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상식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1-5)

1. 첫째 주장 :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발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

그릇된 자유 개념에서 출발한 자들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없어지게 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견해를 공격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훼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의 입장은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다음에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공격한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 무기를 차례로 파괴하겠다. 만일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죄는 이제 죄가 아니며,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1 그들은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도 이 무기로 어거스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의 권위를 빌어서 그들의 무기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고, 먼저 문제 자체를 충분히 처리하겠다. 그러므로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죄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나는 부정한다. 반대로, 죄는 의지적이므로 피할 수 있다는 그들의 추리도 부정한다. 만일 자기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쟁론하며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대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이 대답을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2 즉,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는 것은 창조에서 오지 않고, 인간성의 부패에서 왔다는 것이다. 악인들이 서슴치 않고 구실로 삼는 저 무능은 아담이 자기를 악마의 압제 아래에 기꺼이 넘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를 결박한 부패의 쇠사슬은 처음 사람 아담이 자기의 창조주를 배반한 데서 생겼다. 모든 사람에게 이 반역죄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아무도 필연성을 이유로 용서를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필연성이야말로 그들이 정죄를 받는 가장 명백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하면서 악마 자신을 예로 들었다. 이 예를 보아도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뒤집어서,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의 의지는 선을 버릴 수 없지만, 여전히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나르두스도 같은 생각을 적절하게 가르친다. 즉, 우리는 필연성이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고 이 필연성은 우리를 그 자체에 동여 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 되도록 강요한다 라고3 그들의 삼단 논법의 둘째 부분은 "자발적"에서 "자유"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 선택되지 않는 일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2. 둘째 주장 : 보상과 처벌이란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덕행과 죄악이 모두 의지의 자유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벌이나 상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 논법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이지만 크리소스톰과 제롬도 어디선가 사용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제롬은 이것이 펠라기우스파가 잘 사용하는 논법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수고하지 않는 우리가 아니라 그 은총이 상을 받으리라"고 한 그들의 말까지 인용한다.4
벌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책의 근원이므로 우리에게 벌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유로운 판단 아래서 죄를 짓거나 노예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특히 사람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의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그 보상이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자주 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상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당연히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사에 대해서 주시는 것이다!"5 확실히 그들은 자유 의지가 공로의 원천이 아니라면 공로가 있을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뚜렷이 본다.6 그러나 이것을 큰 논쟁점으로 보는 점에서 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서슴치 않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항상 가르친다. 예컨대, "사람들의 공로란 무엇인가? 흘로 죄가 없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시는 그는 당연히 갚아야 할 의무에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발견하신다. 또,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시지 않고, 받을 자격이 없는 은총을 주신다. 만약 은총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라." 또,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는 우리의 것이지만,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상급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사에 상을 주시게 될 것이다." 같은 뜻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은총이 공로에서 생기지 않고 공로가 은총에서 생긴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조금 뒤에 결론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공로보다 먼저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서 자신의 공로를 나오도록 하려 하시며, 사람을 구원하실 이유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은사를 완전히 값 없이 주신다"7
그러면 이런 문장이 어거스틴의 글에 자꾸만 반복해서 나오는데, 무슨 까닭에 더 많은 증명을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도가 성도의 영광을 어떤 원칙에서 이끌어 내는가를 들으면, 우리의 논적들은 이 오류에서 더 잘 해방될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롬 8 : 30). 그러면 신자들은 무슨 까닭에 면류관을 받는다고(딤후 4 : 8) 사도는 말하는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자비에 의해서 택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 의지가 성립할 수 없으면 공로도 없으리라는 이 허망한 공포심을 버리라. 성경이 우리를 불러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무서워하며 도망한다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 : 7)라고 사도는 말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며 여러 가지이므로, 자기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드시고, 마치 우리 자신의 덕행인 듯이 그것에 상을 주신다.

 

3. 셋째 주장 :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은 말살될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취한 듯한 항의를 첨가하여 만일 선악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면, 동일한 본성을 나눠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악하거나 모두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8 이 입장에 가까운 것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방인의 소명(The Calling of the Gentiles)을 쓴 사람의 견해다. 그의 이론으로는 만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변덕스러운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9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을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크리소스톰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바울이 열심으로 주장한 것을-모든 사람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악으로 넘겨졌다는 것을(참조, 롬 3 : 10)-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함께, 모든 사함이 악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천적으로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는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만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냥 버려 두시는10 사람들은 부패한 가운데서 쇠잔하며 드디어 소멸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발점에서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참으로 인내 자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다.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무슨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굳게 견디어 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동요 때문에 실패하는가 하는 이 차이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즉, 주께서 인내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며 자기의 권능으로 힘을 북돋아 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는 사람들은 변덕스러움의 본보기가 되도록 자기의 권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4. 넷째 주장 : 모든 훈계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만일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게 없다면, 권면하는 것이 헛되며 경고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책망하는 것이 미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1 옛날에 어거스틴이 비슷한 반대를 받았을 때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책망과 은총에 대하여](On Rebuke and Grace)라는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저 비난들을 충분히 논박하지만, 주로 반대자들을 불러 이 중심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오 사람아, 교훈을 통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라. 책망을 받아서, 그대에게 그것이 없는 것은 그대의 허물임을 깨달으라. 기도를 드려서,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으라."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에서도 거의 같은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교훈들을 사람의 힘을 표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올바른 일을 명령하신 곳에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수행 능력을 풍부히 주신다고 말한다.12 또 이 문제는 길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우선 우리만이 이 입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모든 사도들이 우리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이런 상대자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 : 5)고 선언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떠나서 악을 행한 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며 징계하시지 않는가? 또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선행에 전심하라고 권하시지 않는 것인가? 고린도 신자들이 사랑을 등한시했다고 해서 바울이 얼마나 엄중하게 그들을 책망했는가?(고전 3 : 3, 16 : 14) 그러면서도 그는 주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한다(롬 9 : 16). 그러면서도 그 후에 여전히 경고하며 권고하며 책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까닭에 주에게 간청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서 저지른 일을 징벌하시는 헛수고를 하시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무슨 까닭에 바울에게 경고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버림을 당하고, 그 자비가 없이는 원하거나 달음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버려 두라고 하지 않는가? 열렬히 구하는 사람일수록 곧 받을 수 있다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 최대의 근거를 주님 자신에 둔 것이 아닌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바울은 썼다(고전 3 : 7). 여기서 그는 교훈과 충고와 책망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데 얼마나 이바지하는가를 알린다. 이와 같이, 모세가 율법의 계명들을 엄격한 제약하에 두고(신 30 : 19), 예언자들이 범법자들을 얼마나 호되게 위협했는지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은 사람이 깨닫는 마음을 받아야만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한다(예컨대, 사 5 : 24, 24 : 5 ; 렘 9 : 13이하, 16 : 11이하, 44 : 10이하 ; 단 9 : 11 ; 암 2 : 4). 또 마음에 할례를 주며(참조, 신 10 : 16 ; 렘 4 : 4), 돌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참조, 겔 11 : 19),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율법을 새기며(참조, 렘 31 : 33), 결국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참조, 겔 36 : 26) 그의 교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5. 훈계의 의미

그러면 충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경건한 자들이 완고한 생각으로 충고를 거부하면, 그들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충고가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들의 양심을 두들긴다. 가장 거만한 자라도 충고를 실컷 냉소는 할지언정, 정죄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종하는데 필요한 유순한 마음을 받지 못했는데, 가련하고 약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완강한 마음을 그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탄이라고 할 수 없은즉, 그에게 어떤 변명할 구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하나님의 충고를 희롱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충고의 힘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에게는 충고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신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모든 일을 하시지만, 도구로서의 말씀을 결시하시지 않고 신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이용하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의 의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다는 것을 진리로 인정해야 한다. 예언서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라고 한 말과 같다(겔 11 : 19-90). 그래도 그대는 항의하여 무슨 까닭에 그들을 성령의 인도에 맡기지 않고, 지금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경고하는가? 성령이 밀어주시는 정도 이상으로 급히 전진할 수 없는 그들을 무슨 까닭에 충고로 괴롭히는가? 불가피적인 육의 연약 때문에 타락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들이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징벌하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항의자여, 그대는 누구관데, 하나님에게 법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충고에 복종하도륵 은총으로 우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받도록 충고로 우리를 준비하신다면, 그대는 이 경륜의 어디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겠는가? 설사 충고와 견책이 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전연 무용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에 충고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즉, 누가 감히 충고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조롱하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충고는 우리 안에서 선에 대한 소원을 일으키며, 태만을 얼어버리며, 죄악과 그 달콤한 독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동시에, 반대로 죄악을 미워하며 싫어하게 만드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한다.
만일 더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13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지성을 비추며 의를 사랑하며 함양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개조하셔서, 그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와 같은 혁신을 원하며 구하며 달성하도록 활발시키신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결륜의 방법에 의한 자기의 손의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버림받은 자들을 상대로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들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다르다. 현재는 그들의 양심의 증언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심판 때에는 그들에게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이끄시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로 올 수 없으며,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후에 온다고 말씀하시지만 하시지만(요 6 : 44-45), 역시 교사의 직책을 경시하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성령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자기의 음성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바울은, 교훈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향기이므로 버림받은 자들 사이에서도 무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고후 2 : 15-16).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비난과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6-11)

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를 뜻하는가?

