기의 함정을 팜으로써 더욱 깊은 곳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열심으로 맹세를 만들어 내어서는 공통된 사슬 위에 덮고 엄한 의무를 첨가했다. 우리는 소위 "목자"들이 교회를 마음대로 지배하며 악법으로 가련한 영혼들을 옭아매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킨 것을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이것과 관련된 이 다른 악을 여기서 함께 논함으로써 세상이 그 자체의 패악한 성질에 따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보조 수단들을 항상 힘껏 방해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적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맹세의 폐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은 이미 제시한 여러 가지 원리를 회상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첫째로 가르친 것은 사람의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훈련하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 율법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1 또 우리는 주께서 우리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지 않게 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올바른 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에 포함시키셨다고 가르쳤다.2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가식된 예배 행동을 아무리 우리가 기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다. 또 확실히 주께서는 친히 여러 구절에서 그런 행동들을 명백하게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심히 미워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서 떠난 맹세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맹세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맹세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맹세는 어느 정도로 구속력이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 "맹세"라고 부른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상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그들에게 갚을 의무가 있는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정성스러운 행동으로 상대해야 할 하나님 자신에게 맹세한 것은 마땅히 훨씬 더 엄밀하게 지켜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미신이 모든 시대에 그 세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도 없이, 심지어 혀가 돌아가는 대로 즉시 하나님에게 맹세를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무례하게 우롱하는 미련한 짓들, 때로는 어리석고도 해괴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 불손한 짓을 흉내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원래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것은 가장 흔히 보는 악행이었다. 각처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꿈에서 생각난 것이면 무엇이든지 열광적으로 맹세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가를 나는 악의를 가지고 과장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세히 이야기하지도 않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맹세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공연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겸해서 말해 두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2.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맹세가 합당하며 어떤 맹세가 나쁜 것인가를 실수 없이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⑴ 누구를 상대로 맹세하는가? ⑵ 맹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⑶ 어떤 의도로 맹세하는가?
첫째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셔서, 아무리 사람의 눈에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자의적 숭배일지라도3(골 2 : 23) 일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우리 자신이 조작한 모든 자의적 숭배를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승인하는 경배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리라는 증거가 없는 일을 우리의 마음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다 죄가 된다는(롬 14 : 23) 바울의 교훈은 모든 행동에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할 때에 해당한다. 바울은 음식을 구별하는 문제를 논했는데, 만일 그런 가장 사소한 일에서도 믿음이 분명한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실패하거나 과오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를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맹세에 관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경계할 것은, 우리가 경솔한 짓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양심의 확신이 없으면 결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솔한 짓을 할 위험성이 없으려면, 우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한 일과 무익한 일에 대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

 

3. 맹세하는 사람

맹세 문제에서 생각해야 할 두 번째 점에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헤아려야 하며 우리의 소명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축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나 자기의 소명과 상반되는 일을 맹세하는 사람은 경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는데 그 은혜를 멸시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의 수중에 두셨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힘을 믿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 약속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맹세는 합당치 않다고 한 오렌지 회의의 결정은 참으로 옳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가 그에게서 받은 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4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어떤 것은 공정한 입장에서 주시지 않는 것이므로 바울이 가르친 대로(롬 12 : 3, 고전 12 : 11), 사람은 받은 은혜의 분량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맞도록 분량을 정하셨으므로 우리의 맹세도 그 분량에 맞도록 하라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 된다. 예를 들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음모꾼들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했는데(행 23 : 12), 그 계획이 악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사람의 생사를 자기들의 힘으로 좌우하려고 한 그 경솔은 용서할 수 없다. 입다는 경솔한 열성으로 경솔한 서원을 하였으며, 그 미련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았다(삿 11 : 30-31). 이 종류의 맹세에서 독신주의는 첫째 자리를 차지할 만한 만용이다. 사제와5 수도사와 수녀들은 자기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독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생 독신을 계속하고 따라서 그런 맹세를 하라는 교훈을 그들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받았는가? 그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신 "사람의 독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창 2 : 18)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에는 심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절제의 은사는 필요한 경우에 제한된 기간만 허락되는 편이 더 많은데, 그들은 어떻게 감히 이 일반적인 소명을 자신 있게 일평생 벗어버리는가?
이런 완고한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신 6 : 16, 마 4 : 7)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에 역행하는 것, 하나님께서 현재 주시는 은사를 우리의 것이 아닌 듯이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할뿐만 아니라, 일종의 독신 생활을 굉장히 찬양하기 위해서 감히 결혼을 "오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는 것을 자기의 존엄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며(창 2 : 22),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선언하셨고(히 13 : 4),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혼인식에 가셔서 처음 기적으로써 경의를 표명하기까지 하셨는데(요 2 : 2,6-11), 이 모든 사실을 그들은 무시한다.
그들 자신의 생활이(그것을 그들은 "천사 같다"고 부름으로써 더할 나위 없는 파렴치함을 드러내지만) 독신 생활과 순결은 문제가 다르다는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그 밖의 더 악하고 더 부끄러운 것들에6 비교함으로서 천사들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다. 또 사실 자체가 명백하게 반박하는 논증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기를 과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고 교만하게 행동할 때에 주께서 보통 내리시는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숨은 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힐 정도이므로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우리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일체 맹세하지 말라는 것에는 반대할 여지가 없다. 한 가정의 가장이 처자를 버리고 다른 짐을 지겠다고 맹세하며, 공직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선출을 받고도 사사로운 시민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소명에 어긋나는 맹세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멸시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한 것은 설명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고 우리가 만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예속시키셨다. 따라서 우리를 도와야 할 외부적인 사물에 우리 자신을 예속시켜 그 구속을 받는다면, 그런 일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봉사가 되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얽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에서 우리가 해방되고 면제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성을 피하려면 우리는 주께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제정하신 경륜에서7 결코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4. 의도에 따라 맹세를 분류하다

이제 셋째 점을 말하겠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맹세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속마음이지 겉모양이 아니므로 같은 일도(마음에 가진 목적이 변하는 데 따라) 어떤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떤 때는 심히 불쾌하게 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행동 자체가 거룩한 것같이 생각해서 마시지 않기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어떤 나쁘지 않은 목적으로 맹세한다면 아무도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올바른 맹세가 될 수 있는 목적은  네 가지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 중의 두 가지는 과거에 관련시키고 다른 두 가지는 미래에 관련시키겠다.
과거에 속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는 맹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겠다는 맹세다. 전자는 감사의 실천이요, 후자는 회개의 실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타향 생활에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야곱의 서원은(창 28 : 20-22) 처음 종류에 속한다. 고대에 경건한 왕이나 지도자들이 의로운 전쟁을 하려고 했을 때에, 승리를 얻는다면 화목제를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도 한 예가 된다. 또는 어떤 중대한 곤란이 있을 때에 주의 구원을 빌면서 이런 서원을 했다. 시편에서 서원을 말하는 구절들은(시 22 : 25, 56 : 12, 61 : 8, 116 : 14,18)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어떤 재난이나 어려운 병이나 그 밖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신 때에는 이런 맹세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엄숙한 표시로서 서원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와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잘 알려진 예를 하나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탐식의 죄로 어떤 비행을 저질렀을 때에 자기의 무절제를 징벌하기 위해서 얼마 동안 맛난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하는 것과, 자기를 더욱 엄격하게 얽어매기 위해서 맹세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보편적인 법을 제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맹세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허락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자유에 맡기기만 한다면 이런 맹세는 허락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5. 미래에 관한 맹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래에 관한 맹세는 우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는 것도 있다.
가령 달리 나쁘지 않은 일에 관해서 자기가 직접 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없는 것을-그런 특수한 죄에 대한 경향성을 - 자기에게서 발견한다고 할 때, 맹세를 함으로써 그것을 일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결코 미련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사람이 어떤 몸의 장식이 위험하다고 생각나면서도 거기에 대한 욕심의 유혹을 느낄 때, 자기에게 굴레를 씌움으로써 즉 그것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경건에 필요한 의무를 잊어버리거나 게을리 할 때에는 맹세를 해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태만을 떨쳐버리는 것이 나쁜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이 두 가지 맹세가 일종의 초보적인 훈련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힘이 부족할 때에 보조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무지하고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유익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 중의 하나를 위한 맹세는, 특히 외형적인 일에 관한 것은 허락된다. 단, 그런 맹세도 하나님의 승인으로 지지를 받고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한정되어야 한다.

 

6.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하여

이제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맹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세례받을 때 하는 것이며 교리 문답과 성찬 참가로 확인된다. 성례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8 이 계약에 의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영생을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할 것을 주에게 약속한다. 이 맹세의 형식 또는 적어도 그 요점은, 사탄을 물리치고 몸을 바쳐 주를 섬기며 주의 거룩한 계명에 순종하고 우리의 육의 악한 욕망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롬 1 : 3,14 참조). 성경이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요구되는 이 맹세가 거룩하며 유익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러한 복종을 지속할 수 없지만 그런 사실도 지장이 되지 않는다. 이 규정은 은혜의 언약에9 포함되어 있으며 이 언약에는 죄의 용서와 성결의 영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는 약속에는 용서와 도움을 구하는 기원이 결합되어 있다.
개개의 맹세를 판정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표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 맹세의 성격을 틀림없이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룩한 것이라고 단언한 맹세들도 매일 실행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효나 시기에 대해서는 감히 어떤 지시도 할 수 없으나, 나의 충고에 순종하는 사람이면 신중하고 일시적인 맹세만을 할 것이다. 빈번히 맹세를 너무 많이 하게 될 경우, 바로 그 반복으로 인해서 맹세의 종교적 성격이 전적으로 떨어지게 되며 맹세는 미신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맹세로 자기를 얽어매는 사람은 그 맹세를 실행하기 위해서 많은 곤란과 피곤을 느끼거나 오래 계속하는 맹세에 지쳐 맹세를 깨뜨리고자 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사악한 맹세

그런데 과거 수백 년 동안 맹세에 대한 큰 미신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배인 듯이10 금욕을 맹세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하겠다고 자기를 얽어매며 또 어떤 사람은 일정한 날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해서 그런 날이 다른 날보다 특별히 거룩한 것처럼 망상을 했다. 훨씬 더 유치한 일들을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맹세했다. 거룩한 곳으로 기원 순례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여 종종 걸어가거나 반나체가 되어 여행하였는데 이처럼 피곤케 함으로써 더 많은 공로를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믿을 수 없는 열정으로 얼마 동안 추구한 이런 일들을 앞에서 말한 표준들에 비춰 검토한다면, 허무하고 무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불경건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육은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치명적이며 저주받은 생각들이 있다. 위선자들은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나서 특별한 의를 얻었다고 믿으며 경건 생활을 전적으로 외형적인 일에 두고 또 그런 일에는 그다지 주의를 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을 모두 멸시한다

 

(수도사들의 맹세와 수도원 생활의 쇠퇴. 8-10)

8.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

개개의 형식을 열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수도사들의 맹세는 교회의 공적 판단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매우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간단하게 논하겠다.11
우선, 현재의 수도원 제도를 역사가 오래된다는 이유로 옹호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 옛날의 수도원 생활은 훨씬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엄격하고 어려운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갔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리쿠르구스의 법으로 살던 스파르타 사람들과 같이 수도사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그들의 규칙은 더욱 엄격했다고 한다. 그들은 땅에서 자고, 마시는 것은 물뿐이었으며, 먹는 것은 빵과 야채와 풀뿌리였고, 맛있는 것이라곤 주로 기름과 콩이었다. 사치한 음식이나 육신의 쾌락을 일체 단절하였다. 만일 안식이 있는 증인들이-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바실리우스와 크리소스톰과12 같은 목격자들이-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런 예비적 훈련으로 수도사들은 더 큰 임무를 위해서 준비했다. 수도원 학교들은 성직자가 될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신학교였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사람들은 모두 수도원에서 양성된 후에 감독이 되었고 그밖에도 같은 시대의 여러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들이 이 점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어거스틴도 그의 시대에 교회에 성직자들을 공급한 것은 대개 수도원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가 카프라리아 섬의 수도사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말이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결심을 지켜 끝까지 지속하기를 나는 권합니다. 어머니인 교회가 여러분의 수고를 요구할 때에 너무 기쁘게 맡을 것도 아니요 나태한 마음으로 거절할 것도 아닙니다. 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한가한 생활 때문에 교회의 요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인 교회의 해산을 도우려는 선한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분 자신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는 사역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만일 수도원을 버린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게 되면 그들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뿐 아니라 성직 전체에도 심한 치욕과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적당하고 우수한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피리를 잘 불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한 음악가가13 된다고 하지 않는 한 나쁜 수도사가 훌륭한 성직자가 된다고 우리를 우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들에게 이런 파멸적인 교만을 조장하며 성직0湄湧?이렇게 중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필요한 극기심이 있더라도 필요한 훈련이 없으면 좋은 수도사라도 좋은 성직자가 되지 못합니다."14 이런 구절들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은 보통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 규칙에 의해서 교회를 다스리는 준비를 하며 이 중대한 직책에 더 적합하고 유능하도록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수도사들의 대부분은 무식했으므로 그들이 모두 이 목적을 달성했다거나 이런 목적을 가졌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적격자들만이 선택되었다.
9. 수도원 생활에 대한 어거스틴의 묘사

