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면 자기 자만이 없어진다. 1-3)

1.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1 옛날 격언이 역설한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대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수치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필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비참하게도 자기 기만에 빠지고 심지어는 눈뜬 소경이 된다는 것은 더우기 혐오스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훈은 정말로 귀중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더이상악용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자신을 알라고 권하면서 자기의 가치와 우수성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허망한 자신과 자만을 부풀게 만드는 것만을 자기 속에서 관찰하기를 바란다(창 1 : 27).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위대했을까를 아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조금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묵인하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때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기 확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될 것이다. 태초에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창 1 : 27) 우리의 마음속에 선에 대한 열의와 영생에 대한 명상을 넣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野獸)와 구별하는  인류의 위대한 고귀성이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으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해력을 부여 받은 것을 감사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궁극적 목표인 복된 영생을 향하여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우수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사람과 함께 우리는 원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 이 일이 근원이 되어 우리 자신에 대한 중오심과 불쾌감,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겸손이 생기며, 이로 인하여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선을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새로운 열정의 불길이 일어난다.

 

2. 인간의 본성은 천성적으로 거짓된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것들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빼앗고, 우리를 순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행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치심으로 우리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한 빈곤과 수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선한 특징들을 생각하게 하는 원칙이 얼마나 유쾌한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을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천성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알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천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점에서 대개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믿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어도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신뢰를 얻는다.2 비록 비교적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하나님께도 조금은 양보를 해서 만사를 자기의 공로라고 하지 않는 듯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공로를 분배한 결과에는 자랑과 과신의 근거가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된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여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 언행을 가장 기뻐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대중 앞에서 인간성을 가장 듣기 좋은 말로 찬양한 사람의 말을 사람들은 듣기를 좋아하고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도륵 가르치는 인간의 우수성에 대한 이런 예찬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도취 이외의 아무 성과도 없으며 참으로 거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철저한 파멸로 몰아 넣는다. 우리가 모든 허탄한 보장을 믿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숙고하며 계획하고 시험하며 착수할 때에, 우리가 노력을 시작하자마자 건전한 이해력과 진정한 덕성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없어지며, 그래도 경솔한 돌진을 계속해서 드디어 멸망에 빠진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끝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특징만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류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인식이 향상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최악의 깊은 무지 속으로 빠질 것이다.

 

3. 자기 인식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요 문제

그러므로, 지혜의 둘째 부분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판단과 하나님의 진리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상의 큰 차이가 있다. 육신적인 판단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력과 정직함만을 믿고, 담대하게 덕을 닦으려고 노력하며 모든 죄악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탁월하고 존귀한 경지를 향해서 정성껏 노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과신할 이유를 찾아 낼 수가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맡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시조 아담에게 주시고 또 참으로 우리의 가슴에 의와 선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본래의 고귀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우리의 처음 상태나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생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의 교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을 꺾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면 최초란 무엇인가? 우리의 타락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무리와는 완전히 멀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가 싫어 신음하며 신음 중에서도 저 잃어버린 고귀성을 사모한다.3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안에서 기뻐할 원인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 믿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동의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4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5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부족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부족함을 알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으로 땅에 엎드릴 것이며, 끝내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될 것이다. 첫째 점을 고려하면 자기의 의무의 성격을 인식하게 되며, 둘째 점에서는 그 의무를 실천하려는 자기의 능력의 한도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교훈을 절차가 요구하는 대로 각각 논하겠다.

 


(담의 죄로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상실하였고 전 인류 파멸을 가져왔다. 4-7)

4. 타락의 역사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창3장) : 믿음이 없음

하나님께서 엄한 벌을 주신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흉악한 범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야기시킨 아담의 이탈에는 어떤 종류의 죄가 있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아담의 죄를 탐욕에 의한 무절제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최고의 미덕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축복받은 그 기름진땅에는 여러 곳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풍성했고 또한 풍성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종류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깊이 고찰하여야 한다. 아담의 복종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아담에게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나무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하나님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악한 정욕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바랄 수 있다고 한 약속과 그와는 반대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맛보기만 하면 죽음이 있으리라고 한 무서운 경고가 그의 믿음을 시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6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유혹의 성격에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얻어야 한다. 부정한 생각이 있었기에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5 : 1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무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존엄 또한 우리 사이에 거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경배도 여전히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이의 권위를 멀리하는, 아니 오만하게 자기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그 변절이 추악하고 가증한 죄라면, 아담의 죄를 관대히 보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루한 결단과 결합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여 하나님에게 허위와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한 데 찬동한 것이다. 끝으로, 배신으로 인하여 야심이 생겼으며 야심은 참으로 완강한 불순종의 모태가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린 사람은 정욕이 이끄는 대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 때에 사탄에게 귀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참조, 렘 9 : 21), 오늘날 우리가 같은 창문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 앞에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는7 버나드의 가르침은 옳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도 결코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종은 일이라는 생각과 행복한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한 좋은 굴레가 된다. 그러므로 아담은 악마의 모독적 언사에 휘말려 한껏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소멸시킨 것이다.

