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규범


교회는 한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자를 믿는다. 그리고 한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데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육신하셨다. 또 성령을 믿는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의 강생과 동정녀로부터 출생과 수난과 육으로 승천하심과 만물을 하나로 총괄하기 위하여 또 전 인류 종족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부활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미래에 나타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하나님 구주와 왕에게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무릎 꿇게 하고 모든 혀가 다 그에게 고백하게 하고 또 그가 모든 자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기 위함이며 영적인 악독을 보내어 범법하여 배반자들이 된 천사들을 불경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과 악인들과 함께 영원한 불에 넣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은혜를 행사함에 있어서 의인들과 거룩한 자들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들에게는 불사를 수여하시고 그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감싸기 위함이다.

(Adversus haeresis, 1, 10, 1)   


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그의 말씀으로 만물들을 만드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시고 형성하셨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이 성립되었고 만물이 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만물들 곧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감각의 대상들과 지성의 대상들 영원한 것들을 그의 말씀으로 만드시고 배정하시고 지배하시고 만물들을 존재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는 만물을 존재하도록 명령하셨고 만드셨다.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AH, 1,22, 1)  

 

 

 

사도신경(180-750)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使徒信經 , Symbolum Apostolicum)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신앙고백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 역사의 틀을 간략하게나마 잡기 위해서는 최초의 신앙고백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최초의 고백이란 바로 마태복음 제16장 16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하여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해 갔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를 향하여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 때 흩어진 신앙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 신앙적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조항을 만든 것이 사도신경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위해 만든 조항들은 이단들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내용이 첨가되면서 그 모양을 다듬어 나가다가, 서기 404년에 루피누스(Rufinus)가 주석을 펴내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무려 4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압축된 신앙고백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삼위 즉 하나님 ․ 그리스도 ․ 성령에 대한 구체적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수난,부활,심판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제자들이 고백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초대 교회에서 신앙의 기본적 내용을 정한 고백문으로서, 민족이나 교파나 교단의 구별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표준적인 신앙고백문입니다.   

 


사도신경의 의의

1.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의 요약문으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6,000년 역사를 모두 합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 교회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도 올바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교회를 교묘하게 파괴시키려는 이단의 침투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줍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3. 사도신경은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떤 한 사람의 신앙고백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중심적인 신앙표현, 주장이 아니며,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공식적이고 성경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말은 사람과는 다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며, 온 천지와 모든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  게 나시고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심, 그리고 그가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굳게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서 사람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것과, 본디오 빌라도라는 총독에 의해 가장 극악한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만 사용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3.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무덤 속에 계시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과,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 그 때는 육신으로 초라하게 오셨을 때와 달리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입니     다.

4. 성령을 믿사오며,

   이는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으로 우리가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은혜와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5.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거룩한 공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를 믿는다는 뜻이며, 성도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함께 모여서 교통할 때 믿음을 지키는 힘이 나온다는 것, 또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죄를 사면해 주심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 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6.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는 죽음 이후 영혼의 영원함을 믿는 것으로서 언젠가 우리가 죽음을 맞으면 예수님이 신령체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왕이나  제사장처럼 영원토록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진실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믿음의 선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주는 강력한 믿음의 고백이어야 하며 아울러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이 회복되는 체험이 우리 안에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사도신경의 유래와 변천과정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붙인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고백서를 12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전설은 이렇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 외 다른 사도들도 대체로 일찍부터 어려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12 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ㅡ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ㅡ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ㅡ431년의 에베소회의,
  ㅡ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 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다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입니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어째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가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도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슷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 신경은 끝맺음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신경이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카톨릭적인 냄새가 지하게 배어 있으며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다. 사도 신경을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만약 사도신경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게 가르친다면 어쩌면 이단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경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카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이해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도신경해설


1. 예배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있는 '예배'라는 낱말은 '절하다', '섬기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하

나님께 사람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경배하며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요

잔치입니다. 십계명은 예배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으로 우상에게

예배해서는 안되고 오직 당신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출애굽기 20:1

∼17). 또한 예배하되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도록

명하십니다(마태복음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삶 전체로 예배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없는 예배는 위선입니다.


그러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

에서 비롯됩니다. 의식을 갖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도인들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존재하므로 성

도들은 정한 날과 장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

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이레 중 첫날, 즉 일요일을 주의 날(주일)이

라고 부르며, 그 날에 일손을 멈추고 함께 모여 예배해 왔습니다(사도행전

20:7).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특징은 두 부분으로 구

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과 그 말씀에 응답하여 기도하며 찬송

하는 부분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으며 하

나님은 우리 사람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서 창조주요 구원의 주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

와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 봉독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에

서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언약을 확인하며 복음 전

파와 이웃 사랑의 사명을 받고, 삶으로 예배할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영

원토록 예배하는 것, 그것은 구원 얻은 성도의 특권이며 목적입니다.



2. 예배에서 왜 사도신경을 고백합니까?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기는 주후 390년경이었으나, 그 내

용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훨씬 더 일찍부터 예배에서 고백해 왔습니

다. 2세기 초반의 속사도 교부이며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110년)와

순교자 저스틴(∼165)의 글과 저자 미상의 신앙교육서 [디다케」(100년경)에

이미 "신앙의 척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2세기부터 교회에서는 예배에

서 세례 받는 새 신자에게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

까?" 하고 묻는 말에 "예 믿습니다."고 말하면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발

라 안수함으로써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에 관한 고백으로 묻고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죄사하여 주시

는 것..."에 관한 고백으로 고백으로 물어 세례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신약 성경 말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만, 사도들의 편지에는 당시의 교회가 기도나 찬송으로 신앙을 고

백한 구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 2장 6∼11절의 말씀과 여

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

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린도전서 15:3)."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

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

라(로마서 8:34)."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전한 기독교의 신앙, 즉 복음의 진리를 간략하게 표현

하고 있어서 역사적인 교회의 신앙고백들과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감사하며 감격하는 마음에서 세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고백합니다.



