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구약성경의 언약은 신약성경의 언약과 실제로 같다. 1-6)

1. 문제

이미 말한 바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 곧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택하사 자기 백성 중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언약을 맺게 한 율법과 교리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1 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동일한 구원을 바라보았지만, 이 교제에서 그들과 우리는 경우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를 일종의 부록으로서 논하겠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수집한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의 차이점을 많이 논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한 조치로서 이 문제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논하는 몇 장을 특별히 마련해야 한다. 참으로 저 놀랄만한 불량배 세르베투스와 재세례파의 일부 미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은 돼지 무리에 불과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했을 일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상 생활에서 살찌우셨지만, 그들에게 하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시지 않았다고 그들은 지껄이기 때문이다.2 그러면 이 악취 나는 오류에 경건한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할 때에 즉시 일어나는 난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리스도 강림한 후에 우리들과 맺으신 언약이 얼마나 서로 같으며 또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2. 일치되는 주요사항

한 마디로 두 가지 점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말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논의에 전진이 있겠다. 그런데 신구약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그 동일성을 밝히려면, 이미 고찰한 세부를 검토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곳에서 논의 될 문제들을 여기서 뒤섞는 것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주장해야겠다. 첫째로, 노력할 목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것은 육적인 번영과 행복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영생의 희망을 주셨고, 신탁(神託)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 선택을 보증하시며 확인하셨다. 둘째로,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 둘째 점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는지 모르므로, 적당한 곳에서3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거나 약속하신 축복은 모두 오직 그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왔다는 진리를 예언자들의 수많은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확증할 것이다. 셋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증거를 보였고, 첫째 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지 않았다.

 

3. 구약은 미래를 기대한다

첫째 점이 특히 바로 눈 앞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논적들은 논란이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욱 면밀히 주의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하는 설명에 빠진 곳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추진하면서 보충하든지, 또는 다른 적당한 곳에서 첨가하겠다. 사도는 확실히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우리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복음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정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롬 1 : 2-3).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인한 의를 증언하며, 이것을 복음 자체가 가르친다고 한다(롬 3 : 21). 물론, 복음은 사람의 심정을 현세의 기쁨에 국한하지 않고, 영생을 바라보는 경지로 들어올린다. 지상의 쾌락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안식을 얻는 희망을 전언함으로써 이를테면 사람의 심정을 하늘로 옮겨간다. 이 점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도‥‥‥복음을 듣고‥‥‥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엡 1 : 13-14). 또,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곧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골 1 : 4-5). 마찬가지로, "그는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 : 14). 그러므로 복음을 "구원의 말씀"(행 13 : 26),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 1 : 16), 또 "천국"이라고 부른다(마 3 : 2, 13장). 만일 복음의 교훈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한다면, 그 복음의 약속과 선포를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일을 돌보지 않고4 우둔한 짐승같이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관한 약속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인봉되었고 새로운 백성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5 하는 패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율법에 복음이 약속되었다고 말하고, 조금 후에 "무릇 율법에 있는 것은 특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첨가한다(롬 3 : 19 의역). 바울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례히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몇 절 앞에서 자기가 복음이 율법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한 말을 잊은 것이 아니다(롬 1 : 2; 참조, 3 : 21). 복음의 약속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구약이 특히 내세(來世)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같은 이유로, 구약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토대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포하는 것도 죄인이 자기의 공로와는 별도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며, 그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고 하며, 복음의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거저 얻는 구원의 선물에서 격리할6 수 있는가?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주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 : 56).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사도는 신자들의 전반적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 : 8).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이 권능을 신자들은 영원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구원을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눅 1 : 54-55, 72-73). 주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옛날 맹세를 실행하신 것이라면, 구약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7

 

5. 언약의 비슷한 표징들

참으로 사도는 언약의 은총뿐 아니라 성례전의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를 동등하게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형벌들을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우리가 특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을 받지 않겠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은총을 나타내실 때에 같은 상징들을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참조, 고전 10 : 1-6,11).8 그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대들은 세례로 인치심을 받았고 매일 성찬에 참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으므로 그대들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고 믿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를 경멸해서 방자한 행동을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상징이 없지 않았으면서도 주께서 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세례를 받았고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바다를 건넌 것을 육적인 세례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영적 세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사도의 논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특권에 의해서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곧 계속되는 발언도 논적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 : 3-4).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한다.9

 

6. 요한복음 6 : 49,54을 근거로 한 반대에 대한 논박

바울의 발언을 뒤엎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와(요 6 : 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6 : 54)는 말씀을 들어 반대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조화시키기 어렵지 않다. 주께서 그때에 상대로 말씀하신 사람들은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만 하고 영혼의 진정한 양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해력에 알맞도록 말씀하셨다. 특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나와 그들의 육체를 비교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기적으로 권능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모세도 하늘에서 만나를 얻었을 때 광야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만나는 그 당시에 굶주린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도와준 것을 의미할 뿐이었고, 그들의 생각은 바울이 문제로 삼은 더 깊은 신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보다 자기에게서는 얼마나 더 위대한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리시고자, 이 비교를 말씀하셨다. 주의 백성이 광야에서 아사하지 않도록 주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시고 그들을 단시일 동안 지탱해 주신 것을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기적이라고 한다면, 영생을 주는 양식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를 추론해 보라고 하신다. 주께서 만나의 가장 중요한 면을 간과하시고 그 최저의 이용 가치만을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를 비난하려고 모세를 그에게 대립시키고, 모세는 궁지에 빠진 백성을 만나로 구출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훨씬 더 고귀한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이며, 거기 비할 때에 백성의 신체적 요구를 만족시킨 것은, 비록 그들은 그것만을 중요시하지만 멸시해야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주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신 것은 그들의 배만을 불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적 신비로서 주셨다는 것을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적 생명을 예시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고전 10 : 1-5). 그러므로 그는 특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이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다. 주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똑같은 영원한 하늘 생명의 약속을 유대인들에게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 성례전으로 그 약속에 인을 치셨다고. 어거스틴은 『마니교도 파우스투스를 논박함(Against Faustus the Manichee)』이라는10 저서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의했다.

 

(영생에 대한 소망에 관한 주장은 구약성경의 족장들이 다가올 삶 속에서 약속이 이행될 것을 기대했음을 보여 준다. 7-14)

7. 그와 더불어 또한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족장들에게도 모두 공통적인 영적 언약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 독자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인용되기를 바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 소원대로 하겠다. 더우기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논적들은 더 확실히 반박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우선 제출하려는 증거를 재세례파는 무의미하며 심지어 우스운 것이라고 해서 멸시할 줄을 나는 알지만, 역시 그것은 정신이 건전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귀중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큰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거기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살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씨며 항상 있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언제든지 타당했고(벧전 1 : 23), 그는 이 점을 이사야의 말로 추론하기도 한다(벧전 1 : 25, 사 40 : 8). 그런데 하나님께서 옛날 유대인들을 이 거룩한 유대로 자기와 연결하셨은즉, 그들을 성별하셔서 영생의 희망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결합되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천지와 우주 만물에 편만한 전반적인 전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도 만물에 각각 그 본성의 정도에 따라 생명을 주지만, 썩어가는 곤경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는 특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동시에, 이를테면 그 영혼들을 하나님에게 결합시킨다.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와 같은 말씀에 의한 조명으로 하나님에게 밀착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 불멸하는 나라에 틀림없이 들어갔다고 나는 단정한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참여했으며, 이 참여에는 영생의 축복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귐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것도 아직 조금 분명치 못한 것 같은가?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 자체를 보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면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요, 반대자들의 무지도 충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의 종들과 언약하신 말씀은 항상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레 26 : 12). 선지자들도 보통 설명하기를, 생명과 구원과 모든 축복이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다윗이 자주 한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 : 15),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 : 12). 이것은 지상의 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출하시며, 영원한 자비로 영원히 보호하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같을 말을 한다. "당신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죽지 않겠나이다"(합 1 : 12, 의역).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 : 22). "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희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백성이로다"(신 33 : 29).
그러나 공연한 일로 애쓸 것 없이, 예언자들이 반복하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동안, 우리에게는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하며 구원이 확실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시는 순간 그 얼굴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실 때에 이 계시와 동시에 자기의 구원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조건은, 모세를 통해서 증언하신 대로(레 26 : 11),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계시는 사람은 동시에 생명을 받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 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씀에서(출 6 : 7) 그들은 영적 생명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신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지 않은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격리되어 있으며 죽음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결합이 있을 때에는 영원한 구원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죽음보다 강하였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소망이 현세의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장래에까지 확대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 생명의 성격 묘사를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은 여러 구절이 증명한다. 신자들은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약속에는 둘째 부분이 있었고, 거기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을 위해서 지상생활의 한계를 넘어 더욱 연장되리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보장되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 : 7). 후손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죽은 사람에게 대한 후의를 선언하셨은즉, 죽은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확실히 은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친구가 죽으면 그에게 호의를 보일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친구의 후손에게 그 호의를 옮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자비의 열매를 죽은 자에게서 철회하시지 않고, 그들 때문에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출 20 : 6).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훌륭한 증거로 자기의 인애가 위대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시려고, 모든 후손에게까지 넘쳐 흐르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그 은혜를 죽은 후에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당자들이 죽은지 오랜 후에 자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때에(출 3 : 6), 이를테면 이 약속을 실현하심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인하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그들이 죽어 없어졌다면 이것은 불합리한 칭호가 아니었겠는가? 바꿔 말하면 "나는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가지 증거만으로 사두개파를 논박하셨다고 한다(마 22 : 23-32, 눅 20 : 27-38).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까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는 모세 자신에게서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신 33 : 3)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점을 근거로 생사의 심판자이신 이가 인도하시며 돌보시며 보호해 주신 사람들은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10. 옛 사람들의 축복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의 중심점을 검토하겠다. 그들의 더 좋은 생명은 다른 곳에 있으며, 지상의 생명을 무시하고 하늘 생명을 명상하라는 것이 주께서 신자들에게 가르치시며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신 뜻인가 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점이다. 첫째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생활 양식은 일종의 계속적인 훈련이었다. 그들이 현세 생활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기만 해도 지극히 슬펐던 아담은 고된 노동으로 겨우 살아갔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려운 육체 노동을 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듯이(창 3 : 17), 남아 있는 위로 가운데서도 극도의 슬픔을 견뎌야 했다. 두 아들 가운데서 한 아들은 다른 아들에게 무참히 죽었다(창 4 : 8). 살아 있는 아들은 보기만 해도 밉고 몸서리쳐진 것은 당연하다. 한창 때에 참살을 당한 아벨은 인간의 재난을 대표하는 듯했다. 온 세상이 쾌락 추구의 태평 세월을 보냈을 때에 노아만은 일생의 상당한 부분을 방주 건조로 시달렸다(창 6 : 22). 겨우 죽음을 면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백 번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고생이었다. 방주가 십 개월 동안 일종의 무덤 같았을 뿐 아니라, 그 오랜 시일 동안을 짐승들의 배설물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면서 갇혀 지내는 것은 비할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이런 큰 곤란을 극복하고 나서 그는 새로운 슬픔을 당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으며, 부득이 자기 입으로 그 아들을-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홍수에서 살아난 아들을-저주했다(창 9 : 24-25).