어거스틴이 초기 수도원의 형태를 묘사한 중요한 곳은 둘이다. 카톨릭 교회의 품행에 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라는 책에서 그는 마니교주의자들의 중상모략에 반대하여 그 직책에 대한 거룩함을 방어하였으며, 수도사의 행위에 관하여(On the Work of Monks)라는 제목이 붙은 다른 책에서는 수도원을 타락시키기 시작한 일부 수도사들을 공격한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가르친 것을 요약하겠다. "그들은 이 세상의 유혹들을 멸시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공동 생활을 하며, 기도와 독서와 토론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만하게 뽐내거나 고집으로 무질서하거나 질투로 인하여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벌어들이면서 마음에 항상 하나님을 생각한다. '원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해서 얻은 수익을 갖다 주고, 원감들은 모든 일을 주도 면밀하게 관리하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원장에게 보고한다.
이 아버지들은 그 행실이 거룩할 뿐 아니라 거룩한 교리와 모든 일에도 탁월하다. 그들은 '아들'들을 가르치되 교만한 태도가 없다. 큰 권위로 아들들에게 명령하며 아들들은 기꺼이 순종한다. 하루가 끝날 무렵, 아직 식사를 하기 전에 각각 자기 방을 나와 아버지 앞으로 모인다. 한 아버지 앞에 적어도 3,000명이 모인다"(이것은 주로 애굽과 동방에 대한 말이다). "그 다음에 건강에 충분할 정도로 음식을 먹으며, 비록 검소한 보통 음식일지라도 과식하지 않도록 자기를 억제한다. 이와 같이 고기와 포도주를 끊어 욕망을 길들일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도 끊는다.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은 이 둘째 종류의 음식은 '깨끗한 것'이라고 하여 항상 어리석고 부끄러운 변호를 하며, 고기와는 아주 구별된다는 이유로 그러한 음식에 대한 비열한 욕망을 묵인한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벌고 또 음식을 절제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 많은데, 먹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남은 것을 모을 때에도 주의하지만 나눠 줄 때에는 더욱 주의한다. 일부러 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남은 것은 결코 보관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한다." 그 다음에 그는 밀라노와 다른 곳에서 실지로 본 내핍 생활을 회상하면서 말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무에게도 견딜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권하지 않으며 거절하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자기는 약해서 따라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사랑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을(딛 1 : 15)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음식을 마치 부패한 것처럼 배척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며 형제애를 유지하도록 정성껏 경계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라는 말씀을(고전 6 : 13)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먹지 않는 강한 사람들이 많다. 흔한 음식, 사치하지 않은 음식으로 살고 싶다는 소원만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은 건강한 동안은 절제하지만, 병이 나서 건강상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음식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없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많으나 포도주 때문에 더러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허약한 형제들이나 포도주가 없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자하게 포도주를 준다. 허망한 미신 때문에 포도주를 거절하는 미련한 사람들에게는 더 거룩해지기 전에 더 허약해지지 않도록 형제와 같은 태도로 충고한다. 그들은 결심으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만 육체의 연습은 일시적이란 것을 알고 있다. 특히 형제우애를 지켜 음식과 말과 옷과 안색이 모두 사랑에 합치하도록 힘쓴다. 한 사랑으로 모이며 한 사랑을 위해서 노력한다. 사랑에 어긋나는 것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악한 일로 생각한다. 사랑에 반대하는 사람은 축출하고 피한다. 사랑을 비웃는 자는 하루도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15
저 거룩한 분은 이런 말로 옛날의 수도원 생활을 그린 것 같다. 그의 말은 길었으나 여기에 넣기로 했다. 내가 여러 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수집한다면 아무리 간결하게 만들어도 이보다 길어지겠기 때문이다.

 

10. 수도원 생활의 초기와 후기를 비교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거를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다. 다만 고대 교회에는 어떤 종류의 수도사들이 있었으며, 그때의 수도원 생활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간단히 말하고자 할뿐이다. 그렇게 하면 현명한 독자들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현재 수도원 제도를 지지하는 자들이 역사가 장구하다고 주장하는 그 파렴치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고 합당한 수도원 생활을 우리에게 그려 보인 어거스틴은 주의 말씀이 우리의 자유에 맡긴 일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일체 배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런 일들을 무엇보다도 엄격하게 요구한다. 옷의 빛깔이나 모양과 음식의 종류와 그 밖의 너절하고 무의미한 의식들에 관한 규정을 일점 일획이라도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인정한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남의 덕으로 놀고먹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짓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의 시대에 질서가 잘 잡힌 수도원에서는 이런 예가 없었다고 한다.16 현대의 수도사들은 무위 도식하는 것을 그들의 성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명상 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며 천사들에게 가까이 근접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에게서 나태한 생활을 박탈한다면 과연 명상 생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어거스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한 경건 생활의 의무를 실천하며 돕는데 불과한 수도원 생활을 요구한다. 그가 형제적 사랑을 중요시하고 거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소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교회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음모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인가?17 그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 수도사들의 모범이 교회의 단결을 보존하는 데 어떤 광명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현대 수도원 생활의 성격은 너무도 다르며, 반대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보다 더 다른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꾸준히 열성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경건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조작해서는 그것을 명상하며 모든 사람들 보다 더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

 

(수도원의 완전성을 말함은 잘못이다. 11-14)

11. 수도원 생활은 상태가 완전한가?

만일 그들이 이것을 부정한다면, 나는 왜 그들은 그들의 계급에만 완전하다는 칭호를 붙여 위엄을 더하고 하나님의 모든 소명에서는 그 칭호를 빼앗느냐고 그들에게 묻겠다. 나는 그들의 궤변적인 답변을 안다.
수도원 생활은 그 자체 내에 완전성을 포함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8 그들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선전을 할 때,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한 사람들을 올가미로 잡으려 할 때, 자기들의 특권을 주장하려 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기들의 위신을 높이려고 할 때에 그들은 완전 상태에 있다고 자랑한다. 추궁을 당해서 이런 헛된 교만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그 때에는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는 등의 속임수를 쓴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들보다 완전을 더욱 추구하는 상태에 있노라고 한다. 동시에 세상에서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것만이 천사적이고 완전하며 모든 허물이 제거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허위를 이용해서 그들은 심히 유리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제심을 몇 권의 서적에 묻어 두었다. 이것은 용인할 수 없는 우롱이요 허위란 것을 어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에, 그들은 수도원 생활을 완전성을 얻는 길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것을 돌리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겠다. 그들이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수도원 생활과 다른 생활 방식을 구별하는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경에 한 마디도 인정한 일이 없는 이런 제도에 이렇게 큰 영예를 돌리며,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소명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귀한 칭호로 장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생활에 비해서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을 어느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친히 자신의 증거로서 찬양하신 모든 생활 양식보다도 이 위조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신성모독이 아닌가?

 

12.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활 법칙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고 한 나의 말이 중상모략이라고 마음대로 주장해 보라.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신을 훌륭하게 고발한다. 자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졌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복수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등의(마 5 : 33이하) 복음의 권고를 그들은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만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권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근거를 어느 고대인에게서 찾으려는가? 이런 생각을 한 고대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모두 순종해야 된다고 고대인들은 이구 동성으로 선언했다. 이 훌륭한 해석가들이 그리스도께서는 권고하셨을 뿐이라고 상상하는 이 여러 가지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명령하셨다고19 고대인들은 서슴지 않고 꾸준히 가르쳤다.20 그러나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해석이 가장 유해한 오류란 것을 말했으므로, 현대 수도원 생활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마땅히 배척해야 할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에 명령하신 공통된 생활 법칙보다 더 완전한 원칙을 고안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21 이런 견해를 근거로 삼아 세운 것은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3. 마태복음 19장 21절의 의미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완전성에 대한 다른 논의를 끌어들이며 이것을 가장 강력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의를 물은 청년에게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 : 21).
나는 그들이 그대로 행하든 행하지 않든, 우선은 행한다고 가정하겠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버렸으므로 자기들은 완전하게 되었노라고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곧 완전성이라고 하면, 사람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은(고전 13 : 3) 무슨 뜻인가? 사랑이 없으면 완전성은 그것을 가진 사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이것은 어떤 완전성인가? 여기서 그들은, 그것은 완전성의 유일한 행위가 아니라 최고의 행위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높은 소리로 반대한다. 이런 재산 포기가 없어도 주저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골 3 : 14)라고 하였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으며, 그 한 편이 사람의 완전성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런 포기가 없어도 완전성은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 : 21)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면 누구를 상대로 하신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22 어떤 일을 해야만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한 청년이 묻는다(마 19 : 16, 눅 10 : 25 참조). 행위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마 19 : 17-19).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율법은 그대로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패가 없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에 있는 옛 교훈과는 다른 어떤 생활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의의 교훈이라고 확증하시며, 동시에 자신이 어떤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쳐 백성에게 율법을 버리라고 선동하는 듯이 전하는 거짓말을 반박하신다.
어떤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청년에게는 헛된 자신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훈은 다 지켰노라고 대답한다(마 19 : 20). 그가 도달했노라고 자랑하는 그 경지에서 무한히 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자랑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는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같이 율법에는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준수를 영원한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는 사실만 보아도 이 점은 알 수 있다. 청년은 의를 완수했노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지만, 그 의를 향한 그의 전진이 얼마나 적은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단점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고 마음이 거기에 매여 있었다. 그가 자기의 숨은 상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상처를 건드리신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라고 하신다(마 19 : 21). 그가 자기 생각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다(마 19 : 22).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일체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염병같이 생각해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욕심 많은 부자 청년에게 그의 전재산을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야심가에게 그의 모든 영예를 버리라고 하며, 방탕한 사람에게 그의 모든 쾌락을 버리라고 하고, 파렴치한 사람에게 그 정욕을 채우는 수단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고에 감동되지 않는 양심은 이런 방법으로 그 특유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깨닫도록 각성시켜야 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특별한 예에 일반적인 해석을 붙여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재산 포기와 완전성을 동일시하신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헛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나친 자기 만족에 빠진 청년에게 그의 상처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노라는 그의 주장은 잘못이며 아직도 그는 완전한 순종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교부들이 이 구절을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서 자발적으로 빈곤해진 체하는 기풍이 생겼고 땅에 속한 물건을 일체 버리고 벌거숭이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생각이 나타났다.23 그러나 선하고 온순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한 해석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에 대해서 의문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14. 수도원들의 분파주의

그러나 교부들에게는 후대에 생긴 것과 같은 완전 사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수도원 궤변가들이 이중의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조작한 사상이다. 수도원 생활을 세례에 비교하며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둘째 세례라고 선언하는 모독적인 교리는 교부 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교부들이 이 모독 행위를 진심으로 미워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거스틴은 고대 수도자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하며 그들은 완전히 사랑에 전념했다고 한다.24 그러나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로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실이 알려 준다. 왜, 특이한 직분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성례를 집례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자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시작한 비교를 계속해서 곧 끝낸다면 그들과 고대 수도사들과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고대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살았지만 따로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성례에 참가하며 성회에 출석하며 신자의 일원으로 처신했다. 현대 수도사들이 사적인 제단을 따로 설치한 것은 단결의 유대를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 전체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 사이에 평화와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일반 성직 제도를 멸시한다. 현재 있는 수도원은 모두가 분파주의자들의 소굴로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며 신자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종파명을 취했다. 바울이 극도로 저주한 일을(고전 1 : 12-13, 3 : 4) 그들은 파렴치하게 자랑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혹은 이 선생 혹은 저 선생을 자랑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눈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대신에 베네딕트파라고 자랑하며, 어떤 사람은 프란체스코파, 어떤 사람은 도미닉파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이런 이름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붙이고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다른 체하니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25

 

(고대의 주장과 수도원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 신약성경에 있는 과부와    여집사는 수녀가 아니었다. 15-19)

15. 수도사들의 행실이 타락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고대 수도사들과 현대 수도사들의 차이점은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도사가 아닌 수도원 제도에 대해서 말했으며, 소수 사람들의 생활에 포함된 허물들이 아니라 수도원 생활 그 자체에서 분리할 수 없는 허물들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품행에 큰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하다. 즉 그들같이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계급도 없으며, 파쟁과 미움과 당파열과 음모가 맹렬한 곳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욕을 억제해서 노골적인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을 성적 정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몇 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등가가 아니라 정결한 성역이라고 할 만한 수도원은 열에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들의 음식은 얼마나 검소한가? 그들은 우리에 있는 돼지들같이 뚱뚱하다. 내가 그들을 너무 혹평한다는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그만 말하겠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몇 가지 점에는 고발자로서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태를 아는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대단히 훌륭하게 정절을 지켰다고 증거하는 동시에 부랑자 같은 수도사들도 있었다고 불만을 말한다. 이 부랑자는 간교한 속임수로 단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며 순교자들의 유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추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뼈를 순교자의 유골이라고 속여 팔고 다녔고, 그밖에도 비슷한 여러 가지 비행으로 수도사 계급의 수치를 샀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덕을 닦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이, 수도원에서 타락한 자들보다 더 악한 인간도 본 일이 없다고 한다.26 그가 지금 살아서, 거의 모든 수도원에 이런 통탄할 여러 가지 죄악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 죄악들이 거의 수도원이 넘칠 정도로 가득한 것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나는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아는 사실만을 말한다.
그러나 이 비난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과 규율이 수도원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무위 도식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와 같이 현대 수도사들은 거룩했던 고대에 비하여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무리 가운데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큰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다. 그들은 멸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며, 심지어는 아일랜드 격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 사이에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학대를 받는 때도 있다.27

 

16. 고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의문

고대와 현대의 수도원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목적을 달성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두건을 쓴 친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고대 교회의 예를 도입하는 것은 거짓이며, 양자 사이에는 원숭이와 사람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려고 한다.
동시에 어거스틴이 칭찬한 고대의 형태에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아주 엄격한 규율을 외형적으로 실천한 그들에게 미신적인 점이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들에게는 지나친 외식과 집착된 열성 또한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28 모든 소유를 버리고 땅에 속한 모든 근심에서 떠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건한 가장이 모든 탐욕과 야심과 육의 다른 정욕을 버리고 일정한 직업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가정을 다스리는 일에 전심하는 편을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신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은둔해서 명상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를 미워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광야로 도망하고 주께서 특별하게 명령하신 의무들을 저버리는 것은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수도원 생활에 다른 악한 일이 없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교회에 무익하고 위험한 선례를 도입했다는 것은 확실히 작은 죄악이 아니었다.