3. 사도신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행위로써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흔

히 믿음생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냥 막연히 열심히 믿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고,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믿음입니다. 기독

교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성

경의 말씀을 따라 좀더 구체적으로 그러면서도 간략하게 고백하는 것이 사도

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

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

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

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

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에 관한 신앙고백, 둘째는 아들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신 일에 관한

신앙고백, 셋째는 성령 하나님과 교회 및 성도의 거룩한 삶과 영원한 삶에 관

한 신앙고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은 비교적 깁니다. 아들은 우리가 신앙

하는 대상이시므로 아들의 인격과 그분이 겪은 역사적인 사건을 함께 고백합

니다. 그에 반하여 성령에 대한 서술은 짧습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과 교부

들의 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 정, 의를 감동시켜 예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일하시는 영이시므로 그러합니다(요한복

음 14:16∼17, 26; 16:7∼14).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카톨

릭"이란 "보편적인" 혹은 "범 세계적인"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

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혹은 "거룩한 범세계적인 교회"라고 번역했어

야 합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그냥 "거룩한 교회"라고 말하기도 했으므로 그렇

게 번역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 뜻을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옳은 번역을 시도하지 않고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입니다. 그리

스도의 몸이 하나이므로 온 세계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임을 믿

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입

니다.



4. '하나님 아버지'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사도신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은 비록 짧지만 무한한 내용을 함

축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에 말

씀이신 아들 하나님을 낳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셔서 만물과 함께 우리를 다스리

십니다(시편 8:1∼9; 104:1∼35).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 가운

데서 구원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양자로 삼아주십니다

(로마서 8:14∼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와 내세에서 모든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십니다(이사야 42:5)." 산과 들과 바다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산물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가공하여 만든 물건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

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

사와 찬송을 충분히 드리지 못하며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주시고, 재물을, 과

학 지식과 기술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명

예를 위하여, 자기 성취를 위하여 동원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고 고

백할 때, 독생자를 영원 전에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

사와 함께 회개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부모를 생각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

지면서 내가 불효함을 느끼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면서 우

리의 불충을 고백합니다.


5.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전능하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친히 보존하

시고 다스리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며 다스리시는 것을 섭리

(providence)라고 합니다(사도행전 17:27∼28; 시편 145:15∼16). 나무 잎새

하나와 풀 한 포기, 비오는 것과 가뭄, 먹고 마시는 것, 건강과 병, 부귀와

빈곤, 민족의 흥망 성쇠 등등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다스리심에 달려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

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더 하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면

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열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는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며, 순탄할 때와 다름없이 감사하고, 장래의 모든 일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깁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어서 그분의 뜻이 아니

면 움직일 수 없으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믿는 확신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로마서 8:33∼39).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시인할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고백하고 찬송합니다(로마서 8:28).



6.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이고(마태복음 1:21),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말하자

면 '예수'는 개인적인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공적인 칭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합하는 자를 택하셔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 즉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


예수께서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세 직분을 한 몸에 구현하시는 분이십니

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 현재도 설교자들을 통하

여 천국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다하십니다(누가복음

24:19; 요한복음 3:2; 6:68∼69).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희생이 되어 화목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

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중재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다하십니다(히브리

서 4:14∼16; 8:22∼25; 9:12; 로마서 8:34).


예수께서는 또한 왕이시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

셨습니다. 겸손한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누가복음 1:33; 마태

복음 21:5; 요한복음 18:36, 37; 19:19).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

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왕이시며 섬기는 이로 사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택한 백성을 보전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당신의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빌립보서 2:10∼11; 마태복음 28:18; 요한계시록 1:13∼18; 19:11

∼16).


7. 나사렛 예수는 무슨 뜻입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호칭입니다.

나사렛 동리 출신 예수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여러분

이 알고 있는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앉

은뱅이를 고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고 했으며, 그

의 설교에서도 병자가 같은 이름으로 나음 받았다고 증언합니다(사도행전

3:6, 4: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한 것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선포임과 동시에 지금도 살아 계셔서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예수께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알고 그리스도신 줄 몰랐습니

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

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셨

습니다(마태복음 16:16∼17).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로마서 1:4), 하늘에 있는 자들

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

님으로,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빌립보 2:6

∼11).


'나사렛 예수'는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이름이요 예수께서 사람으로 사셨음

을 상기시키는 이름임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사는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

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얼마를 지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

다(사도행전 9:34).

베드로가 말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는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함축합니다.



8.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외아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희랍 신화에는 영웅들이 신

의 아들이란 믿음이 투영되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

을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6:2,4). 로마의 지성인들이 좋아한 스토아 철학자

의 글에서도 "우리는 신의 자녀"란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는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자녀와

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이 창조 전에 낳으신 아들 하나

님이심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사도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가

르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교리는 가현설(假現說)과 양자설(養子說)

의 두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가현설은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 보이신 분이라고 말하

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따르는 주장입니다. 가현설

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선지자들

의 예언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역사

적 사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중보자이심을 부인하는 이단설입니다(요한 1서 1:1∼4).


양자설은 사람일뿐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았다는 주장입니다. 예수

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로 유대교 배경을 가진 에비온파와

3, 4세기의 아리우스파가 그런 주장을 했으며, 근세의 합리주의자들과 자유주

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계승한 교부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께서 영원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신 아들이시며,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아버지와 본질

이 같으시며, 권세와 능력이 동등하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창조

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합니다(빌립보 2:6∼11).


9. 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합니까?