 

11.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에 그를 십만인의 가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믿음은 믿는 자들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는 아브라함 족속의 일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창 12 : 3).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구석지고 으슥한 곳에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가 모든 신자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였으니(참조, 창 17 : 5),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를 신자들 사이에서-최고의 존경을 받는 계급에서라도-제거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말소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의 경험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창 12 : 1), 그는 고향과 부모와 친구들을 즉 인간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 인정되는 것들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그에게서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으시는 것 같았다. 그는 거주지로 지정된 땅에 도착하자, 기근 때문에 그곳에서 쫓겨났다(창 12 : 10). 도움을 얻으려고 도망해 간 곳에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창 12 : 11이하). 이것은 여러 번 죽기보다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주지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 기근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자주 배를 곯아야 하며, 거기서 도망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땅에서 산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아비멜렉의 땅에서도 같은 궁지에 빠져 자기가 살기 위해서 처를 내놓았다(창 20 : 1이하). 불안한 방랑을 여러 해 계속하는 동안에, 종들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자기 아들같이 사랑한 조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창 13 : 5-9). 확실히 그는 이 이별을 자기의 수족을 끊는 것같이 느꼈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 조카가 원수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창 14 : 14-16). 어디를 가나 무섭게 야만적인 이웃들이 있어서, 자기가 공들여 판 우물들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먼저 우물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도로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창 21 : 25-31). 그런데, 그는 노쇠하여서도 자식이 없었다(창 15 : 2). 이것은 노년에 가장 서글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드디어 천만 의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나(창 16 : 15), 이 아들의 출생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다. 마치 그가 여종을 교만하게 만들어 가정 불화를 일으킨 듯이 사라가 원망하기 때문에 그는 지쳐 버렸다(창 16 : 5). 드디어 이삭이 났지만(창 21 : 2),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거의 원수같이 쫓아내어 버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창 21 : 9 이하). 이삭만이 남아 있어서 노쇠한 이 착한 사람이 의지할 아들이었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잠시 후에 받았다(창 22 : 1이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삭이 병으로 죽었더라도 누가 아브라함을 가장 불행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희롱당한 것같이 아들을 얻었다가 그 아들 때문에 아들이 없는 슬픔이 갑절이나 더 고통스럽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삭이 낮선 사람에 의해 죽었다면, 그 부끄러운 죽음이 재난을 더욱 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재난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같이 적절한 모델을 얻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빠져났다고 해서, 그의 일생이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 말라. 무한히 많은 곤란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악전 고투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산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지 않고 현재 여러 가지 혜택을 고요히 즐기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다.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이삭이 당한 고생들은 비교적 심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지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했다.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겨 났고(창 26 : 1),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겼다(창 26 : 7이하). 이웃들은 백방으로 그를 괴롭혀, 우물물 때문에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창 26 : 12이하). 가정에서는 그의 자부들이 큰 말썽을 일으켰다(창 26 : 34-35). 그의 아들들이 싸워서 괴로웠고(창 27 : 41이하), 이 큰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축복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창 28 : 1, 5).
야곱으로 말하면, 극도의 불행만을 겪은 사람의 특출한 표본이11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에서 형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세월을 보냈고, 드디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창 27 : 41-45). 부모와 고향을 떠나갔을 때에-이런 추방에서 오는 슬픔뿐 아니라-그의 외삼촌인 라반도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받아주지 않았다(창 29 : 15이하). 야곱은 칠년 동안 가장 힘들고 잔혹한 종살이를 했건만, 그것도 부족했고(창 29 : 20), 거기다가 흉계에 걸려 처까지 빼앗겼다(창 29 : 23-26). 둘째 처를 얻기 위해서 다시 종살이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창 29 : 27), 그 자신이 불평한 것과 같이 온종일 불볕에서 타며, 추위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 31 : 40). 이십 년 동안 이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장인의 부당한 처사로 고통했다(창 31 : 41). 자기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서로 맞서 미워하며 싸우기 때문에 집안이 항상 어수선하고 거의 분열 상태였다(창 30 : 1이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끄럽게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창 31 : 17이하). 그래도 장인의 악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여행 도중에 그에게서 모욕과 질욕을 받게 되었다(창 31 : 23). 불원에 그는 훨씬 더 잔혹한 곤란에 부딪혔다. 형이 있는 곳에 접근했을 때에, 그는 잔인한 원수가 계획한 것 같은 죽을 위험성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에서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무서운 공포심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창 32 : 7,11).
에서를 보고 야곱은 거의 죽은 사람같이 형의 발 앞에 엎드려, 의외의 호의를 느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창 33 : 1이하). 그 후 고향에 들어가자 사랑하는 처 라헬을 잃었다(창 35 : 16-20). 후에 그는 라헬이 낳은 아들이 다른 아들들보다 특히 사랑하던 아들이 짐승에게 찢겼다는 말을 들었다(창 37 : 31-32). 아들이 죽은 슬픔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울고 나서 모든 위로를 완강히 거절하고, 죽어 아들에게 가기까지 슬퍼할 것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는 동안에 딸 하나가 잡혀 강간을 당했고(창 34 : 2,5), 아들들이 담대한 복수를 감행해서(창 34 : 25), 그는 모든 지방 주민에게 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언제 피살될는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창 34 : 30). 이 모든 일이 불안과 슬픔과 염세의 큰 원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맏아들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창 35 : 22). 처가 능욕을 당하는 것만도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하거든, 하물며 그 죄를 지은 자가 자기 아들이었으니,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근친 상간의 추태가 있었다(창 38 : 18). 이렇게 많은 부끄러운 일을 겪으면, 아무리 재난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정신이라도 좌절될 것이다. 일생이 거의 끝나려 할 때에 그는 자신과 가족의 주림을 면하려고 하다가, 새로운 재난이 닥쳐온 소식을 들었다. 아들 하나가 옥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자기의 유일한 위로인 베냐민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창 42 : 34, 38). 이렇게 홍수같이 밀려오는 재난 속에서 야곱은 어떻게 일순간이라도 평화로운 숨을 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는 자신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으로서, 자기의 지상 생활은 짧고 험악했다고 바로에게 대답했다(창 47 : 9). 자기는 끊임없는 불행의 일생을 보냈고, 주께서 약속하신 번영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노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상에서 비참한 생애를 살았다는 그의 말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는 땅의 일에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

 

13. 족장들은 영원한 삶을 추구했다

만약 이 거룩한 족장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된 생활을 받으려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을 지상 생활 이외에 다른 축복을 생각하고 구한 것이다. 사도가 이 점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믿었으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원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 : 9-10, 13-16). 만일 그들이 약속의 실현을 다른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실현 될 가망이 없는 약속을 추구하여 마지 않았다는 것은 목석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모세와 같이(창 47 : 9) 그들도 현세를 "나그네 길"이라고 불렀다고 바울이 우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이며 나그네라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만든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무덤 이외에 "발붙일 만큼도" 얻지 못했다(행 7 : 5). 이것으로 그들은 사후에야 약속의 결과를 받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그 땅에 묻히는 것을 심히 원해서 아들 요셉에게 맹세로 이 일을 약속시켰고(창 47 : 29-30), 요셉 또한 자기의 뼈가 흙이 되어 수백 년 지난 후에라도 그 뼈를 그 땅으로 옮겨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창 50 : 25).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끝으로, 족장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내세의 축복을 소망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만일 야곱이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에 장자의 권리를 그렇게까지 원했으며,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 모험을 했겠는가? 그 때문에 그는 외국으로 쫓겨가며, 거의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할 뻔했고, 소득은 조금도 없었다(창 27 : 41). 운명하려 할 때에 그는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창 49 : 18) 자기의 의도를 밝혔다. 만일 그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본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죽어 가는 줄을 안 그가 무슨 구원을 기다렸겠는가? 우리는 무슨 까닭에 거룩한 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가? 진리를 공격하려고 하던 자까지도 이런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았는가? 발람이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민 23 : 10) 그는 후에 다윗이 언명한 것같이 느낀 것이 아닌가? 다윗은 말하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 : 15), 그러나 "불경된 자의 죽음은 극히 악하도다"라고 했다(시 34 : 21). 만일 죽음이 최후의 경계선이요 종점이라면12 죽음에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사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인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