논적들은 굉장한 노력으로 성경으로 성경 구절을 수집한다. 쉬지 않고 모아서 비록 이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수효로 우리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오합지졸이 아무리 화려한 겉치레를 보일지라도. 일단 백병전에 들어가 한두 번 얻어맞으면 즉시 제각기 도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적군의 대부대를 우리는 아주 쉽게 흩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용하는 구절들은 몇 개의 큰 제목을 붙여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절 몇 개에 대답 하나를 하면 폭하고, 일일히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교훈들을 가장 중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명백한 요구를 모두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그것에서 우리의 능력을 측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경건·복종·정조·사랑·유순을 명령하시며, 불결·우상 숭배·불근신·분노·약탈·교만 등을 금지하실 때에, 그는 우리를 희롱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산더미같이 모아 놓은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분류한다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어떤 것은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어떤 것은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라고 한다. 또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일단 받은 사람은 그 은총 안에서 매진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먼저 이 모든 교훈에 대한 개론을 말하고, 다음에 그 세 종류를 논하겠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법규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것은 진리인 듯하기도, 했으나 율법을 전연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율법은 준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무서운 죄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고 하는, 분명히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유를 우리에게 역설한다.14 참으로 그들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묻겠다.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 3 : 19),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참조, 롬 7 : 7-8),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 : 20) 이런 주장들은 무슬 뜻인가? 율법을 주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제한해야 했는가?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보다 훨씬 높은 데 두셨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정의를 보면, 확실히 율법이 실현하려고 목적한 것은 사랑이다(참조, 딤전 1 : 5).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소서라고(살전 3 : 12) 기도 할 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온 율법의 강령을(참조, 마 22 : 37-40) 우리의 마음속에 불어넣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율법에 소리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7. 율법 자체가 은총에 이르는 길을 지적해 준다

만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율법은 생활 원칙이며 우리는 그 원칙대 로 노련해야 한다는 것 뿐 이라면, 물론 나도 즉시 저들의 견해에 양보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여러 가지 효용을 충실히 그리고 분명히 설명하므로,15 우리는 율법이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 해석에 따라 고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에 관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설명한 다음에 즉시, 복종하는 힘은 하나님의 인애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가 이 힘을 받도록 기도로 간구 할 것을 명한다. 만일 명령만 있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그 명령에 응답할 만한가를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에는 즉시 약속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얻는 지지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덕성까지도 전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달렸다고 선언하므로, 우리는 율법을 준수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그 약속들이 넉넉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율법의 교훈들을 비교하는 것을 이 이상 더 강조하지 말라. 주께서는 율법으로 주시려는 의의 표준을 우리의 연약한 힘을 가늠 보아 적용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점에서 주의 은총이 지극히 필요한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준비가 빈약한가를 이 약속들을 보아서 더욱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목석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냐고 그들은 말한다.l6 아무도 이런 논법을 쓰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의 정욕이 하나님 뜻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죄책을 느끼게 될 때에, 그들은 목석이 아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무력에 대한 경고를 받고 은총에서 피난처를 구할 때에, 그들도 목석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심원한 발언들이 적절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를 일게 하신다."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공경한다면, 교훈은 심히 유용하다." "믿음은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참으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명령된 것을 믿음이 성취하기를 원해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 자체를 요구하시지만, 찾으시는 것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요구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며, 주시려는 것을 명령하시게 하라."17

 

8. 여러 종류의 계명은 우리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교훈들을18 검토하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⑴주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많다(을 욜2 : 12 ; 겔 18 : 30-32 ; 호 14 : 2-3), 그리고 한편에서 예언자는 대답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등이다(렘 31 : 18-19). 주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며(신 10 : 16;렘4 : 4), 모세를 통하여 이 할례는 주 자신의 손으로 행하신다고 선언하신다(신 30 : 6). 어떤 곳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시지만(겔 18 : 31), 다른 곳에서는 그 새로운 마음을 자기가 주신다고 하신다(겔 11 : 19, 36 : 26).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은총을 통해서 하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우리는 율법과 약속 또는 계명과 은총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를 티코니우스의(성경 이해를 위한) 원칙 중에서 다섯째로 둔다.19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종할 능력이 있다고 추론하는데 이러한 추론은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계명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⑵둘째 종류의 교훈들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와 성결과 경건과 순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⑶셋째 종류는 바울과 바나바가 신자들에게 했다고 누가가 언급한 말, 즉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한 권고다(행 13 : 43). 그러나 지조라는 그 미덕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가르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46 : 10)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한다(엡 4 : 30). 여기서 요구하는 것을 사람은 완수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서 주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러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 : 11). 같은 식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헌금 문제를 논할 때에 그들의 착하고 경건한 뜻을 여러 번 칭찬하지만(고후 8 : 11), 조금 뒤에 가서 "권고를 받는 마음을 디도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고후 8: 16-17, 의역). 만일 디도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자기 입을 이용해서 남을 권고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않고서 기꺼이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9.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논적 중에서도 더 교활한 자들은 이 모든 증언에 대해서 궤변을 눌어 놓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도와주시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전력을 다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한다. 또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동등하게 나눠진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예언서에서 인용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 : 3). 주께서 어떤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느냐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니,20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점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은총이 무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율법에 대한 복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응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다. 또, 예레미야의 다음 말은 어떤 괴변으로도 논박할 수 없다. 즉 옛날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문자로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영이 언약에 개입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렘 31 : 32-33).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도(슥 1 : 3)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 거기서 하나님이 돌이키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질적 번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심을 입증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경을 주셔서 우리에게 대한 불쾌감을 보이시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불행과 재난으로 지친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고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의의 모범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정직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눠지는 듯하다는 논적들의 추론은 이 구절의 말씀을 일부러 곡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율법론에서 논할 것이므로,21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10. (반대자들의 견해를 따를 것 같으면)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재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종류의 논법은 첫째 논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주께서 우리의 의지와 언약을 맺으시는 약속들을 인용한다. "너희는 선으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 : 14, 의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 : 19-20). 또,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렘 4 :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98 : 1).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을 인용한다(렘 26 : 3이하).
주께서는 이 축복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만일 우리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거나 무효로 만들 힘이 없다면, 그 약속이 우리의 의지를 상대로 하는 것은 부적당하거나 희롱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점을 부연하기 위해서 그들이 말하는 웅변적인 항의들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면, 자기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잔인하게 속이신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자기의 축복들을 전개해 보이시면서도 그것을 즐길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의 이 선심은 대단한 것이다. 걸대로 실현되지 못할 불가능한 일에 의존하는 약속이니 놀랍고 확실한 약속이로다!"22
조건이 붙어 있는 약속들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할 것이다.23 그때에 약속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아무 불합리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이 전연 없는 것을 아시면서 자기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잔인한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데 약속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다 같이 제시되므로, 양쪽에 다 유용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훈으로 불신자들의 양심을 찔러, 그들이 심판을 잊어버리고 죄악에 탐닉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외 사학을 받을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언하도륵 약속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다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공경하는 자들을 축복 하시며, 자기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을 엄벌하시는 것이 완전히 공평하고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죄의 속박하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한 번을-즉, 그들은 악에서 떠나야만 마침내 축복을 받으리라는 법을-정하시는 것은 적절하며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경배자들이 받는 축복에서 그들이 배제되는 것이 정당한 처사임을 이해시키기만 해도, 이 법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백방으로 격려하시므로, 우리가 보인 바와 같이, 교훈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약속으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교훈으로 자기의 뜻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에, 우리의 불행을 알려 주시며, 우리가 얼마나 충심으로 그의 뜻에서 어긋났느냐 하는 것도 알려 주신다. 동시에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호소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러나 교훈은 나태한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지 못하므로, 약속을 첨가하적서 일종의 달콤한 생각으로 우리가 그 교훈들을 좋아하도록 유인하신다. 의에 대한 소원이 간절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열렬히 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즐겨한다면", 또 "너희가 순종한다면"이라고 하시는 호소의 말씀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결심하거나 순종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무력함을 조롱하시는 것도 아닌 것이다.