 

 5. 제일 첫 번째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롬 8 : 22)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8 : 20). 원인을 찾는다면,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은 확실히 사람이 받을 벌의 일부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더라도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 하늘 형상이 그에게서 없어진 후에 이 벌-처음에 그를 훌륭하게 장식했던 지혜와 힘과 성결과 진실과 공의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무지와 무력과 불결과 허영과 불의 등의 가장 추악한 병들이 생겨난 벌-을 받은 것은 그 사람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죄"라는 말은 본래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분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그 죄책을 맡게 되어 죄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상식과 가장 거리가 먼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언급이 모호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적어도 그들의 설명은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Pelagius)는 겁내지 않고, 아담의 죄는 그 자신의 손실을 초래했을 뿐 후손은 해하지 않았다는 모독적인 망상을 들고 나섰다.8 사탄은 이 궤변을 가지고 이 질병을 덮어 가리워서 고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자(롬 5 : 12), 펠라기우스는 그 전달은 모방에 의한 것이지 번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므로 선한 분들이(그 중에서도 특히 어거스틴이) 우리는 외부에서 나타난 사악으로 인해서 부패한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타고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9 이 점을 부인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외 무리가 모든 다른 점에서 파렴치한 짐승들이었다는 것을 저 거룩한 분의 경고에서 깨닫는 사람은 그들의 무모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시 51 : 5)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더욱 칭송하기 위해서, 자기는 잉태된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있는 일이 아님이 분명하며, 따라서 그는 인류의 공통된 처지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전염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웠고 오염이 많았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욥기서에서 말하고 있다(욥 14 : 4).

 

6. 원죄는 모방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의 불결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출생할 때부터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조상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천을 찾지 않는다면 이 오염의 시초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 : 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었다(롬 5 : 17). 이런 관점에서 펠라기우스파들은 어떤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인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그 의가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방하기 때문인가? 누가 이런 모독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그에 따른 그의 생명이 전달 또는 나누어져서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 의와 생명은 아담에게서 상실되어 졌다가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는 결론이 따른다. 또 죄와 죽음은 아담을 통해서 은밀히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없어진다는 결론이 따른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말은(롬 5 : 19)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우리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진리의 빛이 투명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더 이상의 길고 자세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진 생명이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전 15 : 22). 그는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죄의 병에 전염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불의의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정죄가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발언의 다른 부분으로, 거기에서 그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일이 나타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의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그 놀라운 교제뿐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롬 8 : 10).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해석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 즉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 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책은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며 그가 빠진 그 부패를 모든 후손에게 감염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은(엡 2 : 3), 모든 사람이 이미 모태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바울이 "본질"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가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서 부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죽음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생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를 부패시키고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까지 감염되고 만연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악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 : 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모두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신다(요 3 : 5).

 

7.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죄

오염은 주로 영혼에 있는 것이므로, 자식의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된10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무척이나 교부들을 괴롭혔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논의할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간성에 부여하시고자 하신 은사들을 아담에게 위탁하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야담이 그 받은 은사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은사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받은 것이며, 그 은사는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의심할 것인가?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에 인간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빈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썩은 뿌리에서 썩은 큰 가지가 나왔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했고 자녀는 다시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을 옮겨 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담에게서 시작한 부패는 선조로부터 후손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흘러간 것이다.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을 가지며 또 잃어 버리도륵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11
자녀는 부모의 순결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것이므로(참조, 고전 7 : 14),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말한다. 그러나 이 궤변에 대한 논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영적 중생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육적 번식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12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 부모의 성결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받은 보편적 저주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 은총에서 오기 때문이다.

 

(원죄는 본질이 타락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질에서 온    것은 아니다. 8-11)

