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1

(예배에서의 형상(形象)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시적(可視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거칠고 우둔한 지성을 감안하여 보통 대중적인 방법으로 말하기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이 교묘하고 재치 있게 가르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자기 공론(空論)에만 집착하고 있는 한, 우매하게 된다는 것, 아니 발광하게 된다는 것을 보다 더 잘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 독특한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체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 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2
또 한편, 동시에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 돌, 금, 은, 그밖에 생명이 없고 썩어질 물질로 신(神)들을 조형화(造形化)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야수적인 우매가 전세계를 팽배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서에서,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고 요구한 후 자신이 어떤 예배를 받아들이고 어떤 예배를 거절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즉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 : 4).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우리의 방자한 행동을 억제시키셨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키기 시작한 일체의 형태를 간단히 열거하셨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미련한 이방인들 역시 하늘의 별들을 보고서 그것들을 신들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동물이라고 하는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실로 희랍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는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3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들을 마치 하나는 종교, 하나는 나쁘거나 한 것처럼 서로 비교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미신 숭배자들이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일체의 형상, 화상(畵像) 그리고 그 밖의 상징물들을 예외 없이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의 모든 형상적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지령에 더하신 이유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세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만들까 하노라"(신 4 : 15-18). 이렇게,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형상을 적대시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이 문제를 가장 강조한 이사야 한 사람만을 예를들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비물질적인 하나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무생물로, 무궁하신 하나님을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황금 조각과 같은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위엄은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허상(虛像)으로 더렵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사 40 : 18-20, 41 : 7, 29, 45 : 9, 46 : 5-7).
바울도 또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 : 29). 이 말씀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세운 조상(彫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만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외치신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성령께서는 비참하고 맹목적인 눈먼 우상 숭배자에게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인용한 세네카의 불평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 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氣)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4."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미신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상이 금지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우상 옹호자들의 변명은 한낱 천박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본질과 자연의 영속적인 질서에서 제시하신 것을 다만 한 국민에게만 국한시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제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그 오류를 반박할 때, 그는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하여 말한 것이다.

 

3. 신적(神的) 존재로부터 직접적인 표징이라도 형상적 우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실로 하나님은 결정적 표적들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 위엄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대면하여 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날에 보이셨던 그 모든 표적들은 모두 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 : 11)은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세에게 더 친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출 33 : 1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 : 20)고 하는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성령이 한번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나셨다(마 3 : 16). 그러나 그 비둘기는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순간적인 상징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그리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할 것이요 그에 대해서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모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실 것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하에서 속죄소로부터 그 권능의 임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속죄소는 그 마음이 감격하여 자기를 초월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응시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그 속죄소를 덮었다. 속죄소는 휘장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속죄소가 안치된 장소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 : 17-21). 여기서 완전히 명백해지는 것은, 이들 그룹을 본보기로 해서 하나님과 성자(聖者)들의 형상들을 수호하려는 자들이야말로 광란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나는 도대체 그 하찮은 작은 형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로 속죄소를 가림으로써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사람의 눈과 일체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인간의 만용(蠻勇)을 시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선지자들은 환상에서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스랍들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사 6 : 2).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찬란하여 천사들도 그것을 똑 바로 볼수 없으며 따라서 천사들에게서 비치는 그 희미한 섬광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룹이 율법의 옛 후견기간(後見期間)에5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룹을 우리 시대를 위한 실례로 끄집어 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유치한 시대, 말하자면 그러한 종류의 초보를 배우도록 의도된 시대는(갈 4 : 3)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교의 저술가들이 교황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유베나리스(Juvenalis)는 유대인들이 흰 구름과 하늘의 신격을 예배한다고 비난하였다.6 그가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존재를 부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요 경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가시적인 형상이 있었다고 부질없이 꾸며대는 교황주의자들 보다는 더 진실하게 말하였다.7 그러나 이 국민은 마치 물이 큰 샘에서 맹렬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또는 재빠르게 계속 우상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알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공통적인 실패의 죄를 유대인들에게만 전가시키고, 죄에 대한 허망한 유혹에 빠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다.

 

4. 우상과 화상(畵像)은 성경과 반대된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있다. 즉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 135 : 15 참조, 115 : 4)고 하는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요 신이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서 생각해 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흙이나 돌보다도 금과 은을 들어 말한 것은, 그 물질의 광채와 가치가 우상에 대한 존엄을 더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는 일반적으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 신들을 만드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 하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순간 순간 덧없이 호흡을 하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너무도 우매하고 무분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영을 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일시적인 존재임을 고백하지8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속(金屬)이 하나님으로 간주되어 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신격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상의 기원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대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저 이교 시인의 다음과 같은 조소는 가장 정당하다고 하겠다.

한때 나는
하나의 무화과 나무의 줄기, 쓸모 없는 나무 토막이었네.
일꾼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9

이와 같이 순간마다 생명이 꺼저 가고 있는 이 지상의 인간이 자기의 재주로 하나님의 존영과 그 이름을 죽은 나무 줄기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저 에피큐로스학파의 시인은 재담을 늘어놓기는 하나 종교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에 그와 그 동류의 풍자를 묵살하기로 하자. 오히려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을 견책한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자극을 받으며 각성하도록 하자. 즉 저 어리석은 자들은 동일한 나무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고기를 굽거나 삶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 자들이라고 그는 책망하였던 것이다(사 44 : 12-17).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그들을 율법을 범한 자라고 규정 지을 뿐만 아니라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깨닫지 못한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사 40 : 21). 왜냐하면 무한하시면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축소시키려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은, 이 가공할 일이 비록 자연의 질서에는 거스리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로 미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상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 2 : 8, 31 : 7, 37 : 19, 호 14 : 3, 미 5 : 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형태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확립된다. 선지자는 시편에서 이와 같은 비난을 한층 더 맹렬히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명이 없고 무감각한 물질에게서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의 부패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특수하게는 각 개인을 그와 같은 광란에까지 몰고 가기 때문에, 마침내 성령께서는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 : 8)라고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화상도 조상(彫像) 못지 않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희랍인들의 그 어리석은 궤변을 반박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훌륭하게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방종하게 화상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각가가 그를 위하여 어떤 조상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예술가가 어떠한 것도 조형(造型)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말이었다.11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성령의 학교에서 이에 대하여 배웠더라면, 결코 그러한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 : 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 2 : 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다같이 무익하고 거짓 되었다고 하는 일반적인 교리를 결론지을 수 있다.
불경한 미신을 위해 형상을 남용한 자들이 선지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만일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확실한 원리로 결정한 것, 곧 우상은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주장을 예언자들이 전적으로 정죄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명백하게 아는 것이라고 나는 첨부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위에서 인용한 몇 구절에서 이와 같은 비교가 제시되었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는 것이 거짓이요 허망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 되었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우리는 단지 예언자들이 가르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 교회의 교리도 역시 부분적으로 달리 판단한다

이 외에도 라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 보라.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12 어거스틴(Augustine)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형상을 신으로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13 그러나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엘비타 교회 회의(The Council of Elvira)에서 제정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중 제36장에는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이 있어서는 안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14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이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Varro)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 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하였다"15라는 말이다. 만일 바르로만이 이 말을 하였다면, 아마 그 말은 거의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더듬어 이와 같은 광명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히려 오류를 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그것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된 것이 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둘째로, 형상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 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形象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더 이상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하여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와 화상, 혹은 조상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體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는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우상은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그 거짓된 주장을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우상을 적당하게 장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의무를 다했더라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거룩한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방법이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거기서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시선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마음의 주의를 성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하여 다만 우상 이외에서는 배울 수 없다고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무식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 제자로 인정하신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도(道)의 계시로 영광의 옷을 입힌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실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 : 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 : 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 : 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며(계 1 : 5),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 5 : 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다 세웠겠는가?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그들의 마음과 눈을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은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우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성(神聖)에 대한 인간의 욕구

다음으로 우상의 기원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創始)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16 나는 이 왜곡된 습관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더욱 부채질한 도화선이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의 최초의 원인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죽은자들의 형상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버지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으로 기록하였다(창 31 : 19).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홍수 후에는 세계는 새롭게 갱신 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들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족장이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그 자손들이 우상 숭배에 바쳤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 그 타락을 정화시킨 땅이 다시 우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노아는 쓰라린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수 24 : 2). 만일 셈의 자손이 매우 빨리 타락하였다면, 이미 조상 안에서 저주받은 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악에는 다시 새로운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의 기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례가 입증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 : 1)고 하였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국행진(故國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하였다. 우리는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항상 자기와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무분별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像)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그것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9. 형상을 이용하고자 하면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공상에는 즉시 숭배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숭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거기에 신적(神的)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像)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로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출 20 : 25).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제 2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17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우상만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거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던 그 저주받을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 : 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레 26 : 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 : 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우상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형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많은 형상의 수만큼 많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상에게 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신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우상 숭배자들이 구실로 삼았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그 변해서(辯解書)를 읽어 보라. 즉 민중들이 우상 숭배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한 것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물 속에 보이지 않게 내주하는 한 실재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소위 "순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우상이나 그 우상에 의해서 표현된 영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하여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의 한 기호를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18 그러면 어떻다는 말인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우상 숭배자는 누구든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형상물을 통하여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일단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즐겨 만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 우상을 통하여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 하였다.