 

17. 수도사들의 맹세, 특히 독신 생활에 대한 맹세

그러면 오늘날 수도사들을 더 훌륭한 계급에 가입시키는 맹세의 본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은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거짓 경배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데, 나는 위에서 말한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29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이나 승인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생활 방식이든지 생각해 내는데, 나는 그것은 경솔한 것이며 따라서 불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옹호할 근거가 없으며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 : 23)이기 때문이다.30
그뿐 아니라 현대 수도원 제도에 포함된 여러 가지 비뚤어지고 불경건한 예배 행위에 자기를 얽어맬 때, 나는 그들이 몸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악령에게 바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독적인 의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더럽혔을 뿐이었는데,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은 자녀를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제물로 바쳤다고(신 32 : 17, 시 106 : 37) 말하게 허락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두건이 붙은 옷과 무수한 미신으로 몸을 둘러싸는 수도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은 어떤 맹세를 하는가? 그들은 마치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미리 하나님에게서 해방의 언약을 받은 것같이 하나님께 영원한 순결을 약속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이 맹세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마 19 : 11-12) 이 특별한 은사가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라. 육의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주의 도움을 받으라. 주의 힘을 받을 때에만 그들은 저항할 수 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그들에게 제시된 대책을 멸시하지 말라. 절제의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혼하라고 권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고전 7 : 9).
내가 "절제"라고 하는 것은 음행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몸을 순결하게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외형적인 방종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타오르는 정욕도 경계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께 몸을 완전히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절제의 맹세로 자기를 매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관습이라고 말한다.31 물론 나는 이 관습이 고대에 허락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가 완전 무결해서 그 때에 한 일은 모두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후에 저 융통성이 없는 엄격주의가 잠입해서, 일단 맹세한 후에는 돌이킬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점은 키프리아누스가 분명히 표현했다. "처녀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했으면 겸손하고 정결하게 또 아무 거짓 없이 그 처지에 머물러 있어라. 이렇게 하면서 강하고 견고한 태도로 순결의 보상을 기다려라, 그러나 계속하고 싶지 않거나 계속할 수 없으면 죄를 짓고 불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좋다."32 지금 그들은 절제의 맹세를 이런 공정한 방법으로 시정하려고 하는 사람을 온갖 비난으로 괴롭힌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대의 관습에서 훨씬 많이 떠났다.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완화책이나 사면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결혼해서 육의 무절제를 고치는 것은 음행으로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것보다 더욱 흉악한 죄라고 파렴치하게 선언한다.

 

18.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 있는 과부들의 경우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며 이런 맹세는 사도 시대에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힘쓴다.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가 결혼한 과부들은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딤전 5 : 11-12)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대해서 헌신과 봉사를 약속한 과부들은 영구적인 독신 생활을 약속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후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자체가 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해 모두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몸으로서 결혼의 멍에에 매이지 않아야만 맡은 일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33 그러나 맹세를 한 후에 재혼을 생각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정욕에 끌려 그리스도를 배반한다고 한 바울의 말은 당연하다(딤전 5 : 11). 그는 첨가하는 의미로, 교회에 약속한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한 처음 약속까지 어기고 취소한다고 첨부한다(딤전 5 : 12). 처음 약속에는 각자 자기의 소명을 완수해야 된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혹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체면을 잊어버리고 예의에는 일체 관심도 없으며 온갖 방종과 불결에 빠지고 그 방탕한 생활은 전혀 기독교 신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하겠다. 그 때에 교회 일을 보도록 허락을 받은 과부들은 영구히 독신을 지키겠다는 조건을 수락했다. 그 후에 그들이 재혼했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염치를 버리고 기독교 신자답지 못한 무절제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5 : 13)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한 약속을 어겼을 뿐 아니라 경건한 여성의 위치에서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 그들이 독신 생활을 선언한 데에는 그들이 하려는 일과 결혼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의 소명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독신을 서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째, 육의 가시 때문에 고통하거나 불결한 생활에 빠지는 것보다, 차라리 결혼을 선택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그들이 맹세로 매여 있었다는 생각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바울은 상식적으로 위험성이 없을 나이를 지정했다. 특히 한 번 결혼한 것으로 만족하고 이미 모범적인 절제 생활을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독신을 서약하는 데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맹세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라고 오해하며 절제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이 경솔하게 그런 맹세를 하기 때문이다.

 

19. 수녀들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바울의 이 구절을 수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가? 여집사들을 임명한 목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의 노염을 풀라는 것이 아니었고 여생을 무위 도식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빈민들에 대한 교회의 사업을 도우며 자선 사업에 열의와 정성과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독신을 서약한 것은,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어떤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신으로 있는 편이 임무 수행을 위해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들은 청년기의 초기나 성년기에 이런 맹세를 하고 후에 자기들이 뛰어내린 벼랑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때에 거룩하고도 안전한 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자들의 두 가지 논점을 너무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60세 미만의 여성의 독신 서약을 받는 것은 불법이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사도는 60세가 된 부인들만을 허락하며(딤전 5 : 9), 젊은 부인들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라고 권고한다(딤전 5 : 14). 그러므로 처음에는 12세에, 다음에는 20세에, 후에는 30세에 서약을 허락하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소녀들에게 혹은 속임수로, 혹은 폭력과 위협으로 이 저주의 굴레를34 씌우는 때도 있으니 이것은 더욱 허용할 수 없다.
나는 나머지 두 맹세는35 공격하지 않고자 한다. 단지 한 마디만 말하겠다. 이 맹세들의 현상을 보면 여러 가지 미신이 붙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맹세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우롱하게 되도록 맹세 자체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소한 점까지 일일이 혹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반박으로 만족하겠다.36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 20-21)

20. 허용할 수 없는 맹세도 지켜야 하는가?

어떤 종류의 맹세가 합당하며 하나님이 받으시는가를 나는 분명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무지하고 양심이 나약한 사람들은 어떤 맹세를 싫어하거나 또는 옳지 않다고 보면서도 맹세한 의무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어기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죄가 더 많지 않은가 해서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여기서 도와주어야 한다.
모든 불안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나는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생각에서 나온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대해서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사이의 계약에 있어서 계약의 상대자가 우리에게 대해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약속만이 우리를 구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우리의 양심의 증거가 있을 때에 한해서 바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 : 23)고 한 원칙은 변함이 없다. 바울이 한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납된다고 확신하는 믿음은 모든 천한 일의 근본이며 따라서 만일 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 일은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확신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시도할 수 없다면 혹 무지해서 어떤 일을 경솔하게 시작했을 경우 그 과오를 깨달았는데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솔하게 한 맹세는 이런 종류에 속하므로 아무 구속력이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이미 증명한 바와37 같이 그런 맹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운 것이다. 불필요한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내가 보기에는, 경건한 양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불만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 한 가지 증명만으로도 넉넉할 것이다. 즉 순결한 원천에서 나오지 않고 합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행위는 모두 하나님께서 부인하시며 또 그런 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금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하는 것도 금하신다. 따라서 오류와 미신에서 생긴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도 없으며 우리도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21. 수도원 맹세를 파기하는 문제

이 설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수도원을 떠나 존경할 만한 생활로 돌아선 사람들을 지지하며 악인들의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수도원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파약과 거짓 맹세의 중죄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교회에 그들을 매는 소위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끊었다는 것이다.38 그러나 나는 사람이 확인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취소하실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유대도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오류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그들이 매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진리를 알고 광명을 얻었으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있던 우리를 그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면(갈 3 : 13), 사탄이 속이는 그물에 불과한 저 외형적인 족쇄로부터는 더욱 우리를 구출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광명으로 조명하시는 사람들을 미신으로 짊어지게 된 모든 굴레에서도 풀어 주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풀려난 사람들이 처음부터 독신 생활에 부적당한 사람들이었다면 변호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며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반드시 그 영혼을 멸망에 빠뜨린다면, 사람은 그런 맹세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제의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마 19 : 11-12) 절제의 맹세를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설명했다.39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말한다. 모든 수도원에 불결한 일이 만연하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안다. 개중에는 비교적 단정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순결한 것은 아니다. 불결의 악은, 억압하고 제한하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본성을 거슬러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탐내며, 주께서 그들의 힘에 미치는 범위 내에 두신 구제책을 멸시하고, 무절제의 병을 그들이 극복할 수 있다고 완고한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을 무서운 실례로 처벌하신다. 그들을 완고하다고 했는데, 결혼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받고 그 대책으로 주께서 결혼을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멸시하며 또 결혼을 멸시하겠다는 맹세로 자기를 묶는 것은 완고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 14 장

성례1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식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2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 1 : 9)라고 되어 있다. 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 : 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 1 : 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3

 

