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1

(철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주장된다. 1-4)

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더우기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단번에 완성하신 순간적인 창조주로 삼는다는 것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와 다름없이 그 후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망령된 이교도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경건치 못한 자들의 마음도 천지를 관찰할 때 창조주에게 그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 자체의 특수한 방법으로 창조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둔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사도의 주장,2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 : 3)라는 말씀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에 일단 마주치게 될 때에 거기에 그대로 멈추게 된다. 기껏해야 그러한 일을 이룩하신 창조주의 지혜, 권능, 선을 판단하며 정관 할뿐이다(이것들은 이미 명백한 자명한 진리이며 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더우기 육신의 생각은, 보존하며 조정하는 어떤 일반적인 활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운동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육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있으며 이것은 만물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가 만물의 통치자요 보호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적인 운동에 의하여 천체와3 그 각 부분을 운행하시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만물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유지하시고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통치자요 보존자이신 것이다(마 10 : 29). 그리하여 다윗은 우주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간단히 진술한 후에, 즉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고 섭리의 영속적인 과정을 기술하였다. 곧 이어 그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 33 : 13)라는 말씀을 추가하였으며, 그 뒤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말씀이 따른다.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명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가장 좋은 순서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철학자들은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저들은 다윗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도달한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 : 27-30). 실로 저들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 : 28)고 한 바울의 진술에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은총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을 알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운명이나 우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보다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치는데로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4 그런데 세상 만사가 우연히 발생한다는 견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공통적인 신념으로 되어 왔으며, 오늘날 역시 모든 사람들은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패한 견해로 말미암아 섭리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확실히 흐려졌으며 뿐만 아니라 거의 매몰되다시피 되었다. 사람이 강도나 짐승을 만났다고 하자. 바다에서 갑작스런 강풍을 만나 파선을 당했다고 하자. 집이나 나무가 넘어져 압사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자. 파도에 밀려 표류하던 중 마침내는 항구에 다달아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자.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사건들을 그것이 번영이든 불행이든 모두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 : 30)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원인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지배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생물들은 각각 본래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효력을 계속 부어 주시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이런 일 저런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태양의 힘보다 더 놀랍고 더 빛나는 힘을 가진 피조물은 없다. 태양은 그 빛으로 온 지구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 열로 모든 생물을 양육하고 소생시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 광선으로는 땅에 풍요함을 불어넣지 않는가? 태양은 땅에 있는 씨앗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들이 파랗게 싹트게 하며 그것들을 키우고 강하게 하고 또한 신선한 자양분을 공급하여 마침내는 줄기를 일게 하지 않는가? 태양은 식물에 계속 따뜻한 온기를 공급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꽃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다음 뜨거운 열로 열매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수목이나 포도나무도 태양의 따뜻한 열로써 처음에는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며, 다음으로는 꽃을, 그리고 이 꽃에서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전적인 영광을 요구하시기 위해,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빛이 있게 하시고 땅이 각종 풀과 과실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창 1 : 3,11,14).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한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 원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수 10 : 13), 히스기야 왕을 위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갔다는 것을(왕하 20 : 11; 사 38 : 8)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몇 가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양의 매일의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겨울이 지나면 봄으로, 봄 뒤에는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계절의 순서에는 매우 커다란 그리고 한결같지 않은 다양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가 매년, 매월, 매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하나님의 섭리가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을 주장하시는 동시에 이 전능을 우리가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전능이란, 궤변가들이5 상상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게으르며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효과적이시며 활동적이시고 계속 일하시는 그런 전능을 말한다. 실로 전능은 한번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확실히 활동할 수 있으시되 때때로 일을 중단하시고 한가하게 앉아 있다든가 혹은 그가 이미 정해 놓은 자연의 질서를 일반적인 충동으로 계속 운행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천지를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물을 조정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계획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을 철학자들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운동의 기원이요 원인이기 때문에 그를 제1동인(動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6 이는 역경을 당했을 때 신자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일에 확대된다면 이를 자연의 영향하에 둔다는 것은 유치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하여 만물이 자유로운 과정에 따라 생성되도록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좁은 한계 내에 제한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 못지 않게 자기들에게서도 가장 유용한 교리를 빼앗아 버린다.7 왜냐하면, 인간이 만일 하늘, 공기, 땅, 물 등의 운동에 예속되었다고 하면 아마 인간보다 더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은 매우 무가치하게 약화될 것이다. 다윗은 아직 어머니의 젖을 먹는 어린아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웅변으로 찬양하기에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는데(시 8 : 2)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즉시 하나님의 돌보심에 따라 준비된 젖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떤 어머니의 젖은 풍부하나 어떤 어머니의 젖은 거의 말라 있다는 것은, 경험이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우리의 눈도, 우리의 감각도 피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어떤 아기에게는 더 풍부하게 젖을 먹이시고, 어떤 아기를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 첫째, 하늘과 땅을 소유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축복하시기에 풍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이다. 둘째, 유익은 저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재난이 어디서 오든 그것들을 다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키시고, 자신의 권위로 극도로 광포하고 또 온갖 장비를 갖춘 사탄을 억제하시며 우리의 안녕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그의 명령에 복종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험을 만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미신적인 공포는 다른 방법으로는 조정할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피조물에게서 위협을 받으며 강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치 그 피조물에게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힘이나 있는 것처럼, 혹은 그것들이 우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께는 그것들의 해로운 행위를 물리치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무서워 떤다고 하면, 이것은 미신적으로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 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렘 10 : 2)고 명하였다. 확실히 그는 모든 공포를 다 정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별들이 통치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행복과 불행은 별들의 결정과 징조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상한다. 따라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별이나 혜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신앙에서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즉, 피조물에게는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8