성경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에 관하여 말씀하는 대로 믿고 고백합니다(마태

복음 1:18). 선지자의 예언대로 만백성을 구원할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이 되셨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온전한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히브리서 4:15;

베드로전서 2:22).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동정녀 탄생이 물리적으로 인과관계

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남자에게 있고 동정녀에게는 없

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것은 그분이 성령으로 잉

태된 때문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지상에 사시면서 마귀

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시고 흠 없이 거룩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3:21). 예수께서 천국 복음 사역을 하시기 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에 관한 기록은 예수께서 우리 사람이 겪는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셨음을 밝히시는 말씀입니다(마태복음 4:1∼11).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신 사실은 예수께서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

시에 죄가 없으신 참 사람이시므로 하나님과 사람간에 평화를 이루는 중보자

로서의 자격과 요건을 유일하게 갖추신 분이십니다(고린도후서 5:21).


천국의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자비하신 삶이, 그리고 그분의 고난의 삶과 죽음

과 부활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합니다(로마

서 1:3∼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사실을 주저 없이 감사함으로 고백합니다.



10.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말구유에 나신 일, 헤롯의 어린

이 학살을 피하여 부모가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피신시킨 일을 비롯하여, 천

국 복음 사역을 하실 때도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신 일,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질시와 미움을 받으신 일 등이 다 고난의 삶이었습니다(마태복

음 2:1∼23; 8:20).


예수께서는 특히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 당신 자신의 몸과 영

혼으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습니다(이사야 53장). 십자

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단 한번에 드리는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림으

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

혜와 의를 입혀 주시고 영원한 삶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림을 받고 우리

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으셨습니다(이사야서 53:5∼6; 히브리서 9:11∼

15). '구속'은 누군가가 본래 노예 대신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지었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습

니다(로마서 6:23; 5: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첫 사람이 범죄한 때부터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

담과 하와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셔서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

다(창세기 3:21;3:10∼11). 죄를 사한다는 구약의 '키퍼'라는 말뜻이 '덮는

다'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희생하여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

며 죄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

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분을 가리켜 '세

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불렀습니다(요한복음 1:29). 요한계시록에 따

르면 천상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늘 '어린양'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

록 5∼6).


11. 십자가 혹은 그리스도의 피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십자가는 본래 극형의 형틀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뜻하

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화목 제물이 되셔

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

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므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하며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2∼24; 갈라디아서 6:14). 그렇다고 십자

가의 형상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부적처

럼 사용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그런 뜻에서 십자 성호를

긋지 않습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창세기 9:4, 5). 그러므로 피 흘림은 죽음입니다. 하나

님께서는 구약에서 짐승을 희생함으로써 범죄한 사람이 용서함을 받으며 죄에

서 정결함을 얻는 길을 여셨습니다. 제사장은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거나 사

람에게 뿌려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했습니다(출애굽기 24:1-8; 레위기

3:2, 13; 4:7 등). 출애굽 때는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을 면

케 하셨습니다(출애굽기 12:7).


그러나 피 역시도 그 자체가 무슨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뿌려진 피

는 생명의 희생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값있게 보시고 사람의 죄를 사

하시고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를 구속하십니다(요한1서 1:7). 그러므

로 우리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찬송가 202) 하고 찬송합니다. 그러나

피 자체가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제물이 되셔서 흘리신 피를 보시고, 즉 생명을 희생하신 것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새 생명을 주십니다(히브리서 9:12∼22). 그러므로 우리는 그

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귀하게 여기며 그의 피로 인하여, 다시 말하면, 희생

의 제물로 죽으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양합니다.



12. 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까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은 여

론에 따르는 것일 뿐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에서 손을 씻기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27: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느냐고 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당시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행정 책임자이며

예수를 핍박하고 정죄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허락이나 지시가 없이는 아무도 판결을 받거나

처형될 수가 없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이 물욕과 권세에 눈이 어두운 불의한 권력자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

려 죽으셨습니다.


역사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권력자는 늘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과 로마 제국

내의 여러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

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마찰과 갈등의 성격을 띠

었습니다만, 정치적인 권력자가 이런 핍박을 묵인하거나 허용하거나 스스로

주도했을 때, 사소한 핍박은 대규모의 박해로 발전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순

교하게 되었습니다.


네로를 위시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던 로마의 여러 황제들, 사법권을 부여받

아 이단과 신실한 신자들을 종교재판으로 고문하며 처형하고 학살한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교권주의자들과 이를 방조하거나 주도한 군왕들이 곧 본디

오 빌라도의 후예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한 때 부흥했던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景敎)로 하여금 자취를 감출 정도로 심하게 박해한 당나라의

무종(武宗), 카톨릭 신자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일본의 도꾸가와(德川) 및 조

선의 대원군이 다 본디오 빌라도의 후예입니다.


13. 예수의 부활을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사울이라고 칭하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개

종을 하여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리스도인을 잡아 유대인들에게 넘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로 가

는 길에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빛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안수를 받고 눈을 뜨게 되었습

니다(사도행전 9:1∼18). 그는 사도가 되어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면서 지중

해 연안 지방을 여행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

내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

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

느니라(고린도전서 15:1∼8)."


예수께서 생전에 당신의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말씀의 뜻

을 몰랐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

며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의 태도와 삶이 돌변했습니다. 부

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읽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의 부활이 역사

에 일어난 사실임을 믿으며, 우리 믿는 성도들도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

와 함께 장차 부활할 것임을 믿습니다(마가복음 14:9∼12; 누가복음 24:1∼

12; 요한복음 20:19∼31; 21∼23; 사도행전 2:30∼32; 고린도전서 15:12∼

19; 베드로전서 1:3).



14.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예수께서 올리어 가신 하늘은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이 아니고 이 세상

과는 차원이 다른, 이 세상을 초월한 영원한 곳이며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 가서 너희 있을 곳

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리라(요한복음 14:1∼2)."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따르면, 그 곳에서는 네 영물과 이십 사 장로들과 수

많은 천사들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으로 죽임

을 당하신 이, 각 종족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당신의 피

로 사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

을 세세 무궁토록 돌리며 예배합니다(요한계시록 4:1∼7:17).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만물을 다스리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비와 구원을

베푸시도록 중보의 역할을 다하시는 아들이심을 의미합니다(히브리서 7:24,

25).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

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라..." 하는 말씀대로 입니다(에베소서 1:20∼23; 마태복음 28:18; 빌립보서

2:9∼11).