 

10. 교회에서의 우상 숭배

이러한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찌하여 우상 앞에 엎드려 부복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기도하려 할 때, 하나님의 귀로 향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향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이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19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서 어떤 것은 무시당하고 혹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존영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을 모방해서 만들 상(像)들에게 이렇게 심한 차별을 둘 수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들을 보기 위해 서원의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오늘날 마치 제단과 화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릅쓰면서까지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쉽게 떠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의 무한하고 또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고 있는 일반 대중의 우둔한 오류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에 대해 특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옛날에는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 : 27, 겔 6 : 4이하, 사 40 : 19-20, 합 2 : 18-19, 신 32 : 3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감추어서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좀더 충분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20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21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dulia)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이나 화상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는 "예배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둠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 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해서 다른 별명(別名)을 붙인다 하더라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이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기지(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들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들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그러나 나는 절대로 어떠한 상(像)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 양자를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나는 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거나 우리를 파멸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 20 : 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만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처술가들은 누구나 다 우상 숭배 행위를 한결같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 짓는다. 즉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보기에도 흉한 형상물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표현 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사건들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형상 또는 형태이다.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 데 다소 유익을 주나, 후자는 내가 보는 바로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교회내에 장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형상물은 후자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그들의 이와 같은 형상물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상물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꼴사납게 조형되었는지, 또한 조금 앞에서 말한 문제로22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작업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탕녀의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비록 형상물의 사용이 어떠한 악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13. 교리가 순수하고 견고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별은 제쳐 두고라도 과거사의 표현이든 인간의 신체를 표현해 놓은 것이든, 어떠한 형상을 교회당 안에 두는 것이 과연 마땅한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만일 초대 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23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형상의 최초의 창시자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전시대(前時代)와 후시대(後時代)를 비교해 보면, 독자는 형상이 없었던 전시대의 고결성에 비해 후시대가 심히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이들 성스러운 교부들이 유용하고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을 교회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없이 지내도록 그들이 허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교부들은 형상물이 전적으로 무익하거나 혹은 거의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위험성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심사 숙고한 끝에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거절하였던 것이요,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나태 때문에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명백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4 그는 다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우상이 수족(手足)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조금 지나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상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25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상 예배 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한 이유인 것 같다(요일 5 : 21 참조). 그리고 경건을 거의 전부 파멸시킬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를 점령하였던 그 무서운 광란으로 말미암아 교회당 안에 형상물들이 세워지자마자, 소위 우상 예배의 표준이라는 것이 세워진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하여 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여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고 오히려 즉시 미신적인 예배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위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고의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그 말씀으로 성별(聖別)하신 바 살아 있는 상징 이외의 어떤 형상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의 신성에는 전적으로 부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와 성찬과 다른 의식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능으로 날조된 어떤 형상물 이상으로 우리의 눈을 강력하게 붙잡으며 생생하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보라! 교황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게 되면, 어떤 것을 가지고도 대신할 수 없는, 곧 비교할 수 없는 소위 형상물들의 혜택을 찾게 될 것이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회의(Nicene Council)가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라도 이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26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 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27 내가 무엇을 말하건 이 회의의 권위는 반대편에 유리한 편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심을 가진 자들의 그 발광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만큼 나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하자. 오늘날 형상물의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Carolus Magnus)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반박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28
여기에 당시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John)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고(창 1 : 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 : 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마땅히 형상물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마 5 : 15)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어떤이들은 형상들을 우러러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 : 6)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증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 : 8)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 : 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靜觀)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데오도투스(Theodorus)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 : 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 : 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어리석음이야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誤用)

그들은 예배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반드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 47 : 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 : 31, 히 11 : 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 : 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5),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 : 12). 이 여러 구절들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하며 결정적인 구절들로 생각되었다. 만일 누가 형상의 옹호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려고 한다 해도 아마 이 이상 더 그 어리석음을 들 수 있었을까?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부감독의 꿈에 의해 형상물 숭배의 타당성을 확신하였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나 되는 것처럼 신중히 다루었다. 이제 형상물의 조장자(助長者)들은 우리에게 그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존경할 만한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유치하게 다루고 불경건하고 악랄하게 찢어 놓고도 자신의 신용을 전적으로 상실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충격적인 주장

나는 이제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을 감히 입 밖에 토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혐오를 가지고 그들에게 대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광태가 공적으로 폭로되고, 교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고대의 주장들이 적어도 형상 예배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Bishop of Amoriurm)는 형상 예배를 싫어한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어떤 이들은 희랍과 동방 나라가 당한 일체의 재난은 형상 예배를 하지 않은 죄 탓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시대에는 형상이 일체 없었는데 이들은 대체 무슨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만일 사람들이 황제의 상(像) 앞에 분향을 한다고 하면 성자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마르키온과 동류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 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29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笑劇)이 박수 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30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곧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는 구절이었다.31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속이려고 사용한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이 회의는 예외 없이 형상물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된 종교는 우리를 유일신이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

더우기 우리는 이 책 첫머리에서1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냉랭한 공론(空論)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취급하였는데, 이것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 더욱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2 현재로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단히 반복하고자 할 뿐이다. 즉 성경이 유일신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 이름만 가지고 논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에 귀속 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으로 순수한 종교와 미신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 명백해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종교"를 의미하는 헬라어 유세베이아 역시 정당한 예배를 뜻한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맹인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는 "종교"(religion)라는 말을 아주 유식하게 렐레게레(relegere)라는 라틴어에서 끌어냈지만,3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부자연스럽고 당치 않은 것이다. 그는 선량한 예배자는 자주 읽고 또 읽어서 참된 것을 성실하게 숙고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오히려 방종과 대치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은 닥치는대로 다 생각 없이 그대로 붙잡고, 여기 저기 배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이란 것은 확고한 기반위에 서기 위해서 적당한 한계 내에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신이라는 말도 역시 규정된 방법과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쓸데 없는 수많은 공허한 것들을 모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더 이상 어의(語義)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 두더라도, 모든 시대에서 종교가 언제나 허위와 오류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각없는 열심에서 나온 어떤 것을 허용한다고 해도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대는 핑계는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비록 이러한 고백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러운 무지를 나타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명시한 대로4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기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만일 인간이 자기를 가공적인 신과 혼동한다면 가혹하게 복수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였다(출 20 : 5).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에 다음 두 가지를 포함시키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율법 수여자가 되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연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예배하는 규범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그 용도와 목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앞으로 적절한 곳에서 이를 논하려고 한다.5 현재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한 굴레가 인간에게 씌어져 저들로 하여금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하나님의 신성의 고유한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 귀속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박탈당하고 그에 대한 경의는 더렵혀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미신이 농간을 부리는 그 교활함에 대해 더욱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외관상으로 미신은 지고하신 하나님을 버릴 만큼 다른 신들에게 기울어지거나 또는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미신은 하나님에게 최고의 지위를 허용하면서도, 수많은 저급 신들로 둘러싸고는 이 저급신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능을 행사하게 한다. 이렇게 은밀하게 또는 교활한 방법으로 해서 전적으로 한 분에게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여럿으로 조각이 나버리게 되었다.6 이와 같이 옛날에는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무수한 신들을 신들의 아버지와 지배자 밑에 두었다. 그리고 이 신들 각자는 그 서열에 따라 최고신과 함께 천지를 통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세기 전부터 이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높여져서, 하나님 대신에 영광과 기도와 찬양을 받게 되었다. 실로 우리는 이러한 혐오스런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엄이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엄이 대부분 짓밟히고 소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최고의 권능에 대해서는 빈약한 의견을 다소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한편 우리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 여러 신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

 

