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은 오직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부여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에게 배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의식 아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 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묶어 두시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곧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또는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거의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1 그러나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하여 말없이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2

(성경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다른 족장들이 불신자와 구별짓게 하신 하나님에 관한 그 깊은 지식에 도달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도움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도록 그들을 조명하여 준 그 특수한 신앙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말씀을 통하여 이 두 지식에 다같이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먼저 오게된다. 다음으로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다른 내적 지식이 여기에 더하여져서 이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창시자,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증보자의 위격을 가지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세계의 타락과 자연의 부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제책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3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양자로 삼으신 언약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들을 항상 불신자에게서 성별(聖別)하였다는 일부의 교리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확실한 특징에 의하여 모든 허망한 잡신들의 무리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만은 논의를 할 것이다. 그 일련의 문제들을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구속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4 우리는 신약성경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증거의 목적은 미로에서 어떤 불확실한 신성(神性)을 찾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있다.


2.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나 환상으로 나타내셨는지 혹은 인간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다. 하여튼, 그들의 마음에 교리에 대한 견고한 확실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5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인 견해를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진리가 계속적인 교훈을 통하여 대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족장들에게 맡기셨던 그 말씀을,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엮으실 것을 결심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율법이 공포되었으며 그 후에 율법의 선지자들이 해석자로서 또한 첨가되었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6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 : 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보자로 삼는 신앙과 회개의 특수한 교리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과 많은 거짓 신들의 무리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이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의 관객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눈을 돌려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월등한 유익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흑암에서 태어난 자가 점점 더 둔감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한계를 잘 지켜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극소수요, 오히려 자신의 허망에 부풀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7 확실히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려하셨던 것이다.