15.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라는 말은 거기서부터, 즉 주께서 계신 곳으로부터라는 뜻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세계의 종말에 관한 말씀과 함

께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9:28; 고린도전서 16:17;

고린도후서 7:7; 마태복음 24:3, 27; 데살로니가전서 2:19, 3:13, 4:15,

5:23; 베드로후서 1:17 등등). 성경은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

실 것이라고 하며(사도행전 1:11), 모든 족속과 그를 찌른 자를 포함하는 각

사람이 주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7, 마 24:30).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사람을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

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며 그들을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도록 영접하

시는 반면에, 믿지 않고 불의한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하실 것입니다(요

한계시록 21:1∼8; 사도행전 17:31; 10:42, 누가복음 21:27∼28, 마태복음

25:1∼13;31∼46; 데살로니가후서 2:8∼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다시 오시는 구원의 주이시며 심판의 주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삽니다.


예수의 재림의 날짜나 장소를 안다고 하는 자, 소위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

는 자는 거짓 선지자요 미혹하는 자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들도, 아들

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36; 사도행전 1:7). 그래서 예수께서는 도둑 같이 혹은 해산할 여인이 아

이를 낳듯이 갑자기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

그러나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음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명심해

야 할 말씀은 복음이 모든 민족을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올

것이라는 말씀(마태복음 24:14)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선교의 중요성을 일

깨우는 말씀입니다.



16. 성령에 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십니다(요 14:16∼

17).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person)이심을 가르

칩니다. 교회는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개종자를 성부와 성자와 성

령의 이름에 연합하도록 세례를 베풀며 예배에서 성 삼위 하나님을 찬송했습

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다가 예수 그리

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며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이심을 밝히 알게

된 이후, 즉 4세기 중반부터 성령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가르치

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할 때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

신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에 역사적으로 강림하셨음

을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따라, 그리

고 자의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해주시며, 죄를 깨달

아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십니다(요한

복음 3:5∼9).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회개하면서 주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우리를 성화시켜 주십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숨을

거둘 때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갈라디아서 6:16∼24).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교회의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서로

를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십니다(요한복음

16:13; 갈라디아서 6:16∼25). 성령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시며, 우리가

불순종할 때 근심하시며(이사야서 63:10), 우리가 연약할 때 도우시며, 빌 바

를 알지 못 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

다(롬 8:26).


17.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의 서툰 번역어입니다. 그리스도

의 교회는 하나의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시작하여 언어와 문화가 다른 여러 나

라와 지역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온 세계의 교회들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머

리로 하는 하나의 몸 된 교회임을 시인하는 고백입니다.


교회에는 초기부터 분파 운동들이 있었습니다만, 1054년에 교회는 크게 둘

로, 즉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

는 발칸과 러시아 지역의 동방교회로 분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동, 서방 교회

의 분립은 오늘의 교회 분열과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교리보다는 언어와 문

화 및 정치적인 배경의 차이로 인한 분립이었습니다. 한 지역이나 도시 안에

분립된 교회들이 공존하는 그런 분립이 아니었습니다.


서방교회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었습

니다. 개신교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 재세례파 교회들로 출발하여

제각기 또한 민족과 국가 단위의 교회들로 발전하였습니다. 유럽의 이민들로

구성된 미국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의 배경 때문에 수많은 교파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 문화 혹은 교리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분

열과 분립을 거듭해 왔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로서 우리는 '거룩한 보편적

인 교회'를 떳떳이 고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을 깨달으며, 부끄럽게 여깁니

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

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부르심

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에베소서 4:2∼6)." 이 말씀은 지

역 교회의 신자 각자에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 모두에게도 하

시는 말씀입니다.




18.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신자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관입니다. 칼빈

이 옳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었습니다(마태복음 16:18∼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이 복

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요한

복음 21:15∼17).


사도신경에서 다른 모든 주제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에 대한 신앙고백은 다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과 같

이 "여러분"이, 즉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2:27).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혼자 살지 않고 교회

의 지체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

가 되어 서로 도우며 오래 참고 사랑하면서 함께 자라갑니다. 성령 안에서 하

나가 되어 주님을 닮는 거룩한 삶을 살며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

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 즉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봉사는 교회가 하는 봉사와

교회를 위한 봉사로 구분됩니다. 교회가 하는 봉사는 교회가 공동체로서 하

는 봉사,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선교 및 이웃을 돕는 봉사입니다. 교회

를 위한 봉사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목사와 교사를 세

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게 하시며, 장로와 집사를 세워 교회를 돌아보며

교인들을 섬기게 하십니다(에베소서 4:11∼12; 고린도전서 12:27∼31; 로마

서 12:4∼13). 교회를 위한 봉사는 교회가, 즉 온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

아 봉사를 옳게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입니다.


 


니케아 신조(325)

 

Lecture on the Nicene Creed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시었고, 즉 아버지의 본질(substance, 즉 ousia)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시요 빛으로부터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시되 만들어지지는 아니 하시었고,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usios)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하시고 사람이 되시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시사 하늘에 오르시었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is coming).

또한 성신을 믿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들은, 즉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시기 전에는 그는 계시지 아니하시었다. 또한 그는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셨다고 말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다른 존재물이나 본질로부터 되었다거나 창조되었다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거나 주장하는 자들을 카톨릭적이요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니케아(Nicaea)신조 - A.D. 325


(1) 니케아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아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말씀 곧 성자는 지으신 일종의 피조물로서 시작이 있었고 따라서 한 때 그는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 신앙에 위배되는 것임을 아다나시우스(Athanassius)가 지적하고 아리우스와 논쟁을 하게 된 까닭이다. 이 논쟁은 자유를 얻기 시작한 기독교의 통일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세계교회 회의를 니케아(Nicaea)에 소집하여 이때까지 이론(異論)이 많았던 기독론의 교리를 확정하여 올바른 신앙고백을 제정할 것을 기도하였다.


