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고, 그 곳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외적인 수단 또는 보조장치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體)가 되는 진정한 교회1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체가 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1. 교회의 필요성

먼저 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향상시키려면 무지하고 게으르고 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을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엡 4 : 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돈독 하는데 매우 유익한 보조 수단임을 느낀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적절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 정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2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일이 교황 제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그 부패한 상태를 경건한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선 교회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막 10 : 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3 율법 하에서 이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의 증거와 같다(갈 4 : 26).

 

2. 교회와 신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조에서 우리가 "공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보이는 교회뿐만이(현재 우리가 본 제목 하에서 논하는)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죽은 사람들까지를 의미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을 다른 말로 구별할 수 없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전치사 in("안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맡긴다"라는 뜻을 첨가하는 전치사)을 넣는 사람이 많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 고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증거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회사에 기록된 니케아 신조도 이 전치사를 붙였다.4 그러나 교부들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고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신조 해설(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을 쓴 사람도(그가 누구였든 간에) 그렇게 말했다.5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전치사를 붙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며 상당한 이유를 첨가하여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믿고 의지한다" 또는 "몸의 부활을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을 원하지는 않지만은 바른 용어를 택하고 싶다. 공연히 애매 모호한 말을 쓰기보다는 보다 적절한 표현법을 원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마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고 하나님의 원수들도 그것에 못지 않은 잔인한 분노로 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킬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아무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못할 것이고 오히려 어느 정도 유익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그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 : 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엡 1 : 13). 그들은 하나님의 훈장을 달고 있어서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완전히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분명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앞으로 다가 올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고전 1 : 13 참조)-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엡 1 : 22-23 참조)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롬 12 : 5, 고전 10 : 17, 12 : 12,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엡 4 : 16 참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 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엡 5 : 30).
우리 주위에 있는 우울하고 황폐한 광경은 교회의 남은 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교회를 숨겨두신다는6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신다(왕상 19 : 18).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조의 이 항목은 또한 어느 정도 외면적인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대개 이 구절을 빼놓았지만7 그것은 옳지 않은데, 그 구절은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사람의 사유재산이 허락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산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행 4 : 32) 신조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 : 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라는 것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애로 묶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받는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일에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근거는 자기가 교회의 지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동요되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똑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없다. 둘째, 교회는 영원 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욜 2 : 32, 옵 1 : 17),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 : 5).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란 말8 자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신자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우리의 소망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미 말한 바와 같이)9 그런 교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눈으로 분명히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교회를 여전히 존중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10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 : 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와(사 37 : 32) 요엘이(욜 2 : 32) 말한 것과 같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겔 13 : 9). 그와는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향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한다(사 56 : 5, 시 87 : 6 참조). 그러므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 : 4-5)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의 양떼에 제한시킨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

5. 교회를 통한 교육과 그 가치 및 의무

이제 우리는 이 논제에 관한 문제점들을 제시하도록 하자. 바울의 서신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썼다(엡 4 : 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 : 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양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굶주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만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과 같다(롬 10 : 17).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데(롬 1 : 16), (역시 바울이 증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복음 전파에 의해서 나타내신다(ibid).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옛날에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 성전을 하나님이 "쉴 곳"(시 132 : 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는 곳"과(사 57 : 15)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라고 한다(시 80 : 1).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하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존경과 사랑과 경의와 위엄을 얻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시를 받는 죽을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성전과 성소의 가치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가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질그릇인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고후 4 : 7) 우리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며 또 이 질서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술이나 기타 미신에 빠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신 18 : 10-11, 레 19 : 31) 그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에게는 항상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신 18 : 15 참조). 옛날에 백성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의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인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사장들을 해석자로 삼아 사람들이 율법의 참 뜻을 그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말 2 : 7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신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스스로 우리를 향하여 우레 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참으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압도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와 같은 친근한 교수 방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비천한 사람들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인해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기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11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를 기꺼이 그리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면적인 수단에 매이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매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걸린다.
자만심이나 증오심, 경쟁심으로 인하여 단독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충분한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를 무시하며 설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연합의 거룩한 관계를 끊기에 전력을 다하므로 이 신성하지 못한 분리에 대한 당연한 벌을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극악한 오류와 추악한 망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이에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풍성해지려면 우리는 이 신앙 생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높이 평가하셨다. 광신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귀를 막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예언자와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무리와 어려운 투쟁을 했다. 이 자들은 완고해서 사람의 말과 전도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멍에를 메지 못한다. 이것은 전도를 통해서 우리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시 105 : 4), 이런 명령이 율법에서 자주 반복된 것은(시 27 : 8, 100 : 2, 105 : 4, 대상 16 : 11, 대하 7 : 14) 옛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췬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후 4 : 6).
더우기 가증한 것은 배교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교회들을 분열시키는데 온힘을 기울이며, 결과적으로는 양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서 이리들의 입에 던진다.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울의 태도를 지켜야한다.
즉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성장하며 성도들은 한 결속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배우고 증진함으로써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질서를 지킨다는 것이다(엡 4 : 12 참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옛날 율법 아래에서 모든 신자가 성소 앞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은 목적은 특히 여기에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곳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부른다(출 20 : 24 참조). 분명히 그는 경건에 대한 교훈이 없는 곳은 무익하다고 가르친다. 확실히 다윗도 그와 같은 이유로 원수들의 포학과 잔인성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한다(시 84 : 2-3). 이런 불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즐거움만 남아 있으면 성전에 가지 못하는 것쯤은 매우 하찮은 일이며 즐거움에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속을 태우며, 이 한 가지 곤란과 불안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탄식한다. 분명히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공중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향상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시며 영적으로 알리려고 하신 것을 깨달아야한다. 따라서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시 42 : 2 참조), 미신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도 한다(시 132 : 7, 99 : 5, 대상 28 : 2).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머리를 앙모할 때 거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일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엡 4 : 13 참조). 이 원칙을 떠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신전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모독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저속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과 같은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 스데반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그들을 책망했다(행 7 : 48, 사 66 : 1-2).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이 자신에게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별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경솔하게 일을 시작한다면 기이한 조각품이 이 잘못된 출발에 달라붙어 한없는 해독을 퍼뜨리게 된다.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륵세스) 왕이 현자들의 권면에 따라 경솔하게 희랍에 있는 모든 신전을 불사르거나 파괴한 것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신들이 벽과 지붕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며, 그러면서도 우리와 자리를 바꾸거나 우리를 땅에 속한 수단에 국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실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수단으로 무리를 마치 병거에 싣듯이 해서 그의 하늘 영광에 올리신다. 곧 무한하여 모든 것을 충만케 하며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 영광에 올리시는 것이다.

 

6. 목회의 의미와 한도

우리 시대에 들어서 목회의 효력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의 위엄을 대단히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죽을 인간들에게 옮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목사나 교사들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통찰하여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시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13 우리는 이 논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양쪽의 쟁점들은 두 가지 성경 구절들을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⑴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주축자로서 전도에 성령을 결합시키시며 전도의 유익을 약속하신다. ⑵ 또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외면적인 보조수단을 구별하시며 신앙의 출발점과 그 모든 과정을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신다.
1. 말라기에 의하면 제 2 엘리야의 임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밝혀주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하는 것이었다(눅 1 : 17, 말 4 : 5-6).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수고한 열매를 얻도록 그들을 보내신다고 언급하신다(요 15 : 16). 베드로는 이 열매를 간단히 정의해서,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라고 한다(벧전 1 : 23).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으로써" 고린도 신자들을 "낳았으며"(고전 4 : 15) 그가 사도됨을 그들이 "인친다"고 자랑한다(고전 9 : 2). 그뿐 아니라, 자기는 의문의 일꾼이 아니며 말로 사람들의 귀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자기의 가르침이 무익하지 않게 하노라고 한다(고후 3 : 6). 이 같은 뜻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전도함은 지혜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 2 : 4). 또 갈라디아 사람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갈 3 : 2).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여러 구절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뿐만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노라고 한다(고전 3 : 9이하).
2. 이 모든 말을 하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티끌만큼도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 점을 그는 다른데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골 1 : 29)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살전 3 : 5). 또 이처럼 덧붙인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 : 8).
그뿐 아니라 다른 구절들을 보게 되면 그가 사역자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7).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 10)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경고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 결과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보이는 교회 :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표식. 7-9)

7.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앞에서 논한 것으로 이미 명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성직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잠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기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언제나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14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나중 말한 것,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며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8. 우리의 판단의 한계

따라서 주께서는 분명한 표식와 증거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셨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 : 19).15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또,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l6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마 24 : 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그 대신 사랑의 판단으로 대치하셨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17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분명한 표식에 의해서 그 지식을 뚜렷하게 하셨다.

 

9. 교회의 표식과 우리가 이를 판단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교회의 얼굴이 나타나며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엡 2 : 20 참조).18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 20)고 하신 주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요점을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보편적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은 큰 무리다. 그 보편적 교회는 나누어져 여러 곳에 퍼져있지만 거룩한 교리의 한 진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같은 종교 생활의 유대로 연합되었다. 이와 같이 보편적 교회 아래 개교회가 포함되며, 그 개교회들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도시와 촌락에 설립되어 각각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각 개인이 신앙 고백에 의해서 이런 개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때, 비록 그들이 보편적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재판에 의해서 출교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보편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인과 개교회에 관한 판단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경건한 무리에 참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안에 그들을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교회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대접하고 신자로 인정해야 할 경우가 있다. 우리는 표결로 그들을 교회의 회원이라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그들이 차지한 자리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서 빼앗기기까지는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회원 전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한 단체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공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에는 결실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귀들이 분열시키려고 애써 온 보편적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동시에 우리는 각 지방의 필요에 따라 설립된 합법적 회중에게서 그 권위를 빼앗지도 않는다.

 

(이런 표식을 지니고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버려서는 안 된다 : 분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식과 권위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지키는 것을 우리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결정했다.19 이 일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반드시 결실이 있으며 또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즉시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말씀이 거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 어쨌든, 복음 선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례를 경시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선 교회의 형태가 보이며, 그것은 속임수도 아니요 모호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멸시하거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 그 지도를 반대하거나 그 징계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그 교리를 버리고 그 단결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심히 중요시하시므로, 교회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 주께서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시므로 그것이 침범을 당할 때에는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 것으로 믿으신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 3 : 15)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봉사와 수고에 의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스스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심을 보이고자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자기의 신부와(엡 5 : 27) "그의 몸이니‥‥‥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엡 1 : 23)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평범한 찬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러한 악한 분리를 회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복시키려고 전력을 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맞아 분쇄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우리가 모독적인 불충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을(엡 5 : 23-32 참조) 피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상상할 수도 없다.

 

11. 표식이 가지는 신성한 효험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식들을 깊이 명심해서 주의 뜻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 두 표식 전부를 혹은 그중 하나를 제거하고 말살하려고 사탄은 최대의 음모를 꾸민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하고 참된 특색을 없애기 위해서 이 표식들을 없애버리며 파괴하려고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이 표식들을 대대적으로 멸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그 간계에 의해서 어떤 시대에는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선포를 없애 버렸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악의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성직을(엡 4 : 12) 타파하려고 애쓴다. 주께서 주의 교회의 특색을 충분히 나타낸다고 생각하신 표식들이 보일 때 그런 집단에서 탈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아니 치명적인 유혹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면으로 깊이 유의해야 한다.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이 표준을 시금석으로20 적용해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집단이 교회에 바칠 존경을 확신있게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례가 없으면서 교회를 자칭한다면, 우리는 반대 방면에 대해 경솔과 교만을 피해야 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세밀한 경계심으로 이런 거짓에 대처해야 한다.

 

12.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면 이런 표식이 있는 단체를 교회로 인정해도 좋다는 충분한 보장이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이 표식을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 어떤 과오가 끼어들 수도 있지만 이런 사태가 우리를 교회와의 교통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는 진정한 교리의 모든 조항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모든 사람이 종교의 진정한 원칙으로 확신하고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 등이다. 교회들 사이에는 다른 신조들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신앙에 의한 연합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한 교회는 (경쟁심으로 날뛰거나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육체를 떠난 영혼은 곧 하늘로 날아간다고 주장하고 다른 교회는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주를 향하여 사는 것으로 확신한다고 할 때, 어느 교회가 사도가 말한 이 한 점에서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 : 15).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21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충분히 알려 주지 않는가? 맨 먼저, 우리는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무지로 인해서 마음이 다소 어두워졌으므로, 우리는 어떤 교회도 남겨두지 않거나 아니면 신앙 생활의 본질에 손상이 없고 구원도 상실하지 않을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용서하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극히 적은 오류라도 그것을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며, 아첨과 묵계로 조장하려는 생각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소한 의견 충돌 때문에 경솔하게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건 생활을 건전하게 유지하며 성례전의 집행을 주께서 제정하신 대로 지키는 교리를 안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곳은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이 이 점에 해당된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 : 30). 이것을 보면 각 교인은 그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회중의 덕을 세울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22 다만 책임을 이행할 때에 예절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교회의 교통을 버려도 안 되고 교회 안에 머무를 때에 교회의 평화와 합법적 권장을 깨뜨려도 안 된다.

 

13. 교회 내의 물의가 생긴다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 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23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Cathari)파가24 그러했고 도나투스(Donatists)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의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긴 원인을 우리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게으름을 벌하실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인자한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열중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 5 : 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 13 : 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 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 둔다(마 13 : 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 마당과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혀 있게 된다(마 3 : 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짐이 되리라고-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인 것과 교리적인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 1 : 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 1 : 11, 3 : 3, 5 : 1, 6 : 7, 9 : 1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 5 : 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 15 : 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람을 돕지 못했다(고전 13 : 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 1 : 2).

 

15. 사악한 자들과의 교제

그들과 또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파렴치한 사람을 교회에서 물리치지 않았다고 해서 엄중하게 책망했으며(고전 5 : 2), 다음에 일반적 원칙으로서 파렴치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단정한다고(고전 5 : 11) 항의한다. 여기서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데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느냐"고 외친다.
만일 개와 돼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큰 수치란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만일 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팔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수치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을 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합당한 자와 합당치 못한 자들을 무분별하게 저 거룩한 잔치 자리에 앉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라고 해서 경계심이 항상 강렬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보다 관대하거나 또는 엄격하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도 성도의 무리에서 반드시 제거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사태는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서 날카롭게 책망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과오임을 인정하며 변명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 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즉시 떠날 결심을 할 권리는 없다. 악인들과 친밀히 지내지 않고 일부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의 의무인 것을 나는 물론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과 친밀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교회와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악인들과 함께 주의 떡을 나누는 것을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바울보다 훨씬 엄격하다. 바울은 성찬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고할 때, 각각 서로 검토하라든지 또는 전교회를 검토하라고 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한다(고전 11 : 28). 만일 합당치 못한 사람과 함께 성찬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면 회중 가운데 우리를 더럽힐 불결한 사람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바울은 틀림없이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각각 자기 자신만을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 끼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이런 뜻과 부합한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 : 27-29).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라고 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누가 용납되고 누가 배제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위는 개인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 이 판단은 교회 전체에 속한 것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는 행사할 수 없다. 이 점은 후에 자세히 말하겠다. 그러므로 합당치 못한 어떤 개인의 성찬 참가를 자기가 금지할 수 없고 또 금지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한 생각일 것이다.

 

16. 완벽에 대한 그릇된 주장은 왜곡된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의에 대한 잘못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 과민은25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엡 4 : 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 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마 13 : 40, 3 : 12, 눅 3 : 17).26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 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거룩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완전치 못한 거룩으로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하지 않은 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교회는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 : 25-27). 그러나 주께서 주름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27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 : 1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사 35 : 8, 52 : 1 참조)라고 예언하였다. 모든 교회 회원이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과 완전한 순결을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순결을 그들에게 인정하신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 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은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롬 9 : 23이하)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이 일은 확실한 약속으로 다짐하셨다. 예컨데,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시 89 : 3-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 : 13-14) 그리고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렘31 : 35-36) 등이 그것이다.