3. 성경을 떠나면 우리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하늘의 교리가 망각으로 파멸되지 아니하고, 오류로 사라지지 아니하며,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形成)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가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성실하게 명상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갈망한다면 이러한 올바른 길을 추구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하여 진실하게 또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자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 : 16) 그 하나님의 광채는 말씀의 실(絲)로 인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宮)과 같은 것이라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 밖에서 벗어나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름거리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더 낫다.8 그러므로 다윗은 순수한 종교가 번창하기 위하여는 이 지상에서 미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하였다.(시 93 : 1, 96 : 10, 97 : 1, 99 : 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심에서 행사하시는 그러한 권능이란 의미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시는 교리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경은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 : 1-2).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다윗은 여기서 또한 율법의 다른 유용성도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뇌성(3절), 바람, 소낙비, 회오리바람, 폭풍우 속에서 땅을 뒤흔들고, 산들을 떨게 하며(6절), 백향목을 꺾으시는(5절) 하나님의 그 위엄있는 음성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마침내는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는 공중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불신자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다른 시편에서도 바다의 무서운 파도에 대해서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 : 5).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그녀의 백성과 모든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예배를 드리되 유대인만이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씀하신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요 4 : 22).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그러므로 그 권위는1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선 여기서 성경의 권위2에 대해 다소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공포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었을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인간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감히 비난할 만큼 비극적인 오만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聖)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 : 39 참조).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더 충분한 논의와 더 주의 깊은 고찰을 하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문제의 광범한 성격이 요구하는 중요성 보다 본서의 계획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독자는 나를 양해해 줄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음과 같이 물을 때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또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교회가 규정하지 않았다면, 한 책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책은 제거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政經)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무제한의 횡포를 즐겨 행하는 이 불경한 사람들은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관념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만 있다면, 자타(自他)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그 불합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어서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또 그 판단에만 의존된다고 한다면, 그 영생의 확신을 찾고 있는 비참한 양심들의 상태는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답변을 얻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만일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 자체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자들은 사도 바울의 단 한 마디 말로도 훌륭하게 반박할 수 있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 : 20)고 사도는 증거하였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그 기원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지자와 사도가 쓴 책이겠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으로 남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교활한 반대도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회의 승인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에 승인의 인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교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성경을 존경하는 것이다. 교회의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흑암에서 광명을, 검은 데서 흰 것을, 쓴 것에서 단 것을 가려내는 일을 배울 수 있는가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진리의 명백한 증거5를 마치 흰 것과 검은 것이 그 색깔이 다르고, 또한 단 것과 쓴 것이 그 맛이 다르듯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5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그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말이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6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나쁘게 또는 기만적으로 해석하였는가 함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마니교도들(Manichees)을 의식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니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 반론 없이 믿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마니(Mani)에 대한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설득력을 가지고 그를 여러분들의 의견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 그는 여기에 더 첨가하여, "실로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교회의 권위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복음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의 말을 존중하였다고해서 그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확증하였다. 곧 "내가 나의 믿는 바를 예찬하고, 당신의 믿는 것을 비웃을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한 것을 알도록 초청하고, 후에 가서는 불확실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직 충분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믿으라고 초청하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해하게 하는 자들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골 1 : 4-11,23) 이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강화하며 조명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7
이상의 말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였던 말이었다. 이 말에서 누구나 다 명백히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인물이 의도한 바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결정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게 하는 서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경건한 자의 확실성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니교도들이 거절한 성경을 옹호할 생각으로 성경이 전체 교회의 승인을 얻었다고 마니교도들에게 자주 강조한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다음과 같이 파우스투스(Faustus)를8 비난한 것도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곧 "그렇게 기초가 튼튼하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을 받으며,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확실히 계승되어 온 복음의 진리를 그는 순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권위가 사람의 결정이나 제정에 의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가 말한 것은 교회의 보편적인 판단을 제언한 것뿐이니, 그것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큰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을 능가할 수가 있었다. 신앙의 유익에 대하여(The Usefulness of Belief)9라는 어거스틴의 소책자를 읽기 바란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믿음의 유익이란 바로 탐구의 단서를 제공해 주며 그 적절한 시초를 형성해 주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견해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한 진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도 강하다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10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11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로부터 얻은 신앙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증거를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어 전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또는 거짓되게 부르지 않은 것이 정당한 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또한 가장 작은 말장난에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12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이 점을 논하게 될 때, 만일 하늘나라에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그가 율법과 예언의 복음의 원저자(原著者)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들 수 있다. 학식있는 사람이나 최고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반대를 일으켜서, 이 논쟁에서 자기네의 정신력을 모두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절망적으로 파렴치해지기까지 강퍅해지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성경의 교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거룩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른 모든 저작품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의 당돌한 거절을 억제하여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13 나 개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게는 특별한 재주나 특별한 웅변을 하는 데 남보다 뛰어난 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교활한 자, 곧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지와 기술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과 논쟁을 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그들의 소란한 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트집들을 논박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된다고 하면, 그들의 뒷전에서 비밀리에 수군거리는 그 거만한 자들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분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들의 비방에서 옹호했다해서 이것이 곧 참된 경건이 요구하는 확실성을 그들의 마음에 즉시 새겨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견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도 어리석게 혹은 경솔하게 믿지 않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영감으로 말한 것을 합리적으로 입증해 주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요구한다.14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15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 : 21).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도 아무런 죄의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투덜거리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선(善)한 삶 가운데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성령께서 경건한 자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인장(印章)"이나, "보증"으로 불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고후 1 : 22).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기 전에는 그들은 영구히 수많은 회의 속에서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16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17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실의 표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짐작을 성경에 예속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조급히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엄밀히 조사한 끝에 곧 싫어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저 비참한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미신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되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고, 보다 더 효과 있게 순종하도록 마음이 끌리게 되며 또한 순종의 불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올바르게 이사야를 통해서 선지자들과 온 백성은 다 자기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예언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추호의 거짓이나 애매한 점이 없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사 43 : 10).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 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내 말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믿는자 개개인이 마음에서 경험하는 바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가 재론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18 그러나 하나님의 영(靈)이 우리 마음에 인(印)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겸손하고 순진한 독자들은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만족 할 것이다. 즉 이사야는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하기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사 54 : 1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선민(選民), 곧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그가 구별해 내신 자들에게만 이 유일한 특권을 주신다. 실로 참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곧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깊은 데로 내려갈꼬 네 마음에 이르지 말라 오직 그 말씀이 네 입에 있느니라"(신 30 : 12,14; 시 107 : 26 참조)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 이해(理解)의 보화를 감추기로 결정하셨다면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 까지는 나는 그들을 "일반 대중"이란 말로 부르기를 원한다. 더욱이 이사야는 예언의 교훈이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서, 동시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첨가 하였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 : 1).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 반대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 할 수 없다"(마 13 : 11 참조)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자.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한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실성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하지 않는 한 논증으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일반적인 동의로 그것을 확립한다든가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지원을 받아 확증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일단 성경을 그 존엄성에 따라 경건하게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서적과는 달리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이전에는 마음에 성경의 확실성을 강하게 심어 주지 못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던 논증들이 이제는 매우 유용한 도움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얼마나 훌륭하고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도 풍기지 않는 이 교리의 천상적인 성격은 얼마나 완전하며, 이 교리가 그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책에 위엄을 가져다주는 다른 특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에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늘나라의 그 숭고한 신비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더욱 화려한 웅변으로 꾸며졌다고 하면, 불경자들은 아마도 성경의 힘은 다만 웅변술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말의 기교가 필요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인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 2 : 5)에 있다고 주장한 사도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하여 증거한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 : 4)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 아니하고 진리 그 자체가 증명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 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분명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1