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우리는 아직 모세까지 왔을 뿐이다. 모세가 풍부한 각종 물자와 옥토에 대한 약속으로 육적인 백성을 유인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이 그가 다한 유일한 직책이었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시된 광명을 고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적 언약이 이미 분명히 확인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장 찬란하게 제시되었다.
우선 예언자들의 선배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에 따라 하늘 신비들을 다른 예언자들보다 아주 희미하게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모든 발언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목표를 겨눈 것이었다. 그가 지상 생활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했는가는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는 말이 증언한다(시 39 : 12). "사람마다‥‥‥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시 39 : 5-6).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 : 7). 지상에는 견고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은 확실히 자기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자들을 참으로 위로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이 명상을 권고했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인간의 단명함과 무상함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라고 첨부한다(시 103 : 17). 이와 같은 그의 발언이 시편 102편에도 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시 102 : 25-28). 천지가 멸망하더라도 경건자들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굳게 서 있다면,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사야서에 있는 약속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전연 성립할 수 없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 : 6)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기서는 의와 구원에 영구성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영구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구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16. 미래의 삶에 적용되는 첨부적인 구절들

그가 시편에서 성도들의 번영에 대하여 노래하는 많은 구절들도 하늘 영광이 나타난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르게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 : 10). "의인을 위하여 빛이 동트며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이 밝아오도다"(시 97 : 11, 의역). 마찬가지로 "의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 : 9).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 : 10). 또,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시 140 : 13).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 112 : 6). 또 다른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 하시나니"라고 한다(시 34 : 22).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악인의 정욕 때문에 고통당할 뿐 아니라, 찢기고 몰락하는 것까지 허락하시는 때가 많다. 선인들이 어둡고 누추한 곳에서 신음하는 것을 버려 두시는데, 악인들은 거의 별 사이에서 빛난다. 또 자기의 얼굴의 광채로 선인들을 격려하셔서 그들이 영구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까지도 만일 신자들이 현세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그들은 심히 중대한 유혹에 걸려, 마치 하나님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호의와 보상을 베푸시지 않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만큼 악인들은 심히 창성하며 번영하는데, 경건자들은 치욕과 빈곤과 멸시와 각종의 십자가에 눌려지낸다.13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다윗은 말했다(시 73 : 2-3). 그러나 그는 이 발언의 결론으로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닫겠나이다"(시 73 : 16-17)라고 한다.

 

17. 믿는 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곤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이 고백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는 일은 매우 드물거나 전혀 없다는 것을 구약하의 거룩한 족장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 올려, 현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거기 숨겨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곳이 곧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였다. 그들은 비록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확신에 의해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이 점은 다음 발언들이 증거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 : 15). 또,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시 52 : 8). 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 92 : 12-14). 조금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호와여‥‥‥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 : 5,7). 이 현상계가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의해서 전복될 때가 아니면 어디서 신자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점이 나타나는가? 그들은 저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세 재난의 일시적인 고통을 멸시하고 대담하게 부르짖었다.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시 55 : 22-23). 악인을 삼키는 영원한 파멸의 웅덩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악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그 날을 형통하여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 가느니라"고도 한다(욥 21 : 13). 성도들의 위대한 평안은 어디 있는가? 다윗이 각처에서 한탄하듯이, 그들은 난폭하게 휘둘릴 뿐 아니라, 완전히 눌리고 소멸된다. 바꿔 말하면, 다윗은 바다의 파도보다도 더 불안정한 현세의 변화무상한 사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장차 심판대에 앉으셔서 천지의 영구한 상태를 확립하실 때에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다.
시인은 이 점을 다른 구절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도다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그 형제를 죽음에서 구속하지 못하며‥‥‥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 못하리로다‥‥‥지혜 있는 자는 죽고 악인과 우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것을 그들은 보면서도 저희의 속생각에 자기 집이 영영히 있고 자기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땅에서 자기의 이름을 칭송하는도다 사람의 존귀는 장구치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 같으리로다 저희가 이같이 생각함은 우매의 극치이건만, 그 후손들은 그들을 열심히 본받는도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모으시리니 사망이 저희를 지배하리로다‥‥‥빛이 동트면 의인이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소멸하여 음부가 저희 거처가 되리로다"(시 49 : 6-14).
현세의 소위 "행복"은 믿을 수 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인데, 그것을 믿고 안심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조롱하는 것은,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훨씬 다른 종류의 행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들이 멸망한 후에 결경자들의 나라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더욱 분명히 밝힌다. 묻노니, 빛이 동튼다는14 것은 현재의 이 시대가 끝난 후에 새로운 생명이 계시되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신자들이 불행 중의 위로와 고난에 대한 대책으로 사용한 저 큰 소망이 생겨났다. "주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시 30 : 5). 거의 한 평생을 계속한 곤란을 그들은 어떻게 순간에 제거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거의 맛본 일도 없는 그들이 어디서 이렇게 영구적인 은혜를 볼 수 있었는가? 만일 땅에 집착했다면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되, 그것은 "잠시 동안"이며, 그들이 받는 "자비"는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했다(사 54 : 7-8). 그러나 하루 동안 꿈같이 행복했던 악인들에게는 영원히 계속하는 파멸이 있으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여기에 대한 발언들은 예컨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 : 7),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 : 15),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 : 21)가 있으며 사무엘서에 "주께서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라"(삼상 2 : 9)는 말씀도 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성도들은 아무리 곤란으로 시달리더라도 결국은 생명과 구원이며, 악인의 길은 즐거운 행복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점점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을 고대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인의 죽음을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겔 28 : 10; 참조, 31 : 18, 32 : 19이하; 기타). 악인들은 부활할 희망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생각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것이었다(시 69 : 28).

 

19. 욥, 영생 불멸의 증인이다

다른 구절들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욥이 한 말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 : 25-27).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싶은 자들은, 이 구절은 최후 부활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더 인자하게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한 그 첫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15 지껄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이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욥의 소망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고상한 소망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들이 싫든 좋든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미래의 영생 불사를 우러러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무덤 속에 있을 때라도 자기의 구속자가 자기와 함께 계시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현세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최후의 결정적 절망이지만, 그 죽음도 욥의 소망을 끊어버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그는 말한다(욥 13 : 15, 불가타역).
이런 발언들은 소수 사람들이 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명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궤변가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라. 나는 곧 대답하리라. 이 소수 사람들은 이런 발언에서 어떤 감추인 지혜를 우수한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비밀히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일반 사람들의 교사로 임명되어 하나님의 비밀들을 널리 발표했고, 그 신비들을 백성이 배워 경건의 지도 원칙으로 삼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유대인 교회에서 영적 생명을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논하시는 그 공개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육적인 언약으로 돌리며, 땅과 땅에 붙은 재물에만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용납할 수없는 완악한 고집일 것이다.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후기 예언자들에게 내려오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분야를 활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과 욥과 사무엘에 관해서 주장하는 점을 우리가 쉽게 증명했다면, 예언서들에서는 그 증명이 훨씬 더 쉽다. 주께서는 자비의 언약을 실행하실 때에 질서 정연한 계획에 따르셨다. 즉, 세월이 흘러 완전 계시의 때가 접근함에 따라 주께서는 날마다 계시를 더욱더 빛나게 하셨다.16 따라서 맨 처음에 아담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을 때에는(창 3 : 15), 그것은 미약한 불꽃이 비치는 정도였다. 그 후에 점점 빛이 더욱 밝게 되어 더욱 강하고 더욱더 넓게 광채를 퍼뜨렸다. 드디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세계를 완전히 비추셨다(참조, 말 4장) 우리는 우리의 논점을 예언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우리 앞에 거대한 산림같이 많은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 책의 체재를 많이 벗어날 정도로 논해야 하겠고, 그렇게 한다면 이 문제만으로 큰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솔길을 표시해 놓았으니, 어지간히 총명한 독자라면 그 길을 따라 이 산림 속을 무사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전에 그들에게 쥐어준 열쇠를17 써서 앞길을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하겠다. 즉, 믿는 백성의 행복을 선지자들이 말하며, 그런 행복을 현세에서는 흔적조차 보기 어려울18 때마다 독자들은 그들의 특색에서 피난처를 구해 야 한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잘 추천하기 위해서 그 인애를 현세에서 받는 혜택의 모양으로 백성에게 이를테면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그림은 백성의 마음을 들어 올려, 땅을 초월하며 이 세상 초등 학문과(참조, 갈 4 : 3) 멸망해 가는 세대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 그림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장차 올 영적 생명의 행복을 깊이 생각하도록 각성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우리는 예를 하나만 들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은 이 민족 분산이 죽음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민족 부흥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 이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썩어가는 시체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의 은혜는 여전히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시고자, 예언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한 지면의 환상을 보이시고,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일순간에 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라게 하시는 것을 보이셨다(겔 37 : 1-14). 참으로 이 환상은 당시의 회의를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주의 권능이 유대 백성의 부흥뿐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일을 하신다는 깊은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 간단한 명령으로 흩어진 마른 뼈들을 살려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의 말과 이사야에 있는 구절을 비교할 수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 26 : 19-21).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부가한 구절들

혹 누가 모든 다른 구절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구절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미래의 영생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구절들을 우리는 몇 개 설명했지만, 다른 구절들도 대개 같은 뜻이며, 특히 여기서 인용하려는 두 구절이 그러하다. 하나는 이사야서에 있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항상 있으리라‥‥‥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사 66 : 22-24). 또 한 구절은 다니엘서에 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 : 1-2).