 

18. 예언자들의 실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모든 예언자들이 여기에 대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하박국이 기술한 예루살렘 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백성과 관리와 제사장들이 모두 심하게 부패하자 이사야는 주저치 않고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다(사 1 : 10). 종교는 멸시를 당하며 정말로 부패하기도 했다. 도덕적으로는 절도, 강도, 배신, 살륙, 기타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을지라도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새로 세우지도 않았고 새로운 제단을 쌓고 따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말씀을 두시고 그들 사이에 의식을 제정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셨다고 예언자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인들이 모인 한가운데서 깨끗한 두 손을 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이런 의식들에 의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런 곳에 끌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분파를 만들지 않은 것은 오직 연합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크고 많은 비행을 저질렀어도 거룩한 예언자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을 분리하는 것을 불가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일부 사람들의 도덕 생활이 우리의 표준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기독교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이유만으로 우리가 감히 교회의 교통에서 즉시 탈퇴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준 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는 세상 형편이 어떠했는가? 그때에도 바리새인이 말할 수 없이 불경건했고 일반 사람들이 방종한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반 백성과 함께 같은 의식에 참여하며 같은 성전에 모여 공중 예배를 실천했다. 깨끗한 양심으로 같은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고 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보고도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하라. 키프리아누스는 적절한 말을 했다.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그릇들이 있는 것 같더라도 우리편에서 교회를 떠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며 주께는 철장도 맡겨져 있다(시 2 : 9, 계 2 : 27). 아무도 하나님 아들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며, 쭉정이를 키질하고 짚을 타작하거나(마 3 : 12, 눅 3 : 17 참조) 인간적 판단으로 모든 가라지를 갈라내면 충분하다고(마 13 : 38-41 참조) 하지 말라. 사악하고 미친 생각은 이런 완고하고 불경건하고 무례한 행동을 취하므로 참으로 오만하다."28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확립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교회의 보이는 교통에서 의식적으로 탈퇴하는 사람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둘째, 소수의 죄악이나 다수의 죄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의식에서 우리가 신앙을 적합한 방법으로 고백하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목사나 또는 평신도인 다른 개인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경건한 양심이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성례를 불결한 사람들이 집례한다 해도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고 유익한 것이다.

 

20. 죄의 용서받음과 교회

그들의 심술궂음과 교만은 한도를 넘어서,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을 경우에는29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고결한 교사들이 신자들에게 향상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며 일평생 죄짐을 지고 신음하면서 용서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가르칠 때에, 그들은 그런 교사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의해 완전성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항의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완전하게 되라고 권고할 때, 우리의 노력이 게으르거나 열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노력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상에서 경주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마귀적인 공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교회를 말한 다음에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예언서를 보면, 교회 안에 있는 백성과 권속만이 죄의 용서를 얻는다(사 33 : 14-24). 그러므로 우선 하늘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그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의 불의를 도말되게 해야 한다. 내가 하늘 예루살렘을 우선 건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공동체에서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편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 : 18-19)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자비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주께서는 진노로 흩으신 백성을 다시 모으셨다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신다(렘 33 : 8) 따라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징에 의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처음으로 가입을 허락 받으며, 세례는 우리가 우선 하나님의 인애로 우리의 누추함을 씻어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21. 교회의 일원들에게는 용서가 계속된다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단번에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교회 안에서 보존하며 보호하신다. 아무 소용도 없을 용서라면 그런 용서를 제공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 경건한 사람들은 주의 자비를 한 번만 주신다
그것은 무익하고 허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자신들의 경험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여러 가지 약점이 일평생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특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분명히 공연한 일이 아니다. 화해의 소식을 매일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의 흔적을 가지고 다니므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일순간이라도 교회 안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그 자녀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라는 몸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관용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한 성화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고 또 매일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

 

22. 열쇠의 힘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교회의 열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그 권한을 주신 것은 (마 16 : 19, 18 : 18, 요 20 : 23) 믿지 않다가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그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셨다기 보다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이 직책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화해의 사명이 맡겨졌다고 하며 그 직책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반복해서 권면하도록 한 것은(고후 5 : 18,20) 이 점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통에서 우리의 죄는 교역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용서된다. 즉 이 직책을 받은 장로들이나 감독들이 복음의 약속으로 신자들의 양팀에 힘을 주어 용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이 일을 실천한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약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공중 앞에서 전도할 때나 각 가정에서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며 각 사람에게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고했노라고 말한다(행 20 : 20-21).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남달리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셋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열쇠의 권한은 주로 여기에서 두드러지며 주께서는 이 권한을 신자들의 단체에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 주께서 용서를 두신 곳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공적 화해는 권징과 관계된 것이므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31

 

(신도들의 공동사회 내에서 용서받는 사례를 설명해 주는 서건들. 23-29)

23. 모든 신도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광신자들은 교회에서 구원의 유일한 닻을 빼앗으려 하므로 우리는 이 유해한 견해에 대항하도록 양심의 무장을 더욱 튼튼해야 한다. 과거에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ists)파가32 이런 사상으로 교회를 흔들었으며, 지금은(노바티아누스파와 별로 다름이 없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이같은 광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례로 거듭나서 아무 육적인 오점도 없는 순결하고 천사 같은 생활을 하는 것같이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은 은혜를 받은 후에 타락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소망이 없다고 하며 처음 중생했을 때 받은 용서 이외의 다른 용서를 용납하지 않는다.33
비록 이 오류를 성경보다 명백하게 반박한 것은 없지만 (노바티아누스를 따랐던 자들이 많았던 것과 같이) 이 자들로 하여금 이 오류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기와 남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광분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알려 주려고 한다.
첫째, 주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은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마 6 : 12) 반복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의심 없이 고백한다. 또 주께서는 자신이 주실 것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허사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확언하시지만 이 죄의 사면에는 특별한 약속으로 인을 치셨다.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주께서는 죄를 고백하라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며 또한 일평생 계속 고백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거나 또는 죄를 범하면 은혜를 전연 닫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주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시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마 18 : 21-22)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를 그의 자비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한두 번만 용서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놀라 주를 부를 때마다 용서하신다.

 

24.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율법

교회의 초창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족장들이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창 37 : 18)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고 선택을 받아 언약에 참여했으며 근면한 조상들에게서 의와 정직에 대한 교훈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범하려고 한 죄는 가장 타락한 도적들조차 꺼려할 것이었다. 나중에는 유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져서 동생을 팔았지만(창 37 : 28)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잔악한 행위였다. 시온과 레위는 그들의 누이동생의 일로 세겜 사람들에게 불법전인 복수를 하여(창 34 : 25) 자기 아버지에게 정죄를 받았다. 르우벤은 추악한 정욕으로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창 35 : 22).
유다는 음행을 즐기고자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며느리와 동침하였다(창 38 :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된 백성 사이에서 추방되기는 커녕 족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윗은 어떠했는가? 공의를 실시하는 최고 통치자로 있었을 때에 그는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의 맹목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다(삼하 11 : 4,15). 그는 이미 중생한 사람이었고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이런 죄를 범했고 또 용서를 받았다(삼하 12 : 13). (개인들의 예는 이만 하고) 율법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약속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죄를 용서하실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배교한 이 백성이 주께로 돌아설 때 모세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난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신 30 : 3-4).

 

25.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도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예언서

그러나 나는 끝없이 예를 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수한 죄로 뒤덮인 백성에 대한 이런 자비의 약속은 예언서에도 가득하다. 반역보다 중한 죄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분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죄를 이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 3 : 1).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 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렘3 : 12).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돌이켜 사는 것을 바라노라고 언급하시는 이에게 다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겔 18 : 23,32, 33 : 11).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그는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빌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를 원했다. 그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왕상 8 : 46-50)라고 기원했다. 그리고 주께서 죄를 위한 제물을 매일 드리도록 율법에 제정하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민 28 : 3이하). 주의 백성이 항상 죄의 질병으로 괴로워할 것을 예상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치료 방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26.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자들은 이 은혜를 빼앗겼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은혜를 계시하셨는데도 주께 죄를 지은 신자들이 용서를 빌며 자비를 받을 길이 막혀 버렸다는 말인가? 구약시대에는 성도들이 죄의 용서를 위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비가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났으며 주께서 풍부한 자비를 베푸셨고(딛 1 : 9, 3 : 4, 딤후 1 : 9)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가 실현되었다고(고후 5 : 10이하) 성경은 명백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는 끊어지거나 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위에 더욱 풍성하게 흘러내린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증거도 없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리란 말씀을 베드로는 들었으면서도(마 10 : 33, 막 8 : 38) 하룻밤 사이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면서 저주까지 했다(마 26 : 7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서를 받았다(눅22 : 32, 요21 : 15 이하).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회개하라는 권고의 한 방법으로 징벌을 받았다(살후 3 : 14-15, 3 : 6 참조).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까지도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권하여(행8 : 22), 절망 상태로 몰아넣지 않고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했다.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온 교회가 가장 가증스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을 때 바울이 그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온유하게 그들을 죄에서 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이탈은 사소한 죄가 아니었다(갈 1 : 6, 3 : 1, 4 : 9).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는데, 보다 가증스런 죄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주의 자비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사실 불결하고 음란하고 방종한 생활로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권고했다(고후 12 : 21). 진정한 솔로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엄숙하게 확증하신 여호와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언약의 말씀은 이것이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 : 30-33). 끝으로, 다름 아닌 사도신경의 순서에34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죄에 대한 은혜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다. 교회가 설립되면 죄의 용서도 첨가되기 때문이다.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좀더 사려가 깊은 일부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 말씀에 의해서 노바티아누스 사상이 논박되는 것을 보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허물 즉 사람이 알면서도 기꺼이 빠진 죄만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35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은 과오 이외에는 어떤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고의적인 죄를 대속할 제물과(레 6 : 1이하) 모르고 한 행위를 대속할 제물을(레 4장) 각각 따로 드리라고 주께서는 율법에서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고의적인 죄에 대한 대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심히 악한 생각이다. 주께서는 육적인 제물을 인으로 삼아 성도들의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확인하셨으므로, 이 용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명백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분명히 율법에 통달했던 다윗이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백성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매일 처벌한 다윗이 이런 것이 큰 죄라는 것을 몰랐던가?(삼하 11장) 족장들이 동생을 죽이는 것을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겠는가?(창 37 : 18이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정욕과 불결과 음행과 미움과 분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 배웠던가?(고전 5장) 신중한 경고를 받은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을 몰랐던가?(마 26 : 7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가 그렇게 관대하게 나타나는 데에도, 박정한 우리가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에 대한 문제

고대 저술가들은 신자들이 매일 받은 용서는 가벼운 과실, 즉 육이 약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가벼운 과실에 대해서 뿐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엄숙한 회개는 더욱 크고 가증스런 죄에 대한 것이며, 세례와 같이 한 번 이상 반복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36 우리는 이 견해에 대해서, 그들은 첫번 회개 후에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또는 소망을 빼앗으려고 했다든지 또는 다른 과실들을 하나님 앞에서 적은 것같이 경시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들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고 비틀거리는 일이 많으며 때로는 공연한 맹세를 하고 가끔 화를 내며 심지어는 욕설을 터뜨리고 이 밖에도 주께서 심히 싫어하시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일들을 "경미한 과실"이라고 부른 것은 큰 추태를 부려서 교회에 알려지는 드러난 범죄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적으로 시정해야 할 만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죄가 주 앞에서 용서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엄격하게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명을 당할 만한 죄를 경솔히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지도 법칙인 주의 말씀은 더욱 온화한 태도를 명령하신다. 권징 시행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권징의 중심 대상인 사람이 슬픔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후 2 : 7) 우리는 이 점을 위에서37 매우 자세히 논했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와의 비교

(참된 교리와 예배를 떠나면 카톨릭이 주장하는 참된 교회란 무효가 되고 만다. 1-6)

1. 근본적인 구별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우리는 특히 존중해야 하며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는 영원한 표식으로 만들 정도로 이 일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1 즉 이 일이 건전하고 순결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는 도덕적 과실이나 병폐가 있더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교회 내에 사소한 과실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합법성을 부정할 정도로 교회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용서해야 될 과실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중요한 교리를2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과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과오는 용서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요새에 허위가 침입해서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과 성례의 효험이 파괴될 때에, 분명히 교회는 죽게 된다.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말에도(엡 2 : 22)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데, 이 교훈을 없애버린 후에 교회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의 이 핵심뿐이므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 : 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로마 카톨릭교회와 그 주장

교황 제도하의 이러한 상태, 즉 거기 얼마나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3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사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며, 이 조직이 순수한 빛을 꺼 버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미신으로 더렵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고 치명적인 비행에 참여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어질 염려가 없다. 교회와의 교통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기타 악행에 우리를 빠뜨리는데 이바지 해야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극찬하여 세상에는 그들 외에 다른 교회는 없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제가 결말이 난 것처럼, 자기들의 교회의 자랑거리인 복종을 감히 버리는 사람은 분리주의자이며 그 교리에 감히 반대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자기들에게 진정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그들은 고대의 기록을 근거로 과거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있었다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건전한 교회들을 창설하고 피를 흘려 그 교리와 교회의 건물을 설립한 저 거룩한 분들을 자기들의 뿌리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는 영적 은사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순교자들의 피로 성별되며 주교들의 연속적인 계승에 의해서 보존되고,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이 이 계승을 중히 여겼다고 회고한다.4
그러나 나와 함께 이러 주장들을 잠깐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천박한 것인가를 곧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사실, 그들도 나에게서 배워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뿐이므로, 나는 몇 가지 점만 이야기함으로써 선한 사람들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선, 나는 그들이 왜 아프리카와 이집트와 아시아 전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고 묻겠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를 유지해 왔다고 자랑하던 주교들의 계승이 이 여러 지방에서는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교들의 계승이 끊어진 일이 없고 애당초부터 줄곧 주교가 존재한 자기들의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 앞에 희랍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나는 다시, 그들은 왜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소멸됐다고 하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교회를 유일하게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주교들이 희랍에서는 계속해서 계승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희랍 사람들을 분리파라고 하는데,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하는가? 사도 교구에서 떨어졌으므로 특권을 잃었다고 대답한다.5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더욱 특권을 잃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따라서 조상들의 손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건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삼지 않는다면 계승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표시 난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옛날 유대인들이 맹목, 불경건, 우상 숭배 등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하던 주장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와 같이,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실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겉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 : 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파되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의 그룹들 사이에 머무르며(겔 10 : 4) 이곳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가 되리라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지만, 제사장들이 사악한 미신으로 예배를 타락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는 그의 영광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성소에서 거룩한 성격을 빼앗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서 성별된 듯 하던 성전까지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세속적인 것이 되었으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과 장소에 매이며 형식적인 행사에 끌리고 교회라는 이름과 외형만 있는 곳에(롬 9 : 6) 항상 계셔야 한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
또 바울이 로마서 9장부터 12장6 사이에서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듯이 보이면서도 복음의 교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복음을 핍박한다는 사실이 연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리를 설명한 다음에 이 문제를 처리한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외형에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해서, 자유인인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기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한다(갈 4 : 22이하). 바울은 더 나아가 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전해진 것같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그래서 종으로 나서 자랐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회의 자녀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서자이면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교만한 태도로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며(창 21 : 10), 이 신성한 명령을 믿고 그들의 무미 건조한 자랑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의 외형적인 고백을 자랑한다면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었고, 그들이 연대가 오래 되었다고 자랑한다면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바울은 교리적으로 순수하고 합법적인 근원에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대답한다(롬 9 : 6-9).
이 이론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자신의 사자 또는 통역자로 삼는다고 언약하셨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자손인 사악한 제사장들에게 매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참으로, 제사장 계급의 존엄성을 특히 존중해야 된다고 하면서 항상 예언자들에게 반항하는 제사장들의 거짓된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려 대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기꺼이 인정하시면서, 자신은 언약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들 편에서 응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계승자들이 연속적으로 또 진심으로 선인들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 계승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들의 근본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모든 영예를 박탈당한다(말 2 : 1-9). 가야바의 선조에 경건한 제사장이 많았고 (참으로 아론으로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중단되지 않고 제사장직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저 사악한 무리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세속적인 정치에서도,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나 카밀루스7 같은 사람들을 계승했다고 해서 칼리굴라, 네로, 헬리오가발루스의 무리가 행한 폭정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특히 교회 기관에서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계승 관계만을 중시한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주교들이 계속 계승되는 곳에서 일종의 상속권에 관한 것처럼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룩한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잘못이며, 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 일도 전혀 없다. 처음부터 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변동이 없었던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들은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충분한 방어책으로서 한 원칙을 채택했다. 즉 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만장 일치로 확고하게 보존되어 온 교리로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항하여 싸웠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우리가 공경하는 또 공경해야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을 더 속이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그들이 교회를 정의하려고 할 때, 속담에 있듯이 그들에게 물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8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자리에 추악한 창녀를 앉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창에 빠져 버린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속지 않기 위해서(다른 이들도 있으나) 어거스틴의 권면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는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산적한 추문에 가려지는 것처럼 희미해지고 때로는 평온한 때를 만나 평온 무사하며 혹은 고난과 시험의 파도에 휩쓸린다." 가장 강력한 기둥들이 믿음을 위해서 용감하게 추방을 감수하며 혹은 세계 각지에서 숨어 지낸 일이 많다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9

 

4.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일 큰 대적이면서도 교회의 이름으로10 지금 우리를 괴롭히며 무식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성전과 사제 계급과 그외의 외부 장식을 내놓지만, 단순한 사람들의 눈이나 현혹시킬 헛된 외화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이는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인치신 영원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 : 37)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요 10 : 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 : 27) 그러나 조금 전에 주께서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 : 4-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는 표식으로 교회를 교시하셨는데 왜 우리는 교회를 찿느라고 미친 사람같이 행동하는가? 표식이 보이는 곳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있으며, 표식이 없는 곳에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교훈이라고 바울은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킨다(엡 2 : 20). 참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탄의 권모술수의 차이점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 : 47). 요약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흘로 즉 그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상상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것을(렘 7 : 4 참조) 어느 누가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인가?