 

11. 우리의 반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온 비난은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못한다면 의미를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논적들이 쓰는 셋째 종류의 논법은 앞에 있는 두 가지와 비슷하다. 그들은 배은 망덕한 백성을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그 구절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지극한 자비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런 종류의 구절을 들면 다음과 같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민 14 : 43), "내가‥‥‥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이 집‥ ‥‥에 행하리라"(렌 7 : 13-14), 또 "너희는‥‥‥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렘 7 : 28). 이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했다(렘 7 : 29). 또 저희가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주께 복종하고자 아니하였으므로, 이 모든 재난이 저희에게 임하였다는(참조, 렘 19 : 16) 말씀이 있다.
이런 질책은 당장 다음과 같이 대답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곧 우리는 순경을 원하고 역경을 두려워했으며, 그 순경을 얻고 역경을 피하기 위해서 주께 복종하지 않고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도 않은 것은, 우리가 죄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어 해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도망할 수 없는 악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다라고.
그러나 필연성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력하고 무익한 변명이므로, 나는 그것을 무시하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오를 변명할 수 있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들이 패악해서 주의 자비의 혜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한 원인은 그들 자신의 패악한 의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해 보라. 악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은 자기의 멸망을 자초하지 않은 듯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얻으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만일 죄인들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징벌을 받는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완고하게 죄악을 계속 범한다면 큰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잔인하시다고 비난하기보다 자기의 무가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 만일 그들이 배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불행과 파멸의 원인인줄로 아는 자기의 죄에 싫증이 났다면, 그들 자신이 비참하고 길일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며, 주께서 책망으로 자기들을 깨우쳐 주신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인정하며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책망이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 제 9장에 있는 다니엘의 위대한 기도를 보면 분명히 알수 있다(4-19절). 첫째 효과의 실례를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례미야를 보내 그들의 불행한 원인을 설명하라고 명하셨으나, 이 일은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라고(렘 7 : 27) 하신 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귀머거리들을 당대로 노래를 부른 것인가? 그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그 말씀이 옳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불행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은 사악한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자들은 계명에서, 또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서 무수한 증거를 끌어다가,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은 망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몇 개의 설명으로 독자는 그들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시편에서 유대인들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악한 세대"라는 책망을 듣는다(시78 : 8). 다른 시편에서도 예언자는 동시대 아람들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고 권한다(시 95 : 8). 확실히 이것은 모든 완고한 마음이 사람들의 사악함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마음은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니(참조, 잠 16 : 1)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굽힐 수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시 119 : 112) 유쾌한 생각으로 기꺼이 하나님에게 자기를 바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성향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같은 시편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시 119 : 36).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의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경고의 말에 유의해야 한다(빌 2 : 12-13). 참으로 사도가 그들에게 할 일을 지정하는 것은 육의 태만을 허락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그는 두려움과 조심성을 명령해서 그들의 자만을 깼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침을 기억하게 한다. 여기서 바울은 신자의 행동이 이를테면 피동적임을 분명히 알리며, 그들이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능력은 하늘이 공급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또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공급하라"고(벧후 1 : 5) 권하면서도, 우리가 무슨 일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듯이 이차적인 의무들을 우리에게 지정하지 않고, 다만 육에서 오는 나태를 분발시킬 뿐이다. 이 나태가 믿음을 자주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태만은 시정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신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하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살전 5 : 19)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받은 빛을 키우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짓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우둔한 생각은 쉽게 반박될 것이다. 바울이 명령하는 열성 그 자체는 하나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고후 7 : 1).
사실, 성결케 하는 직책은 성령이 홀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게 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는다. 요컨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고 한다(요일 5 : 18). 그런데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우리가 한 부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또 다른 부분은 자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사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 준 바로 이 보존이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도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다(요 17 : 15). 또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사탄과 싸울 태에는 하나님의 무기만으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안다(참조, 엡 6 : 13이하).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깨끗게 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시정하는 의미로 즉시 "성령을 통하여"라고 첨부한다(벧전 1 : 22).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요일 3 : 9)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전투에서 사람의 힘은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히 밝힌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요일 5 : 4) 하는 말로 그 이유를 알린다.

 

(성경에 있는 특별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답변. 12­19)

12. 신명기 30:11이하

그러나 반대자들은 우리의 설명에 강력히 반대되는 듯한 구절을 모세의 율법에서 인용한다. 모세는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 앞에서 증언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 11-14).24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단순히 교훈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당면 문제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판정한다. 이것은 계명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성향에 관한 것이지 계명들을 지키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의심이 남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믿을 수 있는 해석가인 사도 바울은 모세가 여기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롬 10 : 8). 그러나 어떤 완고한 사람이 있어서,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심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사람의 대담성은 불경건한 것이지만, 우리는 사도의 권위를 빌 것 없이 그를 논박할 방법이 있다. 만일 모세가 교훈들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라면, 그는 백성에게 심히 허망한 자신을 불어넣은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처운 일인 듯이 자기 힘으로 지키려 했다면, 그것은 파멸로 돌진한 것 외에 달리 무 이었겠는가? 율법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모세의 이 말씀은 자비의 언약을 의미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의 규정들과 함께 그 자비의 언약을 공표했던 것이다. 몇 절 앞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필요가 있다고도 가르쳤기 때문이다(신 30 : 6). 그러므로 그는 곧 뒤에서 말한 그 능력을 사람의 힘에 두지 않고 성령의 도움과 보호에 둔 것이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 안에서 자기의 사업을 힘차게 실현하신다. 이 구절도 단순히 교훈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약속은 의를 얻을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는 전연 주장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바울은 이러한 증언을 확인한다. 즉, 복음 안에서 주어진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어렵고 가혹하고 지키기에 불가능한 조건 아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쉽고도 언제든지 지킬 수 있으며 공적으로 따를 수 있는 조건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은 모든 율법을 성취한 사람만 결국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롬 10장) 인간 의지의 자유를 확립하는 데는 아무 가치도 없다.

 