 

23. 요약과 결론 : 영생 문제에서 신구약은 일치한다

아직 두 가지 점이 남았다. 즉, 구약의 조상들은 ⑴ 그리스도를 언약의 보증으로 소유하였고, ⑵ 미래의 행복은 그에게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은 비교적 분명하고 논쟁할 여지도 적기 때문에, 우리는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모든 술책으로도 공격할 수 없는 한 원칙을 담대히 견지하겠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구약 즉, 옛 언약은 땅에 붙은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이 언약에 참으로 찬동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에 이런 생명에 대한 기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자들은 주께서 유대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 또는 그들이 추구한 것은 배가 부르는 것, 육의 즐거움, 불어가는 재물, 외면적인 권력, 번성하는 자손, 기타 자연인이 갈망하는 모든 것뿐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위험스런 사상을 물리친다. 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금 약속하시는 "천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는" 천국에 불과하다(마 8 : 11).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은 복음의 은총을 상속할 자들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옛날에 자기 백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행 3 : 25). 주께서는 이 일을 말로만 증거하시지 않고 행동으로도 인정하셨다. 부활의 순간에 주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자기의 부활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보도록 하셨다(마 27 : 52-53).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하신 일과 겪으신 고난은 우리들과 똑같이 구약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셨다. 참으로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우리를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믿음의 영을 그들도 받았다(행 15 : 8). 우리 안에서 영생 불사의 불티와 같으시며, 따라서 다른 곳에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한(엡 1 : 14) 그 성령께서 그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계셨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서 생명의 상속을 감히 빼앗을 것인가? 옛날 사두개파가 부활과 영혼의 존재를19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것은(마 22 : 23; 행 23 : 8) 이 두 가지 교리를 성경이 이미 분명한 증언으로 인친 후였으므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 유대 민족은 전체적으로 메시아의 지상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형벌을 받으리라고 성경이 벌써 예언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우둔함은 사두개파에 못지 않게 해괴할 것이다. 제시된 하늘 광명을 거부하고 고의로 암흑을 덮어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을 내리셔서 그 마음을 어둡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읽으며 항상 그의 글을 깊이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을 수건이 가리워 그의 얼굴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한다(고후 3 : 13-15). 그래서 그들은 지금 모세의 얼굴을 그리스도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모세의 얼굴은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까지 그들에게 항상 가리워 있으며 숨겨 있을 것이다.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일시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

1.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야 할 지상의 은혜를 강조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은 신구약간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또한 신구약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대립시키는 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성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엄연한 통일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인정이다. 차이점들을 순서대로 토의하고 나면 이 점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거나 기억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넷이다. 다섯째 것을 첨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이 모든 차이점은 처리 방법에 관한 것이고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며, 그 점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신구약의 약속들이 같으며, 이 약속들의 토대도 같은 그리스도시라는1 입장을 방해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첫째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기업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기업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수준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육체에 대해서 약속된 축복을 더 이상 초월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은 훌륭하고 심지어 유일한 상급이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있는 것을 그들은 듣는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하시는 가장 가혹한 벌의 위협은 소유한 이 땅에서 쫓겨나며 외국 땅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임을 그들은 듣는다(참조, 레 26 : 33, 신 28 : 36). 그들은 모세가 말한 축복과 저주의 거의 전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증거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했다기보다 다른 민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서슴치 않고 단정한다. 즉, 그리스도 교회가 한 외형을 보고 거기서 영적인 일들의 증거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상적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주셨을 때에, 친히 그들의 손을 잡아 천상적인 일에 대한 희망으로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가끔 보여 준다. 따라서 이런 처리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몽매, 아니 우둔의 극치였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반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최고의 궁극적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가 계시된 후로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 상속을 예표했다고 그들은 가르친다.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즐긴 지상적 소유를 일종의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위해서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은 미래의 상속을 내다본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2. 지상에서의 약속은 구약에서 유년기 시절의 교회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지상의 일에 대한 희망을 구속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서신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유대 민족을 어린 상속인에 비교한다. 아직 자립할 수 없어, 후견인 또는 관리인에게 맡겨 돌보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갈 4 : 1-2). 바울은 주로 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하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기서도 그 비교론을 가장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유업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려서3 그것을 상속해서 운영할 수 없었다. 같은 교회가 그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아직 유년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이 보호 감독 하에 두시며, 영적 약속을 주실 때에 아무 장식없이 또 드러나 보이게 하시지 않고, 지상적 약속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예표된 것을 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생 불사의 희망을 주시기로 정하셨을 때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다. 그 땅은 그들의 소망의 최종목표가 아니었고, 그것을 봄으로써 진정한 유업을 아직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은 유업을 바라보도록 그들을 훈련하며 확고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더 높은 약속을 주셔서 그 땅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가 아님을 알리셨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가 거져 듣고만 있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를 향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말씀은,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것이었다(창 15 : 1).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궁극적 상급은 오로지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초등 학문에서(참조, 갈 4 : 3) 무상하고 포착할 수 없는 상급을 구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상급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주께서는 그 다음에 땅에 대한 약속을 첨가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인애의 상징과 하늘 유업의 예표에 불과했다. 성도들도 이 일을 체험했노라고 각기 증언한다. 다윗은 현세의 행복으로부터 비약해서 저 최고의 궁극적 행복에 도달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나의…영원한 분깃이니라"(시 73 : 26, 참조, 시 84 : 2). 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 16 : 5). 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 : 5).
이런 말을 감히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들에게는 이 세상과 모든 현세적 혜택을 초월한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주에게서 받은 예표로 내세의 행복을 표시하는 때가 더 많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컨대, "대저 경건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리라"(잠 2 : 21),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욥 18 : 17, 참조, 잠 2 : 22, 집회서 41 : 9). 이사야서에는 예루살렘에 각종 재물이 풍성하며 시온에 모든 물건이 차고 넘치리라고 하는 구절이 많다(참조, 사 35 : 10, 52 : 1이하, 60 : 4이하, 62장).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출생지에서나 지상의 예루살렘에 적용될 수 없고, 신자들의 진정한 고향 "여호와께서 복과 영생을 명하신"(시 133 : 3) 저 하늘 도성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3. 유형별로 본 육체적인 은혜와 육체적인 처벌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못 할 정도로 현세 생활과 그 행복을 너무 중요시했다. 그것이 경주의 종점인 듯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약한 분량에 따라 그들을 훈련하시려고 그 행복에 은총의 표적을 남겨 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은총을 직접 보지 않고 표적을 기뻐하여 거기 더욱 끌렸다. 그러나 주께서는 현세의 혜택으로 신자들에 대한 자기의 인애를 증거하실 때에 이런 예시와 상징으로 영적 행복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체적 처벌로 장차 악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지상적인 일에서 더 현저히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벌도 마찬가지였다. 무지한 자들은 상벌간에 있는 이 비슷함과 일치라고 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많이 변하셨다고 해서 놀란다. 과거에는 엄격하고 무서운 벌을 모든 범행에 일일이 또 신속히 내리셨는데, 지금은 이전의 노하신 기분을 버리시고 훨씬 부드러운 벌을 훨씬 드물게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니교도들과 같이,4 신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까지 공상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이런 의구심을 곧 일소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울로 가리운 형태로 언약을 주신 동안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의 은총은 지상적인 혜택으로, 그리고 영적 죽음의 중대성은 신체적 형벌로 표시하며 상징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둘째 차이점 :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습과 의식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4-6)

4. 이 차이점의 의미

신구약간의 둘째 차이점은 상징에 있다. 구약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 대신에 형상과 그림자를 보였을 뿐이고, 신약은 진상의 실체 그 자체를 현재 있는 것으로서 계시한다. 항상 이 차이점이 신구약이 대조될 때에는 거의 언급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설명이 가장 자세하다.5 그곳에서 사도가 논란하는 상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면 경건 전체도 파멸된다고 생각했다. 이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는 예언자 다윗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예언한 것을 인정한다(시 110 : 4, 히 7 : 11).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날마다 교체되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된 것이 확실하다(히 7 : 23). 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은 맹세로 제정된 것이므로 우세하리라는 것을 그는 증명한다(히 7 : 21). 그리고 나서 그는 제사장 제도가 변했으므로 언약도6 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히 8 : 6-13). 율법은 그 자체가 약해서 완성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이 변경이 필요했다고 그는 선언한다(히 7 : 19). 그 다음에 이 약점의 성격을 논한다. 율법에는 의의 행동이 외면적 신체적인 행동이 있었지만, 이런 행동을 준행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물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양심은 죄를 말소하거나 진정한 성결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있고 "일 자체의 산 형상"은 없다고 그는 단정한다(히 10 : 1). 그러므로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복음에서 나타난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히 7 : 19, 시 110 : 4, 히 7 : 11, 9 : 9, 10 : 1).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언약과 복음의 언약, 그리스도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이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만일 약속들의 내용에 관한 비교라면 신구약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경향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 진상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일찌기 영원 불멸할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설명하겠다.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시며, 이 성취에 의해서 언약은 최종적으로 확정되며 인준된다. 확정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의식들을 제정하셨고, 의식들은 이를테면 그 확인에 대한 엄숙한 상징이었다. 율법에 제정된 의식들은 그리스도에게 위치를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생겼다. 그런데 의식은 언약의 일시적인 속성, 첨가물, 부속물, 소위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약을 실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성례전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이 구절에서 "구약"은 언약을 확인하는 엄숙한 방법을 의미하며, 그 방법은 의식과 제사에 포함되었다.
우리가 방법을 초월하지 않을 때에, 거기는 본질적 기반이 없으므로, 사도는 방법을 종결시키며 폐지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참조, 히 7 : 22). 그리스도께서는 이 언약에 의해서 영원한 성결을 선택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시며, 율법 하에서 처리되지 못한 죄를 없애버린다.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주의 옛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었는데, 그것은 그림자7 같고 효과가 없는 의식 준수에 포함되었으며, 확고하고 실질적인 확인을 받기까지는 이를테면 미결 상태에 있는 것, 일시적인 것이었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되며 확립된 때에 비로소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잔"이라고 부르셨다(눅 92 : 20).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쳐질 때에 그 진리에 도달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는 뜻이다.