 

5. 종파 분립과 이단의 비난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잘못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 이따금씩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11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 있으므로, 이 후자는 전자의 출발점과 종점과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합을 우리에게 권고할 때 요구 조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때 우리의 의지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호간의 호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의 연합을 권하면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는(엡 4 : 5) 입장이라고 한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빌 2 : 1-5) 또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고 (롬 15 : 5) 첨부한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간의 일치가 없고 오직 악한 사람들의 갈라지는 파당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가 머리됨이 연합의 여건이다

키프리아누스도 바울을 따라, 교회 전체의 화합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감독으로 모시는 경우에만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결실이 많으므로 널리 퍼져 많은 교회가 된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은 많은 것과 같다. 나무의 가지는 많으나 그 굳센 줄기는 하나이며, 줄기는 땅 속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있다.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흐르고 많은 시내가 각각 자체의 풍부함에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다. 태양에서 오는 광선을 보라. 태앙 자체는 갈라지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꺾어 보라. 꺾인 가지에서는 움이 돋지 않는다. 시냇물의 근원을 막아 보라. 시내는 말라 버린다. 그와 같이 교회는 주의 빛을 풍성하게 받아 전 세계에 퍼뜨리며, 그 빛 하나 하나는 각지에 확산된다."12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가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항상 우리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이단설과 분파 행동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머리이신 분을 찾지 않고 하늘 교사의 교훈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회를 떠난 우리는 이단이라고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떠난 유일한 원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들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저주하는 말로 우리를 추방한 것을13 나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도를 분파주의자라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의 이름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다(요 16 : 2). 주께서 말씀하신 이 회당들은 당시에 합법적 교회로 인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쫓겨났고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일이란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 대해서 좌우간의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점을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는데, 이는 나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는 고대 이스라엘과 비교된다. 7-11)

7.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우상의 압제 하에 억눌려 있던 모든 교회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것은 예언자들이 기술한 고대 이스라엘 교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법들을 지킬 때에는 그들 중에 진정한 교회가 있었다. 즉 하나님과 은혜로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다. 율법에서 진리의 교리를 얻었으며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교리를 선포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 종교에 입문하며 그 밖의 성례를 실시함으로써 믿음을 강화시켰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영예로운 칭호들은 확실히 그들의 사회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 숭배와 미신에 빠져 그 특권의 일부를 잃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성례를 집행하는 일을 맡기신 백성에게서 누가 감히 교회라는 이름을 제거했는가? 또 주의 말씀을 공공연하게 짓밟고도 벌을 받지 않으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힘과 생명 자체가 되는 말씀 선포를 말살해 버리는 무리를 누가 감히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불렀는가?

 

8.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러면, 혹자는 유대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후에는 그들 사이에 교회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첫째, 타락에도 몇 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경배에서 타락했을 때 그것이 같은 정도의 타락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송아지를 만들며 불법적인 예배 장소를 정했을 때에 그의 종교를 완전히 부패시켰다(왕상 12 : 28이하). 유대 백성도 종교의 외형까지 위조하기 전에 악하고 미신적인 풍습에 오염되었다. 여로보암 때에 이미 여러 가지 타락한 의식을 일반적으로 가르쳤으며 채택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율법을 가르쳤으며 제사장이 있었고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들이 존속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쓸만한 교회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 때까지 사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 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혹은 아합과 같았으며 혹은(아합보다 조금 낫다는 것이) 여로보암을 본받았다. 그러나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였다. 유대에서는 가끔 변화가 있었다. 어떤 왕들은 거짓된 미신을 조작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타락시켰고 어떤 왕들은 쇠퇴한 종교를 재건했다. 드디어는 제사장들까지도 가증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성전을 더럽혔다.

 

9. 카톨릭 교회는 부패하였으며,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황주의자들은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에 못지 않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것을 부정해 보라. 그들의 과오도 될 수 있는 대로 변명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추잡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교리 방면에서도 더 순수한 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더욱 불순하다. 하나님께서, 또 보통의 판단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증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사태 자체까지도 나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그들의 교회와 교통하도록 강요하고 싶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와 성례와 의식에 참가해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모든 명예와 권세와 재판권을 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점에 대해서, 나는 상태가 완전히 부패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예언자들은 모두가 개인적으로 제물을 드리지도, 따로 기도회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들에게는 솔로몬의 성전에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신 12 : 13,11).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그 직분에 머무를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지만 성례를 집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고(출 29 : 9) 면직하신 일이 없으므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예언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즉 에언자들은 미신적인 예배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교황주의자들-에게는 어디에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거의 명백한 우상 숭배로 더렵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통의 중심 유대는 미사인데 이것을 우리는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혐오한다. 우리의 이 태도가 바른 것인지 또는 경솔한 것인지는 다른 곳에서14 알려질 것이다. 지금은 우리와 예언자간의 경우가 이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악인들의 의식에 참석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 이외의 것을 보거나 또는 거기 참석하라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모든 점에서 유사한 예를 원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다. 여로보암의 칙령에 따라 종전과 같이 할례를 행했으며 제물을 드렸고 거룩한 율법을 지켰으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금지된 가짜 예배 형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한 일을 모두 불가하다고 정죄하셨다(왕상 12 : 31). 벧엘에서 예배하거나 제사를 드린 예언자나 경건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누구든지 내게 보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 신성 모독으로 몸을 더럽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을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되 교회가 부패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타락했을 경우 그런 교회를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10. 우리가 부패한 교회를 멀리해야하는 이유

둘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장할 것이 더욱 많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그 판단만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그 경고에 순종하고 그 징계로 마음을 고치며 모든 일에 그 교통을 양심껏 보존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에 복종하게 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같거나 혹은 더 낫다면 예언자들이 당시의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한 것을 우리도 교황주의자에게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예언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모임이 신성 모독이고(사 1 : 14) 그들에게 찬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불법이란 것을 여러 번 공언했다. 만일 그들의 모임이 교회였다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유대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와 호세아와 그 밖의 종류의 사람들(당시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무할례자 보다도 더 나쁜 자들이라고 해서 미움을 받은 자들) 이 하나님의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집회가 교회였다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딤전 3 : 15) 거짓의 버팀목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막(Taberacle)이 아니라 우상을 두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음모에 불과한 그 모임들에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미신과 불경건한 교리에 오염된 현대 회중들을 교회 즉 그리스도인이 교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이 교회라면 열쇠의 권한이 그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쇠는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그들 중에서는 그 말씀이 파괴되었다. 또 만일 그들이 교회라면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 운운하신(마 16 : 19, 18 : 18, 요 20 : 23) 그리스도의 약속이 그들 사이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의 교통을 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약속이 헛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적어도 이 점에서-교회가 아니다. 끝으로,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을 가르치는 학교들과 각종 오류의 소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교회가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의 합법적인 회중과 불신자들의 집회를 구별하는 표식이 없어지거나 할 것이다.

 

11. 교황 제도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자취

옛날에는 교회의 일부 특전이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파멸을 면하게 하신 교회의 흔적이 교황주의에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나, 그것을 보존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약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들의 불경건과 싸우면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언약이 그들 중에 존속한 것은 확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주의 진실을 말소할 수 없었고, 비록 그들의 불결한 손이 할례를 더럽혔을지라도 그것을 여전히 여호와의 언약의 진정한 표징이며 거룩한 성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난 사람들을 주께서는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셨으며(겔 16 : 20-21), 이 사람들은 오직 특별한 복에 의해서 여호와께 속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신 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과 영국에서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들이 적 그리스도의 압제로 억압을 당할 때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로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건물이 헐릴 때에 기초와 폐허가 남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적 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 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혼란과 분열을 겪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타락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절대로 교황주의자에게 유일한 교회라는 칭호를 주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15 오히려 우리는 다만 신앙 고백의 표준인 성례뿐만 아니라 특히 교리에 있어서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진정하고 합법적인 교회 제도를 주장한다. 다니엘과(단 9 : 27) 바울은(살후 2 : 4) 하나님의 성전에 적 그리스도가 앉으리라고 예언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16 수령과 기수는 로마 교황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지배력이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압제 하에 있는 교회들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북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요컨대, 모든 일이 혼란에 빠져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보다도 바벨론의 모습이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그 교회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비록 비참하게 분산되어 있지만-기적적으로 보존하셨기 때문이며, 표식 특히 악마의 간계와 인간의 패악도 파괴할 수 없는 교회의 표식이 다소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하는 표식들이 없으므로 나는 그 교회들에게는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말한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 이 기능은 고귀하고 필요하다. 1-3)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서 쓰시는 교회의 교직 제도를 말해야 하겠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 : 11). 우리는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도구를 쓰는 것과 같다.
나는 먼저 설명한 것을1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어도 사업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수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방편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택하신다.
이런 방편으로 우선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 : 20 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그를 대표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우리를 그의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이(고전 3 : 16-17, 6 : 19, 고후 6 : 16)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신다.
사람들의 입들 통해서 마치 성소에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시기 때문이다.2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거나,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경건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렇게 위대한 위엄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끝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 : 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려는 의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로 합하여서 사랑을 보다 올바르게 양육하는 한 끈이 있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이 목사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제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한 입에서 공통된 교훈을 받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만으로 만족해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이렇게 인간이 교만하다) 서로가 남을 멸시하며 또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시고 이것이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힘있는 수단이라고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의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이 점을 숙지하면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 : 4-7)라고 기록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말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 8,10-16).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목회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목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울은 교회를 손상 없이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만드신 안전 대책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4 : 10). 이 일이 실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는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스스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성도들의 갱신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세워지며 (엡 4 : 12),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여(엡 4 : 15 참조) 서로 함께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서 예언 활동이 활발하고 사도들을 영접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질서와 이런 교회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하든지 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이 또 음식이 필요하지만,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더욱 더 필요하다.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풍요하다

위에서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직 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교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라고 증언하신다. 예언자에게 명령 하셔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외치게 하시며(사 52 : 7), 사도들을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다(마 5 : 13-14).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눅 10 : 15).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 문제를 마치 고의로 논의하듯이 했을 때 기록한 구절이 가장 확실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고후 4 : 6, 3 : 9).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의 뜻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직이 확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뿐만 아니라 실례로 공포하신다.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더욱 풍부하게 비추려고 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다(행 10 : 3-6). 바울을 불러 자신을 알게 하시며 교회에 접붙이고자 하셨을 때,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를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에게서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을 받게 하셨다(행 9 : 6). 하나님의 대변자인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지 않고 그렇게 할 사람을 부르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자들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람에게 맡겨 배우게 하시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바울을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만하게 만드시기로 이미 정하셨다(고후 12 : 2-4) 그러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로 그 유용성을 증명하신 성직을 멸시하거나 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할 것인가?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 : 11). 이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것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막 16 : 15) 명령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여기 저기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들을 세웠노라고 한다(롬 15 : 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전 3 : 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엡 4 : 11).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들 다음에 있으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활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의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었을 것이다(눅 10 : 1).
이렇게 해석한다면(이 해석은 바울의 말과 의견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직책은 교회 내의 항구직으로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한 당시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적어도 그들 대신에 전도자들을 일으키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4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직책이 바르게 조직된 교회 내에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다음이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5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5. 임시직과 항존직

우리는 이제 교회 조직에서 어떤 것이 임시직이며 어떤 것이 항존직으로 제정되었는가를 생각하겠다. 전도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두 쌍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특수 계시의 은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그 목적이 똑같다. 그래서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할 목적으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은 가장 높은 서열에 있었다(눅 6 : 13, 갈 1 : 1).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열두 제자에게(후에 바울이 첨가된 그들에게)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른 장소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이 명칭을 적용하고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던" 사람들이라고 했다(롬 16 : 7). 그러나 그가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고 싶을 때에는 처음 등급에만 이 말을 적용한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 용법이다(마 10 : 1). 그러나 목사들은 (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 같은 책임을 맡았다. 이제 그 책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듣기로 하자.

 

6. 사도들과 목사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6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 : 19).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눅 22 : 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에게 신성 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여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사도를 사칭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떤가? 바울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에 대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고전 4 : 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딛 1 : 9)고 말한다. 이 구절들과 흔하게 자주 나타나는 비슷한 구절들을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례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가르치는 방법은 공개적인 강론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행 20 : 20-21) 그들도 안다고 말하였고, 조금 뒤에 자기는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다(행 20 : 31). 그러나 나는 지금 선한 목사의 은사를 자세히 알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목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이려는 것뿐이다. 즉 그들이 교회 위에 임명된 것은 무위 도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임명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께서는 만일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이 무지 때문에 멸망한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겔 3 : 17) 선포하신다.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한 말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 : 16-17). 끝으로, 사도들이 전세계를 위해서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해야 한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목사를 각각 그 교회에 파송하지만, 동시에 한 교회에 매여있는 목사가 다른 교회를 돕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분란이 생겨서 그가 있어야 한다든지 어떤 애매 모호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조언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즉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 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세운 교회들에 각각 처음으로 장로들을 임명했고(행 14 : 22-23) 또 바울은 디도에게 명해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딛 1 : 5).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에 대해서(빌 1 : 1) 또 골로새 교회의 감독 아킵보에 대해서 (골 4 : 17) 말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주목할 만한 설교를 기록했다(행 20 : 18-19).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며 돌보는 일을 담임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이 법에 자기가 구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법률가들의 말과 같이) 교회 소유지에7 매이지 않았다. 즉 꽁꽁 묶여 그 땅에 매여 있어서 공공의 복리가 요구하는 때에도 그리고 그 요구가 정당한 방법과 순서를 밟아 온 때에도 그 땅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곳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곳을 떠나거나 그곳에서 놓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사사롭게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 장로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이 말들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8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딛 1 : 5) 명령한 직후에, "감독은‥‥‥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한다(딛 1 : 7, 딤전 3 : 1 참조). 다른 데서는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에게 문안하였다(빌 1 : 1). 사도행전에는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이야기한 기사가 있는데(행 20 : 17), 그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행 20 : 28).
지금까지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가 인용한 에베소서 4장에서(엡 4 : 11)9 바울은 다른 직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와(롬 12 : 7-8) 고린도전서에서(고전 12 : 28)는 다른 직분들을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통역,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러나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 : 28)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고 나는 믿는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롬 12 : 8) 달리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잘못을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10 말하겠다. 그런데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경험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9. 집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롬 12 : 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 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 : 9-10).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          (섬기는 일 : 집사직)라는 말에는 더 넓은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 행전에 기록했다(행 6 : 3).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은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을 터뜨렸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공궤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해서 이 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다11(행 6 : 1이하).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

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성회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지만(고전 14 : 40) 질서가 가장 잘 지켜져야 할 때는 교회 정치를 확립할 때이다. 여기서는 무슨 일을 불규칙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했다.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되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히 5 : 4), 다음에 이 소명에 응해야 한다. 즉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롬 1 : 1, 고전 1 : 1).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일꾼도 자기가 주의 명령으로 사도직에 임명됐다는 것과 위임된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교회에서 발언할 권위를 감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중의 한가지도 없는 사람이 이런 영예를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 직분 완수의 필요성에 관해 잠깐 언급했으므로 지금은 소명만을 논하겠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네 가지 점을 이해해야 한다. ⑴ 어떤 종류의 사역자가 될 건인가? ⑵ 어떻게 ⑶ 누구에 의해서 임명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⑷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련된 외형적인 엄숙한 소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밀한 소명은12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는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더 잘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비록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이 직분에 임하는 사람도 그의 사악한 심사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평신도에 대해서 그들이 성직에 적당하고 유능하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흔히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좋은 목사의 경건을 겸한 학식과 그 밖의 은사는 확실히 이 직분을 위한 일종의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런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임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 여러 가지 직책을 논할 때, 각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특히 가져야 할 은사를 먼저 열거했다(고전 12 : 7-11).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제목 중의 첫째이므로 이제부터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딛 1 : 7, 딤전 3 : 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 : 2-3, 딛 1 : 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 : 8-13). 우리는 항상 그들이 맡은 직무에 합당하고 충분하도록, 즉 그 직분 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알고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다(눅 21 : 15, 24 : 49, 막 16 : 15-18, 행 1 : 8). 그리고 바울은 선하고 진정한 감독을 그려 보인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충고한다(딤전 5 : 22).
내가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에 갖추어야 할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 : 23 기타) 그들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히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간구했다(참조, 사 11 : 2).