13.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 한다는 주장

하나님께서 간혹 사람들을 시험하시는 의미에서, 은총의 도움을 철수하시고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노력의 방향을 돌리는가를 기다려 보신다고 하는 구절들을 반대자들은 자주 끌어온다. 예컨대 호세아서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내 얼굴을 구할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리라"는 말씀이 있다(호 5 : 15, 의역).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그 본유적인 능력으로써 어느 쪽으로든지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 그들이 자기의 얼굴을 구하게 될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라고. 마치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백성이 그들의 생활을 바르게 고치기까지 그들을 멸시하며 버리시는 듯한 띨을 극히 자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자들은 이런 위협의 말씀에서 결국 무슨 결론을 내리려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백성이 자기 힘으로 회심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성경 전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회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와 싸우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고유 능력을 보유하는 조건으로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25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증명하는가? 물론 그것은 그 구절이나 유사한 구절일 수는 없다. 사람에게서 물러서시고 그들이 자기 지혜만으로 무엇을 판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는 것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 약한 정도에 따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말씀들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백성은 완고해서 경고와 권고와 책망이 아무 효과도 없으므로, 나는 잠깐 물러서서 그들이 고통 당하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두겠다. 오랫동안 재난을 겪고 나서 언제 나를 기억하고 내 얼굴을 찾게 되는지 볼 것이다." 주께서 떠나가신다는 것은 예언을 중지하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으로 조용히-말하자면 비밀히-시험하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공순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정을 받기 전에 역경의 채찍으로 타도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완고한 고집에 노하시고 심지어 지치신 주님께서 잠깐 우리를 떠나실 때에-바꿔 말하면, 자기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조금씩 이라도 나타내시는 그 말씀을 일시 주시지 않을 때에-그리고 주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 관찰하며 시험하실  어떤 자유 의지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잘못 해석한다. 하나님이 일시 떠나시는 목적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26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려는 것뿐이다.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그들은 또 성격이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방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죄를 짓지만 거듭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한다고 인정된다. 죄가 우리에게서 왔다고 해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이 옳다면, 같은 이유로 선행에서 우리가 하는 몫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밀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거저 돌덩이처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첫째 자리를 드리지만 저 표현들은 우리의 노력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일러준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단순히 주장한다면, 나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떡도 "우리의"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참조, 마 6 : 11). 여기서 "우리의"라는 소유 대명사는, 원래는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주기도에도 같은 어리석은 점이 있다고 조롱하든지, 그럴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의 선심에 의해서 할 뿐인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러석은 일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는 좀더 강하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를 보존하며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선행을 한다고 확언하는 때가 많다. 이런 일은 마음과 의지의 고유한 기능이므로 만일 우리의 열성이 하나님의 힘을 어느 정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성령에게도 돌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의 성령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시는가를 잘 생각하기만 하면, 이런 너절한 항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들이 악의로 우리에게 던지는 비유는 적당하지 않다. 어떤 미련한 사람도 우리가 돌을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7 또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찬성과 배척, 원함과 원치 않음, 추구와 저항 등의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기능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허망한 것에 찬성하고 완전한 선을 배척하며, 악을 원하고 선을 원하지 않으며, 사악을 추구하고 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부패 행위를 자기의 진노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뜻대로 조종하셔서 사람의 썩은 손을 통해서 자기의 선한 사업을 실현하신다. 그러면 자기의 정욕만을 따라 노력하는 악인이 하나님의 권능을 섬길 때에, 우리는 그런 악인을 돌에-외부의 힘에 움직여 자기의 운동이나 감각이나 의지가 전연 없이 거저 길려가는 들에-비교 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선한 사람들은 어떤가? 주께서 그들 속에 자기의 나라를 건설하실 때에 주님은, 의지의 본유적 성향에 따라 빗나간 정욕에 의해서 전후좌우로 끌리지 않도록 성령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억제하신다. 그리고 성결과 의를 향하도록, 자기의 의를 표준으로 삼아 그 의지를 굽히며 청태를 주며 방향을 지시하신다. 비틀거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의지를 바로잡으며 힘을 주신다. 이런 뜻으로 어거스틴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용을 받을 분이고 자기는 행동하지 않느냐?"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하며 또 작용을 받습니다. 선한 사람의 작용을 받으면 여러분은 좋은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돕는 이'라는 말은 여러분도 행동한다는 뜻을 보입니다.28 이 발언의 처음 부분에서 그는 성령의 작용이 사람의 행동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을 추구하도록 지도를 받는 사람의 그 의지는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돕는다"는 말에서 우리도 무엇을 하는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고 곧 첨가하는데, 이 점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무엇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를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을 연결해서, "결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고 바르게 결심하는 것은 은총에 속한다"고 말한다.29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정복할 수 없고, 심지어 싸울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격려 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하나님의 은총과의 관계를 논할 때에, 그 은총은 사람의 의지를 지휘하며 규정하는 성령의 지배라고 해석된다. 성령이 지배하실 때에는 반드시 시정과 개혁과 갱신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시작은 우리의 것을 일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이런 기능들을 하시려면 반드시 움직이며 행동하며 재촉하며 참으며 보존하여야 한다. 따라서 은총에서 생기는 행동들은 모두 전적으로 성령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동시에 우리는 어거스틴이 "은총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한다"고30 가르친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즉,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의지가 시정되어 의의 참된 지배를 받도록 지도될 때에, 그것은 재건된다고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의지가 사람 속에 창조된다고 한다. 본성에 있는 의지는 심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새로운 본성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의 적합한 행동이라고 아무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다른 어떤 기의 것을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데서31 인용한 어거스틴의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인은 사람의 의지에서 사람 자신의 어떤 선을 찾아보려고 무익한 노력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 의지의 힘과 하나님의 은총을 혼합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혼합은 은총을 부패시킬 뿐이다. 마치 포도주에 쓴 흙탕물을 타는 것과 같다. 설사 의지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순수한 감동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를 타고났으므로, 하나님이 자기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하시는 일을, 한 편에서는 우리가 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선을 향해서 지도하시는 그 마음도 우리의 것이요, 의지도 우리의 것이요, 노력도 우리의 것이다.

 

16. 창세기 4 : 7

그들은 여기저기서 다른 증거를 긁어모으지만, 이미 제시한 논박들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총명하지 않더라도 별로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 있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발언을 인용한다(창 4 : 7). 그들은 이 말씀을 죄에 적용해서, 주께서 가인에게 약속하시기를, 만일 그가 죄를 정복하려고 애쓸 결심을 한다면, 죄의 힘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듯이 말한다.32 그러나 이 절을 아벨에 적용시키는 것이 말의 순서에 더 잘 맞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이 아우에 대해서 품은 악한 시기심을 책망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책망하신 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것만이 칭찬을 받는 것인데, 가인은 헛되이 범죄를 계획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우보다 나으려고 했다. 둘째로, 가인은 하나님에게서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할 줄 모르고, 아우가 자기의 권위하에 있었는데도 그 아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우리의 견해와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해석을 취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는지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잘쏨하셨다고,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럴게 가정할 때에, 주께서는 이 발언 내용을 약속하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령하셨을 것이다. 만일 명령하셨다면, 인간의 능력이 있다는 증명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히 설명했다. 만일 약속하셨다면, 가인이 정복하리라던 죄에 항복했으니, 그 약속은 어디서 실현되었는가? 그 약속에는 무언중에 조건이-예컨대, "네가 싸운다면 승리를 얻으리라"는 식으로-포함되어 있었다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누가 이런 핑계를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지배가 죄에 관한 것이라면 말투가 명령법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정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일 자체로 보거나 문법의 원칙으로 볼 때, 가인과 아벨을 비교한다고 해야 한다. 장자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아우보다 낮게 된것이 아니였다면, 아우 밑에 들었을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17. 로마서 9 : 16과 고린도전서 3 : 9

그들은 또 사도의 증언인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을 이용한다(롬 9 : 16).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은 비록 자체만으로는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을 받을 때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추론한다.33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바울이 여기서 무슨 문제를 논하는가를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그의 발언을 이렇게까지 경솔하게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오리겐과 제롬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편에서는 어거스틴을 대립시킬 수 있다.34 그러나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들의 견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구원이 예비되었으며,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파멸과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뜻이다. 그는 바로의 예를 들어 악인들의 운명을 지적했다(롬 9 : 17).
그는 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는(롬 9 : 15 ; 출 33 : 19) 모세의 증언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거저 선택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했다. 그리고 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결론지었다(롬 9 : 16). 그러나 만일 의지와 노력이 이 무거운 짐을 질 만한 힘이 없으니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바울의 발언은 부적당할 것이다. 이러면,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의 원함과 어느 장도의 달음박질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이 궤변을 그만 두라, 바울이 말하는 뜻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를 위해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은(사람의) 의지도 아니요 노력도 아닌 하나남의 자비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 : 4-5). "원하는 자로 말미암으며 달음박질하는 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부정했으니(롬 9 : 16), 원함과 달음질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암시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같은 식으로 추론한다면, 즉 우리는 우리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이 부정하니 우리는 다소의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추론의 권리를 그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추론에서 결점을 발견한다면, 그들 자신의 추론에도 같은 오류가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확고한 추론을 한다. "그러므로 만일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논법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추론이 불합리하므로, 어거스틴은 주께서 사람의 의지를 준비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선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바른 결론을 내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달음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성취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35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한 바울의 말을(고전 3 : 9) 비틀어서 똑같이 무지한 곡해를 한다.36 이것이 교역자들에 국한된 말씀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동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무엇을 공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할 능력과 필요한 은사를 주신 다음에 그들의 수고를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18. 집회서(묵시 문학서 중의 한 책) 15 : 14-17