2. 차이점이 없는 구별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소위 라트리아(ls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천사와 죽은 사람들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된 것이다.7 왜냐하면 교황주의자들이 성자(聖者)에게 돌리는 영광은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전혀 차별 없이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난받을 때에는 예배(latria)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하나 상처를 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우물쭈물 변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말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사건 그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무시하는 자들을 누가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의 구별은 마침내 하나님께만 "예배"(cultus)드리고, 다른 것에는 "봉사"(servitium)한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헬라어의 "라트레이아"(latreiva)는 라틴어의 "쿨투스"(cultus)와 같은 것을 뜻하고, "두레이아"(douleiva)는 "세르비투스"(servitus)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자주 등한시되었다. 설사 이 구별이 변치 않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이 두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곧 두레이아(douleiva)는 봉사를 의미하고, 라트레이아(latreiva)는 예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봉사가 예배보다 더 범위가 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경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를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려울 때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는 보다 큰 것을, 하나님께는 보다 적은 것을 돌린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많은 저술가들은 그러한 구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이 적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3. 형상 숭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세밀한 구별은 그만두고 문제 자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 전까지는 어떠한 처지에 있었던가 함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dulia)하였더니"(갈 4 : 8)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라트리아" (latria)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미신이 변명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는 사악한 미신에 "둘리아"(dulia)란 명칭을 붙임으로써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둘리아"(dulia)를 정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 : 10)고 하는 이 말씀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셨을 때에도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8 왜냐하면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요구한 것은 다만 엎드려 경배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9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천사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계 19 : 10, 22 : 8-9),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천사에게 드리고자 하였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와 결합된 경건한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신적인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 천사에게 무릎 꿇어 "절(knelt)"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로 우리는 자주 인간이 예배를 받는 일에 대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말하자면 세속적인 경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이와는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가 일단 예배 행위와 결합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행 10 : 25). 그의 경건은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최상의 경배를 드릴만큼 그렇게 불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베드로 앞에 "엎드리어 절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대신에 그를 예배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그러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금하였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인간에 대한 예배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을 무차별하게 피조물에게 옮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에게 속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홀로 하나"라는 것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슥 14 : 9). 이 말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예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후에 적절한 곳에서 거론하게 될 것이다.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선과 의를 규정하고, 따라서 인간이 제멋대로 예배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일정한 규범에 그들을 붙들어 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문제를 뒤섞어 독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올바른 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다만 어떠한 경건의 의식이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 드려지게 될 때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미신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태양과 별들, 그리고 우상을 위해 생각해 냈다. 다음에는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썩어 없어질 인간을 장식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원리가 비록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호신들, 저급신들, 또는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큰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하나님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을 수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1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2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4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5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6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 : 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로7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라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 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 : 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7a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8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9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10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11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운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條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12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던가?13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14 그러나 제롬은 "본체" (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는데15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시스" (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히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17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18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20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筆)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21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22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 : 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23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그러나 말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의 차이점을 살피고자 한다.
확실히,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 편에서부터 나온 단지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어리석은 일이다.24 오히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증거한 대로, 사도들(벧전 1 : 10-11)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위해 일한 후대의 모든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靈)이 말씀의 영이었다고 하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재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것이 있으라, 저 것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모세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남의 허물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 : 2-3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은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統轄)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 : 22).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의지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분별없는 천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자신의 계획과 심지어는 한층 더 은밀한 것까지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 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략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 : 1-3).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특수한 것을 귀속시켰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고 동일하시고 또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8. 말씀의 영구성

여기 몇몇 개들이 짖고 있는데, 그들은 말씀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감히 부인하지 않지만 은밀히 그의 영원성을 훔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셨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5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일종의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사역과 관계되는 여러 명칭들은 창조 사역이 있은 후에 그에게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불린 것). 그러나 하나님에게 새로운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말하는 그런 명칭은, 경건한 마음은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무슨 우발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주장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 : 17)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후에는 만유의 창조주가 되신 바로 그 말씀이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모세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어떠한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결론을 지으려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 : 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 5)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 : 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더 나아가 나는 여기서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는 구속의 문제를 다룰 때까지 미루어 두고자 한다.2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시편 45편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 : 6)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27 이를 왜곡한 채 "엘로힘"(Elohim)이라는 명칭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배자로도 불리는 분에게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명칭은 어떤 부가어(附加語)가 없이는 결코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 7 : 1)이라고 하신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바로에게"를 소유격 "바로의"라고 읽는데, 그것이야말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비범한 탁월성 때문에 뛰어난 것이 자주 "신적"인 것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그러한 해석은 곤란하고 무리한 해석이며, 더욱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 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 : 6).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그를 부르시는 이름이라"고 고쳐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성자를 다만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명백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의도일 뿐인데 이 구절에서 그렇게 많은 칭호들을 성부이신 하나님께 쌓아 올린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것과 같이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 : 5-6, 33 : 15 -16)고 한 예레미야서의 이 한 구절보다 더 명백한 말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은 다만 칭호에 지나지 않으며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그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 실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 : 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신이 세운 제단에 이 명칭을 붙였고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것을 붙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여기서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 : 35).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 : 15)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다른 구절에 대하여는 더 큰 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 : 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이름을 예루삼렘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지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근원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덧붙여 설명된 것이다.

 

10. 영원한 하나님의 천사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증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교묘한 이론을 내세워 피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 : 11, 12, 20, 21, 22, 7 : 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천사는 식물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 : 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 : 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표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 : 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 : 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 : 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28 불신앙은 더욱더 가증하다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29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중보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즉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 : 5)고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이 예언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 : 29)라고 한 모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 : 30)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 : 4).30 왜냐하면, 그의 낮춤의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 2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슥 2 : 3,9). 나는 우리의 신앙이 안전하게 채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더 이상 열거하지 않겠다. 물론 이 증거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거의 감동를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 : 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 : 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더우기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전부 다 수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개의 증거를 간단하게 선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미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증명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 8 : 14)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롬 9 : 32-33).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 : 10-11, 사 45 : 23)고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편의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 : 8, 시 68 : 18).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나타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그 위로 올라가심이 벌써 예표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 : 41, 사 6 : 1). 물론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성자에게 드린 하나님의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1 : 26). 또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6 : 7)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이러한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실로 시편에서 찬양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하신 것들이다. 일어나서 시온에 긍휼을 베푸신 분이 그 분이시며(시 102 : 13), 모든 나라와 모든 섬들의 지배권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시 97 : 1). 요한은 말씀이 항상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1 : 1, 14), 어찌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주저하였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 : 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히기를 두려워하겠는가?(고후 5 : 1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 : 17).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 : 6-7).
그리고 요한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신이라고 트집잡을까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 : 20)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 한 증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하나님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신 6 : 4).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5-6).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 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바울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제2의 신을 상상하겠는가?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이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마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 : 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하심 가운데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 : 17), 주님의 다른 말씀에 대하여는 극도로 둔감했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고 느꼈다. 그 결과 요한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 : 18).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 : 3). 그리고 그는 성부와 함께 세계 통치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다른 개개의 직무도 수행하셨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25)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이 말씀에 따라 이 권세는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이적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셨다(마 9 : 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다(마 9 : 4, 요 2 : 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 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이적에서 얼마나 명백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되어지고 있는가! 선지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 : 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것을 위탁하신 분이 어떻게 이적의 참된 창시자가 되지 못하겠는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을 권능을 주셨다(마 10 : 8, 막 3 : 15, 6 : 7). 더욱이 그들은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할 때에, 그 권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 : 6)고 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5 : 36, 10 : 37, 14 : 11).
더우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31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 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면(마 19 : 17),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의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 : 4)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신뢰하여,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은 그에게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누구든지 피조물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해석하였다. 곧 그 한 구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 : 11, 사 28 : 16)는 말씀이요, 다른 한 구절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 : 12, 사 11 : 10)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 : 47)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성경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기도야 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 요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 : 32). 다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 : 10).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러한 호소의 한 실례를 보게 되는데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 : 5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도행전에서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 9 : 13- 14)라고 증거한 것처럼, 이와 같은 실례는 그 후 모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 : 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 : 2).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고 명하셨는데(렘 9 : 24), 성자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의 근거라면, 누가 감히 그분를 가리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외에도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 : 7, 고전 1 : 3, 고후 1 : 2, 갈 1 : 3)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를 통하여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우게 된다.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 없는 어떤 사변(思辨)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2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성. 14-15)