 

13. 누가 사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우리가 논할 셋째 점은 어느 누가 사역자들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소명은 다른 것들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확실한 표준 이 될 수 없다.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었고 그 자리를 더욱 현저한 표식으로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도가 될 사람들을 친히 주의 입으로 임명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의 명령만으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에 나섰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유다의 후임자를 구했을 때에도 감히 한 사람을 확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내세워서 주께서 제비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결정하시게 했다(행 1 : 23-26). 바울이 자기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자라고 한 말도(갈 1 : 1,12 참조)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람으로 말미암은"이라는 첫 말씀은 모든 말씀 선포자들과 공통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말씀은 바울에게 독특하고 또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점을 자랑한 것은 합법적인 목사가 가질 것을 가졌다는 자랑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을 표시하는 휘장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는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 그는 보통 제자이고 처음 사도들만이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가 암암리에 공격을 받는 것을 알고는 그의 전도의 위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이 자기는 모든 점에서 다른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자기는 보통 감독같이 사람들의 결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14. 사람을 통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감독을 임명하는 것이 합법적 소명과 모든 점에서 조화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 관습을 증명하는 구절이 많다. 방금 인용한 바울의 말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도 이 관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평상시에 사역자를 선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에게 특유한 점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셔서 바울도 임명하셨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 : 2). 성령께서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따로 세우며 안수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자들을 임명한다는 교회 규율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언급하신 후에 교회가 그를 지명하게 하심으로써 가장 명백한 실례로 이런 질서를 시인하셨다. 맛디아를 선택했을 때에도(행 1 : 23)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사도직은 심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한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세워서 그 중 한 사람이 제비로 뽑히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확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다.

 

15. 평신도의 투표

사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회 전체인가,13 또는 그의 동료들과 도덕적 책망을 맡은 장로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권위로 임명되는가 하고 혹자는 사역자 임명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이 권위를 한 사람에게 주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 : 5). 디모데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 : 22).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에 있는 디도가 교회를 다스릴 때에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디모데와 디도가 다른 사람들 위에 있은 것은 건전하고 좋은 충고를 하려는 것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증거를 위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비슷한 예를 들어 나의 주장을 밝히겠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 투표를 했다고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14 라고 기록했다(행 14 : 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의 권리라고 주장한 것보다 저 큰 권리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허락했을 리가 없다. 바울은 항상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감독들을 "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교회 전체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유래한 일이라고 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사실 레위족의 제사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성별하기 전에 온 백성 앞에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레 8 : 4-6, 민 20 : 26-27). 맛디아를 사도로 보선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고(행 1 : 15이하) 일곱 집사도 신자들이 보고 찬성하는 가운데서 임명했다(행 6 : 2-7).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이런 예들을 보더라도 성직자를15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반 신도들이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임명이 모든 사람의 증거로 검토되며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역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적당한 듯한 사람들을 일반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회중이 경박함과 악한 의도나 무질서 때문에 탈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6. 임명

우리가 소명의 마지막 점이라고 한 임명식이 아직 남아 있다. 사도들이 사역자를 임명했을 때에 안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성별 받기를 원할 때 그 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고 할 때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창 40 : 14). 우리 주께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마 19 : 15).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물에 안수한 것도(민 8 : 12, 27 : 23, 레 1 : 4, 3 : 2,8,13, 4 : 4,15,24,29,33 기타) 같은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수함으로써 그들이 사역자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신자들에게 베풀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행 19 : 6). 여하간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를 임명할 때마다 사용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목사와 교사와 집사들을 성별했다.
안수에 대해서는 일정한 가르침이 없지만 사도들이 항상 이 방법을 쓴 것을 보아서, 이 방식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 곧 가르침을 대신할 것이다. 확실히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교회에 알리는 징표로서 유용한 동시에,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앞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그뿐 아니라, 안수의 진정한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면 그것은 허무한 표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도 이유 없이 교회 내에 세우시지 않는다면 이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미신적으로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회중 전체가 사역자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만이 안수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여러 목사가 안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곱 집사들과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럿이 안수한 것이 분명하다(행 6 : 6, 13 : 3).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럿이 아니라 자기가 디모데에게 직접 안수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한다(딤후 1 : 6). 바울이 장로회의 안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에서16(딤전 4 : 14) 한 말을 나는 장로들이 안수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임명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했을 때에 안수에 의해서 그대가 받은 은혜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제 4 장

고대의 교회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정치1

(사역의 역사적 발전 ; 사역자의 세 부류 :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 그 중에서 선택된 한 사람의 감독, 대감독. 1-4)

1.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우리들에게까지 전해 온 교회 정치 질서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이다.2 이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고 진지하게 만들며 더욱 잘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고대 교회의 특색을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고대 교회의 특색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다. 당시의 감독들은 여러 가지 교회 법을 발표해서 성경에 없는 뜻까지 표현한 듯이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있는 독특한 형태와 일치하도록 세밀하게 주의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정에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혹 그들의 처리에 부족한 점도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보존하기 위해선 진지하게 노력했고 또 그렇게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무엇을 지켰는가를 간단하게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자들도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로 계열에서 ⑴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⑵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책망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⑶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독경사와 시제는 아직 정확한 직분을 표시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성직자"라고 부르며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일정한 일을 시켜 자기들의 임무를 잘 이해하도록 훈련시켰는데, 이것은 적당한 때가 오면 곧 직분을 맡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3
그러므로 제롬은 다섯 가지 교회 계급을 말하고, 그것을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고 했다. 그 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지위를 주지 않았다.4

 

2. 감독의 지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불화를 막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위엄을 가지고 있어서 동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원로원에서 집정관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의견을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함으로써 모임의 의장이 되며,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관하고 회의 결정 사항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들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집행하였다.
고대 사람들 자신은 이 제도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사람들의 합의로 시작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롬은 디도서 주해에서 말한다. "감독과 장로는 꼭 같다. 마귀의 유혹으로 교회에 불화가 생기고 사람들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게바 파라 하기 전에는(고전 1 : 12, 3 : 4 참조) 장로들의 협의로 교회를 운영했다." 그 이후에 불화의 씨를 없애기 위해서 감독권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관하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이 감독들도 자기들이 장로들보다 높다는 것은 주께서 정하신 일이 아니라 교회의 관습에 의한 것이며, 장로들의 협력을 얻어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 그러나 제롬은 다른 곳에서, 이 제도는 매우 오랜 것이라고 한다. 즉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복음서 저자 마가의 시대에서부터 헤라클라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시대까지 장로들은 항상 동료 한 사람을 뽑아서 더 높은 지위에 앉히고 "감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6
그때에는 각 도시에 장로회가 있었으며 그 장로회는 목사와 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권고하며 징계하는 직무를 이행했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들이다(딛 1 : 9). 또 그들은 후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거룩한 단체에 들어온 청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각 도시에는 일정한 지역이 할당되어, 그 지역 내에서 장로들을 뽑으며 그 지역을 교회의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장로회는 교회의 조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감독 아래에 있었다. 감독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엄을 가졌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회의된 안건에는 복종했다. 그러나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때에는 장로들을 그런 지역에 배치해서 작은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했으며,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런 장로들을 "지방 감독"7 이라고 불렀다.

 

3. 감독과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는 직분에 대해서 본다면,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성례전을 시행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했다.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은(아리우스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든 후) 알렉산드리아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Tripartite History)의 제 9 권에서 말한 바와 같고,8 제롬은 이 사실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9
확실히 진정한 감독임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감독을 자칭한다면 이상한 일로 인정됐을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모두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한 시대의 관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미 고대 교회의 순수성이 많이 부패해서 교회가 거의 붕괴되었지만 그래도 감독이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에게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것이다. 설교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지 않는 감독은 숨은 심판자의 진노를 자기 위에 내리게 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말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깨끗하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행 20 : 26), 우리 자신에게 죄악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시키는 감독이라 불리우는 우리는 바울의 말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되고 강압을 느끼며 유죄가 증명된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미지근하고 잠잠한 우리는 그들을 죽이는 자들이다."10 그는 자기나 다른 감독들이 일에 대한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묵묵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절반 완수한 감독들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랜 원칙이었다.

 

4. 대감독과 총대감독

각 지방마다 대감독 한 사람이 있었으며, 니케아 회의에서 총대감독 이 대감독보다 지위나 위엄이 더 높다고 결정한 것은11 규율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극히 드문 관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위는 어떤 교회 내의 문제가 몇 사람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을 때에 그 지방의 교회 회의에 맡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창설된 것이다. 만일 문제가 크거나 어려워서 더 광범한 토의가 필요한 때에는 교회 회의와 함께 총대감독들을 소집했고, 이 외에는 교회 전체의 총회에 상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조직된 것을 교권 제도(hierarchy)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말을 부적당하다고 보며 또한 이 말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정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12 사람들이 주권이나 지배를 꿈꾸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용어를 등한시하고 사실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고대 감독들에게 하나님이 그 말씀에서 정해 두신 것과 다른 어떤 교회 통치 형식을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사와 부감독 :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 하부 성직자. 5-9)

5. 집사의 직분

당시의 집사직은 사도 시대와 성격이 같았다.13 그들은 매일 신자들이 바치는 예물과 매년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들여서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결정한대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법이 어디서나 감독을 교회의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은 감독이 직접 그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공적 원조를 받을 사람들을 집사에게 지정하며 남는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 또 얼마씩 주라고 지시하는 것이 감독의 책임이었다. 그는 집사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정했다고 하는 교회법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감독에게 교회의 일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의 영혼이(이것은 더욱 귀중한 것이다) 감독에게 위탁되었다면 그가 재산 관리에 관계하는 것은 더욱 적당하다. 그의 권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장로들과 집사들을 통하여 빈민에게 분배되며, 두려움과 주의 깊게 처리되어야 한다"14 그리고 안디옥 회의에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모르게 교회 일을 처리하는 감독들을 억제하도록 결정했다.15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더 이상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그레고리우스의 여러 서한을 보면, 당시의 다른 교회법들은 효력을 잃은 것이 많았지만 집사가 감독의 지도아래에서 빈민들을 돌본다는 규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처음에는 빈민 구제 사업을 돕는 부집사(sub-deacon)가 있어서 집사들 밑에 있은 듯하나 이 구별은 점점 불투명해졌다. 그뿐 아니라 부감독(archdeacon)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제롬은 그의 시대에 이미 부감독이 있었다고 하지만16 그들이 생긴 것은 교회 재산이 많이 늘어나서 보다 정확한 새로운 관리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부감독들은 교회의 수입과 재산과 설비 그리고 매일의 헌물을 전부 책임저 맡아보았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살로나의 부감독에 대해서, 만일 누가 태만하거나 속이기 때문에 교회 물품이 하나라도 없어진다면 그의 죄로 인정될 것이라고 엄명했다.17 그러나 부감독들은 신자들에게 복음을 읽어 주는 일과 기도에 대한 권고를 하는 일도 맡았으며, 성만찬에서 잔을 내어 주는 직분도 가졌었다.18 이런 일들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는 의미로 지정된 것이며, 그들이 더욱 양심적으로 직분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직무란 것이 이런 여러 가지 표징으로 알려졌다.

 

6. 교회 재산의 운용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교회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며 어떻게 분배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 소유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 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나눠줘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같이 최대의 두려움과 공경으로 치우침이 없이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크리소스톰과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및 그 외에 그들과 같은 감독들이 엄숙한 항의를 하면서, 자기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직했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공적인 경비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인정된 일이다(고전 9 : 14, 갈 6 : 6). 또 고대의 어떤 장로들은 자기의 유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스스로 빈민이 되었다. 따라서 사역자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리고 빈민들도 무시되지 않도록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검소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역자들이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할 정도로 많이 받지 말고 꼭 필요한 정도로만 받도록 규정했다. 부모의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들이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 : 29).19

 

7.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에는 무보수로 또 자발적으로 맡았었다. 감독과 집사들은 자유 의사로 충실했으며 그들의 고결한 양심과 순결한 생활이 법을 대신했다.20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탐욕과 악행으로 인해서 악한 선례가 생겼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성직자들과 빈민들과 교회 건물들의 수리를 위해서 그리고 넷째로는 타지방과 본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어떤 교회법에서는 이 넷째 부분을 감독에게 맡겼지만 이것은 내가 말한 구분법과 다르지 않다. 감독에게 맡겼다고 하더라도 감독의 개인 수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혼자서 쓴다든지 마음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독들에게 요구한 것과 같이(딤전 3 : 2) 손님을 접대하는 데 넉넉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겔라시우스와 그레고리우스도 이렇게 해석한다. 겔라시우스는 감독들이 비용을 요구한 것은 포로와 나그네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더욱 분명히 말한다. 사도 교구의 관습은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모든 수입을 사분 할 것을 명령한다. 즉 한 부분은 감독과 그의 가족에게 손님 접대와 생활 유지를 위해서 돌리고, 한 부분은 성직자들에게 또 한 부분은 빈민에게 그리고 넷째 부분은 교회 수리에 돌린다.21 그러므로 감독은 검소한 보통 정도의 의식에 넉넉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만일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김독이 있으면 즉시 동료들의 책망을 받았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 지위를 빼앗겼다.

 

8.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처음에는 교회 성물을 장식하는 데 비용을 아주 적게 들였으며, 나중에 교회가 점점 풍부하게 됐을 때에도 이 점에서는 여전히 절제했다. 교회에 기부가 들어오면 빈민을 위해서 그대로 고스란히 보관해 두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방에 기근이 들어 달리 구제 방법이 없었을 때에 키릴루스는 교회의 기물과 예복들을 팔아서 그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아미다의 감독 아카키우스도 무수한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사 직전에 있을 때 자기 교회의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이 유명한 연설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잡수시거나 마시지 않으시므로 접시나 잔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기물을 녹여 그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을 사며 몸값을 치르게 했다.22 제롬도 교회들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공격하면서 당시의 툴루즈의 감독 엑수페리우스를 칭찬했다. 이 감독은 주의 몸을 버들가지 바구니에 담고 주의 피를 유리 그릇에 담으면서도 빈민은 한 사람도 굶기지 않았다고 했다.23 내가 아카키우스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암브로시우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가 교회의 거룩한 기물을 깨뜨렸다고 해서 아리우스파가 비난했을 때 그는 훌륭한 변명을 했다.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금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분은 교회를 모으실 때에도 금을 취하시지 않았다.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값을 치르기 위해서, 곤란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무엇인가? 앗수르 사람들이 주의 성전에서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실어 갔는지를(왕하 18 : 15-16) 우리는 모르는가? 모독적인 적국이 가져가기보다는 빈민 구제를 위해서 제사장이 금은을 녹이는 편이 다른 방법이 없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왜 저렇게 많은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 두었느냐? 네게는 그들을 살리기에 넉넉한 금이 있었다. 왜 저렇게 많은 포로들이 끌려가는데 한 사람도 도로 사지 않았느냐? 왜 저렇게 많은 포로가 적에게 죽었느냐? 너는 쇠그릇보다 살아 있는 사람 그릇을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대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성전에 장식물이 없을까 염려했습니다'라고 할 것인가? 주께서는 대답하실 것이다. 성례에는 금이 필요 없다. 금으로 사지 않은 것은 금을 기뻐하지 않는다. 성례의 장식은 포로들을 도로 사는 것이다." 요컨대, 암브로시우스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을 우리는 대단히 옳은 말이라고 본다. "그 때의 교회 소유는 모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뜻으로, "감독이 가진 것은 모두 빈민의 것이었다"24라고 하였다.