 

4. 섭리의 본질

그러면 첫째로,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9 오히려 열쇠의 관리자로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눈 못지 않게 그의 두 손에도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 : 8)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예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난국과 당황케 하는 일을 언제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그 미지의 사건에 관한 걱정을 맡기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섭리는 행위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예지에 대하여 크게 떠벌리는 것은 지나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혼란되고 잡다한 통치로 보는 사람들의 오류는 그렇게 심하게 조잡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운동에 의해서 천체와 그 각 부분을 회전시키시며 운행시키시되 피조물 하나하나의 활동을 특수하게 지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용납될 수 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 섭리에는 모든 피조물이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나 인간이 그의 자유 선택에 따라 이쪽 혹은 저쪽으로 향하는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별을 지어 놓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인간에게 운동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운동력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본성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계획에 따라 스스로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와 인간사 그리고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스려지기는 하나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 생각의 요점이다. 하나님은 게을러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이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분하다)와 이에 못지 않게 어리석은 사람들, 곧 하나님은 공중의 상반부(上半部)는 다스리시고 그 하반부(下半部)는 운명에 맡긴다고 공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말하지 않겠다.10 말 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그 엄청난 광란에 대하여 충분히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일반적" 섭리와 "특별" 섭리)

그러므로 이제 나는 (거의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견해를 반박하고자 하는데,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일종의 맹목적이며 애매모호한 운동으로 인정할 뿐 하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만물을 지도하시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배치하시는 사실들을 그에게서 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이름만의 우주의 통치자일 뿐 실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배력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지배한다는 것은 지휘하는 것들을 결정된 질서에 따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그러나,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일반 섭리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겠다. 마치 만물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일단 결정하신 것은 저절로 운행되어 나가는 것처럼 여러 종류의 사물이 자연의 은밀한 충동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 17).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 : 28)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11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할 뜻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 : 3)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확실하고 명백한 성격의 증거로 확증된 그 특별 섭리를 부당하게 가르치고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말한 바 있는 휘장으로 그 특별 섭리를 가리는 자들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특수한 행동에만 잘못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의 교리. 5-7)

5.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운동의 시작은12 하나님께 있지만, 그러나 만사가 자연적 경향의 강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혹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의 서로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 각자에게 각각 일을 지정하시고 일정한 법칙을 제정해 주신 한, 즉 그것들이 순탄한 행로를 따라 계속 동일한 과정을 유지하여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또 한 해가 오는 한, 하나님의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심한 무더위에 심한 가뭄이 겹쳐 땅의 농작물을 태워 버리며, 어떤 때에는 때아닌 비로 곡식이 해를 입고 또한 우박과 폭풍우로 불의의 재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날씨의 맑고 흐림, 그리고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그 기원을 별들의 근접과 다른 자연적 원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성적인 사랑이나 심판을 표시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어떤 통상적인 힘을 넣어 주시고, 이것으로 인류에게 식물을 공급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매우 빈약하고 속된 허구이다. 이것은 마치 어느 해의 풍작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며, 흉년이나 기근이 하나님의 저주와 복수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 모든 논증을 수집한다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니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만족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자신의 은총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으며(레 26 : 3-4; 신 11 : 13-14, 28 : 12), 또 그의 명령으로 하늘이 철과 같이 굳어지고(레 26 : 19), 곡식 밭이 충해와 다른 재앙들로 손상을 입게 되며(신 28 : 22), 우박과 폭풍우로 전답이 해를 당할 때마다(사 28 : 2; 학 2 : 17) 이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특수한 보응의 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실로 다윗은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시 147 : 9)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동물을 위협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때로는 적게 먹이시고 때로는 더 많이 가장 좋아 보이는 음식으로 먹이신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이것을 특별 행위에 국한시킨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부의 뜻이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 : 29).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새들을 날게 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 : 5-6)

 

6. 하나님의 섭리는 특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우주가 특별히 인류를 위하여13 세워 졌음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도 역시 이 목적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 : 23). 솔로몬도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 : 24)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고 그들로 말하게 하자.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인간 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와 솔로몬은 권능뿐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솔로몬은, 마치 하나님의 손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자들의 이 경솔함을 훌륭하게 책망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 : 1,9).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어리석은 일이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들면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그 밑을 지나던 행인이 맞아 죽었다고 하자. 이보다 더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살해자의 손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출 21 : 13). 마찬가지로, 제비를 뽑을 때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 제비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신다. 조약돌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거기에서 집어 올리는 것은 그들 각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우연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다고 증언하셨다(잠 16 : 33).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 : 13; 참조, 잠 22 : 2).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다같이 이 세상에서 섞여 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처해 있는 상황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온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자기 운명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짐을 벗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지자도, 어떤 사람은 비천한 자리에 처해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높임을 받는 것이 인간의 수고와 운명의 탓이라고 하는 경건치 못한 자를 꾸짖는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 : 6-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장의 직무를 벗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의 높임을 받고 어떤 이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여기서 논증한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현상을 조정한다