2.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 결정적이다

사실 선지자들 중 어떤이들의 문체는 우아하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화려하기까지 하므로 그들의 수사법은 어떠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나는 인정한다.2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러한 실례를 보여 주심으로써, 비록 다른 곳에서 소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웅변에서 자기에게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름답고 즐거운 말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다윗과 이사야,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의 글이나 또는 거칠지만 문체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야 또는 스가랴의 글을 읽어 보면,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성령의 위엄이 어디서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탄이 거짓된 탈을 쓰고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흉내낸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세련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박한 언어로써 나약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교활하게 불경스러운 오류를 심어 우리 인간들을 속인다. 그리고 사탄은 언어의 진부한 형식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가면으로 쓰고는 자신의 사기 행각을 감추려고 한다.3 그러나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한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트집을 잡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지 않는 선지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교훈을 무미 건조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주요한 요점들만을 택하여 전체의 문제를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에서 다룬 문제들과 함께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회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4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들였던 것을 선언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 외에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창 17 : 7). 모세가 듣지도 못한 것을 제시했었더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그들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즉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라고 하는 연수(年數)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창 15 : 13, 출 12 : 40, 갈 3 : 17). 모세가(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리의 전숭을 그렇게 먼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가 보여준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 기원을 세계 창조 이전 6천년까지 소급하는 것을 믿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저자들까지도 저들의 수다를 항상 조소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내가 그것을 구태여 힘들여 논박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요세푸스(Josephus)는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이라는 저서에서 기억할 만한 증언을 고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율법의 교리가 비록 읽혀지지도 않고 또 참되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득히 먼 시대로부터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였다고 결론 지을수 있다.5
그리고 악독한 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혹도 품지 못하게 하고, 사 악한 자들로 변명의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최선의 구제책을 강구하신다. 야곱이 약 300년 전에 영감을 받아 자기 자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 하고 있지만, 그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종족을 고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레위 사람으로서 자기 지파에게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 49 : 5-6). 그는 분명히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온 가문이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는데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평을 기록할 때에(민 12 : 1), 육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나는 여기서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율법서의 도처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公布)한 교리에 대한 확증들이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의 교제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 : 18),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 34 : 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오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 19 : 16), 장막의 입구가 구름에 가리워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 : 34),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6 그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 16 : 24),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것(민 20 : 10-11, 출 17 : 6, 고전 10 : 4 참조), 그가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 11:9, 출 16:13, 고전 10:3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하여 혹 누가 반대이론을 제기 한다면, 그러한 교묘한 이론(異論)에 대하여 나는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 모든 사건을 온 회중 앞에서 공포하였는데 어떻게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세가 회중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 완고함, 배은 망덕,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 교리를 확신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6. 모세의 이적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이적에 대하여 모세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조금이라도 무슨 기회만 보이면 온 회중을 선동하여 떠들썩하게 반항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그런 불유쾌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도 명백하여 세속적인 저자들도 모세의 이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의 아비는 그 이적들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다(출 7 : 11, 9 : 11).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모세는 미신을 증오하였다(레 20 : 6).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런 모세가 마술사였다고 억측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모세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과 형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것도 아님을 공언함으로써 일체의 비난의 표적들을 충분히 지워 버렸다(출 16 : 7). 그리고 일어난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본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마술이 백성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출 16 : 19-20)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많은 엄격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사악한 자들이 더 이상 불평함으로써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온 민중이 교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넘어뜨리려고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마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광포함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교훈이 모든 시대에 확신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더우기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우위를 부여하게 한 것이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입증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창 49 : 10). 이 예언을 최초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을 기록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사울이 즉위한 후 왕권은 베냐민 지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삼상 11 : 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 : 13), 이때 왕권의 이양에 대한 무슨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던가? 양을 치는 평민의 가정에서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가정에는 7형제나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다윗에게 그러한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조차 하였겠는가? 어떻게 그가 왕국을 통치할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노력, 혹은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서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모호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창 49 : 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예언들이 더 있지만 나는 여기서 이를 생략하겠다. 이 예언들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그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다. 요컨대 모세의 한 편의 노래는(신 32장)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맑은 거울인 것이다.