 

9. 직분들의 준비 단계

지금까지 열거한 것이 고대 교회의 직무들이었다. 이 외에 교회 저술가들이 언급한 것에는 분명한 직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훈련과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한 묘목판을 남겨 두기 위해서 부모의 허락과 인정을 얻어 소년들을 영적 군대에 모집하여 보호하며 교육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들을 훈련시켜서 직분을 맡게 될 때에 무식하거나 미숙하지 않도록 했다. 이 예비 훈련을 받는 청년들을 다 성직자(clerics)라고 불렀는데, 더 적당한 이름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 전체를 성직자(clergy) 즉 주의 상속 재산이라고 부른 것을(벧전 5 : 3) 오해한 데서 적어도 그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 자체는 특히 거룩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이 제도에 따라 몸을 성별하며 교회에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감독의 지도 아래에 육성했다. 그것은 또 훌륭한 예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교회에 봉사하게 하는 길을 확보했다.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거룩한 학문을 배우며 엄격한 훈련을 쌓아 근엄하고 거룩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세상 근심을 떠나 영적인 문제와 연구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병들이 모의 전투를 통해서 진짜 전투를 배우는 것과 같이 그들은 일정한 초보부터 훈련을 받아 정식 성직자의 직분을 맡았다. 처음에는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문지기"라고 불렀다. 그 후에는 "시제"라고 해서 감독의 집안 일을 도우며 항상 감독을 따라 다녔다. 이것은 첫째는 주교의 명예를 위해서였고 다음에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신자들에게 점점 알려지며 신자들의 칭찬을 받는 동시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을 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장로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강단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와 같이 각종 훈련에서 그 부지런함을 증명하도록 단계적으로 승진되어 마침내 부집사가 되었다.25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일들은 신규 모집자들에 대한 훈련이었지 교회의 진정한 사역자로서의 직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역자의 선택 및 임명의 변천사 : 집권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찬성으로 감독을 선택한다. 10-15)

10.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 : 평신도들의 찬성

우리는 사역자들의 소명에서 생각할 첫째 점과 둘째 점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며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주의해야 되느냐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서 바울의 명령과 사도들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이 목사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최대의 경외와 열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26 더우기 바울이 세운 표준에 따라 선택할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을 심사하는 일종의 심사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독에 대해서 바울이 요구한 것보다(딤전 3 : 2-7)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 다소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과오를 범했나. 특히 얼마가 지난 후에는 독신 생활을 요구했다.27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례는 바울이 정한 것과 일치했다.
셋째 점에 관해서도 즉 누가 사역자들을 임명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항상 한가지 절차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일반 신도의 찬성이 없이는 아무도 성직자 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에 문의하지 않고 아우렐리우스라는 사람을 독경사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 애써 변명했다. 그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관습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직자들을 임명할 때 여러분에게 문의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재질을 함께 심사 숙고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입니다."28 그러나 이런 사소한 임무에는 큰 위험성이 없었고 또 당사자들은 오랜 견습 생활을 하였으며 큰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의 동의를 묻지 않게 되었다.
그후 감독직을 제외한 다른 교직에 관해서도 일반 신자는 적격자를 선택하고 임명하는 일을 감독과 장로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 한 교구에 새로 장로가 임명될 때는 아마 예외였을 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그곳 주민들이 분명히 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보유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부집사가 되는 데에도 반드시 당시의 엄격한 규율 아래서 장기간의 성직자로서의 경험이 있어야 했다. 이 계급에서 시험에 통과되면 집사가 되었고 집사로서 충실하게 행동하면 장로로 승진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이 보는 데서 다년간 시험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승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점을 처벌하는 교회법이 많았으므로 이 대책을 등한시하지만 않으면 나쁜 장로나 집사의 출현으로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 임명에도 반드시 시민들의 찬성이 필요했다. 이 점은 아나클레투스가 제정했다는 교회법 제 1 편 제 67 부가29 증명한다. 끝으로, 임명식은 매년 일정한 날에 있었다. 이것은 신자들의 찬성이 없이 몰래 기어드는 사람이나 증인이 없이 너무 쉽게 승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1. 감독 선거에 대한 찬성 : 데오보도레트 시대까지

신자들이 자기의 감독을 선택하는 자유는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 감독을 억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회의에서는 신자들이 반대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30 이 점에 레오 1세는 열렬하게 찬동하여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또는 그 대다수가 요구한 사람이 선택되게 하라" 또 "모든 사람 위에 앉힐 사람은 모든 사람이 선택하게 하라. 알려지지 않고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임명하려면 강제로 밀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선택하고 신자들이 원한사람을 택하라. 그리고 총대감독의 결정을 얻어 지방 내의 감독들이 그를 성별하라."31 그뿐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은 신도의 이 자유가 결코 축소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가 넥타리우스를 임명했을 때에 모든 성직자와 신도의 승인이 없이 취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이 사실은 로마 종교 회의에 보낸 서한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어떤 감독이 후계자를 지명할 때에는 교인들이 확인해야만 그 지명이 효력이 있었다. 이런 예와 그 형식을 우리는 어거스틴이 에라클리우스를 지명한 때에 볼 수 있다.32 데오도레트는 아타나시우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베드로에 관하여 언급할 때 장로들이 그 지명을 인정했고 관리들과 지도적 시민들과 모든 교인들이 만장일치의 환호로 승인했다고 덧붙여 말했다.33

 

12. 평신도와 성직자의 균형

라오디게아 회의가 선거를 조중에게 일임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34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많은 사람이 만장 일치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중은 확신이 없으며 상반되는 이해로 서로 갈라진다"는 것이35 보통이다. 그러나 이 위험성에 대해서 훌륭한 대책을 강구했다. 처음에는 성직자들만이 따로 후보를 선거해서 관리들이나 원로원과 지도급 시민들에게 제시했다. 이 사람들은 심사 숙고한 후에 그 선거가 바르다고 보이면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원하는 다른 사람을 다시 선출했다. 다음에 문제를 일반 신자들에게 제출하는데, 신자들은 이미 결정된 일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동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신자들에게서부터 시작할 때에는 그들이 특히 누구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으로 그쳤다. 신자들의 소원을 들은 후에 성직자들이 선택했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할 수도 없었고 일반 신자들의 어리석은 소원을 성직자들이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었다. 레오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제시한다. "시민들의 소원과 신자들의 증언과 중요 인물들의 결정과 성직자들의 선택을 얻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중요 인물들의 증언과 성직자들의 일치된 의견과 관리들과 신자들의 찬성을 따라야 한다." "다른 방법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한다.36 라오디게아 회의의 결정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부주의한 군중에게 끌리지 말고 필요한 때에는 그들의 지혜와 성의로 군중의 어리석은 소원을 억제하라는 뜻에 불과하다.37

 

13. 성직자들과 통치자들

이 선택 방법은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시행되었고 아마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그의 서한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디서나 새로 감독을 임명하는 문제가 생길 때, 그는 성직자들과 관리들과 신자들에게 관례적으로 글을 보냈다. 그 도시의 행정 제도에 따라서는 시장에게도 글을 보냈다. 교회 사정이 어지러워 인근 감독에게 선거를 조사하게 한 때에도 그는 항상 모든 사람의 서명을 받은 엄숙한 결정을 요구했다. 콘스탄티우스라는 사람이 밀라노 감독으로 선출됐을 때에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많은 밀라노 사람들이 제노아로 도망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그들까지 돌아와서 회의를 열고 그 선거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선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38 참으로 교황 니콜라스가 로마 교황 선거법을 이런 방식으로 확립한 후 아직 50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방식은, 우선은 추기경들이 선거하고 다음은 나머지 성직자들이 그들과 합류하고 끝으로 일반 신도의 찬성으로 선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방금 인용한 레오의 결정을 인용하면서 이 결정은 후세에 계속 유효해야 된다고 명령했다. 악한 사람들의 악의 때문에 정직한 선거를 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일부 신자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다.39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황제의 직접 관할 아래에 있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두 교회에 대해서만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암브로시우스에게 권한을 주어 밀라노의 감독 선거를 감시하도록 파견한 것은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취한 특별한 조치였다.40 그러나 옛날 로마에서는 감독 지명에 대한 황제의 권위가 대단한 영향력이 있어서,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자기는 엄숙한 의식으로 이미 신자들의 부름을 받았었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교회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41 그러나 당시의 관례는 다음과 같았다. 즉 관리들과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누구를 지명하면 그는 곧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그 선거를 시인하고 확인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해서 취소시켰다. 그라티아누스가 수집한 교령들도 이 관례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 교령집에는 교회법에 의한 선거를 국왕이 제쳐놓고 자기의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폭력으로 추천된 감독을 대감독들이 성별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이다.42 교회의 권리를 빼앗아 전권을 한 사람의 기분에 맡기는 것과 합법적인 선거를 국왕이나 황제가 자기의 권위로 확인하도록 이 영예를 양보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14. 임직 절차

이제 우리가 논할 것은 고대 교회에서 사역자 선거가 있은 후에 선거된 사람들을 임직시키는 의식이다. 라틴 교회는 이 의식을 서품 또는 축성이라고 불렀고 희랍 교회는 거수 또는 안수라고 불렀다.43 "거수"는 원래 손을 들어서 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는 대감독이 지방 내의 모든 감독들과 함께 모여 선거된 사람을 임직시킨다는 내용이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길이 멀거나 건강, 기타 사정으로 모일 수 없는 감독들이 있을 때에도 적어도 세 사람은 모여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문서로 찬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 규정은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여러 종교 회의 후에 부활시켰다.44 적어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은 모두 모여야 했는데, 그 목적은 선출된 사람의 교리와 행실을 자세히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조사를 하지 않고는 임명식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을 보더라도 당시의 감독들은 선거 후에 부르지 않고 보통 일반 선거에 임석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회자가 되어 군중 사이에 소란이 생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일반 신자들에게 자격자를 사제로 선택하거나 무자격자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도적 전통을 근실히 그리고 굳게 지켜야 한다. 이것은 현재 거의 모든 지방에서 지키고 있다. 즉 임직식을 바르게 거행할 수 있기 위해서 지방 내의 인근 감독들은 전부 지도자의 임직이 있을 신자들 앞에 모여야 하며 신자들 앞에서 감독이 선택되어야 한다.45 그러나 감독들이 모이는 것이 늦고 이 지체되는 것을 악용해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자가 있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선거 후에 도착한 때라도 선택된 사람을 합법적으로 심사하여 승인한 후에 성별하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46

 

15. 대감독에 의한 성별

이것은 여러 곳에서 예외 없이 시행되었다. 그 후에 점차로 다른 관습이 생겼다. 선택된 사람들이 중앙 도시에 가서 임명을 받고자 했다. 여기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심 때문이며 또 옛 질서가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 교구의 권위가 높아진 후에는 다른 더 나쁜 관습이 유행했다. 이탈리아의 감독들은 거의 전부가 로마에서 성별을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서 한들을 보면 알 수 있다.47 고대 권리를 유지한 것은 몇 개 도시에 불과했고 이 도시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았는데, 밀라노가 그 예였다. 이 권리를 보유한 것은 아마 지방 중앙 도시들 뿐이었을 것이다. 한 지방의 감독들이 모두 그 지방의 중심 도시에 모여서 대감독의 성별식을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식은 안수하는 것이었다.48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집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감독들과 다른 장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엄숙한 회합에서는 일정한 장식을 감독들이 달았을 뿐이다. 그들은 장로와 집사들을 임명할 때에도 안수를 했을 뿐이다. 감독은 각각 자기 교회의 장로회와 함께 장로를 임명했다.49 모두 공동으로 행동했으나 감독이 의식을 주관하며 모든 일을 그의 주장 하에 했기 때문에 임명식도 "그의"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대 저술가들은 장로와 감독의 차이점은 장로에게 임명의 권한이 없는 것뿐이라고 자주 언급한다.50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제도가 고대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평신도의 투표 없이 무자격자를 임명했다. 1-3)

1.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로마 교황청과 그 모든 예속된 단체들이 지키고 있는 교회 정치 제도와 그들이 항상 말하는 성직 제도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기술한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를 그들의 교회와 비교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이렇게 비교한다면 우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압박하며 말살하려고 광분하는 그들의 교회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사역자가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소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다음에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겠다.
우리는 먼저 주교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논술의 처음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광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를 조금만 논하더라도 그들의 수치가 크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나는 현재 쓰고 있는 이 글이 어떤 것인가를 잊지 않고, 단순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그 한계를 넘지 않겠다.
그러나 수치심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 통상적으로 어떤 종류의 주교들이 선택되는가를 대답해 보기 바란다.
학식에 대하여 심사를 하던 관습은 확실히 너무도 구식이 되었다. 그러나 학식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법정에서 변호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한다. 분명히 지난 100년 동안 거룩한 학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주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전 시대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때가 더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현대 교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도덕 생활을 평가한다면 고대 교회법이 무자격자라고 판단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술고래가 아니면 음행하는 자였고, 이런 죄가 없는 자는 노름꾼이나 사냥꾼이거나 또는 어딘가 생활에 허랑 방탕한 면이 있었다. 어떤 결점은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대 교회법은 그런 사람을 감독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어리석은 짓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을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파렴치와 어리석음은 극도에 달해서, 자연적인 감정으로 보아도 불쾌한, 이 해괴 망측한 죄악을 보고도 무서워 할 줄을 몰랐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런 부주의와 무관심이 있은 곳에서의 선거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

 

2. 주교 선거의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지금은 주교를 선거하는 권리를 평신도로부터 완전히 박탈했다. 투표, 찬성, 서명 승낙, 기타 유사한 일이 모두 없어지고 전권이 참사회 의원들에게 이전되었다. 참사회 의원들은 마음대로 주교직온 수여하고 직접 신도들에게 소개한다. 신도들에겐 그를 검토하라는 것이 아니고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것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2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3 아주 많은 종교 회의의 교령은 다른 방법을 엄중하게 금지하며, 그렇게 한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다.4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교황 제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나 교회의 권리에 의한 교회법에 입각한 선거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폐해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권리를 빼앗은 사실을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주교 선거에서, 평신도와 관리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판단력보다도 증오심과 당파심으로 움직이므로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는 문제의 해결을 소수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5 분명히 이것은 개탄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의 악에 대한 비상 치료책이었다. 그러나 병 자체보다 치료약이 더욱 치명적인 듯한 이 때에 왜 이 새로운 폐단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은 교회법에는 선거 절차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6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감독을 선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신성한 법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감독의 참 모습을 그리신 말씀 한 마디가 마땅히 수만 개의 교회법보다 더 비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비열한 정욕으로 부패하여 법이나 공정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법을 정하더라도 그것은 문서로서 묻혀 있을 뿐이다. 술고래나 음행자나 지독하게 상습적인 노름꾼들이 주교로 추천되어도 대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계획적인 듯이) 승인한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다. 주교직은 간음하는 자들과 뚜쟁이들에게 대한 보수가 된다. 총사냥꾼과 매사냥꾼들이 주교가 되는 때에는 일이 아주 잘 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추행을 조금이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잘 가르치며, 다투지 않으며 운운하는(딤전 3 : 1-7, 딛 1 : 7-9)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옛날 신자들에게는 훌륭한 법이 있었다. 그러면 왜 선거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런 자들에게 옮겼는가? 분명히 평신도들의 소란과 분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그 책임을 평신도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철저한 철면피가 되어 이기적인 야심으로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제멋대로 흔동하는 자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3. 태만한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구제책으로서 간섭하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감독 선거 문제로 도시에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선거권을 시민들에게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아무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결점을 회피하며, 결점이 발생할 때에는 시정하는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일반 신자들이 선거에 더욱더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여 그 책임을 장로들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장로들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전제를 하게 되고 후에 새로운 법을 발표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확립했다.
그뿐 아니라, 임명식은 단지 순전한 흉내뿐이었다. 그들이 한 심사는 내용이 극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어서 장식할 외형조차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방의 집권자들이 로마 교황과의 합의로 얻은 주교 임명권은 교회에 아무런 새로운 손실도 야기시키지 않았다.7 선거권을 참사회 의원들에게서 빼앗았을 뿐이기 때문이며, 참사회 의원들도 정당하게 그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도둑질한 것이었다. 참으로 추악한 예가 있었다. 경건한 군주라면 이런 부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궁정에서 주교를 파견해서 교회를 장악하게 했다. 일반 신자들이 원하지 않은, 적어도 자유로운 발언으로 승인하지 않은 주교를 강압적으로 떠맡긴다는 것은 교회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 무질서한 관례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군주들에게 자기들의 주교를 내세울 구실을 주게 되었다. 군주들은 자기들보다 권리가 더 많지 않은 자들이 자기들처럼 권리를 악용하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자기들이 그 권리를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직록 수여에 관련된 폐해. 4-7)