 

5. 교회의 유년기와 장년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고 사도가 말한 뜻이 분명하다(갈 3 : 24. 참조, 4 : 1-2). 사도는 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후사였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는 크고 빛나는 계시나 분명한 이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광명을 나눠주셨지만, 그들은 아직 그것을 여전히 또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 미약한 이해 상태를 "어렸을 때"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동 교육의 방법으로서 이 유년기를 이 세상 초등 학문과 사소한 의식 준수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비치시게 되면, 그로 인해서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하도록 하신 것이다(참조, 엡 4 : 13).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 구별을 시사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느니라"(눅 16 : 16. 참조, 마 11 : 13). 율법과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들은 언젠가는 분명히 계시될 그 지혜를 예상하게 만들었으며, 그 지혜가 멀리 반짝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렸다. 그리스도에게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 2 : 3)가 계시되었으며, 이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가장 깊은 하늘 성소에 거의 이르게 할 수 있다.

 

6. 신앙이 깊었던 위인들도 옛 언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과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예언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훌륭히 받아서 지금도 전 세계를 그 힘으로 비출 만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한 우리의 견해는 움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의 은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가르치신 그 통상적인 처리 방법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한 통찰력을 받은 예언자들이 가르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까지도 먼데 있는 물건같이 희미하였고 예표로 표현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지식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었더라도, 그들은 민족의 전반적 훈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역시 어린이들로 인정됨을 면할 수 없었다. 끝으로, 그 때에는 시대적인 모호한 지식을 초월할 만큼 투철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 : 24). 그러므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 : 16). 확실히 이 특권을 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이 특출한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하늘 신비들이 더욱 분명히 계시되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은 여기도 해당한다. 선지자들의 노고는 주로 우리 시대를 위한 것이었음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벧전 1 : 12).8

 

(셋째 차이점 :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

7. 이 차이점의 성경적 기원과 의미

이제 셋째 차이점을 논할 터인데,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얻은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을 다스렸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 : 31-34 의역과 순서 변경). 이 말씀을 근거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한다. 율법은 문자적인 교훈이고, 복음은 영적인 교훈이며, 전자는 돌판에 새겼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에 새겼으며,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생명을 전파하며, 전자는 정죄를, 후자는 의를 전파하며, 전자는 무효하게 될 것이요 후자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후 3 : 6-11). 사도는 예언자의 뜻을 해석하려고 한 것이므로, 두 사람의 취지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의 말만을 검토하면 충분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예언자에 비해서 사도는 율법을 나쁘게 말한다. 율법 자체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일부 그릇된 율법 추종자들이9 의식에 대한 도착된 열성으로 명료한 복음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류와 어리석은 편벽을 보고 바울은 율법의 본성을 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특이점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바울이 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므로, 율법의 고유한 특색만을 고려한다. 예컨대, 율법에는 처처에 자비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데서 빌려 온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본성만을 논할 때에는 율법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이 율법의 기능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다. 즉, 바른 일을 명령하고 악한 일을 금지하며,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범죄자들을 처벌로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부패를 변하거나 시정하지 못한다고 한다.

 

8. 고린도후서 3장에 따른 세부적인 차이점

이제 사도의 비교론을 한 항목씩 설명하겠다. 구약이 문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의 역사가 없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그것을 사람들의 심정에 영적으로 새기셨기 때문이다(고후 3 : 6상). 둘째 대조점은 첫째 것을 밝힌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저주 가운데 덮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의 도구인 것은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3 : 6하). 구약이 정죄를 내림은 아담의 모든 자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이며, 신약이 의를 줌은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하며 이 자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고후 3 : 9).
마지막 대조는 의식적 율법에 관련시켜야 한다. 구약은 현장에 없는 것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때가 오면 죽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본체 그것을 나타내므로 영원히 굳게 서 있다(고후 3 : 10-11). 참으로 예레미야는 도덕적 율법까지도 무력하고 연약한 언약이라고 부른다(렘 31 : 32). 그러나 거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즉, 은혜를 잊은 백성이 갑자기 이탈했기 때문에 그 언약이 곧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반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언약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런데, 의식들은 무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에 의해서 폐지되었은즉, 폐기된 원인이10 자체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자와 영의 이 차이를 근거로 주께서 유대 민족에게 주신 율법에 아무 효과도 없었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을 지적하여 비교한 것은 은총이 풍부하게 된 것을 찬양하려는 뜻이다. 동일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마치 성격이 달라진 듯이, 복음 전파에 은총을 풍성히 베푸신 것을 찬양한다. 복음 선포를 통해서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을-모든 민족 사이에서 불러 모으셔서 교회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생각하라.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인 사람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비교하지 않고 그들만을 본다면, 그들의 수가 많았 던 것이 사실이다.

 

(넷째 차이점 : 구약의 구속과 신약의 자유. 9-10)

9. 바울의 가르침

넷째 차이점은 셋째에서 생긴 것이다. 구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경은 구약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하므로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한다(15절). 히브리서에 있는 구절도 여기 적용될 수 있다. 신자들이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아니라고 한다. 거기서는 이목에 접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그 무서운 음성이 울렸을 때에 백성은 듣지 않기를 구했으며, 모세까지도 겁이 났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 12 : 22).
바울은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의 발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상세히 설명한다. 거기서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해서 비유로 해석한다. 계집종 하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상징이며, 자유 여인 사라는 복음의 근원지인 하늘 예루살렘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갈의 소생은 노예의 몸에서 났으므로 상속을 받을 수 없었고, 사라의 후손은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노예가 되지만, 복음에 의해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갈 4 : 22-31). 요약하면, 구약은 양심에 공포심과 전율을 불어넣지만, 신약의 은혜로 양심은 해방과 기쁨을 얻는다. 구약은 양심을 노예의 멍에에 구속하였지만, 신약은 너그러운 영으로 양심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항의한다고 가정하라. 곧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거룩한 족장들은 예외였으며, 분명히 우리와 같이 믿음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자유와 기쁨을 받았다는 결론이 된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 자유나 기쁨은 율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족장들은 율법에 의해서 노예와 같이 압박을 받으며 양심의 불안으로 지치게 된 것을 느꼈을 때에 복음에 도망해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약의 일반법과는 별개로 구약의 폐해를 면하게 된 것은 신약의 특별한 결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유와 화신의 영을 충분히 받아서 율법에서 오는 공포심과 노예 상태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복음의 은총을 통해서 받은 특권을 즐겼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일반 백성과 같이 의식 준수의 구속을 받으며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상태와 비슷한 훈련의 상징인 의식들을 정확히 지켜야 했으며(참조, 갈 4 : 3-3), 그들에게 유죄를 고백하게 한 증서는(참조, 골 2 : 14)11 그들을 의무에서 해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때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쓰신 일반적 처리 방법을 고려할 때에, 그들은 우리와는 현저히 달라서 속박과 공포의 언약하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0. 율법과 복음

우리가 말한 둘째 이하의 세 가지 비교는12 율법과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 비교에서 "구약"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을,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의미했다. 첫째 비교는13 범위가 더 넓어서 율법 이전에 발표된 약속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약속들을 "구약"이라는 이름에 넣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예레미야와 바울의 발언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은총과 자비의 말씀을 구약과 구별했다. 어거스틴은 같은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적절한 말을 첨가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계명에 복종한(갈 5 : 6) 약속의 자녀들은(롬 9 : 8) 창세 이후로 모두 새 언약에 속했다. 그들이 복종한 것은 육적·지상적·일시적인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천상적·영구적인 혜택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보를 믿었고, 그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 선을 행하게 되며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14 이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즉, 성경에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특별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동일한 축복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우리와 어거스틴의 분석이 다른 점은 이와 같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는 말씀에 따라(눅 16 : 16) 복음은 분명하고 그 이전에 있어온 말씀의 경륜은 비교적 모호했다는 점을 구별하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다만 율법은 무력했고 복음은 견고하다는 구별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족장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들은 옛 언약하에 살면서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새 언약을 사모해서 참으로 그것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의 그림자로 만족하고 마음의 시야를 넓혀 그리스도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도는 맹목적이고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다른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죽인 짐승에게서 죄의 대속을 얻겠다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맹목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는 외면적으로 물을 뿌려 영혼을 깨끗이 정결케 하며, 냉담한 의식들을 하나님이 즐기시는 듯이 그 의식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율법 준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어리석은 짓으로 엉터리없는 모순에 빠진다.