14.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 : 2)고 한 모세의 증거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 : 16)고 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교묘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일에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33 여기서 성령의 신적 위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한 최상의 확증은 익숙한 경험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께 돌리는 것과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배우는 것들은 모두가 피조물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 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만일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현재의 성장하는 어떤 생명보다도 더 우수하고 탁월하다고 하면, 중생케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은 빌려 온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 11 : 34)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 : 10).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 : 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은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4 : 11).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므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 : 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 : 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 : 4)라는 바울의 말은 특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곧 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 : 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권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으로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전 3 : 6-17, 6 : 19, 고후 6 : 16).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전으로 택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약속 하셨지만 이 약속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나무와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령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34 그리고 사도는 가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 : 16-17, 고후 6 : 16)이라 불렀고 또 어떤 때는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전"(고전 6 : 19)이라고 불렀다. 성령을 속였다고 하여 아나니아를 책망하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 : 3-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를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구절 중에서 바울은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 : 9, 행 28 : 25-26). 실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만군의 주의 말씀이라고 변함없이 말하였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참조, 벧후 1 : 21). 그러므로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 : 10)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 : 32, 막 3 : 29, 눅 12 : 10)면, 이 말씀은 분명히 성령의 신적 위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범하고 훼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날 교부들이 사용한 많은 증거를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저들은 우주의 창조가 성자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사야서에서는 "입술의 기운"(사 11 : 4)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거가 빈약하다. 그리하여 나는 경건한 영혼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만 진술하기로 하였다.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35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 : 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 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 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36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 : 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 : 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37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 : 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 : 32, 8 : 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 : 3, 히 11 : 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38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 : 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 : 26, 참조, 14 : 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 : 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39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40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41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하였으며(벧후 1 : 21, 참조, 벧전 1 : 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우기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 : 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42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43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44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 : 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 : 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     , 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 : 21, 욜 2 : 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 : 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

더우기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 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은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그 왜곡된 헛소리들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특별한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었지, 강퍅하며 논쟁적인 사람들과 맞부딪쳐 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금까지 평화스럽게 해석되어 온 진리를 사악한 사람들의 모든 비방에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끝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진실로 성경의 감추인 신비에 대하여 논할 경우가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마땅히 냉정하고 아주 신중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적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45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46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아노모에오스파(Anomoeans)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아직 다섯 편이나 현존하고 있다.47 그러나 이 설교들은 그 건방진 궤변론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 보다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행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들의 이해력에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48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말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한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된 일 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수와 같이 헛소리하는 너무나 많은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전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식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혼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로 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즉시 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며,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도 문은 굳게 닫혀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나 그의 부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저들의 오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삼위일체론자를 가리켜 보통 무신론자라고 불렀다.49 나는 여기서 그가 삼위일체론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생각해 낸 몰상식한 말들을 생략하려고 한다. 그 일로 이것은 그의 생각의 전체였다. 즉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위(位)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동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오심에 따라 그로부터 다시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비유로 착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 안에와 심지어는 나무나 돌 속에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증보자의 위에 대하여 그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실로 "위(位)"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구에 대하여 구태여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50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기 때문이다(요 1 : 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셨다고 하면(요 17 : 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우기 천지 창조 역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 : 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확실히, 세르베투스가 꿈꾼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한 모양이나 표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불경건한 사상을 더 공공연하게 드러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아들을 작정하심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실재(實在)를 환상물로 바꾸어 이를 변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새로운 우연적인 특성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거짓되게 첨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아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질적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도 실질적인 신격을 부여하였다.

 

23. 성자는 성부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늪51에서 또 다른 비슷한 괴물이 나왔다. 어떤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불경건이 저지른 그 오명과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실로 저들은 이 가공스런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의 수여자"52이시며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그 가식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해서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다 우월하므로53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를 한 위격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변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 : 7), (아직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이니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격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부 이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하거나 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 : 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요 12 : 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거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 : 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었다(롬 9 : 33).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사 45 : 23)라고 말씀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 : 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하였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2 : 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7 : 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 : 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께 옮겨진다고 하는 궤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 예레미야의 말 또한 주의할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 : 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때부터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 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케 하신 창조주가 어떻게 자존하지 않으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 올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전체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든가 아니면 성자에게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든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까닭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 되든가 또는 전체에서 끌어 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롬 8 : 9)고 한 바울의 증거에 의하여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체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은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성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하면 성부가 이 본질을 성자와 공유하였는가 공유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반만 신이라고 날조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악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곤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하면, 본질에 관한 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들이 해석한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 : 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여러 구절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함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한 마디 말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논할 것이다.54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 : 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人性)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이냐 선하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의 불경건은 그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것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한층 더 확증시켜 준다. 확실히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나는 또한, 바울은 하나님만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 : 17), 지혜로우시며(롬 16 : 27), 참되시다고(롬 3 : 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가고 묻고 싶다. 태초로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당연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마땅히 자기에게 꿇기를 정당하게 요구하셨다고 하면(빌 2 : 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금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 : 3). 만일 그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고 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써 그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었다고 교묘하게 구별짓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 또는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증보자의 전(全)인격에 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에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빌 2 : 6-7). 실로 그가 여호와로 불리시고, 그룹들을 타시며(참조, 시 18 : 10, 80 : 1, 99 : 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 : 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아무리 넋두리를 한다 하더라도, 이사야가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 : 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수는 없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실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까지 회복시키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 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 반론을 즉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 : 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는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란 명칭이 성부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하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은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 : 23).55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25. 신성한 본질은 삼위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56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位)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제신(諸神)의 삼위일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가치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57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員)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반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고 대답했었다.58 물론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위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웠다고는 하지만(빌 2 : 7),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춰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였다고 하였으나(히 2 : 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 : 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 : 28, 참조, 16 : 7, 20 : 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의 그 완전함이, 육신을 입으신 자신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해 휠씬 뛰어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 : 24,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 : 1, 요일 5 : 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로운 신(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마치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참되신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는 이입(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59 많은 구절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자들을 다루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현재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해야 할 경우,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는 사실상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은 종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3권 제6장을 읽으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2권 제46장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외에도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자와 성부를 다같이 하나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제3권 제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제3권 제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세의 손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분이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합 3 : 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3권 제18장, 제23장). 제4권 제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60

 

28. 터툴리안을 인용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이 터툴리안(Tertullian)을 그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모호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애매하게 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위를 구별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가 말씀인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位)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성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位)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은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위격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그는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61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교회의 모두 정평있는 교부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  였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를 지지한다.62 저스틴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 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다. 힐라리(Hilary)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더 예리하게 역설하였다.63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연결이 안 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64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그들의 파렴치함에는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게 된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회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와 이전 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 않았다. 이 악한들이 가장 적대시하였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들였던가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이론(異論)도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하였다.65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친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Christion Doctrine)라는 저서 제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거스틴이 그때 자신을 망각하였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여,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66
사탄은 온갖 궤변으로 오늘날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나는 이상의 고찰이 이와 같은 사탄의 일체의 궤변을 충분히 물리쳤다고 경건한 독자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내게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덕성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발생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67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

1. 우리는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진실한 의도를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이사야가 거짓 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의 기초와 하늘의 운행을 보고도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 40 : 21). 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이 더디고 우둔한 까닭에 신자들이 이교도들이 꾸며낸 거짓 형상(figmenta)에 빠지지 않도록 참 하나님을 더욱 더 명백히 묘사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판단에 있어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서술, 곧 하나님을 우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1은 허무맹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혼돈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좀더 상세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창조의 역사가 명백해지며, 교회의 신앙이 이것들을 근거하여서 모세가 우주의 형성자요 창조자로 표현한 분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창조 역사에는 제일 먼저 시간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연속되는 연륜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와 만물의 최초의 기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식이 특별히 유익한 점은, 그것이 옛날 애굽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만연하였던 기괴한 이야기들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초가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 우리가 넋을 잃고 그것에 경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사악한 자들의 우롱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롱이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에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일찍이 천지창조를 하시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간을 헛되게 지내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6천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계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오랫동안 천지창조의 시기를 연기 하셨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정당한 일도 아니요 이치에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그 이유를 깊이 캐어내려고 노력한다 해도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중도에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기 위해 고의적으로 감추어 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 못 된다. 어떤 파렴치한 자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어떤 경건한 노인에게 조롱 삼아 물었다. 이때 그 노인은 재치 있게, 하나님은 그런 호기심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변하였다.2
엄격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경고는, 많은 사람을 자극하여 그들을 사악하고 유해한 공론(公論)으로 몰아가는 방종을 제어해 줄 것이다. 요컨대, 지혜와 권능과 의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 눈으로서는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모세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년이나 허약, 혹은 어떤 다른 결함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경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무능함도 그와 같아서, 하나님을 찾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3 실로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은 경고를 받고서도 그것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파멸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독적인 언사로 하늘나라의 일을 흐리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사물의 원인을 찾되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행하는 것이라고 개탄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4 그는 다른 곳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끝없아 뻗쳐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똑같은 잘못이라고 조심스럽게 경고하였다.5 사실 하늘의 범위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만일 어떤 사람이, 공간이 하늘보다 백 배나 더 컸으면 하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이 무례한 언동에 대해 모든 경건한 사람이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와 같은 광란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저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광대한 주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명으로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독점할 만한 충분한 사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또 이는 마치 6천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진지한 명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한하기를 원하시는 울타리, 말하자면 우리가 제멋대로 방황하며 헤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두어 두시기를 원하시는 그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물자.