나는 또한 개개의 사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바람을 일으켜 많은 메추라기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주셨다(출 16 : 13 ; 민 11 : 31).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보내 광풍을 일으키셨다(욘 1 : 4). 하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생각지 않는 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통상적인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도, 불지도 못한다고 추론한다.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구름과 바람의 행로를 원하시는 대로 지도하시며 이 가운데서 자신의 특별한 권능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하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 : 3-4)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바다가 강한 바람으로 거센 파도가 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임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 107 : 25).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시 107 : 29). 다른 곳에서 그는 풍재(風災)로 백성을 치셨다고 말씀하셨다(암 4 : 9).
이와 같이 또한 인간에게는 본래의 생식력이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손이 없게 내버려두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자손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참조, 시 113 : 9). 이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 127 : 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곱은 그의 아내에게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 : 2)라고 했다. 이 논의를 곧 끝맺는다면, 우리가 음식으로 양육된다는 것보다 더 평범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지만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 : 3; 마 4 : 4)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은 풍부한 떡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4 반대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을 제하여 버리겠다"(사 3 : 1)고 위협하시는 것과 같다. 실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마 6 : 11)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손길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양육하심으로써 한 가족의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시 136 : 25)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시 34 : 15)라는 말씀과, 또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 : 16)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어떤 모양으로든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자.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역사하여 자연의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놀라우신 계획으로 본래의 명확한 목적에 순응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운명, 우연, 우발성에 대한 토론. 8-9)

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이 아니다

이 교리를 비난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를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라고 하여 비방한다. 어거스틴도 한때 이러한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15 우리는 용어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명이라는 말에 용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친 망령되고 공허한 말 중의 하나이며(딤전 6 : 20), 또한 사람들이 이 비방하는 말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이 운명론을 믿고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또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과(因果)의 계속적인 관계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연속에서 파생되는 필연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무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뜻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독자는 물을 것이다. 아무 일도 운명적으로나 우연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는가? 나는 이에 대하여 대답한다. 대(大)바실(Basil)은,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진실하게 말했다.16 왜냐하면,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는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상적인 말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논박(Against the Academics)이라는 나의 책에서 자주 운명이라는 말을 언급한 데 대하여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사용할 때 어떤 여신이나 혹 다른 것을 나타내려고 뜻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외부적 사건에 있어서의 우연적 결과를 나타내려고 한 것뿐이다.17 '포르튜나'(fortuna, 운명)란 말에서 '우연히'(forte), '아마'(forsan), '혹시'(forsitan), '어쩌면'(fortasse), '뜻밖의'(fortuito)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서,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다"라고 할 것을 "이것은 운명이 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거스틴은 만일 무엇이든지 모두 운명에 맡겨버린다면 세계는 목적 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만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곧 이어 그는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리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되는 대로 발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또한 어떠한 우연한 일도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한층 더 명백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자주 사용한 "허용"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라고 그가 증명한 데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18 확실히 그는, 한가하게 높은 망대에 앉아서 이것저것 허락하기를 즐겨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공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간섭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말하자면 현실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원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9.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우연적이라고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 즉 물론 이것은 운명이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며 만물을 되는대로 상하로 굴러가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생각되든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에 따라 평가되든, 그것들은 표면상으로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숲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見)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장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선견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다"(욥 14 : 5)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그런 죽음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성질상 우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리시며 그 목적을 향해 운명을 지도하신다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평가는 미래의 우발적인 사건에도 적용된다.19 일체의 미래사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그 일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 속에서 그 미래사를 붙잡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견하시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 부동한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이라는 말이 전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2 : 14-15, 3 : 19, 9 : 2-3,11)20 인간은 처음 보아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제일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이 가르침은, 그 어떤 섬광이 흑암 속에서 항상 비취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서 소멸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점장이들도, 비록 의심하여 흔들렸을 망정 그들은 액운을 일부분은 하나님의 탓으로, 일부분은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보아서 궤(櫃)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삼상 6 : 9)고 말하였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점(占)에 속아 운명을 의지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불행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감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섭리의 고삐로 모든 사건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시는 가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실례에서 명백해질 것이다. 즉,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게 되어 부득불 사울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삼상 23 : 26-27).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종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사울의 가는 길을 방해하셨다고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또는 뜻밖에 싸움을 걸어 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신앙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밀한 추진이었다고 인정한다.
언제나 똑같은 이유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변동이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활동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되지만, 그 필연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그 자체의 특수한 성격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뼈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소유하셨던 만큼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요 19 : 33,36).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 마찬가지로 결과적 필연과 결과의 필연의 구별이21 학파들간에 분별없이 고안된 것이 아님을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를 부러지지 않게 하심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계획의 필연으로 제안하셨던 것이다.

 