그렇다면 이단으로 지목을 받았던 아리우스의 주장과,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싸웠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도 그런 잘못에 빠지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① 그릇된 교리 {아리우스(아리안주의)의 주장에 대해서}


가. John Calvin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거짓된 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명백한 성경을 반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 또 자기가 올바른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척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가 창조되었으며, 다른 피조물들처럼 시작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계속하였다”. 여기서 보면 입장을 약간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약간이 가장 근본적인 내용을 변질 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칼빈이 지적하는 것은 “아리우스는 예언서와 사도 문서에 포함된 교훈 전체를 믿노라고 했지만 니케아 교부들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라는 지적처럼 성경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부정하게 되었을 때 이단으로 정죄된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신조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인해서 어떻게 정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당시 교회가 이처럼 정죄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리우스가 자신의 입장을 속이기 위해서 잠시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받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도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아리우스의 입장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과 신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신조를 부정하는 것은 곧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인 것이다.


나. Herman Bavinck


바빙크의 다음 글에서도 아리우스의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비뚤어져 나갔는지를 살펴보자. 또한 왜 잘못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이단들은 무엇인지를 배우도록 하자.


AD 2세기와 3세기에 있었던 아리안주의자들의 선구자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초자연적 방식으로 낳은 사람으로만 여기고 그가 세례 때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서 그의 사역에 적합하게 되고 주로 높여졌다고 생각하되, 그의 영원전에 존재하심과 신적 본성을 부인하는 에비온주의자들(the Ebionites), 알로기파(the Alogi), 떼오도투스(Theodotus), 아르테몬(Artemon),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nosata) 등이다. 그들은 양자론적 기독론(an adoptionistic Christology), 즉 예수님이 피조되어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4세기에 이 신념이 루시안(Lucian)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Arius)에 의해서, 또한 아에티우스(Aetius)와 유노미우스(Eunomius)에 의해 옹호되었다.

아다나시우스에 의해 그 단편들만이 보존되어 있는 The Banquet 라는 제목의 작품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불출생적이고, 시작을 가지지 아니하시는 한, 그는 절대적으로 독특하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으며, 무한하시므로 직접적인 교제 관계에 들어갈 수 없고, 그의 존재를 부여할 수 없으며, 불출생적인 것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존재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피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이신 것이 아니고, 창조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되셨다

즉,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창조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를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될 매개자로 행동할 일종의 존재, 즉 성경에서 지혜, 아들, 로고스,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운 구별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또는 구별된 본질을 존재케 하셨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낳아진 것도 아니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두 신(two Gods)이 있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는(예수님) 오히려 ‘무로부터’ 낳아졌고, 또는 피조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케 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사역’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시간들과 세대들 이전에’, 즉 ‘우주’ 이전에 피조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인 것이 아니고, 그와 완전히 구분된다. 그는 성부처럼 불변적이지 않고, 선 뿐만 아니라 악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전한 피조물”이다. 그는 선을 선택하였고 그럼으로써 불변성을 얻었고 그리하여 신성에 이르렀다. 이 로고스는 또한 사람이 되어 진리를 선포하고 우리의 구속을 이루셨다. 따라서 우리의 영예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살펴보면서 단순히 성경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에서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을 받아들여도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리우스는 성경을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한 대로 받아들인 것이지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객관적인 성경이해의 내용들이 교회 안에 있었으나 이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생각한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오늘날도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과 상관없이 자신이 이해하고 생각한 대로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처럼 개인적인 생각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게 되면 진리의 참된 내용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즉 여러 사람마다 각자가 이해하고 생각하는 성경의 내용이 다르다면 누구의 이해가 진리인지 알 수 가 없는 것이다. 결국 객관적인 절대적인 진리가 없어지게 되고 수많은 내용이 가지각색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의 기준이 있음에도 왜 신조라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이 또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다양하기 때문에 성경의 의미가 전혀 다르게 왜곡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의미가 어떤 것이 바른 이해인지를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조는 성경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을 가장 깊이 있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조는 필요없다고 하면서 단지 성경만 잘 믿으면 된다’고 하는 말을 매우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아주 그럴싸 하지만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즉 이런 정신은 자신의 이해한 대로 성경의 의미를 마구 왜곡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성경을 곡해하고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② 바른 교리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아리우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개혁주의의 입장을 바르게 정립했던 아다나시우스의 핵심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가. John Calvin


칼빈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활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대 교부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선조들은 아리우스의 꾸불꾸불한 술책을 그 은신처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한 걸음을 앞질러 가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요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고 선포했다. 그러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불경이 끓어올라서 동일본질이라는 말에 대하여 증오와 저주를 가장 사악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진지하고 또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라면 이렇게 그가 아버지와 동일본질 이라고 말하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작은 단어 때문에 아무리 열띤 논쟁이 불붙고 또 교회의 평화가 방해를 받았기로서니 누가 그 고결한 사람들을 말장이니 궤변가들이라고 독설을 하였겠는가? 하지만 그 아무 것도 아닌 단어 하나가 순수한 믿음을 소유한 신자들과 거룩한 것을 짓밟는 아리우스주의자들 사이에 구분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다나시우스와 당시 교부들은 바른 신앙고백을 하기 위한 한 단어를 목숨처럼 지키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즉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의 흥망성쇄가 달려 있었던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객관적인 신앙고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과 가리움에 해당된 문제였기 때문인 것이다.