 

(다섯째 차이점 : 구약은 한 민족에 언급했으나,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l2)

11.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너진다

다섯째로 첨가해도 좋은 차이점은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주께서 한 민족을 택하시고 은총의 언약을 그 민족에 국한하셨다는 사실이다.15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모세는 말했다(신 32 : 8-9).
다른 곳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써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느니라"(신 10 : 14-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한 백성만이 자기 백성인 듯이,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만 주셨다. 그들의 가슴에 자기의 언약을 안겨 주시다시피 하셨고, 자기의 숭엄성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특권을 그들에게 퍼부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축복들은 보지 않고 화제에 오른 축복만을 고찰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을 자기에게 결부하시고, 그들이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높이게 하셨다. 동시에 모든 다른 족속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헛된 길로 다니게 묵인하셨다(행 14 : 16). 그들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인 말씀 전파도 그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주의 제일 사랑하시는 아들이었고, 다른 민족들은 남이었다. 이스라엘은 인정과 신임과 보호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자체의 암흑 중에 방치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성별해 주셨으나, 다른 민족들은 속화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영예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이 막혔었다. 그러나 만유를 회복하시기로 지정하신 "때가 차매"(갈 4 : 4) 주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자로 나타나셨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의 경계선 안에 국한하던 "담을 허시며"(엡 2 : 14), "먼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엡 2 : 17), 이는 그들이 함께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백성으로 융합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엡 2 : 16). 그러므로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갈 3 : 28), 할례나 무할례의 차별이 없고(갈 6 : 15),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다"(골 3 : 11) "그리스도께서는 열방을 유업으로 만들어 주었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시 2 : 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된 것이다(시 72 : 8, 참조, 슥 9 : 10).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것은 신약이 구약보다 우수한 점을16 밝히 표시한다. 참으로 이 점은 선지자들의 아주 분명한 발언이 여러번 확인했다. 다만 그 실현은 메시아 왕국이 나타날 때까지 연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까지도 전도의 초기에는 그 실현을 즉시 시도하시지 않고 연기하셨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마치며 치욕을 받으시는 기간을 끝내신 후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하는 이름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때까지 연기하셨다(빌 2 : 9-10). 그래서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냄을 받지 아니하셨노라고 하셨다(마 15 : 24). 그리고 제자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파송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일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마 10 : 5). 성경에 이방인을 부르시리라는 증언이 아무리 많았어도, 사도들은 그 일에 착수하려고 했을 때에 너무도 신기하고 해괴한 일같이 느껴져서 움츠렸다. 드디어 그들은 떠는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했으나,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또 그것은 당연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만을 택하시던 주께서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시고 그 선택을 버리신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띄는 일이 너무도 신기해서 이런 예언들을 읽을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을 부르시리라는 증거를 하나님이 옛날에 그들에게 주셨건만, 그 증거를 보고도 그들은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부르신 이방인의 수효가 아주 적었을 뿐 아니라, 이를테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접붙여서 그 민족에 가입시키셨다. 그러나 이제는 공개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될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받아들이신 외국인들은 유대인과 동등시된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일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위대한 비밀이라고 부르며(골 1 : 26; 참조, 엡 3 : 9), 천사들에게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는 데는(참조, 벧전 1 : 12)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    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

13. 보편적으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인가?

단순한 교리 설명의 범위내에서 나는 이 넷 또는 다섯 가지 점으로 신구약의 차이를 충실히 또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회 치리상의 이 변화와 교육 방법상의 차이와 예식 및 의식의 중대 변혁들을 비웃는다.1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대답해야겠다. 다만 그들의 항의는 자세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간단히 대답하겠다. 항상 시종 여일하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명령하시고 권장하시던 일을 후에 비난하신다는, 이런 큰 변동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에 유익하다고 보신 대로 형식을 조절하셨다고 해서, 그 일만으로 하나님이 변하신다고 볼 것이 아니다. 농부가 가족에게 시키는 일이 겨울과 여름에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변덕스러움을 비난하거나, 자연의 연속적 질서와 일치하는 정규의 영농법에서 그가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장(家長)된 사람이 가르치며 명령하며 인도하는 방법이 영아기와 유년기와 청년기에 서로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때문에 그를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으며, 목적을 버린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대 차이를 적절한 표지로 구별하신 것을 무슨 까닭에 변심이라고 비난하는가? 내가 둘째로 든 비교로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린이들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청년에 비교한다(갈 4 : 1이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나이에 맞도록 초등교육에 국한하시고, 우리는 더 엄격하고 이를테면 더 어른다운 규율로 훈련하신 것이 어디가 변칙이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시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결과는 처음에 명령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계속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나는 것이다. 외면적인 형식과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르며 또 변하는 인간의 능력에 알맞도록 행동하신다.

 

14.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인간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런 다양성이 생겼는가? 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강림 후와 같이 처음에도 어떤 상징 없이 분명한 말씀으로 영생을 계시하실 수 없었는가? 맨 처음에 몇 가지 명백한 성례전으로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며, 성령을 주시며, 은총을 전 세계에 보급시키실 수는 없었느냐고, 이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고 너무 늦게 창조하셨다느니, 겨울과 여름, 낮과 밤이 교대하게 만드셨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싸우려는 것과 같은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무슨 까닭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를 때가 많더라도,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을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동물의 희생 제물과 레위 족속의 사제 직분에 딸린 여러 가지 부속물들을 하나님이 옛날에 기뻐하셨는데, 지금은 멸시하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대체로 이런 외형적이며 덧 없는 것들이 하나님에게 즐거움이나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18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정하신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청년기에 쓰는 최선의 치료법과, 같은 사람의 노년기에 쓰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전에 기뻐하던 치료법을 버렸다고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그는 치료에 전념하면서 연령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가 장차 오시리라고 선포하는 데 필요했던 표징과, 그가 계시된 지금 그를 나타내는 표징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강림 후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 사이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갔고, 성령의 은총은 이전보다 더욱 풍부하게 쏟아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과 뜻으로 은혜를 자유로 분배하시며, 원하시는 민족들에게 광명을 주시는 것을 누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원하시는 곳에서 말씀 전파를 일으키시며, 원하시는 방법과 정도로 자기의 교훈이 전진하며 성공하게 하시며,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에 대한 지식을 몇 세대 동안 빼앗으시며, 자기의 자비에 따라 다시 원하시는 대로 그 지식을 돌려주시는 것을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려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너무도 부드러운 중상이라고 본다. 단순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나 성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이 이런 중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중보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

1.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간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동시에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보통 말하듯이) 단순한 즉,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인간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 결정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최선의 길을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리워진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참조, 사 59 : 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역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아담의 후손 중의 하나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조상과 같이 모두 하나님을 보면 공포에 떨었다(창 3 : 8). 천사 중의 하나였는가? 그들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했으며,1 그의 연줄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견고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참조, 엡 1 : 22, 골 2 : 10).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존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7 : 14, 마 1 : 23),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기에는 친근감이 충분히 가깝지 못하며 친밀함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에는 그만큼 큰 차이첨이 있다. 사람이 본래대로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는 중보 없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현상은 어떠한가? 치명적인 타락으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한 오점과 부패로 더럽혔고 모든 저주로 압도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중보를 설명하면서, 그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지적하는 것은 훌륭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 : 5). 사도는 "하나님이신"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이 "사람"이라는 말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적당한 순간에 가장 적당한 대책을 쓰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친근하게 우리 사이에 두셨다. 그러므로 중보를 어디서 찾을까, 어느 길로 그에게 가야 하는가 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성령께서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참으로, 우리와 같은 육신이시므로 우리와 접촉해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분명히 성령이 여기서 가르치시는 뜻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 것과 같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 : 15).2

 

2. 중보자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 점은 중보자가 성취하려고 한 것이 비상한 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임무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킴으로서 사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본질상 그에게 속한 것을 은총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누가 중보의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증을 신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아들이 우리의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로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로 자기의 뼈를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엡 5 : 29-31, 창 2 : 23-24). 그는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도 되시려고, 쾌히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거룩한 형제 관계를 친히 칭찬하신다(요 20 : 17). 이와 같이 우리는 천국 상속의 확약을 받았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것인데, 그가 우리를 자기의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형제면 또한 그와 함께 후사기 때문이다"(롬 8 : 17 의역)
똑 같은 이유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임무는 죽음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 자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세상과 공중(空中)의 권세들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보다 더 높은 권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명이나 의나 하늘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로 정하셨을 때에,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 친히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참조, 롬 5 : 8).

 

3. 오직 참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해서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두 번째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다. 즉,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을 바로 고쳐서 불복종을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며, 인간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겠으므로,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는 데는 약한 인성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른 본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싸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박탈하는 자들은 그의 존엄성과 영광을 감축하거나, 그의 인애를 희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하며 전복시키므로, 인간에게도 적지않은 해를 준다. 믿음은 이 토대 위에서 안정하지 않으면 굳게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대망했던 구속자는 하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 즉,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이 일은 경건자들에게 혜택을 더한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무수한 신탁이 환영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더욱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방금 설명한 점을 특히 지지해야 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모두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은 육신을 제물로 바치셔서 그 대속 행위로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리시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 4-7)

4. 그리스도의 성육신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이런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할 때에 필요한 근면하고 주도 면밀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박한 자나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매혹하는 허망한 사변을 쉽게 버릴 것이다. 이런 사변의 예를 들면, 인류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인간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3 창조된 처음의 질서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천사와 사람의 우두머리으로 그들 위에 위치하셨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 : 15)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그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려고 육신을 입으셨다고 선포하므로, 다른 이유나 다른 목적을 상상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약속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타락한 세계를 재건하며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표현되었으며, 신자들의 죄가 대속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신 후에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희망을 주려고 했다. 율법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때에도, 어느 시대에나 피 흘림 없이 중보가 약속된 일이 없으므로, 그는 인류의 불결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임명되셨다고 우리는 확실히 추론한다.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의 증표이기 때문이다(참조, 히 9 : 22).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를 선포할 때에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리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대한 모든 증언 가운데서 이사야의 유명한 말을 들면 충분할 것이다. 백성의 죄악을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손에 맞으며 평화의 징계가 그에게 내리며 (사 53 : 4-5),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히 9 : 11-12), 그가 맞은 채찍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되며, 모두 양같이 그릇 행하여 흩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혀 모든 사람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리라고 한다(사 53 : 5-6). 가련한 죄인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자신을 임명하셨다고 하므로, 이 범위를 넘는 사람은 어리석은 호기심에 너무도 깊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강림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써 우리를 모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증언을 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 : 14)고 가르치기 전에 인류의 반역을 말한다(요 1 : 9-11).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 : 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리라"(요 5 :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 : 25)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 18 : 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 9 : 12). 모든 구절을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불러 이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 확실히,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예로운 제사장직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임명되기 때문이다(히 5 : 1). 또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아니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위해서(고후 5 : 19)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성결이 그에게 드리는 모든 칭호를 잃으실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는(롬 8 : 3-4) 바울의 발언도 소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셨을 때에,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무한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참조, 딛 2 : 11)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사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기로 결심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이 명령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로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아버지의 진노를 푸는 희생이 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또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 : 46-4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 : 17, 15,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 : 14). 또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 : 27-28,23절과 융합)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육신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리신다. 즉, 우리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희생과 속죄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같은 의미에서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눅 1 : 79)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오셨다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는 알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며"(골 2 : 3), 그를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울은 자랑한다(고전 2 : 2).