8. 원죄의 본질

불확실한 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원죄의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자.13 나는 여러 저술가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연구하려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보기에 가장 진리에 맞는 듯한 것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자주 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나오는 행위, 예컨대 간음, 우상 숭배, 도둑질, 미움, 살인, 열락 등을 그는 "죄의 열매"(갈 5 : 19-21)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행위를 보통 "죄들"이라고 부르며, 바울 역시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어느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행으로 인하여 받는 책임이 아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죄 없고 책임 없는 우리가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그 저주에 함께 말려들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한 심판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거스틴은 죄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 사이에 전파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죄를 자주 "타인의 죄"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죄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14 사도 바울도 가장 명쾌하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증언한다(롬 5 : 12). 즉 그들은 원죄에 빠져 쌓였고 그 오점들로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들까지도 모태에서부터 저주를 받았지만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에 있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에게서 불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불의의 씨는 그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본성 전체는 죄의 하나의 씨앗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죄로 인정된다는 결론이 된다. 허물이 없으면 처벌도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이미 앞에서 언급된 육의 일을 하는-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시초의 의의 결핍"을 원죄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의 의미를 전적으로 이 정의에 포함시키지만 그 위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15 이것은,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냥 있도록 놔두지 않는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원죄를 "육욕"이라고16 말한 사람들은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육욕으로 더럽혀지고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보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첨부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9. 죄는 전 인류를 전복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나는 말한다. 저속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부패를 소위 감각적 충동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또는 그 부패를 "불쏘시개"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감성" 부분만을 유인 선동해서 죄에 끌어넣는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완전한 무지를 폭로했다. 그는 부패가 있는 자리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에 있다고 말하면서 육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육에서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17 이것은 마치 바울이 영혼의 본성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이 초자연적 은총에 반대한다고 가르쳤다는 말과 같다. 바울은 부패는 영혼의 일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는 치명적인 들지 않은 순결한 부분은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부패한 본성을 논할 때에, 눈에 보이는 욕망의 과도한 충동을 비난한 뿐만 아니라 특히 지성의 눈이 멀고 마음이 썩어 버렸다고 주장한다.18
로마서 3장은 단지 원죄에 대한 것을 나타나게 한 것에 불과하다(1-20절). "새롭게 함"에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은 옛 사람과 육에 반대하며, 영혼의 저속한 감성적 부분을 시정하는 은총을 표시할 뿐 아니라 모든 부활의 완전한 개혁을 포함한다. 따라서 바울은 동물적 욕망을 없애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거기에 더하여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요구한다(엡 4 : 23). 다른 곳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같은 권고를 한다(롬 12 : 2). 그러므로 영혼의 탁월함과 존귀성이 특히 빛나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해서 치유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는 죄가 어느 정도로 지성과 심정을 모두 점령했는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육으로 향하는 생각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 8 : 7), 따라서 사망인 것이다(롬 8 : 6).

 

10. 죄는 우리의 천성이 아니고 우리의 천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허물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19 물러가도록 하라. 아담의 상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작품을 찾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부패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처음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예방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더 잘 마련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20 이런 반론은 뚜렷한 지나친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경건한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점은 후에 적당한 곳에서21 논하게 될 예정의 비밀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타락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치명적 상처가 본성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외부로부터 온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불평을 돌릴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 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전 7 : 29). 분명히 인간의 멸망은 그 책임을 인간에게만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음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허무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의 "자연적인" 부패

그러므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유래 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22 우리는 그 타락이 본성에서 흘러 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래 된 첨가된 성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려고 한다. "선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타락이 거의 상속권과 같이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있으므로 악행에 의해서 얻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2 : 3). 자기가 지으신 가장 작은 것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을 적대시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피조물의 부패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이 올바른 것이라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육을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죄들을 "선천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23 그리하여 마니교도들의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은 소멸된다. 그들은 사람에게 약한 본질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악의 원인과 시초를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린다는 인상을 주지않을 목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감히 다른 조물주를 만들었던 것이다.24

 

제 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논제의 위험성들 : 관점을 수립. 1)

1. 이제부터 우리는,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가 노예 상태로 전락한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아니면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진상를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나는 논의 전체가 향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겠다.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양쪽에서 오는 위험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⑴ 인간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혀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자기 만족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⑵ 인간에게 사소한 것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위험성 모두를 지적한다.1
이같은 두 위험에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혀 없으며 심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편이 그의 천품에 최고의 고상한 덕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태만한 그를 더 날카롭게 자극하며 분발시킬 수 있다. 이 둘째 점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나는 본다. 인간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자랑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영예의 표시들이 뚜렷했을 때에도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극도의 치욕된 상태로 떨어진 지금은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최고의 영예의 최정상에 올라 있을 때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밖에 사람에게 돌린 것이 없다(창 1 : 27).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선행들로 인해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2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목에 대한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의 파멸에 신성 모독을 첨가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의 자신의 힘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아서 갈대와 비교하는 것조차 과대 평가인 것이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가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반복해서 자유 의지는 옹호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보다는 그들에게 짓밟히는 편이 더 많다는3 매우 타당한 말을 하곤 했다. 이 점은 서론의 의미로 말해 둘 필요가 있는데, 사람 안에 하나님의 힘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밑바닥에서부터 뿌리뽑혀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이런 논쟁은 쓸데 없다고 하지는 않더라고 전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해서 심히 싫어하기 때문이다.4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근본 문제인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의지론에 대한 비판.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을 신뢰한다.