그들은 집회서의 저자를 들먹인다. 이 사람의 권위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저자를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가 있지만, 가령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자유 의지를 어떻게 변호하겠는가? 그는 말한다. "사람이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지혜의 힘으로 살도록 맡기셨다. 그에게 계명들을 주셨다. 그가 계명을 지키면 계명이 그를 지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앞에‥‥‥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두셨다. 어느 쪽이든지 그가 택하신 대로 주시리라고 하셨다"(집회서 15 : 14-17, 의역).37 사람이 창조된 때에 생명이나 죽음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장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은 이 능력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나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한 말에(전 7 : 29)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기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으므로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그가 가졌던 것이 모두 다 반드시 곧 그의 부패·타락만 본성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논적들뿐 아니라 집회서 저자에게도(그가 누구였든간에) 대답한다. 구원을 얻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우리는 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대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편견을 일으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그대는 육의 악한 경향을 억압하며, 육이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면서 헛된 자기 변호를 시도하는 것을 누르려는 생각뿐이며, 따라서 정직한 마음을 사람 속에 넣으신 것은 사람의 파멸이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대가 대답한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처음에 사람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장식을 사람이 자기의 허물 때문에 지금은 빼앗기고 없다는 점에서, 그대와 나의 견해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나 나나 사람은 지금 변호인보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19. 누가복음 10 : 30

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절반 산채로") 길에 버려졌던 행인의 이야기를(눅 10 : 30) 무엇보다도 자주 인용한다. 이 행인은 인류의 큰 재난을 대표한다고, 거의 모든 저자들이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을 근거로 반대론자들은 추론한다. 즉, 행인을 "절반 산채로" 버렸다고 하니, 사람은 죄와 악마라는 강도를 만나 선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무 흔적도 없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며 바른 이성과 의지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절반 살았다"고 하겠느냐고 추론한다.38
첫째로 내가 그들의 이 풍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확실히 교부들은 주의 말씀의 참뜻을 고려하지 않고 이 해석을 고안했다. 성경의 원칙이 지정한 한계를 넘어서 풍유(알레고리)를39 해석해서는 안 되며, 어떤 교리의 완전한 토대로 삼는 것은 더욱 안 된다. 내가 이 허위를 근절하려면 그렇게 할 근거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절반 살았다"고 하지 않고 축복된 생활에 관해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죽은 우리를‥‥‥살리셨다"고 말하고(엡 2 : 5), 성도들이 "절반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절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광명을 받으라고 호소하지 않고, 잠자는 자와 무덤에 묻힌 자들을 상대로 한다(엡 5 : 14). 같은 식으로 주께서는 친히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나는 때가 왔다"고 하신다(요 5 : 25, 의역). 사소한 암시를 들어 이렇게 많은 분명한 발언들에 반대하는 그들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그러나 그들의 이 풍유가 확실한 증언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절반 살아 있다고 하니, 아직 건전한 데가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사람은 천상적이며 영적인 지혜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성은 없지만, 그의 지성에는 이해력이 있다. 그는 정직한 일을 다소간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은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성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속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 학과들의 공통된 찬동으로 인정된 어거스틴의 견해를 우리가 버려야 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을-거저 주시는 선한 것들을-빼앗겼고, 사람의 여러 가지 천품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고 한다.40 그러므로 우리가 틀림없는 진리, 어떤 공성기로도 흔들 수 없는 진리라고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즉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불경하고 패악하고 악취가 나고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독소가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선한 외관을 보이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적 패악성으로 결박되어 있다.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1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처럼 보인다. 1-2)

1. 중보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시초에 있었던 훌륭한 고귀성은2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도리어 큰 수치를 주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로 오염되고 더렵혀진 인간을 자기의 작품으로 인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드디어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구속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논술한3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더라도, 믿음이-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믿음이-따르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자연적인 순서로서는 우주라는 구조가4 일종의 학교가 되어 그 안에서 우리가 경건을 배우고, 거기서부터 다시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전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반역한 후로 우리는 어느 쪽으로 향하든간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만나게 된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죄없는 다른 피조물들까지도 이 저주하에 잡혀 있고 덮여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이 저주에 압도되어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려고 하시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보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우리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전혀 인정하시지 않고 인연을 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으므로 당연하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의 마음도 눈이 어두워져서 참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둔해지고 은혜를 모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감각도 뒤집혀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만큼 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발언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 : 21). 수많은 기적이 가득히 들어찬 하늘과 땅-이 웅대한 극장을6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보면 우리는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 믿음을 어리석다고 보아서 멸시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멀어진 우리의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전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틀림없이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로 중보를 떠나서는7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구원을 얻게 하는 힘이 없었다(참조, 롬 1 : 16: 고전 1 :24). "영생은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믿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요 17 : 3) 그리스도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문이라고(요 10 : 9) 모든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이8 모든 불경건한 자와 불신자들에게 천국을 열어 주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더욱더 추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발언을 복음 전파에 국한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에 대한 것은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참조, 엡 4 : 18) 저주를 받은(참조. 갈 3 : 10) 진노의 자녀라고(참조, 엡 2 : 3) 선언된 사람들은 화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상식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 : 22). 이런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방 종교를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하시는 것과 똑같이, 율법 아래에서 구속자가 선민에게만 약속되었다는 그 이유를 알리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는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된다. 또 이 근거 위에 서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없고 생명에 대한 희망을 빼앗겼다고 단언한다(엡 2 : 12), 그런데 요한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었고(요 1 : 4), 모든 세계가 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므로(참조, 요 1 : 10),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가 화해자 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생명이라고 선언하신다(요 11 : 25, 14 : 6). 확실히 하늘을 이어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뿐이다(.참조, 마 5 : 9-10). 그뿐 아니라 독생자의 몸에 접붙임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녀의 지위를 가진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부적당한 생각이다. 요한은 분명히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요 1 : 12, 의역).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직 철저히 논할 생각이 아니므로, 언급하기만 하고 지나가도 충분할 것이다.

 