 

2. 6일간의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선하심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엿새 동안에 완성되었다고 기술한다(창 2 : 2).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체의 허구를 떠나서 창조의 사역을 엿새로 나누어 일하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끌려가게 되므로, 그 창조 사역을 명상함에 전 생애를 바쳐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의력이 얼마나 변하기 쉬우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어떤 경건한 사상도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함을 알고 있다. 여기서 또한 인간의 이성은, 신앙에 순종하여 제7일의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안식을 배워 환영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한 것처럼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 모든 선한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만물의 창조 순서에서 인류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6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것도 없는 텅빈 땅에 두셨다면, 또는 빛이 있기 전에 그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를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해와 별의 운행을 조정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에는 생물로 채우시고 식량으로 풍부한 과실을 맺게 하실 때에, 앞을 내다보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한 가족의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셨다. 비록 나는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했지만  이 문제를 보다 더 신중히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세가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확실한 증언이며 사신(使臣)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서서7 모세는 하나님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지혜와 영에 대해서도 말했으며 또한 모세가 이를 말한 것은 분명한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고자 한다.

 

(천사. 3-12)

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충분히 논하기 전에8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잠시 언급해야 하겠다. 확실히 모세는 일반 대중의 무지에 고려하여, 창조의 역사 중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천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소개했을 때, 저들이 수고와 직분을 바쳐 봉사해야 할 분이 바로 저들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모세는 통속적인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 첫머리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넣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은 성경이 여러곳에서 천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명백히 또는 확실히 가르치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한 결코 그렇게 훌륭하고 고상한 표본이 생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교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 천사의 성질의 탁월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기 때문에, 만일 천사를 한 분 하나님의 권위 밑에 예속시켜 억지로 그와 같은 지위에 처하도록 강요한다고 하면 그것은 천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들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되었다.
마니(Mani)#9 역시 자기 일파와 함께 일어나서 스스로 만들어 낸 두 원리, 즉 하나님과 마귀를 제기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선한 것들의 기원이라고 하고, 악한 성질의 창시자는 마귀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광란에 미혹된다면 우주 창조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영광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특성은 영원성과 자존성10 -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속성들을 마귀에게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귀를 하나님의 칭호로 장식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며 저항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그러한 주권이 마귀에게 주어진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니교도의 유일한 기초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 우주에 어떤 악한 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 신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탄의 부패와 악의, 혹은 여기서부터 나오는 죄는 본성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1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의 예증을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왜곡된 거짓사상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야가 미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니케아 신경에서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라고 부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무익한 사색에 빠짐으로써 독자들이 신앙의 단순성에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도록, 경건의 규범이 명령하는 그 한계를 지키도록 계속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령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항상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나 덕을 세우는데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든가 혹은 가볍게 또는 대충 그것들을 다루실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기꺼이 단념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

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추상적 사고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시 103 : 20-21). 천사들의 창조된 시간과 순서에 대해 무슨 논쟁을 일삼는 것은 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악하다는 증거가 아닐까?12 모세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 : 1)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별들과 유성들 이외의 다른 종류의 천군들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열심히 묻겠는가? 이 이상 더 길게 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더우기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용없는 문제들이 아니라 건전한 경건과 자기에 대한 경외, 참된 신뢰, 그리고 성결의 의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참으로 현명해지기를 원한다면, 쓸모 없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천사의 성질, 계급, 수에 대하여 가르치는 그 공허한 사색을13 떠나야만 한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에 더 집착하고 그러한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시하신 방법을 따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교훈으로 만족하고, 그가 일깨워 주신 그 전적으로 공허한 사변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이를 몹시 증오하게 될 것이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어떤 사람이든간에14 하늘의 천사계급(Celestial Hierarchy)이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매우 교묘하고 예리하게 논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대부분이 서툰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 저자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실제로 본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후 12 : 2) 바울도 그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본 그 은밀한 것을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고후 12 : 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버리고 주께서 천사에 대하여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바를 성경의 그 단순한 교훈 안에서 검토하도록 하자.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천사는 하늘의 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임무를 통하여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모두 수행케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시 103 : 20-21). 이와 같이 하여 이 명칭이 천사들에게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하여 천사들을 중재(仲裁)의 사자(使者)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들도 또한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그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 2 : 13) 호위병처럼 왕을 에워싸 왕의 위엄을 장식하며 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병들처럼 지휘관의 신호에 항상 주의를 집중하여 언제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을 지휘관의 신호만 떨어지면 즉시 일에 착수한다. 아니 이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선지자들도 그의 보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지만, 특별히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대 위에 오르실 때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 : 10)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권능과 능력을 놀랍도록 발휘하시며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저들은 권세라고 불린다(엡 1 : 21; 고전 15 : 24). 하나님은 세계에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고 집행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정사(政事), 때로는 권세, 때로는 주관하는 자로 불린다(골 1 : 16; 엡 1 : 21; 고전 15 : 24).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골 1 : 16). 그러나 이 마지막 명칭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이것은 동등하게 적합한 해석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해석이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성령께서는 천사의 사역의 고귀함을 높이기 위해 이 명칭을 제외하고 앞의 명칭들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적 위엄의 임재를 특별히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 기구들을 존경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더우기 그들은 한 번 이상 신들이라 불려졌다(시 138 : 1).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마치 거울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창 18 : 1), 야곱(창 32 : 2,18), 모세와 다른 사람들(수 5 : 14; 삿 6 : 14; 13 : 10,22)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경의 언급에 대하여 고대 교회의 저자들은 그 사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해석하였는데,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자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더욱 자주 "신들"이라는 명칭이 그 모든 천사들에게 적용된다(창 22 : 11-12). 그것을 무슨 신기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왕들과 통치자들이 지고하신 왕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해서 그들에게 존영(尊榮)이 주어진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이유에서 그 존영은 마땅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한층 더 풍부히 빛내는 천사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6. 신자의 보호자이며 도움을 주는 자로서의 천사

그러나 성경은 위로와 신앙을 강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교훈에 강조점을 둔다. 즉, 천사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요 관리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천사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밤을 새우고 우리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고 따라서 어떠한 재앙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아 준다고 상기시킨다. 성경의 다음 두 구절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첫째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둘째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즉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 : 11-12)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말씀이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 : 7)라는 말씀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키기로 하신 자들의 보호를 천사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의 천사는 도망자 하갈을 위로하고, 그녀의 여주인과 화목하기를 명령하였다(창 16 : 9).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천사가 그의 여행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창 24 : 7).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금까지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주의 사자가 그들을 번창케 해 주시기를 기원하였다(창 48 : 16).
이와 같이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陣)을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출 14 : 19, 23 : 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는 언제나 천사들을 사용하여 원수에게 보복할 자들을 일으키셨다(삿 2 : 1, 6 : 11, 13 : 3-20). 간단히 말하자면 이 이상 더 다른 실례를 열거할 필요가 없고, 다만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섬겼으며(마 4 : 11), 그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와 함께 있었다(눅 22 : 43)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렸으며(마 28 : 5-7; 눅 24 : 5),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주었다(행 1 : 10).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한다. 성경에서 본 대로, 하나님의 사자는 예루살렘을 그 포위에서 건져내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쳐서 죽였다(왕하 19 : 35; 사 37 : 36).

 

7. 수호 천사들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개개의 천사가 그들 각자에게 지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감히 단언할 수 없다. 다니엘이 바사인들의 천사와 헬라인들의 천사를 소개할 때(단 10 : 13,20, 12 : 1), 특수한 천사들이 왕국과 지방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그는 명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천사들이 항상 성부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마 18 : 10), 이것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탁받은 어떤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들 각 사람에게 자기를 보호하는 특수한 천사가 있다고 단정해야 할지에 대하여는 나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한 천사만이 우리 각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한다고 했는데, 기뻐하는 자들이란 사실 모든 천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눅 15 : 7).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 : 22)라는 말씀 역시 많은 수의 천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엘리사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서 지정된 많은 불명거를 자기 사환에게 보여 준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왕하 6 : 17).
다른 구절보다 한층 더 분명하게 이 점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즉,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형제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형제들은 두드리는 자가 베드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천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행 12 : 15). 이것은, 각 신자에게는 그들을 지켜주는 천사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생각되어진 듯하다. 그러나 천사들 중 어느 한 천사가 베드로를 돌보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천사가 베드로의 영원한 수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데 우리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일반 대중들은 두 천사, 곧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다고 상상하고는 그것이 마치 별개의 특성인 것처럼 각자에게 예속시킨다.16 그러나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다. 모든 천군 천사가 자신의 안전을 계속해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천사가 자신의 특별한 수호자로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한 천사에게만 국한시키는 자들은 저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 회원들에게까지도 큰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사방에서 후원하며 보호하는 천군들과 함께 보다 더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무익한 약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8. 천사의 계급, 수, 모양