위에서 우리는 영혼의 능력은 지성과 심정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므로,5 이제 이 두 부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겠다. 철학자들은, 거룩한 빛이 가득하여 가장 효과적인 의견을 알리며, 우월한 힘이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서 등불과 같이 모든 생각을 비추며 왕과 같이 지배한다고 상상하는데, 이 견해는 그들 사이에서 대체로 분명하게 일치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감각에 의한 지각은 우둔하며 보는 것이 희미해서 항상 땅에서 기어다니고 저속한 일에 얽매이며 결코 진정한 식별을 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만일 욕망이 이성에 복종하고 감성에 굴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덕을 추구하게되고 바른 길을 계속하며 의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감성의 노예가 될 때, 그 욕망은 감성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침내 정욕으로까지 전락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6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내가 위에서7 말한 능력들은-지성과 감각과 욕망 또는 의지(이 마지막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영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선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의 우수성을 견지하며 자연이 부여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저 저속한 충동에 대하여서는, 감성은 사람을 오류와 망상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엇보다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때때로 인간이 자기 안에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심히 어려운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쾌락의 유혹을 기뻐하며 혹은 행복에 대한 망상에 속기도 하고 혹은 무절제한 기호의 습격을 받아, 플라톤의 말과 같이,8 여러 밧줄에 매인 듯 여러 방향으로 끌린다. 따라서 우리의 악한 견해와 악한 관습으로 인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준 희미한 빛이 곧 꺼져 버린다고 키케로는 말한다.9 이런 병들이 일단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때는 아무도 그 맹렬한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없다고 철학자들은 인정한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이 병들을 사나운 말에 비교한다. 병거를 모는 사람이 병거에서 떨어지듯이 이성이 혼란될 때에 이 병들은 아무런 억제도 받지 않고 마구 날뛴다고 한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능력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면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우리는 하는 일을 하고 피하는 일은 피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싶을 때에 어떤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11 참으로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신들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선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방자하게 호언하기까지 한다. 또한 코타(Cotta)의 입을 통하여 키케로가 한 말도 여기에서 왔다. "사람은 모두 자기 힘으로 덕을 얻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 결코 그 현명한 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으며 자기의 덕을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는 말한다. "행운은 하나님께 구하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다."12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에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

 

4. 일반적으로 교부들의 생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교회의 저술가 모두가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건정성에 중대한 손상이 있었으며, 악한 욕망으로 인하여 의지가 심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지나치게 철학자들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13 그중에서 초기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첫째로, 인간의 무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체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14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으로 어리석게 생각될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조화시키려고 타협시켰다. 그러나 둘째 점, 즉 나태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점에 그들은 특히 유의했다. 이 점은 그들의 말에서 나타나 있다. 어디선가 크리소스톰도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우리의 권한에 맡기셨으므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을 허락하시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으로 받아 주신다." 또, "악한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 일이 많으며, 선한 사람도 나태해서 타락하여 악하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연성을 부담시키시지 않고 적당한 치료법을 제공하시며 모든 것을 환자 자신의 판단에 맡기신다." 또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바르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몫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도 동시에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많이 쓴 표현 중의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하는 표현이다.15 제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시작할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16
확실히 이런 발언들은 덕에 대한 인간의 열의를 과대 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오직 나태하기 때문이라고 논하지 않으면 우리가 타고난 나태를 분발시킬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 일을 했는가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용한 이 의견들이 전혀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뒤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톰이 인간의 의지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주장이 다르며 혹은 동요하고 또 혼란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확실한 것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각 사람의 의견을 정확하게 나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점만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인용할 것이다.
그들의 후대의 다른 저자들은 각각 인간성을 교묘하게 옹호하노라고 자랑하고자 했지만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사람은 감성부분에서만 부패하고 이성은 완전 무결하며 의지 또한 대부분 손상이 없다고 하게되었다.17 동시에 "사람의 자연적인 천품은 부패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천품은 제거되었다"18고 하는 그 유명한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나도 본성의 부패상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할 때에는 이 말로 만족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초자연적 능력도 빼앗긴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의깊게 고려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너무도 철학자들과 같은 말을 했다. 라틴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올바른 것같이 항상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더욱 외람된 말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각 자기 손에 힘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력 또는 자주라고19 불렀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천품으로 받았다는 원칙을 모든 사람이-일반 민중까지도-믿었다. 그러나 명성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도 이 원칙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말의 영향력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의 단순한 증언에 의해서, 인간은 그 본성에 따라 선악간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결정하겠다.
모든 사람의 글에 자유 의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교회 저술가들은 오리겐이 제출한 정의에는 찬성하는 듯이 보이는데, 오리겐은 자유 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20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 의지라고 한 어거스틴도 오리겐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21 베르나르두스는 자유 의지를 정교하게 말하고자, "의지의 불멸의 자유와 이성의 틀림없는 판단 때문에" 그것은 "찬동"이라고 더욱 모호한 말은 했다.22 안셈의, "공정을 위한 공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유명한 정의도 그다지 명백하지 못하다.23 그 결과 롬바르드와 스콜라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정의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정의가 더욱 분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총이 없으면 의지는 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더 좋거나 혹은 설명을 더욱 자세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 하는 일이며 따라서 의지라는 명사는 이성을 가리키는 데 써야 한다고 그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는 좌우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24 그리하여 토마스는,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선택 능력" 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한다.25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유 결정의 힘이 있는 자리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인 것이다. 그들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보는 것이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이다.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것을26 대개 인간의 자유로운 의견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돌렸다. 이 점에 대하여 '이방인의 소명'이라는 저서의 저자는 감성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의 세 가지로 의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의 두 가지는 인간이 넉넉히 받았으며 마지막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친다.27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는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지금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발언만을 반박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먼저 사회 활동 또는 외부적 활동을 위해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이다. 나는 이 둘째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만 처음의 문제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잘 표명하게 될 것이다.28 그런데 스콜라 학자들은 세 가지 자유를 구별하여, 첫째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 처음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다.29 나는 기꺼이 이 구별에 찬성하지만, 필연성과 강제를 혼동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점의 범위와 이것을 염두에 둘 필요성은 다른 곳에서 밝혀질 것이다.30