 

8.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들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한층 더 명백하게 발견된다. 나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의 실례만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체의 실례를 든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될 것이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 : 6-7). 그 당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오래 전에 예언한다는 것은, 아직 신적 영감에 대한 명백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못된다고 치자. 그러나 이사야가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 : 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하였다.7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고레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바벨론과 싸워 그 강대한 왕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자적인 수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사람의 추측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의 포로 생활의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하여도 예언하였는데(렘 25 : 11-12, 29 : 10),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예언자들의 권위가 확증되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주장한 바가 바로 그들이 말의 신빙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 : 9).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대하여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같은 시대에 예언하였으며, 그 예언이 마치 상호간에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 진술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니엘은 어떠한가? 그는 약 6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것이 마치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역사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충분히 억제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너무도 명백해서 교묘히 반대할 여지를 조금도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율법의 전승(傳承)은 신뢰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박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치의 예리함을 보이기 위해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나 선지자들의 이름이 붙여진 채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8 심지어는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었던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주먹이나 채찍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도록 보존되었다. 비록 그 율법이 제사장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잠시 파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 : 8, 대하 34 : 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9 실로 요시야는 이를 공포할 때에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야는 그 원본을 성전에 보존하고,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하였다(신 17 : 18-19). 다만 이러한 일들은 있었다. 곧 제사장들이 옛날의 엄숙한 관습을 따라 율법을 공표하기를 중단하였고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버릇을 게을리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가 확인되지 않은 때나 그것이 갱신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윗의 시편에 정통한 사람이 모세를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저자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저작은 오직 한 길을 통하여 직접 입에서 입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어떤이들은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율법과 예언자를 보존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던 것 중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깨끗이 일소해 버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설치한 공격 무기로 그들을 역습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성경을 다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에서 그처럼 빨리 위조될 수 있었겠는가10 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가 끝나자 마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그 책들이 바로 성경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악한 자들이 서로 모의나 한 듯이 파렴치하게 유대인들을 모욕했지만,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종교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들은 모세가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全)역사의 동의로 그 거룩한 유구성이 확증된 이 책들을 가리켜 날조라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개 같은 몰염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추악한 비방을 논박하는 데 이 이상 더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맹렬히 타고 있는 불길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이 말씀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지조를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보물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게 하셨으며, 또한 총독들과 군인들의 온갖 맹렬한 조사를 좌절시키기도 하셨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던 그 거룩한 기념비가 즉시 되돌아와서 이전의 위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되고, 더욱이 그 위엄이 높아지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적이며 주목할 만한 성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후 곧 이어서 헬라어 성경이 나왔으며 이것은 전세계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11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 내셨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손상되지 않고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당시 히브리어는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를 돌보지 아니하셨더라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자기네 모국어를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예언서들을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고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해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마 22 : 37-40)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 곧 어거스틴이 기독교회의 사서(司書)들이라고12 적절히 칭한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11)

11.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  로 확고부동한가! 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비천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교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성을13 몹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제 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간단하게 요약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들의 기록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치듯 강하게 꾸짖는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 대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욕망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트집쟁이들을 대중(大衆) 앞에 나오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적어도 그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줄 무수한 말씀들, 아니 그들의 조롱을 억제하도록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줄 무수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작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재하는 하늘의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14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교리를 이 세상 이상의 것으로 높이기에 충분하다.
마태는 이전에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배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하나도 이 세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원수였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았던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지난날 그가 반대하던 교리를 변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 개들이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임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자. 또한 심지어 그들이 역사를 불신하도록 놓아두자. 그래도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이 외에도 교회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또 다른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전세계와 함께 성경을 억압, 전복하며, 혹은 인간의 기억에서 이를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을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고 하면 사방으로부터의 그 강력한 공격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만사에서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러한 일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서로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에 적지 않은 중요성이 이에 더하여진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등불로 삼아 빛을 발하게 하신 사람들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교리를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담보를 치르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를 확고부동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지나친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 밖에도 소수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게 변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의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을 확증하려는 인간적인 증거는 그 주요하고 우선적인 증거에 대하여 부차적인 보호자의 역할만 한다면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15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호소