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제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4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아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였다. 그들은 신부가 축성경( 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교리에 관한 것을 조금도 얻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라틴어로 말했다. 후케는 미신이 팽창해서,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쉰 소리로 속삭여야만 축성이 잘된다고 믿게 되었다.
성례의 말씀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훨씬 다르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말씀 자체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10 : 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하였으며(행 15 : 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 : 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 : 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게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임이 확실하다."5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우리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 사도들이 따라서 행한 일 그리고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가 지킨 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어떤 표징을 주실 때에 그 표징과 교훈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교훈이 없으면 우리의 감각 기관은 단순히 표징만을 볼뿐이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단순하지 않은 미묘한 내용이 없는 딜레마로 우리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정부 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반대자들은 이 비교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인"6이라고(롬 4 : 11) 부르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성례는 이 약속에 인을 친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약속들 자체를 보면 모두 서로 확인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에 적당하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성례와 문서에 찍는 인장은 다르다고 하는 반대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7 두 가지가 다 이 세상 물질로 된 것이므로, 성례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인을 찍어 확인하기에 불충분하며 인장은 보통 무상한 일에 관한 군주들의 법령에 찍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반대론은 구별한다. 그러나 신자는 눈으로 성례를 볼 때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명상에 의해서(내가 비유적으로 암시한) 여러 단계를 밟아 성례 안에 감취어 있는 숭고한 신비를 향해서 올라간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 "언약"(창 6 : 18, 9 : 9, 17 : 2)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겠다. 돼지를 잡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잡는 행위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돼지는 아무 내면적 또는 고상한 신비가 없이 잡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손을 서로 잡게 되는 때가 많은데, 바른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미련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8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9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0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    지이다. 7-13)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지 못한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제공되지만 악인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한 정죄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똑같은 논법을 쓴다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도 그것을 배척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복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문서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공문서에 찍힌 인장이 군주의 것이며 그의 뜻을 확증하는11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장을 우롱하며 비웃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까지 한다. 내가 위에서 한 비교는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되므로 더욱 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마치,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며 구원을 얻으라고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뜻을 전달하면서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12
따라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성례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성례에 포함시킨다. 예컨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 : 27),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 : 12-13). 그러나 그가 성례를 악용하는데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것들을 허무하고 차디찬 그림자와 다름없이 간주한다.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에서 역사하는 것을 불경건하고 패악한 위선자들이 사악하게 아무리 억압하며 애매 모호하게 하고 감추려 할지라도 성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어디서나 또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참으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영 또한 성례가 약속하는 것을 여전히 계시하며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인장과 같다고 단정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용하는 논리는 너무나도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아질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동요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3 그들은 주께서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눅 17 : 5) 좋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믿음을 가진 듯이 확신에 찬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막 9 : 24)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그들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었고 불신을 제거하면 더욱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양심이 어떤 논법보다도 그들을 더 잘 논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임을 자백한다면(좋든 싫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빌립이 내시에게 그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행 8 : 37) 말한다.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은 자기의 마음 한쪽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어떤 명사의 말에 자기는 배우면서 늙었다고 했다.14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 진전 없이 늙는다면 우리는 심히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완전히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엡 4 : 13). 그러므로 사도행전 8장 37절의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열렬한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무슨 일을 성의와 진심으로 하는 것을 "마음을 온전히 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시 119 : 10), "내가‥‥‥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 : 1, 138 : 1) 등등이다. 그러나 거짓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에는 보통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15라고 책망하신다(시 12 : 2).
여기서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나는 물론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고유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보고를 알게 되고, 성령의 광명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감각이 둔해서 영적인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16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17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18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는 일 즉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즉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이렇게 볼 때에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반대론도 곧 사라지게 된다. 믿음을 증진시키거나 강화하는 일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면, 믿음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께 부당한 처사가 된다는 반대론이 있다. 우리는 믿음을 강화 증진시키는 일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 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표현이 애매 모호하다고 한다면 아주 명백하게 해 줄 비유를 첨가하겠다. 어떤 일을 하도록 어떤 사람을 말로 설득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의견에 기울어지게 하며, 어느 정도 우리의 충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만한 모든 논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없다면 우리는 헛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또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없거나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우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권위를 멸시하는 곳에서는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설득도 별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좋은 특성이 모두 있을 때 우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곧 순종하게 되며 비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신다. 우리들이 귀에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 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서며 더욱 강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 확인을 새김으로써 효력이 나타나게 하실 때이다. 동시에, 빛들의 아버지께서(약 1 : 17) 태양 광선으로 우리 몸의 눈을 비추시는 것같이 성례를 통해서 일종의 중간적인 광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을 "씨"라고 부르셨다(마 13 : 3-23, 눅 8 : 5-15). 황폐해지고 버려 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 : 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 : 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전 3 : 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352-353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 : 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 : 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엡 2 : 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19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3.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20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21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22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 : 16, 겔 37 : 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23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성례 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례의 힘을 약화하며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반대로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힘을 성례에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어디를 읽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는다.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찾으라고 하며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점점 분리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허망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율법의 성례는(즉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 우리가 죽을죄로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의로우며 은혜를 준다고 궤변가들의 각 파는 이구 동성으로 가르친다.24 이런 생각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유해한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과거 수백년 동안 넓은 지역에 이 생각이 만연해서 교회에 큰 손실을 입혔다. 확실히 그것은 마귀적인 생각이다.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함으로써 이 관념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둘째, 성례를 의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25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두 가지에 대한 긴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도록 우리가 그 악한 것들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약속과의 관련이 없이는 성례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제시하는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고 사람이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것 이상의 것을 성례를 통해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마치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인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표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보이는 표징이 있어도 진정한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26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그의 다른 글에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고 성례를 받는데까지 이를 때도 있으며 성화의 생활에까지 이르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상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둘째 상태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다.27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과 같이 성례와 성례의 본체와의 구별이 생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성례는 그 의미하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28 한 것은 두 가지가 분리되는 데 대해서 말한 것이다. 또 유대 사람들에게 대해서 쓴 것도 같은 의미에서이다.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의 씻음 곧 세례는(딛 3 : 5) 지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 머리와 함께 중생하게 되는 은혜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29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주의 만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의 떡 조각이 유다에게 독이 된 것은 고가 악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선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30 조금 뒤에, "이 본체로 이루어지는 성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례가 어떤 곳에서는 매일 거행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먹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는다. 성례의 본체는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 아무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또 첨부한다. "먹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즉 보이는 성례가 아니라 성례의 힘에 도달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내적으로 먹는 사람이지 외적으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이로 씹는 사람이 아닌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31 이점에 대해서는 각처에서 받는 사람의 무자격에 의해서 성례가 그 실체에서 분리되며 허망하고 무용한 형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을 얻으며 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만일 이것이 간단해서 그 뜻이 다소 애매 모호하다면 나는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유식한 주장을 하는 피터 롬바르드의 오류는 더욱 용인할 수 없다.32 우리는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 내는 모든 원인을 버리고 이 한 가지 원인만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성례가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그렇다면 악인들은 배은 망덕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쓸모 없게 만들고 폐기하느냐고 혹 물을 것이다. 내 말은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여전히 견고하며 그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제시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의해서 성별된 상징이 실지로 그 이름같이 되며, 그 자체의 힘을 유지하는 것을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몇 마디로 잘 해결했다. "만일 우리가 육적으로 받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하다."33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에서 어거스틴이 성례를 그 진상에서 분리한다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에도 양자를 동시에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처럼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34 그는 여기서 피해야 할 두 가지 과오를 지적한다. 첫째 과오는, 표징을 받을 때 그것을 주신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태도를 취하며, 우리의 반대로 그 비밀한 뜻을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표징이 우리에게 대해서 전혀 결실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과오는, 우리의 마음을 보이는 표징보다 더 높이 비약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표징에서 오는 것 인양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게 만드신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완전히 말살되는 것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액체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부어도 흘러 없어질 뿐이다. 그릇 밖에는 온통 묻을지언정 그릇 속은 텅 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대인들이 성례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기록한 것에 있어서 비슷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35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나 언약의 비준을 전하는 담보물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사자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고, 다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성례는 담보물과 표이므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확증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의 임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집행할 때에 결실이 없고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표징으로 약속하며 표현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신다. 표징은 그 창시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여기서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그들이 말하는) 그의 고유한 능력으로 행동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을 외적인 상징들에 맡겨 버리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든, 그 도구가 그의 최초의 활동에 아무런 손상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에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용을 지켜서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36 안에 있듯이 물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37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즉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 점을 현명하게 경고한다.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성결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38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 : 9, 3 : 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 : 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생명나무는 나무였고 무지개는 무지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가 새겨진 후에는 새로운 형태가 생겼고 전과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허망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 멸망치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떤 이론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우롱하려고 저렇게 많은 색깔은 맞은편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이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우매함을 우리는 비웃는다.39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런 기념의 뜻을 인치신다면 이 모든 자연물은 우리에게 성물이 될 것이다. 은 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은 덩어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관인이 찍힐 때에 은전이 되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건에 말씀으로 표를 하셔서 단순한 자연물이던 것이 성물이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둘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연기 나는 풀무 속에 있는 빛을 보이셨다(창 15 : 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양털은 이슬에 젖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시며 또 그와 반대로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털은 마르게 하셨다(삿 6 : 37-40). 히스기야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일영표에 있는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 : 9-11, 사 38 : 8). 이런 일들은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역시 성례였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연합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40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들을 위해서 경건을 위한 일정한 행사를 제정하셨다. 그 후에 사탄이 이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41 그래서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비밀 종교에 입교시키는 의식과 그 밖의 타락한 의식들이 생겼다. 이런 의식들은 오류와 미신이 가득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종교를 고백할 때에는 외형적인 표징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표징이 나타내야 할 진리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회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성한 상징들 곧 진정한 경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의 그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지 않는 상징들을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성한 상징들은 무지개나 나무와 같이 단순한 표징이 아닌 의식이다. 혹은 여기서 주어진 표징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 표징들은, 우리가 위에서42 주께서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쪽에는 고백의 표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43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호 협약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식들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례를 의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키신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경륜에 따라 성례는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 17 : 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와(레 11-15장) 희생과 다른 의식들이(레 1-10장)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 28 : 19, 26 : 26-28). 나는 교회 전체가 쓰도록 제정된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목사들을 취임시킬 때44 안수하는 것을 성례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는 않으나 또한 그것을 정규적인 성례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보통 성례라고 생각하는 다른 행사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다.45
그러나 저 고대의 성례들은 현대의 성례전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인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46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후 1 : 20).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47 산상에서 모세 앞에 제시된 율법대로의 회막과 예배의 하늘 모형(출 25 : 9,40, 25 : 30)도 여기에 속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고대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동안에 어렴풋이 그를 예시했고, 현재의 성례는 이미 임재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일들은 하나씩 설명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끊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그뿐 아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며 확인하는 표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창 22 : 18), 그 후손에게서 유대인들도 복을 얻으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후손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였고(갈 3 : 16),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아담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할례와 아브라함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바울이 가르친 일이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즉 할례는 믿음의 의를 알리는 한 표징이었다(롬 4 : 11). 바꿔 말하면, 그 후손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일종의 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적당한 기회에 할례와 세례48를 더 자세하게 비교하겠다.
세례와 결례는 그들의 본성이 자신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악을 씻어 없애 버릴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히 9 : 10,14). 이 씻음은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요일 1 : 7, 계 1 : 5), 하나님 앞에 그의 순결하심을 가지고 가서 우리의 추악함을 덮는다.
희생은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49에 대해서 어떤 보속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있어서 피를 흘리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충분한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보속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였다(히 4 : 14, 5 : 5, 9 : 11). 그는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그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 : 8).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한 인류의 불순종을 그의 순종으로 말소하셨다(롬 5 : 19).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성례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욱 완전하게 계시 될수록 성례는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은 씻음을, 피는 보속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말과 같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 : 6). 곧 씻으며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도 이 일을 증거하신다. 참으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 : 8) 물과 피는 깨끗하게 하며 구속하는 증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성령은 이런 증거를 우리가 확신하게 만드신다. 이 숭고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온 때에(요 19 : 34)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원천이 라고 불렀다.50
우리는 아직도 이 점을 좀더 자세하게 논해야 하겠다. 확실히 성령의 은혜도 시대의 전후를 비교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요 7 : 8-9,38-39)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 하에서는 그림자가 있었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말도(골 2 : 17)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의 의도는 고대에 있었던 은혜의 증거에서 효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세례와 성만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과 같이 고대에는 은혜의 증거로 족장들에게 증명하려고 하셨다. 바울의 의도는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것을 찬양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율법 하의 의식들이 폐지된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러나 우리는 옛 율법과 새 율법의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리를 완전히 배척해야 한다. (이 교리는 내친 김에 언급할 뿐이지만) 그들은 옛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할 뿐이고 새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의 실재로서51 준다는 듯이 구별한다. 참으로 사도는 조상들이 우리와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 가르치며, 그 식물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을 때에(고전 10 : 3) 신약의 성례에 대한 것과 똑같이 구약의 성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을 계시한 것을 누가 감히 헛된 표징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또 바울이 다룬 일의 성격상 그의 주장은 분명히 우리편을 지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기독교의 무의미한 칭호와 외적인 표를 믿고 감히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이신 엄격한 태도를 예를 들어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죄악에 빠진다면 그들이 받은 벌이 우리에게도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비교가 적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짓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금한 은혜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성례에서 그 은혜가 같다고 했다. 영혼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특권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했다. 또 그가 다른 곳에서 믿음의 의를 인치는 인이라고 부른 할례에(롬 4 : 11) 돌린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우리의 세례에 돌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현재 성례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례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힘을 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느꼈다. 즉 성례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인치는 도장이었으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히브리서를 잘 해석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에 의해서는 죄는 속죄되지 않으며 그 옛 그림자들은 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다고(히 10 : 1) 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거기서 논의되는 비교를 무시하고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는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점만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의식들은 아무 진d퓬볕?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고 만 생각했다.52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율법의 의식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그들은 항의하는 방법으로, 바울의 글에서 "의문에 속한 할례"에(롬 2 : 29) 관한 말을 인용할 것이다. 의문(儀文)에 속한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언명은 할례를 세례보다 훨씬 낮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롬 2 : 25- 29, 갈 5 : 6, 6 : 15, 고전 7 : 19 참조).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말을 세례에 대해서 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바울 자신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왔을 때 받은 외면적인 씻음은, 만일 마음까지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고 또 끝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전혀 무시하신다고 말했다(고전 10 : 5 참조). 그 다음에 베드로는, 세례의 실상은 외면적인 씻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양심의 증거에 있다고 했다(벧전 3 : 21).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행한 할례를 완전히 멸시하는 것 같다고(골 2 : 11-12)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할례의 위엄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폐지된 할례를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는 옛 그림자를 버리고 실체 안에 굳게 서 있으라고 신자들에게 충고한다. 이 교사들은 당신에게 몸에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이미 몸과 영혼에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으므로 당신은 실체의 계시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림자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는 실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 모형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조상들 중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외면적인 할례가 그들에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반대를 막기 위해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즉시 부연하여 말한다(골 2 : 12). 이것은 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한 일을 지금은 세례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곧 세례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것 즉 유대인들의 의식은 모두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것은(골 2 : 17)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근에 언급한 일이 있다.53 참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히브리서의 여러 장에서 논의된 문제들이다. 동물의 피는 양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하고(히 9 : 12이하),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지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으며(히 8 : 4-5, 10 : 1),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의식들에서 완전한 것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했으며(히 7 : 19, 9 : 9, 10 : 1), 그 외에도 이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나는 이미 간단하게 말한 것을54 반복한다. 즉 바울이 의식들을 그림자라고 한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식들의 성취가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때까지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는, 이것은 효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말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능과 임재를 신자들의 마음속에 느끼게 만드셨지만,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까지는 모든 표징이 그가 계시지 않은 것같이 그를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이 모든 구절에서 바울은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의식만으로 경건이 성립된다고 가르친 거짓 사도들을 상대로 바울은 싸우며,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의식들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만을 말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들은 그 진정한 본연의 의미로 인정되지 않고 사악하고 거짓된 해석으로 왜곡되었다. 그 합당한 사용이 아니라 미신적인 악용이 문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의식은 모든 힘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의미하는 본체가 제거될 때에는 표징이 가진 것도 일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만나를 몸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에 자기의 말씀을 그들의 유치한 생각에 맞추셔서, 영혼에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그분께서 더 좋은 음식을 나눠준다고 말씀하셨다(요 6 : 27).
그러나 반대론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모든 화려한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는 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둘째,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그가 드디어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의식들은 성취되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이 폐지된 것은 그림자가 태양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세례와 할례를 비교하기로 결정한 곳으로55 미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간단히 말할 뿐이다.

 

26. 유사점과 차이점 : 어거스틴의 구별

현대의 가련한 궤변가들은 우리의 표징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글에서 성례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읽고 속은 것 같다. 어거스틴의 발언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옛 율법의 성례들은 구주를 약속했을 뿐이나 우리의 성례는 구원을 준다." 여기 있는 표현과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궤변가들은 자기들의 과장된 교리까지 발표했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인들의 글과 상반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의 뜻은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예고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56 파우스트에 대한 반박문에서도 "그들의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약속이었고 우리의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표다."57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들의 것은 그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그를 대표했으나 우리의 것은 이미 오신 그를 임재하시는 것같이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표시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른 곳에서 말했다. "율법과 예언자들에게는 장차 있을 일을 예고하는 성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성례들은 옛날 성례들이 장래의 사건이라고 선포한 것이 이미 나타났다고 증거한다."58 그러나 성례의 본질과 그 효력에 대한 생각을 그는 여러 곳에서 설명했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성례는 표징은 달랐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았으며 보이는 외형은 달랐으나 영적 능력은 같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다. 즉 서로 다른 표징은 서로 다른 말과 같은데 이는 말은 때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며 표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우리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나 그 음료의 물질은 달랐다. 그러므로 표징은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반석이었으나(고전 10 : 4)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제단 위에 안치되셨다. 그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물로 믿고 마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는지는 신자들이 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마신 것은 다르다 그러나 내면적인 의미를 보면 그들은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59 또 다른 구절에서, "이 신비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외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반석으로 대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60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61 우리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에 부합한다. (우리가 고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증인으로 생각해서 자주 인용하는) 어거스틴도 이런 뜻으로 가르쳤다. 즉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셨을 때에 그 수는 더 적으며 의미는 더 숭고하고, 능력이 더 훌륭한 성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이다.62
독자들이 간단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곧 궤변가들이 소위 opus operatum63(행한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거짓일 뿐 이며 성례의 본질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제정하실 때, 모든 것을 빼앗긴 가련한 신자들이 아무것도 성례에 가지고 오지 말고 오직 간구하는 태도만을 가지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례를 받음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이 받는 행동조차 (그들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할 뿐이므로) 그들의 공로로 돌릴 수 없다.

 

제 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징표이다. 1-6)