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의 언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해석.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더우기 인간의 성향은 쓸데없이 교묘한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유익하고 바르게 계속 사용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에 말려들어 거의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배정하셨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기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와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의 결정적 원리로서 이 섭리는 때로는 매개체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체 없이, 때로는 모든 매개체와 반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더욱 친근히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지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자비 혹은 엄격하신 공의가 종종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하여 운행된다고 하는 사상이 슬그머니 잠입하기도 하고,1 또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선동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처럼 던져서 가지고 우롱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항변하게도 한다. 실로 우리가 만일 정숙하며 침착한 마음으로 기꺼이 배우려 하기만 한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데 최상의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실 것이다. 혹은 자기 백성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혹은 저들의 사악한 감정을 바르게 하시고 방종을 억제하시고 혹은 자기 부인을 실천케 하시고 혹은 나태에서 일으키시며 또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불경건한 자들의 교활함을 낮추게하시고 그들의 책략을 전복시키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인이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 : 5).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할 때, 죄가 언제나 마음에 떠오르며 형벌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은밀하신 계획에 더 많은 권위를 두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 : 3)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불행이 출생에 앞선다고 하는 경우, 마치 무죄한 사람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리의 본성은 소리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밝으면 이 이적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시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어두어지고 심한 폭풍우가 일어날 때 침침한 안개가 우리의 눈 앞을 가리고 천둥이 귀를 때리며 공포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우리에게는 혼란해지고 뒤엉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여전히 평온하고 청명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이 혼란한 상태가 우리의 판단력을 빼앗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소동을 가장 잘 고안된 질서로 조정하심으로써 통제하신다는 것이며 그들을 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추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그의 은밀한 계획을 조사하여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는 죽을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더 경솔한 판결을 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등한 인간들에게는 겸손하여,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기를 더 좋아하면서,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심판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은 경건히 준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요,2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올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 오늘날 공교롭게도 많은 개들이 이 교리를 독살스러운 이빨로 물어뜯으며 혹은 적어도 소리내어 짖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이성이 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맹렬히 비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의 훈계로 만족하지 않고 우주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3 실로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가르치는 바가 다만 머리의 고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또 성령이 도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수한 표현 형식으로 이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소나마 살아있는 그들의 수치심이 그들을 억제하여 감히 하늘나라에 대한 모독을 토해 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분방하게 날뛰기 위하여는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시 36 : 6)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하여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구름이나 깊은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신 30 : 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심연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것이 된다.4 바울 또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 : 33-34; 참조, 시 40 : 13-1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사 11 : 2)5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었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시 119 : 105), 생명의 빛(요 1 : 4; 참조, 8 : 12),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은 당연히 심연이라고 불리며, 이는 그것이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건하게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몇 마디 말로 이 둘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 : 29).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열심히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 보도록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명하는가를 보게된다. 욥기에도 역시 이 숭고한 교리가 기록되어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있다. 즉, 욥기의 저자는 우주의 구조를 상하로 두루 살피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장엄하게 논술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였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 : 14). 이런 방법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있는 지혜와 그가 인간에게 주신 지혜를 구별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논할 때 지혜는 하나님께만 알려지고 "모든 생물의 눈에는 숨겨졌다"고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28 : 21). 그러나 조금 지나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는 탐구되기 위하여 일반에게 알려졌다고 부언하였으니,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욥 28 : 28)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의 질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공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궤변 철학자들이 지껄이고 있는 절대적 의지, 즉 불경하게 또는 모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분리시켜 놓은 그런 절대적 의지가 아니라,7 만물의 결정적 원리가 되는 섭리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이 섭리에서는 옳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불행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호마(Homer)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Agamemnon)이 "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신과 운명의 여신에게 있다"8 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의 죄책을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운명에 의하여 유괴된 것처럼, 그들은 플라우투스(Plautus,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젊은이가 "만사는 불안정하며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인간을 몰아친다. 나는 나 자신을 절벽으로 끌고 가서 거기서 내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겠다"라고 한 것처럼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또 다른 실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악행의 구실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리코니데스(Lyconides)는 다른 희극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동자였다. 나는 신들이 그것을 원하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9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탐구하며 배우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에 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동시에, 저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불경스러운 사람들은10 어리석게도 불합리의 혼란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거의 혼동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자신을 지켜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강도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위험하다는 길로는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이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지치도록 약을 너무 복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거친 음식을 삼가며, 어떤 이는 다 낡아서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기를 두려워한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고안해내며 열심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를 시정해 보려고 시도한 이상의 모든 치료는 헛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과 죽음과 사, 건강과 질병, 평화와 전쟁, 그리고 인간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대로 혹은 얻으려 애쓰거나하고, 혹은 피하려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작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또한 신자의 기도는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 기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것을 주시도록 주님께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와 관계된 모든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신의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 발생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고,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계 있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린다. 살인자가 한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이 살인자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한 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던가, 혹은 간음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들의 말대로 하면, 주께서 예지하시고 정해 놓으신 것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대행자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병들어 누워있는데, 아들이 치료를 게을리한 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의 죽음만을 기다렸다고 하자. 그로서는 영원 전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해서 그들은 모든 범죄를 미덕이라고 부른다.

 

4. 하나님의 섭리를 구실로 인간의 신중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미래일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섭리와 쉽게 조화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없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대담하게 계획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 : 9). 이 말씀은, 우리가 앞날을 준비하며 모든 문제를 정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에 항상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 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와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에게 구조의 수단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되다. 하나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위험도 그것이 운명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운명적인 한 이에 대한 여하한 대비책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물리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와 얼마나 일치한가를 검토해보자.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면 주의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피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위험을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독자들은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위험이 독자에게 운명적인 것이 아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경계하도록 명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게으르고 태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살핌으로써 임박한 재난을 해결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 없이 무모한 짓을 하여 파멸한다. 그런데 만일 우매와 신중이 다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체의 미래사를 의심스러운 사건들로 대항하게 하시며, 준비하셨던 예비책으로 끊임없이 반대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감추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미래사들을 극복하게 하시거나 우리의 모든 염려를 초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된 수단으로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역시 그들은 경솔하게 또는 그릇되게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하나님의 들어난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섭리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도나 간음, 그리고 살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의 간섭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주께서 빈곤으로 벌하고자 하셨던 자의 물질을 약탈한 도둑이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주께서 생이 끝나도록 하신 자를 죽인 살인자가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들은 형벌을 받아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악한 성향에 의해 자극을 받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배우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전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디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신 뜻을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가 명령하신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악을 행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할 정도로 방종과 정욕에 깊이 빠져 앞 뒤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무한하여 하나님은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이론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도둑과 살인자 및 다른 행악자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정하신 심판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실이  그들의 범죄에 무슨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그들과 동일한 불의에 하나님을 연루시킬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생각을 합법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단으로 해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태양의 열로 부패되고 노출된 시체의 악취가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태양 광선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그 악취가 광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1 이와 같이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봉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어떤 불결한 것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할 수는 있어도 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 개와 같은 뻔뻔스러운 행동을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한 명상 : 섭리의 작용을 깨달을 때 오는 행복. 6-11)