4. 사제와 부제를 임명하는 데 관한 폐해

이런 고상한 소명을 근거로 주교들은 자신들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제들을 임명하는 권리가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8 이것은 고대의 제도를 부패시키는 심히 사악한 행위인데, 그것은 그들이 임명하는 자는 신자들을 인도하고 양육할 장로들이 아닌 제사를 드리는 사제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제를 임명할 때 그 부제들에게 진정한 직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 즉 성작과 성반에 관한 의식만을 시킨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칼케돈 회의(451)에서는 목회 의무가 없는 임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즉 임명된 사람에게는 그 직책을 수행할 곳을 지정하라고 했다.9 이 결정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귀중하다. 첫째, 교회는 불필요한 경비를 부담하지 않으며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둘째, 임명된 사람들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엄숙한 선서로 맡은 그 직책의 의무를 다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은(종교에서는 먹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성직 취임 자격을 먼저 생활 유지에 충분한 수입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수입은 자기들의 교회 재산에서 오든지 또는 사제직에서 오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제나 부제를 임명할 때에, 그들이 일할 곳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생활할 재력이 있기만 하면 성직을 준다. 그러나 칼케돈 회의가 요구한 성직 취임 자격이 생활비의 연수입이라고 하는 이 해석을 누가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경솔한 임명을 방지하려고 최근의 교회법에는10 주교가 임지 없지 그냥 임명한 이들 성직자들의 생활을 돕는 것을 금지했다. 이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만 수단이 고안되었다. 즉 어떤 성직에 임명되든지 임명된 자는 그 칭호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서 생활비 청구 소송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여기서 생겨난 수많은 협잡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자들은 일년에 다섯 푼도10a 받을 수 없는 성직록에 대해서 자격이 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어떤 자들은 비밀 약정으로 성직록을 빌려쓰고, 곧 갚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갚지 않는 때가 있다. 이 밖에도 이런 종류의 기괴망측한 일들이 많이 있다.

 

5. 임명식은 가짜

이런 심한 악폐를 타파하더라도, 일할 곳을 주지 않으면서 사제를 임명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11 그들은 다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제를 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도록 임명하고 집사는 구제 물자를 수집하기 위해서 임명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가장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가식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견실한 것이 없고 가짜뿐인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의식은 유대교에서 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므로 회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 신도의 찬성을 물어보는 진정한 심사와(그들이 유지하는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밖의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옛 의식을 본받노라는 그들의 서투르고 얼빠진 흉내와 그 우스운 몸짓들을 나는 그림자라고 부른다. 주교들은 대리를 시켜서 서품식이 있기 전에 후보자의 학력을 시험한다. 그들은 무엇을 물어보는가? 미사를 올릴 수 있는가, 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명사나 동사의 변화를 아는가, 어떤 말의 뜻을 아는가, 이런 질문뿐이다. 그들은 성경의 한 절에 대해서도 그 뜻을 설명할 줄 몰라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초보지식이 없더라도 돈이나 권력의 배경이 있으면 사제가 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 서품식에서 성단 앞으로 인도될 때에도 변함없는 협잡이 계속된다. 그들은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누가 세 번 묻는다. 그러면 그들을 본 일도 없는 사람이 형식에 결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연극의 한 몫을 담당하고 나서서, "그들은 자격이 있습니다"라고12 대답한다. 이 거룩한 신부님들은 어디가 나쁜가? 그들은 이런 공공연한 모독 행위를 함으로써 뻔뻔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냉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런 관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분명하고 무서운 악행을 감히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옛날에 케레스(로마의 농업 여신)의 성스러운 의식들을 폭로한 사람들과 같이,13 그들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한다. 만일 그들이 진정 어떤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6. 성직록의 정체

그러면 그들은 성직록을 수여하는 문제에서는 얼마나 올바른 행동을 하는가? 성직록 수여는 이전에 임명식과 결합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다양하게 행한다. 주교들만 사제직을 수여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수여자"라고14 불리는 곳에서도 그들이 항상 전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성직록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고 주교들은 수여한다는 명예만 가지고 있다. 또 학교에 의한 지명, 단순한 또는 교환 조건이 붙은 양도, 추천, 우선권, 기타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도 비난할 수가 없다. 나는 현재 교황 제도 아래에서는 고대인들이 정의한 의미의 성직 매매가15 없이 수여되는 성직록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모두 돈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간접적인 배경이 없이 성직록을 받은 예가 스물에 하 나라도 있으면 내게 증명해 보라, 어떤 자들은 친척이나 인척 때문에, 어떤 자들은 부모의 세력으로 승진한다. 또 어떤 자들은 아첨으로 환심을 산다. 요컨대, 사제직을 수여하는 목적은 교회에 유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얻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성직록(benefice)이라고-말의 본래 뜻으로는 "은혜"라고-한다. 그들은 이것을 군주들의 하사금에16 지나지 않는 것, 군주들이 기사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또는 수고에 대한 보수로서 주는 것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이발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노새 모는 사람, 그 밖의 비천한 사람들에게 이 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 각지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건보다도 사제직에 관한 소송 사건들이 가장 시끄럽다. 결국 사제직은 마치 개들에게 던져서 사냥하게 하는 사냥감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또는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에 덤벼들 듯이 교회의 재산에 덤벼들었으며 또는 소송을 해서 교회를 얻었고 또한 돈으로 샀다. 어떤 자들은 추악한 아첨으로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때에17 이미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사생아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교회도 있다. 이런 자들을 그들은 "목자"라고 부르니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는가?

 

7. 해괴한 악폐

평신도들이 비록 부패하고 무법한 행동을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무법 하거나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해괴한 일이 있다. 한 사람이-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자기 한 몸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다섯이나 여섯 교회에 동시에 임명된다! 지금 군주들의 궁정에서는 각각 수도원장직이 셋, 주교직이 둘, 대주교직 하나를 가진 소년들을 볼 수 있다.18 한 참사회 의원이 성직록을 다섯이나 여섯, 일곱씩을 차지하고서 수입만 받으면서 그곳 교회들은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런 관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곳에서 비난한다는 것을 역설하지 않겠다. 나는 이 무질서를 금지한 엄격한 법규가 여러 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지 않겠다. 그들은 이 법규들을 언제나 마음대로 맹렬하게 배척한다. 단지 나는 이 악폐들은 해괴하다는 것, 즉 하나님과 자연과 교회 제도에 반대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한 약탈자가 동시에 여러 교회를 점령하는 것이나, 비록 원하더라도 자기의 양떼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목자로 임명하는 것은 다 해괴한 악폐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극도로 파렴치한) 그들은 모든 비난을 피하려고 이런 가증하고 추악한 것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린다. 또 그들은 외람되게도 이런 악행에 저 가장 거룩한 사도 계승권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계승의 공로로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자랑한다.

 

(성직을 가진 수도사와 참사회 의원과 기타 인물들의 무성의와 나태. 8-10)

8. "사제"가 된 수도사들

이제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가를 보자. 이것은 합법적인 목자를 판단하는 둘째 표식이다.
로마교회에서 임명되는 사제들 중의 일부는 수도사들이고 일부는 그들이 "세속 신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 두 무리 가운데서 수도사들은 고대 교회가 모르는 자들이었으며, 교회 안에 자리를 가지는 것은 수도 생활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는 수도원에서 교회로 옮긴 사람은 수도사를 그만두었다. 심히 부패한 시대에 있던 그레고리우스까지도 이런 혼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사람들에게 교회의 직분에서 떠나라고 했다. 수도사로 있는 것과 성직자로 있는 것은 서로 배치되므로 아무도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20 교회법에 부적당하다고 선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무를 수행하느냐고 내가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은 물론 이노센트와 보니파키우스의 실패로 끝난 칙령을 인용할 것이다. 이 교황들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그대로 있으면서 사제의 명예와 권한을 받게 하였다.21 그러나 무지한 바보가 로마 교황청을 차지할 때마다, 한 마디로 모든 고대 전통을 전복해도 좋다는 이 주장은 무슨 논리인가? 이 점은 후에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교회가 비교적 순결했을 때에는 수도사가 사제의 일을 본다는 것을 큰 모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만 말하겠다. 제롬은 그가 수도사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사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고 자기는 사제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22 그러나 한 걸음 양보해서 묻고자 한다. 그들은 사제직의 어떤 부분을 실천하고 있는가? 몇몇 탁발 수도사들은 전도를 하고, 그 밖의 수도사들은 모두 자기의 방에서 성가를 부르거나 미사곡을 중얼거린다. 마치 사제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서 임명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거나 사제직의 성격이 허락을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제의 임무는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성경이 명백하게 확인한다(행 20 : 28). 그러므로 이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완전히 변경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모독이 아닌가? 그들이 임명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사제에게 명령하신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백하게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이것이다 . 수도사는 자기의 수도원으로 만족하라. 성례전을 집행하거나 공적 직책에 속한 일을 하려고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23 사제가 되면서 처음부터 사제의 진정한 직분은 다하지 않을 작정0?하고, 사제라는 이름은 가지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우롱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그들은 대답할 수 있는가?

 

9. 성직록을 받는 사제들과 고용살이를 하는 사제들

이제 세속 신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들의 말대로 성직록을 받는다. 즉 사제로서의 생활비를 받는다.2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미사를 집례하거나 성가를 부름으로써 매일 노동을 하여 이런 일에 대한 삯을 받아서 살아간다.
성직록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주교나 목사같이 영혼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하는 기품있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 사제 참사회 의원, 교구 사제, 고위 성직자,25 지도 신부 등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미 일을 뒤집어 놓은 그들은 크고 작은 수도원들을 세속 사제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년들에게도 준다. 그들은 이른바 "특권으로", 즉 일상 관습으로 이렇게 한다.
보수를 목적으로 고용된 사제들은 지금 하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지금같이 전세계에 무수하게 퍼져 돈을 벌기 위해서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자기 몸을 파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감히 내놓고 구걸할 수 없어서, 또는 그렇게 해서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굶주린 개같이 돌아다니면서 싫어하는 사람들을 졸라댄다. 개가 짖듯이 성가시게 굴어서 조금이라도 빼앗아 시장기를 면하려고 한다. 사제의 영예와 직책이 이렇게 된 것이 교회에 얼마나 큰 수치인가를 내가 말로 표현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극심한 악폐에 해당하는 논의를 독자는 나에게서 기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간단하게 말한다. 하나님 말씀이 명령하고(고전 4 : 1, 요 10 : 1이하 참조) 고대 교회법이 요구한 대로 사제의 직책은 교회를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면 미사를 파는 일만을 일삼거나 그것만으로 삯을 받는 이 모든 사제들은 그 직분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할 합법적인 직분도 없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곳이 없으며 다스릴 사람도 없다. 요약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는 제단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들에게 드리고 있다(고전 10 : 20 참조).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26

 

10. 여러 가지 성직들의 겉치레

나는 외면적인 악폐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제도에 뿌리를 박은 내면적인 폐악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맡을 덧붙여 말하겠다.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사회 의원, 부주교, 부속 예배당 사제, 참사회 의장, 기타 하는 일이 없이 성직록을 먹는 자들은 모두 같은 종류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그들은 말씀 선포와 권징의 엄수, 성례 집행을 귀찮은 짐이라고 해서 던져 버렸다. 진정한 장로라고 자랑할 무엇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가? 노래가 있고 찬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장로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관습, 습관, 오랫동안 공인된 일들을 그들이 주장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정의와 대결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이 진정한 장로이며, 진정한 장로로 인정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표준을 따르라는 이 어려운 요구에 그들이 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원시 교회의 권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라. 그들의 현상을 고대 교회법에 따라서 판단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하지 못할 것이다. 참사회 의원으로 타락한 자들은 옛날 장로들과 같이 감독과 공동으로 교회를 다스리며 그의 동료로서 목회하는 일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27 그들의 이른바 "참사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진정한 교회 정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부속 예배당 사제와 그 밖의 쓸데없는 성직들도 적지 않다.
그러면 이 모든 자리들을 어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대 교회의 관례는 확실히 그들을 장로의 직위에서 제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로로 자칭한다. 그러나 이 가면은 벗겨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이 설명하고 고대 교회가 요구한 장로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며 거리가 먼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성직들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이 제정하시거나 고대 교회의 관례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교회에 주신 영적 제도를 설명할 때에는 그들에게 어떤 자리도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내가 더 알기 쉽고 확실하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부속 예배당 사제와 참사회 의원 그리고 부주교와 참사회 의장과 그 밖의 무위 도식하는 자들은 장로의 가장 중요한 직책에 새끼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이 명예를 도둑질하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도를 침범하는 것을 우리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교와 목사와 부제들의 부패와 탐욕. 11-19)

11.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

이제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을 언급할 차례이다. 그들이 그 지위를 보존하도록 노력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그들이 직분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것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임된 교회를 기만하고 교회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 여전히 목자로 행세하려고 하며, 목자의 직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시외에 나가 본 일이 없는 고리 대금업자를 농부나 포도원지기라고 하며 전쟁터와 병영만을 돌아다니고 법정이나 법률 서적은 본 일도 없는 사람을 변호사라고 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보고 누가 불쾌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교회의 합법적인 목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면서도 목자의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 교회를 다스리는 체하는 사람조차 몇 명이 되는가? 일평생 교회의 수입을 받아먹으면서도 한 번도 그 교회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일년에 한 번 자기가 오거나 사환을 보내서 자기 수입에 손해가 없도록 한다. 이런 부패가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렇게 무위 도식을 원하는 자들은 특권으로 의무를 면했다. 지금은 누구든지 자기 교회에서 사는 것이 희귀한 예외이다. 사환이나 소작인에게 농토를 맡기듯이 그들은 그들의 대리자들에게 교회를 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양을 한 마리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양떼의 목자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생각이다.28

 

12. 이 폐단의 초기 :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

이미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폐단의 씨가 약간 있어서,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가르치는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강경하게 불만을 말한 것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사제들은 가득하지만 추수를 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사제직을 맡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를 신부(아버지)라고 보지 않으며 겸손해야 할 곳을 교만한 주인의 자리로 바꾸어 버린다." 또, "그러나 목자들이여, 보수를 받으면서도 일은 하지 않는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보기에만 바쁘면서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한다. 전도하는 일을 버렸다. 주교라는 명예를 가졌으나 그 직책을 다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받을 벌은 더욱 중하다.29 단지 직책에 대한 성의와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그레고리우스가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책망했는데. 평생에 한 번 강단에 서는 주교가 거의 없거나 또는 몇 명밖에 되지 않고 다른 성직자들은 백에 하나도 되지않는 것을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지금 그들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신자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은 주교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사태가 더욱더 악화되어, 그는 이 계급 전체를 날카롭게 공격했다.30 그러나 그 시대의 주교 계급은 지금보다 상당히 순수했던 것 같다.