1. 세례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1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이런 목적은 모든 성례2에 공통된 것이라고 이미 가르쳤다). 세례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차례로 논하겠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것을 가져다주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씩 논하고자 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첫째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 (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설명하자면)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고 하겠다. 믿는 자는 모두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마 28 : 19, 행 2 : 38).
따라서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와 표식에 불과하며 군인이 그 직업의3 표지로서 사령관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은 사람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막 16 : 16)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2. 세례의 효력은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다음 말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엡 5 : 26). "우리를 구원하시되‥‥‥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 : 5). 그리고 베드로에 의하면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 : 21)고 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구원한다거나  물 자체에 깨끗하게 하며 중생하게 하며 새롭게 하는 힘이 있거나 여기에 구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성례에서 이런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의 말 자체가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의 말은 마치 생명의 말씀과 물로 주는 세례를 결합해서, 마치 "우리의 정결케 됨과 성화에 대한 소식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이런 세례를 통해서 그 소식이 인치 듯 확인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이어 베드로는, 이 세례는 육에서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서 온 선한 양심이라고 한다(벧전 3 : 21). 실로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는 정결이지 결코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피를 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씻는 진정한 물두멍이라고 확증하는 이 물에 대해서, 물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물의4 힘에 돌리는 사람들의 자기 기만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례의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논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요소와 그 밖의 모든 수단들이 떠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그러나 세례는 과거를 위해서만 받은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소진한 것처럼 어떤 다른 성례에서 새로운 속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초기에는 이런 오류 때문에, 생명이 위급하거나 임종시가 아니면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받아야만 일생 동안 지은 죄의 용서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 감독들의 글에는 이런 어리석은 경계심을5 공격하는 말이 많다.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는 일생 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세례받은 것을 회고하며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례는 한 번 받은 것이며 지나간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얻었다. 그의 순결은 영원히 풍성하고, 어떤 오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어 버리며 깨끗하게 씻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그런 대담한 짓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오직 자기의 죄에 지치고 눌려 있는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들을 일으키며 위로할 것이 있도록 그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고 했다(롬 3 : 25).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만 가련한 죄인들 곧 양심의 가책으로 상처받아서 의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지을 기회와 방종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야기시킬 뿐이다.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나는 세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중생했을 때에 세례만으로 받은 사죄를 세례 후에는 회개와 열쇠의 덕택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6 그러나 이런 생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열쇠의 권한도 세례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세례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죄인은 교회의 활동 즉 복음선포에 의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선포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죄의 씻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씻음을 나타내는 표징과 증거는 곧 세례가 아닌가? 그러므로 죄의 사면은 세례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저 고해 성사라는 허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문제는 전에 언급했고 앞으로7 적당한 곳에서 그 논의를 완결하겠다.8 본성이 야비해서 외형적인 사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갖는 인간이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보조 수단을 고안해서 이 결점을 폭로했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세례 그 자체가 고해 성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일평생 고해하라고 권고한다면 세례의 힘도 똑같은 한도까지 확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울 때마다 단호하게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죄의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세례는 또 다른 유익을 준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는 것과 그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알려 준다. 참으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롬 6 : 4). 사도는 이런 말로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경고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것을 파악한다. 즉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셔서 우리를 그 죽음에 접붙이려 하신다는 것이다(롬 6 : 5).9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 : 8).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고(롬 6 : 11) 권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논법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장사된 후에 할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는(골 2 : 11-12)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미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에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른다(딛 3 : 5).10 이와 같이 먼저 죄의 용서와 의의 전가가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개조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약속된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이 세례에서 받는 유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는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친교를 맺으시고자 하시는 그 연합과 친교의 가장 견고한 유대로서 세례를 공통 분모로 삼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으로 세례를 성별하셨다(마 3 : 3).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혀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한다(갈 3 : 26-27) 이와 같이 우리는 세례의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세례의 고유한 목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도들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마 28 : 19)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된 것은(행 8 : 16, 19 : 5)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세례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주는 사람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도 같이 불러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 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質料)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 그래서 요한이 처음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들도 그러한 세례를 주었다(마 3 : 6,11, 눅 3 : 16, 요 3 : 23, 4 : 1, 행 2 : 38,41).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이런 중생을 의미했고 "죄의 용서"는 깨끗하게 하는것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    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후에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똑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세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교훈이므로 같은 세례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과 사도들은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쳤고 그 점에서 서로 일치했다. 즉 다 같이 회개를 위해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그리스도에게서 회개와 죄사함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다(요 1 : 29).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며 의로우신 화해자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사도들은 이 고백에 무엇을 덧붙여 말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려고 애쓴 고대 저술가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권위를 너무 존중해서 성경의 확실성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이11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주장한 누가의 말은(눅 3 : 3) 듣지 않고, 요한의 세례에는 죄의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겠는가? 어거스틴도 요한의 세례에는 죄를 용서받을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실제적으로 용서되었다고 미묘한 구별을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12 누가가 요한은 그의 세례에서 죄의 용서를 약속했다고 분명히 증거하는데 왜 이 표현을 약화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간의 차이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차이는 한 가지뿐이다. 즉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눅 3 : 16, 행 19 : 4)는 것이다.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내렸다는 사실은 세례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사도들이 행한 세례도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세례도 요한의 세례보다 성령이 더욱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도록 파송되기 이전의 신자들보다 더 많은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행 8 : 14, 17).
나는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고 초대 저술가들이 말한 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행 19 : 3,6) 읽고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은 다음의 적당한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겠다.13
그러면, 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 (마 3 : 11, 눅 3 : 16) 이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세례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비교한 것이다.
즉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권능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의 혀와 같이 보내신 날에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나타났다(행 2 : 3). 사도들은 이 이상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었는가? 지금 세례를 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외적인 표징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고, 내면적인 은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이 점은 고대 저술가들도 각처에서 가르치며, 특히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누가 세례를 주든 간에 그리스도만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14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가 이야기한 육을 죽이는 일과 깨끗이 씻는 일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고,1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다(고전 10 : 2).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지배와 잔인한 속박에서 구출하셔서 홍해에 그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후에(출 14 : 21) 그들의 뒤를 바싹 따라온 바로와 애굽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하신 것은(출 14 : 26-28) 몸을 죽이는 일을 상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주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즉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으며, 우리의 바로인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지치게 만들지만 그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세례는 우리에게 약속하며 상징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시체가 바다 속에 잠기지 않고 바닷가에 있어서 그 무서운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출 14 : 30-3l), 우리의 이 원수도 여전히 위협하고 무기를 휘두르며 그 존재를 느끼게 하지만 정복할 힘은 없다.
구름에는(민 9 : 15, 출 13 : 21) 깨끗이 씻는 일의 상징이 있었다. 주께서 그들을 구름으로 덮어 서늘하게 해 주셔서 무자비한 태양열로 인하여 기진 맥진하게 되지 않도록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며 보호를 받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덮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불꽃의 엄습을 받지 않게 된다.
그 때에는 이 신비의 뜻이 애매 모호해서 아는 사람이 적었지만, 이 두 가지 은혜 외에는 구원을 얻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후사로 택하신 고대 조상들에게서 두 은혜의 표징으로 빼앗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 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

10.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그런데 세례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선전했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고집하는 생각이 있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원죄가 없어지게 되며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고, 아담이 창조된 대로 바르게 살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그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회복한다고 가르친다. 이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원죄나 원래의 의나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과 같이16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며, 그 부패로 인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다음에는 성경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 것이(갈 5 : 19)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에 신중하게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의와 결백과 순결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들까지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씨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본성은 죄의 씨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이 저주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확약을 받는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7 주께서는 이 표징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다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는데 오직 전가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의롭고 결백하다고 간주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점 중의 또 하나는, 이 비뚤어진 성질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곧 앞에서 "육체의 일"이라고(갈 5 : 19)18 한 것을 만들어 낸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으며, 샘에서 쉬지 않고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몸에서 해방되며 자기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까지는 사람의 정욕은 결코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물론 세례는 우리의 바로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으며(출 14 : 28) 우리의 죄가 죽는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죄가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우리를 더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19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가 충실히 붙잡고만 있으면 죄의 흔적은 지배적인 세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 안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 기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죄악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짓기 쉬운 사람들이 안심하고 죄악 속에서 잠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의 가시에 찔려 고민하는 사람들이 기진맥진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전진하는 중에 있음을 생각하여 매일 정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것을 훌륭하게 전진한 것으로 믿어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인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 때까지 끊임없이 씩씩하게 싸우며 전진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완전한 승리를 향해서 매진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력을 했는데도 아직 적지 않은 곤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겠다는 분발심을 일으키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목적은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 죽이는 일은 우리의 세례와 똑같이 시작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에게로 옮겨갈 때에 완성될 것이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 로마서 7장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다.20 그는 값없이 주시는 의를 논한 다음에,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을 논거로 삼아 우리는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추론하기 때문에(롬 6 : 1,15)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 중생의 약속을 세례에서 받는다고(롬 6 : 3이하) 첨부한다. 따라서 죄가 그 지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롬 6 : 12).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첨가한다(롬 6 : 14).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손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 폐지의 성질을 논하고(롬 7 : 1-6) 동시에 지금까지 두 번 연기해온 이 문제21 즉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논한다(롬 2 : 12-24, 7 : 7-13). 그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되기 위해서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 우리가 자신의 부패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가련함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저 부패한 본성은 세속 사람들에게서 곧 나타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대로 산다) 바울은 중생한 사람 즉 자기를 예로 든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과 싸우며22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 해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한다(롬 7 : 18-23).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롬 7 : 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감옥 생활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고 심히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첨부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롬 8 : 1) 하였다. 바울은 주께서 일단 은혜로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접붙이시고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공동체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속하는 동안은 (비록 죄에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가지고 다닐지라도)-죄책과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의 단순하고 바른 해석이라면 아무도 우리가 이상한 생각을 가르친다는 인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13. 세례는 고백의 표

또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23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끝으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능력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것을 본받아 같은 노력을 하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전 1 : 13). 그가 암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에게 몸을 바치며 그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세례 때에 한 고백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는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

14. 표징과 실상

이미 주께서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세례를 어떻게 사용하며 또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판단하기가 쉬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만드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는 것같이 받아야 한다.
이 표징을 통해서 말하는 이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증명이 된 일로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어 깨끗이 하며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 주시는 이도 주님시며, 우리를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하고 사탄에게서 그 지배력을 박탈하며 우리의 정욕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이도 주님이시며, 참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가 이 여러 가지 일을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물로써 외적으로 깨끗해지고 물에 잠기며 물에 둘러 쌓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참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성례의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이 유사점에 있다. 즉 우리는 물질에서 영적인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적인 것을 이런 형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은혜가 성례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자체의 힘으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 표를 이용해서 우리에 대한 주의 뜻을 즉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또 주께서는 우리의 눈에 단순한 외형만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임재하는 실재에 인도하시며 외형이 상징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신다.24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여기에 대한 증명으로서 우리는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기로 한다. 그는 이미 사죄와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역시 세례를 받았다(행 10 : 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사죄를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확실하게 단련되었다-참으로 보증을 얻어 확신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만일 세례 자체의 힘으로 죄가 씻기는 것이 아니라면, 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했느냐고 (행 22 : 16, 9 : 17-18 참조) 더러는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자각하는 데 따라 받아 얻게 되며 이 점은 주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증거하실 때나 혹은 이 확증하신 것을 더욱 충분하게 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실 때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한다. 아나니아의 말은‥‥"바울이여, 당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오, 주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확신을 얻으시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표징과 실체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세례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성례와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도 믿음으로 받는 정도만큼만 얻을 뿐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배은망덕의 증거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아야 한다. 세례에서 주신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고백의 상징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죄의 용서는 순결하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해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화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이 마지막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가‥‥‥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바울은 말했다(고전 12 : 13).

 

16.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단정한 것 즉, 성례는 집례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옳다고 하자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25 이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편지가 전해질 때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성례에서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 주의 필적과 인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논법은 목사의 가치에 의해서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한 도나투스파의 오류를 깨끗하게 반박한다. 지금 재세례파는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6 따라서 그들은 격렬하게 재세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마 28 : 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의 미련한 생각에 대항할 강력한 이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무지와 신성 모독에 참가하도록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 다른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례였다면 거기에는 확실히 죄를 사하고 육을 죽이며 영을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께 참가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서 할례를 받아도 무방했으며, 그런 표징이 무효하다고 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가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행되어야 된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도, 부분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해서 전체의 효력을 무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 오점도 없는 순결한 세례가 되기 위해서 구비해야 할 조건을 우리는 가르치지만 우상 숭배자들이 더럽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고대에도 여러 가지 미신 때문에 할례가 부패했지만 여전히 은혜의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냈을 때(왕하 18, 22, 23장),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그런데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 몇 해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의 의도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례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항상 확고하며 믿을 만했다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고 믿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믿을 만 하시다(롬 3 : 3) 모든 사람이 멸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세례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무시했고 약속이 없으면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감사할 줄 모른 우리의 맹목과 완고함을 자책한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약속을 모든 신자에게 실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참으로 우리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은 우리 안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자,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므로 주께서 유대 백성을 회개하라고 부르실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27 그들은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인간들에게서 할례를 받았으며 오랫동안 똑같이 불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시지 않고 다만 마음을 돌이키라고 권고하셨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언약을 깨뜨렸을지라도 그 언약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남아 있었고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깨뜨리는 제사장의 손에서 그 언약을 받았으며, 그후에는 그 언약을 더럽히며 무효화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시 세례를 주었다고(행 19 : 2-7) 주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상상한다. 요한의 세례와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가 똑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릇된 교훈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배운 후에 그 바른 믿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으니 바른 교리가 없는 세례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하며 또 우리는 지금 처음으로 맛보게 된 진정한 종교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28 중의 그릇된 열성 분자가 헛된 미신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사실에 두고, 요한이 이렇게 무식한 제자들을 파송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리가 없다. 성경에는 성령을 찬양하는 구절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바울이 묻는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받은 것은 요한의 참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정한다.29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바울에게서 진정한 교리를 배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30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하게 해석해서 성령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은혜를 "세례"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불과 성령의 세례에 대한 주의 말씀을(행 1 : 5) 회상했다고 한다. 베드로도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척에게 이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다(행 11 : 16).
또 이것은 그 다음에 첨가된 말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곧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다(행 19 : 6). 누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던 화술에 따른 것이다. 즉 우선은 사실의 요점을 말하고 그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31 글의 전후를 보면 누구든지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리셨다고 한다. 이 둘째 표현은 세례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처음 세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두 번째 세례로 시정 해야된다면 가장 먼저 사도들부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도 3년 동안이나 더욱 순수한 교리를 조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는 주의 자비로 우리의 무지가 매일 교정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시 침례를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강이 있어야 충분할까?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

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이 신비의 힘과 가치와 유용성과 목적은 이제 충분히 명백해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외형적인 상징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행해서 사람들의 무모한 짓을 억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비천한 일인 듯이, 축복 기도라기보다는 주문이라고 할 것을 고안해서는 물을 참으로 성별하는 것을 더럽혔다. 그후에 촛불과 성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숨을 내쉬는 것이 세례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32 나는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든지 첨가하는 것을 배척할 권리가 있다. 사탄은 복음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미련하고 속기 쉬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사기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더욱 야비하게 우롱을 했다. 그래서 침과 그 밖의 값싼 허식을 노골적으로 함부로 끌어들여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33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일체 제거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 세례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 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고백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준다(마 28 : 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그 완전한 광채를 나타낼 것이다.34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다른 사정에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례를 주다"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이며 고대 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35

 