나. Herman Bavinck


바빙크는 아다나시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다나시우스는 그의 동시대인들 중 어느 누구보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여하에 따라 서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 생애와 그의 모든 힘을 이 교리의 변증에 쏟아 부어 넣었다. 그래서 그는 철학적 문제를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고, 기독종교 자체, 하나님의 계시, 사도들의 가르침, 교회의 신앙과 고백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신적 존재 내의 구별(성부,성자,성령)을 부인하는 유대교와 하나님의 단일성(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교로부터 원칙적으로 구별시키는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다. 따라서 아다나시우스는 존재론과 우주론의 철학적 혼합을 완전히 거부한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영지주의적, 아리안주의적 이원론을 거부하고, 따라서 매개적 중간존재들에 대한 이론도 모두 거부한다.

아다나시우스는 모든 낯선 요소들을 배제한 삼위(三位)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삼위(三位)성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이 아니고, 그 성격상 온전히 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三位)성은 영원하다. 하나님 안에 비(非)본질적 요소들이라고는 없다. 그는 어떤 것이 되지 않으신다. 그는 영원히 모든 것이시다. 삼위(三位)성이 영원부터 있는 것처럼, 이는 영원까지 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것이다. 성부는 항상 성부이시다.

성부됨은 그의 성질에 속한다.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와 같이 말할 수 없다. 햇빛을 떠나서 해를 인식할 수 없고, 그 물을 떠나서 그 물의 원천을 인식할 수 없듯이, 성자를 떠나서는 성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통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는 항상 말씀하신다. 삼위(三位)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명 없는 원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우주의 영원한 존재사실에 대한 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생명 없는 원칙이 아니시므로, 성자의 출생은 영원하다. 성부도, 성자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피조물일 수 없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존재(본질)로부터 출생한 것이다.

성령에 대해서도 이미 마찬가지이다. 비록 아다나시우스가 성령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이 삼위는 참으로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의 전체의 세 부분이나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세 이름이 아니다. 성부만이 성부이시고, 성자만이 성자이시며, 성령만이 성령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다나시우스는 이 삼위(三位)가 그 본질과 실체와 속성에서 같다고 하며, 성부는 신성의 첫 원리요, 원천이라고 하고, 삼위(三位)가 서로 안에서,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고 하며, 그들이 그 행위에서 하나이시라고 가르침으로써 삼위(三位)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2) 니케아 신조의 특징 및 영향


니케아 신조의 특징으로는, “니케아 신조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한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Homoousios)하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니케아 이후 계속되는 논쟁의 발단이 될 정도로 당시의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을 통해서 아리안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이’(Homoiousios)를 주장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했던 유이설자들도(동일함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비슷하다라고 해서 유이설이다) 배격되었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본래 아리안주의를 향한 저주문이 첨가되어 있었으나 훗날 이것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즉 당시 교회에서는 “저주문”을 통해서 이런 행위가 성경을 깨뜨리는 행위며, 또한 하나님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행위가 됨을 분명히 지적했던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신앙고백은 교회를 보호하고 또한 성경을 지켜가는 큰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니케아 신조의 영향에 대해서는 바빙크의 설명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신조 이후로 삼위일체 교리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하나님의 존재의 위격적 구별을 주장하였고,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그 이후로 삼위의 구별을 믿는 이가 하나님의 통일성(단일성)에 관한 진리를 무효화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만 하였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는 주된 쟁점이 어떻게 통일성(단일성)으로부터 삼위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그 반대의 쟁점 삼위성으로부터 통일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이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기독교 강요 上, pp. 207-208.)

이 나타났다. 이제 삼위일체론은 그 나름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가치와 신학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니케아 신조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당시 참된 교회에서 바른 신앙의 내용을 드러내고 지키기 위해서 취했던 방법은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을 교회 안에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당시대의 이단들과 거짓교사들과 싸웠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니케아 신조가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또한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는데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처럼 목숨을 걸고 바른 신앙고백적 기준을 드러내었음에도 교회는 금새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아리우스의 신앙적 내용들을 받아들이게 되어서 아타나시우스와 이 신앙고백적 기준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교회적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피난길을 떠나야 했고, 결국에는 붙잡혀 극형에 처하는 형편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아타나시우스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만 바꾸면 얼마든지 교회에서 교직자의 직분을 유지할 수 있는 타협이 있었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이를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객관적인 신앙고백적 기준 때문에 순교도 할 수 있는 역사를 만나게 된다. 즉 그만큼 신조의 정리는 교회에서 중요한 것이었기에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양보하게되면 성경의 거부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또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신앙고백의 내용을 지켰던 것이다.

결국 이런 역사를 통해서 신조가 초기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와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신조를 교회에서 표명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얼마나 엄밀하고 철저하게 고백하고 받아들이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3) 니케아신조에 대한 평가


바빙크는 니케아 신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교회는 니케아 공의회(A.D 325)에서 오리겐의 종속론(예수님이 성부보다 낮아서 종속되었다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참된 신성(성부와 동일성)을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그 성격이 전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 외에 “서방 교회에서 추가한 조항이 없는 니케아 신조는 희랍교회에서 큰 권위를 인정받아 사도신경이 라틴교회나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차지하는 것과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하지만 “니케아 신조는 ‘동일’이란 표현을 통해서 일체성에 대해서는 극복을 했지만 이 하나의 본질에서 어떻게 삼위가 바로 주장되면서 또한 어떻게 서로 구별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게 되었던 것이다. … 다음으로는 성령에 대한 표현이 좀더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믿습니다’라고만 되어있기에 어떤 방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단순성 때문에 후에 ‘성령 피조설’(성령도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이단들이 발생되었고 이 영향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니케아-콘스탄틴노플(NicaeaConstantinoplis)신조-A.D. 381


(1)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한다.