 

13. 선전과 현실

그러나 현재 교황 제도하에 있는 교회 제도의 외형을 잘 고찰한다면, 강도들의 소굴에서도 그렇게까지 법도 없고 체면도 없는 철면피한 난잡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거기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과는 다르고 이질적이며 고대 교회의 규정과 관례에서 타락했고 자연이나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이런 무질서한 제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지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타격이 된다. 그들은, 사도들의 권한이 그들에게까지 계승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교회의 기둥이요 종교 지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요 신자들의 머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나무 조각에 대고 말하듯이 이런 미련한 말을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자랑을 할 때마다 나는 그들과 사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받을 수 있는 세습적인 작위가 아니라 그들이 한사코 도망하는 전도의 직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적그리스도의 독재라고 선언할 때에 그들은 의례히 그것은 위대하고 거룩한 분들이 자주 칭찬한 존엄한 성직 제도라고 말한다.31 저 거룩한 교부들은 교회의 성직 제도, 즉 사도들에게서 그들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영적 통치를 칭찬했으나 현대의 혼란 상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가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서, 주교들은 대부분 무례한 바보들이며 믿음에 대한 초보적 상식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유모에게서 방금 떨어진 덩치만 큰 아이들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좀 더 학식이 있는 주교가 있으면 그는 주교직을 호화 찬란한 생활을 할 권리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교황 제도에서 교회 담당 신부들은 구두장이에게 밭을 갈 생각이 없는 것같이, 양떼를 먹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바벨의 혼잡보다 더 심하며 (창 11 : 9),교부들이 규정한 것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14. 사제들의 도덕 수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도덕 생활을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은 어디 있는가(마 5 : 14, 13) 인생의 영원한 지표라고 할 거룩함은 어디 있는가? 오늘날 무절제와 나약과 주색 등, 모든 정욕에 깊이 빠진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이름난 계급은 없다. 그들처럼 온갖 기만과 사기와 반역과 배반에 능숙한 계급도 없다. 사람을 해하는 일에 그들같이 교묘하고 대담한 계급도 없다. 나는 그들의 거만과 자만과 탐욕과 잔인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 전체가 방종한 데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악폐에 진저리가 났으므로, 내가 부당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성이 없다. 그러나 그들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을 하나만 말하겠다. 만일 고대의 교회법에 따라 그들의 행위를 판단한다면, 파문을 면하거나 적어도 면직을 당하지 않을 주교가 거의 한사람도 없고 교구 신부들은 백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만큼 성직자들의 행위를 더욱 엄중하게 책망하라고 하던 옛날 규율은 폐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이 완전히 그러하다. 로마 교황의 기치 아래에서 일하며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이제 가서 그들의 사제 계급을 서로 자랑하라. 그들에게 있는 이 계급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사도들에게서나 교부들에게서나 고대 교회에서 온 것도 아니다.

 

15. 부제

이제 우리는 부제들과,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그들의 지극히 거룩한 임무를 보기로 하자.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런 목적으로 그들의 부제(집사에 해당하는)를 임명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제에게 제단에서 봉사하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또는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시킬 뿐이다.32 구제 물자 분배나 구제하는 일과 같은 그들이 옛날에 하던 일은 전연 없다. 나는 지금 제도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일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직분이라기보다는 사제가 되기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 미사에서 부제가 하는 일은 한 면에서는 고대를 흉내내지만 내용은 없다-그들은 성별하기 전에 제물을 받는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관습은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석하기 전에 서로 입을 맞추고 성단에 구제 물자를 드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먼저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다음에 구제품으로 표시했다. 빈민들의 심부름꾼인 집사는 들어오는 것을 받았다가 분배했다.33 지금 빈민들은 구제품을 바다에 던진 것같이 얻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 부제직으로 교회를 희롱한다. 사도들이 제정한 것이나 고대 교회의 관습에 비할 것이 전혀 없다. 참으로 그들은 재산 분배를 다른 데로 옮겨서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켰다. 강도들이 사람의 목을 찌르고 강탈한 물건을 나누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은 교회의 목을 찌르듯이 하나님 말씀의 빛을 꺼버린 다음에 거룩하게 쓰도록 봉헌한 물건은 모두 자기들이 나눌 전리품과 약탈품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나누고 각각 힘 자라는 대로 많이 집어 갔다.

 

16. 교회 수입의 분배

내가 여기서 설명한34 고대의 관습들은 혼란이 야기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말소되고 은폐되었다. 이런 약탈품으로 부자가 된 도시 주교와 사제들이 참사회의 이익이 되면 약탈품의 대부분을 압수해서 자기들끼리 나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계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분배가 무질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했든지, 적어도 고대교회 수입의 절반이 빈민에게 가던 것이 지금은 한 푼도 가지 않게 만들었다. 교회법은 명백하게 사분지 일을 빈민들에게 배당하고 또 사분지 일을 감독에게 배당해서 손님 대접과 기타 자선 사업에 사용하게 했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배당금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나는 말하지 않는다. 교회와 건물, 기타에 배당된 나머지도 필요한 때에는 빈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이 모두 도둑질한 것, 아니 신성 모독 행위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도 그들은 태연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묻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적어도 그들이 속이려는 상대가 감각과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항상 교회 안에 아름답고 정연한 질서가 있다고 자랑한다. 부제직이 도둑질과 강도질을 하라는 면허인지를 간단하게 대답해 보라.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부제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교회 재산의 관리가 완전히 모독적인 약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17. 교회의 참 광채와 거짓 광채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대단히 훌륭한 기만책을 쓴다. 그들은 교회의 위엄이 이런 장엄한 외관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을 시켜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자랑을 한다. 즉 사제 계급이 군왕들같이 호화롭게 보여야만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에 대해서 고대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이 실현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교회에 이런 일들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 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시 72 : 10-11 주해 참조)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사 52 : 1).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사 60 : 6-7). 내가 만일 그들의 후안무치함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나는 바보같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만일 어떤 유대인이 이런 말씀들을 악용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묻는다. 물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대해서 영적 의미로 한 말을 육과 세상에 옮겼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는 예언자들이 땅에 속한 물건을 사용하여 교회 안을 비춰야 할 하나님의 하늘 영광을 비유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말에 있는 이 복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제일 빈약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의 권능은 그 때에 가장 풍성했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이런 발언들의 뜻은 무엇인가? 어디 있든지 간에, 진귀하고 고상한 것은 모두 주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들에 대해서 명백히 한 말, 즉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흘을 바치고 왕관을 그의 발아래 던지며 그들의 재물을 교회에 바치리라고 한 말이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같이 참으로 또 완전하게 실현된 일이 있는가? 그는 그의 자색 옷을 벗고 통치자의 표지를 내려놓은 후에 일반 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복해서 엄숙하게 참회했다.35 그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경건한 다른 군주들도 교회의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며 건전한 교사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려고 노력과 주의를 기울인 때처럼 예언이 완전히 실현된 때가 있었는가? 그러나 그때의 사제들은 불필요한 재산이 많지 못했다는 것이 암브로시우스가 주재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주의 사제들은 빈곤이 영광이다.36 확실히 당시의 주교들은 재산이 있었고, 만일 외면적인 화려가 교회의 진정한 장식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의 진미와 화려한 옷과 많은 하인들과 웅장한 저택을 자랑하는 것은 목회자의 직책에 가장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겸손과 검소의 길을 걸었으며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자들 사이에 제정하신 빈곤한 생활을 따른 것이다.

 

18. 교회 재산의 부정한 사용과 정직한 사용

이 점에 대해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현재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아니 낭비하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 추천하며 고대 교회가 준수한 진정한 부제직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요약하려 한다. 중용을 지키라는 것은 거룩한 물건들의 논질이 요구하며 사도들과 거룩한 교부들이 교훈과 실천으로 명령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중용의 길을 볼 수 있는가? 고대의 검소는 말하지 않더라도 정직한 중용의 길을 일체 배척하고 있다. 극단적인 것, 부패한 현대 취미에 맞는 것만을 좋아한다. 동시에 살아 있는 성전들은 돌보지 않고 가장 작은 잔이나 병 한 개를 아껴서 수천 명의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 둔다. 내 자신의 생각으로 가혹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경건한 독자에게 이 한 가지 일을 고려하기를 청한다. 즉 내가 이미 언급한 툴루즈의 엑수페리우스 주교나 아카키오스나 암브로시우스나 그밖에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것이다.37 물론 빈민들의 심한 곤궁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불필요한 것인 듯이 돈을 다른 데로 빼돌리지 않을 것이다. (빈민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돈을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해독만이 있고 유익은 하나도 없다는 점은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물질들은 그리스도에게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뜻에 따라서 분배해야 한다. 그의 명령에 위반되는 일에 낭비한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계산하려 해도 그것은 허사일 것이다. 그러나 진상을 말한다면, 교회의 경상 수입에서 이런 일에 쓰는 부분은 많지 않다. 아무리 넉넉한 주교구와 대수도원일지라도 그리고 기증 재산이 풍부한 성직록을 아무리 많이 겸할지라도 사제들의 한없는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미신적인 일에 쓰도록 신자들을 유혹하여 교회를 지으며 조상을 세우며 그릇을 사며 예식복을 준비한다. 이런 식으로 이 밑 없는 구렁이 일상 구제 물자를 삼켜버린다.

 

19.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

그들이 농지와 소유 재산에서 받는 수입에 대해서, 내가 이미 말한 것 이외에 또 온 세상이 보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주교와 수도원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수입의 대부분을 얼마나 충실하게 처리하는가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교회의 질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검소와 중용과 절제와 겸손의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세상 집권자들에게 옹호하지 않겠다고 고용인의 수효를 늘리고 찬란한 건물과 화려한 의복과 빈번한 연회에 경비를 들였으니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며 간단한 음식으로 만족하라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딛 1 : 7) 촌락과 큰 저택들을 점령할 뿐 아니라 큰 지방과 온 나라들까지도 빼앗았으니 이 얼마나 그들의 직무에 배치되는 것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면 고대 종교 회의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회의들에서는 감독이 자기 교회에서 멀지 않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값싼 음식을 먹고 값싼 가구를 사용하라고 했다.38 주의 사제들은 가난한 것이 영광이라고39 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제롬이 네포티아누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손님으로서 그의 작은 식탁에 자주 앉아야 한다고 한 명령을 그들은 너무 엄격하다고 해서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롬이 곧 첨가한 말에는 부끄러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주교의 영광은 빈민을 돌보는 것이며 모든 사제의 수치는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했다.40 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자기들의 수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점을 추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합법적인 부제직이 없어진 지 오래라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며 이로써 그들이 교회의 한 미점이라고 해서 부제직을 자랑하는 것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는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1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

1.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교회 제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계급들이 후대에 부패하고 점점 더욱 악용되어, 현재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이름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찰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뜻은 경건한 독자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카톨릭교에 어떤 교회가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함으로써 분파의 죄를 우리에게 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조 전체의 갓돌(capstone)에 대해서, 즉 로마 교황청의 권위권에 대해서는 아직 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세계의 교회가 그들의 독점물이란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수위권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니며 고대 교회가 사실상 인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논한 제도들과 다르다. 그 계급들은 먼 고대에 만들어져서 시대가 흐르는 동안에 완전히 부패하고 마침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유일한 유대는 우리가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되지 않고 여전히 복종하는 것이라 또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한다.2 그들이 우리에게서 교회를 빼앗고 자기들만이 독점하려고 할 때에 특히 의지하는 논점은 하나인데, 즉 자기들에게는 머리가 있고 교회의 단결은 그 머리에 달렸으며 그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로마 교황청을 머리로 여겨,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는 목이 잘린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직 제도를 논할 때에 언제든지 출발점으로 삼는 원칙도 이것이다. 즉 로마 교황은(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그리스도 대신해서 모든 교회를 주관하며 로마 교구가 모든 다른 교구들 위에 수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위권의 정체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밝히겠다. 그들이 말하는 성직 제도, 즉 교회 조직의 진정한 형태를 위해서 어느 한 교구의 위신과 권한이 모든 다른 교구들을 능가하며 전체의 머리가 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런 필요성을 교회에 강요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부당한 법에 굴복시키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대자들은, 그 주장을 증명하려면 먼저 이런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율법에 있는 대제사장직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설치하신 최고 재판소를 언급한다.3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쉬우며, 그들이 한 가지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한 민족에게 유익한 일을 온 세계에 확대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한 민족의 근본법과 전세계의 근본법은 훨씬 더 다르다. 유대인들은 주위가 온통 우상 숭배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 가지 종교에 마음이 유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처소를 세계의 중심지에4 두셨다. 그들의 단결을 더 잘 유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한 사람을 임명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같이 진정한 종교가 전 세계에 퍼진 때에 동서의 지배권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어느 누가 간파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한 지방을 한 사람이 다스리므로 세계도 한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도 이런 모방은 불가하다. 대제사장이 그리스도의 한 예표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제사장직이 옮겨졌을 때에 권리도 옮겨졌다(히 7 : 12). 누구에게 옮겨졌는가? 교황은 자기가 교황이 된 때에 그 권리를 이양 받았다고 감히 파렴치한 주장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이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자나 후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이 제사장직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일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의해서 또 현재 아버지 앞에서 하시는 중보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푸시기 때문이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예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서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짓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시적인 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의 견해를 확인할 만한 것을 신약성경에서 한 사람에게 말했던 것밖에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다(마 16 : 18). 또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 : 15)고 하신 말씀도 그들은 인용한다.5
그러나 그들의 증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으려면, 그들은 우선 양을 먹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위임되었다는 것과 매는 것과 푸는 일은 곧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찬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주께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 : 2).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베드로는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나누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익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다른 말씀을 보겠다.
다른 구절에서, 매며 푼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두거나 또는 용서한다는 뜻이라고(요 20 : 23)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매며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에 반복 설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장 훌륭한 설명을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동시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고후 5 : 18, 10 : 6).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매는 것과 푸는 데 관한 구절을 그들이 얼마나 망측하게 왜곡하는가 하는 것을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지만6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7 지금은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에서 그들이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하는가를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이리라고 하셨다(마 16 : 19). 만일 "열쇠"라는 말과 매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면 모든 논쟁이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노고와 곤란이 많은 것이므로 교황은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런 일은 그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의 쾌락만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8
복음의 교훈이 우리 앞에 하늘을 열어 주는 것이므로 "열쇠"라는 말은 적절한 은유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이며 풀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으며 어떤 사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더욱 속박을 받는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황이 이 일만을 자기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를 시기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승하면 수고만 많고 이익은 적겠기 때문에 교황은 싫어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된다. 나는 이 약속 자체에는 사도의 직분이 존귀하다는 뜻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도직과 수고는 분리할 수 없다. 내가 제시한 이 정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파렴치한 짓일 것이며, 만일 이 정의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그의 동료들에게 주신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인격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교리의 권위 자체가 손상될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참으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나는, 이 바위를 향해서 돌진한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즉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모든 사도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매고 푸는 권한도 모든 사도가 공통하게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베드로를 온 교회의 통치자로 임명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때에 약속하신 것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부여하신다. 이를테면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다(마 18 : 18, 요 20 : 23). 한 사도에게 약속하신 것과 똑같은 권리를 모든 사도들에게 허락하셨은즉 어떤 점에서 베드로가 동료들보다 우월한가? 그들은 그가 단독으로 또 공동으로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공동으로만 받았으므로 우월하다고 말한다.9 내가 키프리아누스나 어거스틴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시지 않고 교회의 일치 단결을 명령하시는 뜻으로 하신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베드로와 똑 같았고 영예와 권한을 동등하게 나눠 받았다. 그러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인 것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10 어거스틴은 다음처럼 말한다.
"만일 교회의 신비가 베드로에게 없었다면 주께서는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 : 19)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라면 교회에는 열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가 열쇠를 받았을 때에 그것은 온 교회를 상징한 것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질문을 받은 후에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마 16 : 16)라고 대답했고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그만이 매고 푸는 권한을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연합을 몸소 상징했다. 따라서 연합이 모든 사람 안에 있으므로 한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11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마 16 : 18) 어느 다른 사람에게는 하신 일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에 대해서 바울과 베드로 자신이 한말과는 다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 대해서 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한다(엡 2 : 20-21).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돌이 되라고 명령하며, 저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돌 위에 놓여(벧전 2 : 5-6) 각각 우리의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또한 서로 연합하라고 한다(엡 4 : 16, 골 2 : 19참조). 그들은 그가 특히 그 이름을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제일인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영예나 지위를 물론 베드로에게 기꺼이 돌린다. 만일 그들이 원하면 모든 사도들 중의 첫 자리를 주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 위에 수위권을 가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대체 이런 연역법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는 열성과 교리와 용기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출중했고 그러므로 그에게 지배권이 있다는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 앞섰었고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 : 40,42).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주어라. 그러나 지위의 영예는 권력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사도들이 대개 베드로에게 이 영예를 준 것을 안다. 그는 집회에서 발언하며 토론과 권고와 충고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했다(행 2 : 14이하, 4 : 8이하, 15 : 7이하). 그러나 권력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읽어볼 수 없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아직 이 논쟁을 제기하지 않았으나12 우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주장하겠다. 즉 그들이 베드로라는 이름 하나를 기초로 하여 교회 전체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무력한 논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사기를 시작했을 때에 내세운 어리석은 주장은 논박은 커녕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 : 18)라고 하셨으므로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몇몇 교부들도 있었다고 그들은 아직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이런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왜 교부들의 권위를 내세워서 하나님에게 반대하는가? 진실로, 왜 우리는 이 말씀의 뜻에 대해서 논쟁하는가? 그것은 어떤 애매 모호한 점이 없고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교우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언했다(마 16 : 16).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바울의 말과 같이 기초는 하나뿐이며 그 이외의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3 : 11). 또 나는 여기서 교부들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언을 인용하려고 하더라도 나는 거부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13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무용한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 쪽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14 오래 전에 많이 논술하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성경 자체보다 더 훌륭한 해결을 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어떤 직책과 권한을 가졌으며 또 어떻게 행동했고 다른 사도들은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이 기록들을 전부 읽어 보라. 그렇게 하면 베드로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동등했으며 그들의 동료였으나 주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회의에 제출하며 해야 할 일에 대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의견 발표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결정도 그들에게 맡기고는, 그들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르며 복종했다(행 15 : 5-12). 목자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상관의 권위로써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료로 보며 동료들 사이의 관례대로 다정하게 권고했다(벧전 5 : 1이하). 그가 이방인과 가까이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것은 부당한 비난이었지만 답변하고 과실이 없는 것을 밝혔다(행 11 : 3-18). 그는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라고 동료들이 명령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행 8 : 14). 그를 보냄으로써 사도들은 그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했고, 명령에 복종하여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는 그들 위에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료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갈라디아서 하나만을 보면 우리는 곧 모든 의심을 버릴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거의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그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그에 대한 복종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요리상으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도 그런 일은 전혀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함께 일하기 위한 동료로서의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방인 사이에서 그가 받은 은총은 베드로가 유대인 사이에서 받은 은총보다 적지 않았다고 한다(갈 1 : 18, 2 : 8). 끝으로, 베드로의 행동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때에 바울이 시정했고 베드로도 그 책망에 순종했다고 한다(갈 2 : 11-14). 이 모든 기록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동등했거나 적어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사이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분명하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의 동료이지 상전이 아니므로 아무도 사도직에서 그들을 자기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다. 8-10)