6. 믿는 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이상의 여러 비방들, 곧 광인들의 헛소리는 섭리에 대한 경건하며 거룩한 명상으로 쉽게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상은 경건의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이 명성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하나남의 특별 섭리가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판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양쪽을 모두 지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확신한다. 그들이 선하든 악인이던,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신자의 행복을 돌보신다는 증거하는 매우 분명한 약속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 : 2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다(벧전 5 : 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 : 1).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 : 8). "나는 너의 방패요"(창 15 : 1). "너로 …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램 1 : 18),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 : 15). 실로 성경역사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길을 이처럼 열심히 돌보아 주심으로써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시 91 : 12)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말하는 자들, 곧 하나님은 개개의 피조물들을 특별하게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방금 위에서 거절한 것처럼,12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돌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13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 10 : 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 10 : 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 10 : 30). 머리털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실 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특수하게 표현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7. 번창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는 혹은 남을 헤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접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출 3 : 21)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심으로써 그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기 위해 사탄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의 입을 거짓 영으로 채우게 하신 일이 있었다.(왕상 22 : 22). 또한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통해 르호보암의 정신을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르호보암은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그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다(왕상 12 : 10,15). 때로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고 낙담케 하심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바를 원하거나 계획하거나 혹은 수행할 수 없게 하신다. 간혹 그들이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광포를 꺾으시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치명적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사전에 분쇄하셨다(삼하 17 : 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며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이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욥 1 : 12).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를 보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건 아니면 무생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건간에 일체의 번영과 인간의 욕망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마음에, "그들의 마음을 내게로 기울여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들을 나와 연합하게 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신 것은 분명히 주님이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호 2 : 21-22)라는 말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축복만이 모든 번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어떤 역경에 닥쳐올지라도 그는 즉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인내와 마음의 평온을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 주실 것이다. 만일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계속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형들에 대한 형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들의 불의를 잊었기 때문에 그는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형들을 위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창 45 : 7-8).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 : 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들을 주시하였더라면, 그에게는 복수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 일로 여기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 : 21). 이와 같이,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또 그에게 돌을 던졌을 때, 다윗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아마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한 보복을 당장 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시므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부하들을 진정시키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로 그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 : 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지나친 슬픔을 억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해하신 연고니이다"(시 39 : 9). 만일 분노와 성급함에 대하여 이 이상 더 효과 있는 치료법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크게 유익할 것이며 그 마음에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니 마땅히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정당하고 유익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부당하게 해를 받았을 경우, 우리의 고통을 악화시키고 우리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그들의 사악함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원수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하였든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며 그의 의로우신 섭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 6 : 12), 영적인 원수 곧 마귀에 대한 것(엡 6 : 11)이라고 지혜로운 교훈을 주었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싸움에 스스로를 대비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충동을 진정시키는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은 마귀와 모든 행악자들을 대항해서 싸우려고 무장하시며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흘러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신 28 : 2이하 : 15이하) 율법의 교훈을 상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레 26 : 23-24).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아둔함을 죄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훈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애 3 : 38; 암 3 : 6).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선언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 : 7).

 