20. "긴급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도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하는데,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들이나 모든 남자들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그가 임명하신 사도들에게만 이 일을 명령하셨다. 그는 친히 합법적인 관리인의 직책을 다하시고(눅 22 : 19),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그대로 성만찬을 집례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분명히 그들이 자기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있고 당장에 성직자가 없을 때에는 평신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 거의 교회의 초기부터 오랫동안 행한 관습이 되었다.36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지할 만한 건전한 이론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관습을 따랐거나 묵인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거스틴의 말에도 이 의문이 나타나 있다. "평신도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해야 된다고 경건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거나 소죄밖에 되지 않는다."37 여자들에 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38
그러나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다고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창 17 : 7) 이런 뜻이다.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서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만큼 그렇게 불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잘못 설명된 교리가39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조심성이 적어졌다.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멸망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의 옛 백성들보다 더 나쁘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 아래에서보다 지금은 더 제한된 듯하다. 이는 그 때에는 난지 8일 이전에 구원을 줄 만한 효력이 있던 약속이(창 17 : 7, 12절 참조) 지금은 어떤 표징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효력이 없으리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폐지하러 오셨다고(마 5 : 17 참조)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터툴리안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우기 사제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40 여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한 마르키온을 에피파니우스는 책망했는데, 그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이다.
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잘 안다. 정녕 부득이한 때의 비상 대책과 보통 관습과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가 여자들에게 세례를 집례할 권리를 주는 것은 웃음거리라고 선언하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이 부패한 관습을 어떤 구실 아래에서도 용서할 수 없다고 정죄한 것이 분명하다. 제 3 편에서 그는, 성모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면서 전혀 보류 조건을 첨가하지 않는다.41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십보라가 한 일을 인용하여 옳지 못한 주장을 한다(출 4 : 25).42 십보라가 돌을 집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노염을 풀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가납하셨다고 그들은 추론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면 앗수르에서 온 이주민들이 시작한 할례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왕하 17 : 32-33).
그러나 저 미련한 여인이 한 일을 모방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다른 타당한 이유들로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선례로 삼아서는 안 되는 드문 일이었으며(할례를 집행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하셨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으므로) 또 할례와 세례는 문제가 다르다고 내가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19).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세례를 행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셨으므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아론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히 5 : 4) 아무도 그 영예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소명을 받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타인의 직책 을 빼앗는 것이 된다(벧전 4 : 15 참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극히 사소한 일도 양심에 의심을 갖고 행하면 죄가 된다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롬 14 : 23). 여성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칙을 범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훨씬 더 중대한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마 19 : 6, 막 10 : 3).43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더 말하지 않겠다. 독자들은 십보라에게는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모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 십보라는 불평하면서 노하여 아들의 포피를 땅에 던지며 남편을 나무랐기 때문에 남편까지도 하나님께 대하여 노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사건은 순전히 십보라의 성급함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아들의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남편에게 불평을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모든 다른 점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남편이 있었는데 자기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의 남편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으뜸가는 예언자 모세였으며, 이보다 더 큰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나타난 일이 없었다. 십보라의 할례 거행이 그 때에 허락되지 않은 것도 지금 감독 앞에서 여성들이 세례를 집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논쟁을 쉽게 즉각적으로 해결할 원칙이 있다. 즉 유아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하다는 듯이 우리가 그 언약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불법 행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44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례나 어떤 첨가물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이 성례에 일종의 인을 첨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효이기라도 하듯 그 약속에 효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약속을 확증시하려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자녀가 세례를 받는 목적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외인이었다가 지금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약속의 복을 받아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으므로 이 엄숙한 표징에 의해서 교회에 가입되기 위한 것이다.45
그러므로 이 표징이 생략될 때에, 그 원인이 나태나 멸시나 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위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규정을 존경하는 편이 즉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게서만 성례를 구하는 편이 훨씬 더 거룩한 일이다. 교회에서 받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에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일치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그러나 현재 일부의 열광적인 사람들이 유아세례 문제로 교회를 소란하게 하며 선동을 계속해서 그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광태를 억제하기 위하여 여기 부록을1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평화를 중시하며 또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무 까다롭게 시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이 강화가 세례의 비밀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체계화할 것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공격할 때에 그럴 듯한 논거를 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외람된 생각과 타락한 호기심이 끌어들인 것이며, 결국에는 우매한 자기 만족감으로 경솔하게 관습화된 것이라고 한다.2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위에 확고하게 확립된 성례가 아니면 가느다란 실에 달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올바르게 깊이 생각할 때에, 만일 주의 거룩한 규례에 대한 이런 중대한 비난이 잘못되고 부당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규례의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 만일 경솔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 드러날 경우에는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표준으로 세례의 진정한 준수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폐지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오만불손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표징을 올바르게 고찰하는 것은 그 외형적인 의식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을 제정하실 때 의식이 표시하도록 하신 그 약속과 영적 비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잘 알고 또 인정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가치와 목적 즉 그 본질을 완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물질과 물질적인 외형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세례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세례가 표현하는 내면적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이 일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례의 견고한 진상 이를테면 그 본체를 파악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될 때에 그는 외형적으로 물을 뿌리는 이유와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일들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전적으로 보이는 의식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례의 힘이나 성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물의 의미나 가치까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발언은 성경의 여러 구절이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이상 더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세례가 주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효력과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우선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세례는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가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한 가지 첨가시키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3 된다.

 

3. 세례와 할례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할례가4 있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표징이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서로 같은가를 검토하기로 하자. 이렇게 검토한다면 둘 사이의 비슷한 관계가5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7 : 7,10). 그리고 모든 것을 풍부하고 충족하게 가질 것이라고 하셨다(창 17 : 1,6,8).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손을 모든 복의 원천으로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해석하시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증명하셨다. 곧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눅 20 : 38, 마 22 : 32). 그러므로 바울도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멸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셨는가를 가르칠 때에, 그들이 할례의 언약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리스도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다고 추론했다(엡 2 : 12). 이 모든 것은 언약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접근하며 영생에 들어가는 첫 단계는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으리라고 하는 세례의 약속에 해당한다. 후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결백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신다(창 17 : 1). 이것은 육을 죽이는 것 또는 중생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의 포피를 베어 버리라고 권고함으로써(신 10 : 16)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고 설명하며, 이 때문에 땅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신 10 : 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실 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에 받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신 30 : 6). 또 아무도 자기 힘으로 진정한 할례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일은 예언자들도 자주 반복하여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a뻘??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렘 4 : 4, 겔 16 : 30).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에서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다. 할례는 그들에게 죄사함을 받음과 육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두 가지를 겸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기초라고 한 우리의 가르침과 같이 그가 할례의 기초가 되신 것도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창 12 : 2-3). 이 은혜에 인을 치기 위해서 할례의 표징이 첨가된 것이다.

 