천사의 수와 계급을 감히 결정짓는 자들은17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미가엘을 가리켜 "대군"이라 부르고(단 12 : 1) 유다가 그를 "천사장"이라고 부른 것(유 1 : 9)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도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심판자리에 모으는 자가 바로 천사장이라고 말하였다(살전 4 : 16; 참조, 겔 10 : 5). 그러나 누가 이러한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천사들의 존귀의 정도를 결정짓고 각 천사들을 그 칭호로 구별지으며 그 위치와 지위를 각자에게 배정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이름, 곧 미가엘(단 10 : 21)과 가브리엘(단 8 : 16; 눅 1 : 19,26) 그리고 토비트의 역사에서 이에 하나를 더 가한다면 제3의 칭호(라파엘)가 있는데(토비트 12 : 15), 이 명칭들은 그것들을 갖고 있는 의미로 보아 우리의 능력의 약함 때문에 천사들에게 적용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를 미결로 남겨 두기를 원한다.
천사의 수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는 말씀을 듣고, 다니엘로부터는 그 천사의 수가 "천천이요……만만이며"(단 7 : 10)라는 말을 듣는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병거가 산에 가득함"(왕하 6 : 17)을 보았으며,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시 34 : 7) 있다고 기록된 것은 그 수의 막대함을 의미한다.18
영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의 이해력의 정도에 맞추어 그룹이나 스랍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이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단 유사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는 마치 번개가 하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더우기,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계시를 알게 될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해 두자. 그러므로 너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확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9. 천사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그러나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19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천사는 "부리는 영(靈)"(히 1 : 14)이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또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남은 일들을 수행하신다는 것 등이다. 고대 사두개인들은 천사라는 말을,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무하시는 충동이나, 또는 그가 내뿜는 능력의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행 23 : 8).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는 매우 반대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유(類)의 무지가 그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 곧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계 5 : 11)이며,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고 말한 구절, 그들이 기뻐한다는 구절(눅 15 : 10), 손으로 신자들을 붙들며(시 91 : 12; 마 4 : 6; 눅 4 : 10-11) 신자들의 영혼을 안식처로 인도하며(눅 16 : 22),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다고 한 구절(마 18 : 10),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 대하여는 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외에 천사는 실질적인 실체를 가진 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논증하는 구절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20 그것이 아무리 곡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율법이 천사들의 손으로 전해졌다고 한 스데반과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행 7 : 53; 갈 3 : 19). 이와 마찬가지로 피택자들이 부활 후에는 천사와 같이 될 것이며(마 22 : 30), 심판의 날은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마 24 : 36), 그날에 주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마 25 : 31; 눅 9 : 26)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딤전 5 : 21) 자신의 훈계를 지키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 있거니와, 그가 이때 의중(意中)에 둔 천사는 실체가 없는 성질이나 영감이 아니라 실재의 영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보다 더욱 뛰어나시다는 것(히 1 : 4), 세계는 천사들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히 2 : 5), 그리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히 2 : 16) 등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천사들이 축복받은 영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그들에게 적절하다고 이해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동서(同書)의 저자는 신자들의 영혼과 거룩한 천사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집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히 12 : 22-23).
더우기 우리가 이미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는,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오며(마 18 : 10), 그들의 호위로 우리는 항상 보호를 받게 되고(눅 4 : 10-11),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고(눅 15 : 10), 그리고 교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여러 모양의 은혜에 놀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한다고 하였다(히 1 : 6).21 천사들이 자주 사람의 모양으로 거룩한 족장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서 환대를 받았다는 것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창 18 : 2).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중보자의 위격에서 얻은 탁월성 때문에 천사라고 불렸다(말 3 : 1). 여러 세대 전에 사탄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후 자주 새로이 일어나는 그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상에 대비하여 순박한 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좋다고 생각되었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천사들이 모든 축복의 관리자요 공급자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미신에 대항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범하기 쉬운 과오는, 어떠한 존귀도 천사들로부터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돌리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이 여러 면으로 빛을 상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헤아릴 수 없는 존귀가 천사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악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천사들을 높임으로써 그리스도를 천사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 자들과 큰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일체의 축복의 창시자라고 매우 열심히 주장하였다(골 1 : 16,20).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족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와 동일한 샘에서 물을 긷는 자들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확실히 신적 위엄의 광채가 천사들에게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 : 10, 22 : 8-9)는 천사의 대답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천사들을 이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째서 직접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신자의 안전을 위해 대비하시며 자비의 은사를 전달하시는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위험을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필연성에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들 없이는 그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천사들을 그대로 두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이 위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선한 소망을 가지게 하거나 또는 안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주께서 스스로 우리의 보호자라고 선언하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많은 위험과 그렇게 많은 해로운 것들과 그렇게 많은 종류의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주께서 만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은혜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유약하기 때문에 분명히 때로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절망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보호자에게 명령하여 우리의 안전을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옹호와 보호 속에 감싸여 있는 한,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우리는 모든 해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순수한 약속을 받고서도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 : 1)하고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친절로 우리의 이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위대한 은총을 무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사의 사환에게서 우리는 이에 대한 실례를 보게 된다. 그는 아람의 군대가 성을 에워싸 피할 길이 없음을 보자 자신과 엘리사가 마치 죽게 된 것처럼 그 마음이 공포로 가득하였다. 이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즉시 사환은 자기와 그 선지자를 보호할 불 말과 불 병거, 즉 무수한 하나님의 사자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왕하 6 : 17). 이에 힘을 얻은 사환은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만 해도 보기만 해도 거의 절망할 것 같았던 그 원수들을 대담하게 경시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천사때문에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직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모든 의혹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더 굳게 확립하는 데 목표를 두기로 하자. 실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돕는 자들을 마련해 두신 것은, 무수한 원수들이 마치 주의 도우심보다 우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 : 16)고 한 엘리사의 말에서 위안을 찾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세우신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원조자로 바라보고 부르며 선포하도록 천사들이 그 손으로 우리를 똑바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어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우리의 몸을 맡기며 헌신하게 하여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만군의 주께서 서 계시는 사닥다리로 사람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야곱의 환상에서 기술된 것을 우리는 마음에 담아 깊이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창 28 : 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 : 51)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천사들의 사역이 우리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창 24 : 7)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께 위탁하고 기도하며, 아브라함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창 24 : 1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천사와 나누기 위해 천사들을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의 사역자로 삼은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우리의 신뢰를 천사들과 자신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자신의 도우심의 사역자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심을 더욱 베푸시도록 할 목적으로 천사들에게 경배하는 저 플라톤 철학을 물리쳐야 한다.22 미신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 종교에 끌어들이려 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굽히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

13. 성경은 원수와 대항하도록 우리를 미리 무장시켜 맞서게 한다

성경이 마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의도는, 모두가 우리들을 깨우쳐서 저들의 간교한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따라서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 : 4), "이 세상 임금"(요 12 : 31)으로 불리고, "강한 자"(눅 11 : 21; 참조, 마 12 : 29),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 : 2), "우는 사자"(벧전 5 : 8)로 언급되는 것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하고 경계하며 마귀와의 싸움을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가끔 명백한 말로 기록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라고 말한 후 곧 이어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 : 9)는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 : 12)고 경고한 후, 그렇게 크고 그렇게 위험한 싸움을 싸우는 데 적합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엡 6 : 13이하). 우리는 원수가 가혹하게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 받아 왔다. 이 원수는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며, 전투적용맹을 가진 자이며, 가능한 모든 무기를 가졌으며, 전술에 노련한 자의 화신(化身)인 것이다.2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우리는 부주의와 무기력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24 오히려 그와 반대로 다시 불붙는 용기를 가지고 전투에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죽을 때에야 끝이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하여 인내하도록 하자. 실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자각하고, 무엇을 시도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권고와 힘과 용기와 무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14. 사악함의 영역

더우기 성경은 이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해, 우리와 싸우는 원수의 수가 하나 둘 하는 소수가 아니라 군대이라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놓였다고 성경은 말한다(막 16 : 9; 눅 8 : 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내어쫓긴후에 악한 귀신에게 다시 그 장소를 허락해 주면 그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텅 빈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2 : 43-45). 실로 어떤 사람은 "군대" 마귀에 붙잡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눅 8 : 30).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원수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소수를 멸시하여 싸우기를 게을리하며, 혹은 가끔 휴전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태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나 마귀에 대하여 자주 단수로 언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통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단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처럼, 불신앙의 무리들과 불경건 그 자체는 그들에게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그들의 왕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고 말씀하셨다.