9. 중재하는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은 제 이차적 원인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인간적 친절에 대한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충심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고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또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가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게될 것이다. 만일 이 경건한 사람이 태만하거나 경솔하여 무엇인가 손실을 입었다면 그는 이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발생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역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만일 잘 돌보아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 사람이 이미 넘을 수 없는 한계에까지 도달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그가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자기의 탓으로 여길 것이다. 살인이나 절도범에게 기만과 고의적인 악이 개재되었을 때,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여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범행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스스로를 명시하는 대로 양자를 똑똑히 응시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미래사에 관하여 그는 이런 종류의 이차적 원인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인간적 도움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원조를 청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상의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게을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적 섭리의 합법적 기구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낙착될 것인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주께서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아는 일 외에는), 그는 지성과 이해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열심히 동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르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더우기 그는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결정에 의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 : 12).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서 무모함과 자만심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참된 소망과 신뢰와 용기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경멸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을 보게된다.14 인간의 생활은 수 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무수한 죽음의 위기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수많은 질병을 담는 그릇으로서 사실상 몸속에 질병을 보유하거나 그 원인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형태의 파멸 원인에서 모면할 수 없으며, 죽음에 둘러싸인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추위를 만나든 더위를 만나든, 인간은 위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대상은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절박한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배를 타 보라.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단 한발자국의 거리가 있을 뿐이다. 말을 타 보라. 한 쪽발이 미끄러지면 우리의 생명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 보라. 지붕 위의 기왓장과 같이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기가 우리의 손에 있든 친구의 손에 있든 역시 해악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보는 사나운 동물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즐겁게만 보이는 정원에 몸을 감추려고 해도, 거기에도 때로는 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은 계속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어, 낮에는 가난해지지 않을까. 밤에는 우리 위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밭은 우박과 서리, 가뭄 그 밖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모와 이에 따르는 기근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해독과 복병, 약탈과 공공연한 폭행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들은 때로는 집에서도 우리를 괴롭히고, 때로는 멀리까지 따라다닌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살아 있으나 반은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런 사람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항상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허약한 마음으로 불안하고 활기 없는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간혹 있을 뿐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갑자기 있는 일도 아니라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도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들이 역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와는 다른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례를 통해서 경고를 받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우기,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맹목적이며 무모한 운명의 공격을 받도록 내버려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간이 운명의 지배하에 있을 때 느끼게 될 그 비참함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더우기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칠 때, 그는 지금까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게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운명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담대하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우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인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하여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 : 3-6).
여기서 또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 118 : 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 : 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 : 1).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 27 : 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 : 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 : 14). 그들이 이와 같은 굳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세계가 우연히 도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은 어디서나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행복이 사탄이나 행악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섭리를 기억하거나 명상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곧 약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모든 행악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쇠사슬에 속박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
이러한 생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줄 것이다. 그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방향을 돌리고, 그것을 지도해 나가는 것이 주님께 속하는 일인 것처럼,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방종하게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도 주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을 확신한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 2 : 18),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16 : 7). 사탄에게서 그 여행의 장애물이 왔다고 말했다면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를 뒤집어 엎을 수나 있는 것처럼 사탄에게 막대한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모든 여행을 허락하시는 주관자라고 말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탄은 그가 꾸미는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다윗은, 인생을 끊임없이 변전시키는 말하자면 회전시키는 각양의 변화 때문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 : 15) 라고 하면서 이 피난처에 자신을 맡긴다. 다윗은 "인생행로", 혹은 "때"라는 말로 단수로 기술할 수도 있었음에도 "시대"(times)란 복수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태가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계속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르신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연합하였을 때 유다 온 지방을 멸망시키고 황폐하게 하기 위해 밝힌 거센 불붙는 나무처럼 보였지만, 예언자는 이를 보고 그것은 겨우 연기가 나는 정도에 불과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사 7 : 4)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바로가 부와 권력과 강한 군사력 덕분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바로 자신은 바다의 악어로 비유되고 그의 군대는 고기로 비유되었다.(겔 29 :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통솔자와 그 부하들을 갈고리로 잡아다가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끌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만일 독자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가 최대의 비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반대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 방해가 안되었다면 섭리의 교리가 신자들에게 순수한 가르침과 위로를 준다는데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하였다고 본다(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천박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이것을 만족시키기를 원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 부동한 것이 아니고 현상계의 상황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것으로 언급된 실례가 몇군데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셨고(창 6 : 6),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 : 11). 또한 자기 백성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그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하셨던 재앙을 돌이키시겠다고도 하셨다(렘 18 : 8). 둘째, 하나님의 작정 중 얼마가 폐기되었다고 언급된 곳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40일 후에는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선언하셨지만, 그후 그들이 회개하자 이전보다 더 은혜로운 선언을 그들에게 내리셨다(욘 3 : 4,10).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에 감동을 받아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사 38 : 1,5; 왕하 20 : 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결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각자의 공로나 또는 하나님 자신이 공평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매년, 매일, 또는 매시간, 이런 일,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많은 사람은 주장한다.15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곧 하나님께 무지, 오류, 무력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후회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고의적으로 또는 기꺼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할 것을 알지 못하신다든가 이를 피할 수없으시다든가 혹은 조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짓고 이를 즉시 후회하신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뜻하시는 바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성령은 후회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삼상 15 : 29).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서 이 둘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대조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는데, 이때의 마음의 변화는 비유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곧 이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 : 29) 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사실적으로 명백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 : 19).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그러면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둔하여 존엄하신 하나님에게까지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그 묘사가 낮추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묘사를 낮추시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우리가 그를 지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께는 마음의 혼란이 전혀 없지만 죄인에 대하여는 분노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께 무슨 감정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에서 취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흥분하고 노한 사람의 용모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의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행동의 변화로 자신의 불만을 증거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끊임없이 방법으로 수행해 나아가신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확고하게 실행하신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멸망을 선고하신 후 그들이 회개하자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과(욘 3 : 10),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 히스기야의 생명을 더 연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사 38 : 5).16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암시되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순한 확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내어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는가?