앞에서 본 신조들의 작성 배경에는 이단의 잘못된 사상을 대항하기 위함과 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도 그러한 환경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했다(작성 배경).…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칼빈의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객관적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제시하는 행위는 “사탄의 흉계”로 인정될 정도 정죄되어야 할 악한 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앙고백의 역사를 보게 되면 사도들의 신앙적 정신을 이어온 정통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객관적 신앙고백의 기준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근절하고 금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포용과 관용과 연합이라는 명목 하에 전통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분파와도 얼마나 가까이 하고 또한 정당한 교회로서 인정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교회는 진리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분파와도 연합과 일치를 이루도록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라는 말씀처럼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는 분파와만 일치하고 연합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분파와는 어떤 면에서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배격하고 멀리해야 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롬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살후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요이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우리는 성경에서 왜 이토록 철저하고 엄격하게 신앙이 다른 자들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하는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관용이나 자비가 없어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긍휼이나 자비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이름의 거룩하심을 지키고 드러내는 신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대해서 결코 어떤 흠집과 불명예와 모독도 허용하시지 않고 가장 엄격하게 경고하시며, 말씀하고 계신데도 인간이 단지 자비를 내세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째로, “성부의 본질에서”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 세미아리안주의(아리안주의의 입장을 반(半)만 인정하는 분파)나 성령피조설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는 비평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뒤에 “성부와의 동일”이란 말이 생략되지 않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로는 “신에게서 나온 신”이란 말이 빠졌다. 이 표현도 피상적으로 보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빛의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은 참 하나님”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생략되어도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차적 신이거나, 혹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없애버린 효과도 있다.

셋째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신조는 교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객관적인 확인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객관적 기준에 입각하여 신앙을 고백하고 드러내게 될 때에 그를 성도로서 인정하고 또한 교회의 정식회원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조는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초기교회부터 감당해 왔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신조가 교회안에 얼마나 중요한 사용되고 인정되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평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경 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 (단지 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조의 발전 과정을 우리는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시대가 지날수록 이단들은 더욱 교묘하게 정통적인 신앙의 교리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교회 가운데 도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한 신앙의 내용을 성경에 입각하여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작업들은 바울의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4-15) 라는 지적처럼 사탄의 거짓된 활동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무너뜨려서 교회를 지키려는 거룩한 싸움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고전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라는 말씀에서 성령께서 지적하고 있듯이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신앙고백적 기준을 통하여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 이단과 거짓교사를 분리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되어 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영광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짓된 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거짓된 자들과 자신을 더욱 철저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객관적 신앙고백의 표명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관점에 의해서 볼때도 이것은 게으르게, 또는 회피하거나, 또는 무관심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심, 즉 소명임을 깨닫고 반드시 교회 안에서 목숨을 다하여 세워야 하고 또한 지켜야 하고, 또한 전해야 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만드신 자를 믿나이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모든 세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出生) 자요, 빛으로부터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이시요, 나시되 만들어지신 것은 아니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니라. 이를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으며, 그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육신하시었고, 사람이 되시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시었고, 고난받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니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사오니, 이는 주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니, 아버지로부터 발출(發出)(proceeds)하시며, 곧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함께 경배받으시며, 함께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오신 분이시니라.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나이다. 우리는 죄의 사유를 위한 한 세례를 고백하나이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을 바라고 있나이다. 아멘.

 

1)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이 신조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한 신조로 알려져 있고, 승인을 받은 것은 451년의 칼케돈 에큐메니칼회의라고 한다.
  앞에서 본 신조들의 작성 배경에는 이단의 잘못된 사상을 대항하기 위함이었음을, 바른 교리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칼케돈 신조도 그러한 환경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작성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했다(작성 배경).…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리고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의 중요한 차이점을 살펴보자.
  첫째로, "성부의 본질에서"라는 문구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서 아리안주의나 성령피조설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는 비평도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뒤에 "성부와의 동일"이란 말이 생략되지 않고 있기에 이 표현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로는 "신에게서 나온 신"이란 말이 빠졌다.
이 표현도 피상적으로 보면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그 다음에 "빛의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은 참 하나님"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생략되어도 성자의 신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차적 신이거나, 혹은 일부분일 수도 있다라는 의혹을 없애버린 효과도 있다.
  셋째로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3)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평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경 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칼케돈 신조(451)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모두가 일치하여 가르치는 바는 그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이성 있는 영혼과 육신으로 되시느니라.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니 죄 이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니라. 신성에 있어서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 나시었으며 그 동일하신 분이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사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이시(theotokos)이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느니라.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 독생자는 두 성품에 있어서 인식되되 혼합됨이 없으시며 변화됨이 없으시며 분리됨이 없으시며, 분할됨이 없으시며 ― 이 연합으로 인하여 양성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성의 특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한 품격 한 개체에 있어서 결합되어 있다.― 그리하여 두 품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거나 하지 않으며 한 분이시오, 동일하신 아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이 가르친 바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에 대하여 가르치신 바이며 교부들이 신조로서 우리에게 전하여 내려오는 바와 같으니라.

 

1) 칼케돈 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유티케스)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① 그릇된 교리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유티케스(Eutyches)의 주장}

   벌코프(Louis Berkhof)는 당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몹시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재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을, 곧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명의 하나 됨에서는 그와 하나가 아닌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를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 시릴을 인용하였다."

    ② 바른 교리(칼케돈회의의 결정 내용)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의 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를 들고 있다.

① 양성의 특성은 일위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全知)와 제한된 지식과 같은 것이다.

②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③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④ 로고스는 어떤 독특한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연합된 개인이 있은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腹中)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다.

  2) 칼케돈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이러한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다.

  3) 칼케돈 신조에 대한 평가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는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unity)과 양성을 함께 주장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케아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종결을 짓지 못하였다".