 

15. 화해할 수 없는 투쟁

마귀는 어디서나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틀림없이 이 사실은 마귀와의 부단한 싸움에 우리의 마음을 불붙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큰 관심사로 여긴다면 마땅히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여 이를 소멸시키려는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히 낸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자와 타협할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고 함정을 파는 자와 화목해서도 안 되고 휴전을 해서도 안 된다. 창세기 3장에는 그러한 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박탈하며 인간을 파멸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1-5절). 복음서의 기자들도 역시 그를 가리켜 "원수"라고 불렀으며(마 13 : 28,39), 영생의 씨앗을 부패케 하기 위해 가라지를 뿌리는 자라고 기술하였다(마 13 : 25). 요컨대,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말장이요"(요 8 : 44)라고 하신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고 흑암으로 빛을 가리며 인간의 마음을 오류에 빠지게 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며 논쟁과 싸움을 일으켜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며 인류를 자신과 함께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그는 본래 타락하고 사악하며 악의로 가득찬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데 열중하는 그 성질은 극도로 타락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실로 요한은 마귀를 모든 흉악과 불의의 창시자요 지도자이며 설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6. 마귀는 하나님 창조의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마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 속하는 이 사악함은 창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에게 있는 정죄받아야 할 것들은 모두가 다 반역과 타락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전적으로 관계없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주님께서도, 사탄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진리에 서지 못하기"(요 8 : 44)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귀가 진리에 서지 못한다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확실히 한때는 진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부름으로써, 전적으로 마귀 자신에게 돌려야 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지 않도록 하셨다.
이상의 사실들은 비록 간단하고 또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을 모든 비방으로부터 옹호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귀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많이 알거나, 혹은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귀의 타락과 그 타락의 원인, 방법, 시기, 성질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성경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또는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볍게 언급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유익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성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외에는 그 거룩한 말씀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시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필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마귀의 성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즉 악마는 창조시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자멸하였으며, 남을 파멸시키는 파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알아서 유익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는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 : 4),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 : 6)을 용서하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딤전 5 : 21),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버림받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있다고 하는것에 관하여 우리가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이 없이는 사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욥의 역사를 읽어보면,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타났으며(요 1 : 6, 2 : 1),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떠한 악도 감히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욥 1 : 12, 2 : 6). 또, 이와 같이 아합이 속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자기 일을 수행하였다(왕상 22 : 20-22). 이러한 이유에서 사탄은 역시 사울을 괴롭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가 그 불경건한 왕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삼상 16 : 14, 18 : 10).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께서 "벌하는 사자들"을 통하여 애굽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78 : 49). 이상의 개개의 실례에 따라 바울은 불신자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살후 2 : 11). 그러나 조금 앞에서는 이를 사탄의 역사라고 불렀다(살후 2 : 9; 참조, 고후 4 : 4; 엡 2 : 2). 그러므로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께 반항한다든가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 반항과 반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사탄의 의지나 노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본래 사악한 존재여서, 조금도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아주 완강하게 불순종하며 전적으로 반항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격렬하게 또 고의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악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악함이 마귀를 재촉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능의 고삐로 마귀를 잡아매고 제지하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창조주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촉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 승리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악령들을 굴복시키며 그들의 활동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신자들과 싸우게 하심으로써 신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기습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게 하시고 그들을 싸움으로 몰아 넣으시고 자주 피곤하게 만드시며 패배시키게 하며, 공포에 떨게 하시며, 때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게도 하신다. 그렇지만 악령들은 신자들을 정복하지도 못하며 박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악령은 불경자들을 정복하여 끌고 다니며, 그 영혼과 육체를 학대하고, 노예처럼 그들을 능욕하여 갖가지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게 한다. 신자들은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권고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 : 2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9). 바울은 자기의 교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후 12 : 7)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이런 종류의 싸움을 면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훈련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창 3 : 15)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탄에게 정복된다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심한 타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하지만 후에 다시 일어난다.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한 개인의 행위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복수로 다윗이 한때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어, 사탄의 선동으로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24 : 1). 그리고 바울은 비록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자들에게도 아직 사죄의 소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딤후 2 : 25-26).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위에 언급한 약속은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할 이 세상에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이 싸움이 끝난 후 그 약속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 : 20)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실로 이 승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항상 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상 임금은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관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요 14 : 30).
더우기, 그 승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우리에게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완성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 : 18)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때에 사탄과 그의 권세는 무너지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의 효력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이 답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하셨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 : 2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 : 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타파하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교회는 매순간 몇백 번이고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사탄의 광포의 세력은 그렇게도 강한데, 만일 우리의 인도자의 승리를 의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그 다양하고 끊임없는 공격에 대항하여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하여는 사탄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단지 자기 백성의 수에 넣지 않기로 하신 불경자들과 불신자들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추방당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 세상을 소유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참조, 눅 11 : 21). 그는 또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고후 4 : 4)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엡 2 : 2)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일로서, 불경자들은 모두가 다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복수에 대행하는 사자들에게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종속되었겠는가? 마지막으로, 저들은 저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한다(요 8 : 44). 왜냐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처럼, 불경자들은 타락하여 사탄의 형상을 지님으로써 당연히 그의 자녀로 인정되기 때문이다(요일 3 : 8-10).

 

19. 마귀는 어떤 상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거룩한 천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으키는 선한 영감 혹은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그 천박한 철학사상을 반박하였다.25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육신에서 오는 악한 감정 혹은 마음의 불안이 바로 마귀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반박해야 한다.26 우리는 이러한 반박을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적지 않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저들은 본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유 1 : 6) "더러운 귀신" 또는 변절한 천사(마 12 : 43)라고 불려졌는데, 이때 그 이름은 충동이나 마음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이해를 구비하고 있는 마음, 혹은 영(靈)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자녀와 비교하였는데(요 8 : 44; 요일 3 : 10), 만일 이 "마귀"라는 말이 악한 영감 이상의 뜻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그것은 무의미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요한은, 보다 명백한 말씀을 첨가하여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하였다. 유다 역시 "천사장 미가엘이……마귀와 다투어"라는 말씀에서, 악하고 배반한 천사를 선한 천사와 대립시켜 놓았다(유 1 : 9). 이것은 사탄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욥의 기사와 일치한다(욥 1 : 6, 2 : 1). 더우기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느끼기 시작하여 부활시에는 특별히 느끼게 될 형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 : 29)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 : 4).
만일 마귀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그를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의해 지금 그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등의 표현들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그러나 이 점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동시에 신기한 것만을 좋아하는 공상가들에게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증언은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의도한 바를 다 완수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불안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저들 자신과 저들보다 한층 더 단순한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그러한 현혹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고서도 원수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원수를 저항하는 일에 태만하거나 부주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