2. 구약의 중보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중보를 떠나서 하나님이 저 옛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이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있는 제사는 그리스도만이 행하는 속죄에서만 구원을 찾으라고 신자들에게 명백히 가르쳤지만, 나는 그 제사들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기쁘고 복받은 상태는 언제나 그 토대가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을 포함시키셨지만(창 17 : 4), 바울은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할 후손은, 바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였다고 현명한 추리를 한다(갈 3 : 14).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이 모두 그의 후손인 것이 아님은 우리가 아는 바이기 때문이다(갈 3 : 16). 이스라엘과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은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을 때부터, 하나는 택하심을 받고 하나는 버리심을 받았으니(롬 9 : 11),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참으로 장자가 버림을 받고 차남만이 자기의 지위를 지킨 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상속권을 빼앗긴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주로 머리인 한 분 안에서 인정되며,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직책인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약속의 구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최초에 선민을 택하신 것도 중보의 은총에 의한 일이었다. 비록 모세의 글에 이 점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아직 백성 위에 왕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경건한 자들의 행복을 이미 노래에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 : 10). 이런 말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축복하시리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 생각과 부합되는 예언이 조금 뒤에 첨가되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 : 35) 또 우리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다윗과 그 후손에게서 그리스도의 산 형상을 보기를 원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할 때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시 2 : 12)고 명령한다. 이와 일치하는 것은 복음서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 : 23)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나라는 열 지파의 반란으로 인해서 붕괴했지만. 다윗과 그 후계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변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 : 13,32)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약속은 두세 번 반복되어, 분명히 "내가‥‥‥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왕상 11 : 39). 얼마 후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라고 한다(왕상 15 : 4). 그 후에 사태가 거의 파멸 상태였으나,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한다(왕하 8 : 19).
간추리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려 두시고 다윗을 택하셔서 하나님 의 영구히 기뻐하실 사람을 삼으셨으니,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다. "실로의 성막 그리고 요셉의 장막을 싫여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틀 택하지 아니하시고"(시 78 : 60,67),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 : 68),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 78 : 70-71).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의 교회를 보존하기로 정하셔서, 저 머리되시는 분에게서 그 건전성과 안전성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라고 선언한다(시 28 : 8). 그는 즉시 기원을 첨가하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라고 해서(시 28 : 9), 교회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뗄 수 없게 연결되었다는 뜻을 표시한다. 다른 구절도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낙하소서"(시 20 : 9).9 이 말씀은 신자들이 자신들은 왕의 보호하에 피하여 있다는 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도움에서 피난처를 얻으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 뜻은 다른 시에서 "여호와여‥‥‥구원하소서‥‥‥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는 말씀에도 포함되어 있다(시 118 : 25-26). 여기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을 받을 소망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다른 기원에서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 : 17).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백성이 흩어진 것을 통곡하면서도 그들이 머리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백성이 외국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하고 모든 것이 파멸된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교회의 재난을 슬퍼했을 때에, 그는 특히 나라가 망해서 신자들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통곡한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애 4 : 20).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중보 없이는 인류와 화해하실 수 없으므로, 율법하에서 거룩한 조상들이 믿어야할 대상으로서 항상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언약과 참된 신앙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분이다.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그런데 환난 중에서 위로가 약속되며 특히 교회의 구원이 묘사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깃발이 예시되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와 함께 나오셨느니라"고 하박국은 말한다(합 3 : 13). 그리고 예언자들은 교회의 회복을 말할 때마다.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킨다(참조, 왕하 8 : 19) 또 이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약에 안정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한 대답이 매우 적절하다. 불신자인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해제되어 도성이 곧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사야의 증언을 물리쳤을 때에, 그는 갑자기 메시아에 관해 언급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 : 14). 이런 말로 그는 비록 악한 왕과 백성이 고의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려는 듯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거부했지만, 구속자가 지정된 때에 오실 것이므로 그 언약은 무효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예언자가 항상 애써 선포한 것은 구속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다윗의 나라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라고 한다(사 55 : 3-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이 증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심한 절망에서 신자들은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었다. 낙망한 자들을 고무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신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벗이며"(렘 23 : 5-6). 그뿐 아니라, 에스겔서에는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34 : 23-25)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이 믿어지지 않는 거듭남을 논하신 후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라고 하신다(겔 37 : 24,26).
모든 경건자들의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에게만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몇 구절씩 수집하는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다. 예를 들면, 호세아서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라는 말씀이 있다(호 1 : 11). 그는 후에 이것을 더 분명히 설명해서,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라고 한다(호 3 : 5) 또 미가도 백성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명백히 말한다.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미 2 : 13). 아모스도 백성이 새로워질 것을 예언하려고,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라고 한다(암 9 : 11). 이 말씀의 뜻은 "내가 다윗의 가문에 다시 한 번 왕가의 영광을 일으키리니, 이것은 구원의 유일한 기치며,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출현 시대에 더 가까워진 스가랴는 더욱 분명히 선포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슥 9 : 9). 이것은 이미 인용한 시편의 말씀, "여호와는‥‥‥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힘이시로다‥‥‥여호와여 구원하소서" 하는 말씀과(시 28 : 8-9) 일치한다. 여기서 구원은 머리로부터 전신에 흘러내린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이 이런 예언들을 듣고 깨달아, 직접 그리스도를 향해서 해방을 구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들은 수치스러운 타락 상태에 빠졌지만, 대원칙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서 교회를 구원하시며, 선민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실 그 언약-거저 주신 그 언약-은 확고 부동하리라는 것이 그 대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마 21 : 9). 어린이들이 부른 그 찬송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고, 하나님의 자비의 유일한 보증은 구속자의 출현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믿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으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너희는‥‥‥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 믿음은 원래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곧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완전히 굳은 믿음을 가진 분이 중보로서 사이에 있지 않으면 믿음은 점점 사라지며, 중보가 없으면 하나님은 너무도 존엄하고 높으시기 때문에 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와 같은 죽을 인생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라고10 하는 일반적인 말에 나는 찬성하지만, 거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데는(골 1 : 15) 이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칭호는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예언자들이 구속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해석으로 모호하게 만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절망 상태에서는 중보의 출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며, 교회를 해방하는 방법도 달리 없다는 것이 여론과 같이 인정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롬 10 : 4)11 바울의 가르침은 유감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율법 자체와 예언서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의 가르침은 바르고 확실하다. 다른 적당한 곳이12 있겠기 때문에 여기서는 믿음에 대해서 아직 논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의견이 이 점에서 일치하기를 바란다. 즉, 경건 생활의 첫째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우리를 지켜 주시며,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드디어 우리를 모아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상속으로 주신다는 것을-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최근에 말한 것이13-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분명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들이 그를 보며 그를 믿게 하셨다.
이런 의미로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광대 무변한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들 안에서 유한하게 되시고 우리의 작은 척도에 자기를 맞추셨다고 했다.14 광신자 들은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유용한 발언을 불경건한 공상으로 바꾸어 마치 하나님의 완전하신 전체에서 흘러나는 신성의 일부분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듯이 곡해한다.15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말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된다는 뜻에 불과하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라고 한 요한의 말은(요일 2 : 23) 언제든지 옳았다. 천지를 만드신 최고의 존엄하신 분을 경배하노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중보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참으로 맛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모시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잠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그 결과로 그들은 드디어 유치하고 추악한 미신에 빠져, 자기의 무지를 폭로했다. 현재 회교도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우상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

 

제 7 장

율법을1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율법. 1-2)

1.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을 돕는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갈 3 : 17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증언들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온 것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모세를 입법자로 세우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말소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거저 받은 언약과 그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여러 번 그들에게 회상시켰다. 마치 그는 그 언약을 부활시키려고 파견된 것 같았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의식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기름에서 나는 악취를 드리는 것보다 더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자기의 더러운 살결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 물과 피를 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것에 대응하는 그림자와 상징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체가 전혀 우스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에 속한 모든 것을 산에서 보이신 규례 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신 구절을(출 25 : 40) 스데반의 설교와(행 7 : 44) 히브리서에서(히 8 : 5) 아주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방인들이 너절한 짓에 정력을 소모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그 의식들에서 공연한 노력을 낭비했을 것이다. 경건을 위한 열성으로 노력한 일이 없는 무(無)종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진저리날 정도다. 그들은 무슨 까닭에 하나님이 저 고대 민족을 이 많은 의식으로 괴롭히셨느냐고 할 뿐 아니라, 이 의식들을 멸시하며 어린애 장난이라고 비난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율법의 목적에 주목하지 않는다. 율법의 형식을 그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사를 명령하신 목적은 세상적인 일로 경배자들을 분주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바로 저 모형이2 알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본성을 생각해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경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많은 말들도 이 점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의 미련함을 비난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물에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율법의 가치를 낮추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해석가였으므로,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일반 사람들의 눈을 이런 방법으로 다시 그 목표로 향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은총을 보면, 우리는 확실히 율법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점이 없지 않다는 언급을 할 수 있다.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라고 모세가 그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출 19 : 6). 이것은 짐승의 피로 얻는 화해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화해가 사이에 끼지 않으면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참조, 히 9 : 12이하). 아담의 후손은 모두 유전적 오염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다. 그러면 그들이 왕 같은 존엄한 지위에 오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만일 이런 탁월한 명예가 어떤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가장 합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러운 죄악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그들이 거룩한 머리 안에서 성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사장직의 권리가 그들 사이에서 잘 실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세의 말을 교묘하게 돌려, 유대인들이 율법하에서 맛본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2 : 9). 그가 이렇게 말을 바꾼 것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조상들보다 더 많이 얻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과 임금의 영예를 받았고, 중보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감히 자유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율법은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의 가문을 중심으로 드디어 건설된 왕국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모세의 제도하에 포함되었다는 점에 우리는 여기서 잠깐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레위 지파 전체에서와 다윗의 후손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고대인들의 눈앞에 마치 이중의 거울에 비치듯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며 자신의 부패에 오염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받은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 유대인들은 "몽학 선생"의 감독 아래에 놓였다고 한 바울의 말은 옳다(갈 3 : 24).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친숙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애들과 같았다.3 의식들이 어떻게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는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다. 이 점은 예언자들의 많은 증언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매일 새 제물을 드려야 했지만, 그들의 모든 악행을 다만 한 제물이 대속하리라고 이사야는 약속했다(사 53 : 5). 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단 9 : 26-27). 레위 족속에서 임명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다만 한 제사장에 대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이 엄숙한 맹세로 선택하셨다고 한다(시 110 : 4 ; 히 5 : 6, 7 : 21). 그 때에는 눈에 보이는 기름을 부었는데,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다른 종류의 기름 부음이 있으리라고 선언했다(단 9 : 24). 여기서 무수한 예를 말하지 않고 히브리서 기자의 예를 보면, 그는 제 4장부터 제 11장까지, 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는 의식들이 무가치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십계명에 관해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롬 10 : 4) 경고한 말에 주의해야 한다. 또, 의문 자체는 죽이는 것이지만(고후 3 : 6), 그리스도는 그 의문을 살리는 영이시라고 한다(고후 3 : 17). 율법의 마침이라는 발언은, 그리스도께서 의를 거저 전가해 주시며 중생의 영으로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쓸데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 즉 마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더라도, 그 감당할 수 없는 멍에와 짐에 눌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지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 : 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의를 얻는 듯이 말하는 악한 거짓 교사들을 상대로 사도는 논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서 율법 자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율법은 거저 택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포함한 아름다울 것이었다.