 

5.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을 것인가?

혹 누가 항의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정죄된 인간들을 구속-하셨지만, 구원을 받아 안전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람의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이 모든 일은 방해 않는다고4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고 성령이 선언하시므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본성의 동참자가 되셨는가를 더 탐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가 속죄를 얻는 대가로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그리스도에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예정의 고원한 신비에까지 솟아올라가서, 인간성의 모든 방자함과 경망한 호기심을 적절한 말로 억제한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엡 1 : 4-5),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받을 만한 자로 만드셨으며(엡 1 : 6), "우리는 그리스도 잔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고 한다(엡 1 : 7). 여기서는 확실히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때에 하나님이 인류의 불행을 고쳐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5 가령 우리의 대적자들이 다시 항의해서, 하나님의 이 계획은 그가 예견하신 인류의 타락에 좌우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이면 아주 충분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비밀한 결정으로 정하신 일 이상의 일을 물으며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외람된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를 만들려고 덤빈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직책을 논한 다음에, 에베소 신자들이 깨닫게 하는 영을 받아(엡 3 : 14-17)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즉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엡 3 : 18-19) 올바른 기도를 드린다. 그는 마치 우리 마음의 주위에 계획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리스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화해의 은총에서 조금이라도 떠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쁘다‥‥‥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임하셨다"라는 바울의 증언에 따라(딤전 1 : 15) 나는 기꺼이 이 일에 찬성한다. 또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지금 복음에서 계시된 은총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라고 가르치므로(딤후 1 : 9) 나는 끝까지 항상 이 은총 안에 머무를 결심이다.
이와 같은 온건한 태도에 대해서 오시안더(Osiander)는 부당한 항의를 한다. 이전에 몇 사람이6 간단히 언급한 이 문제를 그가 현대에 새로 일으킨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그는 외람되다고 비난하며, 성경에 이 공상을 반박하는 증언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는다. 바울은 이런 도착된 호기심에 굴레를 씌우지 않았던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속에 대해서 말한 후에 곧 우리에게 명령하기를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한다(딛 3 : 9). 어떤 사람들은 미친듯이 날뛰며, 미련한 생각으로 재치를 보이고자, 하나님의 아들은 나귀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까지 일으킨다.7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 해괴한 짓을 가증한 것으로 보아 타기하건만, 오시안더는 그것을 특별히 반박한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로 변명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귀중하거나 알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은 바울은(고전 2 : 2) 나귀가 구주라고 인정했는가!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일하는 머리로 임명되었다고 전파하니(엡 1 : 10, 22), 속죄 사역을 위임받지 않은 어떤 다른 머리를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6.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그러나 오시안더가 자랑하는 원칙은 전혀 보잘 것 없는 너절한 것이다. 사람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본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며,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히기로 이미 결정하신 이와 사람이 같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추론하기를, 아담이 시초의 올바른 상태에서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것이 얼마나 너절한 편견인가를 자연히 이해한다. 또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처음으로 알아냈노라고 생각한다. 아담을 장식한 비상한 재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신 것이라고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이것은 진정하고 가장 완전한 존엄성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우수성의 표지들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점에서만 이 형상을 찾아야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인정한다. 따라서 아담에게 새겨진 우수성은 모두 그가 독생자를 통해서 창조주의 영광에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왔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 : 27),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자신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독생자의 덕택으로 이렇게 높은 영예에까지 승진되었다. 그러나 나는 첨가한다. 아들 자신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공통한 머리였다고. 이와 같이, 아담에게 부여된 존엄성은 천사들도 가졌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시 82 : 6), 그들이 그 아버지와 같은 어떤 성질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이 천사와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그 두 본성에서 나타나는 것을 아버지께서 원하셨다면, 오시안더가 천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었으므로 사람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하는 것은 무지해서 지껄이는 말이다. 천사들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면 항상 하나님을 직접 뷜 수 없을 것이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사람들은 천사들과 합하여 한 머리 아래서 서로 밀착해야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골 3 : 10).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늘에 영접될 때에 천사들의 형태를 취할 것이며(마 22 : 30),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형상의 처음 모형은 사람인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는8 오시안더의 추론을 허락한다면, 누구든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 천사들에게도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7. 오시안더에 대한 요점 하나 하나에 대한 논박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 부동한 결정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오시안더의 걱정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담이 끝까지 순전한 상태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나 천사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걱정도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가 속죄주로서가 아니라 처음 사람으로서 태어 나시기로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특권적 지위에서 떨어졌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멸망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우연이 없었다면 태어 나시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그가 아담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를 제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데(히 4 : 15), 오시안더는 무슨 까닭에 이 일이 무서워 떠는 것인가? 누가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눅 3 : 38). 또 아담의 후손들을 그리스도가 멸망에서 구출하도록 그의 인간 상태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고전 15 : 47) 부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다. 그리스도가 창조 이전에 오셨다면 그는 첫째 아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시안더는 분별없이 선언한다. 사람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형으로 삼아 인류가 창조된 것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의 타락 사건을 자연을 회복할 필요성의 원인이된 이 타락 사건을 사람의 처음 창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회복 사이에 둔다.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려고 나셨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데 오시안더는 서툴고 부적당한 추리로 아담이 그대로 근직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몸과 영혼에서 빛났을 것이라고. 이 형상의 광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만유의 머리시며 만유의 수위(首位)를 점유하신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시안더가 퍼뜨리는 무익한 궤변을 배제한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육신을 입히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면, 천사들에게는 이 두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런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일에 오시안더는 경솔하게 달라붙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천사들에 대한 수위권이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그를 지도자로서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시안더는 주장한다. 그러나 옳은 추리는 바울의 말에서 곧 나온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므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골 1 : 15).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창조물 중의 하나로 계산되셔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었던 그 완전 상태의 세계는 그 이외에 다른 기원(起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였다(골 1 : 18). 사도는 한 짧은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가 천사들을 지배하시게 되었으며(골 1 : 16), ⑵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참조, 골 1 : 14).
오시안더의 다른 주장도 역시 그의 무지를 폭로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인간의 육신을 입으시지 않았더라도-천사들과 사람들을 모아 자기의 하늘 영광과 생명을 나누게 하며, 스스로 만물 위에 수위권을 행사하셨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성립하지 못하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오시안더를 항상 속이는-또는 그가 스스로 속는-그릇된 원칙이 있다. 곧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머리가 없었으리라는9 것이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지도를 즐겁게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무슨 까닭에 자기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시지 못하겠는가! 또 자기의 영의 비밀한 힘으로 자기 몸같이 사람들에게도 생명과 양식을 주어, 드디어 그들을 하늘에 모으며, 천사들과 똑같은 생명을 즐기게 하실 수 없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논박한 이 너절한 생각들을 오시안더는 가장 확고한 말씀으로 여긴다! 자기의 사변에 도취되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리석게 찬양한다. 후에 그는 훨씬 확고한 증명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아담이 자기 처를 보았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을(창 2 : 23) 그는 "아담의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이것이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같은 말을 하나님에게 돌리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에는 모두 어떤 예언이 포함되었다는 말인가! 율법의 교훈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한즉, 오시안더는 그 교훈들에서 예언들을 찾아 보라. 그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인 의미에 자기를 국한하셨다면, 그것은 땅에 붙은 유치한 생각이었을 것이다(마 19 : 4-6).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문제는 교회와 자기와의 신비적 결합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성실뿐이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고 하며, 해소할 수 없는 이 결합을 아무도 이혼으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오시안더가 이 단순한 뜻을 싫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더 미묘하게 해석해서 제자들을 신비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그가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바울은 오시안더의 망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의 살이라고 말하고(엡 5 : 30-31) 즉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엡 5 : 32). 아담이 이런 말을 한 뜻을 말하려 하지 않고, 결혼을 한 비유로 삼아,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가 되게 하는 그 거룩한 결합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말 자체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고 하면서, 시정하는 의미에서 결혼의 원칙과 그리스도 대 교회의 영적 결합과를 구별한다. 이와 같이, 이 망령된 주장은 곧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너절한 생각들을 이 이상 더 상대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 아주 간단한 논박으로 그 모든 것의 허무성이 폭로되겠기 때문이다. 다음의 엄숙한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양식을 넉넉히 주고도 남는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 : 4-5).