 

6. "역사하는" 은혜와 "협력하는" 은혜란?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 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 즉 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은총은 평등하고 아무에게나 차별없이 분배된다고 하는 광신자들에31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선을 행할 힘을 완전히 박탈당하였는지 빼앗겼는지, 아니면 비록 미약하지만 아직은 다소의 힘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자체만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은총의 도움을 얻으면 자기 몫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명제집의 저자는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처음 종류를 "역사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선을 행하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가지도록 마련하다. 둘째 것을 "협력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하나의 보조로서 선한 의지를 따른다.32 이 구분에서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한 효과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효과적이 되지 못하는데도-선을 추구한다고 암시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두스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단정하면서도, 인간은 자기의 충동으로 이런 종류의 선한 의지를 추구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롬바르드는 어거스틴에게서 이 구별을 얻어 왔노라고 하지만.33 이 생각과 어거스틴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부분 또한 애매모호하여 부패한 해석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나는 싫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조하는 은총과 우리가 협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은총을 멸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든, 그렇지 않고 그것에 복종해서 확인하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인의 소명의 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성의 판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은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공로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성령의 협력이 없이는 할 수 없었을 일이, 자기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을 사람들의 공로로 인정된다."34 내가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 것은, 독자 여러분으로 하여금 비교적 건전했던 스콜라 학자들과 나의 생각에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우리와 더욱 가까운 시대의 궤변가들은,35 그들이 고대에서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나와의 차이가 더욱 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인정하는가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행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강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롬바르드는 마지막으로 단언한다. 롬바르드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악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고 또 죄를 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경우라도 이 자유는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36

 

7.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 결정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선과 악을 선택하는 힘을 동등하게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강요를 받지 않고도 자기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에 훌륭한 이름을 붙여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해서 노예가37 되었으며, 인간의 그 의지는 죄의 족쇄로 묶여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귀한 자유인가? 사실 나는 말다툼을38 몹시 싫어하며, 그 말다툼으로 교회는 쓸데 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뜻이 있는 말과, 특히 치명적 오류와 관련된 말을 피하는 데는 신중하기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이 말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한다. 고대 저술가들의 뒤를 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고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만 집착하여 파멸적인 자신에 빠지고 말았다.

 

8. 어거스틴의 "자유 의지론"