 

(우리는 도덕적인 율법을 수행할 수 없다. 3-5)

3.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며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게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율법을 배울 때에 변명할 여지가 더욱 없어진다는 것을 간단히 알아두어야 한다. 만약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럴 때에 인간은 하늘 심판대 앞에서 분명히 외로운 자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을 선포한 후에,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놓았노라고 하면서(신 30 : 19), 주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았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보상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만일 우리가 이 길을 취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완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나는 있는 일을 말할 뿐 아니라, 있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율법의 교훈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 것이므로, 사람은 제시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 약속에서 혜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약속이 선하심으로 사람은 자기의 불행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구원받을 소망이 없어졌으므로 자기는 분명히 죽으리라는 위협을 느낀다. 여러 가지 무서운 협박이 몇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압박하며 괴롭힌다. 협박은 우리를 지나지 않고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추궁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가장 임박한 죽음을 볼 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약속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만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하며 당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서 얻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정죄와 저주이기 때문이다(갈 3 : 10). 율법은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도, 그 축복과 우리 모든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또한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희롱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행복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보이시며, 그것을 얻으라고 불러 인도하시며, 얻을 수 있다고 다짐하시면서, 한 편으로 그것을 감추며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드시니, 이것은 희롱과 다른 데가 없지 않은가? 나는 대답한다. 율법의 약속에 조건이 붙어 있는 점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행해야만 약속을 얻을 수 있으며 완전한 준수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약속을 주신 것은 허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애로 우리의 행위를 보심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으며, 우리도 복음이 보여 주는 그 인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율법의 약속에 아무 결실이나 결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그 약속은 조건이 붙어 있더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베풀어주시며, 자기의 충만한 친절에 다시 다른 선물을 첨가하신다. 즉, 주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물리치시지 않고 도리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완전히 만드시면서, 마치 우리가 조건을 이행한 듯이 율법이 약속하는 혜택들을 받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제목하에4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논해야 하겠으므로, 지금은 더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5. 율법의 수행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했다. 제롬이 아무 저주함없을 만큼5 이 생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일반 사람이 생각하므로, 우리는 곧 간단히 설명하여 재확인해야겠다. 나는 제롬의 생각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를 살펴야 하겠다.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구질구질한 말로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지금까지 있은 일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나는 "불가능하다"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오랜 과거를 찾아본다 하여도 성도들은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참조, 롬 7 : 24), 한 사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함을 다하며"(막 12 : 30)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사랑의 목표에 도달한 일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또 정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누가 이것을 반대하겠는가? 물론 나는 우리가 어리석은 미신으로 어떤 성자를 공상하는가를 안다. 하늘 천사들도 그 성자들처럼 순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또 경험에서 얻는 증거와는 반대된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도 육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완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이 점을 지지하는 명백한 증언들이 성경에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솔로몬이 말한다(전 7 : 20 ; 참조, 왕상 8 : 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한다(시 143 : 2). 욥은 여러 구절에서 같은 생각을 주장한다(참조, 욥 9 : 2, 25 : 4). 바울의 말은 가장 분명하다. "육체외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 : 17).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 바울이 드는 이유는 다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것이다(갈 3 : 10 ; 신 27 : 26). 여기서 그는 아무도 그렇게 항상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전제한다. 성경에서 기록된 일은 영구적인 것,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을 궤변으로 괴롭혔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행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그들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물론 죽을 인생을 천사 같은 순결 상태에 끌어올리실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서 선언하신 것과 반대되는 일은 하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6 나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실을 대립시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하다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또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런 발언은 냉소해 버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자.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마 19 : 25-26). 또 어거스틴은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한다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지식에 따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애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땅에서 방랑하는 동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전 13 : 12)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하다."7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력한 것을 볼 때에, 율법을 이 육신 생활에서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기를 바란다. 이 점은 바울의 다른 구절도 밝힌다.(롬 8 : 3).8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며, 거울처럼 우리의 죄 많음을 밝혀 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  한다. 6-9)

6. 율법은 엄격함이 우리에게서 모든 자기 기만을 제거해 준다

그러나 이 문제 전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도덕적 율법"의 기능과 용도를9 간단히 개관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그 기능에 세 부분이 있다.10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유일한 의를 밝히는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죄를 깨닫게 하며, 결국 정죄한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눈이 어둡고 정신이 마비되었으므로, 자기의 무력함과 불순함을 알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기의 허무함을 분명히 믿게 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의 정신력에 대해서 지나친 자신을 가지며, 자기가 택한 표준으로 재는 동안은 자기의 정신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게 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과 율법의 난해함을 비교하게 되면, 자기의 오만불손함이 다소간 꺾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기의 능력을 아무리 굉장한 것으로 생각했더라도, 이 무거운 율법을 지고는 숨이 가쁘고 비틀거리는 것을 곧 느끼며, 결국은 심지어 넘어지며 지쳐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율법을 배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든 그 교만을 탈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병도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가 자만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삼는 것을 버려 두는 동안은 위선을 의로움 이라고 가장하며, 여기 재미를 붙여서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에 반역한다. 그러나 그 모든 허구적인 가짜 의를 제쳐놓고, 율법의 저울로 자기의 생활을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는 자기가 성경에서 멀며, 참으로 지금까지 자기는 오염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무수한 죄악이 자기 안에서 가득차있는 것을 깨닫는다. 탐욕의 죄는 아주 깊고 꼬불꼬불한 구석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쉽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사도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롬 7 : 7). 율법이 탐욕을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끌어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련한 인간을 아주 비밀히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

 

7.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은 그 가치를 감하지 않는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 그가 거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의 첫째 기능, 즉 아직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이 경험하는 것 뿐이다. 여기에 관련된 발언들이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 : 20), 그래서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으로서(고후 3 : 7) "진노를 이루게" 하며(롬 4 : 15) 죽인다.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가책이 더욱 커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럴 때에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범행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 자체만으로는 고발하며 정죄하며 멸망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11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율법을 공경하지 않거나 그 훌륭한 우월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할 태세가 완전히 준비되어 있으면 율법을 알기만 해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맹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12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범법자임이 증명되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명백하게 나타낼수록, 반대로 우리의 죄를 더욱 폭로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구원이라는 보상은 의에 달렸다고 율법이 확실히 다짐할수록, 그것은 악인의 열망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이 격언들은 결코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분명히 칭송하므로 가장 가치있는 발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사악과 부패로 인해서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제시하는 복된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지지 없이 우리를 양육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감사하며, 우리에게 은총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로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새로운 은사를 더욱 많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

우리 모든 사람이 사악하다는 것과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한다. 그러나 이 확인은 우리가 낙심해서 주저앉아 버리거나, 완전히 용기를 잃고 낭떠러지에 뛰어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증언에서 마땅한 유익을 얻으면 된다. 율법이 악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 : 19)고 사도는 단언한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멸망하게 버려 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 : 32).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율법의 교훈에서 하나님은 다만 완전한 의에 보상을 주시며 그러나 이런 의는 아무에게도 없다. 반대로 악행은 엄격히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충만한 빛이 난다.13

 

9. 율법은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듯이 비난함으로써 우리가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주 말한다. 예컨대, 힐라리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 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연약하여 피로할 때에, 율법은 우리에게 은총의 도움을 구할 줄 알라고 합니다." 아셀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글을 써 보내었다.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 대책으로서 그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을 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유용합니다"라고. 또 로마의 이노센트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율법은 명령하고 은총은 실천력을 공급합니다"라고 썼다. 발렌티누스에게 보낸 글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책망하며, 책망을 받은 우리가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므로 용서를 빌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고 감히 행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다." 또,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궁핍하여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주여, 행동하소서, 자비하신 주여, 행동하소서, 행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소서, 아니, 당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소서,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입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를 큰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게 하소서"14 그러나 그가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15 글을 썼는데, 내가 그의 증거를 많이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율법의 둘째 가치를 이렇게 명백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첫째 가치에 의존한 것이라고 알았거나 또는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그 정확한 뜻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말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이 첫째 기능은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육을 억누른 후에 속사람이 새로워지며 다시 꽃이 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첫 인상에 놀라 절망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이 이런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버림받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율법과 양심의 증거에서 철저한 타격을 받아, 마땅히 받은 것을 스스로 탄로시킨다.