 

제 13 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해서 칼빈은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

1.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임에 대한 증명함

그리스도의 신성은 분명하고 확고한 증언에 의해서 다른 곳에서 증명했다.1 따라서 내 생각이 잘못이 아니라면,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보의 직책을 완수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의 인간성이 진실였다는 것을 옛날에 마니교도들과 마르키온파는 부정했다.2 마르키온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지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상했고, 마니교도는 그리스도는 천상적 육신을 받으셨다고 공상했다. 그러나 이 양자를 반박하는 강력한 성구가 많다. 왜냐하면 천상적인 후손이나 유령 같은 사람을 인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을 인해서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시다(창 12 : 3, 17 : 2, 7, 18 : 18, 22 : 18, 26 : 4). 또 영원한 보좌는 공중(空中)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과 그의 육신의 소생에게 약속되었다(시 45 : 6, 132 : 11). 따라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1 : 1).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었으나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해석한 대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롬 1 : 3). 같은 사도가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롬 9 : 5). 그렇기 때문에 주 자신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자주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자기가 참으로 사람의 씨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시려는 뜻이다. 성령이 이 명백한 사실을 자주 선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쓰며 아주 부지런히 또 단순하게 표현하셨는데, 이 일을 감히 기만으로 더럽히는 파렴치한 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더우기 증언을 더 많이 수집하려면 그것은 곧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 : 4)고 하는 바울의 발언이다. 그리스도가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위를 느끼며 그밖에 우리의 본성에 있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셨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가 있다. 이 많은 증언 중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신념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천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히 2 : 16),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와 같이 "헐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며"(히 2 : 14), 또, 우리는 그와 인연이 있는 덕택으로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신다(참조, 히 2 : 11). 또, "그는‥‥‥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도다. 이는‥‥‥자비하고 충성된 중보가 되려 하심이라"(히 2 : 17 의역),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 : 15). 기타 무수한 구절들이있다. 우리가 조금 앞에서3 언급한 것도 이 점에 해당한다. 즉, 세상 죄는 우리의 육신을 입은 이가 대속해야 했다고, 바울이 분명히 단언한다(롬 8 : 3) 확실히 이런 근거에서, 아버지가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모두 우리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머리시며,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로 자란다(엡 4 : 16). 참으로,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기 위하여"(요 1 : 16)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그(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요 3 : 34)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우연한 선물에 의해서 그 본질이 더 풍부하게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모순된 이야기일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다른 곳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신가(요 17 : 19).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반대자들은 자기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을 제시하지만, 그들은 그 구절들을 심히 곡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입증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들은 너절한 궤변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빌 2 : 7-8) 바울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을 근거로 삼아,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환상(幻像)을 입으셨다고 공상한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말하는 의도를 전혀 무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몸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성을 빛내셔도 당연했을 것이지만, 일개의 미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으로서 나타나셨다고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받아 우리에게 복종을 권면하려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직접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자진해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으며, 이런 비천한 처지에 만족해서 자기의 신성이 육신의 휘장으로 가리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참조, 빌 2 : 5-7).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처신하셨는가를 가르친다. 문맥 전체를 보아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워 참으로 인간적인 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빌 2 : 8) 잠시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비치지 않고 사람의 형상만이 낮고 천한 처지로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벧전 3 : 1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성을 쓰고 연약하셨던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약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단언한다(고후 13 : 4). 그리스도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신 후에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는 명백한 말씀이 있다. 그가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이 해당될 수 없다.
마니는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난 둘째 아담이며 하늘에 속한다"고 한 말을(고전 15 : 47-48)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의 몸은 공기(空氣)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늘에 속한 본질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리를 살리는 그 영적인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의 육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정통파 교리는 도리어 이 구절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주장은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요,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바울의 강렬한 주장은(고전 15 : 12-20 요약) 무의미할 것이다. 고대의 마니교도들과 현대의 그 제자들이 어떤 궤변으로 (이 증명을) 회피하려고 노력 하더라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미한 말을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셨다는 의미에서만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4 이것은 비열한 도피다. 히브리말로 참사람을 "인자"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국어의 이 용법을 보존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또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 없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시편 제8편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시 8 : 4, 히 2 : 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는 죽을 운명의 부친에게서 직접 나신 것이 아니지만, 그의 근본은 아담에게서 유래했다. 그렇지 많다면 내가 이미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 자녀들을 자기에게 모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히 2 : 14)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똑같은 본성을 나눈 동지와 동참자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도 한다(히 2 : 11상). 이 말씀에 곧 이어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므로(히 2 : 11하), 문맥으로 보아 그 뜻은 본성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했으니, 이렇게 존귀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은총으로 낮고 부끄러운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한다(히 2 : 11하). 그뿐 아니라,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리라는 그들의 항의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헐육에서 나지 않고(참조, 요 1 : 13), 믿음을 통하여 영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육신만으로는 형제 관계가 유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영예를 사도는 신자들에게 국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같은 원천에서 나지 못한다는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사이에 끼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맏아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서투른 논쟁을 일으키려 한다. "형제 중의 맏아들"이 되시려면(롬 8 : 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에 아담에게서 나셨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연령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예의 정도와 숭고한 권능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고(히 2 : 16)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하며, 그가 인류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는 의미로 이렇게 지껄이지만, 이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려 주신 영예를 더욱 높이려고 우리와 천사를 비교하며, 우리를 천사들보나 더 귀히 여기셨다고 한다. 모세의 증언을-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증언을(창 3 : 15)-신중히 고려한다면, 이 논쟁은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뿐 아니라, 인류전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를 얻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기리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셨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여자가 절망에 압도되지 않도륵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과 참된 인간성. 3-4)

3.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불합리한 생각을 폭로함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와 다윗 몸의 소생이라고 하는 증언들을 우리의 논적들이 풍유라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사악한 짓이다. "씨"라는 말을 풍유로 쓴 것이었다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구속자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뿐이라고, 즉 그리스도뿐이라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에(갈 3 : 16),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미리 약속되었다가 드디어 자기의 때가 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롬 1 : 3). 바울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전에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제 9장에서는 그를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롬 9 : 5). 그런데, 만일 그가 참으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신 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그 태중의 아이"라고(눅 1 : 42)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네 몸의 소생이 너의 보좌에 길이 있으리라"고 한 약속은(참조, 시 132 : 11 의역 ; 삼하 7 : 12 ; 행 2 : 30) 무슨 뜻인가?
그런데 그들은 마태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무용한 이론으로 궤변을 떨고 있다. 마태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선조를 기록했다(마 1 : 16). 그러나 그는 당시에 잘 알려진 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즉 마리아가 요셉과 같은 가문에서 났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가는 이 점을 더욱 역설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은 전인류에 공통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의 선조인 아담에게서 나셨다고 한다(눅 3 : 38). 족보를 볼 때에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서만 다윗의 후손이심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새 마르키온파는 자기들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서-즉 그리스도는 무에서 육체를 취하셨다는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서-여자에게는 "씨"가 없다고5 거만한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연의 원칙을 전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며, 그들이 제출하는 이유도 허무한 것이어서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과 의학에 속한 문제들을 논하지 않고, 그들이 성경에서 끌어 오는 항의만을 논박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론과 여호야다가 유다 족속에서 처를 취하였은즉(출 6 : 23 ; 대하 22 : 11), 만일 여자에게 생산하는 씨가 있다면 지파간의 차이에 혼란이 생겼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관해서 혈통을 따질 때에는 남자측의 혈통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남성의 우선적 지위는 여자의 씨가 생식 행동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해결책은 모든 족보에 적용된다.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할 때에는 남자들의 이름만을 기록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여자는 "남자" 가운데 든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성은 항상 남자의 성을 따르기 때문에 여자는 남편의 아이를 낳는다고 말한다. 자녀의 귀천은 부친의 신분에 따라 정한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우위(優位)가 인정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그와 반대로 "후손은 태(胎)를 따른다"고 법률가들은 말한다.6 이것을 보면 어머니의 씨에서 자식이 난다고 추론해야 될 것이다. 어머니를 "생산자"라고7 하는 것이 옛날부터 모든 민족에 공통한 말이다. 이것은 외숙과 질녀의 결혼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법과도 일치한다. 이런 법이 옳은 것은 근친(近親) 결혼이 되겠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만 다르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가 결혼하는 것은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수동적인 힘을 돌린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여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갈 4 : 4).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염치도 버리고 방자하게 묻는다. 그리스도는 처녀의 경도씨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냐고.8 나는 그가 어머니의 피와 결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곧 추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라고.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할 때에(마 1 : 5) 유사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서 처녀 마리아를 그리스도가 통과한 수로(水路)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놀라운 생산방법과 보통 방법을 구별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요셉이 야곱에게서 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한다. 마태가 하는 말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생각으로, 마태는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한 가지 일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마리아가 요셉의 친척(이고 따라서 다윗의 족속)9 이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인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4. 참된 인간이나 죄가 없으시고, 참된 인간인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를 누르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유치한 훼방이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후손이 된다면, 아담의 후손은 예외 없이 죄 아래 있다고 하는 일반 원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글에 있는 비교는 이 곤란을 곧 제거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그와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느니라"고한다(롬 5 : 12,18, 15 의역). 이와 일치하는 다른 비교도 있다. "첫째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 속한 자연인(人)이요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으니 천상적이라"(고전 15 : 47 의역).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고, 같은 뜻을 가르친다(롬 8 : 3,4). 이와 같이 사도는 그리스도와 보통 인간을 훌륭히 구별하고,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치하게 지껄인다.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고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불결하지 않고 남자의 씨만 불결한 것이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나셨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던 생산과 같은 순결하고 오염이 없는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지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촉구할 때에는 그의 참인간성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순결하시다고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도(19절) 신성에 대해서 하는 말씀일 수 없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전염이 없었다고 하지만, 아담의 씨에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식 그 자체는 불결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에서 생긴 우발(偶發)적인 성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회복할 사명을 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부패를 면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지적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는 지상적인 신체라는 좁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철면피다! 무한한 본질을 가진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더라도, 우리는 그가 그 속에 갇혀 계셨다고는 공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시지 않고서 자의(自意)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시에, 맨 처음부터 하신 것과 똑같이, 끊임없이 우주에 편만하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