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베드로에 대해서 그가 사도들 중의 제일인자였고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한 위신을 가졌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특수한 예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만들며, 한 번 있었던 아주 다른 일을 영구화할 이유는 없다. 사도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두머리이었다.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열두 명 위에 한 명이 서 있었다고 해서 십만 명 위에도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을 수 있는가? 열두 명이 한 명을 세워 자기들을 통솔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이 이것을 허락하며, 인간의 자연법도 집회에서는 비록 모든 사람의 권한이 같을지라도 한 사람은 사회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지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로마 시대에) 집정관이 없이는 원로원 회의가 없었고 재판장이나 검사가 없이는 법정이 열리지 않았다. 의장이 없는 위원회나 회장이 없는 협회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베드로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수위권을 주었다고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15
그러나 소수 사이에 있는 일을 직접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아무도 단독으로 전세계를 지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뿐 아니라 전체에서도 유일한 최고수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루미들과 벌들은 언제든지 하나의 지도자만 택할 뿐 여럿을 택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서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제출한 예를 인정한다. 그러다 벌들은 한 통치자를 선거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모이는가? 모든 여왕벌은 각각 자기 집 만으로 만족한다. 그와 같이 두루미들도 떼마다 지배자가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개교회마다 자체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 아닌가? 다음에 그들은 정치 관계의 예를 든다. "다수 지배는 좋지 않다"16라고 한 호머의 말을 인용하며, 군주 정치를 칭찬한 세속 문인들의 발언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대답은 쉽다. 호머의 율리시즈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군주 정치를 칭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한 뜻은 한 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같이 권력은 동료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7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전 세계가 한 군주의 지배 아래에 포섭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전혀 어리석은 카톨릭 교회의 생각을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교회 조직에서도 같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아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 16). 우리는 바울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한 몸에 포함시키면서도 머리라는 영예와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남겨 두는 것을 알지 않는가? 바울이 각 지체에 일정한 분량과 일정한 제한된 기능을 배정하여 완전한 은총과 최고의 지배권이 그리스도에게만 있게 하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권위와 이름으로 지배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정당하다고 항의할 때에, 여기 대해서 그들이 의례히 쓰는 궤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로서 그의 밑에 한 행정 수반이 있지 못할 것은 없다고18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이런 직위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 궤변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공급되는 힘은 전적으로 각 지체에 보급되며 그 힘은 하늘에 계시는 유일한 머리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엡 4 : 16). 그들이 더 분명한 설명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이시며 이 영예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확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대리로 임명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이 영예를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명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충분히 반박할 만한 구절만 많다(엡 1 : 22, 4 : 15, 5 : 23, 골 1 : 18, 2 : 10).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여러 번 교회의 산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러나 하나인 머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의 묘사를 통해서, 한 머리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지만(행 1 : 9)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엡 4 : 10).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실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봉사의 직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주께서는 각 지체에 베푸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우리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엡 4 : 7). 그러므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운운한다(엡 4 : 11). 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위에 자신의 대행자를 세우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특히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사람들의 봉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왜 그의 기능을 위임하신 사역자의 머리에 의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하나가 되는 문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라고 한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특수한 방법을 배정하면서도 모두에게 공통된 일을 배정한다. 그는 연합을 권장할 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고(엡 4 : 4- 5) 말한 다음에 왜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제사장을 첨가하지 않았는가?19 그런 사람이 임명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적절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잘 생각해 보라. 확실히, 바울이 교회의 신성하고 영적인 통치를 그리려고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성직자 계급 제도"라고 불렀다. 그는 목사들 사이의 단독 지배 제도를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바울은 신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방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역자들의 머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각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라(엡 4 : 7) 각 지체에게 독특한 기능을 부여한다(엠 4 : 16).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늘의 성직자 계급 제도와 땅의 성직자 계급 제도를 비교해서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할 필요도 없다.20 하늘 제도에 대해서 분수에 넘게 지혜로운 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며, 땅에 있는 제도를 세울 때에는 주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에서 그 개략을 진술해 보이신 형태 이외의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원한 수위권을 소유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

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 내에서의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확정되었으므로 그것은 끊임없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이 주장을 정신이 올바른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베드로의 교구가 로마에 설정되어 로마 시의 감독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온 세계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증명하려는가? 그들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이 높은 영예를 어떤 권리에 의해서 한 장소에 결부시키는가? 그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예루살렘에 계셨고 거기서 감독직을 다하셨고 죽음으로써 그의 제사장직을 완성하시지 않았는가? 목자장, 최고의 감독, 교회의 머리이신 그도 한 장소에 대하여 영예를 얻으실 수 없었는데 그보다 훨씬 열등한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베드로는 로마에 정좌했으며 따라서 베드로가 수위권자의 교구를 거기에 설치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치하다는 정도를 넘은 미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논리를 쓴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최고의 교사요 예언자 중의 으뜸되는 모세가 그의 사명을 다하고 또 죽은 그 광야에(신 34 : 5) 수위권의 자리를 설치해야만 했을 것이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유쾌한 논법을 쓰는가를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감독좌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특권으로써 그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고21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음 감독좌는 어디 있었는가? 그들은 안디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당연히 수위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디옥은 첫째인 때가 있었다고 그들은 인정하지만 베드로가 그곳을 떠나서 로마로 이주함으로써 그 영예까지도 옮겨 온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교황 마르켈루스가 안디옥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베드로의 감독좌는 처음에 당신들과 함께 있었습니다만 후에 주의 말씀에 따라 이곳으로 감독좌를 옮겼습니다. 이와 같이 첫째인 때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로마 감독좌에 양보했습니다"22 그러나 묻노니, 저 어진 사람이 주께서 그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계시를 받았는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그들은 이 특권이 인적인 것인지 또는 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혼합된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23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은 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권은 장소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만일 물적인 것이라면 일단 한 장소에 준 다음에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거나 하더라도 그 장소에서 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얼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장소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대답을 택하든 간에 로마는 결코 자기의 수위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곧 또 쉽게 추론하며 증명할 것이다.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 수위권이 안디옥으로부터 로마로 이전되었다 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안디옥은 둘째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수위권을 차지한다면 둘째 자리는 그가 처음에 감독좌를 설치했던 곳에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가 안디옥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는가? 일개 제자에 불과한 사람의 교회가 베드로의 감독좌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인가? 각 교회의 영예가 그 설립자의 위엄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나머지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바울은 세 제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을 말하고 이 사람들은 기둥과 같다고 한다(갈 2 : 9). 만일 베드로에 대한 경의로 로마 교황청에 첫 자리를 배정한다면 요한과 야고보가 살았던 에베소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은 당연히 둘째 자리와 세째 자리를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대 총감독좌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맨 끝자리를 차지했었고24 에베소는 맨 끝 구석 자리에도 붙을 수 없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과 다른 사도들이 주관한 교회들과 그 밖의 교회들은 서열에서 전연 무시되었다. 제자에 불과했던 마가의 감독좌는 영예를 받았다. 그들은 저 순서는 상하가 바뀐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는 그 설립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원칙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

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그리나 나는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주관했다는 그들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유세비우스가 베드로는 로마교회를 25년간 다스렸다고 한 것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약 20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고(갈 1 : 18, 2 : 1이하) 그 후에 안디옥에 온 것이 분명하다(갈 2 : 11).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7년, 유세비우스는 25년이라고 계산한다.2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베드로를 죽였다고 그들이 말하는 네로의 통치 끝까지는, 37년밖에 되지 않는다. 주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은 티베리우스의 재위 제 18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대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20년을 감한다면 겨우 17년이 남고 이것을 두 감독구에 나눠야 한다. 만일 그가 안디옥에 오래 머물렀다면 로마에는 잠깐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썼고(롬 15 : 25) 예루살렘에서 잡혀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4년 전에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주관하고 있었다면 그의 이름을 빠뜨렸을 리가 없는데 로마서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며 아는 사람은 모두 말하는데(롬 16 : 3-16) 베드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길고 난해한 증명을 할 필요가 없다. 일 자체와 로마서의 논법 전체가,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그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고 높이 외친다.26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그 후에 바울은 한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왔다(행 28 : 16). 누가는 그가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28 : 15).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바울은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썼다. 어떤 편지에서는 교우들의 이름으로 문안을 보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에 거기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만일 베드로가 있었다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곁에는 디모데 같이 주의 일을 충실하게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모두 자기 일만을 생각한다고 불만을 말한다(빌 2 : 20- 21). 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처음 변명했을 때에 아무도 곁에 없었고 모두 그를 버렸다고 더욱 심하게 불만을 말한다(딤수 4 : 16). 그러므로 그 때에 베드로는 어디 있었는가? 그가 로마에 있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가 복음을 버렸다고 바울의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인가?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부언했기 때문이다(딤후 4 : 16). 그러면 베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언제 로마의 감독좌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 교회를 주관했다고 하는 점에서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그 저술가들은 누가 베드로의 후임이었느냐 하는 점에서 의견이 다르다. 혹은 리누스라 하며 혹은 클레멘트라고도 한다.27 또 그들은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이 논쟁했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28 어거스틴도 미신에 대해서 논할 때에,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이긴 날에 금식을 하지 않는 로마의 습관은 경솔한 의견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끝으로,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덮어놓고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생각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곳 감독이었다는 것, 특히 오랫동안 감독이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 문제에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사도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인 반면에 그의 사도직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고(갈 2 : 7-8) 바울이 확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언약한 협력 관계가(갈 2 : 9) 우리 사이에서 유효하기 위해서, 아니 성령께서 하신 임명이 우리 사이에서 확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는 베드로의 사도직보다도 바울의 사도직에 더욱 유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그들의 책임을 나누셔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바울은 우리들에게 보내셨다. 자,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그들의 수위권을 찾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근거는 지극히 빈약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

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옹호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고대 교회를 살펴보겠다. 그들은 한 공리처럼 자랑하는 것이 있다. 즉 교회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땅 위에 최고의 머리가 있어서 모든 지체가 그 머리에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주께서는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다음에는 계승권에 의해서 로마 교황청에 주셨으며 세상 끝까지 거기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자랑할 때에 이 관습은 맨 처음부터 항상 지킨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악의로 왜곡하기 때문에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즉 로마의 교회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이 큰 경의를 표명하며 경건하게 언급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베드로의 전도로 로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생각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유력했기 때문에 이 생각이 로마 교회에 호감과 권위가 돌아가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를 존경하는 뜻으로 "사도의 교구"라고 불렀다.
둘째,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곳 사람들은 교리와 지혜와 수완과 풍부한 경험 등에서 다른 곳 사람들보다 훌륭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참작해서 로마 시의 명예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더 훌륭한 재능들이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방과 희랍과 아프리카에서까지도 교회들이 의견 차이로 많이 흔들렸을 때 로마는 그들보다 고요했고 문제가 적었다. 그래서 지위를 빼앗긴 경건하고 거룩한 감독들이 로마에 가서 피난처를 얻은 예가 많다. 서방 사람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두뇌가 예민하지 못하고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29 새것에 끌리는 점도 적었다. 저 불안한 시대의 다른 교회들보다 로마 교회가 문제가 적었고, 한번 받은 교리를 더욱 굳게 지켰다는 사실은 그 권위를 많이 높였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설명하겠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에서 로마 교회는 적지 않은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의 논적들이 다른 교회들에 대한 수위권과 최고 권력을 로마에 주고자 한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먼저 그들이 그렇게 역설하는 연합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간단히 보여주고자 한다. 네포티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롬은 연합의 여러 가지 예를 말한 후에 끝으로 교회의 성직 계급 제도를 언급한다. 각 교회에는 그 자체의 감독과 수석 장로와 부감독이 있으며 교회의 질서는 모두 그 치리자들에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30 이렇게 말하는 그는 로마 교회의 장로인데 그는 교회 질서에서 연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는 한 머리가 모든 교회를 연합시키는 유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당면한 논증에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잊어버리고 빠뜨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만 허락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기꺼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의 진정한 기초는 키프리아누스가 뛰어난 말로 묘사한 것임을 제롬은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직은 하나요, 이 '전체'의 한 부분을 각 감독이 차지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요, 결실이 늘어남에 따라 교회는 많은 수로 널리 퍼져 나간다. 태양의 광선은 많으나 빛은 하나이며, 나무에 가지는 많으나 굳센 줄기 하나가 땅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으며,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흘러 각각 자체의 풍부한 데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고 갈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도 주의 빛을 풍부하게 받아 많은 광선을 온 세상에 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빛이 각처에 확산되는 것이다. 몸의 연합은 깨뜨려지지 않고 교회의 가지들은 온 지구 위에 뻗어 나가며 넘치는 시내들을 쏟아 보낸다. 그러나 머리와 근원은 하나이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는 음녀가 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집을 알며 정절과 정숙으로 결혼의 신성함을 지킨다." 이 말들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 전체를 거느리는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 이 머리 아래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전체의 부분들을 차지한다고 한다.31 완전한 감독직이 그리스도의 수중에만 있고 각 감독은 그 일부분을 가진다면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은 어디 있는가?
이런 말들을 인용한 목적은 카톨릭 교도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원리, 즉 지상의 한 머리 아래에서 성직 계급 제도의 통일이 된다는 생각을 고대 교부들이 전연 몰랐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