교부들의 권위가 우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항상 이 말을 쓰면서 동시에 이 말에 대한 그들의 해석도 분명하게 밝혔다. 우선,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한다.39 다른 곳에서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그 주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어느 누구도 감히 의지의 결정을 부정해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40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41 분명하게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죄악에 빠져 정복을 당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42 또, 인간은 자유 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 버렸다. 또, 자유 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또,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듯이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돕고 사람의 의지가 비록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복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는 실현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 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 버렸다고43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른 구절에서,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해 확립된다는 것을 밝힌 후에, 은총이 없어도 자기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꾸짖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참한 인간들은 자유를 얻기도 전에 감히 자유 의지를 자랑하며, 또는 이미 자유를 얻었다면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인가? 자유 의지란 말에 자유가 내포된 듯한 사실을 그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 : 17).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노예라면, 무슨 까닭으로 그들은 자유 의지를 자랑하는가? 사람은 자기를 정복한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제 만약 그들이 자유함을 얻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마치 자기의 노력으로 된 일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인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 5)고 하신 분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리만큼 그들은 자유로운가?" 참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이 말의 사용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다. 그는,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말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 사람은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만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구주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44 사람의 자유는 의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는 그의 단정은 그 어리석은 이름을 적절하게 조롱하는 듯이 보인다.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나쁜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그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 말을 보존하는 데는 반드시 큰 위험성이 따르며 따라서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은 이 말을 쓰지 않기를 원하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이 말을 피하기를 바란다.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아마 내가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저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애매모호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에서는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나는 인정했는데 이것이 내게 대한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 그들은 모두가 나와는 반대 입장이므로, 내가 그들에게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못하도록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성실하게 알려 주려는 것 외에는 내게 아무런 다른 의도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부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일반 신자들은 항상 불안 중에서 허덕일 것이다. 때로 이 저술가들은,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을 빼앗겼기 때문에 은총에서만 피난처를 구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장을 제공하거나 또는 제공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호한 생각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인간의 덕성을 없는 것으로 또는 낮은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모든 선행에 대한 공로를 성령께 돌렸다. 그리고 이 점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가르친 발언을 몇 개 소개하겠다. 어거스틴도 자주 반복한 키프리아누스의 말이 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45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과 유케리우스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면서 이 나무에 손을 내미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나무를 의지의 결정이라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 사람이 이 나무 열매를 맛보면 죽을 것이라고 한다.46 이들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일 뿐 아니라 온통 죄덩어리라고47 하는 크리소스톰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죄악이라면, 그의 의지의 힘에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겠는가?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말을 얼마든지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하고 나와 의견의 다른 것을 간교하게 묵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기에, 나는 이들 증언을 파하겠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정한다. 간혹 그들이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찬양한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자기 칭찬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장의 서두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진보한다는 말이다.48 인간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창 3 : 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의 힘이 많아서 자기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꺽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무릇 사람이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 : 5). 또,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 : 10-11). 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 : 29-31). 이 모든 구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작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약 4:6; 참조, 벧전5:5; 잠3:34).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 : 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 : 1). 이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유사한 구절들도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사 60 : 19). 틀림없이 주께서는 종들에게서 해와 달의 빛을 빼앗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11. 참된 겸손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철학의 기초는 겸손이라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은49 항상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나를 더욱 기쁘게 한다. "웅변술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수사학자는 '화술이다'라고 그는 대답했다.50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교훈들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항상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에서 단정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과 교만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겸손 이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원래 사탄이다. 사람의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우리 자신의 것은 죄뿐이 아닌가? 너 자신의 것인 죄를 버리라.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께로서 오기 때문이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거짓된 자기 변호가 아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에게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을 때에, 그의 안에 있는 무기는 파기되고 전쟁은 끝이 난다. 모든 불경건의 무기를 우리는 부수고 태워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하며 우리 자신 안에 아무 도움이 없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편 70편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결국 우리 자신은 죄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고 한다.51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의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 아무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기꺼이 굴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겸손에 자기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그 능력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애와 야심이라는 병을52 버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 평가 하는 것이다(참조, 갈 6 : 3). 오직 나는, 이 병을 버리고 성경이라는 진실한 거울 속에서 비추어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라고 요구할 뿐이다(참조, 약 1 : 22-25).

 

(인간의 천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 오성 12-17)

12. 초자연적인 천성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성들은 타락했지만, 인간을 야만적인 짐승과 구별할 만한 충분한 이성은 남아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인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53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데 충분했을 믿음과 광명의 의를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졌을 때에 동시에 영적 능력, 곧 영원한 구원을 얻을 희망으로 받은 은총을 빼앗겼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쫓겨나 영혼의 축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성질들이 온통 소멸되었으며, 중생의 은총에 의하여 처음으로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성질은 곧,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 및 의에 대한 열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시므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질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의 건전성과 마음의 성실성도 동시에 제거되었다. 이것이 곧 자연적 은사의 부패이다.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며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며, 따라서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일부분은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다(요 1 : 5). 이 말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표현되었다. 첫째로,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아직도 어느 정도 희미한 빛이 번득인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천부의 이해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빛은 짙은 무지가 덮어 질식시키므로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완전한  정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인간의 영혼을 오성과 의지로 구분한 데 따라54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먼저 오성의 능력을 검토하겠다.
인간의 오성은 항상 맹목 무지하다고 단죄하며 아무 대상도 지각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상식적인 경험과도 반대된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인간성에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성은 원래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이 있다. 동물에게 이 은사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둔하고 비이성적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대로 두면 곧 허무한 데 빠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실로 사람의 지성은 둔감하여, 바른 길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헤매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자꾸만 넘어지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같이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추구하며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허무에 눌려 가련한 수고를 하고 있는데, 때때로 마땅히 힘써 알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을 탐구하여 자기의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 특히 이해해야 할 문제들에는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세속 저술가들이 항상 이 타락상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거의 전부가 같은 타락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전도서 전체를 통해서 솔로몬은 사람들이 능통하다고 자처하는 연구 부문들을 열거한 다음에 결국 그것을 모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정한다(전 1 : 2,14, 2 : 11;기타).