20. 창조의 위대함과 풍요로움

한편 가장 아름다운 이 극장에서 도처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역을 경건하게 즐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자.27 왜냐하면,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28 어디를 보나 눈에 띄는 것은 다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하는 일,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경건히 명상하여 생각하는 일, 이러한 것들은 신앙을 위한 으뜸되는 증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의 질서에 있어서 첫째가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데 유익이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모세가 간단하게 기록하였으며(창 1, 2장)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특히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와 같은 사람들이 상세하게 설명한 우주 창조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29 이 창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 이 권능으로 모든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을 산출하셨다는 것, 놀라운 계열에 따라 각종의 무수한 사물들을 구별하셨다는 것, 각기 종류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성질을 주시고 임무를 정하시며 처소와 위치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 만물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종류가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도록 그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 등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어떤 피조물들을 배양하시되 끊임없이 그들에게 새 활력을 넣어 주시고 또 어떤 피조물에게는 번식력을 주시되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종(種) 전체가 멸절되지 않도록 하시며, 천지를 놀랍도록 장식하시되 극도로 풍부하고 극도로 다양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하여 마치 가장 정교하고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장식으로 꾸며지고 채워진 웅대하며 화려한 저택처럼 하셨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처럼 화려한 미와 많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주 창조를 자세히 다루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몇 가지 점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독자들에게 경고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우주에 대한 기사를 충실하게 또는 성실하게 기록한 모세와 그외 사람들에게서 한층 더 충분한 지식을 찾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어떤 목적에 적응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깊이 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대부분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며30 따라서 현재의 목적에 관한 것은 두서너 마디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이 이 우주의 형성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 함을 적절한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와 같은 위대함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몰두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함을 조용히 지켜볼 때, 그것들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목적을 가르치는 데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독자는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피조물에게서 보여 주신 그 명백한 권능을 아무 생각 없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겨 버리지 않는다면, 둘째로 누가 만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정도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외관상 이 이상 더 아름다운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무리를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함을 우리가 생각할 때 비로소 이 법칙의 첫째 부분이 예증된다. 그는 어떤 별들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치를 고정시켜 놓으셨으며, 어떤 별들에게는 한층 더 자유로운 운행을 허용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정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셨으며, 모든 별의 운행을 조정하여 별들로 하여금 낮과 밤, 달과 해(年), 그리고 계절을 구분하셨고, 우리가 항상 보는 대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날을 조화롭게 조절하셨다.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는 것은 그처럼 큰 덩어리를 지탱해 나아가시며 천체를 신속히 운행하는 것과31 그와 비슷한 일들을 관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의 몇 가지 예증만으로도 우주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밝혀 준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내가 이 문제 전체를 설명하려고 결정하였다면,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수많은 증거는 우주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물의 수와 같으며, 실로 크고 작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수와 같기 때문이다.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 법칙의 둘째 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총에서 느끼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32 바로 조금 앞에서 지적한 대로,3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스스로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창 1 : 31). 물론 하나님으로서는 창조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동시에 또는 단숨에 완성하신다는 것이 그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하시는 것에 비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부성적(父性的)인 배려를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인간에게 유용하며 유익하다고 미리 아신 것들을 모두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는 이 가장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망은이겠는가? 또한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도 않았을 때 가장 풍부하게 모든 좋은 것들로 마련해 두신 것을 알고서도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언젠가는 우리의 궁핍을 채워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에 떤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힘입어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우리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듣는다(창 1 : 28, 9 : 2).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분명히 명목상의 빈 증여(贈與)로 우리를 조롱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녕에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함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분배는 그의 솜씨와 권능으로 된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서 그의 성실한 보호 속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축복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하나님께서도 구원에 필요한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한 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완전히 신뢰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진 유익한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인자하심의 아름다움에 의해 초대되었으므로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섬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1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  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 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2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3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 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4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5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27)6.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7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8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9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10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12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13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14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5. 영혼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마니교도의 망상을 공박할 필요가 있다. 세르베투스는 이러한 망상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소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창 2 : 7), 그들은 마치 무한한 신성의 어느 부분이 인간 속에 흘러 들어오기나 한 것처럼,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의 파생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악마적인 오류가 얼마나 우둔하며 얼마나 추악한 모순을 가져 왔는가를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본질에서 인간의 영혼이 유출되었다고 하면,15 하나님의 본성은 변화와 고뇌뿐만 아니라 무지, 사악한 욕망, 허약, 그리고 각종 죄악에도 예속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만큼 불안정한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서로 반대되는 동기로 말미암아 동요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무지로 인해 거듭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는 지극히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는 존재이다. 우리가 알기에 인간의 마음은, 시궁창이자 각종 불결한 것들의 잠복처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신성의 은밀한 유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여러 불결한 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본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실로 바울은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16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것은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특성에 있어서 그의 소생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은사로 우리를 장식하시는 한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다. 동시에 창조주의 본질을 분할하여 각자가 그 일부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극단의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새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혼도 천사와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는 유입이 아니라, 무로부터의 존재의 시작인 것이다.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요 육체를 떠날 때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전 12 : 7),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체에서 일부 뜯어 낸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오시안더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환상에 빠져 스스로 불경건의 오류에 말려들고 있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 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체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측량할 수 없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자신과 비슷하게 만드실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아무리 이 기만을 위장하려 해도 저들은 건전한 독자들의 눈을 가려 마니교도의 오류를 보지 못하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인간은 본체의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 : 18)고 하였다. 이 성령은 분명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드시지는 않는다.

 

(아담의 타락 견해에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8)

6. 영혼과 그 기능

"영혼"의 정의를 철학자들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플라톤을 제외하고는 그들중 영혼의 불멸적인 실체를 올바로 주장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다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견해는 보다 정확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7 다른 사람들은 영혼의 능력과 기능들을 현세의 생활에 너무 고착시키고, 육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였다.18
실로 영혼은 무형의 실체임을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배웠다.19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영혼이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육체속에 거처하는 것 처럼 간주하여 거기에 머물며,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 주고, 육체의 모든 기관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할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며, 그리고 지상생활의 의무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것은 타락 때문에 분명하게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흔적이 새겨진 채 인간의 죄악 자체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명성에 대한 그렇게 큰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수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가? 명예로운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의 시초와 원인은, 인간이 의를 함양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여기에 바로 종교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천상의 생활을 명상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처럼,20 또한 이에 대한 지식이 그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되는 행복을 인간이 몰랐다고 하면 그는 사실상 지성의 가장 중요한 효용을 결여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주된 활동은 이것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감각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이라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는 자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 듯이 보여도21 그들의 추리에는 확고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 경박하며 무익한 주장으로 우리 스스로가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기관의 감각적 활동과 영혼이 이성적 부분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고 저들은 말한다. 이는 마치 이성 그 자체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전쟁터의 군대들처럼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인간성의 타락에서 오는 것이므로 영혼의 기능들이 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능은 상호간에 충분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능에 대하여 정교하게 논하는 일은 철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우리에게는 다만 경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실로 나는 저들의 가르치는 바가 참된 것이며, 알아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배워서 유익한 것이며, 또한 능숙한 솜씨로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이에 나는 저들을 연구하며 저들에게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어도 이를 금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오관(五官)이 있음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이를 차라리 기관(器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이 기관에 의해 일체의 대상이 일종의 그릇처럼 공통 감각에 전달된다고 하였다.22 다음에는 공통 감각에 의해 이해된 것들을 식별하는 공상력이 따른다. 그 다음에는 보편적 판단을 포함한 이성이 따른다. 마지막으로는 오성(悟性)이 있는데, 이것은 이성이 산만하게 생각한 것을 집중적이며 조용한 명상 속에서 정관(靜觀)한다. 오성, 이성, 공상력 등 영혼의 세 가지 인식 기능과 일치하는 세 가지 욕구 기능도 있다. 첫째는 의지인데, 이것은 오성과 이성이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둘째는 분노로, 이것은 이성과 공상력에 의해서 제시된 것을 포착한다. 셋째는 욕망으로, 이것은 공상력과 감각에 의해 제시된 것을 파악한다.23
이상의 견해들은 참된 것이며 적어도 있음직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우리를 돕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불분명한 데로 끌어넣을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를 당연히 생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영혼의 능력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기능이라고 말하고 이성이 없다고 해 어느 다른 기능의 지도를 받아 이성에 복종한다면, 하나를 욕구적이라 칭하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 이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지적이라고 칭한다고 해도 나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행동의 원리, 즉 감각, 오성, 욕구가 있다는 것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분을 짓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구분을 짓도록 하자. 이것은 분명히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분이다. 저들은 매우 단순하게 말하기를 원하면서도 영혼을 욕구와 오성으로 구분하여 이 둘을 이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저들은 가끔 후자를 관조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만으로 만족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키케로는 이를 지력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24 때로는 그것을 실천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과 악을 이해함으로써 의지를 다양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에는 옳고 의로운 생활방법에 관한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저들은 또한 전자(前者) 곧 욕구를 의지와 정욕으로 구분하고, 저들이 "불레시스(        )"라고 부르는 욕구가 이성에 복종할 때에는 이를 "홀메(    ,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욕구가 이성의 멍에를 내던지고 방종에 빠질 때에는 "파토스(     , 격정)"가 된다.25 이와 같이 저들은 항상, 사람에게는 자신을 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기능으로서의 이성이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7. 진실로 기본적인 능력으로서의 견해와 의지

우리는 지금 하는 수 없이 이런 식의 가르침에서 다소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학자들은 타락에 대한 형벌에서 오는 인간성의 부패를 모르고 사람의 전혀 대립되는 두 상태를 부당하게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두 부분, 곧 오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로 하자. 실로 이 구분은 현재 우리의 목적에 편리한 것이다. 그리고 오성이 하는 일은 대상을 식별하여 대상을 각각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든가 하는 것이다. 한편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선택하며 추구하고, 오성이 부인하는 것을 거절하며 피하는 것이다.26 우리는 여기서, 마음 그 자체에는 활동이 없고 그것은 선택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사소한 논의에 붙들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27 그는 이 선택을 욕구적 오성이라고 불렀다. 무익한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성은 말하자면 영혼의 지도자요 지배자이며 의지는 오성의 명령을 항상 유의하며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 오성의 판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에 있어서의 회피 혹은 추구는 마음에 있어서의 긍정 혹은 부정에 상응한다는 것을 진실하게 가르쳤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28 오성이 의지의 방향을 얼마나 확고하게 지배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 두 기능 중 어느 하나에도 관계가 없는 힘이 영혼 안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감각을 오성에 포함시킨다. 한편 철학자들은 이를 구별하여, 감각은 쾌락을 바라고 오성은 선을 추구한다고 한다. 여기서 감각적 욕구는 과도한 욕망 또는 정욕이 되고 오성의 경향은 의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좋아하는 "욕구"라는 말 대신에 보다 흔히 쓰이는 "의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29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30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31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32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