4. 차이는 오직 외적인 것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표징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표징의 힘은 약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는데) 그 약속은 두 표징에서 똑같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죄와 영생이 약속되었다. 다음에 표현된 것 중생도 같다. 두 표징의 기초 즉 이런 일들을 실현시키는 기초도 같다. 그러므로 성례의 힘과 성격을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내적 신비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는 외형전인 의식에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약속과 거기에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외형적인 의식은 다수 경미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6 모든 성경 해석을 검토하라고 가르친(롬 12 : 3,6) 사도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어떤 유사한 관계와 비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교회에 처음으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표현이었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에 참가하겠다고 고백하는 표였기7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성별되어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며 우리편에서도 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우리 사이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런데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물이라는 요소와 외형적인 관례에 그치고 그 영적인 신비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말을 하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말을 한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영적 신비를 설명한다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들도 참여하게 하셨다(창 17 : 12 참조).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 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 시대 유대인의 유아들과 똑같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상을 안다면 왜 그들을 외형에서 쫓아 보낼 것인가?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든 반대론자들을 충분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례8에는 일정한 날이 있었다고 하는 반대론은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같이 날짜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날짜를 정하시지 않으면서 엄숙한 의식으로 유아들을 자신과의 언약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더 확실한 지식을 열어 준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창 17 : 14 참조) 옛날 유대인과 동일하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명백하다. 그리스도가 와서 아버지의 은혜를 축소시키셨다고 하는 흉악하고 모독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으므로 거룩한 자손이라고 불렀다(스 9 : 2, 사 6 : 13). 그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인정되며 한쪽 어버이만이 신자일지라도 거기서 난 자녀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결한 자손과 다르다고 사도는 확언한다(고전 7 : 14). 그런데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직후에 외적인 성례로 유아들에게 그 언약을 인치라고 명령하셨다(창 17 : 12). 그런데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는 인을 치지 않겠다는 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할례 이외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언약을 확인하라는 명령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없으며 그 할례는 오래 전에 폐지되었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주께서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할례를 제정하셨으나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 (우리와 유대인 사이에 공통된)주의 언약을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언약은 공통되고, 언약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공통적이다. 확인하는 방법만이 다르다-그들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세례가 대신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유대인들이 후손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모호해지고 확실성이 적어질 것이다. 이런 말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중상모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신 사랑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명백하고 풍부하게 땅 위에 부어졌으며 사람들에게 선언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있던 때보다 이 은혜를 더 심한 악의로 은폐하거나 혹은 나타내더라도 더 무력한 증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기 위해서란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자신에게 데려온 유아들을 다정하게 안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마 19 : 1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신 것과 세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들어 안으시고 축복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기도로 보살펴 주자고 말한다.9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 : 14)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친교의 상징이 아닌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안으시며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며 그들을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그 행동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이 구절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다른 옹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버린 아기들과 어린아이들"10이라고 부른다(눅 18 : 15, 마 19 : 14, 막 10 : 13 참조). 이 두 마디의 희랍 말은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다"라는 말은 "접근한다"11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의 거미집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12 하셨으므로, 천국은 유아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건전한 논점도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인정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이 나이 때문에 자신에게 외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을까? 유아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실제로 젖먹이들을 의미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 : 14). 유아들이 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이런 자"라는 말은 유아 자신들과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의 확고한 승인을 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들의 미련한 항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행 16 : 15,3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의 제정 정신을 숙고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도 이 원칙을 지킨다. 참으로 세례의 제정 목적에 주의만 하면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서 세례를 빼앗는 것은 곧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후 오랫동안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13 이 점에서 그들의 부정직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저술가라도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14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이 행사에서 오는 유익을-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부모들과 세례를 받는 유아 자신들에게15 오는 유익을-간단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16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 20 : 6)17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창 17 : 14).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미친 짐승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제도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데 쓰는 논법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첫째, 그들은 세례와 할례의 유사성 때문에 너무도 구속과 제한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두 표징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분리시켜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 두 표징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각각 포함된 언약도 아주 다르며 어린이들에 대한 소명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첫째 점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  들은 할례는 육을 죽이는 모형이었으나 세례의 모형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 우리의 입장을 잘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근거는, 세례와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우리는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옛날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준 의미를 우리에게는 세례가 나타내 보인다고 추론한다.18
언약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만용으로 성경을 남용하며 곡해한다. 그것도 한 구절만이 아니라 취급하지 않는 구절이 없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히 육적인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같이 만든다. 그들과의 언약은 현세 생활을 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준 약속은 현세의 물질적 유익이었다고 한다.19 이런 주장이 승인된다면, 유대 민족은 (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을 살찌우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배부르다가는 영원한 멸망에 빠질 운명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할례와 첨가된 약속을 우리가 말하면, 할례는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으며 그 약속은 육적인 것이었다고 그들은 곧 대답하기 때문이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할례가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다면 우리는 세례도 그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사도는 어느 한 쪽이 더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에 거하는 죄의 몸을 벗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른다(골 2 : 11). 후에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첨부한다(골 2 : 12). 이런 말씀은, 세례의 실천과 진상은 곧 할례의 진상과 실천이며 둘은 똑같은 의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들은 이전에 할례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던 일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세례가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두 표징의 약속과 신비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설명했으므로 이제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신자들에게, 바로 영적인 하늘 일을 나타내는 표징을 땅에 붙은 것, 문자 그대로의 표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하라고 경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지 못하도록,20 그들이 아주 파렴치한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 가지 항의를 여기서 논박하겠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재가하셨을 때에 그 언약을 포함한 근본 약속이 영적이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또 그 약속을 받은 조상들도 그들이 열망한 영생에 대한 확약을 얻으려고 그 약속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으며)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호의를 지상적이며 물질적인 은혜로 증명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영적인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이 은혜를 그의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다른 약속을 첨가하셨다(창 15 : 1,18). 유대 민족에게 주신 모든 지상적인 약속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약속들은 저 영적 약속을 원천으로 삼아야 하며 영적 약속이 항상 첫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신구약간의21 차이를 논할 때에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간단히 논한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그들은 "자녀들"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들을 그의 자녀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구별한다. 그러므로 할례에 의해서 저 언약의 공동체에 접붙임을 받은 신체적인 유아들은 신약 시대의 영적 유아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생을 얻도록 중생한 사람들을 예시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2 이런 말에는 희미하게 진리의 불꽃이 보인다. 그러나 이 경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우선 손에 닿는 것을 잡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들러붙어서는 일체 여러 가지 일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속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건전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그의 영적 후손들의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의 자리를 일시 차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본래 그와 혈연이 없었지만 그의 자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갈 4 : 28, 롬 4 : 1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복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게 약속된 일은 전혀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큰 오류이다. 우리는 성경의 확실한 인도를 받아 더 나은 목표를 향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후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다(창 12 : 3). 동시에 그와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확약하신다(창 17 : 7). 그리스도를 이 복의 근원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이 약속을 계승하게 되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은 모든 족속 사이로 널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세계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하늘 영광 가운데 앉으려는 것이었다(마 8 : 11). 그러나 그보다 수 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에게 그와 똑같은 위대한 자비를 베푸셨다.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제쳐놓으시고 이 한 민족을 택하셔서 얼마동안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만 한정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의 소유와 (출 19 : 5) 자신의 사신 백성이라고(출 15 : 16) 부르셨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 은혜를 확증하는 할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이 상징으로 가르치려 하셨다. 이 일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씀은 영생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로 일단 결정한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후에 그는 믿음으로 인한 의를 확인하는 일인 할례를 표징으로 받아서 무할례자와 할례자 즉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대에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조상이 되었다(롬 4 : 10-12).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영예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의 조상이었다. 사도가 말하듯이(엡 2 : 14),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이 허물어진 후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세례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의식만을 자랑하는 자들의 교만을 꺽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들만의 조상이란 생각을 명백하게 부정한다(롬 4 : 12). 지금은 세례에서 물밖에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헛된 생각을 같은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반대론자들은 또 사도의 다른 구절을 내놓을 것이다(롬 9 : 7). 거기서 사도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난 자만이 그의 후손으로 인정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브라함 의 혈통에 의한 후손에게 어느 정도의 지위를 주는 데 비해서 사도의 말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논하는 문제점을 더 주의해 보아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후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이런 혈통 자체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에서를 예로 든다(롬 9 : 6-13). 외인과 같이 제거된 이 두 사람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이었지만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갔다. 이 사실에서 사도가 후에 주장하는 결론이 나온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롬 9 : 15-16) 그러나 언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즉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의 이름으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혈통을 헛되이 믿는 것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일단 맺으신 언약은 결코 수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로마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후손이 그 위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논한다. 이 위엄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복음의 첫째 가는 자연적인 후계자였고, 비록 그들이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무가치한 자로 버림을 받았지만 하늘의 복이 이 민족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사도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하고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롬 11 : 1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 세대에 큰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 (우리와 그들을 비교하는 듯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복자 또는 조산아라고 부르며 적자가 아니라 양자라고 한다. 또 마치 가지를 꺾어서 다른 나무 줄기에 접붙인 것 같다고 한다(롬 11 : 17).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특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가정에서 맏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예는 그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제공된 것을 거절하며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완고해서 복음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사도는 그 복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 : 29)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어떤 저울로 달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서자나 외인들과의 구별은 물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그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시기 위해서 할례로 인을 치셨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형편이 이와 같다. 바울이 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그 부모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논하는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그 부모에게서 동일한 성화를 받는 다고 가르친다(고전 7 : 14). 이 점을 근거로 그는 불결한 죄가 있는 사람들은(고전 7 : 15)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우리의 반대론자들이 내린 결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옛날에 할례를 받은 유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한 영적 유아 시기를 예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고 말했다(롬 15 : 8).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에 적용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서 일단 약속하신 일을 이행하시려고 유대 민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한 것처럼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언약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에게 비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사도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은 뜻으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행 2 : 39) 언약을 받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당연히 복음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언명하며, 다음 장에서는(행 3 : 25) 그들을 "언약의 자손" 즉 상속자라고 부른다. 위에서 인용한 사도의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사도는 유아들에게 새겨진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엡 2 : 11-13).23
만일 우리가 그들의 너절한 말을 듣는다면, 주께서 율법의 둘째 계명에서 그의 종들의 후손들에게 천 대까지도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약속은 어떻게 되겠는가?(출 20 : 6)24 우리는 여기서 비유로 회피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경박한 핑계가 될 것이다. 그 약속은 폐기되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율법이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영원히 유익한 것이 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마 5 : 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대해서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야 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더우기 그들이 내세운 세례와 할례의 차이점은 우습고 조리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모순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속하지만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제 8일에 속한다고25 그들은 말한 다음, 즉시 이 말을 잊어버리고는 논조를 바꾸어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의 모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례는 매장이라고 부르며 이미 죽은 자가 아니면 매장할 수 없다고 한다. 미친 사람의 정신없는 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조리가 없을까? 처음 언급한 대로한다면 세례가 할례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요 둘째 언급에서는 할례보다 뒤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공상을 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말씀이라고 숭배할 때,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한 차이점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제 8일에 대해서 비유를 말하고26 싶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면 여덟이라는 수는 (제 8일에 있은) 부활에 관련시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부활에 달렸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혹은 현세 생활의 전과정에 관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세 생활에서는 육을 죽이는 일은 생명이 끝나고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27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 8일까지 미루신 목적은 아직 연약한 유아들을 생각하신 것으로서 이는 갓난 핏덩어리 같은 아기에게 할례의 상처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8
이미 죽은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매장된다고 하는 말은 훨씬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어 장사지낸 바 된다고 하지만 그 조건으로서 우리는 죽은 후에 육을 죽이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롬 6 : 4) 확실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비슷한 속임수로서, 세례가 할례와 같아야 한다면 여성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트집을 잡는다.29 이스라엘 자손의 성결이 할례의 표징으로 확인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 표징으로 남녀가 다 같이 거룩하게 되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남자의 몸은 본래 할례로 인칠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에게만 할례를 행하였으나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여자들도 할례의 동반자와 협력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이런 미련한 말들을 물리치고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인 신비 즉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곧 어린이들은 그 나이로 인하여 세례가 의미하는 신비 즉 영적 중생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주 갓난아기는 영적으로 중생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어린이들이 거듭나기에 적합한 연령이 될 때까지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 짓는다.30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도처에서 이 모든 이론에 반대한다. 어린이들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롬 5 : 12이하) 어린이들은 죽음 가운데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하신다(마 19 : 14). 무슨 까닭인가?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에게 참가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추방과 죽음을 선고한다.
만일 그들이 이런 선고를 주저하면서 어린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오류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된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선언하므로(고전 15 : 22),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소망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구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하며(엡 2 : 3) 죄 중에 잉태되어(시 51 : 5) 항상 정죄 아래 있다고 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열리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본성을 떠나야 한다. 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고전 15 : 50)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려라(이것은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이 진리라면(요 11 : 25, 14 : 6) 우리는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하느냐고 묻는다.31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구원을 받을 유아들을(어떤 유아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으므로) 주께서 먼저 중생시키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부패가 그들에게 있다면, 오염된 것이나 부패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계 21 : 27)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오염된 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다윗과 바울이 주장하듯이, 유아들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면(엡 2 : 3, 시 51 : 5) 그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대상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 심판자 자신께서 하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다시 난 사람들에게만 열린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는데(요 3 : 3) 우리는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런 반대론자들을 침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 한 증거를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며(눅 1 : 15) 다른 태아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여기서도 그들은 우롱하면서 핑계를 말하지만 아무 소득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것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며 이 한 가지 예를 근거로 주께서 유아들을 매양 이렇게 다루신다는 직접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고 우롱한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논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제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의 힘을 좁은 범위 내에 가지려고 하는 그들의 악한 불법 행위를 폭로하려는 것뿐이다. 그들의 다른 궤변도 역시 무가치하다. 그들은 "모세로부터"라는 말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법에 의해서 "어렸을 때부터"라는 말과 같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말을 했을 때에는, 요한은 나기 전부터 성령이 충만하리란 것을 의미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법칙을 강요해서, 원하시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은 적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아이도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만드셨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갓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함을 받으셨다. 그것은 연령의 구별 없이 그의 선민들을 자신 안에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으로 범한 불복종의 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육을 입으셨다. 육으로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육을 취하시며 성령의 거룩함으로 충만하셔서 그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얻는다면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유아 시기가 성화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이 현세에서 불려가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화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 반대론자들은 성경에서 성령은 썩지 않을 씨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중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벧전1 : 23).32 그들은 이 점에서 베드로의 발언을 오해하였다.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배운 신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중생의 유일한 씨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 할 수 없다고 하는 추론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유아들을 중생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으로서는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마음대로 유아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권능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불완전한 논법일 것이다.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그러나 믿음은 듣는 데서 생기는데(롬 10 : 17), 유아들은 아직 듣지 못하며, 그들은 선악을 모른다고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신 1 : 39)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반대론자들은 말한다.33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도가 들음을 믿음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 보통 사용하시는 순서와 방법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지 결코 하나님에게 일정 불변의 법칙을 지정하며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런 다른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부르셨으며 내적인 방법으로 즉 설교와는 별도로 성령으로 마음속을 비추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한 유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유아들이 조금 후에 완전히 즐길 은혜의 일부분을 지금 받는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충실한 삶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데 있다면, 어떤 어린이들이 아주 갓난아이 때에 죽어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 갈때에 확실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접되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의 빛의 완전한 광채로 비추시려는 유아들을 지금 작은 불꽃으로 비추시기를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것을 불가하다고 할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그들을 이 육신의 감옥에서 구출하시기 전에 그들의 무지를 제거하시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그들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받는다든지 또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지식을 가졌다고 경솔하게 단정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은 채 남겨 두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큰 소리로 부정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둔한 교만을 나는 조금이라도 억제하려고 한다.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그러나 이 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례를 회개와 믿음의 성례라고 덧붙인다. 갓난 유아기에는 회개나 믿음이 생길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세례의 의미가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유아들에게 세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34 그러나 이런 창은 우리를 향한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아서 할례 또한 회개의 표란 것은 아주 분명하다(렘 4 : 4, 9 : 25, 신 10 : 16, 30 : 6 참조). 그리고 바울은 할례를 믿음으로 인한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롬 4 : 11).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유아들의 몸에 할례의 인을 치셨는지는 하나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세례와 할례는 경우가 같으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한쪽에 주는 것을 다른 쪽에 거부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유아 시기는 영적 유아들을 상징한 것이라는 상투 수단으로 도망하려 한다면 이 길은 이미 막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의 성례로서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셨으므로, 지금 유아들을 세례에 참가시키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일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그런 것과 같이, 이 일에서도 불경건한 자들의 훼방을 충분히 물리칠만한 지혜와 의가 빛난다. 유아들은 비록 할례를 받는 순간에는 그 표징의 뜻을 그들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죽이는 할례를 참으로 받았으며, 이 죽이는 일은 장성한 후에 실행할 것이다. 요컨대 이 반대론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유아들은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세례의 의미를 곡해해서 우리에게 반대하는 것은 이 대답에 의해서 모두 결정적으로 반박된다. 바울이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를 때에(딛 3 : 5) 그는 세례에 이런 부전을 붙였다. 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세례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추론한다.35 그러나 우리는 할례도 중생을 의미했으므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면 할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든지 그들의 추론을 반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일이 우리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이미 여러 번 시사한 바와 같이) 할례를 흔드는 경향이 있는 어떤 논법도 세례를 공격할 힘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권위에 근거한 일은 아무 이유가 없올 지라도 확고 부동하지만,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하신 것이 아닌 유아세례나 그 밖의 비슷한 일들에는 그런 경의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36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일단 이 딜레마에 빠진 이상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 유아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합당하며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비난을 받아야 하든 지의 둘 중의 하나이다. 그 명령에 불합리한 것이나 어리석은 점이 없었다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일에서도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 21-22)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논제에 대해서 불합리하다는 낙인을 찍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씻어버리는 주장이 있다.37 즉 주께서 선택하시기로 의도하신 유아들이 중생의 표징을 받았으나 장성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힘으로, 주만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만일 그들이 장성해서 세례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갓 태어났을 때 그들에게 중생의 표를 주어 일평생 그 뜻을 명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들에게 새로워지겠다는 열의가 불일 듯 일게 될 것이다.
바울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된다고 가르치는 것도(롬 6 : 4, 골 2 : 12)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말은 세례를 받을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근본 교리를 선언하려는 것뿐이다. 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세례 전에 매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모세와(신 10 : 16) 예언자들도(렘 4 : 4) 유아시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할례의 의미를 생각나게 했다.
동일한 취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편지하였다(갈 3 : 27).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그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은 이 신비의  뜻을 이해한 다음에 표징을 받아야 하지만 유아들은 다른 순서를 밟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곧 설명하겠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구절이 그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구절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례는 몸의 오염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이 고백하는 증거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3 : 21). 사실 이 구절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위해서는 공허한 허풍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38 그러나 그들은 실상이 표징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틀린 생각을 되풀이한다. 이는 할례의 진상도 선한 양심의 동일한 증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양심의 증거가 할례의 진상의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에 할례는 장래를 위해서 부여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리신다. 따라서 유아 세례에 있어서 주께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현재적인 효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22.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런 종류의 논법은 모두 성경을 반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비슷한 나머지 논법들을 간단하게 추궁하겠다. 그들은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받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시한다.39 이 점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견해는 큰 지지를 받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죄인이므로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서 자비의 소망을 빼앗으시지 않고 오히려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실제보다 훨씬 낮은 표징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따라서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 던진다. 즉 유아들은 죄사함을 받으므로 그 유아들에게서 그 표징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께서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인용한다(엡 5 : 26). 그들 자신의 오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을 인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쉬운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씻으실 때에 세례에 의한 확증을 원하신다면, 어린이들에게 이 증거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들을 천국의 상속자라고 부르셨으며(마19 : 14) 그들은 당연히 교회의 일부로 인정된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는 물로 씻음으로써 깨끗하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보편 교회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다른 곳에서(고전 12 : 13)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한 말도 우리는 같은 식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유아들이 그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 우리의 믿음의 요새에 가하는 그들의 공격은 맹렬하기만 하며 사용하는 무기 또한 많기도 하다.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

23. 어른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이제 그들은 사도 시대의 관습을 보고, 그 때에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회개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으라고 권고했다(행 2 : 37-38). 마찬가지로, 빌립에게 내시가 세례를 받겠다고 청했을 때 빌립은 그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행 8 : 37).40 이런 기사를 읽고 그들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례를 허락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법을 인정한다면 처음 구절은 믿음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에 회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증명이 될 것이며, 둘째 구절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두 구절은 서로 보충하고 따라서 서로 연결시켜야 된다고 대답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구절들도 이 두 구절과 비교해야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서 뜻을 해석해야 할 구절이 많다.41 여기에 인용된 구절이 그 예다. 베드로와 빌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생각하며 믿음을 이해할 만한 나이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회개하고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유아들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할례의 표를 받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을 배워야 했다. 할례에 의해서 확인된 언약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는 민족적으로 외인이었기 때문이다.42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여호와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에, 우선 할례를 주시면서 그 표징의 의미를 감추시려 하지 않고 먼저 그와 맺으시려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언명하셨다(창 15 : 1).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후에 그를 성례에 참가하게 하셨다(창 17 : 1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성례가 믿음 다음에 있었고 그의 아들 이삭의 경우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 먼저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그때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던 장성한 아브라함을 이제는 언약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려고 했으므로 먼저 언약의 조건들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공정한 행위였지만 그의 갓난 아들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은 약속의 내용에 따라 상속권에 의해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는 (문제를 더 간단 명료하게 표명하기 위해서) 신자들의 자녀들이 이해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약에 참가하면, 언약의 조건에 대한 서약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표징을 거부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을 자기를 위해서 낳은 자녀라고 부르신다(겔 16 : 20, 23 : 27). 그 후손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창 17 : 7 참조) 사람들의 어린이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불신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연결되기 전에는 언약의 공동체에 대해서 외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표징의 의미가 그에게 잘못 이해되고 또 이해되지 않을 때에 그가 표징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도 이런 뜻으로,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을 때에는 언약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엡 2 : 12). 내가 오해하지만 않았다면 이 간단한 발언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장성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으므로, 언약 사회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믿음과 회개가 있기까지는 그들에게 세례를 휘장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난 유아들은 직접 언약의 상속자로서 태어났으며 하나님께 용납하였으므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43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 기자가 한 말도(마 3 : 6) 이것과 관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교도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만족할 만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세례를 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더우기 그들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요 3 : 5) 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례에는 현재의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친히 세례를 중생이라고 부르시지 않느냐고 한다. 유아들에게 중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인데, 우리는 무슨 구실로 중생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세례를 그들에게 허락하느냐고 한다.44
우선 그들은, "물"이란 말이 있다고 해서 이 구절은 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곡해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에, 니고데모가 육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성령 즉 믿는 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는 데 있어서 물과 같은 일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단하게 "물과 성령"을 "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또 이것은 신기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3장에 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 : 11, 눅 3 : 16, 요 1 : 26,33 참조)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이며, 성령은 중생시키는 일에서 불의 기능과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며, 성령은 물이 몸에 대해서 하는 일을 영혼에 대해서 수행한다. 나는 다른 분들이 다른 해석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45 이것이 참뜻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구하는 사람은 모두 그 본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불쾌하고 너절한 비난을 하기로 작정한다면(그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한 다음에) 세례가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고 그들을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보면 물이 성령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영적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영적 은사가 세례 후에 오는 것이라면 나는 바른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너절한 반대론은 일체 버리고, 우리는 내가 제창한 단순한 해석을 고수해야 한다. 즉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보내는 자들의 공상을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46 그들의 가정에 따라서 세례는 어른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경건에 대한 초보 지식을 올바르게 배우고 세례를 받을 날이 가까운 어린이가 모든 사람의 기대를 어기고 돌연히 죽을 경우에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인가? 주의 약속은 분명하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5 : 24).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세례는 멸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멸시한다면 주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세례를 받을 능력을 빼앗긴 사람은 멸망한 것으로 곧 인정해야 할만큼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공상에 찬성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할 만큼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예외 없이 정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모든 유아들에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유아들에게 천국을 주신(마 19 : 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들의 의견이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관계된 일을 우리가 다 인정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소득이 있으려면 우리가 이미 확립한 교리를47 그들은 우선 논박해야 할 것이다.