 

13. 세상적인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그러나 오성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없을 정도로 언제나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55 특히 아래에 있는 일들에 오성이 주의를 돌릴 때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는 반대로, 오성은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하려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다소의 경험을 하는 총명이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할 때에는 그 기능이 균등하지 못한데, 지성이 현세의 영역을 넘을 때에는 자체의 무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지성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전진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 알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땅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공의, 또는 내세의 정복에 속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되었다. "하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의의 본성과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의미한다.
처음 것에는 정치와 모든 기계 공작 기술과 문예가 포함된다. 둘째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뜻에 합치하게 하는 원칙에 대한 지식이다.
처음 종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이 사회적 동물이므로,56 타고난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사회 생활을 육성하며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 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단체 생활은 모두 법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법의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관해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개인이 한결같이 합의하게 된다. 교사와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발생하는 분쟁과 충돌에 대해 나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절도범과 강도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모든 법과 권리를 뒤집고 모든 법적 제재를 깨뜨리면서, 자기들의 정욕만이 법으로 행세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이것은 더욱 흔한 허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금지한 일을 칭찬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법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경솔한 정욕에 미쳐서 명백한 이성과 싸우는 것이다. 오성으로는 시인하는 것을 정욕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이러 종류의 갈등은 공정성에 대한 천부의 개념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법의 여러 부분에 대하여는 서로 논쟁하면서도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지성은 바른 길을 따르는 듯이 보일 때에도 절름거리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씨앗이 모든 사람 속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세 생활을 정리하는 데는 이성의 빛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14. 학술과 예술에 관한 오성

다음으로 학술과 예술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이것을 배울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인간의 총명이 나타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학예를 배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한 방면에 분명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능력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어느 한 가지를 배울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며 선배에게서 배운 것을 더욱 연마 완성하기도 하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런 이해는 회상에 불과하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57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이해력의 시초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 선(善)은 보편적이므로, 여기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의 창조주께서는 저능아들을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감사하는 생각을 많이 고취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편만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천품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학예를 발견하거나 조직적으로 전수하거나 학예에 대한 오묘하고 탁월한 지식이 있다는 것은 소수 사람들의 특색이므로 이것은 공통한 총명에 대한 증거로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므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15.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속 저술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거기에는 진리의 훌륭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 이 광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비록 그 완전 상태에서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능력을 아름다운 옷과 같이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그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58 그 이유는 영의 선물을 경시하는 것은 곧 영 자신을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대 입법가들이 사회 질서와 규율을 아주 공정하게 수립한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 위에 진리가 비쳤다는 것을 부정할 것인가? 자연을 훌륭하게 관찰하며 교묘하게 묘사한 철학자들이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변론술을 생각하고 조리있는 화법을 가르친 사람들을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 우리의 유익을 위해거 전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미친 사람들의 허튼 소리라고 할 것인가? 그럴수는 없다. 우리는 싶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술을 읽을 수 없는데, 그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일은 훌륭하다 또는 고귀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교의 시인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신들이 철학과 법률과 모든 유익한 기술을 발명했다고 인정했다.59 성경에(고전 2 : 14)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60 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일을 탐구하는 데는 참으로 예리하고 투철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는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깨달아야 한다.61

 

16. 예술과 과학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동시에, 인류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넣어 주신 것이었다(출 31 : 2-11, 35 : 30-35).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불경건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묻는 것 역시 정당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신자들 속에만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다는 발언은(롬 8 : 9) 성결의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결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고전 3 :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움직이시며 살리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법칙에 따라 각 종류에 부여하신 그 성격에 따라서 하신다. 우리가 자연 과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그 밖의 학술의 도움을 받으며 불신자들의 활동과 봉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도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학술을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태만에 대한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참조, 골 2 : 8) 진리를 이해라는 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를 참으로 축복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이해력과 거기에 따르는 지식은, 만일 진리의 견고한 기초가 그 밑에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즉시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과 같이 남아있는 자연적인 은혜들도 부패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참으로 옳은 가르침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에서 명제집의 선생과 스콜라 학자들은62 그에게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은사들이 저절로 더럽혀질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오염된 후에는 그의 은사들은 깨끗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은사를 이유로 칭찬을 받을 수도 전혀 없었다.