아다나시우스 신조

 

(The Athanasian Creed)

 

A.D.420-450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의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
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교회의 신앙이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에게 세분이 각기 신이며 주님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세계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세 신이나 세 주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이 삼위일체에서 선후나 대소가 없다. 세 분 모두 다른 분과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따라서, 상술한 대로, 일체가 삼위로, 삼위가 일체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그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또한, 영원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신과 인간임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신으로서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출생하였으며, 인간으로서 시간안에서 그 어머니의 본성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그는 완전한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다.
그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등하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성부보다 열등하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이지만, 그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그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성이 신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본성의 혼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에 의한 것이다.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인 것처럼, 신과 인간이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어 음부에 내려갔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거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모든 인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부활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선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삶에, 악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교회의 신앙이다. 모두가 그것을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아멘.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주의의 종속설(Subordinationism)을 배격하였고 후에 알렉산더(Alexander)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아타나시우스(296년경 -373)의 삼위일체에 대한 입장이 드러난 ‘아타나시우스의 신조’가 있는데 작자 미상으로 5세기 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다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의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 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아다나시우스 신경 (The Athanasian Creed)원문

 

누구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계교회의 신앙을 보유해야 한다.이 신앙을 완전무결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교회의 신앙이니,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즉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을 예배한다.
인격을 혼동해서도 안되고, 본질을 분리해서도 안된다. 한 분 성부와 또 다른 분 성자와 또 다른 분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일한 신성과 동등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위엄을 가진다. 성부의 본성이 바로 성자와 성령의 본성이다. 성부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자도 피조되지 않았고, 성령도 피조되지 않았다. 성부도 무한하고, 성자도 무한하고, 성령도 무한하다. 성부도 영원하고, 성자도 영원하고, 성령도 영원하다. 그러나, 영원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그와 같이, 피조되지 않은 본질이나 무한한 본질도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성부도 전능하고, 성자도 전능하고, 성령도 전능하다. 그러나 전능한 본질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고, 성자도 신이고, 성령도 신이다. 그러나 신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성부도 주님이고, 성자도 주님이고, 성령도 주님이다. 그러나 주님은 셋이 아니라 하나만 존재한다. 기독교 진리가 우리에게 세분이 각기 신이며 주님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세계교회의 신앙은 우리에게 세 신이나 세 주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한다.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이 삼위일체에서 선후나 대소가 없다. 세 분 모두 다른 분과 같이 영원하고 동등하다. 따라서, 상술한 대로, 일체가 삼위로, 삼위가 일체로 예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그든지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또한, 영원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신과 인간임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신으로서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출생하였으며, 인간으로서 시간안에서 그 어머니의 본성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그는 완전한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다. 그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등하지만, 인성에 있어서는 성부보다 열등하다. 비록 그가 신과 인간이지만, 그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그의 신성이 육신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성이 신에게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인 것은 본성의 혼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에 의한 것이다. 이성적인 영혼과 육체가 한 인간인 것처럼, 신과 인간이 하나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어 음부에 내려갔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거기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가 오시면, 모든 인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부활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행동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선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삶에, 악행을 한 사람은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세계교회의 신앙이다. 모두가 그것을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아멘.
1)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작성배경
 이 신조는 사도신경처럼 저자가 명확하지 않다. 9세기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가장 두드러지게 옹호했던 아다나시우스(296-373)가 이 신조의 저자로 알려져 왔으나,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이 견해가 배척을 당했다고 한다.
  "이 신조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되었는데, 제 1부는 삼위일체론으로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보다 더 분명하게 아우그스티누스적인 삼위일체를 고백하면서 삼위 사이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종속은 없게 되어 있다. 제 2부는 기독론인데 아폴리나리우스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 등의 이단설들을 반격하고 있다"
  2)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특징 및 영향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제4차 에큐메니칼 회의 때까지(325-451)의 교리적 결정들과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매우 분명하고도 자세하게 요약하고 있으며, 간결한 문장들은 기술적으로 배열되었고 리드미컬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비논쟁적이고 평화로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삼위일체와 성육신 등을 믿는 공교회의 신앙은 구원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며, 이 신앙을 반대하는 자는 영원히 멸망을 받으리라고 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 저주문이 있다. 이런 저주문이 후기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3) 아다나시우스 신조에 대한 평가
  Philip Schaff의 글에 의하면 제 3차와 제 4차 세계 교회 회의는 니케아 신조 이외에 다른 신조를 작성하거나 출판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음에도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범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아 "정통 교리의 아버지"란 찬란한 이름을 얻었다고 평가한다.
고대 신조 결론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 본 바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신조

채택

지역

다른이름

주요내용

이단

사도신경

 

서방

 

신앙의 규범, 진리의 규범 사도적 전통, 신앙의 상징

유대교

이교주의

니케아

325년에 318명의 동방교회의 감독들이 니케아 회의에서 채택(아다나시우스)

동방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 본질 문제

아리우스

(아리안주의)

콘스탄 티노플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공회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채택

동방

나이신 신조(Nicene Creed)

105교부의 신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

삼위일체

(성령에 관한 내용 추가)

유노미우스,

마케도니우스

칼케돈

451년에 칼케돈에서 회집

되었던 제4차 세계종교회의

에서 채택

동방

 

기독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문제)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아다나시우스

 

 

퀸쿤케 신조

삼위일체+기독론

 

이와 같이 각 신조가 작성 되게 된 배경에는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는 이단들이 있음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여기에 대항하여 초대 신조들은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반복하여 언급하지만 초대 신조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고백하기 위해서 작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단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원리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바빙크의 표현처럼 우리의 적들은 "대문밖에 있는 적"들과 "기독교 안에 있는 적"들이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해서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귀한 유산들이 남겨진 오늘날에도 우리가 잘못된 주장을 펴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개혁주의 신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자 하는 노력들은 참으로 귀하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다음 칼빈의 글을 통해,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진리를 찾기 어려워도, 우리는 진리가 승리할 것을 확실히 믿도록 하자.
  "우리는 아다나시우스와 바실이나 카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옹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