 

27.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세례의 제정 자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견고한 보루가 된다고 자랑한다. 마태복음의 맨 끝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먼저 그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고 다음에 세례를 주라는 둘째 명령을 하셨다고 한다(마 28 : 19). 그리고 그들은 마가복음의 맨 끝장에 있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첨가한다(막 16 : 16). 세례를 주기 전에 가르치고, 세례에는 믿음 다음가는 둘째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의 음성이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이상 무엇을 더 구하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또 주 예수께서는 서른이 되시기까지 세례를 받으시지 않음으로써 친히 이 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마 3 : 13, 눅 3 : 21-22).48
기막힌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자승자박하고 그 무지를 폭로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신 때부터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세례를 주게 하셨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마치 이 두 구절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것같이, 거기서 세례에 관한 법칙을 연역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들의 이 오류를 묵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대체 이 논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밀한 곳이 아닌 넓은 들판으로 밖에 도망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니며‥‥‥전파하라‥‥‥세례를 받는"(막 16 : 15) 또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막 16 : 16)이라고 한 말씀의 순서에 집착해서 세례를 주기 전에 전파해야 하며 세례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믿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세례부터 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주께서는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8 : 19-20).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에 관해서,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고찰하였다(요 3 : 5).49 그들이 고집하는 대로 해석한다면, 여기서 세례를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영적 중생보다 세례가 먼저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물로" 거듭나라고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28. 마가복음 16 : 16에는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

그들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이 근거도 이제 얼마만큼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말로 풍성하게 변호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점잖지 못한 방법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내용이 충실한 대답을 하겠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한 부록으로 첨가하시면서 세례를 주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천하 만민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목적은 그들이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각지에서 그의 나라로 모으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물론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그 후에, 이런 사람들이 배운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첨부하시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부언하셨다(막 16 : 16). 이때 하신 설교에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었는가?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형식의 논법인가? 장성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는 논법을 쓴다.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복음을 가르치라는 말씀밖에 이 구절에서 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막는 장벽을 쌓을 수 있으면, 어디 쌓아 보라.

 

29. 예수님은 성년자의 세례의 원형이시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를 장님이라도 볼 수 있도록 나는 명백한 비교를 사용하여 그것을 폭로하겠다. 일하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사도가 말한 것을 구실로 삼아(살후 3 : 10), 유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 침을 뱉어도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일정한 종류와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을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우에서 우리의 논적들의 논법이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없다. 어른들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을 그들은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성숙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정한 원칙에 이 연령층을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예도 그들의 입장을 전혀 돕지 않는다.50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서른 이후였다(눅 3 : 23, 마 3 : 13). 이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으로 세례에 든든한 기초를 주려고 하셨다. 요한이 앞서 놓은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교훈으로 세례를 확립하려고 하셨을 때, 그 제정하시는 일에 더욱 큰 권위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몸으로 그 제도를 거룩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즉 자기가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에 실천하셨다.51 요컨대 그들은 이 구절에서 세례는 복음 선포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살로 정하는 것이 좋다면, 그들은 왜 이대로 행하지 않고 그들이 보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세례를 받는가?
이 나이를 고집한 그들의 한 교사인 세르베투스까지도 스물 한 살이 되기 전에 벌써 예언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52 마치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사람을 신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30. 세례와 성만찬

더우기 그들의 항의는 계속된다.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즉 세례를 허락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53 마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큰 차이점을 가르치지 않은 듯이 말이다. 사실 고대 교회에서는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은 키프리아누스와 어거스틴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54 그러나 다행히 이 관습은 폐지되었다. 세례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일종의 입문식이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표징이며 중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러나 성만찬은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다.
이 구별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주께서 일정한 연령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성만찬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지 않고, 다만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며 자기의 양심을 검토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신다. 각각 자기를 검토하고 반성한 마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라고 한 바울의 교훈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고전 11 : 28) 그러므로 우선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유아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다(고전 11 : 29).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분변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유아들에게 영양분 있는 음식을 주지 않고 독을 주려고 하겠는가?55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의 명령은 무슨 뜻인가?(눅 22 : 19, 고전 11 : 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사도가 주의 말씀에 의해서 명령한 것은 무슨 뜻인가?(고전 11 : 26) 유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때 이 일을 기억하라고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유아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힘과 유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선포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례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하나도 지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표징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구약에 있는 비슷한 표징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차이를 보았다.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할례는 유아들에게 행하라고 하셨다(창 17 : 12). 그러나 성만찬으로 대체된 유월절에는 아무 손님이나 무분별하게 참가시키지 않고, 그 뜻을 물을 만한 나이가 된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출 12 : 26). 이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렇게 분명한 일을 보지 못하겠는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사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독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나 역시 괴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가 주장하는 이유들을 간단히 처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재세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아닌 실로 그 족속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서 그가 전투 태세를 갖추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가짜 이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들을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56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다. 세례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인데 세례의 완전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한 걸음씩 계속적으로 전진해서 마침내 완전성에 도달할 것을 요망하는데, 첫날에 사람에게서 완전성을 찾는 것은 미련한 생각이다.57
2.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는 것을 기념하라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논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가 세례에 적용하는 말은, 각각 "자기를 살피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1 : 28) 알려 주는 것과 같이 성만찬에 관련시켜야만 정당하다. 세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아직 어려서 자기 반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도 좋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3. 그는 셋째 항의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여전히 죽음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요 3 : 36), 믿을 힘이 없는 유아들은 자기가 받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아담의 후손 전체가 빠져 있는 전반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복음을 멸시하고 자기들에게 제시된 은혜를 교만하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고하신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모두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된다는 반대 논법을 제출한다. 따라서 유아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마 19 : 15, 막 10 : 16) 그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성령으로 나는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요 3 : 8 참조)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데 따라 복종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씀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짓이다.
4. 그의 넷째 항의는, 물질적인 것이 먼저 오기 때문에(고전 15 : 46) 영적인 세례를 위해서는 더 나이를 먹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으로 난 아담의 후손이 모두 모태에서부터 정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즉시 대책을 마련하시지 못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해를 지정하셨다는 생각을 세르베투스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확언하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녀도 본성대로 한다면 혹 멸망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다(고전 7 : 14).
5 . 다음 세르베투스의 비유에서, 다윗이 시온 성에 올라갈 때에 장님과 절뚝발이들이 아닌 강건한 군인들을 데리고 갔다고(삼하 5 : 8) 한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소경들과 저는 사람들을 하늘잔치에 초대하셨다는 비유를 인용한다면(눅 14 : 21) 세르베투스는 이 난문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또 나는 절뚝발이들과 불구자들이 이전에 다윗과 함께 일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에, 순전한 거짓말로 꾸며낸 이 논리를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6. 그는 또 다른 비유를 말한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였지(마 4 : 19) 유아들을 낚는 어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복음의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슨 뜻이냐고(마 13 : 47)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비유 놀이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들이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을 때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또 나는 아직도 알고 싶은 일이 있다. 복음서 기자는 그들을          (인간)이라고 부르는데(마 4 : 19, 이 말은 예외 없이 인류 전체를 포함한다), 왜 세르베투스는 유아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7. 그의 일곱째 항의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고전 2 : 13-14) 영적이 아닌 유아들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바울의 말을 사악하게 곡해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울은 교리에 대해서 말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의 허망한 지혜를 너무도 자랑하므로 바울은 아직도 하늘 교리의 초보를 배워야 하는 그들의 우매함을 책망한다. 누가 이 말을 근거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육에서 난 유아들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선택하셔서 자신에게 성별하시지 않는가?
8. 그는 그들이 새로운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영적인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즉 유아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양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 선택되었다는 상징만 있으면 그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만찬에 관해서 명백하게 요구하신 자기 성찰을 그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9.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을 성찬에 초대하신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기념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허락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안아 주시기까지 한 유아들은 장성할 때까지 특이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외인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사람이 나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해괴한 일이라고 항의한다. 나는 대답한다. 영혼은 성찬을 외형적으로 먹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식을 받으며, 따라서 유아들은 상징을 받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음식이 되신다. 그러나 세례는 경우가 다르다. 세례에 의해서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 그들 앞에 열릴 뿐이다.
10. 세르베투스는 다시, 착한 관리인은 적합한 때에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준다고(마 24 : 45) 항의한다. 나는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는 어떤 표준으로 우리가 세례 받을 때를 결정하며 유아기는 세례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그는 주께서 밭이 희어지는 동안에 속히 추수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고 첨가한다(요 4 : 3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사도들이 자기들이 수고한 목전의 결실을 보고 더욱 분발해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뿐이다. 누가 이 말씀에서 추수 때만이 세례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11. 그의 열한번째 논거는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 동일인물이었다는 것이다(행 11 : 26).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가 부분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서툰 논법을 보았다. 제자라고 한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이미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모세의 제자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올바른 논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확언하신 유아들을 외인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12. 세르베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이지만 유아들은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만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원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안으셨다는 것은(마 19 : 13-15, 막 10 : 13-16, 눅 18 : 15-17) 그들을 택하셨다는 진정한 표였다.58 이 선택에 의해서 유아들은 어른들과 연합되었으며, 일시 성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라는 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은(눅 23 : 40-43) 성찬에 참가한 일이 없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있었다.
13. 다음에 그는 양자의 영에(롬 8 : 15)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없으며, 양자의 영은 오직 듣고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라고(갈 3 : 2) 첨가한다. 나는 대답한다. 그는 항상 그릇된 논법으로59 돌아간다. 여기서도 어른들에 대해서만 한 말을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전후를 전도한다. 거기서(롬 10 : 17, 갈 3 : 5)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보통 방법은 자기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 성실한 교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직무와 수고를 통해서 자신의 손을 뻗치심으로써 택하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논거로 한 법칙을 세워, 하나님께서 다른 비밀한 방법으로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시는 것을 감히 금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14. 그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항의한다(행 10 : 44-48).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예로 일반적 원칙을 연역해 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시와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보면(행 8 : 27-28, 8 : 12), 주께서는 다른 순서에 따라 세례가 성령의 은사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15. 열 다섯째 이유는 어리석다는 정도를 넘는다. 그는, 우리는 중생에 의해서 신들이 되지만 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며(요 10 : 34-35, 시 82 : 6 참조)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에게 신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의 한 가지 망상이지만 여기는 그것을 검토할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시편의 한 절을 곡해해서 이런 이질적인 뜻으로 바꾼다는 것은 극히 파렴치한 행동이다. 예언자가 왕들과 집권자들을 "신들" 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능숙한 해석가는 특수한 통치 명령에 관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복음의 교리에 적용해서는 유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 한다.
16. 또 그는 유아들은 말씀에 의해서 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한다. 복음의 교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참으로 적합하다면 우리를 중생케 하는 썩지 않는 씨이지만(벧전 1 : 23), 우리가 아직 배울 나이가 아닌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독자적인 중생 예정표에 따르신다.
17. 후에 세르베투스는 다시 비유로 돌아가서, 율법에서 갓난 양과 갓난 암염소는 희생으로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적인 해석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나는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초태생은 모두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고(출 13 : 2) 양이나 염소나 일년 된 어린 수컷을 희생물로 사용했다(출 12 : 5). 이것을 보면, 우리는 결코 강건한 성인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근에 태어난 아직 어린것을 희생으로 택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8. 그뿐 아니라 요한이 준비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요한의 직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이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안아 주시고 축복하신 어린이들은(마 19 : 13-15, 막 10 : 13-16, 눅 18 : 15-17) 요한에게서 준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자, 이제 세르베투스와 그의 그릇된 원칙은 물러가도록 하라!
19. 드디어 그는 트리스메기스투스와60 여자 점장이들에게61 호소해서, 거룩한 씻음은 어른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증거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교도들의 모독적인 의식에 일치시키려 하며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뜻에 따라서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얼마나 존경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존중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에게 성별하시며, 비록 어린 나이로 인해 그 효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한 상징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속죄 의식에서 무엇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례에 적용함으로써 할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 불변의 법칙을 변경하는 것을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 끝으로, 그는 만일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면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이 한 웃음거리로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과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직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이 보통 할례를 받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할례를 우롱거리로 집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파괴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마치 발광한 듯이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오류를 변호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고집을 이런 불합리한 생각으로 처벌하신다. 나는 세르베투스가 그의 재세례파 아우들을 지지하는 힘이 약했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는다.

 

32. 우리의 어린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언쟁과 논쟁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를 이제 신중한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이런 심히 미묘한 수단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경건한 자들로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의 자녀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씀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후손을 돌보아 주셔서 우리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이처럼 인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시 48 : 10) 사탄이 이렇게 큰 군대를 동원해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우리에게서 빼앗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눈앞에 놓인 약속도 결과적으로 점점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불경건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나태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즉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길을 가르치겠다는 강력한 자극을 느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애를 흐리게 하려는 악의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즉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