 

17. 12-16까지의 요약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의 본성에 이성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류 전채에서 볼 수 있으며, 마치 동물이 감정을 가진 점에서 무생물과 다른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들과 동물들을 구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이 결함이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63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돌려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파멸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판단력이 월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우면 곧 깨닫는 총명이 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은총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심에서 흘러 들어온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하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가의 공통한 본성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64 나타내시려는 것이 아닌가? 이 은총은 여러 사람을 그냥 지나감으로서 그 자체는 어느 사람에게도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사사기에 이런 예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도록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의 신이 강림하셨다"고 한다(삿 6 : 34). 요컨대, 모든 특별한 사건에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용사들이 사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삼상 10 : 26). 사울이 왕으로서 성별될 것을 예언했을 때에, 사무엘은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했다(삼상 10 : 6). 그리고 이런 일이 정치의 전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후에 다윗에 대하여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한 것과 같다(삼상 16 : 13). 똑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호머까지도,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이 우수한 것은 각각 제우스신이 주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65 일찍이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둔해지는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과 뜻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총명한 자의 지식을 빼앗으며(참조, 욥 12 : 20)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신다"라고 한다.(욥 12 : 24; 참조, 시 107 : 40).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며, 이 흔적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하기 전까지는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되었다.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가를 분석해야겠다.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⑴ 하나님을 아는 것, ⑵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자비, 즉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 ⑶ 하나님의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 특히 둘째 점에서는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라 할 지라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 물론 철학자들의 글에는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유능하고 적절한 발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서는 항상 일종의 경솔한 상상이 엿보인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자기의 신성을 조금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무지를 구실로 자기들의 불경건을 숨길 수 없게 만드셨다.66 또 어떤 때에는 그들이 어떤 발언을 하게 만드시고,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침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찰 태도로 인하여 사물을 보아도 진리로 향하지 못했으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들이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빛의 도움으로 길의 방향을 잡을 수는 더욱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술의 여기저기에 진리의 작은 물방울을 몇 개 우연히 떨어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더럽히는 해괴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요컨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느낀 일조차 없다. (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은 이 진리 즉,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그는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가를67 이해하는 진리에 접근하거나, 또는 접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는 이 진리를 직접 목표로 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19. 요한복음 1 : 4-5 나타나 있는 인간의 영적 맹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취해, 거룩한 일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이 전혀 맹목적이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논의보다 성경의 증언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얼마 전에 인용한 구절에서68 요한은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가르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 : 4-5)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추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서는,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한다(요 1 : 13).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다(마 16 : 17).

 

20.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참조, 딛 3 : 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 의심을 생각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예언자들을 따라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시 36 : 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 : 3)는 사도 바울의 확언  또한 같은 뜻이다. 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 : 27)고 외쳤다. 요한이 "은사"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69 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일들을 알려 줄 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은사를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 아니하셨느니라"(신 29 : 3-4). 만약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일에서 우리는 "장애"라고 그가 말한다면, 이 이상 더 표현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기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렘 24 : 7). 분명히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셔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 : 44). 무슨 까닭인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산 형상이시며(참조, 골 1 : 15), 이 형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광채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던가?(참조, 히 1 : 3)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그 형상이 밝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땅에 내려오신 것은 인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던가?(참조, 요 1 : 18)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다 하시지 않았는가? 분명히 다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스승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께로 온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듣는 것과 배움인가? 물론,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밝히신다. 교회의 갱신을 약속하실 때에, 그는 구원을 하기 위해 모으신 사람들은(사 54 : 7)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고 가르치신다(요 6 : 45; 사 54 : 13).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예언하신다면, 불신자들과 세속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교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70 바울은 이 문제를 진실하게 논의하고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 : 18 이하). 모든 인간적인 지혜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분쇄한 다음에(참조, 고전 1 : 18이하) 그는 단정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 : 14). 누구를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연의 광명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나태하여 그 신비를 무시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과 귀와 마음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찬양했다(고전 2 : 9). 참으로 그는 사람의 지혜를 휘장에 비교하고, 이것이 마음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사도는 선언한다(고전 1 : 20).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에 예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략할 것인가? 이런 광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사람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름 곳에서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께만 돌린다. "하나님, 영과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엡 1 : 17). 이제 우리는 모든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듣는다. 그는 또 무슨 말을 하는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고 한다.(엡 1 : 18상). 그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면, 그들 자신은 눈이 먼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운운한다(엡 1 : 18하-19).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소명을 알 만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한다.
여기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사람의 이해력을 인도하시며, 이런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하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 또는 무지를 시정하신다고 말할 것이다.71 그러나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이다. 다윗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자기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원한다(시 119 : 18). 분명히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위에 비칠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아나지만,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약 1 : 17) 눈을 뜨게 하시거나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그 말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 빛을 비추시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가장 훌륭하신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받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가르칠 진리의 영이 필요하지 않았다면(요 14 : 26), 그 선생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행 1 : 4).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결핍을 증명하신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든지 서슴치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이상의 이해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를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더 무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