또, 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그의 죽음을 암시하셨는가? 멸망에 대한 예고가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히스기야를 다 멸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죽음을 미리 경고하여 그 죽음의 다가옴을 멀리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란,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상 멸망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장수의 소망이 끊어졌던 것은 보다 오래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와 같은 위협을 통해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회개케 하며, 그들의 죄값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피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의 성질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한 암시 속에 한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사실은 또한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실례에 의해 확증된다. 아비멜렉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자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위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 : 3). 그러나 이비멜렉이 변명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 : 7).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에서 아비멜렉의 마음을 심하게 때리심으로써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 하셨고, 두 번째 말씀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명백히 표현하셨는데,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전에 선언하신 바를 취소하셨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목적이 폐기되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경고하심으로써 그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실 때에, 이는 자신의 뜻을 변경하거나 자신의 말씀을 변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음절씩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실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한 것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퍼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 : 27).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1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탄과 모든 악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하며 하시며 끌어내기도 하신다는 다른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활동하시면서 어떻게 그들의 범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시는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하시면서 어떻게 모든 죄책을 면할 수 있으시며 나아가서는 그가 사용하시는 자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정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행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2 왜냐하면,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그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가시고 또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고 하는 이 난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그릇된 점을 밝히려고 부정하게 힘쓰지만 않는다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에 놀란 자들의 겸손함은 아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으로 눈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으로 인하여 후에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저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이 없이는 인간으로서는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앞에서 우리가 시편에서 인용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는 말씀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말씀이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의해서 닥치는대로 무리하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특수한 증거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을 우리는 욥기 1장을 통해서 알고 있다(욥 1 : 6, 2 : 1). 실로 그 방법이 다르고 그 목적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지 않으셨으면 사탄은 어떠한 일도 착수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건한 인물을 괴롭히기 위해 허락이 공공연하게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시련의 장본인은 하나님이시며 사탄과 사악한 도둑들은 다만 그 대행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 1 : 21)라는 말씀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경건한 인물을 미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스바 사람은 잔인하고 사악하게 침입하여 남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욥은, 자신이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빈곤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사탄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들의 수고를 돌려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저 불신의 왕 아합이 기만당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자 이 목적을 위해 마귀는 자기가 봉사하겠다고 하였다. 이 마귀는 모든 선지자의 입에서 거짓말을 하는 영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왕상 22 : 20,22). 아합의 무분별하고 미치광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것이, 단순히 허용만이라는 허황된 공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자가 할 일을 작정도 아니하시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역자들에게 명령도 아니하시고, 다만 허락만 하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획책하였으며,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광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엄숙한 기도에서,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행 4 : 28)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 : 23)이라고 설교한 것과 일치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 명확한 지식과 정하신 의지에 따라 유대인들이 행한 것을 결정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일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 : 18)고 이와 같은 뜻의 말을 하였다. 압살롬은 근친 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가증스런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 : 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일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 : 15, 7 : 14, 50 : 25 및 그 밖의 여러 구절).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 : 9).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꾸중(사 7 : 18 혹은 5 : 26)과 나팔소리(호 8 : 1)와 권위와 명령으로 말미암아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습 2 : 1 참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을 진노의 막대기요(사 10 : 5),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라고 하셨다(마 3 : 10 참조).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 28 : 21). 다윗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의로우신 심판장이라고 인정하였으며,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삼하 16 : 10)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삼하 16 : 11).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예를 들면, 열 지파의 배반과(왕상 11 : 31), 엘리의 아들들의 죽음과(삼상 2 : 34). 또 그와 비슷한 많은 사건이 있다.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 위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2. 하나님의 충동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충동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쁘심에 따라 임의로 인도된다고 하였는데(잠 21 : 1), 이 말은 확실히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말은 "우리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그가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 : 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욥 12 : 24; 참조, 시 107 : 40) 하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계된 말씀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자주 읽게 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포로 그 마음을 점령당하게 될 때 두려워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사울의 진영을 떠났는데, 즉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었다(삼상 26 : 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며(사 29 : 14), 저들을 쳐서 현기증이 나게 하시고(신 28 : 28; 참조, 슥 12 : 4), 잠자는 영으로 저들의 눈을 감기시며(사 29 : 10), 광기로 저들을 채우시고(롬 1 : 28),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출 14 : 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요구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자들을 버리심으로써 사탄에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처럼 이 여러 구절들 역시 하나님의 허용과 관계된 구절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결은 너무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의 정신이 나간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하여 되어진 것으로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롬 1 : 20-24).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출 9 : 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완강하고(출 10 : 1) 굳게 하셨으며(출 10 : 20,27, 11 : 10, 14 : 8)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회피하면서, 어리석은 트집을 내세우는데, 즉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출 8 : 15,32, 9 : 34)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행동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일한다는 두 사실이 미처 서로 완전하게 모순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반대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만일 완고하게 하는 것이 단순한 허용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본래 완고하게 된 동기는 바로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바로 왕이 수동적으로 완고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 해석이겠는가? 이 외에도 어느 경우에도 성경은 그런 생트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출 4 : 21)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뜻으로 모세는 가나안 주민들에 대하여 저들이 싸우러 나아간 것은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수 11 : 20; 참조, 신 2 : 30). 다른 예언자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여호와께서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시 105 : 25)라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사 10 : 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경하고 완고한 인간을 가르쳐서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시행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명확한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탄의 중재 활동을 통하여 악한자에게서 활동하시지만,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충동과 허용에 의해서 그에게 허락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사울은 악한 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악령은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삼상 16 : 14)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사실은 사울의 광란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복수에서 온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또한 사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4 : 4). 그러나 유혹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면(살후 2 : 11),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이 일이 어디서 오겠는가? 첫째 이유에 의하면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겔 14 : 9)라고 하였고, 둘째 이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롬 1 : 28) 가장 무서운 정욕에 사로잡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복수의 근본적인 창시자이시고, 사탄은 다만 그 복수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제2권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 예속을 다르게 될 때에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에,4 나는 여기서 필요한 만큼만 간단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라고.