더우기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어떤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출현하여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그 확신이야말로 참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음을 그들은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예언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 59 : 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어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성령에 의해서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다녀 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후 12 : 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는 것에 착념(着念)하라고 권고하였다(딤전 4 :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에 대한 찬사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l7)고 말하였다.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것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또한, 그들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답변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 : 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이미 받은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앉혀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과 뜻을 같이할 때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 : 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갈 1 : 6-9).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 : 14)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파멸에 이르는 이 가련한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 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된다는 말과도 같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노예 상태에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檢討)를 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립하고자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혹은 타락시키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2 그러나 이 일 자체에서 그들은 성경을 무시한 데 대한 형벌을 치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 : 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들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 : 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새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3 그것은 "영혼을 소생케 하고 우둔한 자도 지혜롭게 하는"(시 19 : 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 : 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 : 8). 의심의 여지없이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4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즉시 말씀을 폐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展示)를 위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 : 27,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 : 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思索)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의 빛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암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 거만한 광신자들은5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버리며, 또한 그 말씀에 결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아무 것이나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도 탁월한 조명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와는 전혀 다른 절제(節制)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도구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였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그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1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진실하신 하나님만을 정립하신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주의 구조2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서 더욱 생생하고 더욱 상세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경 가운데서 보여 주신 것과 앞에서 본 대로 자기 사역에서 자신을 묘사하신 것이 동일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만일 누가 이 문제를 보다 충분히 다루고자 한다면 일은 실로 방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목록(目錄) 정도를 마련해 주어 그것으로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들의 탐구가 확고한 목적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신 그 특수한 언약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겠다(창 17 : 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수였던 자들을 자녀의 반열에 아무런 공로 없이 받아들이셨을 때 벌써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주 창조에 관한 지식에 머물고 있을 뿐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신약성경으로부터 몇몇 구절들을 인용하여3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최초의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그 섭리를 입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되겠지만,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이 자기에게 부과된 한계를 뛰어 넘지 않고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유의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으로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자비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그의 의지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반복적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분임을 보여 주는 실례들도 있다. 곧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 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장이심을 나타내시기도 하는 것이다.

 

2. 성경에 따른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실로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특성을 더 명백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4 모세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오라 여호라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子輿孫)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 : 6-7). 여기서 우리는 두 번 반복된 그 위대하신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自存性)이5 선언된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이 언급되었는데, 이들 완전성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6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헛되고 막연한 과장된 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서 열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곧 그것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그와 같은 명칭들을 사용하였다. 현재로서는 성경에서 여러 실례들을 찾지 않고도 시편 한 편만으로(시 145편) 충분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의 총체가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시 145 : 5). 더욱이 피조물에게서 볼 수 없는 것들은 여기에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이라고 하는 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셨는데, 비록 그 기록이 아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위와 동일한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 : 24 참조, 고전 1 : 31). 특히 이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인애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 혹은 심판(Judg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하게 저들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義, Justice)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충분히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권세, 거룩하심과 선하심, 어느 하나도 빠뜨려진 것이 없다. 사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에 관한 필수 불가결의 지식이 하나님의 확고 불변의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공평과 정직으로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선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그의 인애가 도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하면(시 25 : 8-10)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자들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교리를 요약하고자 한다. 실로, 첫째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독자는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일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유일신 하나님의 존칭은 어디서나 알려졌으며 또한 존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본래의 진정한 감정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알아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왕국(God's Monarchy)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하나님의 유일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7 터툴리안(Tertullian) 또한 그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하였다.8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에 의해 한결같이 거짓된 허구에 끌려들었거나 또는 빠져 들어감으로써 그 지각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하던 것은 다만 그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었다.9 왜냐하면, 그들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까지도 어떤 종류의 신들이 그들 중에 임재하기를 열망하고 기도시에 불확실한 신들에게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특성을 상상함에 있어서 쥬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비너스(Venus), 미네르바(Minerva) 및 그 외의 여러 신들에 대한 상상은 비록 교양 없는 민중들의 그것처럼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들 역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도피처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부패케 한 그 변절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10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명하였다(합 2 : 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