 

(율법은 죄인과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구속한다. 10-11)

10. 율법은 부정한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적어도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강압을 느끼지 않으면 바르고 공정한 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들이 억제되는 것은 속마음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굴레를 쓰고 있어서 외면적인 활동에 손을 대지 못하며, 제멋대로 즐겼을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도 나아졌거나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이 방해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품은 것을 감히 실행하지 못하며, 날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시키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올라, 무서운 율법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곧 무엇이든지 하며 어디서든지 폭발할 자세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 자체를 극히 미워하며 입법자인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른 일을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나, 하나님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쪽으로 기꺼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싫어서 반대를 해보지만 하도 무서워서 억지로 복종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억제된 또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16 주께서는 만사가 소란·혼돈하지 않고 사회가 평온하도록 이런 방법을 마련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한다면 사회는 소란하고 혼돈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 : 4), 어리석은 육의 욕심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17 받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벌이 무서워서 적어도 외면에 나타나는 난동을 삼가는 동안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고 적지만, 그래도 의의 멍에를 담당하므로 조금은 야성이 꺾인다. 그 결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전혀 규율에 대한 초보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다음과 같은 교훈은 특히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해 언급한 듯하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 : 9-10). 사도는 여기서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 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고 가르친다.

 

11.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 : 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
처음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덕이 있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둘째 종류의 인간들은 굴레가 필요하다. 그들이 육의 정욕이 날뛰는 대로 포기하여 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을 굴레로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직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욕이 몹시 끓어올라 영혼을 결박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멸시하는 상태에 떨어뜨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대항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즉시 중생시키지 않는 때에는, 그들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공포심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신다(참조, 벧전 2 : 12).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순결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는 데 유익한 공포심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암중모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이 굴레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성령으로 중생해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18

 

(율법은 주로 믿는 자들을 깨우치며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믿는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필요하다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본래의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19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렘 31 : 33; 히 10 : 16),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마치 주인의 마음에 들겠다는 성의와 준비가 있는 하인이 주인의 습관을 따르며 거기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 습관을 자세히 연구하며 관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율법을 매일 공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더욱 순수하게 아는 일에서 새로운 전진이 없을이 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또 우리는 배울 뿐 아니라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 : 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시 119 : 5). 이 구절들은 바울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도는 중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는 율법의 위대한 효용가치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종심을 불어넣으시고,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읽을 때에 그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훈뿐 아니라, 거기 동반하는 은총의 약속을 붙잡는다.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든다. 만일 율법이 명령과 위협만으로 사람의 영혼을 무섭고 놀라게 하여 괴롭히며 슬프게 만든다면, 율법보다 더 싫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히 율법에서 중보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린다. 중보가 없으면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13. 믿음이 깊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20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집어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죽음의 직분"이 포함된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리 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 32 : 46-47). 그러나 만일 율법에 의의 완전한 모범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시 1 : 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의무와 일치하는 동시에 또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기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참으로 인생 전체가 경주다(참조, 고전 9 : 24-26). 경주로를 다 달릴 때에, 지금 멀리 바라보면서 뛰어가는 그 목표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이른바 율법의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단절을 뜻한다. 14-17)

14. 율법이 어느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철폐되었는가?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을 일깨워 주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즉 내가 말하는 도덕적 율법이-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21 율법이 신자들에게 지금은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 넣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철폐된 데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친다(참조, 롬 7 : 6). 주께서도 철폐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주께서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리라는 생각을 부정하셨는데(마 5 : 17), 만일 이 생각이 유대인 사이에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정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구실도 없이 우연히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리가 없으므로,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오류는 거의 모두가 진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께서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 : 17-18)고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강림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교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 3 : 16-17).

 

15.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의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계명의 힘에 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법은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솔직하게 실시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저주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갈 3 : 10; 신 27 : 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 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 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속박하에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속박에서 풀러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형벌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 : 13 ; 신 21 : 23).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갈 4 : 4-5)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갈 4 : 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끝없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억눌려지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우리는 항상 여전한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6. 의식적인 율법

의식들은 문제가 별개이다.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의식을 끝내셨지만 그 신성은 조금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정하시며 존중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허무한 외관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의식들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의식을 정한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의식 준수가 쓸데없을 뿐 아니라 또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은 그림자요 그 본체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골 2 : 17). 그러므로 이미 자기를 분명히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의식이 상징하는 것보다 멀리서, 또 휘장으로 가리워 있듯이 상징하는 것보다 지금은 의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진실이 더 잘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마 27 : 5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히 10 : 1) 전에 희미한 윤곽만으로 시작했던 하늘 축복이 명백하고 살아 있는 형상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눅 16 : 16) 여기 해당한다. 저 거룩한 족장들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대낮에 보는 것을 그들은 멀리서 희미한 윤곽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교회는 이 초보적 단계를 아주 초월해야 하는가를 세례 요한이 설명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 : 17). 비록 속죄가 고대의 제사에서 참으로 약속되었고, 언약의 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증했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안정성이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림자에22 불과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시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17. 우리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유대관계는 삭제되어 있다

바울이 지적한 것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운운한다(골 2 : 13-14). 이 발언은 율법의 철폐를 확대해서 율법의 규정이 이제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정도까지 가는 듯하다. 이 말을 도덕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교훈보다 그 용서 없는 엄격성을 폐지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23 그 생각은 잘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더 신중히 고려해서 그 본뜻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의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한다(엡 2 : 14-15).24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를 막힌 담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엡 2 : 14),이 발언이 의식에 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둘째 주석가들이 저 첫째 사람들을 바르게 비평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사람들도 아직 사도의 뜻을 썩 잘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두 구절을 세부까지 비교하는 것을 나는 옳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다짐하려고, 과거에 그들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런 장애물은 의식들이었다.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성별한 결례와 제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골로새서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숭고한 신비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거기서 문제는 모세에 있는 규례들이며,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 규례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더 깊은 데까지 논의를 전진시키는 것과 같이-이를테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이 구절에서도 같은 논의를 한다. 의식들에 관해서 순수해야 된다는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 의식들을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라고25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골 2 : 14) 그뿐 아니라, 무슨 까닭에 우리의 구속을 그 증서가 "도말"되었다는 사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시키는가? 그러므로 문제 자체가 우리에게 더 내면적인 것으로 인정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옳은 해석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글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사도의 분명한 말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곧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죄에 대한 속죄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참조, 히 10 : 1이하; 레 16 : 21).26 유대인들이 제물을 드림으로써 얻은 것은 자기들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자기 대신에 결례를 드렸다. 그들이 결례로 얻은 것은 자기의 불결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준다고 해서 거기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의 글에 구약아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에 속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히 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이다(참조, 히 10 : 3).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은총에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을 받았고 의식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사용한 의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만들었으므로, 사도는 그 구절에서 의식과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의식 자체만을 볼 때에는 사람의 구원에 "적대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람들의 의무를 증거 하는 의무적인 법적 요구 문서이기27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의무로 얽어매려고 했을 때에, 바울은 정당한 논거에 입각해서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심원한 말로 다시 규정하며, 골로새 신자들을 향해서 만일 이 모양으로 끌려서 의식적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다(골2 : 16이하).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의식을, 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 데는 아무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을 철폐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