 

3. 하나님의 의지는 통일체를 이룬다

지금까지 나는 성경에서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들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말씀에 악의에 찬 불명예의 낙인을 주저 없이 찍으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비난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지를 구실 삼아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느니 혹 "이런 문제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식의 가벼운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위를 반대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교만이 달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공공연히 저주한다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와 같은 건방짐의 실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불경한 사람들과 참람된 사람들이 있어서 교리의 이 부분을 반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성령께서 오랜 옛날 다윗의 입을 통해 "주께서……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 : 4)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윗은 방종한 사람들의 광기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그들은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논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정죄할 권능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그들이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하여 참람된 말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비방의 안개를 깨끗이 거두셔서 자신의 의를 화려하게 빛내신다고 간단하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신앙도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서 온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요일 5 : 4), 높은 곳에 서서 이들 비방의 안개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첫째 반대는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반대 내용이다. 그것은 율법에서 공적으로 금지하신 것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서는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변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트집이 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목표로 한 것임을 거듭 경고해 두고자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경건한 욥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되어졌다(욥 1 : 21)고 확실하게 고백하셨다. 그가 도둑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그들의 불의한 행동과 악행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채찍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 : 25)고 말하고 있다. 다른 선지자도 역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남의 흠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태한 허용에 의해서만 모든 일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 만사의 창시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는 이미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 : 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 : 6). 내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원해서 하시는가 아니면 마지 못해 하시는가를 저들이 말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 : 5; 참조, 출 21:13 ).
이와 같이 누가에 의하면,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계획에 의한 예정으로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바를 행하기 위하여 공모하였다고 온 교회는 주장한다고 한다(행 4 : 28).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속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그 자체 스스로 모순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지가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하실 바를 원하기도 하기고 원하지 않기도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소명을 "감추었던 비밀"(엡 3 : 9)이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 3 : 10)가 나타나 있다고 첨가하였다.5 하나님의 지혜가 "다양하게"(고대의 해석가들은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번역했음) 나타난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둔한 이해로 인해6 하나님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고 꿈꾸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하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적 무능력을 생각해야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 : 16)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그것이 흑암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경건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쉽게 동의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인간은 가끔 선한 의도에서 원한다 그 예로, 선량한 자식은 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원하시는 것을 인간은 악한 뜻으로 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한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원하시는 경우가 있다. 즉, 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전자의 자식으로서의 경건은, 그가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원하는 후자의 불경건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와 일치한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각자의 의지가 향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 따라 그것이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의 악한 의지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신 의지를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전에, 타락한 천사와 모든 악한 자들이 태만하여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저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의지는 저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크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찾았다"(참조, 시 111 : 2). 그러므로 그 방법이야말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어서, 비록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그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 못해 허용하시지 않고 기꺼이 허용하신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에서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의 행위를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7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믿지 않는자의 행위를 이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 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역시 다른 반대도 해결되거나 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인데,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자의 행동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관하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시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작성하신 바를 수행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교훈이 잘못 혼동되어 있는데, 이 양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는 수없이 많은 실례들에 의해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 예로,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더럽혔을 때(삼하 16 : 22), 하나님께서는 이 파렴치한 행위를 통하여 다윗의 간음죄를 벌하려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유로 해서 그 사악한 아들에게 근친 상간의 죄를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아마 다윗으로서는, 그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말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삼하 16 : 10-11), 그러나 그 뻔뻔스러운 개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 순종을 칭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그 징계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고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밀한 심판으로 작성하신 것을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이나 한 것처럼 용서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으로 선택된 것은(왕상 12 : 20), 인간의 사악한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신실하게 다윗의 가문을 배반한 것으로 인해서 국민의 경솔함과 광기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기름부음 받을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호세아의 말 가운데 얼핏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한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시며 또한 원치 않으시는데 그 나라가 세워졌다고 탄식하셨다(호 8 : 4).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함으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호 13 : 11). 여로보암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한편 하나님께서 저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를 내팽개치지 않고는 백성들은 다윗의 집을 배반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망은을 이처럼 벌하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반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정당하게 이 변절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여로보암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 위해 대적을 일으키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왕상 11 : 23).
독자들은 이들 두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백성들이 한 왕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선지자는 예언과 기름 부음을 통해 아무런 생각도 않고 있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왕국 계승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확실히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명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반역은 정당하게 정죄되고 있다. 저들이 정죄된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반대하여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후 르호보암이 백성의 소원을 거만하게 멸시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 12 : 15). 신성한 통일이 분열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열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떠났는가를 유의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즉 아합의 아들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후손이 모두 멸절당한 것은 백성들의 동의, 곧 저들의 조력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왕하 10 : 7). 참으로 예후는 "여호와께서……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 10 : 10)라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미라의 백성들이 이 일을 도와준 데 대해서 꾸짖고 있다.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왕하 10 : 9)라고 그는 묻고 있다. 만일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동일한 행동에 인간의 죄가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빛나고 있는가를 나는 이미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만으로도 언제나 충분할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셨으며 유다는 주님을 관헌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8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충동에 따라 불법을 저지르는 때에도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만을 가진다면, 그들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시되 그들의 공적에 따라 보응하시니, 어느 누가 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9 그리고 확실히 유다의 반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를 내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범죄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구속의 명예를 유다에게 돌리는 것에 못지 않게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이 심문에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혹은 무엇을 하였던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였던가이며,10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과 의지를 참작하려 하셨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이것이 조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한다고 해서 성경이 명백히 입증하는 진리를 거절한 점에 있어서 자신의 완고함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셨다면, 결코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선포되는 것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고 공손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만하게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이 이상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여 반박할 가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